피, 성령, 진리로 목회해라

 

1988. 10. 20. 양성원 경건회 (목)

 

본문:야고보서 1장 22절∼25절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이 도를 듣고 행하는 자는 자기를 속이는 그것의 정반대인 자기를 유익되게 하고 자기에게 바른 것을 알려 주는 자가 되고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 들은 도를 바로 알지 못하게 됩니다. 들은 도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잘못 알게 됩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을 때는 그저 하나의 외부만 자기가 듣고 알게 되고 잘못 알아서 속에 실상은 자기가 모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이성으로 비판하고 감각으로 느끼고 또 자기의 지성으로 들어 기억하고 이렇게만 하고 마는 사람은 이 도에 대해서 바로 알지를 못합니다. 바로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바로 알리지를 못하고 잘못 알리게 됩니다.

잘못 알리는 것은 어떻게 잘못 알리는가? 이 도가 그저 그렇게 쉬운 줄로만 알고, 쉬운 줄로만 자기가 알고 또 이 도를 자기는 들어서 감각하고 기억하고 이성으로 비판하면 그것이 다인 줄로 이렇게 자기를 인식하도록 그렇게 만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도를 듣고 행하지 안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들은 그것으로써 다 아는 사람으로 또 그것이 이제 자기에게 실효도 다 그대로 있는 것으로 이렇게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안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라 이렇게 말했는데 이 속이는 자라는 것은 자신에게 잘못 알려 줬다 말이지요. 속인다 말은 자신을 잘못 알려 줬다 말 아니요? 자기가 귀로 듣고 이렇게 뭐 감각으로 느끼고 이성으로 비판하고 기억력으로 기억하고 요랬으니까 똑똑히 알았는데, 그만치 알아 가지고, 귀로 들었지 감각으로 느껴 봤지 이성으로 또 비판해 봤지 이라면 얼마나 똑똑히 안 사람이요? 이러니까 그만 자기는 그렇게 인식을 하니까, 자기는 그렇게 인식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인식시킨 자가 누구입니까? 자기가 그렇게 인식을 시켰지.

그러니까, 너는 요 도에 대해서는 다 들었고 이제 다 바로 알았고 또 다 비판도 해 봤고 기억도 하고 있으니까 이 도에 대해서는 바로 안 사람이라. 그래, 바로 안 줄로 알도록 자신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그말이오. 자기가 자기를 그래 가르쳤어. 이랬는데 실은 그것이 자기 속인 것이다.

어째 속인 것이냐? 속인 것은 안 되는 것을 된다고, 또 아주 어려운 것을 쉽다고, 또 이루어지지 안한 것을 다 이루어졌다고, 그것은 자기 것이 되지 못했는데 자기 것이 됐다고 이렇게 하니까 전부 거짓말로 자기에게 대해서 자기를 속였다, 자기를 잘못 인식하도록 이렇게 만들었다. 누가? 자신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자기에게 바로 알릴 수 있는가? 자기에게 바로 알릴 수 있는 것은 이 도가 얼마나 가치 있는가 하는 가치를 바로 알리는 데에도 자기가 듣고 행하는 자라야 그 가치를 바로 알리는 자가 되고 또 이 도를 행하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도 행한 자라야 가르치게 되고 바로 알리게 되고 또 행해 본 자라야 이 도는 행하기가 아주 쉽다는 것도 알려 주고, 그러면 또 이 도는 가치 있는 거, 이 도는 참 한없이 존영할 뿐 아니라 실상 중에 실상이라는 것을 자기가 행해 볼 때에 자기가 그걸 깨달아 알아지게 되니까 자기는 이 행함으로 인해서 자신이라는 사람은 이 도에 대해서 정확하게 정확무오하게 바로 알고 또 바로 상대하고 또 바로 이용해서 바른 혜택, 효과를 누리게 되기 때문에 그거는 자기를 속이지 안하고 자기를 바르게, 자기가 자기에게 바로 해 준 사람, 자기가 자기에게 바로 이 도를 참 받아서 바로 유익을 보도록 그렇게 해 준 사람이지마는서도 행하지 안한 사람은 자기를 속인,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된다, 이 말이 조금 어렵습니다.

그다음에 예를 들어서,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써 자기 얼굴을 보고 돌아가 가지고서 자기 얼굴, 거울로 자기 얼굴을 이래 보고 환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환하게 보이지마는서도 가 가지고 다시 자기 얼굴이 어째 생겼던고 하는 것을 자기가 암만 생각할라 해도 그게 잘 기억 안 납니다. 여러분들 그런 것 못 느껴요? 보면 아는데 암만 자기 얼굴을 알지마는서도 가 가지고 거울 없애버리고 난 다음에 자기 얼굴이 어찌 생겼는지, 남의 얼굴은 환하게 기억나는데, 남의 얼굴은 환하게 기억이 나도 자기 얼굴을 자기가 어째 생겼는지, 여러분 지금 가만히 생각해 봐.

자기 얼굴을 자기가 지금 생각이 잘 나요? 그와 마찬가지로,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자기 얼굴을 자기가 보고서 돌아가 가지고서는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거와같이, 그러면 자기 얼굴인데 자기가 똑똑히 보기는 봤는데 자기 얼굴인데 돌아가서 생각하니까 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도도 듣고 행하지 아니한 사람은 들을 때에, 들을 때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기는 네모잽이다, 세모잽이다, 자기는 길쭉하다, 자기는 반쪼가리다, 자기는 어떤 내가 병신이다 하는 이런 것을 들을 때에 알기는 알았는데, 들을 때에 자기가 자기를 정평 정가했어. 거울을 볼 때 자기 똑똑히 보지 안해요? 정평 정가하고 자기를 똑똑히 알았지마는서도 행하지 안하니까 그라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어째 생겼는지 몰라. 모르기 때문에 흉하지마는 잘난 줄 알고 무능하지마는 아주 유능한 줄 알고 참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럽지마는 영광스러운 줄 알고 이렇게 정 아주 오판을 하고 있다 그말이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자기 도를, 도면 이 도가 어떤 데는 젖이라고 말했고 어떤 데는 양식이라고 말했고 어떤 데는 이 도는 생명이라고 말했고 이 도는 능력이라고 이렇게도 말했는데 이 도를 자기가 받고 난 다음에 그만 잊어버리는데 잊어버리지 안하고 이 도를 자기 걸로 삼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자기가 듣고 행하는 사람이라.

그러면 도를 듣고 행하는 사람은 그 행하는 가운데서 도와 자기와 하나가 되니까 도가 딴 데로 갈 수도 없고 도와 자기와 한덩어리가 돼 가지고 이래 있지마는서도 행하지 안하고 자꾸 귀로만 듣는 사람은 자기를 한번 퍼뜩 구경을 하기는 했는데 지나고 난 다음에 어떤 사람인지 자기가 자기를 모르게 되고 그 사람은 도를 자기 도를 삼지 못한 사람이다.

이라면서, 여게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이랬어.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다는 이거는 말을 암만 해 봐야 이게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이거는 참 실험을 해 봐야 돼요.

여러분들 제가 언제가, 엊저녁이가 아침이가? 목회는 신학으로 목회하는 게 아니고 피와 성령과 진리의 권능으로 목회한다 이렇게 말했는데 목회를 신학으로 목회한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해도 잘되고 또 그렇게 써먹기도 하고 그래 할 것입니다. 신학 이거 뭐 배운, 신학에 배운 그 지식 가지고서 설교도 하고 그 지식 가지고 이만하면 내가 지금 목회하는 데는 넉넉히 목회를 잘 할 수가 있다. 내가 이만치 누구보다도 신학에 달통했고 또 신학에 권위가 있기 때문에 이거 가지고 목회를 하겠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그게 껍데기 지식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또 그래 가지고 그대로 목회를 합니다. 그대로 목회를 하지마는 목회가 안 돼.

그런데 피와 성령과 진리로 목회한다 하는 그것은, 진리로라 말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목회한다, 또 성령으로 목회한다, 또 사죄, 칭의, 화친으로 목회한다. 이걸 잡고 목회하면은 그거 뭐 진리만 말합니까? 진리를 자꾸 진리 진리 이렇게 말하는 게 뭐 목회가 되겠습니까 영감 영감 뭐 말해야 목회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을 자꾸 이렇게 자꾸 말하면 목회가 됩니까? 그거 말하면 목회가 돼요 안 돼요? 그러면 자, 진리, 영감, 피 그러면 몇 가지요? 세 가지면 설교를 몇 번이나 하겠소? 세 번 하면 다 할 수 있지 안해요? 그 뒤에 할 밑천이 없는데, 뭐. 그러면 피로 목회해라, 피로면 예수님의 대속의 보혈인데 피로 목회해라 영감으로 목회해라 진리로 목회해라 이라니까 나중에 이것만 가지고서 목회할라 하니까 신학을 거석하면은 그 신학에 아무것이 뭐고 뭐고 자꾸 이래 말하면 그래도 자기가 공부한 것이 책이 몇 권 되니까 한번에 한 두 페이지씩이나 세 페이지씩 한다 하더란대도 삼백 페이지면 백 번은 하는데, 그래 백 번은 하는데 그거 백 번 하지마는서도 이거는 찍해야 피와 성령과 진리 이것으로 목회한다 하니까 피, 성령, 진리 이거 피는 예수님의 피요 또 그 해석을 쭉 하고 성령은 어떻고 진리는 어떻고 이래 쭉 하고 나야 아마 한 두번 설교를 하면 세번째는 설교할 게 없다 말이요, 설교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그거 가지고 목회를 하겠소? 그게 지금 무슨 말인가? 그러니까, 사람들이 여기서 설교를 듣고 가 가지고서 설교록을 가지고 목회하면 설교록 그거 한번 설교하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두 번 해야 재미가 없어요.

사람들이 또 안 들을라 해요. 그러니까 자, 그러면 목회자가 설교를 한 설교를 한 번 하면은 한 번만 하고 장 새 설교하는 사람이 권위 있는 사람입니까 항상 한 설교만 자꾸 하는 사람이 권위 있는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권위 있는 사람입니까? 설교를 할 때 교인들이 은혜를 받는 그것이 권위 있는 설교입니까 은혜 못 받는 게 권위 있는 설교입니까? 은혜 받는 것이 권위 있는 설교라면은 은혜 받는 것은 늘 새 설교를 해야 은혜를 받습니까 항상 한 설교 그 설교만 해야 은혜를 받습니까? 어때요? 여러분들 내나 설교 들으니까 많은 경험과 체험이 평생 하고 있지 안해요? 어째요? 장 새 설교만 하면, 새 설교에 은혜를 받소 항상 하는 설교 묵은 설교 또 하고 또 하고 재독 또 하고 또 하고 해야 은혜를 받습니까? 새로 해야 은혜를 받소, 새로 해야. 새로 해야 은혜 받아. 새 설교에 은혜 받아. 새 설교에서 은혜 받는 그 사람은 껍데기 목사요 껍데기 교인입니다. 한 설교 자꾸 해야 은혜 받고 그라니까 은혜가 더 되고 더 되고 자꾸 또, 그 설교 또 하고 나서 또 다른 설교하니까 내나 그 설교 또 하고 또 하고 자꾸 그 설교 또 하고 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 은혜 있는 목사요 은혜 있는 교인입니다.

그러면,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세 가지인데 세 가지를 평생 해도 또 자꾸 남습니다.

평생 해도 남는 사람은 남는데 세 시간 하고 나니까 없어서 할 게 없어. 진리라면 진리든지 그 진리 가지고 설교 한 번 하면은 그만 그 뒤에 두번째 할라 하면 맛이 없고 교인들도 안 들을라 하는데 그 설교를 하고 나서 또 하고 또 하고 자꾸 이와같이 지금 하니까 은혜가 돼지고 자기도 은혜가 돼지고 교인들도 은혜를 받고 이라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한 설교 가지고서 자꾸 설교를 여러 번 할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들 겪어 봤어, 경험해 봤어요? 자기가 행하면, 행하면 설교하고 나서 행하고 보니까 ‘아이구, 이거 설교 잘못했다.

이거 고쳐 또 해야 되겠다.’ 고쳐 가지고 또 행하고 보니, 행하고 나서 그 설교했지. 행하고 나서 설교했는데 설교하고 나서 또 행해 보니까 ‘아이고 또 잘못됐다’ 평생 설교를 고쳐야 되겠소.

그러면 그 사람이 처음에 설교할 때와 행하고 난 다음에 이거 잘못됐다 고쳐야 되겠다 하는 그것이 정신 이상자로 미치괭이 말입니까 그 사람이 정신이 차차 차차 발라지는 것입니까? 그러면 증거하는 것이 그 증거가 점점 발라지는 것이요 그 증거가 점점 삐뚤어져가는 것이요? 발라져가는 것이라. 여기 저 ○○○교회 무슨 조사님인가 안 보이네? 어데 있어? 뒤에 있나? 나는 도망쳤는가 싶어 지금, 안 치는가? 안 쳐? 처음에 그때 좀 빛을 받더니마는 요새 조금 어두워졌어. 그래.

여러분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을 하면, 어느 설교든지 한번 설교해 놓고 그 설교를, 그 설교를 ‘아, 이 설교 잘못됐다.’ 하는 것은 설교 해 놓고 다시 자기가 새김질해 보면은 요거 좀 잘못됐는데 싶은데 자기가 또 실행을 해 보면 어찌 돼요? 실행해 보면 또 잘못됐어, 실행해 보면.

자꾸 그대로 실행을 할라고 할수록이 또 틀리고 또 틀리고 자꾸 틀렸다고 하는데 그라면 자꾸 틀려져갑니까 점점 고쳐져갑니까? 이게 비결이라. 목회 이게 비결. 이거 모르고 껍데기로 막 이래 가지고서 ‘실행만 짜다라 많이 거석하면 될 줄 알아?’ 그 사람들은 암만 그래 쌓아야 설교에 은혜가 없어요. 자꾸 처음 듣는 말만 하니까 사람들이 귀가 즐거워서 이래 하지마는서도 내나 테레비 보는 것 한가지지 그거는 속에 진리와 멀어지니까 성령도 역사하시지 안하고 진리도 역사하지 않고, 진리가 얼마나 힘이 센데? 진리가 힘이 대통령만치 힘이 세요? 진리가 힘이, 신학자가 힘이 세요 진리가 힘이 세요? 진리는 그래도 진리는 사람만은 못하지 안해요? 사람이, 전부 이거 신구약 성경은 사람의 구원 위해서 있고 이라기 때문에 사람이 위대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 다음 위대한 것 아니요? 이라니까 진리가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진리 위해서 있어요? 진리가 사람 위해 있소 사람이 진리 위해 있소? 사람이 진리를 위해 있소 진리가 사람을 위해 있소? 진리가 사람 위해 있는 것이라 하는 것이 신학자의 백의 구십구입니다. 알겠습니까? 몰라.

진리가 크냐 사람이 크냐 하는 그것을 신학에서 질문을 할 때 거게 대해서 진리가 크다여기는 쉬운 말이라. 장 듣기 때문에 이거 어리기야 어리지마는 딴 데 가서 보면은 진리가 크냐 사람이 크냐 하면은 사람이 크다고 해요. 진리가 크다는 걸 느끼지 못해. 여게서는 장 하니까 이거 샘 안에 개구리 모양으로 이거 장 하니까 이거는 예사로 듣지마는서도 인제 교계 좀 나갑니다. 나가 보면은 또 그만 뭐이냐? 이걸 잡은 사람은 나가면 ‘이게 다 거짓부리다’ 거짓부리라 하는 걸 참을 알고 더 견고히 서는데 안 잡고 새 말만 듣는 사람은 거게 가니까 새 말 계속해서 오늘도 듣고 오늘도 듣고 뭐 신학자 수백 명 것을 이렇게 뭐 주 지꺼려 놓은 걸 말할라 하니까 그 얼마나 많소? 장 새 말 들어.

새 말 듣는데 예수 믿는 거는 새 말 듣는 게 아니고 이미 받은 바의 도를, 도 알아 가지고 자꾸 행해 보니까 또 틀리고 또 틀리고 또 새로 고쳐야 되고 고쳐야 되겠고 자꾸 그래 고쳐 나가다 보니까 나중에 가서는 자기는 자꾸 틀린 사람이 됐는데 자꾸 그와같이 해 나가다 보니까 나중에 가 자기는 틀린 줄 아는 사람만 됐지 점점 옳은 사람이 돼집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자꾸 이렇게 고쳐가니까 의인이 되겠소 죄인이 되겠소? 의인이 되겠소 죄인이 되겠소? 의인이 되지. 자기가 알기에는 의인이 되겠소 죄인이 되겠소? 죄인이 돼. 이게 오묘한 거라.

이래야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거, 여게 내가 아레 그말도 안 할 건데 그뭐 뭐 신학이니 뭐 자꾸 이래 쌓기 때문에 그래 신학은 시찰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시찰하는 것으로. 시찰은 뭐이요? 시찰은 그냥 구경하는 거요? 구경하는 게 아니라 이게 옳으나 이게 바로 했나 옳으나? 그 사람이 이 성경을, 성경을 보고 이거 성경을 지금 사람이 바로 알았나 틀렸나 하는 그걸 지금 자기가 참고 삼아서, 이 사람은 성경을 바로 말했다, 이 사람을 성경을 틀리게 말했다. 성경을 알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지 신학을 알기 위해서 성경 팽개쳐 놓고서 공부하는 이것이 영 꺼꾸로 되고 말았다 말이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목회를 할 때에 뭐 가지고 하느냐 하면은, 자기는 이 진리 신구약 성경 말씀 가지고 목회할라고 나서는 사람 그 사람 있어요. 또 이 신학 가지고 이 세상에 지식 가지고 목회할라고 나서는 사람 있어요, 또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은 이 세상 문학 가지고 목회할라고, ‘내가 문학에 누구보다도, 이 뭐 총공회 이 교역자들 그까짓 거야 문학 문터막도 못 밟았는데 내가 문학에 능하니까 이 문학 가지고 내가 목회하겠다.’ 또 저는 이 세상에 이 모든 인간이 입법해 놓은 입법에 달통하니까 ‘법을 내가 이만치 아니까 이거 가지고 목회하겠다’ 또 자기는 과학을 많이 아니까 ‘이 과학 가지고서 목회하겠다’ 자기는 온갖 지식이 많으니까 `이 지식 가지고 목회하겠다’ 언변이 있는 사람은 ‘언변 가지고 목회하겠다' `나는 지혜가 있다. 지혜로 목회하겠다.’ ‘나는 또 배경이 많다. 내가 전부 내 배경이 많으니까, 우리 형님이 배경이, 우리 형님이 유력한 목사고 유력한 정치가고 또 뭐,’ 사람을 배경삼아 목회하고, 이러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 이거 저거 의지하는 그것을 주님이 제일 미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자,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자, 또 벌써 있기는 있지마는 죽은 자, 가난한 자를 주님이 기뻐하시요 죽은 자를 기뻐하시요? 죽은 자를 기뻐해, 죽은 자를. 죽어서 숨도 못 쉬고 있는 그자가 하나님께는 필요해.

하나님만 뭐 얼마 이미 택한 자를 통해 가지고 얼마든지 역사할 수가 있는데 이 속에 방해물이 들어 가지고서 일이 안 된다 말이요, 방해물이 들어서.

방해물이 뭐이 방해물이요? 그 사람에 뭐이 방해요? 그 사람의 지식이 방해라. 그 사람의 지혜가 방해라. 그 사람의 웅변이 방해라. 그 사람의 배짱이 방해라. 그 사람의 온갖 실력이 방해라. 하나님의 실력 외에는 인간의 실력이 하나도 필요가 없어. 다 부인하고 주님의 것 하나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당신에게 필요해. 그걸 만들어 놔도 뒤에 일하고 난 다음에는 제가 한 척 ‘그래 내가 했지’ 이래 하는데 처음부터 제것 가지고 있다고서 하는 그 사람을 만일 하나님이 도와 주시면 나중에 가서 제가 했다고 저만 키워 버리고 하나님은 발 아래 처넣어 버린다 말이오.

사람이 대개 자기 뭐 있는 사람은 일 성공하고 난 다음에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안하고 제가 했다고 영광은 제가 따먹고 나중에 가 누가 ‘하나님’ 하면은 마지 못해서 ‘그래요, 참 하나님 은혜지요.’ `헤,속으로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가지고 되나? 해 보지.’ ‘하나님' 하면은 싫어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추켜 주면 좋아하요. 그놈이 도둑놈이라. 그놈을 두고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어떻게 믿을 거라, 믿기를? 이러니까, 피와 성령과 진리로 목회하라 말은 그 말이 이해가 안 되지마는서도 목회 다른 것 없어요. 신구약 성경 지금, 자, 지금 우리에게 진리가 중합니까 영감이 중합니까? 뭐이 더 중하요? 영감이 더 귀중해. 영감이 귀중합니까 예수님의 피가 귀중합니까? 피가 귀중해. 피가 아니면 진리도 영감도 우리에게는 상관이 없어.

하나님도 상관이 없어. 피가 중보라. 피로 인해서 돼지는 거라.

그러니까 성령은 뭐하러 왔어요? 성령은 뭐할라고 지금 왔습니까? 피를 우리에게 증거해 줄라고 왔어요. 이 사죄, 칭의, 화친, 또 예수님의 부활 이렇게 네 가지를 우리에게 증거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를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보증으로 줬다 말이오. 보증이라. 이게 책임진 자라. 보증이라 말은 책임진 자라 말이오.

이러니까, 이 둔한 말 같지마는서도 그러면 진리 가지고 목회한다 하면 ‘진리 가지고 목회하다니?’ 진리가 신구약 성경 말씀이지.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자기가 행할라 하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행할라 하니까 안 되니 요렇게 안 되더라 하는 것을 교인들에게 말해 주니까 하, 양식으로 먹습니다. 하다 보니까 요거 때문에 안 되더라. 안 되는 것 말하고 요리요리요리 하니까 되더라. 그거 뭐 조그매 된 것도 말하고 조그매 안 되는 것 말하고 이라면 그 사람들이 ‘아따 은혜 받았다’ 이라는데, 또 그 뒤에 또 내나 그 말씀하면서 ‘또 요라니까 요게 또 안 되더라’ 안 되는 것 말하고 되는 것 말하고 해 보니까 되더라 안 되더라 안 되는 것 되는 것 말하니까 그것이 뭐이냐? 그 사람에게 양식이 됐다 그거야.

그러니까, 말쟁이로 말만 하고서 실행하지 안하는 그런 무슨 학으로나 이런 것 가지고 자꾸, 학으로 말하면 말쟁이 하는 거 꼭 한가지라. 그것도 말 이것도 말이오.

말로 가지고서 목회하는 사람은 나중에 보면은 말쟁이만 모습니다. 뒤에 가서 모은 거는 말쟁이만 모아 버려요. 말쟁이 다 날아가거라 하면 다 날아가 버리고 하나도 없어.

또 거게서, 목회할 때에 이 세상에 있는, 위엣 것을 찾으라 했는데 이 땅의 것 가지고 자꾸 이래 목회하는 것은 땅에 것 가지고 목회하니까 소망하고 가진 게 전부 땅의 것이라. 땅의 것 가지고 다 달라들고 이라는데 나중에 땅의 것 날아가고 보니까 그것도 다 날아가 버렸어. 하나도 없어.

또 택한 자면 땅의 것만 자꾸 소망하면 하나님이 땅의 걸 줍니까? 그건 거짓말이라.

이렇게 이렇게 하면 이리 된다, 이리 된다. 이랬는데 나중에 가 보니까, 될 때야 뭐 이런 것 다 그리 되지요. 될 때는 됐지만 안 될 때 가서는 그만 절단나 버리고 만다 말이오.

이러니까, ‘저 목회는 오 년을 가겠다, 십 년을 가겠다. 저 목회는 속일 밑천이 있으니까 자꾸 계속 속이지마는서도 환난 오면 날아간다.’ 다 그게 지금 된 대로 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자기가 꼭 실행하는 가운데에서 모든 걸 바로 압니다. 자기가 실행하지 안하고 성경을 듣고 배우고 외우고 기도만 합니다. 성경 듣고 배우고 외우고 이래 하는데, 기도하는 것도 막 고함질러 기도하는 거는 실은 그 기도가 껍데기 기도요, 처음에는 고함질러 기도하라 하지만. 고함 질러 기도하는 것은 참말로 자기 속에 어려운 그런 간절한 그런 것은 다른 사람이 들을까 싶어서 은밀히 기도하지 속으로 똑똑히 그렇게 못 해요. 알겠습니까? 그 껍데기로 막 기도하며 이라는 그거는 다 속에 거를 내놓고 저거 안 하고 지금 감춰 놓고서 이 외식으로 껍데기만 하고 있는 거라.

껍데기는 진정 껍데기는 다른 사람이 듣지도 못하게 들을까 모를까 이라고 속으로 기도하게 돼져요, 돼지기를.

이러니까, 내가 이 경건회를 인도할라 하지 안했기 때문에 뭘할까 이랬는데,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성경 말씀 듣고 그 말씀 외우고 기억하고 또 배우고 또 자꾸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고 이라는데 그 사람이 왜 자기를 속여, 자기를 구원하지? 그러면 성경 말씀을 듣고 기억하고 외우고 그대로 증거하고 설교하고 자꾸 해도 그것만 하는 사람은 자기 속이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바로 알지 못한다 그말이오.

자기가 말씀 듣고 실행을 해 봐야, 실행을 하면은 참말로 ‘아이쿠 이 말씀’ 실행해 보는 가운데에서 자기가 알기도 바로 알고 자기도 바로 알고 말씀도 바로 알고, 말씀에 어려운 것도 바로 알고 권위도 바로 알고 또 자기도 바로 알고 이러니까 모든 걸 차차 차차 어두움이 물러가고 바로 알게 돼져.

실행하는 자는, 듣고 실행하지 안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고 또 듣고 실행하는 자는 정반대로 뭐입니까? 자신을? 속이는 자 반대는 뭐이요? 자기를 바로 알리는 사람이라, 바로 알리는 사람. 듣고 행한 사람은 자기를 바로 알지. 자기를 바로 인식시킨다 말이오.

이러니까, 자꾸 듣고 다른 사람에게만 자꾸 외치고 자꾸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 돼요. 자신을 자신이 속였는데, 자신을 속였는데 그 사람 어떠한 사람돼? 무슨 사람 돼지지? 교만한 사람돼, 교만한 사람.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는 것이, 지식은 뭐이냐 하면 실행하지 안하는 지식은 전부 자기를 교만케 해요. 실행하는 지식은 어떻게 돼요? 자기를 겸손케 해요. 실행하는 사람의 지식은 자꾸 자기를 겸손케 하고 자기를 무능아로 알고 만삭돼서 낳지 못한 아이와 같다고 자꾸 이래 이렇게 자기 못난 사람을 자꾸 만든다 말이오. 못난 사람 만드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그 가치 있는 사람이 돼요 못쓸 사람이 돼요? 가치 있는 사람이 돼요. 그러면 자신은 그거 참말로 나쁜 사람 아주 가짜되는가 진짜되는가? 그게 진짜가 되는 거라. 이러기 때문에 이 세상의 지식 하나님의 지식은 정반대라.

이러기 때문에,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라. 그 반대로 듣고 실행하는 자는 자기가 자신에게 올바로 바로 알리는 자가 된다. 자기도 바로 알리고 도도 바로 알리고 바로 알리는 자가 돼져요.

이러니까 자, 그라면 설교에 은혜 있는 설교를 할라고 하면은 자꾸 성경을 뒤벼서, 은혜 있는 설교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 가지고서 여게서 설교 하나 빼고 여게서 자꾸 지금 갈아서 갈아서 자꾸 이래 하는 사람입니까? 자기가 말씀을 듣든지 읽든지 하고 그대로 실행할라 했다가서 실행하니까 그 실행에서 경험이 나오고 체험이 나오고 요거는 틀렸다, 됐다. 실행의 경험과 체험을 그것을 말할 때에 교인들이 은혜를 받습니까? 그런데, 실행하는 데에서 경험과 체험한 그걸 교인들에게 주니까 양식이 돼 은혜받는 사람이 있고 또 실행 안 하고 지금, 실행 안 하고 말씀만 지식만 가지고 전할 때 은혜받는 사람이 있고 그 두 종류가 있습니다. 두 종류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실행해 가지고 체험하고 한 실행한 설교를 들을 때에 은혜를 받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요? 실행하는 사람이라. 실행할라 하는 사람이라. 실행하는 사람은 들어 보니까 이게 됐고 또 자기도 경험해 보니까 이거 됐거든.

이렇지마는서도 이거 실행할라 하는 사람은 지식으로만 가지고 실행하지 않고 날뛰는 그 사람의 설교를 들으면 순 저거 거짓말이라. 왜? 해 보니까 안 그렇거든.

말 들어 보니까 벌써 안 된다 말이오. 해 보니까 안 돼. 해 보니까 안 될 뿐 아니라 그만 들어 보니까 저거 틀렸다, 저거 가짜다. 그러니까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그 비밀은 굉장해요. 목사대로 교인됩니다. 목사대로. 그러기 때문에 교인은 목사의 간판이오. 목사의 표시판이라. 저 된 대로 돼.

그래서, 이번에 야고보서를 자, 외웠는데 모두 다 그거 외웠습니까? 얼마나 외웠소? 거의 다 외웠어요? 거의 다 외웠습니까? 내가 그러면 강을 받아야지. 이거 외우는 것도 그래요. 외우는 것도 쪽 외워져 가지고, 그러면 되는 게 아니라. 쪽 외워져 가지고 그다음에 그만 깜깜한 게 영 자꾸 틀려대고 처음에 졸졸졸 외우던 그게 자꾸 이리저리 자꾸 틀려집니다, 자꾸. 틀려져 가지고서 아이고 나중에 가서 외우지 못하게 아주 그만 깜깜하게 못 외우게 돼 가지고 또 새로 외워져야 돼요. 또 그라니까 졸졸 다 외워졌는데 또 나중에 또 보니까 이거 헷갈리고 이것이 그만 다 틀려져 버리고 안 되고 이래 가지고서 외운 것을 잊어버리고 못 외우고 또 외우고 못 외우고 외우고 못 외우고 몇 번 이래 가지고서 비로소 그것이 자기 속에 박히는 것이니까 야고보서 이것만 여러분들 이제 완전히 외운다 해도 이것이 목회하는 데 여러분 목회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도움이 돼요.

여기 신학 배워 가지고 뭐 떠들어 대는 그런 것은 그거는 목회할 때 거게서 교만이나 쑥 나오고 제 자랑이나 나오고 하나님과 멀어지게만 만들지 가깝게 만드는 거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제가 여기 ○○신학교 다닐 때에 새벽 설교 모두 하고 나면은 그만 설교 딱 끝나면 바로 다 가버리고 없어요. 공부하러 간다고, 뭐. 시험 칠 때는 뭐 새벽기도 나오지도 안해요. 이불 두터쓰고 이래 전등불 속에 넣어 놓고서 이래 가지고 공부하고, 그라는 사람들 그거 지식 위주라. 그거 몰라 그래. 내가 하나님과 지금 같이 해서 하나님이 나와 동행을 해야 되지 이 지식 이까짓 거 뭐 있느냐? 당신의 비위 맞춰서 당신이 나와 같이 해 줄 수 있도록 내가 해야 되겠다 하는 그것만 깨달으면 그짓 안 해요.

내가 신학교 들어가니까 논문을 쓰라 해. 입학 논문을 쓰라 해. 입학 논문을 쓰라 하는데 나는 논문 쓰라 할 때 그때 그래 그 내가 뭐 무식하니까 그거 뭐 논문도 잘 쓰지도 못하지 내가 논문 쓰라 할 때 그런 것 쓰기 싫고 내가 그랬어. 온 목적을, 인제 여기 ○○신학교 온 동기와 목적을 기록하라 이래 놔. 그래 내가 내 뭐 양심대로 솔직하게 ‘포도나무 원가지가 되기 위해서 왔습니다’ 내가 이래 써 놨거든. 이라고 내 이름을 써 놓으니까 그거 가지고 교무실에서 모두 보고 찌글찌글 하, 이거요. 여게 온 자기의 동기 목적 그것을 기록하라 하니까 그 논문 쓰라 하니까 이 사람은 이거 여기 신학교 들여 줄 수 없다. 이거 엉뚱이같이 포도나무 원가지가 되고 싶어 왔다 하는 그거 무슨 말인고? 이거 뭐 포도나무 비유나 뭣을 읽어 봤는갑다. 이래 가지고서 그래 그만 거게서 낙제를 시켰어. 입학에 그었다 말이오.

그었는데 인제 주남선 목사님이 나를 알아요. 내가 어떻게 믿으며 또 왜정말년에도 어떻게 행했다는 그런 것 다 알기 때문에 이 사람은 입학을 시켜야 된다고 그분이 하도 강조하니까 그래 그랬지. 제일 반대한 이가 그 박사들 목사요. 박사들 목사가 그래 반대해 가지고서 그랬는데, 그때에 내가 쓴 그 내 소원이 지금도 변하지 안해. 하나님이 그때 그렇게 해 준 것 같아. 포도나무 여기 지금 한국 교회 포도나무 원가지가 될라고 지금 이라고 있는데 원가지가 언제 될란지 안 될란지 몰라도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제일 으뜸되는 진리를 나를 통해서 발견해 주면 내가 원가지 되고 마는 거라.

그런데 그 우리가 외식을 버려야 됩니다. 버리고 어짜든지 자기가 실지로 실행하는 가운데, 그만 실행하는 가운데서만 모든 것이 바로 조절되지 실행하지 안하는 데는 바로 조절되지 안해요. 그러기 때문에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말에 거하면’ 그말은 실행한다 그말이오.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사람이 변화된다 말이오. 실행해서 변화되지. 변화돼야 변화된 것만치 진리를 알게 돼요.

성현이라야 능지성현이라고서 자기가 변화되지 안하면 어떻게 그 진리를 알 수 있습니까? 모릅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모든 교역자들이 다 지식주의요. 전부 지식주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고 또 이단이 말이요, 이단이 여러 가지가 틀려야 이단입니까 이단자는 한 가지 틀리면 이단자입니까? 한 가지 틀리면 이단자야. 한 가지 틀리지 안 틀린 자 누가 있는가? 있지마는서도 한 가지 틀리고 그것은 절대성을 가지고서 요거는 변동 못 하는, 틀린 것, 뭣이든지 틀린 것 하나라도 그걸 절대성을 가지고서 그거는 요동치 안한다면 그 사람이 이단자 되고 맙니다. 기어코 이단자되고 마요, 결국은. 사람이 틀린 게 많지마는서도 나는 불완전하고 바로 알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틀린 건 얼마든지 고쳐 갈라고 애를 쓰면은 이단자가 안 돼요.

그 사람에게는 박혀서 고치지 안하고 그거는 자기에게 아주 자기 참 가장 그게 주가 돼 가지고, 주가 돼 가지고, 민주주의 가지고 이거 말하는데 민주주의도 말이지요, 민주주의를 떡 이렇게 그 말하니까 그날 새벽에 ○○○목사님 사모님이 나한테 왔어. 와 가지고서 새파라이 해 가지고서 어떻게 해붙이든지, 나를 무식해서 이거 지금 민주주의지 어데 기독교가 민주주의지 그랄까보냐고서 이래. 내가 슬슬 그래 ‘그러면 뭐 기독교가 독재주의지 그라면 민주주의가?’ 이러니까 ‘민주주의인데’ 이래 가지고 막 설명을 많이 해요. 그래 내가 몇 마디 하니까 그만 나중에 가서 그만 자기는 ‘그랄라면 독재주의라고 하지 말고 신주주의라 하이소, 신주주의.’ ‘신주주의가 어데 있노? 민주주의 반대는 독재주의 아니가? 독재주의라는 말 써야 되지 달리 써 가지고는 안 된다.’ 이라고 나서 그날 나중에 오전에 내가 가 가지고 거게 대해서 실컷 설교를 했다 말이지.

기독교가 민주주의라 하는 사람들은 그거는 물론 생각하는 각도가 틀리기는 틀렸지마는서도 민주주의 하는 것은 그거는 혹 틀리지 안했다 할 수가 있다 할지라도 독재주의란 말이 나왔을 때에 민주주의지 독재주의는 아니다 하면은 그 사람은 완전히 새까만 사람이라. 믿는 도리의 근본을 전연히 모르는 사람이라.

그거야 자기네들이, 민주주의라 말은 그거는 틀리기는 틀렸지마는서도 혹 처음에는 민주주의라 이런 말 할 수 있을지라도 기독교는 독재주의고 민주주의가 아니다.

독재주의라 말이 나면은 뻐뜩 각성해 가지고 아이쿠 이거 참 독재주의다 이렇게 할 수 있어야지 독재주의라하는 것 반발하는 그 사람은 몰라, 전연히 몰라.

내가 그래 가지고 저 언제 그 신학교 나갈까 묻기 때문에 ‘나가들랑은 여게 나한테 배운 걸랑 가르치지 말고 너거가 물 건너서 배워 가지고 온 것 그것만 가르치라.

그라면 내가가구로 허락한다. 그것만 가르치라.’ 지금은 저거 맘대로 가지요.

‘가르치라' 왜? ‘여기 걸 양념같이 넣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하기 때문에 그들이 들을라 하지 물 건너 그거는 다 알고 지금 하기 때문에 그거는 뭐 그거 들을라고 오라 소리 안 한다. 여기 지금 딴걸 내놓으니까 그렇다.’ 내가 그런 말 했어.

다 자기네들이 저 물 건너 배운 그걸 가지고서 여게 있는 걸 거게다 살을 붙여.

여게 있는 걸 거게다 들여붙여 가지고서 그걸 보강을 시켜. 여게 있는 걸 그거 자기네들 배운 거기다 대고 보강을 시켜. 여호와의 증인이, 만나서 진리를 말해 주면은 여호의 증인에게 진리 말하면 그게 효력이 있을 줄 알아요? 없어요. 말하면 우리가 지금 개혁주의의 이 진리를 이단 그 여호와의 증인들하고 이래 변론을 하면은 그 사람들은 여기 진리를 이걸 가지고서 자기네들 근본을 고치느냐? 근본 고치지 않고 고거는 그대로 두고 이것을 거게다가 보태 가지고 저거 여호와의 증인이라 하는 그 주장을 보강을 해서 더 든든케 만듭니다. 이러니까 이게 가 심겨지지 그 변화되지 안해요. 이제 그렇게 돼지면 일이 안 돼, 그만.

여게서도 이 도를 암만 들어도 이 도를 자기네들이 이 세상에서 지금 현재 유행하고 있는 모든 그 배운 데 거게다가 이것을 보강을 시키니까, 보강을 시키니까 그건 줄 알지만 실은 이거 없을 때 그것만 가지고 아무것도 몰랐는데 이것으로 인해서 알고 난 다음에 이걸 거기 그걸 보조하는 보조를 붙여 버린다 말이오. 그걸로. 그걸 보조해서 그걸 보강시켜. 이해가 돼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하나만 해도 그러면 ‘영 죽을 자’ `영 죽은 자' 그거 하나만 해도 그게 뭐 조그만한 이단이요? 아다나시우스하고, 아폴리내리스가 신론에 대해서 둘이 맞아 가지고서 정통에 아주 진리에 정통으로 동지라 했는데 나중에 가 인론을 말할 때에 아폴리내리스가 인론을 부인했다 말이오. 인론 부인한 건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지마는서도 사람은 아니다. 사람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시지 사람은 아니다.’ 이라니까 그거 가지고 이단이 되고 말았어.

그 지금은 그 사람들이 다 뭐라 하는데? 그게 뭐 ‘그래도 예수님이 암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왔으니까 사람되어 왔다 하지마는서도 어데 사람인가? 하나님은 하나님이지. 사람을 잠깐 뭐 입고 왔든지 어떻게 된 것이지.’ 이렇게 말해도 그것이 나중에 따져 들어가면 이단이 되기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런 것, 영 죽을 나를 대신 한 것과 죽은 나를 대신 한 것 그거는 그런 거 십배도 더 큰 이단입니다. 이거 그런 걸 몰라. 그래 또 뭐 성경에 ‘죽을 우리를 살리려 함이라’ 또 그 말이 없는 게 아니라 있기는 있어. 로마서에 보면 있다 말이오.

있는데 거게 지금 우리 죽을 몸도 했으니까 죽을 몸이라 하는 그거 과거사요 미래사요? 미래사 아니요? ‘죽은’ 과거사 아니요? 거게는 `죽을 몸도' 미래사를 붙였다 말이오. 미래사를 붙이기는 거게 왜 미래사를 붙여? 미래사를 붙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을 우리를 대속했다 말이 성경에 있지 않느냐?’ 그것 들이대면은 꼼짝 못하고 지금 모두 하고 있다 말이오.

이러니까 교역자들이 뭐 한 두시간인가 얼마인가 말해도 그걸 해결을 짓지 못하고 이러니까 ‘하,모두 다목사님이 그래 하니까 이거 뭐’ 그러니까 그만 할 수 없어서 다수가결로 손을 들어 결의하데, 내가 보니까. 손을 들어 결의하니그래 모두 ‘그만 죽은 걸로 결정합시다’ 죽은 걸로 결정한다고 그래 결정하지마는서도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시리라’ 이랬으니까 죽을이라 하는 거 미래사인데 그렇다고서 이라니까 그라면 어찌 돼요? 그거는 뭐 해석을 어떻게 할 거라? 그 미래사인데.

‘죽을 몸을 살리려 함이라’ 죽을 몸을, 죽을 몸을 거게 살리려 함이라 하는 거 다 그거 미래에 속한 것 아니요? ‘죽을 몸도’ 하는 그것도 미래고 `살리려 함이라' 하는 것도 미래고 그러니까 여기 다 미래로 이래 돼 가지고 있는데 ‘죽은 우리를 대속했다’ 하는 그 말은 이 봐라 맞지 안하지 않느냐 하면은 그만 꼼짝 그래 진다 그말이오. 그 성경에 그래 있지 안해요? 로마서 8장 찾아 봐요.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면 죽을 몸도 하니까 이거는 미래사 아니요? 이런데 뭐 그게 틀렸다 해? 이거 뭐 어떻게 해석하겠소, 이거를?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는 이 모두 다, 기본구원이니 건설구원에 대한 것을 말하니까 마구 그것 때문에 욕 많이 얻어먹었어. 하, 그거 백 조사는 왜 하필 탁 쪼개서, 자꾸 쪼개서 말하느냐? 구원이면 구원이고 구원 하나뿐이지 구원이 어데 둘 있노? 기본구원이니 건설구원으로 이와같이 지금 쪼갠다고 말하는데.

자, 여게서 죽을 몸이라고 말했지,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고 말했지, 죽은 자라 하는 건 과거사 아니요? 여게 또 죽을 몸이라 했으니까 이거는 또 미래사 아니요? 어떻게 판단을 하겠느냐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죄와 허물로 죽은 그것은 우리의 기본구원 죽은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기본구원 죽은 것이오, 기본구원 죽은 것.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은 기본구원 죽은 것을 우리에게 기본구원 여기서 우리를 대속했지 이 뭐 건설구원만 한 것 아니야. ‘죽을 몸도’ 하는 이거는 건설구원에 속한 것이요 기본구원에 속한 것이요? 이래야 구별하지. 이러니까 성경을 알아 보면은 건설구원 기본구원을 안 할 수 없는데 한다고 야단이라.

아폴리내리스가 예수님의 그 인성을 부인하다가 정죄했는데 그걸 옳다고 세우고 자꾸 그걸 안 고치기를 고치지 안하면 이단자 되고 말아요. 자꾸 세워대면 이단자 되고 말아요. 지금 이거 ‘영 죽은 우리라’ 하는 걸 이걸 하지 안하고 ‘죽을’ 이라고 그걸 옳다고 세워대면 조만간에 반드시 이단자가 되고 말아요.

그거 여러분들은 그거 모르지. 틀린 걸 자기가 안 고치고 틀린 걸 옳다고 자꾸 세우면은 이제 그걸 옳다고 하기 위해서 모든 성구를 거게다 적용시켜서 다 그렇게 되도록 적용하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모든 성경이 다 그 사람 해석에는 다 그와같이 되고 말아요.

아폴리내리스 그 사람도 인성을 부인했지마는서도 그만 그때 많이 세우지 안하고 그만 그래 내비 뒀든지 제가 그리 세우지 안하고 말든지 했으면 그만 괜찮을 것인데 옆에서 많이 세우고 저도 많이 세워 가지고서 그거 다시 용납지 못하고 저는 자꾸 그걸 끝까지 주장하게 되다 보니까 그만 완전히 역사에 아폴리내리스는 인성 부인 가지고 이단자가 되고 말았어.

제가 여수 애양원 손양원 목사님 계신 그 교회 가 가지고 집회했는데 손 목사님은 그때 세상 뜨고 없을 때인데 어째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기를 예수님의 그 인성에 대해서 말하다가 예수님의 신성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시지마는서도 인성은 피조물이다 이라니까 그 피조물이라 한다고 뭐 이래 가지고서 장로 하나가 그만 막 쑥 일어나더니마는 ‘나는 이런 집회 참석 안 하겠다’ 하면서 그래 그만 나가 버려.

나가니까, 여집사들은 그런 건 더 낫게 깨달아. 여집사들이 그뭐 걱정을 하고 그거 또 돈 많은 장로 권세 있는 장로인데 이래 거석하니까 야단이라. 나는 그래 또 설교하고 그래 인제 왔었는데 저거끼리 가 가지고서 말한 모양이라. 예수님의 그러면 인성이 그러면 피조물이지 뭐 창조주라 말이요? 마리아의 젖을 먹고 마리아의 몸에서 나왔는데 그러면 피조물이지 그러면 창조주라 말이요? 하루밤 하루낮을 세워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 인제 그 장로가 왔어. ‘아이고 내가 강사님 내가 이거 잘못 알고 이거 그래 실수를 했습니다. 제가 회개를 합니다.’ 그 말이 떡 여기 ○○신학교 왔다 말이오. ○○신학교 벌써 왔어, 그 말이. 얼마나 여게는 진리라고 본부라고 해 가지고 와서 그래 놓으니까 하, 예수님을 피조물이라니? 어떻게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그렇게 할 수 있을까보냐고. 그래 가지고 ○○신학교에서 야단이 났었어. 그거 내나 예수님의 인성 부인 아니요? 그거 어째요? 그거 인성 부인이요 뭐이요? 내나 인성 부인이라.

그래도 가만히 암말도 안 하고 가만히 냅둬 그렇지 자꾸 그래 되게 세워 대면 그 사람이 이단자되고 말아요, 그만. 자꾸 세워대면. 이러기 때문에 그 중생된 영에 대해서도 자꾸 내가 세우지 안하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하다 보면은 나중에 그 사람들은 다시 돌아올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그대로 둬 둬. 그거 여러분들은 알아야지.

하나가, 하나가 틀렸다. 그러면 틀린 거 고치면 되는 거지마는서도 거게서는 말하는 것이 이제까지 말하는 그 모든 신학에서 말하는, 유력한 사람이 말하는 것과 이 백 목사 이거 순 무식쟁이 이거 백 목사가 말하는 것과 다른데 나중에 백 목사가 맞으면은 말이지 하나만 맞아도 야 그거 볼품 있다. 뭐 그거 뭣도 거게도 있는가보다 이럴 건데 둘이고 서이고 자꾸 틀리고 하나라도 맞았으면 그만하면 인정할 수 있을 터인데 그래도 내 말은, 여러분들은 내 말 인정 안 돼요, 박사 말은 인정하지. 내 말은 인정을 잘 안 해, 여러분들이. 안 하면 여러분들의 손해라.

여러분은 어째 믿고 있어요? 죽은 과거사로 믿고 있어요 앞으로 죽을 것으로 믿고 있어요? 어째 믿고 있어요? 죽은 우리를 대속했어요 죽을 우리를 대속했어요? 저 ○○○씨 뒤에 있는 저 학생 어데서 왔지? ○○교회서? ct4““교회 ○○○목사님 거게 있었지? 그라면 잘 가르쳤을 거라. ○○○목사님 바로 가르치요. 그래 과거사입니다.

그라고 여러분들 또 자, 기독교는 민주주의요 독재주의요? 그거 확실해요? 공연히 지금 나한테만 하는 것 아니요? 기독교는 독재주의라고 몽둥이를 뚜드려 맞고 죽인다 해도 기독교는 독재주의라 할 수 있어요? 정말로 할 수 있어? 예수님은, 예수님은 독재하셨어요 예수님이 독재를 당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에게는 독재를 당했어. 동등될 걸로 여기지 안하시고 먼지만한 것도 당신 독재로 하지 안했어. 자유로 하지 안했어. 아버지의 독재에 절대 복종을 했어.

‘세상 임금이 오겠으나 내가 아버지를 어떻게 사랑하는 것과 그 계명을 어떻게 순종하는 것을 세상에게 보여 줄 것뿐이라’ 그러니까 하나도 독재 안 당한 게 하나도 없어.

그러면 예수님은 그러면 모든 성도들은 어찌 돼? 성도들은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다 민주주의 했어요 그 사람들이 절대 독재에 독재를 당했어요? 어째요? 모든 선지자는 어쨌지? 선지자들은 그 사람들이 위에는 독재를 당했고, 독재에 완전 독재를 당했고 저거는 밑에 있는 지도하는 양떼들에게는 민주주의로 타협했어요 독재했어요? 독재했어. 기독교가 뭐인지도 모르고. 이렇게 엉터리 같은 걸 이래 말해도 그게 옳다고 자꾸 이래 세워대고 말이지.

신학은 좀 알아 가지고서 이래 말하면 이 신학 가지고 또 사람을 스르르르 해 가지고서 사람을 그만 죽여 버리고 또 저 신학 가지고 죽여 버리고, 사람이, 하나님이냐 사람이냐 할 때에 사람이 귀하지마는서도 먼저 하나님이고 그다음에 사람인데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되지 하나님 아니면 사람 필요가 없어.

사람 사랑하고 존경하는 거는 하나님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지 하나님 아니고라도 사람에게 존경할 가치가 있어 그런 게 아니라. 가치 아무것도 없어. 만물보다 제일 거짓된 게 인간인데 무슨 가치 있어? 독재는 내가 하도 떠들어 쌓기 때문에 이래 말하니까 ‘그라면 그거는 뭐 독재주의라 하지 말고 신주주의라 하지’ ‘민주주의 반대는 독재주의 아니가? 그뭐 신주주의는 무슨 신주주의? 민주주의 반대를 신주주의라 하면 되겠나, 독재주의지?’ 이라고 말았는데 그 하나 꺼꾸러지고 그라면 좀 회개를 할 터인데 그래도 어떻게 뻔뻔한지.

또 저 먼저께는 뭐 양성원에 질이 낮고 이라니 신학도 정규 신학을 졸업 맡은 사람은 어떤 어떤 사람이고 모두 다 정규 신학도 졸업도 맡지도 못 하고 그런 사람들이 강사들이 그래 놓으니까 거게서 배워 가지고서 뭐할 거냐고? 거게 가르쳐 가지고 뭐 할 거냐고서. 거게서 배워 가지고서 무슨 목회자 일 해?. 신학을 배울 거냐고? 신학을 일류 신학자들한테 배워야 목회를 잘하지 그거 거게서 뭐 성경만 배운다 이래 가지고는 무슨 목회할 것이냐고. 그래 내놓으니까 그놈이 목회자가 되느냐고.

일류 신학자들은 목회를 못 하는데 요 진리를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목회 잘합니다.

지금 교회가 부흥 안 되는 것은 요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에 부흥이 안 돼요. 안 믿어. 이 진리를 믿어 보지. 나이가 젊은 사람이 이 진리를 확실히 믿고 막 이 진리를 외치면은 어데 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마귀 절단나지 하나님의 양떼들은 목자의 음성이기 때문에 듣고 좋아하지 왜 부흥이 안 돼요? 부흥이 안 되는 건 전부 속에서, ○○○ 저 조사님도 거게 가서 지금 많이 속화가 됐어. 이 진리를 그대로 외치지 안해. 외칠라 하니까 외로워지지 두려워지지 또 이라면 자꾸 다른 사람들한테 몰려가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걸 살살 그라기 위해서 양보하지. 양보하니까 하나님과 멀어지지. 다 말 안 해도 병든 줄 알아.

이제 이 도리를 깨닫고 이 도리에, 이게 뭐이냐 하면은 예수 믿는 것은 이 도리에 내 소유와 몸과 생명 다 바쳐서 이것 때문에 죽는 것이 성공인 줄 알아야 되지, 이 도리 때문에 죽는 게 성공인 줄 알아야 되지 자기 살기 위해서 이 도리 버리면, 그 도를 버리면 누구 버리는 건데? 주님 버리는 거라.

자, 오늘까지 이천 년 동안이나 신학자들이 영에 대해서, 영이 마음이요 이성이라, 이성이 영이요 하는 거라 이라다가 영은 완전히, 마음과 이성은 이 물질계에 속한 우주에 땅에 속한 것이고 영은 영계에 속한 것이라 이래서 영은 그걸 마음이 아니라 이렇게 정의를 내놓은 것이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말했는데. 과거에는 안 그런데.

칼빈도 보니까 영은 이성적 존재라 그래 놨어. 이성은? 이성은 육이요 영이요? 이성을 육이라 하는 것도 여러분들 여게서 배워서 그렇지 딴 데 나가면 지금 아니라고 큰일 나. 뭐 마구 뭐 아주 그 신학, 이 신학을 들이대면서 이단이라 저 신학을 들이대며 이단이라, 뭐라 하든지 그러면 그거 자, 살펴보자. 딱 거머쥐고 차차 차차 살펴보면 그다음에 보면 내나, 처음에 말한 그런 사람들은 그래도 좀 아는 사람들인데 그 뒤에 모두 변동을 시켜 버려서 다 그래.

중생된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그걸 ○○○목사님도 반대를 해 가지고 그렇게 시비를 했고 ○○○목사님도 그랬고 ○○신학교도 다 그랬고 전부이 다 그래서, 다 그래 가지고서 그 ○○노회서 정죄하고 나는 몰랐는데 ○○노회에서, OO총회서인가 노회에서도 정죄했대요.

정죄했다는 것 내가 어째 들었느냐 하면은 ○○○전도사님이 대구 ○○○씨 만났어요. ○○○씨 누구지 알아요? 몰라? ○○○씨 아는 사람 손 들어 봐. 허, 이래 놨으니. 참 벌써 세대가, ○○○씨가 전국에서 처녀로서 그렇게 늙은 사람으로서 제일 큰 부흥사는 ○○○씨요. 하나는 ○○○씨요. 이런데 그 사람을 한번 만나 가지고서, 우리 ○○교파에도 백 목사님을 그렇게 그 말하는 것을 이단이라 했는데 그 이단이라 한 거 우리가 잘못했다고 그거는 고쳐야 된다고, 시정해야 된다고 야단이라. 시정하거나 말거나 뭐 그대로 얼마든지 주장해 보지 뭐.

그러니까, 여게서 배운 것 딴 데 가 말하니까 깜짝깜짝 놀라면서 이라니까 그걸 가지고서 떡 거석하면서, 뭣 때문에 여기 배웠으면 이거 꼭 배반해야 될 건가? 배반해야 그게 맛이 나고 그게 다른가? 못 써. 우리가 어데든지 가 가지고서 암만 핍박해도 그 탈퇴는 금물이요, 탈퇴는 안 됩니다. 거게서 증거하다가 죽임당하면 죽임당하고 그렇지 그 제가 튀어 나오는 거는 그거는 진리가 아니라. 나는 ○○교파에서 자꾸 증거하다가 거게서 안 되니까 자꾸, 자꾸 밀어내 나중에 가 제명해서, 제명을 해서 제명 통지를 받아 가지고, 그 상회 불복종으로 제명해서 그래 통지가 왔기 때문에 내가 ‘그러면 너거하고 말하지 않겠다’ 내가 말았지 내가 거게서 나오거나 탈퇴하거나 그래 하지 안해. 거게서 싸워서 얼마든지 거게 있으며 싸워서 옳은 것이 이기는데 해 봐야 되지 탈퇴해 나오면 될 건가? 여러분들, 중생된 영이 그렇다는 것. 영은 마음도 아니요 몸도 아니요 이거는 마음과 몸은 합해서 그거는 육덩이라 하는 그것도, 그것도 오늘까지 안 나왔어. 그것도 주장은 내가 주장했지 다른 데 아직 그전에는 없었어, 마음이 영이요 영이 마음이지.

그러고, 그런 것 하나씩 꼭 가져야 돼요. 독재주의 민주주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뭐이 기독교요? 예수교지. 예수교, 예수교. 예수님은 독재주의요 민주주의요? 독재주의라, 그분 독재주의라. 그러면 그분은 독재주의면 그분은 위가 없네? 하나님께 독재를 당했기 때문에 그는 독재합니다. 우리가 독재가 아니고 하나님에게 우리가 독재당한 자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독재합니다. 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 독재당한 사람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독재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는 그렇게 뭐뭐 절대 될까? 독재가 절대로 가능해요? 절대로 가능해. 기독교는 독재주의라 하는 것 천하가 다 달라들어도 꼼짝도 안 해. 온 천하가 다 달라들어 민주주의라 하면 손으로 이래 뭉캐버리면 다 뭉캐지고 다 없어져버려서 가루가 돼 버리고 말아. 옳은 것을, 옳은 것이 이기지 삐뚤어진 게 이길 줄 알아요, 알기를?

뭐 그런 것 모두 많은데 지금 문제는, 문제는 무슨 문제가 지금 걸려 가지고 있느냐? 중생된 사람으로서 그 심신의 그 본체는 다 구원을 얻어 있지마는 그 심신의 기능은 죄지은 기능은 지옥 간다 나는 그래 말하고 그 사람들은 ‘죄지은 것도 지옥 안 간다’ 지옥 안 가면 어찌 되느냐? 지옥 안 가면은 없어지느냐 천국 가느냐 거게 대해서는 똑똑히 말을 나는 못 들어 봤어요.

본체는 뭐이 본체요? 마음과 고기덩어리의 본체가 있고, 기능은 본체하고 달라요 같아요? 기능은 뭐 어데서 나왔는데, 그라면? 본체의 정력에서 나왔어. 본체의 정력이 현실이라는 그 현재를 통해 가지고서 그 본체에는 정력이 나오는데 그 정력이 나와 가지고서 정력으로 그저 있어요 그게 뭣 돼요? 그러면 하루를 그 정력을 기울여 가지고서 어학을 공부했으면 그 사람이 하루 동안을 이래 어학에 단어를 뭐 몇십 단어를 외웠으면은 그 몇십 단어 외운 그거는 심신의 본체라요 기능이라요? 그게 기능이라. 뭐이 기능됐어? 정력이 기능됐어, 정력이 기능.

정력이 기능됐으면 정력은 없어졌어요 있어졌어요? 없어졌어. 정력이 기능화돼 가지고 없어졌어요. 그러면 그 기능 그게 뭐이냐 하면은 정력이, 사람의 심신의 정력이 기능이 된 거라.

그러면 그 기능은 하나님을 부인한 그 기능인데, 부인한 기능인데 그 기능은 그라면 어데 가겠어요? 천국 가야 되겠소 안 되겠소? 예수님의 대속을 부인했는데 가요 못 가요? 부인했으니까 못 가요. 못 가면 그거 어데 있을까요? 길가 가 있을까 그리 아니면 공중에 가 있을까? 부인하는 그걸 하늘나라 가지고 갈까? 하늘나라 못 가겠지. 그러면 그게 어데 가 있어? 기능이 죄악의 기능이요 죄를 범한 기능인데, 죄악의 기능이요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인하는 그 기능이니까 그 기능은 죄 있는 데 가 있지 다른 데 어데 가 있어? 죄 있는 데밖에 더 가 있겠어? 예수님의 대속을 반대했으니까 대속 없는 데 가 있어야 될 것 아니라? 그러니까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 있지.

어데 죄지은 기능 유황불 구렁텅이에 간다고 어데 말했어? 그라면 네 손이 범죄하거들랑은 끊어 버리라 양쪽 손이 있고 죄 지어서 온 전신이 지옥 가는 것보다 하나 끊어 내버리고 지옥 가지 안하는 게 낫다고 하지 안했어요? 그러면 그거는 성경 아닌가? 그러면, 이 세상에 유황불 구렁텅이에 심판하는 것이 어떤 걸 심판해요? 안 믿는 사람 심판, 뭘 심판해요? 심신의 본체인가? 본체인가? 심신은 하나님께 지음 받은 게 심신인데 그것이 그게 본질적으로 악화될 수 있는가요? 없어. 물들려, 물이 들었어. 물이 들었어.

이래서, 깨달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 몸뚱이, 몸뚱이 이거는 죄악이 아니다. 몸뚱이는 죄악이 아니다. 이래서 몸뚱이가 죄라 하는 그 주장이 뭐이냐 하면은 물질은 다 악이다, 그래 몸뚱이도 악이다. 물질을 개악설이라 하는 그 개악설을 지금 죄라고 정죄를 하고 있어요 의라고 하고 있어요. 죄로 정죄하고 있어, 죄로.

그러기 때문에, 몸은 죄가 아닌데 몸을 누가 지옥으로 끌고 가요? 기능이 끌고 가, 기능이. 그거 유황불 구렁텅이에는 기능이 끌고 가.

이러니까, 그러면 믿는 자는 본체는 하늘나라 갔으니까 그 심신으로 만들어 놓은 기능 뭐, 심신의 정력, 심신의 정력이 안 믿는 사람들 뭐이 말하고 있어? 안 믿는 사람은 희로애락을 뭐이 느끼고 있어요? 정력이 느끼고 있어, 정력이. 정력. 정력 그게 희로애락을 다 말도 하고 주장도 하고 모두 다 하고 있어.

그러면, 정력이 기능이 됐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이런 기능 가지고 지옥 가 있고 저런 사람은 저런 기능 가지고 지옥 가 있고 그 심신하고 기능하고 다 영하고 전부 한목 다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 있는데 택한 사람은 그 심신의 그 정력을 가지고서 일생 동안 하나님에게 반대되는 그것만 했습니다. 그것만 했으면 그 기능은 하늘나라 가야 돼요 지옥을 가야 돼요? 지옥 간다고 말했는데? 네가 범죄하면 지옥 간다고 말하지 안했어요? 범죄하면 지옥 간다 했는데 그라면 기능이 지옥 간다고서 심신의 본체가 지옥 갑니까 안 갑니까? 기능하고 본체하고 분리될 수가 있어요 없어요? 분리될 수 있어. 그 사람은 요번에 88올림픽에 보니까 모두 다 그 사람이 심신을 가지고서 아주 연습을 해서 아주 훌륭한 묘기를 하는 사람들 쌔버렸데. 묘기하고 있으면 그것이 본체요 기능이요? 그게 본체하고 기능하고 그거는 서로 나누어져 있을 수 있소 없소? 나누질 수가 있소 나눌 수 없소? 나눌 수가 있어.

그런데 믿는 사람은 하늘나라 가기 때문에 죄지은 기능은 하늘나라 못 가니까 자연히 나뉘어질 수밖에 없어. 나뉘어지니까 죄짓는 것은 유황불 구렁텅이에, 그 기능은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야 되지 어짤 건가 말이지.

그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심신의 정력 가지고서 그거 뭐 뜀 뛰는 기능을 가졌고 그 사람은 또 높이 뛰는 기능을 가졌고 다 기능을 가졌는데 그 기능과 본체는 다릅니다. 기능과 본체는 따로 있어요.

그래서, 그라면 그 정력은, 본체하고 정력하고는 같이 있어요 본체에서 정력이 나오면 나온 그거는 본체로 돌아가요 못 돌아가요? 못 돌아가요. 그거는 그러면 뭐이 되는고, 그라면? 그만 춤추는 게 되든지 그리 아니면 뭐 어학이 되든지 그리 아니면 활 쏘는 게 되든지 뭣이든지 자기 정력이 가 가지고 뭘 만든 그게 자기의 재산이라. 그게 자기 기능이라. 평생 동안 정력 가지고 글 써놓으니 글씨를 잘 써.

글씨 잘 쓰면 글씨 잘 쓰는 그것이 본체가 잘 쓰는 게 아니라. 본체의 기능이라.

그거 뭘로 가지고 만들었어요? 정력 가지고 만들었어.

그러니까 이런 걸 하나라도, 이 세상에서 이걸 듣지 못하는 소리라. 그들이 모르는 소리라. 모르는 소리인데 뭐 어짤라고 나는 그 무지리기 이거 아주, 그 내 혼자 그래, ‘인간 중에 제일 무지하고 제일 말단에 무식하고 아주 뭐 그 참 제일 천물, 제일 하등물에다 왜 이 하나님 복음을 이래 주는가?’ 내가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봤어. 여러 번 내가 생각해 봤어. ‘하필 똑똑한 그런 사람들 놓고서 이 진리를 가르치면 이거 효력이 있을 터인데 반푼이 같은 것만 데려다 놓고 자꾸 진리를 가르치니까 이거 뭐할라고 하나님 이래 하십니까?’ 내가 더러 물어본 일 있었어.

그라니까 내게 대해서 ‘그 똑똑한 사람, 네가 똑똑한 사람들 진리 가르치니까 잘 배우더나? 똑똑한 사람이 잘 배우더나?’ 똑똑한 사람은 배우지도 안하고 조그매 알면 아는 것 가지고서 그만 다 도망쳐 버리고 있지도 안해요. 그러니까 이 진리를 가르치는 데는 바보에게밖에는 가르칠 데가 없어. 천치 바보밖에는 가르칠 데가 없어. 똑똑하고 유식한 자에게는 가르칠 수가 없어. 지혜 있고 통달한 자에게는 가르칠 수가 없어. 그래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게 옳소이다 이랬어. 그거이해가 돼요? 여게서 만일 뭣을 이 세상적으로 지식도 높고 이거 뭐 있으면 여게서 이 진리만 듣고 안 있어, 그게. 조그매 벌써 하나 들으면 왕되고자 하는 속에 악 그놈은 두 자 크고, 이 도가 한 치 크면 악 그놈은 한 자나 크고 십 배나 크고 자꾸 이래 올라가니까 나중에 가서는 이게 이 진리가 이용만 당하고 거게 그것에게 이용만 당하고 그것이 왕이 돼 가지고서 도망칠 수밖에 없다 말이오. 그거는 필연적이야.

‘그러니까 지혜 있고 통달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자가 강한 자뇨?’ 이래서 내가 깨달은 게 그거라.

왜 어린 아이는 알아듣고 왜 어른들은 못 알아듣는고? 왜 못 알아들어요? 어른들은 못 알아듣는데 어린 아이는 왜 잘 알아들어요? 왜 그래요? 왜 그렇습니까? 어린 아이는 덜 버려졌어. 어른들은 더 많이 버려졌어. 학자들은 더 많이 버려졌어.

하나님의 도에 정반대되는 것으로 더 감염되고 더 더러워졌고 더 악해졌기 때문에 자기 주관이 더 강하고 왕이 더 악이 더 강하기 때문에 거게는 안 되는 거라.

이해가 돼요? 이런 것은 이거 뭐 다시는 변할 수 없는 이 진리인데 이 진리를 여러분들이 듣고 굳게 잡으면은 힘이 날 터인데, 옳다 이게 노선 쳐 놓고서는 지금 현재로는 세계 제일로 좋은 노선이 우리 노선이다. 뭐 자신이 있어요. 또 진리 깨달음으로서는 세계 제일 올바른 진리입니다. 아마 여게서 나간 사람들도 그 사람 딴 데 못 가요.

○○교파에 가면 OO교파에 갈 줄 알아도 못 가요. 가도 뱅뱅 돌리고 가면 생각이나 견해가 전부 다 이 진리를 배워 놨는데 그래도 그 속에 들어가 놨는데 제가 딴거 못 해요. 가면 안 맞아요. 안 맞기를. 또 옳다고 인정되는 걸 속여서 양심 속여서 그렇게 할 수는 없고 이러니까 안 맞으니까 나중에 가서 여기 나간 사람은 나간 사람들끼리 뚤뚤 뭉쳐서 한뭉텅이가 될 거야.

여러분들이 옳은 것을 잡고는 놓치 말아야 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는데 그것도 좁은 문이 무엇이 좁은 문인가? 가서 좀 여기 칼빈 주석이 여기 있지. 좀 찾아 봐요, 거기 좁은 문을 뭐라고 해석해 놨는가? 좁은 문은 진리는 하나인데 하나만 되는 그걸 찾아 가지고서 그것 찾아 가지고 그래 갈라 하는 그게 좁은 문으로 가는 거라. 여기 칼빈 주석이 여기 있지? 그 칼빈 주석에는 뭐라고 해 놨는고 몰라, 좁은 문을? 그걸 그거 내 사상으로 가져야 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내 자신의 사상으로 가져야 돼요. 나는 좁은 문으로 가겠다. 뭐할라고 좁은 문으로 가, 괴로운데? 그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거든. 그러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누가 인도해요? 하나님이 인도하시요.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인데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길은 누가 인도해요? 마귀가 인도해요, 마귀가. 맞아요? 그러면 여러분들 자, 이렇게 배우는데 이거냐 저거냐 어느 것이 옳으냐? 옳은 것이 하나라요 둘이라요? 옳은 거 하나인 옳은 것 하나만 그것만 취할라고 해서 그것만 찾아 가지고 나갈라고 하면은 동무 없고 외롭고 또 쓸쓸하고 핍박 많고 아주 어려움 당해. 그래도 그게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라.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니 무슨 소리요, 생명으로? 생명으로 나아가다니 뭐? 뭐 무슨 말이요? 하나님에 딱 들어맞다 말이오. 딱 들어맞는 거라. 마이너스 플러스가 딱 대일 때는 어때요? 저 ○○○씨 더러 전기 공부 안 했나? 형은 하고 동생은 안 했나? 마이너스 플러스가 둘이 딱 대이면 어째요? 팍 불나요, 팍 불나. 주님하고 저하고 만나면 불이 나. 뭐 죽음이나 사는 그런 게 문제요? 이러니까, 어떻게 해야 그래 그라면 주님 만나요? 어떻게 해야 주님 만나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주님 만나. 좁은 문이 뭐이 좁은 문인데? 하나님의 진리라 하면 안 돼. 하나만 되는 그걸 찾아서 만나야 돼. 이게 생명인데 이렇게 하면 되는데 그거 까다롭다 하고, 보면 저 사람은 하나만 찾아 만나는 게 아니고 넓은 것 딴것 모든 것 가진다 하면 헛일이야.

여러분들도 이 좁은 길로 가라 하는 여기 좁은 길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인데, 생명 길인데 주님 만나는 것이요 생명 길인데 이걸 알면 요것만 하나 돼도 살아요.

그거 보면 여러분들이 알아. ‘저 사람은 똑 조거는 고집쟁이인지 어짠지 저거는 꼭 하나라 하는 그걸 찾아야지 하나라 하는 그걸 잡고 그걸 찾아야 안심하지 그전에는 안심 안 한다. 꼭 하나를 그걸 잡는다.’ 그 사람이면 탈선하지 안해요 속화되지 안해요. 그거 하나 가지고 속화되지 안해요, 탈선되지 안하고. 그게 없는 사람은 뭐 팔방미인이지마는서도 오늘에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면 어짤 것이요? 마지막에는 주님 한 분뿐이신데. 생각해 봐요. 하나만 되는 그걸 원하고 뺨을 맞고 욕을 얻어먹어도 하나만 되는 그거를 찾아가는 그 사람과 이제 모든 사람이 허허 하고서 인화주의로 모든 화평주의로 이와같이 해 넓은 그걸 하나님이 좋아할 것인가? 좋아하지 안해.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한 것이 자꾸 그게 넓은 길을 가는 것입니까? 사람으로 더불어 자꾸 화목하는 게 넓은 길을 가는 것이요 좁은 길 가는 것이요? 그게 넓은길 아니고 그게 좁은 길이오.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는 것. 그게 진리라.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는 그게 진리라. 그러기 때문에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했지. 거룩은 뭐인가? 화평한 그게 거룩이 생명이야.

그러면 제철소는 고철이 있고 신철이 있어요. 고철을 신철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면 그 공장 그만 다 뜯어 버려야 돼. 없애야 돼. 뭐 ○○제강이니 무슨 제강이니 제철소가 고철이 신철돼 나오는 그 변화가 있지 안하면은 그것은 폐공장이지 못 써요. 성공 못 해. 실패해.

이러니까, 오늘 사람들이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는 것은 뭐이요? 고철이라, 고철.

고철. 그래 가지고 신철은 뭐이야? 거룩이라. 사람이 사람으로 화친하는 것이, 화평하는 것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하나되는 거룩되기 위해서 그런 작용하는 작업차로 그렇게 해야 되지 거룩을 내놓고 화평만 하는 그거는 망하고 말지 뭐하겠소? 그래 하나라도 잡고 놓치 안해야 될 터인데 그만, 틀린 것도 말하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그래, 너희들이 어찌 그리 속히 이 생명의 도를 배반하고 가느냐 참 어리석다 말하는 것처럼 삐뚤어진 거는 말하면 귀가 쫑긋하게 들려지는데 옳은 거는 암만 말해야 귀에 안 들려져. 옳은 거는 말해도 그 기쁘다고 즐겁다고 안 들리고 께꾸름하고 틀린 거는 이래 말할 때에 기쁘고 즐거운 것은 원인이 뭐이야? 원인이 뭐이라? 말해 봐. 자기 속에 자기가 그런 사람이 돼 그런 거라, 그거. 그걸 봐서 알 수가 있는 그거라.

자,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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