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행동은 부활의 형체를 심는 것

 

1988. 6. 2. 목새.

 

본문: 고전 15:36-38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요것을  지난밤까지 했습니다. 증거했습니다. 오랫동안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삼가 듣지  않기 때문에 가르칠라 해도 가르칠 진도가 자꾸 더디집니다. 예사롭게 듣기  때문에.

 37절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각 종자에게 형체를 주시느니라’  그러면 씨종자가 뿌리워질 때의 종자의 그 형체와 종자가 땅 속에 뿌리워져  가지고서 자라나는 그 형체와 아주 다릅니다.

 그 종자가 크다고 자라나는 그것이 큰 것 아니고 또 작다고 작은 것도 아니고  종자의 종류에 따라서 각각 형체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면 , 37절은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종자는 무엇을 비유했는고 하니 종자는 이  세상에 그 사람의 행동, 생활 이것을 종자로 비유했고, 또 종자를 심는 것은 그  행동을 한 것을 비유했고, 또 종자를 심는 땅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그  현실을 비유했고, 또 종자를 심으면 그것이 자라나는, 자라나는 그 장래의 형체  자라나는 그것은 부활의 능력 부활의 행동을 말합니다. 부활한 행동, 부활한  능력, 부활한 가치, 부활한 그 영광 그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뿌리는 씨의 그 형체, 형체라 말하면 모양 아닙니까? 뿌리는 씨의  모양과 뒤에 나는 모양은 다르다. 씨의 모양과 나는 모양은 다르다. 이걸 알아야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말합니다. 씨의 모양과 나는 모양, 나서 자라는 모양,  그러면 자기가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그 생활, 행동이면 생활이요 생활이면  행동입니다. 그 모르기 때문에 자꾸 이리 접말 자꾸 해 쌓는 것이오. 생활하는  그 생활 행동과 부활하고 난 뒤의 부활한 것의 행동과 생활과 그것의 모든 능력,  영광, 존귀, 권위, 가치 이런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의 행동하는 행동에 그것의 가치와 부활한  것의 가치가 다르다. 또 행동하는 그것의 실력과 부활한 실력이 다르다. 이  세상에서 행동한 그 행동의 영광과 존귀와 부활한 것의 영광과 존귀가 다르다.

또 행동한 그것의 모든 사람이 환영하고 평가하는 것과 부활한 후의 행동과  생애의 환영과 평가는 다르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잘 알아야 됩니다.

 말 암만 해야 이게 안 돼서 자구 지난밤에도 이거 가르칠라 하다가 또 안 되고  자꾸 그라는데 암만 가르칠라 해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넘어 듣기  때문에 그렇게 이게 심각하게 들리지 안하니까 심각히 안 들리면 이 속에 내용의  뜻을 모릅니다.

 그저 씨뿌리는 걸 가지고서 우리들의 부활에 대해서 해석을 했는데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심각하게 듣지 안하니까 그걸 애사로 지내보내 버리고 거게 대한  내용을 듣지 안하니까 안 된다 그거야. 몰라.

 제가 부활에 대해서 지금으로부터 한 삼십 년 전, 삼십 널 전 고신에 있을 때에  전국 학생 운동이라고 하면 그 운동은 학생들이 했지마는 외나 대가리는 내가  쥐고 있었습니다. 나는 뭐 권리 부리는 게 아니고 그들이 다 나를 딿기 때문에.

이랬는데 새벽 예배 인도는 꼭 계속 나를 시켜서 내가 새벽 인도를 꼭 인도를  했습니다.

 했는데, 그때에 부활에 대한 것을 내가 말을 했습니다. 그때 부활은 이  씨종자를 가지고 말했고 또 이런 모든 부화하는 그런 곤충들과 동물들을 들어  가지고서 얘기를 했지마는 하나도 모릅니다. 말해야 무슨 말인지.

 그래서, 그 뒤에 그들이 무엇인가 몰라도 은혜는 받고 이라니까 감격하기는  하는데 뭣인가 모른다 그거야.

 그래서, 이번에 이 강사된 분들은 다 무엇인가 하나씩 조그막씩이라도 문서로  좀 기록해 달라 이래서 재가 ‘영광은 하나님께’ 하는 제목으로서 조그만한  책자를 하나 그때 기록한 게 있습니다. 있는데 그게 편집실에가 있는지 오층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뭐 찾아보니 그게 있기는 있읍디다.

 그래, 오늘 아침에는 씨종자의 형체와 씨종자가 뒤에 장래 나서 자라는 그  형체와 다르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십시오.

 다른데, 씨종자의 형체와 씨종자가 나서 자라는 형체가 다른데 거게 대해서  지식이 없는 사람은 씨종자를 보고서 이것은 장래 아마 나서 자라는 ‘이것은  크게 자라겠다 작게 자라겠다 그런 것을 씨종자를 보고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씨종자에 대해서 전연히 그 구비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 씨종자의  지식과 씨종자가 뒤에 나면 어떻게 나서 자란다 하는, 나서 자라는 것과의 그  심으기 전 씨종자에 대한 지식과 심어서 자라는 그후의 씨종자에 대한 지식 그  지식을 같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씨종자에서 이것은 심으면은 어떻게  자란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알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익숙한 그 농부는 하나 예를 든다면은 밀 씨알, 밀알, 밀씨, 밀씨를 보고서  밀씨 이것은 뒤에 심기워지면 이 밀씨는 어떤 모양으로 자란다하는 것을 농부는  소맥 농사지어 본 사람은 알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심으기 전 종자의 형체와  심어 가지고서 나서 자라는 것의 형체에 대해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지고 있습니다.

 있는 사람은 이 씨종자는 앞으로 땅에 심으면은 며칠만에 나는 것 또 그 나면은  어떤 모양으로 자라는 것 그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전연히 농사짓는 데 대해서 무식한 사람 그것을 심으기 전만 보고 심어  놓고 난 다음에 나서 자라는 것은 보지 못하고 그 면은 모르고 이쪽 일방적  지식만 가지고 있는 그건 사람이라면 씨종자를 보고서 그것이 나서 자랄 때에는  어떤 모양이 되고 어떤 것이 된다 하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알  수 없지요. 맞지요? 알 수 없지요. 그런데, 이 세상에 지식은 두 가지 지식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지식이요 하나는 인간의 지식인데 인간의 지식은 그것이  마귀가 줘서 미혹하는 지식인데 세상에 이십세기 과학이라면 많이 떠들지마는  서도 그 지식은 다 일방적 지식입니다. 한쪽, 면만 알고 한쪽면은 모르는  지식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이런 행동을 하면은 이건 행동은 뒤에 이런 모양으로  부활한다. 형동의 그 모양과 행동의 그 형체, 행동의 형체와 그 행동의 형체와  그 행동의 부활한 후의 형체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세상 지식은 전연히  모릅니다. 알겠습니까? 이게 이 변동 못 하고 요 비유한 것도 요런 거는  변동하지 못하도록 요렇게 해 놓은 건데 이걸 예사로 들으니까 모릅니다. 세상에  있는 지식은 전부 다 뚜드려 뭉쳐도 그걸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행동한 행동과 무궁세계의 보응, 무궁세계에  고대로 나 가지고서 부활해서 영원히 존재하는 그 형체를 모릅니다. 일방적으로  그저 심으는 그 사람의 행동의 모양 그것만 보지 그 행동이 뒤에 어떤 것으로서  부활하느냐, 어떤 것으로 부활해 가지고서 영원히 존재하게 되느냐 하는 것은  전연히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종교들이 짐작을 하고서 이런 아마 행동에는 이런 보응이 있을  것이라, 보응 있는 것도 모릅니다.

 이래서, 유교에는 전체의 통틀어서 ‘인생에 생부지 사부지라’ 사랑이 나는  것도 어째 나는지 모르겠고 또 죽은 뒤도 어찌 되는지 모른다 하는 것을 유교  학자들은 말을 했습니다. 양심가입니다. 이 세상에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종교나 사상 중에는 유교 사상이 제일 양반이요 양심가요 정직한 자입니다.

 불교의 사상은 이것이, 그건 불교는 철학인데 궁구는 많이 했습니다. 많이  해서는 있는데 하나님이 안 가르쳐 주니까 모르면서 이럴 것이라 저럴 것이라 해  가지고서 추론한 것을 ‘아마 이럴 것이라 추측한 것을, 이럴 것이라’ 불교의  시종은 ‘이럴 것이라’ 추측하고 추론하고 미루어 생각해 보면 그럴 것이라  하는 추측과 추론한 것을 그 다음 불교인들의 자손들이 그것을 자꾸  진화시켰습니다.

 고걸 그전에 말한 것보다 더 좀 더 똑똑히 말하고 똑똑히 말하고 이렇게 말하는  데다가 기독교의 이 성경에 말한 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인용을 해 가지고  저거 것같이 해서 지금은 뭐 그들도 불교에서 중생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중생을  말하요, 이제.

 뭐 불교에서 중생 말하는 그것이 지금, 부활은 기독교 사람들이 부활주일  한다고 부활 많이 말했기 때문에 부활이라 하는 그 단어는 그들이 쓰기가 너무  급하니까 중생이란 말만 쓰는데 부활이라는 말도 좀 있으면 쓸 것입니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지금 그와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요 기독교에서 부활이라  하는 이 부활에 대해서는 지금 말하고 창세기에서부터 부활을 말했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진화의 종교가 아닙니다. 진화의 종교라 말은 차차차차  사람들이 생각해서, 생각해 가지고 조금 더 발명하고 좀더 발명하고 또 좀 더  발달하고 그란 것이 조금씩 자꾸 진보되고 향상되고 나아가는 그런 것이라  말입니다. 진화되는 그 종교지마는 기독교는 진화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계시의 종교라 말은 하나님의 그 무한하심을  인간들에게 내 보이고 열어 보이고 가르쳐 주는데 그분에게는 완전이라 모든  것이 다 있지마는 배우는 우리들이 어리기 때문에 우리 정도에 맞춰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데 처음에 창세기에 가르쳐 주신 것이나 지금 가르쳐 주시는  것이나 조금 더 세밀한 것뿐이지 꼭 같습니다.

 그때의 인생관이나 지금 인생관이나 그때의 구원관이나 지금 구원관이나 꼭  같습니다. 그때에 생명에 대해서 생명관이나 지금 생명관이나 다 같고 그때의  부활관이나 지금 부활관이나 도덕관이나 꼭 같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같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똑똑히, 모두 머리가 모든 마귀가 어둡게 해 놓으니까  심령이 어두워져 있으니까 모르지 똑똑히 넓게 보면은 세상에 있는 모든 거는 갈  지자 걸음이오.

 갈 지자는 이래 쓰는 거라. 이래 픽 이리 삐쳐 가지고 흐 이래 가지고 이라면  이게 갈 지자라. 갈 지자는 이래 써. 이래 갈 지자 걸음이라. 인제 이러니까  세상에 있는 어느 종교라도 인생관이면 인생관에 대해서 일관된 게 없습니다.

언제는 이랬다가 저랬다가 자꾸 변해집니다. 또 철학 쳐놓고 일관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종교 쳐놓고 일관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무엇이든지 일관이지 태초나 지금이나 가르치는 것이 전부다 일관인데  다만 사람의 정도에 따라서 더 쉽게 말해 놓고 지금은 어렵게 말하고 그때는  눈에 보이는 것을 위주로 해 가지고서. 가르쳤고 지금은 눈에 보이는데서 차차  사람이 마음의 눈으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을 가르쳤고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걸 가르치다가 이 장성한 분량자들에게는 이제 성령으로 가르치는 그거는 글로,  글로 쓸 수 없는, 글로 표시할 수 없는,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할 수 없는 것을  지금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데서도 말로 이렇게 자꾸 하는 가운데에 말로 표시할 수 없는  고것을 자기가 발견해 가지고 잡고 가져야 되지 그 말로 표시할 수 없는 거는  그거는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은 뭐인가? 그것은 자기가 들을 때에 양심으로 생각하면은  들려지고 양심으로 생각하면은, 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양심으로 자기가 느낀  것을 이 글로 다 표현할 수가 있습니까? 못합니다. 양심으로 느끼는 것보다도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느끼는 그 성령이라야 비로소 알릴 수 있는 것,  그러기 때문에, 진리가 문서 계시로 나타나고 문서 계시보다 더 확고하게  세밀히 나타내는 것을 가리켜서 영감 계시라 그랍니다. 영감계시. 영감 계시를  가리켜서, 문서 계시는 나타난 계시고 영감 계시는, 은밀 계시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러니까, 자꾸 여러분들이 사람의 말로 할 때에 사람의 방언으로써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속에 있는 영감의 세계를 자꾸 인간의 말로 하는  가운데에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인간의 말로 표시할 수  없는 그 신령한 면 가치 있는 뭐 실상에 가까워진 그 면을 자꾸 찾아서 알아  가지고서 영감으로 알면 그 실상을 알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상을 알아지면 완전히 다 알아졌느냐? 실상을 알아져도 그저 육체의  귀로 들은, 눈으로 본 것보다는 더 확고하고 범위 넓고 더 참에게 가깝지마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는 무한하니까 알고 알고 듣고 듣고 깨닫고  깨달아도 그 미래에 아직까지 미달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37절에서 여러분들이 현재 뿌리우는 종자의 형체와  그것이 다시 움싹이 나 가지고서 자라는 형체가 다르다 요걸 가지고 주님이  비유를 하셨는데 그러면 지금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것 그 사람의 사는  생활, 행동, 그 행동의 형체와,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이 행동한 형체 그 행동한 형체는 그 행동은 그것을  심으기를 어데다가 심습니까? 현실에다가 심습니다. 그러면 현실에다가 그  사람이 심으는, 현실에다가 행동하는 그 행동의 형체와 부활한 것의 형체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릅니다.

 다른데, 그 농부는 그 종자를 보고 뒤에 자라는 형체를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까? 알고 있습니다. 농부 아니고 거게 대해서 전연히 경험해 보지 못했고  또 그것을 체험해 보지 못한 농부가 아닌 그건. 사람은 종자의 형체를 보고 장래  자란 것의 형체를 짐작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짐작은 제대로 하지마는  틀린다 그거야. 그러면 이 불교나 이런 모두 이 종교는 짐작하는 것이라 그거요.

 그러면, 그것을 심으는 농부는 아는데 인간의 그 행위를 인간이 이 사람은 이런  행위하고 저 사람은 저런 행위하고 행위를 하는데 고 행위에 대해서 뒤에 부활한  그 형체는 요런 행위는 요건 부활하고 조런 행위는 조런 부활한다는 그것을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은 알지요. 안 한사람은 모르지요.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통틀어서 말하면 지식은 두 종류인데 그 인간의 지식,  하나는 하나님의 지식인데 인간의 지식으로서 사람들의 행동과 이 다음에 부활할  때의 그 형체, 행동의 형체와 부활해 가지고 영원히 부활해 가지고 사는 것,  영원히 부활해 가지고 존재하는 것, 그 형체와를 양면을 아는 지식은 세상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가르친 것이 신구약 성경에 가르쳐  놨습니다.

 요런 행동은 현실에서 요런 행동한 것은 요런 부활을 받는다 조런 행동한 것은  조런 부활을 받는다 하는 그것을 신구약 성경에서는 가르쳐놨습니다. 이러니까  신구약 성경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뒤에 좋은 부활 영광스러운 그 부활을 할려고  하면은 이 세상에서 그 행동할 때에 이런 행동하면은 부활에는 수치스러운  부활이 되고 이런 행동하면은 부활할때는 한없이 존영한 부활이 된다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이 부활에 대한 선택을 어데서 선택합니까? 부활에 대한  선택을 어데서 하겠습니까? 어데서? 현실 뭘 해? 뭘 어데서 해? 현실 행동을  선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현실 행동을 선택합니다.

 행동 선택 그것이, 요 행동은 요런 부활되고 행동은 저런 부활하는 것은 세상  지식에는 전체의 지식 속에 다 통틀어 가지고서 그 지식 속에 요런 행동에는  요런 부활 영원이 있다 저 행동에는 저건 부활 영원이 있다 하는 것을 세상  지식에서 아는 지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 이게 그러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지식, 지금으로부터 역사가 한 사천  년 됐는데 육천 년인데 근 이천 년 동안은 그만, 한 육천 년 됐습니다. 그 이천  년 동안 그 지식도 노아로부터 연결돼 나와 가지고 또 그 뒤에 또 사천 년  동안을 인간 지식이 점점 경험 체험 연구가 가해져 가지고서 한 육천 년 동안  쌓여 나온 그 인간의 지식이 그것이 이 세상 지식입니다. 이것이 세상 말로  문화라고도 하고 세상 지식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이런 것 속에, 그러면 육천 년 동안 인간들이 다 뭉쳐 가지고서  인간들이 연구하고 깨닫고 발견하고 안 인간 지식 전체 속에 인간이 현실에서.

행동한 고 행동에 부활에 영원한 것은 어떤 부활과 어떤 영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지식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 천하 인간이 다 알아도  모르는 지식이 이 하나님의 성경에 있지마는 눈이 어둡고 사람들이 아직까지 다  변화가 안 됐기 때문에 여게 대한 가치를 크게 사람들이 생각지를 아니합니다.

 그러기에, 빌립보 3장에 이 성경을 아는 사람은 1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리스도가 뭐할라고 그  고난을 참여했으며 그분이 어떻게 해서 그런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부활을  했는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기업으로 다 받았고  영계와 물질계에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이 홀로 다 통치하시고 다 그분에게 속해  가지고 삽니다. 그분으로 인하여 삽니다. 이런 말 여러분들이 몰라. 이거 참  심령이 어두워요, 여러분들이.

 ‘참여하려 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예수님이 어떤 생애로 끝남을 본받아 그 말이오. 죽으심을 본받아 그  말은 죽은 걸 본받는다 그 말은 그분아 나서 일생 동안 살기를 사는데 일생 동안  어떤 생애를 하는 것으로서 끝냈느냐? 어떤 생애를 일생 동안 했느냐?  ‘죽으심을 본받아’ 예수님이 세상에서 인간 생애를 어떤 생애를 취해  가지고서 어떤 생애로 끝냈느냐? 죽음이라 하는 것은 생애를 끝낸걸 말합니다.

 ‘본받아 어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도  예수님이 어떻게 죽었는가? 어떻게 행동하고 죽었는가? 그렸는데 그분이 어떻게  행동해서 죽었는데 그분은 어떤 권능 있는 부활을 했는가 이거 알라고 지금 전심  전력 기울이고 있습니다.

 자기가 모든 문벌도 있고 학벌도 있는 걸 그 위에 쭉 말해 놨습니다. 이래서  그가 말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예수를 바로 알아서 예수와의 관계를 바로  가지는 이것이 제일 귀하다는 것을 앎이라.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왔어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을 다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나는 세상에 있는 그 모든 이런  저런 그 행동과 영광과 존귀 그것이 다인 줄 알았다. 육안으로 보는 이 세상  그게 다인 줄 아는데 그게 아니라. 그것은 찌꺼기고 그 속에 알맹이가 있다. 그  속에 알맹이가 있다. 이 세상 행동 속에 알맹이가 있다.

 알맹이 있는 것은 뭣을 가리켜서 알맹이라고 말했습니까? 저 OOO이. 말해 봐.

그 쩌꺼기 말했지. 기름은 짜면은 깻묵은 찌꺼기고 기름은 속에 알맹이 아니요?  이러니까 배설물로 말했으니까,  자, 그러면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데 배설물은 뭣이 배설물입니까? 뭐이  배설물이지? 똥오줌이지? 쉽게 똥오줌 아니요? 알맹이는 뭐입니까? 알맹이는  뭐이요? 영양 아니요?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이런 저런 행동되는 그것은  찌꺼기인 것을 발견했다. 찌끼인 것을 발견했다. 그러면 찌끼 속에 알맹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기 때문에 찌꺼기와 알맹이를 발견했기 때문에  찌꺼기를 보고서 과거에 욕심을 내고서 야단을 지겼는데 그것은 다 쩌꺼기이기  때문에 버리고 그 속에 알맹이를 위해서 알맹이를 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 알맹이를 취해서 노력한다는 거니까 알맹이는 뭐입니까? 알맹이는  뭐이지요? 뭐라 하노? 알맹이는 뭐이지? 부활. 알맹이는 부활. 이 세상에 생애와  부활이 있는 것을 발견했어. 이 세상 생애 이거는 껍데기요 그 속에 부활 그것이  알맹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이르려 하노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또 그 부활에 참여하고 또 권능에 참여할 수가 있다  말이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예수님이 잡은 거  예수님이 취한 부활 권능 예수님이 취한 부활권능, 부활의 형태, 부활의 형체,  부활의 형체라 하면은 부활의 영광과 가치는 형체 속에 포함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포함됐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 말이 얼마나 넓고 얼마나 크고 얼마나 크고 얼마나 깊고 얼마나  세밀한데 이걸 세상에 있는 그 학문 그거 연구하듯이 그런 연구 정도로 할라  하기 때문에 안 돼. 세상 지식 그까짓 거야 볼 것이 없어.

 잡힌바 된 젓 ‘그리스도에게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좋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면,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실라고서 지금 상을 만들어 가지고 자꾸 그  상을 받으라고 하는데 그 상이 죽 계속해서 있으니까 그 상을 보고서 이 세상 게  좋다 해 가지고 그 상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고, 그 상을 찍해야 만 분의 일만  받고 마는 사람 있고 그 상을 만의 오천 받은 사람, 만의 구천 구백 받은 사람,  만의 만을 다 받는 사람,  그 상은 뭐입니까? 하나님이 손에 들고 있는 상, 상급은, 상급이라는것은 어떤  게 상급인고 하니 상급은 무슨 댓가입니까? 상급은 무슨 댓가입니까?  불쌍하니까, 준 불쌍한 댓가입니까? 어린 댓가입니까? 전투의 댓가입니까?  승리의 댓가입니까? 상이라면 어떤 것입니까? 승리의 댓가라.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잡힌바 된 것, 또 상, 이 푯대, 그러면 이 상은 뭐이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형 대행 대화친으로서 우리의 대속을. 이룬 것은 이것은  하나님께 이와 같이 해서 하나님이 주셨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대속을 완성 것은  이것은 뭐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들로서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셔서 준  것입니까? 이것은 안 줄래야 안 줄 수 없는 공평으로서 승리한 승리의  상급입니까? 승리의 상급이오. 승리의 상급. 예수님이 승리의 상급.

 그러면 승리의 상은 뭐인데? 죄가 완전히 없어. 완전히 하나님의 공심판에  통과한 완전한 의라.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된 이 결합이라. 이것이 상인데  바울은 이것을 다 차지하기 위해 죽자 살자 하고 노력을 했다고 했습니다.

 ‘하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데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니라’ 죽는 그 시간까지 자꾸 이  달음질을 지금 해야 될 우리들입니다.

 이러니까,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데 이것을 이 세계 신학에서 부활에 대한  것을 이것을 정확하게 가르쳐 놨느냐 하면은 아직까지 정확한 것을 뭐 가르쳐  놨는지 안 가르쳐 놨는지 나는 다 많은 서적을 못 봤기 때문에 모르지마는 제가  접촉하는 사람에게는 물어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고려신학 다닐  때도 그랬고 지금도 학자들이고 지금도 무슨 조직 신학이니 뭐이니 하지마는  부활에 대한 이 세밀한 정확한 것을 느끼지를 못하고 있어, 그 사람들도.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 여러분들이 이 어려운 것 중에 지금, 지난밤까지는  죽어야 산다 하는 고것을 배웠습니다. 죽어야 산다는 걸 배워도 껍데기를 지금  가르쳤지 속에 알맹이는 감당 못할 거 같아서 가르치지를 못했습니다. 죽으면  산다는 것도.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리대로 영감대로 또 예수님의 대속대로 사람이  살아서 살면, 사람이 그와같이 대속에서 살면은 이 세상에 살아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 또 진리, 영감대로 자기가 살았으면 지금 살고  있으면 산 그 사람이 영감대로 산 사람이 살아있고 진리대로 산 사람이 살아  있고 예수님의 대속대로 산 사람이 살아있습니다.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다가  그 사람이 그대로 산 사람이 죽어 없어져 버렸습니다. 죽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산 사람이 죽어 없어진 것 있고 아직까지 죽자 안하고 그대로  산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 있고, 살아 있는 부분 있고 죽어 없어진 것 있고,  살아 있는 사람도 있고 죽어 없어진 사람도 있고, 이러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완성입니까? 죽어 없어진 사람이 완성입니까?  어째 그래? 어째 그렇습니까? 이래 말하니까 짐작으로 그대로 해 그렇지 죽어  없어진 사람이 왜 살아 있는 사람보다 완성입니까? 살아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미정이라. 미완성이라. 오늘은 영감대로 진리대로 살았지마는 내일 그게 망령  부리고 이제 신앙을 배반할란지 모른다 그말이오.

 그러나, 신앙을 지킴으로서 끝난 것은 다시 그거는 재시 할 것이 있습니까?  의문날 게 있습니까? 아직까지 미결이 있습니까? 완성입니까? 완성이라  그말이오.

 죽지 안하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겠고 하는 것은 죽어 다시 살아나서 이  세상에서 승리해 가지고서 미완성이나마 승리 중에 있는 것 있고, 승리 중에  있는 것 있고 완전 승리한 것 있다. 완전 승리한 것은 어떻게, 지금 죽어 살아  있는 것입니까? 죽어 완전히 없어진 것입니까? 죽어 완전히 없어진 것인데  여러분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걸 알지마는 나가면 몰라. 죽어 완전히 없어진  것입니다. 없어진 것. 그러면 이것이면 이것이 완성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진리와 영감과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대로  이렇게 사는 그 생활로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으로 사는 생활이면 온전한  신앙생활이겠습니다. 온전한 신앙생활로 살아있기를 원하겠습니까? 온전한  신앙생활로 끝을 맺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성도들이 ‘내가 원하는 것은 어서 떠나 그리스도로 더불어  함께 거하는 것이라’ 떠나기를 원한다는 그 말은 세상에 있기를 원한다 말이요  죽기를 원한다 말이요? 죽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요 진리를 깨닫지 아니하면  마지막에 최후 승리할라 할 때에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을 사람이 취하기 쉽기 때문에 평소에는 순교, 순교  원하지마는 고때를 딱 닥치면은 요것을 순교를 원하지 안하고 살아 있는 그것을  택한다 그 말이오.

 왜? 제가 살아 있는 그것이 낫다고 제 지식이 그렇게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나은 것을 취하지 나쁜 것을, 더 좋은 것 취하지 덜 좋은 걸 취할 턱이  있습니까? 이러니까 지금 지식이 온전치 안하면 안 돼.

 그러기 때문에 뭐 말할 것 없이 앞으로 무슨 환난이 오면은 자기의 살아 있는  삶보다, 산 것보다 죽은 것이 완전히 높이 평가되고 그것이 더 생명에 완전하고  진리에 완전하고 성결에 완전하고 하나님과 화친에 완전하고 그것은 영원히 죽지  안하고 확고한, 가치도 능력도 모든 환영도 대우도 훨씬 초월하고 이것보다 살아  있는 것보다 탁월하다는 이 사실을 자기가 알고 확실히 믿어지는 믿음이 아니면  그 죽음이 있을 때에 그 죽음을 피하지 취하지를 안한다 말이오.

 그런고로, 오늘은 37절, 이 세상에서 현실에서 행동하는 그 행동의 형체와  부활한 형체가 다르다. 세상에서는 행동한 형체의 가치만 알지 부활한 형체의  가치를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행동한 그 행동의 형체가,  부활 후에는 제일 존귀한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영계와 물질계 모든 것을 다  점령하고 모든 것에게 제일 존귀를 받는 그 행동인데 키 세상은 그 행동을, 그  생애를 세상은 가치 있게 봤습니까? 천하게, 봤습니까? 천하게 봤어. 가치 있게  보지를 안해 천하게 봤어.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가치를 천하게 봤기 때문에 이종교는 일면의  가치밖에 모르고 그것이 그 다음에 조물주가 요런 행동에는 요런 부활을 주겠다  하는 고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의 형체로서 좋은 것만 봤기 때문에  석가모니도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고 존대받고 많은 사람이 딿고  이랬지 전 인류에게 배척을 당해서 한 사람도 예수님을 딿지 안하고 다 배척해서  ‘다 너희들이 나를 떠나고 나 혼자 있을 것이라. 그러나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다.’ 하는 요 행동을 취하지 안했다 그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이종교는 다 이 행동을 취하지 안했어.

 그러니까, 요것을 단단히 오늘 아침에는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 그 종자와 종자가 뒤에 날 때의그 형체,  종자와 종자가 나서 자랄 때의 형체를 농부가 아는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요 행동에는 요 부활되고 조 행동에는 조 부활된다는 고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경이 가르쳤습니다.’  가르켰는데, 여게 대해서 무식한 사람들은 이 세상 행동 고것만 봅니다. 그  세상 행동이 가치 있는 것은 부활에 그 행동에도 가치가 있고 이 세상 행동에  천한 것은 부활에도 천하고 그렇게 됩니까? 이 세상 행동에 천한 것은 부활에  존귀해지고 이 세상 행동에 무가치한 거는 부활에 가치 있게 된다 그렇게  됩니까? 어쩝니까? 정반대로 고렇게 됩니까? 정반대로 되는 것도 있고 고대로  되는 것도 있고 복잡하기 때문에 고것을 성경을 모르면 고것을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오. 이해가 돼요? 그러면 오늘 요만침 하고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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