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

  선지자선교회

1980. 6. 14. () 새벽

 

(기도)

우리를 구속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계속 영원토록 구속의 은혜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심을 찬송합니다. 극히 미약하고 제한되어 있는 저희들로 주님의 영영하신 영원하신 구속의 은혜를 스스로는 지극히 작은 것도 감당할 수 없음을 확실히 압니다. 다만 아버지의 성령으로서만 주님으로서만 할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이 시간에도 주님의 공로로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받아 주에게 속하고 주에게 된 자들에게 주의 성령으로 충만케 하사 깨달으며 증거하게 하시고 또 들어 깨달아 영원히 나타낼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성령님으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본문 : 고린도전서 15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땅에 속한 자 첫째 아담의 형상을 우리가 그와 같이 입었으니 이 형상은 곧 원죄로 죽은 형상이니 곧 죽은 영과 육 심신의 육 이것으로 되어진 것을 말씀하는데 이는 첫째 아담과 꼭 같습니다. 죽은 영으로 되어 있는 것도 같고, 또 타락한 마음으로 가진 것도 꼭 같고, 또 몸의 모든 구조나 이목구비 수족에 모든 지체의 구조나 기능도 꼭 같습니다. 땅에 속한 자 곧 이는 피조물에게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땅에 속했다는 말은 피조물에게 속했다는 말이오. 하늘에 속했다는 말은 창조주에게 속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땅에 속한 첫째 아담과 영육과 기능과 생애가 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에 속한 자는 곧 하나님에게 속한 둘째 아담 예수님을 가리켜서 말씀했는데 땅에 속한 자의 그 형상을 제외하고, 땅에 속한 자의 형상이 아닌 형상을 입은 것이 있으니 곧 그것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아담과 같은 그런 형상은 없고 하늘에 속했기 때 문에 땅에 속한 그런 형상은 없고 순전히 하늘에 속한 형상만 예수님은 가졌었습니다. 영도 산 영이요 심신의 육도 산 육이요 기능도 생애도 모두가 다 산 것인데, 이는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또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형상을 덧입게 하기 위해서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이라는 것은 신인양성일위의 그 형상이니 곧 완전한 영육이며, 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은 무형에 존재인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그 흔적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 수 있도록 볼 수 있도록 나타난 그 형상이니, 그 형상은 물형도 아니요 영형도 아니요 그는 곧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과 하나님의 그 속성 곧 하나님의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 단일성이 단일성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많이 좀 새겨 봐야 되지 단일성을 잘 모르는 거 같은데, 이 단일성은 거게서 나온 것이 수 억억만이라도 그것이 하나에서 나왔으며 곧 그것이 하나라. 완전이기 때문에 완전에서 수많은 것이 다 나왔지만 그것은 다 완전성이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은 또 하나님의 형상은 아무리 말해도 그것이 하나입니다. 완전이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영도 육도 신성도 인성에 대한 모든 기능도 도덕도 속성도 다 완전이신 거와 같이 우리도 그와 같이 된다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우리가 입어서 흙에 속한 자의 형상과 다름이 없는 이런 형상을 우리가 가졌습니다. 이 형상은 물형이요 영형이요 또 범죄의 행위의 형상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 둘째 아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은 아담의 영육과 같은 영육이 아닌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진 거와 같지 아니한 신인일위인 이 예수님으로서 이제는 일위이기 때문에 그 기능이나, 또 모든 활동이나, 작용 그 전부가 하나님이 하시는 그대로 나타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그대로 나타나는 예수님의 형상이신데 이 예수님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우리가 입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그런데 그 형상을 예수님께서 도성인신하심과 살으심과 죽으심과 살아나심에 이 대속으로 이것을 다 이루어놓으셨습니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영은 받을 것을 다 받았고 육이 이제 받은 것을 제가 간직하느냐, 받은 것을 버리느냐? 버리는 것을 가리켜서 둘째 사망의 해라고 말씀하고, 이루어 놓으신 것을 그대로 간직하여 가지는 것을 가리켜서 세세토록 있는 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으리도다 하신 이 말씀이 곧 너희에게 전한 이 복음이니라" 이제 영원토록 이 의를 가진 자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어떠하신 분인가? 영원 전 자존하신 하나님이시요. 또 그는 완전자시요. 또 그는 영원 불변자시요. 영원하시고 불변자시요. 또 그는 수많은 것으로 비추어 나오지마는 하나인 참인 하나인 완전인 거게서 나왔기 때문에 수많은 속성들이, 수많은 역사들이 있지마는 그것이 하나라 단일성. 이 하나님이 이 자체이신 이 본체이신 이 하나님이 당신이 목적을 정했으니 곧 그 목적은 온전한 교회를 일으키려는 것이 곧 신인양성일위의 중보자로 인하여 신인양성 결합의 일행으로 동행보다 동행하는 것 보다도 일행이란 말은 더 동행 속에 들어가서 있는 것입니다.

노아가 동행했다 에녹이 동했했다 하는데 우리는 동행이 아니고 일행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니라." 하신 것은 동행이 아니고 일행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말하는 것은 내 말이 아니요 내 안에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일이라." 내가 안식일날 이런 일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매 내가 일하게 됐다 아버지가 일하니 내가 아버지와 같이 일했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일하신 그 일이 나를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에 내가 일한 그것이 아버지가 일한 것이다. 양성일위의 행위인데 우리는 양성일위가 아니고 양성 결합, 결합으로서 일행하는 이 자를 되게 하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과 같은 온전한 자,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고 하나님과 같이 영원하고 불변한 자, 발단적으로는 앞으로 가는 데는 자꾸 새것이 오지마는 이루어 놓은 것은 영원 불변의 것이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대형으로 우리의 잘못된 죄를 대신했고, 대행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진 의무를 다 완수하신,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대신해서 하나님과 양성 결합이 일행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과 결합에 이 새생명 생명은 하나님과 결합된 것이 생명이오. 영생은 결합된 것이하나님으로 인하여 피조물이 움직인 그것이 영생입니다. 이래서 이 대속은 영원한 대속이라.

그런데 이것으로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그의 위치는 만물 위로 곧 위로서는 하나님 밑에 하나님의 몸 하나님의 지체 이렇게 되어져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교회를 통해서 만물에게 나타나고, 만물의 모든 역사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상달되도록하셔서 영원무궁의 생명과 사랑과 평강의 나라로 알파와 오메가의 나라로 영생하는 이 나라를 하늘에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통일되어서 발등상되고, 또 옹호하는 모든 시위한 것들이 되고, 천군 천사는 시위한 것들이 되어 이렇게 돼서 영생하도록 하려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십니다.

오늘 아침에는 조금 하나님의 목적이신데 (가실 분들은 가십시요. 다섯 시가 된 모양인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것을 정하시고 이 목적을 정하셨는데 이 목적은 자존하신 홀로 한 분이신 유일하신 당신이 혼자 이 목적을 정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목적은 유일의 존재가 정한 유일의 목적이요, 이 목적은 완전한 목적이요, 영원한 목적이요, 불변의 목적이요, 이 목적이 우주와 영계에 충만하게 가득차지마는 그것이 다 단일성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이루시는 이 목적은 하나님같은 온전자, 완전자, 영원 불변자를 하나님과 같이 피조물들에게 역사할 수 있는 하나님과 일위가 된, 하나님과 일위는 아니지마는 일위의 이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과 결합으로 동거 동행하는 일행이 되는 이것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이 목적을 이루시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것은 이 목적의 정반대인 이 목적으로, 이 목적이 이루어지는 이 순서에 반대로 이 목적에 그 자체와 반대로 되어 있는 이 목적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되어지는 것인데 이 목적의 반대는 하나님으로 인하지 아니하고 피조물로 인하여 되어지는 것, 이것이 이루어져 이 목적이 달성될 때에 이 목적이 영화롭고 존귀한 거와같이 이 목적의 반대인 그것이 얼마나 비천하고 고난스러운 그것을 상대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인 것입니다.

이래서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 했는데 여러분들이 좀 아직가지 그 생각의 시야의 범위가 좁아서 퍼뜩 이해가 안되는 것 같은데 지난 밤에도 내가 땀을 뺏습니다. 이해가 안되고 통해지지 안해서 오늘 아침에도 시간이 갔는데 여러분들이 제목을 가지고 가서 좀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이 시공 세계에서 이루어 놓으신 이것이 끝나면 예수님이 재림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부활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살아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심판이 있는데 이 공심판 있기 전에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말은 예수 안에서 구속을 받은 자들이 받은 심판을 가르쳐서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말은 제사장의 심판이요, 선지자의 심판이요, 왕의 심판이랍니다.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제사장성이 얼마나 있으며, 제사장의 공적이 얼마나 있으며, 제사장의 그 자격이 실력이 얼마나 있는가? 선지자 자격, 왕의 자격 이것을 심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이렇게 그 다음에 공심판이 있어. 이 심판을 거쳐 가지고 그 다음에 세계가 있으니 그 다음 세계는 영원무궁합니다. 그 다음 세계는 영원무궁한데 영원무궁한 그 다음 세계가 어떠한 것인가? 영원 무궁한 그 다음 세계는 세 가지가 나타납니다. 크게 말하면 두 가지요. 세밀히 말하면 세 가지입니다.

크게 말하면 두 가지라는 것은 하나는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아니 피조물된 자가, 피조물 된 자가 하나님과의 그 삐뚤어진 것 수많은 삐뚤어진 것이 삐뚤어진 데에 영원한 값을 받는 것으로 그렇게 나타나서 '나는 하나님에게 요렇게 삐뚤어져 가지고 이렇게 되었다. 그런 것을 받고 있다.' '나는 하나님께 삐뚤어진 거 이렇게 이렇게 이런 것이 있어 나는 이렇게 됐다.' 삐뚤어진 것에 그의 손해가 삐둘어짐에 그 손해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세상에서 하나 보여 줬으니,첫째 아담이 하나님에게 선악과 먹어 삐뚤어진 거, 하나님의 선포하신 그 게약을 어긴 그 삐뚤어진 거, 그 삐뚤어진 것으로서 얼마나 그 해가 큰가 하는 것을 역사 육천 년 동안에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그 벌을 받아오는 것이 그 삐뚤어진 값이라 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하나의 표적을 보입니다.

영원무궁토록 삐뚤어진 그것의 종류와 그 값을 그 보이고 있는 것을 한 말로 말해서 유황불 구렁텅인데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아니하는 곳이다'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영원한 사망이라.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죽는 거 아닙니다. 그 고통이 끝나는 것 아닙니다. 영원무궁한 그것이 이제 공심판 넘에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렇게 공심판 넘어 어떤 어떤 그 수많은 삐뚤어짐에 그 하나님의 신실하신 보응으로, 공평된 심판으로 어떻게 이루어진 그 속에 하나님의 택한 자도 함게 타락하게 하여 그 속에 있는 그것을 그 속에 가지는 안했지마는 벌써 하나님의 전지한 지혜로서는,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서는, 그 속에 있는 피조물의 지혜로서는 아직까지 가지 안했으니까 그 속에 있는 거를 모르는 우리가 미래를 우리는 모르지마는 하나님께서는 미래와 과거와 현재라는 게 없습니다. 이것을 초월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식으로 꼭같이 삐둘어져, 꼭같이 삐뚤어진 값으로 그가 영원무궁한 것을 그러면 삐뚤어진 것도 영원하고, 그 값도 영원하고, 그 종류는 불택자들이 삐뚤어진 것과 꼭같은 삐뚤어짐에 그의 보응의 영원함에 이것을 예수님께서 인성으로는 안 돼. 신인양성일위인 신성으로 인성되어 이렇게 이것을 대속하신 대속이 무궁세계에서 영원히 보입니다.

크게 두 가지로 말하면 하나는 불택자의 이 범죄에 영원한 보응의 유황불 구렁텅이요, 하나는 예수님이 그것을 대신 다 하셔서 예수님이 다 대신하시 가지고 이것을 그 공심판에서 구출해서 따로 옮겨 놓은 심판 넘, 공심판 넘 무궁에 그것을 대신해서 거게서 해방했고 하나님의 무한한 그 요구 명령 이것을 대신해서 이루어 예수님의 대속이 영원히 이루어져 있는 이것으로 하나되어 있는 이 둘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대행이 어떤 것이며, 대형이 어떤 것이며, 예수님의 결합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이것을 알 대로 아는 자가 없습니다. 알 대로 아는 자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아나 그런 차이가 많고 영원무궁세계에 가서 불택자들에 그 삐뚤어진 것과 삐뚤어진 댓가 그거 하나 하나를 볼 때 우리가 환하이 봅니다. 안 보지 않습니다.

그걸 볼 때에 예수님의 형이 대행에 대형의 형이 어땠던 것, 대행의 형이 어땠던 것, 이것을 영원 무궁토록 우리는 아는 가운데 자라갈 것이며, 또 사은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얼마며, 예수님의 대행이 어떠한가 이 두 가지 예수님의 대속이 영원히 심판 넘에 서서 있고, 예수님의 대속을 입지 아니한 인간의 소행과 보응이 서서 있는 크게 말하면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성취 안에서 심판 넘에 영원무궁 영원무궁한 것이 이 두 가지가 영원무궁에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영원무궁토록 서 있습니다.

이것이 뭐이냐? 하나님의 목적 달성을 위함이요, 이것이 자존하신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서 하신 것인데, 세 가지로 나눈다 그 말은 이제는 불택자들이 유황불 구렁텅이에 있는, 영원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자들이 예수님의 대속 안에 있는 영원인데 예수님의 대속 안에서 예수님의 대속 안에서 둘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예수님의 대속 안에서 둘이 있으니 하나는 뭐이냐?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믿음으로 믿음에 나아가게 하나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이 대형 대행 대호목으로 대생 대생을 대화목은 대생인데 대생으로 이루어 놓으신 이것이 의입니다. 영원히 죄가없습니다. 영원한 의입니다. 영원한 영광입니다.

이런데 이것을 이루어 놨는데 이루어 놓은 이것을 가지고 사는 것은 이루어 놓은 이것으로 사는 그것이 뭐이냐?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루어 놓은 이것으로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예수님의 대속으로 이루어진 이 사람들은 믿음으로 사는데 이 의인들은 믿음으로 사는데 이 의인들이 믿음으로 살지 아니하고 공심판은 면했지마는 그리스도의 심판에 걸릴 행위, 이렇게 이루어 놓은 이 의를 가진 자가 이 의로 살지 않고 이 의를 버려, 이 의를 배반해, 이 의로 사는 것이 뭐인가?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요. 이것이 충성입니다. 이것은 값에 팔려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그 대속 받은 자로 사는 것이 그게 충성인데 그 충성 그것은 뭐이냐? 곧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해서 사는 것인데, 이렇게 살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인데 이제는 하나님이 대속해 놓으신 이 대속이 대속으로 산 이것을 얻을 것인데 대속 받은 것이 대속이 대속으로 살 때에 대속이 승리하는 승리를 가질 터인데, 대속이 대속으로 살지 않고 대속을 버렸습니다. 대속으로 사는 그것이 무슨 죄가 의가 아니라 그 값에 팔렸기 때문에 그거 충성이라. 주의 것으로 산단 말이오.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산단 말이오. 이랬는데 이것이 대속으로 살지 아니할 때에 "죽도록 충성하라" 네가 임에 대속받은 자로 합당한 생활해라 그말입니다. 대속 받은 자로 합당한 생활하라. 이 대속을 어떻게 하신 그 값에 내가 팔렸기 때문에 다해서 대속했기 때문에 너도 다해서 살으라 죽도록 충성해서 다해 살으라 그말입니다.

'살아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시리라' 이렇게 "네가 다하면" 네가 다하면 생명이 대속 받은 것이, 하나님과 결합된 것이 이것이 결합된 그대로 승리를 해서 결합된 것이 다시 패전하지 않고, 결합된 것이 다시 어떤 미혹이나 어떤 방해를 받아서 이 대속된 것이 구속된 것이 다시 얽매이고 지는 이 미혹이나 강제나 어떻게 당했어도 대속받은 것이 대속받은 자로 살지 않고 대속을 버리고 내나 첫째 아담에 그 속에 하나님을 순종하여야 될터인데 거역으로,또 하나님을 반대로 이렇게 순종치 못하고 거역한 이것으로, 대속받은 것을 버리고 대속받은 자로 네가 살지 않고 대속을 받은 것을 버린 자로 사는 것, 영은 불변적으로 이거는 자체가 단일성인 것이요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렸고, 이 육은 수많은 종합체인데 중복적인 구원을 이루는 것인데 이것은 영을 살렸기 때문에 영을 통해서 스스로 살아날 수 있는 이것이야 되는데 이것이 값에 팔린 이 합당한 생애인 충성, 곧 그게 뭐이냐?하나님으로 피동된 그 믿음 이렇게 살면 주님이 주신 이것을 받은 자로 구속받은 자로 살건데 구속받은 자로 살지 않고 구속받은 것을 버리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 가지고 죄에 드려 죄의 병기, 의에 들렸으면 의의 병기가 될 터인데 이것이 깨끗해진 것이 더러워진 거 이래 가지고 이제는 예수님의 대속이 없었으면 그 행동이 첫째 사망의 행동이지마는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것이 이렇게 했기 때문에 둘째 사망의 해입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의 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 영원무궁한 예정이 하나는 하나님에게 위반된 것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멀리함으로 이런 게 된 것이다 하는 이것이 영원히 있는 것이 유황불 구렁텅이요, 이렇게 있는 이 가운데에 어떤 자를, 하나님이 택한 자를 예수님이 영원한 데에서 대속해서 이렇게 옮겨 놓은 자들이 있으니 꼭같은 자들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이렇게 영원히 옮겨놔. 예수님의 대속을 영원히 예수님의 대속이 어떤 것을 보여주는 것이 유황불 구렁텅이요. 하나님을 배반한 것은 어떠한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유황불 구렁텅이요. 유황불 구렁텅이는 예수님이 어떤 데서 대속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이요. 하나님을 떠난 존재가 어떻다는 수많은 종자를 다 보여주는 것이 이것이 유황불 구렁텅이요.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영원함을 입은, 영원한 형벌을 벗은, 영원한 의와 생명을 입은 이것이 있는 것이 하늘나라인데 이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자가 다시금 망령을 부려서 대속을 입은 자로서의 합당한 제 생활 하지 않고 대속을 입은 자가 대속을 벗고 다시 죄 가운데 빠졌어.

대속을 벗고 대속 입은 대속을 입은 무죄의 심신으로 의의 시신으로 하나님과 결합된 심신으로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 이것을 배반했을 때에 이것이 예수님이 대속하신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속하지 안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은 죄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그 무한하신 이 대속을 이것을 벗은 것, 이 대속을 제가 버려서 이것이 둘째 사망의 해 이 오른편에 예수님의 대속의 영원무궁이 있는데 이 대속 안에는 사망은 예수님이 대속했기 때문에 공심판에서만 사망이 있는 것인데 이것은 다 제거되었지만 예수님의 대속의 그것을 제가 입지 못하고, 제 것을 삼지 못하고, 제것을 삼아서 입지 못하고, 이 대속을 가진 자로 있지 못하고,비유건덴 대속을 열 개를 받았는데 한 자는 이 대속을 다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그 기회에 이 대속을 다 버렸어. 대속해 놓으셨으니까 공심판에서 지옥은 가지 안하지만 예수님의 대속으로는 하늘나라 오기는 와서 있지마는 예수님의 이 사죄와 칭의의 그리스도의 심판 곧 구속받은 자가 예수님의 이 대속을 그가 그대로 가지고 있느냐, 그 대속을 버렸느냐? 대속을 빼앗겼느냐? 이 대속을 벗어 대속을 제것으로 삼지 못한 그 자들이 십분지 일을 삼지 못했다. 십분지 이를 삼지 못했다. 십분지 삼을 삼지 못했다. 십분지 십을 다 삼았다 하는 이것으로서 차별 있는 것이니 하늘나라의 권세의 차이요 영광의 차이입니다. 권위의 차이요 영광의 차이요.

이것을 뺏긴 것이 지옥의 사망은 아닌데, 둘째 사망의 해는 지옥의 사망의 해를 아닌데 이것을 입어서 이 예수님의 대속을 가진 기능의 존재로서 하늘나라에 살지를 못합니다. 그 기능의 존재 그 기능이 뭐인데, 그 기능은 곧 제사장 노릇하는 기능이요, 선지자 노릇하는 기능이요, 왕 노릇하는 기능이니 모든 피조물들에게 충만하게 하는 기능입니다.

이래서 이것이 어느 정도 제가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느냐 하는 그 실력은 세상에서 마련하는 것인데, 이것이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게 되어 있느냐 하는 그것을 심판하는 심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지옥가는 심판 아닙니다. 제사장, 선지자, 왕의 이 직책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느냐 하는 그 실력을 심판하는 것이니, 예수님의 대속을 제가 어느 정도 그 대속을 보장하고 그 대속을 입은 자로 살았느냐 그 대속을 버렸느냐 하는 그것을 심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이것은 완전자가 이렇게 하셨습니다. 불변자가 영원자가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 세상 것 말이요 하나를 물건 하나 만들라 해도 좀 가치 있는 것을 한 가지 가지고 안 됩니다. 열 가지 백 가지 종류를 가지고 종합해서 되지고 한 가지 이치만 가지고 안 됩니다. 수십 백 가지 종류를 가지고 종합해야 되지고 한 가지 이치만 가지고 안 됩니다. 수십 수백 가지의 이치가 들어야 거게 내표해야 그것이 소위 과학물로서 가치 있는 좀 실력 있는 과학물이라 이럴 수 있는데, 하물며 이런 것들을 영원히 통치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되어지는 이 구원인데 그렇게 믿습니다. 예배당에 왔다 갔다하는 그거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이런데 사람들이 설교를 하면 설교를 하면 자기 주관을 딱 가지고 듣고 마음을 양심을 열지 안하기 때문에 그저 자기 생각대로의 어떤 사람은 하나, , 하나 어떤 사람은 셋, 넷 요 정도에서 요 범위 요것으로 다 구원이 다 될 줄 압니다. 예수님이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구원 얻는다 그러니까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 고렇게 단순히 생각합니다. 네 예수님의 이름만 믿으면 구원 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이 어떤 것인지?이러기 때문에 이 일이 얼마나 어렵든지 인간으로서는 힘으로 능으로도 아무도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할 수 있다는 전지 전능자 완전자라면 할 수 있다는 이 구원인데 그렇게 우리는 쉽게 여겨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뭣 때문에 세상에 많이 살게 되며 뭣 때문에 형형색색의 현실을 주느냐? 그 현실 현실에서 배울 수 있고 거게서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데 거게서 실행이란 걸 떠났기 때문에 수많은 지식을 가질 수 있는 전지의 지식을 내가 받아야 되겠고, 전능의 능력을 받아야 되는데 이것을 다 부인해 버리고 마는 것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 것이라 말이요. 예수님의 구속해 놓으신 이 구속을 제가 받지 못하는 것이라 말이요.

이래서 하나님께서 하신 그대로의 그것이 되는 것만큼 이게 실상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너무도 사람은 주관적이고 자기 본위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라서 이것을 행해야 알아질 터인데 행하지 안하니까 언제든지 자기가 들어서 하나님의 도를 이용해 먹고 하나님을 이용해 먹고 자기가 들어서 하나님을 취사 선택합니다. 이러니까 언제든지 왕은 자기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요한계시 18장에 멸망받은 것이 여왕이 멸망받는다 했습니다. 그것이 옛사람이요 자기 중심에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이러기 때문에 언제든지 듣는 것이 인본적이요 사람을 근본으로 한 듣는 것이 인본적이요, 생각하는 것이 인본적이요, 비판하는 것이 인본적이요, 소원하는 것이 인본적이기 때문에 인본에 원수인 신본의 것이 언제든지 마찰이 되기 때문에 신본이 것을 자기 인본의 것으로 조화를 해 가지고 인본에 알맞도록,과거에 민주주의를 한국은 토착화시켜야 된다 하는, 그 다시 말하면 그와 같이 신본을 인본화 시켜서 인본화된 것이면 자기에게 맞다 해서 이것을 하지마는 실은 기본구원은 이것은 완전히 객관 역사로 얻는 것이지마는 건설구원은 이것은 그 자기의 객관성과 주관성의 그 조화가 바로된 거게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건설구원은 힘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안 갈래야, 왜 천국 우리는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다 하는 그것을 왜 말하느냐? 그것을 말하는 것은 우리는 딴데 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기본구원이라 그렇게 구별을 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건설구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인본 자기 주관화, 이러니까 넓어지는 것이 사람 제 주관만큼 넓어져 있소. 주관만큼 넓어져 있어. 이 주관을 깨트리고 주관을 헐고 객관과 주관에 연결을 가진 그것이 칼빈이 그 당시에 나열해서 편집한 거 칼빈은 편집자입니다.

칼빈은 하나에 편집자요. 칼빈 전에 많은 사람들이 다 올바른 하나님의 주권이나, 하나님의 궁극적 은혜나, 하나님의 그 선택적 구별이나 이런 것이 이것이 다 그전에 말했다가 이단이라고 정죄받아 다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소. 죽었으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은 옳은 걸 주장하다 죽었으니까 순교자들이요.

다 그 흔적을 사람을 통해서 남겨 놔서 그 깨달은 그 사람은 죽었지마는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그만큼 느끼지를 못하니까 편지 모양으로 전하기만 전했지 저는 제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많았어. 제가 소유하지는 못했지마는 그 교리와 신조를 전하기는 전했어. 이것들을 종합해서 나열한 것이 칼빈이요. 이것 중에 하나의 실천으로서 깃발 들고 나선 것이 루터니 이 천주교에 무서운 우상을 깨트리고 거게서 벗어나왔습니다.

이렇게 그 당시 그 당시에 필요한 인본을 깨트리고 신본의 연결이 된 그 접선들입니다. 연결이 된 접선들이요. 다 인본을 깨트리고 신본과 연결이 된 그 접선들입니다. 연결이 된 접선들이요 다 인본을 깨트리고 신본과 인본이 연결되어 인본이 신본에게 복종함으로 살게 되는 이것을 하나씩 둘씩 발견해 놓은 것이 새로운 발견된 교리요 새로운 신조요 이것을 말하고 선지자들이 죽었습니다.

그 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우리에게 필요한 시대에 필요한 이 모든 인본과 신본에 마찰되는 것을 인본을 깨트리고 신본의 것을 이것을 세운 사람들은 다 이단이라고 정죄해서 매장해 버려 버리고 매장해서 다 매장이 되고, 그러기에 이단이라고 정죄받은 매장 속에 이단도 있지마는 거게 참된 그 정통들이 그 안에 숨어 있고, 그것을 또 받아 가지고 후손들이 전해서 세상은 언제든지 인간들이 보기에 크게 움직이는 그 움직임 그것은 벌써 죽었고 그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은 보이지 않게 은밀히 역사해서 산 줄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역사는 은밀하다. 하나님은 은밀히 역사합니다. 옛날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했지만 그는 은밀히 역사됐소. 그를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때의 세상이 알기에 커다란 진리 운동 하나님의 운동은 다 벌써 부패해졌었소. 노아도 그때에 노아는 정통입니다. 노아와 함께 하나님이 운동하지마는 노아는 그는 하나에 조롱물이요. 그 당시의 하나님의 아들들 네피림 유명한 사람들이 거게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인본으로 자꾸 타락해 나갑니다. 그 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지금은 세대가 아브라함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마는 그 당시에는 아브라함이 그렇게 유명한 줄 압니까? 아니요.

그러기에 언제나 인본의 이 죄악이 와서 되덮고 하나님의 성령은 그대로 역사해 나오는데 이것이 덮혀져서 인간들이 다 이 생명의 길을 모르고 자꾸 고만 생명이라고 왔다가 또 인간으로 돌아가고 생명으로 왔다가도 인간으로 돌아가서 자꾸 타락하게 마련이라. 개혁됐다가 타락되고 타락해섣도 그 속에 하나님의 줄기인 그것이 뚜렷이 배치가 될 때에는 나타나서 이 대립이 될 때는 이제 이것이 생명 줄기로 나와서 개혁이 됐는데 개혁된 이것이 또 인본화되어져 가지고 또 타락되고 그 속에서 개혁해 나오고서 이렇게 되어진 그것이 교회사요 그 역사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들이 지금은 어떤 때냐? 벌써 주의 재림도 가까웠고 마지막 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본체에 대해서는 우리가 연구할 길이 없지마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것을 연구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연구해서 하나님은 속성적 목적자요 속성적 예정자요 속성적 창조자요 속성적 섭리자요 속성적 구속자라.

그러기에 어떤 지극히 작은 거 하나에도 요 안에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붙이야 됩니다. 어떻게 지극히 작은 것에도 이는 삐뚤어졌으면 거게 하나님의 완전성이 붙었습니다. 그 삐뚤어진 것은 완전히 삐뚤어져 그 삐뚤어짐이 무한합니다. 옳은 것은 그 옳은 것의 완전성이 붙어서 그 완전이 무한합니다.

어떤 것이든지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완전성, 하나님의 영원 불변성, 하나님의 단일성, 하나님의 고 다음에는 하나님의 목적성, 하나님의 예정성 이것도 하나님의 예정이라 하나님의 예정성 하나님의 창조성. 하나님이 목적을 위해서 이것을 다 지으신 이 목적을 위한 이 목적성 처음에 단일 목적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존재 목적성이란 말입니다. 존재 목적성. 존재 목적성 그러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개별의 섭리성 개별적으로 머리털 하나도 개미 하나가 수염 하나 흔드는 것도 그것이 제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개별적으로 그것도 하나님이 섭리해서 고놈이 수염을 요래 흔들고 조래 흔들고 하지 요랬다가 그 이상 흔들지 못하게 하면 요래 못 흔들어.

하나님의 섭리의 개별성 이것을 어데든지 연결을 시켜서 연결되어 있는 게 내가 연결시켜 연결되어 있는 그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합당한 생애로 살아야 되는 것인데 우리가 타락이 어떤 타락이며, 예수님의 대속이 어떤 대속이며, 이 대속을 제가 한 시간 한 시간에서 한 한 한 현실 한 현실에서 이 대속을 이 영광스러운 대속을 팔아 먹는, 이 대속을 빼앗기는, 이 대속을 버리는 지옥으로 가는 사망은 아니지마는 지옥은 가는 사망은 아니지마는 둘째 사망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된 이것은 제가 버려 사망은 제 자체가 하나님과 연결되지 못하면 멸망받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이것이 영원 불변적 연결이 아니라 불변적 연결이 아니라영은 불변적 연결이 됐는데 불변적 연결이 이것이 연결된 여기에 연결된 이것이 한번에 자기의 심신이 믿음으로 긍정으로 영접으로 배반치 아니함으로 이 연결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변동될 수 있는 연결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이 구원을 배반하는 사망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서 범죄와 예수 안에서 범죄가 다르고, 예수 밖에서 받는 사망과 예수 안에서 받는 사망이 다릅니다. 받는 사망은 임에 구속이 자기와에 관련이 끊어진다 그말이오. 그 현실에 자기의 심신이 움직인 그 요소는 하나님과 연결이 그 현실에서 끊어집니다. 그 현실에서 연결된 그것이 영원한 연결이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된 이 현실은 이것이 영생이요 영망입니다. 여게서 영생이 이루어지고 영원 멸망이 이루어집니다. 이러기 때문에 구속받은 자지마는 제사장의 그 면에서 선지자 면에서 왕의 면에서 예수님의 구속을 받은 면에서 그 면은 완전히 죽어 없애버리고 그 멸해지고 구원은 얻지마는 불가운데 구원얻은 거와 같은 거, 이제 그것이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음같이 시험할 때에 타는 것 모든 시간이나 공간이나 모든 사정에 대해서 다 절단나지는 거 모래 위에 지은 것 이것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알고 현실에서 한 의가 어떤 것이며 한 죄가 어떤 것인지 그 죄에 대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줘서 그 죄보다 삼사대인데 천대니까 얼마입니까? 그 삼백 배 더 되지 않습니까. 삼백 배. 의는 죄에 삼백 배 더 되는 상으로 영광으로 갚으십니다. 이러니까 한 의에 가치가 어떤지. 한 죄의 손해가 어떤지. 이러기 때문에 네가 너를 잊어 버렸단 건 영원히 잊어버린단 말 아니요 그 순간 찰라에 잊어버렸단 말입니다. 뭣 때문에 잊어버렸느냐? 세상 것 때문에 잊어버렸는데 네가 그것을 잊어버리고 온 천하를 얻었다 할지라도 너는 손해갔다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기의 주관을 벗어서 자기를 부인해야 틀리지고 이는 예수님도 예수님도 기드론 시내를 건나가실 때에는 그렇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기까지 고민할 일이 있을 걸 몰랐습니다. 생각도 안했소.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려고 이제 때가 왔으니까 순종할 때가 왔고 아버지 영화롭게 하고 아버지의 소원대로의 당신의 소원대로의 대속하실 이런 일을 하게 되었으니 기다리는 기회가 왔으니까 기쁘고 즐거움으로 기드론 시내를 찬송하면서 건너갔습니다.

만일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 가지고 죽기까지 고민한 그 고민을 알았더라면 기드론 시내는 고민으로 건너갔지 찬미로 건너가지를 못합니다. 가 가지고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우리를 대속하는 대속이 그렇츰 어렵다는 것을 그때서 확실히 깨달았어. 아버지의 도우심이 아니면 지극히 큰 능력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소.

이러기 때문에 나로서는 안 되니까 다른 이가 이를 감당할 이가 없는가 하는 이것을 싱강을 많이 했어. 이는 단순히 죽는 그것을 죽기 싫다는 거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도 불신자들도 공산주의자들도 죽음이라는 이 생명, 임에 죽을 거라는 것을 그 죽을 거라는 공산주의 사상은 생명을 초월했습니다. 초월한 것이 많애.

죽는다는 것을 그거는 문제 하지 않고 이 사상만 그 달성시키자 하는 그 생명보다 초월해 있어. 그런데 뭐 그 죽는 게 두려워서 그렇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고민하고 싱강한 줄 압니까. 아니요. 그 대속이 얼마나 어려운 그 영원 무한한 그것을 아시고 했는데 예수님도 기드론 시내에 갈 때는 모르시고 겟세마네 시내에 아버지의 인도를 따라서 가시 가지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려 하실 때에 기도하시고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그렇게 고민할 문제를 알았습니다.

이랬는데 오늘 아는 거 하나도 가지 않고 앉아서 제가 앉아서 다 하려고 '주여 어데로 가십니까. 주를 따라 가면 뒤에 장래가 어찌 될 것입니까.' 예수님은 거게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와 보라 와 봐야 알지. 네가 모른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 이랬는데 그러기 때문에 모르지.

하나님에 우리의 오늘에 교리를 여러분들 오늘에 나타난 이 모든 교리든지 모든 주석을 그것을 신본이니 인본이니 그 껍데기로 그것을 구별하십시오. 신본 인본을 구별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완전성에 어떠하며, 영원성에 어떠하며, 불변성에 어떠하며, 단일성에 어떠하며, 하나님의 그 목적성에 어떠하며, 하나님의 예정성에 어떠한지 하나님 당신의 속성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에 어떤지 정말로 이것이 신본인지 하나님을 중심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인간을 중심하고 인간을 근본으로 한 것인지 이것에 근거되지 안하면 그 신앙은 바람에 불리는 갈대와 같습니다. 시대를 따라서 움직입니다.

이제 시대를 초월한 데에 속하지 아니하면 시대에 초월한 것에 속하지 안하면 인간을 초월한 하나님에게 속하지 안하면 그의 신조도 교리도 언제든지 시대를 따라서 움직일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무궁세계는 두 가지 거게서 세밀히 말하면 세 가지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는 하나님과에 피조물이 하나님과에 요런 관계는 요런 보응이다. 요런 관계는 요리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삐뚤어진 것에 빠짐없이 모든 것을 나열해 놓고 보라. 하나님과 피조물과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데 그 관계가 삐뚤어짐으로 이렇게 삐뚤어진 것은 이렇게 됐다 하는 그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 무궁세계의 하나요 하나는 이렇게 삐뚤어진 데에서 예수님이 대형. 대행. 대생으로 대속하셔서 옮겨놓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영원함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줌이 영원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이 대속을 보여주는 것이 영원함이요.

여게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 것을 하나님은 어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며, 어떻게 사랑하시며, 어떻게 세밀히 사랑하시며, 어떻게 끝까지 힘들여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거,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뭐이 됐는데 하나님과 피조물이 결합됐으니 결합 하나님과의 결합된 것이 하나 있어. 영원히 있는데 이것을 파고 들어가서 보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순전히 됐어. 여게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불변 하나님의 영원성을 나타내고, 여게서 둘인데 하나인 하나님의 사랑 속 하나님의 구속 속 이것은 하나님과 일치됨으로 어떻게 됐다는 이것이 보여지는 그 피조물이 하나님과 하나 되니까 어떻게 됐다는 것,첫째로 예수님께서 피조물인 인성이 하나님과 하나됨으로서 그 인성이 만물 위에 뛰어나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아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있는 그 자체를 그 행위를 그 공로 설정을 그 공로가 이루어진 거 그 모양 하나님에게 피조물이 순종함으로 어떻게 되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이거와 두 줄기가 영원 무궁세계에 나열되어서 영원히 계속할 터인데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데 이 하나에서 두 가지가 되어 있으니 두 가지 뭐이냐?하나는 이대로 입고 입는 자 이것을 망령되이 구속받은 자가 또 다시 되돌아 가 가지고 이렇게 되돌아 가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값에 합당한 자로 사는 충성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믿음으로 살지 아니함으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아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큰 구속을 받아 이 구속을 배반한 종류의 것들이 또 하나님에게 합당하게 산 것들이 이렇게 뚤뚤 뭉쳐서 있는 것이 이것이 무궁세계의 하늘나라입니다. 거는 형벌이 없어. 형벌은 없지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한 부끄러움은 있어. 이래서 그 부끄러움을 가르쳐 불 가운데에 구원 얻은 거같은 그런 뜨거운 부끄럼, 부끄러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두 가지. , 이 세 가지 이것을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자세히 자세히 명상해서 깨닫고 또 자기가 하나 믿음을 지킴으로 깨달아지는 것은 믿음을 지키지 아니한 그 자는 암만 들어도 모릅니다. 믿음을 지킴으로 깨달을 거, 믿음을 지키야 깨닫지 믿음을 지키지 않고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제일 복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자기가 자기 복음으로 받지 않고 남의 복음으로 받아서 이 복음을 이것을 상품처럼 이 복음을 가지고 이 세상 생활에 비용으로 세상 생활의 이 실력으로 이렇게 삼는 그 사람이 제일 불행한 사람입니다.

내가 미국에서 온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록이 거게 가치는 목사 가치가 제일 떨어져 있답니다. 그러기에 처음에는 무조건 신임했지만 인자 목사라면 아야 모든 사람들이 불신자보다도 목사 이름만 대면 다 부인한대요. 그것이 미국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간 사람들 때문이가 아니고, 또 자기 나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곳에 좀 모든 것들이 세상이 뭐라고 하고 있는가 하는 그것을 한번 좀 시찰하고 올라고 하는 그런 사람 때문에 아니고, 그런 사람들은 지금도 거게서 존귀합니다. 거기서도 구별되어 존귀하요.

다만 이 말씀을 가지고 팔아 먹는 데는 어느 장소 가서 팔아 먹어야 되느냐? 한국에서는 팔아먹으려고 하면 공산주의가 위험하다. 공산주의에게 위험성을 당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해할 수 있는 그런 기독교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해할 수 있는 그것은 땅에 속한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것은 공산주의가 따라오지를 못해. 가까이 오지를 못합니다. 그는 절대 해를 못합니다. 죽었으면 그 죽어도 그를 그는 유익되게 해서 영원히 그를 위한 것이 됐지 이 피조물들에게 해를 받을 수 있는 것이 기독교는 아닙니다. 다만 자기에게는 자유성으로 제한된 자유나 자유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 상품으로 팔아 먹는데 상품으로 팔아먹는데 팔면 수입은 있지마는 내 목숨이 위험하면 든든한 자리가 가지고 팔아 먹어야 될 것 아닌가 해서 든든한 자리에 가 가지고 어쩌든지 왔다 갔다 하면서 영주권 받으면 급한 사람은 영주권 받아 가지고 이제 선교사로 나오고 좀 엉큼하게 좀 지혜로운 자는 시민권을 받아 가지고 나오고 이래 가지고 살기는 한국 사람이 미국 사람돼 가지고 그 복음 팔기는 한국에 가 팔아야 되지 거기서는 가서 팔아 봤자 세월이 안 나니까 팔러 오고 이래도 이것도 모르고 '야 이 사람은 미국갔다 왔기 때문에 미국에 영주권 있고 시민권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을 노회장시키야 된다. 이 사람 총회장 세워야 된다. 이 사람을 신학교 교장 세워야 된다. 교수 세워야 된다.' 좋은 생각인지 나쁜 생각인지 기막힌 생각인지 창자조차 없습니다. 창자도 없어. 창자 조차도.

이런데 그 동참하는 죄를 짓고 있소. 동참하는 여게서 그런 사람들 다 밀어내야 됩니다. '거게 영주권 가지고 온 사람 필요가 없다. 너 그거 버리고 여기 와 해라.' 태영목사 영주권 가지고 와서러 올 때 내가 버리고 오이라 했는데 예 하고서 버리고 오지 안했고, 여기 와서 버리고 오지 안했다는 말을 나한테 하지 안했는데 그 뒤에 어째 내 귀에 거제동 교회에 집회 때에 고것이 나온 것이 내 귀에 들어와서 내가 그 뒤에 전화했어.

'너 영주권 그거 가지고 있으면 미국으로 가야되지 한국에서는 일할 자격 없어. 어찌됐지.' '내가 쓰지는 안하는데 완전히 정리를 하는 그런 수속을 안했습니다.' '그것은 그 속에 어떤 때는 쓰기 위해서 했지. 버릴 거야 안 버릴 거야. 안 버리면 가야 돼. 여기서는 소용 없어. 우리 진영에는 그런 사람은 일할 수 없어. 믿음 없는 사람 이 공산주의에게 피해 받고 미국으로만 피난되고 한국에는 피난 안되는 그런 복음은 그런 복음의 소유자는 우리에게는 필요가 없어.' ', 제가 수속을 마치는데 수속을 빨리 마치겠습니다.' 그 뒤에 전화가 왔어. 완전히 수속을 해서 남은 거까지 완전히 나는 그거 예사로 여겼는데 완전히 수속을 해서 버렸습니다. 그렇게 말해서 내가 버렸지? 버렸습니다.

뭣 때문에 예수를 믿고 우리가 어떻게 판단하고 예수를 믿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예수를 믿는지 그 껍데기 예수 믿으면 안 됩니다. 뭐 이단이라 한다고 이걸 가서 뭐 가 가지고 어떻게 공박을 하고 어떻게 할까. 할 필요가 뭐 있어. 예수님도 이단으로 바리새 교인 서기관 제사장들에게 몰려 죽었는데. 안 죽은 것도 다행인데안 죽은 것은 힘이 약하기 때문에 파동이 적기 때문에 그렇지 물이 아래로 내려 가는데 위로 끌어 올리는 뭉텡이가 요만하면 물결이 고만치 날기고 이만하면 물결이 그만치 나지. 예수님은 물결이 컸기 때문에 그 전체에게 이단으로 정죄해 죽었고, 사도들도 고보담 좀 적어도 이제 순교 했고, 조금 물결이 있는 것은 그 거슬리는 그와 반대되는 거슬리는 뭉팅이가 작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덜 떠들지 이단이라고 말 듣는 것도 영광이요 존귀요 영광이요 존귀요. 그들에게 저를 죽이지 안하면 안된다고 할 수 있는 죽임을 받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그만큼 세상에게 삐뚤어진 것에게 거슬려지는 바른 것이 됐으면 그것이 복있는 것입니다.

뭣 때문에 거게 대해서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증거해 줄 수 있지마는 그 이상이 뭐 있는가. 하나님이 옳다 인정하시는데 인간들이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그것을 막아낼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 자격 없어.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 아니십니다.

뭣 때문에 이렇기 때문에 교회가 침체되고 부흥이 안 돼. 그 때문에 마귀 큰 마귀들이 들어 왔었습니다. 침체되고 부흥이 안 된다 이것 때문에. 우리 교회가 왜 우리 교회가 부흥이 안 돼. 우리 진영이 왜 부흥 안 돼. 다른 진영보다 부흥이 더 돼요. 안 되는 것은 개 교역자 그분이 안 되서 안 되는 것이지 안 되는 것 아니라. 이 복음이 그들이 아단이라고 한다고 안 되는 것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지 안하면 올 자가 없는데 아버지가 보내는 자를 그들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요.

우리가 나가는데 이단자라 하면 날 이단자로 제일 백목사를 제일 이단자로 모는 두목인데 이단자라고 모는 것이 제일 처음에 고신이 제일 그석 했고 그 다음에 거기 피동돼서 모두 다 이래 따라 이러는데 그 이단자로 모는 것이 부산이 제일 근거지지마는 부산서 이렇게 서부 교회를 이렇게 만들어서 주일학교도 세계에서 지금 이것이 당신이 보내니까 못 오게 하는 증거 아닌가요.

왜 그런데 충격을 받습니까? 어리석습니다. 이것은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억울함에 그 사람 위해서 변명하기만 했지 자기 위해서 변명할 필요가 없고 자기의 의를 인간이 모른다고 애터질 게 아니라 너무 큰 보응이 있는데, 죄에 대해서나 관심하고 주 구속 주신 이 구속을 제가 팔아먹고 빼앗고 이 구속을 배반할 것이나 구속에 팔린 값에 종으로 살지 못하는 이것이나 염려할 일이지 무엇을 딴것을 남을 위해서 하지 안하면 남을 위해서 말하자면 말할 말 한 마디도 없습니다. 남을 위하는 말이 아니면 한 마디도 할 필요 없어.

변명이라는 것도 그 사람을 살리고 그 사람 때문에 하는 그렇지 안하면 할 필요가 없어. 남을 위해서 말하지 말할 것 하나도 말하지 안하면 하나도 할 것이 없고 그러면 자기 고칠 것이나 죄나 그거나 지금 찾아서 그 시급한데 할 일이고, 그것을 찾아서 과거에 이렇게 한 경험이 있으니까 이제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이 의를 살려 놓은 이것을 다시 팔아 먹을까 하는 그것이나 참고해서 할 일이지 딴거 할 일이 뭐있습니까.

우리는 마음을 넓혀야 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리면 하나님의 완전성을 우리를 목적하신 것을 완전성 우리 구속한 것은 완전성이요 우리에게 선포해 놓은 것은 완전성입니다. 완전의 것입니다. '네가 모든 걸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 조그만한 참새 그거 한 마리도 하나님 허락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너희들은 많은 이 새보다 귀하다. 머리털 하나 희고 검은 것도 아무도 주권을 내가 마음대로 한다'이분을 믿으면 이분을 믿으면 믿느냐 안 믿느냐 그것을 현실에서 보이줍니다. 현실에서 내가 참으로 전능자를 믿느냐, 전지자를 믿느냐, 너와 같이 한 자를 믿느냐, 하나님의 절대성을 믿느냐, 하나님의 예정을 믿느냐,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믿느냐, 이 창조한 것이 당신이 목적이 있어서 모든 존재의 목적 이 존재의 목적을 믿느냐, 창조의 목적을 믿느냐, 이 창조가 너 때문에 있는 거 너의 구속 때문에 있는 걸 믿느냐, 하나님의 개별 섭리를 믿느냐,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의 역사를 믿느냐?우리는 현실 현실에서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은 다 결정지워 지나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내갔지마는 수많은 세월에 하나님 부인한 것이 수많이 있는 사람도 있고 인정한 수많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기에 입술로 암만 믿는다 소용 없어. 그 믿고 안 믿는 것을 시험하는 그러기 때문에 시험이라 말했어. '시험을 만난 것은 하나님이 너희들을 악으로 시험한 것이 아니고 네 욕심에 끌려서 미혹함이라' 그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대한 완전 관계가 예수님의 대속으로 되어 있는데 완전 관계 이것을 우리에게 받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현실을 주는 것인데 거게 성신의 소욕이 있으면 완전한 관계가 되어 있는 이것을 자기가 주관적으로 환인하고 이 관계를 가지고 누리는 자로 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인데 그 시험이 두렵습니다.

누가 두렵습니까? 성령의 소욕이 두렵습니까? 그 속에 있는 성령의 소욕이 두렵습니까, 무슨 욕심이 두렵습니까? 두려워하는 그 욕심의 이름이 뭐이뇨? 그 이름이 뭐입니까? 자 여기 좀 교역자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그 다음에 이름이 뭐이지요? 욕심의 이름이 그게 육체의 소욕입니다. 그게 육체의 소욕이요. 그게 사욕이요. 시험이 시험되는 것은 시험이 기쁘고 즐겁고 ', 이제는 내 것 된 것 내가 한번 누리겠다 이제는 내가 확실히 내 심신이 가졌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기쁘고 즐거운 그 현실인데 이것이 두려워지고 너희에게 시험이 되어지고 너희에게는 어려운 난제가 되어지는 것은 네 속에 욕심으로 인해서 네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옛사람으로 인해서 고통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무한함이 영원함이 완전함이 이 현실 현실을 통해서 지나가고 있습니다. 어리석지 맙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해결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하지 안해야 됩니다. 일생 동안 자기의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맙시다. 그게 이루어졌다고 뻔뻔스럽게 어쩌든지 이제 연극하는 연습이 어찌 되던간에 달통해서 연극이 숙달이 되서 이제는 꿈적도 없이 연극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에는 권찰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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