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하기를 소망할 것

 

1987. 9. 21. 새벽 (월)

 

본문:시편 1편 1절∼6절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3절에 “저는” 하는 것은 1절로부터 2절에 기록된 대로 이대로 사는 사람은 하는 말입니다. “저는” 1절로부터 2절에 기록한 그대로 사는 사람은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이라는 것은 비유로 말하는 것이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뭐 가물든지 장마가 지든지 상관없이 열매 맺을 때에 열매 맺고, 잎이 필 때에 잎이 펴고, 자랄 때에 자라고, 잎 펼 때에 잎이 안 펴도 사고, 또 열매 맺을 때 열매가 안 맺어도 사고, 또 자랄 때에 자라지 안해도 사고, 열매가 익을 때에 익지 안하고 기한 전에 떨어져도 사고 이런데 그런 사고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참 우리가 세상 세상 빛이 되는 것은 이것은 무슨 사고가 우리에게 안 나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형통하고 복있다고 따라오지 우리 모든 이 생활에 사고가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그 사고 난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그 사람들의 사고 나는 것 보고 멀리 피해서 달아나지 사고 난 사람의 뒤를 따라가기를 싫어합니다.

사고가 안 나고 모든 일이 형통하기를 사람들이 바라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생활이 항상 형통하고 모든 것이 다 정상적으로 잘 돼 나갈 때에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복되다 할 것이고 또 부러워할 것이고, 저런 사람들은 저런 거 보고 또 나는 저와 같지 않는 것을 볼 때에 ‘그 사람과 나와 다른 게 뭐꼬? 그 사람은 교회 다니면서 예수 믿고 나는 교회 안 다니면서 예수 안 믿고 하니까 나는 이렇고 그들은 그런가보다.’ 이래 가지고 많은 사람이 저절로 전도가 돼서 따라올 수 있는데 우리의 이 모든 당한 일이 형통치 아니하고 모든 일이 다 잘못돼서, 그것이 자랄 때는 자라고, 성공할 때 성공하고, 또 결실할 때에 결실해서 다른 사람 보기에 ‘이거 참 복되다’ 이렇게, `덕되다' 이렇게 되어져야만 되겠는데 우리가 그렇지 못한 이것이 다 천국 문을 가로막는 일이 됩니다.

‘저 사람은 왜 예수를 저래 잘 믿는데 저런가? 예수 믿는 사람 보니까 별수 없으니 예수 믿을 마음 없다. 또 예수 믿는 사람들 보니까 모든 일이 다 형통치 못하고 오히려 화가 돼지니까 나는 예수 안 믿겠다.’ 자꾸 이렇게 돼서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가루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형통치 아니하고 모든 일이 다른 사람 보기에 ‘저 사람들은 저렇게 다 불행스러워지고 그 가정이 망해진다’ 이렇게 보여지는 일이 몇 종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잘못 살아서 그래 되는 것이 그 첫 종류인데 그 종류가 전부요 그게 제일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살아서 그렇게 돼 가지고 있는 그것이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고, 또 우리가 뜻대로 살라고 이렇게 해도 안 되는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요구가 구비해야 되는데 뭣인가 부족한 점이 있으니까 그 부족한 점 그것을 보충해서 채우기를 하나님이 원하셔서 그렇게 채우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런 형통을 주지 안하고 여러가지로 어려움을 주는 일 있습니다. 그거는 아주 극히 소수를 차지하고 있고, 또 우리가 이 세상적으로 형통치 아니하고 아주 어려운 일만 자꾸 닥쳐오는 그런 일이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중에도 다 그게 죄를 지어서 나빠서 그런 것만이 아니고 오히려 예수를 잘 믿어서 하나님께서 다른 면으로 그 사람을 쓰시기 위해서 ‘이 사람은 보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이렇게 또 어려움을 당해도 거게 대해서 낙망이나 의심이나 불만이나 불평하지 아니하고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그렇게 신앙 생활을 잘 하지 않느냐?’ 그런 면으로 하나님이 또 세상에 빛을 보이기 위해서 그런 모든 불통과 또 모든 실패 모든 어려움 그런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낙망할 수 있고 얼마든지 불평 원망 의심할 수 있는 데도 의심치 안하고 항상 믿고, 항상 소망하고, 항상 만족하고 감사하고 그저 거게서도 또 자기의 잘못이 있는가 찾고, 잘못이 없으면 그저 ‘주님은 나 위해서 그렇게 큰 고난으로 대속했는데 내가 뭐 이런 생활도 너무 과분하지 뭐 내가 형통하고 평안하기를 어찌 원할 수 있겠느냐? 그저 이것도 만족하고 좋다 감사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그런 또 신앙의 빛을 보이기 위해서 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뭐 그거는 참 아주 극히 희귀한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말한 일호도 있고 이호도 있고 삼호도 있는데 전부 일호라고 계산하면은 틀린 것은, 삼호는 일호보다도, 삼호는 그거는 참 아주 좋은 것인데, 그러면 형통한 것보다도 그 사람이 더 좋습니다. 형통한 것보다도 그 사람이 더 좋은데, 그러면 제일 일등은 뭐이 일등이냐 하면은 욥과 같은 그런 역경 그런 일을 닥쳐도 불만 불평하지 안하고 감사하고, 항상 믿고, 항상 소망하고, 항상 감사하고, 항상 만족하고, 항상 겸손히 주님 앞에서 사는 그게 특등이요, 그게 일등이고 그게 특등입니다.

그게 특등이고, 그 다음에 이등은 어떤 게 이등인고 하니 무릇 그 행사가 다 형통해서 다른 사람이 보고서 ‘참 복되다. 예수 믿는 사람은 저렇다.’ 그 모두 다 형통해서 자녀들도 다 훌륭하게 자랐고 또 출세도 했고 성공도 했고 한 또 그런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은 이등이지 일등은 못 됩니다.

아따 내가 주기철 목사님 기념식에 간증하는 그 장로 성이 뭐이더라? 유? 유기선 장로님인데 그 장로님은 아들이 팔 형제인가 그래요. 한 탯줄에 아들이 팔 형제라. 팔 형제인데 전부 장로고 전부 총장 또 무슨 교수 의사 전부 다 그래.

그래서 참 모든 사람들이 뭐 그렇게만 되면은 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좔좔 들어올 만치 참 세상에 빛이 되겠어. 그런 집이 있어요. 그런 것이 일등이 아니고 그것이 이등쯤 됩니다.

일등은 어떤 게 일등이냐? 욥이 시험 받을 때에 된 일과 같은 그런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항상 믿고, 항상 주님을 소망하고, 항상 자기를 맡겨놓고, 항상 순종하고, 항상 겸손하고, 항상 감사하고, 항상 만족하고, ‘내게는 이것도 오히려 과분하다’ 하면서 사는 그것이 참 제일 존귀한 일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나사로의 비유를 잘 배우는데 그거는 나사로가 하늘나라 가 가지고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하늘나라 간 사람 가운데에 들기를 나사로를 들었습니다. 이러니까 실은 우리가 생각해도 그런 신앙이 참 부럽고 제일 고귀한 신앙이요, 견고한 신앙이요, 겸손한 신앙이요, 그는 참 장성한 신앙으로 그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저 사람은 잘못 믿어서 지금 하나님 앞에 징계 받아서 저렇다’ 이렇게 하면 그거는 아주 오산이라. 아주 오판이라. 그러니까 그런 것도 있고, 또 그런 것도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죄를 지어 가지고서 모든 것이 다 실패되고 곤란하고 천해지고 하는 그것을 저 제일 상등이 되는 일호의 축복으로 만일 오산하는 날이면 그것도 큰일이라. 제일 잘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제일 기쁘시게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을 잘못 믿어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그저 저주와 징계를 받아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도 아주 잘못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큰 손해를, 자기에게 큰 손해본다 말이오. 그렇게 깨닫는 사람은 큰 손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패하는 그 순서를 생각하면은 자기가 말씀대로 잘못 살아 가지고서 모든 사람들 보는 이 세상에 있는 이 자연은총, 자연은총이라 하면은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이 이 세상에 있다가 없어질 그런 은혜와 축복을 가리켜서 자연축복이라 자연은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또 특별은총이라 특별축복이라 하는 것은 죽어도 영원히 가도 없어지지 안할 그런 은혜와 축복을 가리켜서 특별은혜와 특별축복이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는 것이고 자연축복이라 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도 받고 있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자연축복이 하나도 없고, 불교 믿는 사람도 자연 축복이 있어. 그러면 우상 섬기니까 망할 것인데 그 면으로만 하지 안하고 그 사람은 하나님의 도를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뭐 모르니까 이 종교 저 종교 그 어느 종교든지 믿을라고 애를 쓰고 또 그 사람의 모든 행사가 다 하나님 보시기에 축복할 수 있으면은 자연축복은 준다 그 말이오. 자연축복은 불신자들도 받습니다.

이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일반축복 세상축복 육체의 축복 이런 것이 성장되지 못하고 형통치 못하고 모든 것이 다 실패가 되어지고 이래 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리를 지키지 안하고 죄를 짓기 때문에 이와 같이 되어지는 그것이 일호라. 제일 많아. 그것이 뭐 대부분이라. 아마 그것이 십으로 만수를 한다고 하면은 그런 것이 그저 십의 한 팔이나 돼, 십의 팔이나 돼. 십의 팔은 다 잘못해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게 있다 그거요.

또, 그게 제일 망하는 것으로 일등, 또 망하는 것으로 이등은 어떤 게 이등이냐? 이등은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고칠라고도 애를 쓰고 또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고치도록 할라고 애를 쓸 때에 하나님이 그 사람이 고치기를 기다리고 회개하기를 기다려서, 뭐 다른 거는 다 됐는데 뭐 한두 가지가 안 됐으니까 ‘요걸 회개하라’ 그래 그걸 독촉으로 재촉하는 그것 때문에서 아직까지 성공을 못 하고 그렇게 고난 받고 천한 가운데 있는 그런 사람이 이호, 이등, 그런 사람의 수는 한 십분지 그저 한 일이, 열 중에 한둘 있거나 말거나 그렇게 좀 흔치 안합니다. 많지 않습니다.

그러고 망하는 가운데에서 삼호, 삼호는 아주 그 사람이 예수도 잘 믿고 그라는 데에 모든 것이 참 형편이 없이 곤고하고 가련한 그런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그저 백에 하나쯤 끼었거나 말았거나 그래요. 많지 안해요.

그 사람은 제일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인데 ‘네가 얼마나 나를 잘 믿느냐?’ 모든 사람에게 심판의 그 표본이 되기 위해서 ‘보라' `나는 이래서 그랬습니다.’ ‘이 사람은 너와 꼭 같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잘 이렇게 잘 믿지 않느냐? 이 사람은 너보다 더 사람이 볼 때에 불행스러운 가운데서도 만족하고 기뻐하고 잘 믿지 않느냐?’ 이래서 이다음에, 유다서에 보면은 많은 거룩한 자들이 같이 와서 심판하는데 ‘나는 이렇게 지금 시험이 많아서 예수 잘 못 믿었습니다’ 할 때는 그 사람보다 시험을 더 큰 시험을 많이 받은 사람이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떡 하나 내놓으면은 그만 그 사람의 입이 막혀. 그 사람 형편과 제 형편과 보니까 그 사람 형편은 제 형편보다 십 배나 더 어려운데도 만족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이랬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나오니까 그만 입을 딱 오그리고 그만 거석해 버려.

그래서 “노아가 세상을 정죄했다” 그 말은 ‘노아는 너거와 꼭 같은 입장에서 이래도 하나님에게 대한 준비를 잘해 가지고 이랬는데 왜 너거는 같은 입장에 준비하지 안했느냐?’ 이러니까 노아가 나오니까 그만 다 심판 다 됐어. 그만 그거 다 정죄 다 돼 가지고 다 멸망했다.

이와 같이 앞으로 하나님 심판에서 ‘나는 시어머니가 그 못되고 요래서 나는 예수 잘 못 믿었습니다.’ 저거 시어머니보다 십 배 못된 시어머니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효성을 하고 예수를 잘 믿은 이가 있다 말이오. 그 사람 나오니까 그만 입이 딱 오무라져 가지고 그만 저는 정죄 받아야 된다 그 말이오.

‘나는 남편이 뭐 개망나니라서 돈도 안 벌어오지 못되고 그래서 나는 이 신앙 생활 못 했습니다’ 하니까 그 사람보다 십 배나 뭐 몇십 배 오히려 더 악한 남편 있는 데도 그 남편 밑에서 신앙 생활 잘하고 이렇게 한 사람이 그 사람이 썩 나오니까 ‘이 사람 형편은 너보다 더 훨씬 나빴는데 그래도 예수 잘 믿었는데 너는 이 사람보다 더 좋은 형편에서 못 믿었느냐?’ 이래 정죄된다 그거요. 이걸 가리켜서 유다서에 “거룩한 자 수만으로 더불어 같이 와서 심판한다” 이랬어. 그거 하나 내 보이기 위해서 그래.

이 사람은 모든 면이 다 어렵고 곤란했지마는 아주 이 사람은 그래도 항상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만족하고 그저 주님을 더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네가 믿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데 이라느냐?’ 할 때에 `나는 이것도 족하다.

주님은 나 위해서 이렇게 어려움 당해 가지고, 내가 잘 살라 하다가서 죄지은, 인생이 잘 살라 하다가 제맘대로 해서 죄지은 것을 예수님이 대신 형벌 받으시고 이렇게 하셨는데 나는 이것도 족하다.’ 내가 조그마치라도 높아지려 잘되려 좋아지려 평안하려 영광스러우려 부요해지려 하는 이 생각이 내게 들어오면 ‘이런 죄가 어데 있나?ㅡ 주님 앞에ㅡ 인간이 부자되기 위해서 범죄한 그 멸망을 대속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그 부요를 내놓고 다 가난해짐으로 우리를 대속하셨는데 내가 어데 부자되기를, 내가 높아지기를, 내가 평안하기를 뭣을 원한다 말이냐? 그런 건 꿈에도 원할 수가 없다. 나는 이것도 족하다.’ 이거 참 아주 차원이 높은 참 성자의 신앙 생활이라.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특등을 저 꼼뱅이에다 끌어다 붙이고 자꾸 이래 가지고서 어짜든지 자기를, 요는 악이 제일 망하는 거라. 자기를 자꾸 변론하기 위해서, 이 죄지어서 망한 놈이 말이요, 죄지어서 불통하는 놈이 있다가서 ‘욥도 그랬는데, 아주 아무것이 예수 잘 믿어도 그렇는데.’ 특등에다 떡 대 가지고 ‘특등도 그 어렵지 않느냐? 나도 특등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인지 아나?’ 제가 자꾸 합리화시키고 저를 과장하고 과평해 가지고서 그렇게 판단하면 망하고 또 망하고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나무와 같이 망하고 망하고 자꾸 망하게 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우리가 잘못 그 판단하고 계산하면 안 돼요.

이런데 일반적으로 그만 ‘형통치 못한 것은 죄값이다’ 그만 요렇게 보는 게 제일 좋습니다. 만일 일등으로 그 사람이 그렇게 아주 어려운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나는 일등이기 때문에 내가 죄 안 짓고 이래도 나는 잘못 살아서 이렇게 불통하고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특별한 의인이기 때문에 이렇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실상이 그런 사람이라. 실상이 그런 사람이라도 그렇게 생각하면 저는 떨어집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

‘나는 뭐인가 당신 보실 때에 잘못됨이 있어서 이런 것이니까 그게 뭐인지?’ 그걸 찾을라고 애를 쓰는 사람 되는 것이 자기에게 뭐 손해갈 일은 없다 그거요.

낙망하면 손해가지만 낙망 안 하고 자꾸 잘못된 게 있는가 찾을라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손해갈 게 아무것도 없다 그거요.

그러니까 우리는 멸망의 일호로 ‘내가 뭐이 잘못 살아 이렇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것이 우리로서는 제일 반석같은 길이요 돌다리와 같은 그런 튼튼한 길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우리는 다 형통한 것이 이게 뭐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치 예수 잘 믿으면 형통하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고, 다 그게 다는 아니라 그 말이오. 다는 아니라. 그 특별히 잘 믿는 사람은 또 잘 믿는 그 사람에게 그런 어려운 일이 오는 일이 있습니다, 있기는.

그거는 하나님이 이 다음에 심판의 재료로 삼고 자랑하기 위해서, ‘이 사람은 이렇고 이렇고 이래도 항상 감사하고 만족하고 그래도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나 충성이 변동되지 안했다’ 그런 것을 이다음에 심판 재료로 하나님이 하는 일 있다 말이오. 심판하는 그 심판의 자리에 앉힐라고.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이제 우리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심판대에 앉아 있고 그 밑에서는 여러 거룩한 자들이 다 성도들이 앉아 있어. 성도들이 많이 앉아 있어.

앉아 있어서 그뭐 심판할 것 없이, 이 사람 심판할 때는, 제가 다 불만 불평을 하고 다 변명을 합니다. ‘나는 이래서 그렇다’ 할 때는 이 사람이 썩 나가면 그만 해결돼 버려. 이 사람이 썩 나가니까 대번 입이 딱 막아지고 ‘아이고, 나는 정죄받아야 마땅합니다’ 이라기 위해서 여러 수만 명을 하나님이 데리고 와 가지고 그래 합니다. 그거 만들라고 지금 하는 그런 사람도 있다 그 말이오.

노아 홍수 때는 노아 한 사람을 가지고 썩, 한 사람 나오니까 모든 사람 정죄 다 받아. 이다음에 노아 홍수 때에 멸망 받은 사람들은 ‘나는 이랬는데 홍수로 이래 멸망했으니까’ 불평이 있는데 노아가 척 나오니까 그 사람들 입이 막혀지고 그만 불평을 낼 수가 없고 ‘나는 지당합니다’ 할 수밖에 없게 돼.

이러니까 그런 일도 있지마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교만하기 쉽고,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는 모르겠다. 뭣인가 내게 부족함이 있어서 그렇지 딴게 아니다. 뭐 있을 것이다. 또 그러고 나는 벌써 주님의 대속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 형편도 나는 만족하고 나는 과분하다. 나는 얼마나 더 고통 가운데 있을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고문과 고형 가운데서도 만족하고 사는데 내가 뭐 조금 배고프고 뭐 이렇게 입을 거 없다 할지라도 그 고문과 고형에서 자꾸 전기 고문이니 무슨 고문이니 하는 그 고문 중에 있는 사람보다야 내가 얼마나 좋지 않느냐?’ 이렇게 하고 자꾸 만족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말이오.

그래 바울이 그걸 배웠어. “나는 지족하기를 배웠다” 지족하기를 배웠다 그 말은 어데서든지 만족할 수 있는 그 진리를 배웠다 그 말이오. 그는 어데서든지 만족했어.

그는 매를 맞고도 만족하고, 감옥에 갇히고도 만족하고, 어데서든지 만족할 수 있는 걸 배웠어. 왜? 주님의 대속을 자기가 깨닫고 대속 받은 자기로서는 주를 위해서 어떤 생활 해야 되느냐? 주님 따라가는 생활은 어떤 곤고한 생활이라도 그거 지옥 생활 아니고 천국 가는 생활이니까 만족하고 또 그것이 하늘나라에서 당신이 뒤에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이랬으니까 이제 하늘에 상급이 많으리라 했으니까 뭐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만족하고 사는 도리를 배웠다 하는 그 말입니다.

이래서 오늘 아침에는 우리 믿는 사람은 “무릇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형통한 게 우리인데 왜 형통하지 않는가? 이러니까 이 뭣 때문인가 이 사고를 좀 우리가 찾아 가지고서 무릇 하는 행사가 다 형통하기를 우리가 소망하고 자꾸 힘을 쓰자 그 말입니다. 우리가 다 형통해야 복음이 자꾸 영광스러워지고 전도가 될 터인데 형통치 안하니까 이 복음이 가리워진다 말이오. 복음이 가리워져.

이러니까 뭣이 들어서 이렇게 형통치 안한가 이 점을 찾아 가지고서 자꾸 고치자 그 말이오.

고치는 그거 다른 사람이 가르쳐 주기는 쉽습니다. 자기 낯에 있는 그 검정은 자기가 못 보지마는 다른 사람의 낯에 있는 검정은 잘 보이거든. 그 모양으로 나는 내 허물을 못 봐도 다른 사람은 잘 보고 있다 말이오. 잘 보고 있어서 다른 사람 모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게 뭣인가 잘못된 거 고칠 것이 있으면 말해 주이소. 그라면 제가 뭐 불평 안 하고 감사히 고치겠습니다.’ 해도 그거는 방편 쓰는 방편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단점 그것을 말해 가지고는 참 별로이 유익이 없어요. 그래 쌓아도 말만 하면 그게 ‘저 사람은 나를’ 그때는 단점을 말해 주면 감사하다 이렇게 생각했는데도 고거는 잠깐이고 마귀가 들어오거든. 마귀가 그놈을 가지고 ‘너 아무것이가 너한테 그 단점 말하지? 그 사람은 항상 너를 그래 보고 있다. 그 사람은 너 항상 너를 그래 보고 있다.’ ‘그래? 그 사람이 나를 그래 보고 있어?' 이래 가지고 마귀 놀음 많이 들어.

그러니까 그저 제게 고칠 수 있는 원인은 제가 찾아 가지고 고쳐야 되지 말해 줘 가지고서 뭐 되는 사람이 별로이 없습니다.

나는 말해 줘 가지고서 실패 많이 봤어. 제일 말해 가지고서 실패 보는 사람은 가까운 사람이라. 제일 가까운 사람이 자기 부부간인데 부부간에 그거 말하면 제일 실패 많이 보고, 부자간이고 부녀간 모자간인데 자녀에게 그거 말해 가지고 실패 많이 보고 이러니까 그걸 말해 가지고 실패 많이 본 것이 많아요. 또 교인들에게 말해서 그거 되고.

그래 가지고 참 그것을 말해서 달게 받는 사람이면 얼마나 복있는 사람이지마는 그 복있는 사람이 달게 받아도 나중에, 사람이라는 것이 말이오 어두워지지 안하는 사람 없습니다. 시험 안 들 때 없다 말이오. 시험 들 때 그때에 마귀란 놈이 그걸 가지고서 그만 엮어댄다 말이오. ‘그분이 나를, 그 사람이 나를 이래 보기 때문에’ 그래 마귀는 쭉 엮어댄다 말이오. ‘나를 이래 보기 때문에 아무 때 것도 그렇고 아무 때 것도 그렇고 그렇고’ 막 그 사람이 그만 자기에게 하는 건 전부 그게 불평으로 다 엮어대니까 그만 그 사람이 거게 팍 빠져서 죽고도 남는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어짜든지 자기가 형통치 못한 그 점은 자기가 찾아서 고치는 것이 제일 좋은 수입니다. 자기가 찾아 고치는 것은 그것은, 그것도 혹 뒤에 가서 부작용 생길 때가 있기는 있어요. 자기가 찾아 고친 것도 마귀가 들어와 놓으면 ‘이거 내가 잘못해 그렇다’ 이라고도 마귀가 들어와 놓으면 ‘아무것이도 그런데 뭐, 아무것이도 그런데 안 그런 사람이 누가 있나?’ 그래 가지고 그놈이 제가 자살을 또 하는 일 또 한다 그거요.

그런데 어쨌든지 우리가 형통치 아니한 것은 죄값이라. 형통치 안한 것은 죄값이라. 이러기 때문에 형통하기를 우리의 목표로 소망으로 삼고 자꾸 모든 것을 고쳐 나가면 형통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제가 이 설교를 하는 것은 제가 일어나기를 세시 오십오분엔가 오십분엔가 그때 일어났는데, 그래서 그때부터 이 생각하는 데에 시편 1편을 증거해 들려야겠다. 다 형통해야 되는데 형통치 못하는 것은 조건이 있다.

그거 1절과 2절에 보면은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면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것이 1절과 2절이라. 이걸 안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형통치 안하니까 이것부터 해 보자. 그것이 오늘 아침에 설교하는 목적입니다. 이것부터 해 보자.

그러고 고거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 말은 우리는 뭐 좀 형통을 받고 나면, 형통을 받고 나면은 하나님이 해 줬으면 하나님이 해 주신 것을 믿는 사람과 자기가 조심하고 이렇게 잘해서 됐다 이렇게 하는 사람과 그 결과가 달라요.

하나님이 해 줬고 자기 힘으로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해 줬다 하면은 그 형통치 못한 사람 보면은 멸시를 해요 천대를 해요? 어찌 됩니까? 멸시합니까 천대합니까, 형통치 못한 사람 보면은? 멸시 천대가 안 돼요.

저와 꼭 같은 자인데, 하나님이 해 주셔 됐다는 것을 그걸 믿는 사람은 나와 저 사람과 꼭 같은 사람인데 나는 형통하고 저 사람은 형통치 안하니까 그 사람 보기에 미안타 그 말이오. 나는 그 사람하고 꼭 같은 사람인데 같은 대우 받아야 될 터인데 그 사람보다 내가 몇 배나 뛰어난 대우 받으니까 부끄럽고 미안하다 말이지요.

저 사람과 나와 꼭 같은데 나만 대우를 높이 받으니까 미안해서 할 수 없어서 자기 형통을 갈라 주던지 그리 안 하면 그 사람에게 ‘이거 참 미안합니다.

이거,’ 갈라 줘서 안 할라 하면은 하나님 앞에 ‘저 사람은 안 주고 나만 주니까 내가 미안해서 안 됐습니다. 저 사람도 좀 형통을 주십시오.’ 그렇게 간구하지, 이 형통하고 난 다음에는 ‘저런 거 다 죄인이라 그런데 나는 의인이라 이와 같이 지금 됐다’ 하고서 자기가 자기 힘으로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뭐라 해요?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그 말은 제가 독립으로 제 힘으로 됐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 다음에 순서는 넘어지는 것이 순서라 그 말이오.

그런고로 어짜든지 우리는 형통으로 일관돼야 되겠고 형통에서 이제는 일호에, 어느 지경에 이를지라도 항상 주님을, 변지 않는 그 주님의 사랑을 믿고, 바라보고, 나를 맡겨놓고, 그만 의지하고, 그에게 복종하고, 언제든지 그분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고, 항상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이 사람이 참 우리가 되는 것이 이것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 우리는 이걸 목표하고서 달려야 되겠는데 우리는 어리기 때문에 어짜든지 형통하기를 바랍시다, 형통하기를.

그거 내가 한 이십 년 전에, 한 십오 년인가 이십 년 전에 제가 설교하기를, 나는 하나 하면 다른 데 광고가 되기는 열 했다고 광고가 돼요. 옳은 거 하나 하면 다른 사람이 광고는 그 십 배나 광고가 돼져요. 나는 기도도, 기도한 것도 ‘그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라’ 이래 가지고 뭐 십 배나 광고가 돼요. 이래 가지고 지금은 없지마는 그전에는 내가 고신에 이래 신학교 다니고 이래 고신에 속했을 때는 그 기도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나한테 다 와서 물어요, 기도에 대해서.

그래서 박윤선 목사님도 종종 저를 청해 가지고서 ‘조사님 좀 저를 위해서 기도 좀 해 주이소.’ ‘내가 목사님 위해서 기도할 수가 있습니까?' 자꾸 기도해 달라 이래 가지고서, 거석하면 그만 소리해 가지고 좀 기도해 달라 하고서 같이 기도하고 자꾸 이래 해요.

이거 그만, 기도는 실상 하기는 참 뭐 토끼 꼬랭이만치 기도는 했는데 이거 광고는 지금 큰 호랑이 꼬랭이만치 그렇게 광고가 돼져 버렸어.

이러니까 앞으로 남은 때는 내가 이제 한 것에, 열 가지 의를 했으면은 한 가지 의로 나타나고 또 죄는 하나 지었으면 막 십 배나 이 범죄한 거로 나타나야 내가 이 보응을 받고 이거 이 값을 치르지 지금 나는 전부 이거 과대평가로만 자꾸 받았기 때문에 내 앞의 길은 아무래도 내가 이것이 내 길이다, 이렇게 지금 순서라 이래 생각한다 하는 것을 내가 그때 설교를 많이 좀 여러 시간 했는데 그거 혹 지금 기억하는 사람 있습니까? 기억하는 사람 있어요? 기억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녜, 그렇게 했는데 아직도 그게 안 오는 셈이오. 아직도 그게 안 와요. 안 오고 지금 내가 한 것을 좋은 걸로 과장되고 또 어떤 건 혹 그게 조금 오는 거 있기는 있어. 뭐 좀 억울한 거 뭐 이상한 거 그런 것도 오기는 와요. 오는데 아직까지는 나는 오히려 행함에 대해서 주님이 내게 대한 선전도 더 지내치게 선전하시고 축복도 더 지내치게 축복 주는 것이고, 그러나 이제 여러가지로 좀 내게 어려움도 오기는 오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쨌든지 오늘 아침에는 “무릇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전부 우리가 형통 못 받으면 뭐인가 죄값인 줄 알고 자꾸 회개하면서 형통하기를 소망하고 자꾸 그래 달려 봅시다. 그라면 인제 형통이 올 겁니다.

교회 주변을 종전같이 좀 잘 청소하되 고요히 겸손히 청소하시기 바랍니다.

또 지금 곧 권찰회 모입니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외우도록 그렇게 힘쓰시고, 하루 삼십 분 기도 잃지 말고, 꼭 자기 미래의 환난을 위해서 삼십 분 기도하자는 말입니다. 요걸 꼭 기도하도록 하고, 또 재독에는 이백오십팔 명이고, 지하철 공사를 위해서 늘 기도합시다. 계속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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