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잔치

 

1986. 11. 30. 주일오후

 

본문:마태복음 22장 1절∼14절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리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 비유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한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일차적으로는 육체의 이스라엘에게 응해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다만 작은 범위로 이루어져서 마지막 이루어질 그 일에 하나의 그림자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들을 위해서 혼인 잔치를 베푼 이것을 가지고 이 천국에 대한 것을 가르쳤습니다. 혼인 잔치는 이 세상 혼인 잔치에 그 일을 하나의 비유로 인용해 가지고 우리 기독교의 내용이 되는 그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여게 임금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가리켰고, 또 아들은 독생하신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을 비유로 가리켰고, 또 혼인 잔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 곧 교회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결합을 갖추어 가지는 것을 가리켜서 혼인 잔치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일차적으로 종들을 보냈는데 종들이 거부하고 청하러 간 사람들까지 다 죽이고 그렇게 해한 것을  비유한 것은 하나님께서 육체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저희의 메시야로 보냈을 때에 저희가 예수님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예수님을 정죄해서 십자가 못박아 죽인 것을 비유로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노해서 그 사람들을 진멸하고 그 동리를 불사뤘다 이렇게 비유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육체의 이스라엘을 주후 칠십 년에 로마 병정을 시켜서 예루살렘을 진멸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무 견디기 어려워서 자기 자녀의 고기를 안 먹은 사람들이 없고 자기의 부모의 고기를 안 먹은 사람들이 없을 만치 그렇게 서로 죽이고 먹고 하는 이런 역사에 없는 비참한 일을 하나님이 베푸셨습니다.

그 전에 노아 홍수의 때도 똑 이거와 같은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도 하나님이 사람들로 더불어 이렇게 영원한 친밀을 가질려고 온갖 노력을 해서 여러가지 쉬운 방편을 주셨고, 또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와같이 늘 교훈하시고 또 예언하시고 섭리하시고 이래서 여러모로 이렇게 역사를 했지마는 그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이 신인 친교를, 하나님과  백성과의 신인 친교를 가져서 영원히 멸망치 않도록 하려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응하지 안하고 노아의 여덟 식구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과 사람이 친밀히 되는 그 유일한 방법이 되는 그 말씀 순종으로서 준비해 가지고 여덟 사람만  멸망을 벗어나고 나머지기는 다 멸망을 했습니다.

꼭 그와 같은 성질의 것인데 이차적으로 육체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베푸셨으나 육체의 이스라엘들이 또 듣지 안해서 예루살렘 멸망 곧 유대 나라의 멸망으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보응하셔 가지고 말세에 하나님의 그 심판될 것을 하나의 모형적으로 보였습니다.

이래서, 역사가 시작한 지 후에 하나님께서 꼭 같은 성질의 심판을 지역적으로 베푸신 그런 일은 많이 있지마는 전체적으로 베푸신 일은 두 번 지나갔습니다. 한 번은 노아 홍수 때요 한 번은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 멸망의 때입니다. 이와 같이 남은 예수님의 재림 때도 이와 같이 될 것을 예수님께서 몇 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또 다시 한번 봉독하고 생각을 하고자 하는 것은 노아 때도 그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한 거와 같이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신약 교회에 이렇게 주일을 주신 것이나 또 신약 교회 이 시대, 이천 년이 될란지 이천 년이 넘을란지는 모르지마는 이천 년 동안이라는 그 신약 교회 시대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이 비유와 같이 내나 혼인 잔치의 시기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아들 곧 구세주로 보내신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또 주권 개별 섭리를 가지시고 또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총 대리로 오신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 성도들과의 관계에 밀접한 안팎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기가 지금 신약 교회 시기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밀접한 이 결혼을 맺을 수 있는 이런 모든 준비를 갖추는 때입니다. 그러면 이 일이 끝나면 세상은 다 끝이 나고 맙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지고 준비해 가지고 신부를 맞이할 곧 하나님의 교회를 맞이할 준비를 갖췄는가? 갖춘 것은 첫째가 우리가 죄값으로 멸망하는 그 멸망에서 당신이 대신 우리 죄값으로 멸망을 받으셔서 우리 죄를 다 없이 하시고 멸하시고, 이 죄를 없이 하신 것은 당신이 주권의 능력을 가지시고 죄 없다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친히 죄값을 정당하게 받으셔서 우리 죄를 멸하시고, 또 우리를 사망시키는 사망을 대신 당신이 죽으셔서 사망을 멸하시고, 또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이 마귀로 더불어 도전해서 마귀에게 온갖 시험과 모욕과 저주를 받아서 고난을 당했으나 예수님께서 마귀의 그 모든 악의 행위 불의의 행위를 할 때에 예수님이 거기 하나도, 죽으시기까지 하셔서 굴복하지 안하고 응하지 안하셔서 마귀를 승리해서 우리를 해방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과 마귀를 멸하여 우리를 거게서 해방시킨 이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자유를 마련해 가지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자유를 가지고 우리에게 오셨는데 지금은 어느 때인고 하니 예수님이 주신 이 자유로 결혼하는 때입니다. 주님이 자유를 주시는 이 자유를 받아 가지고 내 자유를 삼고, 이 자유를 내 대신 만들어서 나에게 주신 이 주님에게 나는 내 자신을 드려서 주님의 것을 만들고, 또 예수님이 우리가 행해야 될 우리 대신 하나님의 전지자의 입법이신 지성 지공법을 우리가 다 행하지 안하면 완전 생명을 가질 수 없는데, 완전 생명인 완전자로 더불어 완전한 결합을  할 수 없는데 우리 대신 주님이 다 이 법을 순종 이행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대신 설정해 가지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의라고 로마인서 1장에 16절 이하에 말씀한 것은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옳다 참되다 인정받은 모든 하나님의 입법 완전 이행을 말합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설정해 가지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법을 하나도 행할 수 없는 우리들인데 대신 행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셔서 이 의로 우리와 하나되어 하나님이 설정하신 이 의를 우리가 받아서 내것 삼고 모든 전적 부패한 우리들은 주님에게 바쳐 주의 것이  되는 것으로서 이 결합을 가지고.

또 하나님과 원수되어 있는 이 원수의 관계를 우리 대신 주님이 화목 제물 노릇을 하실 때에 화목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할라고 악령이 고문과 고형을 해도 이 화목을 놓지 안하고 끝까지 화목을 가졌을 때에 사탄은 이 화목을 이루지 못하게 할라고 주님을 고문 고형하다가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화목과 하나님의 법을 이행하는 그것으로서 끝을 마쳐졌기 때문에 하나님과 완전 화친의 이 완전 결합, 완전 결합, 창조주와 피조물이 완전 결합은 완전 생명입니다.

영원히 끊쳐질 수 없는 완전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뿐 아니고, 또 이렇게 예수님이 형으로 죽으심으로 사죄 해방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 대신 화친의 행위와 율법 복종의 행위를 죽기까지 하셔서 이 행위를 인하여 순종으로 화친으로 끝을 마친 이 하나님의 의와 완전 결합의 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두 가지로 인해 죽으셨습니다. 하나는 형을 받아서 죽으셨고 하나는 순종하는 데에 화친하는 데에 순종과 화친을 하지 못하도록 사탄이 방해해서 순종 못하게 할라고 항복받을라고 이렇게 하다가 예수님을 죽이고 예수님은 순종 화목으로 끝낸 이 죽으심입니다. 한번 죽음은 하나님이 저주의 죽음을 죽여서 예수님이 죽으셨고 하나 죽음은 악령이 고문과 고형으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세 가지입니다. 세 가지를 우리에게 죽음으로 주셨고, 또 예수님이 이렇게 세 가지를 우리에게 주셨으니까 우리는 자유하는 자요, 또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의롭다 인정받은 자요, 또 하나님과 화친을 가진 자이지마는 이 세 가지를 가졌으나 이 세 가지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일은 못 합니다.

세 가지를 가져서 자유 가졌으나 자유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또 하나님의 공심판의 의를 우리가 받았으나 의로서 살 수 있는 그런 실력은 없고 하나님과 완전히 화친됐지마는 화친한 자로 살 것은 없습니다. 이래서,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세 가지를 누리고 사는 자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다시,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다시 신인양성일위로 살아났습니다.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은 하나님이 영원히 사람되심으로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끝났으면 예수님의 신성은 영원한 하나님의 위치에서 하나님 노릇하지 피조물 노릇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랬는데 삼 일 만에 다시 우리를 하나님을 향해서 이 세 가지 죽으심으로 베풀어 주신 이 대속의 공로를 영원히 누리면서 사는 자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부득이 당신이 다시 사람으로 살아나셔 가지고 우리를 대속하셔서 사람으로 살아나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완전 생활 이 영생을 해 가지고 그것을 또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는 주님이 대신 영생하신 그 공로가 우리 공로되어서 우리는 영생하는 자 됐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세 가지를 우리에게 해 주셨고 또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인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영생인 이 한 가지를 우리에게 우리 위해서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네 가지인데 네 가지를 분류하면 일곱 가지로도 할 수 있으나 네 가지로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영감과 진리로 하나님 향한 생활 이 두 가지를 가리켜서 영생이라고 말하고, 해방과 자유는 죄 마귀 사망에서 해방해서 죄에게 자유, 마귀에게 자유, 사망에게 자유 이것을 가리켜서 한 마디로 자유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신 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영원히 하나님과 우리와 하나되어서 영생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죽으심으로 세 가지 대속을 하셨고, 부활하심으로 한 가지 대속을 해서 예수님의 사활의 이 대속 이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장가들었습니다.

우리는 죄 사망 마귀의 종, 또 영원한 사망, 하나님의 공심판에 정죄 멸망, 하나님과 원수된 이것을 우리는 가지고 주님은 이것을 해결해 주시는 이 사활의 네 가지 대속을 가지고 우리로 더불어 결합해서 결합이 돼서 영생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베푸신 이 친밀의 관계를 맺는 기간을 가리켜서 신약 교회 시대라, 또 혼인 잔치라 이렇게 여게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더불어 이 친밀히 결합되는 이 결합을 그저 결합이라, 친밀이라, 또 화친이라, 신인 친교라 이런 말을 써도 됩니다. 써도 되는데 특별히 여게 결혼이라는 이 결혼으로 관계된 것은 그는 원형이요 우리는 모형인데 하나님과 우리와의 그 결합되는 이 결합이 이 신비하게 결합되는 이 결합을 말로 가지고서 표시를 할라 해도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신인 관계에 이 친밀의 비밀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형식계시를 당신이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으니 그 형식계시가 곧 남녀 결혼입니다.

사람과 사람끼리 결합되는 것도 사상 결혼도 있고, 사상 결혼도 있고,  또 그 사람의 목적 결혼도 있고, 또 그의  취미 결혼도 있고, 또 그의  무슨 목적 결혼 그런 것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 결합을 가지는 그런 것은, 그런 결합은 그 사람이 사상으로 결합하는 거, 또 목적이 같아서 결합이 되는 거, 취미가 같아서 결합이 되는 거, 자기의 입장과 처지가 같아서 서로 결합이 되는 거 이런 결합은 그 결혼 결합과 좀 다른 것은 이상한 감정이라는, 감정이라는 그 정서가 심히 풍부하게 주동이 돼 가지고서 역사하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남녀 이성 결합에는, 결합인 이 결혼에는 아주 다정 다감한 그런 일이 있어서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강한 시기도 있고, 또 강한 밀접의 그 밀접의 애정도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 아무리 서로 결합이라 이렇게 해도 내나 이 남녀 이성 결합이라는 그 결혼과 같이 그렇게 그 정서가 많이 역할해 가지고서 역사하는 그런 면은 다른 것은 그렇게 뜨겁지를 못합니다.

이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과 함께 이 결합한다는 이 결합에 대해서 성경을 나벼봐도 생사를 같이 합니다. 생사 같이 하는 것은 다른 결합도 생사를 같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꼭 남녀 이성 결혼 결합과 같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이 결합되는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과의 결합되는 그런 뭐 천군 천사와도 결합되는 그런 일이 있지마는 그렇게 다정 다감으로서 성도와의 관계같이 그렇게 하나님이 시기하는 거나 분하는 것이나 그런 것이 없습니다.

천사가 범죄했지마는 범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저 범죄했으니까 냉정스럽게 그렇게 그만 처리해서 결박해서 어두움에 던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성도와의 관계는 다른 결합보다, 결합도 심히 유별한 그런 친밀을 가졌고, 또 이 결합의 상처가 생길 때에는 하나님께서 굉장히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게 대해서 사랑하는 그 사랑의 열심이나 미워하시는 그 미움의 열심이나 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배반하고 이 세상하고 가까이 할 때에 그때 당신이 미워하시고 시기하시고 분노 분발하시는 것은 아무래도 이 말로 가지고는 그 형편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래서, 남녀 부부의 이성 관계에서 그 유별한 다정 다감의 친밀과 또 서로 나뉘어질 때에 심히 분발한 그 분발을 다른 것으로서 무엇을 표시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에 대해서 그 유별한 관계된 그것을 말로 가지고는 아무리 표시를 해야 표시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관계의 신비한 것을 이 인간의 남녀 육체의 이 부부 결혼으로서 그 계시해 보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 이 남녀 결혼은 하나의 하나님과 택자들의 그 관계를 나타내는 하나의 계시 도구입니다. 계시 도구요. 계시의 기관입니다. 이것이 원형이 아니고 계시의 기관입니다. 기관인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성경을 가지고 이렇게 살펴봐도 하나님이 성도에게 대해서 사랑하는 것도 그 측량 못 하고 이해 못 할 만치 그렇게 극심히 사랑했습니다. 극심히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할 때에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도 뭐 극심히 미워합니다.

그래서, 이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육체의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도 그 어떻게 해서 그렇게 사랑했는가 도무지 그걸 비밀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을 만치 어떻게 해서 그렇츰 사랑했을까, 또 미워하고 좀 실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하고 하나돼서 하나님만 의지하지 안하고, 하나님만 의지하지 안하고 세상 의지하고, 또 하나님만  바라보지 안하고 세상 바라보고, 하나님과 하나가 돼 가지고 이 세상을 관계하지 안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떼놓고 세상하고 이리 될 때에 거게는 보면 하나님이 그럴 때 보면 뭘로,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을 이렇게 미워하고 이렇게 지독스레 이라는가 아무리 그것을 성경에서 미워하는 것만 나타냈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미워하고 이렇게 사랑했는가 하는 것을 아무 걸로도 그 진상을 파악 못합니다.

다만 호세아서에도 하나님은 본 남편이요, 세상은 간부요, 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신부라, 또 이 신약 교회 와 가지고서 하나님의 백성은 신부요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은 신랑이시라.

이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시기를 했으며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서 우리 위해서 그 노고를 할 때에 당신이 피곤해 하시지도 안하시고  뭐 때문인지  모르겠고, 또 우리를 위해서는  온갖 것도 피곤치 안하고 수고롭지 않는 거 그런 거 다 부모가 지식을 사랑하는 그 애정에서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못견뎌 하는 것이나, 모든 것을 당신의 전부를 희생해 주신 것이나, 또 우리가 세상과 짝이 될 때는 당신이 마구 못 삽니다.

견디지 못할 만치 그 분발한 것이나 암만 해도 이것은 우리 인간의 참 정상적인, 결혼의 첫사랑이라 하는 거 모양으로 이렇게 정상적인 이 결혼 사랑 그것으로서나 거게 대해서 짐작을 할 수가 있지 다른 것으로는 짐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성도들이 차차 차차 깨달아지면 성도들이 깨달아져서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또 주님이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나 그 사랑하는 도수가, 사랑하는 도수가 암만 뭘로 가지고서, 성질적으로 종자적으로, 성질적으로 말이오.

성질적으로 아무리 사람이 사랑하는 게 많은데 어떤 그 사랑 같은 것이냐 해도 그런 종류와 다르고 꼭 결혼한 부부, 아내가 남편 사랑하고 남편이 아내 사랑하는, 아주 결혼의 그 애정으로나 표현이 되고 그것으로나 짐작을 하고 찾을 수가 있지 딴거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모두 의문 중에 있는 건 뭐이 의문 중에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왜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미워한다고 그렇게 막 미워했을까, 그렇게 미워했을까? 그 미워한 그걸 ‘참 이상하다, 하나님이 암만 그러면 그래 처리하실 일이지 그렇츰, 그렇츰 미울까? 그렇츰 지독스레 미울까? 그렇게 못 견디게 미울까? 또 그렇게 사랑스러울까? 못 견디게 사랑스러울까?’ 하나님이 어짠다고 사람되셔 가지고서 우리의 그 네 가지 당신이 대속하신 대속이라 하는 것을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짐작할 수 없는데, 꼭 남녀 이성의 그 사랑하는 그 사랑의 절정이라는, 사랑의 변치 않는  사랑의 절정으로, 정상적으로 사랑의 절정되는 그 토막으로서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고, 또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해서 못 견뎌 하는 그것을 알 수가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 대속도 알 수가 있고, 또 대속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암만 말로 표현해도 표현 못 합니다.

그걸 표현 못 하요.

어떤 성도는 주님을 증거한다고 지방 권력들이 잡아 가지고서 물소 가죽을 벗겨 가지고 생가죽에다가 그 속에다가 집어 넣고 공중에 달아 놓으니까 이거는 햇볕에 마르면 쪼입니다. 쪼이는데 그 물소 가죽은 두껍기 때문에 사람을 쪼우면 사람이 꽉 쪼여지는데 이렇게 쪼이니까 뭐 대번에도 아니고 살살 쪼여지니까 그저 기름 짜듯이 피가 나와서 이렇게 기름 짜듯이 하는 데도 그 밑에 가 들어보니까 그 쪼이는 가운데서 기뻐 못 견뎌서 못 견디고 감사하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주님에게 감사하고 주를 위해서 이렇게 고난당한다는 게 자기로서 어떻게 만족하고 기뻐하는지 이것은 무슨 그 부모와 자식이나, 또 임금과 신하에나, 또 선생과 제자 사이나, 어떤 친구 사이나 아무걸로서도 도무지 그 형용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러나 이 부부 결혼의 요 정상적인 결혼의 그 첫사랑이 절정으로 되어지는 그 형편은 그 사상과 성질과 거게서는 그것을 짐작해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은 이 주님은 하나님은 신랑이시요 우리는 신부라 하는 이것을 말하면 똑 육체의 부부의 무슨 결혼하는 것같이, 무슨 음란스러운 것 추접한 것같이 이렇게 생각하지마는 주님은 우리에게 장가 오기를 딴거 가지고 장가 오지 안했습니다. 다른 거 가지고 장가 오지 안했어. 당신이 이 네 가지 가지고 우리에게 장가 왔습니다. 네 가지 가지고서, 네 가지  가지고 우리에게 장가 왔고 우리는 이 네 가지에, 이 네 가지가 아니면 우리가 멸망되는 거, 이 네 가지가 아니면 우리가 멸망되는 거, 이 멸망과 이 더러운 것만 가지고 있습니다. 더러운 이것과 이 사랑을 네 가지를 가져 와 가지고서 우리를 대신해서 이 네 가지를 설정해 가지고 이 네 가지를  우리에게 줬습니다.

그러면, 죄에서 당신이 죽으심으로써 해방, 마귀에게서 해방, 사망에서 해방 세 가지 해방, 우리 대신 당신이 죽으심으로 해방해 가지고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를 줬고, 자유를 준 거는 마귀가 우리를 해하지 못하도록 죄가 해하지 못하도록, 사망이 우리를 해하지 못하도록 언제든지 이 세 가지에게 자유하는 이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당신이 대신 죽으셨고, 또 우리에게 하나님의 공심판에 완전 통과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대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데 이 순종하는 이것으로써 순종하구로 냅뒀으면 될 건데 마귀란 놈이 순종 못 하도록 방해하다가 죽었으면 죽었지 순종하는 것을, 우리 대신 순종하는 것을 놓지 안하고 있다가서 마지막에 죽었습니다.

죽으심으로써 완료가 됐고, 우리 대신 화친을 행하다가 그 화친하는 걸 하지 못하도록 고문 고형으로 이라니까 고문 고형을 당해서 죽으나 우리 대신 화친이라는 건 놓지 안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자기 사람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러면, 이 사랑하신 것은 무엇으로, 그 사랑하신 그 말할 수 없는 그 다정 다감의 그 인격과 인격이, 신격과 인격이 이래 결합해 가지고서 다정 다감한 그것을 아무 걸로도 표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육체의 결혼이라 하는 이걸 가지고서, 다른 결합은 얼마든지 다른 결합은 다른 걸로서도 비유할 수 있는데 다만 그 신비한 다정 다감 그 정이 하나가 돼 가지고 이래 결합되는 그것은 다른 것으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이 결혼은 원형이요 이 원형의 비밀을 알려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남녀 이성의 결혼이라 하는 이것을 하나 형식계시로 이 내용을 표시하기 위한 계시 이용으로 쓰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자꾸 생각하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사랑할 때에 그 사랑할 수 없는, 당신이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어떤 지경이 있을 때 그때는 어떻게 사랑했는가? 그분이 나를 사랑하실 때에 사랑할 수 없는 어데까지의 지경이 있었던가? 있었는데 그래도 그분은 그때 변해지지 안하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러면 사랑하시다가 이 사랑을 이것을 다 끊어서 중단시킬라고 방해할라고 이렇게 할 때에 당신은 마지막에 그것으로써 사랑으로 죽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행함으로 죽었고 대화친으로 죽으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이 사탄에게 거절당해서 방해하는 이 방해하도록 계속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방해하는 그 방해에 예수님께서 못 견뎌서 우리 대신 하나님 율법을 이행하는 것을 중단하지 안했고 화친을 중단하지 안했고 계속 이 일을 하다 보니까 마지막에 목숨이 끊어져서 이제 마귀가 더 시험하지 못하게 했지, 마귀 시험은 더 할 수 없도록 이 끝이 나 버렸고 우리 대신 하나님의 법을 지켜 이행하는 것은 계속 이행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은 “그 죽으나 속으로는 하나님을 향하여서 위해서 기도하고 계셨다” 했습니다. 그러면 죽으시면서 당신이 우리 위한 것이 죽어도 끊쳐지지 안하고  우리 대신 화친한 것이 죽어도 끊쳐지지 안했고 또 당신이 자원해서 우리 형을 대신해 가지고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세 가지 감옥에서, 죽음의 감옥, 죄의 감옥, 마귀의 감옥에서 우리를 거게서 해방시켰다.

그러면, 이 사랑도 이것도 다른 것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지금 뭐 이 결혼이라 하는 이것은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게 모두가 다 속화가 돼 버렸어. 지금 결혼은 어데 가 찾아볼 것이냐? 아주 저 아주 미개한, 미개한 야만들 지금도 야만 토인들 아주 저 사람 접촉하지 안하는 미개인들의 그 결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개인들의 그 결혼에서는 그 생명이 하나요. 그 생명이 하나인데 딴걸로서는 안 되고 이상스러운 그 정신이나 그 모든, 그 모든 정과 그 마음과 모든 것이 그렇게 하나가 돼 가지고 있는 그 뜨거운 거 거게서 좀 찾아 볼 수 있고, 지금도 이 개화한 결혼이 아니고 아주 미개한, 순진한, 미개한 아주 단순하고  순진한 그런 이들의 참 깨끗한  결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정신을, 성질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다시, 그만 해도 족할 건데 그것만 가지고도 우리에게 누리게 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을 향해서 영생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셔 가지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결혼하는 때라 결혼하는 지금 준비의 때라.

요한계시 21장에 “거룩한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그전에는 “신부가 지아비를 위해서 단장한 것 같더라” 남편이라 하니까 벌써 또 속화가 돼서 맛이 없습니다. 그 신부가 지아비를 위해서 예비한 것 같다. 지아비면 그게 좀 요새 표준어가 아니지만 더 좀 깊은 맛이 있는데 이 남편이라 하니까 그만 속화돼 속어가 돼서 그만 깊은 맛이 또 없어요.

이렇게 이 성도가 마치 그 신부가  그 결혼할  지아비 신랑될 사람을 위해서 결혼할라고 그때 자기가 모든 것을 갖추는 그 정신, 갖추는, 요새는 또 그것도 없어요. 요새는 그것도 더러워져서, 더러워져서 뭐 장난하면서 그저 하나의 한 장난삼아 이렇지마는 옛날은 안 그래.  옛날은 결혼이라 하면은 그 신부는 참 일단 정신 모든 걸 갖추고 이래  가지고 남편에게 결혼할라고 오만 걸 준비하고 다 갖추는 그 정신이나 모든 상태 이 더러워지지 않는 속화되지 않는 거게서는 좀 찾아 볼 수 있어요.

이래서, 주님이 죽으시고 살으신 것으로서 우리에게 이 네 가지 대속을 주신 거, 좁게 나누면은 일곱 가지 대속을 주신 거, 이 대속을 우리가 생각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어떻게 뭐 때문에 사랑했으며 사랑했는가?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무 남녀 이성 교제나 그런 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성과 인성이 교제한 것인데 그분은 하나님이요. 우리는 만든 거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인간의 육적인 무슨 이성 관계인 그런 사랑은 아니고 다만 타락하기 전 아담 하와가 부부이나 벗어도 벗은 것도 모르고 부끄러워하지 안하고 그랬는데 그때는 하나입니다. 그때는 둘이 아니고 하나인데 그후 타락하고 난 다음부터 이래 벌어지고 차차차 죄가 생겨지고 난 다음에 이거 뭐 형식으로 결혼하지 그 뒤에 결혼이라 하는 것은 아무 신성미나 아무 친근미나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혼인 잔치 때라 말한 것은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했으며 사랑하는 그 사랑의 성질이 어땠으며 그 사랑의 감정이 어땠으며  사랑함으로 그분이 내게 대해서 모든 신격과 인격, 신인양성일위가 나를 사랑함이 어떻게 사랑했는가 하는 그 진상을, 또 나를 위해서 사랑함으로써의, 나를 사랑함으로써의 당하는 그 고난당할 때에 그분이 고난을 절정으로 당할 때에 그 심리가  어땠던가, 정신이 어땠던가, 그분이 내게 대해서 이 대속한 것을 보면  어떻게 했던가 요것을, 또 그분이 사람되어 올 때는 어떻게 해서 왔던가, 온 그것을 , 그분이 얼마나 큰가, 그분이 얼마나 큰데 낮은 나를 어떻게 그렇게, 또 사랑하시는데 당신이, 뭐 물론 여게도 결혼하기 위해서 미국도 가고 하지마는 하늘에서 땅에까지 그렇게 나 위해서, 내가 뭐인데 나를 이렇게 사랑해서 낮아지셨을까,  나를 뭐인데 이렇게 사랑하셔서 당신이 이렇게 천해졌을까? 그걸 그래도 짜증내지 안하고  내 이 모든 더러운 것을 당신이 대신해서 속하기 때문에 기뻐 즐거워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여 어떻게 나로 하여금 이들의 이 멸망을 대신 나에게 입혀 주십니까?” 대신 입혀 준다고 대신 내 멸망을 대신 입으면은 원망 불평이 가득 찼고 불만 불평이 있고 시비를 할라 할 터인데 내 멸망을 대신 입혀 준 것에 대해서 죽으시면서 기뻐 즐거워서 “어떻게 나를 이렇게, 이렇게 나를 대우해 줍니까, 나를 이렇게 좋게 해 줍니까, 내 소원을 이루어 줍니까?” 그분의 소원이 뭣 때문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 그렇게 했던가? 이것을 자기가 자꾸 이렇게 생각하고, 그분이 사람되어 오신 것이나 십자가의 대형, 대행, 대화친을 한 것이나, 다 시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것이나, 예수님이 나를 향하신 그 향하심이 어떠했는가 그걸 내가 알아서 내가 하나님을 향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어데까지며 끝이 어데까지인가 그걸 알아서 나도 그 사랑을 따라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또 그분이 나를 이렇게 사랑함으로 모든 고난을 당할 때에 그분이 어데까지 고난을 당했으며 어데까지 고난당할 때 그분의 마음이 마음 자세가 어땠던가, 조그마치라도 좀 요동이 됐던가? 이런 것을 알기 위해서 후란시스 그런 사람도 ‘주님이 나를 사랑함으로 고난당한 그 고난을 나도 알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나서 나중에 그분이 그 기도하고 내려오는데 보니까 여기 손이 뚫어졌습니다. 손이 뚫어지고 발이 뚫어지고 주님의 고난을 사모하는 그 고난의, 대신 사랑하심으로써 그분이 대속하신 고난을 사모하고 사모하고 하는 그 사모의 정신에서 이 손이 뚫혔다 그말이오. 손이 뚫혔어. 우리는 암만 사모한다 해도 손이 저리기나 합니까? 저리지도 안하는데 이 뚫혔으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뭐이냐? 후란시스같은 그런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이 높은 데 갔고 주님을 사랑함도 높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높으심을 내가 깨닫고, 나의 낮음을 깨닫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함을 깨닫고 내가 주님을 사랑해야 될 터인데 내가 시랑하지 못함을 깨닫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이 사랑으로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이것이, 당신은 주시고 나는 받아서 당신의 대속하신 이 넷은 나의 것이 되고 이 대속을 받은 나는 주님의 것이 되는 이 일을 깨닫고 깨닫고 느끼고 느껴서 이것이 실상화되어져서, 실상화되어져서 하나님과 나와의 조금도 이색짐이 없이 영원히 하나되어 가지고 하나님 안에 내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이 말할 수 없는 이 신비한 고귀한 결합, 고귀한 결합, 이것은 속성적인 결합이요 애정적인 결합이요 사랑의 결합이요 이거 전부 책임지고 주고 봉사하는 이 결합이니 이것을 이 친교를 맺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무궁세계는, 무궁세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것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받는 것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어느 정도로 세상에 이루어졌는가 하는 그것이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그것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면 하늘 생활은 신인 결합의 생활이라. 신인 결합 그것이 하늘나라의 실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은 우리가  다른 것을 말하지 안하고 자꾸, 오늘도 제가 광안동교회 가 가지고 설교한 것은 그것을 설교했습니다. 우리가 성전 건축하는 데 성전 건축은 무엇하는 것이 성전 건축하는 것이냐? 세 가지 하는 것이 성전 건축이다.

주님이  나 위해서 사활로 대속해 주신 이것을 내가 깨닫고 믿음으로 내것 삼는 것 한 가지, 또 이 세 가지 대속을 나에게 주셨으니, 나 대신 해서 주셨으니 나는 이 세 가지 대속을 입은 나는 주님의 것 되는 것, 주님의 대속은 내것 되고 나는 주님의 것 되고, 주님의 것 된 이것이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서 영생하는 것, 당신 것이 내것 되고 내것이  당신 것 되고 이래 가지고 이 둘이 합하여서 하나님을 향하여서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영생하는 이 세 가지가 이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라. 이 세 가지를 우리가 알고  믿고 실상을 만들어서 사는 것 이것이 성전 건축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서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실 수 있지 이게 없으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못 옵니다. 우리에게 오면 우리가 소멸돼 버립니다. 우리가 소멸됩니다.

예수님의 이 사활의 대속이 내것 안 되면 우리는 소멸돼 버립니다. 이 본질이 당신은 우리의 이 세 가지 대속을 입지 안한 우리 본질은 하나님에게 당장 정죄받아 가지고 소멸당하는  이것입니다. 소멸당하는 이것인데 예수님의 대속을 입음으로써 소멸당하지 안하고 그분이 좋아서 못 견디는 거, 대속을 입지 안하면 그분이 미워서 직살시키는 거, 직살당하는 거, 대속을 입으면 그분이 좋아서 못 견뎌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하나되는 거 이 비밀을 증거하고 왔습니다.

왔는데, 우리가 이 일을 자꾸 이렇게, 신구약 성경은 다 이것입니다. 뭐 신구약 성경을 전부 다 하면 신구약 성경은 이 네 가지를 이루는 방법이요. 신구약 성경은 이 네 가지를 이루는 방법 이 네 가지를 알게 하는 것이요 이 네 가지가 실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신구약 성경입니다. 이 네 가지를 이루면 그만 신구약 성경 다 됐소.

그러면, 여게 비유로 혼인 잔치라 말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이 네 가지를 이루는 기간이 신약 교회 시대입니다. 모든 오찬을 준비했다 하는 것이 이것이 성경에 예수님의 피와 살이라 이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활로 우리에게 주신 이 사활의 공로를 우리가 먹고 우리는 배부르고 힘 얻고 자라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 자라가는 것이 예수님의 이 사활의 대속 네 가지, 일곱 가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세 가지 해방 주고 세 가지 해방해 가지고 자유 준 것, 예수님이 또 대행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주신 것, 또 예수님이 대화친으로써 완전 결합의 생명을 주신 것, 또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로 영감대로 사는 것 진리대로 사는 것 이 두 가지 영생하는 것 이것이 우리 양식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해 놨기 때문에 대속해 놓은 것을 내가 알고 믿어서 내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믿어서 내것 만드는 것, 내것 만드는 것만치 내가 주님의 것이 돼 가지고 살게 되는 것, 이 신비한 비밀을 우리가 작성해 나가는 이것이 신약 이 교회 자기 생활 시대라 그말입니다.

이래 가지고서 이것이 우리 때인데 그래 나중에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자는 결박해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면 쫓겨날 자가 어떤 자가 쫓겨날 자인가? 영과 육이 예수님의 이 사활의 대속을 입지 안한 것은 다 쫓겨납니다. 예복은 예수님의 사활의 이 대속을 말하는데 대속을 입지 안한 자는 전부 다 쫓겨납니다.

그러면 택자는 어찌되는가? 택자들도 쫓겨나겠습니다. 택자들도 이 사활을 대속을 입지 안한 것은 다 쫓겨납니다. 그러면 택자로서 사활의 대속을 입지 안한 것이 어떤 건가? 대속을 입지 안한 것은 중생된 영은 사활의 대속을 입고 있지마는 그 심신의 기능은 사활의 대속을 하나도 안 입은 자 있습니다. 사활의 대속을 입지 안한 이 예복을 입지 안한 자는 결박받아 가지고 다 유황불 구렁텅이에 다 던짐받습니다.

그러면 오늘에는 우리가 영은 사활의 대속을 입었지마는 우리 심신의 기능이 사활의 대속을 입지 안했기 때문에, 예복을 입지 안했기 때문에 오늘 지금 예복을 갖추어 입을 때요, 오늘은 예복을 갖추어 입을 때라. 또 주님과 나와의 영원히 완전 결합을 가질 수 있는 그 결합의 준비 모든 결합의 이 준비를 갖추는 게 오늘날이라. 그러면 오늘 결합한 것이 결합한 것만치 무궁세계에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혼인 잔치에는, “살찐 짐승을 잡고 또 좋은 모든 짐승들을 잡았다” 하는 그거는 짐승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죽으심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해서 죽으신 그것이 우리의 양식이 됐고 또 우리의 힘이 됐고 우리의 생명이 됐고 우리의 자유가 됐고 우리의 영생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오늘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여러분들이 자꾸, 그러기 때문에 이걸 뭐라고 말로는 해 가지고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저 내가 말하기를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그 죽으심을, “내 피와 살을 먹지 않고는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 피와 살은 주님의 이 대속하신 주님의 죽으심을 말하는 것이고, 또 주님이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하신 신인양성일위의 이 부활의 몸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자꾸 내가 생각해서 ‘예수님이 사활로 입곱 가지 대속해 주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활로 일곱 가지 대속을 설정한 것은 내 대신 했기 때문에 이것은 내것이다. 이것이 내것 됐으니, 내 대신 해서, 내 대신 하신 거는 내것 만들었으니까 나는 주님의 것이다.’ 이걸 자꾸 그저, 그저 뭐 모르지요. 외우라 말이오. 자꾸 외우고, 그러면 이제 주님의 대속은 내것 됐고, 주님이 죽고 사신 것은 내 대신했기 때문에 죽고 사심으로 설정된 공로 이것은 내것 됐고 이 공로를 가진 나는 주님의 것 됐고, 이 공로를 내놔도 안 돼요. 이 공로를 내놓으면 우리는 주님 앞에 가지도 못합니다. 이 공로를 내가 입어서 이 공로를 입은 자라야 이제 주님의 것이 됩니다. 이 공로를 입고 주님의 것된 자라야 이 모든 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영생을 이루지 그리 안 하면 안 됩니다.

이 공로를 입고 범죄하는 것은 은혜 아래 있고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 공로를 입고 범죄한 것은 바울이 말하기를 “죄를 지은 것은, 죄는 내가 지은 게 아니라 내 속에 죄가 지었다.” 이랬습니다. 알겠습니까? 이게 아주 깊은 말인데 이거 참 아주, “내가 원치 안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행한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죄가 행했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자기는 예수님의 대속을 입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자기는 대속 입은 자라, 죄와 마귀와 사망에 상관 없는 자라,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 이행자라, 하나님과 완전 화친한 자라, 자기는 영생을 가진 자라, 영생을 가진 나는 영생할라 하는데 내가 죄 지었습니다. 내가 죄 지었으면 내가 지은 게 아니라 죄 그놈이 나를 이용해 가지고 내가 이용을 당해서 실수해 미혹을 당해 가지고서 잠깐 이용을 당했으니까 이건 내가 아니다 하고서 일어서면 그러면 그 죄 지은 것이 자기에게는 오지 안하고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본의 아닌데 그놈이 잠깐 나를 거머쥐고, 내가 이래 여게다 연장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모르는데 내 손을 확 잡아 당겨 가지고서 사람을 쿡 찔러 버렸다 말이오. 쿡 찔렀지만 내가 찌른 거 아니라 말이요, 예를 들면 말이지.

그러니까 그걸 가리켜서 “원치 안하는 것을 행한 것은 내가 행한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죄가 행했다” 요것이 대속받은 자기는 뚜렷이 따로 구별해서 자기는 받은 자기이고, 대속 받은 자기가, 그러니까 자기는 죄짓지 않는 게 자기인데 이 마귀란 놈이 우리를 협잡해 가지고 유혹을 해 가지고 잠깐 범죄케 해 버렸습니다.

범죄케 했으면 그때 자기 범죄한 게 아니고 죄가 들어서 자기를 죄로 이용했다는 것을 깨닫고, 깨닫고 자기가 ‘나는 사죄를 받은 내인데, 칭의를 받은 내인데 이건 내 생활이 아니다.’ 내 생활이 아니다 하고서 이제 일어서면서 ‘주님, 내가, 나를 도적했습니다. 이게 죄가 들어서 나를 잠깐 나를 이렇게 원치 않는 데로 끌려가 가지고 이렇게 했습니다.’ 할 때에 그는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사함 받습니다. 고거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사함 받고, 그게 아니고 ‘내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하는 것과 이제 죄와 나와는 상관이 없는데 죄를 이걸 내가 지은 게 아니라 자기는 중심에 짓기도 싫어하고 원치도 안하는, 자기는 사죄 받은, 자기가 돼 가지고 있는데도 실수할 수 있다 그말이오.

마귀란 놈이 거머쥐고 퍼뜩퍼뜩 이래 가지고서 그랄 때 있다 말이오. 그럴 때에 자기가 범하면, 그 죄를 자기가 범한 것과  자기가 범하지 안하고 원치 안하는 데에 그 객관의 힘이 와 가지고서 원치 안하는데 끌려 가지고 범죄하는 것이 있습니다. 요거 구별하는 것이 이러면 장성한 신앙이라.

요거 구별해서 자기가 범하지 안하고 원치 안하는데 그 객관의 세력이 와 가지고서 나를 거머쥐고 탁 이래 실수하게 한 그것을 자기가 하는 것은 그것은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내가 깨닫고 일어서면 즉시 그것은 다시 회복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범죄했으면 ‘내가 이거는 범죄했다’ 자기가  범죄했다고 하면은 그것은 벌써 대속의 공로를 자기가 벗어 버렸기 때문에 다시 사함 못 받고 대속의 공로를 입고라야 사함 받습니다. 대속의 공로 입는 것부터  먼저입니다.

대속의 공로를 입는 것부터 먼저 입고서 고해서 사함 받는 것이지 대속의 공로를 입지 아니하고 ‘나는 이런 죄인입니다’ 암만 해 봤자 소용 없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이 버르징이를 고쳐 버립시다. 내가 그라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주남선 목사님을 내가 오랫 동안 교제했는데 지내봤는데 그분은 기도할 때 한번도 ‘공로 없는 죄인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를 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죄인이라는 말 한번도 들어 보지 못했어. 기도하면 그분은 ‘잠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했지 죄인이라는 그 말을 자기 입으로 하는 걸 내가 들어 보지를 못했어요. 내가 그걸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분이 참 높은 신앙에서 깨닫고 있었다 하는 것을 제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나는 죄인입니다.’ 하면은 예수님의 대속을 벌써 벗어 버렸습니다.

대속을 벗지 말고 대속을 입었으니 나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이 죄 짓는 거는 내 본능이 아니고 나 할 일이 아닙니다. 이래서, 자꾸 사람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이 설정해 놓은 대속이 자기 것인 것을 자기가 믿고 대속 받은 나는 주님의 것인 것을 이렇게 알 때에 죄가 멀어집니다. 그래 보십시오. 죄가 멀어집니다. 죄가 멀어져.

예를 들면 죄를 범하고 싶어 못 견디는, 못 견디는 그 죄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내것 나는 주님의 것 할 때에 그 견디지 못하는  물욕이든지 무슨 욕심이든지 이 죄악의 욕심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거 여러분들이 경험해 보라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어짜든지 ‘예수님의 대속은 내것 나는 주님의 것’ 이것을 자꾸 말합니다. 자꾸 말해서 익혀 가지고, 나중에 그라고 나서 조금 들어가면은 ‘예수님의 대속이 어떻게 어떻게 대속했는가?’ 또 연구해서 설명을 해 봅니다.

또 ‘예수님의 대속을 내가 입었으면 어떻게 입었는가?’ 또 해석으로 설명을 해 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나를 대속하실 때에 그분이 나를 사랑했으면 그 사랑의 도수가 어떠며 사랑의 성질이 어떤가?’ 또 연구를 해 봅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함으로써 그라면 사랑할라 할 때 어떤 애로가 있었는가? 그 애로가 있을 때 그분이 어떻게 했는가?’ 자꾸 이래서, 예수님이 사활로 나를 대속하신 그 실상을 내가 아는 것만치 자라게 되고, 또 대속을 내가 가졌으니까 나는 주님의 것이라 하는 것을 알고 믿는 것만치 능력 오고 이것이 자라 가지고서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모든 성경은 이 일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전에 오종덕 목사님이 설교를 할 때 말하기를 ‘아무리 설교를 해도 그 설교에 예수님의 대속이 없으면 이거는 가짜다’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그때 들을 때에는 그거  참 그저 하나의 지식으로만 들었는데 그후 차차 나이가 많아가면서 볼 때 오종덕 목사님 그분이 고신 계통에서는 성경으로서는 제일입니다. 그만 고신 계통에 성경으로 그뭐 박사들이 많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이분이 성경은 제일 깊이 알고 많이 알았습니다.

어짜든지 우리 전부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연구하고 사활의 대속은 내것 된 것 연구하고, 대속을 받은 나는, 대속을 받아 가진 나는 예수님의 것 된 것 연구하고, 그러면 대속을 받아 가진 예수님의 것 됐으니까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그거 연구하고, 이런 가운데서 죄는 멀어지고 마귀는 물러갑니다. 요 대속을 입고 입고만 있으면 죄와 마귀와 사망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해하지 못합니다. 침노하지 못해요.

이라면서, 그라면 그 일만 하면 우리는 뭐 먹고 살고? 그저 바느질하는 사람은 이거 바느질하면서, 바느질하며 자꾸, 바느질하며 그거 생각합니다. 바늘에 손 다 찔릴라고? 안 찔립니다. 해 보십시오. 안 찔리고 아무리 이 손으로  만드는 기계를 쓸 때에 기계에 손 끊어진 사람이 그거 하다가는 잠깐 먼눈만 돌려도 손 잘칵 끊어 버리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자기 것 삼았으며 이래 하는 데에는 더 맑아져서 뭐 그 손이 끊기는 게 아니라, 그전에는 아이 퍼뜩 이래.

퍼뜩 넣었다 퍼뜩 내야 되고 이라는데 대속의 공로를 자꾸 연습을 하면은 퍼뜩 넣었다가 내는 게 아니고 넣고 내는데 시간이 오랫 동안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민활해집니다. 사람의 정신도 민활해지고 모든 것이 다 민활해져 버립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경험해서, 예수님의 이 사활의 대속을 내가 입고 내가 주님의 것이 돼 가지고서 살라고 이랄 때에는 할 일이 없어. 아무 할 일이 없어.

할 일이 없으면 그라면 일을 적게 하느냐? 아니야, 할 일 없는데 과거에 열 시간에 하던 일을 단 한 두서너 시간이면 다 하고도 남음이 있어. 그 이상해요.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 있을 때에는 일이 밀리지 안하고 다 일을 춰 버렸고 신앙이 없을 때에는 분주하기는 분주한데 일은 하나도 못 하고 밀려 버립니다.

어짜든지 우리 교인들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내것이라. 사활의 대속을 가진 나는 예수님의 것이라. 그러면 인제 나는 예수님의 것으로 살 자라. 사활의 대속 입은 내가 주님의 것으로 살 자라.’ 이것을 자꾸 연구해서 익숙해지거들랑은 그다음에 또 한층 더 들어가서 ‘예수님이 사활의 대속은 어떤 성질이며 어떤 과정을 거쳤으며 어떤 방편을 썼으며 어떤 형편과 사정을 당했으며 그 도수는 얼마나 뜨거웠느냐?’ 그 도수를 자꾸 연구합니다. ‘그러면 내가 주님의 것 된 도수는 얼마나 지금 이 도수가 높아져 가지고 있느냐, 내가 또 주님의 것으로 사는 건 어데 있느냐?’ 자꾸 이거 연구하는 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유요 생명이요 능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은 혼인할 시기이기 때문에 요 혼인이라 하는 걸 여러분들이 그저 육적으로만 그래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주님이 내게 가지고 장가 오신 것이 일곱 가지라. 나는 주님에게 드린 것이 참 말할 수 없는 더러운 것이라.’ 이래 가지고서 내 더러운 거 당신이 다 차지했고 당신의 좋은 거는 내가 차지했어. 이것이 세상에서 뭐 아무걸로 말해도 이거 말로만 해 가지고 안 듣는다 그말이오.

이런데 이 결혼에서, 결혼에서, 주인이 여러 수십억 재벌을 가지고 있고 이 처녀는 얻어 먹는 거지 아무것도 없었지만 결혼만 딱 됐으면 그 수십억 가진 남편의 것이 제것이오. 또 이 결혼만 바로 돼 가지고 있다면은 그 여자의 온갖 재, 이게 재를 저질러서 뭐 빚투성이고 해도 빚투성이라도 그 남편이 다 갚습니다. 이 결혼만 바로 됐다고 하면은 아내의 모든 것이 다, 아내의 모든 나쁜 것이 다 남편의 것이 되고 남편의 좋은 것이 다 자기 것이 된다 이것을 성경 가지고 암만 가르쳐도 안 되고 이거는 부득이 형식계시인 부부의 이 형식계시 가지고서 찾아보고 알 수가 있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성경에 이 결혼이라 하는 이 신비하고 이 거룩하고 깨끗한 이 사실을 우리가 깊이 깨달아 느끼고 오늘에 예수님의 사활로 네 가지 대속, 일곱 가지 대속 이것이 나 위해서 했다 이걸 연구하고, 또 나는 주님의 것 된 것 연구하고, 주님의 것 된 이거 가지고서 주님의 것으로 사는 이거 연구하고, 이것이 내 피와 살을 먹는 사람이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것이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은 먹는 자에게는 다 영생이 있다, 그 속에 생명이 있다.”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자. 그래서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 했어.

이런데 우리가 이것을 잘못 해석하고, 이번에도 카톨릭 신문에서 내가 퍼뜩 보니까 화육설을 그 사람들도 지금도 주장하고 있어, 화육설을. 기독자의 참 능력 있는 그 신비한 생활은 예수님의 육체 속에서 찾아서 연구해야 된다, 육체에서 찾아서 연구해야 된다 말했는데 그것이 화육설을 말한 것으로 그렇게 내가 보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 믿는 것은, 모르니까, 성경을 모르니까 부득이 이래 해라 하는데 하면 알아져요. 하기 전에는 몰라요. 그러니까 내가 암만 말해도 여러분들이 이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하루 종일만, 하루 동안만 ‘예수님의’ 뭐 분주할 때 잘 안 되면 처음에 어릴 때에는 저 한적한 곳에 가 가지고서 ‘예수님이 나를 넷 사활로 대속하셨다’ 그것을 자꾸 생각하고 생각할 때에, 생각할 때에 마음이 달라지고, 또 거기서 감사함이 생겨지고 눈물이 나오고 자꾸 이래 할 때 나도 모든 거 다 바쳐서 주를 위해 살고 싶다는 그런 힘이 나오고, 또 기쁨이 나오고, 이거 죄와 마귀와 사망의 것이 멀리 떨어져서 그게 생각도 나지 안하고 ‘그거 그때 내가 그걸 그렇게 못 견뎌 했는데 그게 어데로 갔노?’ 한번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다시 생각하면 아무 맛도 없고 아무 가치도 없고 해서 멀어지는 것을 자꾸 느껴 행해 봐야 되지, 아무리 여기 음식이 있는데 이거 맛있다 해도 몰라요. 그저 먹어보면 알아요. 먹어봐야 되는 건 먹어봐야 알지 먹어보기 전에는 모른다 그거요.

그저 이제  말한 걸 여러분들이 들리지 안하고 알지 못하는 말을 지금 내가 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저 마지막에 결론으로 예수님의 죽을 사자 사, 활자는 살 활자, 사활, 활은 부활 말하고 죽음은 십자가 죽으심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활로 일곱 가지 대속이라 하십시오. 그라면 좀 기억하기 좋아. ‘일곱 가지 대속을 나 위해서 해 주셔서 일곱 가지 대속을 나는 입은 자라.’ 입은 자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입은 자라는 것을 믿을 때에 여러분들에게 능력 오는 걸 여러분들이 알 것입니다. 믿을 때에 능력이 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믿을 때에 이 일곱 가지의 이 모든 더러운 것은 나와의 상관없이 멀어지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거 가진 나는 예수님의 것인 것을 자기가 믿고 행해 볼라 할 때에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이 행해집니다. 이게 뭐이냐? 이렇게 알게 하는 것이 성령이요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에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성령으로 행하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가 뭐입니까? 성령의 인도가 뭐 인도합니까? 성령의 인도 딴거 하나도  안 합니다. 성령의 인도는 요 일곱 가지 합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우리에게 가르쳐서 ‘이 대속을 믿어라. 이 대속은 네것이다. 이 대속은 네것 됐으니 너는 주님의 것으로 살아라.’ 이것만 가르치는 것이 성경이라. 신구약 성경은 전부 이것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거 외에는 하나도 없어. 전부 이것만 가르치고 있어. 이러기 때문에 볼 것 없이 이것만 자꾸 내가 생각하고, 생각하고 요대로 하면은 지름길로 첩경으로 빨리 지름길로 빨라서 구원을 가속으로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세상이 모르는 자존자 하나님이,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보이는 거 보이지 않는 거 지극히 작은 것까지 다 홀로 주권적으로 섭리 관리하시는 하나님께서 티끌같은 저희들을 사랑하사 이렇게 모든 것을 다 기울여 사활의 대속을 베풀어 얼마든지 무지 무능하고 악하고 더럽고 사나울지라도 수많은 멸망에 얽혀 있을지라도 상관없이 이런 빚을 다 갚아 주고 이런 것을 다 풀어서 해방시켜 얼마든지 영원히 해와같이 빛나는 의로운 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영광스러운 이 신인 결합의 측량 못 할 영광의 구원이 오늘 베풀어지고 있건마는 악령이 미혹을 줘서 저희들이 여게 대해서 등한히 하고 있는 것을 오늘도 주님이 간곡히 말씀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는 성령으로만 깨닫고 성령으로만 믿고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행할 수 있지 우리에게 있는 인적 요소는 하나도 안 되는 것을 저희들이 압니다.

주님 간구합니다. 주님의 피와 이름을 의지해서 간구합니다. 여게 있는 모든 무리와 이 밖에 있는 모든 택한 성도들, 오늘이라는 이때에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기 전까지의 짧은 이 토막에 모든 거 다 드려서 주님의 대속의 공로가 아니면 신인 결합은 할 수 없는데 이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서 하나님과 저희들이 하나되는 지극히 영광스럽고 놀랠 만한 이 큰 관계가 맺어지는 이 일에 전심 전력 기울여서 후회 없이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형제들을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들은 생명도 몰랐고 죽음도 몰랐고 보이는 거 이것만 상대하고 살았었는데  사랑하는 종들의 권고를, 기도를, 안타까움을 인하여 사랑하는 종들의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전하는 데에서 많은 형제들이 사망에서 마귀의 쇠사슬에서 해방되게 됨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것이오니 저희들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성령의 감화 감동이 같이 하여 주셔서 저들의 모든 기쁜 일 있으면 찬양하고 어려운 일 있으면 주님에게 기도해서 주님과 동거 동행함으로 이 어지럽고 복잡하고 사나운 세상, 과연 바다와 같은 이 세상, 자유롭게 아무 염려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날마다 세상을  양식삼아 자라갈 수 있는 영광스러운 이 구원의 길을 완전히 걸어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고, 이들을 구원하느라고 눈물과 무릎으로 간구하고 애쓴 사랑하는 종들에게 더욱이 주를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이 사랑이 저희들 속에 점점 뜨거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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