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과 거룩

 

1987. 12. 6. 주일오전

 

본문:히브리서 12장 14절∼17절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신 것은, 택자든지 불택자든지 중생된 자든지 중생 안 된  자든지 모든 사람을 망라해서 말하고 또 교회 안에서는 이런 성직을 가졌고 저런  성직을 가져서 여러 성직을 가진 그런 성도들을 다 망라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아무도’ 하는 말은 화평함과 거룩이 없으면 중생된 사람이라도 그저 그 도의  생활은 하고 행위는 할지라도 살아계시는 주님은 만나지 못한다 또 성령은  만나지 못한다 하는 말입니다.

열심 있는 신자라도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주를 만나지 못하고, 또 반사 권찰  집사라도 이것이 없이는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또 권사 장로 목사라도 이것이  없이는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 하는 것을 말씀해서 ‘아무도’ 이렇게라는 말씀을  붙인 것입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으면 아무도 주님을 만나지는 못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도 있었고 서기관도 있었고 또 열심 있는 바리새 교인들도  있었지마는 그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이 오시니까 저희들의 모든  언행심사의 행위가 주님과 거슬려져서 결국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한 연고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님의 감화 감동을 만나지 못한 연고입니다.

주님은 지금은 신인양성일위의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나서 같이 계시지  않고 신인양성일위로 부활하셨으나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게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보면 “세상 끝날까지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볼 수 없게 부활하신 신령한  양성일위의 주님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주님을 가리켜서 “그리스도가 영으로 우리와 같이 계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영으로 계시는 이 주님을 과거 이스라엘이 그 제도와 법칙은 잘 지켰고,  또 모든 의식들은, 종교 의식들은 잘 행하고 철저하게 했지마는 주님을 만나려고  하는 데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하나님이  영으로 오시는 이 그리스도의 영을 맞이하려고는 하지를 안했습니다.

다만 그때 몇몇 사람, 성경에 나타난 대로 요셉이라든지 마리아라든지  시므온이라든지 안나라든지 나다나엘이라든지 그런 사람들은 주님과 비밀히  만나는 영교가 있었습니다. 천한 업을 하고 있는 목자들이지마는 그 사람들은  주님과의 영교가 있었습니다.

이러니까 주님이 탄생하실 때에 그들이 모르게 탄생하지 안하셨고 탄생하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줬고, 또 탄생하신 주님이 결례받으러 성전에 갔을 때에  시므온이라든지 안나라든지 그 사람들이 강보에 싸서 주님을 마리아와 요셉이가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서 그들은 주 하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알고 영접하고  경배와 찬송을 드렸습니다.

또 먼데 떨어져 있는 그 동방 박사들도 그들은 의식과 제도를 행하는 데서만  전부로 이렇게 생각지를 아니하고 꼭 주님을 만나서 주님으로 더불어 신령한  교제를 하는 영감 생활을 그들은 늘 힘을 써서 했기 때문에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에게 별로 나타나서 그 별을 보고 따라와 가지고서 자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가 유대땅에 나셨다는 그 영감을 받고 모든 이 천문 계시를 받고 그  자리 와 가지고 예물을 드리고 경배를 했습니다.

과거 구약의 모든 시대를 보면 대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신앙생활 한  그 제도만 본받고 또 하나의 법칙만 따라서 행하지,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려고 하는 그점에 힘을 쓰지 아니한 시대가 많았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한 자리에서 두 여인이 매를 갈고 있고 한 자리에  둘이 누워자고 한 밭에서 둘이 일을 하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껍데기 생활은 꼭 같습니다. 꼭 같은데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하나는 데려감을 당했다 하는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만나고 못 만난 거기에서 그것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에 주님을 만나는 것은 형체를 가지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영으로 와 가지고 우리에게 와서 역사합니다. 그러면 영감이 곧  그리스도십니다.

이런데 말씀만 법칙으로 지키면 되지 자기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감동시키는 것,  이 감동시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고 체험할 때에 우리 양심에 옳다 참되다  인정하여서 양심에 가책이 없는 그 과정을 통과해서 비로소 성신의 감화를 받는  것을 우리가 느낍니다. 양심에 거리끼는 그 밖에 생활에서는 성령은 만나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우리 신앙생활에서 자기 양심을 자기가 만나 가지고서 양심으로 더불어  협동해서 그다음에 영감을 만나 가지고야 비로소 우리에게 참된 평강도 오고 또  우리에게 변화도 오고 능력도 오는 것입니다.

이래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이것이 있은 지 후에 주님은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영감을 받을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신인양성일위의 부활한 영으로 우리에게 와서 항상 같이  있기를 원하고 문을 두드리면서 문 열어서 같이 역사하기를 원하는 이 주님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면, 이 성령님을 우리가 만나서 주와 같이 동행하는 이것은 우리가 모든 잡된  마음이 다 합해서 양심에게 굴복하여 우리가 양심의 사람이 돼 가지고 비로소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영, 영감을 만나려고 우리가 애를 써서 영감을 만날 때에  새로운 깨달음도 우리에게 주시고 또 새로운 모든 깨달음에서 소망도 새 소망이  생기고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던 죄도 새 죄가 발견되고 우리는 새 생활과 새  사람이 이루어지는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 하는 이 주님은 곧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같이 하겠다”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내게 주셨으니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주권 통치하는 이 내가 너와 같이 하겠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주님과 자기가 같이 하는 데에는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으면 이분을  만나지 못한다. 이분을 만나지 못하면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를 주권하시는  그분을 만나지 못하면 하늘의 것이나 땅의 것을 주권할 수 없다. 이분을 만나면  이분이 우리를 주권하게 해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 주셔서 우리는 주권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이 화평함과 거룩함을 가지도록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화평함이라는 말은 화친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화친이라는 말, 또 화목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를 지낼 때에 네 가지 제사를 지냈는데 제일  초보에 일호 제사가 속건제요, 허물을 사하는 속건제요, 그다음이 모든 죄를  속함받는 속죄제요, 속죄제 속건제 그 둘을 이래 드리고 저래 드리고 했습니다.

속죄제라는 것은 뚜렷한 그 죄를 다 회개해서 주님 앞에서 사함받는 것이  속죄제요, 속건제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죄라고 볼 수도 있고 죄라고 보지  안할 수도 있는, 실수라고 할 수 있는, 사소한 그런 죄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허물 건자, 허물을 속하는 것이라.

속건제 속죄제가 있었고 그다음에는 화목제가 있었습니다. 세번째는 화목제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제사는 번제가 있었습니다. 번제는 제물된 그 양의 전부를  불에 태워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번제요 화목제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불목한  것은 사람으로 더불어 불목의 열매를 맺게 되고 사람으로 더불어 불목한 것은  차차 하나님으로 더불어 불목의 자리를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과 불목, 하나님과 불목 이 불목을 다 없이 하는, 양의 피,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이 화목이 될 것을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짐승으로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화목제를 드리고 난  다음에 이 화목 제물은 그들이 다 식구들과 모든 원수되는 사람들까지 다 청해  가지고서 한 자리에서 이 제물을 같이 먹었습니다.

이래서, 속건제 속제제 화목제가 있은 지 후라야 하나님께 바쳐지는 번제가 있지  이것이 준비되기 전에는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것이나 뭘 바친다는 것은 그것은  다 온전하지 못하고 거게 미달되는 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화평은 화목이요 화친하는 것이요  또 화평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뜻은 약간 좀 다른 뜻이 있지만 그만 화친이  화목이요 화목이 화평입니다.

이 화평이라는 것은 자기 혼자 화평하는 것이 아니고 쌍방이 있어서 상대방으로  더불어 화평하는 것이 화평이요, 화목하는 것이 화목이요, 화친하는 것이  화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화친이라든지 화평이라든지 화목이라는 것은 자기 혼자는 못  하는 것입니다. 쌍방이 돼야만 되는 것입니다. 또 이 거룩이라는 것도 자기  혼자는 거룩이 안 됩니다. 그 쌍방이 있어야 거룩이 됩니다.

이 거룩이라는 것은 일로, 자기가 일을 접할 때에 거게서 거룩을 이룰 수가 있고  또 그 모든 불결을 이룰 수가 있고, 또 물건을 접할 때에도 거룩을 이룰 수가  있고 불결을 이룰 수가 있고, 사람을 접할 때도 거룩을 이룰 수도 있고 불결을  이룰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평이나 이 거룩이나 다 쌍방이 있어야 된다 하는 것을 여게서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화평이라는 것은 순전히 인인 관계에서만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거룩이라  하는 것은 자기와 사람과 사물로 더불어 관계를 가질 때에 이 거룩이라 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화평은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는 것인데 이 화평이 얼마나 중요한고 하니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보지 못하는 것, 화평이 없으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화평이 있으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또 거룩이 있으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거룩이 없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이렇게 중요한 것인데 이 화평은 인인  관계에서만 있는 화평이니 이 화평을 이루는 이 화평은 화평보다 먼저 있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있는 것은 회개와 자복이 먼저 있습니다.

회개한 사람에게, 상대방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자복을 한 다음에 그다음에  화평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혹 생각하기를 화평은 갑과 을 두 사람이 이렇게  화평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게서 서로 잘못한 것을 고하고ㅡ이것은  자복입니다ㅡ또 잘못된 것을 회개를 하고 이러는 것이 화평인 줄로 이렇게  생각하는데 화평은 그 너머 있습니다.

화평하려고 달라들기 전에 먼저 자기를 살펴서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회개하는 것이 먼저 있습니다. 회개를 하고 난 다음에 그 상대방으로 더불어  화평이 그다음에 있지 회개하기 전에는 화평이 이루어지지를 안합니다.

회개는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된 것은 자기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과 관계에서 자기가 잘못된 것은 상대방으로 더불어 하지 안해도  자기 혼자 잘못된 것을 다 고칠 수 있습니다. 그 회개로 고칠 수 있고 또 자기  혼자 잘못된 것은 상대방에게 그다음에는 자복으로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회개하고 자복하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화평이라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시작되는 것이지 이 회개와 자복이 없이 화평이라 하는 것은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여게 요 화평함을 우리가 하려고 할 때에는 그 사람으로 더불어 둘이  이렇게 화합하고 화친하고 화목하는 것인데 이것을 둘이 쌍방이 이것을 화친을  하려고 화평을 하려고 화목을 하려고 이렇게 시작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그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자기의 잘못된 것을 용서받는 그런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자기가 고치고, 고치고 난 다음에는 잘못된 것을 상대방에게 고하고, 자복을 하고.

자복을 하고 용서를 받고. 회개하고 자복하고 용서받고 난 그다음에 화평이라는  것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뒤에 화평이 되냐 안 되냐 하는 것은 그다음의  노력입니다.

우리가 요것을 잘 순서를 알아서, 지금 내가 상대방에게 잘못됐다 하는 잘못된  그것을 내가 잘못됐다고 사과하고 이렇게 용서받으면 화평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지금 그 아주 그 이하의 낮은 차원에 있는  것입니다. 아주 낮은 그 차원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아무래도 이 화평은  해야 되지 화평하지 안하면 주님 보지 못하면 자기 건설구원은 다 헛일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야 건설구원이 되는 것이니 건설구원을 할려고 하면  화평함과 거룩함을 가져야 되는 것인데 화평함을 가지는 그 준비가 뭣이냐?  자기가 회개할 것을 깊이 찾아 가지고서 자기의 회개할 것을 하나님 보실 때에  ‘너는 회개할 것을 회개했다’ 회개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은 후에,  회개에 대해 인정을 받은 후에, 또 상대방에게 잘못된 것을 자복해서 용서를 받은  후에, 용서받은 후, 회개에서 하나님에게 인정받은 후, 다시 말하면 자신으로서는 흠점이  없는 사람이 되어지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상대방으로 더불어 이 고귀한 화평과  화친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만나는 데에 유일한 구비의 것이요 중요한 것인데 이것을 가지는  것은 그냥 이래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겠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화평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전제 조건이 뭣이 전제 조건인고 하니  자기에게 모든 잘못된 것을 그것을 다 깨끗하게 회개해서 자신이 흠없는 사람이  되는, 아무리 주홍같고 진홍같이 붉은 죄를 가진 자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는, 희게  된 이 사람이 먼저 되고, 또 상대방에게 관련 있으면 그것을 다 자복하고  사과하고 해서 깨끗한 자신이 되도록 노력해서 흠없는 깨끗한 자신이 되고 난 지  후에 화친을 하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화친을 그렇게 쉽게 생각해서 그만 말 한마디로 화친이  되리라고 생각을 하고 무슨 어떤 사소한 한 행동으로 화친이 되리라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는 것도 있기는 있습니다마는 이 화친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래도 화친을 해야, 화평을 해야, 화목을  해야, 이걸 해야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가지는 데에 우리가 준비할  것이 뭣인가? 준비할 것은 자기에게 흠점이 없는 자기를 깨끗게 하는 이 회개를  해서 주홍같고 진홍같은 자가 양털과 눈과같이 희게 되어지는 이것이 먼저  급선무입니다.

이것이 먼저 선행되고, 먼저 이것이 행해지고, 먼저 이루어지고, 이래서 자기가  회개 자복 용서, 자복도 이것도 회개에 속한 것이요, 용서도 회개에 속한 것이요  또 그 모두 다 회개, 자복 회개로써 자기에게 거리낌이 없는 깨끗한 회개, 우리는 눈이 넓게 보지를 못하고 우리가 눈으로 보는 면적이 솝니다. 면적이  솔아서 요 면에 대해서 잘못된 그것이 고쳐졌으면 다 고쳐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눈이 어두워서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거리낄 것이 없이  고쳤다고 해서 그것이 실상으로 다 고쳐질 수도 있지만 고쳐지지 안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못 봐서 그것을 몰라서 고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4장에는 바울은 말하기를 자기 양심에 가책되는 것이  하나도 없으나, 가책되는 것을 낱낱이 고쳐서 없지만 이렇다고 안심하지를 못하고  “모든 것을 아시고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이 보실 때에, 내 양심에는  가책되는 것이 없지만 그분이 보실 때에는 잘못된 것이 얼마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이래서 항상 미결 중에 있었고 항상 근심 중에 있었고 ‘어떻게  되나?’ 이 심판에 대해서 두려움 중에 있었지 `이제 내 양심에 가책할 것이 없이  됐으니까 이제는 안심이다’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렇게 못했느냐? 내 눈은 어두워서 모든 전면을 다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바로 다 보시는 그분 앞에 가 가지고서 심사를 받을 터이니까 내  양심이 보지 못한 그런 것이 있는가 해서 한참 두려움을 가지고 지낸 것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이런고로 우리는 자기의 잘못된 것을 참 눈과 같이 희어지는 이것이 되도록  자기가 자기에게 대해서 잘못된 그것을 자기 마음으로 찾아서 이제는 내가  잘못됨이 없다 하고서 그것으로써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나에게 잘못된 무엇이 있으면 이것을 알려 주옵소서’ 하는  그것을 자꾸 찾아서 나아가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할일입니다.

이래서 회개에 깨끗함을 가지게 되면 그다음에는 이제 화평의 높은 차원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모든 것이 필연성의  기독교입니다.

자기가 죄를 잘못된 것을 참으로 깨달으면 필연적으로 안 고칠 수 없고, 자기의  잘못된 것을 깨끗이 회개했다면 필연적으로 화평이 안 될 수가 없고, 또 화평이  참으로 바로 됐으면 거룩이 이루어지지 안할 수가 없다 하는 것을 여게서 우리가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아무래도 화평이 없으면 주님 보지 못하니 이 화평을 해야 되는  데는 자기 일방적으로 그저, 회개보다 화평이 고차원의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회개를 깨끗이 해서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이 깨끗하다 깨끗하다 할지라도  화평이 이루어지지 안했으면 아직까지 회개가 미완성이라고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또, 화평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자기가 참으로 거룩한 자가 되어지지 안했으면  아직까지 이 화평이 미완성이라 그렇게 평가하고 지금 자기는 밑에서부터 더듬어  올라와 가지고서 회개할 것을 더듬어서 또 거게서 새로 더듬어 가지고서 그것을  새롭게 깨끗하게 해서 새로운 화평을 이루고, 또 화평을 이루어 봐서 거룩이 안 되면 또 이 화평을 더듬고 밑에 내려가  가지고서 죄를 더듬고 이래 가지고서 죄를 더듬어서 회개를 더듬고 회개를  이루어서 그 회개가 이제 화평이 되어졌으면 회개가 되어졌는가보다 이렇게 하고, 또 화평이 되어지는 것도 어느 몇분지 일은 화평이 됐지만 몇분지 일은 화평이  안 됐다, 어느 면은 화평이 됐지마는 어느 면은 화평이 안 됐다, 화평이  이루어지지 안하는 것은 그것은 원인이 어데 있느냐? 회개에 불완전에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회개에 완성을 이루도록 해 가지고서 화평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또, 화평은 뭘 이루느냐? 화평은 거룩함을 이루는 것인데, 자기가 성결해지는  것인데, 화평 후에 성결이 되지 아무리 자기가 욕심을 내서 성결만 하려고 애를  써도 화평이 전제 조건으로 그 화평이라는 토대 위에 이 성결이 되어지기 때문에  화평이 되지 안하면 성결이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결이 안 되는 원인을 화평에서 찾고, 화평이 안 되는 원인을  회개에서 찾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아무래도 세상을 떠나기 전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하는 것은 저거끼리 화평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저거끼리 화평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여게 말씀한 것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 그러면 너의 가족과도 화평이 돼야 되겠고, 교인들끼리도 화평이 돼야 되겠고,  이웃끼리도 화평이 돼야 되겠고, 또 원수끼리도 화평이 돼야 되겠고, 이 화평이  이것이 있어야 네가 거룩한 사람에 나아가게 되고 화평으로 거룩에 향상하고  거룩에서 하나님을 보는 데에 이렇게 높은 차원에 향상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너는 일방적으로 이와같이 화평함만 노력하다가 실패하기 쉬우니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할 수 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할 수 있다.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것은 이 화목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  가지고서 죽으셔서 화평을 이루어 놨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이  불목이라 하는 것은 왕이 돼 가지고 이 절대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불목을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화목의 제물로서 화평을 이루어 놨기  때문에 절대 이 화평은 못 한다는 것은 아니고 화평에 불가능이라는 것은 아니고  이 화평은 우리가 절대 할 수 있도록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화평을 우리가 하는 데에 그 순서를 밟지 안하고 우리가 노력을 하지  않고 우리가 순종하지 안해서 안 되는 것이지 이것은 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그러면 화평만 가지고는 안  되고 또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거룩함을 좇으라 그말은, 거룩함을 좇으라  말은 거룩함을 주장하라 말이요, 거룩함을 따르라 말이요, 거룩함을 향해서 가라  말입니다. 네 생애의 목표가 어데냐? 너는 화평을 목표로 두고서 달리라. 거룩을  목표로 두고서 달리라.

그러면 화평과 거룩의 목표가 어데냐? 거게는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이 화목 제물이 되셨고 또 거룩이 되셨기 때문에 주님이 어떻게 하셔서  이 화평의 성공을 했으며 이 거룩의 성공을 했는가 그분이 화평과 거룩을  성공하신 그분을 목표로 두고, 그분을 표준으로 두고, 그분을 표본으로 두고,  그분이 한 방편 그 방편을 네가 써서 어짜든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 화평함과  거룩함을 마련해라. 이래야 네가 주를 보게 된다. 주님 만나게 되면 우리의  구원은 다 아닙니까? 우리 구원은 완성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그런데 잘못하면 네가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려고 해도 네가 시야가 좁아서, 시야가, 보는 면이 좁아서, 보는  면이 좁아서 네가 아는 대로의 몇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면 너는 됐다고 이렇게  생각하지만 화평함이 됐느냐 안 됐느냐 하는 그것은 뭘로 볼 수 있느냐?  화평함이 되고 안 된 그 표현은 뭣이냐? 화평함이 되고 안 된 그 표현은 뭣이냐?  거룩이라.

네게 거룩이 그것이 자꾸 미완성으로, 거룩할라 해도 또 결심해도 안 되고  작정하고 한 시간 지나가면 또 더러워지고 또 하루 지나가면 더러워지고 이렇게  거룩을 네가 이루지 못하는 것은 거룩의 밑받침이 되는 그 밑받침이 모자라 그런  것이니까 거룩에 밑받침에 다시 더듬어 가지고서 거룩의 밑받침을 네가 힘을  써라. 밑받침을 힘을 써서 네가 화평이 이루어진 것만치 네게는 거룩이  이루어지지 화평이 구비하지 못하면 거룩은 구비하지 못하다. 화평이 원만하지  못하면 거룩은 원만하지 못한다.

그러면 네가 화평을 할라 해도 화평이 안 되거든 그 밑을 더듬어 보라. 화평은  무슨 토대 위에 서느냐? 화평이라 하는 것은 회개의 토대 위에 선다. 그러기  때문에 화평이 안 되거든 자꾸 회개를 파라. 회개를 파서 네가 회개에 온전함이  됐으면 된 것만치 화평이 될 것이다.

회개에 완전은 화평의 완전이다, 화평의 완전은 거룩의 완전이다, 거룩의 완전은  하나님과 너와의 동거 동행의 완전이 된다 하는 것을 여게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게 그 방편에 대해서 약간을 말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너희는  돌아보아” 화평과 거룩에 대해서 지금 화평한 자와 거룩한 자의 그 생애를  말합니다. 화평된 자와 거룩된 자가 어떤 열매를 맺느냐, 그자의 생애는 어떤  것이냐? 그자의 생애는 어떤 것이 그자의 생애가 되느냐? “너희는 돌아보아” 돌아본다는 것은, 돌아보는 것은, 앞을 바라보는 것은  바라보는 것이요 돌아보는 것은 뒤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돌아보아” 그말은  너는 앞서 걸었고 뒤떨어진 사람들을 표현해서 “돌아보아” 그러면 자기가 앞서  가고 뒤를 돌아봐야 되지, 자기부터 거룩을 이루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해야 되지 자기는 거룩도 못 한 것이 다른 사람을 거룩하라고, 자기는  화친도 못 한 것이 다른 사람을 화친하라고 이래 하는 것은 안 되기 때문에 네가  앞서 가고 뒤에 오는 사람을 향해서 네가 말하라. “돌아보아”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고” 여기는  전부 두려워합니다. 그러면 자기 구원 위해서 염려하는 게 아니라 자기 구원에  대해서는 돼 놓은, 자기 구원은 이루어져 놓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루지 못한  데 대해서 노력하고 두려워해야 되지 자기도 이루지 못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이루려고 노력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 말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영과 육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루 동안 사는 것도  일하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전부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라 말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의 것 그것은 다 불완전한  것들이요, 다 저주 아래 있는 것들이요, 죄 아래 있는 것들이요, 멸망 아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망하지 안하고 없어지지 안하고, 변하지 안하고, 다 영생이 되는 것,  완전이 되는 것, 온전이 되는 것은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이 세상을 우리가 떠날  때에 죽을 때에 없어지지 안할 것, 재림할 때 없어지지 안할 것, 망하지 안할 것은  전부 이 주님에게만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값을 내라면 우리는 값을 줄 값이 없습니다. 이것은 전부  공짜배기로 받습니다. 공짜배기로 받는 것은 가치가 적어서 공짜배기로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값을 낼 만한, 우리가 가진 소유 이상의 무한한 초월한  고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아주 높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댓가를 낼 수가  없는고로 전부 공짜배기로 받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사는 것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지 못하면 우리는 멸망받습니다. 홍포 입은 부자가 음부에 가 가지고 고통할  때에 거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물 한방울의 은혜도 은혜가 없기 때문에 멸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은혜에 이르지 못할까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고 다른 사람이 은혜받지 못하는 그 일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은혜받지 못하고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그런 자리에 있을까 두려워하는 이것이  화평함과 거룩함을 가진 자의 표현되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내야 뭐 나만 됐으니까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이 은혜를 받지 못한다. 그 사람이 영감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  축복을 받지 못한다, 도움을 받지 못한다, 긍휼을 받지 못한다, 제야, 그 자신이야 은혜받을 만한 그런 자가 못 되고 악하고 독하고 벌을 받아야  되고 멸망을 받아야 될 그런 자라 할지라도, 자기에게 어떤 그 잘못이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은혜받지 못하는 것은  제가 그와 같은 자신의 자체와 행위와 그 사상과 모든 정신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면 그것은 율법입니다. 그건 공평된 율법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상대방은 그렇지만 상대방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그 일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지고 두려워하고 그의 은혜받지 못하는 거게 대해서  자기의 멸망과 같이 생각하고 그렇게 두려워하는 요것이 무슨 열매냐? 거룩의  열매라. 요것이 거룩한 사람의 그 결실이라.

이것이 없이는, 다른 사람이 원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거기 대해서  두려워하고 애터지고 못 견뎌서 노력하는 이것이 없으면 너는 혼자 거룩이지 참  진짜 거룩된 것은 아니라.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고” 그러면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받지 못하는 그 일을 두려워하고, 제게 대해서 제 복받지 못해 제가  불행스러울까 두려워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은혜받아 복받고 이 축복받아  잘되지 못할까, 다른 사람이 잘되지 못하는 그 일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그러면, 두려워하면 자기야 ‘내야 뭐 저주받든지 말든지 다른 사람 복되면  좋겠다’ 그게 아닙니다. 여게는 “돌아보아” “돌아보아” 돌아보면 자기는  벌써 앞서가고 그 사람은 뒤서 간 사람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받지 못한 자에 대해서 염려해야 되지 자기도 은혜받지 못한 그자가, 저주받고  있는 자가, 징계받고 있는 자가 다른 사람의 은혜에 대해서 염려한다는 것은  그것은 월권 행동이요 그것은 참람된 행동인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또 쓴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쓴뿌리라 하는 것은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에  반대되는 것이요 곧 안 믿는 사람들에게 있는 행위입니다. 이 쓴뿌리라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열여섯 가지 구속주의로서 구속 위해서 살아야  되는데 세상주의로 사는 것이 그게 쓴뿌리요, 세상에 있는 유물주의로 사는 것이  쓴뿌리요, 믿는 사람이 세상 위주로 세상 물질 위주로 살고 있는 그것이, 그 사람이 “쓴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그러면 믿는 사람들이 어데서  괴로움을 당하느냐? 믿는 사람이 세상 염려와 재리의 염려, 세상주의 물질주의  이것 때문에 전부 신자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 주님에게 맡겨 놓고 믿음으로 살면 고통이 하나도 없는 것인데 다  믿는 사람들이 고통하는 것, 집집마다 가 가지고서 걱정하는 것을 찾아들어가  보면 예수님의 피 때문에 걱정하고, 영감 때문에 걱정하고, 진리 때문에 걱정하는  그 집은 그 걱정하는 게 아니라 걱정 속에 한없는 평강이 들었고 한없는 축복이  들었으나 그런 것을 돌보지도 안하고 지금, 영감과 진리와 피에 불만과 가난한  사람이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인데 믿는 사람들이 쓴뿌리로 괴로움당하는 것,  쓴뿌리로 괴로움당하는 것은 세상주의 때문에 괴로움당하고 유물주의기 때문에  물질 때문에 괴로움 당하는 이 괴로움을 당하고ㅡ거게 대해서 안타까와서  애터지는 그것이 거룩한 사람이요 화평을 이룬 사람이라.

“쓴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사람이 이 세상주의 물질주의 물질 세상 그것  때문에 고통당하는 그것에 대해서 안타까와 두려운 마음으로서 거게서 그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그 뜨거움이 너에게 있으면 그것이 너에게  거룩이 있는 증거라. 그것은 거룩의 소산이라.

거룩이라는 나무 위에 이제 이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그 두려움과 또 쓴뿌리가  나서 사람들이 괴로움당하고 있는 거게 대해서 안타까와 두려움과 또 이 한  사람뿐 아니라 한 사람이 그리 되면 많은 사람이 그로 인해서 감염돼 가지고서  공연히 이 세상주의 물질주의 때문에 더러워지고 고통당하는 이런 두려움이 네게  결실이 되고 열매가 맺어졌으면 너는 거룩이라는 그 나무가 되어 있다 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16절에, “음행하는 자와” 이 소용 없는 음행. 음행 그것은 하나님 잊어버리게  되지, 음행 그것으로 인해서 마귀의 것이 되지, 자기의 몸이 더러워지지, 다른  죄는 몸 밖에 있지만 음행죄는 자기 몸 안에 있습니다. 몸 안에 있다 했습니다.

자기 몸 더러워지지, 하나님의 축복 없어지지, 다른 사람에게 멸시당하지, 자기  마음에 남모르는 고통당하지, 모든 데 대해서 저자세로 천해지고 굴해야 되지, 또, 자기의 심신도 괴로울 뿐 아니라 자기의 귀한 정력 다 뽑아서 더러워지고,  자기의 정력 더러워지고 자기의 몸이 다 더럽게 다 쇠해지고 낡아지고 다  더러워지는 것, 이것은 백해 무익인데 여게 지금 사람들이 미혹돼 가지고서 이  음행에 미혹돼서 이 음란에 미혹돼 가지고 있으니 이것에 대해서 정말로  두려워하고 안타까움의 열매가 맺어 있으면 너는 거룩이라는 나무가 지금 생겨져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와 혹 한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은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팥죽 한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자와 같은 망령된 자,  하루밤 나그네니까 돈 취해봤자 하루밤 가지련지, 이틀밤 가지련지, 며칠 가지련지  모르는 세상 것, 세상 부귀, 영화, 지위, 권세, 물질, 행락, 또 제 마음의 욕심에  만족하는 미남 미인, 모든 세상에 아름다운 이십세기에 과학에 모든 아름다운  물질, 그것 때문에 영원 무궁을 파는 망령된 자, 팥죽 한그릇에 장자의 기업을 판 에서와 같은 이런, 잠깐 있다가 없어질 정함이  없는 그런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한 기업을 이루지 못하는 그런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고, 그러면 이런 일에 대해서 마음이 안타까운 사람,  이런 일에 대해서 마음에 고통스러워서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이런 일에 대해서, 은혜받지 못하는 자, 쓴뿌리가 난 자, 공연한 괴로움을 가지는 자, 공연히 더러운  음란에 빠져서 음탕에 빠진 자, 부부간이라도 거게다 정력을 다 쏟고, 아무 백해  무익인데 그런 자, 또 잠깐 있다 없어질 정함이 없는 이런 것에게 자기의 전부를  기울이는 이 망령된 자 이런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그는 그후에 축복을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려고 했지만 기회를  놓쳤다” 기회가 지나가면 없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세상 이 다 가치 없는 이런 것을 가지고서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들의 이 구원을  다 허비하는 이 기회를 놓치는 이 기회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가져져서 네가  두려워서 그 일을 방관시할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여기에서, 은혜 못 받는 자, 또 쓴뿌리로 자기를 괴롭히는 자, 다른  사람이 거게 물들어서 더러워지고 괴로워 하는 자, 또 음행에 이로써 공연히  고생하고 헛수고하는 자, 또 한그릇 팥죽에 장자의 기업을 판 것과 같이 이  망령된 자, 이런 자들이 기회가 지나가는 데 따라서 애터지는 이것이 성도의  심정인 것을 말합니다. 다시 기회를 놓치면 안 돼. 그 기회가 자꾸 지나가는 데  애터지는 이 일을 가지고서, 어짜든지, 아름다운 이 열매가 맺는 데에는 거룩이 먼저 가꾸어져야 되고, 거룩이  가꾸어지는 데는 화평이 먼저 가꾸어져야 되고, 화평이 가꾸어지는 데는 깨끗한  이 회개가 갖추어져야 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이 회개에서 그저 자기가 하나님에게 대해서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위에 사람에게 아래 사람에게 대해서 자기의 지식이 있는 대로  이렇게 다 활용을 해 가지고서 이렇게 해서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도록 하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 여게서부터 주를 보기 시작한다. 주를  보기 시작하면 그다음에는 이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지게 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화평에 대해서 아무래도 우리가 이제는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그 전에는 하나님을 향하는, 하나님을 향해서 이 믿음 가지는  것을 자꾸 노력을 하고서 이렇게 애를 써서 이 세상 마귀와 죄와 사망 이놈을  이별하고 그놈하고 원수되고 그놈을 정복해서 투쟁하는 데에 힘을 썼는데 이제  이 단계에 와서는 또 화평에 지금 주력하는 이 일을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이렇게 주님이 완전한 화목의 제물로 화목을 일으키시고 우리에게 이 화목의  비밀을 알려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화목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만날 수 없다고  단정지운 이 말씀을 주셨사오니 이 화목을 이루는 데에는 주님 앞에 조금도  빠짐없이 회개에 온전함을 이루어 나가는 것은 화목의 온전함이 이루어 나가  회개가 성장되는 양만치 화목이 성장되고, 화목이 성장되는 양만치 거룩이  성장되고, 거룩이 성장된 양만치 주님이 땅위에 오셔서 생애한 주의 생애의 그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서부교회 온 식구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회개의 온전함에 이르고,  화평함에 온전함에 이르고, 거룩함에 온전함을 이루어 주님과 동행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이 준비를 나그네 세상에서 다 이루어 가지고 주님 앞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주님 오후에도 이 말씀을 계속해서 증거할 때에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참석하여 깨달아 기어코라도 이 일을 달성하는 저희들이 되도록 능력을 주옵소서.

많은 형제를 불러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들은 이제는 주님 앞으로  돌아왔사오니 주님의 능하신 사랑의 자비의 품 안에 안기워서 주님으로 더불어  의논하면 못 할 것 없는 것을 깨달아 무정하고 위험하고 사나운 세상을 평강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 품안으로 안겨드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고  주님을 떠나는 행동을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을 구원하느라고 수고한 사랑하는 종들에게도 점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  심령에 뜨겁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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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화평/ 마태복음 5장 9절/ 1981. 9. 23. 수저녁 선지자 2016.01.11
» 화평과 거룩/ 히브리서 12장 14절-17절/ 1987. 12. 6.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11
134 화평과 거룩/ 히브리서 12장 14절/ 1989. 2. 24.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11
133 화평과 거룩/ 히브리서 12장 14절/ 1989. 6. 30.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11
132 화평케 하는 것 세 가지/ 에베소서 2장 11절-22절/ 1981. 9. 24. 목새벽 선지자 2016.01.11
131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히브리서 12장 14절 / 1988. 7. 22.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11
130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히브리서 12장 14절-17절/ 1988. 4. 18. 월새벽 선지자 2016.01.11
129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히브리서 12장 14절-17절/ 1998. 4. 17.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11
128 화평함과 거룩함/ 히브리서 12장 14절-17절/ 1988. 5. 6. 새벽집회 선지자 2016.01.11
127 확신. 확정. 단행 할 것/ 마태복음 6장 31절-34절/ 1980. 5. 17. 토새벽 선지자 2016.01.11
126 확신. 확정. 단행 할 것/ 마태복음 6장 31절-33절/ 1980. 5. 16. 금저녁 선지자 2016.01.11
125 확신7단계/ 디모데후서 3장 12절-17절/ 1960. 4. 27. 수새집회 선지자 2016.01.11
124 환난 때에 우리 할 일/ 다니엘 12장 1절 상반절/ 1989. 7. 10. 월새벽 선지자 2016.01.11
123 환난 준비/ 베드로후서 3장 1절-18절/ 1984. 5. 10. 목전집회 선지자 2016.01.11
122 환난 준비/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11절/ 1988. 11. 22. 화새벽 선지자 2016.01.11
121 환난 준비 2가지/ 마태복음24장5절-6절/ 1988. 5. 20.지권찰회 선지자 2016.01.11
120 환난 준비의 네 가지/ 이사야 49장 22절-23절/ 1982. 3. 10. 수새벽 선지자 2016.01.11
119 환난가운데서 인간 구원을 생각/ 베드로전서 5장 5절-6절/ 1986. 7. 21. 월새벽 선지자 2016.01.11
118 환난과 구원 역사의 원인/ 출애굽기 12장 11절-14절/ 1979. 11. 21. 수저녁 선지자 2016.01.11
117 환난과 피난/ 시편 91편15절-16절/ 1980. 5. 23. 금새벽 선지자 2016.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