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5가지 믿음이면 눈 떠

 

1987. 2. 20. 새벽 <금>

 

본문:마가복음 10장 46절∼52절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이 말씀이 오늘 아침이 세번째인데, 제게 대해서 이 말씀이 갈급해서 또 여러분들에게도 한번 더 증거해야 되겠다 해서 다시 이 말씀을 봉독한 것입니다.

이 소경 바디매오가, 5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이 사람은 모든 사람이 아는 참 불쌍하기로 그 지방에서 유명한 사람인데 예수님으로 인해서 눈이 뜨여 이전에 보지 못하던 모든 것을 보게 되는 이런 기적적인 축복을 받고 나니 그는 그만 그시로 길에서 예수님을 좇았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좇았다 말은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인데,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그 모든 것을 따른 것으로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는 말씀이다 하는 것을 우리는 여게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 소경이 보게 된 이 계시의 말씀은 육신의 눈을 보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만 한해서 육신의 눈 어두운 소경은 예수님 믿어 이 소경과 같이 눈 뜨는 은혜를 받아라 하는 그런 것으로, 다 기록할라면 온 세상에도 둘 곳이 없을 만큼 기록할 말씀의 그 양이 잘못된 양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할 예수님의 말씀이라 말이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하신 일, 이 일은 곧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이 일을 다 기록할라고 하면 온 세상에도 둘 만한 곳이 없을 만치 그렇게 중요한 말씀의 양이 많은데 하필 이 사실을 기록한 것은 육신의 눈먼 자 예수 믿어 눈 뜨라는 그런 목적에서 그런 것을 소경에게 알려 이 은혜를 받으라고 계시해 주신 것만은 아니라고 우리가 판정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이 소경이 자기가 아주 모든 사람 알기에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하게 되어 있는 그 형편은 신세는 아무것도 원인이 되지 안하고 보지 못하는 그것이 원인이 된 그 사실을 이 소경이 알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길가에 있다가 고함을 지르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그렇게 고함을 지른 이것도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도리가 무슨 도리를 가르쳐서 말한 것인고? 우리가 여게서 이거는 이 역사적인 사실을 하나님이 계시해 보여 주신 것인데 여게서 이치로 진리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이치, 예수 믿는 도로 가르쳐 주신 것인데, 진리인데.

이 바디매오가 모든 불행의 원인이 보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니까, 하필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안해서, 보지 못해서 육신이 불행스러운 이 이치를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이 모든 심령의 눈, 지혜의 눈, 그 심령의 눈이 어두워 가지고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는, 자기가 망할 것도 보지 못하고 참 행복될 것도 보지 못하는, 보아야 모든 사망에 속한 것을 다 피할 수 있고 보아야 자기의 영육과 금생 내세에 행복될 것을 취할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인데 보지 못한 까닭으로 우리들이 그저 나그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참 세월을 아껴서 그 순간이라는 세월도 허비하지 안하고 꼭 그 시간을 효력 있게 이용을 해 가지고 복된 길을 그렇게 걸은 그런 사람들이 우리 앞에도 많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가 이 성경을 보고 난 다음에 생각할 때에 ‘우리는 걷지 못하는데 그들은 어떻게 걸었는가? 그런 걸음을 걸었는가?’ 우리는 결심해도 그 결심이 일주일도 못 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루도 못 가기도 하는데 그것을 되새겨 볼 때에 무엇 때문에 그런가? 분명히 열심이, 옳은 일에 열심이 나서 하루든지, 몇 시간이든지, 며칠이든지 참 자기가 봐도 후회가 없고 하나님 앞에서 가책되지 않는 그런 가치 있는 그런 걸음을 걸은 것이 얼마 동안의 기간이 됐든지 그것은 분명히 우리 신앙 체험에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본 까닭이요, 또 이 신앙 생활을 그만 중단하고 버린 것은 분명히 보는 것을 그만 보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까닭으로 되었다는 그것은 우리 신앙 체험에 우리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생활이 보고 못 보는 여기에서 우리의 전생애는 좌우하고 있다 하는 것을 우리가 현재에 실상으로 우리가 느끼고 있으니 이 바디매오를 가지고 계시해 주신 것이 우리에게 육신의 눈뿐 아니고 우리의 그 심령의 눈이, 지혜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도 다 같이 보지 못하는 그런 것이라, 우리는 육신의 눈은 보기 때문에 뭐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리 마음의 눈이 심령의 눈이 보지 못하고 어두워서 낭파되고, 또 참 행복된 걸음을 걷지 못한 그런 것은 과거에 전부라고 할 만치 우리가 다 실지로 경험했고, 체험했고, 날마다 당하고 있는 일이니 이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이 계시 목적이 이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여게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우리에게 보지 못함으로 망한 그 사람이 자기의 망한 원인이 보지 못함으로 망했다는 요것을 이 소경이 안 것처럼 우리도 요와같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요 현실을 만드셔 가지고 요런 일이 생겨졌고 또 요 일을 성경에 기록해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것은 분명합니다.

이래서, 이런 사실은 역사적인 그 형식 사실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셔서 이 형식을, 역사적인 사실인 이 형식을 계시하는 기관으로 써 가지고 그 당시 성도들에게 계시해 주셨고, 형식으로 기관을 삼아 가지고 계시해 주신 그 일을 이제는 문서로 우리에게 기록해 가지고 이 사실을 계시해 주셔서, 문서를 계시 기관으로 삼아 가지고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틀림없이 여게서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이 소경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까 그시로 보게 됐고, 그시로 보지 못하는 거 보게 됐고, 보게 되고 보니 그 사람은 완전히 변해져서 길가에서 구걸이나 하고 남의 조롱이나 받고 그렇게 아주 참 불쌍하고 가련한 그런 신세에 있던 사람이 그시로 보게 됨으로 보게 된 그시부터 “길에서 주님을 따랐다” 이랬어. 길에서 주님을 따랐다.

이거는 뭐 가 가지고 ‘내가 부모를 장사하게 하시옵소서, 내 가족을 작별하고 주님을 따르겠나이다.’ 이렇게 하지 안하고, 물론 그 사람이 뭐 소경이니까 무슨 가족이나 그런 분주한 것이 없기도 했겠지마는 없으나 있으나 사람들은 보면은 거지라도 자기 챙길 게 있고 부자도 자기 챙길 게 있고, 사람의 마음이 크고 작고 욕심이 많고 적어서 ‘저거야 뭐 거지기 때문에 뭐 아무 돌아볼 게 있느냐?’ 하면은 그거 또 거지는 여러 수억대 된 사람이 자기 소유를 정리하는 것이나 거의 뭐 같은 그 정리의 순서도 마음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랬는데, “길에서 주님을 좇았다” 주님을 따랐다, 주님을 좇았다. 주님을 좇았다 말은 주님을 따랐다 말인데 “길에서 주님을 따랐다” 이 말씀을 볼 때에 우리가 지금도 주님을 좇는다고, 주님을 지금 따라간다고, 주님을 닮아간다고, 주님을 본받아 간다고, 주님과 같이 되어 주의 형상을 입어간다고, 이루어 간다고 이렇게 우리가 말은 하고 하기는 하지마는 실상 우리가 생각할 때에 이 일이 일관되지를 못하고, 또 따를 때도 조건 많고, 이유 많고, 또 그래 가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주님을 닮아가는 이런 일을, 따라가는 것이나, 닮아가는 것이나, 본받아 가는 것이나, 배워가는 것이나,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이나, 예수님과 같이 꼭 같이 되어져 가는 것이나 이것이 좋은 줄 알아도 우리가 이 일을 시작하는 것도 당장 시작하지를 못하는 그런 것이 우리에게 사고고, 또 시작했다고 해도 그저 시작한 것이 어떨 때는 뭐 한 시간도 가고 뭐 두 시간도 가고 며칠도 가고 세밀히 살펴보면은 그저 얼마라는 그런 시간도 유지하지 못하는 그런 우리들인 것을 우리가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느끼는 동시에,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서 사생 결단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금하지 못하는 눈물로, 애타는 마음으로 아무것도 안 보이고 주님만 따르겠다는 그런 것이 우리 속에 불붙은 때도 있는데, 또 그라다가 또 그 마음이 그만 사라지고 없어지니까 자기도 평가적으로 과거에 그렇던 때가 정상의 자기요, 그게 참 믿는 신자요, 그 은혜의 내 감동이라든지, 내 모든 동기라든지, 열심이라든지, 감정이라든지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언제 참 속담에 꿈에 뭐 천냥을 봤다, 꿈에 천냥 본 것처럼, 꿈에 부자됐던 것처럼, 꿈에 한번 날아다녀 봤던 것처럼 그런 것처럼 이렇게 그 일이 ‘언제 그랬던가?’ 분명히 그럴 때는 있었는데 까마득히 생각을 해도 생각 못 할 만치 그렇게 잊어버려지는 일이 그런 일이 많습니다.

봄으로 내가 그런 사람으로 순간적이나마 며칠간이나마 변하였고, 또 봄으로 또 그렇게 모든 것을 이기고 자기도 이기고 환경도 이기고 뭐 조건들이 많은 그까짓 것도 다 이겨 버리고 이랬었는데 그 은혜가 우리에게 끊어졌을 때에는 분명히 그것을 보지 못하고 또, 자기가 생각해 보면, 생각하면 그 생각은, 생각해 보면, 또 그 소원을 가져보면, 그 경영을 해 보면 그는 분명히 망할 것인데 또 망할 것을 보지 못해서 그렇고, 세월을 참, 세월은 바로 구원인데 이 세월을 그렇게 허송한 그런 것은 분명히 우리가 볼 것을 보지 못해서, 그게 좋은 줄 알고 어떨 때는 여게 분발했는데 그뭐 지나간 걸 보면은 ‘일 년 동안 나는 헛일했다, 안 볼 걸 봤다, 일 년 동안 그게 해로운 것을 참 느끼지 못했다, 그게 손해간 걸 느끼지 못했다.’ 일 년을, 혹은 한 달을, ‘나는 공연히 지나간 일주일 동안은 내가 그게 좋은 줄 알고 그거 취했는데 실은 그거는 화가 되는 걸 내가 보지 못해 그렇다. 화를 보지 못하고, 불행을 보지 못했고, 또 행복을 보지 못했다.’ 이래서 그거 느껴지는 그것이 다 우리가 신앙 경험 체험에서 각각 다 가지고 있는 소원이요 포원인 줄 압니다.

이래서, 이 바디매오가 그가 어떻게 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라시니까 그시로 그가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걸 다 보게 됐는가? 그는 육안으로 봤지마는 우리에게는 지금 주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해서 우리가 보지 못한 거 안타까운 것을 당장에 볼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됐으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될까? 제가 생각해 볼 때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 사활의 대속을 주신 이 대속도 우리가 입으로만 앵무새 모양으로 종알거리지 사실은 하나님이 크신 것도 우리가 보는 눈이 당달이지 뭐 하나님의 크심도 우리가 본다 할 수 없고 본다는 것이 그저 뭐 아주, 당달봉사라 하는 것은 아주 보이지 안하지만 무엇을 똑똑히 구별 못 하고 무슨 물형이나 그런 형체를 보지 못하고 그저 번하니까 좀 번한 것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걸 그걸 당달봉사라 해. 눈은 떴는데 못 본다 말이오.

우리 눈은 당달봉사라.

이러니까, 하나님의 크심이나, 두려움이나, 또 그분의 진실함이나, 그분의 변함없는 신실함이나, 우리를 사랑하심이나, 우리로 더불어 계약하심이나 이거 전부 이 생각해 보니까 뭐 못 보는 것이 좋은 거는 뭐 다 못 봐요. 본다는 것이 당달봉사라. 좋은 거는 다 못 봐. 좋은 거는 다 못 보고 이제 또 망할 것은 다 좋게 다 보고 있어.

이러니까, 망할 것도 보지 못하지, 분명히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돈을 위해서 일 년을 허비했으면 분명히 일 년 저는 망할 길을 걸었는데, 돈이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데, 어떤 자는 뭐 공부하면 된다고 대가리 싸짜매고 인간 말한 그 지식을 배울라 했지마는 그것도 망할 것인 줄 모르고 그래 가지고 일 년도 일생도 지내는 것이라.

그러면 배움에 대해서 잘못 본 거, 또 욕심에 대해서, 또 모든 행복에 대해서, 모든 가치에 대해서, 비판에 대해서 이런 거 뭐, 하나님도 우리가 잘못 봤고, 또 하나님의 이 사랑도, 능력도, 크심도, 신실하심도, 우리에게 이렇게 사활로 주신 이 대속도 우리가 입으로 말하지마는 이 사활의 대속이 우리에게 얼마나 행복되며, 이 사활의 대속을 베푸신 주님, 그리스도 한 분이면,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내나 한 분인데 창세 전에 그리스도는 우리를 책임졌고, 또 사활로써 우리의 모든 잘못된 걸 영원히 다 해결 완전히 지웠고, 또 영원히 우리를 그리스도직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한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이이면 우리에게 전부인데, 이외에 더 찾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우리가 분명히 여기 대해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암만 내가 나를 알아도 보지 못하는 그것이 보는 것보다 몇 수십 배 수백 배 더 많아요.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보이기는 보이거든. 예수님의 이 대속도 보이고, 하나님의 주권 개별 섭리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내가 너희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겠다” “머리털 하나까지 세시고 있다. 네가 두려워하지 마라.” 뭐 이런 말씀을 이렇게 보일 때는 하나님이 이 크신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지켜 보호하신다는 것이 눈에 보일 때는, 보일 때는 뭐 세상 권세가 두렵지 안하고, 세상 뭐 공산주의도 그까짓 거 하거나 말거나 눈 앞에 아무것도 아니고, 또 왜정 말년에 일본 나라의 그 세력도 그까짓 거 눈에, 너무 나를 보호하시고 책임지고 계신 분과 그와 상대하면 이는 뭐 태산과 먼지와 비교하는 것도 비교가 안 되기 때문에 거게 대해서는 아무런 그런 게 하나도 없이 있는데, 어떨 때에는 안 보일 때에는 그게 커지고, 세상 그게 그 세력이 커지고 주님은 보이지 않는다 말이오.

그러면 우리가 보지 못하고 보고 하는 이런 걸 이걸 우리가 많이 느끼고 있는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니까 그시로 보게 됐고 보게 되니까 길에서 주님 따랐는데, 이렇게 지금부터라도 분명히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면은 주를 위해서 순생 안 할 자가 없고, 순교 안 할 자가 없을 터이고, 있는 걸 다 팔아서 이 주님의 뒤를 따라갈 터인데 우리가 분명히 보지 못해 그렇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 말이오.

알고 있는데, 보니까 길에서 주님을 따랐으니 주님을 좇았으니 우리가 뭐 주님 좇는다고 해도, 성경은 얼마나 주님을 따르라고, “이것을 네 마음에 가지라, 이 마음을 네가 가져라.” 하는 이런 것도 다 그렇게 말해 놓고 “네가 이 마음 가지면 된다” 했지만 그 마음을 우리가 가지지 못한다 말이오. 가지지 못하고 계속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히 보지 못해 그래요.

보지 못해서 우리가 참 모든 불행의 원인이 보지 못한 여게 달렸다 하는 이것을 이 바디매오는 그때 그 범위는 넓어서 신령한 면은 모를지라도 분명히 저의 모든 불행이 보지 못함이 원인이라는 것을 그는 확실히 잡았는데 우리가 이것을 잡고 있는지? 이거 잡으면 우리가 지금이라도 행복되고 우리는, 그러면 다른 거 다 헤쳐버리고 주님 발자취를 따라서 주님이 땅위에 걸으심같이 “네가 만일 그리스도로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했으니까 우리도 찾아서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거와 같이 우리도 주님의 우편에서 “내가 이기고 아버지의 보좌에 앉음같이 너희들도 이기면 내 보좌에 함께 앉으리라” 이 걸음이 우리 걸음이고 우리 갈 수 있는데 우리가 이 못 가는 것은 이 바디매오에서 우리가 깨달아 볼 때에 우리의 온갖 모든 불행의 원인이 보지 못함에 달렸다, 보지 못함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순교 못 한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요, 순생 못 하는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요, 온 세상을 버리고 주를 따르지 못하는 것도 보지 못하는 원인이요,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는 이 뛰어남을 받지 못하는 것도 보지 못하는 원인, 모든 불행이 보지 못하는 원인이라는 이걸 우리가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셨는데, 우리는 보지 못함으로 된다는 이 원인이라는 이것을 우리 느끼는 것이 너무 빈약하고 너무 흐미하고 너무 거리 멉니다.

또 그가 기다리고 길가에 기다리고 있다가 그런 것처럼 우리는 어짜든지 내 보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니까 이 원인은 예수님만이 해결지워 줄 수 있다고 이것을 이 사람이 알았기 때문에 그 뒤에 행동을 한 거 보니까 뭐 모두 잠잠하라 이랬지마는 그럴수록이 사생결단하고 하는 것은 이제 예수님만이 나의 이 모든 원인을 해결해 줄 수 있는데 이때에 예수님 떨구면 안 된다 하기 때문에 뭐 옆의 사람이, 모든 사람들이 다 꾸짖으면서 잠잠하라고 야단을 쳐도 제재받지 안한 거 이거 보면은, 그 기회를 놓치고 예수님 놓치면 다시는 안 된다고 하는, 예수님을 그때에 놓치면 안 된다는데 환경에서는 다 방해를 지깁니다, 환경에는. 우리는 이 현실에서 참 그럴 때가 있는데 그때에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될 터인데 그 환경과 주위에서 반드시 우리가 지나가고 보면은 그때 원수가 있었습니다. 옆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잠잠하라 꾸짖으면서 야단치는 그런 것이 있었다 그말이오.

성경 보다가도 그런 걸 우리가 얼마든지 경험했고, 기도 가도 경험했고, 우리가 또 신앙 걸음을 이 행동하다가도 그런 것을 봐서 그 현실에서 제재를 받아 가지고 못 한 것 있었으니까 그때에 환경에 제재를 다 극복하고 무시하고 그럴수록이 사생결단하고 이와같이 달라들 수 있는, 우리의 모든 원인이, 불행의 원인이 보지 못함에 있다. 보지 못하는 걸 해결해 줄 이는 예수님만이 있다. 그렇게 우리가 느껴지는 때가 없는 게 아니라 여러 수백 번 수천 번 느꼈다 말이오. 느꼈으나 그걸 우리는 현실에서 다 뺏기고 제재받고 말았고 야단치니까 중단하고 만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것이 우리에게 아쉽고, 그가 부르짖을 때에 환경에서 꾸짖으며 잠잠하라 하니까 제재받지 안하고 그럴수록이 말했습니다. 여기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우리가 이렇게 참 우리의 불행의 원인이 보지 못함이라, 보지 못한 것은 주님만이 해결해 줄 수 있다, 주님의 은혜만이 된다 할 때에 주님을 내가, 주님의 은혜를 내가 받을듯 말듯 해서 받을라고 할 때에 환경의 그렇게 그 방해하는 것을 그럴수록이 거게 제재받지 안하고 더욱 심히 부르짖은 요 신앙이 우리에게 없어서 실패된 일이 얼마나 많았으며, 이라다가 예수님께서 ‘오라’ 하니까 그가 예수님이 오라는 그 소리를 듣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음성 거기는 이랬지만 우리로 말하면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영감을 우리에게 주신 때가 많았다 그말이오. 영감을 주셔서 그 영감이, 주님의 영감을 받을 때에 이라면 되겠다 하는 우리가 영감을 받아 가지고 시작도 해 봤고 별별 일 했지마는 우리는 자꾸 중단했어.

영감을 받았을 때에 분명히 우리의 생활이 완전히 변해지고, 사람이 변해지고, 전체가 변해질 수 있는 그런 영감이 우리에게 접선됐을 때에 반드시 사고 생겼고, 사고가 생길 때에 그 사고에 제재받았지 그 사고에 제재받지 안하고 더욱 더 심히 부르짖어서, 요 바디매오의 형편을 보면은 옆에서 그라면 뭐 이제까지 눈 멀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멸시합니다. 그 나라에서는 문둥이 소경 이런 거는 성전에 못 들어옵니다. 사람축에 못 가고 구걸이나 하는 거는, 구걸할라 하면 냅두지마는 아주 천대로 여겼다 말이오.

이런데 호령치고 야단치고 잠잠하라 하는 걸 볼 때에는 옆의 사람이 뚜드릴까 별 두려움도 생겼고 별별 일이 생겼지마는 이제 예수 못 만나면 나는 살아봤자 소용 없다. 자기가 예수님 만나서 눈 뜨는 것과 죽는 것과 그 두 가지를 생각할 때에 죽어도 눈을 떠야 되지 죽는 거, 사는 것보다도 눈 뜨는 게 크다 말이오. 그러니까 생명보다 주님을 만나는 게 크기 때문에 요렇게까지 해 가지고 부르짖었으니 부르짖은 그 신앙은 참 우리에게는 부럽다, 요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셨다.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오라는 소리를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이 오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 난 다음에는 자기의 겉옷을 버리고 달아났다. 예수님께로 달려갔다.

겉옷을 버리고 달렸다 해. 겉옷을 여기 뭐, 하필 그 겉옷은 뭣 때문에 기록했을까? 그 소경이니까 겉옷이라면 자기의 재산 중에는 제일 보배입니다.

겉옷이라 하는 것은, 거지들 겉옷이라 하는 건 그게 뭐 두루막도 되고 외투도 되고 요도 되고 또 이불도 되고 다 되는 것이오. 그거 하나가 제 소유입니다.

그러니까 더우면 똘똘 뭉쳐 그거 짊어지고 가고 뭐 그거는 안 놓고 갑니다.

이런데 자기의 그 필요한 귀중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주님에게 달려갔으니 이것을 주님이 칭찬하신 것이 아닌가? 우리는 지금 수십 년 예수 믿는다 해도 자기에 필요 있는 거 하나 가진 사람도 있고 둘 가진 사람도, 어떤 사람은 필요한 게 예수보다 나은 것이 뭐 열도 스물도 넘은 사람 꽉 찼고, 예수보다 나은 거 하나 있는 사람 별로 없고, 모든 것보다 주님이 낫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지식적으로 해결하고 순간적으로는 이렇지마는 나중에 실상 행할 때 보면은 생각하는 것이나 마음에 내 마음도 내 행동도 점령한 것은 예수님이 점령한 것보다도 딴게 점령한 시간이 많은 것을 봐서 평가적으로 그게 말로만 그랬지 사실 실상에서는 그것을 더 높이 평가한 게 분명하다 말이오. 왜?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를 점령한 시간보다도 그런 것이 나를 점령한 시간이 많았더라 그거요.

이래서, 버리고 떠났는데 예수님이 묻기를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랄 때에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님이 무슨 소원을 원하느냐? 그 소원하는 거 이 거지니까 필요한 게, 거지니까 필요한 것이 많지 않겠소? 거지니까 필요하고 오만 거 다 필요 있지마는 그는 단일 소원, 단지 내 모든 것은 보지 못함에 있다.

보지 못함에 원인되어 있는 그것을 세상이 방해해도 방해받지 안하고, 보지 못한 것이 불행의 원인이라는 이 원인의 그의 그 자극은, 원인의 이 감격은 세상에 어떤 방해나 반대 그것보다도 강했고, 또 자기의 모든 소유보다도 강했고, 또 예수님을 만날 때도 오만 거 다 있지마는 다 안 하고 ‘선생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요거 단일로 소원했기 때문에 과연 이 믿음을 우리가 가지면 오늘 우리도 눈이 떨어지겠다.

우리도 이 소원을 가졌으면 눈이 떨어지겠고 눈이 떨어졌나 안 떨어졌나 증거는 눈이 떨어졌으면 길에서 예수님을 좇았으니까 우리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요동치 안하고 따라갈 것이다 하는 요것이 전부 이 눈먼 데 있는 것이니까 요것이 아무래도 우리가 지금 이것을 가져서 새로 이 사람들이 되어야 이 계시가, 이 계시가 우리에게 주시는 이 복음을 우리가 받는 것이지 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이 계시가 우리에게는 복음이 되지 못하고 우리를 나중에 마지막에 심판하는 정죄의 율법이 되고 말지, 이치로만 알고 여게 대한 속에 요 은혜의 능력을 받지 못하면 우리가 비참하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불행의 원인이 보지 못함이라는 그것을 깊이 느꼈고, 이 원인은 예수님만이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그가 확고히 느꼈고, 이래서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을 때에 모든 환경이 방해했지마는 방해에 제재받지 안하고 방해를 극복했고, 그라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눈 띄워 줄라고, 눈 띄워 줄라고. 오라 한다는 그 음성을 듣고 난 다음에는 그는 모든 걸 다 버려버리고,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걸 버려버리고 주님에게 달려갔고, 달려가 가지고 주님이 ‘뭐 원하느냐?’ 이라니까 다른 것 다 두고 ‘선생님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할 때에 주님이 ‘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이래 말씀하셨으니, 오늘 우리에게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다’ 하는, 주님이 우리에게 기뻐하셔서 이렇게 즉시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심령의 눈을 환하게 밝혀 주는 이것은 이 바디매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요 믿음을 우리가 갖추면 우리도 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하는 것을 믿어집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 다섯 가지 요 믿음, 예수님이 칭찬한 것은 우리가 이 성경에 나타내 놓은 거 볼 때에는 다섯 가지 믿음입니다. 요 다섯 가지 믿음을 오늘 우리 가지면 분명히 우리가 해석을 할 때에, 우리가 비판하고 평가할 때에 요 다섯 가지 믿음 가지면 분명히 우리가 눈이 뜨입니다. 눈이 뜨이면 우리는 생사를 물론하고 예수님 따르게 되는 것은 필연한 것입니다. 이런데 우리가 요 계시를 받아 가지고 우리 복음으로 써서 효력있게 가져야 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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