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준비

 

1987. 7. 25. 새벽 <토>

 

본문:베드로후서 3장 10절∼13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 구원에 대해서 금 맡긴, 금을 맡긴 그 금 맡긴 비유에 보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받은 꼭 그 배수를 다 노력해 가지고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 양이 적지 달란트도 같이 받았고, 또 주인과의 관계도 약속도 같이 받았고, 또 다시 주인이 올 때에 영접도 했고, 같이 서로 계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노력으로 받은 자본에 배수를 남기지 못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있는 것도 다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쫓겨나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며 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는 순전히 행위구원, 행위에 대해서 결정된 것입니다. 뭐 주인과의, 종과 주인의 관계도 꼭 같고, 달란트도 양만 적지 받기는 꼭 같이 받았고, 또 뒤에 올 때 영접도 했고, 또 계산도 했고 이런데 다만 그 노력으로 장사해서 이를 남기지 못한 고거 하나 가지고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났습니다.

이런 것도 보면 기본구원 곧 영 구원과 행위구원이 다른 것을 나타냈습니다.

우리의 영 구원은 본인이 알기 전에 벌써 대속이 됐고 또 본인이 알기 전에 영이 중생되었고 다 중생된 지 후가 아니면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소망하지도 못하고 또 그런 관계를 맺지도 못하고 또 달란트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불택자들은 이거 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그 재료를 거석한 것인데 그런 걸 받지도 못합니다.

이러니까 이것도 지금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이것이 영 구원을 얻었느냐 안 얻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일반적으로는 영 구원도 그는 얻지 못하고 아주 멸망한 사람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 일반 교리에서 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본다면 과연 우리가 받은 바의 은혜에 백프로 완전히 배수를 우리가 남겼느냐 하면은 거게 대해서 미달된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데에는 주님이 주신 그 받은 바의 그 은혜를 다, 받은 바의 은혜를 자기가 노력을 해 가지고 배수를 남겼다 하는 그것이 우리가 듣고 지금 조심할 일입니다.

뭣이든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것을 주님하고 뒤에 계산할 때에 주신 은혜의 배수가 됐다 하는 그것이 고거 우리의 충성을 두고 말하기 때문에 어쨌든지 받은 바의 그 은혜를 우리가 하나도 버리지 안하고 그 은혜를 우리가 힘입고 또 사용해서 그 주신 은혜대로에, 은혜와 꼭 같은 그런 무엇을 하나 만들어서 해야, 주신 은혜대로 그것이 다 성화가 돼져야 된다 하는 그런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썩어질 것을 받아 가지고 썩지 아니할 것들을 만들 우리들입니다. “썩어질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하는데 썩어질 거 맡긴 그것이 다 썩지 아니할 것으로 그렇게 성화되면 그 사람의 구원은 다 완전한 구원으로서 영광이 될 것이고 또 노력하지 안해 가지고 그걸 만들지 안하고 내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그대로만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을 믿고 자기 노력이 없는 사람은 다 있는 것도 빼앗기고 쫓겨남을 당했으니까, 그 간단하게 세 가지로 말했으나 그러면 우리는 거게서 닷 냥중 두 냥중 얻은 거와 같은 그런 부분으로서 우리가 받은 바의 은혜를 완전히 신령한 것으로 이 성화시킨 것이 백프로 되는 사람도 있겠고, 또 한 달란트 받은 거와 같이 이루지 못해서 구십프로 되는 사람도 있고 뭐 칠십프로 팔십프로 육십프로 오십프로 삼십프로 이렇게 차이 있게, 자기가 노력한 대로, 자기가 노력한 대로 주인이 올 때에 칭찬받고 “네가 적은 것으로 충성했기 때문에 내가 많은 것으로 준다” 많다 적다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다 이 시공이 제한되어 있는 그런 은혜지마는 앞으로 신령한 것은 다 시공을 초월한 영원 무궁한 완전한 것을 말해서 그것을 큰 것이라 많은 것이라 지금은 적은 것이라 그렇게 차이 지워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게서도 우리가 알 것은 어쨌든지 우리 노력이 있는 그 노력이 있는 것만치, 노력이 있는 것만치 그 주인과 다시 관계가 맺어진다. 처음에 주인과 맺어진 관계도 있어서 그 재간대로 닷 냥중 두 냥중 이래 준, 한 냥중 이래 준 인연이 있고 서로 관계가 맺어졌지마는 자기 노력을 통하고 난 다음에는 다시 주님과 관계가 맺어진다.

그러면 처음에 맺어진 관계가 있고 뒤에 맺어진 관계가 있으니 처음에 맺어진 관계는 여게 기록되지 안했기 때문에, 주인과 관계 맺어졌으니 우리는 알든지 모르든지 주님과의 이 대속의 택함을 받았고, 또 대속함을 입었고, 또 우리가 벌써 중생돼서 기본구원 얻었기 때문에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맺어져 있습니다. 그 맺어진 것은 그뭐 많이 받고 적게 받은 것뿐이지 관계는 맺어져 가지고 있습니다.

또 많이 받은 사람이나 적게 받은 사람이나 자기가 노력을 한 결과에 적게 받은 사람이 노력한 거나 많이 받은 사람이 노력한 거나 그것에 대해서 대우는 꼭 같았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한 것도 같았고, 또 많은 것으로 너희에게 갚아 준다고 하시는 그것도 같았고, 또 주인의 즐거움에 와서 참여하라 하는 그것도 같았습니다.

그것은 백프로 한 사람에게, 한 사람이 있고 하나도 못 한 사람이 있고 이러니까 백프로 한 사람과 못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이 중간이 또 있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그저 우리에게 비유해서 가르쳐 주신 것인데 어쨌든지 사람들의 노력 전, 노력 전 하나님과의 관계 맺어진 것이 있고, 노력하기 전. 사람의 노력이 하나도 가하기 전 주님과, 주인되신 주님과의 관계 맺어진 것이 있고 관계 맺어진 그 이후에 자기의 노력으로 인해서 다시 주님과 관계가 맺어진다 하는 것을 우리가 여게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본구원 얻고 난 다음에 이 행위, 우리 행위, 우리 건설, 행위와 건설구원에 자기가 어떻게 노력을 했든지 노력한 그대로 다시 주인과 영원한 관계는 맺어진다 하는 이것을 여게서 우리가 깨달을 거는 뭐이냐? 이렇게 주님이 주신 바의 이 은혜를 다 하나 받았으면 하나 둘 받았으면 둘 받아 받은 거 이 썩어질 거, 이 썩어질 거 이런 것을, 다 없어질 거 이것을 우리가 받아 가지고 신령한 것으로 개조돼야 되겠다.

또 우리가 주님에게 받은 바의 그 신령한 은혜 그것이 또 신령한 은혜로 받은 것은 그것이 이 모든 시공에 제한을 받는 이 땅의 것, 신령한 거 받은 것은 땅의 것으로 그것이 다, 땅의 것이 돼서, 말하자면 성령의 감화받은 그 성령의 감화가 그 성령 감화받은 그대로 있으면 아무 가치가 없고 성령 감화 받은 그것이 없어질 이 땅에 속한 것이 다 성신의 감화로써 변화되는 거.

그러기 때문에 신령한 것은 이 모든 이 세상 것이 제한되어 있는 이것으로서 이것화되는 거, 또 제한된 이것은 신령한 것으로 화되는 거 이것이 우리의 노력입니다.

그러면 성신의 감화를 받은 것만치 그 사람이 멸망받을 사람에게나 멸망받을 사건에게나 멸망받을 그 행사에나 다 이 모든 것이 받은 신령한 은혜화된다 그말이오.

그러면 영감을 받은 대로, 진리라든지 영감은 다 신령한 것이요 영원한 것인데 영감과 진리 받은 그것이 이 썩어질 이 모든 세상 것이 다 영감화되고 진리화되는, 신령한 것은 이 모든 물질화돼 가지고 물질과 조화가 가져야 되고 이 썩어질 이것은 또 받아 가지고 신령한 것으로 조화가 돼야 되고 이렇게 자기의 노력으로써 변화될 수 있다.

그러면 신령한 것은 이 모든 신령치 아니한 것과 이와같이 조화가 돼야 되고, 조화가 되어지면, 조화가 되면 이것은 뒤에 가서 뭐이냐? 조화되면은 이것은 썩을 것을 심어 가지고 썩지 아니할 것을 거둔다 하는 것이, 그거는 뭐이냐 하면 신령한 거 받은 그 힘을 가지고 썩을 것이 심어지게 되고 심어짐으로써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추수하게 된다 하는 이것은 다 우리 노력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노력이 있기 전 관계와 인간의 노력이 첨부된 그 후에의 주님과의 관계가 다르다 하는 것을 우리가 요것을 알고 준비해야 되겠고, 그러면 나에게 무슨 이 육체적으로 이 세상에 주신 자기 재간이라든지, 자기의 물질이라든지, 자기 건강이라든지, 자기 시간이라든지, 받은 그것이 다 그대로는 다 멸망받고 말 것인데 그것이 신령화돼야 되겠고, 또 예수님의 구속받은 것은 신령인데 구속받은 신령한 것이 이 세상에서 구속받은 신령한 그것이 이 육체도 구속화돼야 되겠고, 또 우리의 모든 소유도 구속화돼야 되겠고, 우리의 활동도 다 구속화돼야 된다 하는 이것은 다 우리의 노력으로 이와같이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러기 때문에 노력이 하나님과의 근본 관계 맺은 그 관계 그 뒤에는 노력 여하에 따라서 주님과의 관계가 새로 맺어지고 다시 되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칭찬받고 또 많은 그 보상을 받고 또 주인의 즐거움에 영원히 같이 참석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그 노력, 인간 노력의 이전에는 같았는데 노력 이후에는 완전히 차이 있어서 하나는 슬피 울면서 이를 가는 바깥에 쫓겨나게 됐다 이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또 어떤 데는 말하기를 “집짓는 거와 같은데 하나는 불탈 요소로 지어서 자기 공적이 다 불탔기 때문에 해를 보고 공적이 남아 있는 사람은 상급을 본다.

그런데 공적이 다 불타면 저는 구원을 얻으나 불 가운데서 구원 얻은 거와 같다.” 그렇게 말씀했어.

불 가운데 구원 얻는다 하는 거는 불 가운데서 구원 얻는 게 아니고, 이거 비유입니다. 불 가운데 구원 얻는 거와 같기 때문에 불 속에 있다 말이 아니고, 불 속에 있다, 이거 본문에 그래 놨어. 불 속에 있다 말이 아니고 이거는 불 속에서 구원 얻은 거와 같다 하기 때문에 불 속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와 같은 어쨌든지 불 속에 구원 얻으면 뭐 구원이 좋고 평안할 리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구원인데 그 평안할 리가 없는 것은 기본구원의 평강은 얻지마는 자기가 노력해 가지고 건설구원의 노력구원의 그 평강은 얻지 못한다 하는 것을 그것을 여게 밝혀서 말했습니다.

또 “이 영생 얻을라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이 영생이 이루어진다” 또 말씀하시기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니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다” 또 이와 “모든 것이 다 불탈 터인데 거룩과 경건이 준비되면은 모든 것이 다 불타지마는 그는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구원으로 받게 된다” 이렇게 여러가지로 말씀을 하신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우리가, 그 여러가지로 비유한 것은 이 각도에서 우리에게 나타내서 말씀했고 저 각도에서 나타내 말씀했고, 이 주먹이 있으면은 주먹의 요 모때기로 가지고 말한 것 있고 요 모때기 말한 것 있고 요 모때기 말한 것 있고, 모때기 요 모든 모때기를 말한 거 있는데 다 모때기 모때기 있지만 그것이 실상은 한 덩어리라. 파고 들어가면 내나 모때기는 다르지만 속은 하나라.

하나라 하는 이거 모양으로 이모 저모로 말했는데 그것을 연구해서 파고 들어가면 그 모든 비유로 이렇게 말한 것이나 모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나 그 모든 것이 속은 하나입니다. 단일성입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우리가 노력하는 게 문제다.

또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실 때에 그때에 대환난이 있다. 대환난이 있어서 자기의 교리와 신조를 변경하지 안하고 그 교리와 신조를 지킬라고 하면 다 목베임을 당하게 된다. 다 순교를 당하게 된다. 또 그 말씀도 했기 때문에 그 말씀도 우리에게 또 해당된 말씀이라 그거요.

또 이제 예수님의 재림 때가 되면은 이 모든 아마겟돈의 마지막 대환난의 전쟁이 있다. 그러면 그 전쟁으로 불택자들은 거의 다 죽고 나머지기는 하나님께서 다 또 인제 불심판으로 다 멸해서 멸하게 된다. 그러면 이런 것이 다 여러 각도로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을 종합해서 파고 들어가면 속에는 하나입니다.

어쨌든지 예수님 믿는다고 박해가 와서 목을 벤다고 해도 목을 베는 일을 닥쳐도 상하지 아니할 사람, 목을 벨라고 해도 상하지 아니하는 믿음, 요동치 않는 믿음, 또 변동치 아니하는 그 의, 요동치 않은 그 성화, 그라면 이 모든 개적으로 믿음의 박해를 인해서 어떤 환난, 고문과 고형이나 또 지금으로 말하면 앞으로 뭐 독침이나 또 독약을 먹여 가지고 우리를 이 마음이 변화하게 하기 쉬운데 물론 고문과 고형으로 여러가지 뭐 전기 고문이나 이런 것 다 오만 그런 방식이 있어서 고문이 있겠는데 그런 고문과 고형에서 멸하지 안하고 요동치 않는 신앙, 변동치 않는 신앙, 또 변동치 않는 기쁨, 변동치 않는 소망, 변동치 않는 담대와 평강, 변동치 않는 무슨 이런 개적인 어떤 박해가 와도 그 박해가 해하지 못하는, 그 박해의 종이 되지 안하고, 그 박해 그거는 다 죽음에 속한 것인데 그 죽음에 속한 그런 데 해를 받지 안하고 자기는 신앙을 지키니까 다 목베임을 당한다.

그러면 그런 그 시험이 와도 그 시험에 조그만치도 피동되지 안하고 시험의 종이 되지 안하고 그런 시험을 이기고 나는, 이기고 나는 그 구원이 다 자기 구원이다.

그래 가지고 “목베임을 당한 사람들이 다 첫째 부활에 참여해 가지고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그것도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거라 그거요,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데에 자기가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목숨 힘 뜻을 다해서 주님 사랑하는, 그 아무 시험이 없어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그 시험을 하나도 ‘네가 참말로 다해서 사랑하나 안 사랑하나?’ 하는 그런 시험을 해 보지 안했을지라도 다 사랑하는 것으로 준비된 사람, 그러면 그 시험을 보나 안 보나 어쨌든지 다 사랑하는 사람, 그렇게 돼 있는 사람, 또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바라보고 소망하는 거 이런 것을 변동시켜서 없앨라고 하는 여러가지 어떤 박해가 와 가지고, 박해가 와서 그라면은 박해로써 목베임을 당하는 순교를 당해도 그것이 요동치 않는 거, 이것이 우리가 준비가 돼야 된다 말이오. 않는 거.

또, 그러면 마지막으로 아마겟돈 전쟁의 이 마지막 전쟁, 이 전쟁으로서 또 이렇게 큰 환난이 와서 모두 다 전쟁이 되니까 전쟁화되기 쉽다 말이오. 전쟁화되기 쉬운데 이렇게, 그러면 인제 뭐 그것은 그 마지막 전쟁이기 때문에 세계전입니다.

이것이 종말 환난 종말 전쟁인데 또 이 전쟁에 아무 상함을 받지 않는 거, 이 전쟁에 상함 받지 않는 거, 또 전쟁에 상함을 받지 않는 건데, 그러면 벌써 순교도 당했고 불신자가 벌써 이 전쟁으로 마지막에 지금 다 절단나는, “곡식을 거두고 난 다음에 이 포도는 포도즙을 짜는 거게다가 틀에다 넣고 성 밖에서 밟으니까 그 피가 일천육백 스다디온이 흐르더라” 하는 그것이 인제 마지막에 불신자들의 그 모든 전사될 것 인제 그런 것을 가리켜 말하는 건데, 그것이 오고.

최종으로 또 인제 예수님의 불심판 와 가지고 불심판으로 또 이래 오고 이러니까 이것이 다 동시에 될 터인데, 동시에 이런 마지막에 아마겟돈 전쟁이라든지, 믿는 사람의 개적 환난이라든지, 또 자기가 미리 있는 것을 다해서 준비하는 것이라든지, 그러면 거룩과 경건을 준비해서 하는 것이라든지 이거 모든 환난이 다 오는데 그 환난이 꼭 이래 오나 저래 오나 상관이 없어. 한가지입니다.

이래 오나 저래 오나 한가지인데 우리는 그 오는 시간을 우리가 언제 오나 그 시간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시간은 성경이 말한 대로 밤에 올란지 낮에 올란지 오늘 올란지 내일 올란지 모르니까 언제 와도 그 시간은 우리가 상관하지 말라 했어. 상관하지 말고 언제 와도 되도록 준비해라.

또 그러면 그렇게 여러가지 환난이 오면 그 어떤 순서로 오겠느냐? 이 순서 오고 저 순서 오고 그 순서가 어찌 되느냐? 그 순서도 상관 없다.

그러면 우리는 이 환난의 시기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 가질 것 없는 것이 오늘에 오든지 내일 오든지, 또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환난의 시기를 못 만나든지 만나든지 상관 없어. 만나도 못 만나도 상관 없다. 시기도 상관할 것 없이 이런 데에 피동받지 안하고 이런 데에 네가 요동치 않는 그런 정금 같은 그런 신앙을 네가 가지도록 해라.

또, 전쟁이 오는 그 전쟁이, 전쟁을 너는 구경하든지 안 하든지 상관없다. 다만 이 전쟁에 이런 전쟁 시험, 또 개적으로 “주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구원의 역사 때문에 개적으로 그 모든 환난 당해 가지고 당하는 그 환난, 또 전쟁 환난, 불심판의 환난, 어쟀든지 이거는 다 한가지인데 그 어느 것에라도 상해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그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인 것입니다.

그 순서는 어느 순서가 먼저이며 뒤에 되겠느냐 하는 그것은 우리가 그 순서를 우리가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왜 구별할 수가 없느냐? 없는 그 이유는 우리가 성경에 기록해 놓지 안했기 때문에 이런 이런 종류의 어려움의 시험이 있으니까 이런 이런 종류의 어려운 시험에도 자기가 피해를 보지 안할 수 있는, 이런 이런 어려운 시험에도 피해보지 않는다.

피해보지 않는 것은 무슨 피해를 보지 않는 것입니까? 돈 피해보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의 이 육체가 피해보지 않는 것입니까, 뭐 무슨 피해를 보지 않는 것입니까? 어떤 것이 손해보지 안해야 됩니까? 손해보지 않는 것은 곧 믿음 소망, 이 믿음 손해 안 본다 말이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조그마치라도 손상되지 않는 걸 말합니다. 소망도 그런 걸 말합니다. 소망도 우리가 다 주님을 상대한, 주님이 우리 소망의 대상이지 그외 딴거 아니기 때문에. 뭐 세상 소망 그런 거 손해보는 게 아니고. 주님과의 관계 이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손해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손해보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육체나 소유나 생명이 다 손해본다 할지라도 주님과의 관계가 손해되지 안하고 유익이 된다고 하면은 이것은 우리가 손해보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나, 주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나, 의지하는 것이나, 순종하는 것이나, 주님을 높이는 것이나, 자랑하는 것이나, 사모하는 것이나 이렇게 뭐 섬기는 것이나 하는 이런 것이 요동치 않는 그게 우리 손해 안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손해 안 보는 것은 주님을 향한 소망이 손해되지 않는 것이요, 믿음이 손해되지 않는 것이요, 주님을 두려워함이 손해가지 않는 것이요, 사랑함이 손해가지 않는 것이요, 또 의지함이 손해가지 않는 것이요, 우리의 맡김이 손해가지 않는, 그 금방 맡겼다가도, 맡긴 것은 맡긴 그것이 그대로 계속되지 못하고 맡겼다가 도로 찾을 수 있도록 이 세상은 만듭니다. 어쨌든지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 이것을 없애고 변동되고 끊어버릴라고 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시험입니다.

그래서 이 불시험이라 하는 것은 혹독한 어려운 시험을 말하는 것이고 이 전체로 땅위에 우리가 어려움 당하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를 맺는 어려움, 맺는 어려움. 또 주님과의 관계가 떨어지지 않는 그 어려움,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당하는 어려움이요 주님과 관계를 맺기 위한 어려움입니다.

그러면 주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한 그런 어려움이면 그것이 곧 뭐이냐 하면 떨어지지 않기 위한 어려움입니다. 우리 어려움은 전부 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땅위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는 그 어려움을 한 말로 말하면 그 어려움은 무슨 어려움이냐? 그 어려움은 전부 주님과의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는 어려움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말하기를 모든 것은 주님과의 관계를 잘 맺도록 관계를 맺기 위한 어려움입니다.

그러면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지 주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한 어려움이라, 또 관계를 끊기 위한 어려움이라. 이러면 이 끊기 위한 어려움이라면 끊기 어려운 어려움이라 해야 되지 또 금방 끊기 위한 어려움이라 고하다가 또 맺기 위한 어려움이라, 맺기 위한 어려움이라. 그러면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지 어찌 이렇게 말했다가 저리 말했다가 그렇게 두 가지로 말하는가? 이것은 진실 없는 말이라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주님과의 관계를 끊기 위한 어려움이라 하는 그 말은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그 말은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맞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녜, 맞습니다. 그러면 또, 주님과 끊기 위한 어려움이라, 끊을라고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어려움이라. 그런데 그게 그런 게 아니고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견고히 맺기 위한 모든 시험이요 어려움들이라 이 말은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맞는 사람들 손 들어 보십시오. 맞습니다. 그러면 내나 그게 하나입니다. 알겠습니까? 그게 하나.

그러기 때문에, 그러면 그 어려움은 어떤 어려움이 우리에게 있겠느냐 그게 우리 문제입니다. 이 시간도 뭐 시간도 늦게 되나 일찍 되나 그 시간도 우리 상관할 것 없고, 시간도 상관할 것 없고, 또 어떤 어려움의 종류가 오겠느냐 그것도 상관할 것 없고, 또 자기에게는 그런 어려움을 닥치지 안하고 그만 그전에, 어려움 닥치지 안하고 주님 앞에 가게 되는 그런 것도 있으니 그것도 또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알아듣겠습니까? 그러면 그거는 그때를 만나든지 안 만나든지, 그런 시험을 만났든지 안 만났든지, 또 이런 종류 저런 종류의 시험을 어떤 종류의 시험을 만났든지 상관 없다.

다만 뭐이냐? 우리에게는 이런 저런 어떤 시험이 와도 내가 그 시험에게 피해를 보지 안할 수 있는, 그 시험에 그 모든 시험에게 내가 지지 않는, 그 시험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요동되지 않는 그것을 우리가 준비하는 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그것만 준비해 놓으면 뭐 마지막에 불심판이 오든지, 전쟁 심판이 오든지, 개인 고문과 고형의 심판이 오든지, 개인의 고문과 고형의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그 준비라면 불심판 와도 상관 없고 전쟁 심판 와도 상관 없고 그런 거 안 보고 그만 그대로 하늘나라에 세상을 떠나서 가도 상관 없고, 그러면 시험을 한 거나 안 한 거나 받은 거나 안 받은 거나 상관이 없어. 그 준비되는 것이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혹 생각할 때에 ‘이런 시험을 척 쳐서 시험쳐서 통과됐고 또 거기는 시험쳐서 통과 안 된 사람’ 안 되나 되나 실상만 되어 가지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왜? 그거는 주님은 전지자시요 전능자시기 때문에, 전지자요 전능자시기 때문에 꼭 시험을 해 가지고 시험의 그 결과로 실적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실적이 시험하기 전에 그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 다 주님은 어떤 존재라 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심사해서 그 채점, 그 점수 매기는 채점하는 것이 상관이 없다 말이오.

다만 이 시험 있는 그것은 우리에게 관계를 맺기 위해서, 맺은 것을 끊어지지 안하도록 하기 위해서, 또 자기나 다른 사람들이 그 진상을 모르기 때문에 그 진상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 인간 구원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있는 것이지 당신에게는 전지자이기 때문에 아무 그런 게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은 혹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런 시험도 있고 저런 시험도 있고 자꾸 이래 말하니까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지 어찌 이리 되면 어찌 되느냐? 또 그때 그러면 선후는 어찌 되느냐? 선후는 어찌 되느냐? 또 그 시기는 어찌 되느냐?’ 시기도 알 필요 없고 선후도 알 필요 없고 한목 닥치든지 순서적으로 닥치든지 어느 것이 앞에 닥치든지 뒤에 닥치든지 상관 없다.

만일 “네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준비해야 영생이 된다” 다해서 준비해야 영생된다 하는 요 말씀이 와 가지고 우리를 심사할 때라도 다했으면 문제 없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 가지고 내게 와도 내가 다했으면 그게 준비가 됐다 그말이오.

되고, 또 “네가 주의 이름으로써 목베임을 당한다” 그라면 예수 믿는 일로 인해서 여러가지 고문과 고형이 있어 가지고 그뭐 온갖 박해, 독약을 먹여서, 독약을 먹여 가지고 신앙을 꺾을라 한다든지ㅡ저 저분, 졸지 마. 이게 안 들리면 울어 쌓는 거 소용 없어, 찔찔 눈물 흘리는 거 아무 소용 없어. 그까짓 거 눈물 흘리는 눈물이 무슨 가치 있는 줄 알아? 눈물이 가치 없는 거라. 이 진리를 깨닫고 믿는 게 가치 있어! 그까짓 거 눈물이 무슨 가치 있어, 있기를? 찔찔 울기만 하면 되는가? 그거 안 돼.

외나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눈물이 안 나와. 이를 갈아붙이요, 뭐. 이를 갈아붙이고 이래 모든 것을 할라 하면 어데 눈물이 나와? 눈물 그거는 평안하고 좋아야 눈물 나는 것이지. 그까짓 거 그 근방에 가지도 안한 것입니다.

이 개인 고문과 고형에 뭐 독약이나 뭐이나 이렇게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해서 준비한 그 사람이면 독약을 먹여도 상관 없고, 독침을 찔러도 상관 없고, 고문과 고형이 와도 상관이 없고, 또 이 혹독한 전쟁이 와 가지고 전쟁이 와서 전쟁 분위기 속에 들이말아 가지고 그만 거게서 속화돼 가지고 떨어지기 쉽다 말이오. 사람이라는 것은 이 환경에 피동을 받기가 아주 쉽습니다.

환경 피동받기 쉽기 때문에 이 환경 피동 받지 않는 이 연습을 우리가 그래 평소에 자꾸 해야 됩니다.

이거 연습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차를 타고 오다가도 그만 잘못하면, 사람 척 만나면, 사람 척 만나면은 나는 그만 주님 잊어버리고 사람하고 말합니다.

사람하고 말해 척 말을 걸고 난 다음에 생각하니까 ‘아이구, 내가 지금 이 사람하고 지금 이것으로 대화하고 있는 것은 이 사람에게 피동됐나 주님에게 내가 피동됐나?’ 조사해 보면은, 사람에게 피동됐으면 그거 뭐입니까? 그 환경과 주위와 현실에 피동된 거 아닙니까? 이러니까 이런 일들이 많다 말이오. 얼마든지 다시 연습하고 연습하고 얼마든지 연습을 할 수가 있다 그거요.

이래서, 이것 다해서 한 준비, 다해서 한 준비면 또 개인 신앙으로 뭐 독침 시험이 오든지, 독약을 먹여 가지고 시험이 오든지, 또 어떤 그 고문과 고형의 시험이 오든지, 장기간 고문의 시험이 오든지 상관이 없다 말이오. 이 도가 다 하나라.

다해서 준비한 자는 무슨 시험이 와도 상관 없고, 그래 가지고 목벤다는 그런 게 와도 상관 없고, 또 이 마지막에 아마겟돈 전쟁의 이 여러가지 어려움이 와도 상관 없고, 상관이 없고, 또 마지막에 불심판이 와 가지고 불심판으로 멸망한다 할지라도 상관이 없어. 왜? 다 그런 것들을 다 초월한, 그런 것들에 초월한 이질의 것이 됐기 때문에.

이질의 것이 뭐입니까? 그런 것들은 다 소멸될 요소들인데 소멸될 요소를 초월한 이질의 것이 됐다, 이질의 것이 됐다 말은 다 신령한 것이 돼 버렸다 말이오.

신령한 것이 돼 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해서 마련한 것이요 불에도 타지 않는 것이요 불에 타지 않는 것은 고문과 고형에도 상관 없는 것이요 전쟁에도 상관 없는 것이라. 그러면 이것이 된 것만치 자기 구원인 것입니다, 이것이 된 것만치.

그런데 그 한 가지 의문되는 거, 이거 어떤 사람이 여기 이런 걸 기록했어요.

이것은 ‘불심판이 오면 믿는 우리는 피합니까 다 같이 타서 죽습니까? 그라고 나서 다시 부활합니까?’ 이렇게 말했는데, 왜? 그 마음에 조금 거기 대해서 조금 걱정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 했는데 이것은 아직까지 어리니까 하지만 그게 상관이 없다 말이오.

여게서 대답하는 것은 그것이 어느 것이 앞이고 어느 것이 뒤다, 그때 불타 죽는다 어짠다, 타서 죽으나 안 죽는 거라야 됩니다. 죽지 안하는 것이라야 돼요.

그것이 신령한 것으로 이와같이 다 이래 된, 이런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그 존재가 된 것은 불이 오나 안 오나 상관이 없어.

상관이 없고 다만 그런 것이 온다 해도 도로 그 사람에게는 기쁘고 즐거움이 돼서, 그러면 그때 신령한 것으로 변화되는 것은 자기가 죽어서 변화되는 것도 있고 또 사람이 볼 수 있는 꺼풀을 휘뜩 벗어버리고 그렇게 변화되는 것도 있고 어쨌든지 이 껍데기 이거는 벗습니다.

벗으나, 그러면 불에 같이 타서 벗느냐? 타지 안한다 말이오. 불에 타지 안해.

불에 타지 않고 벗습니다. 불의 해를 보지 안하고, 불에 대해서 해를 보지 안하고, 그 불에 대해서 두려움을 보지 안하고, 또 불의 두려움 보지 않는 그 두려움 보지 않는 것은 그 고문과 고형을 주는데, 고문과 고형을 주는데 그 고문과 고형이 그에게 고통이나 두려움이 되지 않고 두려움이 되지 안하고 감사와 기쁨이 되어지는 것, 감사와 기쁨이 되어지는 것은 내나 이 불심판이 와도 감사와 기쁨뿐이지 그에게는 고통이 하나도 없어. 또 전쟁으로써 이렇게 한다 할지라도 그 전쟁에 기쁨이 있지 두려움이 있지를 안해.

예를 들어서 하나 비유컨대는 홍해 강변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있었는데 꼭 같이 그뭐 추격도 당했고 홍해도 앞에 가로놓였고 이랬지마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심한 고통이 됐지마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되지 안하고 기쁨이 됐다 말이오. 기쁨이 된 것은.

그러면 하나는 고통이요 하나는 기쁨이 됐다, 이거 차이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런 게 불타지만 불타지 안할 것으로 됐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불타는 것이 기쁘고, 불타는 것이 기쁘고, 이 전쟁 오는 것이 기쁘고, 또 고문과 고형이 기쁘고, 왜 기쁩니까? 고문과 고형이 오는 것이 왜 기쁘냐 하면은 그것이 주님과 가까워지는 것이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기쁘고 즐겁다 그거요.

자기가 아무리 주님을 사랑할라 해도 그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와 모든 조성이 안 되는데 자기가 주님에게 대한 소망이나, 주님에게 대한 간절이나, 주님에게 대해서 자기 소욕, 그 욕심, 그 욕심이 달성돼.

그러면 이거 그 불심판이 온다든지 개인의 그 고문과 고형이 온다든지 전쟁의 어려움이 온다든지 그 어려움이 올 때에 욕심은 두 가지 욕심인데, 간단하게 말하면. 육체의 소욕을 가진 사람이 있고 성령의 소욕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럴 때에 성령의 소욕 가진 사람은 그럴 때가 어떻겠습니까? 성령의 소욕을 가진 사람이 그때가 어떤 때입니까? 성령의 소욕을 가진 사람은 그때가 어떤 때요? 고통스러운 때입니까 크게 기다리던, 장사꾼으로 말하면, 박 목사님 말하기를 대목장이라 그렇게 말해요, 대목장이라. 박윤선 목사님은 그게 대목장이라. 왜? 장사꾼이 내치 장사하다가 대목장 뭐할라고? 대목장에는 지금 한번 인제 한번 한 세월 보고 자기 소망하던 것이 성공이 되겠다 그말이오. 그때 수입이 아주 아주 독특하게 수입이 있을 수 있는 그걸 대목장이라 하지 않습니까? 이 성령의 소욕은 그때 자기 소욕이 달성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의 소욕을 가진 사람은 기쁘고 즐겁고 육체의 소욕을 가진 사람은 그 모든 것이 다 절단났기 때문에, 저의 욕심이 절단났고, 욕심으로, 욕심하는 것이 다 절단나 버리고, 그 욕심해서 만들어 놓은 게 절단나 버렸고, 이제 이 성령의 소욕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것이 그대로 더 영광스럽게 되어지고 또 자기 만들고자 하는 그 욕심이 성공이 되게 되기 때문에 기쁘고 즐겁다 그거요.

그러니까 성령의 소욕의 사람과 육체의 소욕의 사람이 그 꼭 같은 것을 당하는 데에 그때에 그의 희로애락은 다릅니다. 그 다 같이 당했지마는 하나님을 믿는 모세는 ‘하나님의 솜씨 보자’ 이래 기뻤는데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꼭 같은 입장에서 고통을 당했다 그말이오.

그렇기에 이것이 뭐이냐? 꼭 같은 말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하나님이라면은 주님이신데. 주님이시요 곧 삼위일체이신데, 성부나 성자나 한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사랑하는 것이 성자 사랑하는 것이요 성자 사랑하는 것이 성령하는 것이요 하나인데, 내가 뭘 말하다가 말했지? 그거 내가 뭘 말하다가 또 맥을 내가 깜깜하다, 잊어버렸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으로서 그 사람이 성령의 소욕이 된 사람과 육체의 소욕이 된 사람이 다 같이 당했는데 그 다 같은 현실을 당해도 육체의 소욕이 근심할 때에는 성령의 소욕은 기뻐하고 성령의 소욕이 근심할 때에는 육체의 소욕은 기뻐합니다. 정반대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것이 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 가지고 이와같이 해야 영생이 된다는 것은 벌써 영생이 된 그것은 영생이 된 것은 영원히 변동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불로 변동시킬 수 없고 시간으로 변동시킬 수 없기 때문에 영생입니다. 어떤 피조물도 그것을 변동시킬 수 없는 그 실력이라야 영생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노력에 된다 그말이오. 우리의 노력에 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노력하면 그 일이 된다 그말이오.

그 일이 되는 것은, 그 일이 되는 것은 그러면 우리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을 다하면은 그 일을 조성하느냐?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본구원으로 주신 그 구원을 자기가 믿는 그, 믿는 믿음을 할라 하면은 그걸 다해야 믿음이 되어지고 은혜로 주시는 것을 자기가 받는 데는 다해야 공짜배기로 받지 그러면,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을 다했으면은 자기 다한 그 다함의 그 가치로, 다함의 공로로 자기 영생을 만든 그것이 조그마치라도 털끝만치라도 있는가? 없습니다. 그거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인데 은혜로 공으로 주시는 것을 내가 받는 데 이것을 다할 때에, 다할 때에, 다할 때 그게 뭐이냐 하면 받은 은혜로써 성화된다 말이오.

받은 은혜로 다할 때에 받은 은혜로 성화되지 다하지 않으면 성화가 될 수 없는 것은 이거 순전히 주관으로 되었고 땅에 속했기 때문에 성화가 안 돼. 다하는 그것이 성화되는 방편이요 순서라 그말이오. 다하는 그것으로써 그 은혜화되어지는 것이지, 은혜화되어지는 것이지 제가 뭐 만드는 게 아니라.

만일 제가 이걸 다해 가지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과 힘을 다 이것 다 하는 것은, 다해 가지고 만든 것이라고 하면은 그것이 아무리 잘 만들어져 봤자 원료가 내나 그 근본이 자기 것으로 됐기 때문에 인간만치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거는 다하는 것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다하는 것이 자기 부인하는 것이라 말이오.

알겠습니까? 다하는 것이 자기 부인하는 것이라.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가 영접하고 자기 부인하기 때문에 다해야 이것이 하나님이 이 은혜로 주시는 피와 성령과 진리의 이 은혜화돼서, 다해야 주님의 것이 되고, 다해야 영감의 것이 되고, 다해야 진리의 것이 되기 때문에 다해야 진리로 물드는 거라 말이오.

그러면 물들일라고, 물들일라고 감화시켜 성화시킬라고 할 때에 이제 자기가 다하면 지금 물들이러 가져오는 거라.

자기가 원단을 가지고 만일 흰베를 한 필을 가져왔든지 한 필 가져왔으면은 그 베를 다해 가지고 지금 염색집에 가져 갔으면 거게서 새파란 물을 들인다 합시다.

물을 들이면 그 베가 물을 들인 게 아니라. 베를 다 갖다 준 것은 뭐이냐 하면은 다 갖다 주고 보니까 뒤에 가서 아주 새파란 베가 돼 버렸어.

새파란 베가 됐으면 그 베가 새파란 베를 만든 것입니까 베는 그 새파란 물에게서 감염돼 가지고, 물에 감염돼 가지고 새파래졌습니까 베 제가 새파랗게 했습니까 어떻습니까? 그 물이 푸르게 했지 제가 한 게 아니라 그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다한다는 것이 이것이 진리화 영감화 그리스도의 대속화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이것을 바치지 안하면 대속화되지 안하기 때문에 이거 바치는 것이지 이거 바치는 그거 가지고 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요것을 잘 구분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이래서 어쨌든지 우리는 자꾸 이모로 저모로 해 가지고, 이제 우리 구원은 뭐이냐? 우리 구원은 영생이라 하는 것은 많이 이루어졌든지 작게 이루어졌든지 이루어진 것은 이 불로 태워도 타지 안하는 것이요, 시간이 가도 쇠해지지 낡아지지 안하는 것이요, 또 이 세상이 다 달라들어 가지고 뭐 전쟁이 야단지겨도 그런 데 아무 피동이 없는 것이요, 또 고문과 고형 그런 게 와도 그런 데 상관이 없는 것이요, 또 이 불심판으로 우주가 다 전부 불탄다 할지라도 그런 것이 상관이 없는 그것을 초월한 이 딴 재료, 딴 원인, 이 고차원의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니까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준비할 때라 그거요.

이러니까 지난밤에 말씀한 거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우리가 두려움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첫째 우리 준비할 것이 뭐이냐 하면 이 재림에 대한 그 두려움의 실상을 우리가 가지고 실상같이 우리가 두려워져야 되겠다 말이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미친 사람이라 어찌 하든지, 미친 사람이라 하든지 어짜든지 그 실상을 보고 지금 두려워하는 사람이 돼서, 그 실상을 보고 두려워하니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두려워하는 것은 멸망한다 하면은 낙망이 되지마는 두려워하는데 거게서 우리는 준비할 수 있는 거룩과 경건 이 준비로, 두 가지로 가지고 그걸 면할 수 있는 준비하는 길이 있다면은 자기가 힘있는 대로는 하다 못 해도 다 기울일 것 아닙니까? 다 기울이게 된다 말이오.

다 기울이게 되면, 이거 다 필연적이라. 예수님의 재림의 이 불심판을 믿는다고 하면은 필연적으로, 그뭐 애쓰는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두려움 오고 거게 대한 두려움이 온 것만치 필연적으로 그 피난 방편이 되는 거룩과 경건의 이 준비가 필연적으로 되고, 거룩과 경건이 필연적으로 됐으면, 거룩과 경건을 자기가 참으로 만들었으면 필연적으로 이 모든 소망이 주님에게 있어 주님 오기만 기다리고 세상에는 쓸쓸하고 외롭고 그뭐 아무 소망이 없고 가봐야 정이 안 붙고 자꾸 박해밖에 안 오니까, 그 대립이 되니까, 암만 뭐 결혼 처음에 할 때는 좋아서 뭐뭐 서로 못 죽을 만치 이래도 이제 서로 자꾸 이렇게 미움이 쌓이고, 자꾸 이래 자꾸 미움이 쌓이고 서로 정이 떨어지고, 의견이 말이요, 의견이 또 대립되고 의견이 대립되고 자꾸 의견이 대립돼. 의견 대립도 오래 되면은 이혼합니다. 의견 대립도 오래 되면 이혼해요. 성질 대립도 오래되면 이혼됩니다. 사상 대립도 오래 되면 이혼돼요. 그러기 때문에 이 사상과 모든 게 하나되면은 붙는데.

자연히, 아무리 그 사람하고 나하고 친하다 할지라도 자꾸 의견이 틀려, 사상이 틀려, 성질이 틀려, 소망이 틀려, 이 모든 게 틀리면 자꾸 들어붙습니까 서로 성글어지고 떨어지겠습니까? 마지막에는 이혼합니다. 안 하고 안 돼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룩과 경건을 준비할라고 하니까, 거룩과 경건을 준비할라고 하니까 자연히 세상하고는 이혼이 된다 그말이오, 세상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하고 이혼이 되고 자꾸, 이 누구 때문에 그러냐? 주님의 재림 때문에 자꾸 이러다 보니까, 그라다 보니까 세상 때문에는 이혼이 되어지고, 세상과는 이혼이 되고 주님에게는 자꾸 소망이 더 되어지고 자꾸 애정이 더 가고 또 소망이 더 가고 자꾸 기달피고 사모해지고 자꾸 그리 된다 그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그거? 이 필연한 일이라, 자꾸.

나는 뭐 그것 저, 다 경험 안 했겠지마는, 결혼 안 한 사람들은 경험을 못했겠지마는. 결혼을 약혼을 턱 하고 이라고 나면은 남자는 항상 자꾸 여자에게 자꾸 마음이 가고 여자는 남자에게 마음이 가고, 가는 것이 필연이라 말이오.

그거 자꾸 그거는 뭐이냐? 그거 일방적이라. 자꾸 마음을 그리 기울이니까 가는 거라. 마음을 기울이니까 간다 그말이오. 마음을 기울이니까 가고 하지마는 우리가 가는 것은 마음을 기울이면 가는 거, 기울이니까 가는 일방적으로 되는 것만 아니고 주님에게 마음을 기울이다 보니까 지금 이 세상에게 자꾸 박해를 당한다 말이오.

박해를 당하니까 세상에게 자꾸 박해를 당하고 세상과 뜻이 안 맞고 박해를 당하니까 박해당하는 그것이 주님에게 대한 사모가 강하게 됩니까 약하게 됩니까? 강하게 되지지, 또 주님에게 자꾸 사모를 이래 하니까 또 그것도 약하게 됩니까 강하게 됩니까? 강하게 돼. 이거는 쌍방면으로 쌍방으로 지금 자꾸 강하게 돼지는 것이라 말이오.

이거 뭐 결혼한 사람들이 이와같이 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가 자꾸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보고 싶고 만나고 자꾸 이라니까 가까워지지 않습니까? 일방적으로, 일방적 방편으로 가까워지는 것이지마는 우리가 주님을, 그날을, 하나님의 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되는 것은 일방적 방편이 아니고 쌍방적 방편으로서 이와같이 가까워진다 그거요. 그거 이해가 됩니까? 쌍방 방편이라 하는 거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돼요? 내가 그 비유 들기를 춘향이를 들었어. 춘향이를 그 원이 춘향이를 자기가 차지할라고 살살 달래다가 꼬우다가 아무리 해도 안 들으니 나중에는 이거 좀 고문을 해야 되겠다. 여러가지, 항복받을라고 자꾸 이라니까 항복 받는 그, 항복을 자꾸 받을라고 자꾸 이라고 뭐 뚜드리고 옥에 가두고 자꾸 이라니까 그 누구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게 내나 소설이지마는 이도령 때문에 그렇다 말이오.

이도령 때문에 자꾸 그라지 이도령 때문에 자꾸 이도령 때문에, 이도령을 버리지 안하고 이도령을 배척 안 할라 하고 이도령을 자꾸 좋아하기 때문에 저 좋아 안 한다고 이 군수가 자꾸 매를 때리고 자꾸 이 고문과 고형을 해.

고문과 고형할수록이 이 군수하고는 자꾸 정이 떨어지겠습니까 붙겠습니까? 떨어지지. 그라면 그 이도령을 사모하는 것이나 기다리는 것이나 간절한 것이나 그런 것은 더 강해지겠습니까 약해지겠습니까? 강해진다 말이오. 강해져.

이러니까 이제 이 고문과 고형을 당하면서 그럴 때에는 그 사람에게 눈물이 날 거라. 눈물 나는 그 눈물은 무슨 눈물이겠습니까? 그 눈물은 이 세상에서 이도령 때문에 설움 받으니까 이 세상을 향해서는 서러워서 눈물이 나오고 그 서러워서 눈물 나오는 것이 주님 때문에 더 그래. 그러면 그게 뭐이냐 하면은 주님에게 자꾸 사모되고 이도령에 사모되는 거 그와 같이 꼭 같은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 필연성이라 하는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재림을 참말로 참으로 믿나 안 믿나 하는 그 필연적인 그 결과는 뭐입니까? 필연적인 결과는 뭐이지요? 다 여러분들이 말을 해요. 그래야 빨리 가지. 필연적인 결과는 뭐입니까? 두려움이라, 두려움. 두려움.

두려움이 있나 없나 하는, 두려움이 있나 없나 하는 그 필연적에, 두려움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뭐이 생기게 됩니까? 방편인 거룩과 경건의 그 방편이 필연적으로 돼.

그 거룩과 경건의 그 방편이 이루어졌다고 하면 필연적으로 뭐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주님의 재림하시는 날이 고대해지고 자꾸 사모해지고 간절해진다 말이오. 그거 다 필연적으로 돼. 뭐 역부러 아니라 그거 필연적으로.

필연적으로 돼져요.

그리 되면은 고대해지고 사모하게 되면은 자기의 심신의, 모든 심신의 염려는 어데 가 있겠습니까? 심신의 노력은 어데 가 있겠소? 심신의 노력은 주님의 재림하시는 거기 가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쁨도 거기 있고 근심도 거기 있고, 할 일도 거기 있고 또 고칠 것도 거기 있고 전 힘이 거게 가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거라.

이 필연적이기 때문에 이거 돼 있나 안 됐나 하는 것은 필연적인 그 결과가 있기 때문에 결과를 봐서 안심하고 결과 없는 이 안심을 가지고 됐다고 생각지를 말라 그말이오.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사람이면 필연적으로 이 순서가 이루어져 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 순서 이루어지면은 우리는 어떻게 할라고? 그거 하다 말라고? 이 순서가 이루어지면은 자기 의식주는 다 주님에게 맡겼기 때문에 당신이 세계 갑부되게 할라면 갑부되고 그거는 나 할 일 아니라. 당신이 해 주는 대로 하는 대로 닥치는 대로 그것도 그거 환경이니까 세계 갑부를 주면 갑부라는 그 환경 가운데서 이제 믿음 손해보지 안하고 그대로 나갈 것뿐이지 그거 우리 할 일이 아니고 우리 소망도 아니오.

우리는 기뻐할 것도 아니요, 소망할 것도 아니요, 노력할 것도 아니요, 노력은 그래 하다 보니까 세계 갑부돼도 세계 갑부를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거는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그 일 했지, 무슨 일이라도 그 일 했고 다만 우리에게 온 것은 주님이 해 주신 것이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 그 외에는 내가 한 게 없어. 이것이 신앙 생활에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여러분들이 가족들에게도 그걸 깨우쳐요. 지금, 남자들은 어리석어.

이거 남자들은 보면 어리석어서 뭐 제가 자녀의 밥이나 먹이면 되는 줄 알고 제가 또 밥벌어 먹이니까 ‘내가 밥벌어 먹이는데’ 이 자식아 네가 밥벌어 먹이나, 이놈아? 하나님이 밥 안 주면 네까짓 놈이 지금 뭘 주사를 줘도 그만 팔이 오그라져서 주사 못 준다. 또 네가 지금 뭐 출근해 가지고 뭐 어째 해도 네 대가리배기를 홱 뒤비쳐 버리면 네까짓 게 아무것도 모른다. 하나님이 그거 그걸 통해 가지고 다 하는데 네가 이놈아 출물꾼만 되지 말고 너도 구원 얻으라 하는 그 불쌍하고 가련한 자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인간이 뭘 먹입니까? 인간 먹,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인간은 아무리 제가 노력해도 ‘내가 벌어서 뭐 했다’ 제 힘으로 했다 하는 거는 죄만 자꾸 그게 하나 하나가 전부 죄만 됐지 하나도 제가 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은 요 바로 해서 이 구원 준비하는 요것만 할 때 다른 것은 구원 준비하다 보니, 구원 준비 하는 데에, 구원 준비 하는 데에 어떨 때는 구원 준비 같은 구원 준비 하는데 같은 구원 준비 하는데 몽둥이 올 때도 있고, 꼭 같은 구원 준비 하는데 존귀가 올 때도 있고, 꼭 같은 구원 준비 하는데 사랑 올 때도 있고, 꼭 같은 구원 준비 하는데 미움 올 때도 있고, 이거는 내 구원에 유익하도록 당신이 환경을 이렇게 만들어 이래 주는 것이지.

우리가 요한복음 9장을 공부했는데 그때 진흙을 이겨 준다는, 이겨 눈에 바른다는 그 진흙이라 하는 건 무엇을 우리에게 이 상징해서 가리킨 거라 했습니까? 그 진흙은 뭐라 했습니까? 현실. 현실.

이래서 어짜든지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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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환난과 피난/ 시편 91장 15절-16절/ 1980. 5. 24. 토새벽 선지자 2016.01.11
113 환난과 피난/ 시편 91장 1절-16절/ 1980. 5. 21. 수저녁 선지자 2016.01.11
112 환난때에 더욱-믿음,연경,회개/ 요한계시록 17장 12절-14절/ 1987. 6. 21.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11
111 환난때에 필요한 것/ 호세아 2장 18절-23절/ 1984. 8. 25. 토새벽 선지자 2016.01.11
110 환난에 대한 성도의 자세/ 출애굽기 12장 8절-11절/ 1979. 11. 21. 수새벽 선지자 2016.01.11
109 환난에서 건짐 받는 길-계명지키는 것/ 시편 91장 14절/ 1987. 6. 29. 월새벽 선지자 2016.01.11
108 환난의 든든한 준비 방편/ 요한복음16장 23절-33절/ 1988. 5. 18. 수저녁 선지자 2016.01.11
107 환난있는 목적과 피난얻는 방편/ 마태복음 10장 18절/ 1988. 4. 15. 금저녁 선지자 2016.01.11
106 환난절기에 오병이어의 기적/ 요한복음 6장 1절-15절/ 1988. 10. 2.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11
» 환난준비/ 베드로후서 3장 10절-13절/ 1987. 7. 25. 토새벽 선지자 2016.01.11
104 환난준비/ 사무엘상 17장 41절-49절/ 1984. 5. 18. 금새벽 선지자 2016.01.11
103 환난준비/ 사무엘상 17장 41절-49절/ 1984. 5. 18. 금저녁 선지자 2016.01.11
102 환난준비 3가지/ 시편 91편 9절-16절/ 1987. 6. 28.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11
101 환난준비는 깨끗하게 할 것/ 마태복음 3장 5절-12절/ 1988. 5. 18. 수새벽 선지자 2016.01.11
100 활동 계약/ 이사야 26장 2절/ 1980. 1. 14. 월새벽 선지자 2016.01.11
99 회개/ 마가복음 1장 14절-15절/ 1979. 12. 3. 월새벽 선지자 2016.01.11
98 회개/ 마태복음 4장 17절/ 1980. 10. 22. 수새벽 선지자 2016.01.11
97 회개/ 신명기 28장 1절/ 1985. 2. 7. 목새벽 선지자 2016.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