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1985. 2. 7. 새벽

 

본문 : 신명기 28장 1절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 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이 '네가' 하는 것은 곧 우리 각자를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누가 이렇게 '네가' 합니까? 누가 '네가' 이래 합니까? 누구를 '네가' 합니까?  '네가' 누구가 누구를 '네가' 이렇게 말하지요? 녜, 하나님이 나를 가리켜서  '네가' 그렇게 말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가리켜서. 그러면 백 목사님을  가리켜서 그 말입니까? 예? 녜, 각각 자기지요? 각각 자기를 가리켜서.

 '네가 네 하나님'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이 된 것인데, 여기 성경에 기록 한  하나님은 일반인들에게 대한 하나님과 다릅니다. 일반인에게는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요, 또 일반적으로 일반적 은혜. 일반적 은혜라 하면은 어떤 은혜를  가리켜서 말하는고 하니 이런 모든 동물이나 곤충이나 생물이나 이런 것들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관리하시고 이 세상에서 보존하시고 성장하도록 하시는  그것이 일반적 은혜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 베푼 은혜가 일반적 은혜요. 이  모든 동물, 식물, 곤충들에게 베푸신 은혜가 일반적 은혜요, 이 성경에 기록한  이 하나님은 일반적 은혜 면에서가 아니고 특수 은혜면에서 입니다.

 특수 은혜라면 어떤 것을 가리켜서 특수 은혜라고 하는고 하니. 우리 시조가  배암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 원죄를 범하고 본죄를 범해서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정죄를 받았고. 죄 정함을 받았다 말입니다. 하나님의 지공 지성의 법에서 죄  정함을 받았고 또 저주를 받았고 사망을 받았고 또 사람뿐만 아니고 이  사람으로 인해서 모든 만물이 다 저주를 받은 우리를 예수님의 대형으로 사죄를  주셨습니다. 대형으로 사죄 주신 것은 형벌을 다 받으심으로 죄 없는 자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죄를 우리가 입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 사죄를  입고 있는 것인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어기지 않는 신구약 성경 말씀을 어기지  않는 것이 사죄를 입고 있는 것이요. 신구약 성경 말씀을 한 절수라도 어겼을  때에는 사죄를 주님이 입혀 주신 것을 벗은 것입니다. 다시 이것을 잘못된 것을  주님 앞에 고해서 사함을 받으면 또 사죄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면, 사죄를  입고 있는 것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하나도 어기지 않는 것이 사죄를 입고 있는  것이고,  또. 칭의를 입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대신 행해서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했다, 하나님의 그 율법 하나도 어기지 안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다  준행했을 뿐만 아니라, 칭의는,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율법의 지성과  지공법의 요구를 완전히 대신 행하심으로 우리에게 칭의 주신 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는 요 피동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칭의를 입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칭의를 입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는 것이 칭의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니고  칭의를 입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요것이 칭의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도 하나님이 마음을 가지신 고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  내게 대해서 하나님이 이 마음을 가지시면 나는 또 따라서 그 마음을 가지고,  이 소원을 가지시면 그 소원 따라서 내가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 따른 내  마음, 하나님의 소원 따른 내 소원, 하나님의 소욕 욕심 따른 내 욕심,  하나님의 기쁨 따른 내 기쁨, 하나님의 노를 따른 내 노, 하나님이 노하실  때에는 자기는 그 노에 따라서 노해져서 이게 뭐 '하나님이 노하시니 내가  노해야 되겠다' 그런 게 아니고, 이제 하나님과 이리 연결되어서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이 피동이 되도록 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이 희로애락 하시는 그  희로 애락에 따라서 희로 애락이 되어지는 그런고로, 하나님이 동하면 내가  동해지고 하나님이 또, 정한다 말은 이래 움직 이다가, 이리 이리 움직이는  이게 동(動)이오. 이게 동이고, 이렇게 동하다가 정하면 탁 멈추는 이게  정입니다. 하나님이 멈추게 하시면 멈추면 나도 멈추고 하나님이 동하면 나도  동하는 그것이 칭의입니다.

 화친은 어떤 것이 화친인고 하니, 화친으로 새생명 얻었는데. 화친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된 요 연결이.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 고 연결을 가리켜서  화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지 안한 것 그것이  화친인데,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우리에게 이런 끊어지지 않는  자로 살 수 있는 요런 공로를 베푸시기 위해서 주님이 신인 양성 일위로 계시고  또 밖에 성부와 성령이 또 계시는데, 내나 한 하나님이지마는서도 이  하나님과의, 신인 양성 일위와 이렇게 끊어질 수 있도록, 끊어지도록 오만  가해를 다 했습니다. 오만 박해를 다 해도 마지막에 죽어도 그 연결을 끊지  안하고 죽은 요것이 화목의 제물이 되고 화친의 대속 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화친의 새생명 준. 이 대속을 준 공로는 제일 처음이 뭣인고 하니  하나님이 사람 되신 그것이 제일 첫 공로입니다. 신성과 인성. 그 신성 인성  양성이 일위가 돼 가지고, 이 일위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끊어지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에. 죽으셨을 때에 신성은 그대로 살아  있지마는서도 인성은 죽어 버렸습니다. 그때 신성과 인성이 끊어집니다. 신성은  죽음이 없어서 안 죽었지마는 인성은 죽었다 말이 그. 그럴 때 다시 즉시 삼 일  만에 부활했습니다. 부활한 것은 다시 신성과 인성이 끊어지지 않는 복구가  됐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도들이 중생 된 거나 신약 성도들이 중생되는  것이나 이 중생은 다 예수님의 신인 양성 일위가 됨으로써 비로소 중생이라  하는, 이 중생은 우리 영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다시 끊어질 수 없는 그런  연결로 연결된 그것이 중생입니다.

 중생인데 이 구약 중생은 예수님의 예표인 짐승이 대속하는 이 대속을  가지고서 그저 소망하고 바라보고만 있었지 그렇게 밀접한 연결은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연결됐다 끊어졌다. 연결됐다 끊어졌다 이래서 그 연결이 역사적  연결로만 연결이 됐던 것입니다. 역사적이라 말은 활동적 연결로만 연결이  됐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도는 하나님과 연결될 때는 연결되어 가지고 하나가  돼서 역사했고 또 그라던 사람들도 끊어질 때는 끊어졌고, 아브라함 같은 이도  하나님과 연결될 때는 연결됐고 또 연결이 끊어 질 때는 끊어지고 이렇게,  그래서. 구약 연결은 중복적인 연결입니다.

 중복적으로 연결됐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신  부활할 때에 모든 자던 성인들이 다 일어났습니다. 일어나서 부활할 때에  그때에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인들이 다 일어난 거는 아니고 자던 성인들이,  그 예루살렘 가까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인들이 일어났다 말이오. 그러면. 자기네들이 다 아는 사람이니까, 죽은  사람이 다 살아나고 일어나 가지고 예수님이 부활하셔 가지고 이렇게  예루살렘으로 가셨을 때에 같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성경에 그래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됐다가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고 난 다음에는 다시  돌아갔습니다.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고 영과 그 마음은 다시, 영계로 낙원으로  돌아가고,  이것이 이제 구약의 앞으로 이루어질 대속을 예표, 대속을 모형으로 짐승을  가지고서 대속하는 그런 하나의 규정을 하나님이 주셨을 때에 그 규정을 믿고  그대로 이행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대속이 이루어지기까지 미결에 있다가,  중생된 행위가 됐다가 안 됐다가 이렇게 중복적으로 완전 연결이 안 되고  이렇게 돼 있다가 예수님 부활하실 그때에 구약에 있는 성도들의 모든  소망했던. 짐승으로 대속했던 대속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완전히 대속이 됐다  하는 그것을 하나의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표시를 하시고 또 연결된 생명도  그때부터 연결된 생명, 완전히 연결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에 있는 성도들은 앞으로 대속하실 예수님의 대속을  바라보는 그 대속으로 구원을 그들이 소망하고 있었고 또 신약에 있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미 대속하신 그 대속을 자기가 받아서 이미 대속된 그 더속을,  지나간 대속, 이미 대속해 놓은 그 대속을 바라보면서 소망하고 이 대속으로  사는 것이 그것이 신약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케  하러 오셨다' 그 말은, 모든 율법이 다 그러하지마는 율법의 중심이 뭐이  율법의 중심인고 하니 예수님이 율법의 중심입니다. 모든 율법은 예수님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율법을 온전케 하러 오셨다 그 말은 구약의  모든 예표된 그 모든 율법을 다 완전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에 짐승으로 대속됐던 그  대속이 이제 예수님으로 그 대속이 완전 대속이 됐다 하는 그런 것도 다  포함돼서 율법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왔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구약 시대에 안식일이라든지, 안식일이라든지 또 절기라든지, 또 구약 때에  성막이 있었고 성전이 있어서 성막과 성전이 있었던 거. 거게 또 뭐 성전  안에는 떡상도 있고 등대도 있고 세수통도 있었고 또 향로도 있었고 법궤도  있었고 뭐 여러 가지가 설치돼 있었는데 그런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다 폐해졌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가리키셨던 것은 다 폐해졌고, 예수님을 가리키셨던 예수님의  모형으로 된, 예수님을 예표로 된 모든 것은 다 폐해졌고, 예수님을 예표로 한  거는 모형으로 한 거는 폐해졌고, 예수님이 지켜야 하실. 예수님이 지키게 하신  모든 규정은 폐해지지 안했습니다. 구약에서는 폐해진 부분이 있고 폐해지지  안한 부분이 있는데, 사람들이 폐해진 부분과 폐해지지 안한 부분을 구별하지  못해 가지고서 그만 혼돈해서 자꾸 이래, ○○교니 이런 거 나온 것은 다  그것을 분별하지 못해 가지고서 착각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리적으로는 ○○교는 기독교는 아닙니다. 구원이 있다 없다 하는 그거는  택했으면은 구원이 있고 택하지 안했으면 구원이 없는데 ○○교는 기독교  예수교는 아닙니다.

 그런고로 구약에서 어떤 것이든지 있었던 것을 새로 성경에, 신약 성경에  폐했다 하는 그 폐했다는 그런 명문으로 폐해진 거는 폐해졌고, 폐했다 하지  안한 것은 폐해지지 안하고 그대로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 그 날짜 지키는 것은 폐해졌습니다. 날짜 지키는 것은  폐해졌지마는서도 안식일 지키던 그 규례는, 규정은 폐해지지 안했습니다.

그러면 날짜만 폐해졌으니까, 날짜는 다시 그 후에 한 날을 새로 가리켜서  말씀했다 이렇게 말했고, 또 다른 성경에는 이 날이니 저 날이니 날을 가지고서  시비하지 말아라. 시비하지 말아라. 자기가 이미 정한 대로 하라. 정한 대로  정한 대로 지키라 고 말을 누가 했는고 하니 사도 바울이가 했는데, 사도  바울이 했는데,

 사도 바울은 유태인이요 구약 성도입니다. 구약 성도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예수교가 나오고 난 다음에, 구약 지키던 사람이니까. 어데 이 예수교란 새로  이 잡교를 가지고서 이와 같이 유혹시킨다고 이단이라고 해 가지고서 예수교를  박멸할라고 책임을 지고 나선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책임지고 믿는 사람들을 다 죽이기 위해서 출발해 가지고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죽인 가운데 제일 유명하게 죽여진 사람이 성경에  기록돼 있으니 그것이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되어 있는 내나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을 다른 사람 다 이거 죽이고. 뭐 각단지기 잡아 죽이는데. 스데반을  죽일 때에는 좀 이상함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게 이상해서 주목을 했고,  또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 사울이, 사울이 스데반을 죽일 때 그때에  하나님께서 거게는 계시 이용으로, 계시로,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알려 주기  위해서 특별히 계시 기관으로 죽은 것이 스데반이요 죽인 것이 사울이기 때문에  그것은 성경에 기록 됐습니다. 다른 거는다, 다른 사람이 죽은 거는 기록이 안  되고 스데반 죽은 것만 기록이 됐습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 모두가 다 기쁨도 없어지고  평강도 없어지고 사람이 다 변질이 되어지고 그만 타락성이 나오는데. 타락의  본성이 나와 가지고서 미움도 생겨지고 두려움도 생겨지고 절망도 생겨지고  그렇게 생겨지는 것이 사람이었는데, 스데반은 돌로 쳐서 죽여도 이 타락한  원러와 본죄가 있는 사람과 같지를 안했습니다. 원죄와 본죄가 있는 사람과  같지 안하고 보니까 기쁨이 충만하고 감사가 충만하고 또 사랑이 충만하고  얼굴에 광채가 나고 이라면서 말하기를 '내가 보니 하늘 문이 열렸는데  주님께서 서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서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니 내가 어서  주님에게로 가야 되겠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 얼굴에 아주 기쁨과 감사와  생명이 넘쳐서 죽음이라 하는 것이 그에게 없더라 그말이오. 육체는  죽지마는서도 그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없고 산 자로서 이제 '내가 여게서  하늘나라 가야 되겠다' 하면서 육체를 벗어 놓고 가는데 그에게는 보니까 그  본인이 죽음을 느끼지 안하고 죽음 없는 영생하는 사람으로 그리 되는 것을  봤고. 마지막에 떠나면서 주님에게 간구하기를. 이들이 알지 못하고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니까 이 죄를 저희들에게 정하지 마시고 이 죄를 사해 달라고서  주님에게 기도하고 마지막 생명이 떠나는 것을 봤다 그거요.' 그래서, 사울, 사울이 구약에 속해 가지고서, 이렇게 새로운 이단 도가 들어  왔다 해 가지고서 지금 예수교를 이단 도로 없앨라고 이렇게 해서 나서 가지고  스데반 죽이다가 거게서 좀 이상함을 봤다 말이오. '과연 저는 우리와 같지  않다. 우리는 죽을 때에 다 죽는 그건데 저희는 죽을 때에 죽지 않는 생명이 그  속에 있었다. 또 그런 고난 가운데서라도 모든 기쁨과 소망에 넘쳤다. 감사에  넘쳤다. 그 사람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아니다.' 하는 그것을 사울이 직견하고,  그때 책임자입니다. 직견하고서 이상하다 하는 그런 감을 느꼈고, 또 그러면  반드시 마지막에는 복수성이 생겨지는 것이 그것이 타락한 사람의 본성인데  복수성이 하나도 없고, 이들이 알지 못해 그러니까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하고  하는데. 그 스데반이 하는 일을 보니까 죽음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이 아니고  죽음을 벌써 초월해 가지고 죽음을 넘어서 새 생명, 무슨 생명을 받아 가지고서  있는 그런 사람의 본질과 본성이요 태도요 행동이요 또 모든 기쁨이요 평강의  충만이요 그 사랑이라 그 말이오.

 그걸 보고서 사울이 스데반을 죽여 놓고 난 다음에 이제 다메섹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이 있다 하는 그 말을 듣고서 다메섹으로 지금 믿는 사람들 죽일라고  가는 도중입니다. 가면서도 마음에 벌써 좀 여러 가지 번민이 생겨졌던  것입니다. 번민이 생겨진 그것이 그만 거게서 대번 된 것인 줄 알아도 스뎨반을  그렇게 하면서 스데반이 그렇게 산 생명을 가지고서 사울을 위해서 마지막에  축복하고 소망을 보여 주고 증거를 하고. 사도행전 7장에 보면은 죽 증거한 게  있습니다. 그렇게 생명에 증거한 것도 보니까 그 증거 하는 것이 지금 죽음  이편에서만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 이편에서 죽음 저편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실족했다 하는 것을 늘 설교한 것이 7장에 계속해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편만 보고 사는데 이편만 보고 사는 것은 눈이 어두워서  몰라 그렇다 하니까 '이놈이 무슨 소리고? 우리는 전부 소경이고 우리는 전부  다 등신이라 말이냐' 하면서 그래 죽일려고 더 돌로 쳐서 죽였던 것입니다.

 이랬는데. 자기가 다메섹을 가면서 의문과 번민 가운데에 있었는데 그 때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큰 빛이 나타나서 공중에 큰 소리가  나는데 옆의 사람들은 말하기를 '아. 비 오지 안하는 멀건 이 햇빛 좋은 날에  왜 우뢰 소리가 나느냐? 뇌성을 한다?' 그 옆에 간 사람들은 뇌성 난다고  그렇게 말했고, 성경에 보면은, 뇌성이. 뇌성 소리가 난다 이렇게 말했고,  사울은 그때 자기가 거게서 고민과 번민에 벌써 증거를 받았다 말이오.

스데반에게 전도의 증거를 받아서 번민과 고민을 가진 깬 마음이 되니까 그때는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벌써 중생이 됐고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돼 버렸다 말이오.

 됐기 때문에 그때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와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그 소리가 공중에서 크게 뇌성 소리같이 날 때에 그 사울은 그만 그 앞에  꺼꾸러지면서. '주여 뉘시오니이까' 이랬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이랄 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때에 '아, 주님은 죽지  안하고 과연 살아 계시고 참 메시야로구나. 예언하신 대로 메시야로구나.

구주로구나' 하는 그것을 사울이 거게서 깨달았습니다. 깨달았는데, 그때에  주님이 빛으로 나타나셔 가지고서 소리를 거석할 때애 소리에는 참 사울이  기절해 가지고서 꺼꾸러져 버렸고, 그 소리를 들어서 꺼꾸러졌고, 또  빛으로서는 사울의 그만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사울의 눈이 멀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안했습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부축을 해 가지고서 다메섹에 갔습니다. 다메섹  성에 들어가 가지고, 다메섹 성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제 사울이 오니까  다메섹에 있는 예수 믿는 자들을 전부 다 이제는 오면은 다 학살해 버릴  것이다' 그래 기다리고 지금 모두 다 환영을 하고 이랬는데 들어가 가지고서,  사울은 사울인데 갑자기 고합을 지르며 외치기를 '내가 핍박하는 예수님은 죽지  안하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다'하는 것을 다메섹에다 외쳤습니다.

 외치니까, 외치니까 그만 그날. 외칠 그날에 다메섹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이  갑자기 특별 회집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특별히 전체가 모여 가지고서 '자,  저 사울이 예수 교인들을, 우리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이단을 증거하는 예수  교인들을 다 죽일라고 지금 총회에서 그렇게 책임을 받고 모두 다 사람들을  인솔해 가지고 오는 토벌하러 온 사람이 예수를 증거하니까 저놈 어째야  되겠느냐?' 그래서 '그놈은 두 말 없이 죽여야 된다.' 이것이 다메섹에서  결의가 됐습니다.

 아메섹에서 결의가 뒈서, 그때에 다메섹에도 예수 믿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일라고 사울이 왔었는데,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울이 그때 권세도 있고 세력도 있고 로마의 시민권도 있었고 또 대학자이고  이러니까 아주 유명하고 또 용감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 이제  다 죽었다 하고서 뻘뻘 떨고 있는데 오더니마는 의외에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증거해서, '아. 그라면서 자기가 다메섹에 오다 가서 그와 같이 된 광경을  증거했습니다. 증거하니까 '아, 주님이 저 사울을 불쌍히 여겨서 이제 변화를  시켰다, 중생을 시켰다. 또 성령을 받았다. 또 스데반이 증거를 해서 거게서  전도를 받아서 중생이 됐다' 이것을 깨닫고 사울을 죽일라 하는 것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그만 미리 훔쳐 가지고서, 죽일라고 회의할 때에. 돌려  가지고.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 하면서 묶어 가지고서 광주리에다 달아  가지고, 광주리에다 달아 가지고서 들창문으로 내렸습니다. 들창문으로 내리고,  그러니까, 내려 봐야 못 가니까, 아무 것도, 눈이 어두워서 아무데도 가지  못하니까, 들창문으로 내려 놓고 그때 이제 몇 사람이 다시 들창문으로 달아  내려가지고, 성이니까, 높은데 거기서 떨어지면 죽으니까 들창문으로 달아  내려놓고 또 안내할 사람들을 몇을 부축할 사람을 보내 가지고 내려서 그만  거게서 그만 도망을 쳐서 아라비야로 갔습니다.

 아라비야 가 가지고서 삼 년 동안 거게서 기도하고 회개하고 하는 가운데에서  눈도, 아주는 못보지 않았으나 눈이 조금 흐렸습니다. 그래서 '내게 찌른  가시가 있다' 하는 그것은 사울의 눈이 그때 빛에 비취어서 어두워진 그 눈이  완전히 치료되지 안한 그것을 가리켜서 찌르는 가시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이 문둥병이 들어서 나환을 가리켜서  그렇게 찌르는 가시라 그렇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거는 어느 것이라고  그렇게 확실히 증거할 수는 없고, 눈이 그렇게 됐다 하는 그 말은 성경적으로  증거가 됩니다. 나환이 들었다 하는 그 말은 전설이지 그거는 똑똑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 뒤에도 성경에 기록할 때 보면은 '눈이 어두워서 내가. 내가 큰  글자로 썼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시켜서 글을 성경을 기록해 놓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요새 말로 말하면 뭐 싸인이라 합니까? 싸인하듯이 당신이 큰  글자로 이렇게 써서 이랬다 이랬습니다. 눈이 보이지 안하니까 큰 글자로 쓰지  작은 글자로 쓰지 못한다 말이지. 그래서 그거는 성경적인 증거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삼 년동안 아라비야에 가 가지고서 거게서 이제 회개를 했고 기도  생활을 했고 거게서 아주 회개를 하고, 삼년 동안 참 회개하고 거게서 준비를  해 가지고 이제 나서서는 눈도 다 이렇게 세밀한 거는 못 보지 마는서도  나만치는 아마 밝았는지 몰라. 나만치만 밝았는지, 나만치는 밝았을 거야. 지금  나는 이거 성경 돋보기 안 쓰면 못 보니까, 그런 사람도 됐고 또 건강도  회복돼서 그때 나와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니까 모두 다 '저거  죽일라 하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 하니까 다 예수 믿는다 하면은 환영을 하고  이래 한덩어리가 되고 나면 싹 죽일라고 그라는 갑다' 그런 줄 알고서 예수  믿는 사람이 오래 동안 사울을 영접하지 안했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바울이라는 이름을 줘서, 바울이라는 이름을 줘 가지고 바울이  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왜 사울을 사도라고 하느냐? 사도라고 하는 것은,  사도는 예수님이 직접 부른 사람이 사도들입니다. 사도라는 것은 특별히.

사도성은 어떤 것이냐 하면 예수님이 직접 불러 가지고 성령 주시고 또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그런 권력을 준 세 가지 권력을 받은 것이 사도의 특권인데,  사울도 예수님께서 직접, 다메섹 갈 때 직접 불러 가지고서 그 사람을  구원시켰기 때문에. 열 두 사도 가운데에 맛디아를 해 가지고서 가룟 유다의  대신으로서 열 두 사도를 만들었는데, 이거는 사도들이 그때에 제비 뽑아  가지고 만든 맛디아이고, 신앙 좋으니까 그 사람을 아마 사도가 안 되겠느냐,  가룟 유다를 대신 하나 대충을, 대충을 세워야 되겠는데 맛디아로 하자 이렇게  했었는데, 그 뒤에 예수님께서 직접 그렇게 한 것을 보고서 그 뒤에는 가롯  유다의 대신이 곧 사도 바울로서 대신이 돼 가지고서 십이 사도가 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생명을 내 놓고 많이 전했는데, 고린도전서에 보면은 '다른  사람들은 생명을 바쳐서 복음을 전하면 상급이 있지마는서도 나는 상급은 없다.

내가 이 생명 바쳐서 복음 전하는 일 하지 안하면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나는  화가 있다. 왜 화가 있느냐?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예수 믿는  사람을 내가 많이 죽인 그런, 다른 사람이 범하지 않는 큰 죄를 범했기 때문에  나는 이 생명 바쳐 복음을 전하지 안하면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화를 받을 사람이라 그렇게 늘 하면서 일생 동안 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 개척 사도 바울이라고 그래 모두 다 온 세계가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에는, 이방 사도는 누구냐? 사도 바울이 이방 사도라. 베드로는 그  본족들에게 전하게 했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했다. 그랬는데.

이방인에게 전하는 데에 베드로도 이방인에게 전하는 그것을 욥바에서 사람을  보내 가지고서, 고넬료가 사람 보내 가지고 이방인에게 전도해 주는 그 전도,  성령을 받는 그 일이 처음에 개척이 됐습니다. 이래서, 이방 '구원 사도  바울이라, 이방 전도 사도 바울이라. 또 이방 전도 베드로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방 전도 스데반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방에게 먼저 전도했다. 왜? 스데반 이 사울을 낳았다.

스데반이 사도 바울을 낳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방 개척자이니까 스데반이,  이방 사도 스데반이다 이렇게 깨닫고, 깊이 깨닫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래서, 화친은, 화친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 그 연결  연결을 우리에게 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끊어지지 않는 연결을 줬기  때문에, 우리 영과 하나님은 끊어지지 안하는 연결된 고 연결이 중생입니다.

중생은 영과 하나님이 끊어지지 일는 고 연결된 고 연결로 말미암아 생명된  고것이 중생이고, 또 우리의 마음과 몸은 중생되지 못하고 이것은 연결을  가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영이 연결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순전히 연결됐고 우리의 심신이 연결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노력이  연결합니다.

 그러면, 연결이, 영과 연결된 그 연결을 힘입어 가지고서 그 영에게 이 심신이  복종하면 이 심신이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심신의 연결은  연결됐다가 끊어겼다가 연결됐다가 끊어졌다가 이렇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의 이 연결을 법적으로는 연결이 돼 가지고 있고 영은 연결이  돼 가지고 있지마는서도 활동적으로. 활동적, 활동이라 말이나, 여러분들이  역사라는 말로 바꿔 가지십시오. 활동이라 하면은 알아 듣기 쉬운데 활동이라는  말이나 역사, 뭐 복음 역사. 건축 역사 모두 역사로 알지만, 역사라 하는 건  일하는 걸 역사라 하지 않숩니까? 고 역사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이  됐다가 끊어졌다가 다 이래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의 영적 연결이 끊어질까 해서 연결을 가지면  하는 그 말이 아니고, 이 역사적인 연결이 끊어지지 안하고, 하나님을 그러면,  역사적인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내가 생각하고 사모하고 내가 또  이성으로 또 알고 감각으로 알고 느끼고, 요렇게 요 끊어지지 않는 요것이  역사적으로 심신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게 말하기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영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한다' 이거는 역사적으로 자꾸 하나님을 잊어 버려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라 하는 그것을 구약이기  때문에 이래 놨습니다.

 그 명령을 지켜 행하라 말은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고  하나님에게 피동돼라, 피동되는 그것은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는 것이요.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는 것만 아니고 천상 천하의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는, 고 뛰어남이 되어지는 것이 하나님과 연결된 연결인 것입니다.

 이래서, 어떤 사람은 영은 연결됐지마는서도 마음과 몸은 연결이됐다가  떨어졌다가 됐다 떨어졌다가 이래서 이 심신은 한번도 연결 못하고 천국 간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또 잠깐 이래 연결하고 간 사람도 있고. 잠깐  연결하고 간 사람은 잠깐 연결됐기 때문에 연결된 고 심신만 살았지 딴거는  살지 못한고로, 부활이야 뚱뚱한 몸으로 이래 부활 다 됩니다. 부활이  되지마는서도 고 부활의 기능이라 하는, 마음의 기능이라든지 몸의  기능이라든지 그 기능은 연결이 한번도 못 됐으면 부활은 하지마는서도 기능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능은 하나도 없어요. 몸온 있어도 기능은 없다 말이오.

 나는 지금 몸은 이래 있지 않습니까? 몸은 있지마는서도 기능 가운데에 뭐  말만 지금 하지, 에이 비이 씨이 하는데, 에이 자는 알아요. 에이 자는 요거  알아요. 내가 영어 공부를 하라 할 때에 그때 나는 영어 공부 하기 싫었어.

'영어 공부 그거 할 필요가 뭐 있노? 우리 한국 국문만 하면 됐지 영어 무슨  필요가 있노?' 영어, 그때 성경 학교 다닐 때에 영어 공부하라 하는 거 내가  영어 공부를 안 했어요. 그럴 때 성경 명상하고 있어요. 나는 안 했어.

이러니까 지금 것도 그래서, 이제 에이 자는 요라는 줄 알고 비이 자는 요래  쓰제? 그렇습니까? 요거는 하도 물건에 보니까 자꾸 요게 있어서 그래 하지 영  모릅니다. 이러니까 영어를 아는 기능에는 나는 아주 기능이 하나도 없다  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도 없어. 다른 어학하는 사람은 각국 방언을  아는 그런 기능이 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부활을 하지마는서도 주님과의 연결된 기능은 하나도 없는  사람으로서 부활된 사람이, 있고, 조금, 아주 연결의 기능이 조금 있는  사람으로 부활하는 사람이 있고, 그 연결의 기능이 많은 사람 있고, 그러니까  주님과 연결된 고 기능만 천국 가 가지고서 역사하지 딴 거는 못 합니다. 이  세상에 첫째 아담에게 속한 기능은 역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연결된 기능으로만  천국에 역사하니까 천국 가 가지고 부활은 했지마는서도 천국의 일은,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그 일은 하나도 할 수 없는 사람 있고, 아주 참  눈꼽재기라 할까, 눈꼽재기만치 조금 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는 것을 다 하는 사람이 있고, 이러니까, 하늘 나라에 가  가지고서 많은 하나님의 수종을 들고 많은 하나님에 피동이 되고 이라니까 많은  것을 관할할 수가 있고 적은 것을 관할할 수가 있다.

 이래서 한 므나를 만들면 한 고을을 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므나를  남기면 한 고을을 준다 하는 므나를 남겼다 그 말은 하나님에게 피동된 그  기능을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에 피동된 기능이, 비유입니다. 하나님께 피동된  기능이 하나가 되면은 한 고을을 통치할 수 있고 둘이 되면 두 고을을 통치할  수가 있다 요렇게 하나님께 피동되는, 요 접선으로 피동되는 요 기능이 많고  적은 그것으로써 하늘 나라에 하나님께 많이 필요한 사람 적게 필요한 사람,  하늘 나라에서 실상 구속만 받았지 하나도 필요없는 사람. 하나님께 필요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고 하니. 하나님이 무슨 일에 필요한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그 역사에 필요한 하나님께 필요한 사람이니까.

 하나님께 필요한 사람은 또 어떤 것에게 필요됩니까? 고거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어떤 것에게 필요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필요있는 고 사람은  어떤 것에게 필요있는 사람입니까? 내 요거 묻는 것은 말귀를 지금 알아 들어  나가고 있는가 싶어서 내가 묻습니다. 말 귀 알아 들으면 대번 딱 알 터인데.

하나님께 많이 필요 적게 필요 있는데,  하나님께 필요있는 고 필요는 어떤 것에게 필요있는 필요입니까? 예? 크게  말해요. 예? 피조물에게 필요한 필요라 말이오. 하나님이 무슨 일 시키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모드 피조물에게 충만케 하지 않습니까? 그분 아니면 피조물이  다 죽지 않습니까? 망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하시는 하나님의 그 무형의 존재에서 모든 유형의 존재들이  살 수 있는 그 모든 것이 은혜로 나오는데 은혜로 나오는 그 은혜에 피동돼  가지고서 피조물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니까 피조물들에게 필요하다 말이오.

하나님께 하나 필요한 사람은 피조물에게 뭐 필요합니까? 하나 필요하요. 열  필요한 사람 열 필요하요. 이래 이것을 비유로 가르쳐서 열 고을을 맡겨준다 한  고을을 맡겨 준다, 그래서 므나, 누가복음 19장에 보면은 므나 비유에 한  므나를 남긴 사람은 한 고을을 차지한다.

 그러면, 한 므나는 어떤 것인가? 한 므나는 하루 품삯입니다. 하루 품 삯인데.

한 므나를 남긴 사람은 한 고을을 차지하게 된다 그것을 해석하기를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하루 동안을 연결이 끊어지지 안 했으면 하루 연결에  하늘나라에서는 한 고을 통치의 한 고을에게 은총을 베풀 만한 그 만한 능력을  얻는다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고 한 므나는 하나님에게 한 복종을  했으면, 하나님에게 어떤 자기의 현실 지나가는데 그 한 현실을 하나님에게  복종했으면 한 므나를 남긴 것이 된다.

 ○○○ 목사님은 요것을 취해서 해석한 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 어른은. 그때  내가 한번 설교 들을 때에 그런 소리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한 그 지극히 작은 한 의가 어떻게 큰 일을 할란지 우리는 그거는 모른다'  그렇게 말해요. 바로 깨닫고 아주 바로 증거한 것입니다. 그는 한 현실에서  연결된 고 연결이 그 결과로서 얼마나 확대되고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그  원인이 되는지 모른다, 하나님과 연결이 되는지 모른다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서 그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걸 가르킵니다.' 연결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아침에 시간이 많아졌으니까, 자꾸 이렇게 우리가 배워서  이러니까, 성경을 이리 봐도 이래 다 깨닫고 저래 봐도 깨달아서 나중에 보면  그게 도통이라. 도통이면 이것도 보면은 그만 이 성경에 이래 돼서 깨달아서,  성경대로 깨달아서,  이러니까, 어떤 사람은 성경에 깨달은 것이 이렇게 깨달았는데 저 다른 것  하고 배치가 돼 가지고서 언제는 이 주장으로 가면 그 말대로 가면은 동으로  가야 되고 어떨 때는 그 말대로 하면 서로 가야 되고 이것은 아니라. 그저  이러나 저러나 나중에 보면 한 길로 갑니다. 한 길로 가는 그것이 성경을 바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바로 깨닫지 못 하고 아무나따나 잘못  깨달으면 스승된 자는 받을 심판이 크니라 그래 말씀했습니다.

 요런 걸 딱 강직(주 : 굳게 간직) 한 번 배웠으면 강직하고 잊어 버리지  안해야 되.는데 그만 자꾸 잊어 버리기 때문에 또 가르칠려면 또 새로또  처음부터 시작해야 되지 또 시작해야 되지 이러니까 이거 진도가 없다 그거요.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처음에는 들으면 잘 몰라도, 그렇게 세상 것도 배울라 하면 힘이 드는데  그렇게 그게 쉽겠습니까? 이러니까 자꾸 와서 들어야 돼요. 새벽 기도 안  빠지고 자꾸 들어야 되지 안 듣고 그렇게 예수 믿는게 쉬운 줄 압니까? 세상  학문 그까짓 거야 배울 것이 없다고 합니다. 배울 것이 없어. 그거는 안 배워도  좋고 또 배울 것도 없어. 그건 뫼? 인간들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래요. 학교 가지 말고 테레비 석 달만 꼭 보면 석 달만 보면 안 나오는 거  없어. 석 달만 봤으면 일반. 일반 상식은 다 가지고 있오. 일반 상식은 다  가지고 있을 수 있어요. 요새 지식 가지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옛날에야 그런  거 한번도 못보지마는서도 뭐 테레비에 문화 방송 같은 그런 거는 테레비 같은  거는 보면은 오만 거 다 나오는데.

 어짜든지 새벽이고 낮이고 자꾸 이래 들어와. 어제 말씀에 주님을 자꾸 만나야  되고 들어야 되고 또 주의 말씀을 들어야 되고 만나야 되고 또 기적을 봐야  되고. 기적은 자기 신앙 생할에 봐야 돼. 다른 사람 기적 본 것도 성자의  전기도 읽어야 됩니다. 성자들의 전기를 읽으면, 예를 들면 썬 다씽 전기를  읽으면 '하 예수 믿으니까 이런 기적 이런 기적 봤구나' 그거는 구경하는 거라.

그래 내게 실감은, 마음에 그렇다고 하지 자기가 똑똑히 안 느껴지거든. 자기가  말씀대로 지키면 '아멘' 지키면 또 한 기적 보고 지키면 또 한 기적 보고,  말씀대로 지키면 고대로 딱딱 되어지는 걸 보고, '아멘 아멘.' 자꾸 기적을  실행에서 기적을 보니까 기적을 많이 보는 데에서 예수 한 분과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외에는 가질 것이 없다 하는 이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돼야 이제 권능으로 살고 평강으로 살고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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