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십계명


선지자선교회 1983년 3월 13일 주전 

 

본문 : 누가복음 13장 6절-9절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주인이 일년 이태 삼년까지 와서 그 실과를 구했지만 얻지 못했습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해도 일년도 그저 지나갔고, 이년도 그저 지나갔고, 삼년도 그저 지나갔지  만 이번에는 열리지 안하면 찍어 버리겠다고 주인과 과원지기가 다 약속이  됐습니다.

 이와 같이 기독자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혹은 교계적으로  시대적으로 하나님께서 회개에 대해서 참아 기다리는 때가 있고 또 기다리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내리시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언제는 범죄해도 하나님이 그대로  두셨지만 언제는 범죄하면 멸망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말은, 말 중에 듣기 싫은 말이 회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에게는 회개라는 것이 없으면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회개로 살아날  수 있고, 회개로 화가 복으로 바꾸어질 수 있고, 회개로 못쓸 사람이 귀한 사람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실은 회개가 대단히 보배로운 귀한 음성이요 말씀이지만 우리  속에 범죄케 한 죄악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죄악이 주관하는 사람, 나를  멸망시키는 내 속에 나 아닌 나 그것은 어쨌든지 회개를 제일 듣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듣기 싫어하는 그것은 벌써 그거 하나로 듣기 싫어하는 그 자부터 잡아  멸망을 시켜야 희망이 있지, 그것을 처단 못 하면 그 사람은 희망이 없고 완전히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은 별별 세밀하고 오묘한 말도 우리 교회는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감화의  시원한 기이한 그런 설교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듣기가 싫든지 좋든지 회개해야  된다는 이 말씀 외에 다른 말씀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가르칠  때에는 그 성경에 내포되어 있는 광대하고 오묘한 진리를 가르쳤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가르칠 때가 아니고 그저 하나씩 둘씩 찾아서 회개를 해야 될 때입니다.

 회개는 말로 들을 때에는 심히 증오심나는 말로서 회개를 말할 때에 회개를 말하는  사람을 대적해서 없애 버리면 싶을 만치 듣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그  회개를 자기가 다만 한개라도 껍질을 까서 회개를 먹어, 맛을 보면 그는 참  자기에게 지극히 귀한 양약이 되는 것을 자기가 느끼게 됩니다.

 이번 회개가 무력 적화를 하려는 세계적인 무신론 공산주의의 이 세력을 월남  크메르같이 그렇게 기독자들이 멸망하는 그 멸망에서 벗어나게 하는 회개인지, 또는  이 회개가 예수님의 재림으로 불심판이 되는 이 불심판을 벗어나게 하는 회개인지  모르기는 합니다. 어쨌든 회개하면 손해없고 유익합니다.

 6·25때에 재가 아는 어떤 의사 부인인데, 돈 많고 인물 좋고 민첩하고 유식하고  한 부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사람입니다. 또 인간성이  대단히 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모든 세상 일은 다 민첩하게 잘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맺는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교회는 다니기는 다니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하나님이 돕지  않으면 우리는 못 산다. 내가 의지하고 있는 유력한 인물 재산 정치가들 환경  있지만 이것이 구출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언제 우리에게 닥칠런지 모른다.' 노아  때에 많은 네피림들이 오만 것을 구비해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이 예비하고 있는  모든 배경보다 더 크신 분이 심판을 내리시니까 하나도 효력이 없었습니다. 다  홍수로 멸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만날 때마다 말을 해 줘도 그저 겸손한  태도로 '예 예' 하기는 하지만 속으로 하나님보다 필요한 것이 땅 위에 많고 갖추어  있는 모든 준비가 하나님 안 계셔도 잘 지낼 수 있겠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서울에서 6·25를 만났습니다. 그 시어머니의 말을 들으니까 가족이 함께 있다가  공습을 당했는데, 그분이 탄환에 맞아 가지고 그만 배가 갈라져서 죽지는 아니하고  생생하게 있으면서 창자가 나와 가지고 마구 확 퍼지고, 공습은 심하니까 나를 살려  달라고 시어머니 시동생 형제 가족 여러 사람들에게 울부짖지만 거기 있으면 다  죽을 판이라 참 눈물을 머금고 할 수 없어 거기다가 버려두고 우리가 잠깐 여기에  피했다가 올터이니까 그동안에 좀 머물라. 지금 우리가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나뉘었는데 공습이 끝나자 빨리 가서 보니까 벌써 뽀스래기가 돼서  날아갔는지 그 자리에도 없고 그 곳에 없더랍니다.

 그럴 때에 인간의 무슨 구원이 뭐가 되겠습니까? 노아 때에 노아가 하나님 말씀  들어 순종으로 물 심판 예비하라고 하실 때에 그 예비하는 것이 세상 사람이 볼  때는 참 어리석소. 그러나 하나님이 물심판으로 인생을 멸할 때에는 그 구원밖에는  효력이 없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신앙 준비하는 것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것  그것 예수 믿어 하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니오. 돈으로 할 수 있는 그것도 없든지  있든지 인간이 할 수 있고, 과학으로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고, 다만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에게 해 주심을 받기 위해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초자연의 안보와 초자연의 인도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모든 피조물의  지글거리는 소꿉장난 같은 것을 다 발 아래 두고 이런 것들을 초월한 어떤 그  하나님의 심판이 올 때에 그때에 '어떻게 하나? 인생이 다 죽고 마는 이 사망의  세력이 올 때에 이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영생으로 나아가게 할 자가 누구냐?'  초피조물을 하여 그 구원과 그 은혜를 바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월남이 그렇게 될 때에 참 기도는 하고, 거기에 있던 사람 돌아온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교회는 있기는 있고, 천주교가 주로 되어 있고 있지만  신앙이라 하는 것은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저 한 의식 제도, 무슨  하나의 정치 그룹 모양으로 운동 그룹이지 신앙이라는 것은 별로이 볼 수가 없다.

한국에서 우리가 믿는 그 신앙과 같은 그런 신앙은 거기에서는 하나도 보지를  못했다.' 그럴 때에 마음이 기가 막혔습니다.

위급하고 다급하여 그때로 말하면, 참 제일 세계에서 강한 강대국 인 미국이 구원해  보려고 애를 써도 되지 안하는 그 마당에서 누가 구원하겠습니까? 하나님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달라고 회개하는 회개가 보이지 안한다고 할 때에 참 기가 막혀서 기도는 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다 전멸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이 우리 한국이라는 그것은 세계에. 정치가들이 다 그렇게 평했고, 모든  언론가들이 다 그렇게 말했고, 종교가들도 다 그렇게 생각을 가졌습니다. 제대로의  지식을 가지고 비판한 사람은 다 그렇게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참 뜻밖에도  이렇게 오랫 동안 참아 나와서 벌써 전쟁 없이 평안한 가운데서 산 것이  삼십여년입니다.

 우리 한반도 나라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역사를 훑어 봐도  삼사십 년이라는 그 세월이 전쟁없이 평안한 때가 없습니다. 아니면 내란이라도  났었지, 이렇게 평온한 때가 없었는데 참 그동안은 평안하게 살았습니다. 유엔군이  철퇴할 때도 유엔군 물러가면 일시에 적화될 터이니까 다 죽겠다고 한국 각  교단마다 다 메세지를 보냈고, 운동을 했고, 혈서를 써서 내무성에 보냈고 이렇게  죽겠다고 동동거렸지만 유엔군 갔다고 그후에 조그만한 일도 없습니다.

 일이라면 있는 것은 광주 사건 외에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평안했습니다. 사람  보기에는 유엔군 가 버리면 이거는 뭐 하루 아침 일거리도 안될 만치 적화된다  했지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보여서 있었습니다.

 이러니까 사람들은 자꾸 마음이 완패해지고 강퍅해져서, 예수 믿는 우리들이 너무  평안한 가운데에서 그만 이 세상 살이에 재미를 붙이다 보니까 주님에게 대해서는  아주 섭섭하게 우리가 했습니다. 며칠 전에도 제가 새벽 설교하는 걸 들으니까, 풍랑  만난 제자들이 주님과 주의 가라는 음성이 그들 속에 가득 찼을 때에는 순순히 배가  항진했지만, 그러는 가운데에 차차 노졌는 데에 옛날 어부의 습성 노릇이 기술이  등장하고 주님과 주의 말씀은 차차 멀어지고 희미해질 때에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개적이나 단체나 우리의 생애에 풍랑같은 환난이 일어나는 것은 이는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가 아니고 주님과 주의 말씀이 성도에게서 멀어질 때에  일어난다. 아무 것으로도 할 수 없고 다만 그들에게 있는 모든 지식은 수리를  떠났으니까 수심이 깊으니 빠지면 죽는다고, 그들의, 기존 지식이나 선입적 관념이나  모든 인간적 지식은 놀라게만 했고, 풍랑만 만나게만 했고, 주님과 말씀을  멀어지게만 했지 백해무익입니다. 도움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시는 주님은 또  유령으로 물귀신같이 여긴 그것도 누가 그랬습니까? 저희에게 선입적 관념과 지식이  들어서 그랬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회개해야 우리가 이 위급한 일을' 면할 수 있다 하는 이 말은 참  아주 업신여겨서 듣기 쉽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을 우리 한국 교회의 교역자들이  이제는 성경 해석도 많이 했고 논리 설교도, 이해 설교도, 비유 설교도, 풍자 설교도,  웅변 설교도 많이 했으니 보다 회개라는 이 하나를 해서 어쨌든지 우리가 회개를  해야 살지 회개하지 안하면 살아날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준비한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는 천하 인류가 전멸되는 그  참 무서운, 생각하기에도 너무 소름끼치는 무서운 홍수 멸망이지만, 전 인류를  멸망시킨 홍수 명망이지만 하나님의 뜻 대로 모든 것을 준비한 사람들에게는 그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홍수도 노아에게는 크게 도움이 됐습니다.

 6·25 때도 6·25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그렇게 커졌고, 영광스러워졌고,  권위 있어졌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게 됐고, 6.25로 말미암아 영육에 대성한  사람들도 있었고, 또 멸망한 사람들도 있었고 망해도 망하는 줄도 모르게 모르고  그냥 멸망 가운데에서 깨달음이 없으니까 짐승처럼 그렇게 지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삼 년 지내서 이제는 열매 안 열면 찍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루 파고  과일 맺도록 한다. 이 열매는 회개의 열매요, 실과는, 우리는 전적 부패한  죄인입니다. 우리는 전적 부패한 죄인입니다. 옳은 것이 털끝만치도 없었던  우리들입니다. 부패한 것이 돌아서는 것이 우리 죽는 날까지 하는 일이요. 하나님  배반했던 요소 요소가, 부분 부분이 하나님께로 돌아서 하나님과 결합해 가지고  피는 것, 진리를 배반한 그것이 다 돌아 진리와 결합하게 되는 것 평생 우리 할  일은 회개입니다. 그거 외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방편을 말했고  회개라는 것은 실상을 말한 것입니다. 믿음이 돌아서 고치게 하는 것이오.

 우리는 이 적화 무력의 그것도 무섭습니다. 오전에 말했지만, 전라도 이리에서 믿는  사람이 한 몇백 명 됐다 하는데, 칠백 명 중에 몇백 명 된 그 사람들이 '이제 예수  안 믿겠습니다. 당신들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할 때에 그들이 얼마나 다급해서  그랬겠습니까? 또 그렇게 했다고 살았습니까? 죽었습니다. '우리가 구름같은  간증자들이 우리에게 둘러있다' 그 말은 지나간 모든 사람들의 그 형편과 사실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남의 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닥친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그럴 때에 내가 참으로 어떻게 될지라도 주와 주의 명령을 지킬  건가, 사죄를 그대로 보수할 건가, 칭의를 그대로 보수해서 기념할 건가, 주님이  죽기까지 하셔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신인 결합이라는 이 결합을 내가 버리지  안 할 것인가!  이래서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는 소원이지만 '이럴 때에 두려움은 마귀가 주는  것이니까 두려움을 가지지 않게 해 주옵소서.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 주옵소서.

그러나 장기간의 고문과 고형이 오면 아픈 걸 견디지 못하니 그때에 못 견뎌서 원치  아니하는 주님에게 대해서 배반이나 명령을 배반하거나 하는 이런 일 있을까 모르고  두렵사오니 능치 못하심이 없는 성령님께서 그럴 때에 몸과 생명이 다 주님과  진리로 인해서 없어질지라도 그들 앞에서, 생명을 다 빼앗아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 계명을 지킨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자기의 입술로 범죄했으면 입술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그 입술에 대해서 어떤 고형을 하고, 수족에  대해서 어떤 고형을 하고, 자기의 물질에 대해 어떤 고문과 고형을 해서 원수  앞에서 하나님을 섭섭하게 욕되게 부끄럽게 했던 그것을 반복해서 이제는 원수  앞에, '보라! 네가 아무리 해도 그가 날 사랑하는 것과 내 계명을 지키는 것을  변개치 않는다. 네 마음대로 해 봐라 할 수 있는 이렇게 당신이 원하셔서 하실 때에  그 일을 해야 되겠고, 세상 떠나기 전에 무슨 죄를 지었든지 지은 대로 낱낱이 원수  앞에서 주님을 부인한 그것을 반복해서 원수 앞에서 원수를 부인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이 일로써 일관을 해야 마음에 시원하겠는데, 그때에 무서운 고문과  고형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그 면에 대해 모두 다  걱정들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먹고 입고 사는 것은, 회개하는 자를 굶겨 죽이지 않습니다. 모든 물질의 주권을  당신이 가지고 있어. 인간이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당신이 예정한 선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복음과 주님에게 바쳐서 다 살아도 주님이 예정하신  가난의 선 이하에 내려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의 예정, 절대의 그 능력이 이끌고 나가는데 우리는 마귀가 미혹  주는 그 미혹에서 제가 '이렇게 하면 이리 되고, 저렇 게 하면 저리 되고, 안 하면  안 되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마귀의 미혹에서 우리가 다 고난당하고 있는 것이지,  든든히 그분을 믿고 얼마든지 당신에게 거리끼는 것 당신의 매어 놓은 계약의  법칙에 거리끼는 것 지체 말고 담대히 회개해서 그 계약에 일치되고 그 법칙에  일치되고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이 일을 담대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것이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실 때에 모든 만물은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경건치 아니한 자를 다 멸망시킬 때에 그때 불사르기 위해서  간직해 둔다. 경건을 만들기 위해서 이런 것들을 다 이용하고 보류하고 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말씀하신 그대로 재림 맞이할 준비인지 모릅니다. 어쨌든지  주님이 지금 회개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라는 것은 절대로 허영주의자가 회개를 못합니다. 회개는 허영에 속한  것이 아니고, 허욕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진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는 제일 낮은데서부터, 제일 껍데기서부터 회개를 해 들어가야 됩니다.

 제일 껍데기 죄가 무슨 죄인가? 그 죄를 가리켜서 본죄라 그렇게 말합니다. 본죄를  다른 말로 말하면 악습의 죄입니다. 악습 악은 세상에서 말하는 그대로의 뜻이  아니고, 악이라는 것은 창조주요, 주권자요, 주재자요, 우리의 주가 되신 분인데 그분  버리고 어떤 피조물이든지, 자기든지, 주님 외에 딴것을 주로 인정해서 행동하는  것이 다 악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번 살고 두 번 살고 살아온 그 생활 습성 거듭 거듭 연습해 놓은  그 악습이 본죄입니다. 악습 외에는 원죄가 있는데, 원죄는 죄의 뿌럭지 인데,  악성이 원죄입니다. 악성. 자기를 중심으로 위주로 한 그 죄가 원죄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그 후는 인간이 하나님 중심 위주가 되지 못하고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사람이 됐습니다.

 '선악을 아는 것이 우리 중 하나 같다' 그 말은 선악의 정의를 자기를 중심해서  '자기에게 거리끼면 악, 자기에게 화합되면 선.' 하나님 완전자 하나님이 당신을  중심으로 해서 선악의 규정을 지우신 것같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저를,  하나님처럼 저를 근거해 가지고 선악을 규정지운 그것이 '선악 규정지우는 것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본죄를 회개하고 가면 그 다음에 이제 원죄에 가서 원죄를 회개 하려고 우리가  애를 써야 되고, 원죄 위에는 악령의 유혹, 악령입니다. 그것이 에덴 동산에 들어온  배암입니다. 우리가 제일 처음 어릴 때에는 본죄로 더불어 싸워서 회개를 해야  됩니다. 삼계명은 본죄에. 삼계명 이하는 본죄에 속한 것이요, 이 계명은 원죄에  속한 것이요, 일계명은 악령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끝에 '이웃 것을 탐내지 말라' 하는 것이 십 계명 중에 제일 끝이니까,  내가 실지로 무엇이든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에 내게 오는 것이면 암만 원치  아니하는 것이 와도 내게 필요해서 주님이 주는 것인 줄 알고 달게 받고, 또 내가  아무리 원하는 것이라도 안 오면 내게 와서 해가 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안  주시는 줄 알고 물질에 대해서는 주님에게만 받으라 했습니다. 주님이 보관하라는  것만 보관하고, 주라는 것만 주고, 쓰라는 것만 쓰고, 물질에 대한 네가지 말한 것도  그것만 하면 물질에서 회개가 자꾸 하나씩 파고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요 네  가지는 물질에 대한 회개는 파고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밑절미를 보도록까지 파고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자기가 자연스레 신앙 생활할 때에 자기에게 오지 안하는 것을 탐하는 것은  다 탐심이오. 남의 집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아도 남의 형편 사정을 원해서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도 그것도 역연 십계명을 범하는 탐심인 것입니다.

 이런 죄를 하나라도 회개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은 다른 말로 하면 회개는 회개로 회개에 나아가게 된다.

하나 회개함으로 그 마음에 둘 회개하고 이렇지, 제가 회개할 것 거기다 딱  중단시켜 놓으면 그 다음에는 안 열립니다. 열리지는 않습니다. 회개를 해야 그  다음에 회개의 문이 열려지지 회개하지 안하고 닫아놨는데 그 다음에 회개의 문을  넘어서 회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고요히 생각을 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닌 무엇을 이웃 것을 탐하는 부러워하는 그런 것이 뭐가  있는가? 그것이 제 신앙 생활 경험으로 보면 꽉 찼습니다. 처음 믿을 때 꽉 차도  믿음으로 돌아서니까 다 버렸지요. 버려도 결단코 깨끗해지지는 않습니다. 그건 제  경험입니다. 깨끗해지지는 않습니다.

 이미 '열째 계명을 범하지 말라' 하는 것을 다 버려서 그런 것이 생각에도 없고,  아예 그런 걸 탐하거나 그런 것이 없는데도 우리가 깨끗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도  낱낱이 내가 버렸지만, '과거에 이렇게 이렇게 해서'이웃 것을 탐냈습니다. 욕심을  부렸습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이미 다 고쳐 버린 것이지만 하나씩 그것을 들먹여서  주 앞에 고할 때에 우리는 시원해집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해 보면 알 것이오.

그것을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 위의 죄는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열째 계명이 제일  회개하기 쉽습니다.

 회개해도 주님의 피에 고해서 사해 달라고 고하십시오. 그래야 해결이 됩니다.

고쳤다고 해결되는 것 아니오. '내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사해 주십시오.'  옛날은, 레위기를 읽어 보십시오. 조그만한 허물된 죄가 있으면 양이든지  비둘기든지 산 걸 잡아다가 자기의 그 잘못의 그것을 부담을 시켜서 죽여서 피를  제단에 뿌려야 용서를 받습니다. 그 전에는 그들이 용서를 받지 못하고 죄를  받았습니다. 그저 자기가 고쳤다고 되는 것 아니오. 지금은 단번에 흘리신 주님의  피가 있으니까, 우리가 양 한마리 잡기보다는 주의 피에 고하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이래도 주님의 피에 고해야 사함이 돼 집니다.

 제가 며칠 전 가 있는 양산동이라 하는 거기 가서, 어쩐지 며칠 동안 자꾸 내장이  아픈 것 같아서, 갑갑하고 창수가 버긋해서 안됐어서 식구들에게 어쩐지 내가  내장에 들어 있는 내종이 생겼는가 아파서 못 견디겠고 뿌듯하이 안됐다고  이랫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가! 어떻게 해서 볼까? 너무 이래 놓으니까 이거는 뭐  누구한데 병원에 의사한테 가 봐야 이 많은 병을 다 알지도 못할 것이고 제가 산에  올라가서 고요히 묵상하는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회개는 다 했지만 주님의  피에 고하지를 아니했다 그 말이오.

 고하지 아니한 것이 깨달아져서, 다 짐승의 피를, 짐승을 잡아 가지고 이렇게  사함받았는데, '내가 뭐든지 안하면 그만이지 생각했지 과거에 알지 못했을 때에  지은 그런 죄를 다 주님의 피공로에 고해서 사함을 받지 아니했다.' 하는 그걸  느껴서 그것을 주님의 피에 고하니까 수르르르 내려갔습니다. 지금 괜찮습니다. 그날  밤에 와서 식구들에게, '내가 이렇게 죄 하나를 주님의 피에 고하지 아니하고,  고쳤으면 그만이지 했는데, 아니라 과거에 지은 죄를 주님의 피에 고하지 아니하고  고쳤으면 되지 않나 했는데, 고하지 아니한 그것이 나에게 고통이 돼서 내가 그걸  고하니까 그만 그 모든 속 아픈 것이 다 물러가고 지금 시원하게 됐다.' 주의 피에  아니 고한 그거라. 벌써 고치기는 고친 것들인데, 옛날 고친 것들인데 주님의 피에  고하지 아니하니까 그것이 장 늘 그래 들어 가지고 있다 그 말이오. 레위기를 내가  보는 동시에 그것을 깨닫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깨끗게 하시려고 애를 쓰십니다. 왜? 지극히 거룩하신  당신의 백성을 삼으려고, 택한 자면 남자나 여자나 유 무식간에 당신의 거룩한  제사장을 삼으시려고, 영계나 물질계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로  제사장으로 삼으시려고, 우리를 깨끗하게 만드시려고 당신이 애를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열째 계명을 회개하고 생각해서 실제로 무엇인가 자기가  이웃의 무슨 물건 하나를, 단스 하나를 탐을 내도 냈으면 무슨 연장 하나라도, 토지  하나라도, 집 하나라도 이웃 것을 내가 내것 만들었으면 좋겠다 하는 탐낸 것  있으면 그 회개를 해 보시면 알 것이오. 회개해 보시면 회개 속에 찬말로 인격의  영양분이 들었는지, 맛이 있는지, 씹어 보면 솜을 씹는 것 다르고, 껍데기는  아무것도 없는데 씹어 보니까 속에서 단 것이 나오는 것 있고, 쓴 것이 나오는 것  있는 것처럼 회개를 해 보면 압니다. 회개라는 것은 회개를 해 보면 회개 속에  하나님의 은총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회개의 맛을 본 자가 회개하고  회개함으로써의 회개 속에서 나오는 그 영양 그것을 먹고 우리의 신앙 인격  하나님의 형상은 자라게 됩니다.

 O의사라고 학교 선생으로 있었는데, 왜정 말년에도 그렇게 신사 참배, 그렇지만 그  사람은 학생들 데려다 놓고 계명 가르치고 예수 믿는 것 가르쳤습니다. 교실에서  죽을 각오하고. 이런데 그분이 제가 고 웃 마을에서 주일 본다 소리를 듣고 쫓아  올라오다가, 그때 나는 집사입니다. '집사님 나는 이상한 것을 봤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인데요?' '내가 올라오니까 조그마한 밭뙈기가 있는데, 그리로  모두 사람들이 다녀서 밭이 길이 돼 가지고 있는데 밭 가운데 썩 들어오다가,  아이구! 이거 남의 밭인데 임자가 얼마나 이렇게 다니는 것 보면 섭섭해 하겠느냐!  남의 침노인데 할 수 없다. 도로 돌아서 둘러서 저렇게 와 가지고 그 밭을 딱 다  지내니까 이상하게 내 마음 가운데 기쁨이 충만하고 오늘 내가, 그런 깨끗하고  개운하고 참 통쾌한 그런 기쁨의 맛을 보지 못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저한테  묻습디다. '녜, 그것이 회개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모든 회개는 다  그런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말을 하고 보냈는데, 우리는 실질적으로 회개를 합시다.

 아홉째, 거짓증거하지 말아라. 우리 거짓말하지 맙시다. 기생 라합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구원에 유익된, 안 할 수 없는 거짓말이 있었고, 거짓말하면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에 방해가 되는 일이 있을 때에 라합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때에 그거짓말한 것을 하나님이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그로 인해서 기생 라합에게  구원을 줬습니다.

 우리가 이미 자기가 거짓말 해 놓은 게 있다든지 하는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구원에, 거짓말 안 하면 다른 사람의 구원이 망쳐지는 그런 일이라면 저 혼자  속으로 회개하고 이래 할 것이로되 그렇지 아니한 것, 다른 사람의 구원에 관련되지  아니한 자기의 물질이나 자기 지위에나 자기 사업에나 자기 위신에나 어떤 것에  어떤 것이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거짓말한 것 다 회개해야 됩니다. 거짓 말 안 해야  됩니다.

 '주여! 나는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 가 아니라,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도와 주시옵소서. 내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거짓말하지 아니하는데  주님이 도와주시지 아니하면 나 혼자는 이렇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어떤 일에든지, 사업에나 자기 가정 관계나 인인  관계나 무슨 지위 관계나 사회 관계나 어떤 데서라도 우리는 거짓말한 죄를  회개하고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이 될 때에  '이러면 활동 범위가 좁아서 살 기 힘들겠다.' 생각하지만, 아니오. 거짓말 안 하려  하는 거기에서 자기가 빠져 죽을 함정과 자기가 걸려 죽을 올무는 다 피하게  됩니다.

 여러분들! 거짓말 하냐 안 하려고 하는 데에서 '내가 이러면, 이 거짓말 안 하고는  안 되겠고, 이 길 가며 거짓말 안 하고는 안 되겠고, 거짓말 안 하려면 이 길 안  가야 되겠다.' 거짓말 하나만 안 하려고 작정해고 안 하면 거짓말 안 하는 이것  가지고 자기를 멸망시키는 열 멸망 몇십 멸망 빠지는 수없는 함정, 자기를 망치는  수없는 그 모든 것을 피해서 벗어나게 되는 참 복 있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 계명은 마구 우리의 생명이요, 행복의 덩어리입니다. 자유의 피난처요.

 또 우리가 남의 것을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도적질한 거 있으면 다 돌립시다.

돌릴 거는 돌리고 못 돌리면, 사람이 죽었든지 없어졌든지 하면 자기에게 있는 그  물건은 더러운 것이니까 하다 안 되면 구제하는데 넣어서라도 속하십시오. 그게  들어 우리에게 복에 거리낌이 되면 속해야 됩니다. 만일 그런 것을 자기가 못하면  '나는 이렇게 이렇게 부정한 재물이라 이것을 하나님에게 바치오니 처분해 주십시오'  하고 이름을 써서 연보궤에 넣으면 그것은 연보에 그냥 헤아려 넣지 아니하고 그걸  해서 주면은, 그걸 제가 어떻게 처리할 걸 처리해서 그 도둑질한 것이 그 사람의  영과 육에 모든 형통을 가로막는 무서운 암초와 같은 이런 일이 되어 있지 않도록  그것을 다 속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또 갚을 수 있으면 갚고.

 어리석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부정을, 물질에 부정해 가지고 잘 사는 것 아닙니다.

부정을 하면 부정을 함으로써 물질은 들어와도 물질의 주인공된 자기가 벌써  어두워지기 때문에 그 어두워짐을 인해서 다른 면으로 수십 배 수백 배 절단이 나는  것입니다. 도적질하는 것을 물리치고, 넉넉히 도둑질할 수 있는데 그걸 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물리쳤을 때에, 당장에 주먹에 쥘 수 있는, 호주머니에 집어 넣을  수 있는 것을 안 넣으니까 손해간 것 같지만 그로 인해서 그것보다 얼마나 큰 것을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는 실력있는, 지능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그 방편 그 길을 걸어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고 우리는 주시는 것 받아 가지고 잘되는 그 길이 좋지,  하나님은 안 주려 하고 인간도 안 주려 하고 싸움 싸움 해 가지고 이래 가지고  불법으로 취해서 가지는 그런 것이 뭐 좋을 게 있겠습니까? 팔계명을 우리가 회개를  합시다.

 또 일곱째로 칠계명을 우리가 회개합시다. 다 어리석은 일이오. 남자나 여자나 남의  남자나 남의 여자를 탐내는 그것도 자기의 큰 함정과 지옥을 만드는 것이요, 모든  자유를 다 꺾어서 감옥에 가두는 것이요, 자기에게 한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끌어올  수 있는 그 지능들을 다 불로 지져서 움싹 타서 망쳐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일이오.

 우리가 어디까지 빠지고 어떻게 됐을지라도 칠계의 음행죄도 회개해야 됩니다.

이것이 말세에는 제일 심해서 이거 하나 범하면 다 그만 해이해지고 마음이  부패해지고, 이거 하나 방비하려고 하면 다른 모든 것이 다 방비되고 예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칠계를 회개하는 이 일을 아주 힘써야  합니다.

 에덴 동산도 인류시조도 칠계로 망했습니다. 실은 남녀교제에서 망했어. 노아 때도  남녀 교제에서 망했습니다. 소돔 고모라 하는 거 남녀 교제에서 망했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도 이것으로 망한다 했습니다. 칠계를 회개하고.

 여섯째 사람으로 더불어 불목하는 것 있으면 그 불목을 어쨌든지 풀도록 노력하고,  안되면 자기 혼자라도 참 하나님 앞에, 내가 상호 관계는 안 되니까 하나님께  부탁하니까 어쨌든지 이 불목을 다 주님이 맡으시고 화평해 달라고, 이 죄를 사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구해서 제 육계명에 거리낌이 없이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도 오계명부터는 다르지만 육계 칠계 팔계 구계 십계 이 죄를 회개하는  데에는 눈물을 두 번 만나야 됩니다. 이 죄를 회개할려면 범죄케 한 마귀 그놈이  우리 속에서 원통하고 아까와서 못 견디는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회개를 할려고  하면 옛사람 그놈이 쫓겨나가야 되고, 그놈의 소욕이 끊어지게 되고, 그놈의 모든  정실이 다 끊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놈이 들어서 슬퍼서 우는 이 눈물을 만나야  됩니다. 이 눈물 없이 회개한 것 껍데기요.

 이 눈물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 어김으로 말미암아 닥쳐오는 그  결과, 닥쳐오는 결과의 그 멸망이라는 그 결과를 자기가 몰라서 그랬다가 하나 둘  차차 차차 그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을 깨달아 알 때에 너무 과거가 기막히고  원통해서 이제는 원통의 속 사람의 눈물이 나와서 울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위로함을 받을 것임이요' 이제 주님의 위로가 옵니다.

 두 눈물을 통과하는 회개를 지나면 주님의 위로의 깨달음이 와서 주님의 위로가 올  때에 이제는 그때에 감사의 눈물이 납니다. 위로의 감사의 눈물이 나면 그 다음에는  환하게 열리는 것이 소망이 열립니다. 소망이 열리고 주의 안보의 담대와 평강이  오니까 담대하고 소망을 향하여 용진할 수 있는 용기가 속에서 나옵니다. 힘이  나옵니다. '주여! 합니다.' 용기가 나옵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이에게 능력을  주면 그 능력이 들어서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대로의 충성의 결과를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생명에 속한 결실인데 이 가로막혀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야 되지, 문  열기 전에는 안 됩니다. 회개는 주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그 휘장이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가 성도는 성도라.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지만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이 죄, 이것을 하나씩 둘씩  회개를 해야 하나님과 나와가 열려지게 됩니다.

 이제 말한 이 모든 것이 다 본죄입니다. 악습의 죄요, 그 죄가 어디에서 나왔느냐?  자기 중심 자기 위주. 모든 것보다도 자기를 제일 사랑하고 자기 위주로 자기  중심으로, 선악을 아는 것이 우리 중 하나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중심으로  선악의 정의를 내리니, 자기 위주 자기 중심 이것이 들어서 모든 본죄를 다  지어놓은 것입니다. 이 본죄를 회개해야 비로소 원죄인 자기, 자기 중심의 자기  그놈이 자기에게 원수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본죄를 회개하는 데에서  원죄를 알게 됩니다.

 자기의 행위로 범한 이 죄를 회개하는 데에서 자기 속에 죄를 범하게한 자기 중심  자기 위주라는 그 자기가 자기가 아니요, 자기를 죽인 자기요, 원수인 자기라는  이것을 알고 이것을 원수로 삼아 이 자를 대항해서, 참으로 주님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  자를 부인 하라고 했구나! 이자를 부인하라고 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원죄를 이제 거머쥐고 씨름하게 됩니다.

 이래서 어디서든지 '주님이여 ! 육체의 소욕, 내 욕심, 내 생각, 내 주장, 내 소원,  내 재미, 내 기쁨, 내라는, 주님 떠나 내라는 나 이것을 중심해서, 이것을 위주로  해서, 이것을 근원으로 해 가지고 하는 이 행동은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주의  것입니다. 주께 속했습니다. 주의 종입니다. 주의 성전입니다. 주의 백성입니다. 주의  피로 값주고 산 주의 것입니다. 주님만이 내게 자유할 수 있고 나는 주의 것으로만  움직일 수 있지, 주님이 말하지 아니하는 말 내가 어찌 하며, 주님이 원치 않는 걸  내가 어찌 원하며,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기쁨을 내가 어떻게 가지며, 당신은 내  안에 계셔서 당신의 기쁨이 내 기쁨을 입고 나오고 당신의 소원이 내 소원을 입고  나와 세상에서는 내 소원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당신의 소원으로서 범사에 당신은  주인되고 나는 주의 전으로 주의 종으로 주의 것으로 살겠습니다.' 하는 것이  원죄하고 싸우는 싸움입니다. 원죄하고 싸우는 싸움.

 이 싸움을 싸우면 주님으로 인하여 움직여야 될 터인데, 주님 사모가 동가리가  나고 '주여, 내가 오늘은 사람을 만나든지 일을 만나든지 물건을 만나은지  복잡하든지 한가하든지 주님 모시고 주님 시키시는 대로만 하겠습니다. 참으로 주의  전으로만 살겠습니다. 했는데 갑자기 사람이 와서 척 닥치니까 그만 보는 사람하고  이야기 하고, 척 이야기 하다 보니까 주님은 잊어 버리고 그 사람하고' 단 둘이  상대했어.

 또 거기에서 회개하고 몇천 번 몇백 번 이렇게 해서, 참 말이 쉽지 주님으로  동하고 정하고, 주님 잊어 버리고 무엇을 상대하는 이것이 음녀같이 떠난 저와 같은  무인격이며, 무가치한 것이며, 참 가치없는 인간이며, 팔방 미인 창기 모양으로  아무데나 사람 닥치면, 샤람만 넘치면 그만 주님 잊어 버리고 거기에 상대해서  날뛰는 이 죄를 회개할려고 하는 것이 배암의 유혹을 벗어 날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하고 같이 상대할 때에 어떤 그 무엇이 와 가지고 주님 잊어 버리게  하고, 그와 나와 상대케 하는 그것이 바로 내게 대해서 배암입니다. 그것이 나를  유혹시킨 배암입니다. 돈이든지 물건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그것이 내게 대해서  배암입니다. 그 생각 가지고 주님 잊어 버리고 인간이든지 무엇이든지 사건이든지,  둘이 상대해 가지고 주고 받고 하다 보니까, 어떤 대상이 하나 나서 가지고, '그것은  나에게 참 필요하고 요긴한 것이다' 하는 그것이 선악과입니다. 그것 먹으면 완전히  죽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고로 어쨌든지 지금 우리는 회개할 기회입니다. 지금 돈을 탐 할 때,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무때나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돈을 탐해 가지고서 돈으로 성공한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권세를 탐해 가지고 권세 성공한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만 보고 당신 하나로 전부를 삼아서 당신 얻을려고, 당신 하나만 취할려고,  당신의 것만 될려고, 당신하고만 하나 되어 움직일려고 애쓰다 보니까 애굽 나라  총리대신 그것이 요셉이요, 왕된 것도 다윗이요, 총리된 것이 다니엘이오.

 이제 몇 사람 이렇게 보인 것은 그만하면 족하다 말입니다. 이러니까 기독교는  그저 당신 한 분으로써 우리의 전부의 전부가 되고 무한히 남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돈도 되고. 지혜도 되고, 능력도 되고, 영광도 되고, 기쁨도 되고, 평강도 됩니다.

 그분 잊어 버리지 안하고 그분을 잡고 있으면 그분에게서 나오는 게 있습니다.

내가 그분을 좋아하고, 그분을 사모하고, 연모하고, 애모하고, 경모하면 우리  본능으로 그분을 좋아하고 사모하고 경모할 때는, 내가 그를 어떻게 하든지 좋게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는 안 되고 그분을 좋게 하려는 사람이 되는, 좋게 하려는  그것이 들어서 멸망을 피하고 모든 영광의 구원을 다 빨아 당기는 유일한 법칙인  것입니다.

 어쨌든지 회개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경비하는 것, 이런 경비하는 가운데서라도  '우리에게는 적이 있다. 공산주의가 밀고 오면 우리는 절단나니까 우리는 회개해야  되겠다.' 밤에라도 어두운데 경비를 하면서 외로운 가운데에서 혹 연상해 가지고  공산주의와 직면할 그런 연상도 하고 이래 가지고 우리도 회개를 일으켜서 좀  강퍅한 마음을, 강퍅한 마음을 이제라도 해 가지고 거기에서 좀 예민하게 할까 해서  우리가 경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지키시면, 인간이 지키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소용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해서 회개의, 이것도 모두 회개 운동을 일으키는 이걸로  하는 것은 주님이 분명히 기뻐하시고 이것을 당신이 독촉해서 나에게 알렸습니다.

서부 교회 교인들은 이 사실을 성경 대로는 믿지 말고, 성신의 감화를 나도 받아서  내가 마귀 감화도 알고 내 이성 판단도 알고 내 주관도 알고 관념도 알고, 내가  과거에 무슨 주사야몽 같이 내게 무슨 상상 무꾸리가 들었던 것이 나온 그것도  생각하고 성신의 감화도 알고 짐작은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회개 안 하면 다 불로 소멸된다.' 하는  것으로 주신 하나의 경고인 것을 알고 우리가 똑똑히 회개합시다 지금 그런것 자꾸  탐할 때가 아니고 회개하면 그 안에 또 다 있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회개 안 하면 망합니다. 어쨌든지 고요한 시간을 찾아서 회개합시다. 회개하면  자기가 시원해질 것이고, 증거가 있습니다. 빛이 옵니다. 기쁨이 옵니다. 담대와  평안이 옵니다. 염려가 다 물러갑니다.

 (초신자를 위한 기도)  주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헤매던 두 형제를 주님의 피로 구속하사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죄와 마귀와 사망이 해할  수 없는 구속받은 주의 것인 것을 저들이 깨닫고 주님을 바라며 의지하며 믿고  순종하고 주의 자녀된 것을 깨달아 언제든지 주님으로 더불어 의논하여 모든 길이  다 바로 되고 형통하여 인간 성공을 하여 가지고 세상을 뜰 수 있도록 인간 되는 이  사람 만들어지는 이 일에 전심 전력을 기울이는 산 소망을 가지는 저희들이 되도록  영육에 축복하시고 동행해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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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회개시킬것/ 이사야 1장 18절-20절/ 1985. 3. 1.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12
51 회개에 담대하라/ 누가복음 15장 1절-7절/ 1984. 8. 31. 금새벽 선지자 2016.01.12
50 회개에 담대할 것/ 이사야 1장 18절-20절/ 1987. 5. 29. 금새벽 선지자 2016.01.12
49 회개에 담대할 것/ 고린도후서 7장 1절/ 1983. 6. 20. 월새벽 선지자 2016.01.12
48 회개에 후퇴하지 말라/ 베드로후서 2장 22절/ 1983. 5. 6.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6.01.12
47 회개에 후퇴하지 말라/ 베드로후서 2장 22절/ 1983년 20공과 선지자 2016.01.12
46 회개에 후퇴하지 말라/ 베드로후서 2장 22절/ 1983. 5. 6. 금저녁 선지자 2016.01.12
» 회개와 십계명/ 누가복음 13장 6절-9절/ 1983. 3. 13.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12
44 회개와 십계명/ 요엘 1장 2절-4절/ 1983. 2. 13.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12
43 회개의 기회/ 요엘 1장 1절-4절/ 1983. 2. 20.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12
42 회개의 기회에/ 히브리서 12장 14절-17절/ 1983. 10. 15. 토새벽 선지자 2016.01.12
41 회개의 노력/ 마태복음 4장 17절/ 1982. 7. 19. 월새벽 선지자 2016.01.12
40 회개의 목표 표준/ 베드로후서 3장 10절-13절/ 1983. 5. 8.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12
39 회개의 방편과 종별/ 마태복음 4장 17절/ 1982. 7. 18.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12
38 회개의 복/ 마태복음 4장 17절/ 1982. 7. 18.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12
37 회개의 복/ 마태복음 4장 17절/ 1982. 7. 22. 목새벽 선지자 2016.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