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기회에


선지자선교회 1983년 10월 15일 토새

 

본문 : 히12:14-17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지난밤에 마태복음 5장과 18장에서 두 가지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들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심신에 각 지체들이 있는데 각 지체의 구원 곧 하나는 살아  장성하게 되는 것이요 하나는 두 번 죽어, 다시 죽어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도리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첫째 아담의 범죄로 정죄받아 모든 것이 죽었습니다. 날 때에 사람이  되어 나자 정죄를 받아 죄 아래에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되는 그 동시에  정죄받게 됩니다. 그는 아담이 하나님과 계약한 것은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계약했기 때문에 날 때부터 정죄를 받아 사망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신학자들의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면 날 때부터 정죄 받았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죄 있는 것을 지을 수가 있느냐?' 그렇게 트집을 부리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는 심령이 어두워서 깨닫지를 못하는 구별성이 없는  연고입니다.

 하나님이 죄 있는 것을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창조되면 창조돼서  아담 하와의 자손이 되는 동시에 정죄도 동시에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됐으면 정죄 아래에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 사망한 자들입니다. 사망 아래에 있어서 아무리 어려도  하루 살면 그만치 죽었고, 이틀 살면 그만치 많이 죽었고 십 년 살면 그만치 더  많이 죽었고, 이제 나이가 많으면 그 사람은 살 날이 조금밖에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로서 그대로 심신이 따라 완전히 죽는  죽음까지를 세상에 머무는 기간으로 삼아 가지고 완전히 죽는 것으로 세상  생활을 끝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도 있으니 그것은 구속을 입지 못한  불택자들입니다.

 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사람들은 죽은 가운데서 예수님의 공로로 다시  살려 주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영은 이 공로를 단번에 다 입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심신은 받을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은 그 사람의 주격체이기 때문에 전체가 죽어 있으니 하나님이  살리지 안하면 그는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리 지마는 이 심신의  육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이 주격이 아니고 그 영이 그에게 주격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셔서 주격 권위를 영에게 줬습니다. 그러기에  영이 살리는 데로 그 육이 영에게 복종하면 쉽게 다 살아납니다.

 그런고로 영이 살아나서 영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 그 심신의 기능을  살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 심신의 기능이 이렇게 영이 애를 쓰고 또 실질적으로는 살아나지 안했지마는  법적으로는 살아났고 살아난 권세를 얻었습니다. 살아난 권세를 얻어서 이제  죽지만 안하면, 중생된 영에게 순종만 하면 안 죽습니다. 그러나 중생된 영에게  순종하지 안하면 죽는 죽음이니 그 죽음을 가리켜서 둘째 죽음이라 그렇게  성경에 말씀을 했습니다. 둘째 죽음의 해를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그런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이 현실은 죽은 것이 살아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현실은 살아난 것이 영원히 죽지 안한다. 그렇게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현실을 그렇게 두 가지로 말할 수가 있는가? 녜, 두 가지로 말할 수가 있습니다.

 기본구원을 연결해서 이미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아남의 위치에 있고 소속에  있고 법적 해결이 다 됐기 때문에 살아난 자입니다. 이 심신의 기능도 살아난  자나 독립성이 없고 영에게 소속했기 때문에 영에게 속하면 살아나고 영에게  속한 것이 떨어지지 안하면 살아납니다. 안 떨어지면 살아납니다. 이것은 구속을  안 벗으면 영생합니다. 또 이것이 구속을 입으면 영생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현실은 죽은 것이 살림을 받는 현실이요 살아난 것이  성장을 받는 현실이라, 또 현실은 산 것이 산 것을 벗지 아니해야 산 것이  계속하은 현실이요 벗지 안하면 현실은 안 벗고 살아 있는 것이 성장되는  현실이다. 그러기에 성장은 같고 살아난다 죽지 안하면 된다 하는 말은 내나  거기에 따라서 편리상 알아듣기 쉽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현실을 통하여 모든 죽은 심신의 기능이 살아난다. 그렇게  말해도 됩니다. 실상은 죽어 있는 것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또 법적으로  예수님의 구속적으로는 이미 살게 되어 있는 기본구원 얻은 자는 살게 되어 있는  자인데 살도록 되어 있는 자가 죽지 안하면 영생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신의 기능이 사는 것도 현실에 달렸고 또 살아난 기능이  성장되는 것도 현실에 있습니다. 현실은 아주 이렇게 중요합니다.

 중요한데 우리의 그 심신의 기능이 이렇게 영원한 구원을 받는 데에는 각각  여러 지체가 있어 그 지체는 그 지체의 믿음으로 구원 얻지 그 지체가 믿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 지체가 있으나 여러 지체 있는 그 지체들은 그 지체가  세상에서 믿는 행위를 통하엿 구원을 이루기 때문에 만일 그 지체를 하나  끊어버려서 만일 불구라고 하면 그 면에는 그 지체의 기능의 구원은 이루지  못합니다. 눈이든지 발이든지 손이든지 없애버 리면 안 됩니다. 또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다시는 건설구원은 이 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떠나지 안했을지라도 부분적으로 떠났으면 떠난 부분은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만날 때에 요 현실에서는 내 어느 지체가 기능을  얻는 때라, 이때에 이 지체가 믿으면 기능 얻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면 기능이  살아나고, 기눙이 성장하고, 순종치 안하면 요 부분적인 기능은 요것은 죽고  살아나지 못한다, 죽어 있다. 그것을 지난밤에 말씀을 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다른 지체가 다 온전하다 할지라도 한 지체가 그것이 범죄하면 한  범죄한 그 지체로 인해서 모든 지체가 정죄 아래에 있습니다. 모든 지체가 정죄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대로 세상을 떠나면 아깝게 의를 행한 모든 지체도 한  지체의 범죄로 인해서 전심신의 기능이 정죄받아 다 유황불 구렁텅이로 가게  됩니다.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 의로운 모든 지체는 한 지체로 인해서 정죄에서 벗어 나지를  못합니다. 죄와 의와 다른 것이 죄는 한 지체의 범죄로 모든 지체가 정죄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의는 한 의로 인해서 모든 심신의 기능이  의로워지는 것 아닙니다. 의와 죄가 다르다는 것을 성경에 많이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한 지체의 순종으로써는 모든 지체가 순종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한  지체 그것만 인정받고, 또 정죄는 한 지체의 정죄로 모든 지체가 다 정죄를  받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마태복음 23장에도 명 확하게 말해 놨고 학개서에도  똑똑히 말씀을 해 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기의 심신의 기능의 구원, 이 기능의 구원, 못 이룬 그  지체는 이다음에 그것이 부활할 때도 그것은 없이 부활이 됩니다. 만일 그것이  의를 행하지 못했으면 믿지 못했으면 그것은 기능이 하나도 없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해서 사함을 받아,  죄를 끊는 것과 의를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죄를 끊는 것과 의를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죄를 끊는 것은 사죄에 속한 것이요 의를 행하는 것은 이제 믿음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사람이 다른 모든 지체에 구원을 이루어 가지고 있었으나 한  지체가 계속 범죄를 함으로 전신이 정죄받아 가지고 건설구원이 되지 안하다가  그 한 지체가 이제 죄를 끊는 그 시간, 죄를 끊는 그 시간 죄를 끊는 그  시간이면 그 사람이 죽을 때에 그때라도 그 지체가 이제는 죄를 범하지 안하고  고하여서 사함을 받고, 죄를 주님 앞에 고해서 사함을 받습니다.

 죄짓는 일은 죽는 때가 왔으니까 죄짓는 일은 중단이 됐고 이제 그 죄에 대해서  사함을 받으면 그때에 남은 지체는 희망 있습니다. 다시 그것이 죄짓지 안하면  하나님 앞에 의로 인정을 받도록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의로 인징을 받도록 돼  가지고 있다가 다시 그것이 죄를 지으면 다시 정죄 아래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렇게 있다가 그 사람이 그러면 죄를 끊으면 의를 행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죄를 그것을 끊으면 막바로 그것이 의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죄와 의는 다릅니다.

 죄는 하나님을 어긴 그것이 죄요 고하여서 죄를 고하면 주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의 고한 죄를 다 사해 주시는 그것은 아무 때든지 됩니다. 자기의 지은 죄를  고해서 사함 받는 것은 아무 때라도 됩니다. 사함 받는 건 아무 때라도 됩니다.

 그러기에 고해서 사함 받으면 모든 지체가 이것이 하나님 앞에 인정이 돼  가지고 있으나 다시 그 지체가 범죄하면 또 인정된 것이 다 허사가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지체가 아주 회개를 했든지 죽었든지 하기 전에는 그 지체를  인해서 정죄되는 것은 고하면 사함 받아서 죄로 인하여 자기에게 오는 그 영향은  자기가 받지 안하지마는 자체는 의롭게 돼 가지고 있지마는 의의 혜택은 입지를  못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범죄하면 다시 정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의는 이것은, 고하면 언제든지 밤이나 낮이나 아무  때라도 고하면 되지마는, 무슨 죄라도 고하면 되지마는 의는 하나님께서 기회를  만들어 주셔야 의가 되지 기회를 만들어 주시지 안하면 의가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라는 것은 회는 사함에 속한 것이고 개는 그것은 의에 속한  것인데, 사람들이 '이것 내가 어떤 죄라도 이것은 내가 범 죄하다가 나중에  회개하면 될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지마는 회개는 자기에게 있는 것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회개할 수 있도록, 고칠 수 있도록, 잘못된 것  사함은 받지마는, 과거에는 삐뚤어지게 했는데 이제 바로 행하는 것, 바로  행하는 그게 의요 삐뚤어진 것을 잘못한 줄 알고 주님 앞에 용서 구하는 것이  그것이 사함입니다.

 삐뚤어진 것을 용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언제든지 구할 수 있지마는 삐뚤어진  것을 고쳐서 바로 행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 때나따나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행하는 그것은 행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셔야 됩니다.

 그러기에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를 했는데 신사참배 한 그 죄는 그때에 다 주를  팔고 신사참배 한 그런 사람들이 그 뒤에 다 회개는, 후회는 했습니다. 후회는  했지마는 각자에게 그렇게 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받은 사람도 있고 받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신사참배 그 신사는 없지마는, 신사는 뭐이냐? 자기의 생명이 아까와서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내놓지 아니함으로써 하나님와 도를 배반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내놓기 아까와서, 세상에 속한 것을 다 내놓기가 아까와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한 그 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사참배라는 것이 그뒤에 다시 있은 것은 아니고 단군신사니  뭐이니 그런 것을 말을 했지마는 그 다음에 그만 실상을 이루지를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신사참배를 회는 했습니다. 후회를 해서 주님 앞에 고해서 사함은  받았지마는 개라는,-회개.-개라는 것은 그 뒤에 고쳐 행할 기회를 가지는 데에서  개가 되지 고치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면 개가 안 됩니다.

 그것은 개적으로 혹, 신사참배 문제는 아니지마는 개적으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내놓느냐 주님을 내놓느냐 하는 두 가지에 반드시 씨름이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무슨 체육 대회에서 뭐 참피언니 뭐이니 말하는데 그 참피언에  대한 성질을 내가 잘 배웠는지 못 배웠는지 몰라도 누구에게 말을 들으니까 그  사람이 세계 제일 일등의 그 자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한번 패전했으면 그만 그  다음에는 그 위치를 뺏긴다고. 뺏기는데 다시 얻을 수는 있기는 있다고.

 어떻게 얻느냐? 그러면 저 밑에서부터 새로 해 올라와 가지고 이기고 이기고  이기고 이기고 이겨서 제일 지금 일등되어 있는 그 사람만 남아 있는데 그  사람하고 저 밑에서 다 이겨 올라와 가지고 '나하고 다시 한번 대결하자' 할  때는 대결을 안 해 줄 수가 없는 것이 법이라고. 그러나 자기가 그 사람에게  패전했다고 다시, 패전했는데 '이제 다시 한번 더 두 번 거듭 한번 또 시합을  하자' 그런 일은 못 해. 밑에서부터 밟아 올라와야 그게 있어야 이제 다시  도전을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그런 말로 들었습니다.

 사람이 개라는 것은 자기가 말로 개 한다고 개 하는 것 안 되고 마음으로,  한다고 하는 것 아니고, 마음의 기능 몸의 기능이 있는데 그 신사참배는 마음의  기능과 몸의 기능이 다. 그 기능이 뭘로 말미암아 죽었느냐? 자기의 세상 소유를  내놓기가 싫어서 죽은 것입니다  세상 소유를 내놓기가 싫어서 아까와서 죽었는데 죽은 그 죄를 고해서 사함은  받습니다. 사함은 받지마는 아직까지 개는 안 됐습니다.

 사함 받는 것은, 사함 받는 것은 사함만 받고 끝나면 누구의 구원이 됩니까?  자체의 구원이 됩니까? 누구의 구원이 됩니까? 지체, 그 개별 지체 그 지체  자체의 구원이 됩니까 다른 지체의 구원이 됩니까? 사함 받는 것은 누구의  지체의 구원이 됩니까?  개별 지체의 구원이 됩니까 개별 지체의 구원은 안 되고 다른 지체들의 구원이  펍니까? 다른 지체들의 구원은 되지마는 개별 지체 그 자체의 구원은 안 됩니다.

자체 구원은 사함은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가리워진 것은 없고 죄는 없지마는  그것이 의를 행하지 안했기 때문에 그 기능이 살아 있지는 안합니다. 살아나지는  안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회개라는 것은 기회가 있지 기회가 없이 제 맘대로  언제든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함 받는 것은 기회를 제가 만들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사함 받지마는 개라는 것은 하나님이 기회를 만들어 줘야 되지 기회를  만들어 주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신사참배로 범죄한 사람이 사함은 언제든지 받지마는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개를 자기가 마련할 수 있는 그런 기회는 어떤 때가 그런 기회입니까? 어떤  때가 그런 기회지요? 한번 대답해 봐요. 남 반에 한번, 한번 교역자들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전체가 죽었는데 죽은 것은 사함 받아서, 사함 받아서 의로운 지체들은 다  미결로 있던 것이 삶에 속했지마는 또 범죄하면 헛일입니다. 그러나  신사참배라는 그 부분적인 그것이 사함은 받아 회는 되지마는, 회는 되지마는,  사함 받는 것은 회에 속한 것입니다.

 회는 되지마는 개는, 가룟 유다의 회는 소망 없는 회고 이거는 소망을 가지고  회 했기 때문에 회에 속한 것은 속한 것이지마는 가룟 유다의 후회와는 조금  다르기는 다릅니다,  회는 되지마는 개는 안 되는데 그 신사참배 한 것을 회개를 완전히 하는 개를  이루는 것은 어떠한 기회를 하나님이 주셔야 개를 이룰 수 있습니까? 그것 한번  누가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저 ○○교회에 있는 저 ○목사님? 녜, 다 내놓지  안하면, 자기의 몸과 소유와 세상 모든 것 세상에 속한 것을 다 내놓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진리를 내놓든지 그러면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다 내놓고  하나님과 진리를 붙들든지 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그  기회가 신사참배를 회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지 안하 시면 저는 단독이 회개라는 것은 안 됩니다.

 그 후에 신사참배는 안 됐지마는 하나님께서 있게 해서 혹은 6·25로 그렇게  그런 회개할 기회를 만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6·25에서도 그 기회를 다  버리고 내나 신사참배 한 것과 같은 그런 죄를 범한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고,  6·25가 아니라도 개인적으로라도 자기에게 있는 어떤, 내 생명과 몸과 소유와  내 이 세상 가정이고 뭐이고 이것 전부 이때에 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면은 이 모든 게 다 절단된다 절단난다 할 수 있는 그런 개적  어려움을 만난 사람도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개적으로 만났든지, 단체적으로 만났든지, 전체적으로 만났든지,  시대적으로 만났든지 만나서 그때에 범죄한 그 형편과 같은 꼭 그 도수의, 그  정도의, 그 성질의 형편을 만났을 때에 그때에 이제 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를  만나기 전에는 개가 안 됩니다.제 마음으로 이제 고쳤다고, 그거야 그런  형편에서 고치지 안하고 만나기 전에야 고쳤다는 그말은 말뿐이지 실지가 아니요  믿음이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때 회개하지, 에서도 축복을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간구했지마는 다시 그 축복받을  기회가 지나갔기 때문에 그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 기회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삭도 한 번밖에는 못 하는 축복인데 그 축복을 했기 때문에 다시는 영원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기회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회개라는 것이 이것이 앞으로 기회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없는 것은 다시 회개할 기회를 못 얻는 것입니다. 이제 있는  것은 회개할 기회를 자기가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 하나님이 이렇게 주셔서 이 회개를 하는 이 일을 하는 일, 하나님이  기회를 주셔야 되고 그때 내가 있는 것을 다 하나님에게 다 바쳐서 이제, 구속의  팔린 것이기 때문에 내것이 아니고 주의 것인 것을 깨닫고 주님에게 다 내놔야  되는 그런 기회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데는 쉽습니다. 내놓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그 기회를 만들어 주시지 안하는데 자기가 내놓는 그 생활은 심히  어려운 것인데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뭐이냐? 그것은 순생이라는  것입니다. 순생. 순생. 자기가 평소에 살면서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자기의 소유로 자기가 다시 되찾아 가지고 살지 안하고 세상과 세상에 모든 있는  것은 주님에게 다 맡겨놓고 자기는 순전히 주님의 것으로 사는 그 일이 계속되면  자기의 모든 것은 다 주님에게 바친 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주님을 배반한  일이 복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 신사참배 한 사람들이 혹 순생으로 그 굴지를 메운  사람 있고, 또 그런 기회를 만나서 메운 사람 있고, 그런 기회를 만난 사람은  메우기가 쉬울 것입니다. 복구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왜? '먼저도 이리 됐기  때문에 이제 내가 이것을 요번에 지면 안 된다'해서 늘 기도 많이 하고  기다리다가 그런 기회가 오니까 이제는 모든 걸 다 내놓고 진리와 영감을  영접해서 회개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하나님이 만들어 줘서 하기가 쉽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시지 안하고 '네가 일생 동안  순생으로써 그것을 만들라' 하는 사람은 이것은 참 힘이 듭니다.

 그러나 순생이 되는 사람이면 다 내놓는 순교가 되고, 순교는 죽어서 끝나는  것이 순교요, 순생은 자기가 살아 있으면서 산 '네 심신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살아 있는데 제물된 이것이 순생인데 이 순생으로 이루는 것은 그 계속해야 되는  것인데 그것 좀 힘이 듭니다.

 단번에 하기는 쉽습니다. 단번에 하기는 어느 정도 쉽지마는 계속 내놓는 생활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순생이 없는 사람은, 또 한가지입니다.

순생이 없는 사람은 순교를 못 합니다. 또 주님에게 이것이 어려운 줄 알고  간구해서 기도하지 안해서, 기도함으로 성화되지 안한 사람은 이 사람은 순교를  못 하고 순생도 못 합니다.

 그런데 신사참배에 대한 지식을 바로 가지는 것이 문제인데 신사 참배에 대한  지식을 대개 사람들이 해석을 하기를 뭐라고 해석하느냐? 이계명 범한 죄라  그렇게만 해석하니까 그 해석은 틀렸습니다. 일계명과 이계명을 다 범한  죄입니다.

 그것이, 다시 말하면 신상을 머리 꾹 이게 문제가 아니라. 머리 숙인 이게  문제가 아니라, 이게 문제가 아니라 주 앞에서 다른 주님보다 높이는 뭐인가  있다는 그것이오. 주님보다 뭐인가 높이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말은  자신도 신이 될 수 있어.

 자신도 신이라는 것은 하나님 동등으로 두는 것, 하나님보다 위에 두는 것,  하나님보다 위에 두는 것, 하나님보다 자기를 다스리는 권리가 위에 있고,  하나님보다 자기가 자기에게 존경받기를 위에 있고, 또 하나님보다 더 소망하고  애착하고 위하고 높이고 그에게 따라서 움직이는 그것이 더 위에 있는 그것이 곧  일계명 범하는 것인데 신사 참배는 그것 때문에 된 것입니다.

 꾸뻑 절한 그게 문제가 아니오. 꾸뻑 절한 게 문제가 아니라 절하기 전에는  많은 세월을 두고서 얼마든지 위협과 그 모든 것이 충분히 생각하고 연구할 만한  일이 있기 때문에 자기 혼자 비판하고 비판해 가지고 '어느 것이 비중이  높으냐?' 이렇게 비중을 달고 달고 장기간 동안 달고 달아 가지고 이제 하나님과  진리보다 이제 이 세상과 자기 이것의 비중을 높이 본 그게 결정되고 난 다음에  신사참배가 되는 것입니다. 요 갑자기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는 데는 자기와 세상을 완전히  내놓고 주님과 진리 하나만을 가지도록 하는 가지는 요것이 회개요, '세상과  세상에 있는 자기 이것을 내놓기 싫어서 하나님과 진리를 내놨다, 생명을 내놓기  싫어서 주님을 내놨다' 요렇게 요것이 신사참배라 하는 것을 요 죄를 아는  사람은 그 뒤에 회개를 하려고도 애를 쓰고 또 기회 주시면 회개를 하기도  하지마는.

 그걸 해석을 그렇게 해서 바로 가르치지 안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뒤에 약간  약간 있었습니다. 국기 배례 때문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 주일 성수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었어.

 그런 것은 뭐 그냥 안 해도 될 터인데 백지 홍겁을 쥐먹고 '내일은 주일날  투표인데, 선거 투표인데 딱 오라고 지금 자꾸 이래 통지가 와 가지고 두번 세번  오고 자꾸 이래 하고 가면 빤하게 아는데 내가 주 일날이라고 대통령 선거나 그  선거에 투표하지 안하면은 딱 지목해 가지고 이제 내게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하는 걸 자꾸, 마귀란 놈이 자꾸 협박을 줍니다.

 마귀란 놈이 자꾸 협박을 주니까 자기가 있다가 '어라, 아무래도 할 수 없다.

자기의 목숨이나 자기와 세상을 이것을 내놓지 않기 위해서 주님과 진리를  배반한다는 것을 확정짓고 가는 것입니다. 확정 다 지었소.

 확정 다 짓고 난 다음에 내나 주일날 선거 안 하게 되니까 지은 그 사람만 속고  망령됐고, 또 아예, '모든 것을 다 내놓고 다 뺏길지라도 주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 하는 것을 작정한 사람에게 고통 줄 필요가 없습니다. 작정한  사람에게 고통 줄 필요가 없어.

 고통 안 받고 주일 잘 지켰고, 다 같이 한 자리에서 주일 예배를 봤지마는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살았습니다. 하나는 신사참배의 그 죄를 회개할 기회를  가져서 회개를 했고 하나는 회개를 못 했고 이렇게,  이러기 때문에 모든 믿음은 아는 데에서 생겨집니다. 아는 데에서, 알아야  행하고 행해야 믿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도리를 바로  배우고 못 배운 데 대해서 이게 얼마나, 그까짓 거 세상 전부보다도 가치가  큽니다. 바로 배우고 못 배운 것. 그러기에 신사참배는 일계명 이계명을 다 범한  죄지 이계명만을 범한 죄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회는 언제든지 되지마는 개는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야 된다.

개는 제가 범죄한 그 정도 그 성질, 그 종류와 같은 종류가 아니라도 그 정도의  현실을 줬을 때에 그 정도의 어려움을 자기가 이기고 나가야, 그 정도의  어려움을 받아야, 그 정도의 자기의 것을 희생을 해야,그 정도의 것을 부인해야,  그 정도의 것을 믿어야 되어지는 것이지 말만 해 가지고 되는 것 아니라  그말이오.

 요것도 요걸 모르는 사라들은 회개에 대한 것을 똑똑히 모르기 때문에 공연히  회개했다 하지만 나중에 가 보면 참, 예수 믿는다고 어북 잘 믿는다 하는데 좀  만나 가지고 얘기를 몇 마디 해 보면 깜깜해 가지고 있어. 예수 믿는 것 아니오.

그건 성전 밭마당이 분명합니다. 성전 밭마당이 분명해.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건설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서 이것이 얼마나 힘이  드느냐? 행위로는, 행위로는 온전한 행위라야 건설구원 됩니다. 건설구원이  이루어지는 행위의 표준은 온전입니다.

 '사데교회야, 네가 살았다는 이름 있으나 실상은 죽었다. 왜 죽었느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한번도 찾아보지 못했다.' 네 현실에 그 현실에서 네 모든  마음과 몸의 그 기능에 전체가 다 똘똘 뭉쳐 가지고 해야 온전이지 한쪽은 하고  한쪽 안 하는, 겉어머리 고기덩어리는 행하고 마음은 딴것 하고 있습니다. 그  온전한 행위 아니오. 사람 보기에는 온전하지만 하나님 보기에는 온전하지 않다  그말이오.

 또 마음도 그 부분은 다 행했지마는 마음에 깊은 속에 어떤 욕심 하나 그놈은  지금 행하지 안하고 있어. 욕심 그놈은 지금 행하지 안하고 그놈은 지금,  겉어머리 다른 거는 다 행하는데 욕심 하나 그놈은 행하지 안하고 있으니 그것이  뭐이냐? 네 구원 전체를 멸망시킬 것이니 그것을 끊어서 병신이 돼도 그게 낫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지난밤에 그 말씀과 또 회개는 하나님이 기회를 주셔야 되지  제가 기회를 만들려고 해서 만들어지는 건 아닙니다. 기 회는 뭐이냐? 그것을 그  정도의, 그 성질의, 그 도수의 자기와 세상을 내놓을 수 있는 도수, 또 그보다도  다 안 내놓고 조그만한 것을 내놓을 수 있는 도수 그런 정도의 도수와 종류와  본질과 본성의 그것이 요것 때문에 주와 진리를 판 것에는 그와 같은 것을 이제  대놓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이제 그것이 복구가 돼지지 그전에는 복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소용 없을 때에,그 소용 없을 때 그때는 자기가 '목숨을 지금  내놨습니다. 목숨을 내놨습니다.' 암만 해도 안 되니 그것은 하려면 한 건 한  건에서 순생의 생활을-내나 죽음은 죽음이라.- 순생의 생활을 네가 계속 하면은  그 오래 계속 하는 가운데서 그것이 혹 이루어질 수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그 기회 기회에 만날 때에 딱 희생을  함으로써 건설구원이 이루어지는 그 건설구원의 기회를 놓지 않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덧입기를 날마다 힘쓴다' '무거운 짐진 거와 같이 내가 마음이  지금 눌려 있다' '눌려 있다' 이러니까 바울은 마지막 세상을 떠나게 될 그때에  제일 많이 눌렸어. 그때에 구원을 많이 이루어야 될 그때 마귀란 놈은 제일  달려들어.

 왜? 사도 바울이 사도된 첫해에는 중량이 한 근짜리라면 이태에는 두 근짜리  되고, 삼 년에는 세 근짜리 되고, 사 년 오 년에는 열 근짜리 되고 마지막에는  백 근짜리 되고 천 근짜리 되고 이제 만 근짜리가 돼 만 근짜리가 됐는데 마지막  다 이루는 마지막에 딱 범죄하게 해 버리면 그건 완전히 악마의 마귀가 솔빡 참  노다지를 땄다 그말이오. 노다지 따는 거라.

 우리 이남에서는 지금 슬퍼하지마는 이북에서는 김일성이는 노다지 땄다고 지금  기뻐하고 찬송을 할 것이라. '요번에는 노다지 땄다. 그런 것만 몇 번만 노다지  따버리면 그것 전쟁할 것도 없이 다, 인물만 다 없으면 할 게 뭐 있나?'  이러니까 이번에는 노다지 땄다고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이 차차 이루어지는데 이 커져 갈수록이, 구원이  커져갈수록이 마귀에게는 욕심이 더 많이 나게 되고, 욕심만 날 뿐 아니라 이  커지고 많아져 가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투자를 많이 들여서라도 빼앗아야 된다는  그것이 마귀에게 각오가 섭니다.

 이러기 때문에 많은 투자를 들이니까 이 사도 바울이 이루어 놓은 건설구원  이것을 이제 빼앗기지 안하려 하니까 점점 힘을 더 써야 되어지니까 '무거운  짐진 거와 같다' 짐을 지면 처음이 무겁소 갈수록 무겁습니까? 갈수록 무겁지.

 이러니까 자기가 이 건설구원을 이루는 것 뺏기지 않는 이 일에 대해서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이것이 신앙인데, 믿는 사람들이 젊을 때는 그래 믿지마는 나이가  많아갈수록이 자꾸 믿음이 흐려지고 이러면 '우리도 젊을 때는 풋믿음이라  그랬지마는 우리는 노숙한 믿음이라' 신앙이 어데 늙습니까? 신앙은 늙는 종류가  아니오. 그거는 제가 스스로 위안을 받는 벌써 오만한 자리에 앉았고 벌써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자인 것입니다.

 우리의 건설구원에 대해서 우리 마음이 다급해지고 마음에 눌려지고 마음이  힘이 쥐어지고 이제 되는 그것은 무거운 짐진 것과 같다고 그렇게 묘사해 가지고  표시해 놓은 그것이 올바른 표시입니다.

 또 자기가 이 전투하는 전투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기를 이 전투를 뭘로  표시했느냐? 경주하는 것으로 표시했어. 경주하는 것은 시작하면 끝까지 대적이  없는 시간은 없어. 대적이 없는 시간 없고 계속해서 대적이 있는 그것으로  표시했는데 얼마나 요긴하게 바로 표시를 해 줬는지? 우리의 전투라 하는 건  밤이고 낮이고 끝나는 그 쉬는 시간은 절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 구원을 방해하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입시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서, 실은 주님의 말씀을 어기는 지체는 다 죽여야 돼요. 내  눈도 죽여야 되고 주님의 말씀을 어기는 지체는 다 죽여야 돼.

 황보 기 장로님에게 제가, 처음에 교역자로 모신 이가 황보 기 장로님인데 황보  기 장로님의 사모님의 말 들으니까 그 장로님이 처음에 젊어 예수 믿을 때에 그  눈으로 범죄하는 것을 회개하려고 눈을 자꾸 이래서 눈이 그만 좀 병신이 됐어.

안경 쓰고 다니는데 눈이 그만 항상 눈물 나오고 눈이 잘 안 보입니다. 눈이  희미룸하이 이래 가지고 똑 좀 반눈뜨기 모양으로 그만 그래 가지고  또록또록하지를, 장 이래 가지고 다녀.

 이래 다니는데, 요 눈이 범죄해서 눈 요놈을 범죄해서 눈을 헤비고 때리고 이래  가지고 눈을 병신을 만들듯이 그렇게 하고, 혀로 범죄한 걸 인해서 그 혀를  깨물어서 얼마나 참 혀 끄트머리가 잘라질 만치 끊어질 만치 이렇게 범죄  회개했다는 그 말 들었어. 그뿐만 아니고 다. 그렇습니다. 다. 그렇지 안하고는  회개가 되어지는 것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의 전신의 구원을 방해하고 있는 지체 어떤  지체든지, 자기의 육체의 지체든지 마음의 지체든지 그 지체를 그놈을 죽입시다.

그놈을 아주 안 죽이려면 그것을 마음의 지체는 그것을 죽이는 것은 아주 부인해  버리는 것이고 그것을 죽이지 안하고 그것을 자꾸 의의 병기로, 죄에 드려서  죄의 도구로 쓰던 그 마음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려서 의의 도구로 쓰도록 요렇게  하면, 아주 그것을 부인해 버리면, 부인해 버리지 안해도 그것이 더 효력 있게  회개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회만 아니라 개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 육체의 지체도 그렇습니다. 육체의 지체도 자기가 무엇이든지 자기는  눈으로서 범죄하는 것, 눈으로 범죄, 안목의 정욕 이것 무섭습니다. 안목의  정욕, 어데 가면 그만 뉘집에 들어가면 좋은 단스만 있어도 그만 욕심이 나  가지고 '나는 단스, 나도 저놈을 한번 사 보겠다.' 그까짓 거 사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데 그만 단스 한번 사 보겠다고 여기에다가 경쟁을 붙어 가지고 죽는  날까지 좋은 단스 하나 사기 위해서 이제 다노모시도 하고 뭣 하고 뭣 하고 이래  가지고 나중에 그것 절단이 나서 뭐 자살하느니 뭐 하니,  다노모시를 권하는 권찰이라면 그 권찰은 마귀 새끼요. 다노모시를 권하는  목사라면 마귀 새끼요. 다노모시를 권하는 장로라면 마귀 새끼요. 다노모시를  권하는 집사라면 마귀 새끼입니다. 회개해야 돼요!  왜? 그것이 왜 마귀 새끼가 되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한 시간 두 시간 들어  가지고 모르나 다른 것을 보면 아요. 그것이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제가  직접 망하든지, 그것은 조그매 망하는 것이고 하나는 다른 사람을 망쳐서 그거는  끝없는 멸망을 받는 멸망을 받는 것이니까 그런 것을 안 해야 됩니다.

 그 뭐이냐? 그거는 내나 안목의 정욕이라. '단스 하나 사자.' 이래 가지고 자,  단스 하는 단스 다노모시도 있지, 양복 다노모시가 다 있어요. 제 정도대로 제  정도 았는 대로 입으면 되는 것이지 하필 제 정도에 없는 것을 몇 달이나 주  모으고 몇 해나 모아 가지고서 양복을 사 입는 그것을 제 분수에 맞지 안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에게 전체가 폐단되는 것뿐이고 의복으로 말미암아 자기는  아무짝도 못쓸 사람 됩니다.

 옷 입고 다니는 것 보고서 '야, 저놈 바람 들었구나. 저놈이 저러기 때문에  못쓰는구나.'  좋은 의복 입고 가면 돈 얻을 줄 알아도 그 의복을 입고 가니까 돈 달라 하니까  '돈이 없네. 그 미안하네. 돈이 없네.' 왜 돈이 없어? 돈이 꽉 차. 네 놈한테  빌릴 돈은 없다 그말이오. 네 놈한테 빌릴 돈은 없다. 양복 입고 온 것 보니까  틀렸어.

 제 분수에 딱 맞은 옷을 입고 오면 '옷은 됐다. 옷은 돈을 빌려 줄 만하다.'  갑자기 가 가지고서 그 사람들 먹고 사는 절 떡 이래 가 보니까 '식상을 보니 제  분수에 딱 들어맞다. 돈을 발려 줄 만하다.'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또 교제하는 남의 교제하는 데 가서 보니까 아주  집에서는 아끼면서 활수로 가지고서 제 분수는 요만한 것이 남하고 교제할 때는  아주 분수를 높여 가지고서 이와 같이 교제하는 것 사 교하는 걸 보니까 '아이고  이 사람 돈 빌려 줬다가는 안 되겠다.'  '사교하는 것도 보니까 돈을 빌려 줄 만하다. 이 사람은 사업 경영을 하는 것  보니까 경영하는 것이 제 분수에 맞다.' 그러면 다 됐어. 다 됐으면 돈을 줄 수  있는데 하나 더 심사해야 됩니다.

 뭘 심사합니까? '그 사업은, 내가 이래 듣기에는 그 사업은 된다는 것만  말했는데 혹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지 않느냐?' 그러기 때문에 남 돈을 줘 안  떼이는 사람은 그 사람 사업에도 다 사장이 다 돼야 됩니다.

 떡 가서 '이 일에 대해서 이런 실패가 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런 실패를  생각해 봤는가?' '아, 예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면 이런 실패가 오는 것은  어떻게 하지?' '그런 실패 할 때는 요렇게 요렇게 방비할 것으로 해 놨습니다.'  맞았다 그말이오. '또 이런 실패는 안 올까?'  모든 실패를 다 아니까 그 사람이 모든 실패 다 알고 모든 실패 다 방비하기로  딱딱 준비해서 모든 실패 방비하게 딱딱 해서 해 놓고 그러고 난 다음의  성공이라. 실패를 다 제거한 다음의 성공이라.

 이러면 돈 줘 놔도 그거는 나중에 암만 쓰라 해도 '아이구, 이자 길어가는 것  겁이 나서 이것 좀 갚겠습니다.' 하고서 와서 갚을 수 있다 그거요. 세상에서는  물질 그것을 성공하려 하면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기에 이제 우리에게 육체의 지체도 온갖 게 있어. 어떤 사람은 그 발을  왑으면 괜찮겠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그만 갑자기 병이 들게 해 가지고  어데 돌아다니지를 못하구로 해. 못 하구로 해 가지고 안 되구로도 그렇게도 해.

 발이 다녀, 발이 걸어 돌아다녀, 발이 걸어서 번연히 그거는 온 전신을 죽이는  범죄를 하는 그 지체의 노력이지마는 발이 성하니까 뽈뽈 걸어가고 뽈뽈 요리  가고 조리 가고 산에도 가고 들에도 가고 뭐 요리 조리 가 가지고 그래 가지고서  죄짓는 것,  요것 발이 요게 성해 가지고 요 친구 만나고 조 친구 만나고 요래 가지고  망하는 것, 손이 들어서 그러는 것, 혀가 들어서 그러는 것, 눈 요놈이 눈이  봉사만 되면 좋을 것인데 눈이 봐서,  자, 단스 보니까 단스 욕심 나 가지고 죄짓지, 다른 사람 이래 축하하는데 영광  축하하는 것 보니까 그것 욕심나서 죄짓지, 권세 있는 것 보니까 그 욕심나서  죄짓지, 또 부자 보니까 그것 욕심나서 죄짓지, 또 여인 보니까 욕심나서  죄짓지, 남자 보니까 욕심나서 죄짓지,  정말로 못난 것이 좋습니다. 가난한 것이 좋소. 세상은 보면 잘나고 부한 게  좋지마는 인물도 가난한 게 좋아. 가난한 건 손해갈 것 하나도 없어. 가난한  것은 의를 행해도 세상에서 칭찬도 못 받고 옳은 일을 해도 환영도 못 받소.

얼굴이 더덕대가리 모양으로 뚜덕뚜덕 돼 가지고 있으니까 아무리 유익을 줘도  다른 사람에게 환영 못 받는다 말이오.

 이거는 기생 모양으로 생겨 놓으면, 생겨 놓으면 손해를 봐도, 손해를 봐도 또  만나면 죽고 못 살고, 손해봐도 만나면 죽고 못 살고, 이러니까 세상 것 부요한  것보다는 가난한 것이 낫다는 그것이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에게는 그 결론이  맞습니다.

 이러니까 이제 이 지체를 네가 죽여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골로새 3장에다 말씀해 놓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이  말씀을 해 놓고 난 다음에 첫 말에 말하기를 '곧 음란' 첫째 음란 말했어. 음란  말했어.

 이러니까 이 지체 가운데 망치는 능력이 많은 것은 음란에 속한 이것이 제일  심하고 말세가 돼 갈수록 자꾸 심한 모양이라.

 이런데 이걸 죽이려고 애를 써도 죽여지지 안하고 애를 먹고 죽이려고 애를  쓰는데 죽이려고 애를 쓰지 안하고 이 면을 자꾸 소원을 성취해 가지고서 물욕을  자꾸 기르고, 탐심을 기르고, 거짓말을 기르고 수단 방법을 기르고, 진실을 파는  거짓을 자꾸 길러 가지고 자꾸 하는 이러니까 그 사람의 구원이 얼마나 천리  만리 거리가 멉니까? 이것을 연습해 가지고 그것을 숙달을 시켜 가지고 숙달해서  망한다 그말이 오.

 그래 가지고 그의 행함으로 말미암아 육체적으로도 상당한 상당한 보응을  받는다, 성경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다' 그렇게 말했어. '상당한 보웅을  받는다.' 그런고로 우리가 참 정신 차려서 삽시다.

 마태복음 19장 11절 이하에는 보면은 말세에 대해서 우리에 말씀해 주신 것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은 모태로부터 타고 난 사람이라야 들을 수 있다. 아주  이 교훈은 들어서 감당하기가 참 어렵다. 이 교훈은 들어서 자기 복음으로  삼기가 어렵다. 그러나 모태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입고 온 사람들은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뭐이냐? '모태로부터 고자된 자도 있고, 또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해서 스스로 고자된 자도 있다. 이 교훈은 받을 만한 사람은  받으리라.' 아주 지극히 어려운 것을 가리켜서 말씀을 했습니다.

 다 사도 바울 그런 사람은 다 스스로 고자된 사람이오. 또 모든 산다싱이라든지  후란시스라든지 그런 사람들은 다 스스로 고자된 사람 이오. 에녹은 스스로  고자된 사람은 아니오.

 이러기 때문에 오늘도 결혼은 했으나 둘이 의논해 가지고 스스로 고자된 생활을  둘이, 여자도 고자 남자도 고자 '우리가 그러면 길게는 말고 한 한 달 동안  우리가 스스로 고자, 천국을 위해서 주를 위해서 죄악 요놈은 죽이기 위해 한 달  동안 고자 생활을 한번 해 봅시다.' 내외 만나, 내외 의논해 가지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삼 년 동안만 고자 생활 해 봅시다.' 삼 년 동안 의논해  가지고서 고자 생활 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 이래도 그것 됐으니까 한번 요번에 십 년을 한번' 의논하고,  고자 생활, 십 년을 하고, 그럭저럭 하다 보니까 일생이 그리 다 지나간다  말이오.

 마지막에는 이제는 '그뭐 고자 생활 하고 보니까 별 취미도 없고 별 미혹될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이제는 마지막으로 하늘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우리가  고자된 사람,' 한쪽이 반대하면 안 돼. 여자가 반대해도 안 되고 남자가  반대해도 안 돼. 반대하면 안 돼. 둘이 합의해 가지 고라야지 합의 안 해  가지고는 안 된다 하는 것을 고린도전서 7장에 말씀해 놨습니다.

 이러니까 이래 가지고 여생을 고자되는 사람도 있는데 이 말세가 돼 놓으니까  이것을 숙달하고 연습을 합니다. 연습을 해. 자꾸 연습을 해. 이 테레비 전부는  연습하는 그 테레비라. 나는 테레비에 그거는 내가 아직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그 테레비에 뭐 일본 테레비인가 뭐인가 보면 열한시 지나가면 있다 하던가?  우리는 여덟시까지만 테레비 보고 그 이상은 보지 못하니까 그런 건 아마 못  봤을 거라. 이러니까 테레비에 그 전부 뽑아야 될 이 성기의 숙달을 시키고  연습을 해 가지고서 이것을 하는 것을 테레비에 나온대요.

 이러니까 그놈을 죽이려 해도 힘이 드는데 이놈을 자꾸 숙달을 시켜 놓으니까  남자가 숙달시키니 아내가 죽을 지경이고, 아내가 숙달시키니 남자가 죽을  지경이고 이래 가지고 이 바란스가 안 맞아 죽는다. 그 말이오.

 우리가 깨야 됩니다. 지금은 급한 때입니다. 또 그렇게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의의 낙은 더 재미 있고 더 기쁘고 더 좋습니다. 나쁜 것 아니오. 더  좋고 더 재미 있소. 그럴진대야 세상보다 천국이 나쁘면 천국에 간 사람 다  후회하려고요? 부득이해서 가는 것 아니오.

 우리가 느껴 봅니다. 죄지을 때 재미 있다 해도 죄지은 재미와 내가 회개한  의를 행한 재미와 재미를 보면 다릅니다. 다르지 안해요? 이러기 때문에 의를  행한 그 거리는 눈을 감으면 생각이 나 '그때 그 거리를 걸을 때에 참 재미  있었다.' 그때는 아주 미인으로 더불어 같이 걸으면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동행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동행하고 그 사람, 사람 둘이 하나님 모시고  동행한 그 걸음은 참 기쁘고 즐겁다.' 하나님 배척하고 마귀하고 저거 둘이 하고  범죄한 그 걸음은 뒤에 생각할수록이 끔찍하고 후회되고 재미 없습니다.

 의가, 의가 죄보다 재미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체험해서 자꾸 판정해야  됩나다. '의의 재미는 이렇고 죄의 재미는 이렇구나' 하는 것을 비교해 보면  의의 재미와 죄의 재미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때가 가까왔습니다. 어쩌든지 한 지체로 모든 지체의  의가 미결에 되어 있는, 아직 정죄 아래에 되어 있는, 그것은 계속 죄와  연결되기 때문에, 손 하나가 죄와 연결돼 있으면 다른 몸뚱이 암만 해도 이것 다  죄와 연결돼 있는 것입니다.

 손 하나가 범죄하면 '손으로 범죄했지. 손만 가져가십시오.' 아니오. 손 하나  범죄했으면 온 전신을 묶어 가지고 갑니다. 손 하나가 감옥 가는 동시에 온  전신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법도 그와 꼭 같애.

 그런고로 우리는 깹시다. 지금 때가 됐습니다. 지난밤에 아주 중요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 옆으로 물을 나가 놓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그 죄악의 범죄의  배출구를 내지 안하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내놨다  그말이오.

 어떤 남편이 그 여자는 죄를 짓지 안하면 안 되기 때문에 한 보름 되면 집에서  박지기를 긁고 막 발동을 하고 미쳐서 야단을 지기고 이러기 때문에 남편이  알고도 '아, 이거는 뭐 가정이나 자녀나 다 이래 망치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  해서 '여보, 좀 어데 바람 좀 쐬고 오지요.' 이러면 '그럴까요?' 해 가지고, 해  가지고 가서 바람 쐬고 온다고 실컷 죄짓고 난 다음에는 이제 들어오면 그만  새사람이 돼 버려. 새사람이 돼. 그게 배출구라. 알지마는 그리 안 하면 전체가  깨질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 죄만 짓구로 해 가지고 다른 걸 살리려고 이래  가지고,  차차 차차 아이도 커나고 가정도 커나고 저도 나이도 차차차 많아지고 이러면  이제 뒤에 가서 그때는 한목, 믿는 사람이면 하나님께서 벼락을 때려서  그러든지, 그리 안 하면 환난을 주든지, 그리 안 하면 가정에서 뭐 어찌 돼  가지고 되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 이래 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기도하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것을 고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각자 각자가 자기에게 무슨 마음에 지체든지 몸의 지체든지 그 지체의  기능을 그것을 살릴 수 있는 기회에 살리지 못하고 죄악으로 말미암아 되지  안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다른 것을, 다른 성을 쌓기 위해서 다른 것을 의로  숙달시켜 놓고 요 한 배출구, 요 한 배출구,  요 사람은 먹는 죄, 요 사람은 투기 죄, 요 사람은 안일 죄, 요 사람은 명예  죄, 요 사람은 정믄 죄, 요 사람은 음욕 죄, 요 사람은 무슨 행락 죄, 뭐인가  하나 배출구 그거는 죄를 짓구로 내비둬야 다른 게 되겠다 싶어서 요래 놨다가  그것을 마지막으로 막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제 막으려 하는 이 방편을 수월하게 주셨는데 새벽기도를 다 나와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하면은 차차 차차 그놈이 말라 죽기 때문에 문제가 없어.

말라 죽기 때문에 문제가 없어. 말라 죽어요.

 말라 죽으니까 문제가 없이 그걸 쉽게 그 죄악이 끊쳐지지마는 그렇게 기도와  말씀을 가지고 끊지 안하고 그것을 그대로 두고 있으면 나중에 가서는 참 벼락이  떨어져 가지고서 그때에 자기 하룻밤이면 벌써 피골이 상접할 만치 그렇게  다급한 일, 6·25 때에 그런 일을 만난 사람은 만났습니다. 6·25 때 죽을  지경이라.

 어떤 장로님 한 분 그분이 죽었습니다. 장로님 한 분이 평소에 자기 부인이  집회 따라 다니며 은혜 받았다고 이래 가지고 은혜받아 가지고 신앙생활 하니까  그 장로가 잘 믿는 척 하는 것이 저거 마누라가 신앙생활 하니까 죽자껏 원수가  됐습니다. 그래 가지고 나도 한번 잡혀갔어. 잡혀갔어. ○○○집사님, 알지요?  누가 잡아간지 알지? 몰라요? 몰라? 박병영 장로를 몰라? 이제 알겠어? 나를  호출해 가지고 그때는 읍교회 있으니까 장로니까 조사 오라 하니까 가야 된다  말이오.

 가니까 그 말을 떡 해. '어떻게 집회를 거석해 가지고 이렇게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냐.?' 그래 내가 있다가 '그 미친 게 아니라 미친 게 바로 고쳐진 것이오.

미친 게 아니고 바로 고쳐졌는데 당신들이 미쳤소.' 내가 이래 하니까 막  이러더니마는 나중에 할 수 없어, 뭐 말해 봐야 자꾸 해 봐야 점점 더 그러니까.

 이랬는데 그때 거창군내가, 거창읍이 인민공화국이 공비로 말미암아 사흘 동안  인민공화국이 됐어. 경찰서 전부 다 태웠어. 경찰서 군청 재판소 뭐 읍소 뭐  전부 기관 다 불로 태워버리고 이랬는데 그때에 이제 갑자기 그리 안 하면 다른  데로 도망을 가지만 도망 갈 수 없이 갑자기 그만 밤에 습격을 해서 닥쳤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 장로님이 죽을 지경이라. 죽을 지경이라 막 어쩔 줄을 모르고 이래  날뛰는데 '장로님, 이 밑으로 들어가십시오.' 다다미를 열고 그 밑에 들고 '이  밑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래 다다미 밑이 얼마나 험하며 얼마나 버러지도 있고  얼마나 흉하겠습니까? 그 밑으로 안 들어가면 제가 죽을 것이니까 들어갔다  말이오.

 들어가니까 다다미 위에 턱 덮어 놓고 위에서, 그래 놓고 그만 어데로 가  버리면 싶은데 거기에서 '주여, 이 뺄갱이들이 왔으니까 이것 다, 황충이떼들이  왔으니까 이것 다 물리쳐 달라'고, 위에서 그렇게 위에서 자꾸 기도를 하니까  밑에서 죽을 지경이라. 그만 간이 녹았어.

 그 한, 나오지도 못하고 그것이 그러고 들어가고 난 다음에 뭐 얼마 뭐 하루  견뎠다 하더나 몇 시간? 얼마, 모르요? 아요? 하룻밤을 견뎠다던가 얼마  견뎠는데 그만 거기에서 그만 기절해서 그만 죽었어, 그만. 기절해 죽어버렸어.

 막 기도하고 이러는데 이 래도, 이러니까 뺄갱이들이 와 가지고 그 고함을 질러  기도하고 있는데 문 턱 열고 '아무도 없다. 가자.' 아무리 그렇게 호되게 고함을  질러도 뺄갱이 귀를 어둡게 만들어 놓으니까 와야 안 들리는 것이고 눈을  가뤄놓으니까 보이지를 않는 모양이라.

 그러기 때문에 '주여, 저들의 귀를 막아 주시고, 눈을 막아 주시고, 입을  가리워 주시옵소서.' 하는 것을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가리워 주시지 안하면 안 될 때는 기도해 가지고 우리가 가리워 주셔 가지고  파하는 일이 많이 있다 그거요.

 그것도 모르면 기도 못 해요. 제가 위천 있을 때세 그 교인들이 그걸 배워서,  자기 방에 있으나 뺄갱이들이 '이놈들, 어데 갔노?' 쫓아들어 오는데 자기는  방에 구석에 이래 가지고 이래 숨어서, 구석에 섰으니까 알 것 아닙니까? 아는데  문 확 열어보고서 '아무도 없다, 여기.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 하고 간 그런  그 피난을 한 사람들이 그뒤에 간증하는데 많이 있습디다. 그것도 알아야  기도하고 믿어야 되지 안 믿으면 안 된다 그말이오. 그러기에 성경을 봐야 돼요.

 그래 나중에 인민군들이 다 나가고 난 다음에 열어보니까 뭐 기절해 있어. 그만  거의 가물쳐서 죽었어, 얼마나 녹아놨든지. 얼마나 녹아놨 든지 죽었어. 그래 내  와 가지고 물도 먹이고 이래 가지고 이래 나오니까 그래 눈을 멀거니 뜨면서  '여보, 그렇게 좀 가만 있지 왜 그리 고함은 왜 질러 기도하며 고함을  지르느냐'고. 그래 녹아났어.

 그러면서 그 다음부터는 '아, 참 신앙은 따로 있는 것이로구나. 신앙은 따로  있어. 우리가 믿는 이 신앙은 신앙이 아니고 신앙은 참 따로 있 구나.' 그  다음부터는 그 장로님이 저를 신과 같이 여겼소. 신과 같이 여겨서 그  다음부터는 즉시 목회자 되겠다고 사법대서 이것을 사법대서 다 치워, 권위 있는  대서입니다.

 다 치워버리고 고려신학교 와 가지고, 신학교 오기는 고려신학교 왔지마는,  오기는 제가 그때 서부교회 여기 왔는데 항상 서부교회 와 있어. 와서 있다가,  목회를 하는 데도 그때 시작해 놓으니까, 목회를 하기는 해서 소문이 나. 차를  타든지 아무 때든지 장 성경 들고 있어.

 이랬지마는 목회는 참 아주 허무한 목회했습니다. 그저 배척당하고 설교도,  그렇게 세상서는 똑똑하고 웅변가고 이렇지마는 설교는 못해. 이래서 목회는 잘  못했지마는 마지막에 목회로 세상을 떴고 자기 부인은 이제 자기 아들이 전라도  어데 있어서 그리 갔었는데 지금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모르기는 모르겠습니다.

그때 그만 이것 갈라지고 그만 이래 되고 해 버리니까 내가 어데 있는지 그  사람들이 알지도 잘 못 할 것이요, 이 고신이 갈라지고 하는 이 바람에.

 그게 신앙이라 말이요, 그게 신앙. 권능이 없으니까, 인민군이 오는데 거기에서  주님 앞에 막 기도하고 고함을 지르고 기도하고 기쁘고 즐겁고 기도하고 이렇게  의기가 양양하게 그렇게 능력이 있는데 그 장로는 지금 그 밑에 들어가서도 그만  기절이 됐으니까 어찌 되겠소?  그것이 뭐이냐? 기도하지 안하고 새벽으로 하나님 말씀 들어서 회개하지 안하고  기도하지 안하고 요것을 서서히 요 죄를 끊지 안하는 사람은 마지막으로 환난  가운데에 마지막에 요런 긴급한 환난을 만나 가지고 거기에서 이제 회개를  시키는 것이니까 아무래도 택한 자는 회개를 시키는 것이니까 미리 미리부터  하는 것이 좋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새벽에는 좀 많이 나왔는데, 오늘 새벽에는 한 오백 명 가량 될런지  모르겠는데, 이제 다 나와야 돼요. 나와서 말씀을 들으면 자기에게 자꾸 회개가  안 됩니까? 기도하면 또 회개가 돼져요. 어쩌든지 회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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