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진리 사람을 위하는 생애

 

1984. 7. 15. 주일 오후 

 

본문 : 고린도후서 5장 15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선지자선교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것으로 영체와 물체 두 원소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천군 천사들은 다 영체뿐이요, 사람 외에 수많은 동물이나 곤충이나  모든 만물들은 다 물체뿐이요. 영체와 물체 두 요소를 겸하여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람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다 정복하고. 그  말은 다 그것을 소유하란 말입니다. 다 정복하고, 또 다스리게 하셨으니, 지금은  땅의 것만 그러하지만 앞으로 장차는 하늘의 것까지 다 정복하고 통치하게  됩니다. 타락 이전 인류 시조가 땅의 것을 다 정복하고 통치하였다가 마귀의  꼬임을 받아 가지고 그만 정복권과 통치권을 잊어버리고 사망하게 됐습니다.

어떻게 해서 정복권과 통치권을 잊어 버렸는가? 잊어버린 것은 자기가 자주자로  자기가 스스로 자기 주인이 되어 가지고 자주자로 이렇게 살고, 또 제 마음대로  하는 자율대로 살고 이렇게 하려는 이 두 가지로서 정복권도 통치권도 영생도 다  잊어버리고 쫓겨나게 된 것이 사람들의 타락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로 말미암아 사람이 영원한 멸망에 빠져 있는 것을 주님이 대속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우리 대신 우리가 잘못한 자주자로  자율자로 산 그 죄 값으로 영원 멸망된 그 멸망을 주님이 대신 받으시고,  받으심으로 죽으시고, 또 우리 대신 하나님만을 위하고 또 진리만을 위하고 하는  이 대행하는 역사를 하셔 가지고 우리에게 의롭다 하는 칭의를 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이  자주장으로 자율로 산 그 죄 값으로 다 죽어서 영원히 멸망 받게 된 그 형벌  멸망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시기 위해서 죽으신 죽으심입니다. 또 그뿐만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못한 것을 대신 행하시기 위해서 죽기까지 충성해  가지고 대신 행하셔서 죽으신 죽음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 대신해서 죽으신 죽으심인데 우리를 대신하되 두 가지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영원한 멸망을 대신해서 멸망으로  죽으셨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못한 의무와 책임을 대신 행하시되  죽기까지 해서 행하시므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복종하되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이와 같이 우리 죽음  대신해서 죽으시고 우리 대신 행하는 일을 죽기까지 행하셔 가지고 칭의를 입혀  주신 주님이 이렇게 하신 그 이유는 "산 자들로 하여금" 이제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에서 구출해서 살아나게 됐으니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그러면 사람이 자기 위함으로  영원 멸망 받은 것을 주님이 대신 죽으시기까지 하셔 가지고 구출했는데, 구출해  놓은 것이 또 자기 위하면 이제는 두 번째 영원한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한 번은 우리를 대속하셨지만 다시 한 번 더 대속을 해야 이 대속으로  살아난 것이 또 죄를 지어도 구원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두 번 대속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그거는 하나님의 지공법과 지성법에서 두 번은  대속을 할 수가 없도록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했으면 다 했지 더는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산자들로" 산자들이라 말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힘 입고,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되고, 또 하나님의 법적으로,  대속으로 인해서 심신이 법적으로 살아난 이것을 가리켜서 산 자들이라, 우리를  말합니다. 중생되고 예수님의 공로를 입고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입니다.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하는 것은 주님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너 위해서 죽어서 널 구원해 놨으니까 이제는 날 위해서  살라 그말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게 되면 인간은 만물보다 거짓된 것이  인간이요 타락해서 다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되어 있는 인간인데 타락하기  전에도 피조물은 하나님을 위해야 피조물이 사는 건데 자기 위하다가 죽었는데.

또 살려 놓은 것이 또 자기 위하면 또 죽기 때문에 '다시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말고' 그말은 다시는 너 위해서 사는 그 어리석은 노릇을 해 가지고 다시 멸망을  받지 않도록 해라 하는 그 말입니다.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저희를 대신해서 죽으신 이는 하나님이시요 또 도성인신하신 이신데  완전히 세상과 죄악과 사망을 이기신 완전입니다. 완전자를 위해서 창조주시요  또 구주시요 자존자이신 완전자를 이제는 네가 위하면 완전자를 위하면 완전의  행위가 되고 완전의 생애가 되기 때문에 거기에는 죽음이 없는 것이니까 주를  위해서 살아라 그 말은 너희들이 죽지 않는다고 영생하는 그 생활 방법을 취해  가지고 살아라 하는 그 말씀인 것입니다.

 본문에는 이렇게 하고, 이제 거기에 대한 해석을 말씀하겠는데 단단히  기억합시다.

 우리는 영을 가지고 있고, 또 마음을 가지고 있고 몸을 가지고 있고 또  우리들이 이런 행동 저런 행동을 가지고 있고. 또 우리가 이런 물질 저런 물질  물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을 우리가 가지고  있고. 또 우리에게 소유되어 있는 여러 가지를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많고 적은 것만 차이 있지 다 자기의 그 영육이라는 영육을 가졌고  자기의 소유라는 그 모든 사물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일과 물건, 사물이든지 또 자기 몸, 마음. 영 이 자체든지  우리의 가지고 있는 이것은 뭐하려고 세상에서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셔  가지고 살게 하셨는가 하는 이것을 우리가 또 바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세상에 살게 하신 것은 이것을 세상에서 재미있게 이용하고 또 편리하게  이용하고 또 세상에서 이런 거 저런 거 하고 잘 살도록 하기 위해서 가지게 한  것 아닙니다. 우리 자체와 우리의 모든 소유가 우리에게 있는 이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 하나님. 주님이면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이면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위하는 것, 주님을 위하는 그 일을 숙달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이나 물건이라든지 사건이라든지 우리 몸이나  마음이나 우리 영이나 우리의 가진 이 모든 것이 주를 위한 것이 되면 이는 죽지  않고 다 영생하게 되고, 또 주님 외에 딴 것을 위하게 되면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가진 것은 주를 위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영은 주님을 위한 것이 되어졌고,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법적으로 살아났지만 실상은 죽어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살아나 있지만  실상은 죽어 있는데 그 현실에서 우리 마음은 현실을 백 현실을 만날는지 천  현실을 만날는지 억만 현실을 만날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앞으로 그만 오늘 예배  보고 나서 오후에 하나님이 딱 불러가 버리면 우리 현실은 뭐 오늘로서 끝나  버립니다. 그러나 세상이 있게 되면. 하루도 바꾸어지는 현실은 열 번도 뭐 어떨  때는 참 몇 십 번으로도 하루 동안에 우리 현실은 바꾸어지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면,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지는 거기에서 우리의 마음을, 마음을  영생으로 완전히 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사는가? 사는 것은  주를 위한 것은 살고 주님 위하는 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위하는 것은 다  죽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실 때에 그렇게 지어 놨기 때문에 주를 위하면 살고 딴  걸 위하면 죽도록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주를 위함이 뭐인데? 주를 위함이 곧 진리를 위함이요 거룩을 위함이요 선을  위함이요 의를 위함이요 참을 위함이요 바르고 곧은 것을 위함이요 완전을  위함이요 온전을 위함이요 불변을 위함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면 그것은 그  현실에 주님을 위하는 것이 되었으면 벌써 그것은 영생으로 결정이 돼 버렸고.

또 자기를 위하든지 다른 어떤 피조물을 위하게 되면 법적으로 삶을 받았지만  실지에 가 가지고 자기가 주를 위하는 일을 주님이 우리 대신해서 주를 위해서  우리에게 공로를 입혀 주셨는데. 자기는 현실에서 주를 위하지 안하고 딴것을  위하게 되니까, 주님이 자기 위한 그 대속의 공로는 배반했기 때문에 그 공로는  자기에게 효력을 입히지를 못합니다. 이래서, 그만 그 현실을 통해서 자기의  심신이나 소유가 죽게 됩니다. 죽게 됩니다.

 그것은 처음에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었고 이제 둘째 아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려 주심을 받은 것이 또 한 번 죽으니까 성경에 말하기를 둘째 죽음 두 번째  죽음으로 죽었다 이랬습니다. 첫째 죽음에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아날 수  있지만 두 번 죽은 것은 영원히 살아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사느냐? 사는 것은 주님을 위하면 살고 주님을  배반하면 죽습니다. 주님을 위하는 거 뭐이냐? 주님을 위하게 되면 그것이 곧  진리를 위함이 된 것이요 진리화 된 것입니다. 그러면 살게 됩니다. 또 현실에서  자기의 무슨 사건이 주를 위한 사건이 안 되고 다른 자기나 어떤 인간이나  무엇이나 딴 걸 위하는 일이라면 그 일이 죽었습니다. 또 주를 위한 말이라면  그말은 다 영원히 살았고 딴 걸 위한 말이라면 그 말은 죽었습니다. 우리의  혀든지 귀든지 눈이든지 입이든지. 수족이든지 우리 마음이든지 그것이 현실에서  주를 위했으면 그것은 주께 속한 게 되어지고 진리에게 속한 게 되어지고, 진리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입혀주신 법적 그 생명을 그것을 현실에서 벗지  아니하고 입고 현실에 통과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주의 것 된 것이 현실에서  실상으로 주의 것이 돼 버리기 때문에, 그는 다시는 죽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우리의 이 소유를 살리는 것은 주를 위하면 살게 되는 것이고  또 주를 배반하면 죽게 됩니다. 현실에서 주를 위하면 주를 위한 그것은  현실에서 주를 위한 것으로 통과됐기 때문에 다시 현실은 다시 닥쳐오지  안합니다. 안 하기 때문에 그것은 현실에서 주를 위했으면 주를 위한 것으로서  끝이 나 버렸습니다. 끝이 났기 때문에 주를 위하는 것으로 그것이 결정이 벌써  지나 가서 결정이 통과한 결제가 되었습니다. 벌써 결정이 통과해서 결제가 돼  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주께 속한 주를 위한 진리에 속한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그러하고 마음도 그러하고 우리의 소유도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것 하나씩 단단히 가지면 여러분들이 알기 쉬운데.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을 위하고 진리를 위하고 사람을 위해서 있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을 합시다.

 사람을 위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요한 계명, 생명에  속한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함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그것이 내 계명 지키는 것이라. 이래서 주님이 인간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는 하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습니다.

마치 속담에 쥐는 밉지만 쥐가 그 도가지 옆에 있기 때문에 돌로 던지면 그만  쥐는 당장 잡을 수 있겠는데, 쥐잡으려 하다가 도가지 깨겠으니까 할 수 없어  도가지 때문에 도가지를 아껴서 쥐를 죽이지 못한다 하는 그런 말과 같이  하나님이, 인간을 딱 아듬고 함께 돌기 때문에 아무리 미워도 그 인간만. 따로  어떻게. 처벌을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에게 배고플 때에 먹여 주었다. 갇혔을 때에  방문했다. 병들었을 때에 나를 방문하고 위로했다. 뭐 벗었을 때에 입혀 줬다.'  여러 가지 대접한 것을 말해 놓고 언제 우리가 주님을 그렇게 대우했습니까?  말하니까 주님이 있다가서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것이라' 이렇게 말씀해 놨으니 우리가 그 사람은 사람으로 따로 빼 놓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이렇게 하나님만 대접하면 좋겠는데 하나님 대접은 사람을  대접해야 하나님 대접이 되고, 사람대접이 하나님 대접이 되니까 우리가 하나님  대접하는 일을 아무리 해도 사람을 해치고 대접하지 안하는 일이 되면 그만  하나님은 그 대우를 받지 안하기 때문에 부득이 하나님을 대우하는 사람은  사람을 대우해야 되겠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해야 되겠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 이것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섬김이 곧 사람 섬김이요 사람 섬김이 하나님 섬김이라. 그러면,  사람과 하나님과 동등으로 이렇게 돼지는가? 그런 것은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김으로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 때문에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이는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요 완전자이시지만 사람이라는 것은 그거 뭐 그렇게  가치가 많다고 할는지 적다고 할란지. 이런데 하나님이 꼭 아듬고 돌기 때문에  이거는 어쩔 수 없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보는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한 다는  것이 거짓말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렇게 말씀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사랑 하는 것인데  하나님 사랑을 인해서 사람을 사랑하도록 이렇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는  그것이 진리를 위하는 것이 안 되면 하나님 위하는 것이 안 됩니다. 왜? 진리는  참된 이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다고 해도 참된 이치대로 위해야 되지 참된  이치에 삐끄러지게 하나님을 위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 위함이 안 되고 말고,  또,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이 형제를 사람을 해 치는 일이 돼지면 하나님이  그것으로서 마음이 상하고 섭섭하고 이라기 때문에 하나님 위해 봤자 소용이  없다 그거요.

 우리가 그런 것을 세상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집에 가보니까 그 딸이  참 몸이 약하고 이러니까 친정어머니가 그 딸을 데려다가 딸을 잘 보신을 하려고  뭐 조그매 영양 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이러니까 이거 뭐 아이들이 와  가지고 와 달라듭니다. 그 딸이 데리고 온 아이들이 다 달라 들어요. 이러니까  할머니가 밉다 말이오. 이놈의 새끼들 저거 어머니는 지금 다 죽어가도록 쫄쫄  빨아먹어서 지금 다 죽어 가는데 좀 이럴 때는 저거는. 좀 나가서 안 먹고 좀  이라면 좋을 건데 이란다고 그 아이 들을 그렇게 먹으려고 자꾸 그리 쌓는 것을  그만 뚝 잡아 떼 가지고 가니까, 그 딸이 딸 먹으라고 그랬지만 뚝 떼 가지고 가  버리면 그 딸이 그거 먹다가 그만 체했다 말이오. 막혀 버렸어. 막혀서 그만  소화가 안 돼. 끙끙을 앓고 있어. 와 그런가 자세히 심사를 해 보니까 사랑하는  그걸 그만 딸 먹으라고 외손자를 떼 가지고 나가 버려 놓으니까 그 어머니  마음에 그게 먹으려고 쌓는데 그걸 못 먹구로 하고 내 보내고 하니까 자기  모가지 안 넘어가 가지고 먹은 것이 체해졌다 말이오. 우리도 사랑을 가지면  그런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셔서 꼭 끼고 도니까 이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는 뭐 사람을 좋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입이  벙긋 거리시고, 그만 사람에게 아주 자기가 안되게 하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다  해도 하나님은 속에 섭섭하고 꾹 끼인 마음이 풀어지지를 않는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가진 것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첫째는 하나님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비용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삼기 위해서 비용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하기를 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대한 무슨  생수를 사라 하는 생수 사라 말이 하나님 사라 말입니다. 생수 사라 말이 하나님  사라 말이오. 사라 말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그 성령을 자기 성령 만들기 위해서  자기에게 있는 몸을 내 줘야 될 때도 있고 마음을 내 줘야 될 때도 있고 건강을  내 줘야 될 때도 있고 소유를 내 줘야 될 때도 있고 그것을 이제 팔아 가지고  사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있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진리와 사람 이  셋을 사기 위해서 이 셋을 내가 차지하기 위해서 이 셋을 얻어서 내 것을 삼기  위해서 하나님을 내 것이라 하면 그 망말될 말 같으나 알도록 하기 위해서 내  것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성령을 받아라 하니까 무슨 물건 받듯이  받는 것 같지만 실상 내용은 그 말을 알아듣게 하는 말이지 성령을 받아라 말은  네가 성령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자가 되어져서 꼼짝 못 하고 성령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고 성령에게 완전히 자유 박탈당한 성령의 것이 되라 하는  그런 말씀을 그렇게 사람이 듣기 쉽도록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이 가진 것은 이대로 가지고 있으면 다 무가치한  것입니다. 영도 이대로 가지고 있으면 무능한 영이 되고 우리의 마음도 이대로  가지고 있으면 무능한 마음이 되고, 우리의 몸도 이대로 가지고 있으면 다  마지막에 무능하고 기능은 다 죽어 버리고 맙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이 영이나 우리의 마음이나 우리의 몸이나 이것을 실력  있게 만들고. 또 이것을 산 것을 만들고, 아주 기능이 있는 그런 것을 만들라고  하는 데에는 이것을 팔아야 됩니다. 이걸 팔지 안하면 안 됩니다. 요거 너무  범위가 조금 넓은 말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알아들을라 하면 이렇게 애쓰게 말  안 해도 그만 퍼뜩퍼뜩 하면 알아들을 건데 자꾸 모르기 때문에 자꾸 이렇게  말하니.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서 명상을 하면 알게 될 겁니다. 그걸 다 말로 하려고  하면 한정 없는 말이 되고, 여러분들이 고요히 눈감고 가서 생각해 보면 압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이치를 가르치고 있고, 성경에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슨  정원에 나무를 정원수를 하나 심어 놓고 봐도 거기서 가르치고 있고. 우리가  짐승 한 마리를 먹여도 거기서 가르치고 있고 또 사람을 접촉해도 가르치고 있고  모든 만물을 봐도 다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내 자신, 영육이라는 이 자신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슨 물질이라든지 또 이런 저런 모든 이력의 움직이는 그 모든 행동이라든지  이것은 뭐하려고 가지고 있느냐 하는 요것을 단단히 쥐고 놓지 안하면 다른  해석은 따라서 저절로 쭉 갈라집니다. 요것만 단단히 거머쥐고 놓지만 안하면  마지막에는 갈라지게 됩니다. 사람이, 시골에 가면 질쌈할 때에 마포를. 만들  때에 이 삼을 째 가지고 하는데 삼을 한 발이나 한 발가웃 되는 것을 자잔하이  가지를 쪼개 가지고 그 놈을 이어 가지고 베를 만드는 건데, 그것은 뭐 이래  흐트러 놓으면 못 가립니다. 그러나 흐트러도 고 대가리만 대가리만 뽈끈  붙들어서 대가리를 들어 딱 도파 가지고 뽈끈 짜매 가지고 대가리 고 뽈끈  거머쥐고 딱 거머쥐고 있으면 그 밑에 어떻게 흐트러져도 흐트러져도 나중에  물에다 대고 자꾸 이래 이래 하면 저절로 펴 가지고 쭉 펴이서 딱 갈라지고  맙니다. 이놈을 놔 놓으면 이 대가리를 내 놓으면 안 돼요. 대가리를 내 놓으면  안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구원에 대한 도리도 머리만 간추려서 강령만  간추려 가지고 딱 거머쥐고 자꾸 그것을 거머쥐고 변동하지 안하고 생각하면  저절로 진리가 다 깨달아서 나오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체라 하는 것이 영육의 자체가 있고. 자체라  하는 것은 영과 마음과 몸 이것이 우리 자체이겠습니다. 자체가 있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이런 일 저런 일 하는 우리 모든 행사가 있고, 또 뭐 이런 물질  저런 물질 물질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통합해서 내라, 내 것이라  말하겠습니다. 나라 나, 또 내 것, 나 내 것. 이것은 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을  입기는 입었지만 현실이라는 그 현실에서 이것이 영생으로 살아날 수도 있고  영멸도 죽을 수도 있고 이렇게 좌우가 결정되는 것이 우리 현실인 것입니다.

 그 현실에서 이 두 가지, 나와 내 소유 이것이 주를 위한 것이 되면 주를 위한  것이 되면 곧 진리를 위한 것이 됩니다. 주를 위한 것이 되면 그것은 진리를  위한 것이 되고 주님과 진리를 위한 것이 되면 사람이 알든지 모르든지  마지막으로는 그거는 사람을 위함이 됩니다. 그 사람이 일생 동안 주님을 바로  위하고 진리를 위하고 주님과 진리를 위한 주님을 바로 위했으면 진리로 위한 게  되어지고 주님을 바로 위했으면 인간도 위함이 되어지고 이제 모든 것도 다  위함이 되어집니다. 그러나 거기에 나가면 더 복잡해지고 어려울 터이니까  여러분들이 아는 대로 세 가지만 말합시다.

 우리의 모든 가진 것은 뭐 하려고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는 것은 주님을  위하는 것으로, 진리를 위하는 것으로, 사람을 위하는 것으로 이 세 가지를  위하는 것이 되려고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 가지를 위하는 것 무엇.

세 가지를 위해서. 뭐하려고 자기는 위하지 안하고 이 세 가지만 위해 줄 건가?  네, 세 가지 위한 그것이 자체나 소유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에서 이  세 가지를 위한 것이 되어지면 고 현실에 대 한 자체나 현실에 대한 자기의  소유나 이것이 참이 돼 버립니다. 요게 참 이 돼 버리고 요게 완전이 돼 버리고  요것이 깨끗이 돼 버리고 요것이 다 생명으로 살아나 버립니다. 살아납니다.

여러분들은 하늘나라의 생명은 깨끗이 생명입니다. 이 세상 육의 생명은 그것은  다 더러운 게 생명이지만 하늘의 생명은 깨끗이 생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왜 우리가 이 내 자체나 소유를 가지고 나를 위하지 못 하고 뭐  때문에 주와 진리와 사람을 위하는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있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셋을 위하는 것은 달리 위하는 게 아니라 그 셋을 위하는  그것이 내 두 가지가 내 두 가지가 살아나는 것이요. 내 두 가지가 완전해지는  것이요, 내 두 가지가 완전에 속한 것이요, 내 두 가지가 완전화 되어져서  완전의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완전은 내 것 됐고 내 것은 완전이 돼 버리고  이래서 완전이 되기 때문에 구원이 되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위한 것을 안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에 지으실 때에 지으신 그 목적이 이러하고. 또 지어  가지고 우리를 살게 할 때에, 우리를 지을 때도 특수한 그 특수 법으로  지었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새로 의논을 해 가지고 마지막에 이 사람을,  만물을 지어 놓고 사람을 지을 터인데, 사람은 어떻게 지어야 되느냐 삼위일체가  의논을 할 때에 사람은. 이 영계와 물질계에 많은 것을 지어 놨는데, 이것을  피조물로서 통치하는 통치권자를 내어야 되겠는데 거기서 대장을 내야 되겠는데  거기서 왕을 내야 되겠는데, 그게 되도록 그렇게 짓자. 이거는 지어 가지고 모든  만물을 정복하고 통치하도록 그렇게 짓자 그렇게 지으려고 하면 어떻게 지어야  됩니까? 그렇게 지으려고 하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가지신 그 신성과 같은  인격성을 가진 자로 그렇게 지어야 하겠다 하는 것을 의논하시고. 그라면 영계가  있고 물질계가 있는데 영계 것을 물질계에서 자유롭게 그렇게 정복해서 통치해서  책임을 짊어지고 그것들의 모든 장생불사의 그렇게 행복을 책임질 수가  없으니까, 천사가 와서 그것을 책임지지 못하고 물질계에 와 가지고 특수 기이한  때에는 와서 활동하지만 언제나 자유로 활동하지 못하는 것인데 어떻게 되는가?  그러니까 사람은 그 두 가지 요소로 마치 동물 가운데 양서 동물이 있어서  육지에 와 가지고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물에 가 살 수 있는 양서 동물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이 두 가지 요소로 지어서 물질과 그 영체로 이렇게 물체  영체 이 두 가지로 지어 가지고 이 물질이나 영계에 있는 거나 모든 것을  정복하고 통치하도록 그렇게 하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의논하고 지으신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짓기도 그렇게 지었고. 그러면 이래 지었는데 이 지은  것이 저만 위하면 어찌 되냐? 그래 지어 놓은 것이 고급적으로 지어 놓은 것이  저만 위하면 어찌되느냐? 저만 위하는 것을 사망으로 해 버렸습니다. 자체를  위하는 것을 사망으로 결정을 해 버렸고, 그것이 자존자이신 완전자 이신  하나님을 위함이 생명이 되고, 또 하나님의 뜻인 진리를 위함이 자유가 되고. 또  사람을 위함이 그것이 영광이 되도록 이렇게 하나님께서 딱 작정 해 놨기 때문에  마치 만물이 하나님께 지음을 받았지만 매 만물 만물마다 개별 개별의 생애  법칙이 있고 제도가 있고 또 모든 거주처나 또 그의 모든 식물이나 하는 것이  각각 정해져 있는 거와 마 찬 가지로 사람은 신령한 것도 먹고 물질의 것도 먹고  영육으로 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 속성은 자존자이신 하나님을 위하면  그것이 살고. 또 진리를 위하는 것이 되어지면 자유를 하고, 또 인간은 만물의  대표기 때문에 인간을 위하는 것이 되어지면 거기에 속한 만물은 다 통치할 수가  있기 때문에 인간을 위하는 것이 되도록 이렇게 세 가지를 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법칙을 주시고 세상에 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이 세 가지를 하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의 이  자체라든지 소유라든지 이것은 완전히 바꾸어야 하는데 우리자 체와 소유는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게 된 것들인데, 죽었던 것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아나기는 났지만 본질과 본성은 줅 은 것으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자체라든지 소유라든지 이것은 전부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위하는  것으로 다 되어 있는 것인데 자기를 위한 이것이 현실에서 자기 위하는 것이  자기 아닌 이 세 가지를 위하는 것으로서 변질돼야 됩니다. 변질되고 변화돼  버려야 됩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를 위하는 것으로 변화되면 그것이 생명화된 것이고 그것이  성화된 것이고 그것이 이제는 하나님에게 속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순전히 하나님에게 피동됐으면 살지 하나님의 형상은  독단으로는 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까 산  영이 됐다고 생기 불어 넣었다고 하는 그 생기는 뭐이 생기냐 하면 그 생기는 곧  영감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영감이 가니까 그게 생령이 되셨습니다.

 그러기에 요걸 하나 간추려 거머쥡시다. 우리 자체나 우리의 소유는 아무것도  위하지 안하고 우리 자체나 소유는 물질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또 사건을 잘돼  가는 일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뭐 물질 위하는 것도 아니오. 또 일을 위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질과 일 우리의 물질과 일. 또 모든 사람의 물질과 일 그것도  우리는 접촉할 때에 그것은 존재 목적이 하나님과 지리와 사람을 위하는 것으로  존재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 물질이나 내 물건이나 남의 물질이나 남의  일이나 남의 일이나 남의 물질이나 내 일이나 내 물질이나 그것을 우리가 내가  손을 대 가지고 취급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첫째 주를 위하고 진리를 위하고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요 법칙대로 우리가 행하고 만일 고 법칙대로  행할 수 없으면 남의 일 남의 물건이라면 손을 떼야 됩니다. 손을 떼야 되고,  내가 손을 대서 한다면 그것이 주와 진리와 사람을 위하는 것으로만 내가 거기에  손 댈 수가 있지 달리는 손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일과 내 물건, 요것은 순전히 우리가 잘못하면 요거 잘 모르면 착각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일을 닥쳤을 때에 그 일을 주체로 삼아 가지고 그 일을 독립을  시킵니다. 그 일을 독립을 시켜 가지고 그 일은 일대로 그 일이 잘 되도록  어떻게 해 가지고 하려는 것으로써 그렇게 그 일을 주체로 삼아 가지고 그 일 그  자체만이가 잘 되도록 낭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 위주로 그렇게  하기 쉽습니다. 그 일은 본디 있기를 그 일 위주로 일이라는 그 독립성이나  자체성이나 자주성이나 그런 것을 가지지 못한 것인데, 우리는 잘못하면 일을  맡으면 그 일을 그것을 어쩌든지 잘 되도록 하려고 해서 그 일을 위하여서  사람도 희생되고 그 일을 위해서 진리도 희생되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도  희생되는 이런 아주 잘못을 저지르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요것을  아주 구별하는 것 같아도 구별을 못합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와서 물을 때에 이것을 다 혼합시켜 가지고 하기 때문에  그만 그 머리로 정신이 떨떨해 가지고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 시험에  듭니다.

 그러기에, 내게 내 일이나 내 물건이나 남의 일이나 남의 물건이나 만일 내가  거기에 대해서 손을 대서 그것을 내가 운영을 한다든지 간섭을 한다든지 거기에  내가 만일 착수를 한다고 하면 내가 손을 댄다고 하면 반드시 그것은 원리로  돌아가야 됩니다. 이것은 내가 손을 대는데, 그러면 내가 일을 잘되게 하기  위해서 있느냐? 일을 위해서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냐? 뭘 하느냐? 반드시 그  일 배후에는 내든지 다른 사람이든지, 또 진리든지 악령의 그 불법의 이치든지,  또 하나님이든지 악령이든지 반드시 그 일과는 이 셋이 연관성을 딱 가지고  연결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살펴보면 요 일은 어떤 사람이 요게  관련돼 있다. 요 일에는 벌써 불법이 관련돼 있다, 요 일에는 진리가 관련돼  있다. 요 일에는 벌써 처음부터 마귀가 관련돼 있다, 요 일에는 하나님이 관련돼  있다, 반드시 그 관련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없는 것이 없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이나 물건은 그 일이 사람이 아니요 그 일이 진리가 아니요  그 물건이 사람이 아니요 진리가 아니요 그것이 신이 아니지만 거기에는 다  거기에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그 위에 머리가 돼 있기 때문에  거기에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고로 자기에게 있는 일이나 물건이나 그것을  우리가 취급할 때에는 반드시 오늘 배운 이 원리로 돌아가야 돼. 원리에  입각해야 됩니다.

 누가 이 일을 해 달라 합니다. 이 일을 해 달라 하면 내가 그 일을 안 맡아도  될 일 같으면 맡지 말고, 안 맡고 안 되고 맡기를 맡아야 되는 일 같으면 그  일을 맡을 때에 이 세 가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그 일을 맡을 때에 사람이야  어찌됐든지 진리야 어찌 됐든지 하나님이 어찌 됐든지 이 일 자체만 어떻게  돼어지기로 하자 하는 그런 생각가지고 하면 일시 그 일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되는 일이 있으나 그것은 순전히 멸망의 폭탄이 되고 맙니다. 멸망의 폭탄이  되고 말기 때문에 그게 이루어져 가지고 뒤에 쾅 폭탄 될 때에는 많은 피해가  뫼고 많은 상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럴 때에는 내가 착수하게 될 때에는 거기서 먼저 제일 머리  하나님을 위하는 그 일이 돼야 되겠습니다. 내가 그 일에서 하나님을 위하는  일을 합니다. 그 일에서 하나님 위하는 일을 내가 하고, 그 일에서 진리를 위한  일을 내가 하고, 그래서 또 그 일을 하면서 사람을 위 한 일이고 그 일을 하고  나서 나 한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을 거기서 했고 진리를 위하는 일을 거기서  했고 사람 위한 일을 거기서 했다고 하면 그 사람은 그 성공을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셋을 다 위할 수 있을 때도 있습니다. 만 셋을 위하지 못하고 둘만  위하게 될 때도 있고 하나만 위하게 될 때에도 있고 그렇게 이것이 일률적으로  되지 안하고 자꾸 그것이 바꾸어지고 달라지더라 그것입니다. 그러면 그럴 때에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고 일을 그래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또 진리에도 딱 들어맞고, 또 고 일하면 그 사람도 다 좋아하고 이라면 참  좋겠는데 가다가 보면 하나님을 위하고 지리를 위하려고 하면 하나님과 진리는  언제든지 하나 동행하는데, 하나님과 진리를 위하려고 하면 사람이 섭섭해 할 것  같고, 또 하나님과 진리와 사람을 위하려고 하면 그 일이 바싹 깨지고 낭파가  되어져야 되겠고 이럴 때에는 서슴지 않고 일은 깨져도 하나님과 진리와 사람을  위하는 그 일을 했으면,  사람을 위한다는 말은 사람을 위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지만 여러 수천 년 동안 고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네들 위하러 온  메시아 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였습니다. 죽인 것은 주님은 그들을 위하러 왔지만  그들은 주님이 자기네들을 위한다는 것을 이해를 못했습니다. 인정을  못했습니다. 왜 인정이 안 됐느냐? 인정이 안 됐기 때문에 주님을 염병같은  자라고도 말했고. 주님을 마귀들였다고도 말을 하고 이렇게 죽이자고 이래 해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였던 것입니다. 그거는 왜 그러냐? 그 사람이 변질이  돼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되어져 있는 그 본 사람이 아니고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된 마귀의 사람이 되어서 변질되어서 변질이 되었기 때문에, 변질된  사람을 위하란 말이냐? 아닙니다. 사람을 위하라 말은 변질된 사람을 위하라는  말이 아니고 변질되어 있든지 없든지 나는 그 사람을 위할 때에 변질된, 사람을  위하지 말고 변질된 사람은 그것을 치료를 해서 끊어내고 끊어내고 깎아내고  약을 써서 다 이것을 녹여내고 변질된 사람은 자꾸 치료해서 그 병을 뿌리  뽑듯이 차차 자꾸 제거해 버리고 그 참사람을 이제 치료해서 강건하게 만드는  것이 그것이 사람 위하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우리가 사람 위한다는 이것도 사람 위함이 사람을 위하려 하연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 위하려면 사람 위함이 안 되고 할 때에는  참사람을 위하는 것은 하나님 위하는 것, 진리 위하는 것 사람 위하는 것,  이것이 세 갈래가 아니고 이 셋은 하나입니다. 셋은 하나입니다. 왜 셋은  하나인가? 사람 위하는 것이 왜 하나님 위함이 되어지는가? 사람 위함이 하나님  위함이 되어지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이 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그것이라야 사람을 위함이 되고 하나님이 좋아 하는 것이라야  사람이 좋아하게 되고, 하나님에게 맞는 법칙이라야 사람에게 맞지 하나님에게  맞지 않는 법칙은 사람이 맞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형으로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는 그 원형적 위함이 된다면 사람은 모형적 위함이  되어지는 것이지 딴 질이 타질이 아닙니다. 이질이 아닙니다. 딴 질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요거 잘 안 배우면 모릅니다. 우리의 가진 거 두  가진데,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을 위하고 진리를 위하고 참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어 하늘나라 가 있는 사람과 같은 이 세상에서  참사람이 움싹이 난 사람도 있고. 참사람이 나서 어북 자란 사람도 있고  참사람은 아직까지 생겨나도 안하고 옛사람만 들어 있는 그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에게는 참사람의 씨를 속에 넣어 가지고, 그것이 자라서 뱃속에 아이 배어  놓으면 자꾸 자라듯이 참사람의 씨를 그 속에 넣어 가지고 그 참 사람이 자꾸  자라므로 말미암아 옛사람 이놈이 꾸불덩이를 치고 싫다고 쌓아 가지고 나중에  옛사람이 벌써 죽었는데, 넘어져 버리고 참사람이 자라도록 이렇게 그게  사람인데, 그게 사람을 위한다 말이 그말을 말하는 것인데 그 옛사람 마귀 사람  말하는 것 아닙니다.

 내 두 가지는 주를 위하고 진리를 위하고 사람을 위하는 이 세 가지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뭐하려고 위하느냐? 이 세 가지를  위하는 그것이 변질된 것을 본질로 치료해서 정상화시키는 것입니다.

정상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재생이요 그것이 갱생이요 그것이 부활이요  그것이 중생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짓기를 그래 지어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 가지를 가진 거 가지고 위합니다. 가진 거 가지고 요거  잘 안 들으면 모릅니다. 우리의 가진 거 이 두 가지, 자본 두 가지 내 자체와  소유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이 세 가지를 위하는 본질로 본성으로. 위하는  행동으로, 위하는 소원으로, 위하는 그 지혜 지식으로, 위하는 욕심으로 이렇게  완전히 변화시켜 버립니다. 한 번 두 번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자꾸 변화를  시켜서 이제 새것이 나옵니다. 잘 안 들으면 잘 모릅니다.

 내게 가지고 있는 거 가지고 이 세 가지를 위하는 일을 합니다. 내 혀로 이 세  가지를 위하는 일을 하고, 내 눈으로 세 가지를 위하는 일을 하고, 내 눈에서 이  세 가지를 위하는 것이 아니면 안 봅니다. 내 눈에 보아도 내 눈으로 보았으면  이 세 가지를 위하는 행동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흉측한 범죄하는 아주 잔인무도한 악인을 봤습니다.

잔인무도한 악인을 자기 눈으로 봤습니다. 자기 눈으로 봤으면 이제 그 본 눈이  이 세 가지를 위하는 눈이 되려고 하면 어찌 되느냐? 아주 못 쓸 그 잔인무도한  악인을 봤는데, 악인을 봤음으로 말미암아 눈으로 봤기 때문에 악인을 정죄하고  멸시하고 교만할 게 아니라, 악인을 봤기 때문에 악인에 대해서 자기는 책임지고  기도해야 되겠고 그를 권해야 되겠고 그 사람을 어서 구출해야 되기 때문에 눈이  하나 그것을 봄으로 말미암아 일거리가 많이 생겨졌습니다.

 사람들은 남의 단점을 보면 흉이나 볼 줄 아는 그거는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자기에게로 건너와 버립니다. 자기가 그래 쌓으니 데끼 이놈 네가 이따위  행동하니까 그것을 네게로 덮어 씌워 주겠다. 이래서 남의 화 받은 것을 보고  기뻐하면 그 화를 자기에게로 옮기는 그런 것을 성경에 많이 말해 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화를 보고 그 화에 대해서 내가 깨운하게 다른 사람이 화  가운데에든 것을 보고 내가 기쁘고 즐겁게 깨운하게 쾌감스럽게 생각한다면 그  화가, 반드시 내게 옮겨 옵니다. 그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옮겨 오는 것을  그런 걸 제가 분명히 받은 것을 다 봅니다. 보고는 또 자꾸 회개하고 자꾸  이렇게 됩니다.

 그 눈이 주를 위하면 눈으로 봄으로 인해서 사람을 위하는 결과가, 사람을  위하는 노력이, 눈으로 봄으로 인해서 진리에 대한 책임이, 눈으로 봄으로  인해서 하나님에게 대한 책임이 자꾸 지워지니까 눈으로 좋은 걸 봤든지 나쁜 걸  봤든지 그 모든 것이 다 주를 위함이 되고 진리를 위함이 되고 인간을 위함이  되어지고 귀로 들은 것도 저런 것도,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귀 먹은 사람이 좋다, 귀 먹은 사람이  좋다, 왜 귀 먹은 사람이 좋아? 귀 먹은 사람이 좋은 것은 귀가 먹었기 때문에  그 쓸데없는 거 안 들으니까 번민 고통 없으니 좋고 욕하는 소리 안 들으니까  평안하이 좋고, 귀먹은 사람이 오래 삽니다. 나 많은 사람이 귀 먹으면 오래  사요, 귀 먹으면 오래 사는데 나이 많은 사람이 귀가 밝으면 일찍 죽어요.

 나는 요번에 아프고 난 다음에 귀가 그전보다 어떻게 어떻게 밝아져 놨는지, 이  뭐 젊은 사람 같이 있으면 젊은 사람 모르는데 나는 벌써 뭐 먼 데 소리 나는  것도 그리하고, 내가 누워 자면서도 소리 나는 것을 저 수위들 보고 내가  인터폰을 가지고 '아, 무슨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가 안 들리느냐?' '아무것도  안 들립니다.' '가 봐라.' 가보면 나중에 가 보면 어디 밤에 어떤 사람이  고치는, 못을 친다든지 뭐 한다든지. 이런데 이 귀가 밝으면 이거 문제라. 이  귀로 들은 것은 들은 것은 내가 책임을 지고 이 귀로 가지고 주를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하려 하니까 이 귀로 들음으로써 일거리가 많이 생겨지고  복잡하게 생겨지고 이라니까 될 수 있으면 안 들으려고 애를 씁니다. 안  들으려고 애를 쓰고 안 보려고 애를 쓰고. 사람들은 남의 단점을 돌아다니면서  찾아보려고 하지만 지혜 있는 사람들은 남의 단점이 닥쳤으면 안 보고 넘기려고,  모른 척 하고 넘기려고 그만 슬쩍 지나갈라 하는데 지나갈라 하면 그것이 지나  갔는데 그것이 자꾸 내 속에 요래서 고게 그렇고 그렇고 자꾸 그러니까 나는  모릅니다. 하지 뭐. 모릅니다. 하면 주님을 모른다 하면 주님이 네가 모른다  하면 나도 너 모른다 이럴 터이니까. 할 수 없어, 그러니까 듣지 안하면 좋고  보지 안하면 좋겠는데, 왜? 그라면 일이 복잡해진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이 모든 거 가지고 주님과 진리와 형제를 위해서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이북에 말 들었는데. 그 혀가 주를 위합니다. 이제  말하니까 불법을 말하면서 말을 하니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거는 성경에 위반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랬으니까  그 공산주의가 저거한테 복종 안 한다고 미워하지만 그러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했으니까 그 혀는 주를 위함이 됩니까? 안 됩니까? 주를 위함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혀가 주를 위함이 됐어. 또 그 혀가 그거는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 위반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했으니까 그 혀가  진리를 위함이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진리를 위함이 됐지. 됐으면 대가리를  그덕그덕 하라 말이오. 그래 사람이 상대방에게 부담을 안 줘야지 전화 하면  한참 전화 뒤에는 죽었나 도망을 쳤나 한참 있다가서 듣습니까? 하니까 예,  듣습니다. 그거 야만인이라 야만인 남의 마음에 부담을 주는 자라. 부담 안 주기  위해서 문화인들은 그렇습니다. 전화하면 저 사람이 안 듣는가? 염려될까 해서  예. 또 예. 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을 만 치 예예해서 상대방의 마음의 부담을  정신의 부담을 몸의 부담을 안 주고 남에게 지장을 부담을 안 주고 제가  부담하는 것이 그것이 신앙생활 아닙니까?  그 혀가 주님과 진리를 위했습니다. 그러면 그라니까 그 사람이 노하면서 이놈  뭐 어디 하나님이 어디 있다고 그따위 소리 하냐고 이래 가지고 때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공산주의 그 사람을 위했습니까? 안 위했습니까? 저 ○선생  예? 위함이 됩니다. 그 사람은 싫다고 마다고 저 시키는 대로 안 한다고 때리고  뭐 죽인다고 야단을 지기지만 그래도 그 사람에게 참사람을 보였고 인간이 사는  진리를 보였고 하나님을 보였고 했으니까 그 사람이 살아나려면 넉넉히 살아날  수 있는 그 위함을 해 줬습니다.

 그러면 그러다가 그 혀로 가지고 주를 위하다가 마지막에, 그 사람이 그 혀로  가지고 주를 위했는데, 최후로 그 혀가 그래 하다가 그만 그 사람들이 야 이놈의  새끼 네가 자꾸 그런 말만 하고 하니까 이 혀줄기를 빼야 된다고 그만 입을 벌려  가지고 혀를 잡아 빼 가지고 그만 좋은 일 호 가위로 가지고 썸벅 끊어 버렸다  말이오. 그만 그 혀를 잡아 째 가지고 저 대목을 싹 끊어 버렸어. 그만 혀가  없어져 버렸다 말이오. 없어졌으면 그 혀는 어째서 없어졌어? 그 혀는 없어진  혀는 이젠 살아 있으면 그 혀를 가지고 얼마든지 설교도 하고 증거도 하고 이랄  터인데 그만 그 혀가 끊어 버렸기 때문에 그 혀는 끝이 나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 혀는 어찌 됐습니까? 그 혀는 주를 위한 혀가 됐습니까? 주를 위한 일을 못  했습니까? 진리를 위한 일을 했습니까? 그 혀는 주를 위하고 진리를 위하고  형제를 위하는 일을 하다가 실패를 했습니까? 성공을 했습니까? 완전히  성공했습니다. 완전히 성공했습니다. 완전히 성공.

 그러기 때문에, 요걸 가르치기 위해서 합니다. 우리 자체나 소유나 이것 가지고  주님과 진리와 형제를 위해서 하다가, 하다가, 하다가 이것을 그것만 위해서  사용을 하다가 사용을 하다가 마지막에 사용 못 하게 할 때에는 사용 못하게 할  때에는 마지막에 사용 못하게 하면 이 세 가지를 위하는 것으로 마지막에 깨져  버리든지, 위하는 것으로 취급을 당해 버리든지, 위한다고 재물을 가지고 자꾸  이렇게 이 세 가지를 위하니까 이놈이 돈이 있으니 이라는 가 봐. 이놈은 돈을  전부 몰수해 버린다고 돈을 싹 몰수해서 이제 주를 위해서 그 사람이 돈을  가지고 이 세 가지를 위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네, 없지요. 위하지 못하지요. 위하지 못하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돈을 싹 몰수하려 할 때 '너 이놈 자꾸 주님만 위하겠다면 이 돈 가지고 주님만  위하니까 돈을 싹 쓸어 몰수를 해 버리겠다' 이랄 때에 주님과 진리와 사람의 이  구원을 위해서 하다가 그 재산을 솔박 다 뺏겼으니까 뺏긴 그 재물은 주를 위한  재물이 됐습니까? 진리를 위한 재물이 됐습니까? 이제 사람을 위하는 재물이  됐습니까? 원수가 와 가지고 그것을 쓰고 하니까 원수의 재물이 됐습니까?, 무슨  재물이 됐습니까? 예? 무슨 재물 됐습니까? 그것이 주를 위한 재물인 됐습니다.

 이제 하는 말은 뭐인고 하니, 우리에게 가지고 있는 자체나 소유를 가지고 이  세 가지를 위하다가 이 세 가지를 위하다가 있으면 내가 가지고 있으면 가지고  있으면 세 가지를 위하고, 위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위하지 못 하도록 뺏들어  가면 이 세 가지를 위해서 마지막에 뺏기는 것으로써 끝을 마치십시오. 이 세  가지를 위하는 것으로써 끝을 마치고, 이 세 가지를 위하는 것으로서 끝이 나고.

이 세 가지를 위하는 것으로 이제 없어져 버렸으면 이 세 가지 위하는 것으로  그의 소유나 그 자체가 이 세 가지를 위하는 것으로서 완성이 됐습니까? 미결이  됐습니까? 미성이 됐습니까? 완성이 됐다는 요것을 여러분들이 알라는 말입니다.

요것을 지금 말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세 가지를 위해서 사용하고, 세 가지 위해서 사용하다가 사용하다가  사용하다가 마지막 생명이 끝나서 끝나면 그만인 것이고, 끝나도 세 가지를  위해서 있다가서 끝나면 쓰지 못하는 것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쓰지 못하고  그대로 남지만 세 가지를 위해서 없앴으면 고 것은 완전히 다 세 가지를 위한 게  됐는데, 세 가지를 위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이 있으면 어찌 됩니까? 세  가지를 위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 세 가지를 위하지 못하고 늙어서  죽는다든지 병들어 죽는다든지 세 가지를 위하지 못하고 그 자체를 가지고  소유를 가지고 세 가지를 위하지 못하고 이렇게 그만 세 가지를 위하지 못하고  늙어 죽든지 병들어 죽든지 죽었습니다. 그러면 죽었으면 세 가지 위하지 못한  남아 있는 그 요소, 남아 있는 그 자체나 소유나 하는 그것은 그것을 다 세  가지를 위함이 됩니까?, 세 가지를 위하지 못하고 그만 썩어져 버리는 게  됩니까? 썩어져 그런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 보십시오. 또  놓읍시다. 네, 세 가지를 위함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위함이  안 됩니다. 위함이 안 돼요. 그것은 썩어져 버렸고 썩어져 버렸오.

 이러기 때문에 주님과 진리와 인간 구원을 위해서 쓰여져서 없어졌든지 뺏겨서  없어졌든지 벼락을 맞아 없어졌든지 어쩌든지 세 가지를 위해서 써서 없어졌든지  원수에게 박해를 당해 없어졌든지 우리의 소유나 우리 자체가 이 세 가지를  위해서 사용돼서 없어졌든지 세 가지를 위하다가 한꺼번에 원수에게 뺏겨서  없어졌든지 어쨌든지 이 세 가지를 위해서 없어지는 것이 성공이요, 세 가지를  위하지 안하고 생명이 끝나서 남아 있지만 생명이 없어 쓰지 못한 것은 그것은  그대로 썩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순생과 순교를 깨달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것인 것입니다.

 우리가 요 한 가지를 더 말해 줄라 하면 가진 것을 보관 못 하겠고, 고만하게  그만 중단하고 요것을 단단히 가집시다.

 이제는 하나 뭐이냐? 우리의 가진 것은 소유와 자체뿐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소유와 자체 두 가지뿐입니다. 두 가지뿐인데 두 가지 그것은 뭐하려고 가지고  있느냐, 뭐 하려고 가지고 있느냐? 이 세상에서 무슨 정치하고 무슨 문화  운동하고 위해서 있는 거 아니라 그거는 문화 운동도 주를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인간 구원을 위해서 할 수도 있겠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주를 위하고 진리를  위하고 인간 구원을 위해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 사람이 밭에  일하니까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했습니다.

 이러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을 통하여서 주를 위하고 진리를 위하고 인간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의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어느 무대서라도 주를 위하고 진리 위하고 인간 구원을 위할 수 없는  직장이 없고, 없는 사업이 없고, 없는 그 현실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가진 것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이 일을 하면 그 일을 껍데기는 그 일하지만 그  일을 통하여서 나는 주님을 위하는 일을 하고 그 일을 통해서 진리지키는 일을  하고 그 일을 통해서 인간 구원을 중심하는 그 일을 할 수가 있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내가 김길창 목사님이 언제 거창 와서 설교할 때 한 번  들었는데, 그분이 참 그때는 아주 믿음도 좋고 위대했었고 대단히 위대한 인물이  됐습니다. 위대한 인물이 됐는데 그만 세상 이런 문화 사업에 교육 사업에  종신하고 난 다음부터 그만 그 이름이 별로 없어졌습니다. 그분이 미국 가  가지고 그때는 미국이라 하면 굉장한 나라인데 미국가 가지고 트루만 대통령  있을 때 떡 가 가지고 '아, 여보 나도 여기까지 한국에서 왔는데 당신 그 앉은  그 대통령 의자에 나도. 한번 앉아봅시다' 이라니까 그 대통령이 '아 예 그래  하십시오.' 쑥 내려앉아서 그래 한번 앉고 왔다고. 대통령 자리 한번 앉고 왔다  그렇게 말합디다. 이랬는데, 그분이 미국 가서 감상을 크게 받은 것은 한 군데  가니까 처량한 찬송 소리가 나는데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하는 그  찬송을 부르는데 가보니까 새까만 그 여인이 조그만한 게 아주 못 난 여인이  하나 빨래하면서 그 찬송을 부르다라고. 그래서 그래 어디 있느냐 하니까 저  집에 있다고 이라면서 그래 그러면 거기에 뭐하냐고, 나는 거기서 일하고  있다고, 그래 기쁘냐 하니까 기쁘다고. 뭐 그래 종노릇하는 게 뭐이 기쁘냐고,  나는 여기서 주님 만날 준비하고 주님 만날 준비하고, 또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  찬양하고 그래 기쁘다고. 그 여종이 그렇게 아주 기쁨에 넘치는 그 찬송하는  거기서 미국 몇 번 갔다왔지만 그 여인에게서 받은 저 여인이 가지고 있는 천국.

저 여인이 가지고 있는 기쁨, 저 여인이 가지고 있는 주님 사랑하는 그 사랑  그것이 참 부럽다고 아무것도 부럽지 안하고 그분 이 부럽기는 그 하나가 뭐  세계 많이 다녔지만 그 하나가 제일 부럽다고 그렇게 말합디다.

 이러니까 우리가 어디서라도 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가진 거는 두 가지뿐인데, 두 가지 가진 것은 주를 위하고  진리를 위하고 사람을 위하는 이 세 가지를 위해서 이 두 가지를 다 투자하는데,  이 두 가지를 성경에 말하기를 이 두 가지를 팔아 가지고 사라. 이 두 가지를  투자함으로서만 이 세 가지를 얻을 수 있지 달리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얻기 위해서 이 세 가지를 얻기 위해서 세 가지를 네 것 삼기 위해서  이제 바꿔라.

 그러면, 이 두 가지가 이 세 가지를 위하면 세 가지를 차지하게 됐는데 세  가지를 차지한 이 두 가지는 이 세 가지를 차지한 이 두 가지는 영생이요 이거는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십니다. 이 세 가지를 위하는 그  자 그 소유 그는 하늘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요 그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그에게 모든 소유를 다 맡겨서 그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려는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의 처음 창조의 목적, 모든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는 그 목적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두 가지 가진 것은 이 세 가지를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 이 세 가지를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 하나님을 얻기 위해서 진리를  얻기 위해서 사람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

 그러면, 이 세 가지를 얻기 위해서 쓰다가, 세 가지를 얻기 위해서 쓰니까 차차  내 것이 줄어집니다. 내거 줄어지는데 줄어지고 줄어지는데 줄어지는데,  마지막으로 순교를 하지 못하고 줄어지는데, 진리 위해서 그만 몽땅 빼앗기거나  몽땅 다 드리는 요런 일이 되지 못하고 그만 늙어서 이래 병석에 누워서 이래  끊어져 버리면 고거는 허비되고 남용되고 만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이번에 저도 아플 때에 내가 그것을 여러 사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마지막 같으면 내가 내 자체나 소유나 하는 이것을  주를 위하고 진리를 생명을 위하는 것으로 마지막에 있는 것을 힘을 다해서  진리를 증거하다가 자꾸 돌아다니며 설교를 하다가-그때는 설교를 계속해서 하면  쭉 뻗어 그만 죽어 버려요. 죽을 것 같아서 그러다가 죽겠는데, 만일 주님이  이걸 치료해 가지고 다시 이것을 잘 이거 달궈 가지고 잘 벼뤄서 연장 벼르듯이  이걸 잘 벼뤄 가지고 뒤에 쓰실라 하는 날이면 이거 미련한 일이다. 이거냐  저거냐 하는 것을 내가 사람들에게 많이 물었습니다. 내 형편은 이거겠느냐?  저거겠는가 내 생각에 그때 생각하기를 아무래도 이거 부자지 요번에 마구 쓰는  것은 아니라 그렇게 생각이 돼서 그 치료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살다가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이 세 가지를 얻어서 이 세 가지  얻어서 이 두 가지 가지고 술람미 여인이 네 목에서 한 마디 나오는 소리에 내가  내 마음을 다 뺏겼다. 네 눈초리에 그만 내 마음 다 뺏겼다. 일편단심 주님만  바라보고 진리만 바라보고 옳고 바른 것만 바라보니까 그만 그 참 정결의 그  비둘기 눈이라 말한 대로 그만 그렇게 네 눈으로 한 번 나를 봄으로써 내 마음  다 뺏들었다. 내 목에서 한 구슬이 나오는 그 구슬에서 그만 내 마음 다  뺏들었다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 가진 거 가지고 주님을 내가 얻고  진리를 얻고, 진리도 감탄해서 내 진리되고 나는 주님의 것 됐고, 주님도  감탄해서 내 하나님되고 나는 주님의 것 되고 이제 사람도 저거야 알든지  모르든지 그 사람의 영은 내가 사야 되겠고 그 사람의 양심이 있다면 양심은  사야 되겠고, 그 사람에게 옳은 직심이 있다면 직심은 내가 그 마음을 사야  됩니다.

 이래서 이 세 가지를 위해서 우리가 있는 대로는 사용하다가 마지막에는 솔박  다 하나도 남김없이 솔박 다 투자 돼서 하나도 남김없이 솔박 한 목 다 쓰여져서  하나도 남긴 거 없이 하나도 남긴 거 없이 다 주를 위하고 진리를 위하고 인간을  위하는 것으로 솔박 마지막 먼지 하나도 부시락 하나도 솔박 다 쓰여지는 요것을  우리가 목표하고 달립시다. 제가 한 이삼 일 전에 그때 밤에 꿈을 꿨는데 그때  한 시쯤 됐었습니다. 한 시쯤 됐는데 청년들 몇 을 데리고 이제 내가 미안하기는  미안하다만 그 꿈에 그 말이오 미안하기는 미안하지만 이제 모든 주님과  결혼하고, 결혼도 다 그만 이제 정리하고, 주를 위해서, 어쩌든지 열심히 일  하면 몇 시간 하면 밥먹을 수 있을 터이니까 몇 시간 일하고 주의 복음을 위해서  나서서 여생을 이래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이런 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몇  단체를 해 가지고 이와 같이 했는데, 그라면서 염려가 되는 거는 이라면 만일  이것이 자꾸 돼져 나가면 모든 사람이 생각할 때에 저렇게 예수교가 저리 된다고  하는 날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거슬리게 돼져서 많은 사람들을 얻지 못하고  편벽되게 몇 특지가만 얻지 그래 되면 한갖 예수 믿는 그 괴물만 되고 기형만 돼  버리지, 이것이 모든 사람이 다 환영 하고 모든 사람들의 양심과 마음을 다 얻을  수 있는 길이 돼야 되겠는데 이 길을 가 가지고는 안 되겠다 해서 그때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좀 새로 재고해 가지고 하자 하면서 회의하다가 끝을  냈습니다.

 어쩌든지 오늘은 요거, 우리 가진 것을 요거 세 가지를 우리가 내는데 세  가지를 사는 거, 이것을 희생해야 세 가지가 내게 오지 그리 안하면 안 옵니다.

이 세 가지를 얻고 사기 위해서 다 쓰고 쓰다가 남은 거 있으면 한목 남긴 거  없이 솔박 한목 다 쓸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오거들랑 놓지 말고 그 기회를 놓지  말고 있는 대로 다 투자하고 주님 앞에 가서 서는 사람 되자 하는 그것을 우리가  기억합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뭐 하룻밤 나그네에 별 생활 없습니다. 해 아래에 딴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경험이 없고 철이 없어서 이거는 처음 보는 것이라고 막 죽자 살자 하고 이거  외에 뭐 좋은 게 있느냐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다 지나갔던 것입니다. 다  무익한 것이오. 인간이 해 아래 수고한 것이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길을 줬습니다. 밝은 길을 줬습니다. 이거  위해서 인간을 얻기 위해서 희생 못 할 것 없고 인간 얻기 위해서 속 못 썩일 것  없고 인간 위해서 자기 낮아지지 못할 것 없습니다. 이런데 그 인간과 진리와  주님을 위함이 안 되는 것도 자기 고집을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하는 그것  죽여야 됩니다. 죽여야 됩니다. 그거 원수 중의 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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