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

 

1981. 5. 17. 주일 오후

 

본문 :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오전에 선포한 대로 양면을 증거하는 설교는 과거에 많이 증거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깨달은 대로 어떻게하면 이미 모시고 섬기고 동거 동행하고  영화롭게 기쁘시게 하고 있는 이 하나님을 내가 잊어버리지 아니할까? 또  아직까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 모시고  섬기고 동거 동행하고 또 영화롭게 기쁘시게 해서 하나님이 나를 책임져 주시는  이 생명과 안보와 평강과 축복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고 방편이요 길이요  법칙으로 가르쳐 주신 것만 해석을 붙이지 않고 간단 명료하게 그저 계속해서  창세기로부터 증거해 나가려고 합니다.

요 3장 15절은 뱀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택함을 입지 아니한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들을 가르려서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택한자라도 아직까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 사람이면 뱀의 후손이요 또 믿는 사람이라도 성령으로 살지 아니할  때에는 뱀의 후손의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같이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싸움이 있는 것을 여기에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의 여인의 후손이 또 이길 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살이를  해 나갈 때에 내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내 신앙생활에 대립되는  사람들이 계속된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에서 배워 기억해야 합니다. 이 싸움을  우라가 양보하거나 타협을 하면 안 됩니다.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싸움은 하나님이 싸운다고 말씀했고 계속된다고  말씀했는데 우리가 이 싸움을 제가 무슨 신사인 처럼, 제가 무슨 도덕가인 처럼,  제가 무슨 사랑의 최고의 사람인 처럼 이 싸움을 타협하고 양보하고 평화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이것은 이제까지 하나님을 모시고 살았을지라도 하나님과 나귀게  됩니다. 또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배반하고 저 혼자  인간으로 더불어 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과의 이 투쟁이라 하는 것은 계속 있는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또 이는 필연한 일이요. 이 싸움은 싸워야 합니다. 또  사우되 기어코라도 이겨야 합니다. 요것을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은 대대손손이 계속된다. 그러나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후손의 머리를 상해서 이기게 되고 뱀의 후손은 여인의 후손을  괴롭혀서 정신차리게만 하는 것 뿐이게 된다 이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편에 서서 뱀의 후손 마귀의 작용으로 마귀의 그 거짓말하는  반거짓말하는 마귀에게 속해 가지고 날뛰는 것이 어느 교회 안에나 있고 어느  사회나 어느 자리나 우리가 가는 곳마다 있습니다. 요 싸움은 기어코 싸워야  합니다. 요 싸움을 양보하면 안 됩니다.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요 싸움을  양보하면 안 됩니다.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동행해라" 하는 말씀은 로마 병정이 무레하게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그것이 진리에 위반되지 아니할  때에는 너는 그의 요구에 대해서 그를 구원할 목적으로 희생을 해라. 하되 오리  가자 하는데 십리를 가서 오리를 더 감으로 그가 너에게 와서 압박으로 천대로  멸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압도적으로 멸시로 천대하고 왔던 그가 네  행동과 인격과 사상을 보고 그가 깨닫은 점이 있고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 행하라" 상대방이 어떤 죄악으로 올찌라도 네  수고와 고생의 희생의 어떤 것을 하는 것은 하지만 그의 죄악성에게 네가 물지  말라. 그가 악심을 가지고 너에게 대하는 그 악심에게 너도 피동되어서 너도  그를 대해서 악심을 품는 이런 자 되지 말라 너는 절대 죄로 더불어 싸워 죄를  이기고 의를 양보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네가 종이 되고 죽임을 당하고 어떤  소유를 다 박탈당한다 할지라도 너는 죄악에게 피동되지 죄악의 종이 되어 너는  죄악에 물들지 말고 속화되지 말아라 말씀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죄로 더불어 싸우고, 불의로 더불어 싸우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모든  인간 운동으로 더불어 싸우는 이 싸움을 주님 오실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희생을 당할지라도 죄에게 지지말고 죄를 이기고, 불의에게  지지말고 의를 행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세력들이 나에게 어떤 방편으로 와  가지고 나를 충격 줘소. 나도 하나님 섬기야 소용 없다 하는 이런 미혹에서 나도  하나님 배반하는 이런 일이 없도록 어떻게 할지라도 네가 세 가지 사죄와 칭의와 새 생명 받은 이 성도의 생애와,  죄와 불의와 인본의 생애,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생애와 세상을 보고 사는 이  생애 ,이 관계에 대림이라는 이 투쟁은 네가 죽는 날까지 계속해야 할 것이고  네가 어떤 희생을 당할지라도 그 세력에게 네가 지면 안 된다.

너는 이기려면 이길 수가 있다. 기어코라도 죄를 무죄로 통과해서 이기고 수많은  죄악이 와도 네가 범죄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이기고 수많은 불법 불의가 와도  나는 의로 이기고 하나님 배반하는 세력이 세계에 평창할지라도 나 혼자  노아처럼 하나님 모시고 기어코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애로 너는 이기야 된다  하는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싸움을 계속된다. 그러나 여인의 후손이 승리를 할  수 있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벌써 정하여져 있다 하는 요것을 확신 가지고  우리는 나가야 됩니다.

그 다음에 3장 16절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네 요것이 또 타락한 인간 부부입니다. 타락한 인간 부부 독신으로 사는  사람에게 대해서는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안했습니다. 요 다음에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오지 안했기 때문에 타락한 사람으로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사람은 어떻게 해야 이미 모신 하나님 섬기는, 하나님 동거 동행하는, 하나님  영화롭게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 내가 계속 생명과 안보와 축복과 기쁨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요 부부에게 여섯 가지를 가르친 요것 해야 이 가치 있는  생애가 계속이 되고, 만일 하나님을 이제까지 모시지 못하고 찾지도 못했다면  타락한 부부생활에 세 가지를 지키면 이것이 하나님을 찾아 가까이 하는 길이요,  모셔 섬기는 길이요, 또 영화롭게 존귀케 기쁘시게 하는 길이요, 이제부터  하나님의 책임지신 생명과 안보와 기쁨과 행복을 받게 되는 길로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요 길을 요대로 걸어야 됩니다.

여자에게는 세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생산의 고통을 네가 겪어라' 또 '남편을  너는 사모해라' 또 '남편의 다스림을 받아라' 요 세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남편에게는 '네가 네 아내의 사모의 대상이 되라' 또 '네가 아내를 다스리라' 또  '네가 수고해서 먹을 것을 책임져라' 요렇게 말씀했습니다. 남자에게 세 가지  여자에게 세 가지 요것을 실행을 하는 데에서 타락한 부부로서는 하나님과  옳바른 관계가 맺어지고 맺어진 관계가 다시 끊켜지지 아니하고 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책임져 주십니다.

요사이 매우 지키기 어려운 하나님의 법도입니다. 세계가 점점 여기에서  이탈되어서 거리 멀어지는 세상입니다. 남편보다 아내에게 먼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해산의 고통을 네가 격어라" 다른데는 보면 "여인이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또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물론 자기의 몸에 감당치 못할 것은 그것은 자기가 절제해서 제재하는 것도 생산  제재하는 것도 죄는 아닙니다. 왜? 그거는 돼봤자 안될 것이기 때문에 이렇지만  저희들이 평안하기 위해서 온갖 행락은 취하면서 생산은 금하는 것은 요것은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요 배반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그런고로 결혼하면 아야 해산의 고통을 각오할 것이고 이 고통을 당하지  안하려면 결혼을 하지 말고 혼자 지날 것이고 또 혼자 지나면서 해산은 안하고  흉측한 범죄를 하는 그런 행사를 하면 또 장수도 하고 건강도 하고 세상에서  온갖 세상 행락을 누리고 살수는 있지만 이 구원에는 참가를 못합니다. 요걸 잘  들읍시다.

물론 약도 쓰고 별 치료도 하고 이렇게 하지만 결혼한 부부는 벌써 생산을  이것을 해야 된다고 하나님이 명령입니다. "남편을 사모하라" 하는 말은  남편에게 온갖 소망을 다 두라는 말이오. 남편에게 소망을 다 두라는 말이오.

애착을 다 두라 말이오. 천하에 모든 것 보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 자기에게  어려운 것 자기에게 유익될 것 모든 전부는 남편에게 소망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그러면 얼마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소망하는 거와 꼭 같이 소망하자  했습니다.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사모하라는 말의 뜻은 이것입니다. 결혼한  부부라면 남편을 사모해라 너는 네가 뱀 만나 가지고 너 혼자 이런 것 저런 것  네가 소망하고 욕망해 가지고 큰 죄를 저질러서 큰 불장난을 해서 대대손손이  망치게 하는 이 여인아, 너는 네 남편을 통해서 무엇이 되도록 정해 놨기 때문에  이것을 회개하고 너는 남편을 사모해라. 남편에게 전 소망을 두고 전 애모를  기우리라. 또 남편에게 다스림을 받아라. 네가 이렇게 전부가 남편에게 소망을  다 기울릴 뿐 아니라 남편의 다스림을 네가 받아야 된다. 남편이 하라면 하고  아니 하려면 아니하고 금하면 금해지고 명령하면 준행하고 그를 따라서 피동하는  네가 되라. 결혼을 했으면 하려면 여인은 이 세 가지를 지켜야 한다  말씀했습니다.

남편에게 대해서는 "네가 아내의 사모의 대상이 되라" "아내의 사모의 대상이  되라" 네가 아내가 네게 대해서 어떤 것을 소망하든지 네가 하나님에게 소망할  때에 하나님이 네게 대해서 못해 줄 것 없이, 부족할 것 없이, 네 소망하는 것을  당신을 향하여 소망하는 것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완성해 주는  거와 같이 아내가 너희에게 대해서 모든 소망을 가질 때에 그에게 대해서 만족히  해줄 수 있는 네 사모의 대상이 네가 되라.

다만 네가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소망하되 네게 해로울 건 네가 모르고 잘못  소망하고 잘못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해 주시지를 아니하시고 너에게  참으로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하나님에게 네가 소망하고 구하고 기다릴 때에  부족함이 없이 해주시는 것처럼 네 아내가 너만을 사모하고 바라고 이렇게 사는  아내가 된 그 아내에게 하나님이 네게 주시지 않는 것처럼 네 아내가 너에게  소망해서 잘못 알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제가 손해 볼 그런 것 외에 아내에게  있어 유익될 필요한 모든 것은 너에게 소망하면 너는 그 소망하는 것을 다  이루어줄 수 있는 사모의 대상이 네가 되라 하는 것이 이것이 타락후에 결혼한  남편된 자에게 첫째 명령입니다.

이것을 고린도서에는 여인의 머리는 남편이요 남편의 머리는 그리스도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그렇게 또 거기에는 해놨습니다. "하나님이 남편된 네  머리된 것처럼 너는 아내의 머리가 되라" 네가 하나님에게 대하여 어떤 것을  소망할 때에 하나님이 변함없이 가감없이 너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다 이루어  주실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이루어 주는 것처럼 너는 아내에게 대해서 이런  대상이 되라. 어떻게 무능한 내가 됩니까? 네가 네 머리 하나님을 네가 바라보고  관계를 가지는 이것을 네가 바로 가지면 막바로 네가 너거 아내에게 하나님처럼  되어진다. 하나님에게 모든것을 네가 받아 아내에게 영과 육의 만족을 줄 수  있다. 이러기에 남편은 아내의 사모의 대상이 되라.

이리되고 둘째로는 아내를 다스리라. 아담이 해와를 다스리지 안하고 해와가  말하는데 끌리가 가지고 저와 자손대대가 망친것처럼 하나님이 세우신 제다가  그렇지를 아니하는데 순위가 그렇지 아니하는데 네가 그렇게 해 가지고 망했으니  이제는 이것을 돌이켜서 너는 아내 다스리기를 네가 하나님에게 다스림 받는  것처럼 해라. 너는 하나님 앞에 완전한 다스림을 받고 너는 아내를 다스리라.

그러고 셋째는 네가 모든 면에 네 힘을 다하여 땀을 흘러 수고해서 수고해서  너와 아내의 모든 필요한 것을 네가 충당하도록 해라. 이것이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필요 있는 모든 것을 충당하고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같이 이렇게  네가 책임지고 해라.

아내는 해산의 수고를 할 것이요 남편을 사모할 것이요, 남편에게 다스림을  받아야 할 것이요, 남편은 아내의 사모에 대상이 될 것이요, 아내를 다스릴  것이요, 아내에게 와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가 노력으로 충당하여야 한다  하는 것을 이것을 타락한 부부생활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결혼 생활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룩한 제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여인의 셋 명령 남편에게 대해서 세 가지, 명령 요 명령을 지키는  데에서만 모신 하나님은 계속 나에게 모심을 받습니다. 내가 영광스럽게 존귀케  하는 하나님은 계속 나에게 영광과 존귀를 받습니다.

만일 오늘까지 하나님과 원수과 되고 끊어져 어디까지 주홍같고 진홍같이 붉어져  있을지라도 요게서 부부의 요 생애는 돌이켜 요 세 가지를 아내는 남편은 요 세  가지를 요것을 다시 시작해서 단행할 때에 먼 하나님을 가까와지고 잊어버린  하나님을 찾게 되고 내가 몰랐던 하나님을 모시게 되고, 그 주님을 섬기게 되고,  그와 동거 동행하게 되고, 그를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되고 그분은  나에게 마음놓고 힘껏 아낌없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모든 바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법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4장 1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사를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부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요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낮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니라 죄의 소원은 네가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네 8절까지 읽었습니다.

요것도 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사람은 새로 바로 좋은 관계가 맺어지는  길이고,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요것이 계속되는 길입니다. 가인은 형이요  아벨은 아우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섬기는 일로 충돌되어서 아벨이 형  가인에게 죽임을 받았습니다.

가인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으며 아벨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기에 하나님  섬기는 일에 충돌되어서 그렇게 살생이 되었던가? 요게 말씀하시기를 가인은  자기가 농사를 짓기 때문에 밤낮으로 생각하고 만지고 접촉하고 하는 자기의  주의와 환경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자기가 밤낮으로 만지고 일하고  생각하고 하는 자기가 접촉하고 있는 자기 환경 주위에 주위를 따라서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아벨은 자기 생각대로 섬긴게 아니고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들에게 선포해  놓으신 하나님의 명한 법칙대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명한 법칙대로 섬긴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벨 뿐 아니라 그후 대대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인생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는 희생이 있어야 짐승으로 제사를 드리야  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명령해 지켜 나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무나따나 아벨이 자기 양치는 자이니까 자기 생각대로 양으로  제사 드린 그것을 하나님이 따라서 그렇게 여러 수천 년 동안 그 법을  준행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다 기록지 않는  것이 성경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러기에 과거 미래 모든 것을  이렇게 종합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바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명하신 그 명령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이래서 아벨의 섬김은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의 섬김은 하나님이 받지 아니함으로 서로 시기가 나게  되고 거기에 말썽이 생겨났습니다.

그럴 때에 가인이 그 아벨에게 많은 말을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너 도 나와  같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라.' 나와 같이 드리자고 하는 그것을 많이 말했을  것이고, 또 '깨끗한 곡식으로 드리는 것이 좋지 무슨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그것이라야 될 게 뭐 있노' 거기에 놓은 단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에 보면 아벨은 이 제사 드리는 문제에 대해서 양보하지 안했고  타협하지 안했고 변개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게 장기간 충돌되 나오다가  마지막에는 형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또 가르치는 길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보면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섬기고 모든  사람들의 중론이 주장하고 있는 유력한 사람, 유식한 사람, 많은 사람, 권세있는  사람, 높은 사람 이렇게 많은 사람 많은 사람들이 어떤 유력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 주장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인의 길을 걷는 가인의  자손입니다.

'보라 세상이 이렇지 않느냐?' '아무 나라에도 선진국 이렇지 않느냐?' '세상  법칙에도 이렇지 않느냐?' '어느 종교에서도 어느 도덕에서도 이렇지 않느냐?'  세상에 수많은 아름답고 유명하고 권세 있는 그 어떤 것이든지 세상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칙을 삼고, 인간들의 유력한 주장 많은 사람들이 쏠리고 있는  그 주장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법칙으로 삼아서 섬기는 것이 벌써 세상을  점령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완전히 점령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자손이요 가인의 길입니다.

우리는 벌서 삼천여 년 전에 주신 구약 성경이 있어.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법칙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구약 성경은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 증거하셨고, 신약 성경은 성령이 오셔서 증거를 했습니다.

이 성경 법칙대로 자기 신앙양심에 가책 없이 하면 성신의 감화에 가깝습니다.

성신의 감화대로 요대로 아무리 이십세기의 교회는 어디로 가든지 어떤 방편을  취하든지 상관없이 신구약 성경 요 교리와 신조대로 요 신앙사상대로 성경대로의  양심의 가책되지 않는대로 요렇게 살 때에 자기의 마음이 기쁘고 자기 마음속에  담대함이 생겨지고 온유함이 생겨지는 영감이 그것이고 양심의 가책없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가 요 법칙대로 살 때에 우리 속에는 한없는 평강이 속에 솟아  오릅니다. 담력이 솟아 오릅니다.

세상이 뭐라하면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니 세상이 나를 어찌 하겠노?' 나는  주와 주의 말씀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제물로 어느 때나 속히 받혀져야 남김없이  다 받혀져야 되는 것이 이것이 나의 재세의 생활이니 세상이 도우면 빨리 될  것이고 안 도우면 이거는 문제인데, 세상은 이 제물되는 일을 돕도록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조직해 놨기 때문에 변동없이 나에게도 십자가가 있으리라 하는 것을  생각하는 십자가의 이 길의 기쁨을 그이가 가질 수 있는 속에서 오는 그것이  성신의 감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대로의 교리, 성경대로의 신조, 성경대로의 신앙사상, 이  행위는 어떤 인간사의 어떤 사물관계 어떠한 큰 난제를 두고 충돌이 될찌라도  소유와 몸과 생명이 아벨처럼 다 절단나여지는 거기까지 갈찌라도 양보없이  고수하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이거 요동하면 안 됩니다.

요 사이는 팔방미인의 창기처럼 이 사람 만나면 이 말하고 저 사람 만나면 저  말해서 자기 비유에 이 사람에게는 요 비유를 건정거리고 조 사람에게는 조  비유를 맞춰서 져 좋도록 하는, 스승을 많이 뒀다고 말씀하신 대로 요것을  술책으로 해서 날뛰는 요 사람들만 좋아하고 저거끼리 단합해서 얼마든지 꾸며서  이렇게 화합 단합 평화 사랑하면서 나가지만 이것은 다 가인의 길입니다.

우리는 신조와 교리와 사상 행위는 어떤 난제가 있어도 타협하면 안 됩니다.

의례히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대립은 있는 것입니다. 가까운 형제끼리의  마지막의 그에게 생명이 빼앗겨지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라 그에게 죽임을  당할지라도 주님이 주신 교리와 신조와 신앙 사상과 생애는 양보하지 아니하는  것이 아벨입니다.

아벨은 이렇게 해서 벌써 근 육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이지만 그의 피는 지금도  일한다고 했습니다. 아벨의 피는 지금도 내속에도 와서 일하고 있고 여러분들  속에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교리와 신조와 신앙사상의 문제에 있어 아벨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단마음으로 생명을 받힐 용기가 그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하나만 더하고 끝내겠습니다. 창세기 5장 21절 "에녹은 육십오세에 무드셀라를  낳았고 무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면 그가  삼백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 전후에는 보면 누구가 몇 해를 살면서  어떤 어떤 자녀를 낳고 그 후에 몇해 살다가 죽었다 이것이 기록입니다.

에녹은 다른 사람들과 꼭같이 몇 해를 살면서 자녀를 놓으면서 살았는데 그는 다  같이 죽지 아니하고 산채로 승천해서 다시는 세상에 보이지 아니했다. 이것은  인생살이에 어떻게 하면 죽음을 면케하고 영생하는 것을 우리에게 이 한 현물로  계시해서 보여주시는 하나의 계시입니다. 에녹은 실물계시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자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실물로 우리에게 계시해 준 계시인물입니다.

계시로 이용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 생활이든지, 가정 생활이든지, 어떤 사업, 어떤 직장, 어떤 운동,  어떤 생활을 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할 수 있고 혹 가다가는 하나님  모시고는 할 수 없는 생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금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을, 사업을, 정치를, 농사를, 공장을, 예술을, 문화를, 과학을, 어떤  생애를 하든지 하나님 모시고 한 것은 죽음에 이르지 안하고 그대로 영생하게  되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아니하고 제가 한것은 일시에 어떤 크게 이름을 날리고  어떻게 웅대하고 장대하고 어떻게 사람의 이목을 관심을 끌었다 할지라도 많이  살았든지 적게 살았든지 모조리 다 죽었습니다. 모조리 사망입니다. 다만 우리의  생애에서 영생으로 옮겨지는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요 생애 요것만 옮겨지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고 외에 것은 다 사망이라는 것을 창세기 5장에 보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구백 몇살을 산 사람도 있었습니다마는 구백 몇살을 살아도  마지막에는 죽음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저거 좋아하는 대로 고게 여인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고것은  하나를 대표를 들어서 말씀한 것입니다. 어떤 자는 명예가 아름답고, 어떤 자는  권세가 아름답고, 어떤 자는 물질이 아름답고, 어떤 자는 행락이 아름답고  무엇인가 자기 보기에 제일 좋은 것 제일 좋은 것 그대로 하는 자들을 보니까  저거 좋아하고 아내 취해 가지고 가정 이루었는데, 거기에 보니까 자손이 잘나고  유명한 네피림들이 많이 났습니다. 많이 났지만 저거 눈이 어두어 몰랐지  일백이십 년으로 딱 한정해 놨습니다. 일백이십 년 되면 다 홍수에 멸할  것들이요 아무리 잘나도 그렇고 흉해도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우리에게 이 눈을 보여주는 것이 성경이요. 이것을 보게하는 눈을 뜨고  죽은 것이 영감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 같애도 결말이 멸망이면 무슨 소용 있소?  우리가 준비하는 기간에 좀 어렵고 괴롭고 한다 할지라도 죽음이 안 죽은 것  보다도 영광스러워 진다면 그 죽음 누가 안 죽겠소.

5장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든 것은 영생이요 하나님 없이 저 혼자 산거는  전부가 사망이라는 것을 여기에 보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이 무엇입니까? 우리  못난 사람들이 어떤 권력가와 동행하려하면 그는 참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대국의 왕을 대통령을 내가 동행하려 한다고 동행해 줍니까? 안 됩니다.

그러나 만유의 대주재이신 하나님 이분보다 높은 분이 없는, 이분은 암만 못나도  병신이라도 동행하려면 동행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랠만한 사랑입니까?  이분과 동행하는 것은 이분을 잊어버리지 말고 이분을 모시고, '주님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 이분 모시고, 제 주관에 이분 모신 것을 제가 인정하고  이분을 모시고, 이분의 뜻을 거슬리지 말고 이분이 주신 법칙대로 사는 것이  이분과 동행입니다.

이분 모시고 이분이 동할 때에 동하고 정할 때에 정하는 이분은 당신의 뜻대로  동하고 정합니다. 이분 모시고 어떤 현실을 만났든지 그 현실에 주의 뜻을 찾아  주의 뜻대로 현실 현실을 꼬박꼬박 이분 모시고 이분 모시기 때문에 든든함을  느끼면서, 이분을 모셨기 때문에 이분의 눈초리를 보아 두려워 조심하면서, 이분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분을 모시고 이분을 잊어버리지 말고,  이분을 모시고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는 걸 입으로 말하지 안해도 자기가  주님이 자기와 함게 계시는 것을 느끼면서, 자기 눈에 보이지 안할지라도 자기  안에 주님이 계시니까 '주임이여 이 현실에는 이렇게 해야 됩니까 저렇게 해야  됩니까?' 당신에게 묻는 것으로써 당신의 도우심을 내가 바른 것으로 당신이  나에게 알려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요렇게 당신을 소망하면서 내가 모시고  있는 당신을 소망하면서 당신을 모시고 현실 현실을 사는 이것이 동행입니다.

 여기에는 돋도 안 듭니다. 지식도 안 듭니다. 자기의 역량대로 자기의 이미  있는 그 지식 그대로 이분을 자기대로 모시고 이분을 모시고 이분을 동행하는 이  생활로 자기가 살 때에 그는 다 하나님께 영생으로 이루어 주십니다. 그것은  영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그는 사망이 해할 수 없는 걸음을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주하든지, 복잡하든지, 좋은 것을 닥쳤든지, 나쁜 것이  닥쳤든지 어떤 과도기 역경을 비상을 닥쳤을지라도 우리는 그만 접하는 사람,  접하는 일, 접하는 물건 그것을 접하다 보니까 내 마음도 생각도 정신도 다 그리  끌려가서 그것만 상대하고 그거에 비추어서 '요것을 보니까 요래야 되겠나?'  '돈을 보니 요래야 되겠나?' '요 사람을 만나니까 요 비유를 요렇게 맞추어야  되겠나?' 그것을 상대하고 그만 생각하고 그에게 어떻게 맞출까 하여 가는  이것이 하나님 없이 사는 멸망의 생애입니다.

아무리 천 명 만 명이 다 그리 쭉 끌려갈지라도, 내가 그걸 접했을지라도, 나는  주님 모시고 '주님이여 내가 여기에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혹 내가  주님을 잊어버리고 거기에 내가 끌려가지 안했습니까?' '혹 그 단에 망령을  부리지 안했습니까?' 자기는 주님을 모신 이것을 자기가 기억하고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으로 더불어 의논해서 살려고 할 때에 인간에게는 영원한  명철이 나옵니다. 총명이 나옵니다. 담력이 나옵니다. 온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책임의 보호가 나옵니다. 이걸음 걷는 자가 결단코 좌절하지  않고, 우열하지 않고, 비겁하지 않습니다. 절망되지 않습니다. 결단코  천해지거나 꺽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즉시 나타나면 더 큰 걸로 나타났지, 그  생활을 걷는 자 아무도 후회하는 자 없습니다.

세상 모든 어떤 생애라도 걷고 난 다음에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정치가는 죽을 때에 정치가 된걸 후회 해, 예술가는 예술가 된 걸 후회 해, 모든  이종교가들은 이종교가 된 걸 후회 해, 중은 중 된 걸 후회 해. 그러나 기독자는  이 걸음 걸은 것을 후회하지 안 해. 고문과 고행에서 세상을 떠나서 마지막 떠날  때에 감탄해서 어떻게 '내가 비참한 것을 이렇게 알찬 가치 있는 행복의 생명을  길을 걷게 하였습니까?' 하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감탄하신 것처럼 감탄하지  후회하는 사람 없습니다. 우리는 깹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을 우리는 싸워야겠고 우리는 이겨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 부부의 가정을 가졌거든 여인의 세 가지 의무, 남편의 세 가지  의무, 요 일을 달성되야 합니다. 아내는 그 남편이 자기의 사모의 흠없는 대상이  되기까지 배후에 노력하는 것이 아내의 본문을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앞서고  남편이 뒤따라 오는 것은 그는 가정 구원이 안 된 것입니다. 가정 구원이 안 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충돌 교리 신조 신앙 사상의 충돌을 우리는 양보하면  안 됩니다. 에녹만이 승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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