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

 

1984. 11. 25. 주일오전

 

본문 : 창세기 5장 1절∼32절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셋은 일백 오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구십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오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게난은 칠십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마할랄렐은 육십오세에 야렛을 낳았고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팔백구십오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야렛은 일백육십이세에 에녹을 낳았고 에녹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육십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므두셀라는  일백팔십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라멕은 일백팔십이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칠백칠십칠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이 창세기 5장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에녹이라는 사람이고,  남은 사람들은 몇이든지 다 한 종류입니다.

 두 종류 중에 한 종류는 나서 의식주로 자라고, 또 자라니까 때가 되매  결혼하고 또 결혼하니 자녀 낳고, 자녀를 낳으면서 살다 보니까 늙으니 단산하고  그 다음에 얼마 살다가 죽었더라 하는 것이 그 한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다 나고 나니 살기에 분망했고, 또 살다 보니까 결혼하기에 분망했고. 또  결혼하고 보니까 부부 서로 사랑하고 동침하는 데에 분망했고, 또 그라다 보니까  자녀가 낳았으니 자녀 기르는 데에 분망했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 먹고 입고  살다가 마지막은 죽음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한 종류의 사람 에녹은 이는 죽음을 보지 안한 사람입니다. 에녹과  그들과 꼭 같이 나고 난 다음에는 의식주로 살라고 분망했고, 그러다가 결혼했고  자녀 낳았고, 고라고 난 다음부터 에녹은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자녀 낳고  하는고 일로 계속하지 안하고 거기에 딴 토막을 하나 시작했습니다.

 에녹만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이 여게.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으면 그 부부 생활이나 자녀를 양육하는 생활을 안 했는냐?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것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자녀를 양육할라고 하면 일도 해야 할  것이고 농사도 지어야 할 것이고 또 장사를 하든지 직장에서 직공 노릇을 하든지  어떤 교육계에서 활동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정계에서 활동을 하든지  어떤 예술계에서 활동을 하든지 그리 안 하면 남에게 종업자로 그렇게 어떤 그  노조로 활동하든지 일을 해야 자녀를 양육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자녀  양육하는 가정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 일  했습니다. 그 일을 하고 나 다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을  하면서 그 일을 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을 자녀 낳는 데서 동행하는 일을  했고, 노아가 오백 부부 동침에서 동행하는 일을 했고, 자녀 기르는 데에서  동행하는 일을 했고, 자녀에 대한 생활비를 모두 다 담당하는 데에서 동행했고,  이렇게 하다가 그는 첫자녀 낳을 때는 하나님과 동행할 줄을 몰랐지마는서도  첫아이를 낳고 난 다음부터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기를 삼 백 년 동안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고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이 산 채로 데려가서 죽음을 보지  안하고 그대로 승천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도리를 가르쳐 주시는 계시의 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리를 가르쳐 주신 이 도리입니다. 도의 이치입니다. 그 이치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그게 할 일인 줄 알아도 먹고 입고 사는 것도 중요하고 가정을  꾸려가는 것도 중요하고 자녀를 양육해 가는 것도 중요하고 다 죽는 그 시간까지  먹고 입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마는, 그것만으로서는 다 죽는 것을 찾아서 가는  것이며 죽음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니다 결국은 죽음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여게 보여 주고. 에녹은 그들과 꼭 같은 사람이요 꼭 같은 처지 형편 중에서 꼭  같은 종류의 그런 의무와 책임과 그 생활을 하면서 그들과 다른 거 있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것이 달랐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달랐음으로써 그  결과로 달라진 것은 죽지 안하고 산 채로 승천한 그것이 달라졌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땅 위에 이런 저런 분망한 일이 많고 뭐 큰 사람도 있고 또  소인들도 있고 사람들이 존대하는 위대한 일들도 있고 그 사소한 평범한 서민의  생활도 있지마는서도 그것은 전부 다 말해서 먹고 입고 살고 자녀 낳고 자녀  기르다가 죽는 거고 속에 다 포함됐습니다. 거게 하나도 벗어난게 없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이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을 함으로 죽지 안하고 산 채로  승천했습니다. 그는 사망을 이겼습니다.

 여게서 우리들이 에녹 외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 생활만 하면, 그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도 그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법칙도 그 법칙이요 마귀도 그  마귀요 생사도 다 그 생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 당사자들은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마는서도 여게서 암만 해 봤자 죽는 일 하나 있고,  또 내나 그 일 하면서 죽지 않고 사는 일 하나 있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서  우리는 에녹에게 속해서 사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할려고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또 여게서 우리가 세상에 이 세상 살이를 하면서 '나는 다른 사람과 입장과  처지가 다르고 부담이 다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다 그것은  오산입니다. 잘못 계산한 것입니다. 꼭 같습니다.

 그러기에, 꼭 같은 생활에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동행 요것을 하나 빠졌기 때문에 사망을 이기는 생명 성공을 하지  못했지마는서도 에녹은 꼭 같은 일을 하면서 사망을 이긴 생명 성공을 한 것을  우리에게 보입니다.

 우리든지 우리 자손이든지 우리 친구든지 높은 사람이든지 낮은 사람이든지  말할 것 없이 다 요 두 종류에 속하여 있으니 누구든지 택한 자라면 하나님과 다  동행할 수 있고 다 사망을 이기고 생명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고, 또 아무리  택한 자라도 다른 일은 다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 하지 안하면 기본구원은  있지마는서도 자기의 시간 시간에 사는 일생의 생애라 하는 것은 다 둘째 사망의  해로서 사망이 되고 마는 것을 우리가 여게서 명심하고 확정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또, 에녹 외에 하나님과 동행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던 이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이 세상을 소망하고 오만 것들을 다 방편을 써고  수단을 써서 주력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뭐 별별 종류로 과학으로 학문으로  기술로 또 자기의 노력으로 모든 복술로 온갖 방편을 써서 별별 것을 다  마련했지마는 그 마련한 것이 다 홍수 속에 한꺼번에 다 매몰되어서 멸망하였고  하나님과 동행한 이 노아의 그 준비만은 성공했습니다.

 노아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그 성공을 한 사람이 노아입니다.

천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욕심 부려 가지고 내것이라 내것이라  했지마는서도 이거는 내 토지라 이것은 내 뭣이라 해서 그 단 한 평도 촌보도  양보하지 안하고 그렇게 시비하던 자들은 다 하나님께서 홍수 속에 쓸어서 다  쓸어 버려 버리고 이 우주는 그때에 노아의 우주가 되었습니다. 우주에는 노아  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었고 거게 소속한 일곱 식구들이 다 그것을 같이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씀 하시기를 '온 세상을 노아는 정죄하였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서 하나님의 기업을 단독이 받았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우리에게 계시의 인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탐하고 어떤 것을 욕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서만  그것을 자기가 취득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데에서는 제것이라고 단단히  어떻게 해 놨다 할지라도 그것을 심판해서 던져 버리는 하나님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다 빼앗기고 자기 것은 하나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서만 자기 것을 영원히 삼을 수가 있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또, 한 사람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있으너 그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우리가 간단한 그 계시된 것을  봐도 이런 저런 모든 파란도 있었고 곡절도 있었고 애로도 있었고  있었지마는서도 아브라함은 거기에 하나도 제재를 받지 안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만 전심 전력 기울였습니다.

 그랬는데, 그는 역사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는 그 후배 자손에 대해서 성공한 사람은 아브라함 같이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여러분들도 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역사의 세계에 나서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이 땅 위에서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이 죽을때까지 자기에게 오지  안했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의 절대 불변을 믿고 보니 내가 이 땅에 보이는  가나안으로 생각한 것은 범위 좁은 이 착각된 것이고 하나님은 이것을 초월한  영원 무궁한 그 터가 있는 견고한 세계를 나에게 주실라고 하는 것인데 나는  이것을 소망했구나 하면서 세상을 떠날 때에 하나님이 가나안 주신다는 그  가나안을 소망하면서 든든히 믿고 떠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다 그의 기업이  되었고 하늘나라의 소망 가진 자들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생명 성공도 하나님과 동행에 있고 또 모든 기업 성공도 하나님과  동행에 있고 모든 후배나 자손의 성공도 하나님과 동행에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우리는 한 시간 동행했으면 동행한 그 한 시간은 나와 그  기능과 내게 속한 모든 것은 생명으로 성공했고 기업으로 성공했고 모든  자손으로 다 성공한 그 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설교할라고 할 때에 아침까지 제 설교할라고 하는 것은  삼중의 힘에 대해서 설교를 할라고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왜? 지난 주일에  가르칠 때에 너무 좀 가르치는 것이 허무해서 그렇게 했는데 오늘 내가 가르치는  모든 지하층들, 일층, 이층 가르치는 데에서 제가 마음에 홉족을 느꼈고, 중에도  사 층에서 가르치는 데에 만족을 얻었고 그보다도 삼 층에서 가르치는 데에 내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만하면 이것을 다시 중복적으로 오늘 증거할 필요가  없다 하는 것을 느껴서 그때부터 다른 말씀을 하나님이 증거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가 그 증거할라고 저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이 창세기 5장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도 여러 차례 증거를 했습니다. 대예배 때는 제가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밤 예배에 새벽 예배에 많이 증거를 했습니다. 이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것이 우리로서는 가장 좋은 거 이 세 가지라면 생명 성공하고  하나님에게 받는 기업 성공되고 또 자손 성공되고 하면 그것으로서 다 됐습니다.

그 세 가지 강령에게 다 달린 그런 그물 코와 같은 것이지 다 거게서 이 강령  속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일을 첫째는 이 필요성의 가치를 우리  교인들이 다 알아야 하겠고, 우리 서부 교회 유치반 중간반 장년반들이 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며 우리에게 상대되는  가치 중의 전부라는 것을 다 알아야 되겠고, 여게 대해서 욕망을 품어야 되겠고,  또 이 일에 대해서 전심 전력을 기울 여야 할 것을 제가 생각나서 여러 차례  예배 때에 증거를 했는데 대예 배 때는 증거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여러 차례 증거하는 것은 아직까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분들 때문에 다시 증거하는 것이니 먼저 깨달은  사람들은 실천의 결과를 맺고 그 권능을 얻어서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능력을 가지는 사람들이 되도록 힘을 쓰면 얼마든지 힘을 쓸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거게 대해서 힘쓰면 자기 혼자 개적으로 어떤 그 굴 속에 파묻혀  가지고 힘 쓰는 것보다도 이 시간에 힘을 쓸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그 주시는  것을 받으면 받기가 쉽습니다. 은혜 받을라고 기다리는 사람의 수가 많은데  따라서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의 양은 다르다고 그렇게 성경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주컴과 동행하는 것이 영원 자존자와 동행하는 것이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목적을 정하신 분과 동행하는 것이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전지 전능자와  동행하는 것이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모든 예정자와 동행하는 것이요,  창조주와 동행하는 것이요, 크고 작은 모든 것을 다 보존하고 관리하시고 개별  섭리를 주권적으로 하시는 분과 동펑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이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진리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과 동행한다. 주님과 같이 있고 같이 행하고 또 같이 계획하고  소원하고 같이 희로 애락을 누리고 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데 있어서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지금도 신인 양성 일위로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십니다. 신인 양성 일위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신성도 이 물체가 없고 인성도 변화 됐기  때문에 물체가 없는고로 우리 안에 계시나 아무런 형체는 없습니다. 없으나 나  위해서 사람되시고 나 위해서 십자가에 대속하시고 나 위해서 창조와 피조물로  부활하신 이 사랑의 주님. 우리를 절대 책임지신 이 주님이 우리 안팎에  계십니다.

 그런고로, 이 주님과 동행하는 그 동행하는 것이 어떤 것이 동행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무쳬의 존재기 때문에 우리는 좀 잘못하면 깨닫지 못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창에 있을 때에 여게 감천에 그 고아원하는 장로님의 아버지  되시는 분인데 아주 열심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그때 그 정미소라 하면은  대단히 그 재벌이라 할 수 있는데. 정미소하다가 정미소를 그만 자녀들에게 다  맡겨 놓고 그저 신앙으로만 저 집회할 때나 어디든지 따라다니면서 그래 열심히  은혜를 받고 그래 지냈습니다.

 그분이 주님에게 기도하는데 있어서 아무래도 주님을 대면해 가지고 기도를  해야 되겠는데 주님을 어떤 주님으로 만납니까 하는 것을 자기 혼자 애를 쓰고  이래 하다가 '그저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동행해야 되겠는데 어째야 되나?'  이래서 애를 쓰다가 한번은 그분이 참 정중하게 며칠 기도를 했다고 하면서  저에게 찾아 와 가지고서 지금 그때에 저는 집사님입니다 집사님에게 하나  묻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님을 만날라고 애를 쓰고 이렇게 금식도 많이 하고  산기도도 많이 하고 주님 마날라고 애를 썼었는데 주님을 만날라고 애를 쓰니까  내 앞에 주님이 나타나시는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그 손에서와 발에서와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토막토막 떨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마음에 안타까워서 그 입을  대고 떨어지는 그 피를 내가 받아 마셨습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내가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서 주님에게 상대해서 기도할려고 하면은 이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형상이 나타나서 주님을 만나고 그라고 나면 마음이 시원하고  그라기 전에는 시원찮아서 늘 그렇게 하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이렇게 저에게  물었습니다.

 물어서 제가 그때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그분은 장로가 되지 안할 그  집사 때입니다. '○ 집사님이 예수님의 그 성화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그려 놓은  그 그림을 본 일이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성화라고 하면서 그림을 본 일이  있습니까?' 이라니까 '예, 그 그림을 많이 봤습니다.' 이래서 '그 그림을 그리는  자체도 배암의 지식이 하는 일이요 유혹이요 또 그림 그것이 일종의 우상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나아갈라고 할 때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그 그림이 가로 막아서 기끈 애를 쓰다가 성화라는 그 그림에게 가서  중단을 당하고 그 너머를 넘어가지 못하고 사람들이 그 유혹에서 떨어지는 것이  그것이 악령의 대 궤휼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다 물리치십시오. 그리고  집에 그런 그림을 붙여놨거든 다 떼 버리십시오.'  주님은 성경 가운데에 나타났는데, 성경을 읽으면 주님은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신구약 성경의 이 진리는 진리는  바로 예수님이 사람들이 보고 접할 수 있도록 나타나신 주님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또, 이 말씀 안에는 성신의 감화가 있습니다. 다른 서적들은 그 속에  말뿐이고 그 속에 있다고 하면 말한 사람 그 사람의 생각이나 대상이나 있지  없지마는 신구약 성경 말씀 안에는 내재적 영감이라고 성경 안에는 성신의  감화가 그 안에서 역사한다 하는 그것은 세계 정통 신학자들은 다 공통이 되어  있는 내재적 영감을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영감이 계십니다. 영감은,  그 성신의 감화는 다른 것이 아니고 신구약 성경 말씀을 나에게 더 정확하게  깨닫도록 도와 주는 것이 성령의 역사요, 또 깨닫고 그대로 욕망을 가지도록  욕망을 점점 강하게 하는 것이 성신의 역사요, 그대로 실행하지 안하고는 견딜  수 없는 실행의 욕망을 가지도록 하고 또 실행의 결과를 맺도록 하는 그 능력이  성령의 감화입니다.

 그러면, 이 성령과 진리는 뭣을 하고 있느냐? 이 성령과 진리는 진리를 자꾸  만나서 접촉하고, 또 성령님을 소멸하지 안하고 성신의 감화를 만나서 동행하고  이렇게 하면 진리와 성령은 주님이 나 위해서 대형해서 나를 사죄해 주신 대형의  사죄를 자꾸 깨닫게 하고 강하게 하고 느끼게 하고 이래서 나를 대형하느라고  죽으신 그 주님에게 대해서 내가 어떻게 주님을 상대하며 그 주님에게 대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 그것이 자기에게 점점 강하게 깨달아집니다. 또, 그  다음에는 주님이 나를 대행해서 의를 입혀 주신 나를 대행해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 칭의에 대해서 점점 깨달아내가  칭의를 받은 사람이 되고. 사죄를 받은 사람이 되고, 하나님과 원수된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 이 화목의 제물로서 하나님과 이 밀접한 신인 영교가 된  신령한 교제를 맺게 하셨고, 창조주가 전지자가 전능자가 조물주가 자존자가  주권자가 대주재자가 이분이 나의 아버지된 것을 깨닫고 느꺼고 점점 강하게 할  때에 거게서 충성이 나올 것이요 감사가 나올 것이요 강하고 담대함이 나올  것이요 기쁨이 나오는 것이 이것이 그 주님을 만나는 것이요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는 것을 그에게 말해줬습니다.

 이래서, 그 후에 저는 그전부터 이 성화라는 것을 그것을 반대해서 없애  버렸습니다. 성화가 오면은 찢어 버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제가 고려  신학교 다닐 때에 '성화는 이것은 순전히 마귀의 역사지 하나님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거기에 예수님의 그 사진도 없고 예수님의 글씨 하나도 기록하지 않는데  이것은 무형의 존재를 유형의 존재로 바꾸어 가지고서 사람을 미혹케 하는  것이요, 그 성신의 감화로 무형의 존재를 만나게 하는 그 길을 가로 막아서  유형으로 가로 막아서 끝을 막게 하는 유혹이기 때문에 그런 걸 가지지 마라  해서 제 밑에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대개는 그 성화를 다 무시하고 성화를 그때에  인정치를 아니했습니다.

 제가 친한 어떤 서울에 있는 유력한 신학자요 권위 있는 신학교 이사장이요  교장인데 그분이 나한테 달력을 하나 보냈는데 달력에 보니까 그 성화를 전부이  그림을 해 가지고 달력을 해서 보냈습니다. 그것을 내가 받아 가지고서 그것을  찍어서 없애고 그분에게 전화를 해 가지고 이것이 이렇다는 거 설명을 해서 좀  거석해 볼라고 하다가 아무래도 내가 만나서 대화하면 할까 그 전화를 해  가지고서는 오해하고 도로 반발하겠다 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 뒤에 보니까 그런  방향으로 많이 흐르기 때문에 아직까지 말을 못 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과 동행을 하니까 혹 우리 가운데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인가? 그것을 몰라서 혼돈되고, 오히려 동행할라는 여게서  유혹받기 쉽습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주를 위하여 간절한 것이 도리어 나를 삼켜서 멸하게  했다. 너희들이 나를 잘 믿고 잘 바라보고 잘 섬길라고 하는 거기에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것과 도적질하는 것을 만들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돈도 유태 돈으로써 로마 정부의 정치하에 있으면서 유태 돈으로 재물을  사야 되겠고 구별되게 기르는 것을 사야 된다고 한다는 것이 좋은 동기에서  했지마는서도 하나님이 거게 축복하지 안하시니까 좋은 동기로 한 것이 결국에는  장사하는 집이 됐고 강도와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일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요렇게 좀 돈 많이 받고 돈벌이 할라는 그런 것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게  대해서 성경에 예언하시기를 주의 전을 위하여 간절한 것이 도리어 나를 삼켜서  멸하게 했다고 그렇게 미리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일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 주님과 동행하는 것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에녹처럼 주님과 동행하고 노아처럼 주님과 동행하고 아브라함처럼 주님과  동행하는 이것이 우리의 모든 일에 형통이요 성공이 되어지는 것인데,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어떤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인가?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실 때에 셋으로 나타났습니다. 셋으로 하나는 성령과  물과 피라 이렇게 했습니다. 성령과 물과 피라. 물은 이 육십 육 권 도리의  진리의 말씀을 가리키고, 피를 말하는 것운 세 가지 대속을 가리킨 것입니다.

'우리에게 증거하는 이가 셋이 있으매 곧 성령과 물과 피라 이 셋은 하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증거한다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도록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도록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하나님만을 붙들고 놓지 않도록 증거해 주고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증거해 주는 그 증거를 누가 하고 있느냐? 성령과 물과 피가 증거하고 있다. 이  셋은 하나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피는 참된 음료요 내 살은 참된 양식이 로다 이를  먹는 자는 다 그 속에 영생이 있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아난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예수님의 피와 살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어떤 것이 주님과 동행인가?  우리가 진리와 동행이 주님과 동행입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과 내가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입니다. 요걸 꼭 잡으십시오. 성경 말씀을 통하여 내가 깊이  들어가면 거게 영감이 나오나니 그 영감을 소멸하지 말고 성신의 감화를  소멸하지 말고 영감과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인 것입니다. 진리와 영감과  동행하면 진리와 영감이 예수님의 대속하신 사죄를 나에게 증거해 주기 때문에  사죄와 내가 동행하는 것입니다. 사죄와 동행하는 것, 죽음 앞에서도 사죄를  배반하지 안하고 사죄와 동행하고 어떻게 고관 대작을 주는 그 영광스러운 그  영광 앞에서도 사죄를 배반치 안하고 사죄와 동행하고, 칭의와 동행하고,  하나님과 화친된 이 결합된 이 결합과 동행하고 버리지 안하고 이것이 주님과  동행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때에 우리 마음으로 동행하고 우리 몸으로  동행하면 됩니다.

 마음으로 동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지 생각할 때에 진리와 함께  생각하면 주님과 동행입니다. 영감과 함께 우리 생각이 동행하면 주님과  동행입니다. 우리의 뜻이 우리의 소원이 우리의 비판이 우리의 감정이 어떤  감정이라도 주님의 말씀과 동행할라고 할 때에 자기의 감정이 돌변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주님의 피와 동행할라고 할 때에 그 감정이 돌변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자기가 그 감정으로 생명 내대 놓고 할라 하던 것이 이 진리와 영감과  동행할라고 보니까 그렇게 복수심이 당장에 소멸되고서 죄인이을소이다 하면서  꺼꾸러지는 것을 우리가 볼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마음, 우리 마음이나 우리 생각이나 우리 뜻이나 우리  감정이나 우리의 소욕이나 우리의 소원이나 우리의 이 모든 마음의 작용이  마음의 작용이 진리와 영감과 주님의 피, 피의 이 세 가지 이로 내 마음이  동행하면 그것이 주님과 동행입니다. 그렇게 동행할 때에 분명히 전지 전능자가  나와 동행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주재가  나와 동행하고 계시는 것을 확실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몸으로 동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귀로 동행하는 거, 내가 들을 때에 들을 때에 그때에 내가 주님과  동행하지 안하고 이 세상과 동행하는, 마귀와 동행할 때 많습니다. 내 귀가 들을  때에 그 듣는 것을 진리와 함께 하고 내가 들을 때에 내 옛사람에게는 딱  맞지마는서도 진리와 동행할라 하니까 그 들은 것을 부인해야 되겠습니다.

진리와 동행할라 하니 그런 말 안 들어야 되겠습니다. 내가 진리와 동행할라  하니까 내가 보던 것을 안 봐야 되겠습니다. 보던 것을 버려야 되겠음니다. 내가  보고 들은 데에 회개해야 되겠고 거게 대해서 나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내 입술이 주님과 동행합니다. 내가 말하고자 할 때에 하고 싶은 말  많지마는서도 그 말하면 인간과는 동행하고 죄악과는 동행이 되지마는서도  주님과 동행이 안 된다. 진리와 동행이 안 된다, 영감과 동행이 안 된다, 내가  그 말 할라 하니까 영감이 그만 사라져 버린다. 내가 그 말 하고 나서 보니까  그만 영감이 달아나서 설교가 안 된다. 그 말을 하고 보니까 진리의 깨달음이  고만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래서 내 말이 진리와 동행하고 영감과 동행하고  나를 대형으로 사죄 주신 사죄와 동행하고 죽으심으로 칭의 주신 대행으로 칭의  주신 칭의와 동행하고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합된 하나님과 동행하고 이렇게 내  혀가 동행할라 할 때에 쉽게 껍데기로 동행이지마는서도 동행하고 보면은  전지자가 나와 동행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확실히 믿어지게, 알게 확실히  담대와 평강이 확실히 그분과 동행하고 나면은 내 자체가 변화돼 버린다.

 입술로 동행하고, 내가 하고 싶지마는서도 내 수족으로 동행하고. 내가 걸음을  걷고 싶지마는서도 내 걸음에 주님과 동행하고, 내 모든 지체로서 주님과  동행하고 이렇게 내 영은 주님과 동행하고 있으니까 내 마음과 몸이 주님의 이  세 가지와 동행할 때에 거게는 다 생명이 승리한 생명의 면류관을 얻습니다.

거게는 사망이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사망이 들어왔다면은 이 동행을 버렸기  때문에 사망이 들어왔지 이 동행하면은 사망이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동행했으면  내게 대한 기업은 하나도 뺏을 자가 없습니다. 내게 분개했던 기업은 다 내가  솔박 다 취하게 됐습니다. 내게 분담된 조상 노릇은 다 했습니다. 내가 할 자손  성공은 다 했습니다.

 그런고로, 주님과 동행은 내 마음의 여러 지체. 마음에도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여러 기관이 있습니다. 뜻이라는 지체가 있고 마음의 지체가 있고  생각이라는 지체가 있고 기억이라는 지체가 있고 정서라는 지체가 있고  감정이라는 지체가 있고 이런 모든 욕심이라는 지체가 있고 마음이 여러 지체가  있으니 모든 지체가 움직일 때에 주님과 동행하는 거, 주님과 동행하는 세  가지와 동행하는 거, 진리와 동행하고 영감과 동행하고 주님의 피와 동행하는  거, 주님의 피는 세 가지, 사죄와 동행하고 칭의와 동행하고 화합과 화평과  동행하는 거 이 세 가지 공로, 사죄는 우리가 이용해 먹을 사죄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죄의 것이 됐습니다. 사죄는 우리 상전입니다. 나는 사죄를 모시고  사죄를 모시고 사죄에게 속해 살아야 됩니다. 사죄를 모셔야 됩니다. 사죄를  모시고 나는 사죄에게 속했습니다. 사죄를 모시고 나는 사죄를 떠날 수 없고  칭의를 모시고 칭의를 떠날 수 없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된 이 화친을 모시고  이 화친을 떠날 수 없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모시고 대속의 공로를 나는  떠날 수 없어 모시고 살고, 이를 위한 진리와 영감을 모셔 동행하는 것이 내  마음으로 동행하고, 내 몸에 여러 가지 지체 있는데 이 지체 하나하나가 움직일  때에 이 셋과 동행하면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형의 존재이기 때문에 이로 동행하는 것이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요  무형의 존재를 어떤 유형의 존재로 만들어 가지고 동행할라 하는 것은 다 악령이  주는 미혹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몸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나셨지마는 우리를 가견적인 이  물체 물체에서 영체로 성화시키기 위해서 당신이 오셨기 때문에 하나도 그  물체를 남기지 안했습니다. 당신 몸은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마는서도  부활해서 몸도 안 남겼고 글씨 하나 필적도 안 남겼고 사진 하나도 안  남겼습니다. 그는 무형의 존재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무형의 존재인 그분을 무형의 존재가 우리가 사귈 수 있도록 나타나신 것은  무형의 존재를 동행할 수 있고 사귈 수 있도록 나타난 것은곧 성경에 기록된  육십 육 권의 도리 이 진리요 진리인데, 진리가 육십 육 권의 말씀으로  나타났으니 말씀은 우리가 볼 수 있지만 진리는 보지 못 합니다. 말씀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말씀과 동행하는 것이 말씀 안에는 진리와 동행입니다. 영감도  우리가 그 심령으로 느낄 수 있고 접할 수 있지마는서도 영감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나갔습니다. 사죄도  칭의도 화친도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그를 기념해야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 마음으로 몸으로 이렇게 주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동행하기  쉽게 동행할 수 있도록 나타난 것이 문서 계시인 이 진리요 또 그로 통해서  우리에게 새롭게 강하게 밝게 하는 영감이요. 또 우리에게 주신 이 대형의  사죄요 대행의 칭의요 대화목 제물로서 주신 화친이니 이렇게 이 세 가지요 다섯  가지, 세 가지요 다섯 가지 이는 우리가 우리 마음이 동행할 수 있고 우리 몸이  동행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사람되어 오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일을 잃지 맙시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저 주님의 이 이 다섯 가지를 사모하고 사모하고 생각하고 입술로 익히고 자꾸  이라면 다른 사람이 뭐 정신 병자라 하든지 어쨌든지 우리가 자꾸 사모하고  익힘으로써 우리 입에 배야 되겠고 우리 눈에 배야 되겠고 우리 눈에 배야 되고  우리 귀에 배야 되고 우리 마음에 배야 되고 우리 마음에 가득 차야 됩니다.

가득 차고 우리 몸에 차서 그것이 우리의 습성이 되고 본능이 돼서 우리는 그  사람 되어 화되는 것이 그것이 성화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을 놓지 맙시다. 여게서만 생명 성공, 기업 성공, 후손 성공이  되어지지 다른 데서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형제와 나와 관계할 때에  계명대로 관계 가지면 그 사람에게 사랑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완전한 증거를  했습니다. 생명을 줬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그러기에, 기독교의 구원은 진실이요 진실 없으면 안 됩니다. 껍데기로  수단으로 방법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자기를 옛사람을 부인하고야 만나는 것이  부인하기 전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복술을 다 버리고 자기 주관을 다 버리고 완전히  그분에게 피동됨으로서의 우리가 이 신앙 가지고만 구원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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