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


선지자선교회 1982년 1월 29일 금새

 

본문 : 창 5:21-24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바로 하늘나라에 갈 사람들을 보여 준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바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보인 한 표본의  인물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동행에는 죽음이 없는 것을 하나 계시해  보이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에녹의 일을 인용해 가지고 '에녹과 같이 예수님을 잘 믿으면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다 하늘나라에 간다.' 이렇게 이 성구를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시켜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는 이런 사람을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믿기는 믿지마는 '안 죽는다' 하는 이 성구로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그 소망이 죽지 않는 이 소망, 제일 두려워하는 건 이 죽음, 그러면 죽음을  제일 두려워하고 죽지 않는 이 소망, 이 소망만 가지고 열심히 믿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와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을 따르되 어디까지 따를 것이냐? 모든 자기의 마음, 뜻,  힘, 소유, 목숨 이것을 다 들여 주님을 따르는, 자기의 것이 주님을 따름으로  없어진 그것이 다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현실을 지낼 때에 그 현실에 없어진 심신의 기능이 있고 남아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남아 있는 기능은 남은 현실에서 하나님을 위하고 사랑함으로 그의  법도에 순종함을 인해서 없어진 그것은 진리의 것이 됐고 하나님에게 소속했고  이러기 때문에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도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인  진리의 것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없어졌고 그리스도 안에 생명 안에 감추어지게 된 것입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졌느니라" 골로새 3장에 말씀한 대로.

그것이 십자가의 도인데, 다시 말하면 죽고 사는 것이 십자가의 도인데, 죽음의  적이 되고 죽지 않는 이것을 소망하고 강조하게 되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의  원수가 됩니다.

 안 죽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 이대로의 안 죽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  이대로의 악령과 악성과 악습에 속한 이것은 하나님과 진리로 인해서 죽고  이제는 성령과 진리와 중생된 영으로 살아난 것, 성령과 진리와 중생된 영의  마음이 되고 몸이 되어서 행동한 그 행동에서 하나님과 진리와 중생된 영의 것이  되어진 이 옮겨진 것 변화된 것 이것만 영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 또 여기 전도관, 그런 사람들은 이 성구를 인용해 가지고  '보라, 에녹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면 안 죽는다.' 이 성구로 미혹하니까, 죽기를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인생인데 안 죽는다는 도로 받으니까 소망 있고 '네가  무슨 일 해도 안 죽는다.' 이러니까 그 사람들이 하나님도 인간도 예의도 체면도  법도도 모르고 벌로 날뛰는 그런 사람들이 됩니다.

 그래서 박태선씨도 그 말을 주장하고 난 다음에 잘 믿는다고 인정한 사람의  아이가 죽었습니다. '이것은 죽은게 아니라 사람에게 안 죽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라, 며칠이 지나면 살아난다.' 해 가지고  유리관에다가 넣어 가지고 바로 여기 서부산 경찰서 앞에인가 그 어디, 내가 가  보지는 않았는데 거기다가 유리관을 해 놓고 그때 주장을 해서, 전도관이 거기  있을 때입니다. 가서 구경하고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방부제를 넣어 가지고, 썩는다 하니까 그 방부제를 넣어서 썩지는 않습니다. 안  썩고 그래 있다가 나중에 그 아이가 '안 썩은 것 보라. 인제 살아난다.' 이렇게  미혹을 주다가, 잘 믿는 그 전도관 다니는 사람이 죽어서 장례를 지냈습니다.

'이와 같이 썩지 않고 살아난다.' 며칠 지나고 난 다음에 가 파 보니까  썩었습니다. 이 아이도 보니까 벌써 속은 썩었습니다. 그래서 전도관이 그때  주장하다가 그 주장이 깨졌습니다. 깨지면 그만하면 미혹 안 받을 터인데 또  그래도 미혹은 계속됩니다.

 이뇌자라고 하는, 새일교회라고 하는 그 교회를 창설한 이뇌자라 하는 그  목사가 또 안 죽는다는 주장을 이렇게 하니까, 안 죽는다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육의 소망의 인간은 안 죽는다 하니까 좋아서 그리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김철봉 목사님은 자기가 땅위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보니까 그  육의 잘못된 욕심이 어떻게 있어서 하나님 뜻대로 살기가 힘이 들었던지 그는  말하기를 '육체의 욕심 이놈이 강해 가지고 평생 나에게 괴롭히고 애를  먹였으니까 내가 죽거든 꼭 리어카로 끌어다가, 널 하지 말고 리어카로  끌어다가, 가마니로 묶어 가지고 리어카로 끌어다가 화장을 해 달라'고 단단히  부탁을 하고 유언을 해서, 그때 저도 그 장례에 갔었는데 거기 모인 사람이  굉장히 많았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분이 많기 때문에. 그러나 리어카에 끌고 가  가지고 화장을 했습니다.

 너무 자기가 살려고 할 때에 자기 육체 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많으니까 '이렇게 아무래도 죽을 뿐만 아니라 한번 불에 사뤄 가지고  한번 다시 개조가 돼야 되지 이래 가지고 안 되겠다.' 조금 성경에 교리  적으로는 조금 위반된 교리는 교리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음을 이것을 큰 수술로 아무래도 한번 바꿔져야 된다 이랬는데  땅에 속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해서 안 죽는다 하니까 막 이래 따랐습니다.

또 그 외에도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걸 주장해 가지고 하다가 안  되니까 뒤에 가서 그것을 돌이켜 그만 회개하고 한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것을 가르친게 아니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자기 마음과 육이  모든 것이 다 그대로 산 채로 하늘나라 간다.' 하는 그런 것을 보인게 아니고  하나님과 동행은 죽음을 이기는 진리를 하나 계시해 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은 하나님께서 살리셨고 지금 구원 이룰 것은 무슨 구원이냐?  이 마음의 기능을 살려야 되고 몸의 기능을 살려야 되는데, 마음의 기능과 몸의  기능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으로만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살아납니다.

 그러나 이 몸은 다 죽습니다. 몸은 죽어 가지고, 죽어야 부활을 합니다. 부활  이것은 예수님의 공로로만 하는 것이지 자기의 행함으로 부활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잘 믿든지 못 믿든지 한번 죽어야 하고 또 죽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로 부활하게 됩니다.

 부활은 영원히 죽지 아니한 부활은 세 차례 있는데,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은  제일 첫 번 첫 차례는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죽지 아니할 부활로 부활하신 것이  첫째요, 제일 순위적으로 첫째 부활이요, 또 그 다음에 둘째 부활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그때에 생명의 부활로 부활합니다.

그것이 순위적으로는 둘째 부활입니다. 둘째 부활. 그러면 마지막 셋째로 제일  마지막으로 부활이 있는데 그 부활은 어떤 부활이냐?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  불택자들이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전부 다 살아납니다. 살아나 가지고 그들은 하나님의 공심판  앞에서 하나님의 행동록에 기록된 대로 그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자기가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했든지 행동한 그대로  심판을 받아 가지고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게 됩니다. 왜? 아무리 자기가 행동을  잘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에 완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다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심판받아 가지고 지옥을 가게 됩니다.

그러면 지옥 가는 데에도 거기서 이제 더하고 덜하는 그런 심판을 받아서 영원히  고통은 사망의 고통을 당하지마는, 그 사망 고통당한다 하니까 없어지는 줄  알아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고통입니다.

 그러기에 천하에 예수님의 대속을 입지 않는 그런 도로서는 구원 얻는 길이  없습니다. 천하에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 얻는 길이 없습니다. 불교 같은 이런  불교는 성경에 우상 섬기는, 우상에게 절하는 것, 하나님에게도 마음으로  숭배하고 다만 사람은 산 사람에게 피차 예의로 이렇게 절을 하지 다른 절은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죽은 시체에게 절을 하면 그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제이계명  범죄가 됩니다.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라는 그 신사참배는 거기 뭐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마는 산 사람이 아닌 거기다가 절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우상 숭배가 됐던  것입니다. 또 왜정 말년에는 '일본의 동경에 천황 폐하가 있으니까 그 천황  폐하에게부터 먼저 절을 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된다.' 일본 사람들이  그래 주장을 해서, 일본은 저 동방이니까 동쪽을 향해서 동방요배, 일어서서  동방요배를 하고 예배를 드리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에 깨달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동방요배를 안  했습니다. 안 하려 하다가 잡혀가고, 또 감옥에 신사참배 안 하려고 들어간  사람들 중에서도 동방요배를 안 하려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더 형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 처음에 동방요배 이래 하라 하니까 아무라도 교회서 교역자가 일어서라  하니까, '일어섭시다.' 하니까 일어서게 됩니다. 일어서고 '동경에 있는 천황  폐하에게 경례!' 이렇게 교역자들이 말했습니다. 원청 위에서 눌러 놓으니까.

그때에 그만 따라서 절하기 아주 쉽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그때  따라서 절하기 쉽다 그거요. 그때 저도 일어섰습니다. 일어섰는데 그 말을  하는데 깜짝 놀라서 앉아버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았으면 안 할 수  없는 그런 뜻밖에 그렇게 미혹으로 그래 된 것입니다.

 이러기에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거기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  이랬는데 천주교도 거기 12사도, 또 선지자, 또 마리아, 예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다가 절하는 것이 그것이 미사드리는 것입니다. 또 절 많이 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절을 많이 합니다. 이러니까 천하에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 얻는  길이 없습니다.

 무슨 종교든지 다 멸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해 가지고 하나님의  공심판에 가지를 않습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 대신 공심판을 받아서 대신  형벌받았고, 대신 순종했고, 대신 불의와 하나님과 불목된 이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공심판에 가지 않습니다. 대신 행하셨기 때문에  공심판에 가지 않습니다. 공심판에 가지 않으니까 이제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선다 이랬어.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대속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서 가지고 자기가 예수님의 대속을 어느 정도 믿었느냐? 믿은 것만 구원이  되고 믿지 않은 것은 다 다시 유황불 구렁텅이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켜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다.

 "너희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으려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말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 계명  지키는 일 해서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전에 우리가 '자기가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라.' 할 수  있는 걸 하나 정해 놓고 이 일을 요동치 아니하고 계속하려고 하면 거기서  그것만 계속하다가 보면 우리에게 강한 신앙 의지, 양심의 의지가 생겨지고, 또  그것 생겨지는 데에는 수많은 전쟁을 해야 됩니다.

 '오늘은 이것이 와 가지고 나를 약하게 만들어서 내가 그만 잊어 버려 버렸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그것이 올 때에 내가 여기 이로 인해서 넘어지지 않겠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또 그걸 보내 주십니다. 보내 주면 이번에는 이깁니다. 또  그 다음에는 그것은 이겼는데 엉뚱한게 튀어나와 가지고 또 내가 그렇게 마음에  정한 대로 하지 못하게 또 합니다. 그럴 때 또 힘을 써 가지고 그걸 이겼습니다.

이기면 그 다음에는 또 딴걸 보냅니다.

 이래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작정한 그것이 계속되려고 할 때에는 옆에  인간 문제, 경제 문제, 감정 문제, 오기 문제, 또 오해 문제, 또 미 문제, 행락  문제, 취미 문제, 음식 문제 뭐 별별 것들이 와 가지고 넘어지게 하려 할 때에  내가 넘어지지 않을 때에 그것을 싸워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엇이든지 작정해 놓고 그것을 실행하는 가운데에서 자기의 자체가  변화가 되고 실력 변화가 되고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맺어지는 것이 그것이  점점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계속을 하는 데에는 하나님과 동행해야 된다 요것을 오늘  아침에 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해야 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별스럽게 생각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눈을 감고,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할 때에 눈을 감고  주님 앞에 '주여, 내가 요렇게 하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주님을 생각합니다.

'주님, 내가 요렇게 해 주옵소서.' 그것이 바로 주님과 동행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기도할 때에 주님을 생각하고 또 주님 앞에서, 주님을 생각하니까  자기에게 다른 것이 들어오지 아니하고 주님만 봐지고 요렇게 살고 싶은 그  마음이 드는 그것이 막바로 주님과 동행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동행은 기도라  그렇게 해석들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간 우리가 눈을 감고 주님 앞에서 '자, 하나님과 동행해야 된다'  요 말씀이든지, '자기가 무엇이든지 뜻을 정했으면 그대로 실행을 하자.' 하는  것이든지, 또 내가 반성할 때 '내가 어제는 무엇 때문에 내가 실행을 못  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다.'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이 시간 의논할 것 아닙니까?  주님 앞에서 간구하고 주님 앞에서 모든 것을 고하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이 시간 생각하는 것 요만치 생각하면 그것이 그 사람으로서는 주님과  동행입니다.

 일을 하면서도 기도할 때만치 주님을 생각하고, 사람을 접촉할 때도 기도할  때만치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과 관계를 가지고 사람과 서로 의논을 하고 요대로  계속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주님과 동행도 천층만층이오. 먼 사람 가까운 사람 있는데 이 시간에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지마는 주님에게 대해서 생각하고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다 각각 다르다 말이오. 그러면 다른데 각각 자기대로, 자기 정도대로 자기대로  이 시간 기도할 때에 주님을 생각하는 요대로의 정도를 계속하는 그것이 주님과  자기로서는 동행입니다. 동행이오. 요 동행이 되면 차차 차차 자꾸 주님과  밀접한 동행, 또 범위 넓은 동행, 또 깊은 동행, 더 지성적이고 더 유식한 모든  것이 구비한 이 동행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서 모든 것이 되어집니다. 요 에녹은  3백년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자녀 낳았으니까 가정생활 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렇게 모든 세상살이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한 동행이면 그것은 다 영생이 되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이 다를 때보다 그 사람의 정도로서 기도할 때는 좀 조심이 더  되고, 기도할 때에는 죄를 안 짓고 싶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그때에 기도를, 하나님 앞에 기도 할 때에 자기의 마음이나 모든 생각이나  소원이나 갖추어진 갖춤 이, 자기 갖추어짐이 그것이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 앞에  기도하기 때문에 그렇게 갖추어 졌으니 자기가 그만치 갖추어진만치 자기 모든  평소의 생활에 주님을 사모하고 상대하게 되면 그것이 주님과 동행입니다.

 그러면 모든 시험이 다 들어오지 못하고, 자기대로는 시험이 들어오지 못하고  또 자기대로는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 다른 생각이 들어오면 그걸 못 들어오게 하려고 자꾸 이래  애를 쓰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그걸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그냥 쫓아내려  해야 안 되니까 어띤 사람은 머리를 흔들며 또 그것 잊어버리려고 '주여!'  이러면서 머리 흔들면 그 생각이 뚝 달아나 버리고, 어떤 사람은 '쉭!' 또  이러면서 그 생각을 물리치려고 하고 어쨌든지 그 생각을 물리치고 주님과의  접하려고 할 때에 애를 쓴다 그말이오. 그와 같이 주님과 동행하려고 애를 쓰게  되면 그것이 바로 주님과 동행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536 하나님, 진리 사람을 위하는 생애/ 고린도후서 5장 15절/ 1984. 7. 15.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1
535 하나님과 3가지 기도/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1988. 4. 3.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1
534 하나님과 동거 동행의 비결/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 1989. 6. 4. 남지권찰회 선지자 2016.01.01
533 하나님과 동거동행/ 창세기 6장 1절-22절/ 1981. 5. 20. 수저녁 선지자 2016.01.01
532 하나님과 동거동행/ 창세기 6장 1절-22절/ 1981. 5. 18. 월새벽 선지자 2016.01.01
531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4. 11. 23. 금저녁 선지자 2016.01.01
530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1. 6. 20. 토새벽 선지자 2016.01.01
529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1절-20절/ 1981. 6. 19. 금저녁 선지자 2016.01.01
528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4. 9. 28.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02
527 하나님과 동행/ 말라기 3장 10절-12절/ 1984. 10. 31. 수새벽 선지자 2016.01.02
526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3장 15절/ 1981. 5. 17.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
525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4. 11. 19. 월새벽 선지자 2016.01.02
524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1절-32절/ 1984. 11. 25.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02
»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2. 1. 29. 금새벽 선지자 2016.01.02
522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4. 12. 4. 화새벽 선지자 2016.01.02
521 하나님과 동행/ 로마서 12장 1절-2절/ 1980. 4. 16. 수새벽 선지자 2016.01.02
520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5. 7. 28.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
519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6장 9절-12절/ 1988. 4. 10.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
518 하나님과 동행 열 가지/ 창세기 5장 1 절-32절/ 1984. 11. 23. 금새벽 선지자 2016.01.02
517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 유다서 1장 5절 상반절/ 1981. 5. 27. 수저녁 선지자 2016.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