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

 

1984. 12. 4. 화새벽

 

본문 : 창세기 5장 21절∼24절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우리가 믿는 일에 있어서 깨달은 것이 다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저  사람에게 다 깨닫게 해 주시는 그 은혜가 달라서 이 사람의 깨달은 은혜와 저  사람의 깨달은 은혜가 서로 교류가 돼서 서로 사귐으로 원만하고 온전함을  이루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비유하시기를 장터로 비유했습니다.

교회를 장터로, 복음 운동을 장터로 비유했습니다. 장터에는 여러 사람이 제  각각 가지고 온 한 물건을 가지고 모든 물건을 다 바꿀 수 있는 것이  장터입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온 목사님 한 분이 요 부근에 와서 설교하셨다 하는데 그  녹음을 사왔습니다. ○○○집사님을 보내서 '듣고 그래 녹음을 해 가지고 오라'  이랬더니마는 녹음이 잘못됐는데, '거게서 녹음을 해서 판다고 해서 내가 신청을  해 놨습니다.' 했는데, 그 녹음 테이프가 왔습니다.

 들어 보니까 아주 그분이 참 산 신앙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제가 많은  사람을 접하지는 못했지마는 미국에서 온 설교자 중에 스톱 박사라 하는 그분이  언제 한번 왔었는데 그분이 진리를 그분이 깨달은 좋은 점이 있습니다. 그분의  진리 깨달음에 대해서 그때 참 저도 은혜 받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다 많이  은혜를 받았고 이랬는데, 이번에 이 목사님은 진리를 깨달은 것도 깨달았지마는  거게다가 믿음을 보탰습니다. 진리를 깨달은 데의 그렇게 아주 장점보다 믿음을  가진 그 점이 장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이번에 교역자회에 다 같이 나눌라고, 계속 그저 그  테이프에서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으로 이번 교역자회는 끝날라고 그렇게  생각을 가졌습니다. 제가.

 뭐 다른 의논할 것도 있지마는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이  참 가속도로 다 진행이 되고, 또 성령이 안 오시고 우리 옛 사람들만 있으면  그만 서로 시비하느라고 머리만 아프지 아무 일이 안 됩니다. 그래서 그래 하고  있는데. 엊저녁에 또 물으니까 모든 사람들이 오늘 새벽에는 제가 증거하는 것을  듣고 싶다고 이래 해서 또 이게 하나님의 뜻인가 해서 오늘 아침에 제가 설교를  하기로 했습니다.

 설교하기로 했는데, 본교회에서는 지난 주일에는 어제 아래 주일에는 누가복음  16장에 있는 홍포 입은 부자와 나사로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 하면서 하나님의  도리를 연구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전하고 싶었었는데 그보다도  아무래도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 더욱더 필요하겠다, 우리 교역자들이 치료함을  받는 데에 이 말씀이 더욱 급급하고 또 새로워지고 힘을 얻는 데에 더 급급하다  이래서 이 말씀을 증거하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알기는 아는 일입니다.

 에녹은 죽지 않고 산 채로 승천했습니다.

 그 앞뒤에 보면 아담이 낳은 그 자손의 계보가 기록돼 있습니다. 거게 보면,  3절에 보면 '아담이 자기 형상,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이렇게 거게 셋이라는 사람이 아담의 아들로 되어  있습니다.

 녜, 셋은 아담의 아들이지마는 성경에 기록한 대로는 가인이 있었고 아벨이  있었고 셋이 세째 아들인데 가인과 아벨은 기록되어 있지 많고 셋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담의 자손의 계보이기 때문에, 가인도 그는 아담의 믿음의  자손에 계보에 들 수가 없는 사람이요, 아벨은 계보에 들 수 있는 사람인데  아벨은 벌써 죽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계보가 된다면은 그 아벨에게서 자손이  나야 될 터인데 아벨은 죽었는고로 그 다음에 셋이 나서 계대를 했기 때문에  셋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아담의 낳은 자녀가 가인, 아벨, 셋 그 외에도 많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이나 예수님의 계보를 기록할 때에 신앙 계보를  기록했는고로 거게 빠진 사람들도 많고 또 친손으로 외손으로 이렇게 건너간  것은 그 신앙, 사람 보기에는 그렇지마는서도 신앙 계통으로는 그대로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게 셋이라고 기록한데 대해서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신신학자들은 자꾸 이런 점을 가지고 사람들을 어지럽게만 만들라고 해서  어쨌든지 성령의 정확무오성을 요동시킬라고 하는 그런 것이 있는 것이니까 그런  미혹을 받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거게 보면 모든 사람이 다 출생하고 난 다음에는 의식주 하고 자라갔고 또  자라가다가 보면 결혼해야 됐고 결혼하다가 보면 또 자녀 낳았고 또 자녀 낳다가  단산이 되고 난 다음에는 자녀 낳지 못하게 됐을 때에는 죽을 때까지 먹고  마시고 이래 살다가 죽은 그것이 다 인생 살이였습니다.

 간단하게 기록됐지마는서도 우리 뭐 천인 만인이라 할지라도 모든 인생의  생활이라 하는 것은 여게 빠짐없이 다 기록한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자랄라고 하니까 먹고 마셔야 되니 자기대로 각 분야에서 노동을 해야 했겠고,  또 결혼하고 자녀 낳고 이렇게 양자손 할라 하니까 자기대로는 각 분야에서  노력을 했기 때문에. 뭐 이런 사업. 저런 활동 세상의 여러 종류, 인간 생활이  여러 종류가 있지마는 다 여게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다 나 가지고 의식주로 자라고 때가 되면 결혼하고 자녀  기르고 거게 소망을 가지고 이라다가 또 때가 되니까 다 죽어 버리고 이랬는데  에녹만 거게 들지 안하고 독특합니다.

 그래서 이 에녹에 대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나고 난 다음에 선천,  후천적으로 어떻게 뛰어났든지 못났든지 그것도 여게는 나타나 있지 않고 또 그  사람이 생활하는데 무슨 큰 정권을 잡아서 생활하는 사함도 있겠고 재벌가로  생활하는 사람도 있겠고 또 아주 비천하게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었겠고  무식하게 사는 사람도 있었겠고 뭐 자손이 없는 사람에게 있었겠고 많은  사람에게 있었겠고 있었지마는 그거는 통틀어 다 도매입니다. 도매로 전부는 다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 하는 것이 그것이 다 전부 도합입니다.

 그런데, 이 에녹은 그들과 다른 것이 뭐이냐? 다른 것은 그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하나만 다릅니다. 동행하는 그것이 모든 사람과 달랐습니다.

다르니까 그 결과가 또 모든 사람들과 다른 것은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에녹은 죽지 아니하고 산 채로 하나님께서 데려 가셔서 승천했습니다.

 이것을 또 악령은 우리를 유혹시켜 가지고서.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일생 동안  종 노릇 하는 자를 놓아 주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죽음이 없는  사람, 죽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죽는 사람은 벗어 버리라고 이렇게 주님이 이  일위해서 오셨고 또 이렇게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의 구비성을, 구비를 다 베풀어  주시고 또 이렇게 교훈하셔서 하셨는데, 악령은 우리를 유혹시켜 가지고서,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에게 '예수를 믿되 죽지 않는 길이 있다' 이라니까, 죽기  두려워하고 천국은 가고 싶은 매 두 가지 다 좋은 길이 있으니까, 죽지 안하고  천국 갈 수 있는 길이 있으니까 그 길이 참 좋겠다 이래 가지고서,  뭐 천년성이니 또 ○○○씨가 주장하는 거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거 여호와의  증인에서 주장하는 거, 그런 데서는 다 죽지 안하고 구원얻는 그것을 말을 하고  또 부활을 말하되 땅 부활과 하늘 부활을 말해 가지고 하늘 부활은 벌써  지나갔고 땅 부활뿐이다 이렇게 해서, 어쨌든지 육신의 소망을 가지도록, 육신의  소욕을 가지도록 악령은 여러 면으로 노력을 해 가지고 이 모로 저 모로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 소욕 소망을 가지도록 그렇게 기울어지게 하려는 것이  그것이 악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것을 근거할 때에 이 에녹과 엘리야를 들고서 '산 채로 승천했기 때문에 안  죽고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그러면 죽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은 다 그 사람들은 이 산 채로 승천하는 이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내가 대구, 대구 집회 가 가지고, 지난번에 대구 집회 가 가지고서도  어떤 사람들이 그거 가지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 했는데 자기네들 마음에는 어떻게 됐다고 생각하느냐?' '그 아브라함은  우리의 구원의 떡잎. 식물로 말하면 밑의 떡잎 같이 그저 우리 구원을 위해서  계대해서 나왔지 그들은 다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구원 얻는데 이르지 못하고  다 준비만 하고 주님 재림 때에 안 죽고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만이가 구원이다'  하는 그것을 담대히 말했습니다. 목사 두 분인가 세 분인가 와 가지고 저한테  지난번에 대구 집회에 질문을 하는데 그렇게 말을 해서 그게 아니라는 그 말을  해 주니까 이제까지 깊이 박혀서 그것 가지고서 지금 세월을 내고 사람들을  이끌어서 인기를 끌고 사람들을 모으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그걸 쉽사리 받아 들이지는 안하고 '그저 그런가' 하는 것을, 그저 반신반의로  그렇게 하고 돌아가는 것을 봤었습니다.

 그러기에 여게 에녹이 산 채로 승천했다는 것은 하나의 계시의 기관으로  우리에게 계시해 보이는 계시 기관으로 하나님이 쓰신 것입니다. 거게는 뭣을  가리키는고 하니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죽음을 면하고 살 수 있다 하는 그것을  형식으로 계시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다 그와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몇 해를  하든지 파는 가운데에 하나님과 동행한 그 순간이든지 찰나든지 또 무슨 한  시간이든지 하루해든지 일 년이든지 평생이든지 하나님과 동행 하는 고 토막만  우리의 기능은 죽지 안하고 살고 또 고 토막에 관련된 모든 것들만 다 만물들도  회복시킬 때에 구원 얻는다는 것을 우리가 뭐 얼마나 강조하고 날마다 우리가  배우고 또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이 안 되는 때는 헛일이라 하는 것을 여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말로, 어쨌든지 자기가 믿음을 지키는 고 믿음으로 현실을  통과한고 현실에 관련된 고 기능만 죽지 안하고 영생이 됐다 하는 그것을 에녹의  요 사실 아니라도 다른 성경에서 우리가 그렇게 깨닫고 또 믿고 노력을 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계시 기관으로 에녹이 산 채로 승천했고, 또 엘리야도 계시  기관으로 산 채로 승천했기 때문에, 사람이 몸이 죽지 아니하고 그대로  승천한다는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동행에서만 죽지 안 하고 승천한다 하는  그것을 보여 준 하나의 계시입니다.

 요한계시 20장에 보면은 첫째 부활에 참예한 사람이 복이 있다 이랬는데,  부활은 사망의 부활 생명의 부활 또 예수님의 부활 그뿐이지 부활에 참예한  사람들이 하늘나라 가고 복이 있지 부활하지 안한 사람은 하늘나라 못 간다는  것을 거게 은연중에 결론을 지워 놓은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안 죽고 산 채로 주님을 맞이하거나 하늘나라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생각을 완전히 버려야 됩니다. 우리가  죽어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바꾸어지고 또 욕된 것이 영화로운  것으로 바꾸어지고, 시간과 공간에 모두 다 제한받는 몸이 무제한의 완전으로  바꾸어지고 이렇게 다 이런 저런 모든 것의 다 제재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제재받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안 죽고 예수님을 산 채로 맞이할 수 있다 하는 그런 욕망은 마귀가  주는 욕망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욕망은 아주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죽는  것이, 죽는 것이, 깨닫지를 못해 그렇지 죽는 것은 헌 옷을 벗어 주고 새 옷을  받아서 갈아 입을라고 착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에는 영은 영원히 죽지  안하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영을 말하는 것인데 영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또 우리의 마음도 성화된 마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영과 육이 한꺼번에 하늘나라 가는데,  육에는 이 고기 덩어리까지 가지 안하고 고기 덩어리만 남겨 놓고 마음이라는  육, 마음이라는 신령한 육 그 육과, 마음이라는 그 육은 벌써 신령해졌기 때문에  그는 공간이나 시간이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또 그는 늙고 쇠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화된 마음의 기능을 입고 영이 그대로 하늘나라에  가서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그 마음이 활동을 했습니다. 거게서  홍포 입은 부자로 더불어 대화할 때에 그 마음이 활동을 했고 홍포 입은 부자도  또 그 마음이 활동을 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도 세상을 뜰 때에 영과 혼이 함께  그는 세상을 떠나게 되고 또 믿는 사람도 영과 혼이 함께 떠나는데, 혼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우리의 마음의 위치에 가지고 있는 마음의 부분들을 가리켜서  혼이라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령이 사이비한 것을 가지고 어쨌든지 사람들로 하여금 땅에  있는 소망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 그것이 악령의 역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악령이 땅에 있는 소망을 가지게 할라고 백방으로 노력을 합니다. 또 육체의  소욕. 한 말로 말하면 첫째 아담에게 속한 그 사람에게 대한 욕망을 가질라고,  그것이 옛사람의 욕심인데 옛사람의 그 욕심을 자꾸 줘서 우리 마음과 우리 몸을  옛사람을 자기인 줄 알고 착각해서 옛사람에게 복종하고 옛사람대로 사는 것이  제 마음대로 살고 제 몸에 유익하도록 사는 것인 줄로 이렇게 착각하도록  만들려는 것이 그것이 악령의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땅에 있는 소욕, 또 죽지  안하는 소욕 그것이 뭐이냐? 전부 다 육신의 소욕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런 유혹을 받지 안해야 됩니다. 이 에녹이 산 채로 승천하  것은 다만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데려 가셨다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과 동행에 죽지 안함이 있지 다른 데는 죽지 안함이 없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그는 산 채로 데려갔습니다. 또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그는 모든 우주를 자기가 기업으로 상속했습니다. 또 아브라함도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그는 참 모든 신자가 다 자기의 자손이 돼서 자손의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에서 모든 생명 역사가 있고, 성공이 있고,  구원이 있다 하는 요것을 우리는 굳게 잡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늘 많이 계속했었는데도 우리 교인들은 듣고 잊어버리고 듣고  버리는 그런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모든 은혜를 이렇게 주시는데, 보면 땅에 속한 그 은혜를  자지고서 사람들을 움직이고 또 사람들의 마음을 그렇게 인기를 끄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땅에 았는 소욕을 주면서 그 소망으로 그래 하는 일이  많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면 말씀 가지고서 말하는 일이 많고,  우리는 뭐 하나님께서 참 우리가 강퍅한 것만치 구비한 은혜를 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아니고 또 영감을 우리가 말하고 또 예수님의 피를  말하고 참 이 세 가지가 증거하는데, 이 셋은 하나라는, 세 가지를 힘입어야  된다는 거 이것을 말하지마는서도 하나 가지고도 됩니다. 말씀 가지고도 되고  이렇게 다 되는데, 우리 한국 교회 사람들은 참 별스럽게 변동성이 많고 뭐 이중  삼중 십중적인 그런 외식이 많기 때문에 이 한국 사람을 구원하기가 참 힘들고,  그러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이 복음은, 한국을 구원할 수 있는 복음이라면  세계를 구원하는 데는 대단히 용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이 하나님과 동행,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일을 또 이번에는  한 시간 증거한다면 이 말씀을 증거해야 되겠다 해서 증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이라 하는데 대해서, 하나님과 동행이면 성부와 동행인가, 성자와  동행인가, 성령과 동행인가 이렇게 생각들 가지지마는 하나님과 동행이면 성부와  동행이요, 성자와 동행이요, 성령과 동행이요, 그리스도와 동행이요, 예수님의  신성과 동행이요, 예수님과 동행입니다. 예수님은 신인 양성 일위가 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라고 했지마는서도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면 아버지 동행도 성령 동행도 안 됩니다. 왜? 신성에 있는 그 인성, 인성이  우리의 중보자입니다. 인성이 아니면 우리 중보가 없습니다. 인성이 우리의  중보자입니다. 인성이 중보자인데, 인성이 단독 중보자가 되느냐? 인성이 신성과  일위가 된 그 역사로써 우리의 중보의 공로가 설정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과 동행한다, 주님과 동행하라는 말이나 성부와 동행하라는  말이나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말이나 성자와 동행하라는 말이나 그리스도와  동행하라 말이나 성령과 동행하라는 말이나 다 같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게 대해서 우리가, 삼위일체라는, 위는 서이나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확고하게 우리는 깊이 인식하고 있어야 됩니다.

 이래서, 아버지를 부를 때에, 내나 아버지 부르고 나니까 좀 주님에게 대해서  좀 섭섭하다 좀 먼 거 같다 이래서 '아버지' 또 '주님' 또 그라고 나니까 한  분만 뺏으니까 또 섭섭하다 해서 '성령님' 또 그라고 나니까, 그리스도를 많이  증거했는데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것 같아서 '그리스도님' 또 이래 가지고 있는  대로 다 불러서 이래 하는 그것이.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좋습니다. 이  주님이 그리스도로, 성부로, 성자로, 성령으로. 또 예수님으로 이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 가지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하는 것을 자기가 한번  사귀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하는 것은 좋지마는서도 한 번만 불러 가지고는 마음에  만족이 없고 어느 한 부분을 상대하는 것같이 되어짐으로써 그렇게 부른다는  것은 그것은 회개를 해야 됩니다. 그거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서 사망을 이겼습니다. 또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서 기업을 도적맞지 안했습니다. 천하에 있는 인간들이  오만 방편 다 가지고서 자기 것이라 했지마는 마지막에 다 도적맞았습니다. 다  홍수에게 다 뺏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것으로써  그는 우주를 자기 것 삼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을 정죄하고' 그러면  세상을 이겼다, 그 말이오. 세상을 정죄했다 말은 세상을 이겼다 말이오. 세상을  이기고, 세상에 모두 다 생존 경쟁으로서 소유 경쟁 모든 자기의 기업 경쟁이  있었는데, 과학으로 뺏들고 뭐 학문으로 뺏들고 정치로 뺏들고 오만 걸로 서로  과학 쟁탈전이 났는 데,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것 가지고서 완전히 다  승리하고서 하나님의 후사가 됐다 이랬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다 기업으로  받았다 그말이오. 하나님의 후사 됐다 말은 하나님의 것을 완전히 받았다  그말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서 자손 성공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을 우리가 하는 데에서 모든 성공이 다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데에서는 전체는 다 망하는 거와 죽는 것밖에 없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제일 중요하다 하는 그것을 오늘 아침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목회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서 되어집니다. 뭐 사업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서 되어집니다. 그러면, 어떤 회사의 사장이 그 회사를 경영할 때에  하나님과 동행하면 성공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전지자가 되는 것이요,  전능자가 되는 것이요, 완전자가 되는 것이요. 모든 것을 다, 하늘과 땅의 것을  다 소유한 자가 되어졌기 때문에 그 자기를 통해서 얼마든지 모든 것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이래서, 이것을 먼저  우리가 굳게 잡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서만 성공이 있다. 하나님과 동행해야  되겠다 이것을 놓지 말고 요 사람이 돼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동행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많이 배웠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라고만 하면 어떻게 동행 하는가 이래  돼지면. 그 실천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런 방편을 모르면 문제가 되겠는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편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는 첫째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사모라 말은, 사모라 말은 생각이라는 말과 좀 다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인데. 생각한다고 하면은 자기는 다른 뜻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유물주의자가 하나님을 생각할 수도 있지마는서도 하나님을  사모하라 그 말은, 하나님이 제일 좋고. 내 마음과 내 뜻과 내 소망과 내 취미와  내 정과 내 사랑과 내 욕망과 내 본질 본성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제일 좋기  때문에 사모하는 요 사모를 가지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요 사모라는 말을 쓸 때에는 참 결혼의 첫사랑이라고, 아마 결혼을 해서 제일  처음에, 결혼을 처음에 하고 난 다음에 결혼한 얼마 동안에는 서로 부부가 다른  모든 거 다 거게 생각이 멸어지고 부부 사모하는 그 사모가 그들에게는  전심이라고 할 것이고 전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무슨 다른 것이  아니고 자기가 피차에 세상에 있는 모든 남은 때의 전소망이 그 상대방에게 있고  또 남편은 아내에게 있고 아내는 남편에게 있고 이러기 때문에, 소망적으로나  애착적으로나 애연적으로, 연애적으로나 또 자기가 모든 취미적으로나 어쨌든지  모두가 다 남편, 아내 그가 제일 자기가 제일이기 때문에 우연히 자연히 옮길 수  없게, 암만 잊어버릴라 해도 잊어 버려지지 안하고 생각이 나지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사모라 그렇게 말합니다.

 어쨌든지 우리는 주님을 사모하는 사모의 노력을 이것을 힘을 써 가지고서  주님이 사모되는,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사모한다고 해도 이성, 이성과 뮈 또  자기의 소욕과 자기의 정서와 자기의 모든 본능이 이것이 각각 천지만엽과 같이  이렇게 모두 떨어져 가지고 부스러기로 떨어져 가지고 있으니까 역부로 이래  생각해서 주 모아 가지고 주님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성 비판으로 생각해 불  때에 '아무래도 주님보다 뭐 더, 주님 외에 사모할 이가 없다. 주님 한 분 외에  사모할, 사모는 주님만 사모하겠다. 또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주님이시다.

가치있는 것 또 주님이시다. 신실하신 이도 주님이시다. 또 진실한 이도  주님이시다. 나를 참으로 참 애끼시는 이도 주님이요 사랑에도 주님이요  사랑하고 애끼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의 능력을 가진 이도 주님이시다.' 이렇게  저럴게 모든 면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주님 외에는 사모할 이가 없다' 이렇게  되어지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연습해서 이제는 본능적으로, 마치 결혼의 첫사랑에서 그  부부가 사모하고 거기에만 유일한 욕망을 가지는 것처럼, 철없는 소년들이 서로  친구를 사귈 때에 자기 부모가 심부름 시키는 거, 고만 심부름 안 하고 가면은  뒤에 가서 매 맞을 것도 잊어 버려 버리고 낭파될 것도 잊어버리고 그만 동무  만나면 뮈 정신없이 그만 시간이 다 지나가 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년의  우의, 소년의 우의가 본능적으로 되는 것처럼 주님 사모가 이렇게 돼서 주님을  아무리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고, 안 생각할래야 안 생각해 수가 없고 사모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도록 주님 사모가 계속되는 이 일을 우리가 노력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때에는 성경에 주님은 어떠한 주님이라, 주님은 내게 대해서  어떻게 해 주시는 주님이요, 어떤 책임을 가지신 주님이요, 책임 이행에 신실한  주님이요, 어면 큰 어떤 계약을 맺어 주신 주님이요, 거게 대해서 상대하실  주님이요, 나의 모든 부족한 걸 채워주실, 성경에 주님은 어떤 주님이시라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 신약과 구약에 있는, 신약이라 말은 새로 그  다음번째 된 언약이요 구약은 처음에 된 언약인데, 이거 모두 다 하나님과  더불어 다 언약하는 그 언약이 다 기록되어 있는 것이 성경인데, 그 언약을 자꾸  나벼 봄으로써 주님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사모가 끊치지 않는 것이 주님과 동행입니다. 주님사모가  끊쳐지지 안할 때에 거게는 우리의 생명적으로도 다 영생이 됩니다. 에녹만  영생이 아니고 주님 사모가 끊쳐지지 안하고 계속될 때에, 우리의 모든 마음의  기능이나 몸의 기능이나 이 심신 구원이 우리가 이루어 갈 건설구원인데 이  심신의 기능은 주님을 사모할 때는 이는 다 영생 됐습니다. 그 기능은 살았지 그  기능은 죽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생은 토막 토막입니다. 고 부분 부분이  영생하고 고다음에 또 죽습니다. 그 다음에 또 주님과 동행 안 하면 죽는  것입니다. 동행할 때만 고때의 고 기능은 영생으로 살아나 버렸습니다.

 이래서, 첫째가 사모입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이 일을 우리가 놓지 안 해야  됩니다. 그러면, 사모하는 연습을 자꾸 해야 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연습을  자꾸, 주님과 동행하면, 왜? 주님과 동행하고 사업은 어떻게 할라고? 가정생활은  어떻게 할라고? 경제생활은 어떻게 할라고? 자기 공부하는 학업은 어떻게  하려고? 그것이 다 주님과 동행하면, 그 분이 없는 가운데 엿새 동안에 모든 건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분만 동행하면 다 됩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동행하면 인생 문제가 세 가지 문제가 제일 큰  문제인데 그 문제가 다 해결되니까, 뮈 주님 동행이면 다 되니까, 주님 동행이면  공부도 잘할 것이고 사업도 잘될 것이고 모든 거 잘될 수 있습니다. 왜? 주님과  동행한 사람이면 전지 전능을 가진 사람인데 그 사람이 작기가 해야 될 일을 못  할 것이 뮈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과 동행이 끊어져 버리면 그만 그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과 동행될 때에는 우리는 주님의 입이 되고 주님의 입이  되고 주님의 다리가 되고 주님의 모든 지체와 몸이 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과 동행함에 있어서 첫째는 주님과 사모가 끊치지 않는  것이 이것이 동행이다. 그러기에 주님 사모가 끊어지지 안하도록 우리는 자꾸  노력을 해야 되겠다.

 그 다음에는 주님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쳐 놨기 때문에.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계약이요 진리입니다. 한 말로 말하면 진리요 한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요 한 말로 말하면 우리에게 대해서 복음입니다. 이런데.

이 말씀과 동행합니다. 말씀과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동행할 때에는 주님 사모는, 주님 사모는 의례히 돼 가지고 있는 것이고  동행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동행할 때는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이요 말씀을  궁구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이요 또 그 말씀대로 말씀과 동행할라고 말씀을  모시고 말씀을 떠나지 안할라고 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입니다.

 또 내 눈이 주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입니다. 내가 눈으로 뭘  볼라 할 때에 '이렇게 보는 것은 성경에 틀렸다' 했으면 안 보는 것이 주님과  동행이요, '아, 이것은 자세히 봐야 되겠다' 하면 보는 것이 주님과 동행인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을 볼 때에 '여게서 주님이 왜 나에게 이것을 보여 주느냐?  아, 이거 보라 하는데 이거 안 봐야 되겠다' 처음에는 안 봐야 되는, 안 봐야  주님과 내 눈이 동행하는 수도 있고 또 봐야 동행하는 수도 있고, 그러나  장성하면 안 볼 거 없어. 보이는 거는 다 봐야 됩니다. 자기에게 닥친 거는 다  봐야 됩니다. 왜, 주님이 왜 이것을 나에게 보여 주시는가? 보여 주실 때 보여  주신 그 주님의 목적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아, 주님이 요것 때문에 보여  줬구나.' 거게서 자기가 깨달아짐으로 세상을 알게 되고, 깨달아짐으로써 거게서  자기 옛사람을 알게 되고, 또 깨달아짐으로써 그것을 배격해야 되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깨달음으로써 무서운 죄악 가운데에 그 죄악 속에 참 지극한 의가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캐서 내것을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눈으로 말씀과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귀로  하나님과 이 교훈과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안 들을 거는 안  들어야 되고 들을 것은 들어야 되고, 들을 때에 '요거는 귀신 말이로구나' 요거  들을 때에 '요거는 악한 동무의 말이로구나' 요거 들을 때에 '요거는 참 교훈해  주는 이 교훈의 말이로구나. 나에게 명령이로구나 나에게 책망이로구나' 고렇게  들을 때에 주님과 동행할 수가 있고,  또, 자기가 말할 때도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말할 때에 주님과 동행하는  말도 할 수가 있고 마귀가 동행하는 말도 할 수가 있고, 옛사람의 말을 할 때도  있고 새사람 말할 때도 있고, 새사람 말할 때는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와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니까 이 동행을 하는 것이  이것이 한 가지만 하면 권태나고 한 가지로만 하면은 자꾸 거게서 자꾸 되풀이  하기가 거석하니까 이거 주님과 동생활라 하면 이거 좀 뭣이 좀 너무 싱겁겠고  자꾸 그렇게만 하면은 이거 뭣이 좀 연결이 잘 안 되겠다 이래 싶으나 말씀과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입니다.

 또, 자기가 말씀과 동행하면, 말씀과 동행하면, 말씀과 동행하면 말씀만 보고  내가 깨닫는 것보다 더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보고 깨달으면  내가 처음에 깨달았는데 깨닫고 난 다음에 자꾸 보니까 그 말씀은 더  깨달아집니다. 깨달으면 그 말씀, 고 한 성구라도, 고 성구라도 더 깨달아지게  하는 것이 뭐이냐 하면 영감입니다. 또 이 말씀대로 내가 살아야 되겠다 하는  살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을 더 뜨겁게 해 주는 그게 성령입니다. 또 그  말씀대로 살라 할 때에 거게 관련되는 그 배경을 생각할 때에 하나만 생각했는데  이 면이 생각하면 한 면을 더 생각해 깨닫게 하는 것이 그거 영감인 것입니다.

자꾸 더 널리 생각하는, 뭐 성신의 감화가 별게 아니고 우리가 성신의 감화를  모르기 때문에 성신의 감화가 왔는데 다 성신의 감화를 그만 배척해 버럽니다.

그러면 성신의 감화를 내가 영접해서 자꾸 이렇게 성신의 감화와 동행하는 것이  그것이 동행입니다.

 또, 우리가 주님 앞에 대속의, 삼대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아, 주님이 나를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서 대형해서 내 죄를 다 없애고 사죄를 주셨으니 내가,  이렇게 사죄 주셨으니까 내가 어떻게 이 사죄의 공로를 잊을 수 있겠느냐?'  그러면 주님이 나에게 사죄 해 주신 그 모든 과정, 그 순서 주님이 나에게 사죄  해 주신 과정 그 순서를 생각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그러기 때문에  나는 이 사죄를 벗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이러니까 나는 죄로 더불어 싸워서, 주님이 죽기까지 해서 죄를 멸했기에 나도  죄를 멸하는 그 주님의 지체로서 살아야 되겠다 그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사죄와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시간이 없으니까 또  칭의와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주님의 대속의 화친으로 더불어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면 자연히 거게 대해서 '아, 감사합니다.' 감사가  나올 때에 감사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그라다가 보니까 '주님은 나에게 이렇게 하셨는데 나는 이래도 주님의 대속을  예사로 여기고 내가 이렇게 주님 앞에 너무 범함이 많습니다.' 사죄는  받았지마는 주님을 노엽게 한, 노엽게 한 노여움이 있기 때문에 그 노여움을  당신 앞에서 풀어야 되기 때문에 당신 앞에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는, 용서를  구하는 주님의 노를 푸는 그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이러니까, 이렇게 주님이 이런 주님인 것을 깨닫고 이 주님과  동행하다 보니까 의논할 것이, 뭐 무슨 사건이 있으면 목사에게 물을 필요가  없고 사건이 있으면 누구에게 가서 의논할 필요가 없고 가장 의논의 제일  능력있고 또 의논의 상대가 되어 주기에 능한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하고 하면  되니까 이제 모든 사정을 그분에게 고해 가지고서 '내 사정은 현재는 이렇고  이런데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분과 서로 상의하고 이래 담화하고 서로  의논하는 이 도고의, 도고의 기도가 그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라다 보니까 아무래도 내 약한 것도 알게 되고 그분에게 무한함이 있는 것도  알게 되고 그분이 나에게 주시기로 약속하고 주기를 원하고 계시니까 또  그분에게 다른데 구하는 것보다 그분에게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그말이오.

이렇게 하는 것이 그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과  동행하는 거.

 우리가 아가서에 보면은 그만 주님이 같이 있다가서 그만 주님이 아주 그만  빨리 달아나셨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을 아가서에는 많이 말했습니다.

이래서, 사랑하는 자가 찾는데, 내가 누워서 뭐 잠들고 있는데 뭐 지금 와  가지고서 나를 찾느냐고서,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다  옷도 벗었는데 뭣도 벗었는데 이렇게 말하다가 마음에 안 됐어서 옷을 입고 문을  열고 나가 보니까 간 곳이 없다. 그거 내나 주님의, 주님이 자기를 떠나는 그  흔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주님이 우리를 찾지마는서도 내가 찾을 때에 퍼뜩 당신을 상대하지  안하면 그만 가 버립니다. 이러니까, 노루와 사슴 같다 하는 것도 주님이 우리를  떠나는 형태를 말해서 그렇게 자기가 체험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가지 못하게 붙드는 것은 사모입니다. 내가 사모하면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못합니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자꾸 거머쥐고 우는데,  물론, 혹 우리들은 그럴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럴 수가 있지마는서도  주님은 떠나지 안해. 우리 부모보다 다르다 했습니다. 젖먹이는 아이 자기  태에서 난 자녀를 잊을지라도 나는 잊지 않는다 이랬습니다. 잊지 않는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을 사모하면 당신은 우리를 놓고 떠나지 못해.

당신을 붙드는 거는 우리가 무슨 어떤 걸로 붙들지 못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사모하는 것으로써 당신을 붙들 수 있습니다. 사모하는 자에게는 당신이 떠나지  못합니다. 날 사모하지 안하고 딴걸 사모하니까 '아 그거 좀 사모하고 그 동안에  좀 놀아라. 나는 지금 또 지금 볼 일 있어 가야 된다' 이러니까, 찾는 자에게  가야 되니까 사모하지 안할 때 에는 주님이 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신앙생활은 자전차 생활이라.' 이렇게 자꾸 계속  달리면 달려지고 그만 중단되면 그만 끝난다.

 이래서, ○○○ 목사님이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는데, 이단으로 정죄 받았는데  그의 내가 전기를 약간 읽어 봤는데 그때의 세계의 교회들이 이해를 못 해. 그  신령한 것을 이해를 못해서 그분을 이단으로 정죄했지 그분이 참으로 주님을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니까, 모두 다 그리 디리 모아들었는데 모아드니까  '저게 모아드니 우리 세 안 나겠다' 해 가지고서 아주 이단으로 정죄해 가지고  마구 매장을 시켜 버렸다 말이오. 매장을 시켜 버렸는데 그때만 해도 초기이니까  이단으로 매장할 때에 그만 매장을 당했다 그말이오. 미국 같은 나라는 지금  그런 일이 있으면 모두 다 이리 협조해 가지고 이라는데 우리나라는 ○○○  목사님을 이단으로 매장해 버렸습니다. 지금도 참 이 교회를 살릴 수 있는 복음  역사가 나오면 이단이라고 매장을 해 가지고 그렇게 할 것인 것입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까. '세상의 모든 황금이나 모든  권세나 이런 것을 얻어 가지고서 기쁨이 나오는 것은 그것이 옛사람이라.

하나님의 한 진리를 깨닫고 못 견뎌 하는 그게 새사람이라' 옛사람과 새사람의  정의를 그래, 얼마나, 그때에 뭐 주석 해 놓은 거 보면. 주석 내놓은 그 주석들  보면은 그저 참 진리에서 거리가 멉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들 하면 그렇지만 사도들도, 사도들도 예수님에게 대한 지식은  지금 우리들만치 가지지 못했습니다. 성경 기록이 특수했지. 왜? 우리는 모두 다  그 동안에 많은 역사적인 증거를 우리가 받아 가지고 했기 때문에,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례 요한을 여인으로 난 자 중에는 세례 요한이가  제일 크다 그 말은 예수님을 중심 한 성경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대해서 그  지식이 제일 제일 광대하다 그말이오. 세례 요한만치 아브라함도 몰랐소.

주님에게 대해서 몰랐소. 이사야도 몰랐습니다. 또 천국에서는 이보다도 더 낫다  이랬으니까 오늘 주일학교 학생들도 세례 요한보다도 예수님에게 대한 지식은 더  확고하게 더 광대하게 알고 있다 그말이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세대는 마귀  역사가 많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어찌 됐든 간에 이단이라고 말하면  참으로 이단도 있겠고 참으로 진리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가지 못하게 붙드는 것은 사모입니다. 우리가, 내가 사모하고,  내가 사모하고. 사모해도. 사모해도 자꾸 붙들고 사모만 하고 있으면 당신이  '야, 너 날 뭐 할라고 붙드노?' '내가 당신이 좋아서 붙듭니다.' '좋아서 붙드나  나는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뭐 너 할 일 없으면 나는 가야 된다. 그러니까 좀  나를 놓아라' 이랄 것이라 말이오. 그러나 할 일이 자꾸 있으면 당신이 못 가요.

자꾸 부탁하는데 어떻게 가겠습니까? 당신을 사모로 붙들고,  당신을 믿음으로 붙듭니다. 당신을 믿음으로. '당신은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이런 분이 나에게 이런 책임을 졌기 때문에, 나에게 모든  걸 좋은 것을 다 책임지신 분이기 때문에. 전지전능 분이기 때문에, 창조주이기  때문에, 자존자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놓지  못합니다.' 당신을 믿으니까 믿음으로 당신을 붙들 때에 당신은 떠나지를  못합니다. 성경에 모두 보면은 주님은 어데 가서 계셨는가? 믿는 자에게  계셨습니다. 주님은 할 일이 어데 있는가? 믿음의 하나님이라 믿는 자에게 가  가지고 하나님은 일을 했습니다. 그를 떠나지 못해. 내가 믿을 때에 당신은 나를  떠나지 못합니다.

 내가 믿기는 믿으니까, 믿고 보니까 그분밖에는 내가 소망할 분이 없습니다.

그분만 바라보지, 그분에게만 소망 두지 딴 데는 소망 둘 데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이러니까, 그분에게 이것 저것 전부 소망을 가지고. 내게 모든 게  모자라는데, 모든 것이 모자라는데, 아무것도 없는데, 당신에게 속해서 당신이  나에게 줘야 되는데 '이거 주십시오' 이거 당신을 소망하는데 당신이 어떻게  그것도 주지 안하고 떠나겠습니까? 계약을 우리에게 해 놨는데. 계약을 우리에게  해 놨는데 이 계약한 '이걸 주십시오' 이거 다 이거 소망하는데 그걸 주지 안  하시고 당신이 떠나시 면은 여호와가 아니라 그말이오. 여호와 아니기 때문에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분을 소망하는 것이 당신을 붙드는 것이오.

 이러니까 내가 그분을 소망하니 그분에게 모든 걸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내  모든 거 다 해 주십시오' 이거 해 줘야 됩니다. 맡기니까 그거 해 주기 전에는  못 떠난다 말이오. 그거 해 주고, 맡겨 놓고 내가 딴전 보면 하지만 맡겨 놓고  당신이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자꾸 해 주십시오 해 주십시오' 자꾸 지금 하고  있으니까 당신이 그거 다 해 줘야 떠나지 그러니까 내 구원을 완성하기 전에는  당신이 떠나지를 못하신다 그말이오. 소망하니까 떠나지를 못해.

 또 그분을. 이 험한 세상에 위험천만한 걸음이 우리 신앙 걸음인데, 이거  걸으면서, 위험천만한 걸음을 당신이 시키는 대로 이래 거석하면서 당신만  의지합니다. 당신만 의지하고 이것 저것 하는데, 당신만 의지하는데 예를 들면  지팡이만 의지해 가지고 이래, 그 밑에는 함정되는 뭐 천길 만길 되는 바닥인데  작대기 하나를 의지하고 이래 섰는데, 작대기 빼면 물에 빠져 죽는 것인데.

작대기처럼 당신을 의지하고 있는데 당신이 어떻게 훅 떠나서 물에 빠져 죽구로  못 떠난다 그말이오. 떠나지를 못해요.

 당신이 이러니까, '나 할게 뭐입니까?' '네가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대로  시키는 대로 딱딱 복종하는데, 복종하는데 복종하면서 '나 이거 복종하는데 나  혼자 가면 죽습니다. 복종하는데 당신이 도와 줘야 됩니다.' 의지하면서  복종하고. 바라보면서 복종하고. 믿으며 복종하고 이래 복종하는데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못 떠납니다.

 이라면서 그저 당신 한 분만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잘 해줄까 하면서  눈이 깜짝 깜짝 하고 당신 한 분만 바라보고 모든 걸 당신 한 분으로 전부를  삼고 이래 깜짝 깜짝 하며 당신을 태산같이가 아니라 참 말로 비교 못 할 만치  이거 전폭으로 이래 당신을 믿고 눈만 깜짝 깜짝 하며 당신만 바라보고 있는데  '에이 내 모른다' 집어던져 버리고 어떻게 가겠습니까? 그런 주님 아니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붙들고 주님을 놓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면  우리는 모든 것이 성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행하는 일을 자꾸 연습해야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가면서도 길을  가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주님 사모하는 데는, 주님이 그분이 우리에게 거치지를  않습니다. 무슨 주먹덩이만한 형체라도 가지고 있으면은 우리가 활동할라 할  때에 거치지마는서도. 콩알만치라도 형체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 간에나 뭐  쓸개에나 와 가지고 거치지마는서도 콩알만한 그 형체도 가지지 안했소. 안  가지신 분이 전지 전능의 그 완전으로 우리의 전부로서 계시니까, 형체 없이  우리에게 계시니까 내가 하나님과 꼭 같이 됐다 그말이오.

 그런고로, 사모를 놓지 맙시다.

 그러고 전도지를 열심히 전하십시오. 전도지를 전하는데 물론 안 믿는  사람들에게 전도지 전하는 것도 좋지마는서도 전도지 믿는 사람에게 인사로  전하는 전도지를 꼭 잊지 말고 전하십시오.

 전도지를 전할 때도 자기는 생각하고 전하고 받을 때도 생각하고 받고, 받을  때마다 우리가 생각하는 거, 받을 때 '내가 회개할게 뭐꼬? 회개할 것을 먼저  생각하고 회개할 것이 깨달아지지 안하면 '주님이여 회개할 은혜를 주옵소서'  회개는 하나님이 꼭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안 주시면 회개 못 합니다.

'회개할 은혜를 주시옵소서. 회개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눈물도 하나님이  주셔야 눈물이 나오지 하나님이 안 주시면 우리 강퍅한 자에게 눈물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받고,  '주님이여 주님이 내게 어떤 진노를 하고 계신지 내가 눈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진노를 볼 수 있는 내 눈을 밝혀 주옵소서 기도하면서,  그러면, 그때 생각하면 '주여, 내가 이 일은 주님의 노여움을 이런 노여움을  끼쳤습니다. 이런 노여움을 끼쳤습니다. 내가 모르면 주님의 노를 끼치고 있는  것을 나에게 알 수 있는 볼 수 있는 내 눈을 신령한 눈을, 심령의 눈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옵소서. 주님이 내게 얼마나 진노해서 나에게 지금 징계하고 있는데  나는 징계를 모르고, 징계를 모르고, 징계는 회개하면 되는 것인데 징계를  모르고 원망 불평하고 낙망하고 비관하고 하는 이 주님의 징계를 보는 눈을 밝혀  주옵소서' 그러면, 이거는 다 됩니다.

 회개하는 눈물이 있어, 주님의 진노를 보고 풀 수 있는 공로가 있어 주님의  징계를 회개하는 방편이 있어 이라면 다 안 됐습니까? 이러니까 그 전도지를 꼭  전하십시오

 그래서 이 서부 교회서는 이번에 성탄 때에 어떻게 했느냐? 그 전에는 떡국  잔치를 했는데 을해는 떡국 잔치를 하지마는서도 한자리에서는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는 나누어서 떡국 잔치를 하는데 할 수 있으면 모두 구역장  단위로 하는 것도 복잡하니까 지권찰 단위로 하면은 한 오십 명씩 이래 될  터이니까 오십 명이 자기 처소에, 자기 집에서 도래도래 이래 가지고서 지권찰  거게서,  다 떡국 끓여요. 떡은 바짝 마른 떡 그거 안 돼. 떡국을 끓여 가지고서 자기  이웃이 '우리는 성탄입니다.' 하면서. 요새는 뭐 떡국 그렇게 탐하지 안해요.

옛날과 달라요. 다르니까. 떡국 그걸 하면서 그 사람들에게 성탄인 것을 알리고,  떡국이라도 한번 주면서, 한 번도 음식을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떡국이라도  나누면서 서로 사귀기 위해서 청할 때에 '우리 여기 떡국 있으니까 떡국 먹으러  오십시오' 이렇게 고자세로 해 가지고는 뺨 맞습니다. 이러니까 그리 말고  간청을 해 가지고서 '그저 이러니까 시간이 있으면 참 한번 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간청을 해 가지고서 그분들을 청해서 떡국을  대접하고, 대접하고 난 다음에는 '이 변변치 못한 이걸 가지고서 바쁘신데  오라고해서 대단히 미안합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저 때문에 시간을 내 주셔서  혹 하시는 일에 모두 다 낭파나 안 됐는가 모르겠습니다. 이거 참 미안합니다.'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자꾸 그런 사과를 하면서 그분들에게, 와 주시니  감사하고 또 이렇게 시간을 내 주셔서 나를 위해서 손해를 봤으니 미안합니다.

하는 이 중심이 마음에 있어 가지고 그들에게 사귀어져야 뒤에 후유증이 없지,  뒤에 참 잘못됨이 없고 고장이 안 나지 그렇지 않으면 고장납니다. 이러니까,  고것을 꼭 생각하십시오. 우리 벌써 권찰회에서는 여러번 말했습니다. 그 말을.

그렇게 하도록 하고, 그래서 뭐 그로써 서로 사귀기도 하고 좀 친근하기도 하고  그래 하도록 하고,  그래서 이번에는 전도지를 백만 장을 박으라고 했습니다. 백만 장을 박으라고  했는데. 백만 장을 박으면서. 인사하는 전도지는 십만 장이나 남아 있어요. 남아  있어서. 이십만 장하고 십만 장하고 삼십만 장 인사하는 전도지는 삼십만  장이고. 또 전도하는 전도지는 팔십만 장을 해 가지고서 요번 성탄 주일 때에 다  나눌 수 있도록 그렇게 할라고 생각합니다.

 이래서, 모두 다 자기 구역에 나누고 그 다음에는 모두 이렇게 배정을 해  가지고서 온 저 부산 일대에 전부, 우리가 부산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일대에  해서 다 이렇게 나눠 가지고서 뭐 그만 전도지가 '아이구' 욕을 하든지  뭐이라든지 전도지가 길가에 너술리 꽉 깔릴 수 있도록 모 두 다 뭐 똥닦이도  전도지, 개천에 내버리는 것도 전도지, 바람에 날리는 것도 전도지 어쨌든지  전도지,  이렇게 전도하고 난 다음에는 그 사람이 받아 가지고서 내버렸으면 그걸 다시  두 번 전하지 마십시오. 두 번 전하지 말고, 인사 전도지도 이래 한 번 전하고  난 다음에 그 받은 전도지 주지 마십시오. 그거는 인사를 내가 받았으면 받은  것으로 끝났지 내가 또 그것을 또 하는 것은 벌써 그 전도지 권위와 효력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전도지는 꼭 한 번만 써야 되지 두 번 쓰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전도지를 나눌라고 그렇게 이번에 우리 서부 교회에서는  경영을 하고 있습니다. 혹 다른 지교회들이 참고가 될까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짜든지 동행을 힘씁시다. 동행하는 데에서 우리는 깨끗해지고 새로워집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거게서 내 자신이 성화되는 것도 회개되는 것도 뭐 모든 일이  다 옳게 바르게 되는 것도 주님과 동행하는 여게서 제일 초점이요 요점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요것을 놓지맙시다.

 아마 지난 금요일날 와 가지고서 재독을 들은 분늘은 여게 대해서 설교를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날이 추워져도 저 대신 궁원에 가 가지고 기도하는 일 또 어디든지  기도하는 일 그걸 놓지 마십시오. 그거 놓으면 안 돼요.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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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536 하나님, 진리 사람을 위하는 생애/ 고린도후서 5장 15절/ 1984. 7. 15.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1
535 하나님과 3가지 기도/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1988. 4. 3.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1
534 하나님과 동거 동행의 비결/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 1989. 6. 4. 남지권찰회 선지자 2016.01.01
533 하나님과 동거동행/ 창세기 6장 1절-22절/ 1981. 5. 20. 수저녁 선지자 2016.01.01
532 하나님과 동거동행/ 창세기 6장 1절-22절/ 1981. 5. 18. 월새벽 선지자 2016.01.01
531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4. 11. 23. 금저녁 선지자 2016.01.01
530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1. 6. 20. 토새벽 선지자 2016.01.01
529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1절-20절/ 1981. 6. 19. 금저녁 선지자 2016.01.01
528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4. 9. 28.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02
527 하나님과 동행/ 말라기 3장 10절-12절/ 1984. 10. 31. 수새벽 선지자 2016.01.02
526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3장 15절/ 1981. 5. 17.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
525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4. 11. 19. 월새벽 선지자 2016.01.02
524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1절-32절/ 1984. 11. 25.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02
523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2. 1. 29. 금새벽 선지자 2016.01.02
»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4. 12. 4. 화새벽 선지자 2016.01.02
521 하나님과 동행/ 로마서 12장 1절-2절/ 1980. 4. 16. 수새벽 선지자 2016.01.02
520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5. 7. 28.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
519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6장 9절-12절/ 1988. 4. 10.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
518 하나님과 동행 열 가지/ 창세기 5장 1 절-32절/ 1984. 11. 23. 금새벽 선지자 2016.01.02
517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 유다서 1장 5절 상반절/ 1981. 5. 27. 수저녁 선지자 2016.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