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


선지자선교회 1985년 7월 28일 주후 

 

본문 : 창세기 5장 21절∼24절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오전에 증거한 말씀입니다. 뭐 녹음을 해도 별 다른 게 없이 꼭 그저 그 말씀  범위 내에서 증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하는 것이  나에게 생명의 은혜가 안 되면 율법의 심판이 되는 둘 중에 하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내가 믿고 그대로 행하면 복음이 됩니다. 그대로  행하면 행동도 살고, 또 행한 마음의 기능도 살고, 몸의 기능도 살고 거기 속한  모든 것이 다 살고, 관련된 만물도 다 살아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지 안하고 행하지 아니하고 알고만 있으면 이 말씀은 우리를 심판하는 율법이  됩니다. 그러기에 알고 행치 안한 것이 죄라고 그렇게 신약에는 똑똑히  밝혔습니다. 이 설교를 또 오후에 거듭하는 것은 아무래도 또 오후에 한 번 더  증거해야 되겠다. 오후뿐 아니라 그 증거를 어디 뭐 그런, 공중에 소리가 나는  거 같으면 일 년 내내 계속해서 증거를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왜? 우리가  고쳐야 되지 고치지 않으면 소용없기 때문에.

 오전에 전장을 읽고, 세 가지에 대해서 한 가지가 두 가지씩을 해 나와서 여섯  가지를 증거 했습니다. 그 여섯 가지 아마 거의가 다 외우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그 사람의 산 생애에 있어서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건가? 뭐 사람들의 산 생애에 있어서 이 사람은 이렇게  살았으니까 가치가 이렇고 저렇고. 복잡한 것들을 사람들이 많이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주장을 하는 사람도 모르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생애가 있다. 그것은 가치가 어떻다 하지만 그것은 다 지방성과 또  시대성과 그때의 모든 지식성에 따라서 평가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어떻게 가치 있다고 평가한다 해도 아무것도 아닌 거 있고, 또 어떻게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평가한다고 해도 아주 고귀한 가치를 가진 거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사람의 생애의, 사람의 그 이력 말이오. 이력이라고 할 수  있을란지? 사람의 생애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심히 복잡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다 좀 나은 생애를 해 보겠다, 그런 욕망을 다  가지고 있고 또 점점 가치 있는 생애로 개량해 갈라고 애를 씁니다. 개량이라  말은 좋게 자꾸 고쳐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지금 생애하고  있는 이 생애보다 이 생애가 좀 더 가치 있으니까 내 생애를 바꾸어 가져야  되겠다고 하면서 바꾼다는 것도 실은 이 지식에서 볼 때에 미친 짓, 바꾸겠다는  것도 미친 짓, 아, 이 생애는 고귀하다. 가치 있다고 하는 그것도 미친 생각,  모두 정신없는 다 참 미치괭이의 생각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원히 후회할 것이 없는, 생애에 대해서 올바로 평가할 수  있는 이 평가의 지혜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사람됨에 따라서 이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도 있고,  하나의 궤변쟁이의 궤변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나의 그저 그렇게도  할 수 있겠지 하는 정도로 버리는 자도 있을 것이고, 바로 여기다가 생사를  걸어놓는 그런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생사를 걸어 놓은 그 사람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이 지혜에 대해서 좀 가치를 아는 사람이요, 그저 뭐  옳다, 그게 좋다, 바르다 하는 그 정도의 느끼는 사람은 그 사람은 아직까지  껍데기 핥기지 속에 알맹이를 맛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오전에 하고 오후에 다시 설교하게 된 이것을 나는 대단히  감사하고 행복 되게 생각합니다. 왜? 부족하지만 서도 오전에 이 설교를 하고  오후에 아무래도 또 설교해야 되겠다 이렇게 느껴지고 깨달아진 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이뿐 아니라 평생 사람들에게 말하고 또 말하고 이 일을 고쳐  시작하기 전의 사람에게는 늘 계속해서 말할 수 있는 그런 중요성 필요성을  느끼는 그런 성신의 감화를 받은 사람됐으면 좋겠습니다.

 오전에 세 가지 말했는데, 한 가지가 두 가지씩 해서 이삼은 육 여섯 가지를  말했습니다. 사람의 생애는 수 없는 생애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런 면에서  생애하고, 저런 면에서 생애하고. 모두 다 자기의 일생에 다 가치 있는 생애를  할려고, 가치 있다는 거는 자기 딴에는 아주 수입이 좀 더 크고, 또 길게 가고,  넓게 퍼쳐서 이런 좋은 그런 결과를 맺는 그런 생애를 하려고 사람들이 복잡하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래 서 세상에는 학교에서 수 없는 생애의 그 평가와  종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딴게 아니라 그렇게 모두 다 학교에서 그런 거 다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생애의 종류도 있다. 이 생애에는 이런 방편을 써서  이래 가야 된다. 이 생애는 이만큼 가치 있다 있다. 모두 하는데, 그런 것을  창세기 5장에, 단마디로 판결 내렸습니다. 내려서, 인간의 생애에는 그렇게  복잡한 것을 쓰면 그 복잡 속에 제가 파묻혀 가지고 죽게 되기 때문에, 복잡  속에 파묻혀서 어두워지고 복잡 속에 파묻혀서 분망한 가운데에서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 줄 모르게 그만 일생을 끌려서 다 허송 세월 하기 쉽기 때문에 그렇게  복잡한 걸 다 피해 버리고, 눈을 네가 떠 가지고 똑똑히 인간의 생애, 뭐 현  세대에 생애만 아니라 창세로부터 근 육천 년 이 생애가 된 그 모든 역사의  수많은 사람들이 다 생애를 하고 살고 지나갔지만 그 삶에 대해서 그것을 두  가지로만 평가해라 그렇게 이 본문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 가지 뭘로? 하나는 사망에 속한 생애가 있고, 하나는 생명과 평강에 속한  생애가 있다. 그러면 이 둘로만 판결해라. 그러면 생명과 평강에 속한 그  생애라면 이 생명은 끝이 없는 영생하는 생명이요, 영원한 평강이니까 이 영원한  생명과 평강에 속한 생애라고 하면 굶어도 좋고 죽어도 좋고 맞아도 좋고 욕  얻어먹어도 좋고 불에 그슬려도 좋고 곤봉에 맞아서 어떻게 그러면 전부  피투성이가 돼 죽어도 좋고 짓밟혀 죽어도 좋고, 어떻게 세상에서 아주 참  험악한, 인간이 볼 때에 꿈에도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그런 생애라 할지라도 그  생애가 영생에 속하고 영원한 평강에 속했다면 그는 가치 있다 그렇게  평가하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저 지나갈 것이 아니라 내가 현실 현실을 당할 때에 이 평가를  하고 지나가면 마귀란 놈은 우리에게 와 가지고 벌벌 떨고 도망치지 우리에게 와  가지고 뭐 이래 보자 저래 보자 유혹할 그런 아무런 끄나풀이 없습니다. 유혹을  못합니다. 마귀가 유혹을 못합니다. 우리가 인간 생애의 평가를 이렇게 평가하지  안하고 달리 평가해서 아, 이것은 몇 사람이 존경을 한다. 이 사람은 배가  부르다. 이 사람은 좋은 옷 입고 산다. 이 사람은 뭐 평안하다. 즐겁다.

소원대로 하고 있다. 이 사람은 뭐 재미가 있다. 이 사람은 몇 사람끼리 단합돼  가지고 취미가 있다. 이놈의 종류를 헤아릴라 하면 뭐 천도만도 넘는다 그  말이오. 천도만도 넘는데, 그 걸 우리 머리 가지고 이거보다는 이게 낫다,  저것보다는 저게 낫나? 이래 할라 하면 그 가치를 평가 못 하고 우리는 그만  죽어 버리고 말지 평가 못합니다.

 이런데. 성경이 말하기를 '야, 너는 그래 하지 말고 그만 그 전체를 둘로  평가해라. 영생하는 생명과 영원한 평강을 향하여 가는 그런 생애가 있다.

영생과 영원한 평강을 향하여 가는 그 생애가 하나 있고, 영원한 사망과 실패를  찾아가는 그런 생애가 있다. 이 둘로만 네가 구별하면 그만 복잡하지 안한데  그저 구별해서 영원한 생명과 평강으로 찾아가는 그런 생애라면 어째도 좋다. 뭐  이러나, 이런 종류 저런 종류. 그만 뭐 이런 종류든지 저런 종류든지 길든지  짧든지, 넓든지 둥글든지, 냄새가 나든지 붉든지 검든지 뭐 험하든지 뭐  죽음이든지 상관없다. 영생을 향하여 찾아가는 평강의 길이면 그게, 그거는 그만  제일 가치 있는 길이니까 그 길이면 서슴지 말고 달려라.' 그렇게 가르쳤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 수많은 종류 이거는 영광이 있고, 이거는 명예가 있고, 이거는  지위가 있고, 이거는 권세가 있고 이거는 뭐 많은 사람을 점령하고 있고, 이거는  뭐 공로가 있고 뭐 이런 아름다운 취미 있는 가정이 있고, 이런 뭐 예술이 있고,  뭐 온갖 뭐 세상에 뭐 그거 종류 말할라 하면 시간 없습니다. 얼마든지 뭐, 백  가지도 천 가지도 만 가지도 넘습니다. 그냥 공연한 말이 아니고 만 가지도  넘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평가해서 이거는 이거보다 낫다, 저거는 저거보다  낫다 그렇게 네가 평가하지 말고 도매금으로 이거는 그만 다 사망에 속한  것이다. 영원히 죽고 망하는 데 속한 것이다. 아, 죽고 망하는 데 속한 것이라면  뭐 이래 빼딱해 가지고 망하는 것이나 쨀쭉해 가지고 망하는 것이나 동글동글해  망하는 것이나 넙쩍해 가지고 망하는 것이나 상관할 게 없다. 전부 그거 다 사망  아래 있으면 사망 아래 있는 것이다. 요래 만 평가해라.

 또, 이거는 뭐 넓든지 길든지 둥글든지 뭐 빼쪽하든지 요게 욕 뭉텅이든지 천대  뭉텅 이든지 짓밟히는 뭉텅이든지 뭐 가난한 뭉텅이든지 죽음 뭉텅이든지 만날  매맞고 감옥에 갇히는 뭉텅이든지 어쨌든지 그것은 영생을 향하여 찾아가는  영원한 평강의 길이라면 아무거라도 다 좋다. 영생을 향하여 찾아가는 평강의  길이라면 아무것이라도 다 좋다. 또 영원한 사망과 실패를 찾아가는 길이라면 뭐  뻔쩍거려도 다 그까짓 거는 몹쓸 것이고, 얼룩얼룩해도 몹쓸 것이고 모든 사람이  다 칭찬해도 몹쓸 것이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아도 못 쓸 것이고, 아주 세력이  많아도 몹쓸 것이고 다 몹쓸 것이다. 이렇게 이 두 가지로 모든 생애의 가치를  평가하라. 이거 얼마나 우리에게 참 생명의 길을 축소해 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우리가 그런 뭐 이 세상에 학문이라 하는 것이 다 그런 것입니다.

 다 그래서 이거는 이거보다 낫다, 이거는 이런데 이거는 밥이 넉넉하다. 이거  먹으면 배가 부르다, 이거는, 이 생애는 취하면 밥은 별로 없지만 평안하다.

이거는 '또 뭐 별 평안도 그런 거 없지만 취미가 있다. 이거는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다. 이거는 뭣이 어떻다. 뭣이 어떻다 그러면, 어떠면 어떻고 어떠면  어쩌란 말이냐? 도매금으로 그거는 사망 아래에 속한 것이다. 이거 도매금으로  딱해 치워 버리면 뭐 그 외에 더할 것 없어, 뭐, 누가 말해도 '아. 그거 통과 다  했다.' '아. 그 많은 거 오늘 여기 인류 역사에 육천 년 근 육천 년' 지나가는  가운데에 수많은 학자들이 그 책이라 하는 것이 여러 산더미 같은 책에 다  기록해 놨는데 그걸 다 언제 보고 평가했느냐?' '아, 보거나 말거나 다 뭐  도매금으로 딱 평가 다 했다. 그만 사망 아래에 속한 것이면 그거 다 그거는  사망의 것이기 때문에 가치 없는 것이다. 그거는 뻔쩍뻔쩍해도 가치 없고, 모든  사람이 높여도 가치 없고. 커도 가치 없고, 강해도 그거는 가치 없다.' 이렇게  딱 판정하고, 또 영생과 평강을 향하여 찾아가는 그 길이라면 이래도 저래도 다  가치 있습니다.

 그러기에, 생애의 가치 평가는 이 둘로만 평가하라. 요걸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요걸 '아멘, 과연 옳다, 참 되다.' 요걸 들을 때에, 들을 때 그냥  중얼중얼하니 입술로만 말하고 그저 기억에만 가지고 있을 게 아니라 고거 들을  때에 '아멘, 진리다. 이는 영원히 변치 안한다. 옳다. 참되다. 여기는 내가  생명을 바칠만 하고 일생을 바칠 만 하고 이제 일생을 이 길을 걸어갈 만하다.'  이렇게 확정을 짓고. 요 길을 걸어갈 때에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그때에 이  진리를 생각하면서 뭐 세상이 어떻다고 위협을 해도 비쭉비쭉 비웃습니다. '이  자식 왜 비웃기는 왜 비웃어? 죽어도 좋아?' '죽어도 좋아' '아, 이 자식, 참  미련하네. 너 껍데기를 벗겨도 좋아?' '껍데기 벗겨도 좋아' '불에 태워도  좋아?' '아 불에 태워도 더 좋아.' '감옥에 갇히면?' '아. 감옥에 갇혀도 좋아.'  '거꾸로 달면?' '거꾸로 달아도 좋아. 너는 절대로 이 길을 걸어가는 나에게  해를 지우지 못한다. 네가 이 길 걸어가는 나에게 해를 지우면 죽인다는 것이 날  더 좋게 영광스럽게 복되게 하지 네까짓게 해할 수 있는 그런 걸음인줄 아느냐?  천하가 다 달려들어도 해할 수 없는 걸음이다.' 이것이 이 걸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생의 생애의 평가는 두 가지로만 하라' 요 말씀을 굳게 잡읍시다.

 또, 인간 생애의 방편에 있어서 이런 방편도 저런 방편도 수많은 방편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방편들이 있어. 수많은 방편들이 있는데 그 수많은 방편을  그걸 연구하기 때문에 무슨 이 경영학. 뭐 물질 경영학 뭐 인간 경영학, 정치  경영학, 아직까지 여기서는 경영학이라면 지금 경제 경영학밖에는 없지만 아마  외국에서는 인류 경영학이 있을 것입니다. 그거 다른 말로 하면 사회학이라고도  좀 약간 붙일 수 있는 것인데. 뭐 이런 거 저런 거 뭐 학이 많지만 아, 머리  아프다. 지저분하니 그까짓 거 다 머리 아파 다 지저분하니 머리 아프니까 다  치워 그저 모둠떼기 똘똘 뭉쳐 가지고 불에 팍 사러 버리고 뭐, 사르지  못할지라도 나로서는 불에 팍 사러 버렸다. 다.

 불에 다 사러 버렸고 그저 뭐이냐? 인간의 생애의 방편, 인간이 걸어갈 생활의  방편은 둘 뿐이다. 그러면 뭐 그렇게 너는 이 수많은 다 박사들이 말해 놓은  이런 걸 다 무시하고 한꺼번에 다 포기해 버리고 너는 두 가지 방편뿐이라  하니까 그러면 뭐이라 말이냐, 그러면? 이 학은 어디 속했어? 아, 그 학은  사망에 속했어. 이거는? 이것도 그래. 저것도 그래. 그러면 너는 두 가지 방편을  말하는데. 두 가지 방편 중에 그러면 뭣을 말하느냐?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 계명을 지키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하나  있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해 가지고 죽지 안하고 승천했습니다. 전 인류를 발  아래 밟고 날라 올라가지 안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전 인류 중에 제일 머리로  빼서 올리지 안했습니까? 그만하면 됐지 뭐,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방편 하나 있고, 하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외에  박사하고 동행하든지 대통령하고 동행하든지 왕하고 동행하든지 뭐 미인하고  동행하든지 미남하고 동행하든지 사장하고 동행하든지 무슨 그 학자하고  동행하든지 예술가하고 동행하든지 누구하고 동행을 하든지, 뭐 저 혼자 독보로  걸어가든지 어쨌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외의 거는 다 사망이다.

 어떻게 간추려집니까? 얼마나 일이 쉽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 야 네가  일자 무식해 가지고 그것만 가지고 되겠느냐? 아, 이것만하면 천하를 다 얻는다.

영원히 얻는다. 아,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 신구약 성경에 간단하게, 이거 뭐  아무리, 무식자도 배울 수 있어. 지금은 한글이라 하 지마,는 옛날에는 언문이라  했어요, 언문. 언문이라 했는데 언문은 상놈의 글이라 그 말입니다. 그때 다른  나라에 속국돼 있을 때에 우리 나라 그 글은 상놈 글이라 그래 여겼어. 한글로  써 놨으니까 누구든지 읽지, 이 간단하게 육십 육 권만 가지면 되지. 이 육십 육  권을 가지고 이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 이대로, 하는 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 '아, 이대로 하면 거기 다 기록이 돼. 있어?' '여기  다 기록돼 있어.

 '뭐이 기록돼 있어?' '인간이 모르는 거 억억만 배도 더 기록돼 있어.' '그러면  뭐이 거기? 찍해야 조그만한 책 한 권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느냐?' '아,  여기는 억억만 배도 더 기록돼 있어.' '억억만 배도 더 기록돼 있다니? 거기  뭐이 조그만한 책 속에 그렇게 많이 들었느냐?' '이 속에 너희가 모르는 내재의  영감이 있어. 내재의 영감, 이 책 속에는 전지 전능의 하나님의 인도가 이  가운데 들었어. 들었기 때문에 이 말씀대로 지켜 나가면 전지 전능자가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에 세상 학문의 억억억억억억만 배도 더 되는 세밀한 것까지 다 이  가운데 다 들어 가지고 있어.' 이만하면 족해.

 이래서, 모든 인간의 생의 방편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편이 하나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안하고 피조물과 동행하는 방편 하나 있으니까 피조물과  동행하는 방편은 다 망하고 죽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편은 다 영생과  평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편은, 세상은, 그러면 염세주의로  세상은 부인하느냐? 아니야. 하나님하고 동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라  하면 사랑하고, 세상을 먹으라면 먹고, 세상을 죽이라면 죽이고. 세상을  가지라면 가지고, 세상을 발길로 차라면 차고, 세상을 던지라면 던지고, 세상을  손바닥에 놓고 사랑하라면 사랑하고 뭐 하나님 그분과 동행하니까 그분이 내  모자라는 거 도와 줘서 내가 자빠지면 붙들어 줄 것이고, 내가 또 딴, 어만 길  가면 날 바른 길로 인도해 줄 것이고, 그분과만 동행하니까 내 힘 모자랄 때에  그분의 전능은 내 힘이 되고, 내 지혜 모자랄 때는 그분의 지혜는 내 지혜가  되어지고 하니까 모자랄 거 하나도 없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모자랄 거  하나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생의 법칙이 수억억만가지 많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하나, 하나님과 동행 버리고 모든 피조물과 동행하는 거하나 두  길뿐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세상을 포기하느냐? 포기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거 좀 구경하라 하니까, 이거  구경하라 하면 구경하고, 이거 보라 하면 보고, 이거 읽으라면 읽고, 버리라면  버리고, 가지라면 가지고, 그분이 시키는 대로만 같이 동행하니까 문제가 없어.

자, 구렁텅이에 빠져도 그분이 계시니까 건져 주시니 문제가 없지, 원수가 뭐  세계같이 달라든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그분이 훅 불어 버리니까 다 날아가  버리니 문제가 없고, 얼마나 좋은지? 이분하고 동행하니까 이분이 계시니 아무  것도 문제가 없어. '나는 지금 이렇게 만신창의 이 병신인데 어쩔꼬?' '아,  병신이면 어떠냐? 내가 너 병신을 미남 만들라면 미남 만들고, 미인 만들라면  미인 만들고 천하에 제일 존귀한 자를 만들라면 만들 수 있는데 내게 다 능력이  있는데 뭐 네게? 병신이면 어떠며. 무식하면 무슨 상관이 있어? 나와 동행하면  돼. 동행 하나로 족해.'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이 생명의 말씀이요, 계약의  말씀이요. 위로의 말씀인 것입니다. 생의 법칙에 대해서는 둘뿐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칙 하나 있고, 또 하나님 빼놓고 피조물과 동행하는 법칙 있고,  하나님 빼놓고 피조물에게 막 두터 타서 피조물 가마를 타고 피조물 가마를 타고  피조물 비행기를 타고 피조물에게 이렇게 높임 받고 저렇게 높임 받고, 한  사람에게 높임 받고 열 사람에게 높임 받고 백 사람에게 높임 받고 천 사람에게  높임 받고 만 사람에게 높임 받고 전 인류에게 높임 받고, 이렇게 이런 방편  저런 방편 꽉 찼지만 그거 볼 것 없어. 다 도매금이야.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생활 법칙 그 외의 거는 다 사망이야. 천 사람 만 사람에게 존대 받아도  소용없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걸음은 천 사람 만 사람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아도 좋아.

왜? 하나님과 동행할려고 멸시 천대받으니까 그분에게 사랑 받고 그분에게 날  후하게 대접하려는 그 대접을 영원한 나라에 가서 받지. 그러니까 손해 갈 게 뭐  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를 누가 손해 보이겠소? 손해.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네 이놈 하나님하고 동행하니까 욕을 합니다. 자.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욕을 하면 그 욕 얻어먹은 그게 막상 손해요 유익이요? 한번 말해  보십시오. 여기 남반에? 손해 아닐까?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막 죽여  버리면 어째 그만 죽여 버리면 손해 요 유익이요? 욕 얻어먹은 거 하고 죽인 거  하고 어느 게 더 유익일꼬? 죽인 게 더 유익이지. 이게 우리의 길이라. 만고에  아무 것도 상대할게 없어. 얼마나 편하고 좋습니까? 공연한 것입니까? 공연한 헛  장담이오? 아니오. 다 이 길을 걷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이러기 때문에 그 어떤 강대국이 와서 뭐라고 해도 눈도  꼼짝거리지 안하고 도로 웃고 있습니다. 혹독한 형벌이 와도 도로 웃고 즐거워서  그 사람을 염려하지 자기 신세는 탄식하지를 않습니다.

 이제 두 가지 배웠습니다. 생애 가치, 생애 가치는 어찌되느냐? 또 생애 하는  그 방편 그 법칙은 어떠하냐? (두 가지 배웠습니다) 그 다음에 두 가지 있는데  두 가지는 뭐이라 했습니까? 두 가지는 뭐이라 했습니까? 자, 두 가지 따라  합시다. 기쁨! 기쁨! 두 가지 기쁨! 두 가지 기쁨! 두 가지 기쁨!  이것도 성경이 가르쳐 주시고 자연 계시들이 다 가르쳐 줍니다. 작은 자가  자기보다 큰 자를 위했을 때에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또 가난한 자가 자기를  살릴 수 있는 부자를 기쁘게 좋게 했을 때에 평강과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또  새카만 그 어두운 죄인이 의를 행했을 때에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못할  일했을 때에 고통 오고 할 일 했을 때에 기쁨이 옵니다. 또 인생이 자기에게  분담된 그 책임을 하지 못했을 때에 고민이 오고 분담된 책임을 잘했을 때에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이 다 성도들의 영원한 기쁨을 하나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자연 계시, 특별 계시, 성도의 두 가지 기쁨, 그런 거는 우리가 다  생각해 보면 알아요. 오전에도 거기 대해서 몇 가지 예를 들어서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 성도의 기쁨은 무슨 기쁨인고 하니 하나는 십자가의 기쁨입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기쁨. 십자가의 기쁨은 뭘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고 하니 나를  십자가에서 대속해 주신 주님의 그 사랑과 그 고난과 대속해 주신 그 광대함과  대속으로 말미암아 내게 온 그 은혜의 구비하고 세밀하고 그 무한한 은혜, 그  소망의 지극히 큼. 이것을 주신 주님이시요, 또 그분이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시요 주권 개별 섭리자시요, 창조주시요 전지 전능자시요. 자존의  하나님이시라. 제일 크신 분이라. 영원한 나라 알파와 오메가의 그 나라에서  왕으로 계실 그분이라. 그분을 내가 모시고 영원히 삽니다. 모두 그분 앞에서  모든 피조물들은 살게 됩니다.

 '살게 되는데, 십자가는 이분이 나를 어떻게 사랑했는가 하는 그것은 십자가의  피로 말했는데, 피는 하나님께서 사람되어 온 도성인신하심과 또 세상에서  사생활 공생활에서 나 위해서 수 없는 그런 곤욕스러운 생애를 한 것과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대형, 대행. 대화친으로 생명을 바쳐서 나를 대속했고. 그래도 또  마음에 차지 안해서 영원한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다시 부활하신 주님의 그분의  사랑,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이 위대하니까 그분으로 인한 소망을 깨닫고  영원히 그분 모시고 살고, 그 나라에서 그 분이 '안다' 한 번 하면, 그분이  '안다' 한 번 하면. 요새 뭐 잠깐 지나 갈 세상에서라도 대통령이 만일 그  사람을 '안다' 한 번 하면 굉장합니다. '안다' 한 번하면, 이런 것으로 좀  미루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데, 그분을 위해서 내가 현실에, 그분을 위해서 내가 희생했고 그 분을  위해서 내가 수고를 했고. 그분을 위해서 하기 어려운 일을 했고 그 분을 위해서  나 좋고 나 편리하고 나 좋은 길 많지만 그분을 위해서 나 좋은걸 다 버리고  그분 좋게 한 그 생애를 했을 때에 그 신앙양심에 기쁨이 어떠할 것인가? 그것이  십자가의 기쁨입니다. 십자가의 기쁨. 이 기쁨을 우리 기독자들이 가져야  됩니다. 이 기쁨은 뭐 해석을 암만 해 봤자 모르요. 해석 암만 해 봤자 말로는  그렇지만 믿어지지도 안하고 또 그렇게 실감 있게 들어지지를 안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해 보면 기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보니까 입이 벙긋벙긋 거리면서 그래 그 눈은 쑥 들어가  가지고 삐쩍 말라가지고 벙긋벙긋 옵니다. 그래 내가 묻기를 어디 갔다 옵니까?  '이러니까 네, 어디 좀 갔다 옵니다.' 그래 내가 알고 '언제 갔다가 지금  옵니까? '한 사흘 됐어. 한 사흘 됐는데 '아무데 갔다 옵니다 ' 그래 내가  묻기를 '뭐 왜 그래, 보니까 얼굴도 눈이 쑥 들어가고 삐쩍 말랐고 그런데 뭐  기쁘기는 뭐이 기뻐 그래?' '아, 예. 그저 기쁠 일이 있어 그래 기쁩니다.'  '뭐이 기뻐? 기쁜 거 말 좀 해 줘.' 이라니까 '뭐 말할 것도 없고 말 또 할래도  할 것도 없고. 이런데 어쩐지 기쁩니다. 제딴에는 뭐 큰 일 한 듯이 기쁘대요,  그래 내가 그걸 알고 물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자기에게 속한 그 교인 하나  있었는데 참 비참한 형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비참한 일을 위해서  자기가 사흘 동안 산에 가서 금식 기도를 했어. 금식 기도를 하니까 그거는 뭐  그 본인이 압니까? 누가 압니까? 아무도 모르는데 주님만이 아신다 그말이오.

자기가 맡은 그 사람의 그 구원을 위해서 밥을 굶으면서 한 사날 밥 굶고 오니까  그렇게 기쁘고 즐거워서 기쁘고 즐거워서 그래. 그래 내가 폭로를 시킬라 하다가  폭로를 안 시켰어. 또 폭로시키면 그만 그거 헛김이 빠져 버리면 헛일이기  때문에 저만 알고 있어야 재미가 있지. '참 되게 기쁜가배. 삐쩍 말라 가지고 뭐  했는고 나도 좀 가르쳐 줘.' 이라니까 '아이구 뭐 그럴 거 없습니다.' 이래도  속으로 기뻐서, 기뻐서 가만 보니까 삐쩍 말라서 아랫도리가 휘들휘들거리는데,  아랫도리가 휘적휘적 그러는데도 기뻐서 막 뛰어 내려가. 좋아서.

 인간이 그런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수고함의 기쁨, 주님이 소원하신 대로  원수를 위해서 사랑한 그 기쁨, 모든 이웃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주의  명령대로 희생한 그 기쁨, 그 기쁨 그게 무슨 기쁨이요? 그 피조물로 인한  기쁨이 아니고 주님으로 말미암아서 주님이 좋아할 것이기 때문에 기쁘다  그말이오. 주님이 좋아하실 것이기 때문에 기쁘다 그거요.

 사람은 그게 있습니다. 혹 제가 이 반사 선생님들을 내가 지금은 안 그렇지만  얼마 전에는 혹 데리고 갑니다. '보자. 심방 가는데 좀 한 번 따라가 볼께.

어떻게 심방 하는고 보자.' 이래 떡 가서 보면 학생을 만나 가지고, 다룰 때도  그라면 굉장히 부흥이 될 건데 뭐 학생에 대해서 어떻게 친절히 하고. 겸손히  하고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을 내 가지고 막 된 줄도 모르며 뭐 있는 전심전력을  기울여 가르치면서 날 슬큼슬큼 한 번 봐. 이래 가르치다가 또 나 한번보고.

보니까 내 얼굴이 좋거든 내 얼굴이 좋아 놓으니까 더 힘을 내 가지고 막  가르치요. 하물며. 주님의, 만주의 주 만 왕의 왕이신 그분의 안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할 때에 그 속에 기쁨이 없을 건가? 넘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기쁨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기쁨을 발견해서 십자가의 기쁨에 취미를 붙이고 난  다음에는 도둑놈의 기쁨은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기쁨을 맛보고 난  다음에는 세상 기쁨은 다 도둑놈의 기쁨인데 그 도둑놈의 기쁨이 기쁘지 안하고  도둑놈의 기쁨은 만일 기쁨을 가졌으면 그 배나 울어야 됩니다. 배나 울어야 돼.

도둑놈의 기쁨은 기쁨 가지고 난 다음에는 마음에 가책이 돼서 잠도 안자고  께꾸름한 게 숨이 툭 죽어서 '야 이 사람아. 자네 왜 요새 그렇게 기백이 없고  그러노?' 뭐 괜찮습니다. 왜 그래? 뭐 뭐 일 있구먼. '뭐 그런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은 해도 께꾸름하게 못 견딘다 말이오. 이러다가 그게 견디다가 할 수  없어 도둑질한 거 토해 냅니다. 견디다가 견디다가 도둑질한 걸 떡 확 토해서  말이지 토해서 도로 돌리든지 이제 남을 희생시키고 자기가 유익 되었던 그거 다  토해 내트려 가지고 그 사람에게 음으로 양으로 이래 가지고 그걸 다  회복시키고, 그 사람한테 안 되니까 딴 사람에게라도 그래 하고 난 다음에는  이제 무슨 체증 앓아서 사람이 체해 가지고 죽는다고 넷 방구석을 헤매다가 그만  그것 내려가고 나니까 기쁘고 즐거운 거 모양으로 기쁘고 즐거워한다 말이오.

'야 사람아 요새 얼굴이 좋은데 지금 퍽 기쁘고 즐거우네. 어째 그래?' 그라고  난 다음에는 이제 말합니다. '체증이 내려갔나? 뭐 먹고 얹혔지? 얹혔지? 그래  얹혔는데 체증이 내려갔나?' 신앙의 사람은 압니다. '예. 아이고 그놈 먹었다가  큰욕 봤습니다. 인제 게우고 나니까 시원합니다.' 성도가 이런 것입니다.

 이러니까 십자가의 취미, 십자가의 기쁨을 맛본 자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을  착취하고 모든 사람을 이용해서 자기를 유익 되게 하려는 거기서 누리던 그  기쁨을 누릴 줄 압니까? 못 누립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좀 인격 있는 사람은  자기의 생애가 다문 좁은 사회라도 몇 사람에게라도 그래도 유익을 끼치고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아. 칭찬할 만하고 그건 참 귀한 일을 했구먼 참 아름다운 일을  했구먼.' 이렇게 할 수 있는 생애를 이루어야 잠이 오지, 누가 들으면, 보면  그거 말은 안해도 머리를 쩔렁쩔렁 흔들며 '어째 그 사람이 그럴까? ' 하는 그  생애를 하고는 절대로 먹고 삭이지를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격성 가진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맛을 못 보는데, 맛을 보면 다 볼  수 있어요. 이 권사님들 보면, 나는 자꾸 말하기를 '좀 과로하지 마십시오. 절제  못해 가지고 만날 예수 잘 믿는다 하더니 병만 들어 가지고 그렇다고 자꾸  욕이나 돌리고 이라면 안 되니까 좀 병 안들구로 좀 과로하지 말라고 암만 해도,  암만 해도 그보다 더 맛있는 아마, 맛있는 게 있는 모양이라. 아무리 그래  말해도 자기가 몸치가, 과로가 돼 가지고 병이 나도, 병이 나도 못 견디는 그런  재미가 있는 모양이라. 못 견디는 재미가 있어. 이 꿀벌이 역사를 하는데 한창  굴 많이 날 때는 일주일 못 삽니다. 일 주일도 못 살지만 가니까 꿀이 있으니까  얼른 빨아 가지고 하나 또 주머니 하나 차니까 와서 또 게와서 또 저축해 놓고  또 가고 꿀 욕심에, 굴 욕심 꿀 재미에 자꾸 활동하다 보니까 생명이 그렇게,  아흡 달 살 것이 일 주일 살고 끊어진다 말이오. 그래 죽을 줄도 모르는 거라.

그와 마찬가지로 이 권사님들도 자꾸 아마 그런 재미가 있는 모양이라. 그래  가지고 한 번 가서 말하면 살아나지, 또 어려움 있는 그거 말 안 해 주면 넘어  갈 터인데 또 말해 주니까 되어지지. 이러니까 이제 자기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수고하는 그 수고를 할 때에 수고하는 그 기쁨의, 기쁨의 그 자극성, 그 기쁨의  자극성은 자기가 과로돼서 병들어 눕는 자극성보다 크기 때문에 할 수 없어서,  병들어 누워도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 봉사하는 그 자극성에 취해서 가는 것이라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기독자로서 두 가지 기쁨, 하나는 십자가의  기쁨인데, 십자가의 기쁨 이것을 자꾸 맛을 봐야 됩니다. 이러니까 모두  권찰님들이 다 그런 모양이오. 모두 말 들어보면 다 통계라. 통계가 다 보면 다  공통돼 가지고 있어요 처음에 나설 때는 다리가 질질 끌면서 다리를 질질 끌고  기운이 없어서 이래 가지고 가다가 한 집 심방하면 기운이 나고, 두 집 심방하면  기운이 나고, 세 집 심방하면 기운이 나서 나중에 가서는 그만 신바람이 나  가지고 뭐 그만 서너집 이라고 나면 뭐 넘어질란가, 오늘 저녁에 자빠질란가  그것도 모르고 막 죽자 살자하고 막 가 그 싶은 대로 전부이 가 가지고 심방 다  하고 집에 올 때는 기쁘고 즐거워서 오는데, 그래 인제  '오늘 몇 집이나 했습니까?' 오늘 뭐 이렇고 저렇고 많이 했다고, 그만 그렇게  하면 그 속에서 십자가의 그 기쁨에서 능력이 나오니까. 십자가의 기쁨이  나오니까, 십자가의 기쁨은 그 기쁨은 주님 위해서 다 죽어 버려야. 죽어 끝이  나야 만족이 되는 것이니까 암만 해도 남은 힘이 있거든. 남은 힘이 있으니까  '아, 오늘 참 너무 과히 했습니다.' '아이구 이래도 심방도 다 못하고 뭐 이래  백지 걸음만 걷지 뭐 가서 옳게 하지도 못하고 만나서 얘기도 충분히 하지도  못하고' 만날 부족이오. 만날 부족. '이래 가지고 뭐 일도 하는 둥 만 둥 이래  가지고 이래' 놓으니까 이거 참' 만날 탄식이라  이거 여러분들 십자가의 기쁨을 맛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기쁨을 이제 이름만  들어 알게 아니라 십자가의 기쁨을 맛을 보십시오. 주일 학교 반사들이 다  그렇습니다. 주일 학교 반사들이 다 그만, 그 주일 학교 반사들이 반사하는 데만  그 십자가의 기쁨을 보는데, 그 십자가의 기쁨뿐이니까 그것은 일방적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균형이 갖춰지지를 못하니까 그것이 일찍 없어진다 말이오.

없어지니까 그 주일 학교 학생들 맡아서 일하는 그 십자가의 기쁨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가지고 자기 개인 생애에서 세상에 빛을 보이겠다 해 가지고 그렇게  좀 희생하는 그 십자가의 기쁨 자기 개인 생애에 십자가의 기쁨, 또 그 다음에는  자기의 모든 경제면, 물질면 경제면에 대해서 내가 좀 손해 갈지라도 하나님에게  욕 돌릴라, 내가 좀 유익을 못 봐도 남에게 덕되지 않게는 안해야지. 주를  위해서 경제면에 대해서 자신이 또 십자가의 기쁨을 받아 봅니다. 경제면에  대해서. 나중에 가서는 명예면에 대해서 십자가의 기쁨을 받아 봅니다. 명예면에  대해서, '아 이 사람이 뭐 명예로 말하면 그까짓 거야 다 풀젓개 모양으로 쥐  흔들어 버리지만 주를 위해서 거기서도 그저 속을 썩히고 예 예 예 예 하면서  이와 같이하니까 그 희생하는 거, 그라니까 그렇게 희생하고 자꾸 천해지고  희생하는 것은 그것은 그 희생 이 세상에 뭘로 나옵니까? 뭘로 나타납니까? 아는  사람? 그거 세상에 뭘로 나타나지요? 자, 저 ○○○ 집사님, 빛으로 나타나!  아멘! 빛으로 나타나.' 향기로 나타나! 빛으로 나타나.' 향기로 나타나. 그러면  상당히 기쁩니다. 상당히 기쁘요.

 이래 가지고 십자가의 기쁨을 하나에서 둘, 둘에서 셋 자꾸 이래 가져 가지고  둥글둥글 자꾸 십자가의 기쁨을 이 모든 면에 이래 가지고 십자가의 기쁨의 맛을  봐 놓으면, 십자가의 기쁨은 주는 기쁨인데 십자가의 기쁨은 씻기는 기쁨인데,  십자가의 기쁨은 다른 사람을 올리는 기쁨인데, 다른 사람을 위하는 기쁨인데,  십자가의 기쁨을 맛보고 난 다음에는 살인 강도의,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고 밟고  올라서고, 또 다른 사람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가해하고 이렇게 침략하고 하는  이런 도둑놈의 도둑, 이거 뭐 설교록에 나갈 터이니까 이거 도둑놈이라 해  놓으면 모두 '에히, 백목사 말하는 거 보니까 상놈인갑다.' 이렇게 할지 모를  거라 말이오. 그래도 그거는 또 재미가 도둑놈이라 해야 내 맘이 시원하구만요.

도둑놈의 기쁨은 나중에 가서는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기쁨을 맛본  사람은 도둑놈의 기쁨은 맛보지 안합니다. 도둑놈의 기쁨이 와도 다 물리쳐  버리요.

 이제 이 기쁨을 누리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무슨 기쁨이냐? 주님 만나는  기쁨이요 주님이 선물 주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떡 선물을 보내면서 선물을  보내면서, 선물 보냈습니다. '나와 내 복음을 위해서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처자나 전토를 버린 자는 세상에서 여러 배 백 배를 얻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없다' 말씀하신 대로 주님이 내게 오시지 안하고 선물 보낼 때  있습니다. '야, 네가 나 위해서 그렇게 물질에 많이 손해 갔는데 아나 그거 좀  내가 지금 너에게 줄 테니까 받아라.' 아, 물질이 백 배나 옵니다. 주님 위해서  푹 낮아졌는데 푹 올라갑니다. 다니엘이 주님 위해서 그만 사자 구덩이에  사자밥이 돼 버렸는데 거기서 그랬다고 주님이 칭찬해 가지고 올려서 나중에  가서는 총총리가 돼 가지고 자기 반대하는 사람들을 다 죽여 버렸고. 그렇게  영광스러운 자리 얻었어. 주님은 이런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우리가 믿고,  믿어야 됩니다.

 처음에는, 그러니까 주님께서 선물 보내. 물질 보내다가, 또 지위 보내다가. 또  주님 위해서 다 실직되고 나니까 또 직장 보내다가 주님 위해서 또 공부  못했는데 또 공부 보내다가 오만 거 주님 위해서 손해 간거 전 부 다 당신이  선물로 다 이래 보내줍니다. 선물로 보내 주다가 '내가 지금 바빠서 못 가니까  요것으로 나 대신해서 나 본듯이 봐' 하면서 이런 거 저런 거 주니까 자, 그때  기쁘겠소 안 기쁘겠소? 물질이 기쁘다는 것보다도 지위가 기쁘다는 것보다도  천하에 지위가 많고 물질이 많지만 주님이 내게 선물로 주신 그것은 모든  물질보다 다릅니다. 왜?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완전히 파괴돼 버렸는데 주님의 말씀대로 살 때에 말씀대로 삶으로 인해서 내게  온 것은 주님이 분명히 주신 것이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천하 인간이 많은  재물 가지고 있는 것보다도 내가 가진 재물 적은 것 요것이 더 낫다. 왜? 이것은  재물이 많은 게 아니라 나에게 이 물질을 주신 그분이 크기 때문에 지극히 크신  분이 내게 주셨기 때문에 이거는 천인 만인이 가진 수십억보다도 내게 있는 적은  물질이 낫다. 적은 지위가 낫다. 이제 주님이 주신 선물을 받을 때에 기쁨이  옵니다.

 선물 받을 때에 기쁨이 오는데. 그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요?  있겠습니까? 있겠다고 생각하는 분 손 한번 들어봐요. 저 ○선생 무슨 기쁨이야?  어? 뭐라하노? 그래. 주님 만나는 기쁨. 주님 만나. 아 주님 선물도 좋지만  주님이 직접 오시면, 만나면 얼마나 좋겠소? 이러니까 이 밤중에 신랑 만난다는  것이, 밤중은 다 어려움 아닙니까? 어려움 끝에 주님 만납니다.

 이러니까, 십자가의 기쁨, 주님이 주신 선물의 기쁨, 주님 만난 기쁨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그 소망의 기쁨, 이 기쁨이 세상 기쁨만 못합니까? 여러분들,  세상 기쁨은 따져보면 병 안든 게 없고 병 안든 거 없다 말은 병이 사망의 병  안든 게 없고, 세상 기쁨은 사망의 병 안든 게 없고, 죄 병 안든 게 없고  하나님의 저주병이 안든 것이 없습니다. 다 그 병이 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 배반하고 누렸으니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제 주님이 주시는  선물의 기쁨은 깨끗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진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선물의  기쁨도 기쁘고, 그러다가 주님이 오셔서 주님 만나는 그 기쁨은 참으로  기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기쁨을 우리가 이 세상에 사망되는 그런  기쁨에 갈급해 가지고 이 기쁨을 찾아서 헤매어 가지고 안 되면 노래도 부르고.

뭐 안 되면 술도 먹고 또 자꾸 이래 쌓지만 그 기쁨이 얼마나 갑니까? 그 기쁨  속에는 애가 터져서 못 견뎌 지금 발동하는 지금 발광하는 게 있어요.

 이제 십자가의 기쁨 그러고 난 다음에는 주님이 보내 주시는 선물의 기쁨, 주님  만나는 기쁨, 그러면 주님 만나는 기쁨이 선물을 줬든지 주님 만났든지 그거  기쁨, 십자가의 기쁨, 십자가는 내가, 십자가는 내가 희생할 때의 기쁨 선물이나  주님을 만나는 것은 이제 천한 것이 큰 주님을 만나기 때문에 얻어 기쁨, 얻어  기쁨, 투자해 기쁨, 투자해서 기쁨은 십자가의 기쁨이요, 얻어 기쁨은 주님 만나  기쁨입니다. 이러니까 두 가지 기쁨.

 따라 합니다. 두 가지 평가! 두 가지 평가! 두 가지 법칙! 두 가지 법칙? 두  가지 기쁨! 두 가지 기쁨! 이것을 여러분들이 각각 모두 우리가 실제화시키고  내가 이런 사람이 된다는 것이 대번에 되지 안하니까 이 생활을 내가 하고, 이  생활하는 가운데에서 내가 이 사람이 점점 되어져서 어 떤 현실을 만나든지 이  행동에서 이 사람이 되어지면 지상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지 그 이상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세상에서 제일 행락을 누리고  간 사람이 누구냐? 제일 영광과 존귀와 취미를, 제일 좋은 취미를 누리고 간  사람이 누구냐? 제일 이 세상에서 재미있고 참 취미 있고 행복된 생할을 하고 간  이가 누구냐?' 누굽니까? 주님, 주님, 주님 제일 행복을 누렸습니다. 행복을  누렸소.

 그러므로, 이제 오후에는 요걸 똑똑히 기억해요. 인간의 생애는 두 가지로만  평가해라. 사망의 생애냐, 생명과 평강의 생애냐? 두 가지로만 평가해라. 인간의  수많은 생의 법칙들이 있는데 그 법칙도 둘로만 이제 판정하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 하나, 하나님 배반하고 피조물과 동행하는 거 하나, 둘 뿐이야.

기쁨은 두 가지 기쁨. 십자가를 짐으로 기쁨, 이거는 내게 있는 것을 심으는  기쁨, 내게 있는 것을 심는 기쁨, 사망의 것을 생명으로 바꾸는 기쁨. 썩을 것이  썩지 안할 것으로 바꾸는 기쁨. 약한 것을 강한 거로 바꾸는 기쁨, 혈육의 것을  신령한 것으로 바꾸는 기쁨, 없어질 것을 영원 존재의 것으로 바꾸는 기쁨,  유한의 것을 무한한 것으로 바꾸는 기쁨. 이 기쁨, 그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영원한 것을 받는 기쁨, 이 두 가지 기쁨, 요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 예수 믿는 길은 얼마나 행복된지 모릅니다. 뭐 춤추는 그런 기쁨만  못합니까? 돈 벌어 놓고 즐거워하는 그런 기쁨만 못합니까? 이 세상에서 공부해  가지고 어떻게 되는 그 기쁨만 못합니까? 공부하는 것도 주님이 주신 공부,  주님과 동행으로, 주님과 동행으로 공부도 하고, 주님과 동행으로, 정치도 하고,  주님과 동행으로 대통령도 하고, 주님과 동행으로 왕노릇도 하고, 주님과  동행으로 부자도 하고, 주님과 동행으로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주님과  동행으로 또 자녀도 낳고 다 되지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면 다 가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기쁨을 사양치 마십시오. 십자가의 기쁨을 뺏기지 마십시오. 주일  학교 반사들은 십자가의 기쁨에서 다른 면으로 자꾸 진출하십시오 진출해. 모든  면 전체가 다 십자가의 걸음 걷고 십자가의 기쁨으로 살고 있는 우리가 돼야  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536 하나님, 진리 사람을 위하는 생애/ 고린도후서 5장 15절/ 1984. 7. 15.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1
535 하나님과 3가지 기도/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1988. 4. 3.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1
534 하나님과 동거 동행의 비결/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 1989. 6. 4. 남지권찰회 선지자 2016.01.01
533 하나님과 동거동행/ 창세기 6장 1절-22절/ 1981. 5. 20. 수저녁 선지자 2016.01.01
532 하나님과 동거동행/ 창세기 6장 1절-22절/ 1981. 5. 18. 월새벽 선지자 2016.01.01
531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4. 11. 23. 금저녁 선지자 2016.01.01
530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1. 6. 20. 토새벽 선지자 2016.01.01
529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1절-20절/ 1981. 6. 19. 금저녁 선지자 2016.01.01
528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4. 9. 28. 지권찰회 선지자 2016.01.02
527 하나님과 동행/ 말라기 3장 10절-12절/ 1984. 10. 31. 수새벽 선지자 2016.01.02
526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3장 15절/ 1981. 5. 17.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
525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4. 11. 19. 월새벽 선지자 2016.01.02
524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1절-32절/ 1984. 11. 25. 주일오전 선지자 2016.01.02
523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2. 1. 29. 금새벽 선지자 2016.01.02
522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4. 12. 4. 화새벽 선지자 2016.01.02
521 하나님과 동행/ 로마서 12장 1절-2절/ 1980. 4. 16. 수새벽 선지자 2016.01.02
»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5장 21절-24절/ 1985. 7. 28.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
519 하나님과 동행/ 창세기 6장 9절-12절/ 1988. 4. 10. 주일오후 선지자 2016.01.02
518 하나님과 동행 열 가지/ 창세기 5장 1 절-32절/ 1984. 11. 23. 금새벽 선지자 2016.01.02
517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 유다서 1장 5절 상반절/ 1981. 5. 27. 수저녁 선지자 2016.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