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

 

1981. 5. 27 밤 (수)

 

본문: 유다서 1장 5절 상반절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모든 것은 인본대로 됩니다. 욕심이나 기쁨이나  평가를 인간 지식으로 가지면 멸망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야 신앙 생활이  바로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우리가 범사를 알더라도 자기가 당한 현실에 해당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필요한 것이 빠짐없이 구비됐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많은  현실을 만나고 또 1년을 두고 말한다면 생각지도 못할 많은 현실을 만나지만 그  많은 현실마다 해당되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현실을 만나 가지고 ‘어떻게 하면 내 소원의 성패가 이루어지느냐, 또  어떻게 하면 돈에 유익과 손해가 되느냐!’ 하는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은 성령  없는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공로로 중생된 사람으로 성신의 감화 감동으로 사는  사람은 ‘이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느냐’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도 고요히 한번 생각해봅시다. 많은 말을 듣고 기분을 흥분시키고 우리 속에  부패성을 따라서 기절할 만큼 좋아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인  진리 외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또 생명과 평강도 없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고요히 ‘현실이라는 이 문을 통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움직였는가? 돈을 생각하고 움직였는가, 어떤 인간을  생각하고 움직였는가, 내 감정을 따라서 움직였는가, 권세에 따라서  움직였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천언 만언을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밤에 이 말씀에서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도 모르면 이 시간이 지나가면 생각이 나겠습니까?  고요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에게 당면한 이런 저런 사정이나 물질이나 인간이나 어떤 피조물을 생각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았으면 두 말할 것 없이 그것은 죽은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하여 마음이  새로워질 때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 현실을 당해서 자기나 인간이나 어떤  피조물로만 급급한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찾겠습니까? 천부당  만부당합니다.

공연히 허영과 허욕으로 날뛰지 맙시다. ‘아, 앞으로 별별 현실을 닥칠 때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현실 생활을 하겠다!’ 이렇게 거머쥐고 사는 그 사람을  하나님이 버리지 않습니다.

말세가 되면 자기 귀를 즐겁게 할 많은 스승을 찾는다 했는데 그래봤자  소용없습니다. 그저 내게 닥치는 현실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비로소 생명 생활은 시작되는 것이고, 다른 걸 생각했으면 벌써 사망으로  탈선됐습니다.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온갖 기적으로 인도해내셨지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의지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음으로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는 사람을 만들어 세상에서 나오게 할 때  우리는 어떤 파란을 겪었습니까? 녹아서 없어질 만한 많은 여로를 거치지  않았습니까? 이런데도 우리는 현실에서 하나님은 생각지 않고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보다도 제 뜻이나 어떤 인간의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매장된 것처럼 몇십 년 신앙 생활해도 세상  놀음하다가 멸망이나 받지 세상을 초월한 심판 너머 하늘나라의 수입은 하나도  가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요한계시록 13장에 말세에 믿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굉장한  역사가 땅 위에 일어나는 것을 증거하려고 했는데, 그것보다는 우리에게 당면한  구원 성취에 대해서 증거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엑스포 74’ 에서 빌리그레함 목사가 운동할 때 굉장히 많은 사람이  모였었는데 과연 구원이 될 만한 길을 가르치던가요? 나는 거기서 길을 얻지  못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디다.

어리석게 눈에 보이는 크고 많은 것, 피조물만 보이고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은  무시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앞으로 판단합니다. 보이는 모든 것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크게 여기고, 더 참되이 여기고, 더 두려워하고, 더 의지하고, 더  바라보면서 상대하는 사람을 찾으려고 창세 후 6천년 역사를 하나님이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병석에 누워서 깨닫고 생각한 것은 이제는 인간의 귀를 즐겁게 해서  감정이나 배불리는 것은 증거할 시간이 없고, 구원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간단 간단하게라도 증거해서, 마치 무덤에 넣고 돌담을 쌓아서 가려 있는  나사로를 살려내는 것처럼 주님과 우리 사이에 돌담처럼 가려진 죄악을 하나씩  둘씩 헐면 시체 같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차차 가까워질 것이고, 소리도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나사로가 살아났지만 베에 묶여 있으니 팔을 펼 수가 있습니까, 다리를 펼 수  있습니까, 숨을 쉴 수가 있습니까? 매인 것을 하나씩 풀어주니까 말하고 뛰기도  하고 사람 노릇을 한 것처럼 이제는 세상 밧줄에 매인 것을 풀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나서 창세기 1장부터 계속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5절부터 17절까지 에덴동산에 대해서 다섯 가지를 간단하게  말씀했습니다.

아담 하와에게 ‘너희에게 다른 곳은 저주와 사망의 곳이요 에덴동산에서만 나와  같이 있고 영생할 수 있다.’ 하시고 에덴 동산을 처소로 정해주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형식으로 주신 것이니 곧 우리의 에덴동산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닥친 현실은 자기의 에덴동산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함으로  만들어 주신 내가 살 거처인 줄 아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그러나 이 현실의  가치와 중요성과 자기와의 관련성을 깨닫는 것은 심히 어렵습니다.

천 마디 말을 해도 소용없고 다만 어떤 현실이든지 자기에게는 제일 좋은  처소요,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는 현실로 인정하는 사람이 성신의 사람이요,  천하를 점령하는 것보다 큽니다. 이게 믿음이요, 이게 능력입니다. 여기에  마음을 두고 나가면 사탄은 근방에 오지도 못합니다.

그 다음에는 에덴동산에서 할 일 네 가지를 말했는데, 첫째는 동산을 다스릴  것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현실을 다스리고 현실에 피동되지 말라는 것인데 어떤  현실에서든지 하나님이 명한 대로만 하면 승리가 됩니다.

에덴동산을 다스리라고 했으니까 내 현실에 칼이 오든지 돈이 오든지 딱한  사정이 오든지 영광이 오든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는 그 자가 하나님  아들이요 이것이 세상을 점령하는 방편입니다.

말하라면 말하고 말하지 말라면 안하고,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거절하라면 거절하고, 호통치라면 호통치고, 취하라면 취하고 버리라면 버리는  이것이 자기 현실을 다스리는 것이요, 이것이 천하와 영계와 모든 피조물을  점령하는 권세요, 방편입니다.

현실만 다스리면 모든 피조물은 다스림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내가 현실을  다스리는 것은 모든 피조물의 통치권을 받는 것이 됩니다.

춤 좋아하는 사람은 춤 이야기 하면 기분 좋고, 돈벌이 하는 사람은 돈벌이하는  말을 해줘야 좋아하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 좋아하시는 대로 살까,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 어떻게 하면 이 구원에 다 투자하고 갈까!’ 하는 설교를  하니까 오랑캐가 됩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속에서 구역질이 나고, 부아가 치밀어 반항심이 나오고,  설교하는 사람이 아주 밉상스러워지는 미움이 생깁니다. 마귀 때려잡는 말을  마귀가 좋아할 턱이 있습니까?  우리는 근본 목적을 바꾸어야 됩니다. 팔방 미인 모양으로 닥치는 현실마다  창기같이 상대해서 수입을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멸망할  사람이 미련하게 보는 것은 돈도 권세도 사람도 얻을 수 있는 현실을 하나님의  뜻대로만 북북 걸어가라고 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도 이것이 천상 천하의 모든 피조물을 점령하는 점령권이요, 무궁세계에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 은혜로 충만시킬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또 에덴동산에서 할 일 중에서 둘째는 무엇인가? 순서로는 셋째인데 동산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지 않은 것은 못 들어오도록 하라는  것인데 이 말씀도 알기가 어렵습니다.

동산을 지키는 것은 자기 현실에 하나님이 허락지 않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현실에 대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그것은 내  현실이 됩니다. 원수가 칼을 들이대는 그곳도 내가 살 곳이요 내 좋은 처소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용납치 않는 것을 용납치 않으려면 안 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아는 사람은 환난이 와도 승리하지만 귀나 즐겁게 하려고 하는  신앙들은 세상 좋은 것이 오면 좋아하다가 하늘나라의 좋은 것이 오면 그만 삶아  놓은 채소처럼 늘어져서 일생을 헛된 것으로 고백하고 마지막에 패전하고  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실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용납치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생각 마음 뜻 소원 성질 행동 말을 용납치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만 용납하는 이것이 우주와 영계를 파수하는 실력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일반 과실은 먹어라 했습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업, 명예, 지위, 권세, 출세, 향락, 쾌락을 힘있는 대로 취하면 그것은 양식도  되고 힘도 되고 그것으로 우리가 자라기도 합니다.

이렇게 에덴동산에서 실컷 먹고 살 수 있게 하셨지만 마귀 미혹 받아서 선악과  먹으면 좋은 줄 알았는데 그게 정말 좋았습니까? 우리는 현실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족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금하는 과실은 먹지 마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실에서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사업이든지 취직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거리끼는 죄가 되는 취직이나 사업이나 말, 수단, 교제, 활동, 열심 이런  것이 마치 하와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보였던 선악과처럼 하나님에게 거리끼고  하나님 법에 위반되는 것이지만 꼭 해야 좋을 것 같이 보입니다.

‘아, 하나님 때문에 나는 참 낭패다. 예수만 안 믿으면 할 수 있는데 믿기  때문에 못한다!’ 하는데, 만일 그걸 하는 날이면 그것 때문에 자기를 망치고  맙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겼습니다. 우리는 여인의  후손이요 불택자는 뱀의 후손인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밤낮으로 악령과  전투는 언제나 어디서나 계속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있으니까 여기에는 전투가 없겠지!’ 아닙니다.

원수가 네 집안 식구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가족끼리  있어도 ‘주여, 여기도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우소서!’ 또 친밀한 친구, 친밀한 부부, 친밀한 형제, 친밀한 동지와 있을 때도 ‘주여,  여기에도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투가 있습니다.’ 또 ‘혼자니까 아무 일 없겠지!’ 아닙니다. ‘내 속에도 뱀의 후손이 있고  여인의 후손이 있습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이 있습니다. 이 전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여 도우소서!’ 자기에게는 이 전투가 계속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이 전투는 힘만 쓰면 반드시  이긴다고 말씀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고 전투하는 사람은 성령이 충만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합니다. ‘이제 너는 깼다. 내가 네게 모든 것을 맡길 만하다!’

여러분들, 성령은 지금 어떤 역사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해서 지키게 합니다. 여기에서 큰 능력을 얻고 큰  은혜를 입는 것이지 몸이 화끈한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다 헛됩니다.

내가 아는 어떤 기도원 원장은 ‘아, 나는 성신의 불이 배에 왔는데 배가  뜨거워서 웅크리고 훅훅… 이랬다’ 하던데, 내가 집회를 하면서 진리를  말해주니까 그때는 그분도 깨달았지만 또 얼마 후에는 그대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역사는 무엇이냐?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밤낮  계속된다는 이것이 긍정이 되고, 이 싸움은 주님 앞에 도움을 구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을 가지고 달려들어서 이기려는 그것이 성신의 충만입니다.

그 다음에 3장 16절로 17절에는 여자에게 세 가지, 남자에게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여자는 해산하므로 구원 얻는다 했습니다. 이것은 타락에서 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이만한 애로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또 남편 사모하기를 교회가 주님을 사모하듯이 해야 됩니다. 그러면 여인의  의무는 자기 남편을 하나님처럼 사모할 수 있도록 배후에서 노력해야 가정  구원이 완성되지 그전에는 안됩니다.

또 아내는 남편에게 다스림 받아야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다스리듯이 남편이 아내를 완전성 온전성으로 통치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 아내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스린다는 것은 ‘여인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하나님이라.’ 했는데, 남편이 하나님에게 다스림 받는 것으로서 아내를  다스리면 아내가 남편에게 다스림 받는 것이나 하나님께 다스림 받는 것이나  같습니다. 이렇게 남편이 중보자가 되는 것이 가정교회요, 결혼의 목적도 이렇게  흠 없는 교회를 이루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남편은 하나님만을 사모하고 하나님께만 온전한 소망을 가지고,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소망을 가지는 이것이 가정교회입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다스림을  받는 남편에게 아내가 다스림 받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다스림 받은 것이요,  이것이 흠 없는 교회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또 남편은 아내의 사모의 대상이 되어서 아내가 남편을 주님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되는 이것이 가정교회의 완성입니다.

또 남편은 하나님에게 자기가 다스림 받은 그대로 아내를 다스려야 가정교회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또 남편은 수고해서 먹을 것을 담당한다 이랬습니다.

간단하지마는 가정에 대해서는 이렇게 되면 천국 가정이요, 이것이 가정교회요,  이것을 떠나서 인간끼리 아무리 재미있어도 소용없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가인의 믿음과 아벨의 믿음이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 생애에서  발생된 감정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접촉되는 주위 환경에 피동되어서  하나님을 섬겼고, 아벨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섬겼습니다.

모든 교훈의 풍조와 이 세대에 물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세상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가인의 업은 농업인데 ‘이게 보배니까 이것으로 하나님  섬기면 좋지 않겠느냐!’ 이렇게 자기와 자기 환경이 합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독자가 세상과 합작해서 연구 발명된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가인의  자손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껍데기는 성경이요, 그 다음은 영감입니다. 이렇게 위로부터  내려온 것을 따라서 섬겨야 합니다. 그러니까 가인과 아벨이 형제간이지만  교리와 신조를 두고는 생명 끊어지는 데까지 투쟁했습니다. 어떤 것이든지  양보할 수 있지마는 교리와 신조는 하나님의 뜻이요 진리기 때문에 가까운  형제끼리 원수가 되고 목이 끊겨도 팔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오늘은 설교를 들으려면 이걸 들어야 합니다. ‘아, 여기는 지금 하나님 좋은  것을 중점으로 하느냐, 인간 좋은 것을 중점으로 하느냐? 하나님 기뻐하시는 걸  중점으로 하느냐, 인간 기뻐하는 걸 중점으로 하느냐? 여기는 천국에 대한  준비가 중점이냐, 세상에서 예수 믿고 잘 사는 것이 중점이냐? 성경의 도리를  근거해서 하느냐, 문체와 광채있는 세상 말로 하느냐?’ 이것은 따져보면 알 수  있습니다.

5장 22절에서 24절에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아이 낳고 몇  해를 더 살다가 죽었다 하는 것을 기록해놨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3백년을  동행하면서 자녀 낳고 살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심으로 산 대로 승천했습니다.

우리에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에는 사망이 없는 영생이라는 것을 계시해 주시는  계시 인물이요 계시 기관입니다. 달리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만 수입이 있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좋은 것이라도 멸망선 이하에 있는 것이요, 멸망을 뚫고 올라가는 것은  많든 적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뿐입니다. 이것만이 멸망을 꿰뚫고 생명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6장에는 무엇이 가장 좋으냐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냐, 세상 어떤  것이냐! 또 무엇을 보다 더 좋아하느냐? 돈보다 하나님이 좋으냐, 하나님보다  돈이 좋으냐! 무엇을 제일 좋아하느냐 하는 것과 또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네가 하느냐, 너  좋아하는 네가 것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은 전부 하나님보다 세상에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 다음으로 알았던 사람은 노아 여덟  식구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좋은 것과 자기 좋은 것이 마주칠 때 저 좋은 것을  취한 사람이 홍수에 멸망한 사람들인데 오늘도 이대로 심판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천하에 노아 여덟 식구만 빠졌으니까  얼마나 외로우며 얼마나 독보적인 걸음입니까? 그래도 세상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신앙 생활해 나갈 때 서부교회 교인들이 다 달아나고 천하 사람이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지 않겠다는 것을 노아에게 배워서 단단히  결심합시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밤 10시가 넘어가면 안면 방해 되니까 큰 소리로 기도는 할 수 없지만 밤  10시까지는 고함을 질러가면서라도 마음이 확 트이도록 여기에 대해서 확정짓는  기도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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