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책망받은 이유

 

1984. 4. 19. 새벽

 

본문: 마태복음 16장 21절∼26절  이때로 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자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목숨을 바꾸겠느냐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그 형편을 말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거기에서 자기 소견을 말한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뜻 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아서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는 이 고난이라는 순서를 통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고. 또 고난 없이도 이루는 순서도 있지마는 이번에는 고난 없이는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없는 이런 순서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하신 것도 우리들을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지 아니하시고 그런 십자가 못박히시는 어려운 일을 닥쳤으면 오해 잘하는  이 모든 제자들이나, 우리들이나, 또 우리를 유혹시키고 있는 이 악령의  유혹들이나 모두가 다 합해 가지고 '보라, 예수님이 언제는 큰 소리를 텅텅  했지마는 결국은 그 세력들에게 못 이겨서 다 절단나고 말지 안했느냐?' 이렇게  오해를 시켜서 우리를 어지럽게 할 것이기 때문에 미리 알려서 말씀을  하신것입니다. 내가 얼마 후에는. 며칠 후에는  모든, 그때 육체의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유대교의, 바리새교 유대교 그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아서, 현재의 교권을 잡고 있는 그 모든  서기관, 제사장. 바리새교인들 그분들에게 오히려 박해를 당해서 죽게 될 것이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미리  하시지 안하시면 우리가 그 면에 대해서 또 빛을 받지 못하고 어두워서 악령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이런 일을 닥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주님이 안 당하려고 하시면 안  당합니다. 주님이 뭐이런 일을 꼭 당할게 뭐 있습니까? 안 당하실라면, 주님이  이런 일을 당하지 안 하실라고 하시면 누가 이런 일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것은 베드로가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23절에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베드로가 그 말  하는 것을 들으시고 돌아보시면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인도를 딿고 주님의 뜻을 이룰려고 할 때에는 평안함의 그  순서를 통과하는 일도 있지마는 또 고난을 통과하는 일도 있습니다. 대개는  어려움의 노력이 없으면 좋은 결과가 맺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수고 없이 성공이  있을 수 없고, 수고 없이 승리가 있을 수 없고, 또 수고 없이 건설이 안 됩니다.

수고 없이 곡식이 나올 수 없고 또 수고 없이 그 농사를 바로 가꾸어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 가지가 다 그런 것이니 신앙생활에도 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구원을 성공하시는 그 인도를 따를라고 하면 필연적으로 그 어려움이  옵니다. 그 어려움의 종류는 다르고 또 어려움의 양은 다르지마는서도 따져 보면  심적 어려움이나, 육적 어려움이나 경제적 어려움이나 또 절제적 어려움이나 또  속화 되지 않으려는 고독적 어려움이나 뭐 별별 그 어려움을 거쳐서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구원을 이룰 수 있고 우리에게 맡기시고 원하시는 그 뜻을  이루어서 죄와 이 불법과 하나님을 대립하는 이런 사망 속에 빠지지 안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사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럴 때에 옆에 있는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말하기를, 이렇게 이 어려움 당하는  일, 어려움을 당해도 일반적 어려움이 아니라 죽임당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일인데 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버림을  당해서 외로워져 죽게 되는 이 어려움을 당하는 그 일에 대해서 베드로는 아주  동정했습니다. 동정을 해서, '주님, 이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주님이  당하지 안할라면은 당하지 안할 수 있습니다.' 하면서 주님을 동정하고 주님을  위하는 그런 간곡한 말을 베드로가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을 동정하는  말이요. 주님을 또 위하는 말이호, 주님을 사랑하는 말이요, 주님을 아끼는  말이요, 주님에게 그 어려움 당하는 것을 마음에 원치 안해서 그것을 면하도록  하려는 말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말을 듣고 주님이 하신 말씀이 23절부터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대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에 어떻게 말할 것인가? 우리는 그런 일을  당면하면 우리는 어떻게 말을 할 건가? 그런 사람을 우리가 도리어 찾지 안할  것인가? 또 그런 사람을 우리가 있기를 원하고 없는 것을 오히려 섭섭하게 여길  수 있는 우리들이 아닌가? 우리는 이럴 때 이것이 귀로인데, 이 갈래길인데,  잘못해서 여기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걸어가지 안하고 이 악령이 우리를  유혹해서 걷게 하는 이 걸음으로 길을 삐뚤어지게 바꾸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그럴 때에 걸어가신 길이,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첫째 하는 말씀이 이 말씀이었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왜  그렇게 동정, 진정 동정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아꼈고, 동정했고, 위했고,  참 사랑했고, 그 고난 당하는 일을 진정 자기가 당하는 것처럼 안타깝게 여겨서  '이런 일을 멀리 하십시오. 이런 일이 닥치지 않게 하십시오' 하는 이 말은,  자기는, 자기가 그렇게 당하지 않도록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다고 하면 자기가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만일 자기가 무슨 어려움을 당해도 주님에게 이런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할 수만 있다면 했지마는서도 자기로서는 그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님은 이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실라면 하실 수  있습니다. 당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안 당하실라면, 주님은 안 당하려고  하시면 안 당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참 동정하는 말이요, 주님을 아끼는 말이요, 주님을 위하는 말이요,  주님의 그 고난을 심히 자기 고난보다도 더 안타깝게 여겨서 하는 말입니다. 뭐  베드로가 여기에 '이런 일을 멀리하십시오. 당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는 그 말은  얼핏 들으면은 주님에게 대해서 무슨 명령하는 것 같고 하나 충고하는 것같이  보여지지마는 베드로의 전 생애를 본다면 그가 자기힘으로 해서 그 일을 하다가  나중에 죽임을 당하든지 끌려가서 무슨 형을 당하든지 할지라도 자기로서 그런  어려움을 막을 수 있다고 하면 베드로가 막았을 것입니다. 말고의 귀를 깎은  것을 봐도 그의 성격을 알 수 있고, 언제나 그 적극성인 사람이고 또 주저하지  안하고 즉시 행동을 개시하는 그런 좋은 특성을 가진 베드로입니다.

 이렇게 말을 할 때에 주님은 거기에서 첫째 하신 말씀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것 참 아주 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아주 하기 어려운 그런 말씀을 주님이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안했으면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지 안했을 것이고 또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지 안했으면 이런 경우에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하는 그것을 우리가 모르기  쉽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도 이런 경우를 많이 닥칩니다. 자기 신앙 양심대로 또 자기가  깨달은 성경 명문대로 하려고 하면 참 세상적으로는, 자기중심적으로는 아주  어려움을 당하는 그런 일을 우리가 닥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과 같이 우리 옆에서도 반드시 이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멀리 하도록  하라는 이런 그 동정의 말이 반드시 우리에게 있습니다. 동정의 말이 멀리 있는  사람은 올라서 못하지마는 가까운 가족에게서 또 가까운 신앙 동지에게서,  가까운 신앙의 벗 신우에게서 이런 일이 반드시 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갈라고 할 때도, 그때도 꼭 요와 같은 성격적인 그런  동정의 말이 선지 생도들에게서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승리한 엘리사도 보면  아주 그럴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따라 갈라고 하는데에 방해가 될  때에는 뭐 사정없이 냉정스러웠습니다. '나도 안다 잠잠하라. 나도 안다.

너희들은 잠잠하라.'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냐 자기냐 하는 이 두 가지를 두고서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동정하고,  자기를 더 생각하는 이런 참 따뜻한 그런 동정하는 말이 우리에게는 반드시  한자리에 있습니다. 있을 때에. 엘리사도 그것을 끊지 안했으면 그 엘리사는  결국은 신앙 성공을 하지 못하고 고만 일반 선지 생도들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때에, 요 주님의 뜻과 자기에게 대한 모든 것과 이래서 주님 중심이냐  자기중심이냐, 요 두 가지가 서로 견제하고 있을 때에, 이렇게 서로 이렇게  견제하고 있을 때 그때에 주위 환경에서는 알지 못하는, 꺼꾸로 아는 세상을  우리가 가지고 있고, 꺼꾸로 아는 가족들을 가지고 있고, 꺼꾸로 아는 모든 이  이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웃에게서는 반드시 하나님 중심인 이것을  버리고 인간 중심으로 바꾸라고 하는 그런 따뜻한 동정의 말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럴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이 형편에서 똑똑히 우리가, 그때에 더듬을 것 없고,  더듬을 것 없고, 우리가 그저 이런가 저런가 주저할 것 없고, 그저 확정 짓고  지체하지 안하고 바로 단정하고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럴 때 첫째 하는 말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 말씀을 먼저 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에는 입으로 그 말은 하지 안 할지라도, 사단이라고 말은 하지  안할지라도 우리는 속에는 판단해야 되겠습니다. 이거는 이 사랑하는 형제가  하는 것이 아니고 형제가 사단에게 미혹 받아 가지고서 이와 같이 나에게 대해서  하는 것이니까 여기에서 내가 이 미혹을 거절해야 나도 살고 또 사단에게  붙들리고 있는 이 형제를 것게서 구출할 수가 있지, 만일 내가 그것을 승락해서  용납한다고 하면 자기 구원도 사단에게 이용당하는 그 사람의 구원도 절단난다는  요것을 우리가 우리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뭐이냐?  이것이 원수가 네 집안 식구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가장 우리 가깝게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유혹이 제일 많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든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번연히 알고, '이거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게 이리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리 가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냐 인간의 뜻이냐, 하나님을  위함이냐 자기를 위함이냐 하는 이 두 갈래길이 우리에게는 계속 현실마다 놓여  있고, 뚜렷이 또 절정적으로 놓여 있는 때도, 아주 최고도로 높으게 이 갈래길이  돼 가지고 있는 것도 있지마는서도 쉽고도 언제든지 이 갈래길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보다도 그  사람의 육과 그 사람의 형편을 생각해서 동정하는 그런 일들이 많습니다. 본인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 소리를 못 하는 그런 사람 되기 쉽고, 또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이럴 때에 이 베드로와 같은 유혹시키는 이 사단 노릇을 하는  이런 일 하기가 쉽지, 그럴 때에 주님이 말씀하신 거와 같은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어려움, 주의 뜻을 버리고 자기 위하면 어려움이 없이 자기 위함이  되어지는 이 귀로에서 우리가 베드로와 같은 그런 사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이 어렵습니다.

 대개 보면 아무리 진리 문제가 있고, 분명히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고도 그로  인해서 좀 어려움을 닥치면 고만 서슴지 않고 육의 동정으로 나 아가고 있는  것이 주변의 사람들입니다. 그 뭐 자기 앞에 그런 일 닥켰을 때에 아내가 자기  신앙을 도우리라고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다 우리였습니다. 했지마는, 그런 생각 가지는 그런 것은 판판이 끝까지 다  마귀의 역사만 이루었고 파괴만 했지 유익이 없습니다.

 그럴 때에 육의 동정으로, 그만 육을 따라서, 육을 따라서 합세를 합니다.

본인도 그것 닥쳤을 때에 '어떻게 하면 이 일을 면할 수 있겠느냐?' 그 일을  속에서도 견고히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지금 이 갈래길 가운데 서는 나를  동정하는 이가 없느냐? 어떻게 다른 길이 없느냐?' 이렇게 본인도 약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럴 때에 그 참 주기철 목사님의 사모님과 같이 그렇게 힘을  주는 그런 아내라면 정말로 목회자의 사모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아무리 진리 문제라도 그만 육적의 동정으로서 먼저 진리와 함께 하는 사람의  대적이 되고 원수가 됩니다.

 제가 요새 말을 들었는데, 우리 진영에서도 반드시 자기 사욕을 행하려고 할  때에는 총공회를 헙니다. 총공회를 헙니다. 그 사람이 지금 원하고 주장하고  나아가는 그 길이 사단의 길이냐 성령의 길이냐, 그것을 우리가 따져 볼 때에  사단의 길로 나아가면서 총공회를 대적하면 총공회가 바로 섰다는 증거요, 또 그  사람이 주님의 인도를 따라서 가면서 총공회를 헌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섰으니까  총공회가 삐뚤어졌다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이 어떤 선배나 동역자를 이렇게 헐  때에 그 사람이 삐뚤어진 길을 가면서 헐면은 그 상대방이 바로 섰다는  증거입니다. 또 그 사람이 바른 길을 가면서 헌다면은 상대방이 삐뚤어졌다는,  그 선배든지 동역자가 삐뚤어졌다는 것입니다.

 요새 내가 말을 들었는데 저 ○○○○에서, 동역자 한 분이, 참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 안수를 할 수 없는 사람이고, 안수를 할 수 없어서  그러나 오랫동안 그러니까 그 사람이 일하기 위해서 그래라도 해 가지고 좀 일을  할 수 있을까 해서 안수하는 일을 그것을 제가 강조해 가지고 했습니다. 그저  우리 다 뭐 별사람이 없고 특별히 그렇게 원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이 또 직분을 맡기면 직분을 감당하지 않느냐 이래서 됐는데, 딱  목사 안수식 딱 받자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저 산골에 있는 교인 몇  사람에게, 몇 사람 있는 그 교회를 근거해 가지고 그 교회가 교인들이 모두  ○○읍으로 옮기자 하니까, '○○읍으로 옮기자' 한다 하면서 벌써 ○○읍에  예배 처소도 마련하고 벌써 옮겨 가지고 예배를 한번 봤다 말입니다. 예배를  한번 봤답니다. 그 본 것을 총공회 위원들은 들었는지 모르지마는, 위원들도  그런 소식을 못 들었으리라 생각하고, 들었으면 내게 말해, 나도 또 못  들었습니다.

 이러니까, 자기의 그 무슨 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고 또 선배고  총공회고 없이 그와 같이 나가는 그런 일을 하고, 또 그럴 때에는 반드시  헙니다. ○○ ○○에, ○○읍에 ○○○목사님이 거기서 목회하고 있는데  ○○○목사님이 뭐이 틀렸다, 뭐이 틀렸다, 자기에게 잘못됐다, 틀렸다 이렇게  말한다는, 뭣뭣이 틀렸고 자기에게 잘못했다고 이렇게 하면서 거기에 교회를  세운다고 한다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거기에 대해서 좀  마음에 분개했습니다. 주님도 반드시 분개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서 '○○교회는 ○○○목사님이 계속 있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가졌는데 또 ○○교회에서도 이 ○○○목사님을  우리 교회 그대로 계속 위임하도록 해 달라는 그런 말을 전화가 몇 번이나 오고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제직회에서 의논해 가지고 하라 내가 그렇게  답을 해서 보냈습니다.

 죄악이 많은 곳에 은혜도 많고, 또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마귀의  역사가 없는게 아니라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런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또 좀 빌라델비아 교회나 그런, 그런 교회들, 좀 깨끗이 살라고  하는 교회들에게는 반드시 두 당파가 있어서 하나는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는  사단에게 속해서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육적으로 말하면  ○○교회에서 몇 미터 안 떨어졌답니다. 몇 미터 안 떨어졌으니까 ○○교회  교인들이 거기에 올라면 올 것이고, ○○교회 목사는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서  진리로 말하니까 육체를 죽이는 것이고, 옛사람을 죽이는 역사를 하고 있고,  저게서는, 옛사람을 죽이는 역사를 하니까 마음에 섭섭하고 반항이 나오는데,  저게는 육체의 사람을 살려서 기르고 동정하는 역사를 하니까 많이 따라 나갈  것입니다. 나가는데, 나가는 것은 나가니까 좋습니다. 나가는 것은 나가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 안 해도 ○○에 거기에는 ○○에는 교회를 하나 세울라고  했었는데 의논해 가지고서 그렇게 해서 세울 수 있습니다. 세운게 나쁜게 아니라  그 중심이 어떠냐 하는 것이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말하면 우리가 못  하게 할 터이니까 딱 해 놓고 지금 사후에 보고를 뭐라고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미리 말하면 안될 터이니까 해 놓고 뒤에 사후 보고를 이렇게 하자 하는 그  자체가 궤휼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럴 때에, '사단이다.' 이렇게 그런 귀로에 있을 때에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이렇게 했는데, 우리는 그런 형편을 닥치면 자기를 동정하는  그런 사람을 찾는 그런 인간이 되기 쉽고, 또 제삼자로서도 그럴 때에 베드로와  같이 이런 십자가의 역경이 있는 그런 길은 가지 말고 이렇게 그 사람 좋도록,  그 사람의 인본주의 그런 것 좋도록 그렇게 동정하는 이 사단이 되기 쉽습니다.

이 사모들이, 예수 믿는, 예수 믿는 사모들 쳐 놓고서 사단 안 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봐야 되지, 목회자가 아내가 거기에서 어떻게 해 가지고서 그렇게  동정해서 좀 자기를 바른 길을 걸어가도록 해 주는 그런 아내가 있기를 바라는  그런 것은 아주 천부당 만부당한 생각입니다. 나도 그런 생각 가지고 많이  속았습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범죄케 하는 일이 없을 수 없는 일이고,  만일 그렇다면은 자기가 양떼가 되고 자기 아내가 목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에 자기냐 주님이냐, 주님의 뜻을 생각하느냐 자기를 동정하느냐  하는 여기에서 용단을 내지 못하면 우리는 패망합니다. 여기에서 용단을 내지  못하면 우리는 패망합니다. 우리는 그럴 때 그런 사람을 찾기 쉽습니다. 만일  그럴 때에 옆에 있으면, 어떤 사람이 있었으면 '이럴 수가 어디 있겠느냐? 이럴  수가 어디 있느냐? 그러면 총공회 의논을 해 가지고서 승락을 받아 가지고서  이렇게 하는 것이지, 총공회 지금, 이제까지 수십 년 동정을 받아 가지고서,  보조를 받아 가지고 하던 그 교회서 말도 없이 이렇게 하는 길이 어디 있으며,  또 그래 안 해도 안수 받자마자 이와 같이 안수 받았으니 안 돼면' 그 사람이라  '안 되면 나는 딴 길을 자유로 걸을 수 있다' 하는 그 사람이오. 그 사람에게  대해서 우리가 얼마든지 소망하고, 낙망하지 안하고 소망하고 끝까지 할 수  있지마는서도 사단은 사단으로 보아야 되지 사단을 사단으로 보지 안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길렀던 사람이, 자랐던 사람이 이제 다른 데 가 가지고서 물로  해 가지고서 불법적으로 목사 안수를 턱 받고 이래 나서 가지고 이제 되면 '안  되면 말지.' 그라고 난 다음에 반드시 그 사람이면 총공회 헙니다. 제가 다른 데  목사 안수를 받아 가지고서 딴 길을 갈라 해도 이 총공회에서 '잘한다.

어떻게든지 좋다.' 이라면 좋아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건 그래서는 안된다.'  이라면 그만 총공회 헙니다. 총공회를 허는 것이 어떤 자가 헐며 무슨 뜻에서  헐며 무슨 입장에서 허느냐? 제 입장과 소속이 어찌 돼 가지고 허느냐 하는 요걸  봐서 사단과 성령을 구별하지 못 한다면 우리는 가는 길은 실패합니다.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두번째 하는 말씀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 '아 너는 나를  동정한다. 참 너만이 나를 동정한다. 너만이 내 편이고 나를 생각한다.' 이렇게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그걸 자기 동정하는 자기의 동지자로 이렇게 생각하는 그  썩은 생각, 이 참 어두운 생각 사람들은 이 어두운 생각에서 망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파가 망할 때마다 다 이렇게 망했고, 신앙가들이 망할  때마다 다 이렇게 망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감옥에 들어 있을 때에, 오종모라고 하든가 그 사모님이 아주  미인이라 합니다. 얼굴이 예쁘고 아주 또 애교가 있고 사람이 또 민첩하고,  이러니까 그 모든 경관들이 생각할 때에 '저렇게 젊은 목사가 아주 아리따운 꽃  같은 미인 아내를 집에다 두고서 같이 있지 못하니 아내 생각이 얼마나  있겠느냐?' 이래 가지고서 '저 아내하고만 좀 같이 붙여 주면은 아내에 애착하는  그 마음에서 아무래도 이 신앙의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이런 신앙 지조가  변동되지 않겠느냐' 하고서 그 사모님이 면접하러 가면은, 그만 면접하러 갈  때에는 아무도 없는 밀실로 보내 그 아무도 없는. 밖에 보이지도 안하고 혼자  독방에 밀실로 보내요. 밀실로 보내 가지고서 얼마든지 의논할 것 있으면  의논하고 나중에 벨을 눌리면 우리가 열어 줄 터이니까 언제든지 그 동안은 뭐  고생도 많이 했으니까 좀 집안 의논같은 것 할 것 하라고서. 동정하라고  이라면서 밀실로 보내요. 그러면 그들은 '이제는 주 목사님이 미혹을 당한다'  이랬는데 그 사모님은 가 가지고 오랫동안 거석하니까 이거 뭐 손톱도 깎아 주고  또 수염도 밀어 주고 또 이 세수 같은 것도 시켜 주고 뭐이든지 자유로 하라  해요, 다. 세수 같은 것도 시키고 다 이렇게 해 주는데 그러면서 하는 말은 장  그말이라. '당신이 여기에서, 이 한국 교회가 다 신사 참배로 말미암아 죽는데  여기에서 당신이 생명을 바쳐서 이 신사 참배를 반대하지 않으면, 제물로 당신이  바쳐지지 안하면 한국 교회는 절단납니다. 당신이 여기에서 제물로 바쳐지지  안하면 나는 당신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러니까, 당신이 주님을  사랑하시고 또 나를 사랑한다면 한국 교회를 사랑한다면 이 신사 참배로  말미암아 죽어 나와야 되지 살아서 나오면 나와는 영원히 서로 대면하지 못할  것이다' 항상 그말이라. 항상 그말이니까 만나면 주 목사님이 거기에서 큰 힘을  얻고 강한 힘을 얻어 가지고서, 실컷 얘기했으니까 이제 뭐이 됐는가 싶어서  갔는데 그 뒤에 가보면 또 그런 것 하나도 없이 더 신앙에는 더 굳게 서 가지고  있고, 이래 가지고서 주기철 목사님을 결국 순교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참 이런 아내가 됐으면 복 있지마는 이런 아내를 기다린다는 것이 마귀  역사입니다. '이런 아내가, 우리 아내가 이런 아내가 돼줬으면 좋겠다, 우리  사모가 이런 사모가 돼 줬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이 이런 가족이 돼줬으면  좋겠다.' 장로나 집사나 자기가 자기 아내가 '이런 사람이 돼 뒀으면 좋겠다.'  여자 여반들은 자기 남편이 이렇게 자기를, '참 주 목사님 사모님 같은 이런  남편이 돼 가지고 자기에게 신앙을 도와 줬으면 좋겠다.' 절대로 자기 이웃에게  신앙의 도움 오리라는 그런 것을 추호라도 바라는 그것이 우리가 사단에게 빠진  것입니다. 그런 걸 바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살려야 되지 거기에서 뭐 삶이  오리라 하는 그런 것을 추호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두번째 말씀은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두번째 하는 말씀이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왜? 주님을 생각했는데, 동정했는데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이렇게 냉정스럽게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우리가 무슨 사소한 일에도 '이래 볼까 저래 볼까?' 반드시 거기에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길이 있고, 또 하늘나라에 참 유익되는  길이 있고 세상적으로 유익되는 길이 있고 꼭 보면 우리는 두 길입니다. 두 갈래  길입니다. 두 갈래 길이 우리 앞에 있을 때에 주님에게 속한 것 하늘나라에 속한  것, 영에 좋은 것, 모든 복음 운동에 좋은 것 그것보다도 자기 개적에게 좋은  것, 세상적으로 좋은 것, 육적으로 좋은 것 사람에게 좋은 것이 길을 걸어가라고  동정하는 이런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 의례히 그런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있기를 기다리는 것. 나도 그게 있기를 기다리고, 누가  동정하면 좋아하고, 있기를 기다리고 그런 걸음을 많이 걸어 나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사니까 경험하고 경험하고 뒤 결과를 보니까 후회되고, 그라고  나니까 후회 되고 이제는 그런 일이 닥치면 그런 일이 있으리라, 그렇게 하는  일이 있으리라, 동정하는 것이 있으리라. 알고 있을 때에 그걸 대적해서  물리쳐야 된다 하는 그것도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참 돌 크듯이 커 나갑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왕으로 계시기 때문에 결국은 사단이 날 뛰어도  결국은 제가 패전하고 우리 구원을 위해서 이용되고 말지 유익은 못 줍니다.

마지막에, 깨닫고 회개하는 마지막에라도 우리는 그것들을 이용하지 우리를  이용하지 못하기는 못합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셋째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도다  하시고' 세번째 하는 말씀이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은,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 뜻만 생각하고, 하나님 편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 편만 생각한다,  요렇게 우리가 이 현실을 당할 때는 반드시 갈래길이라는 이 두 귀로가 있는데  이 두 귀로가 있을 때에 우리가 요 두 귀로에서 내 자신이 어느 길을 택하는지,  내 자신이 어느 길을 택하는지 그것을 우리가 구별해야 될 것입니다. 요 길을  택하나 요 길을 택하나? 자기가 지금 어느 길을 택하느냐 그것을 바로 정확하게  정평을 해야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내가 바른 길을 택하면 반드시 그 상대되는  삐뚤어진 그 길을 가도록 하는 그 세력들이 와서 부딪친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 세력들이 와서 부딪칩니다. 그럴 때에 그것을 물리치지 안하면  우리는 승리를 못 합니다. 물리치는 것은, 물리치는 방법은 그 다음에 간단하게  주님이 그 방법을 이제는 넷째로 말씀을 해 놨습니다. 세 번째는, 요런 입장에  있을 때에는 세 가지 말하라 했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나를 망하게 하는 자로다.' 세 번째는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안하고 사람의 일만 네가 생각하는 자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왜? 베드로가 그와같이 갑자기 사단이 되고,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고,  주님 따라간다는, 하나님 따라간다는 자가 인간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배척하는 그런 자가 되어졌던가 하는 골자를 그 다음에 나타내서 말씀을 합니다.

 '자로다 하시고'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생각하기 때문에,  베드로도 자기를 생각해서, 인간을 생각하기 때문에, 주님을 생각지 안하고,  우리는 어떤 현실이든지 닥칠 때에는 주님이, 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서 이  현실을 주셨다. 어떤 현실이든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서 이 현실을 주셨다.

그러면, 주님이 나에게 선물로 현실을 주셨다. 그러면, 현실을 주셨으니 이  현실을 어떻게 할까? 나를 사랑하셔서 주신 이 현실을 어떻게 할까? 이 현실을  주를 위해서 이 현실을 사용해야 되겠다. 그 현실을 주를 위해서 그 현실을  사용하고, 주를 위해서 현실을 사용할 때에는 내가 거기에서 평안이 있겠느냐  어려움이 있겠느냐? 어려움이 있는 것은 필연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실을 주님이 나에게 나를 사랑함으로 주신 것인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겠고, 사랑함으로 주신 그 현실은 주를 위하는 내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니까 주를 위하는 내가 된 것이, 나를 부인하고 주를 위하는  내가 된 것이 그것이 나를 위함이 되기 때문에 그 현실을 주실 때에는 주를 위한  내가 되고 주를 위해서 현실을 사용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주님이 가신 이 승리의 길을, 영생의 길을, 성공의 길을, 주님이 우리  전부를 대신해서 이 대속하신 길, 멸망에서 구출한 길, 멸망에서 구출하신 이  길을 우리가 따라갈라고 하거든, 주님이 우리를 이끌어 내신 이끌어 내심을  받아서, 이끌어 냄을 받아 갈라고 하거든. 영생을 가는 길을 갈라고 하거든.

다시 사망에, 사망을 벗어나고 사망에 얽매이지 않는 그런 길을 갈라고 하거든,  '나를 따라오려거든' 하는 말입니다.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대속하신 주를 위하지  안하고 자기 위하는 것. 자기를 부인한다 말은 자기 위하는 그것을 버리라  말이요, 주를 위하라 말입니다. 그 위에 쭉 내려오는 것이 여기에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는 말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위해라 그렇게 말하지 안해도  위에서 내려온 말이기 때문에 내나 연속한 말 그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 부인이 뭐이냐? 자기 부인은 현실에서 주님이냐 자기냐 둘 중에  누구냐 하는 그것입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 부인의 반대는 뭐입니까? 자기  부인의 반대는 주님 부인이오. 주님 부인의 반대는 자기 부인. 둘밖에,  갈래길이, 두 갈래길입니다. 갈래길이기 때문에 주님 부인하면 자기 인정하게  되고 자기 부인하면 주님 인정하게 되고 주님을 인정할라면 자기를 부인해야  주님을 인정하게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님도 인정하고 자기도  인정하는 길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우리가 현실을 만날 때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그 다음에는 주님의 법칙에  복종하는 것. 왜 주님을 위하고 주님에게 복종해야 되는가? 뭣 때문에  그렇습니까? 고 위에 하나 일호가 있지. 뭐입니까? 주님의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주의 것. 어데든지 성경은 꼭 한 진리입니다. 한 진리만 깨닫고 꼭 붙잡으면 전  성경이 하나입니다. 한 진리를 바로 깨달으면 모든 성경은 하나입니다. 이렇지  안하고 이 성경은 이렇게 가고 저 성경은 저렇게 가는 그거는 다 이단이요,  그거는 잘못 깨달은 것이오. 성경 깨달으면 마지막은 한 가지입니다. 이러니까,  뭐이런 것 저런 것 많은 복잡한 말을 해야 그게 진리고 많은 다지식이고 그게 또  광문 다학을 한 원만한 것이지, 이렇게 항상 말해야 그거 하나 말한다. 네, 항상  말해야 하나입니다. 이리 가도 마지막에 가 보니까 거기 가고 저리 가도  마지막은 거기 가요.

 그런고로, 자기. 자기를 부인할 것.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부인이라 말은 내나  주님 인정이라 말이오. 자기 부인이라 말은 자기 형편, 사정, 뜻, 주관, 자기  소원, 자기 사정 그것보다도 주님의 뜻, 주님의 형편, 주님의 소원, 주님의 사정  이것을 자기와 바꾸지 안하면 이 걸음은 걸어가지 못 합니다. 바꿔야 되지.

이것을 연습하는 것이 우리 현실들입니다.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는 뭐이 자기  십자가인가? 자기 십자가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  사랑하셨는가? 그것을 우리가 깨닫고, 주님이 이런 순서로 지난 밤에 하신 말씀  주님이 이런 순서로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도 이런 순서로 주님을 사랑해야  되겠다 하는 요것을 깨닫고, 주님이 날 사랑하신 그 방법대로 나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요. 또 주님이 날 사랑하시면서 이렇게 쓰신 그 방편  그대로 주님이 나에게 하나 부탁하신 것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부탁하신 이  부탁이 있으니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요 순서 다는 그것이 자기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데서부터 시작해 가지고서 어떤 순서 어떤  종류의 어려움에서, 희생에서 나를 사랑하셨는가? 그 사랑을 생각하고 나도  주님을 사랑할라 할 때에 그런 모든 현실들이 닥칠 때 그런 현실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날 사랑하신 그 사랑의 상대방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주님이 이렇게 하시면서  나에게 부탁하신 그 형제를 사랑할라 하면 또 요런 순서가 닥치는 것이니까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 요런 순서 닥치는 그것이 자기 십자가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세 가지. 자기 십자가는 세 가지. 주님이 나를 어떻게 어떤  희생으로 나를 사랑하셨는가, 그것을 자기가 기억하는 것. 그러니까, 나도  주님을 어떻게 어떤 처지에서 주님을 사랑해야 될 것인가, 그것을 자기가 고대로  그런 처지에서 사랑하는 것. 또 내가 이렇게 주님 앞에 큰 사랑 받아 구원  받았는데 주님이 나에게 한 마디 부탁한 것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와 같이 말씀하셨으니 주님이 마지막 한 마디 부탁하신  이 어린 양을 먹이고 양을 치고 양을 기르는 여기에. 이 일을 할 때에 또 여전히  주님이 날 사랑하심과 같은 그런 성질의 순서의 형편들이 닥치는 그와 같은  것이. 형제를 사랑하라 할 때에 그런 형편과 사정이 닥쳐지니 그 닥쳐질 그때에,  내가 고때에 고 형편을 내가 달게 받지 안하고 고 형편에서 주님을, 주님을  사랑하면 위하면 고 형편 잘 걸어갈 수 있고, 그때의 대적은 누구냐? 나입니다.

나를 생각하면 할 수 없고, 주님을 바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데에도 날  생각하면 그 형편과, 사정을 날 위해서 사용해야 되겠고, 주님을 사랑하면 그  형편과 사정을 주를 위해서 사용해야 되겠고, 또 내가 현실에서 형제를 구원할라  할 때에 주님을 사랑하면 그 형제를 위해서 그 형편과 사정을 사용해야 되겠고,  나를 사랑하면 그 형편과 사정을 나를 위해서 사용해야 되겠고, 요것이 십자가의  원수 요것이 십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요게서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십자가 세 가지를, 이 세 가지를 지는 것이 요게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요  십자가는 세 가지. 요 자기가 생각하고 세 가지를 자기가 잡고 가는 것이 자기  십자가 가지를 벗어 놓고, 세 가지 벗어 놓으면, 자기를 생각할려면 벗어 놔야  되고, 주님을 생각할라면 요 세 가지를 잡아야 되는 그러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라고 난 다음에 결론을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요거는 변할 수 없는  결과를 말을 합니다. 요 생명은 육의 생명 영의 생명이 다 그러합니다. 육의  생명 영의 생명이 다 그러합니다. 육의 생명만 말하는게 아니고 영의 생명까지를  다 겹쳐서 두 가지 생명을 다 말했습니다. 육의 생명도 요렇게 자기의 생명을  내놓느냐, 생명을 빼앗기느냐 주님을 내 놓느냐, 둘 중에 하나로 갈래길이 되어  있을 때 그때에 주님을 붙들고.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자는 전능자가 그를  보호하시기 때문에 그 생명의 끝 시간이 닥치기 전에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아직까지 죽을 때가 안 됐기 때문에 사자가 그 다니엘을 삼키지  못했습니다. 다니엘 뿐만 아니라 우리도 다 그렇습니다. 그런 일이 우리에게는  더 많습니다. 다니엘에게는 한번 당한 그런 일이 있었지마는서도 우리는 그  계시를 받아서, 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매 많은 밀알이 맺는다는 거와같이  다니엘 같은 그런 입장이 천도 만도 넘습니다. 그럴 때에 내가 주님을 놓지  안하고, 주님을 놓지 안하고 자기의 생명을 주께 맡겨 버리고 주님을 놓지  안하면 주님이 내게 대해서 책임지시고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그  생명이 끊어지는 그 시간이. 그 시각이 일분이라도 되기 전에는 우리 생명을  삼킬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유지된다면 영광만 마련하고 상만 마련하지  우리 생명은 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때에 주님을 놓으면 우리 기한 전에도 죽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을 만약에. 다니엘이 그때 자기 생명을 붙들기 위해서 주님을 부인했다고  하면 다니엘은 사자 구덩이에 안 들어갑니다. 사자 구덩이에 안 들어가고 살아  나왔습니다. 사자 구덩이에 들어가지 안하고 죽지 안했지마는서도 그 뒤에 그  후환이, 다리오 왕이 다니엘의 원수를 진멸하기까지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오.

'너희들이 왜 이렇게 어울려 이랬느냐?' 주목만 했지 그렇지는 안했을 것이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남아 있으면 그 사람들이 그 다음에는 더 견고한 방식을  가지고서 이제 다니엘을 죽일 이렇게 계획을 할 것이고 그때에 하나님의 권능은  같이 하지 안할 것이니까 다니엘은 그들의 손에 죽고, 비참한 죽음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육의 생명도 말씀하신 것이고, 영의 생명도 자기 육의  생명보다도, 주님을 더 생명보다 더 귀중히 여겨서 생명을, 최고의 어려움이  생명인데 생명에도 주님을 놓지 안하고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과 동행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최고의 승리를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생명은  튼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생명 말한 것은 육적 생명 영적 생명  양면의 생명을 다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을 하신 것도 역연 지난밤에 말씀하신 그 말씀을  되풀이 하는 말씀으로서 제가 다른 각도에서 또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모든 경과를. 사랑의 경로  사랑의 경로를 우리가 잘 알아서, 이런 경로로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도  이런 경로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러하신  경로로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도 주님과 같은 이러한 경로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이 날 사랑한 것 같은 그런 경로를  내가 만나면은, 그 경로를 만날 때는 그 경로에게 속해서 주님의 사랑을  버리면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못 됩니다.

 또 주님을 내가 사랑하는 데에 주님이 날 사랑하신 그 경로, 순서에 지나온  모든 그 순서. 순서. 그 순서를 따라서 나도 주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구출하시고 나에게. 사랑하는 자가 나에게 한 가지  소원. 사랑하는 자가 나에게 한 가지 소원을 하시고 한 가지 부탁을 했으니  그거는 내가 아무래도 이루어 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소원하시는 그  소원하는 어린 양을 먹이고, 치고, 먹이고 하는 이 일을 하려고 하면, 또 내가  그 양을 사랑하는 데에는, 형제를 사랑하는 데에는 어린 양을, 양들을 사랑하는  데에는 역연 이 순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님이 날 사랑하신 그 순서 하나, 내가 주님을 사랑할 순서 하나, 주님이  부탁하신 그 양을 사랑할, 형제를 사랑할 순서 하나. 이 세 이 경로를 하나로 해  가지고서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기념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내일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실라고 할 때에 어떤 일이 있어도 거기에서 주님은 부인하지  안하고 사랑했습니다.

 내가, 뭐 그런 일이 많겠지마는서도 여기 우리 교회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저거 남편이 뭐 좀 애도 먹이고 이라고 이라는데도 그 입술에서 원망하는 말 한  마디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또 자기가 가정에 가족들을 데리고 이래도. 다  대학도 시키고 뭐 이렇게 하면서 그 짐을 혼자 짊어지고 다 가도 하나도 불평  없어. 내가 볼 때에 '저 여자는 바보가 등신이가?' 바보는 아니고 똑똑하기는  똑똑해. 똑똑한데, 그래 내가 한번 물었어. '네가 너거 남편에게 대해서 참 지성  열녀인데 어째 그러노?' 내가 이래 물어 봤어. 물어 보니까, '내가 그때  병들어서 꼭 그 병으로서 죽을 병인데, 의사에 가니까 그 병은 수술 안 하면  죽는다 하는데 그때 그걸 수술할라 하면 우리 살림살이를 다 팔아야 되는데  그때에 우리 있는 살림을 팔아 가지고서, 아끼지 안하고 다 팔아 가지고서  치료하지 안했으면 난 죽었을 터인데 치료해서 내가 살았습니다. 우리 남편이  내가 죽을 경우 있을 때에 있는 것 전부를 다 팔아 가지고서 나를 구출했습니다.

내가 그 사랑을 잊지 못합니다.' 내가 고 말이 나올 줄 알고 물으니까 그렇게  대답해. 그래 내가 '참 네가 은혜를 잊지 안하고 은혜를 감사하는 사은의  사람이니 너에게 평강이 있겠다. 네가 피곤치 않겠다, 그러나 또 남편도  그랬지마는 주님은 네게 대해서 어떻게 그 사랑을 베푸신 것을 좀 생각해  봤느냐?' 그러니까, 주님에게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지요.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근근히 하고 있습니다. 잘 하고 있어요. 이러니까, 모두 다 자손들이 확 피어져.

자손들이 보니까 확 피어져.

 사은의 끝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허락한 땅에서 오래 살리라' 하는 그 말은, 한 마디 들었어. 뭐이냐? 사은을  네가 생각하고 사은하는 사람이 되면, 네게 은혜 베푼, 사은하는 사람이 되면  너희의 결과는 좋아진다, 형통해진다 그말입니다. 사은하면 너는 잘된다.

사은하면 잘되지 배은하면 망합니다. 배은하면 망하지 안할 수가 없습니다.

배은하는 자는 잘나고 못나고 전부 다 망합니다. 배은하는 자는 다 망하고  사은하는 자는 성공됩니다. 이것을 하나 대표적으로 오 계명을 들어서 말씀해  놓은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주님이 날 사랑하신 그 사랑의 경로마다 우리가 생각 하면서  내가 그런 경로를 당할 때에 그 경로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참 주님의  사랑을 감사하는 사은하는 생활이요, 또 주님이 나에게 부탁하신 그 한 마디  부탁 그것을 하기 위해서 그런 경로를 당할 때에 내가 주님의 부탁을 신실히  감당하는 것이 그것이 내가 사은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사은하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배은하면 망합니다. 배은하면 망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배은하면 망한다.' 입술로는 '배은하면 망합니다.

배은하면 망합니다.' 배은은 혼자 하면서 배은하면 망한다하는 그런 말을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구역장이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듣고서 알 것입니다. 그  구역장이 편지라도 하십시오. '너는 배은한다. 너는 배은이다. 분명히 배은이다.

배은이면 너는 망한다.' 예언을 하십시오. 예언을 해야 그 사람을 살리지.

 기도회의 보고는 오천 오백 사십 사 명이 등록 돼 있습니다. 다문 조그매씩  이라도 등록이 더 불어 가고 합니다. 또 기도에 대해서도 오늘은 비가  오지마는서도 우비를 가지고라도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은 가도 됩니다. 저 산에  가도 됩니다.

 우리는 어데든지 손 양원 목사님에게 내가 꼭 한 주간 설교 들었습니다.

거창서, 그 다음에는 설교하는 것을 대구 공회할 때에, 총회 할 때에 그때에 두  시간인가 듣고 그 다음에는 못 들었는데, 그분의 그 설교에 하나 내가 듣고  잊어버리지 안하고 있는 것은 역항력이라 하는 말, '역항력이 있어야 된다.'  역항하는, 여기서 오면 내가 대적하는, '역항하는 그런 역항력이 있어야 된다.'  그라면서 비유를 그 비유를 듭디다. 이렇게, 그때는 뭐 그것밖에 비유할 것  없어. 자동차 앞에 그때 지금은 안에서 또르륵 하면 시동이 걸리지마는 그때는  밑에 돌려야 됩니다. 앞에 가서. 이걸 돌려야 되니까, 이래 돌릴라고 하면 탁  찹니다. 이래 돌릴라 할때 잘못하면 약한 사람 팔 분질기 쉬워. 이래 탁 돌릴라  하면 저기서 콱 내밀어. 콱 대항할 때 그때 콱 극복해 이겨야 그 다음에 고만.

시동이 걸려 퉁퉁퉁 가지. 저는 또 발동기를 이걸 또 사용해 봐서 그거 또 잘  압니다. 발동기 이래, 손으로 이래 이래야 시동이 걸리는데 이라면 식식하며  돌아갈 때에는 시동 안 걸립니다. 이래 돌아갈 때 저기서 힘이 안 돌아가고  저기서 콱 찰때 그때 내가 채여 돌아오면 팔이 부러지든지 헛일해. 콱 채여  돌아올 때에 콱 밀어서 역항해서 꽉 넘어 버리면 그 다음에는 뭐 시동이 걸려  가지고 퉁퉁퉁해.

 우리 신앙생활은 역경에, 뭐이든지 바로 갈라 할 때에 거기서 대항하는 것이 올  때에 대항하는 그런 것을 뭐 역항해 가지고서, 역항해 가지고 콱 잡아 넘겨야 그  다음부터 그 능력으로 가지지 그렇지 안하면 안 가진다 그때에 그 손양원  목사님이 '역항력의 신앙이라야 된다.' 말을 하면서 그때 발동기를 가지고  말하든가 자동차 시동 거는 걸 가지고 말하던가 두 가지 중에 뭘 한 가지 들어  가지고 실례를 들어서 하는 말을 제가 들었습니다.

 우리는 역항력 있는 신앙이 돼야 됩니다. 역경에 용감한 신앙이 돼야 됩니다.

역경에 용감이 없으면 안 됩니다. 역경에 용감 없는 신앙은 그런 것은 항상  팔방미인 모양으로 그거는 그저, 그저 고만 팔방미인 생활 할 수밖에 없소.

그러니까, 사람은 많이 사귀었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사귀지 못합니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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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184 법적구원/ 요한일서 5장 4절-12절/ 880626주전 선지자 2015.11.01
183 벗는 노력 취하는 노력/ 골로새서 3장 1절-4절/ 791213목새 선지자 2015.11.01
» 베드로가 책망받은 이유/ 마태복음 16장 21절-26절/ 840419목새 선지자 2015.11.01
181 베드로의 네 가지 믿음/ 마태복음 14장 24절-33절/ 840522화새 선지자 2015.11.01
180 베드로의 변화/ 마태복음 14장 27절-33절/ 871201화새 선지자 2015.11.01
179 베드로의 신앙/ 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871129주후 선지자 2015.11.01
178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다섯 가지/ 마태복음 16장 13절-20절/ 821226주전 선지자 2015.11.01
177 베푸신 은혜를 찾고 바로 이용/ 시편 136장 1절-26절/ 850210주전 선지자 2015.11.01
176 변동성이 많은 사람/ 마태복음 10장 17절-20절/ 820628월새 선지자 2015.11.01
175 병고침 간증 보고/ 사도행전 3장 1절-21절/ 870726주후 선지자 2015.11.01
174 병고침의 기쁨/ 사도행전 3장 1절-15절/ 820822주후 선지자 2015.11.01
173 병신노릇 구걸하는 인생/ 사도행전 3장 1절-10절/ 860921주전 선지자 2015.11.01
172 병을 고치심/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890808화새집회 선지자 2015.11.01
171 병을 낫게 하심/ 사도행전 3장 1절-22절/ 850522수야 선지자 2015.11.01
170 병을 낫게 하심/ 사도행전 3장 11절-16절/ 850505주후 선지자 2015.11.01
169 병을 낫게 하심/ 사도행전 3장 1절-16절/ 850517금야 선지자 2015.11.01
168 보기를 원하나이다/ 마가복음 10장 46절-52절/ 870218수야 선지자 2015.11.01
167 보물을 하늘에 쌓는 유익/ 마태복음 6장 19절-23절/ 830630목새 선지자 2015.11.01
166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마태복음 6장 19절-34절/ 830629수새 선지자 2015.11.01
165 보배로운 믿음/ 베드로후서 1장 1절-2절/ 810217화새 선지자 2015.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