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변화

 

1987. 12. 1. 새벽 (화)

 

본문:마태복음 14장 27절∼33절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베드로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에 그의 마음 안에서 변화가 생겼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주님을 생각하고 또 주님이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는 그 말씀을 들을 때에 주님을 생각하고 또 그 말씀을 생각할 때에 그때에 그  제자들에게 변화가 왔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지고 평안함이 됐고 또 모든 염려와  고통이 없어지고 다 안심이 됐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마음이 다 변화되고 마음만 변화된 게 아니고 그때에 그들의 몸도  변화가 됐습니다.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변화가 됐습니다. 사람은 신비하게  돼서 영의 모형으로 된 것이 마음이요 마음의 모양같이 모형같이 된 것이 몸이요  또 마음과 몸 모양대로 된 것이 그 사람의 모든 행동입니다.

이렇게 그가 ‘안심하라 내로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는 주의 음성은 귀로  들었고 또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저희들이 마음으로 느껴서 영접했고, 마음으로  생각해서 영접했고 그럴 때에 저희들에게는 깨달아지는 변화가 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안심되는 변화가 왔고 또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느끼는 그  느낌에, 주님을 느끼고 주님을 생각하는 변화가 왔고 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대로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이 작용은 모든 제자들이 다 일반적으로 받았습니다. 그 배에 있는 제자들은 다  그 마음 속에 변화가 온 것을 본인들이 다 느꼈습니다. 그 다른 사람들은 그  변화된 것으로 이제는 완전히 마음이 변화되니 몸도 변화됐고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변화가 됐습니다.

사람은 심신이라는 것은 이것은 하나입니다. 보기는 마음 고기덩어리 둘로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입니다. 고기덩어리를 보아서 마음을 알 수 있고 또 마음을  봐서 고기덩어리를 알아 언제든지 마음과 고기덩어리는 함께 움직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의 희로애락에 따라서 머리털까지 다 실은 볼 줄 아는 사람은  그 희로애락이 머리털에도 다 나옵니다. 그 사람의 근심이 머리털에 나오고 또 그  사람의 기쁨이 머리털에 나오고 그 사람의 근심과 기쁨이 그 사람의 피부에  나오고 지체에 나오고 이렇게 마음에 나옵니다.

그들이 변화가 된 데에 다른 사람들은 그만 안심하고 기쁨으로 주님에게 소망을  가지고 주님이 어서 배에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주의 음성을  듣기 전과 주님의 음성을 인하여 주님을 자기들 마음에 생각하고 사모하고  느끼기 전과 달라졌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모든 제자들은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오시면 저희들에게 더욱 문제 해결되고 좋을 것을 생각하고 기다리다가  주님이 오시니까 그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바람도 잔잔하고 그렇게 목적지에  갔습니다.

그중에 그 베드로는 거게서 자기가 느껴 깨닫고 그 깨달음을 인해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받은 은혜가 다른 제자들과 다 같이 받았지마는 받은 은혜를  인하여 더 주님에게 은혜를 더 받고 싶어 더 가까이 하고 싶어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오라'  이렇게 하셨습니다.

‘오라’ 하실 때에 그때에 베드로가 `나를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하는  그것은 참 어려운 소망인데, 물 위에 내려서면 빠져 죽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이 오라 하시면 물 위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을 자기가 믿고 그렇게 구할 때  주님이 ‘오라’ 하시니까 자기 마음에 `주님이 오라 하시니 물 위에 걸어서 주님  앞에 가는 것이 문제 없다’ 하는 것을 느껴서 물 위로 걸어서 주님에게  갔습니다.

갈 때에는 ‘주님이 나를 오라 했으니 내가 갈 수 있고, 또 주님이 오라고  하셨으니 나를 걸어가게 하실 수 있다.’ 하는 그것을 믿고서 걸어갔습니다.

이러다가 마귀의 미혹을 받았습니다. 바람 불고 풍랑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만  무서워했습니다. 무서워하니까 빠져 들어갔습니다. 무서워할 때 그때에 주님이  베드로의 마음에 계셨느냐? 베드로의 마음이 주님에게 붙들려서 주님과 연결되어  있었느냐? 그 마음이 주님과 연결되어 있었느냐? 주님과 연결은 끊어지고 바람과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바람 생각하고 바람 보고 바람으로 인하여 피동되는  무서움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무서움을 가진 그것은 베드로의 주관입니다. 베드로의 주관과 풍랑과 둘이  합작된 그 결과는 무서웠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두려움에는 주님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 마음에서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물에 빠져 들어갑니다.

빠져 들어가니까 이제 죽을 지경이니 그때사 다시 또 주님을 찾았습니다.

‘주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까 주님이 오셔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잡을  때에 베드로는 다시 물 위에 서게 됐습니다.

같이 배에까지 가서 배에 올랐을 때에 바람은 그쳤고 배는 목적지에 순조롭게  도달했습니다.

주님에게 ‘나를 구원해 주소서’ 그렇게 했을 때에 주님이 손을 잡고  일으키시니까 물 위에 빠져가다가서 물 위에 올라섰습니다.

그러면 물 위에 올라섰고 배에서 베드로가 물에 내려설 때, 배에서 베드로가 물에  내려설 때, 또 물 위에 걸어서 주님에게로 갈 때 그때는 무슨 힘으로 갔습니까?  그때는 무슨 힘으로 갔습니까? 그때는 무슨 힘으로 갔지요? 배에서 물에 내려설  때는 무슨 힘으로 내려섰습니까? 무슨 마음으로 내려섰습니까? ‘주님이 오라  하시니 오라 하시는 대로 갈 수 있다’ 하는 것을 믿었습니다. 또 걸어갈 수 있는  것을 믿고 걸어가니까 걸어가졌습니다.

그러면 그때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갈 수 있다. 걸어가면 된다.’ 그러면  그때는 물 위로 푹 내려서는 그런 마음이나 힘이나, 물 위로 내려서는 힘 그  힘이나 또 물 위로 걸어서 주님에게 가는 그 힘, 그 힘은 무슨 힘입니까? 그 힘은  누구의 힘입니까? 그 힘은 누구의 힘입니까? 주님의 힘입니다. 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손을 내밀어 잡으시면서 물 위로 당겨 올려서 물 위에 세우신  것은 누구의 힘입니까? 주님의 힘입니다. 또 같이 물 위로 걸어서 배에까지 가는  것은 누구의 힘입니까? 주님의 힘입니다. 다 주님의 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곧 예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요, 성부 성자 성령님에게  기도하는 것이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기도하든지, 예수님에게 기도하든지,  성령님에게 기도하든지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 마음에 성부만 부르면 성자가 안  들었으니까 염려되고, 또 성부와 성자 부르면 성령이 안 들어 계시니까  염려되어서 이제 아버지를 한번 부르고, 주님을 한번 부르고, 성령님을 한번  부르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불러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적은 연고입니다.

아버지 부를 때에도 성자 성령 삼위일체에게 대해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부 안에 성자 성령 계시고, 성자 안에 성부 성령 계시고, 성령 안에 성부 성자  성령 계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위는 셋입니다. 위는 셋인데 본체는 하나십니다.

한 본체 안에 삼위가 있습니다. 또 삼위는 각각 본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삼위가  다 각각 본체를 가지고 계시니 그러면 본체가 몇입니까? 본체가 몇입니까?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다 본체를 가지고 있으니까 본체가 셋으로 그렇게 생각되기  쉽습니다. 각각 본체를 가지고 있으나 본체는 하나입니다. 삼위요 본체는  하나이요 또 성부 성자 성령 그 위마다 본체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초월한 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하든지 기도할 때에 아버지에게도 기도할 수 있고,  주님에게 기도할 수도 있고, 또 어떨 때는 가다가 성령님에게 기도할 수도 있고  이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지막에 결론을 짓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지막에 기도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형하시고 대행하시고 대화친하시고 다시 부활로써  완전한 새생명 이래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하나님에게 우리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또 우리의 무슨 부르짖음이 하나님에게 도달하지 안하고  근방에 가지를 못합니다. 소멸됩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서 우리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에게 호소가 됩니다.

그러면 호소를 하면 이루시기는 누가 이루신다 했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누가  이루어 준다 했습니까? 성부에게 기도할 때도 성자가 이루어 주시고, 성령님에게  기도할 때도 성자가 이루어 주시고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내가 다 시행해  주겠다” 그렇게 약속을 우리에게 선포를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다 시행해 주겠다” 그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모든 기도를 합니다. 기도하면 그 기도한 것은 누가  이루어 주십니까? 주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아버지에게 기도해도 주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왜? 아버지에게 기도할 때에 아버지가 주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십니다.

이래서 우리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에게 어떤 그 발하는 일이라도, 발,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도 주님을 통하지 안하면 하나님에게 갈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어떠한 그 역사의 은혜라도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또 우리에게 올  수가 없습니다.

또 이제 중생되고 난 다음에는 주님이 우리 영을 통해서 우리의 몸에 옵니다.

우리 행동이 마음을 통해서 우리 중생된 영을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갑니다. 그러기에 이 중보가 있어서 중보의 이 법과 순위를 통하지  않고는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게,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을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아라’는 이  말씀을 듣기 전과 들은 후에 사람은 달라졌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달라진 것이  주님이 그 마음에 없었는데 주님을 그 마음에 생각했고, 또 주님이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대로 깨달아 ‘내니’ 할 때에 주님을 생각해서 생각할 때에 주님은 그  마음에 들어오셨고, ‘내니’ 할 때에 들어오셨고 `두려워 마라 안심하라' 할  때에 그들의 마음은 변화됐습니다.

그러면 그때 그 마음에 변화된 것, 안심되고 두려움이 없어지고 또 주님이 그 맘  가운데에 들어와 계시게 되고 하는 그것이 다 그들이 듣는 가운데서 그렇게  믿음이라는 그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마음 가운데 영접하게 됐고 또 안심하게  됐고 두려워하지 않게 됐습니다.

그러면 배에 내려서기 전에는 그 마음에 주님이 계셨고 배에서 물에 내려서게 한  그 담력과 힘이, 뭐 내려서기야 내려설 수 있겠습니다. 내려서기는 내려서는  그것은 그들에게 마음의 작용으로 담력이고 또 내려서면 ‘주님이 내려서 바다로  걸어오라 하셨기 때문에 내려서면 당신이 책임지시리라’ 하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서 내려섰고 내려설 때에 물 속에 빠지지 안한 것은 자기가 믿는 믿음이  빠지지 안하게 했습니다. 믿는 믿음이 빠지지 안하게 한 것은 곧 믿기 때문에  주님이 빠지지 않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빠지지 않게 한 그 능력은 곧  주님의 능력입니다. 이래서 물 위로 걸어갔습니다.

걸어가다가 처음에 걸어갈 때와 나중에 물에 빠질 때에 주님에게 부르짖으니까  주님이 손으로 잡아 올려서 물 위로 주님과 함께 같이 걸어간 것과 물 위로  걸어가게 처음에 배에서 내려 걸어간 그 능력과 주님의 손으로 붙잡아 일으켜서  물 위로 같이 걸어간 것과 그 능력은 같은 능력입니까 다른 능력입니까? 같은  능력입니까 다른 능력입니까? 내나 주님의 한 능력입니다. 한 능력.

한 능력인데 처음에는 그가 마음으로 영접해서 ‘주님이 나에게 물 위로  걸어가게 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무엇이든지 명하실 때에는 책임지고 명하시기  때문에 명하신 그대로 내가 하면 나는 명하신 대로 순종할 것뿐이고 명한 대로  순종하면 순종하는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실 이는 주님이시다.’ 홍해 바다를 건너가라 하셨을 때에 ‘건너가라 하시니 이는 틀림없이 건너갈 수  있다.’ 열 번이나 재앙이 내린 것을 다 그것 인간이 볼 때에 인간으로서는 될 수  없는, 믿고 구할 때에 주님이 오셔 그 일을 다 하셨으니 이제까지 연습한 것이 열  번이나 연습했는데 홍해 바다도 또 건너가라 하실 때에 ‘나 할 일은 건너갈  것이요 건너갈 때에 물에 빠지지 않게 걸어갈 수 있게 하실 이는 주님이시라’  그렇게 믿고 갈 때에 홍해 바다를 건너가게 됐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열 가지 재앙을 내릴 때에 주님이 그들이 구하고 믿고 구하는  대로 그 일을 이루시는 이는 주님이었습니다. 또 홍해 바다를 건너가라 할 때에  건너가라는 그 말씀을 안 믿으면 못 가는데 믿고 건너갈 때에 이루시는 이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홍해 바다에 빠지지 않고 건너가도록 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고 마음이 변화됐는데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시는 그 명령을 하시라고 하는 그 용감이 베드로의 믿음에서 생겨졌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그때 물 위로 걸어오라 할 때에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은 제가  무슨 별스러운 신기한 뭐 이상스러운 일로 걸어가리라고 생각지 안하고  ‘걸어오라 하시면 걸어갈 수 있는 것은 걸어오라 하시는 분이 걸어가게 하여  주신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을 때에 주님은 믿는 대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믿지 안했으면 일을 못 합니다. 믿으니까 주님은 그를 물 위로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물에 빠질 때에는 주님이 물 위로 걸어오라 하신 주님도 잊어버렸고 또 오라  하신 주님이 물 위로 걸어서 당신을 만날 때까지 해 주실 것을 믿는 것도 소망도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바람과 연결될 때에 주님은 일할 수 없어서 거게서  떨어졌습니다.

보이는 주님과 자기와의 거리가 멀어진 게 아니고 보이는 그 주님과 자기와는  거리는 그대로 있지만 자기 속에 베드로가 볼 수 없게, 베드로가 잡을 수 없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 위로 걸어오신 주님의 능력으로 그 베드로에게 접선됐던  그 주님은 이별이 됐습니다. 끊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물에 빠졌습니다. 다시  부르짖으니까 주님이 손을 내밀어 잡아 일으켜서 배에까지 같이 갔습니다.

그러면 처음에 베드로에게 출발해 가지고 온 때도 예수님이 오게 하신 예수님의  능력이요 또 손을 잡아 일으켜서 같이 데리고 배에까지 갈 때도 예수님의  능력이요. 다만 다른 것은 처음에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으로 영접하고 마음으로 동행하는, 마음으로 동행하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 믿음으로 볼 수 있고 믿음으로 만날 수 있는, 믿음이라 말은 인정한다 말이오.

마음으로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 나를 지금 물 위로 오라 하셨으니 물 위로  걸어가게 하신다. 주님은 나를 지금 물 위로 걸어서 가도록 주님께 가도록 이렇게  하신다.’ 하는 것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믿습니다.

이럴 때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영으로 그와 같이 하셔 가지고서 가게 됐고 그  후는 예수님의 이 신성 인성이신 그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주님으로 그와  동행해서 갔습니다.

우리가 이 마음으로 믿고 행동하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내나 그 주님이 와서  역사하시고 또 육안으로 봐야 믿는 자는, 봐야 믿는 자는 볼 수 있게 역사하셔서  결과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때 그렇게 하셔 가지고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난 다음에 지금은  부활하신 지금 주님은 어떻게 계시는가? 지금도 주님은 신성 인성  신인양성일위의 주님으로 부활하셔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면 지금 이 주님은 어데  계시는가? 그때 제자들과 십자가 못박혀 죽기 전에 같이 있은 그때는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지만 나사로가 죽을 때에는 ‘주님이  여게 계셨으면 됐을 텐데 주님이 계시지 안해서 이렇다’ 이랬습니다. 주님이  계시고 안 계시고 그렇게 됐었습니다. 그때에 육체로 같이 계실 수도 있고 안  계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때 제자들과 같이 이렇게 관계되는 역사를 하실 때에 볼 수  있는, 육안으로 볼 수 있게만 역사했습니까 육안으로 볼 수 없고 마음으로 볼 수  있도록 또 역사를 했습니까? 어떻습니까? 육안으로 볼 수 있도록만 역사했습니까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역사도 했습니까? 그러면 그때 역사하신 것은  하나로 한 가지로만 했습니까 두 가지로 했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십시오?  녜, 이렇게 두 가지로 역사했습니다.

그때도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보도록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안 되니까 육체로 볼 수 있도록 하려고 해 가지고 차차 그게 목적이  아니고 이제 육체로 접해야 되는 눈으로 육안으로 볼 수 있게 역사하는 거기에서  육안으로 볼 수 없고 마음으로, 마음으로 인정하고 마음으로 믿는 믿음으로 볼 수  있도록 역사하는 역사를 성장시키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게서 배에서 내려설 때에도 내나 주님을 믿으니까 주님의 능력이  손을 붙잡고 둘이 같이 갈 그때에 그 주님이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베드로를  붙들고 같이 물 위에 걸어갈 것을 믿을 때에 됐고, 믿을 때에 됐다 말은 인정할  때에, 뭐 믿는 게 딴게 아니라.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안하나 주님이 능치 못하심이  없고, 알지 못하심이 없고, 계시지 안한 곳이 없으신 주님이시니까 주님이 해  주시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할 때 주님은 일할 수 있었어. 일하는 건 내나  그분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신령하게 역사했고 안 되니까 육체로 역사했고, 이래서 우리는 많은 역사를 주님이 육안으로 볼 수 있게 역사하시고 지금은 이제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도록 하기 위해서 알려 줬고 목적은 육안으로 보는 그런  둔한 데에서 이제 우리가 제한된 하나님으로 이렇게 믿지 말고 우리 마음으로  인정하고 믿고 바라면 그분이 육안으로 볼 수 있지 않게 역사하셔 가지고  우리에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일을 해 주십니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에게 와서 해 주실 때에 육안으로 볼 수 있게 오셔 가지고  우리에게 역사해 주시면 좋습니까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마음으로만 볼 수 있도록,  생각할 수 있도록, 느낄 수 있도록, 바랄 수 있도록, 인정할 수 있도록 하셔  가지고 이렇게 우리에게 와서 역사해 주시면 좋습니까 둘 중에 어느 것입니까?  어느 것입니까? 육안으로 볼 수 있게 만질 수 있게 와서 역사하시는 것을 소원합니까 만질 수도  없고 육안으로는 볼 수도 없는 그런 하나님의 영으로 오셔 가지고 우리에게  역사해 주기를 바랍니까 둘 중에 어느 것을 바랍니까? 어느 것을 바랍니까? 자, 처음에 것은 볼 수 있게, 두번째 거는 육안으로 볼 수 없게, 잡을 수 없게,  손으로 잡을 수 없게 그래 오셔 가지고서, 역사하시는 능력은 꼭 같습니다.

역사하시는 능력은 꼭 같습니다. 육안으로 볼 수 있게 와서 역사하시는 것이나  육안으로 볼 수 없게 역사하시는 것이나 꼭 같습니다. 손을 내면서 붙잡아서  일으킬 때에나, 물 위로 건져 올릴 때에나 또 그가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눈에  보이지 안하는 주님이 그 마음에 믿을 때에 주님이 오셔 가지고 그를 붙들고 물  위로 아무 빠지지 안하고 잘 걸어오게 할 때나 꼭 같습니다.

꼭 같은데 그러면 첫째 것을 원합니까 둘째 것을 원합니까? 첫째 것 원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이 알고나 하는가? 육안으로 볼 수 있게 하시는데.

육안으로 볼 수 없게 영이신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안하는 그분이 온갖 지혜나  능력이나 역사는 꼭 같이 해 주신다면 안 보이는 주님이 와서 하는 게 낫겠소  보이는 주님으로 와서 하는 것이 낫겠소? 자기 몸 안에 주먹덩이만한 형체를 가지고 주님이 오셔 가지고서 역사해 주시면  좋겠소 이제 콩알만한 뭉텅이로 와 가지고 역사하시면 좋겠소? 자기 몸 속에  주먹덩이만한 게 딴게 하나 들어와 가지고 역사하면 좋겠소 콩알만한 것이 와서  역사하면 좋겠소? 어느 게 좋겠어? 주먹덩이보다 콩알만한 게 낫지. 내 몸에 내  몸 아닌 것이 콩알만한 게 그게 낫지 주먹덩이만한 것이 여기 하나 돌아다니면  어짜겠소? 콩알만한 것도 하나도 없이 오셔 가지고서 꼭 역사하시는 능력은 같다면 그게  낫습니까 콩알만한 뭉텅이로 있어야 되겠습니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없이 아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아무것도 없는데 와서  능력만 꼭 같은 능력 역사하시기를 원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원하면  믿어요. 주님의 역사가 이겁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꼭 외우도록 힘쓰고 눈감고 명상해서 새김질하고  그것보다 또 실행해 보고 이래 가지고서 실지의 능력을 얻어 가지고  역사하십시오. 또 지하철 공사를 위해서 계속 기도합시다. 그러고 하루 삼십 분  기도 이거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것 큰 일 납니다. 지금은 귀넘어 듣지마는 뭐  지금은 피곤하고 바쁘니까 이 삼십 분 기도 할 여가 없다 하지마는 삼십 분  기도의 뒤에 효력은 제가 죽어도 할 수 없는 일, 제가 죽어도 할 수 없는 일 천인  만인이 달라들어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오늘의 삼십 분 기도 이 기도 가지고  됩니다. 이 기도 가지고 합니다. 그때는 누가 해 줍니까? 주님이 해 주셔. 주님이  해 주셔. 우리가 기도한 대로 그대로 다 당신이 계산해서 따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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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변동성이 많은 사람/ 마태복음 10장 17절-20절/ 820628월새 선지자 2015.11.01
175 병고침 간증 보고/ 사도행전 3장 1절-21절/ 870726주후 선지자 2015.11.01
174 병고침의 기쁨/ 사도행전 3장 1절-15절/ 820822주후 선지자 2015.11.01
173 병신노릇 구걸하는 인생/ 사도행전 3장 1절-10절/ 860921주전 선지자 2015.11.01
172 병을 고치심/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890808화새집회 선지자 2015.11.01
171 병을 낫게 하심/ 사도행전 3장 1절-22절/ 850522수야 선지자 2015.11.01
170 병을 낫게 하심/ 사도행전 3장 11절-16절/ 850505주후 선지자 2015.11.01
169 병을 낫게 하심/ 사도행전 3장 1절-16절/ 850517금야 선지자 2015.11.01
168 보기를 원하나이다/ 마가복음 10장 46절-52절/ 870218수야 선지자 2015.11.01
167 보물을 하늘에 쌓는 유익/ 마태복음 6장 19절-23절/ 830630목새 선지자 2015.11.01
166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마태복음 6장 19절-34절/ 830629수새 선지자 2015.11.01
165 보배로운 믿음/ 베드로후서 1장 1절-2절/ 810217화새 선지자 2015.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