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3차 죽음

 

1989. 2. 19. 주일오후

 

본문: 로마서 6장 1절∼11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맘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는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암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기록할 사람들은 성구를 기록하고 집에 가서 잘 챙겨 보시기 바랍니다. 일차  죽음은 로마서 6장 2절과 4절, 이것은 기본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둘째 죽음,  로마서 6장 5절, 마태복음 16장 24절, 이거는 건설구원에 대한 죽음입니다. 셋째  죽음, 로마서 12장 1절, 계시 2장 10절, 요한복음 15장 13절로 14절, 요한일서 3장  16절, 이것도 건설구원에 대한 성구입니다. 넷째로 새생명 가운데 사는 데 대해서,  로마서 6장 4절, 11절, 골로새 3장 3절, 요한복음 15장 11절, 그것은 넷째로  새생명으로 사는 것을 가리킨 성구입니다.

 오전에 두 가지를 공부했습니다. 하나는 기독자가 얻는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어 놓으신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사람들의 공로는  털끝만치도 거게 가해질 수 없고 가하면 멸망이 됩니다. 이것은 구원이 너무  완전하고 지극히 큰 구원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차원에서는 이 구원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실력들입니다. 순전히 이는 자존자이신 완전자로서만 이루어진  구원입니다. 이래서 사람들로서는 할 수 없는 지극히 큰 구원이기 때문에 은혜로  주시는 것이요 거게 댓가가 없습니다. 그저 댓가라면 감사하는 그거뿐입니다.

 또 한 가지 공부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설정해 놓으신 이 구원을 우리들이  은혜로 받는데 은혜로 받는 방편은 그것은 사람들의 요소로 받게 됩니다.

사람들의 요소로 받게 되나 껍데기는 사람들의 요소이지마는 속에 알맹이는  하나님의 요소의 작용으로 인간 요소인 이 껍데기가 거게 피동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은혜의 능동에게 이 사람의 모든 능력이 피동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이 은혜의 구원을 받는 그 실력은 속에는 신적  요소요 인간들이 볼 수 있는 외모는 인적 요소로 이루어지는 받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이 받는 그 실력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실력의 그 차이를  가지고 이 은혜를 받는 데에 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실력에는 천층 만층도  더 되는 차이가 있지마는 그것이 상관없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 다 들이는 것으로 은혜를 받는 그 방편이 되어 있고 얼마가 많이 있다  할지라도 다 들이지 안하는 데에는 이 은혜를 받는 그 방편이 항상 미결입니다.

다 함으로 그 은혜의 받는 것은 완료가 되는 것입니다. 고거 두 가지를 오전에  공부했습니다.

 오후에는 일차 죽음 이차 죽음 삼차 죽음에 대해서 간단하게 증거를 하겠습니다.

로마인서 6장 2절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하여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말씀을 하신 이 죽었다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을 떠난 그 결과로 영원히 완전히 사망되어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째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대형의 죽음과 대행의 죽음, 형벌  형(刑)자, 대형의 죽음과, 대행, 행할 행(行)자, 대행의 죽음과 대화친의 죽음을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사죄 칭의 화친의 이 대속의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신이 범죄함으로 영원히 멸망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를  예수님이 우리 대신 형벌 받아서 영원한 죽음을 죽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해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인고로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연합해서 우리가 죽은 것을, 죄 때문에 죽었고 의 때문에  죽었고 하나님과 화친 때문에 죽은 이 사실을 자기가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거는 법적으로 죽는 죽음인데 우리가 죄 의 하나님과 화친 아 세 가지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셔서 이 세 가지 문제를 완전케 하는 이 공로를 설정하신  것은 나를 대신해서 이 설정을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은 내 죽음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알고 이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앎으로  죽는 것이요 법적으로 죽는 것이요 실지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 있는 그 사람은 완전히 죽은 자로 간주되어 있는 죽은  자인 것을 알고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예수 믿기 전 그 사람이 남아 있는 게  아니고 예수 믿기 전 그 사람은 완전히 죽었고 지금 내가 살아 있는 이것은  예수님의 것 되어 있는, 살아 있는 것이니 옛날 내가 아닌 것을 우리가 지식으로  알고 법적으로 알면 됩니다. 나는 내 죄, 하나님의 법을 실행하기 위해서 나는  죽도록 실행했고, 죄의 값으로 죽었다 하는 그것을 자기가 인정을 합니다. 자기가  죽은 자인 것, 나는 죽어 버렸다. 나는 죽어 버렸다. 나는 죽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피로 값주고 산 예수님의 것이 살아  있지 나는 죽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확실히 인정하는 요것이 첫째  죽음입니다.

 그러면 첫째 이 죽음을 죽음으로 예수님의 대속하신 이 구원이 우리 것이  되느냐 하면 그런 것 아닙니다. 이거는 예수님의 대속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 죽는  죽음 아닙니다. 이미 받아 가지고 있는 이 구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죽었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이라 하는 것을 인식을 하든지 안 하든지 상관  없습니다. 반대해도 상관 없습니다. 이것은 다만 예수님이 나 대신 죽었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이라, 이제 남은 이것은 내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라, 예수로 산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내것은 없어졌다, 예수님의 것이다 하는 요것을 자기가  인식을 하는 요것이 첫째 죽음입니다. 요 죽음을 첫째 죽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첫째 죽음을 가짐으로 예수님이 설정해 놓은 구원이 우리 것이 되느냐?  첫째 죽음을 우리가 인식으로 죽고 지식으로 죽고 법적으로 죽었다 하는 것을  자기가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인식을 함으로 예수님의 대속하신 그  구원이 내것이 되느냐 인식을 안 하면 내것이 안 되느냐? 인식을 하든지 안  하든지 이 구원은 내 것이 됩니다. 아무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내것이 됩니다. 이  구원은 꼭 같습니다. 만인 구원이 꼭 같습니다.

 그러면 이 구원을 자기가 인식해서 나는 첫째로 죽었다 하는 것을 인식하고 안  하는 그 차이가 어데 있느냐? 인식을 하면은,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시고 내 대신  부활하셔서 다시는 예수님은 죽지 안하는 그 완전한 생명으로 살아나신 그  주님의 공로를 자기가 믿으면 예수님이 다시는 죽음의 해를 침노를 받지  아니하는 완전한 생명으로 사신 예수님의 그 생명력이 우리에게 건너옵니다.

생명력이 우리에게 건너옵니다. 이 구원은 일차 죽음을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구원은 우리 구원이 되어 있는데 일차 죽음을 자기가 죽음으로 이 구원의 능력이  자기에게 와 가지고서 역사합니다.

 그러면 일차 죽음을 죽지 안하면 예수님의 대속은 대속으로 나는 나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고로 예수님의 대속하신 이 새생명의 능력이  우리에게 건너오지 안하고 다만 구원만 우리의 것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구원만 돼 가지고 있는 이 구원은 영이 얻은 구원이요 이 심신이 얻은 구원은  실상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법적으로만 얻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법으로만 얻은  것이지 실상이 얻어지지 안했는고로 이 심신에게 영생하는 그 능력이 없습니다.

영에게는 능력이 있고 이 심신에게는 이 구원을 법적으로는 얻어 가지고 있는데  실질적의 실행을 할 수 있는 실상 실상의 효력을 일으킬 수 있는 그 실상이 우리  심신에게 오지를 못합니다.

 왜 오지 못하느냐? 그건 좀 어려운 순서이지마는. 왜 오지 못하느냐? 못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이 대속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제가 제대로 살아 있는고로 실상은  이 심신이 예수님의 것이 되지 안했고 예수님의 공로도 제것이 되지 안했기  때문에 실상은 아무 효력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첫째 죽음을 죽는 자와 안 죽는  자, 첫째 죽음을 죽은 자와 안 죽은 차가 차이 있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하신  구원의 실효의 그 실력이 자기 심신에게 와서 역사를 하고 역사를 안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러면 첫째 죽음을 죽고 안 죽는 차이 있는 데 대해서 좀 알아들은 사람,  알겠는 사람, 알고 있는 사람, 지금 알아들은 사람 손 좀 한번 들어 보십시오.

알아들은 사람. 이라면 이지 뭐하구로, 그라면? 이거 못 할아들으면 뭐합니까?  이렇츰 많이 말해, 그 이상 더 말할 수가 없는데. 그 벌써 아는 사람들은 자꾸  거듭 말하니까 한 말 또 한다고 지루증을 낼 만치 그렇게 여러 번 거듭 말했는데  그래도 몰라요? 여러분들이 가서 자꾸 명상 가운데서 생각해 보십시오.

 일차 죽음을 제가 죽은 사람과 안 죽은 사람이 다릅니다. 일차 죽음을 죽어도  지금 남아 있습니다. 이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산 제사를 드리라 이래. 살았는데  제사, 제물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살았는데 제물입니다. 일차 죽음을 죽은  사람은 예수님의 이 대속의 구원이 자기 심신에게 능력으로 와서 역사합니다.

일차 죽음을 죽지 안한 자에게는 영에게는 와서 역사하지마는 심신에게는  새생명의 능력의 역사가 와서 역사하지를 못합니다.

 자기가 죽은 것인 것을 알고 이것은 이제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주 예수가 그리스도가 살아 있고 이거는 내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라,  이것은 죽을 자 아니고 영생할 자라 하는 것을 자기가 알고 믿고 죽는 것만치,  일차 죽음을 뽀스래기만치 죽었으면 그 능력이 뽀스래기만치 오고 일차 죽음을  완전히 자기가 죽어서 이 살아 있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서 다 죽은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의 영생하는  생명의 능력이 자기에게 다 와서 역사하게 됩니다. 뭐 그 이상은 해석을 할라  하면 뭐 해도 복잡하니까 그렇게만 아십시오.

 이차 죽음은 어떤 게 이차 죽음인가? 로마인서 6장 5절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이제 주님의 죽으심에 내가 연합한 자 되는 이것이 둘째 죽음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이하에 보면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 된다' 하는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말은 자기가 자기로  살았는데 자기로 살던 그자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주님의 것이 된 것을  인정했으니까 저는 없어졌고, 저는 없어지고 자기가 살아 있는 것은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아니니까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을 부인하라  그말입니다.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자기 십자가 지는 것은 뭐이 자기  십자가 지는 건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죄 때문에 죽고 의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죄의 형벌로 죽고, 죄의 형벌로 죽어서 죄 짓는 자를 멸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라 말은 자기에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그대로 자기에게  죄의 몸을 죽이는, 죄의 몸을 죽이는 이것이 자기 십자가입니다. 죄의 몸을 죽이는  이것이 자기 십자가입니다. 죄의 몸을 죽이는 죄의 자기를 죽이는 이것이 둘째  죽음입니다.

 이 둘째 죽음은 첫째 죽음을 죽은 자가 능력 얻어 가지고 둘째로 이 능력으로  사는 생활입니다. 첫째 죽음을 죽은 자가 예수님의 대속의 능력 영생하는 이  능력을 자기가 첫째 죽었을 때에 첫째 죽음에 죽으면 이 능력을 실질적으로  받는다 했습니다. 실효 있게 받는다 했습니다. 그러면 이 능력을 받아 가지고 이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능력으로 사는 생활인데 이 능력 생활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이 능력 생활은 하나는 뭐이냐? 죄의 몸을 죽이는 것입니다. 죄의  몸을 죽이는 것이 이것이 이 새생명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의 몸이  죽는다 그말은 자기를 죽인다는 말이요 자기를 꺾는다는 말이요 자기를 뽑는다는  말이요 다시 말하면 자기 욕심을 죽인다는 말이오. 자기 욕심을 죽이는 것, 자기  소원을 죽이는 것, 자기의 모든 성품을 죽이는 것 자기의 뜻을 죽이는 것, 자기의  계획을 죽이는 것, 자기를 죽이니까 자기를 죽이는데 어데까지 죽일 것이냐?  송장돼서 무님에 장사 지내기까지 죽여야 다 죽인 것입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그  송장이 다시는 자기 행동은 못 합니다. 완전히 송장이 무슨 행동을 하겠습니까?  송장은 그것은 그 송장이 죽기 전 살았을 때에 이것 저것 계획도 소원도 욕심도  포부도 모든 제 자존심도 주관도 성질도 뭐 산 것이 많았지마는 송장되면 그런  것 다 죽어서 완전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둘째 죽음은 자기가  송장되기까지 죽이는 것이 그것이 둘째 죽음입니다.

 그러면 둘째 죽음 이것이 곧 하늘나라와 영원 세계에서 자기를 해칠 것, 자기를  해칠 것들이 다 정리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고 망칠 것들이 다 정리되는  것입니다. 그게 어느 정도 정리되느냐? 여기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그와 항께 장사되었나니' 초상쳤다 말입니다. 초상쳐서 장사된  것같이 여게까지 죽어야 하는 것이 이게 둘째 죽음입니다.

 예수 믿는 일이 그렇게 뭐 너무 어렵게 극단으로 과격하게 너무 조운다 너무  행함을 강조한다, 그라면 믿음이 없어지고 은혜가 없어진다 이건 말 하니까  사람들은 거게 넘어갑니다. 믿음은 어떤 게 믿음인가? 믿음은 예수님의 일차  죽음에 동참한 자는 이차 죽음에서 자기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아닌 그것을  완전히 죽이는 그것이 믿음이요 믿음의 능력입니다. 믿음이 딴것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만 자기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아닌 자기, 자기가 자기 것 되어  있는 이것은 죽이는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아주 죽여야 합니다. 또 자기  욕심을 죽여야 됩니다.

 이렇게 이차 죽음을 죽을라고 애를 쓰고, 이차 죽음을 이것을 죽일라고 애써 본  사람은, 이차 죽음을 죽을라고 애써 본 사람은, 자기 욕심을 죽여 볼라고 자기  소원을 죽여 볼라고, 자기 모든 감정 성질 계획 자존심 주관 이놈을 죽여 볼라고  애를 쓰고 달라든 사람마다 마지막 고백은 주여 나는 무능한 자입니다. 당신이 안  도와 주시면 나는 안 됩니다. 내가 금식도 해 봤고 철야도 해 봤고 결심도 해  봤고 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 죄를 범하면 다시는 내가 뭘 어떻게 하겠다고  약속도 해 봤고 오만 것 다 해봐도 안 되는 사람은 정말로 해 볼라고 달라든  사람은 마지막에 '주여, 당신이 돕지 안하면 나는 안 됩니다. 전적 하나님의  도움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 하는 것을 깨닫는 그 종착이 됩니다. 깨닫는  거기에 종착이 되지마는 그렇게 힘써 보지 안하고 한 사람은 '그까짓 거야 뭐  결심하면 되지 뭐, 작정하면 되지 뭐, 원하면 되지 뭐, 힘만 쓰면 되지 그 안 될  게 뭐 있는가?'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경험이 없는 사람이요 철때기가 없는  사람이요 해보지 안한 사람입니다.

 이래서, 기독교는 참으로 체험의 종교요 경험의 종교지 논리만으로 되는 종교는  아닙니다. 이래서, 둘째 죽음 이것을 우리가 기어코라도 달성을 해야, 둘째 죽음을  완전히 죽여야 됩니다. 둘째 죽음 이것을 완전히 죽어야 되지 죽지 안하면 안  됩니다. 자기의 성질을 죽이는 것, 감정을 죽이는 것, 이 감정 죽이는 것이 자기  생명을 죽이는 자살보다 어렵습니다. 자살은 쉽습니다. 자살 이까짓 거야 뭐 사람  감정에 따라서 생명을 얼마든지 포기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감정을 죽이는 것, 그  감정도 뭐 그것도 층하가 있어서 지저분한 그런 감정 그까짓 거 있어도 없어도  하는 그건 감정은 그렇지마는 정말로 자기에게 딱 맺혀 있는 그 강한 감정이라면  이거는 생명보다 강합니다. 또 감정만 그렇습니까? 욕심도 그렇습니다. 욕심도  그러하요. 욕심도 자기에게 참으로 주격이 되어 있는 그 욕심은 그놈 욕심을 쪼개  가지고 해부를 하면 그 속에 악령이 들어 있지 악성이 들어 있지 악습이 들어  있지 이 강한 놈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욕심 그걸 못 죽입니다. 그 욕심을  죽인다는 것은 자살보다도 어렵습니다. 자살은 그만 죽어 버리면 그만이지마는  이거는 죽어도 되는 게 아니니까, 죽어도 되는 게 아니니 욕심 그것을 죽일라고  하면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욕심 하나를 죽일라고 오만 방편을  다 쓰다가, 쓰고 쓰다가 결국은 안 돼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청년의  행실을 무엇으로 깨끗게 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삼가 그 말씀을 따라  행하는 그거 외에는 다른 거 없습니다.

 이러니까 우리에게 참 결심해도 안 되고 뭐 죽어도 안 되고 뭐 욕심 그거  얼마나 강한지? 생명보다 강합니다. 이 욕심을 분명히 이 욕심이 나쁜 욕심은  나쁜 욕심이라 이 욕심대로 하면 내가 실패되고 내 자손도 실패되고 내 모든  미래도 실패된다 하는 것을 알지마는 이 욕심을 꺾어 이길 자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모든 경험하고 체험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욕심 그놈을 너 혼자  붙들어 안고 싸우고 쥐박고 결심하고 작정하고 아무리 해도 안 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이라야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을라면 어떻게 해야 입느냐? 네가 자꾸 성경을  읽어라. 성경을 읽어라. 성경을 읽고 네가 또 기도를 해라. 이래서 디모데전서  4장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함으로 모든 게 깨끗하여질 수 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둘째 죽음 자기 욕심을 죽이는 것 욕심 이놈이  자기의 적이라고 아는 사람도 제법 눈이 뜬 사람입니다. 자기를 해하는 자를 아는  사람이오. 그러나 그렇지 안한 사람은 이 욕심이면 지금 자기에게 지혜인 줄 알고  능력인 줄 알고, 욕심이 강하면 자기는 실력이 있는 줄 알고 욕심 이놈이 강해서  죽을둥 살둥 모르고 전심 전력을 기울여 가지고 막 주위 환경을 정복해 가지고  욕심을 달성을 시키면 내가 잘났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러기에 욕심 이놈을 아주 자기의 왕같이 모시고 이놈이 성공하기를 원하고  이놈이 성공을 하면은 좋아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어두운 사람들이 다  일반 행위입니다. 그런데 자기 욕심, 성령의 하나님의 욕심은 좋은 것이지마는  자기 욕심이라 하는 거는 무조건 이거는 자기를 영원히 망치는 것인데 욕심  이놈이 자기의 원수인 줄 알고 이놈 때문에 밥도 굶어보고 이놈 때문에 참  가슴도 쳐보고 이놈 때문에 깡깡 얼기도 해 보고 이놈 때문에 싸우고 싸워도  자꾸 그런 걸 싸워서 없앨라 할수록이 그 욕심은 강하게 일어납니다. 강하게  일어나서 죽어도 이 욕심을 달성해야 된다는 것이 그것이 뭐 어떤 사람은 정치욕,  어떤 사람은 명예욕, 어떤 사람은 물질욕, 어떤 사람은 생의 애착욕, 어떤 사람은  모든 각양의 더러운 정욕, 이게,  나를 망친 자는 이거다,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이에까지 나를 망친 자는 이거다.

욕심 그놈대로, 그놈이 들어서 줘서 욕심 그놈이 주는 놈을, 욕심 그놈이 주는,  어떤 사람은 돈을 거머쥐고 돈 있으니까 됐다, 욕심 그놈이 주는 지식 가졌으니까  됐다, 욕심 그놈이 주는 지위가 명예가 있으니 됐다 너를 망칠 자는 욕심이  들어서 얻은 지식 명예 돈 권세 그게 바로 너를 죽일 자다. 너를 죽일 자가  누구냐? 네 욕심으로 취한 그게 너를 죽일 자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기에 둘째 죽음은 자기의 성질 하나를 꺾어볼라고, 처음에는 꺾고, 그놈 암만  꺾어도 뿌럭지는 남아 있습니다. 올라오는 성질을 꺾어보고. 올라오는 욕심을  이런 욕심 이거 하나님의 뜻에는 맞지 안하기 때문에 이거는 버려야 되겠다.

꺾어보고 자기의 소원도 꺾어 보고 자기 성질도 꺾어보고 자기의 주장도  꺾어보고 자존심도 꺾어보고 오기도 꺾어보고 감정도 꺾어보고 모든 정서도  꺾어보고 오만 거 꺾으면 꺾여집니다.

 꺾여지는데 꺾으면 그 다음에는 하나 꺾었는데 움이 둘이 돋아 오릅니다. 움이  둘이 돋아오르요. 또 꺾으면 더 터부리하게 더 움이 많이 돋아오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안 됐다. 이놈을 완전히 근절해서 뿌리를 캐내 버려야 되겠다. 뿌리를  뽑아 버려야 되겠다. 완전히 이것을 근절해야 되겠다. 이래서, 죄의 자기를 죽이는  요것이 둘째 죽음입니다. 요 둘째 죽음 요것을 죽기 전에는 영생하는 생명이  자기에게 와 있지를 안합니다.

 이래서 성경에 그중에 하나를 예를 들어 말하기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니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그 속에 없다 이래도 그 미운 것, 미운 사람  있는 것 그거 없어지지 안합니다. 결심 가지고 사람 미운 것이 없어지는 줄  압니까? 없어지지 안하요. 밥을 굶는다고 없어지는 줄 압니까? 철야기도 한다고  없어지는 줄 압니까? 없어지지 안하요. 그걸 없앨라 할수록이 '이라면 안 되겠다'  꺾으면 그 속에 움은 더 여러가지가 돋아오릅니다.

 이것을 완전히 죽여서 장사지낸 자가 뭐 있습니까? 장사지낸 자는 송장이 무슨  욕심이 있으며 송장이 무슨 복수가 있으며 송장이 무슨 감정이 있을 것이며  송장이 무슨 계획이 있을 것이며 송장이 무슨 자존심이 있소? 송장되고 나면 뭐  자식이 불에 태워도 그게 무슨 말 하요? 이와같이 우리가 둘째 죽음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이런데 예수 믿는 것을 백 목사가 주장하는  예수 믿는 것은 너무 어렵고 까다롭고 너무 극단이라서 못쓴다. 나사를 너무  조우면 터진다. 이러기 때문에 너무 조우면 안 된다. 슬슬 해서 그래 믿어야 된다.

뭐 총공회대로 예수 믿을라 하면 놀 시간이 있나, 얘기할 시간이 있나, 정신차릴  시간이 있나, 관광 갈 시간이 있나? 볼끈 매여서 죽을 지경인데 아이구 그놈의  데에서 탈퇴하고 나니까 참 편하다. 참 좋다.

 이래서 내가 듣고 있습니다. 누가 집회 때 말하기를 '우리 총공회 모양으로 너무  어렵게 생각지 말고, 어렵게 생각지 말고.' 그만 요새는 그 말이 한창 세월이  났습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지 말고 보편으로 보편으로. 보통 그만, 보통. 네가  보통 말하는 속에는 죄악이 가득 찼다. 거게는 죄악이 어글어글하게 꽉 찼다.

하나씩 하나씩 따져서 쪼개서 해부해서 떨어내도 암세포가 지금 자꾸 전성을  하고 있는데 그걸 슬그머니 겉어머리만 해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이래서, 이 둘째 죽음을 죽어야 우리가 영생에 나아가는 건데 둘째 죽음을 죽어  본 사람은 '야, 죽자 살자 하고 힘을 다 써도 모자란다.' 이러니까 자기 힘을 두고  도와 달라 하는데 누가 도와 줍니까? 자기 힘을 다 들이고도 '암만 다해도 안  됩니다. 도와 주시옵소서.' 자기 힘을 다 들여도 안 되니 '도와 주시옵소서. 당신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됩니다. 나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다해 보고 할 수 없다 하는  그자에게 하나님이 돕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지 제것에도 반만 들여도 '여기 반 다  들이고 내가 반 가지고 어찌 사노?' 십분지 일쯤도 기울이고도 찌끄러기 그저, 다  수지는 제가 다 해 먹고 찌끄러기 이거 기울여 가지고 '이래 예수 믿어도 되는데  뭐 이렇게 이거 보편으로 믿지 뭐 이렇게 뭐 따글따끌 그래 쌓아?' 녜, 둘째  죽음을 죽어 본 사람이라면 이는 전력을 기울여도 '전심 전력 기울여도 안 된다.

안 되니 하나님에게 구하여야 되겠다.'  '하나님에게 구하면 전심 전력 안 기울여도 되는데 그저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리라고 믿으면 되는데.' 네가 평생 구해봤자 너는 네가 소원하는 그 기도의  응답은 한번도 못 받는다. 너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밥먹고 옷입고 사는데 그게  다인 줄 아느냐?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둘째 죽음을 죽이는 능력이다. 옛사람을  죽이는 그것을 지금 하나님에게 기도해서 그 능력 받는 것인데 그 능력을 네가  받았느냐? 그러니 너는 순전히 인본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기독교 유물주의,  기독교 세상주의, 기독교 도덕주의, 기독교 윤리주의, 기독교 타협주의, 기독교  화합주의, 기독교 합리주의, 뭐 탈선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길로 가면서  예수 믿는다는 너는 너대로 예수 믿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있으니까 네가 믿는  믿음과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의 아무 연결의 관계성은 없다.

 이것을 힘써 보면 알 것이요 응답을 들어 보면 알 것이요 그전에는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해 보기 전에는 거짓말하는 자가 다 권세를 얻지 참된 자는 권세  얻지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것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는 것이 공연히  들어가라 하는 것입니까? 요것을 확정 지우지 안하면, 오전에 두 가지 배웠는데  하나는 받는 방편 배웠는데 받는 방편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해야 하나님이  '너는 이 이상 할라 해야 할 수 없으니 네가 있는 대로 다했지 내가 준 대로  다했지 더 없으니까' 할 수 없으니 당신이 주시는 그 방편 이게 방편인데  사람들은 꺼꾸로 자기에게 있는 실력 비교를 가지고 이제 저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는 양과 내 구하는 양과 그것만 보고 말합니다. 댓 냥중 받은 사람은 장사  하나도 안 해도 댓 냥중이오. 두 냥중 받은 사람은 죽자껏 장사해 봤자 넉  냥중이니까 죽도록 해 봐도 댓 냥중 받은 사람보다 한 냥중이 적습니다. 그런고로  그런 미혹에 들면 헛일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물리의 과학도 조금 귀중품일수록이 세밀이 들어 있고 조금만  틀려도 안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대리자로 우주와 영계를 통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실력이 이루어져 가는 것인데 그렇게 아무나따나 이래도 저래도  인간 찌끄러기 해 가지고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얻기 때문에 그렇지.'  오전에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것을 똑똑히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라고 해서 가치 없는 거 아니고 쉬운 거 아니오. 은혜인데  인간은 그 은혜를 공짜배기로 받는 것만 해도 자기 것을 다하지 안하면은 받는  그 실력에 도달하지 안해서 다 헛일되고 만다는 것을 오전에 공부했습니다.

 둘째 죽음은 죄악의 자기 자기를 죽여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요 나는  아니라. 죄악의 자기가 의의 자기로, 예수님의 것인 자기로, 예수님의 지체로,  예수님의 성전으로, 예수님의 몸으로. 예수님의 종으로 이래서 자기는 죽어 장사  지냈고 예수님이 자기에게 사시는 이 삶을 가질라고 자기 죽는 공부를 하고 자기  죽는 이 노력을 하는 이것이 둘째 죽음입니다. 둘째 죽음의 이 노력이 없이는  셋째 죽음에 못 나아갑니다. 첫째 죽음이 없으면 둘째 죽음에 나아가지 못하고  둘째 죽음을 걷지 못하면 셋째 죽음에 못 나아갑니다.

 그러면 셋째 죽음은 어떤 게 셋째 죽음인가?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이제는  자기가 자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혀요 예수 그리스도의 눈이라. 이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그 생활 외에는 자기는 살 수 없는 것이 이것이 자기인데 이 셋째 죽음은 자기의  심신은 '산 제사를 드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질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이 생활에 어데까지 했든지 아직까지 미결입니다. 아직까지 미결. 셋째 죽음. 이제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탁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죽어 버렸으면 그게  성공입니다. 죽음으로 성공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죽기 전에는 항상 미결이 우리의  셋째 죽음입니다.

 이래서 우리 이동화 목사님은 참 그거 이상하게 요긴하게 됐어. 그 아주 참  공짜배기로 따먹었어, 공짜배기로. 내가 저 미국에 어떤 사람에게 전화를 하니까  이 아주 환난 많은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는데 거기 복음 전하는 데는 거게는  열두 살 먹는 아이들도 다 총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는 아예 관리도 못 하고, 길가  가다가 이 집 아이가 저 집 아이하고 둘이 싸우면은 방안에서 보고 총을 탁 쏴  가지고 상대방 아이를 죽여 버리면 또 상대방에서 보고 총을 쏴 죽여 버린다  말이오. 거기는 무법천지라.

 이런데 어떤 사람이 있다가 말하기를 나도 그렇게 복음 전할 때 그만 총을 탁  맞아 가지고 그만 내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이래 그 말을 하니까 또 옆에 있던  사람이 있다 말하기를 햐, 그랄진대야 이거 참말로 공짜배기다, 영. 순전히  공짜배기다. 그거 아무 힘도 쓰지 안하고 복음 전하러 가서 복음 전도 가다가  그래 복음 전한다고 그 사람들이 미워서 종으로 탁 쏴 죽으면 야 그거는  공짜배기다 공짜배기 뭐 공짜배기라 하는 것이 내가 전화를 들으니까 전화로  공짜배기라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거 공짜배기.

 우리 이동화 목사는 공짜배기 했어. 왜? 그날 목사라고 자기 교인이 죽어서  초상치러 간다고 이래 교인들 여나뭇 데리고 가니까, 가면서, 가는 걸음이 뭐이야?  뭐하러 차타고 가? 이제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 차타고 가지. 형제 믿음을 위해서  차타고 가지 형제를 위해서 차타고 가지, 가면서 뭐 했을까? 가면서 놀음했을까  춤췄을까? 뭐 했을까? 가면서 오늘 가서 무슨 말씀을 증거해야 될꼬 요렇게  생각하며 갔지. 아, 가는데 탁 죽어 버렸다 말이오. 가는데 탁 죽었어. 이래  놓으니까 이거는 뭐 딴거 섞인 거 아무것도 없고 순전히 옳은 거 주를 위해서  하는 그것으로서 그 생명이 끝났으니 이거는 참 공짜배기라. 그래 내가 생각할  때에 홍순철 목사님을 생각할 때 그거는 공짜배기가 아니고 좀 힘이 들었어. 힘이  드는 것은 자기가 암으로 거석해서 암이 들어도 나는 끝까지 주를 증거하다  죽겠다 하고 그날 주일날인데, 새벽이던가? 새벽기도라던가? 새벽기도인데  새벽기도 그래도 나가야 된다고 그냥은 못 나가니까 다른 사람들이 이제 들고  나갔대요. 들고 나가서 강단에 놓으니까 강단을 거머쥐고서 거기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가 녹음이 지금 있어요. 설교를 하는데 설교를 거기서 할 걸 다 마치고 난  다음에 거게서 그만 설교 마치고 나서 탁 쓰러지는데 뭐 더 그만 붙잡고 서지도  못하니까 턱 주저앉아 쓰러졌는데 그래 메고 들어와 가지고 삼 분인가 있다가  그만 하늘나라 갔어.

 이거는 그래도 삼 분 있다 갔으니까 삼 분 있는 동안에는 물론 주를  사모했겠지마는 메고 오고 했으니까 되게 아프고 이러니까 혹 마음이 갈라져  가지고 아픈 데로 갈라졌을지 모르는데 아, 이거는 자꾸 그 마음만 가다가 휘떡  뒤벼져 가지고 꽝! 그래 구불라져, 그때 마지막에 말 들으니까 주여! 주여! 이래  두번 말하더래요. 주를 두 번 부르더래. 이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아이구 저 아마  목사님 지금 벌써 천당 갔다 이렇게 알았더래요. 이거 참 공짜배기라.

 그래 우리가 이 셋째 죽음도 이 죽음도 이 죽음도 언제 끝나는 죽음이 아니오.

이 셋째 죽음 이것도 마지막에 죽는 그 시간까지 우리가 예수님의 대행의 칭의,  대행의 칭의 이 칭의를 입고 나도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수 있도록 이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여게다가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기울여 바쳐서  산다고 된 것 아니오. 요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의를 위해서 살다가 마지막에  생명이 딱 그대로, 살다가 끝이 나야 비로소 셋째 죽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것도, 이것도 놀기삼아 장난삼아 제 볼일 다 보고 그래 되는 것  아닙니다.

 이런데 오늘 예수 믿는 것을 너무 그래 믿으면 안 된다. 너무 되게 믿고 너무  어렵게 믿을라 한다 하는 요거 말하는 것이 기독교의 적입니다. 적기독입니다!  여러분들이 그거 알아야 됩니다! 왜 성경에는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을 다해서 살라 했는데 누가 그렇게 어누리해서, 주님이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놀기 삼아 장난삼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찌끄러기  예수님께 바쳐 믿어 가지고 이 구원 얻겠다고 어데 성경에 그래 말해 놨습니까?  그래 말해 놓은 데 없습니다. 그 적기독에게 지금 미혹을 받고 우리 진영이 둘로  갈라지고 우리 진영에 지금 있는 데도 벌써 거의 삼분지 이는 그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뭐 언제 가도 그리 될 거 뭐 갈라면 가 버리지 그거 하더라란대도  뭐 붙들 필요도 없고 또 가는 대로 제 갈 대로 가고 살아야지.

 그러니까 요한일서 3장 16절에 보면은 내가 너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림으로  사랑을 알았으니 너희가 형제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것이 뭐라 했습니까?  마땅하다! 생명 버리는 게 마땅하다 이랬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셋째 죽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것이 됐으면 예수님의 것이 돼 가지고 팔짱끼고 있을 게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 됐으면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해서 연결된 자 돼야 됩니다.

예수님이 성찬 자실 때에 '내 피와 살을 먹고 마실 때마다 이것으로 나를  기념해라' 주님의 죽으심을 올 때까지 기념하라 말했는데 주님이 무슨  죽음입니까? 주님이 무슨 죽음 했습니까? 장사하다가 뚜드려 맞아 죽었습니까?  정권 잡을라 하다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명령 순종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이 생활 하다가서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이러니까 내 명령과 너와 네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 네가 목숨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하는 이것이 주님의 명령인데 어데다가 우리가 어누리해서 너무 그렇게  자꾸 급하게 말하고 하는 거 극도로 하는 것은 너무 과격하다. 이러니까 총공회  예수 믿는 것은 너무 이것은 지나친 예수다. 이래 가지고 신학자들이 뭐 경건파니  뭐 과격파니 무슨 파니, 신학자들 아무리 신학자라도 유명한 신학자라도 그런  말에 대해서는 내가 깔보고 발로 자끈자끈 밟습니다. 인물을 밟는 게 아니라 그  사상은 밟습니다. 주장은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이다' '이런 일을 당치 않게 하옵소서.' 하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는 자로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것이 주님의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셋째 죽음에 대한  성구를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다음에 넷째로서 그러면 일차 이차 삼차  죽음을 통과한 그 너머 영생하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일차 죽음을 죽고  거게서 예수님의 대속을 얻었으면 대속을 얻은 속에 대속이 들어서 이차 죽음  죽고 삼차 죽음 죽을 때에 그 속에 영생하는 생명이 거게서 힘을 얻고 그걸 먹고  자라다가 마지막에 완성을 해 가지고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하는  생명은 어데서 자라느냐? 일차 죽음에서 자라고 이차 죽음에서 자라고 삼차  죽음에서, 죽음 속에서 자라는 생명입니다! 죽음 속에서 자라는 생명이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나그네 세상 오늘 떠날지 내일 떠날지 모릅니다. 땅에 것을 보고 암만 알뜰히 뭐  이런 거 저런 거 해 봐야 다 자타를 속이는 것뿐이고 딴거 없습니다. 어쨌든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내가 네게 주겠다.

 


선지자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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