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향한 지식 13 가지-양심

 

1986. 2. 14. 금밤

 

본문:에베소서 1장 4절∼9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다음 주 공과가 돼서 또 오늘밤에 간단하게 한 번 더 하게 됐습니다.

공과를 가지신 분들은 공과를 내어 가지고 보면서, 해석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밤에는 각처에서 교역자들이 모였으니까 첫째 일호로부터 간단하게 해석을 하겠습니다.

얼핏보면 그 말이 조리가 안 맞은 거같이 그렇게 보이는 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고 한 자를 넣음으로 말미암아 아주 뜻이 달라지기 때문에 요것은 외울 것이 돼 놔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니까 그리 알고 보면 좋습니다.

첫째,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영원 전도 아니고 영원 후도 아니고 이거는 영원 전 영원 후를 다 포함해서 ‘영원’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존하시다 말은 모든 존재들은 다 원인이 있는데 이 하나님은 원인이 없이 스스로 계셨기 때문에 자존자라, 스스로 있었다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자존자가 영계나 이 물질계에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하는 것은 한 분뿐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라는 뜻으로 ‘하나님’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님, 새 을(乙)자 한을님, 한울님, 또 하느님 이게 전부 마귀가 내어놔서 혼란시킨 말이고 다 틀리는 말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이름을 달리 바꿔서 지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 하나라는 뜻으로 하나님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 하는 것은 우리는 복수요 나는 단수인데 `내 아버지’ 하면 안 됩니다. ‘우리 아버지' 해야 됩니다. 우리는 복수인데 누구하고 복수가 되는고 하니 주님과 성령님과 진리와 나와 또 모든 교회 다 합해서 우리가 됩니다.

그러면, 개인 교회는 대속의 주님과 성령님과 나와 이 셋이 진리로 결합됐을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교회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라 말은 주님의 대속을 내가 입어서 주님과 나와 하나가 된 지 후에 하나님이 아버지 되지 이것이 없으면 아버지가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아버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멸망을 받게 됩니다. ‘우리’ 하는 것은 주님과 나와의 이 대속으로 결합된 지 후에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 하면은 혹 생각할 때에 성령님도 빠지고 또 성자님도 빠지고 이렇게 된 것으로 생각을 하지마는서도 그런 게 아니고 ‘우리’ 할 때는 벌써 진리와 성령과 주님의 피공로의 이 주님과 나와의 결합이 돼 가지고서 그래 하나님 아버지를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할 때에는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과 나와 진리로 하나돼 가지고 이제 우리라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할 때는 우리가 되고 하나님에게 대해서 책임을 질 때에는 자기 개인이 책임져야 되는 것을 가리켜서 내가 믿사오며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공통 믿음이 아니고 개별 믿음입니다.

둘째 ‘영원 자존 불변 사랑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러면 `불변 사랑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하면 좋은 거 같지마는서도 ‘사랑 하나님' 하면 사랑이라는 하나님이라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하나님. 그러면 이 사랑도 자존 사랑입니다.

영원 자존 불변 사랑 하나님, 사랑 하나님의 이 사랑도 영원 자존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사랑 하나님’ 했으니까 사랑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속성이라 해 가지고서 본체에 속한 소속으로 알아서 하나님 본체와 사랑과 무슨 권위나 영광이나 존귀나 그런 것이 차이 있는 줄로 그래 알면 안 됩니다. 내나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사랑도 자존한 사랑입니다. ‘사랑 하나님 우리 아버지’

또 세째로, ‘영원 자존 전지 전능 하나님 우리 아버지’ 전지 전능이, 전지 전능이 하나님 생겨지고 난 다음에 전지 전능이 생겨서 하나님에게 소속한 전지 전능으로 그렇게 보기 쉬운데 그렇지 안하고 이 전지 전능도 자존입니다. 전지 전능도 자존이요 하나님도 자존이요 이 전지 전능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원 자존 전지 전능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러니까 요 뜻을 잘 알아서 기억하고, 그라고 언제든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에는 내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망령이 됩니다.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야 됩니다.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는 주님의 대속으로 주님과 나와 하나가 된 지 후에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지 하나가 되기 전에 아버지되면 전멸이 돼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대속과 나와 하나가 되기 전에는 빛을 만나면 소멸돼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지 후에 빛되신 하나님과 이렇게 관계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어떤가? 예수님은 신인 양성 일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에 우리가 접합니다. 예수님의 인성에 우리가 접해 가지고 예수님의 인성의 중보를 통해 가지고 신성에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지 안하면 성자도 만나면 우리는 소멸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또 네째로, ‘영원 자존 하나님 의지’ 그러면 하나님 의지도 자존 의지라 말입니다. 자존 의지. 그러면 자존 하나님, 자존 사랑, 자존 전지 전능, 자존 의지, 내나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라면 여럿인가? 하나님의 속성들인데, 이 속성은 하나님 한 분이 이 속성으로 나타날 때에 수 없는 속성으로 나타나나 하나님은 단일성입니다. 단일성이 나타날 때에는 수많은 속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단일성, 요 단일성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단일성.

하나님이 우리로 더불어 공통성 있는 속성이 여덟 가지고 공통성 없는 속성이 네 가지인데 네 가지 중에 자존성 또 완전성 영원 불변성 그 다음에 단일성, 요 네 가지인데 단일성은, 단일성에 대해서 과거 장생골에서도 설명을 많이 했습니다.

네째로, ‘영원 자존 하나님 의지가’ 그러면 자존 의지입니다. `자존 의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말은, 그리스도 안이라 말은, 기름 부음 안이라, 제사장 선지 왕직을 가지신 그 그리스도 안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꼭 같은 사람’ `꼭 같은 사람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가 되기까지 귀하게 아름답게 만드시기로 목적을 정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러면 하나님의 의지도 영원 자존 의지인데, 하나님 안에는 영원 자존 의지, 영원 불변 사랑, 영원 자존 전지 전능, 다 하나님 한 분 안에 있는데 그 한 분 하나님이 이렇게 나타날 때에는 자존 사랑으로 나타나고 이렇게 나타날 때에는 자존 전지 전능으로 나타나고 이렇게 나타날 때에는 자존 의지로 나타나고 그렇게 나타나 가지고 자존 의지가 예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예정이 어떤 데에 피동으로 예정된 것이 아니고 자존 의지가 이 목적을 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 정하신 것이,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신 것이 곧 선택하신 것인데, 택하신 것인데 그 목적의 내용이 어떠한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그후에 알게 됐는데 그리스도는 제사장 선지 왕직을 가지고, 제사장 선지 왕직의 원형 삼직을 가지고, 원형 삼직을 가지고서 구속받은 자를 모형 삼직자로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의 역사입니다. 원형 삼직.

그러면, 그리스도는 원형 제사장, 원형 선지자, 원형 왕, 우리는 그 원형과 꼭 같은, 그와 꼭 같은 모형 제사장, 모형 선지자, 모형 왕을 만드는 이 일을 책임 맡으신 이가 그리스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했다 하는 그말은 이 세 가지 모형으로 조성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셨다 그말입니다. 고게 이해가 안 되면, 이해가 안 되면 나중에 거석합니다. 아주 이거는 아주 근본 근본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이게 한 마디만 잘못 되면은 탈선돼서 이단되고 맙니다.

어떻게 만들라고 했는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형이라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형, 그리스도의 모형, 하나님과 꼭 같은 사람, 하나님과 꼭 같은 사람 요거는 하나님의 형상대로라 그말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했는데 그것은 외부적인 형상이고 이제 타락 가운데서 구속한 것은 이는 온전한 그런, 하나님의 모형인 사람입니다.

‘형상과 꼭 같은 사람.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라 말은, 그것은 또 해석할라 하면 영광의 찬미라 말은 우리를 만들어 놓은 걸 인해서 그만 하나님을 모든, 우리가 만들어진, 하나님이 구속하신 우리를 보고서 ‘하나님이 구속하신 이 성도 보니까 하나님은 어떠한 완전한 분이시며 그는 참 영원 불변이시며 그는 참으로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맡길 만한 그는 완전 무흠의 분이시라’ 하는 것을 그렇게 우리를 보아서 알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잘 만들어지며 얼마나 귀중히 만들어지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드시기로 목적을 정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러면 이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셨습니다.

이것도, 여러분들이 잘 알지 못하면, 목적은 누가 정했으며 예정은 누가 했으며 또 창조는 누가 했으며 심히 복잡한 일이 됩니다.

또, 우리가 구원을 얻으면 어데까지 되는 구원을 얻느냐, 구원을 이루느냐? 오늘까지는 하나님같이 된 구원이라 말은 세계에 전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 이래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라’ 하는 그것은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단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것은 사람들이 아무래도 이 법에는 정죄를 받지 안할 수가 없다.

정죄되지 안할 수 없다는 하나 정죄의 한 법으로 내어 놓은 것이지 그거 실상 사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거룩하심과 같이 그렇게될 수 있는 것는 아니다. 될 수 있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요렇게 주석을 해 내려오는 것이 오늘까지의 세계의 주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깨닫는 것은 나가면은 시비가 많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여러분들이 받아 들여야 되지 잘못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얻었던 교리 신조를 다 뺏겨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하나님과 꼭 같은 사람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가 되기까지 귀하게 아름답게 만드시기로 목적을 정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러면 목적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정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이렇게 우리를 만드실라고, 그거 다 성경에 있는 말입니다. 영광의 찬미라는 것은 얼마나 우리가 잘 만들어졌든지 우리를 보고 하나님에게 모든 사람들이 영광을 돌리도록, 영광을 돌릴 게 아니라 우리 자체가 벌써 모든 사람이 볼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게 우리를 지으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것을 우리가 굳게 잡아야 돼요, 놓지 말고 다섯째는 ‘목적을 이루기에 필요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같이 만드시는 목적을 이루시기에, ‘이루시기에 필요한’ 이루시기에 할라 하다가 이루시기에 안 하고 그저 ‘이루기에’ 라고 그래 `시' 자를 뺐습니다. `이루기에' 이루기에 하는 그것은 하나님 당신이 이루기에 당신의 말이기 때문에 거기다 ‘시’ 자를 하면은 우리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시' 자를 역부러 뺐습니다.

‘이루기에 필요한 영계와 우주’ 영계는 하늘나라 또 우주는 이 물질계 세상, ‘우주와 또 그 가운데’ 그러면 영계도 만드셨고 우주도 만드셨습니다.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의 영원을 주권 의지로 예정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억만 년 만에 예정한 것이 아니고 앞으로 미래적으로,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영생하지 않습니까?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 무궁토록 사는데 하늘나라 가서 영원 무궁토록 살 그런 것을 다 하나님께서 단번에 예정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이 예정은 어데까지 가서 끝이 납니까? ○○○조사님 어데까지 가서 끝이 납니까? 예? 끝이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고걸 알아야 돼요.

‘주권 의지로 예정하신’ 주권 의지라 말은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안하고 예정했다 그말이오. 그러면 자존 의지가, 자존 의지가 행동할 때에 어떤 것에게 조금도 뭐 관계나 침노나 협조나 받지 안하고 단독 주권으로 해서 예정했다 하는 말입니다. ‘예정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여섯째로, ‘목적을 위해 예정대로 주권 능력으로’ 주권 능력이라 말은 그 능력도 자존 능력인데, 자존 능력인데 그 능력이 이 창조를 하실 때에 어떤 것의 협조를 받아 가지고 하지 안하고서 단독 주권 그 능력으로 가지고서 창조한 것을 말합니다.

‘주권 능력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라면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도 예정도 혼자했고 창조도 혼자 하셨습니다. 아무도 거게 관계하지를 안했습니다. 못 합니다. 또 예정도 그래 하셨고 목적을 정하실 때에도 자존하신 그분이 홀로 자존 의지 가지고서 그렇게 목적을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목적은 하나님이 좋아서 정했고 하나님이 기뻐서 정했지 어떤 무엇에게 피동돼 가지고 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단독 당신의 본능대로 당신의 본성대로 당신이 혼자 좋아서 이 목적을 정하기 때문에 이는 변할 수 없습니다.

만일 이 목적이 변하면은 당신은 완전히 변해 버리고 맙니다. 당신이 불변이기 때문에 이 목적이 변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목적이 변하지 안하니 우리의 구원이 변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걸 자꾸 새겨서 우리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일곱째로, ‘우주와 영계의 전부를’ `우주와 영계의 전부를 홀로 보존 관리' 보존하는 것도 하나님이 홀로 보존하시고 또 관리하는 것도 혼자 관리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모든 거 홀로 보존하고 홀로 섭리하시고 관리하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러면, 예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가 홀로 창조하셨다고 하니까 이 관계가 어찌 되는가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창조하시는데 그 창조를 예수님의, 성자 제이위 성자를 통해서 그 창조가 나타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창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창조하신 것이며 또 성자가 창조하신 것이며 또 성령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한 분을, 그래서 삼위 일체라 하나님은 한 분뿐이신데 위가 서이라. 위가 서이라는 것은 격위가 서이라. 이래서 격위가 서이니까 하나님이 세 분인가 생각하지마는서도 격위만 서이지 그 본체는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자 성령 성부가 있었지마는서도 한 하나님이요 단일성입니다. 성자와 성부와 단일성입니다. 성령과 단일성. 그 성부 성자 성령 이 셋이 단일성, 단일성. 단일성이십니다.

또 여덟째로 ‘독생하신 하나님을’ 독생하신 하나님이라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세상에 나타나셨는데 세상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이십니다.

신성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독생자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는 다른 어떤 존재는 거게서 나올 때에 이것으로 저것으로 나오는 그 원인이, 사람으로 말하면 부모에게서 나오고,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어떤 뭐 둘이나 셋이나 거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 한 분에게서 나왔다 해서 독생하신 하나님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이라 하나님 한 분에게서 나왔으면, 하나님 한 분에게서 나왔으면 하나님 아버지는 먼저 계셨고, 성자는 그다음에 계셨는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영원 전 같이 계셨습니다. 같이 계셨고 꼭 같은 한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거게는 무슨 시간이나 존재의 시간이나 그런 거 차이 있는 거 아니고 성부가 성자로 나타났고 성부가 성령으로 나타났고, 나타났을 때에는 뭣 때문에 그렇게 나타나셨느냐 하면은 직책이 다르기 때문에 성자가 할 직책을 할 때에 성자로 나타났고, 성부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래서 저는 그것을, 뭐 비유는 여러 가지로 세상에서 비유를 많이 합니다. 나무 뿌리가 있고 또 둥치가 있고 가지가 있고 이렇게 이 비유를 중간에 많이 써 나왔습니다. 성경학자들이 이 비유로 가지고 많이 써 나왔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삼위 일체를 태양, 태양과 빛과 열도. 더운 열과 빛과 태양 이것은 한 태양에서 나왔는데 이렇게 열도 나오고 이러나 열도 내나 열 그것이 태양이요 빛 그게 태양이요 양 자체도 태양이고 이래서 이것으로 가지고서 삼위 일체를 비유해 가지고 많이 증거를 학자들이 해 나왔습니다.

저는, 나 단독이는 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딱 들어맞는 거는 아니지마는서도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이 사람이 호주도 되고 남편도 되고 아버지도 된다. 그러면 한 사람인데 이 일을 할 때에는 남편, ‘여보 남편이 어데 있소?’ 그분을 ‘이가 우리 남편입니다.' 또 있다가서 `너거 아버지 어데 있노?' ‘이분이 아버지입니다.’ 또 이제 `이 집에 호주가 누구요?' `이분이 호주입니다.’ 내나 한 분이 호주됐다가 남편됐다가 아버지됐다가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남편의 지위가 있고 아버지의 지위가 있고 호주의 지위가 있으니 지위라 하는 것은 그 책임이 다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비유로 제가 한번 해 본 것입니다.

여덟째로 ‘독생하신 하나님을 사람의 형상으로 보내사 독생하신 하나님이라 말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왔지 딴데 뭣이 보탰거나 딴것으로 붙여서 나지를 안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독생하신 하나님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는 「하나님을 예로부터 본 사람이 없으나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으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보이셨느니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보내사 우리의 죄’ `우리의 죄, 불의, 원수.' 세 가지 대속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독생하신 하나님에게 담당을 시켜서 십자가 죽으심으로 사죄 칭의 화친의 공로를 설정하사 우리 대속이 되게 하신’ ‘대속이 되게 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러면 이 일을 하도록 계획하시고 독생자를 보내 가지고서 우리의 대속주가 되게 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러면, 대속이 되게 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이니까 대속되기 전에 어떻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 하는가? 대속의 공로를 입고 난 지 후에 우리 아버지입니다. 대속의 공로를 입지 안하면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심판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을 입기 전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심판하실 심판주입니다.

심판의 하나님이오. 심판의 하나님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하나님이 됐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됐습니다.

또 아홉째로, ‘대형의 사죄’ 이거는 잘 아는 거지요? `대형의 사죄 대행의 칭의’ 대형이라 말은 대신 형벌받아 가지고 우리 죄를 없애셨고 또 대신 하나님의 율법을 행해 가지고, 그러면 예수님이 대행한 것은 몇 가지나 대행했는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의 전부를 다 대신 행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자가 입법해 놓은, 전지자가 입법해 놓은 그 입법을 우리는 완전 이행한 사람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거는 예수님이 이행했지 우리가 이행한 것이 아니지마는서도 완전히 이행한 자가 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지자가 입법해 놓은 그 입법의 요구를 만족케 한 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안 했지만 예수님께서 다 만족을 이루신 대행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대형으로써 칭의를 우리가 가지게 됐습니다.

‘대행으로 칭의. 대화친의 영생을’ 이제 예수님이 대신 화목의 제물이 되셔 가지고서 하나님과 결합되니까 생명됐습니다. 생명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되면 생명,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사망.

‘대화친의 영생을 대속으로 주신 은혜의 주님’ 여기서부터 주님으로 말합니다.

‘은혜의 주님’ 그러면, 이 대속으로 우리에게 사죄 칭의 화친의 이 영생하는 생명을 주신 것은 주님이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보내 가지고서 이 일을 하셔 가지고서 이 대속을 우리에게 주님이 주셨습니다. ‘대속으로 주신 은혜의 주님’ 대속으로 주시되 우리가 무슨 값이 있어 가지고서 받는 게 아니고 순전히 공짜배기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은혜의 주님’ 그렇게 한 것입니다.

또 열째는, 신인 양성 일위로,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 신인 양성 일위로 와 가지고서 대형 대행 대화친의 공로을 베푸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시기를 뭘로 부활하셨느냐 하면은 신인 양성 일위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신성과 인성, 신인 양성 일위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사’ 그러면 예수님이 신성은 아예, 신성은 신성이기 때문에 죽지 안하지마는서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신성 따로 인성 따로 부활한 게 아니고 신성과 인성 둘이 한 격위를 만든 이 격위를 가지고서 부활하셨습니다.

격위 가지고서 부활했다 그말은, 양성 일위로 부활했다 말은, 위라는ㅡ 여러분들이 요거 잘 아십시오ㅡ 위라는 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직위라 말입니다. 직위라 말이요 지위라 말입니다. 위에 대해서는 그에 담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책임이 있는데 양성 일위라 하는 거는 신성과 인성이 한 책임을 졌다 그말이오. 일위라 말은 한 책임을 졌다. 우리 구속을 같이 책임졌다. 신성이 진 것도 아니고 인성이 진 것도 아니고 신성과 인성이 같이 책임졌다 하는 것을 나타내서 여게 말한 것입니다.

열째, ‘신인 양성 일위로 부활하사’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하셔 가지고서 뭘 하셨느냐? ‘신인 양성 일위로 부활하사 현재 미래 영원까지 신인 친합 일행이’ 하나님과 우리 사람. 여게 신인이라는 여기 신은, 여기 신인이라는 신은 하나님을 말하고 또 인은 우리를 말합니다. ‘신인 친합’ 하나님과 우리 사람이 하나가 돼 가지고서, 어떻게 하나가 됐느냐?’ ‘신인 친합 일행이 이루어지게’ 일행이 이루어진다 말은 행동을 같이 한다 말이오.

예수님은 신인 양성 일위이지마는서도 우리는 신인 양성 일행입니다. 일행.

행동을 같이 한다 말이오. 이것이 구원이요 성화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사람이 하는 것 아무 소용없고 하나님이 하는 것 소용없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하나가 돼 가지고 행동하는 이것이 다 의요 영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친합 일행이 이루어지게 기도와 역사로 힘써 이루시는 주님’ 그러면 주님은 이 일을 지금 하실라고 부활하셨습니다. 신인 양성 일위로 부활하신 목적이 어데 있느냐 하면은 신인 친합 일행이 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열 한째로, ‘대속하신 공로로’ 대속하신 거, 예수님의 대속하신 공로가 아니면 성령은 우리에게 못 옵니다. ‘예수님의 대속하신 공로로 성령과 진리로 함께 역사하사’ 함께 역사한다는 말은, 함께 역사한다는 말은 삼합 역사입니다. 삼합 역사, 대속 역사와 성령 역사와 진리 이 셋이 하나가 돼 가지고 역사하는 이 삼합 역사로 우리를 중생시킵니다.

우리를 중생시키는 것도 이 세 가지 능력이 합해 가지고 우리를 중생을 시키고 우리를 또 성화시키는 것도 세 가지 능력이 합해 가지고 성화시킵니다.

성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신인 양성 일행이 되는 그것을 가리켜서 성화, 나는 내대로 하나님은 하나님대로인데 내가 하나님에게 속해 가지고 하나님과 친합이 돼 가지고서 일행을 할 수 있는 그것이 이제 성화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화’ 또 ‘영화’ 영화는 무엇을 영화라 하는고 하니 신인 양성 일행이 돼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나와 합해 가지고서 일행을 해도 문을 닫으면 못 들어갑니다. 또 무쇠덩어리 속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또 넓어도 나는 이 우주 공간에 나는 요만한 몸뚱이 하나만 되기 때문에 요만한 공간만 차지 하지 내 몸뚱이 가지고서 이 넓은 몇천 평이나 몇만 평이나 몇억만 평이나 거게 나는 가서 머물 수가 없는 존재인데 공간을 초월해 가지고서 이렇게 하는 거 그것이 영화, 말하자면 물질의 것이 물질의 것으로 있지 안하고 신령한 것으로 변화된다 말은 시공을 초윌한 거, 시공을 초월한 것으로서 변화돼서 여게서부터는 다 영원성 완전성 영생성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이 지금은 성화가 되지마는, 성화만 되지마는 이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는 영화됩니다. 영화돼서 우리의 이 몸의 기능은 이제는 영원 무궁토록 무궁세계에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영화된다 이랬습니다. 영화는 시공을 초월한 그런 존재로, 신령한 몸으로, 신령한 것으로 변화된 것을 가리켜서 영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몸뚱이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영화가 됩니다. 우리의 기능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우리의 부활과 동시에 우리는 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능 영화, 기능 영화 우리의 심신의 이 윤곽 영화, 이 형체 영화, 형체 영화가 되고 기능 영화가 되는, 영화는 벌써 시공을 초월한 영원성 완정성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영화로 하나님같이’ `하나님같이 온전하고' 하나님같이 온전하다 말은 하나님과 꼭 같이, 하나님의 모형 온전입니다. ‘하나님같이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하고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성전이라 말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주관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 그러면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성전될라고 애를 쓰고 성전으로 사는 생활이 계속될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성전과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이라 말은 이거는 무슨 몸이냐 하면은, 그리스도의 몸이라 말은 그리스도의 지체라 말인데 그리스도의 지체라 말은 제사장의 지체 제사장, 선지의 지체 선지, 왕의 지체 왕 그래서 이 삼직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지체로 우리로 삼직을 행 할 수 있는 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 또 그리스도의 지체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됐는데 몸만 될 뿐만 아니라 개별 그 지체노릇도 할 수 있다 말이오. 전체가 몸노릇도 할 수가 있고 개별 개별의 그 지체노릇도, 팔다리노릇 하는 거 모양으로 팔다리 그런 지체노릇도 합니다. ‘지체와 그리스도의 제사장’ 그러면 그리스도의 제사장이라 말은 이제 그리스도의 모형 제사장이 되고 또 모형 선지자가 되고 모형 왕이 되게 계속 힘써 만드시는 주님. 주님이 이것을 계속 힘써 만드시는 주님. 주님이라 말은 우리를 책임졌다 그말입니다.

열 둘째로 ‘만물 안에서’ 만물 안이라 말은 만물 속이라 말인데 만물 속이라 말은 이것은 지위적으로 말하고 평가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만물 안이면 만물 속에 지금 파묻혔다 그말이 아니고 만물은 주위에 둘러 있고 만물을 통치하고 있는 만물의 중심에 있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만물 안에라 말합니다.

‘만물 안에서’ 이것도 성경에 내나 있는 말씀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의 그 중심에서 ‘하나님의 충만으로’ 하나님이 만물들에게 충만케 하시는 그 충만으로 ‘만물에게 충만케 하는’ 하나님이 만물에게 충만케 해 줬는데 지금은 인제 우리가 만물에게 하나님의 충만 가지고 만물에게 충만케 해 줍니다. 그러면 만물의 중보자가 우리입니다.

‘충만케 하는 충만을’ 그렇게 충만케 하는 그 충만을 `영원 기업으로' `영원 기업으로’ 이것이 우리의 직업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업입니다. 우리의 기업은 뭐인고? 하나님의 무한한 그 은혜를 가지고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종류에게 따라서 각각 하나님 은혜로 그들에게 충만시켜 주는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기업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시은의 기업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아들의 기업,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만 단독 받고, 단독 받은 것을 만물들에게 주는, 만물에게는 은혜를 베푸는 시은의 지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업입니다. ‘영원 기업으로 주신 주님’ 이것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열 세째로, ‘겨자씨 믿음의 계속으로’ 겨자씨 믿음의 계속이라 말은 겨자씨 믿음은 산 믿음이라는 말인데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이라 말인데 자기가 하나님의 법에 순종도 있지마는서도 하나님이 영감으로 현실 현실에 ‘요렇게 하라’ 할 때에 하나님이 고렇게 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는 것을 가리켜서 고것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이라.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이라.

고것을 산 믿음이라. 고것을 겨자씨 믿음이라. 이래서 ‘겨자씨 믿음의 계속으로 이 구원을 이루게 하여 주시는 주님’ ‘이 구원을 이루게 하여 주시는 주님’ 이래 가지고서 열 셋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이것을 외우도록 하고, 어짜든지 외우도록 해서 여러 수만 번을 읽어도 외우고 자꾸 외워서, 요 글자 한 자만 틀려도 안 됩니다.

그런데, 요 간추려 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요런 것을 하나의 신조로, 신조로 정하지 안하면은 우리는 벌판이로 마음대로 말합니다. 마음대로 말하는데 마음대로 말하는 것을 그냥 지내가지마는 마음대로 말한 그것을 따지고 따지고 따져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지고 따져보면은 이거는 아주 탈선으로, 이거는 하나님의 성경에 대해서는 천리 만리 거리가 먼 그런 행동을 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행동은 시발할 때에는 모르지마는서도 결말은 반드시 하나님 말씀 가지고 따지고 따져 가지고서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진리에 어긋남이 없어야 되지 진리에 어긋난 것은 다 헛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웅변 설교하는 사람, 웅변 설교하는 사람 또 무슨 풍자적인 설교하는 사람, 이렇게 그저 날뛰는 사람은 그 사람은 속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아주 떠들고 부흥으로만 일시에 사람의 감정이나 일으키고 하는 그런 것은, 그 사람은 얼마 못 갑니다. 그 사람의 목회는 반드시 가면 쭈그러지고 맙니다. 얼마 못 갑니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 말씀을 보고 한 말씀 한 말씀 또박또박 요 말씀대로 꼭꼭 받아서 요 말씀에 하나도 어기지 안하고 요렇게 나가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 가지고서 고것을 또 따지고 또 따지고 또 따져서, 우리는 신구약 성경에게 정죄를 받지 안할 수 있는 그 길을 가야 되고, 신구약 성경에 정죄받지 안하는 그 길도 성령이 오시면 또 정죄받습니다.

여러분들, 이 성경을 깨닫고 자기가 ‘요렇다’ 했는데 `이렇습니다' 나는 고렇게 깨닫고 알고 믿는데, 깨닫고 알고 믿는데, 아는 도수와 믿는 도수가 확 올라가는 걸 여러분들 체험했을 겁니다. 아는 것이, 아는 것이 나는, 예를 들면 요만치 ‘그렇다’ 요래 알았는데 아주 그거 몇천 배 `이렇다!' 꽉 알아지고 또 ‘그렇다, 나는 믿는다’ 했는데 그 믿음이 우리에게 꽉 힘이 쥐여 가지고 이는 틀림없이 요동치 안하고 확신이 오는 것 그게 뭐이냐 하면은 그때 진리에 영감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을 우리가, 우리 마음에는, 예를 들면 말이오. 우리 마음에는 여러 가지 기관들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모든 요소를 총지배하는, 지배하는 총지휘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욕심 감정 소원 정신 성질 뜻 감각 기억성 또 신경, 이 모든 것, 우리 마음에 그 요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것을 총감독, 총지배, 총지휘하는 우리 마음에 머리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머리가 있어 가지고서 이것이 이 모든 것을 지배를 합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그 마음의 제일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지배권, 지휘권, 지휘권 지배권을 가진 존재가 있는데 이것이 들어서 이제 현실을 닥치면 ‘마음 너는 이렇게 해라, 욕심 너는 이렇게 해라, 감정 너는 이렇게 해라, 뜻 너는 이렇게 해라, 정서 너는 이렇게 해라, 기억력 너는 이렇게 해라, 사고력 너는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해 가지고서 이것을 총지배하는 지배의 신경이 있습니다.

지배성, 지배성의 신경이 있으니 지배성 신경 그것이 뭐인고 하니 그것이 곧 우리에게 있는 양심입니다. 양심이 우리 마음의 총지배자입니다. 총지배자요 총관리자요 총지휘자입니다. 우리 마음을 총지배하고 관리하고 하는 총감독, 공장으로 말하면 공장장이라고 할까 하는 그런 우리 마음의 주인이라 말이오.

우리 마음의 주인이요 마음의 왕으로 되어 있는 것이 뭐인고 하니 양심입니다.

그러면 양심인데 그 사람이 바로 될라고 하면은 마음에 수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뭐 욕심 요소도 있고, 감정 요소도 있고, 신경 요소도 있고, 정신 요소도 있고, 기억 요소도 있고, 사색 요소도 있고, 분의 요소도 있고, 기백 요소도 있고, 이 여러 가지 많은 요소들이 있는데 그 요소들 다 누가 지배하도록 돼 가지고 있느냐 하면은 양심이 지배하도록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양심이 지배를 하면은 그 마음이라는 그 나라가, 마음이라는 그 국가가 아주 통일돼 가지고서 그 국가가 안정된 국가로서 잘 살고 있는 국가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양심이라는 것이 통치를 못하고 어떤 사람은 그 역적이 나옵니다. 요새 보면 우리나라도 데모가 이래 나오고 다른 나라도 데모 나오지 않습니까? 데모 나오는 거 모양으로 현 정부를 반대하는, 반역하는 역적의 데모가 나온다 말이오. 역적의 데모가 있어 역적의 데모가 여게서 역적의 데모가 나오고 저게서 역적의 데모가 나오고 양사방 그 데모 떼가 뭐 하나 둘뿐 아니라 그 사람의 그 마음에서는 이렇게 모두 다 심히 분쟁을 일으키는 그런 요소가 여게서 뿔룩 나오고 저게서 뿔룩 나오고 이래 가지고서 그것이 하나 나오면 그 마음은 그만치 불안하고 그만치 실패입니다. 둘이 나오면 그만치 실패입니다. 서이 나오면 그만치 실패입니다. 이래 가지고서 그 마음들이 이렇게 저렇게 해 가지고서 일정되지 안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뭐이냐? 정신 수양이 되어 있지 않다 하는 것입니다.

불교인들은 불교인이지마는서도 불교적인 양심이 그 마음을 다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통치하고 있어서 불교적인 양심으로서 그 양심은 불교적인 양심인데, 불교적인 양심이 통치하고 있으니까 그 불교인이 다른 욕심을 부릴라 해도 욕심을 부릴라 할 때에 불교적인 양심이 있다가 누르면서 ‘너 그라면 안 된다’ 할 때 못 합니다. 또 자기가 그거 하기 싫어도 불교적인 그 양심이 있다가서 ‘너 이거 해라’ 이래 강권을 하면은 그게 안 할 수가 없어서 하기 싫은 희생이라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교인들도 그렇습니다. 그런 불교인은 정신 수양을 해 가지고서 마음이 통일된 사람이라 그렇게 할 수 있어.

마음이 통일된 사람이라.

공산주의도 공산주의로서 그 마음이 통일된 사람 있고 기독자도 기독자로서 그 마음이 통일된 사람이 있으니 어쨌든지 그 사람이 지금, 안 믿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그 사람대로 통일이 돼 가지고서, 정신 통일이 되고 마음 통일이 돼 가지고서 사는 사람이면 그 사람이 실력 있는 사람이요 실력 있게 모든 행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것은 다 정신 통일, 마음 통일, 수양으로 그렇게 통일을 시켜서 그와같이 돼 가지고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 된 사람은, 욕심이 세력을 부리고 하나의 감정이 세력을 부리고 하나의 이 복수성이 세력을 부리고 또 이렇게 하나의 활동성 이것이 또 세력을 부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무슨, 욕심도 식욕이니 명예욕이니 오만 거 다 있는데 그런 것이 세력을 부릴 때에는 양심이 꼼짝을 못 합니다. 양심이 세력을 못 부려.

그러면 양심이 지금 세력을 뺏기고 꼼짝 못 해서, 양심을 꺾은 것이 그 사람 마음 속에 하나 있으면 그 사람은 한 큰 병이 들었습니다. 한 큰 병이 들었고 둘이 있으면 둘 병이 들었고 셋이 있으면 셋 병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양심을 반역하는, 양심을 반역하는 그런 마음의 부분 요소가 없고, 불교 양심이든지 유교 양심이든지 어떤 양심이든지 그 양심이 통일을 시켜 가지고서 통치를 하고 있다고 하면은 그 사람은, 불교인은 불교인으로서 불교 성공을 할 것이고 유교인은 유고 성공을 할 것이고 정치가는 정치 성공을 할 것이고 과학자는 과학 성공을 합니다. 그러나 과학자도 그것이 통일되지 안하면은 성공을 못 합니다. 저거끼리 분쟁이 나 가지고서 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양심이 통일을 하기는 했지마는서도 그 양심 자체가 죽은 양심도 있고 산 양심도 있습니다. 양심이라 하는 것은 지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 지식이 죽은 지식이면 그 양심은 죽은 양심이 되고야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 외에 있는 지식은 다 죽은 지식이고 배암의 지식이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이 그 양심을 지배하는 그 양심이 아니면 산 양심이 아니고 다 죽은 양심입니다.

그러면 이 유교나 불교나 무슨 이런 사상이든지 이런 종교나 저런 종교 그 종교가들이 이 마음, 정신이 통일돼 있다 하지마는서도 그 왕, 왕인 통치자 그 양심이 벌써 삐뚤어져 죽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거 단합되면 단합된 것만치 그것은 탈선이 빨리 되고 또 그는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서 가장 비정상적인 행동이 가속도로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자는 신구약 성경 지식이 자기 지식이 돼 가지고서 이 지식에게 지배받는 이 지식대로 된 양심을 가리켜서 신앙 양심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신앙 양심이 자기 마음을 통치하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은 신앙 생활에 성공을 하게 됩니다.

이래서, 양심이 모든 마음을 통치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양심은 성경에 말하기를 자연의 빛이라 했어. 자연의 빛. 하나님의 빛이 오기 전에는 인간에게 자연의 빛이 있으니 양심 그것을 가리켜 자연의 빛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크겠느냐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이 흐리면 온 몸이 어둡고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은 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눈이 흐리면 온 몸이 어두워지는데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크겠느냐’ 하는 고 빛은 하나님의 빛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양심의 빛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 양심이 자기 마음들을 통치할라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그러면 예수 믿어도 어떤 사람들은, 그 마음에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마는서도 이거는 못되게 말이오.

돈 욕심, 물욕, 돈 욕심이라는 이놈은 그 마음에서 하나의 양심의 군졸이 돼 가지고서 양심이 시키는 대로 지배를 받아 가지고 해야 될 것이 욕심 이놈이 그만 양심이고 뭐이고 다 반역해서 다 죽여 버리고 이것이 왕이 돼 가지고 날뛰는 사람은 그 사람은 하나님의 도를 절대 받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욕, 권세욕, 또 무슨 안일욕, 행락욕, 어떤 사람은 정욕, 또 음욕, 이런 모든 이런 거, 또 그 사람은 무슨 감정, 어떤 사람은 그 감상이라는 그 요소가 왕이 돼 가지고서 이거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바이올린 키면 그만 뭐 아무리 사람이 죽어도 바이올린만 거머쥐면 그만 그는, 놀리기 시작하면 그만 아무 정신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모든, 마음은 양심이 통치해 왕이 돼야 되는데 이 양심이 통치권을 가지지 못하면 그 사람은 이 세상서도 실패하고 아무것도 못 합니다. 실패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도 성공하는 사람들은 다 양심이 통치권을 가진 사람이오. 불교로 성공하는 사람은 불교인의 양심이 통치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교인으로서 성공하는 사람은 유교인의 양심이 통치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이 세상의 이런 어떤 학자로 성공했으면 학자의 양심이 통치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쨌든지 우리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뭐 백도 아니고 천도 아니고 만도 아닙니다. 굉장한 요소들이 가득 쌓여 가지고 이것이 종합체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종합체가, 마음의 의논을 해서, 회의를 해 가지고서 회의를 해 가지고 이 회의 정치로서 거게서 비판과 평가를 해 가지고 ‘요게 옳다’ 요렇게 해서 옳은 것을 는 그 마음 회의라면 그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뭐 옳고 그른 것도 가지리 안하고 어떤 독특한 무슨 감정이 나서, 옳고 그른 게 아니라 나는 이 원수를 갚지 안하면 안 되겠다. 이 원수는 갚아야 되겠다. 내가 어쨌든간에 어쨌든지 죽어도 나는 죽어도 이 원수는 갚는다.’ 거기서 양심이 말하고 정서가 말하고 이성 비판이 말하고 아무가 말해도 그래도 나는 원수 갚아야 된다’ 이래 가지고서 날뛰는 그것은 그게 지금 역적이 돼 가지고서 모든 것을 점령하고 있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안정을 해서, 우리 마음을 안정해 가지고 우 리 마음이 안정이 돼야 되지 그 마음이 안정이 안 되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보면, 이 사람의 마음은 무엇이 지배를 하고 있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번에 보면은 ‘이 사람의 마음은 양심이 지배하고 있다. 이 사람의 마음은 물욕이 지배했다가 정욕이 지배했다가 또 이 사람은 무슨 감상이 지배를 했다가 무슨 정서가 지배를 했다가 이 사람은 무슨 혈육의 무슨 정실이 지배했다가 이놈이, 왕이 나 가지고 불뚝불뚝불뚝 다 이라면은 그 사람은 정함이 없는 사람이요 얼마든지 주위 환경을 통해서 변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말하기를 이 사람은 뼈가 없는 사람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뼈가 없는 사람이라 이 사람은 주체성이 없는 사람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생활이 엉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우리 마음을 가다듬어 가지고서 어찌됐든지 우리 마음을 통일시키도록 해야 됩니다. 통일을 시키는 데는 누가 통치를 하도록 해야 되느냐? 성경 지식의 지배를 받는 성경적 양심, 신앙 양심, 요 신앙 양심을 자꾸 길러 가지고서 요 신앙 양심을 길러서 신앙 양심이 어떨 때는 물욕과 싸우기도 하고 감정과 싸울 때에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이 성경에 위반되는 것을, 거머쥐고 막 데모를 할라고 달라드는 이걸 눌러서 꺽어서 이것을 억제할 수 없는 양심이라면 그 사람의 구원이라 하는 거는 다 헛일입니다. 그것부터 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구원이 되는 것이지 그거 하기 전에는 구원은 못 이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심을 기루면, 그러면 이 양심은 어데 지배 받느냐? 중생된 영이 이 몸에게 분봉왕으로 세운 것이 양심입니다. 분봉왕으로 세운 것이 양심이오.

그러면, 이 중생된 영은 그 몸에게 양심을 제일 인정하고 신용해 가지고서 붙들고 일하게 됩니다. 이래서 중생된 영이 그 양심에게 무엇을 말할 때에 그 양심과 서로 연결이 돼 가지고서 양심이, 중생된 영이 말할 때에 그 말에 잘 복종한다면 벌써, 복종할라 하면은 마음에 여러 가지 요소 이놈이 불룩 거려도 딱 눌려 버리고 저놈이 불룩거려도 눌러 버리고, 이래서, 발이 중절은 선이라 이랍니다. 그게 발동해 나오는 것을 중간에 꺾어 버리는 거. 이게, 그것이 아예 처음에 움직이지 안하는 것이 그것이 안 믿는 사람은 말하기를 중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희로 애락의 미발이 중이라 이랍니다.

그러면 그 마음은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없고 그저 양심이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순종하는 고 사람이 됐으면 안 믿는 사람들은 그라면 그 사람은 중추 신경이 있는 사람이고 중추심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중심이 있는 사람이라.

그런고로 그 사람은 쓸모 있는 사람이라 하는데 우리는 요것이 되어지면은 벌써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간다’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볼 수가 있다’ 하는 고 양심입니다.

그래 가지고서 영이 말할 때에 영의 말에 지배를 받고. 그러면, 영이 우리 양심에다가 말할 때에 영 혼자 말합니까 영이 우리 양심에게 말할 때에 영이 몇 가지 힘을 가지고서 우리 양심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봅시다.

녜, 이 세 가지 힘을 가지고서, 세 가지 생명력, 세 가지 생명력을 가지고서 양심에게다가 지배를 하고 통치를 합니다.

그러면, 영이 세 가지 생명력을 가지고 양심에게다가 통치하는 이 행정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이 세 가지 생명력을 가진 이 양심에게 뒤에서 밀어주는 배후의 능력은 몇입니까? 그 배후에 협조하는 능력은 몇입니까? 배후에 협조하는 능력은 몇입니까? 배후에 협조하는 능력이 몇이라요?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봐요. 녜, 피와 성령과 진리입니다.

그러면 중생된 영이 양심에게 이 생명 운동을 할라고 통치를 할 때에 양심에게 세 가지 생명력으로 통치합니다. 피와 성령과 진리의 이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서 통치를 합니다.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세 가지 능력이 돕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능력이 영을 살렸고 영을 살린 후에 계속해서 이 세 가지 능력이 영에게 계속 힘을 줍니다. 계속 힘을 줘 가지고서, 그 사람 신앙 양심이 살았다고 하면 신앙 양심의 뿌럭지는 중생된 영이요, 중생된 영의 뿌럭지는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 이 세 가지가 뿌럭지입니다. 그래 가지고서 배후에서 역사해서 이렇게 그 양심을 통치할라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양심이 중생된 영에게 통치를 받게 되면은 그 양심이 중생된 영적인 양심이 됩니다. 중생된 영에게 다스림 받아 가지고 중생된 영과 동거 동행하는 양심이 됩니다. 그러면 그 양심이 그다음에는, 그래 가지고는 무슨 일 합니까? 그 양심이 그다음에는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다음에는 하는 일이 뭐입니까? 그다음에는 하는 일이 자기 마음의 모든 요소, 자기가 통치하고 있는 것이, 마음의 요소가 뭐 백도 천도 넘은데 이 모든 마음의 요소들을 자기 사상대로 자기 정치의 이념대로, 중생된 영에게 받은 그 이념대로 그 모든 마음들에게 이렇게 통치해서 모든 마음들이 이대로 순종하도록 이래 합니다. 이래 하면은 대번에 쭉 하나가 돼 가지고서 단합만 되면은 몸은 복종하게 마련입니다. 몸은 복종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이라면 그때, 여기에 구원 안 이루는 것은 이것이 불룩 나와 가지고서 데모하면서 반대하고 하지 저게 불룩 나와 가지고서 데모하며 반대하지 하는 그 사람들은 평생 양심이, 양심이 권리를 가졌다가 그만 권리가 데모에 말려 가지고서 고만 쫓겨나 버리고 꺾어져 버리고 이라는 사람은 헛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심신의 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양심을 기르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양심을 길러서 그 양심이 자기 마음의 부분의 모든 요소에 통치권을 강하게 가져야 됩니다.

이래서 바울은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은 나를 죽일라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나도 안다 너희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자꾸 목을 안고 울고 이렇게 말하지마는서도 나는 마음에 매인 바가 돼 가지고 나는 안 갈 수가 없다. 죽음이 있지마는 안 갈 수가 없다.’ 하는 고 마음은 고거 마음의 통치자 고 양심을 가리켜 말합니다. 양심에게 붙들려서 죽어도 양심이 가라 하니 안 갈 수가 없고 양심에게 끌려서 안 갈 수 없는 그 사람이 이제 자기의 마음과 몸을 통치한 것입니다.

이리 되면은 그 양심에게 온 마음이 단합이 돼 가지고서 ‘양심대로 요대로 하자’ 딱 요래 가지고 단합이 돼 버리고 나면은 양심은 마음을 통치하고, 마음을 통치해 가지고서 온 마음을 거느리고 그 마음이 무슨 일 하느냐 하면은 그 몸에게 이제 전달합니다.

몸에게 전달해서 그 몸을 통치할라고 애를 쓸 때에 그 몸이 게을하다든지 뭐 이래 여러 가지, 몸에도 온갖 요소들이 많이 있고 반항하는 것들이 많은데 이제 그것을 또 얼마나 의논해서 달래고 타이르고 이래 가지고서 비로소 그 몸이 ‘그러면 새벽 기도 나가자’ `그러면 성경 좀 보자' 그러면 성경 볼라고 할 때에 성경을 들고 손으로 볼 때에는 손으로 성경을 들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을 때까지는 어떤 그 이면에 공작이 있어 가지고서 그와같이 오느냐? 그것은 벌써 마음이 다 양심으로 통일됐고, 양심과 마음이 중생된 영과 연결이 됐고, 중생된 영 이면에 있는 피공로와 영감과 진리가 배경이 돼 가지고 역사하는 그 힘이 쭉 퍼쳐나와 가지고서 거게서 이렇게 해 가지고 비로소 마음이 재촉하니까 자기가 볼 마음이 있어서, 볼 마음이 있다가도 그만 이 마귀란 놈이 그때 서둘러 가지고 성경 못 보게 하면 못 봅니다. 그래 가지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되면 비로소 성경을 보고서 읽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손으로 들고 보고 읽는 데에는 수없는 과정이 나왔고 그 과정에는 굉장한 반대자들이 많았는데 그 회의 정치를 해 가지고서 통일이 돼 가지고 이와같이 된 것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사람을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적은 우주라 하는 그 사람이 마음의 요소를 좀 본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우주는 이거는 적고 사람이라는 이거는 우주보다 크기 때문에 우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좀 그 요소를 보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 요소가 많으니까 이 심신의 기능을 구원하는 것은 천번 만번에 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런 현실 줘 가지고서 이 요소를 저런 현실 줘 가지고 저 요소를 구원 할라고 하기 때문에, 왜 우리가 이해 못 하는 그 현실이 오는데 이해 못 하는 그 현실 거게서 내가 이해 못 했던 내 심신의 요소의 기능을 거게서 구원한다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면 그제야 우리에게 오는 그 현실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시느라고 큰 힘을 들였고 그 현실을 우리가 온 천하의 모든 현실보다도 내게는 고 현실이 제일 좋은 현실이고 가치 있는 현실이라 고 현실이 없었으면 내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현실은 우리에게, 온 우주보다 큽니다. 그 현실이라 하는 거는 우리에게 가치성이 더 큽니다. 고 현실에 하나님의 뜻만 딱 찾았으면 고것은 겨자씨 믿음이요 만능이요 전지 전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 마음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중생된 영이 우리 마음을 다스릴 때에 뭘로 가지고 다스리느냐? 요것만 말하고 말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계속하고.

뭘로 가지고 다스리느냐? 중생된 영이 우리 양심을 거머쥐고 단합이 될라고, 양심과 중생된 영이 단합이 될라고 이렇게 통치 단합이 될라고 이렇게 공작을 할 때에 제일 일차 공작을 뭘로 하느냐? 일차 공작을 성경 말씀 가지고 합니다. 성경 말씀 가지고 합니다. 성경 말씀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게도 하고 읽게도 해 가지고서 성경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도록 합니다.

우리 마음에 들어오도록 해 가지고서, 성경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 되면, 들어오게 되면 이 성경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올 때에, 들어올 때에 뭘로 들어오느냐? 우리에게 지성이라는, 우리 마음에 지성이라는 지성으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뭣을 배워서 알라고하는 고 지성으로 고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오고 그라고 난 다음엔 우리에게 기억성을 통해서 기억성에 연결되게 되면은 그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지성과 기억성이 요 성경 말씀을 읽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억하고만 있고 그다음에 하지 안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말이오 아까 말한 대로, 이제, 통치하는 그 지배성, 통치성, 통치성을 양심이 가진 것인데, 양심이 가진 것인데 이거는 지식으로 알기만 했고, 지성으로 알기만 했고 또 기억성으로 기억만 하고 있지마는서도 지금 총감독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총감독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고 있으면은 어찌 되느냐? 모르고 있으면은, 암만 자기가 이 두 가지 알고 기억하고 있어도 총감독은 이것을 한 번도 접촉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여게 대해서는 아주 통통 무식군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게 알고 거게서 통과돼 가지고 거게서 지배가 나와야 될 터인데 안 나오니까 헛일입니다.

조금 비유를 내가 하나 하겠는데, 어떤 사람이, 이 육체를 두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지금 얼음 위에서 타는 거 스케이트, 스케이트를 지금 탈라고 하는데 스케이트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스케이트에 대해서 스케이트를 타는 데는 이렇게 이렇게 해야 된다 고 지식을 알립니다. 고 지식을 알았으면 자기 지성이 고 지식을 알았습니다. 또 기억력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스케이트를 탈 때는 얼음 위에 가야 된다. 얼음 위에 가 가지고는 밑에다 뭘 달아야 된다. 달고 난 다음에는 설 때 어떻게 일어서야 된다. 어떻게 해야 된다. 그것을 배워 가지고 일 년 내내 해서 막 환하게 외웁니다. 스케이트를 탈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렇게 막 쭉 말하면 거게 대해서 일등 강의를 할 수 있게 그렇게 아주 숙달이 돼 가지고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에는, 마음뿐 아니라 우리 몸에는 지배 신경이라 하는 신경이 있습니다. 지배 신경. 지배 신경이라는 신경이 있는데, 그 지배 신경은 그것을 한 번 구경도 못 했습니다. 알고 기억만 하고 있지 지배 신경은 하나도 그것을 접하지 못해 봤습니다. 고라고 다음에 지배 신경이 그다음에는 활동 신경에다가, 활동 신경이 있어 가지고 지배 신경이 활동 신경에 말하면 활동 신경이 이제 그 스케이트 타는 것을 활동을 할라고 애를 쓰고 활동을 할라고 애를 쓰면 활동하게 되면은 그다음에는 조절 신경, 이 모든 것을 균형을 조절하는 조절 신경이 있어 가지고 그 조절 신경이 이제 그것을 요래 해야 되고 요래 해야 되고 그라면 치우쳐서 안 된다 요라면 넘어진다 고 잘 조화를, 조화 시키고 있는 조절 신경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도 해 보지 안했다 말이오.

해 보지 안했으면 그 사람이 스케이트 타는 것을 아무리 아주 힘있는 유력한 강의를 할 수 있고 아무리 외운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 사람이 스케이트를 타는 데는 모릅니다. 탈라고 하면은 넘어지지 스케이트를 타지 못합니다. 못 하고, 그 사람이 대충 지식으로는 배웠지마는서도 지식 가지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술이 있어 가지고 표현할 수 없어서 이렇게 되지는, 능동으로 되는 그게 있는 것인데 그걸 타보지 안한 사람은 모른다 말이오.

타면은, 만일 어떤 사람이 스케이트를 타는 데 대해서 논리적으로 한 마디도 듣지도 안했고 또 기억도 안 하고 모른다 말이오. 아무것도 모른다 말이오.

모르나 이 사람이 얼음 위에 가 가지고 스케이트를 거머쥐고 다른 사람이 타는 걸 보고 자꾸 이라니까 넘어지고 구불어지고 넘어지고 구불어지니까 나중에 그 사람은 막 쫙쫙쫙쫙 잘 탑니다. 잘 타는데 ‘야 어떻게 타노? 네가 이걸 좀 논리적으로 해 가지고서 좀 글에다 기록해 가지고 우리에게 좀 알려 달라’ 아무것도 모릅니다. 한 마디도 못 씁니다. 그러나 탈 줄은 안다 말이오.

그러니까, 이것은 실행하는 신경이 있고 지배 신경이 있고 또 통치 신경이 있고 조절 신경이 있고 이제 실행 신경이 있고, 있는데, 배우는 거 아는 그 지성과 기억하는 기억성 이거와 실제로 그 스케이트를 타는 데에 관계된 그 신경과는 딴 거라 말이오. 이것만 알았지 이거는 하나도 모르니까 이거는 도무지 스케이트를 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알고 기억하고, 암만 기억하고 알아도 이 말씀대로 실행하는 신경이라 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실행하는 신경은 따로 있는데 실행하지 안해 본 사람은 그 사람은 실행할라 하니까 얼음판에 가니까 뚜그르르 구불어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아무 소용이 없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오묘한 것을 좀 말하려 하다가 시간이 많이 갔는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한 마디 들어와 가지고 고걸 기억하고 있으면 요 한마디로 인해 가지고서, 한 마디로 인해 가지고, 내 마음에 여러 요소가 불뚝불뚝 데모를 할라고 일어날 때에 요것을 누르고 요 하나님 말씀이 나를 주관하고 있을 때에는, 고걸 아십시오. 하나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 마음 요소의 전요소, 이 우주 안에 있는 인간의 마음의 전요소 그것보다 세력이 큰 것이 진리입니다. 알겠습니까? 요걸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됩니다. 이 세력이 더 큰 것이 진리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진리가 그 속에, 자기라는 이 자유성을 가지고서 이 마음에서 진리를 영접하고 있으면서 진리를 버리기 전에는 이 진리는 그 사람 속에 있는 마음의 어떤 요소, 그 이웃에 있는 모든 친구들의 어떤 요소, 어떤 마귀 어떤 작용이 와도 그 본인이 진리를 배척해 버리기 전에는 이 진리가 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고거 경험해 보십시오. 자기가 그 진리를 가지고 그 진리대로 새김질하고 그 진리대로 행할라고 요렇게 고 진리를 잊어버리지 안하고 요 진리대로 내가 살아야 되겠다 하고 있으면 고 진리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 다른 것들이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다른 것이 들어오지 못하고 눌리고 꺾여서 들어오지 못하게 되면 거게 대해서, 이런 죄악의 요소도 저런 죄악의 요소도, 어떤 죄악도 들어오지를, 그 마음에 이 모든 죄악의 것들이 들어오지를 못하게 되고 하니까 이제 그 마음은 필연적으로 현실을 닥쳤을 때에 고 말씀대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요거는 여러분들이 지금 알기 어려워서 내일 아침에 그러면 계속하겠습니다.

이제 고 말씀이 우리 속에 있으면서 떠나지 안하고 있으면 어떤 말씀이라도, 떠나지 안하고 있으면, 고 말씀을 내가 버리기 전에는, 고 말씀을 버리기 전에는, 고 말씀을 버리기 전에는, 고 말씀을 내가 생각하고 보고 있을 때에는 어떤 죄악이라도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요걸 여러분들이 경험해 보십시오.

지배하지 못합니다.

못 하고, 고 말씀이 나를 지배하고, 그라다가 이 말씀을 깜빡 잊어 버렸을 때에 적이 콱 들어옵니다. 잊어 버렸을 때에 들어오지, 잊어버리지 안하고 이 말씀을 내가 생각하고 요 말씀대로 살라고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을 생각하고 요 말씀대로 살라고 하면 어느 말씀이라도 좋습니다. 어느 말씀이라도 생각하고 요 말씀을 잊어버리기 전에는, 요 말씀대로 살아야 되겠다 하고서 요 말씀을 잊어버리기 전에는 그 수많은 죄악의 요소가 내 마음 속에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요걸 여러분들이 경험해 보십시오.

들어오지를 못하고 이라다가, 이라니까 이게 못 들어오니까 옆에다가 말이지 무슨 소리를 꽝 낸다 또 어떤 사람이 왈칵 온다 별별 사람들이 옵니다. 와 가지고 사람이 떡 ‘아무것이 집에 있는가?’ 할 때에 그 사람이 아무것이 집에 있는가 할 때에 ‘누굽니까?’ 하다 보니까 말씀을 잊어 버렸다 말이오. 말씀 잊어 버릴 고 틈을 타 가지고서 요놈이 들어옵니다. 들어오고, 고때에 아무리 해도 ‘그게 오는가 보다. 잘못하면 이 말씀 잊을라’ 고 말씀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고 말씀을 강직하고 요 말씀대로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고 말씀을, 상대하고 있는 고 말씀을 잊어 비리기 전에는 죄악과 악령이라 하는 것은 들어오지 못한다는 걸 여러분들이 똑똑히 깨닫고 고걸 경험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뭘 봄으로 그만 말씀을 잊어 버려 버렸습니다. 소리를 들음으로 말씀을 잊어 버렸습니다. 내 속에 이 말씀을 잊어버리게 하고 딴 생각이 들어와 가지고 이 말씀을 잊어버리게 하는 그놈을 용납함으로 됩니다. 요것을 용납지 안하면 단시일에, 단시일에 자기 속에 있는 마음은 통치가 되고 자기 속을 괴롭히던, 여러 수십 년 괴롭히고 하던 요 괴롭혔던 죄악은 단번에 녹아져 버리고 깨져 버리고 다시, 이 말씀을 어느 말씀이라도 좋습니다. 놓지 안하고 가지고 있으면 결국은 그 사람의 마음은 그 말씀이 통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뭐 시간이 지금 많이 가서 안 됐는데 내일 아침에 또 나와요. 어쨌든지 나와서 이 진리를 깨달아요. 예수 믿는 거는 어려운 게 아니오. 예수 믿는 거는 어려운 게 아니고 또 예수 믿는 거는 억지로 믿는 게 아니고 예수를 믿고 싶어서, 잘 믿고 싶어서 애가 터지는데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안해 그렇지 늙어갈수록이 예수는 자꾸 잘 믿고 싶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무거운 짐진 걸로 비유했습니다. 무거운 짐이라 하는 것은 지고 갈수록이 자꾸 더 무거워지는 거 아닙니까? 예수 믿는 것은 자꾸 믿어 갈수록이 자꾸 마음이 자꾸 눌려서 더 잘 믿고 더 잘 믿고 자꾸 잘 믿고 싶은 그 마음에 불이 타고 간절해지지 예수 믿는 것이 ‘이만치 믿었으니까 언간히 됐다’ 하고서, 예수 믿는 사람의 그 믿음이 쇠해지고 늙어지고 차차 약해지면 그거는 산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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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향한 지식 13 가지-양심/ 에베소서 1장 4절-9절/ 1986. 2. 14. 금저녁 선지자 2016.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