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계약


선지자선교회 1989년 8월 9일 수새집회 

 

본문 : 계2:8-11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담은 복음을  듣고, 사활로 대속해 주신 주님의 설정하신 공로의 힘드심과 어려우심 또 배푸신  공로의 지극히 크고 완전해서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는 이 대속을 깨닫고 이  사랑에 감동돼서 이제는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명령인 의에 대해서, 하나님께  대해서, 또 자기가 여생 사는 모든 소망에 대해서 이것을 다 대속을 인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법도에 맞은 신앙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 그것을 가리켜서  처음 사랑 처음 행위라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이랬는데 차차 차차 이렇게 신앙 생활에 세월이 깊어가니까 그만 근본이요  생명인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대해서는 차차 잊어버려지고 멀어지고  자기네들이 행동하는 그 행함에 심신이 기울어지게 되기 때문에 나중에는 외나  생명은 잊어버리고 행동만 하니까 죽은 자의 행동, 안 믿는 사람 옛사람의 행동,  이 세상 사람들이 행동하는 행동과 같은 그런 행동이 되어진 것을 책망했습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인하지 아니한 것은 다 옛사람이 하는 것이요 새사람이  하는 것 아닙니다. 또 피조물만이가 하는 것이지 자존자 창조주 완전자의 하시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인하지 안할 때에는 자존자,  완전자, 전지 전능자 우리를 책임지시고 영원히 목적으로 정하시고 우리를 선택해  주신 그분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이 공로를 믿음으로 시발되는 것은, 그 믿음이 무슨  필요 있는가? 믿음으로 시발된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완전하고 영원하고  불변한 이 능력과 연결이 되기 때문에 연결된 모든 생활은 다 완전 생활이요  영원 생활이요 불변 생활이요 다 거룩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활의 이 대속을 잊어버리고 사건이 자기가 일하는 심신의  동기가 되고 발동이 되고 또 거기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나, 이 세상 무슨 주를  대적하는 무슨 대적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나, 또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무슨 진리 운동이나 보수 운동이나 어떤 그런 아주 귀하고 요긴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주님의 사활의 대속을 잊어버리면 하나님과는 끊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이 지나가면 썩어지고 더러워지고 없어지고 변해지고 망해지는 그런 것이  원인이 되지 이렇지 않는 이런 완전자와 연결은 끊어져 버립니다. 끊어지기  때문에 그 생활은 말하자면 죽은 행위가 됩니다.

 이래서, 우리는 신앙 생할 하면서 처음에 시발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감동되고, 그 공로에 감동되고, 거게 충격이 되고 그로 인해서 시작했다가 이 일을  차차, 그 행위를 옳은 행위를 해 나가다 보면 옳은 행위를 자기가 자기도 모르게  더 높이 평가해서 그것을 가치 있게 여겨서 그것이 자기 움직임에 원인이 되고  동기가 되고 그것이 자기 움직임에 목표가 되어지기 쉽습니다. 이것이 이 에베소  교회에 말씀한 것인데 제일 중요한 중요성입니다.

 기독교에는, 그 밑에 쭉 내리 일곱 교회를 보면 대개 그러합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에는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감동되고 깨달아서 그로  인해서 시작한 신앙 생활이 신앙 생활 해 나가다 보면 그만 생활 하는 사건, 또  생활해 놓은, 일, 이렇게 모두 뭐 마태복음 23장에 말씀하신 거와 같이 선지자들의  무덤, 의인들의 무덤, 뭐 누구의 기념비 뭐 이래 가지고 기념관 이래, 뭐 기념관  짓는 것은 아주 이것은 큰 일을 하고 복음의 일을 하는 줄로 이렇게 알고 이라나.

 무슨 이 세상에서 기독교에 그 모든 역사들을 보면 대개가 성도들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인해서 출발해 가지고 해 놓은 그 모든 공적이 있울 때에 그 공적  그것만을 가치 있계 여겨서 그것은 기념비도 세우고 뭐 기념관도 짓고 찬양도  하고 그 행위는 다 찬양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피공로를 말하는, 예수님이 대형으로 사죄하셨다,  대했으로 칭의를 하셨다, 대화목의 제물이 돼 가지고 화친을 하셨다, 또 영원히  하나님이 피조물을 입고 계시게 된, 하나님이 피조물의 입장에 있고 피조물의  대우를 받고 피조물 입장에서 역사하게 되는 이 부활의 큰 사랑의 희생 같은  것을 잊어버리고, 동기는 성령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공로를  입었음으로 제가 입은 것을 깨닫고 이 공로를 인해서 시발한 그 일이나  마지막에는 일만 귀중히 여기고 사건만 귀중히 여겨서 그만 생명되는 근본  원인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대개는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아주 기념관을 짓고 기념비를 세우는 그런 신앙의 사람들도 보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그 신앙의 행위 한 그 자신도 신앙 행위 한 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이 사랑과 지극히 큰 소망을 가진 이 소망으로 인해서  시작을 한 것입니다.

 제가 웅천교회 집회 가니까 거기 큰 판자에다 '나는 천하를 얻는 것보다 주를  위해서 죽겠노라' 하는 그런 하나의 표어가 쓰여져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단  옆에 그걸 세워 놨기 때문에 '이거는 무슨 말인데 여기다 세워놨느냐?' 이라니까  주기철 목사님이 그 교회서 주일학교 선생으로 또 집사로 이렇게 자라갈 때에  그분이 그때에 그 표어를 자기가 쓴 것이라 그분의 글씨고 그분이 그래 쓴  것이라 그래서 그래 간수하고 있다고 말합디다. 그런 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깨닫고, 사활의 대속의 이 소망을 깨닫고 보니까 온 천하를 자기가 얻는  것보다 주를 위해서 자기는 완전히 다 바치기를 원한다는 그게 소원돼서 그 글을  쏜 것인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다 여기고 그저 주와 같이 고난받고 주와 같이  죽어서 부활 후에 효력을 얻는, 권위와 영광을 받는 그것을 위해서 이 죽음  이편의 것은 전부 다 죽음 저편의 것을 위해서 투자하지 이것을 위해서 자기의  가진 재료를 투자할 그런 무지한 일을 완전히 버렸다 하는 그 말과 같이 그렇게  기록을 한 것인 것을 압니다. 본인도 잘못하면 그와같이 하다 보면, 신사참배라.

 '신사참배 이걸 오늘도 고문과 고형을 할 터이니까 그래도 나는 이 신사참배를  안 하겠다. 나는 그들의 신앙을 억제하는 데 내가 꺾이지 안하고 내가 신앙을  지키겠다.' 이렇게 생각하다가 보면 잘못하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이 사랑을  잊어버리고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제가 해방 후에 마산에 집회를 가니까 거게 뭐 내가 집회 온다는 말을 듣고  나는 몰랐는데 그분들은 내 소문을 잘 듣고 있습디다. 이라면서 모였는데 모두  나이가 한 사십 한 오십 되는 분들이 모였는데 그분들이 남자보다 여자가  많습디다. 그런데 신사참배 때문에 모두 감옥에서 옥고를 당하고 나온 사람들인데  내가 물어 봤습니다. 이들의 신앙이 어떤고 해서, '그러면 그때 싸울 때에 어떻게  됐습니까?' '예, 뭐 그래 가지고 고문과 고형해서 이제 이놈들 네놈들이 뭐  지져먹든지 볶아먹든지 구워먹든지 마음대로 해라. 내가 죽어도 신사참배는 안할  것이고 네놈들한테는 내가 굴하지 안할 것이다.' 이렇게 했다는 그런 말을 전부가  다 같은 말을 하고 있습디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본질과 본성과는 완전히 틀리고 자기들도  동기는 그랬지만 결과는 그만 자기네들의 주관과 이 세상적인 육적 싸움에  대립이 되고 그 사랑은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것을 그걸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들에게, 그걸 힘을 가지고 사는데 대번 그래 말하면 안 될 것이라서 말은  안 하나 나중에 그 설교 중에 그런 말을 좀 했습니다. 하니까 깜짝 놀라서  일어나지는 안하고, 모두 다 자기네들 그거 잘했다, 참 그래 뭐 구워 먹으면 구워  먹고 삶아먹으면 삶아먹고 뭐 그렇게 아주 결사적으로 그렇게 했으니까 잘했다고  이라면 힘이 나올 터인데 그만 그게 푹 죽어서 그 집회에 끝까지 참여를 했는지  안 했는지 제가 모르겠습니다. 잘못하면 이렇게 바꿔지기 쉽습니다.

 우리 OO교파에 처음에 이럴 때에도 뭐 신사참배 때문에 시비하는 일이  많았었습니다. 제가 해방 직후에 첫 총회로 그때는 장로회는 하나뿐이었는데  장로회 첫총회를 대구 제일교회에서 총회를 했는데, 그거 내가 대구 제일교회인지  신정교회인지 그 두 교회 중에 하나인데 제일 교회로 생각하는데 그거 장소는  내가 그때 참여를 했지만 어느 장소인가 지금 내가 조금 이 시간에 모호합니다.

 그게 혹 틀려도 여러분들이 그걸 이해를 하십시오.

 거게 가서 제가 참여를 했는데 그러니까 그때 앉는 좌석에 앉혔는데 신사참배를  안 하고 이긴 사람들은 이긴 사람들대로 거기 따로 이렇게 앉히고 신사참배를  굴한 사람들은 다 그 다음으로 밖에 둘러서 싸고 앉혀서 이래 있습디다. 저는  그때에 하나의 집사였습니다.

 이래서, 보니까 그들이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은 신사참배를 안 한 사람들에게  대해서 그렇게 속속들이 참 마음에 간절한 마음으로 감사를 하면서 이렇게 모여  있는 뜻이 그렇게 보이지 아니하고 또 참배를 하지 안하고 또 승리한 사람들도  그 승리한 사건에만 또 주력하고 있지 원인인 주님의 사활의 대속의 그 사랑에  감격해지는 그런 것은 별로 나타나지 안한 것을 봤습니다.

 이래서 나중에 그 회가 차차 차차 진행돼 나가는 진행의 마지막 종결 결과는  보니까 신사참배 하는 게 죄냐 죄 아니냐 하는 이 신사참배에 대해서만 강조됐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대한 것은 별로 말도 듣지를 못하겠고 그것을 또  들먹여서 말하지도 아니했었습니다. 그때에 첫 설교를 출감한 손양원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그 손양원 목사님이 설교하는 설교가 '우리가 이 신사참배 해서  하나님을 잊어 버렸다. 하나님 잊어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건국이라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해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야 된다는 그  제목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을 제가 그때에 들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사랑이 중하고 사랑이 크고 이 대속으로 말미암아 어디 연결이 됐고 이  대속이 없으면 연결이 끊어진다 하는 거게 대해서는 별로 들려지는 말을 못  들었습니다.

 제가. 그라니까 그 후에 자신들은 그것을 말하기를 별로 하지 안하지만 거게  따르는 사람들은 전부 내세우고 자랑하는 것이 그 몇해 동안 신사참배에 대한  신사참배를 했다 안 했다, 신사참배를 승리했다는 그것만을 들내고 팔고, 그  본인들은 그렇지 안했습니다. 이렇지만 옆에 따르는 사람들은 신사참배에 다  생명을 내놓고 그걸 승리했기 때문에 그 생명 내놓은 그것이 주님이 생명 내놔서  사활의 대속을 하신 죽으심의 그 사랑과 또 영원히 피조물을 입으심의 그 사랑에  대해서 모두 다 증거하고 찬양하고 그렇게 높이고 하는 일은 없고 다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승리했다, 옥고를 당했다 하는 그런 행위에 대해서만 높이고  하는 것을 봤옵니다.

 그라면서 그 마음에 좀 염려가 됐습니다. 염려가 되나 그때 입장에는 말을 잘 못  하는 것이 만일 그래 신사참배를 하는 것을, 뭐 그 신사참배 자꾸 말을 하고  있느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말해야 된다는 그런 것을 말을 한다고 하면  그만 오해를 받습니다. '저건 신사참배 지금 말 하는 것을 반대하는가보다'  이러니까 그 마음에 걱정만 돼지지 그 말을 잘 못 했습니다. 그런 게 지금도  있습니다. 교회서 삼일운동을 이렇게 찬양하는데 삼일운동이, 모두 다 거게  공로자들이 다 모두 신사참배도 다 승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데 이  삼일운동은 이것은 교회서 한 일 중에서 아주 큰 공로의 일로 이렇게 생각을  하고 다 찬양을 하는데 '그 삼일운동이 순복음이 아니다.'하는 그 말을 못 합니다.

 제가 뜨문뜨문 하기는 했습니다. 종종 하지만 그 말을 해도 너무 닥쳐오는 것이  복음에 큰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 말을 펴놓고 많이 하지 못하고 그저  사적으로 앉아 말할 때 있고 집회 때는 슬그머니 그것을 조금씩 귀 있는 자는  들을 만치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삼일운동 때문에 이 한국에 있는, 조선에  있는 교회들이 모든 정치가들에게 오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고 이렇게  말씀하셔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나라는 땅에 있지 않다 내 나라는 진리에  있다' 그라니까 빌라도가 진리가 뭐이냐고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 나라였으면 지금 이라도 열두영도 더되는 천사 중에 하나만  와도 이런 걸 다 전멸할 터인데 내 나라는 땅에 있지 안하고 내 나라는 진리의  나라다' 그렇게 말씀을 해서 세상적으로 싸우는 것을 주님이 거부를 했습니다.

분명히 그렇지만 많은 대세가 그렇게 기울어질 때에 잘못 말하면 마귀란 놈이  그걸 거머쥐고 오해를 해서 완전히 복음을 망쳐 버리고 말기 때문에 그런 말을  못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에베소 교회와 같이 아주 승리한 교회 또 아주 신앙으로 독실한  신앙가들 이런 분들이 신앙 생활을 하다가 그만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대속이  원인이 돼 가지고 거기에 감동돼서 그로 인해서 발원한 것이나 나가다 보면 거게  감동돼서 행동한 이 옳은 행동, 그만 그 행동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찬양하고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뒤로 돌리고 이라니까 본인들은, 그렇지 않다. 사활의  대속을 이걸 말을 한다고 해도 자기들이 한 행위니까 그거 자꾸 겸손해서 그것을  자꾸 말하지 못하게 하고 그뭐 그라면 안 된다고 하니까 그럴수록 겉은 그래도,  저거와 꼭 같은 사람으로 알기 때문에. 겉은 그렇지만 속으로는 찬양을 할수록  좋아할 거다 해서 그랄수록, 말하지 말라 할수록 더 말을 합니다.

 자꾸 이렇게 해 가지고 말을 해서 그것이 그만 원인이 돼 가지고 모든 교회들의  신앙 행위가, 성도들이 승리한 승리 생애 그것이 복음 운동에 신앙 운동에 종자가  되고 원인이 되고 원동력이 돼 가지고 이렇게 하는 일들이 뭐 우리 조선에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 교회가, 나는 역사를 다 모르지만 보나 안 보나 다 그랬을  것입니다.

 이러니까 '네가 어디서 떨어진 것을 알라' '어디서 떨어진 걸 알라 이것이  행위를 가지고 말하고 있고 사활의 대속을 잊어버리면 하나님과 완전자와  떨어진다는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복음 운동인 줄 알고 그래 가지고 뭐  한창 해방 후에는 신사참배 하고 안 한 그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여서 그걸 모두  다 찬양하고 자랑하고 '우리는 이래 신사참배 안 한 사람들이라, 저거는 신사참배  했다.' 이걸 가지고 늘 판가름을 하는 그런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만  그런 운동들이 다 힘을 잃어서 내가 돌이키지 안하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그 촛대가 옮겨졌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대로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 요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본인들도 이라다 보면 그만 그 일이 중요한 줄 알고 거게 전심 전력을  기울이다가 보니까 어떤 사건의 범죄에 자기가 범죄 안 할라고 전심 전력을  기울이다 보니까 유한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생각하는 것이  그만 흐미하게 돼져 가지고 차차 차차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뭐 금송아지 만든  거나 꼭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만든 그것은 눈으로 봐야 되고  그래야 인식이 돼지고 느껴지고 또 실감이 생겨지고 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출애굽에 굉장한 역사를 했지만 역사는 보여지고 역사하신 분은 눈에  보이지 안한 무형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자기네들의 과거의습성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있어야 우리가 힘이 나지 해 가지고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내나 지금도 그러합니다.

 보이는 그 행동을 대해, 행동을 말하고 그것을 말하고 느껴져야 힘이 나오지  벌써 근 이천 년이 다 돼 가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라는 것, 하나님이  사람되셨다는 것 동정녀 마리아 탄생이라든지 이 사활의 대속에 대한 것은  그렇게 아무 형체가 벌써 오래 돼서 흐미하기 때문에 실감이 안 난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신앙 생활 하다 보면 자연히 그 행위에 힘을 안 쓸 수가  없고 행위에 힘쓰다 보면 뭣 때문에 네가 그 일 하느냐? 그 원인인 참 주를  위함이 아니면 그런 일 할 수 없는 일인데, 원인은 잘 그래 가지고 원인은  잊어버리고 또 목적도 잊어버리고 한 가운데 톰박만 거머쥐고 좋은 올바른  결과를 맺는 그런 일도 못 하고 원인도 잊어버리고 말기 쉽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앞서 배타고 바다 건너로 가라 이렇게 재촉해서 보냈다  했는데 그 제자들이 배타고 갈 때에는 잘 갔는데 가다가 얼마 수리를 떠나고 난  다음에는 풍랑이 일어나서 그 배가 가지를 안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해석을 하기를, 제가 깨달은 대로에 해석하기를 그들이 처음에는  주님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 생각하고, 주님도 완전 전지 전능자요 말씀도 전지  전능의 독자적인 권위를 가진 말씀인데, 주님과 말씀을 생각하는, 주님과 말씀에게  명령 피동된 그 피동된 움직임으로 바다에 왔고 배도 탔고 또 노를 저어서  건너편 목적지에 갈라고 이렇게 했는데 배를 젓다 보니까 배젓는 데만 그만  사람들이 신경이 기울어져서 너 배 잘 젓는다 또 멋지게 젓지 그만 자꾸 이래  가다 보니까 차차 차차 주님의 말씀도 흐미해져 잊어버리게 되고 주님도  잊어버리게 되고 잊어버리니까 그 권능이 빠져나갔으니까 바람이 불어서 방해를  받습니다. 방해를 받으니까 더 거기다가 주력을 하니까 완전히 주님과 말씀은  잊어버렸습니다. 잊어 버리니까 이제는 풍랑으로 인해서 조금도 전진하지를  못하고 그들이 죽을 지경이라 지금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찾아오니까  주님을 얼마나 잊어버렸든지 '물귀신이 온다' 이래 가지고 그들이 고함을 질렀던  것입니다.

 그것도 그렇게 주님의 명령 순종하는 그 일을 하다 보니까, 주님의 명령이다  하는 그 명령을 생각하는 것보다 주님이 말씀하셨다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더  힘있는데 나중에는 보면 하는 일에만 전부 치중되고 말씀도 잊어버리고 주님도  잊어 버리니까 모든 풍랑이 일어서 전진하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이 내나 이런  것과 같은 해석의 뜻입니다.

 이래서, 그게 제일 중요한 것, 주님의 사활을 자꾸 노래 불러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말을 많이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시라' 생명이 떠나면,  생명이 떠나면 죽지 않습니까? 생명이 떠나면 죽고 죽으면 그 뒤에 되어지는 건  뭐입니까? 썩는 것뿐입니다. 생명 떠나면 죽고 죽으면 썩는 것뿐입니다. 주님이  우리 생명이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서 주님이 떠나면 생명이 떠난 것입니다.

 생명되신 주님이 우리 마음에 잊어버리면 떠나는데 떠나시면 주님은 어디 천리  만리 가셨는가? 중생된 내 영 안에는 영원히 거처하고 계시기 때문에 영 안에는  계시지만 우리 마음 안에는 떠났다가 오셨다가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노니' 하는 그 문은 마음의 문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면 마음 문을 두 드리면 어디서 두드리는가? 영 안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문을 열라 말은 이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잊어버린 것을 회개하고  사활의 대속을 자기가 생각해서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면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말하기를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자기에게 대한 의무와 책임과 그 본분의 궤도를 걸어가는 것을  가리켜서 인격으로서는 먹는 것이라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래서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하는 것은 그라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사명과 목적을 달성하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는 것은 우리는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과 함께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의 사명과 목적과 본분과 우리의  달려갈 길을 다 목적지까지 달려갈 수 있다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행위하다 보면 주님의 사활의 대속하신 이 주님 잊어버리고 공로  잊어버리고 하기 쉽다는 거, 그러면 우리는 완전자에서 끊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제 신앙 행위라 하는 것은 차차 차차 없어지게 됩니다.

 저도 그때 신사참배 할 때에 저는 육 년간을 감옥에 가지 안하고 매일 일본  부장으로 더불어 싸웠었습니다. 매일 싸웠는데 싸웠으나 저는 그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참 신사참배 안 하고 싸웠고 또 제가 그때 맡아 가지고 있는 교회가  개명교회였는데 개명교회 교인들은 주일학교 학생 하나도 신사참배를 안  했습니다. 매일 나만 들어 싸웠는데 하나님이 그때 그랬지 나는 그런 힘이 없는데  싸워서 그렇게 이겼었습니다. 한번은 주재소에 잡혀가 가지고 그들이 신사참배를  말할 때에 '천조대신 그것은 너희들이 우상을 미신으로 만들어 그런 것이지 아무  힘 없다. 너거가 거기 속지 말아라. 그걸 나에게 지금, 천조대신이라는 가미다나를  내 손에 쥐이면 내가 너거 앞에 불에 태우마. 국기도 너거 앞에 내가 태우마.

 아무, 태워서 벌받아 너거는 죽을 줄 알지만 안 죽는다. 그거는 공연한 것이니까  하지 마라.' 그것을 그들에게 그렇게 싸웠는데도 하나님이 허락지 안하니까  그들이 나를 뺨 한번도 때리지 안했습니다. 못 했습니다. 이래 서로 그라다가  그만 가라 해서 나왔었습니다.

 제가 팔월 십오일 해방은 덕유산이라 하는, 제법 높은 산입니다. 그 산만당에  거기 가 가지고 단식기도 하다가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그때 해방됐다는 것을  거기서 제가, 징소리가, 높은 만당에도 징소리는 올라습니다. 거기서 들으니까  그래서 '이거 무슨 난리가 났나?'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제 큰 아이가 벌써  어두운데, 찾아오니까 저물어서 어두워져서 숲이 굉장히 움밀한 곳인데 와 가지고  고함을 질러도 그 고함 소리가 거기 들릴 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 고함 소리가.

 그런데 그 소리가 또 들렸습니다. 그래 또 내가 내려간다고 말을 하고. 그래  내려왔는데 그 산을 지금 아래 내가 한번 가 가지고 사진을 찍을라고 갔더니만  안개가 끼어서 찍지를 못했는데 내가 인식하고 있기는 아주 요렇게 가파른  산입니다. 이랬는데 거게 한 뭐 십 분이나 걸려 내려왔는가? 하루 종일 내려와야  되는 데 십 분이나 걸려 내려왔습니다. 그거 뭐인지도 모르고, 양산 하나 들고  책보 들고 둘 들었는데 이래 가지고 그저 보니까 평지 같아서 훅 뛰니까  수르르르 똑 이거 뭐 이래 무슨 보자기 속에 내려가듯이 수르르르 내려가고, 또  발에 대이면 또 한번 훅 뛰면 수르르르 내려가고 그래 잠시 내려갔습니다.

 내려가 놓으니까 그만 거게 뭐 너른 아주 땅인데 거기서 서로 찾아 가지고는  밤새 찾지 못할 것이고 할 수 없어서 앉아서 거기서 기도 했습니다. 또 이리 와서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니까, 그라고 기도하고 좀 보니까 앞에서 부르는 소리가  납니다. 그저 부르고, 어디 있는가 싶어 벌로 부르고 고함만 지르고 있지요. 그래  만나 가지고 같이 내려왔었습니다. 내려와서, 그러니까 그분들도 알아요. 그래서  해방 기념 축하하는 축하식을 하는데, 해방된 축하식, 기념이 아니라 해방  축하식을 하는데 그 축하식을 할 때에 그때에 '아무래도 이 축하식에 강연은  이거는 -나를 말하면서 -백 영희씨가 이거 강연을 해야 합당하다' 하면서 하도  자꾸 그래서 제가 그때에 제가 거기서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한 데에 내가 그  강연한 요지는 이것은 어떤 사람의 노력보다도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이렇게 하셨기 때문에 거게 일한 모든 독립 운동 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쓰여졌으니까 다행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잘못하면 우리가 왜정에 시달려서 서로 잘못된 것이 많이 있으니까 그때에  친일파들이 잘못 세력 부리는 거기 대해서 오해를 하고 반감을 하고 만일 지금  뭐 서로 복수한다고 때려 죽이니 뭐이니 이런 소리가 나면 하나님께서 이 해방을  다시 거둬 버리고 우리에게 축복하지 안할 터이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된다는 그런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에 뭐 서로 몽둥이 짱글라 가지고 다 모았었습니다. 모두 몽둥이  짱글라 가지고 친일파 이놈들 다 잡아 죽인다고. 원청 거기 있으면서 세도를  부리고 이랬으니까. 그랬는데 그 일이 없었습니다. 그 면만큼은 그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그것을 그때는 신중히 듣고 그렇게 해서  그게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랬으나 제가 그때 있을 때는 나는 신사참배  안 한 사람이라는 그런 말을 내가 하지를 안했습니다. 안 할라 해도 나올 터인데  그때는 하나님이 지켜 주셔서 하지를 안했습니다. 또 그들에게 천조대신하고 일본  국가 때문에 고난이 많았었는데 일본 부장 앞에서 그것을 내가 불에 태우겠다는  그런 말한 것도 지금 말하지 내가 말 하지를 안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지금 여게 많이 왔을 것이고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 신사참배 안 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래서, 내가 이 말 하는 것은 잘못하면 내 자랑이 되면 어리석은 사람인데 그런  데에 가지는 않습니다. 나는 내가 실력이 없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은 당신이 그후에 쓰시기 위해 가지고 나를 더럽히지 안할라고 그와같이  당신이 하신 것이지 내가 힘있어 가지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뭐 백 프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시험에는 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단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모든 언행심사에 크고 작은 그 모든  일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사랑과 소망, 그 사랑과 그 소망, 이것을 믿는 믿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내나 그거라. 그 사랑과 대속한 이 대속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소망입니까? 이 소망을 자꾸 생각해서 소망을 생각해 볼 때에 이  소망을 깨달은 사람은 땅에 있는 것을 배설물, 배설물이라 말은 똥오줌이라  말이오. 찌끼라 말이오. 찌끼로 여기지 안할 수차 없는 것입니다. 기독자의 소망을  본 사람은 소망은 예를 들면 정금덩어리고 이 세상 온 세상은 똥덩어리인데  똥덩어리 취하기 위해서 정금덩어리를 버릴 자가 누가 있습니까? 이 소망을  깨닫고는 이 소망 두고 땅의 것 위해서 노력할 그런 자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듣고 들어도 깨닫지 못해 그렇지.

 이래서 크고 작은 모든 일이 여게 원인되어 가지고 하지 안한 일은 다 헛일이라  하는 그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고, 또 여게 원인돼 가지고 귀한 일을 하다가도  이 사활의 대속을 잊어버리면 다 끊겨지고 헛일이라 하는 그것을 또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끊겨지면 촛대가 옮겨집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 붙들려서  의로운 행위를 하고 난 다음에 행위를 찬양하고 주님을 잊어버린 그 행위로  말미암아 일어난 운동이 소멸되지 안한 운동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역사 공부하는 데에서도 역사에서, 그런 뭐  역사들이 지금, 내가 말한 것은 나는 그 교회사, 교회사를 공부할 때에 나는  공부를 하지를 안하고 이래서 교회사 공부할 때는 나는 시험을 치는데 육십점을  맞았습니다. 다른 것은 다 거의 뭐 백점이고 이랬지만 그런 육십점을 맞았어. 왜?  그 가르치는 것이 그저 뭐 연대 가르치고 뭐 있다 있다 하는 것만 말하고 있지  '그러면 어떻다 말이냐?' 그걸로 가지고 우리에게 실효 있는 것을, 아무런 그게  없기 때문에 나는 그 과목을 아주 무시했습니다. 내가 무시한 거는 과목을  가르치는 걸 무시했지 과목은 지금 중요하게 여깁니다. 저는 그래서 일찍부터  '학교에 사회학을 공부를 할라거든 법을 공부하고 그 다음에는 사학을 공부해라'  두 가지를 그렇게 제가 시킵니다. 그래서 우리집 아이들은 전부 법을 다  가르쳤습니다. 법을 가르치면 뭐 정치가 좋아서 정권 잡을라 하는 거 아니라.

 정권은 하나도 안 잡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인간들이 공평되게 인간들의  수준에서 제일 공평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을 아는 것과 자기가 어떻게  처세해서 인인 관계를 가져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말한 것이고,  사학을 공부하라 하는 것은 잘못하면 사람은 그 현실이라는 그 시대속에  파묻히기 쉬우나 그 시대속에 파묻히지 안하고 천 년이면 천 년 몇백 년이면  몇백 년의 그 역사를 한 페이지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그 현실에 지내쳐서  파묻히지 않고 전체면을 보고 살 수 있다는 면에서 제가 사학을 말한 것이라.

 그것은 제가 목회자로 나서기 전에 집사로 있을 때에 집회를 다니면서 그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거집에 아이들은 전부 내가 법에다 입학을 시켜서  뭐 남아이고 여아이고 전부 법 공부를 내가 시켰습니다. 그러나 정계에 나선  사람은 없습니다. 장면 때에 법무부 차관으로 그때 임명된 것을 내가 가서 말해  가지고 그것을 기어코라도 못하도록 금지해 가지고 거기서 그만 많은 물의를  당하면서도 그게서 사면을 하고 안했었습니다. 정권 잡을라고, 정치할라고 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수준에서 인간의 모든 경우를 알고 살아야 되겠다는 그면에서  그렇게 했었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어떤 일이라도 일하는 동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대속이라야 되고, 또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항상 여기서 힘을 얻어 가지고  해야 되고, 마지막에 결과를 맺은 것도 그것이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어제도 말했지만 목회자가 설교를 할 때에 설교 준비 할라고 어디로  뭐 산으로 가도 들로 가도 상관 없습니다. 그 자리서도 상관 없습니다. 무슨  서적을 보고 성경을 보고 이래 성경 보는 것도 성경 보고 무슨 설교 할까 하는  그것은 제가 경험한 대로는 껍데기입니다. 그라다 보면 알맹이 생명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 설교 준비할 때에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 대속하신 사활의 대속을 자꾸  생각하면 나오는 것은 뭐이냐 하면 죄밖에 안 나옵니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  죄에 대해서 나는 너무 등한시 했다. 하나님의 명령 순종에 너무 등한시 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데 너무 등한시 했다. 내가 하나님만을 소망해야 될  터인데.' 이러니까 하나님만 사랑하라 하나님만 바라봐라. 하나님만 의지해라.

 하나님에 대해서 만자를 많이 붙이는 것은 아마 제 주장이 제일 많을 것입니다.

 이래 다른 사람들은 다 괴적으로 봅니다. 나는 내대로의 체험하고 경험한 게  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말합니다.

 이래서 사활의 대속만 자꾸 생각하니까 내 잘못 한 것만 자꾸 생각해지니, 나  잘못한 것만 생각해지는데 나만 잘못한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볼 때 모든  사람도 다 그런 사람입니다. 이러니까 잘못된 거 고치면 될 것이기 때문에 내나  그게 설교입니다. 전부 설교는 다 거기서 나옵니다. 뭐 다른 데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거기서 나와서 성경 배웠고 거기서 나은 거 가지고 설교하고  그렇습니다.

 그러고 우리는 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말하면 이 세상  걸 가지고 자본삼아 가지고, 썩지 아니할 것, 완전한 것, 또 신령한 것, 이렇게  강한 것 이런 것을 다 말한 것은 그것은 피조물의 요소를 말한 것 아닙니다. 요거  똑똑히 여러분들 들어요. 피조물의 요소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의 요소로  된 그걸 말한 게 아니고 피조물이 피조물로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인하여서  창조주 자존자 완전자 그분의 요소로 바꾸어지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분의  요소로 바꾸어진다는 말은 그분의 요소에 믿음으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인해서 딱 들어붙습니다. 연결이 딱 돼 버립니다. 연결이 되니까 연결된 그 면에  가서 보면 이는 자존자요 이는 피조물이다 이게 구별돼 있지만 밖에서 보면  그분인지 뭐인지 모르기 때문에 영원 무궁토록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인 줄 알고 바라보고, 이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것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하시는 시은의 역사를 다 교회들이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를 하나님으로 보고, 교회는 또 하나님은 영원히 자존하신  분이요 이분의 은혜를 우리가 받고 이렇지 아직까지 하나님을 보지도 못한다  하는 것으로서 알고 있는 것이 거리 멀고 그런 것이 우리 교회들입니다.

 이래서 처음에 어릴 때에는 주님과 자기와의 아주 거리가 가까와서, 나도 처음에  믿을 때는 그랬습니다. '주님이 아무리 하늘나라 이래 가셔도 만일 내가 거게  없으면 당신이 뭐 뭣이 있어도 섭섭해 그럴 것이다' 이라고 어떨 때는 하나님께  삐꾸는 짓도 했습니다. '내가 삐꾸면 당신이 내게 절절 맬 것이다' 이래 가지고  삐꾸는 짓도 했어.

 그러니까 그때 내게 대한 것을 기도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황보 기 장로님이 와  가지고 '이럴 때는 기도를 하시오' 내가 처음 믿을 때니까 집사로 있을 때인데  '기도를 하십시오' 그래 내가 웃었습니다. 그러니까, 눈치 알아채고 기도를 자꾸  하라 해요. '예예' 이래 대답은 해도 속으로는 '뭐 기도는? 내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아서 내게 필요한 것은 더 잘해 주실 것인데 뭐 그걸  달라 말아라 그렇게 말할 거 있나?' 그래 가지고 기도를 안 했어요. 안 하다가 그  후에 참 이제 내 자신에게 대해서 기도하고 우리에게 대해 기도했지, 지금도  기도할 때는 모든 기도 다하고 제일 마지막에 종말로 내 혈육에 대한 기도를  합니다. 자신에 대해 기도하지 내가 앞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제일 종말로, 모든  기도 다 해 놓고 난 다음에. 그저 꼬랑댕이로 내게 대한 기도를 하고 그래 아멘을  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다 안다고 이렇게 일방적인 신앙을 가졌다가. 그랬는데 지금도  차차 차차 이라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그렇게 나하고 딱 들어 붙었었는데 지금은  하나님과 먼 감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도 생각해 보니까 당신에게 꾸중 들을 일  저것도 보니까 외식 전부 나쁜 것뿐이니까 마음에 하나님께 낯이 없습니다.

 안면이 없어요. 이랬는데 그 말을 내가 어디서 위로를 받았느냐 하면 어떤  사람의 전기를 보니까 하늘나라 갈수록 하나님과 우리 성도들의 거리는 너무  멀다. 그 거리 먼 것을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 1장에 기절한 것을 보고, 하나님과  가까와지면 하나님과 거리 멀어서 기절이 되고 그렇게 친밀감이 없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바로 보게 되는 것은 자기가 그만치  성화가 됐기 때문에 그와 같이 바로 보게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 가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거리는 무한히 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그분과 끊어지느냐? 무한히 멀고 무한한 우리의 소망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한의 소망을 향해서 무한한 믿음, 무한한 믿음, 끝이 없는 믿음, 끝이  없는 무한한 믿음, 영원한 믿음으로 그분을 향해서 달리고 바라보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여기서 우리가 우리가 영생하는 것은 전부 영생하는 것은 인적 요소로  영생하는 것 아닙니다. 전부 신적 요소입니다. 완전자요. 신적 요소에 인적 요소가  연결돼 가지고 순전히 신적 요소의 지혜로 하고 힘으로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생의 구원이 되어지는, 정죄받아서 멸망하지 안하고  구원되어지는 이 구원에 들어가는 것은 뭐이냐? 전지의 지혜로 한 것, 전능의  능력으로 한 것, 완전자로부터 한 것, 이 완전의 신적 요소의 것이 인적 요소를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에, 신적 요소의 것이 인적 요소를 통해서 나타나도 그것이  완전이기 때문에 소멸되지 못하는고로, 신적 요소의 것을 피조물인 인적 요소가  아듬고 있기 때문에 신적 요소는 생명이 되고 인적 요소는 성전이 되어서 신적  요소로 인해서 인적 요소가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능력이요  우리의 전부입니다. 전부는 사활의 대속 자체가 이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하나님과 사람이 합해 가지고 이제 완성을 이루었기  때문에 로마서 1장에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하나님이 완성했다는 말인데, 하나님이 완성했다는 말은 신성과 인성 이 둘이 한  격위를 이루기까지 이래 하나가 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거는 전지 전능자가 이룬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사람이 수억억만 명도 더  되는 택한 자의 형을 다 대형할 수 있다는 것은, 한 사람이면 한 사람의 형밖에는  대형을 못 합니다. 예수님의 인성도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의 인성도 피조물인데  피조물 한 사람으로서 한 사람 형밖에는 대형을 하지 못하는데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이지만 무한하신 신성과 인성이 한 격위가 돼 가지고 한 격위 일위를,  일위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 무한하신, 무한한 신성과 인성이 한 격위를  이루어 가지고 했기 때문에 한 그 일이 유한한 사람의 일만이 아니고 무한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무한한 수를 다 담당을 하고도 또 무한히 남아 있습니다.

 이것으로써 한 사람으로서 많은 택자들을 대속하고도 많은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요것을 단딴히 기억합시다. 오늘 아침에 지금 우리가 신앙 행위를 하는  데에 동기가 예수님의 사활로 인한 동기가 아니면 헛일입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사랑으로 인하여서 그것이 시발된 움싹이 됐다 할지라도 중간에 가다가  잘못하면 O목사님! 좀 안 따라오는 거로구만. 좀 자세히 봐. 모두 다 우상이 있어  그래. 모두 다 목사들 전부 우상이 있어. 저거가 가면 뭐 '테이프 안 있느냐?'  테이프가 다 우상이오. 이래서 녹음 못 하구로, 그전에는 내가 녹음음 못 하구로  자꾸 이렇게 해 쌓았는데 이제는 뭐 이거 녹음으로 다 이거 테이프로 퍼져  나가야 되니까 그런데. '테이프에 있으니까' 이거 처음에는 자기가 열심히 필기해  놓고 뒤에 애를 쓰지 않는 것은 '필기에 있지 않느냐?' 그 필기가 우상이라.

 필기가 설교해 줍니까? '필기에 있지 안하냐?' 이랬는데 지금은 이래 놓고 '내가  여간 못 들어도 한 마디도 어아도 빠지지 안하고 전부 녹음기에다 다 녹음이  되어지니까, 테이프가 있지 않느냐?' 여게다 떡 의지합니다.

 의지하고, 녹음기 가지고 하는 사람들은 보면 하는 짓이 밉상이라. 왜 그렇느냐?  이래 듣고는 이래 있어도, 있으면서도 일단 정신은 뭐이냐? 테이프가 탈칵 그러면  바꿔 넣어야 되니까. 거게 다 전부 정신 다 들고 설교 듣는 데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 말이오. 그러니까 꾸벅꾸벅 졸다가도 어째 탈칵 그 소리는 잘 듣습니다.

 그래 가지고는 안 돼요. 우리는 말씀은, 말씀은 인간의 방언으로 하기 때문에  이거는 얼마 안 됩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다 기록할라 하면 온 세상에 둬도  둘 곳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감으로 되어지는  은밀 의지가 있으니까 은밀 의지 그것을 만일 기록한다고 하면 그거는 이 세상에  못 두지요. 어디 두겠습니까? 무한하지.

 이러니까 인간의 이 방언이라 하는 것은 이거는 참 몇닢푼치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게 그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는 발표의 기술이요 발표의 방법인데  인간의 방언 가지고 안 되는 건 인간의 방언으로 이래 할 때에 성령이  전달됩니다.

 이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전할 때에 지혜의  오묘한 말로 전할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성령의 감동으로 권능으로 전할라고  하고 있다. 이래 하는 것은 너희들이 이 말씀을 듣고 믿는 그 믿음이 성령과  하나님의 권능에 있기를 원해서 이와같이 내가 애쓰고 있다. 뭐 묘한 말로 이래  전하는 말 묘한 걸로 하지 안하고 전할 때에 성령의 능력, 성령의 지혜가 함께  하셔서 성령과 지혜의 결실을 맺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권능에 있다.' 그 말을 듣고 그 속에 성령이 역사하시고  완전하시고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그 능력이 와 가지고 한 것만이  영생이지 그거 아니면 영생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은 못 해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들을 수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말 본위다. 말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말에다가 전력을  기울여서 말을 고등술어를 써야 되겠다. 또 아주 유식한 전문 술어를 써야  되겠다. 말에만 주력하고 도는 모르는 사람이라. 말로 가지고, 책을 아주 어려운  말, 그 책을 읽을라 하면 뭐 학자라도 사전들을 찾아봐야 읽을 만치 어렵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도는 하나도 담겨 있지 안하고 수평선 이하, 이 세상선 이하의  세상 것들만 담겨 있지 세상을 초월한 그 위에 하늘나라의 것은 없더라 그  말이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땅에 속한 자는 땅의 말 하매 잘 듣고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에 속한 말 하매 잘 듣는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 녹음을  믿지 말고, 정 안 되면 그거라도 하기는 해야 되지만 들을 때에 영감을 같이  받아야 돼. 영감을 같이, 그래서,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뭐입니까? 사랑이 이거 하도 잡탱이가 많아  가지고 그라기 때문에 사랑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뱀의 사랑이  있다. 뱀의 사랑은 살해의 독이 제일 강하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과 평강이  충만하다. 이래서 사랑을 둘로 구별해야 될 터인데 사랑 둘을 구별하지를  안합니다. 이 말 하면 다른 사람들이 괴이히 여기고 욕을 합니다. 이 말이 없어.

교계에 없다 그 말이오. 알기야 알겠지.

 이 말을 잘 안 해요.

 이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게 하나님의 사랑인가? 그전에도 여기서  그걸가지고 내가 가르친 기억이 있는데. 사랑이 외형은 같애요 안 같애요? 사랑의  외형은 같다고 했어요 안 같다 했어? (같습니다.) 같고, 또 내용은 같애요 달라요?  (다릅니다.) 내용은 다르다고 그것을 내가 얼마나 장시간을 여기서 가르친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들이 이거 만홀히 듣지 말아요. 이거 백영희 목사가 아니요. 백영희  목사 그까짓 거는 국민학교 오학년밖에 안 했어. 몰라요. 나는 그거 못 한 거 안  한 게 참 다행이야.

 나 하나님께서 이래 지금, 하나님이, 또 저거 오해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저  설교할 때 가르쳐 주신 대로 그래 하지 나는 설교하고 난 다음에 설교하고 그  뭐인지 내가 잘 모릅니다. 모르는데 제가 이 설교록을 이라지만, 자꾸 모든 사람이  '설교록 설교록' 이래 쌓아도 내가 부끄러워서 '설교록, 내가 뭐 무식한 내가 이거  말해 놔서,' 그래 내가 처음에는 설교록 이거 그냥 내놓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수치스러워 안 되니까 이거 다 대학 졸업맡은 이거 조금 학자 축에 가는  사람들이 이 설교록을 다시 수정을 해서 이렇게 하라고 그거 한 달에 돈을 그때  뭐 상당히 돈을 보수를 주면서 그것을 수정하라고 수정을 시켰습니다. 수정을  시켰는데 또 누가 말하기를 '수정한 그것은 도무지 맛이 없고 은혜가 안 되고  하니까 그대로 해야 됩니다.' 또 이래 놓으니까 얼떨떨해 이런가 저런가 나는  모르고 그저 뭐 '하나님이 하실 대로 하십시오. 나는 모르겠습니다.' 이랬습니다.

 이랬는데 그때에 어떤 서적이 하나 와 가지고 나는 뭐 독서력이 그렇게  독서력이 힘이 없어요. 이래서 다른 사람에게 그걸 읽으라 했어, 그걸 한 서너 장  읽고 또 설교록을 내가 또 뭐이든지 하나 해 가지고 한번 읽어 봐라 해서. 또  서너 장 읽어 봤어. 읽어 보니까 이거는 천지 차이라. 가치가 천지 차이라. 나도  그때 비로소 설교록을 알았어.

 그라고 난 다음에 '이거 아니다. 이게 이 설교록을 이거 읽히는 것이 이거  하나님의 뜻이겠다.' 이래 가지고 지난 학기부터, 지난 학기부터 던가 그  전학기부터였던가 양성원에 양성원 학생들을 이거 가르치는 것을 여섯 주간인데,  여섯 주간을 가르치는데 셋 주간은 내가 가르쳐야 되겠다. 셋 주간을 제가  가르치기로 작정을 했어. 그 셋 주간 가르쳐 가지고 셋 주간 동안은 내가 뭐 거기  가서 가르칠 그런 시간도 없고 힘도 없고 그것은 나도 나 할 일 할라 하기  때문에. 죽자껏 해야 내 일과를 해요. 일과를 하는데 잘못하면 내 일과를 못 해.

 내가 기도할 것도 못 하고 못 해요.

 이래서, 가르칠 수가 없는데 그래 가 가지고 이 설교록을 읽혀야 되겠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설교록을 읽으라고 지난 주간 셋 주간 뭐 했지? 설교록 셋 주간  설교록 읽었어요. 설교록 읽으니까 설교록을 읽을 줄을 몰라요, 모두. 나도 뭐  읽으니까 까끌까끌해서 말이 뭐 잘 안 내려가. 이랬는데 설교록을 읽었어요.

 이러면 한 사람이 읽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은 또 같이 내려가면서 속으로  이렇게 따라 내려가며 읽고 또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이 읽고, 이래 가지고  읽었는데 석 주간 읽은 것이 설교록 제 일권 백권부터 시작했는데 그 백권 안에  거는 지금 아직 출판을 못 했고 백권서부터 이래 했는데 백권에서부터 얼마  읽었지? 그러니까 일권 읽고 둘째권째 한 오분지 일 읽고 못 읽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학생들이 어떠냐? 자꾸 그거 원합니다. 그래 내가보니까 가만히  그래 어디 나는, 나이가 많고 연조가 많으니까 짐작을 한다 말이오. 이것들 가만히  얼굴빛을 본다든지, 피부를 본다든지, 그들의 또 정신을 본다든지 행동을 보니까  사람이 완전히 변화돼 버렸어. 이게 복음이지 딴게 뭐 있어? 전부 변화가 많이  됐어. 그래 내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여기서 얻은 힘을 버리지 말아라. 또 가  가지고 이 일을 계속해라.' 숙제를 내나 그거 읽도록 숙제를 시켰어요.

 여기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내가 생각하고 이제 이 설교록을 양사방, 보니까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 많아요. 또 다른 진영에 가는 것이 많아. 우리 진영보다도  다른 진영에 사 가는 목사들이 많아요. 우리 진영 목사들은 이거 사 가는  것보다도 뭐 다른 데서 사 가는 게 많아. 이거 아마, 그래 내가 읽어 보고 난  다음에 이 가치, '이거 내가 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셨다' 설교할 때에 무슨  말을 했는지 나 몰라요. 그 말을 모른다는 것보다도 뭘 했는지 몰라요. 나오는  대로 이래 하는데 내게 영감을 주시는 대로 내 심령이 밝아져서 그걸 환하게  자꾸 말해야 되겠다는 것을 생각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 아침에도 이 서머나 교회에 대한 것을 이와같이 봉독하고 난  다음에 에베소 교회 걸 다시 재독을 해서 말하는 것이 이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걸 다시 한번 다져야 되겠다 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언행심사에 이 모든 신앙 행위, 이런데 여러분 들이 이거 잘  구별해야 될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우리가 각각 서서 뭐라 했습니까? 어?  그리스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심판은 우리 영을 심판하는 것 아닙니다. 요거  똑똑히 알아요. 그리스도의 심판은 우리 영을 심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심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몸을 심판하는 것도 아닙니다. 뭘  심판합니까? 행위를 심판합니다. 요걸 알아야 됩니다. 요게 골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행위를 심판하기 때문에 행위는 마음과 몸에서 나오는 것이요  마음과 몸과 합작돼 했는데 행위만 심판하고 마음과 몸은 심판하지 안하고  행위를 똑똑히 행위 심판이라고 말하고 다른 데도 다 그렇게 말씀했어. 이러니까  그거는 뒤에 언제 나오는 시간 있으면, 사데 교회에 그것이 나올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의 신앙 생활 하는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  행한 대로 우리가 다 갚음을 받는 이 큰 과제를 두고 우리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가 다 하나님 앞에서 심사받아 가지고,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심사받아 가지고,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심사받아 가지고  무궁세계로 갑니다.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무궁세계에 갈 수 있는 자격으로 다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공심판은 우리가 완전히 면제됐어. 완전히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통과한 자들을 이 공심판 대신 통과시키 주신 그분이 지금 권리가  있습니다. 그분이 지금도 '이 공로 너거들에게 하나도 안 입힌다' 하면 안 입힐  수가 앴고 입히면 입힐 수가 있어. 뺏을라면 뺏을 수가 있습니다. 그분이 이제  뭣뭣은 내가 다시 재심사하지 안하고 그대로 공로를 입혀 줄 것이고 뭣뭣은  심사해 가지고 공로를 입힐라면 입히고 뺏을라면 뺏을 수 있다는 이것을 선포해  놓은 것이 이 행위입니다.

 이래서, 우리의 이 모든 신앙 행위는 앞으로 그리스도의 심판을 통과해 가지고  무궁세계를 가는데 그리스도의 심판을 통과할 때에 그때에 무엇으로써  심사하느냐? 그것을 영원 무궁에 실패면 실패 성공이면 성공인데 그 문제를 미리  안다는 것이 이것이 얼마나 행복이 됩니까? 이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평생  기도 제목이 주님이여 66권 도리를 바로 깨닫게 해 달라는 이것을 기도 중에  제일 왕으로, 왜? 바로 깨달으면, 그걸 바로 깨달으면 거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대속을 담아 놓은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에 중심이 뭐이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담아 놓은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다. 우리가 성경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거게 사활의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이 약속의 계약이 담겨  있기 때문에 가치 있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의 모든 행위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심판받을 때에 동기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인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되고,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되고, 또 진행 과정이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되고, 또 결과 맺은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뭐인데? 하나님의 사랑은 죄 없이 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오. 죄 없이 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오. 또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 또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뿐 아니라  하나님 자체와 일치되게 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 또 영원히  하나님만을 향하여 소망하고 또 하나님의 것만 받아 가지고 부요해지는 것, 모든  피조물의 것 받아 가지고 부요해지는 것 아니라. 피조물의 것을 받지 안하고  하나님의 것만 받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받은 것이 완전자의 것을 받았기 때문에. 완전자 됩니다.

 완전입니다. 완전만이 영생하지 완전치 안한 것은 영생하는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혈과 육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하는 것을 성경에 말씀해 놨습니다. 이래서  요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어디서 떨어진 것을 알라. 다시 돌이켜서  다시 재연결하지 안하면, '회개치 아니하면' 하는 것은 재연결하지 안하면  그말입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네 원인이 되고, 네 방편이 되고, 또 네 힘이 되고, 네  소망이 되고 전부 다 돼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대속은 우리의 원인만  되는 것 아니오. 우리의 진행 과정의 방편도 되고 우리의 결과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과가, 우리가 맺어지는 결과가 뭣 맺습니까? 사죄를 결과로 맺고,  칭의를 결과로 맺고, 화친을 결과로 맺고,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이것을 결과로  맺는 것이 우리의 결과입니다. 그러면 종자요 결실이요 다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면 이기는 자에게는, 요 다시 재연결하는 자에게는 어디 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낙원에 있다 했는데 어제 어떤 사람이 여게 낙원을 묻는데  낙원은 '오늘 너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  낙원을 말씀하셔서 이 낙원은 무궁세계가 이루어지기 전 무궁세계를 소망하는  대기소라고 그렇게 우리들이 다 생각을 하고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면 낙원은 예수님과 그 강도가 세상을 떠나서 무궁세계를 대기하고 있는 그  대기소라고 말했는데 그 대기소를 말합니까 또 딴 대기소가 있습니까? 그래  물었습니다. 그 진실한 성도요. 이거 똑똑히, 요래도 저래도 되는 게 아니라. 왜?  그 아는 거게다 내 소유와 몸과 생명을 막 쏟아서 지금 투자해야 될 터인데 잘못  알면 자기 소유나 몸이나 생명을 잘못 투자하는 것 안 되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교리와 신조는 자기 생명보다 가치 있어. 교리와 신조에게 자기 생명을  투자할 것이기 때문에 생명보다 귀중한 것이라. 내가 생명을 다 바칠 그것이기  때문에 잘못 알면 큰일 납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낙원을 물었어. 그 좀, 내가 그 많을 들을 때 하도 고마와서,  다른 사람 볼 때는 '목사님이 질문하는데 저거 이 대중을 위해서 지금 거석하면서  거기 만나 가지고 뭘 얘기를?' 내가 여기 주저앉았어. 내가 주저앉으면서 그분을  만나 가지고 얘기를 내가 어북 좀 장시간 얘기를 해서 말을 했어. 내가 기뻐서.

 즐거워서. 제자들이 '여게 이거 떡 잡수러 오시오' 이라니까 '너거끼리 먹어라  나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여게 있다.' 이라니까 '뭐 갖다 줬는가?'  뚱딴지같에. '사마리아 여인이 갖다 줬는가?' 이랬는데 사마리아 여인에게 지금  당신의 할 일이 있고 아버지의 보내신 뜻이 있기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낙원은  예수님이 가실 그 낙원인데 그 낙원, 죽은 다음에 가는 그 낙원, 죽은 다음에 가  가지고 거기서 대기하고 있는 그 낙원. 대기하고 있을 낙원. 그러면 대기하고  있으면 대기할 때에 거기서 뭣을 하고 있겠소? 그 대기한, 거게 있는 강도가 지금  대기하고 있는데 대기하고 있는 그 강도가 뭐 생각할까요? 그 낙원에 있는  강도는 '아이구, 이거 사업을 어찌 해 볼꼬? 취직을 어떻게 해 볼꼬? 어디 지금  내가 권세를 잡아 볼꼬?' 그런 것 땅의 것은 생각 하나도 없어. 땅의 거는 생각  하나도 없어. 순전히 무궁세계의 것과 무궁세계의 주인공되는 하나님만 생각하지  딴것 생각은 하나도 없어. 이랬는데 낙원에 있는 생명과실을 먹는다 말은 이  세상에 죽기 전 낙원이나 그 낙원이나 내나 한 낙원인데 죽고 난 다음에 낙원에  가서 대기하는 것은 아무라도 다 할 수 있지만 죽기 전 낙원에서 대기하는 사람,  그 사람은 낙원에 있다 말은 일편단심이 하늘나라 영원한 무궁세계만 소망하고  그 일만 하고 있다 그 말이오. 내나 다른 성경에도 그래 말해 놨어요. 이렇게  모든 체질이 불에 타서 녹아지리니 너희들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져야 되느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거게만 소망을  가지고 사모하는 자 돼라. 간절히 사모하는 자 돼라. 그러니까 소망도 거게 있고,  마음도 거게 있고, 거게 소망하고 거기서 생각한 것을 이루기는 이 현실이라는  세상에서 이루지만 자기의 심신은 다, 다 거게 기울여져 가지고 있다 하는 그  말이오. 그 말이 내나 여기 낙원에 있다는 말 한가지입니다. 어제 질문한 사람이  누구요? 손 한번 들어봐요. 어제 질문한 사람 어디 있어? 또 그것만 하고  기어들어갔나? 그러니까, 그때 낙원을 어제 그 말을 다 해 줬어요, 해 주기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리라'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리라. 나무라는 것은 이거는 하와를 말합니다. 생명, 생명 행위의 결과를  먹게 한다. 나무는 행위를 말합니다. 생명나무, 생명나무라 말이 무슨 말이요, 배운  대로 말하는 하로 말하면? 예? 하나님과 연결된 행위. 생명나무. 하나님과 연결된  행위. 그 결과는 뭐이요? 그 열매가 결과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오. 내가  했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이오. 전지 전능자가 하신 일이라. 완전자가 하신 일이라.

 그러기 때문에 해서 이루어 놓은 그 결과인 일은 완전이라. 그거는 전부  하늘나라의 것이고 완전이라. 그것으로써 양식삼게 한다. 그렇게 너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는 것과 온전히 행하는 것이 양식이 요 양식 먹는 것인데  자기는 하나님과 연결된 행위의 그 일과 그 결과만 맺는 그 생활만 하게 된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여게 다른 해석을 붙일 수가 있어요? 다른  해석 붙일 수가 있어? 이러면 옳으면 꽉 잡아야 합니다.

 또 여러분들이 가 가지고 지금 다른 잡아야 합니다. 이러면 그 주석을 보고 어느  게 나은가 하는 보다를 거석해서 모든 주석들을 찾아보고, 또 이것보다 이것보다,  이것보다 이래야 펄 터인데 어짜든지 선입적 관념으로 제것이 좋다 하는 것이오.

 제가 깨달은 것 제가 배운 것, 제가 알고 있는 것. 우리는 세상에 있는 동안은  자꾸 회개의 기간입니다. 회개의 기간이니까 자꾸 더 좋은 거 더 좋은 거 더 옳은  거 더 옳은 거 바른 걸 자꾸 그걸 찾아서 잡아야 되는 것이 우리가 회개할  기회인데 이 기회 놓쳐 놓으면 뒤에는 다시는 못해요.

 그러고 이제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 말씀했는데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이 일곱 교회에 편지한 것 보면 전부 사자들에게 편지했습니다. 이  사자들은 곧 일곱 별이라고 표현도 하고 했는데 목회자들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사자들에게, 에베소 교회도 사자에게 직접 편지했고 또 서머나 교회도 직접  사자에게 편지했는데 이제 여기서 그 교회가 뭐 좋고 나쁘고 한 것은 전부  목회자 한 사람에게 책임입니다. 이래서 1장에 '기록하라' 1장 20절에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의 비밀이라. 비밀은 감추어 있어서 알기 어렵다는 것을 가리켜서 말했는데  바로 목회자가 교회요 교회가 목회자라. 그러기 때문에 이 교회라 하는 것은  목회자의 사진판이라.

 이러기 때문에 목회자가 교회의 그 모든 장점을 보고 이제 하나님 께서  자기에게 장점을 주셔서 장점을 가진 것을 보고 감사하고, 교인들에게 단점을  보고 자기에게 단점이 있기 때문에 단점이 거게 나타나 있다 하는 것을 봐서 그  교인들의 장단점은 바로 자기의 모형이라. 교인들의 장단점은 자기의 모형이요  자기는 교인들의 원형이라.

 이러기 때문에 장점에 대해서 그것이 자기로 통해 왔기 때문에 교인들의 장점이,  시기하지 말고 교인들의 장점이 제 장점이 그리 가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것인  줄 알고 하나님 앞에 감사할 것이고, 단점은 제게 있는 단점이 그리 가 가지고  됐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단점을 보고 조롱하고 비소하고 훼방할 것이 아니라 그  단점이 곧 내 단점이 나가 가지고 그와 같이 됐기 때문에 그 단점을 내게서 먼저  고칠라고 해서 고쳐지면 그것은 따라서 고쳐지는 그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이래서 요 비밀을 말했어. 요 비밀. 이렇게 하나라는 것을 모른다 그 말이오.

지금 현재에도 교역자 이코르(equa1) 교인. 이것이 겉어머리는 교인과 교역자지만  실은 하나이라. 모든 시발하는 것도 하나요, 또 과정도 하나요. 또 결과도 하나기  때문에 이제 교인이라는 그것은 교역자를 어떻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교역자가 자기를 모를 때에는 교인을 보면 자기의 거울이기 때문에, 자기의 꼭  사진판이라. 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비밀이라 이렇게  말했어.

 이래서 여기 일곱 교회를 보니까 일곱 교회에 이렇게 편지한 것이 전부 일곱  교회 뭐 어느 장로에게 어느 집사에게 그리 하지 안하고 전부 사자들에게, 그  교회 사자에게, 그 교회 사자라 말은 그 교회 목회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오.

 목회자에게 전부, 주시는 은혜도 목회자에게 다 줘 가지고 목회자들에게 준  은혜가 온 교인들에게 퍼쳐 나가고 또 교인들의 잘못된 그것도 전부 목회자가  심판을 다 받습니다. 이래서 목회자가 그 교인들의 모든 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고 장점을 가지고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교인과 목회자는 그 관계성이 마치 말하면 머리와 몸과 그런  관계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의 머리는 목회자요 목회자의  몸뚱이는 교인들이라. 이렇게 이것을 둘로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의 단점을 교인들에게 찾아 보면 잘 볼 수가 있고 또 교인들의  단점을 치료할라 할 때에 자기를 치료하면 교인들의 단점은 치료가 됩니다. 이게  속빠릅니다. 아주 직통입니다. 바로 하나요. 그러기 때문에 일곱 교회 사자들에게  말씀 했다 이렇게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네로 황제 때에 제일 순교자가 많이 났는데 그때 베드로가  설교를 여기서 하면 그 설교 듣는 사람들이 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나도 주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게, 천하를 얻는 것 보다도 주를 위해서 내 생명 바치는  것이 귀하다.' 주기철 목사님의 소원 같은 그 소원이 다 생겨지니까, 또 저게  나라에서는 '이놈이 거기서 집회했다 하니 잡아라' 하고 잡으러 오면 또 그분은  거기서 또 '내일 저녁에는 아무 데서 모일 터이니까 그리 모이라' 이라니까 그  말이 하나도 누설되지 안하고, 말해 주지 안하고 다 그래 가지고 그날 밤에 또  거기 모여서 거기서 또 집회를 하고 집회하고 나서 참여한 사람들 은혜 받고  '나도 다 순교하겠다' 이래 가지고 하루밤 지내고 나면 순교자들이 왕창 나오고  왕창 나오고 또 순교에 아직까지 힘을 못 얻은 사람들은 또 다음날 저녁에  집회하고 이래 가지고 마지막에 그 집회가 끝날 때까지 그 비밀이 보존됐고 또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고 난 다음에 베드로도 갔고 모든 성도들이 다 갈 데로 다  갔습니다. 다 순교로 다 주 앞에 갔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교인들의 신앙 여하는 교역자에게 달렸습니다. 보면  알아요. 가까이 보면 몰라도 멀리 보면 알아요. '저거는-성경을 이거 연구하고 난  다음에는-저거는 어떤 목회를 하고 있다. 그러면 저 목회는 십 년이 되면 어디로  탈선돼 나가겠다. 저거 이십 년 되면 완전히 변질돼 버리고 만다. 저거는  가다가는 식어지고 만다. 저거는 식어지지 안하고 끝까지 끝굴림을 한다.'  끝굴림을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인해서만 하는 거.

 이러기 때문에 모든 가르치는 것이 교리와 신조를 가르치는 거 이것은  변했지지를 않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에 집사로서 가조 신천교회 가서 집회를 할  때에 그때에 지방에 시찰장이요 당회장으로 있는 목사님이 제가 집회 한다  소리를 듣고 거게 위로한다고 찾아왔습니다. 찾아와 가지고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하는 말이 '내가 집사님의 지금 설교한 걸 들으니까 전부 교리 설교인데 교리  설교를 해 가지고 교인들이 듣느냐? 그걸 그들이 다 이해를 하느냐? 이러니까  교리 설교를 가지고 부흥회,-부흥회라 해요.-부흥회를 인도하면 안 되니까 교리  설교를 하지 말고 그저 교인들에게 모든 생활 설교를 그렇게 하는 게 좋다.' 하는  그런 충고를 받았습니다. 그 받을 때에 내가 '예' 하기는 해도 속으로 내 속에는  달랐습니다.

 모든 옳은 게 교리와 신조에서 나오는데 성경을 근거해서 성경 교리, 성경을  어떻게, 성경이 뭐라고 말하느냐? 성경이 말하는 거, 성경이 또 어떻게 믿으라고  하느냐? 이거 외에 딴거 인간들의 말 뭐 다른 생활 모든 성자들의 소개나 하고  성녀들의 소개나 하고 생활 이런 거 저런 거 말하는 거 암만 해 봤자 거게는  생명이 없다 이렇게 내게 느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어도 내나 그 다음 시간에도  가면 또 교리 신조 설교입니다. 전부 교리 신조 설교만 제가 내치 해  나왔었습니다. 나는 그때 뭐 조직 신학 그런 거 구경도 안 하고 보지도 안한  사람이오. 이래서, 그런 말 내가 들었습니다. 내가 교역자로 나서고 난 다음에.

 조사님이 집회 할 때는, 집회 할 때에는 아무 거석이 없는데 집회 하고 난  다음에는 전부 다 그리 끌어붙여지기 때문에 이거는 참 기이한 이거 뭐 술법이  있다고. '집회 할 때는 은혜 안 받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그 사람이 돼 버리고  마니까 이거 금해야 되지 이거 큰일난다' 그래 가지고 제가 금족령을 받은 곳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이 이 지역에, 시찰적으로 이 시찰 지역에 시찰회에 와 가지고 만일  집회하면 이거는 뭐, 뭐라 하더라? 뭐 모스크바에 비밀국이라 하던가 이래 가지고  거기는 들어가기만 들어가 놓으면 다시는 나오지 안하고 이라기 때문에 이거는  안 된다고 이라면서 집회하고 난 다음에 그 뒤가 무섭다고 이렇게 말해 가지고  금족령을 내렸습니다.

 그래도 제가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어찌 아는지? 내가 손양원 목사님 교회에  사경회 인도하러 갔었는데 가다가 차가 고장이 나 가지고, 거기 어디인지 나는  몰라요. 가자 하는 대로 갔지. 이랬는데 거기 차가 고장이 났는데 그 차가  고장나고 나니까 와서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애. 나는 전연히 모르는데. '내가  어디서 집회를 참석했습니다. 이래 내가 그때 내가 들은 말씀 가지고 지금 살고  있습니다.' 하는 그런 소리 하는 사람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래서 '교리와 신조는  효력이 있다' 하는 것을 나는 확고히 잡고 있습니다. 이래 전부 이거 교리 신조를  지금 말합니다. 지금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하는 것이 얼마든지 해석해 나갈  수 있지만 골자는 요것입니다. 예수님의 사활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여게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거게 보면 독생자 보내 가지고 사활의 대속한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오.

 그러면 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사랑의 진짜요 알맹이요. 사활의 대속의 이  진짜를 싸고 있는 꺼풀은 뭐입니까?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이오. 알맹이  사랑은 뭐입니까? 알맹이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으니까  성령이 알맹이 사랑이라. 그러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속에는 뭐이 들었습니까?  뭐이 들었습니까? 에베소 1장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 능력이' 뭐라 했어? '그  능력이 그리스도 속에서 역사하사 죽고 살고 하는 그 역사를 일으켰다'  말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요. 성부의 역사요.

 삼위일체 역사요. 표현은 도성인신하신 것은 성자가 도성인신해 가지고  일하셨지만 도성인신하신 그 도 속에는 삼위일체가 다 내주해 계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크고 큰 한 생명의 도인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 도를 아는  사람들이 뭐 피조물을 두려워할 게 뭐 있겠소? 제가 죄지을까 실수할까 두렵지  그 피조물의 세력이 커서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길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요 사자라는 데에서 목회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목회자와 이 교회와는 이거는 곧 둘이 아니고 하나인  이 비밀이 되어 있고 하나인 행위를 하고 모든 결과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이리도 보내고 저리도 보내고 이렇게  보내고 목회자가, 아직까지 되지 못했을 때에 이리 저리 자꾸 이렇게 이동을  시립니다. 이동을 시키니까, 이 세상에 인사 조처하는 사람들이 뇌물도 받고 이거  권리 있으니까 '이거 언제 내가 백 목사 뒈지면 그 다음얘 내가 그 자리 차지해  가지고, 인사권을 떡 받아 가지고 이리 이동하라 저리 이동해라 이렇게 한번 권세  한번 부려 볼까?' 이렇게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그 권세를 하나님이  주지 않습니다. 거리가 너무 멉니다.

 이래서, 교역자가 옳게 되지 안했기 때문에 이것은 여기서 가서 실수해서 실수  터먹이 된 것을, 이제 실수한 걸 제가 겪고 채험하고 경험해서 아니까 그 다음에  딴데로 옮기면 그 실수는 다시는 하지 않습니다. 그 실수는 하지 않고 다른 실수  또 합니다. 또 옮기며 갈아 그래 요리 조리 몇 번 옮겨서 이렇게 해서 차차차  되는 것은 돼지고, 되고 난 다음에 된 사람은 이동을, 나로서는 이동을 안  시키는데 혹 된 사람을 이동시키는 수가 있습니다.

 있는 그거는 뭣 때문에냐? 이 일이, 사건이 있는데 이 사건은 이 사람이 가야  처리하지 이 사람이 가지 안하면 처리할 수가 없다 해서 그 사람은 사건  처리하러 보내는 것이지 사람을 만들러 보내는 것 아닙니다. 이동을 시킬 때에  사람을 하나님의 종을 만들기 위해서 보내는 이동도 있고 일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보내는 이동도 있습니다. 내가 일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동하는 그  일을 지금 내가 노경에는 깨닫고 그 일을 할 수 있으면 많이 안 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그 일은 참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안 할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이 이 교회에 필요 있어서 일꾼으로 보내 가지고 일을  하도록 또 그 일을 하면 얼마 수습이 되고 되면 또 이리 보내 가지고 하고  이라니까 그 면 효력은 있지만 이리 저리 다니다. 보니까 이거 뿌리박은 자리가  없고 이러니까 교인과 교역자가 하나된 그 면이 없이 이라다 보니까 이거 뜬  교역자가 돼 가지고 노경에 문제가 된다 그 말이오.

 이래서 어떤 사람이 자꾸 이래 돌아다니고 자꾸 이래 놓으니까 벌써 자리를  잡아서, 사람이 한 오십이 넘어 되든지 그라면 육십줄에 가면 너무 늦은데  오십줄이 되면 그만 거기서 한 교회에 뿌리 박으면 그 교회 교인들이 한  생명이요, 한 정신이요, 한 사상이요, 한 목적이요, 하나를 힘입어서 한 힘으로  이와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친가족보다도 모든 면이 친밀해서 서로  얼마든지 참 죽을 때 뭐 병들 때 똥오줌도 받아낼 수 있고 또 이렇게 뭐 봉냥도  할 수 있고 이렇지만 빙빙 다니며 떠돌아다닌 거는 가 봤자 그런 인연을 맺지  못하니까 그저 찍해야 일, 급한 수습만 하면 또 가고 이라니까 이거는 나중에  예를 들면 똥오줌 받아낼 교인이 없다 그 말이오. 똥오줌 받아낼 교인이 없어.

 이러니까 이거 들쳐내서 이거 안됐다 이래서 제가 할 수 있으면 교역자를 고칠  만한 흠점이 없으면 그만 그 자리에서 평생 종신을 하도록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역자들이 많지를 못합니다. 이 면 장점인데 이 면이 단점이라.

 그러기 때문에 하필 보내는 것은 언제든지 자기에게 자기 단점에 합당한 교회를  보내기 때문에 제일 가기 싫어하는 교회요. 자기 단점이 거기서 절단날 교회를  보내서 단점을 보강해 가지고 보충할 수 있는 그런 곳을 가기 때문에 제가 가기  싫은 곳을 보낸다 그 말이오. OOO목사, 보내도 좋아? 왜 대답 안 해? 좋아? 안  갈 거라 보내면 좋아? 보내면 좋지.

 그래 아직까지 목회자가 안 돼요. 안 되는데 지금 이제 자꾸 장점이, 사람이 만일  일곱 개가 장점이 있어야 된다면 여섯 개만 장점이 있으면 한 개 단점 있는 그  단점은 위에서 알고 지도해 고쳐 주지 못하면 고치가가 썩 어렵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장점을 다 좋아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그게 장점이 된 것입니다. 장점을  좋아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장점이 돤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일본 사람 말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다 능숙하게 된다 그말  있어. '쓰끼가도모도 조스나리' 이렇게 능숙하게 된다 이렇게 말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능숙하게 됩니다. 이러니까 장점은 좋아하지만 단점은 싫어하기  때문에 단점은 가서 만나기도 싫어하고, 접촉도 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그것이  살아나고 고칠 수가 없어. 이러기 때문에 이래 장단점이 다 없어지면 이 공  모양으로 둥글둥글하게 외나 푹 쭈그러진 데가 없어. 이거 둥글둥글하게 공  모양으로 원만한 자가 되어져야 돤다 그거요.

 이래서 몇몇은 그렇게 옮길 수가 없다고 이렇게 하는, 옮길 수 없을만한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는 옮길 이유가 없어. 원만하게 됐으니까. 옮기면 도로  뿌리박지 못하기 때문에 손해라. 일을 할라 하면 적어도 한 오륙 년 륙칠 년 칠팔  년 돼야 거기서 교인들도 믿고 인정하고 합니다. 저는 삼십팔년째 났는데 지금  대개는 내가 무슨 뭘 말하면 잘 들어요. 잘 인정하고. 그래 놓으니까 나보다 모두  후배들이 설교를 잘하는데 후배들이 설교하는 건 아예 안 들을라 하고 미리부터  안 들을라 해요. 미리부터 안 들을라 하고 내가 설교하면 잘 듣고. 이만치 설교한  것의 효력이 잘 뻗치니까 설교하기가 좋지 안해요? 목회하기가 좋아요. 이러니까  이 뿌리가 박혀야 돼요.

 이런데 이런 목적에서, 이 교회를 위해서 보내는 거 있고 목회자를 위해서  보내는 거 있고 두 종류가 있습니다. 사람 된 사람은 교회를 위해서 보내요. 안된  그 목회자는 목회자를 고치기 위해서 보내요. 이래서 뭐 몇몇 교회는 이거는 아예  안 보내기로 딱 작정하고 그렇게 있는 그런 교회들은 이동을 안 시킵니다.

 이동시키는 건 아주 고치기 위해 이동해야 될 것은 나중에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슨 주목을 당해도 이동을 시켜야 됩니다.

 그래서 인제 그것을 꼭 임명제로 이렇게 할 때는 그 일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임명제를 제하고 청빙제를 말했어. 청빙제 한 것은 내가 힘이 없기 때문에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는 행위입니다. 내가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요. 그 책임을 내가 질  만한 힘도 없기 때문에 전가하는 행위지. 임명제로 할 때는 내가 죽었어. 한  교역자를 딴데로 보내 놓으면 이 교역자와 교인간의 정반대되는 자를 보내  쌓았으니까 거기서 조화가 맞아야 되기 때문에 이거 하나 설득을, 교인들  설득시켜 교역자를 설득시켜. 제일, 교역자를 설득시키기가 제일 힘이 들어. 이거  설득을 시켜서 이래 할라 하면 녹아나. 그래 내가 가만히 과거를 보니까 병난  것이 전부 교역자 이동하는 그 시기에 다 병이 났어. 지금은 거기 대해서 뭐 이제  청빙제로 하면 내가 감당할 만한 힘도 없는 때고 이라니까 이제 청빙제로 하면  저거에게 책임을 지워. 청빙제라는 건 저거에게 책임지워. 저거에게 책임지워서  이러나 저희들이 하는 데 따라가서 '원하면 원하라. 이래 하나님의 뜻이면  되겠지.' 이래 놓으니까 저거가 청빙하다가 청빙하다가 암만 청빙해 봤자 거리 먼  데 저거에게 해당치 안한 교역자를 청빙하니까 됩니까? 아마 청빙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OO목사일 것이고 그보다 많이 받는 사람은 내일 겁니다. 이래도  그래 청빙하면 거기 가겠소, 더 큰 일이 있는데.

 이러니까 청빙하다가 하다가 안 되니까 이에는 나중에 마지막에는 '아이구,  이제는 공회에서 보내 주는 대로 받겠습니다. 공회에서 그만 보내 주십시오.'  이러니까 결국은 이거 임명제가 아닌 청빙제면서 임명제가 되어지는 이거 오묘한  좋은 그런 순서를 밟게 돼 버렸어.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는 요 말씀에 대해서 증거했는데 요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우리 교역자들이 기억하고 교인들이 기억합시다. 교역자가  실패하면 교인 실패라. 내가 여기 개명교회 있을 때에는 개명교회 교인들이 전부  산 순교자들이오. 그때 신사참배 안 한 것은 뭐 신사참배보다도 더 그때 강한  세력을 강한 투쟁을 다 해서 승리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 순교자들이라. 여게 남아  있는 사람 몇 사람 뭐 있기는 있지만 다 생명 내놓고 예수 믿었소. 이러니까 뭐  공산주의니 신사참배가 와도 그까짓 게 뭐 소용이 있소? 공산주의 왔을 때에  다른 교회들은 다 종 안 치고 예배 안 보고 그들에게 다 순응해서 이래 했지만  개명교회는 하루 세 번씩 종 치고, 하루 세 번씩 종 치고 예배 보는 교회가  개명교회가 있었고, 또 위천교회 내가 가서 있었고, 한 교회는 어느 교회야?  도평이던가 봉산이던가 모르겠어. 그때 세 교회가 있었어. 그런 교회들은  공산주의가 와 가지고 이놈들 우리 망하라고 하루 세 번씩 종치고 기도한다고  이래 가지고 와서 탄압을 해도 그걸 두려워하지 안하고 그대로 꼭 세 번씩  종을치고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봤던 것입니다. 그래 놓으니까 그들이  후퇴하고 난 다음에 개명교회를 불로 와서 태워 버렸습니다. 개명교회를 산에  있는 공비들이 조놈들 때문에 우리가 패전하고 지금 가니까 조걸 불로 태워야  된다고 그래 개명교회 예배당을 밤에 와서 불로 태워 버렸어.

 그래 불로 태웠다는 말을 제가 듣고 마음에, 진리를 증거하다가 탔으니까 이  개명교회 예배당은 솔빡 하늘나라 다 올라가 버렸어. 마음에 기뻐서 갔어. 그날  밤에 가 가지고 예배보고 좋아서 뭐 밤새도록 손뼉치고 찬송하고 이라다가,  이라다 보니까 예배당 지을 연보하러 갈라 했는데 벌써 네시라. 네시니까 네시  반에 예배봐야 되니까 삼십 분밖에 안 남았는데 연보할 시간이 있어야지? '그만  지금 연보 잊어버려, 연보합시다.' 그래 연보하며 '자, 할 사람 해 가지고, 우리가  액수는 얼마만 하면 되니까 요 액수가 되면 그 다음에는 연보 안 받습니다.' 그래  선포해 놓고 했다 말이오 하니까 삼십 분 동안에 예배 볼 예배당 지을 게 다  되고 나중에 그거 많이 남았어. 남아서 '이거는 못 받습니다.' 그래 그런 다  카트를 해. 못 받는다 하니까 할 수 없어 그라면 뭐 바치겠다고 이렇게 약속한데  못 바치고 한 그거 있었는데, 김수경이란 청년은 꼭 바쳐 달라고 막 간청을 하고  이래 쌓아서 '그거 그래도 여게는 못 하고 달리 그러면 쓰지. 달리 쓰지 예배당  짓는 데 여기는 못 쓴다 우리 약속했기 때문에 되나?' 이래 가지고 서마지기를  그것을 바쳤는데 그것은 달리 쓰자 하고 그렇게 바쳐 놓기는 바쳐 놨는데 그  사람이 그라고 난 다음에 며칠 지낸 뒤에 공비 토벌하는 데에, 그때  방위군이던가? 뭣이야, 군인들 아니고 하는 사람? 그때 있었지? 거게 가 가지고  공비들에게 총맞아 죽었어요. 그러니까 그걸 저는 바쳤어. 그걸, 그것도 하늘나라  가, 만일 그걸 내가 그거 거부했더라면, 바치고 싶은데 거부했으면 뒤에 가,  하늘나라 가서 내가 책임이 중할 터인데 바쳐 놓기는 바쳐 놔. 그거 쓰기는 아마  개명교회 어디 써도 어찌 썼는지 모르겠어. 예배당 짓는 데는 쓰지 안했어. 그래  그때는 말하기를 '예배당 지을라 하면 모두 다 필요한 것 그런 것 짚도 가져오고,  나무도 가져오고 이래 모두 가져올 터이니까 가져 오거들랑은 오는 대로 위에  착착 재어라. 재어 가지고 쓸 때는 밑에 서부터 빼어 써라. 빼어 쓰고 그거 다  짓고 난 나머지기는 다 카트다. 다 그거는 소용 없다. 다 저거 가져가라 해라.

 이래 가지고 밑에서 빼 썼어요. 이라니까 쓰고 난 다음에 많이 남았는데 그런 다  도로 가져 갔었어요.

 하늘나라는 이런 것입니다. 자기의 것을 하나님께, 이제 명령에 바치면 보관해  있던 것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기가 보관해 가지고 있는 것이오. 보관해  있는 것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한 번 순종하면 그것은 영원히 자기의 것으로  둥록이 되는 것입니다. 보관물을 영원한 자기의 소유권으로 이동되는 그것이 이제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이기 때문에 요게 성경을, 성경에 그렇게 말해 놨다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연보하면 연보 갚아 주는 것은 뭐, 이 세상에 주는 것이요  어째요? 연보 하니까 연보 뒤에, 내가 하고 난 다음에, 연보 하니까 자꾸 하나님이  부자되게 해 줍니다. 그거는 연보 그것을 갚아 주는 것이요 뭐이요? OOO집사  한번 말해 봐. 갚아 주는 거 아니고? 새 씨 주는 거라. 이거 의사거든. 의사인데  어짠지 그거 뭐 병원도 뭐 쪼그만하게 그래 놨는데 막 자꾸 환자가 가득 차서  하루 종일 가득 찼어. 뭐 소문 내가 들었지 나도 몰라요. '약값이 싸다 치료비가  싸다' 이렇게 말해. 그래 나는 혹 그말 묻는 거는 연보를 하면서 연보 뒤에  '연보하면 세상에서 갚아주는가?' 그런 잘못 생각 가지고 있는가 싶어 내가 한번  물었지. 세상에 갚아 주는가 하면 영원히 갚아 주는 것을 헛일되지 안했소? 믿는  대로 되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한번 바친 것은 완전이 됐는데 완전된 것을 그거  썩은 것으로 댓가 줘 가지고 완전을 소멸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그 말이오.

 그거는 안 해요. 그런 자에게는 새로 또 심을 수 있는 새 씨를 줘요. 저 O장로님  사모님 알아요? 저 O장로님 한약 하는데 아주 돈 잘벌어요. 환자들이 많이 와요.

 이런데 그래 인제 좀 연보 생활 잘 하라 하는 것이지. 이번에 우리 목회자  양성원 신축을 하는데 뭐 다른 사람이 보면 우스워요. 그저 대지는 한 이백여 평  되고 또 건축은 얼마입니까 O목사님? 백오십 평이라. 그런데 이거해요 그런데,  연평이 백오십 평이요? 연평 구백 평이고. 그거 연평 구백 평인데 이거 지을라면  한 십억 좀 너머 들어요. 십억 너머 드는데 돈은 어디 있느냐? 돈은 없어.

이라는데 돈을 우리가 연보하는 것은 '각 교회에 십일조 낸 것이 있으니까  십일조의 십일조를 연보를 하자' 이래 가지고 아마 그거는 다 들어왔을 것이오.

 들어오니까 OO목사가 있다가 이제 나중에 저거끼리 말하기를 '어짜든지 십분의  일' 누가 말하니까, '이래 가지고 이 연보를 인제 어떻게 됩니까?' '목사님이  십일조의 십일조를 드리라 했으면 우리는 이것만 드리면 다 돼.' 이라는데 그것만  드리면 십억 드는 거, 찍해야 해 봤자 한 삼천만 원 안 돼요. 삼천만 원 안 되지?  일억 육천만 원 됐나? 십일조? 이게 회계로구나. 일억 육천만 원밖에 안 됐는데  그것밖에 없어요. 그것밖에 없는데,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주실 걸 알아.

 이제 저희들이 이래 살아 가지고 인제 우리 총공회 산하에서는 목회자 양성  기관에 쓸 수 있는 이 건물은 이것이 마지막이요 시작입니다. 나중에 그것은 다시  뒤에 딴 것을 짓는 일은 없습니다. 왜? 없을 것을 내가 압니다.

 또 그렇게 마구 번져서 지금 이래 가지고 이 양성원, '양성원이라 하니까 꼭  아이들 장난하는 거 수치스러우니까 양성원이라 할 게 아니라 이거는 양성원을  신학으로 승격을 시키자' 신학으로 승격을 시킬 것이고, 또 신학으로 승격시키고  난 다음에는 '신학보다는, 이거 너무 초라하니까 신학원으로 승격을 시키자.' 또  그래 가지고는 또 인제 '신학 대학원으로 또 승격을 시키자' 이래 승격돼서 자꾸  나가는 그게 다 죽고 망하는 것이라. 그걸 내가 똑똑히 지금 나는 환하게 보고  알고 있기 때문에 그걸 못을 박아서 자꾸 말해서 저거들이, 나는 다 미리 예고할  것 받고하고 다 해 놨으니까 그걸 뒤에 어겨서 하면 저거 어겨서 가는 거야 저거  심판받지 내게는 책임이 없어.

 이래서 내가 알기로는 총공회 산하에서 목회자 양성을 하는 이 양성원  소용물로서 지금 건축하는 이것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그렇게 생각 됩니다. 또  예수님의 재림도 가까왔고. 이러니까 그래, 누가 돈을 낼란지? 이랄라 하면 일억  얼마 되니까, 일억 얼마요? 일억 육천 되면 아마 십 한 일억, 자꾸 지금 세월이  자꾸 지나가게 되니 자꾸 그거 올라가요. 물가가 자꾸 올라가고 이라니까 십 몇억  돼야 될 터이니까 그라면 몇 해 걸려야 됩니까? 십 년 걸려야 돼요 구 년 걸려야  돼요? 칠 년? 칠 년 걸려야 돼. 칠년 걸려서, 되면 칠 년 걸려서 하고, 칠 년  걸려서 하고, 딱 예금해 놓고 하니까 요건 내것이라. 네까짓 놈이 암만 네것이라  볼끈 거머쥐고 있어도 하나님이 내놓으라 하면 안 내놓으면, 안 내놓으면 어떻게  해? 하나님이 내놓게 할 권리가 있어요 없어요? 안 내놓으면 어떻게 해요?  OOO조사님 한번 대답해. 안 내놓으면 어떻게 하지? 빼앗겨? 안 내놓으면 내놓게  하는 그 방법이 뭐이야? 자, 우리 O집사 한번 대답해 봐. 어떻게 뺏아가?  하나님이 무리하게 뺏아갈 수가 있는가? 쭉 뻗게 해 버려. '내것이다!' 이랬는데  '네것? 얘 이놈아, 뻗어라.' 다 쭉 뻗고 내놓으니까 하나도 제까짓 게 권리도  없어.

 이분이 있기 때문에 나는 걱정 안 해요.

 제가 여기서 이미 내가 보관한 거 이거 내가 떠나기 전에 이 보관물을 내것으로  등록하는 방법은 제것을 영원히 제것을 만드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연보 방법으로  해 놨어. 성경에 그래 놨어. '이것을 영원한 자기의 업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제도를 내놨다' 그렇게 말했어. 또 하나는 이라면 더 심을 수 있는 자본을 더  많이 얻어서, 주니까 또 심고 주니까 또 심고, 주니까 제것 만들고 주니까 제것  만들고, 보관물 만들어 놓으니까 제것 만들고 보관시켜 주니까 제것 만들고 자꾸  그래서 다 부요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방법 있고 또 영원한 자기 것을  만들기 위해서 하는 방법 있고 이 두 방법 있어.

 이러니까 나는 장 보고 있어요. 저게 이제까지 목사도 안 하고 돈만 벌어 가지고  뭐 사장이니 뭐이니 자꾸 이래 하니까 저게 속에 지금 저는 이거 할 때 뭐 몇  억을 낼란가, 일억을 낼란가? 그거 돈 보고만, 내 마음에는 그래. 옛날 내가 예수  믿기 전같이 생각해 보면 돈만 보고 살진대야 그까짓 거 지금 십 몇억 되는 거야  혼자 내지, 뭐뭐 돈만 보고 사는 게 그것도 못 하고 뭐 뭐할라고? 저주받아 그래,  다. 돈을 바라는 사람이 돈 못 버는 것은 저주받아 그래.

 또 거지로 지내도, 나사로같이 지내도 아예 돈 그런 데 소망 하나도 가지지  안하고 '하나님이여, 나는 가난해도 좋고 부해도 좋고 하니까 나는 소망이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딴데 소망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래 가지고 또 그래 지내는  사람, 그 사람은 아예 그것을 바라지도 안하고 더 좋은 것 바라니까 그걸로  주시지. 땅의 것을 소원하고 이걸 자꾸 가질라고 하는데 가져지지 안하는 것은  그거 하나님의 저주라 그 말이오.

 그래 인제 이러니까 이번에 집회 하고 난 다음에, 이제 그거 살며시 해요. 이  교역자들이 다 흉측해요. 교역자들, 이거 흉측한 교역자들 자꾸 위해 기도를 해요.

 흉측한 것이 '이거 아이구, 목사님 저 말씀 하는 데에서 우리 교회로 들어올  돈이 지금 이거 양성원 신축으로 들어가면 어찌 되겠노?' 이래 가지고 배가  아프고 속으로 지금 미리부터 공작도 하고 운동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 그 운동이  마귀 운동이요 하나님 운동이요? 마귀 운동이요 하나님 운동이요? 마귀 운동이요  하나님 우동이요? 마귀 운동이라, 마귀 운동.

 그럴 터이니까 공연히 그래 말고 살며시, 딴데 말하면 소문 나. 나한테 와도 내가  기이고 속이지 안해요. 나는 그거 아니라도 돈 많고 또, 돈이 많아요. 하나님 돈이  다 내 돈이오. 인제 사람들 복받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이러니까 그럴 때는 가만히 와서, 나한테 직접 오든지 와 가지고 내가 얼마  하겠다고 약속을 하든지 그리 안 하면 수표를 끊든지 딱 그때 놓고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만 알고 목사님만 알게 하시이소. 이거 누설하지 마이소.' 그라면  내가 아무한테도 누설하지 안해요. 그래 가지고 이거 다 이거 지을 것입니다.

 짓고 넉넉히 남음이 있으리라. 그래 가지고 이제 딱 짓고 난 다음에 들어오는  돈은 꺼먹꺼먹 검을 게 아니라 고거 딱 짓고 난 다음의 거는 다 도로 돌려 보내  버려. 다 돌려 보내 버려 개명 교회와 같이. 다른 모두 예배당은 그렇지만  개명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걸 내가 알았고 이거 이제 양성원 이 신축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줄 알기 때문에 그렇게 그 외의 거는 다 '카트!' 카트라  말이 무슨 말이야? 짤라 버려. 카트. 카트. 그때 카트할 거라 오늘 어째 거게  대해서 말씀이 나서 잘 증거를 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들에게 편지하기를' 이러니까 목회자는 꼭 오늘 아침에 하신  이 말씀을 거머쥐고 책임을 지십시오. 목회자의 단점을 어디서 찾습니까?  교인들에게서. 목회자의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장점은 어디서 찾습니까?  교인들에게 찾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됩니다. 감사와 회개. 그러니까  목회자는 감사 회개 둘만 해요. 감사 회개 감사 회개 감사 회개 이거 둘만 하면  돼요, 모든 생활이 저는 저거 부친이 세상 떴을 때에 모든 형제들이 다 믿는  형제요. 장자는 안 믿었는데i 그 다음에 장자 믿고 집사 돼 가지고 갔어요.

 이랬는데 그때 모두 다 인제 '어떻게 할꼬?' 이래 묻기 때문에 '에고에고 하는  건데 에고에고 할까 뭐라 할꼬?' 이래. '가만히 따라 가라' '아니, 가만히  따라가면 안 된다. 그래 감사 감사 해라.' 그래 출상할 때부터 저 산에 가서도  항상 '감사 감사' 온 자손들이 다 '감사 감사' 이라면서 갔었어요. 그것도 하고  나서 보니까 그거 재미가 있었어. 그래, '사자들에게 편지하기를' 여게 처음이요  나중이요 처음이요 나중이요 하는 요것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입니다. 요거는  시간에 관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주님은 시간을 어떻게 봐? 주님은  시간을 처음이요 나중인 알파와 오메가가 주님의 시간관입니다. 시간관, 이래서  서머나 교회는 시간관이 주님과 같았어요. 사람들은 이 시간, 제가 살아 있는  시간만 제 시간인 줄 알고 죽으면 시간 없는 줄 알지만 현재는 영원이라. 그러기  때문에 나는 영원 무궁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이 서머나 교회는 시간관이 주님과  같아서 영원 무궁한 시간을 자기 시간으로, 자기 시간인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이  시간만 아니라 과거에 지나간 그 시간도 내 시간이요 현재 내 시간은 영원  무궁한 시간이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생활을 시간에 비추어서 계산을 해야 될  터인데 사람들이 자기 생활에 계산하는 것을 그 날만 보고 계산하니까, 그날만  보고 계산하니까 남은 시간은 제가 어떻게 할 건가? 남은 시간에 망할 걸 계산  안 했으니까 계산 안 하고 그 시간 맞추어서 하다 보니까 전부가 다 틀렸어.

 서머나 교회는 시간관이 주님과 같이 영원 무궁이 자기의 시간이라는 것을  요렇게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모든 계획하는 것이나, 계산하는 것이나, 또  경영하는 것이나, 비판하는 것이나, 평가하는 것이 영원 무궁한 시간을 두고  비판하고 평가하고 계산쳤기 때문에 그이의, 그 서머나 교회의 계산은 억만 년  후에 가도 '이럴 줄 몰랐다' 하는 것이 없고 억억만 년 후에 가도 '이럴 줄  몰랐다' 하는 것이 없고 억억만 년 영원 무궁에도 그 계산은 다 뻗쳐 가 가지고  있고 과거에도 뻗쳐 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이의 계산에 모든 생활 계획이 이  시간관이 그리스도와 같이 처음이요 나중인 요것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시간관이  완전했기 때문에 시간에 대해서는 후회할 것이 었고 잘못될 것이 없는 완전한  계산을 가졌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 서머나 교회가 일곱 교회 중에 제일 칭찬받은 교회요. 이 서머나 교회는 아무  흠과 점이 없습니다. 이랬는데 여게는 보니까 뭐 요래 쌓아니까 마귀가 들어  가지고 좀 있기는 있었지만 요 아주 칭찬 받은 교회요 온전한 교회입니다. 주님이  성경에 나타날 때에 '나는 이런 주님이다, 이런 내다.' 이렇게 나타났었는페  나타난 것을 두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교회가 올바른 점을  가지고 있을 때에 '너도 이렇게 옳은 것을 가지고 있느냐? 나도 너와 동지다.

나와 너와 뜻이 같다. 내 모든 만물관이 너와 같다.' 요렇게, 고렇게 나타난  교회도 있고 '나는 이런데 왜 너는 그러냐? 나는 흰데 너는 왜 검으냐? 나는 쪽  곧은데 너는 왜 굽었느냐?' 정반대로 나타난 그런 교회도 있습니다. 주님이  나타나신 걸 봐서 그 교회가 좋다 나쁘다, 틀렸다 옳다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이 서머나 교회는 주님께서 처음이요 나중이라는 것은 시간관인데  시간관이 주님과 같고, 그 다음에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러면 생사관이 주님과 같다는 것을 여게 말한 것이라.

 사람들은 다 살아 있으면 산 것만 보지 살았느냐? 죽은 것하고 함께 봐라. 네가  산 것만 보고 자꾸 살 준비만 하고 있지만 네가 죽으니까 죽는 거와 같이 연결해  봐라. 죽느냐? 다시 너는 부활한다. 부활과 연결해 봐라. 부활하고 난 다음에 네가  이 세상에 산 것을 다 그대로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 심판받는다  심판까지 연결해 봐라 너는 또 영원히 불멸의 영생하는 존재다. 이러니까 산 것만  보지 말고 죽은 것만 보지 말고 또 부활하는 것만 보지 말고 영원 무궁까지를 다  봐서 이 시간관과 생사관이 주님과 같은 관을 가졌기 때문에 주님이 좋아하여서  '너도 처음과 나중인 시간 전체를 네 시간으로 삼는 시간관을 가졌는데 나도  그러하다' '나는 살았다 죽었다 또 살아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하는 이 생사관을  봤기 때문에 나도 너와 같은 생사관이 같다. 시간관이 같다'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여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 이제  고락관이, 고락관이 주님과 같다는 말입니다. 고락관이라니? 고통은 뭐이  고통이며 줄거운 건 뭐, 평안한 것은 뭐이 평안한 것인가? 가난은 뭐이 가난이며  부요는 뭐이 부요인가? 이 세상만 가지고 보는 사람들은 다 이 서머나 교회가  고통당하는 것을 이것을 고통으로만 압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고통당하는  것을 평안으로 알았고 평안당하는 것도 그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어. 그러니까  고락관이 주님과 같애.

 또 빈부관이, 다른 사람이 이 세상만 표준해 보기 때문에, 세상만 표준해 보니까  세상적으로 가난하니까 '가난하다 하나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 그러니까  그이의 빈부관이 주님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서머나 교회는 시간관, 또  생사관, 또 고락관, 또 빈부관 이것이 주님과 같기 때문에 그의 생애는 주님과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이런 것이 바로 돼져야 되지 그 사람이,  세상만 보고 사는 사람이 세상만 표준해서 모든 계획하고 경영하고 평가하지 그  사람이 무궁을 두고 계산에 넣을 리가 없는 것이고 또 무궁을 두고 평가나  비판이나 할 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세상적이요 단편적이기 때문에,  그거는 전부 다 일방적이기 때문에 전체에 대해서 다 정상이 아닌 그런 걸음을  걷고 그런 계산과 계획을 한다는 것을 여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서머나 교회는 이렇게 시간관, 생사관, 고락관, 또 빈부관 이것이 나와 같다.

 그것을 끄트머리 뭘로 말했느냐 하면 이렇게 너희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정반대 말을 했습니다. '네가 고생당하나  실상은 네가 평안한 사람이다' '네가 가난한 사람이나 네가 실상은 부요한  사람이다' 이래서 이 피조물들끼리, 피조물들끼리의 세계에서, 피조물들끼리의  수준에서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이 다 인간들인데 이 서머나 교회는 피조물 그 선  이하에서 비판하고 평가하지 안하고 피조물과 창조주, 창조주와 이 모든 전체를  두고, 이 전체를 두고 전체에 대해서 비판하고 평가했기 때문에 주님의 비판과  평가가 같습니다. 이러니까 아주 가난한 것이 영원에 비춰 보니까 그것이  부요하고 또 고난스러운 것 같으나 영원에 비춰 보니까 평강이 되고, 이러니까  세상에 평강이 영원 평강도 되는 게 있고 세상 평강이 조만간에 큰 고통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세상 사랑이 좀 있으면 미움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이래 이 세상에 사랑하고 뭐 좋아서 물고 빨고 못 견뎌서 이렇게 하지만 그  사랑은 뱀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이 잠시 후면 미움이 됩니다. 슬프게 하는  자가 누굽니까? 고생스럽게 하는 사람 아니요? 이러니까 이 모든 사람이 죽을  때에 다 울고 불고 야단을 지기는 것은 그거는 뭐이냐? 다 속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오. 닥치고 보니까 딴게 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미리 알고 거기 맞추어  했는데 죽음을 다 알고 죽음에 다 맞추어서 준비했는데 죽는 그 시간이 모든 걸  완전 승리한 할렐루야 시간이지 그 시간이 뭐 고통될 것이 뭐 있겠소? 내가  그전에 서영준 목사님 장례할 때에 내가 그때 아주 많이 울었습니다. 운 거는  서영준 목사님이 죽으니까 아이구 떠났으니까 섭섭해서 내가 그래 운 눈물은  아닙니다. 왜? 내가 울기를 설교할 때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것으로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으로 너에게 맡기겠노라 주인의 즐거움에 와서  참여하라' 하는 이 성구를 읽으면서 내가 울었습니다.

 왜? 내가 그분은 나보다 나이가 젊지만 나보다 일찍 결실을 했습니다. 완전히  성숙했었어. 내가 그분을 볼 때에 참 내가 하지 못하는 그런 것을 많이 하는 걸  봐서 그거 내가 성구를 뭣을 설교할라 하는데 그 성구가 나와서 그 성구를  증거했습니다. 주님이 '잘하였도다' 아마 그분에 대해서는 내가 볼 때는 잘했다  했지 잘못했다 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이 나집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간단한 하루밤  나그네와 같은 이것에 충성하였으니 영원 무궁을 너에게 주겠노라 하는 이  말씀이고 '주인의 즐거움에' 주님과 영원토록, 영원토록 기쁜 주님의 기쁨에 같이  동참하자는 이걸 볼 때에 내 신세가 너무 가련하고 내 행위가 너무 부끄럽고  너무 이래서 나는 오늘까지 살아도 참 너무 내가 이렇게 뭐 오래 세윌은 지내서  머리가 허여이 살았지만 그 사람이 산 생애에 따라가지를 못하고 그거, 그래  꽃마을 기도원이 그분 떠나가고 꽃마을 기도원이 울었을 것이오. 꽃마을 기도원의  주인이 그분이오. 또 양산동에 언제든지 종일 심방하고 다 심방 마치고 나면  토요일날 한 열시나 되면 그때에 혼자, 하루밤도 안 간 일 없어, 토요일날 밤은.

다른 밤은 몰라도 하루 밤도 안 간 날 없어. 토요일 밤은. 꼭 열시나 되면 혼자  그 산만당에 아주, 거게는 좀 가까운 곳이라도 큰산 끝이라서 맹수들이 있습니다.

겨울에 혹 보면, 호랑이 발자국을 나는 잘 알아요. 호랑이 발자국도 있고 또  늑대는 아주, 늑대하고 뭐 동행한 사람들도 있고 늑대가 거기 많이, 늑대가  있어요. 있는데, 그래 거게 언제든지 토요일날 밤이면 열시 되면 혼자 올라가  가지고 거기서 밤새껏 기도하고 또 아침에 몇시에 나서는지 몰라요.

 몇시에 나저는지 봉고차 몰고 나와 가지고, 아침에 나와 가지고 또 새벽에  교인들 전부 깨워 가지고 다 끌어 가지고 새벽기도에 참석을 시켜서 다 그래  하고 또 그날 설교하고 그랬습니다. 그래 놓으니까, 아주 뭐 작아도 힘이 세요.

그때 우리가 예배당 건축할 때에 짐을 지는데 제일 힘이 세. 아주 작아도  힘뭉텅이라.

 이랬는데 너무 거석해서 뭐 운전대를 잡으면 운전대가 잘 쥐여지지 안한다고  그런 말 내가 들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때 청도 가서, '그라면 좀 네가 좀 푹 좀  쉬어라' 하고 보냈는데 거기 가서 하나님께 갔어. 그래 내가 그걸 늘 기억해요.

 그때에 토요일날이라 하나님 앞에 목욕하고 기도하러 간다고 목욕하러  들어가니까 찬물이니까 심장마비로 갔어.

 내가 목욕탕에 들어갈 때마다 한번도 안 잊어버리고 내가 기도를 해요. 냉탕에  들어갈 때에는 '주님이여, 이 냉탕에서 심장마비로 주님이 나의 사랑하는 지체가  되는 신앙 동지를 데려갔습니다. 심장마비에게, 주님이 불러가기는 갔지만  심장마비의 이 냉수의 해를 받아 가지고 갔습니다.' 이래 냉수에 들어가면서  '나도 이 심장마비 이놈에게 걸리지 안하고 이 냉수의 해를 보지 않도록 냉수를  잘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내가 그 기도를 한번도 안 빠져져요, 어짠지. 안  빠지고 내가 그 기도를 합니다. 냉수에 들어가 심장마비가 걸려서 죽을까 싶어서,  죽기 싫어 그런 건지 어짠지 그 기도가 나와요.

 이래서 어짜든지, 오늘 아침에 요것만 하고 끝냅시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사자에 편지하니까 서머나 교회 사자가 이렇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교역자가 백점이면 교인들은 다 백 점됩니다. 교역자가 거짓부리  되면 교인들은 다 거짓부리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비밀을 알라.

 이거는 자기 단점을 몰라요. 교인들에게 그 단점이 있는 거 자기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단점을 그것을 고칠라고 에를 쓰는 그것보다도 그  말을 이래 하는 것도 해 봐야 효력이 없어요. 자기에게 그 단점이 있으니까  그것만 끊어 버리면 그것이 저절로 고쳐진다는 그것이 요게 성경에 가르쳐  주시는 방편이오.

 이래서 시간관, 생사관, 고락관, 빈부관 요것이 요 주님과 같이 무한과 완전의  전부를 봐야 됩니다. 우리는 전체, 우리는 무슨 대국을 보는 게 아니라 전체를,  창조주와 피조물 이 전체라는 범위를 잡아서 이 전체에서 우리는 시간도 거기서  전체의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가 봐야 하고 또 생사도 이 전체를 봐서, 산 것만  보지 말고 죽는 것만 보지 말고 영원까지 이 전체의 생명을 보고 자기가  생명관을 가져야 되겠고, 고락도 전체의 고락을 봐야 되지, 홍포입은 부자는 제일  낙인데 그게 잠시 후에는 또 고생이 됐더라 그거요. 이 전체를 보고, 또 빈부관도  전체를 보고, 그래서 우리는 전체를 보고 계획을 해서, 피조물만 볼 게 아니라  창조주까지 전체를 보고 거기서 계산을 딱 맞춰 가지고 계획을 세우고 수지  계산을 딱 맞추니까 계산이 하나님의 심판에 가저 보면 딱 들어맞습니다. 변동이  없어.

 영원히 가도 놀랠 것이 없어. '이럴 줄 알았는데 이렇다' 자기가 뒤에 가서 '내가  착각했다' 그런 실수가 없는 것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이렇게 귀한 기회를 허락해 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깨달으며 받아 감당하고 누릴 수 있는 은혜를 받는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영광을 받으시고 뜻을 이루시고 영원히 영광의 찬미가  결실하도록 주님이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주님 앞에 간구합니다. 이미 주께서 세상을 이겼사오니 악령 악성 악습의  모든 사망의 권세들을 주님이 이겼사옵나이다. 여기서 우리'를 구출하신 주님, 이  시간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시는 은혜를 입는 이 시간 되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대형의 사죄의 은혜와 대행의 칭의의 은혜와 대화목의 화친의 은혜와 대부활의  산 소망의 은혜를 주셨사오니 이 은혜를 깨닫는 은혜 주시고 이 은혜를 믿는  은혜를 주사 이 사활의 대속의 이 은혜를 확실히 입고 견고히 잡고 이 은혜  안에서 살고 이 은혜 밖에 벗어나지 아니 하도록 인쳐 주시옵소서.

 이 은혜를 입음으로 모든 불완전한 사망에 속한 요소의 인적 요소가 다  소멸되게 하시고 온전한 사람으로, 새사람으로, 영생하는 사람으로 주님만을 참  바라보고 주를 힘입어 의롭고 깨끗하고 동행하는 주님의 사활의 대속을 벗지  않고 잊고 사는 저희들이 됨으로 사람병이 온전히 치료되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목적하신 영광의 찬미의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이리하여 금번 기회에 다 사람병을 완전히 고쳐서 주님이 만족하실 수 있는,  언제든지 주님이 우리 안에 와서 거처하시고 우리는 주의 수족이 되어서 주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서 다 이루어질 수 있는 새사람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이 시간  치료하여 수시옵소서.

 주님, 간구합니다. 이렇게 하여 새사람되고 모든 생활이 다 고쳐지도록 변화시켜  주시고 새사람되고 행위도 새 행위되고 모든 일들이 새 일을 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사 고기덩어리의 병을 완전히 치료해 주시옵소서. 주의 사활의  대속으로 사람병이 치료되는 데 따라 고기 덩어리의 병도 완전히 치료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되는 자들은 외부에 어떤 병 앉은뱅이나, 누운뱅이나,  귀머거리나, 소경이나, 벙어리나, 문둥이나, 반신불수나, 어떠한 피부 외부의  병이든지, 또 내부의 병 무슨 병이든지, 내부의 병, 불치병 어떤 병이라도 다 고쳐  주셔 고침을 받게 하시옵소서. 정신병에 된 것도 다 고쳐서 새로와지게  하시옵소서, 금번 이 은혜 베푸시는 이 기회에 사람병 고기덩어리 병을 완전히  고쳐서 이 성회를 주님이 주관하시고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저희들에게  믿어지게 하는 표적으로 보이는 고기덩어리의 병을 고쳐 주시고 돌아가서는  자기의 생활에 모든 병도 고쳐지게 하사 세상에 빛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 시간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각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주님이 믿음대로  저희들에게 다 치료받게 하시고 치료받음으로 영광을 주님에게 돌리게 하시고  영원히 은혜받은 이 은혜를 기념하는 여생이 되게 하시고 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시 범죄하는 자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자라도 고침을 받게 하시고 고침받고 다시 죄를 범함으로 더 큰 증세가  발동될 자들도 다 고쳐 주시옵소서. 범죄할 때에 더 큰 증세가 발동됨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주로 말미암은 역사인 것을 알 수 있도록 증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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