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에 대한 교훈


선지자선교회 1989년 7월 29일 토새 

 

본문 : 벧전 3:1-6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가정에는 대개는 남편과 아내로 되어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가정이 하나님의 교회가 되는 순위로서는 대개 아내가 신앙을 먼저 가지게 되고  그 후에 남편이 신앙을 가지게 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부터 여자는 감정이 빠르고 또 모든 면이  남자들보다 일반적으로는 세밀하고 이라기 때문에 도를 받는 일이 앞섭니다.

 그래서 먼저 아내로 도인이 되고 그 다음에 남편이 도를 받아서 또 도인이 되고  이렇게 구원되어 가는 것이 그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먼저 도를 받아 주님을 믿는 아내들로 인하여서 그 남편이 차차 도를  받아 가지고 예수님 믿는 도인이 되는 데에 그 방편을 표준적으로 잘된 방편을  우리에게 하나 들어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의 조상이라  그렇게 말씀을 성경이 했습니다. 사라도 아브라함을 주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또 인정을 하고 그런 위치에서 신앙 행위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가정들이 대개는 아내가 먼저 신앙생활을 가지고 그 다음에 이제  남편이 신앙생활을 가지고, 아내의 신앙이 앞서고 남편 신앙이 뒤따라갈 때에는  아직까지도 그 가정 교회는 정상적인 교회는 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아내가 그  남편을 뒤따라가고 남편이 그 아내를 앞서서 그렇게 신앙의 모든 면으로 자라갈  때에 비로소 가정 교회는 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시인했다' 하는 이 말은 사라는 자기 신앙  구원이 바로 되는 것으로서 그것으로 만족히 여기는 거기에 있지 안하고 자기  남편 신앙이 앞서서 자기 가정이라 하는 것을 신앙적으로 앞서 이끌어 나가고  사라는 그 뒤에 따라가서 교회가 참 질서 있는 가정 교회가 되기를 원하여 그  면으로 힘을 써서 나가고 있었다 하는 그것을 여게 가리켜서 말씀을 합니다.

 언제든지 가정 교회라면. 부부 살 때에는 처음에는 꺼꾸로 돼 있지마는 아내가  어떻게 하든지 노력을 해서 남편이 자기 신앙을 이끌 수 있는 데까지 되도록  자라가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서 그 신앙이 힘있게 앞장서 걸어갈 수 있도록  이렇게 배후에서 역사해서 만드는 그것이 정상이라 하는 말입니다.

 그럴 때에 그 남편이 도를 뒤에 들었지마는 도를 들어서, 바로 깨닫게 되면 앞장  설 수 있는 그런 요소로 하나님이 창조도 하셨고 또 하나님의 원리가 교회도  언제든지 남자가 교회를 주장하지 여인이 교회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여목사 여장로 있는 것은 벌써  감리교회는 오래 됐습니다. 지금 장로교회도 거의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좀 성경에 이 면에 대해서는 조금 위배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다  그래 가니까 그저 그렇다는 말만 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따라가지 안하고 있는  것뿐이지 그렇게 지금 교회들은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먼저 신앙을 가지고 남편이 뒤따라와서 신앙을 시작해 가지고  자기보다 앞서 갈 수 있기까지 그렇게 성장시키는 것이 그것이 아내의 의무와  책임이라, 그것은 하나님이 물론 끝까지 아내의 신앙이 남편 신앙보다 앞서서  그런 사람들도 있기는 있지마는 일반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지으실 때에 아내의  요소와 남편의 요소가 다르도록 지었기 때문에 아내 요소보다는 남편 요소가  모든 면이 원만하고 또 견고하게 지으셨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되어지면 남편이  앞서고 아내가 뒤를 따라서 신앙으로 가도록 그렇게까지 자라는 것이 그게  원만하게 바로 자라기는 자란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아내가 남편을, 믿지 않는 남편을 예수 믿구로 만드는 데에는  자기의 그 말로도 물론 하지마는 말로만 가지고는 효력이 없다 그 말입니다. 여게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와 말로, 전도하는 말  전도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아내가 그렇게 하는 데에는 행위로 가지고 남편에게 참사람의 걸음을 걷는 그  행위를 가지고서 남편에게 이 도를 전해 줘야 그 남편이 도를 받지 말로만 받는  사람도 있지마는 말로 안 받는 사람들은 행위로 해야 받는다 하는 그걸 말  합니다.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그러면 너희의  두려워함과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두려워함이라는 것은 아내가 남편을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고 아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 행위를 봄이라.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그러면 혹 자기의 아내가 부정할까 해서  두려워하는 것이니까 하나님 두려워하는 것이요, 혹은 범죄가 될까 두려워하는  것이요, 또 하나님의 진노를 쌓을까 두려워함이요, 하나님의 저주나 그런 것을  받을까 두려워함이요, 또 자기와 자기 자손들이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으면  천대까지도 받을 수 있고 잘못되면 삼사 대까지라도 내려갈 수 있기 때문에  아내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법칙과 하나님의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과 긍휼과 은혜를 천대까지 받는데  이것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이런 행위에서 그 남편이 보고 회개한다 그  말입니다.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그런고로 3절에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그러면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의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이러니까 외모를 단장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외모보다도 그 내모를 단장해서, 속사람을 단장을 해서 참사람 자기가  되어져 감으로 참사람을 보여 주고 또 참사람으로 그들을 이끌고 할 때에 그때에  도인이 된다 하는 말입니다.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함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그 다음에 보면은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순복함으로 단장하였나니  이런 말도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는 이런 아내가 참 행복된 아내입니다.

 순종하는 이런 아내가 행복되다 말은 그 남편이 뭐 꺼꾸로 가든지 옳게 가든지  순종해서 남편이 잘못 가는 데에 아내가 순종하면 내외 다 망해 버립니다. 자손도  다 망합니다. 자기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복받을 수 있는 그런  걸음이 될 수 있는 이것이 정상의 교회요 이것이 행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그게 좋은데 순종한다는 것보다도 아내가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만 하면 그것이 막바로 하나님에게 순종이 되어지는 이런  그 남편의 앞장서 가는 그런 걸음이 되어진 그런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꺼꾸로 가도 아내니까 '여필종부라' 남편에게 따라서 복종해야 된다는 그런  것은 마귀 말입니다. 그저 꺼꾸로 가든지 옳게 가든지 남편에게 복종하라 하는  그런 말 아니오. 이거 잘못 해석해 가지고서 가정을 구원할 수 있는데 구원하지  못하고, 하나라도 살았으면 차차 살아나서 구원돼야 될 터인데 하나가 죽었는데  둘이 죽고 서이 죽고 따라 죽어서 온 가정이 망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라 말은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을 해도 그 순종이 하나님께  순종한 것같이 되어지는, 그 남편과 하나님과 동행해서 안심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면 순종한 그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게 되어지는, 하나님과 그 남편과  동행하는 그 지경에 이르도록 애써 가지고서 그런 사람이 복있다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6절에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자기가  모든 일을 그렇게 노력해서 아브라함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것을 자기는  자기 구원으로 알고 그 일을 위해서 노력을 해서 이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하니까 또 사라는 아브라함에게만 복종하면 그것이 이제 복있는 생애가  되어집니다.

 이래서.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하는 이  말씀은 자기가 노력을 해서 그 남편은 아내의 참으로 인도자로, 하나님이  인도하는 인도가 그 남편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어야 이래야 이 남편이 정상의  남편입니다.

 그러면 정상의 남편이 되기까지는 그 배후에 아내로서 위해서 노력을 하고 또  남편도 자기가 앞장서서 걸어갈 수 있는 이런 남편이 되기 위해서 자기도 힘써서  자기는 하나님을 따르고 아내는 남편 따르고 이래 가지고 돼져야 온전한 바른  교회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데,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사라의 딸이 되었느니라' 이  말씀이 좀 오묘합니다.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사라의 딸이  되었느니라' 하는 이 말은 자기가 첫째 자기 가정에 무슨 사고가 일어났든지 자기  몸 밖에 무슨 환경과 주위에 일어났든지 어떤 데서 일어났든지간에 그런데  대해서 놀라지 안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는 이 준비를 하면은  사라의 딸 곧 신앙의 사람이 된다 하는 이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그것은 이거 무슨 요새 지금 오늘도 보니까 비난리가 와 가지고서 지금 모두 다  우리 교인들도 좀 뭐 딴데로 대피를 하고 이랬다 말을 들었는데 그런 데도  놀라지 안해야 합니다.

 또 무슨 뭐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지 안해야 된다 하는 이 말은 그러면 아무  두려운 일이 있어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저 두려워하지만 아니하고 무슨 일이  되든지 놀라지만 아니하면 된다는 그 말이 아닙니다.

 요걸 깊이 들어 보면은 아브라함을 주라고 하고 아브라함에게 따라서  복종했는데 그라면 아브라함이 우상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에 따라서 복종한  것이 그것이,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따라서 복종해 나아가는, 복종해 나가면서  주라고 이렇게 했으니까 아브라함을 하나님으로 모셨다 그 말이오. 주라 한다  그말은 여게는 하나님 주(主)자와 같은 주(主)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하나님으로 그렇게 여겼다.

 이러니까 아브라함의 가는 걸음이 곧 하나님이 걸어가시는 걸음이요,  아브라함에게 복종하면 하나님께 복종하는 걸음이요, 아브라함의 지도는 하나님의  지도가 되기까지 노력을 해서 거게까지 되어졌을 때에 이제 가정 교회는 바로  됐다고 안심을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을 하고, 또 다른 이 세상 어떤 일이라도.

 자신이 양심에 가책 없이 '그렇게 했을 걸' 후회하는 것은 이것은 고쳐야 될  미진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후회하는 것은. 그러면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않는다' 그말은 후회할 것이 없어야 된다 그 말이오. 후회할 것이 없어야 된다.

 그러면 자기가 무슨 낭파가 돼도 후회할 것이 없는 것은, 내 정도 로서는 그때.

 다른 길은 없다. 다른 길은 없고 그거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그 길대로  걸어갔기 때문에 내게 다른 길은 없다. '그렇게 했을 걸' 지나가고 보니까 '그랬을  걸' 하는 후회하는 일이 없게 살아야 된다 하는 그 말입니다. 요거 좀 어려워.

 후회하는 일이 없게 살아야 된다. 자기 양심적으로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했을 걸' 그때는 나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진리대로  영감대로 아무래도 내 형편 내 처지에서는 그래 밖에는 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때에서는 그 길이 최선으로 가려 가지고서 했기 때문에 '그리 안 했을 걸,  이랬으면.' 하는 그런 후회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그게 신앙의 사람이라 말입니다.

 또 자기가 무슨 물질적으로 이렇게 수해가 나 가지고서 집이 절단이 났다고  하더란대도 그 사람이 놀래지 않는다 그 말은 '집이 떠나가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문제가 있겠느냐?' 그 말이 아니고, 자기 힘으로서는 할 수 있는 거 다  했습니다. 자기 힘으로서는 '뭐 하나님이 계시니까 지키지 안하겠느냐?' 하는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기독자들에게는 요행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기독자들에게 요행이라는 것이 없고  다행이라는 것이 없고, 또 기독자에게는 모험이라 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험도  없고, 요행도 없고, 다행도 없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힘으로서는 이래 밖에는  할 수 없다. 내 힘으로서는 이 이상은 할 수 없다. 이래 밖에는 할 수 없다.

 위험 재대에 있어서 물난리에 어려움을 당해고 '이 집에 오지 안하고 다른 집에  갔으면 좋을 건데 이집으로 왔다.' 그런 후회나 그런 놀램이 없어야 된다  말입니다.

 그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자기 힘으로서는 더 좋게 할 수 없고 더 바르게 할  수 없고 더 옳게 할 수 없고 더 안정되게 할 수 없는 그 길을 택해서 걷기  때문에 후회가 없는 동시에 놀라는 일도 없고 으례히 그러리라, 그거는 뭐 이래도  어짤 수 없이 이 길밖에는 걷지 못하게 된다 하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좀 어려운 말인데.

 그러기에, 기독자들은 허영과 허욕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든지 자기 역량  있는 대로는 생각해서 수재 날 것도 생각하고, 불날 것도 생각하고, 전쟁 날 것도  생각하고 전염병 유행 될 것도 생각하고 만반의 자기로서는 그 이상 더 할 수  없도록 주의할 것 주의하고, 준비 할 것 준비하고, 예비 할 것 예비하고, 방어할  것 방어하고 자기 힘으로서는 그 이상 할 수 없도록 다 해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기독자들이라.

 그러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서는 가장 원만하고 완전하고 온전하고 하는 그런  길을 걸어가는 것이 기독자의 걸음인데 기독자들이 허영을 가진 사람들은 허영  때문에 그런 놀랠 일이 생기고 후회될 일이 생기고, '그때 좀 집은 모양은 좀  험하고 좀 불편해도 이럴 때 보니까 그 집으로 갔더라면 이 물난리에서  야단지기지 안할 터인데' 그 허영이 들었다. 허영과, 좀 우선 보기 좋은 거 허영과  허욕이 들어서 이렇게 낭파를 초래하게 됐다. 허욕이 들어 낭파를 초래하게 됐다.

 또 하나님이 계시니 하는 그런 모험성을 가지고서 이렇게 초래하게 됐다. 혹  요행이, 요행심을 가지고 이런 일 하게 됐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되지 안했느냐?'  했는데 이제 이거 낭파가 돼. 도움을 받지 안했거든. 이런 것이 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는 매사가 살 때에 참 돌다리를 때려보고서, 몇 번이든지  두드려보고 돌다리도 건넌다고 말한 것처럼 자기 지혜로서, 자기 경제 능력으로서,  자기 몸의 능력으로서, 자기 지위로서, 자기 권위로서, 자기 실력으로서 어쨌든지  제일 완전하고 후회 없을 그 걸음을 걸어가는 그것이 기독자의 걸음이라.

 그런데, 기독자들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고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자기는  얼토당토 않는 걸음을 척척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 가지고 안 되면  그게 또 '내가 잘못 걸어와 그러니까' 회개나 하면 하지마는 그라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망하고 만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언제든지 기독자들은 후회할 것이 없는 원만한 걸음을 걸어가야  된다. 그러기 때문에 가정에 일이나 무슨 일이나 '이럴 줄 몰랐네' 놀라는 일,  갑자기 닥치는 일로서 놀랠 그런 일이 없다. 또 '자기가 어떻게 했더라면 괜찮은  것인데 이렇게 했다' 놀래는 것이 없다. 사업을 하다가도 놀래는 일이 없는  사람이 그것이 기독자입니다. '나로서는 뭐 망해도 이 사업밖에는 할 업이 없었다.

이 직장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자기 양심껏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가지고  했기 때문에 그 길 외에는 다른 길을 걸을 거 없고 그 길이 제일 온전한 길을  자기가 택했다 해서 양심에 가책 없이 자기가 했을 때에 그 일에 대해서는  양심적으로는 후회가 없고, 또 경제면으로서 경제로서 자기는 그 길밖에 걸어갈  수 없는 다른 길이 도무지 없고 그 길이 제일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자기가  걸어갈 수 있는 원만한 길인 그 길을 택해 가지고서 갔을 때에는 경제적으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이러지 말고 어째 하면 될 것인데' 이라면 '그리 이사를  갔더라면은 괜찮은 건데 이래 했다' 이러면 그거 후회입니다.

 그거는 자, 식구가 그렇고 또 교회가 뭐 거리가 멀어 그렇고 이런 거 저런 거  수지를 계산하니까 '아무리 축대가 무너져도 요밖에는 올 자리가 없었다'  양심적으로 허욕도 하나도 없었고, 허영도 하나도 없었고, 또 게을도 없었고, 또  거기서 모험성도 없었고, 하나님을 지내치게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그런  허영심이나 하나님을 시험하는 그런 일도 없었고 그렇게 어짜든지 후회할 것이  없는, 양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자기 실력적으로나 자기 분수적으로나 모든  면으로 후회할 것이 없는 요 걸음을 걷는 것이 요 기독자들이라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기독자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원만한지.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일이라도 옳은 기독자는 후회할 일은 없어야 됩니다. 후회할 일은. 후회할  일 없다 말은 그라면 완전한 길을 걷는다 말이 아니오. 후회할 일 없다는 거는  나로서는 그 이상 할 수가 없다. 자기로서는 그 이상은 안 된다는 것, 여게서  나중에 결론을 지워 볼 때에 지극히 작은 죄라도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시지  안하면 못 이긴다 하는 결론이 나오게 되고, 왜? 죄는 그것은 사람의 왕입니다.

죄는 왕이오. 안 믿는 사람들 전부 뭐 왕이든지 대통령이든지 뭐 어떤 학박사든지  그 사람의 왕이 마귀요. 왕이 마귀. 죄가 마귀요. 죄가 마귀인데 왕한테는 백성이  무조건 복종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죄가 마귀.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으로서 죄가 그 사람에게 왕 노릇을 안 해야 지극히 작은 죄라도 이기지  만일 먼지만한 죄라도, 먼지만한 죄라도 그 죄가 그 사람에게 왕 노릇하면은 그  사람은 그 죄에게 복종해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을 자기가 확실히 믿었을 때에는 그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면 제가 거게서 자유 할 수가 있고 죄를 이길 수도 있고 꺾을 수도 있고  있는 것입니다. 의도 그러합니다. 의도 의라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서 의를 이루는 것이지, 전지전능의 능력이라야 의를 이루는 것이지 이  능력이 아니면 지극히 작은 의도 이루지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가 연결되는 데에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공로를 입지 안하면은 하나님과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생명이  없으니 지극히 작은 의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과 연결이  안 되면 지극히 작은 죄도 이길 힘없습니다. 왜 못 이깁니까? 왜 못 이깁니까? 못  이기는 이유가 뭐이지요? O조사님? 죄는 사람의 왕이기 때문에 그래서 죄가  너희들의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입을 때  그런 것입니다.

 이래서, 자기가 어떠한 조그만한 언행심사에 뭐 크든지 작은 죄를 짓든지 무슨  죄를 짓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자기는 '아, 내가 이렇게 했으면 안 지을 걸  후회했다. 내가 결심을 했을 걸. 결심했으면 안 지을 수가 있었다' 하는 그 사람이  아직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 제가 결심하고 뭐 아무리 작정해야 소용없어요.

 작정해도. 백성이 왕한테 어떻게 당하요? 못 당해. 못 이긴다 말이오, 그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내가 벗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대해서 내가  대속을 믿는 요 믿음에 흠점이 있었다.' 하는 그것을 그로 인해서 죄를 인해서  찾고 또 의를 건설하지 못한 데에 그것을 찾고 이래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만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과 연결될 때에 죄는 왕 노릇하지 못하고,  연결 안 되면 죄는 왕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라도 무슨 죄라도 다 지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자의 걸음은 어짜든지 원만한 걸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 하기를 모험을 잘 합니다. 모험. '이거 뭐 이거 안 되면 안 되고 되면  되고 이렇게 그만 하나님이 안 해 주겠느냐?' 모험성을 가지고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만날 실패요. 하나님이 기어코 그놈을 빼서  고치기 위해서 모험성으로 한 것은 다 낭파가 되도록 하나님이 하신다 그 말이오.

 도와주지 않습니다. 왜? 그 사람을 고쳐야 되지 모험성을 자꾸 길러 놓으면 그거  뭣 되겠습니까? 이 모두 보면 예수 잘못 믿어 전부 모험성으로 하다 다 망했고  빚진 것도 전부 그거고 실패한 것도 그거고 낭파된 것도 그거고 뭐 사업 난 것  모두가 다 자기 분수를 안 지켜서 후회할 것, 어떤 실패를 당해도 놀라지 아니할  수 있는, 놀라지 아니한다 말은 양심적으로 암만 비판해 봐도 영감적으로  비판해도 요 길밖에는 나는 걸어갈 수가 없는 이 길이라. 이 양심에 가책이 없다.

신앙으로 가책이 없다. 주님이 요 길 걸어가라 했고 또 요 길 걸어가다 실패당한  것도 요렇게 실패당한 것이 필요하기에 요런 순서로 했지 내가 뭐 잘못해  그렇다는 그런 것이 없도록 살펴서 가는 것이 기독자의 걸음이라.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로서는 비판할  때에 원만치 안하고 될 수 없는 그런 길을 가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가지고서 원만치 못한, 좀 원만하지를 못한, 완벽하지 못한  그런 걸음을 걸어가는. 그러면서 걸어가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그것이 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완벽한 걸음을 걸어야 됩니다. 모험적인 걸음을 걸어가서는 안 됩니다. 요행이나  다행이라 하는 그런 걸음 걷는 그 걸 가리켜서 요행심은 우상숭배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어짜든지 '어떤 두려워할 일에도 놀래지  아니함으로 사라의 딸이 되었느니라' 요 말씀을 단단히 기억을 해서 얼마나  기독자의 결음이 원만하고 완벽해야 된다는 그런 것을 기억해야 되지 뭐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아무나 따나 훌쩍훌쩍 뛰어서 모험성으로 허영심으로 또  다행심으로 이렇게 걸어가는 그런 걸음은 기독자의 걸음이 아닙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제는 성경 공부하러 온 사람이 이백칠십한 명입니다. 그렇게 비가 오고  야단지겨도 요 꼬박꼬박 이백 칠십 한 명이 와 가지고서 성경 공부한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르요. 사람이 말이지. OOO이 말이지. OOO이가, 연경과를  맡겼더니마는, 연경 실장인데 맡겼더니마는 어떻게 잘하는지? 내가 지금 존경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오. 우쭐하지 말아라. 하나님에게 쓰여지면은 하나님  기쁘시게 하면은 그만 사람이 막 이래 커 올라가 제까짓 게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은 일 하면 땅에 처박아서 말이지 교만하면 처박아서  일어나지 못하게 해. 그거 그래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안하는 그런 거 버린  자식이야 얼마든지 그만 선 밖에 내놔서 그만 방임해 버리지만 하나님이  사랑하고 간섭하는 자는 조금만 잘못되면 내비두지를 않습니다.

 어제는 기도하러 간 사람들이 없습니다. 요것도 요거 OOO집사에게 요걸  맡겼는데 요걸 자꾸 연구하고 연구해서 어짜든지 잘하도록 해요. 뭐이든지 다  뭐이든지 맡아서 자기가 연구해서 잘할라고 하면 자꾸 잘돼져요. 맡아 놓고서  성심성의를 빼 버리면 기독교에는 완전히 썩어지고 맙니다. 그만 그자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안해.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어쩝니까? 힘센 사람이 천국 복을 얻습니까 힘쓰는  사람이 얻습니까? 자, 힘센 사람이 얻는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힘이 약하거나 말거나 있는 대로 있는 힘 다 써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다 써야 되는 그건데 어짜든지 예수 믿는 것을 안일주의로 말하는  것이면 그거 하나하면 다 망한다는 걸 알아야 될 터인데 그뭐 딴게 뭐 있겠어?  그러고 우리 교회서는 혹 그런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 걸 살펴서 그라면은  수해로서 좀 어려움 당한 게 있으면 우리 교회서 그런 기회가 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정하는 자가 돼라' 하는 동정이라 하는 것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동정 해석이 뭣이지요? 동정 해석이 뭐이요? 자기 몸과 한 몸 되는  걸 동정이라 그거 그래 했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물에 빠졌으니까 나도 물에 빠진 것으로, 그 사람이 아침밥  해 먹지 못하게 됐으니까 내가 그런 것으로 그래 가지고 하나돼라 그 말이오.

 요렇게 하면 자기를 위해서 큰 복에 복줄기에 연결이 돼, 복줄기에.

 우리 교회는 어제 이백만 원 수해 의연금으로 보냈는데 얼마든지 보내면 좋지만  또 달리 쓸 것도 있고 거게는 그만하면 되겠다 해서 이렇게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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