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

 

1984. 12. 5. 수야

 

본문 : 누가복음 16장 19절∼31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다음 주일 공과입니다.

 본문은 누가 16장 19절로 31절  제목은 부자와 나사로  서론은  이 부자와 나사로는 비유가 아니고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후 세계의 (죽은 후  세계라 말입니다.) 사후 세계의 그 실상을 예수님께서 대조가 되는 두 사람의  형편을 끌어다가 세상에 있는 믿는 사람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홍포 입은  부자는 불택자로서 세상의 최고의 구비한 영광을 누리는 사람이요 나사로는  택자로서 가장 빈곤하게 지낸 저급의 형편 사람이다. 우리는 주님이 보여 주신  사후의 세계를 우리의 세상 생활에서 참고를 삼아 생활에 지혜를 얻어야 한다.

 본론.

 첫째. 부자는 심한 호의 호식으로 날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생활을  계속하다가 갑자기 죽어 지옥의 대기소인 음부로 갔다. 거기는 세상에 심히 많고  구비한 것을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하고 맹렬한 불꽃만 있는 고통하는 음부이다.

 둘째. 음부에 있는 부자는 세상에 많은 모든 소원은 다 없어졌고 다만 두  가지만을 소원하였으니 하나는 혀끝에 물 한 방울 적셔 주기를 원하였고 하나는  세상에 있는 자기 형제 다섯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여 이 음부에 오지 않도록  하여 달라는 소원이었다. 그러나 그 두 소원중 하나도 이루어지지를 못하고 다  거부당하고 불 가운데서 신음만 계속했다.

 세째.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이 사실을 들을  수 있다고 할 때에 부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하면 들을 것이라고 말을 할  때에 아브라함은 이것도 될 수 없다고 거부를 하였다. 불택자는 죽으면 음부에,  택자는 죽으면 낙원에 가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그 범위내에서 활동하고 이  세상에는 오지 못한다. 모든 선지 사도들도 불신의 모든 사람들도 일단 죽으면  심판 때까지는 오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네째. 또 구원 얻는 전도는 택함을 입은 자와 대속하심을 입은 자들만 생명의  전도를 받을 수 있고. 또 전도로 중생된 자만이 신앙생활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믿어지는 전도를 순간이라도 받아 믿는 자는 택한 자라는 증거이다.

불택자는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니 그는 불택자인  증거이다.

 문답에.

 첫째.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말씀은 비유뇨 실상이뇨? 답에, 비유가 아니고  사후의 실상이다.

 둘째로, 모든 것이 구비한 호화로운 부자는 살았을 때에 죽는다는 것과  호화로이 사는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만 생각했느뇨? 답에. 호화롭게 사는  것만 생각하였다.

 세째. 불택자 부자는 어디로 갔으며 택자 나사로는 어디로 갔느뇨? 답에.

불택자 부자는 불꽃 가운데 음부로 갔고 택자 나사로는 낙원 아브라함 품으로  갔다  네째. 음부에서 부자의 소원이 몇 가지며 무엇이뇨? 답에, 혀끝에 물 한 방울과  형제들에게 불꽃 고통의 사실을 전달해 달라는 것이었다.

 오에. 불택자가 믿어 구원 얻을 수 있느뇨? 답에. 불택자는 믿어 구원 얻을 수  없다.

 네. 이것이 다음 공과의 문답입니다.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아주 양극의 사람입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뭐 거릴  것이 없이 모든 것이 구비하고 형통했고 모자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 모든  행복을 갖춘 사람이었고, 또 이 거지 나사로는 택자로서 제일 불쌍하고 가련하고  아주 천한 그 사람입니다. 주님이 이 두 사람의 사실을 우리에게 끌어다가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는 비유가 아니고 사실입니다. 여게서 불택자의 그 최고의  행복된 사람과 택자로서 최하의 사람과의 이 대조적으로 비교해 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끌어다가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는 참 세상에서 호화롭게 모든 것이 구비한 그 행복으로 지냈는데 그뭐 많이  지내 봤자 육십 년 칠십 년 그래 많이 지내면 백 년 지낸다 합시다. 백 년  지낸다고 해도 사람은 영원을 가진 것이 사람이요 영원불멸의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천 년 만 년 억만 년도 아닌 영원이라는 그 세월을 가진 그 사람에게 이  세상의 육칠십 년 칠팔십 년 백 년 해 봤자 그거는 참 하룻밤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세상살이를 하룻밤 나그네라 그렇게 성경에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 호화로운 생활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지옥의 대기소가 되어 있는  음부에 가서 세상에서 죽는 그 시간부텀 음부에 가서 있게 됐는데. 거게는 그  불꽃이 심히 맹렬하게 계속합니다.

 그러면 거게서 그 불꽃이 심한 그 음부인데 그렇다고 해서 타서 죽는 것은  아닙니다. 구더기도 죽지 안하는 곳입니다. 다만 그 고통만 참 불꽃의 그 고통만  당하지 죽지는 아니하는 그 고생이니까 세상에서는 뭐 어떤 고생이 그 음부의  고통같은 고통이 아니겠느냐 하는 그런 것을 우리가 비유할 만한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룻밤 나그네와 같은 아주 호화로운 그런 그 짤막한 동안을  호화롭게 살고 참 자기 소원대로 살고 기쁘게 즐겁게 살았다 할지라도 그 다음  영원 무궁한 그 세월에는 자기가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그것을 생각해  보면 몰라서 그 사람들이 다 그렇게 않고 있지 이 사실을 안다고 하면은 그 불꽃  가운데 갈 사람이 이 세상에 어떻게 좋은 거 있다 할지라도 행복을 느끼지를  못하고 그는 세상에서부터 고통을 느끼고 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택자에게는 예수님의 피공로가 없기 때문에 빛을 주지  아니하십니다. 빚을 주지 안한단 말은 성신의 감화를 주지 아니하고 또 비뚤어진  것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 옳고 바른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지를  아니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택자는 전부 마귀를 좋아해서 마귀에게 따른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간섭도 안 하고 또 옳은 것을 말해 주지도  안하고 그 순전히 거짓말과 또 반거짓 말 이렇게 꾀우는 것 이것만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그 마귀만 접해서 마귀에게 그런 그 지식만 배우고 그런 유혹만  받게 되기 때문에 불택자들은 인생이 이 세상살이는 하룻밤 나그네와 같이 심히  짧고 죽고 난 그 다음은 심히 긴 그 영원을 가지고 있다 하는 그런 것을  불택자들은 모릅니다. 믿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해 준다고 해도 그들은  비웃으면서 듣지 이것이 사실로 인정이 돼지지 안했기 때문에 그들이 들으나 안  들으나 책에 기록한 것을 읽으나 안 읽으나 꼭 같습니다. 그저 어쨌든지 성신의  감화가 아니면은 깨달을 수가 없고, 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아니면 성신의  그 감화가 사람들에게 오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성신의 감화가 와야 모든 것을  옳고 바르게 깨달을 수 있고, 또 옳은 걸 들을 수가 있지 성신의 감화가 오지  안하면 마귀 감화 밖에 없기 때문에 성신 감화가 안 왔을 때에는 마귀 감화, 또  마귀 감화가 물러갔을 때에는 성신의 감화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사람들에게 성신의 감화가 오면 옳고 그른 것을 바로 알게  되고, 마귀의 감화가 오면 옳은 것은 그른 것으로, 그른 것은 옳은 것으로  이렇게 정반대로 꺼꾸로 거짓말로 알게 되는 것이. 그것이 악령의 감화를 받은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그 최고의 어떤 부귀영화라  할지라도 네가 이렇게 이거 누리다가 오늘인지 내일인지 이게 끝나는 시간은  모른다. 오늘 이게 끝날런지 내일 끝날런지 모르나 끝나는 그 시간부텀은 이  음부에 가서 불꽃 가운데서 네가 고통 시작해 가지고서 그 고통으로 영원히  계속하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을 그들이 참으로 알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부귀영화를. 또 끝나고 난 다음에는 영원 유황불 구렁텅이에 그 고통이 있는 그  길을 택할 리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안 되면 한 사람도 택하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몰라서 어두워서 몰라서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또 그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라도 어떻게 하든지 좀 호의호식으로  그렇게 호화롭게 그런 생활을 해 볼려고 욕심을 내고 그러므로 마귀는 또 마귀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이렇게 해서 자꾸 죄의 봉우리를 채워 가지 만일 불택자라도  이 사실을 안다면 마귀는 아주 그만 하나도 수입하지 못하고 바짝 거지가 될  것입니다. 또 불택자가 이 사실을 안다면 그 세상에 있는 부귀영화라는 그런  것은 그것은 아무도 차지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몰라서 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홍포 입은 부자가 죽어 음부에 가 가지고는 완전히 그 생각과  지식이 아주 바꿔졌습니다. 그때는 바꿔져서 세상에서 누린 그 부귀영화 그런  것은 간 곳이 없고 그런 것은 하나도 생각이 없고 불꽃 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까 그런 뭐 세상에 그런 부귀영화나 그런 것이 전혀 탐스럽지 안하고  생각나지 안하고 그저 불꽃 가운데서 고통. 그걸 면할려는 그런 것만 원하고  그렇게 고통하고 있는 것을 여게 기록 했습니다.

 이 나사로는 이는 택자입니다. 그 택자로서 아주 제일 천한 사람입니다.

택자로서는 뭐 그 사람이 재산도 없었지. 건강도 없지. 가족도 없지, 또 아무 뭐  거처할 곳도 없지 그저 그 병이 들어 가지고서 고통으로 그렇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나니까 천사들이 그 나사로를 영접해서 아브라함 품으로 영접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렇게 호화롭게 살고 간 홍포 입은 부자의 그 형편을 주님이  우리에게 그대로 털끝만치도 가감도 없고 정확하게 우리에게 그대로 알려  주셨고, 또 나사로의 형편도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 지나간 이런  일을 우리가 볼 때에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게 됩니까?  누구든지 여게서 홍포 입은 부자의 그 처지와 거지 나사로의 처지를 두고서  어느 것을 택하여 가지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면은 아마 이 가운데에서 홍포 입은  부자의 처지를 택하여 가지겠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 그런  사람 있습니까? 나사로의 그 형편이 그렇게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참 갖은 그  고통의 불쌍한 처지의 사람입니다. 또 홍포 입은 부자는 뭐 온 세상이  부러워하는 참 부귀영화가 아주 구비한 그런 행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몰랐지마는서도 그 두 사람이 살고 난 다음에 세상살이를 다 끝내고  오는 세상으로 옮겨 갔는데. 홍포 입은 부자의 처지는 그 음부 가운데 그렇게  되었고 나사로의 처지는 아브라함 품에서 그렇게 있는 이 두 가지를 비유가  아니고 그 사실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끌어다가 보여 주셨는데, 그러면 우리가  지금 생각할 때에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하면은 그 홍포 입은 부자의 처지를  뒤에 가서 그렇게 유황불 구렁텅이에 그렇게 갈지라도 홍포 입은 부자의 처지를  나는 택하겠다, 뭐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지 안하고 아브라함 품에 간다 할지라도  우선 나사로와 같은 그런 고통스러운 그런 그 형편을 내가 원하지는 안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일런지 어떻게 할런지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벌써 이미 지나갔으니까 지나가고 두 사람이 이렇게 살고 일생을 살고  난 다음에 벌써 세상을 떠나서 죽은 후 하나는 낙원에 가 가지고 있고, 하나는  또 그 불이 타는 그 불꽃 가운데 그 음부에 가서 있고, 이 두 사람이 세상에서  산 것도 우리에게 기록해서 주님이 주셨고, 또 사후에 된 것도 우리에게  기록해서 주셨는데 이것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털끝만치도 거짓이 없는  정확한 말씀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 주신 이것은 그뭐 비유로  이렇게 보여 준 거 아니고. 만일 비유라고 합시다. 그러면 비유라고 해도  좋습니다. 비유라고 한다고 하면 비유는 실상은 비유보다 더 정확한 것입니다.

만일 비유가 이렇다고 하면은 우리는 이대로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고 이  말씀이 비유라고 하면은 죽은 후 음부와 낙원은 이보담도 더 정확하고 더 권위  있는 실상이겠다. 왜? 비유는 그 실상만 못합니다. 실상과 비슷한 것을 이렇게  말하는 것인데, 그러기에 비유보다는 실상은 언제든지 정확하고 더 실질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유로 보면 이보다도 더 그 두 사람이 살고 난 다음에 죽은  후에 닥친 것은 여게 기록한 거보다도 더 엄격하고 더 정확하고 더 실상이겠다  우리는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유라면 이보담 더한  사실이겠고 실상이라면은 이대로 되는 그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게서 이걸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그 나사로와 홍포 입은 부자의 그 두 사람의 그 형편을 우리는 두고서  어느 사람의 형편을 내가 하나님이 주신다면 차지하겠느냐 하면은 우리가 그  홍포 입은 부자의 형편을 차지하겠다 하는 사람이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아마 이 거지 나사로의 형편을 차지하겠다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여게서 혹 홍포 입은 부자보다도 이 두 가지 처지를 하나님이  주시면서 둘 중에 어느 하나 것을 선택해라, 너는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하면은 홍포 입은 부자의 그 처지를 좋다고서 선택할 사람 있으면 손 한 번 들어  봅시다. 아마 그럴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거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여게서 우리 자신을 두고서 언제든지 생각해야만  하겠습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죽으면 낙원에 가고 하늘나라 갈 사람으로서  세상에 뭐 나사로보다 어떤 더 어떤 고생이 있다 할지라도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또 이 홍포 입은 부자보다도 더 존귀한 어떤 존영한 그런 길이 있다  할지라도 그 길을 택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게서  우리는 낙원에 갈 사람들이니 우리가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은 이런 처지에  있을지라도 이런 처지에 우리는 있을지라도 이 세상에서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은  그런 존귀하고 구비하고 호화롭고 참 그 모든 면이 구비한 그 행복스러운 그  사람을 부러워하지 안해야 우리가 이 정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불행스러운 처지를 우리가 가졌다 할지라도  이 사실을 생각할 때에 그 불택자들이 음부의 지옥에 갈 사람들이 어떤 그  행복을 누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행복과 내 그 하늘나라 갈 내 처지에  가련한 형편과 바꾸겠다 하는 그런 사람은 우리가 하나도 없을 터이니까 이것을  언제든지 대조하고 비교 해서 우리가 망령을 부리지 안하고 주님을 노엽게 하지  안하고 우리가 정상적인 그런 생활을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나사로와 같은 이런 아주, 가련한 처지에 이른다 할지라도 우리는  거게서 불택자들이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를 다 그렇게 구비하게 누리다가 지옥  갈 그 사람, 그 사람보담은 내가 행복스럽다, 내가 다행스럽다, 행복스럽다  이것을 우리가 언제든지 생각하고 이것을 깨닫고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그  어려운 처지라도 넉넉히 위로를 받고 남음이 있겠고 감사를 하고 남음이 있겠고  기쁨을 누리고 남음이 있겠고 행복감을 가지고 남음이 있어야 우리는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래도 나사로보다는 낫습니다.

몸이 그래도 뭐 건강해서 걸어 돌아다니지, 암만 비틀거려도 걸어 돌아다니지,  또 그래도 뭐 먹고 싶은 대로 마음에 다 먹지는 못해도 먹고 그 싶은대로 뭘  얻어먹어도 얻어먹어도 먹고 싶은 거 가끔 가다가 먹을 수도 있는 사람이지, 또  그래도 가족들이 있지, 그 세상에서 이런 저런 재미있는 일 있지 이러니까  나사로 형편과 우리 형편과 비교를 한다고 하면은 나사로보다 우리 형편이라  하는 것은 참 비교 못 할 만치 우리 형편은 아주 행복스럽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거게다 비교할 수 없을 만치 행복됩니까? 이런 행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감사 할 줄 모르고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불만 불평을 품는다면 이거는 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저 매맞을 그런 일밖에는 안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항상 이 나사로의 형편을 우리가 그저 우리는 죽는 날까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첫째는, 안 믿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다가서 지옥 갈 그 사람을 생각해야  되겠고, 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는 죽어서 하늘나라 갈 사람이요 유황불  구렁텅이를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거게서 면제 받았으니까 거기서 구출해 구출  받은 사람들이니까 하룻밤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에서 어떤 고통의 생활이  우리에게 부딫힌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인해서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어야 할것입니다. 기쁨이 있어야 하겠고, 또 주님 앞에  감사의 감사를 드려야 하겠고, 그저 그것을 생각할 때에 아, 내가 오늘 이  세상에 암만 고생이 많다 할지라도 오늘 끝날지 모른다. 오늘 끝날지 모르는데  오늘 끝날지 모르는데 내가 끝나면 하늘나라 갈 것이요, 세상에 불택자로 말하면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할지라도 오늘 그것이 끝날지 모르니 그 사람은  끝나면 유황불 구렁텅이에 그 음부에 갈 것이니까 그 사람과 나와의 비교해 볼  때에 비교해 볼 때에 나는 뭐 어떤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어떤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세상에 어떤 존귀한 불택자로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불택자의 최고의  존귀한 그 처지에 있고 나는 아주 택자로서 제일 불쌍하고 가련한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내 형편은 그 형편과 비교가 안 됩니다. 그 비교는 하늘과 땅과의  비교도 안되겠습니다. 그렇게 큰 차이, 참 차이가 있는 그런 내용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데 그런 내용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이 사실을 우리가 까마득히  잊어 버려 버리고 이걸 묵살시켜 버리고 생각하지도 안하고 이래 가지고 우리가  공연히 불만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망하고 뭐 그렇게 지내는 이것은 우리가  자기의 처지와 이 불택자들의 그 처지와 이것을 우리가 번연히 논리적으로 알고  성경을 보아서 알고 우리가 또 깨달아서 압니다. 이렇게 알고 있으면서 알고  있으면서 그런 것을 다 묵살서켜 버리고 우리가 자기의 있는 처지를 불행스럽게  생각하고 세상에서 그 사람들의 처지를 부러워하고 하는 이런 것이니까 이것은  참 우리가 어두운 생각이요 이거는 망령이지 이거 정상의 마음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세상에서 살 때에 이 나사로와 홍포 입은 부자를 이것을  언제든지 비교하는 이 비교를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왜 택자라 불신자라 이리 말하지 안하고 택자라  불택자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리 예수님을 믿지 안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택자라면 마지막에 죽을 때라도 가 가지고서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직 교회에 안 나온다고 해 가지고서 그 사람을 불택자로 단정은 짓지를  못합니다. 단정을 짓지는 못하지마는서도 안 믿는 사람은 불택자라고 단정은  짓지 못하지마는서도 그 사람이 택자라, 하늘나라 갈 사람이라 그렇게 우리는  확정은 짓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지옥을 갈 사람인지 하늘나라 갈  사람인지 우리는 똑똑히 모르겠다. 왜? 안 믿으니까, 모르니까, 우리는 그  사람을 지옥 갈 사람인지 하늘나라 갈 사람인지 모르니까 그 사람의 어떤  부귀영화가 겸해서 그렇게 구비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어데 갈 사람인지  모르니 그 사람의 그 구비한 행복과 내가 택한 사람인 줄 내가 알고 있는 그  나의 어떤 가련한 처지와 이 바꿀 수 없는, 그 처지와 내 처지와는 바꿀수 없는  이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참 그 처지는 말하자면 땅이라면 우리 처지는 하늘같이  하늘과 땅이 이렇게 차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처지는 뭐 세상에 우리 처지는  만일 어떤 정금이라고 하면은 그 사람들의 처지는 그 뭐 어떤 똥 위에도 똥에도  비교할 수 없는 그렇게 차이 있는 이렇게 차이 있는 우리들이라 하는 것을  이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홍포 입은 부자와 나사로와 이 두 사람의 이 세상 토막이라  하는 요 토막만 보지 말고 이 세상 토막과 세상 토막 너머 영원까지를 연결시켜  가지고 부자도 금생과 내세를 연결시키고, 나사로도 금생과 내세를 연결시키고  두 사람이 연결을 시켜 가지고서 그거 비교 해 볼 때에 아무래도 우리가  나사로의 처지를 우리가 원하지 홍포 입은 부자의 처지를 원하지 않을 것이고,  홍포 입은 부자의 처지와 나사로의 처지와 만일 중량을 비교한다면 그 홍포 입은  부자의 처지에 비해서 나사로의 처지는 그것에 뭐 억억만 배도 더 더한 존영한  행복스러운 행복이다 그렇게 우리가 평이 될 것입니다.

 또 그라고. 그러면 그 두 사람을 비교해 보고, 자. 그러면 나는 하늘나라 갈  사람이니까 나와 이 나사로와 처지를 한 번 비교해 보자. 그러면 내가 나사로만  못하나 나사로보다 좀 낮나. 어느 정도 낫나? 이것을 우리가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나사로와 비교할 수 없을 만침 우리는 구비한 사람이요 행복된 사람이요  참 자유로운 사람이요 평강된 사람입니다.

 이러니까 그 나사로와 나를 비교해 볼 때에 나사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원망  불평 없이 그렇게 지냈는데 우리는 나사로에 비해서 그뭐 측량 못 할만치  그보다는 행복됩니다. 그는 무슨 몸에는 병이 들었으니까 무슨 건강 하나도 없지  재산 하나도 없지 또 가족 하나도 없지 처자 하나도 없지 그 집도 하나도 없지  아무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부 하나도 필요한 것은  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 고통스러운 병, 병신 그것밖에 없습니다. 이래도  그는 그 구원 없는 불택자의 가장 행복스러운 사람보다 그 사람이  행복스러웠는데, 우리는 이만치 나사로에 비교 못 할 만치 나사로보다 얼마나 십  배나 뭐 십 배나 백 배도 더 할 만침 이렇게 행복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  나사로가 얻은 이 구원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의 행복은 얼마나 큽니까?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언제든지 생각해서 우리의 행복을 우리가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자기가 무슨 잘못 생각해서 곡해를 해 가지고서 무슨  슬퍼하고 공연히 번민하고 공연히 고통하고 공연히 불만 품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뭐이 나오는 거 아닙니다. 나오는 거 아니고 그것으로서 자기가 교만하고  월권하고 모든 걸 정상적으로 견해하지 못하고 다 잘못 해석함으로 인해서 자기  지옥을 자기가 만들어 가지고 자기 고통을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  가지고서 뭐 그렇게 아무리 뭐 불만 불평을 품어 가지고서 어떻게 불이 붙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가지고서 털끝만한 행복이나 평강이나 오지 않습니다.

 그 세상에서 그 사랑의 집 부모 밑에 있을 때에는 혹 비꾸고 그라면 부모가 참  희생을 해도 뭣 해 주지마는서도 벌써 그 그런 처지가 없는 데서 하나님이  그란다고 들어 주시겠습니까, 세상 사람이 그래 들어 주셨습니까? 이러니까  세상에서 말하기를 '아, 얻으러 와도 고운사람 있고 주러 와도 미운 사람 있다.'  그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웃어서 웃어서 박색이 없고 성내서 미인 없다.

미인이나 미남이나 다 성낸 얼굴 다 보기 싫고 웃는 얼굴 다 아름답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 홍포 입은 부자와 나사로를 우리가 비교를 해 가지고서야.

참 나사로는 행복되다. 뭐 홍포 입은 부자는 참 가련하다. 참 불행스럽다,  나사로는 참 행복되다. 이렇게 그 두 사람을 비교해서 우리가 성경대로 성경대로  비판해 가지고서 나사로의 행복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판정 지어 놓고.

홍포 입은 부자의 그 불행이라는 것을 확실히 판정 지어 놓고, 그 다음에  나사로와 나와 또 비교를 해서 우리가 판정을 지워 놓고, 이러면 우리는 우리 이  가운데 있는 사람은 뭐 한 사람도 나사로 가진 그 행복감과 그 감사와 그 기쁨은  가지지 못할 사람 하나도 없고 그 처지에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슨 공연히 위안제를 마시는 위안제를 마시는 거짓부리로 속아서 위안제  마시는 것이 아니고 사실이라 그말이오. 사실을 자기가 몰랐었는데 이 사실을  바로 깨닫고 바로 찾아 가지고서 바로 비판하고 바로 생각하고 보니까 그 홍포  입은 부자에다 비해서 나사로는 말할 수 없는 행복스러운 사람이요, 또 나사로에  비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행복스러운 사람이니까 그 실상이라 말이오.

실상이니까 그 행복스러운 자기를 깨달았을 때에 기쁠 것이고 감사할 것이고,  그러면 기쁘고 감사하면 자기 주관적 행복이 이를 것이고. 거기 기쁘고  감사하니까 자기 주관적인 평강과 기쁨이 넘칠 것이고, 또 이렇게 기쁘고  즐거워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니까 하나님이 또 좋아서 즐거워하실 것이고, 또  이렇게 감사와 기쁨이 넘치니까 제 삼자들도 볼 때에 성내 가지고서 뭐 불만  불평해 가지고서 찡그려 가지고 있는 거 보담은 그래 가지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도 보고 또 다 좋아할 것이고 이러니까 전체가 사람도 나 보고 좋아하고  나에게 축복을 빌어 줬으면 빌어 주고 내게 대해서 호감을 줬으면 줬고 호의로  도와주면 도와 줬지 후벼 팔 사람 없지마는서도, 우리가 이 사실인데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이 행복을 잊어버리고 행복한 자가 행복을 잊어버리고 불행이라고  이래 가지고 찡그려 가지고서 불만 불평을 품고 있을 때에 옆에 있는 이웃도 나  보기 싫다고 저주를 못할지라도 하나도 그렇게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거나 뭐  우대하거나 그런 사람이 없을 것이고, 또 하나님도 그럴 것이라 그거야.

이러니까 제 지옥을 제가 만들지, 제 천국을 제가 깨트렸지, 제 다른 사람에게  후대 받을 것을 '제 후대를 제가 박멸시켜 버렸지, 하나님께서 좋아해서 축복해  줄 그 축복을 버렸지 이거 뭐 전체가 전멸입니다. 전멸 아닌게 하나도 없어.

이웃에게 내가 나를 멸하도록. 이웃이 나를 멸하도록 내가 만들지. 또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또 멸해서 자기를 지옥에 고통 가운데 끌어넣지, 또 하나님께서도  또 섭섭해서 우리에게 그 섭섭함을 품고 있으니까 좋을리가 없는 것이지  이러니까 백해무익이요 전부가 불행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그 부자와 나사로 둘을 비교하는 것이 이것이 공연  하느냐? 이것이 영원히 변치 않는 이 실상의 사실을 지금 우리가 사실대로  우리가 비판하는 것입니다. 비교해서 비판하는 것이라 그말이오. 또 나사로와  우리와는 다 같은 그 구원을 받은 택함을 입고 중생 받았고 예수님의 대속을  입어서 하늘나라 갈 사람들이니까 꼭 같은 사람인데 나사로 처지와 내 처지를 또  이와 같이 비교해 볼 때에 우리는 뭐 어떻게 기뻐하고 뛰야 될란지. 그렇지  않습니까? 아, 나사로가 만일 우리와 같은 이런 처지를 얻었다면은 나사로가  아마 못 견뎌서 뛰고 굴리고 야단이 날 겁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자기에게 있는  병이 싹 다 낫았다, 또 누워 있을 때에는 항상 대문에 누워 있다 했는데  건강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있다, 또 제것 가지고 제가 먹을 수 있다. 이것  저것 할 수 있다 그래 보십시오. 이 나사로가 뭐 좋아서 뭐 못 견딜 것입니다.

이런 행복이 우리에게 와 이 행복을 파묻어 놓고 깨트리 버리고 우리가 스스로  불행을 가지느냐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가 여게서 깨달아서 이제는 돌아섭시다. 저도 얼마 전에 말한  대로 참 불행을 내 지옥을 내가 만들고 하던 것을 다 깨트리고 내 천국을 내가  만들고 내 평강을 내가 만들고 내 만족을 내가 만들고 내 행복을 내가 행복감을  느꼈다 말이오. 내가 행복을 만들어 행복감을 느꼈어. 또 행복을 만드는 거라.

그라니까 하나님 또 축복해 주시고 모두 좋아하지 나도 평강해지지, 이랬었는데  그라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나사로 설교를 해요. 나사로 설교 해. 나사로  설교하고 나니까 내 마음에 못 견뎌서 내가 이 나사로 보고서 많이 울었어요.

나사로는 참 이런 데서도 만족하고 이랬는데 나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사로와  비교할 수 없는 이런 행복을 주었는데 나는 여게서 행복을 누리지 못했으니까  하나님 보실 때에 '이 교만한 놈아' 얼마든지 하나님이 노여워 하셨겠느냐? 아,  그라고 나사로와 나와 비교하니까 나는 어떻게 행복스러운 사람인지 뭐 어떻게  행복스러운지 그 말을 할 수가 없어. 이러니까 거기 우리보다 더 행복스러운  사람이 없어요.

 우리가 택자라 이라는 것은 불신자라 하면 안 믿는 사람 많이 있기 때문에  불신자 내게 대해서 지금 그와 같이 지금 말하는가 보다 이런 터이니까 우리가  택자라 이랍니다. 택자라 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야 오늘까지 예수 안  믿지마는서도 또 그 사람이 믿을 택자인지 모른다 그 말이오 그렇기 때문에  택자. 불택자라 말하는 것이지 그래도 오늘까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면 우리는  저 사람이 택자라 단정 못 짓습니다. 또 불택자라 단정도 못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자. 불택자라 지옥 갈 사람인지 모른다. 그 의문은 가질 수 있다  말이오. 의문 가지면은 그 의문이 붙어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  우리가 부러울 거 뭐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너 그라면 홍포 입은 부자의 그  처지와 그 음부의 유황불 구렁텅이의 음부와 둘이 연결시킨 그 연결. 그러면  네가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은 그 금생과 영원한 그 유황불의 그 음부 그것을 네가  이 둘이 연결해 가지고 있으니 이걸 취하겠느냐? 그거 너 취할라면 취해라 하면  그거 취할 사람 하나도 없을 거라 말이오.

 우리가 자꾸 생각지 안하고 비판하지 안해 보고 평가하지 안해. 보고 이렇게  따져보지 안하고 이래 구별해 보지 안한 데서 우리 마음이 어두워져 가지고서  공연히 울고 불고 야단이고 불만 불평 야단이고 마귀란 놈은 그렇게 자꾸 우리를  충격을 줘 가지고 이래 어둡게 만들어서 자꾸 우리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이렇게  해 가지고 우리에게 불행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정신 차려서  성경 가지고 까막까막 눈을 감아서 자꾸 연구해 가지고 따져 들어가면 따져  들어가면 우리가 마귀란 놈은 아이구 이거 따지니까 아, 따져들면 내가 여기서  자꾸 있다가는 따져 들어가는 날이면 뒤에 가서 봉변만 당할 터이니까 어라 가  버려야 되겠다. 희망이 없다. 암만 있어도 소용없다. 따져 들어가면 마귀는 도망  가 버립니다. 우리가 따져 들어가면 반드시 우리에게는 감사가 나오고 행복이  나오고 그라면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이 영원히 우리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자꾸 이렇게 되어지는 것인데,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자꾸 따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무엇이든지 내가 ○○○그 조사님을 여게서 소망을 두고 등용한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 설교를 할 때에 어짜든지 따져야 된다 하는 그 설교를 했기  때문에 이게 참 따지는 사람인가? 따지기를 참말로 제가 진심으로 따져야 된다는  걸 그것을 진심으로 말해서 따질 사람인가? 이래서 따진다면 된다. 따진다면  따지는 그거 하나 가지고서 그만 다 된다. 이래서 등용을 했는데 아직까지 그뭐  개척 교회 가 가지고 그렇게 이렇다는 큰 결과는 보여지지를 안합니다. 그래  나는 그 따진다는 그 지혜에 그 아주 희망성에 나는 그만 완전히 그만 반해서  녹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안 세울라 하는 걸 나는 전도사로  임명을 해 세웠다 말이오. 뭐 물론 대학 졸업했고 다 일류 신학교 다 졸업했고  또 신학 대학원도 졸업했고 또 대학도 대학원도 졸업했고 이렇게 한  사람이지마는서도 약간 좀 그런게 있어서 눈이 좀 어두워서 그랬는데 고 사람  따진다 하니까 눈 어두워도 소용 없다 그말이오. 상관이 없어. 그랬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따지는 그 사람은 따지면 결국은 성경이 있고, 또 우리는  중생된 그 산 영이 있고, 우리 안에는 영감이 있고, 진리가, 피공로가 있기  때문에 따지면 따지면 따지는 사람은 마귀는 꺾어서 마귀는 물리칠 수 있고  따지면 모든 멸망 길은 다 피할 수 있고 따지면 행복을 잡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따지지 안하는 데에서 다 절단납니다. 우리가 기쁨도  그만 우리가 잘못하면 그 분위기에서 오는 그 기쁨을 가지고 우리가 기뻐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기뻐하는 그걸 따지지 안하고 그만 기쁘니까 기쁘다 하다가는  반드시 우리가 뒤에 가서 큰 낭파를 당하게 됩니다. 그 기쁨이 와도 따져 봐야.

왜 기쁘노 이거. 왜 이 뭣 때문에 기쁘노. 이 기쁨이 어데서 왔노, 그러면 이  기쁨의 결말이 뭣 되겠노 해서 그 기쁨의 원인이 변할 것이라면 그 기쁨은  조만간에 변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또 그 기쁨의 원인이 불의한 것이라면  기쁨의 원인이 불의한 것이라면 반드시 그 기쁨은 큰 멸망을 받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 기쁨도 우리가 따져야 되겠고. 또 그 고통도 '내가 와 이리  고통하느냐?' 따져 보면 어떨 때는 참 공연히 그 고통하지 안할 걸 고통을 하는  그 고통이 많습니다. 고통을 따져 보면은 고통은 지나가 버리고 고통은 깨져  버리고 고통 반대의 그 평강이 그 속에서 나오는 걸 우리가 얼마든지 봅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따지는 것이 참 이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따지는  것, 고통을 따지다가 행복을 만나는 사람 많고 아주 기쁨을 따지다가 '아이쿠  나를 죽인 무서운 여게 아주 폭탄이 들어 있구나. 나 박살 낼 폭탄이 들어  있구나.' 이래서 기쁨을 따져 가지고서 자기를 삼킬 폭탄을 숨어 있는 암초같은  그런 지렁이같은 그런것을 다 발견해 가지고 물리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성경에 생각해라, 생각해라, 이 세대는 악하다  생각해라 이렇게 말씀하셨고, 또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는 건 전부 생각하라  말이오. 기도하라 말은 전부 생각하라 말이오 기도하란 말은 생각하라 말이요,  기도하라는 것이 네가 하나님도 생각하고 또 사람도 생각하고 네 형편도  생각하고 너와 관계되는 것도 생각하고 네 미래도 생각하고 네 과거도 생각하고  네게와 너와 너와 관련된 사람과 모든 네 사물들과 하나님과 모든 것을 자꾸  성경을 가지고 영감을 가지고 생각해라. 따져봐라 따져봐라 하는 그말이오.

기도는 생각하라 그 말입니다 말하자면 기도는 생각하라는 말이오.

 그런고로 우리는 여게서 이 홍포 입은 부자와 나사로의 이 비교하는 이것을  우리가 해야 되겠고, 또 학생들에게도 이 홍포 입은 부자와 나사로는 요대로니까  요대로니까 요 사실을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서 요 비교할  줄을 알아서 비교를 가르쳐야 되겠고, 또 홍포 입은 부자와 자기와의 요 비교를  가르치면 우리는 거지 나사로가 가지 그 행복보디도 우리는 뛰어난 그런 행복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 둘을 비교해 보는 고것이 여게 첫째 중요하고, 또 그 사람이라는  것은 이 일방적 지식으로 살기 쉽습니다. 일방적 지식으로 살기 쉬운 것은 이  문답에 그게 있습니다. 문답에, 홍포 입은 부자가 그렇게 자기가 당면한 일이  홍포 입은 부자에게는 이 세상에서 죽음이 그이에게 당해 가지고 있고, 또 그  모든 부귀영화를 겸한 호화로움이 자기에게 당면돼 가지고 있는데 그 홍포 입은  부자는 뭣만 생각했는가? 홍포 입은 부자는 나는 죽는 것보다 죽는 것도 좀  생각하고. 또 그렇게 호화롭게 사는 것도 생각하고 둘 생각했는가 뭘  생각했는가? 이 홍포 입은 부자는 둘을 생각지 안했어. 하나만 생각했어. 그걸  가리켜서 일방적 지식이라 그렇게 말해요. 그 홍포 입은 부자가 만일 둘을  생각했더라면 그는 몰라도 죽고 난 다음에는 어찌 되느냐 그걸 생각했으면  번민과 고민으로 가지지 그렇게 안심하고 일사 천리로 호화롭게 날마다 자기를  위해서 연락하는 그런 일을 하지를 안했을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보니까 거기 사는 데에 사는 것을 반으로 하고 죽는 것을  반으로 해서 사는 데에 생각하는 것을 반쯤 기울이고 죽는 데에 생각하는 것을  반을 기울여 가지고서 이 둘을 다 겸해 가지고서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도 사는 것만 생각하면 그 사람이 치우쳐서 실수할 일이 많을 건데  죽음을 생각하다 보니까 그 사람이 할 말을 다 못 하고 할 일을 다 못 하고  그렇게 자제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이랬는데, 이 홍포 입은 부자는 그 일방적인 지식을 가졌다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일방적인 지식을 가지지 않고 나사로는 지금 내가  곤고하게 지내지마는 조만간에 주님이 부르면은 예비해 놓으신 하늘나라가 있다.

하늘나라와 이 세상에 사는 것과 하늘나라 가서 살 이 양방 이 쌍방 지식을 쌍방  지식을 나사로는 가졌지마는서도 홍포 입은 부자는 일방적인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이럴, 물론 불택자만 그리 가는 것이지마는 이럴 줄 모르고  그렇게 지냈더라 그거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일방적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이 사실을 끌어다가 보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희망을 아무리 가져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하늘나라 갈  사람들이지마는 우리가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이 일방적인 지식을 가지기  쉽습니다. 오늘 밤 우리는 일방적인 지식을 이걸 가지지 말자. 쌍방의 지식을  가지자. 쌍방 지식을 가지고 일방적의 지식을 이걸, 주님 말씀하기를 모든  사람들이 왜 멸망을 받느냐? 멸망받는 것은 다 이리 저리 치우쳐서 다 한꺼번에  무익하게 됐다. 이리 치우쳤느냐 저리 치우쳤느냐? 이리 치우쳤다 말은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일방적인 지식으로, 어떤 사람은 이 일방적, 어떤 사람은 저  일방적, 어떤 사람은 천국 일방적으로. 어떤 사람은 세상 일방적. 또 지옥  일방적 이래 가지고 다 헛일이라. 우리가 택한 사람이지마는 우리들이 천국만  생각하면은 일방적인 지식 천국만, 생각하고 세상 안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세상이 천국이요 천국이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 성공이 천국 성공이요 천국  성공이 세상 성공이지 세상없는 천국이 없고 세상없는 천국이 없습니다. 또 천국  없는 세상도 없어요. 내가 세상 살고 있는 여게는 세상이냐 천국이냐?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일방적인 그 일방 지식을 가지지 말고 무엇이든지 쌍방으로  생각해야 된다 하는 것을 여게서 우리가 배우도록 합시다.

 그래서 레위기 11장에는 보면은 쪽발로 걸어가라 그렇게 말했어. 쪽발로  걸어가라. 쪽발로 걸어가라 말은 내나 그 하나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인데  사슴이라든지 소라든지 이런 거는 다 쪽발이고, 말 그런거는 쪽발이 아니고 한  쪼가리 뭐 굽으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개 이런 거는 다섯 발로 이래 가지고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데 그거 다 더럽고 쪽발로 걸어가라. 레위기 11장에  보면 쪽발로 걸어가라. 그 쪽발로 걸어가라 말은 우리가 그 우리의 생활 한 시간  한 현실 한 현실을 돞아서 한 현실 한 현실을 이렇게 우리의 목적을 향해서  걸어갈 때는 언제든지 쪽발로 걸어가라. 쌍방 지식을 가지라. 쌍방 지식을  가지라. 자기를 생각할 때는 반드시 남을 생각하고 피조물 그 생각할 때는  창조주를 생각하고 금생을 생각할 때는 내세를 생각하고 기쁜 것을 생각할 때는  슬픈 걸 생각하고 기쁜 걸 생각하면 야 기쁨을 생각할 때에 이 기쁨에서 슬픈  거는 붙어 있지 않느냐? 그 쌍방으로 생각하면 기쁨에 거게 슬픔이 옆에 붙어  있어서 그 기쁨은 찰나적인 기쁨이요 슬픔은 거게 큰 것이 들어붙어 있는 그것을  우리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이 홍포 입은 부자는 일방적인 지식을 가졌는데  쌍방의 그런 지식을 가져라 하는 그것을 우리가 여게서 공부해야 되겠고. 또  우리는 잘 아는 것이지마는서도 홍포 입은 부자가 그렇게 모든 것이 부요하고  구비했지마는서도 딱 세상 떠나니까 세상 떠나니까 하나도 가져가지 못했어. 그  물 한 방울도 없었어.

 우리가 실지로 실감적으로 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그것이 영감입니다. 성신의  감화가 무엇이 성신의 감화입니까? 성신의 감화를 어떤 사람들은 뭐 무슨  뜨끈뜨끈한 것이니 하는 거 같지만 그거 아니오. 그것 다 잘 못 가르치는  미혹들입니다. 그게 아니오. 성신의 감화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자기가  깨달을 때에 깨달음을 더 강하게 하는 것이 성신의 감화입니다. 처음에는 하나  깨달았던 걸 둘 깨닫게 하는 것이 성신의 감화요, 그 깨달은 깨달음에 자기의 그  깨달음에 대해서 느낀 그 감회. 그 감회 감도가, 감도가 차차 차차 그 감도가  강해지게 하는 것이 그것이 성신의 역사입니다.

 이래서, 이 성경을 보고 사람들이 세상에서 이런 거저런 거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이 우리도 이런 것을 가지고 있지마는서도 하나님이 부르면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하는 그것을 말로는 우리가 잘하지마는서도 어느 정도 실감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어느 정도 실감을 가지고 있느냐? 성신의  감화는 어데 까지 가는 것이 성신의 감화의 충만이냐? 그 충만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가 세상을 떠날 때에 그 모든 것을 자기가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하고 다 두고 가고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죽을 때에  자기 소유에 대해서 느끼는 고 느낌을 느끼도록 고 정도대로의 고 정도와 같은  그때의 실상과 같은 그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이 성신의 충만인 것입니다. 충만.

 그 믿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이상 느끼고 있습니다. 그 이상 느꼈어. 아, 이래  가지고 있는 것이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이거 다 그만 두고 갈 것이라 하는 그  느낌을 오히려 그때 세상을 떠날 때 느끼는 그 느낌보다도 더 강하게 느끼는  것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더 강하게 느끼고 있어요. 이거는 뭐. 그러니까 세상  상대하는 그걸 하나도 상대해서 있다고 봐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미래에 닥쳐 올 일을 현재에 느끼기를 미래에 가서 실상을 더할  때 그때에 그 실감과 같은 그 실감을 오늘에 가지도록 하는 것이 그것이 성신의  감화요. 그때에 고민을 그때에 섭섭함을 오늘에 그 섭섭함과 꼭 같은 도수의  섭섭함을 가지는 것이, 그때에 두려움을 오늘에 그 두려움과 같은 두려움을  오늘에 가지게 하는 것이 그것이 성신의 감화입니다. 그 성신의 감화라는 것은  앞으로 되어질 그 모든 불행을 오늘 느끼는 것이 그때 불행 당할 때 느끼는  것보다 더 많이 느끼니까 많이 느꼈으니까 많이 느끼고 그걸 다 해결 지운  사람이니까 그 불행이 와 봤자 그까짓 거 오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다 말이오.

환난도 그렇고 두려움도 그렇고 모든게 다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신의 충만함을 받아야 되겠다 하는게 뭐입니까? 아,  그 홍포 힘은 부자가 모든 걸 다 그런 거 가지고 있었지만 떠날 때는 그 모든 걸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하고 물 한 방울도 그는 가지고 가지 못했다 하는 그런 걸  자꾸 생각하면 그만 그런 거 아니다. 나는 믿는 사람이지마는서도 내가 지금  땅에다가 이런 이런 거 해 놓은 거 오늘이라도 사람의 생명이 언제 떠날지  압니까? 언제든지 떠날지 모르는데 생명이 딱 떠나면 이건 나는 하나도 내게는  상관이 없다 하는 이것을 자꾸 그것을 느끼고 느끼고. 그렇다 그렇다. 과연  그렇다 이래서 자기가 그때 실상으로 세상을 떠날 때 자기의 모든 갖춘 것이  자기와 하나도 상관없이 다 인연이 딱 끊어지는 그때에 끊어지는 거와 같은 그  실상의 끊어질 그때에 당한 그 실감과 같은 오늘에 그 감을 가질라고 애를 쓰느  것이 성신의 충만을 받을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뭐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 두려움도 그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에 참 모세가 얼마나 두려워했으며 다 두려워 안했습니까? 그 두려우신  하나님을 오늘에 자기가 생각할 때에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라 이런 크신  분이라, 이런 크신 분과 두려운 분이라 하는 것을 오늘에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자꾸 차차 차차 하나님은 크시다. 하나님은 두렵다, 자꾸 크시다.

두렵다 이라니까 그 하나님에게 대해서 같은 신자지마는서도 하나님의 두려움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만 근이나 두렵고 어떤 사람은 뭐 한 지푸래기만치 두렵고  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성신의 충만과 성신의 감화의 빈약이라 그말이오. 그  차이오. 그 성신 감과는 이게 성신 감화입니다. 이러니까 자꾸 성경에 있는 이  사실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사실로 인정되는 그것이 정상적으로  되어질라고 하는 그게 성신의 감화요  그 부자는 그때 가 가지고는 뭐 다른 소원은 하나도 없었어. 그저 세상에서  그런 소원이 많았지마는 소원이 많으니까 그 사람이 뭐 세상 떠날 때까지는  분주했을 것입니다. 아마 아파 누웠어도 그랬을 것입니다. 아파 누웠어도 자기  밑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터이니까 야. 너는 뭣하고 뭣하고 뭣하고 뭣 계획이  누워서 잠들기 전에는 누워서 기운이 없어도 있는 대로 다 이것 저것 다 지휘를  하고서 이거 뭐 계획하고 저거 계획하고 뭐 할 것이 꽉 찼었을 것입니다. 꽉  찼지마는서도 딱 세상 떠나고 나니까 하나도 그게 없어. 그게 다 필요 없어.

그의 요구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단지 둘밖에 요구 안 했어. 이 물 한 방울  요구해. 우리 형제 다섯이 있는데 이 고통의 자리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하는  그것밖에는 저의 소원이 없었고 다른 거 아무 것도 없었어.

 그러면 우리도 이것 또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어. 내가 이런 거 저런 거 붙지  안하지마는 주님이 나를 딱 부른다면 내가 세상을 딱 떠난다면 내가 이 복잡한  일이 다 어떨 것인가, 이 복잡한 일이 그때 나를 따라 올 것이고 하늘나라  가서도 이 복잡한 일이 나 할 일이라고 긍정이 될 건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일인가, 복잡할 수 있는 일인가? 그러면 우리가 하늘나라 가도 주님이 오셔도  주님이 재림을 해도 우리가 재림할수록이 더 이 복잡할 걸 더 가져야 되겠고  재림할수록 이거는 해야 되겠고 재림할수록이 지금 급하니까 더 급하게 해야  되고 빨리 해야 되고 그런 일도 있습니다. 그런 일도 있지마는서도 또 만일 세상  떠난다 생각하면 아무 필요 없는 일, 그 필요 없는 일, 그러면 안 하면 안 될 일  안 하면 안 될 일인데 필요 없는 일, 그 공연히 폐단되는 그런 있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있는지 여기서 그 음부에 있는 홍포 입은 부자의 그 요구가  간추려져서 단 둘 밖에 안 가졌으니까 우리의 그 욕구도 여게서 우리가 그때에  간추려질 것을 간추려질 것을 지금 우리가 생각해 가지고 간추려지는 사람이  되는 이것이 영감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랬는데, 거기 보니까 나사로는 세상을 뜨니까 천사에게 받들려서 낙원으로  갔고, 또 홍포 입은 부자는 그는 죽어서 음부로 갔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둘이 갑니다. 영육이 갑니다. 녜, 영육이  세상을 떠날 때에 낙원으로 갑니다. 영육이 간다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마음을 육으로 붙이면 육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는 우리 영하고 우리  마음하고 그 영이 마음을 입은 채로 그대로 갑니다. 그대로 낙원에 가 가지고  거게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낙원은 하늘나라 가기 전에 하늘나라를 무궁세계를  기다리고 있는 대기소가 낙원입니다. 또 음부라는 것은 영원한 지옥을 기다리고  있는 지옥의 대기소가 음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음부는 다 뭐 할라고 가 있고  낙원은 뭐 할라고 가 있는가? 이제 하나님의 공심판을 받기 위해서 거게서  기다리고 있고 이제 공심판 할 때가 되면은 안 믿는 사람들도 전부 부활 다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부활 다 해 가지고서 몸뚱이까지 부활해 가지고  공심판 받고, 안 믿는 사람들의 그 마음은 안 믿는 사람들의 마음도 역연 하늘에  올라갑니다. 그래서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간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올라간다 그  말은 지옥은 가지마는서도 그는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가고 사람의 혼은  올라간다 그 말은 짐승의 혼은 땅에 들어 가서 없어져 버리고 말지마는서도  사람의 혼은 없어지지 안하고 음부에 가서 기다리든지 낙원에 가 기다리든지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 영과 마음이 같이 갑니다. 그러면 땅에  있는 건 뭐 있느냐? 우리 고기덩어리만 있습니다. 고기덩어리 이거는 왜 있느냐?  고기덩어리 이거는 못 써. 고기덩어리 이대로는 못 써요. 이대로는 만일 천 년을  산다고 해 보이소. 이거 뭐 철철 헐고 이거 뭐 얄궂게 되겠는가? 이러나 마음은  마음은 그렇지 안해. 마음은 이거 벌써 성화되고 살아난 그 기능은 늙지 안해요.

그 사랑의 마음의 기능은 이거는 새로와져서 성화된 것은 늙지 않습니다.

영생합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떠날 때는 영과 마음은 가고,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지금 영이 말하는 거 아니고 마음이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말하고  있고 영계에서 말하고, 또 홍포 입은 부자도 마음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음부에 가면 세상 올 수 있나 올 수 없습니다. 사도들도 선지자들도  한번 세상 떠나면 세상에는 못 오고 음부에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됩니다. 또 안 믿는 사람들도 거게서  기다리고 있어야 됩니다. 오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재림할 때에 낙원에 있는 그 모든 각 사람의 그 영과  마음, 영과 마음, 그러면 육의 일부입니다. 육의 일부. 그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온다 했습니다. 데리고 와 가지고서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그걸 왜  말했느냐 하면은 우리의 그 몸이 우리 몸이 죽으면 화장하면 연기 돼 가지고서  이 공중에 모든 원소가 돼 가지고서 나중에 돌아다니지 또 우리가 화장했으면  고기가 먹고 가 가지고서 고기가 또 먹었으니까 고기 사료 됐지 고기를 잡아다가  또 어떤 사람이 먹었으면 또 사람의 살이 돼 가지고 있지, 또 사람이 썩었으면  흙이 됐지, 흙이 된 걸 또 인제 풀이 먹었으면 풀이 나무가 돼 버렸지 이러니까  어데 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그 능력으로 모든  만물을 다 복종시켜서 이제 아무 것이의 그 몸은 다 이리 다 보내라 할 때 다  보내 가지고서 각각 자기 몸을 입게 됩니다. 그때에 영육을 입고 영육을 입고 안  믿는 사람은 영육을 입고 영과 육이 아울러 범죄했기 때문에 영육이 심판을 가서  받게 하기 위해서, 사망의 부활이라 말은 심판 받기 위해서 죽기 위해서  부활하는 것이고, 우리는 살기 위해서 부활하기 때문에 생명의 부활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때 부활할 때에 우리 이 형체는 부활합니다. 우리 형체는 다 부활해서  뉘든지 다 볼 수 있어요. 우리는 그때 안면을 못 오느냐 하면은 뭐 이것은 무슨  장로님이다, 이거는 주일 학교 반사님이다, 이거는 아무 것이다, 안면은 다 볼  수 있다는 것을 그 성경에도 예수님의 그 부활하신 안면을 제자들이 보고 봤어.

'아, 주님이시구나.' 참 원첨 신기 하니까 보고도 의심했지요. 마태복음 28장  16절에 보면은 '산에서 예수님을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사람 있어 절하고  이래 만지고 이라면서도 참 이상하다 이렇게 믿지 안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그러나 알아서 보고 예수님의 얼굴 알아서 '아,  주님이시구나.' 다 알았어. 또 그 입신한 중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은 그것을  오히려 십자가의 도가 미혹될까해서 말 안 한다 이랬으나 다른 그 성자들은 입신  중에 가서 본 것을 다 많이 말했습니다. 가서 보니까 보니까 얼마전에 자기가  나환자 그 병원에서 나환자소에서 만난 사람인데 그분이 와 가지고 인사를  하더라고. '아이구 어째 오셨습니까?' 이래 인사를 해서 '아 내가  모르겠는데요.' 이라니까 '아, 아무 때 그때 그때 부흥회 와 가지고서 나한테  찾아와 가지고서 그렇게 기도도 해 주고 그렇지 안했습니까? 내가 그때 아무  것입니다. 그때 아무 것입니다. 그 말하는데 보니까 그 사람들이라고서. 그래서  자기가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을 대면해서 서로 은혜를 끼치고 그 사람과 그런  관계를 가진 사람을 영계 입신 중에 가 가지고 만난 사람을 여럿을 말하는  사람들, 저는 성자들 전기에 그래 기록한 것을 많이 봤습니다. 다 봅니다. 얼굴  다 보고 형체 다 봐요  그러나 다른 것은 뭐이냐 하면은 속에 기능은 달라. 그 형체는 다, 아 백 목사  지금 이라니까 머리 이게 희어서 그렇지 머리 이거 새까맣게 물들어 놓으면 이거  뭐뭐 누가 알겠소? 새까맣게 물들어 놓으면 백 목사라 하지마는서도 그 몸뚱이도  같고 다 체중도 다 이렇지마는서도 힘이 없다 말이오. 힘이 없어. 힘이 없으니까  그때야 뭐 그 좀 그만한 거석 할 때는 뭐 어데 뛰어 오르기도 하고 사람들 힘센  사람은 서이 너이 다 그런 거는 뭐 집어 넘기고 다 이렇게 했지마는서도 지금은  몸뚱이는 그대로 있지마는 힘이 없으니까 걷지도 못하고 비틀비틀거리며 이래  간다. 힘이 없으니까. 아, 다 같이 인물은 훌륭하지마는서도 흘륭하지마는서도  그 사람은 보니까 퍽 꼬꾸랑 글자를 써 놓으니까 뭐 어짜고 어짜고 이거는  히브리어다 헬라어다 이리 쌓는데 나는 그거 하나도 안해. 영어 거꾸로 자  에이자 하나, 에이자 그것 이리 아는 그거만 알지마는서도 나는 기능이 그거  모르거든.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거 기능이 아니까 그거 뭐 잘잘 읽는다  그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부활은 하지마는서도 이 세상에서 마련한 기능은  기능이 마련된 대로 그대로 부활합니다. 뭐 기능 세상에서 마련 안한 그 기능은  거기 가 가지고 새롭게 생겨지지를 아니합니다.

 이러니까, 사람이 한 번 가면은 오지 못한다. 제사 지낼 때 이러니 저러니 하는  그런 거 거기 오지 못한다. 또 사무엘이 어찌 되나 그런 것도 이 성경을 보고  성경 아는 사람은 거기 모두 사무엘에 대해서 난해절이라. 난해절이라. 난해절이  아니라 다른 성경 보면은 못 오니까 그거는 사무엘이 아니고 귀신이 마귀란 놈이  그와 같이 가장을 해 가지고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지 않습니까?

 또 그라고 거게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증거를 듣지  않는 사람들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도 안 듣는다' 그거는 증거한다고 되는 거  아니다. 그러면 거게 무얼 가르쳤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벌써 택한자가 대속  입고 대속 입은 자가 중생되고 중생된 자가 예수 믿어서 그 건설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지 이게 그 벌써 택함 입어서 시작된 사람이지 예수를 믿는다고 되는  거 아니라 하는 것을 여게서 봐 놨어. 그러면 아브라함을 아버지 아브라함이라  하는 것 보면은 이 사람이 분명히 교회 나온 사람이요 아브라함을 아는 사람이라  그말이오. 아는 사람이지마는서도 그가 택함을 받지 안한 사람이기 때문에 평생  뭐 주여 주여 했지마는서도 그 사람이 구원에 이르지를 못했고, 또 택함을 받지  안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세상 소망으로 살았다 그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뭐 이 세상 소망으로 살고 이렇게 하는 사람을 그  사람을 지옥 갈 사람이고 홍포 입은 부자 같은 사람이라 그렇게 말 안 할지라도  자기에게 대해서는 그렇게 단속할 수 있습니다. 아, 그 사람이 홍포 입은  부자가. 보니까 아브라함도 잘 알고, 보니까 거기 하나님을 잘 공경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음부에 간 것 보니까 그 사람이 세상에서 호화롭게 연락하고 다  이렇게 살았는데 이 세상에서 호화롭게 연락하는 그것을 위주로 삼고 자기  기쁘게 자기 단장하고 자기 아름답게 꾸미는 자기중심 자기 위주로 사는 그 사람  보니까 홍포 입은 부자가 지옥 갔더라. 이러니까 거기 자기중심 자기 위주로  예수 믿고 있는 그 사람 아무것이가 그 사람 지옥 갈 사람 아닌가 그렇게는  생각할 필요가 없고 생각할 수가 없지마는서도 자기가 그런 생활 할 때는 '아,  내가 자꾸 이거 위주로 되어지고 이것만 욕망하고서 이것이 좋고 자꾸 이와 같이  사는 이것이 내가 불택자가 아닌가. 이 불택자가 아닌가 그것을 생각하고서 좀  두려워 하는 마음이 그런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모양도 많애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 들어갈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에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 하는 그 말씀도 참 좀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택함 받고 중생되고 한 사람들은 다 주님의 뜻대로사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있고, 그러면 그 전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택한 사람이 분명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안 하고 세상 위주로 자기  위주 자기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은 택한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석도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해석한다는 건 다 무너져 버리니까 다  안 될 터이니까 우리가 해석하기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시간도 있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안하는 시간도 있으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고 시간은  새사람으로 살았고 또 안 할 때는 옛사람으로 살았고, 새사람으로 살 때도 있고  옛사람도 살 때도 있고, 이러니까 구원이 될 때도 있고 구원이 안 될 때도 있다.

고 성경에 그래 놨기 때문에 요거를 분류해서 요것을 분석해 분류해 가지고서  우리가 거게서 참 소망을 가지고 위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거 그만  마구잽이로 그래 해석하는 날이면 우리는 뭐 절망자요,

 그러니까 요 공과들 가지고서 여러분들이 많이 기도해 가지고, 여기 여러분들이  알리고 이걸 다 말하는 것이지 학생들에게 이걸 다 말하면 헛일이라. 학생들에게  이걸 말하면 헛일이라. 어떤 사람이 말해요. 어제 아래 와 가지고서 '아, 이  새김질 할라고 하는데 새김질을 할라고 하는데 다른 때는 새김질하면 뭐 은혜가  오고 열려서 환하게 되는데 아, 요번에는 새김질 할라고 준비를 많이 하고 참  집에서 눈물도 흘리고 아주 은혜가 많고 오늘은 새김질을 잘하겠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새김 잘 할라고 오니까 그만 깜깜해서 헛일하고 말았다.'  헛일하고 마는 그 이유가 우리를 기르기 위해서 하는 것도 있지마는서도 너무  준비를 많이 해 가지고서 이 준비를 많이 해서 시간은 한정된 한 시간에 열 시간  할 일을 준비해 놓으면 그거 그만 헛일입니다. 그 설교 헛일이오. 고 시간에 할  고걸 십 분이면 십 분, 십 오분이면 십 오분, 고 시간을 딱 두고서 고 시간에 할  수 있는 고것을 딱 요령을 잡아 가지고서 고 시간에 할 것만 딱 준비해야 돼지는  것이 너무 준비를 많이 해 놓으면 나중에 가서 그만 헛일되고 만다 그거야.

 그와 마찬가지로 반사들이 이 준비를 많이 하면 도리어 그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그것이 서투러지고 그만 죽을 쑤는 그런 일이 되는 것을 여러분들이 많이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상은 준비가 다 바로 되지 못해 그렇습니다.

그러면 준비를 해 가지고서 시간이 십 분, 십 오 분입니까? 십 오 분이요? 십 오  분 십, 오 분이니까 십 오분에 가르쳐야 되니 자기가 그걸 해 보고 십오 분에  가르쳐야 되니까 뭐 뭐 십 오 분이뭐 십 오 분 할려면 말씀 가르치는 건 십 분  이 된다든지 십 이 분이 된다든지 그러면 그걸 보고서 그거 한 번 증거해 보고  요래요래 증거해 보니까 아, 요 십 분에 딱 시계 보니까 요거 증거하니까 십 분  걸렸다. 아, 요라니까 삼십 분이다. 아이구 안 되겠다. 반쯤 줄여야 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십 분에 딱 할 수 있는 고것을 딱 간추린 후에 딱 요것만  딱 간추려 가지고 하되 자기가 전부를 다 알고 있으면서 고것만 말할 때에는  자기 알게 한 그 영감이 같이 가기 때문에 그걸 가르칠 수 있지마는서도, 자기가  아는 것이 고것 밖에 모르고 다른 것 모르면은 모르고 하는 사람과, 말하자면 그  전체를 다 알고고 한 가지를 가르치는 사람과 한 가지 밖에는 모르고 전체를 다  모르는 사람이 가르치는 것과 다르다 그말이오. 전체를 다 알고 한가지가르치는  사람은 한 가지 가르치는 그 가르침에서 그 전체가 다 그리 들어갑니다. 홉수해  들어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을 보면은 아, 저 사람은 다 알고  가르친다. 조거 말하지만 조것도 다 모르고 가르친다 알 수 있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렇게 충분히 준비를 하면 됩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에게 주일 학교 학생들 가르치는 것을 지금 이래 긴 시간에  말하는 거 이거 다 말하라는 거 아니오. 여러분들이 알아서 여러분들이 이래  여러모로 다 알고 알아 가지고서 그러면 그것이자기의 양식이 돼서 자기가  그렇게 참 살고 싶고, 또 그렇게 깨달아지고 또 그렇게 살아 보고, 그렇게  사니까 되어지고 이렇게 하니까 그것을 자기가 음식 먹는 모양으로 소화가 돼서  벌써 자기 깨달음이 됐고 자기 간절이 됐고 자기의 힘이 됐고 자기의 믿음이  됐고 자기의 소망이 됐고 된 그것을 다른 사람이 가르칠 때에 그거 젖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양을 먹이라. 어린 양 먹이기가 제일 힘들어.

어린 양 먹이기가 제일 힘드는데 어린 양은 누가 어린양이라? 주일 학교  학생들이 어린 양이라. 주일 학교 학생들이 어린 양이요, 이제 나오는 사람들이  어린 양이요 그거 다 아직까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주 자기가  소화 해 가지고서 자기 생활 체험에서 나온 것. 자기가 느낀 것 그걸 가르쳐야  되지 그냥 이거 밥으로 먹이는 거 모양으로 그냥 지식으로만 받아 가지고서  자기가 느끼지 안하고 하는 그런 것을 체험 경험 하지 안한 것을 가르치면은  그들이 설사하고 잘 새김질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 몇 가지를 자기네들이 기도해 가지고서 간추려서 요 학생에게 요걸  가르쳐 가지고 요 학생이 학교 가든지 집에 가든지 꼭 요 복음대로 살고 요것이  그 학생에게 힘이 돼 가지고 그 사람의 생애가 변화가 되도록 내가 하겠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각오를 가지고서 그렇게 하면 효력을 가져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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