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

 

 1984. 12. 3. 월새벽  

 

본문 : 누가복음 16장 19절∼21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어제 재독을 참석한 사람이 백 칠십 칠 명이라 이라는데, 물론 백 칠 십 칠   명도 적은 수는 아니지마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등한히 여기면   나중에 큰 화를 만나게 됩니다. 말씀을 모르면 능력이 그 안에 없습니다.

  엊저녁에 미국에서 온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테이프로 들었는데,   ○○○집사심이 갖다 준 테이프인데. 거게서 저는 하나 배웠습니다.

  배운 것은 그 교회 교인이 이만 오천이요, 거게서 한 십 오년 동안 배워   가지고서 나가서 목회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다 삼천 명 사천명 이렇게   교인수가 되는 그런 교회가 많이 있다는 그런 말을 소개합니다. 미국에 있는   사람들은 교인수라 하면 재적수를 말합니다. 재적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교인으로 취급하지 그 사람을 안 믿는 사람으로 그렇게 취급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재적되어 있는 교인들은 다 재적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 교회   교인으로 알고 그렇게 관심도 가지고 관리도 합니다.

  하나 배운 거는 뭘 하나 배웠느냐 하면은, 설교를 하기 전에 성경을   가르치는데 성경을 일주간 동안 읽으라고 해서 내내 그 설교를. 그 성경   말씀을 마태복음이면 마태복음 몇 장으로부터 몇 장까지, 또 사도행전이면.

 요한복음이면, 그렇게 미리 읽으라고 해 가지고 한 며칠 동안 읽어서 그   본문을 환하이 알도록 그렇게 해 가지고 성경을 가르쳐 준다고. 또 가르쳐   주기 전에 읽었으면 거게서 뭣 뭣을 발견했느냐 또 찾아보라 이렇게 해 가지고   자꾸 그 성경을 교인들이 밝히 기억하고 있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 나왔다고서.

 그라기 전에는 목회하다가 목회가 안 돼서 그만 목회를 그만 두고, 자기는   건축업을 한 사람이라서 건축으로 나갈까 이렇게 하다가 성경이나 가르쳐 보자   하고서 성경 가르치는 그런 목회는 그만 그만 둘 요량 하고 성경이나 가르치자   하고서 이렇게 조그만한 홀을 하나 얻어 가지고 성경을 가르쳤는데 사람들이   자꾸 모여 들어 가지고 그렇게 많이 모아 들었다고서. 그래서 교인이 심히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꾸 모여 든답니다.

  하기는 성경을 배워서 성경 말씀을 알아야 능력이 그 속에 있지 그까짓 거   성경 외의 말 천하지식을 다 갖다 끌어간다 해도 그거는 다 사망뿐이지 아무런   생명적인 능력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부 교회는 그저 말씀을 말해야 알아 듣지도 못하고, 여기   부장들이. 주일학교 부장들이 통반으로 공부할 때에 증거하는 걸 보면은 지금   주일학교 부장들은 이 말씀에 대해서 깊이 깨달은 그런 사람이 현재 하나도   없습니다. 가르쳐 봤자. 보면 사층에 중간반 반사 ○○○ 조사님이 깨닫고   가르치는 것이 보여지고, 그 ○○ 조사님은 확실히 깨달아서 거게 대해서   입각해서 참 잡았고, 잡고 증거하고. 또 삼층에 중간반 이부 부장 ○ 부장은   그분은 ○○ 대학 법대 교수이니까 물론 논리도 정연하고 지식도 있으니까   이렇게 증거하는 것이 지식적이라도 깨닫고. 또 보면은 지식적만이 아니고 그   속에 실지로 깨달아서 실감을 좀 가지고 있어서 증거하는 것이 보여집니다.

 그러나 밑에 주일학교 부장들은 껍데기만 술술하고 있지 거게 대해서 '아,   이거다.' 자기에게 꽉 잡혀 가지고서 자기와 하나 되어 있는 그런 부분이 심히   적습니다. 이래서 공과 첫 공과에는 허무하고 두번째 재독할 때에는 두 주일째   가르칠 때는 좀 낫고, 인제 어떨 때는 세 주일째 가르치라고 할 때는 좀   낫습니다.

  이러니까 이렇게 뭐 가르치는 분들도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을 얼마나 등한히 하며,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그렇게 아주 등한히   여기는, 하나님 말씀을 그렇게 업신여기는 예사로 여기는 그런 것이 많은지 그   병이 들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자라지 앉는 것입니다. 암만 말을 해도.

  여게서 가르치는 그것을 들으면. 깨달으면 저는 그저 절대는 붙일 수   없지마는서도 뭐 사업 따라서 가고 또 직장 따라서 가고 자기 가정 형편   따라서 가고 그렇게 못 옮겨집니다. 옮겨지지를 못합니다. 딴데 떠나지를   못합니다. 깨달았으면. 왜? 거게 모든게 다 있는데. 깨닫는 하나님과 진리와   그 성령 위에 다 있는데. 뭐 거게 다 있는데 뭐할라고 딴데 찾아갈게 뭐   있으며 달리 찾아가 가지고는 위험천만한데 그럴 필요가 없다 말이오.

 껍데기로 말로만 슬슬해서 앵무새 모양으로 그저 겨우 지식적으로 알면 그만   '다 됐다.' 몰라도 의례히 '내가 다 모른다. 모르는데 그저 들으면 됐다.

 하나도 기억 못 해도 들으면 됐다. 내가 입으로 옮길 만한 정도만 되면 됐다.'   이 말씀이 자기에게 실감이 생겨지고, 그 다음에는 이 말씀대로 자기가 안   하고는 못 견디는 그 발동이 나오고, 이 말씀대로 할라고 자기는 전심 전력을   기울어지는 이런 행동이 나오는 이 행동을 생각지 안하고 그러면 행동이 암만   나와도 조심하면 그 행동 했다가 조금 마음 놓으면 또 그 행동 못 하고   이러니까 그 행동이 자기 몸에 배 가지고 있지 않다 그말이오. 해 봤자 애를   쓰면 어째 그 행동 한번 하고 그라고 난 다음에 또 잊어 버려 버려서 그만 그   행동이 없어져 버리고, 이거는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지 도무지 본능적으로   돼지지 안하니 그런 고민이 없는 것입니다. 말해야. 암만 말해도 '저 무슨   말인가?' 외나 참 뜨거운 실지의 말은 하면은 '무슨 저렇게 괴벽스러운 말을   하는가? 잔 소리를 하고 있는가?' 이런 정도지, 들어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 들어 깨달으면 무슨 직장 고관 대작을 줘도 그까짓 거 때문에 하나님   말씀 배우는 새벽기도를 빼지 않습니다. 빼는 그게 벌써 그 증거요. 자기는   모르지마는 다 겪어 본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여게 보면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그 말은, '호화로이' 그 말은 호걸 호(豪)자 화려할   화(華)자 그래 호화입니다. 호화. 아주 호걸스럽고 자기가 참 이렇게 저렇게   어짜든지 자기를 잘 장식해서 아름답게도 하지마는서도, 여자의 아름다움 같은   그런 아름다움이 아니고 아주 권위있게 위엄있게 호화로와서 모든 사람이 다   보고 우러러보고 높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런 아주 호걸스럽게 아주   호걸스럽다 그말은 아주 훌륭한 그런 것을 가리켜서 호걸스럽다, 또 자기의   지위나 권세나 명예나 이런 것이 다 대단히 영화롭게 큰 사람을 가리켜서   호걸스럽다 그랍니다.

  또 화려할 화(華)자, 화려할 화 자는 아주 아름다운 거보다도 더 환하게 아주   빛나는 그런 호화로움, 아주 화려한 거, 화려한 거. 어떤 시골에 있는 사람이   도시에 와서 전기 장치가 돼 가지고 있는데 와서 보니까 어떻게 그 빛이   환하게 화려한지, 또 시골에 있던 사람이, 저 한국의 시골에 있던 사람이 서울   가 보면은 서울 거리가 화려하고, 또 서울 있던 사람이 일본 가서 동경이나 가   보니까 더 화려하고, 동경이나 그런데 가 있는 사람이 불란서 콜 그런 거리를   가 보면은 화려해서, 화려하다 그걸 가리켜서, 빛날 화 자, 화려할, 화려할 화   자, 빛날, 화려 할 화 그렇게 말합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연락이라는 연 자는 잔치 연(宴)자요 연락이 라는 연   자는 잔치 연 자요, 락이라는 락 자는 즐거울 락(樂)자입니다. 즐거울 락.

 그러면, 잔치로 즐거워하는,   '연락하는데' 이 부자는 잘못 산 거 아닙니다. 이 부자는 잘 살았습니다.

 천국 가는 사람이 아닌 불택자로서는 제일 잘 산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제일   잘 산 사람이 이 사람이오. 사람은 누구든지 뭐 잘나고 못 나고 간에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 힘대로 해서 자기를 호화롭게 할라고 애를 쓰는   것이 그것이 본능입니다. 그게 옳습니다. 또 자기를 위해서 연락하는 그것이   옳습니다.

  이러니까, 살림살이가 없으니 자주 그라지 못하니까 하다 안 되면 이웃끼리   무슨 채소 한 포기라도 나눠 먹으면서 이웃을 사귈라고, 또 가다가 안 되면   무슨 떡이라도 한번 해 가지고 이웃에 나눠 먹을라고, 또 그렇게 범위가 넓어   안 되면은 요번 월급 받아 가지고는 아무것이 아무 것이를 한번 초대해서,   집으로 초대하기가 좀 힘이 들면은 다른 어떤 음식점에나 가 가지고서 한 두   사람도 초대하고 한 사람도 초대하고 하는 그게 전부 연락이오. 그 잔치로써   자기와 사귀어지고 자기를 알아주고 자기를 대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사교라 그렇게 말하겠고 또 다른 말로   하면은 이웃을 서로 친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니까, 크면 큰 대로 자기를 호화롭게 하고 못났으면 못난 대로 자기를   호화롭게 하고, 그 호화롭게 한다는 그것이 본능이요. 당연한 일이라   그말이오. 여러분들이 아주 앉은뱅이. 누운뱅이면 '누운뱅이 저까짓 거야'   이래 싶어도 아니오. 누운뱅이는 누운뱅이대로 자기대로 자기를 호화롭게   할라고 애를 씁니다. 호화롭게 할라고, 자기 호화롭게 할라고서 누운뱅이   보십시오. 누운뱅이도 자기 눈썹도 닦고 눈도 닦고 요래도 닦고 누운뱅이도   거울이 있을 것이오. 면경이 있을 거요. 면경 가지고 요래도 보고 조래도 보고   자기를 어째, 그대로 또, 그 중에서라도 다문 얼마라도 장식할라고 애를 쓰는   것이고,   이런 짐승도 보면은, 새짐승도 보면은 자기를 호화롭게 안 하는 새짐승이   하나도 없습니다. 보면 아침에 일어나면 전부 이렇게 자기 털을 자꾸 이렇게   정리하고 정돈하고 이래, 자꾸 입으로, 입으로 가지고 이래 자꾸 이렇게 침을   묻혀서 이래 자꾸 단장하고. 고양이도 보면 자기 낯을 고양이만 씻는게 아니라   새 쳐놓고 자기 낯 안 씻는 새가 없고 자기 몸을 단장 안 하는 그런 새가   없고, 짐승 쳐놓고 안 그라는 짐승이 하나도 없습니다. 뭐 동물도 그렇고   곤충도 그렇고 또 뭐 이 식물들은 우리가 그라는가 모르지마는 식물들도   보면은 눈에 보이지 안하지마는서도 벌써 며칠 지나면 그 식물이 어떻게   드러났는지 자기 몸을 위엄스럽게 자기 몸을 단장해서 아름답게 할려고서,   나무를 턱 심어 놓으면 얼마 안 가면 제대로 제 모두 모양이 생겨집니다.

 제대로 모양을 갖춰서 이리 뻗을 건 이리 뻗고 저리 뻗을 건 저리 뻗고 이래   가지고서 자기 모양을 갖출라고.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본능입니다. 본능이오.

  이래서 여게 오늘 아침에 ○ 장로님이 왔는지 몰라도 나는 ○ 장로님한테   하나 배웠는데. 그 ○ 장로님이 말하기를, 그는 의사이니까, ○ 장로님이 지금   박사가 돼서 ○ 박사입니다. ○ 장로님이 한번 말을 하는데 우리 몸에는   어짜든지 각 지체마다, 지체마다 그 지체를 보다 좀 구비하고 온전하고   깨끗하게 하고 잘해서 아주 참 사람 말로 말하면 이상적으로 그걸 잘, 자기   지체를 잘 만들어 가지고서 그 전체의 그 몸에게 제일 좋은 것을 제공해서   '나는 팔이 이리 제일 좋다' 하면서 팔의 그 본분을 그것을 잘 행해서 몸에게   지장이 없도록 팔은 팔을 자랑할라고, 또 안에 있는 거는 무슨. 간은 간을   자랑할라고, 다른 세포는 세포를 그것이 잘 돼 가지고서 온전하고 구비하고 잘   됐다고 이렇게 할라 하는 그런 본능이 있다 하는 그런 말을 언제 한번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본능이 있다. 본능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자연적으로 자기 몸에서 자체에서 자치하는   자기가 스스로 치료하는, 모든 지체마다 자치하는 그것이 있기 때문에   어짜든지 보다 힘있는 데까지는 잘할라고, 좋게 할라고, 그 지체를 좋게   할라고 애를 쓰는 자치하는 그 법과 성격이 있기 때문에. 뭐 무슨 한 기관이   고장이 나도 될 수 있는 대로 그 '고장이 나중에 보면 그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좋게 할라고 요렇게 조렇게 해서 제일 좋은 최고의 방편을 취하고   최고적으로 그것을 옳고 바르게 그렇게 만들어 나가기 때문에 사람이 모르는   것도 그 성격 때문에 자꾸 치료가 돼 가지고서 병난지 얼마 되면은 나중에   가서 보면은 치료가 됩니다.

  그 말을 내가 언제 들었냐 하면은 제가 그때 이것 좀, 교회는 자꾸 부흥이   되는데 기도 시작하고서 이래 가지고 하면서 반사들 이래 거석 하면은 그만   눈이 어두워. 한번은 보니까 오전 오후 설교하고 주일학교 반사회 하는데   뭣이. 그때 피곤해서 이랬는데. 뭣이 내 눈에 와서 턱 가려지는 것 같애. 자꾸   가린다고 내가 자꾸 이래 가지고, 뭐이 와서 덮어서 자꾸 이래 이래 이라다   보니까, 암만 그래야 '아무것도 든게 없는데 이상하다' 그때 내 눈 속에, 이   동공 밖에 물이 있는데, 동공이 물 위에 떠 가지고 있답니다. 물 위에 떠   가지고 있는데 그 물 속에 딴것이 생겨서 뭐 이래 보면 별이 꽉 찼고 비행기가   꽉 찼고 뭣이 왔다 갔다 꽉 찼어. 그날은 그런게 아니고 여기 뭣이 커다란   줄이 하나 턱 이래 덮여 가지고 있는데 이래 암만 해도 안돼. 나중에 보니까   눈의 고장이라. 이라다가 나중에 귀가 근지러워서 귀를 이렇게 좀 뭘 조금 뭘   건드리니까 피가 툭 터져 나와. 이상해서 '아, 이거 안 되겠다.' 막아 놓고   그래 이비인후과 가 가지고서 이래 가서 거석하니까 치료를 해 주는 데,   그것을 내가 우리 ○ 장로님한테 물었습니다.

  '이런데 이게 뭐이냐' 이라니까. 아, 그런 모든 걸 말하니까 '그런게 아니라   뇌의 세포가 모세관이 뭐이 하나. 혈관이 하나 가는게 터져 가지고서 그게   피가 그리 나오지 안했으면 참 큰 고장 났을 터인데 그 피가. 내나 막   연결줄이 있으니까 고 선을 타고서 그리 귀로 나온 겁니다.' 그래 치료를 해서   주면서 그때 말을 해요. '그러면 이게 어찌 되느냐? 이 관이 다시 낫느냐?'   '아닙니다. 그 터진 거 그거는 못 낫습니다. 그거는 피만 중단되고 그저   헌데만 아물어지지 그 관이 새로 다시 회복되는 건 아닙니다.' '그라면 어찌   되느냐?' 그라니까 그때 말해요. '많은 관들이 있는데 고 관이 터졌으면 다른   관으로 고것이 연결돼 가치고서 다른 관으로 연결돼 가지고 처음에 안 터진   것만은 못하지마는 그것이 따로 다시 딴 관으로 이렇게 연결이 돼서, 안 터진   것만은 못해도 지장 없이 그렇게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말 해. 그때   내가 그걸 들었어. 그래 내가 그 말 들을 때에 내가 생각하던 이치와 꼭 같기   때문에 '장로님 맞습니다. 내 마음에도 그렇다고 생각이 돼집니다.' 이라면서   이치가 다 같다 말이오,   뭐이라도 말이오, 이 안에 있는 세포 한 개도 제가 어짜든지 자기를 호화롭게   자기를 아름답게 자기를 위엄스럽게 권위있게 영광있게 모든 것이 다   알아주도록 하려는 그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의 본능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홍포입은 이 부자가 이렇게 산 것이 그 사람으로서 잘못 산게   아니고 잘못 산게 아니고 그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그 피조물들의 본능대로 잘   살았습니다. 잘 살았소. 잘 살았는데. 그 사람들은 타락한 사람으로서 잘   살았소. 타락하고 난 다음에. 원죄라 하는 것이 뭣이 원죄냐? 원죄는, 처음에   타락하기 전에는 자기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이었어.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위주로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살았는데,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 중심이 자기중심으로 바꿔겼고 하나님   위주가 자기 위주로 바꿔진 그것이 원죄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사는 것이 그것이 타락한 사람으로서 바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택자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를 호화롭게 자기를 위해서   연락하는 그런 일을 안 하는 그자는 등신이요 병신이요 그 자는 미친   자입니다. 그 자는 미친 자라. 자기가 자기를 어짜든지 아름답게 꾸밀라고   자기를 호화롭게 아름답게 호걸스럽게. 또 모든 것을 다 갈아서. 밭에 있는   채소도 이거 자기를 위하도록. 또 사람도 자기를 위하도록. 사업도 자기   위하도록 모두가 자기를 위하도록 하려는 그것을 해야 생명이 붙어 있는   사람이지. 생명이. 자연 생명이 붙어 있는 사람이라. 새도 그라고 곤충도   그라고 동물도 그라고 다 그런 것이 뭐이냐 하면은 자연 생명을 가진 것들이라   그말이오.

  그런데 왜 사람은 잘못됐다 하느냐? 사람은 그런 동물과 같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처음에 지으실 때에, 동물은 다, 새는 새로 짓고 곤충은 곤충으로 짓고   식물은 식물로 짓고 이래 하나님이 지으신 거와 같이 사람을 지었으면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이 그것이 옳은 일이오. 옳은 일이요 하나님은 그걸 정죄하지   안합니다. 옳은 일입니다. 여게 꽃 한송이는 꽃 한송이 그것이 전력을   기울여서 꽃 한 송이 자체가 자체를 위해서, 어짜든지 자체를 위해서 아름답게   강건하게 이렇게 자체를 위해서 이렇게 살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그것이 그 화초로서는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지으실 때에 그렇게 짓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으니까 우리의 근본은 하나님이오.

 하나님은 원형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이기 때문에 하나님 형상과 같은   모형이라 그말이오. 모형은 원형을 자꾸 향해서 가야 그 모형이 온전해지는   것이지, 사람이 무슨 꽃을, 생화를 보고서 꽃을 그린다든지 꽃을 조화로 만들   때에 조화를 만들면은 생화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었으면 그 조화는 못 쓸   조화입니다. 생화와 꼭 같이 된 그것이 조화로서는 제일 잘된 조화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원형이니까 하나님과 꼭 같이 되어지는 것이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의 향방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 본받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고, 우리가 닮아 가는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고 이와 같이 있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하다 그말이오. 이것이 당연하다 그말이오.

  당연한테, 배암에게 꼬여 가지고서 이것을 버리고서 그만 자기중심으로   들아갔습니다. 이래서, 에덴 동산에서 쫓아낼 때에,   이것도, 여러분들이 들으면 얼마나 하면 알지 몰라. 몰라. 오늘 아침에 하는   말도 이것도 신학교, 저 신학 박사라도, 신학 박사에게 물어 봐. 아는가. 우리   진영에도 신학 박사, 우리 진영에도 신학 박사 둘 있지 앉아? 물어봐요,   아는가. 여게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셔서 모든 만물에 대한 지식이 다 포함 돼   가지고 만물에 대한 원리를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식물학이나   동물학이나 그런 걸 배우지 안했어. 안 했지마는서도 하나 깨달으면 이치가   그러해.

  이러니까, 꽃이 꽃으로 살고 짐승이 짐승으로 사는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자기 본질대로 사는 거 그것이 바로 옳은 생활인데,   사람은 하나님의 모형으로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형으로 사는 것이   정상인데 하나님의 모형을 말고 제 자체의 독립성인 그런 자체의 모양을,   자기는 자기대로 독립적으로 자기는 스스로 있는 자존자처럼, 하나님과 관련   없는 제 모양 제 생각 제 욕심 제 중심, 하나님에게 속하지 안하고 자체대로의   독립한 그것이 원죄라 그말이오. 그게 원죄라. 그러니까, 타락한 사람으로서는   그대로 사는 것이 옳으니, 이제 '사람이 육체가 됐다' 그 말은, 육체가 됐다   말은 영이 없는 동물같이 됐다 그 말입니다. 동물같이 됐으니까 동물의 사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이 온다 그거요.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가 여게서, 타락한 사람은 홍포 입은 부자처런 자색   옷과 고운 베옷으로 자기를 아주 호화롭게 꾸미고 날마다 잔치 해 가지고서   자기를 즐겁게 하는, 잔치하는 것은 자기를 즐겁게, 잔치하면 잔치애와   참석하는 사람은 먹고 놀면서 자기를 즐겁게 하지 않습니까? 즐겁게 한다   그거요.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말이오. 우리도 불택자로 안 믿을   때에는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안 믿는 사람이 이 두 가지 호화롭게 하고   연락하는 이것이 없으면 아무짝도 못 쓰는 인간이오. 아무짝도 못 쓰는   인간입니다.

  안 믿는 사람 가운데는 자기를 위해서 어짜든지 될 수 있는 대로 옷이라도 좀   좋은 거 값비싼 거 좀 아름다운 거, 또 어떤 사람은, 옷 그걸 가지고서 하는   그 단계를 좀 초월한 사람은 옷 그것보다도 오히려 옷을 값비 싼 옷을 안 사고   값 헐한 험한 옷을 사 입고 그 돈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제나 뭘 이래   함으로 말미암아 그 명예라는 옷, 명예라는 옷, 명예라는 옷, 영광이라는 옷,   다른 사람의 칭찬이라는 옷, 이렇게 덕이라는 옷, 그러니까, 모두 하되, 모두   하되 그것이 종류가 달라서 처음에는, 처음에는 주먹 가지고 자기 세력을   잡을라고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주먹 가지고 하는 그거는 아주 천한 거 이거   깡패밖에는 안 되니까 그걸 논리로, 말로 가지고 해 가지고, 논리로 가지고서   자기가 이재 승리할라고 이라다가 나중에는 논리보다도 모든 작기가 기반을   닦아서 이렇게 모든 건설해 놓은 자기의 건설 시설 자기의 지위나 권세나 이   모든 것을 이래 만들어 가지고 할라 하는 거, 그러면, 차차 차차 등수가   다르고 모두 가치들이 달라지고 이렇게 방편들이 달라져 그렇지 자기를   호화롭게 안 하는 사람은 못 쓴다 말이오.

  그러면, 첫째 중요한 것은 믿는 사람이 무슨 신앙면을 가리지마는서도   일반적으로 탸할 때에, '그 사람이 자기 발등의 불이나 끌 줄 아나? 자기가   얼마나 자기를 호화롭게 할 줄 아느냐? 그러면, 그 사람이 직장이 뮈이며   월급이 얼마나 되며 자기 지식이 얼마나 되며 그 사람이 사람이 또 똑똑한가?'   학교 가서 조사를 해 가지고서 '그 지능지수가 얼마나 됐으며 공부는 얼마나   했는가' 이게 다 뮈이냐 하면은 자기를 호화롭게 할 수 있는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호화롭게 하고 있는지 없는지, 자기를 위해서 연락을 하고 있는지   그건 묻는 것입니다. 그 실력을 묻고 있는 것이오. 안 믿는 사람온 안 믿는   사람 그 실력을 묻고 있는 것이오. 이 두 가지 없는 사람이면 안 믿는   사람으로 아주 제일 천한 인간입니다. 이러니까 이게 옳다 그말이오.

  옳은데, 인류 시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엉상대로 된 정상적인 사람이 변질이   됐소. 배암으로 말미암아 변질됐어. 하나님 중심이 자기중심으로 변질됐고,   하나님 위주가 작기 위주로 변질됐고, 하나님에게만 얻고, 하나님에게만 얻고   하나님에게 얻어서 모든 사람에게 주는 이것이 우리의 정상이었는데 타락해서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끌여 들여 가거고서 자기에게 끌어 들이는 이것을 하는   완전히 변질된 타락이기 때문에 타락한 사람으로서는 그 생활이 옳다   그말이오.

 그러나 우리는 거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참 타락에서  본자리를 회복했습니다. 본지위에서 타락했는데 본지위가 우리는 회복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났고, 하나님의 모형이 되어졌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되어졌습니다.

 이러니까 이제는 이 홍포 입은 부자가 자주빛 옷과 고운 베옷을 입어 자기를,  호화롭게 연락하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회복이 돼서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사는 우리가 되어서,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시요 우리는 하나님의 몸이  이래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정상 생활은 어떤게 우리의 정상 생활인가? 우리의  정상 생활은, 우리의 정상 생활은, 우리 주인이 주님이시요 우리가 주께  속했습니다. 또 우리는 주님 중심자가 됐습니다. 주님 위주자가 됐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의 우리요 내 중의 내요, 나는 껍데기요 내 중의 내가 주인이요,  내 중의 나, 내가 없을 때부터 있어 가지고 나를 있게 한 나. 나의 근원인 나,  나의 원인인 나, 나의 창조인 나 이게 하나님이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 증심 하나님 위주로, 하나님이 내 안의 나로, 내 안의 나, 내  안의 나인 나의 근원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살기를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호화롭게, 자주빛 붉은  옷을 입어서 아주 호화롭게 꾸미는 거와 같이 우리는 이 주님을 이렇게 호화롭게  꾸미는 것이 그것이 우리 정상의 할 일입니다. 그가 자기 몸을 호화롭게 하는  거와 같이 우리는, 우리는 뭐이냐? 우리를 가리켜서 주님의 몸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다 연합해 가지고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간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간다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어  간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어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는 것은, 한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으니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지체라. 그러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속한  사람이요 교회 안의 한 지체라.

 이래서 그 홍포 입은 부자가 자기를 참 기쁘시게 호화롭게 만드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제 알아 듣기 쉽도록 말한다고 해서 '주님에게 좋은 옷을  꾸며 입혀서 주님을 영화롭게 합시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고거 비유입니다.

네. 주님에게 우리는 좋은. 아주 아름답게, 아름답게 주님을 장식해야 돼. 곱게.

주님을 아주 아름답게 참 호화롭게 주님을 꾸며서 누가 봐도 '아, 참 잘났다!  천상 천하에 제일이다! 제일 아름답다! 제일 영광 있다! 제일 보니까 제일  인기가 있다. 제일 좋다' 이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리는, 여게서 기억하기 쉽게  '주님에게 좋은 아름다운 의복을 해서 주님에게 입혀서 주님 몸이 아름답도록  그렇게 하자' 고걸 기억하십시오.

 계시록에 보면은 성도들이 압고 있는, '예복을 입고 있으니 세마포 옷을 입고  있더라 세마포 옷을 입고 있는데 그 세마포 옷은 성도의 옳은 행실이 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왜 세마포로 비유했는고 하니, 마포라 말은 베라 말인데, 삼베라  말인데. 이 베를, 옛날에는 삼 그런 거, 모시 그런 거만 있지 요새 이런 화학사  그런게 없는 때라 그말이오. 이런데 그 날이라는 거 말이오. 베 짜는 거 보면은,  저는 베 짜는 걸 많이 봤어요. 어머니는 어떻게, 뭐 베를, 길쌈을 거기 백여 호  되는데 제일 많이 해요. 많이 짜요, 이러니까 베 짜면 늘 베틀에 있기 때문에 클  때 베틀이 미웠어, 베틀 저놈만 없어져 버리면 좋겠다.' 보면 그저 그만 젖 먹여  눕혀 놓고 또 거석 하고 했는데, 그 날이 말이오. 날이 쭉 지단하게 백자 날도  있고. 백자 날을 할 때도 있고 팔십 자 날을 할 때도 있고 이래 쭉 해 놓고 난  다음에는 이래 놓고 이래 북을 가지고서. 북을 가지고서 이래 을리면 쪽  벌어지면 그 북을 이쪽으로 내면 또 한 씨가 이렇게 들어가고, 이래 지단하이 해  놓은 건 날이라 하고 이건 씨라 해요. 또 그라고 바디부터 턱 치고난 다음에 또  이라면 또 달리 열리면 또 이리 북이 오면은 왔다 갔다 하면은 그렇게 씨가  하나씩 둘씩 짜여 가지고서 이와 같이 베가 되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생활에 일생이라는, 자기 일생이라는 그날이래 기단하게  해 놓은 거는 뭐이라요? 씨? 날, 또 옆으로 이래 하나씩 자꾸 이래 자꾸 얽어  나가는 거는 뭐이라요? 씨, 날, 씨. 이런데, 일생이라는 그 날에다가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그 자기의 행위의 씨로 가지고서 자꾸 이렇게 짜서, 그러면, 한  시간 안에 행위가 만일 잘못됐으면 거게서 고장이 났으면 그걸 가리켜서 이름을  뭐이라 합니까? 자 아는 사람. 여자 들은 알 건데. 얼진다 하지요. 얼. 얼, 얼이  졌다 그말이오. 흉이 졌다 그말이오. 요새는 공장에서 나오는 모두 양복  기지라든지 그런 거 아주 보면은 싼 거 있습니다. 보기에는, 사람 보기에는 꼭  같은데 실은 반값도 안 간다 말이오. 반값도 안 가. 반값이 안 가. 그거 뭐이냐?  보면은 검사하는데 조그매만 얼이 가도 고것 때문에 검사에 불합격이라.

불합격이면 그거는 내버리는 거라. 내버리니까 내버리는 것을 갖다, 이것을 돈을  얼마 주고 가 가지고서 이렇게 파는게 있다 말이오.

 그와 같이, 얼, '옳은 행실이라' 자기 하루 하루의 그 생활을 이래 이리 살고  저리 살고 자꾸 하루 하루 엮어 나가는 이 생활에 흠없이 해서 그것으로  가지고서. 자기의 그 행실을 가지고 영원토록 하늘나라에서 입고 있다해서  '세마포 옷은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보면은 그  베를, 옛날에는 저 보면 스물 한 자인가 두 자가 한 팔이라요, 삼베는 그러면,  스물 한 자를 이래 딱 끊어 놓고 난다음에 이제 제 아버님이 검사를 합니다.

이래 쭉 보면은 이래 보고 '아, 여게는 요게 얼이 졌다.' 그러면, 그 얼진 거  그걸, 얼이 졌으니까 고거는 얼진 걸 따로 내서 요거는 아마 얼마밖에는 못  받겠다 고래 가지고 따로 가려 놓고, 요거는 얼이 하나도 없다 요래 가지고서  고렇게 만드는 것을 봤더라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이러니까, 우리가 일생 동안 살면서 우리가 고만 일 년이든지  이태든지 몇해든지 허탄한 걸음 걸은 거는 그거는 마구 얼이 져서, 얼이 져  가지고서 자기는, 베를 짤라면 베로 가지고 왔다 갔다 이래야 되는데, 베 짜다가  집북더기를 넣어 가지고서 짜다가 또 저게 나무 꼬쟁이를 넣어 가지고 짜다가  이래 가지고서 이래 짜 놓으면은 그 베가 짜이기는 짜였지마는서도 나중에  보면은 엉망이고 그거는 아무짝도 쓰지 못할 것이라 말이오. 우리가 하늘나라  입고 가서 있는 옷이 다 그렇습니다. 자기 행위를 영원히 입고 있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이러니까, 참 그 행위를 잘못해서 입은 그것은 생각하면 기가 막혀. 나는 여게  와서 얼마 동안 내가 어제도 말했지마는 참 마음에 불만 불평을 품은 것은 '왜  내가, 하나님께서, 여게 서부 교회 안 올라고, 내가 도시에 안 올라고 그렇츰  애를 쓰고 이랬는데, 하나님께서 기어코 ○○교파에 있는 머리되는 그 여덟  목사님이 연명 날인 해 가지고서 ○○○ 목사님 참 그런 점잖은 어른이 두  번이나 나한테 데리러 왔고 다른 집사들이 오고 이래 가지고서 기어코 부산에  끌고 와 가지고서 날 이렇게 엉망을 만들었는가' 원망 불평이 있다 말이오. 원망  불평이 있어. 너무 과거를 생각 하니까 기가 막혀서. 원망 불평이 있으나 이제  그것을 하지 안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전지한 지혜로 사랑으로  내게 가장 좋은 것을 해서 나는 이해 못 할. '왜 이러는가?' 이해 못 하는 것도  내가 이해 못 하지 당신은 전지한 그 지혜로써 당신의 영광의 찬미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만들었다는 것을, 그 폭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회개를 했습니다.

 이러니까,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 했는데 이 홍포 입은 부자가,  여게 자색 옷과 고운 베옷, 고운 베옷을 이렇게 입었는데 여게서 그는 그런 걸로  가지고서, 고운 베옷을 가지고 자기를 장식했는데, 우리도 주님의 피공로를 알기  전에는 그렇게 살아야 될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인이 바꿔 졌어. 주인이  바꿔졌기 때문에, 내가 과거에는 주인이었는데 이제 주님이 내 주인이라. 주님이  주인이라. 주님이 내 중의 내라.

 이러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주님에게 고운 베옷을 만들어서 주님을 호화롭게  입히는 우리가 돼야 되겠다, 주님에게 고운 베옷을 짜서 입혀야 되겠다. 내가  지금 주님에게 고운 베옷을 짜서 입혀야 되겠는데 내가 오늘 이 행동을 하면은  이 행동은 이색진 행동이기 때문에 이건 잘 못된 행동이라. 이제 성경에는  보면은 베를 짤 때에 이색이나 삼색이나 그런 걸로 짜지를 말라 했는데 이제  요새는 얼릉덜룽해야 좋아합니다. 얼룽덜룽해야. 이게 전부가 다 타락이요  사람들을 전부 망치게 하는 마귀의 수단으로 굉장히 만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내가 주님에게, 예를 들면은 내가 손이 돼 가지고 손 하나를  아름답게 만들라고 하면은. 손 하나를 아름답게 만들라고 하면 이손에 뭐 반지도  끼우겠고 팔찌도 또 끼우고 하는 것처럼, 나는 하나님의 어느 부분을  담당했든지, 자기는 하나님의 진실한 부분을 담당했든지, 거룩한 부분을  담당했든지, 사랑의 부분을 담당했든지, 관대한 부분을 담당했든지, 이해하는  부분을 담당했든지, 화목의 부분을 담당했든지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담당시킨  것이 따로 있습니다. 자기는 구제하는 구제를 담당했든지, 교훈하는 교훈을  담당했든지, 어느 부분을 담당했든지 담당한 고 면을 자기가 해서 고것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아, 아름답다. 아름답다.' 그 사람의, 고 사람 하는 고  행동 고걸 보고서고 사람으로 인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주님을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모든 사람이 있다가 '아, 참 그거  보니까 참 감탄할 만하다. 예수교가 나는 나쁜 줄 알았는데 아무것이 고면  보니까 예수교가 천하에 제일 종교 종교다.' 참 예수님을 참 믿을 만한 도다.

'뭘 보고?' '아무것이 어떤면 보고.' '또 너는 뭣 보고?' '아무것이 그 사람의  참 사람에게 대해서 관용하는 그면 보고.'

 손 양원 목사님이 자기 두 아들을 죽인 그 원수에게 대해서 그렇게 관용하고  환대하게 그를 오히려 구원하기 위해서 오만 노력을 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사랑의 원자탄이라 그렇게 이제 모든 사람들이 다 말하지 안했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사랑의 옷을 입혔다 말이오. 손 목사님이 주님의 사랑의 옷을 입혔소.

또 그분이 순교당할 때에는 그렇게 잡혀서. 죽으러 가면서도 거게서 여러분들  여게서라도 지금이라도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지옥을 면하고 하늘나라 간다고  외치니까 총부리로 가지고 입을 때려서 그 이도 얼마 남도 안했는데 이가 다  부러지고 입에서 피가 나오고 이래도 끝까지 외친 거기에서 예수님의 사랑의  옷을 입혔고 예수님의 이 구속의 도리의, 예수 믿으면 구원얻는다는 전도의 옷을  입혔다 말이오. 전도의 영광의 옷을 입혔어. 거게서 아마 모르겠습니다. 가서  보면은 그 죽은 사람 가운데에 '아, 이미 죽기는 죽으니까 나도 나도 예수  믿겠다. 나도 이제까지 예수 믿는 걸 반대' 아마 예수 소식 듣고 핍박한 사람들  다 예수 믿을 것이오. 핍박한 사람은 그때 다 믿었을 거라. '아, 이렇게 죽는데  저렇게 죽어 가면서도 저라면서도 외치는 거 보니까 참 저야 말로 참말로 저기  생명이 있기 때문에 저렇다' 해 가지고 그 사람들이 감탄해서 예수 다 믿으니  이제 가 보면 기이한 일이 있을 거라. 그 사람들이 다, 사형받으러 가는  사람들이 손 양원 목사님의 그 전도하는 소리를 듣고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말이오. 우리가 가서 보면 놀랄 거라.

 스데반이 돌에 맞아서, 돌에 맞아서 치어 죽으면서, 죽으면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하늘문이 열렸는데 주님이 서서 나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이라는데, 스데반 얼굴에 광채가 나고 마지막에 마지막 기도가 뭐라  하는게 아니라. 이들이 알지 못해서 나를 돌로 치는 것이니 이것을 죄로 정하지  마시고 알지 못해 그런 것이니까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이 주님을 믿어서  구원얻도록 해 달라는 그 간곡한 그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는 그 기도를 하고  떠나는 걸 보고 그 사울이가. 사도 바울인데, 사도 바울 되기 전에 사울이가  속에 '이상하다' 하면서 다메섹으로 죽이러 가기는 가지마는서도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일라고 가다가 가는 도중에 거게서 자기는 자각했다  말이오. '아, 이상하다 이상하다' 할 때에,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니까, 스데반  하는 일을 보고서 이상하다 하니까 그 사람은 심령이 차차 밝아지고 옳은 것을  향하게, 되어졌을 때에 그때에 주님이 말하기를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이라니까 사울이 깜짝 놀래 가지고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때에 그 앞에 꺼꾸러졌습니다. 그 때에 그만 그 시간에  주님의 빛을 보고서 사울은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눈이 멀었습니다. 눈이 먼  그것을 빛에 비취어서 어두웠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마는서도 제가 경험하는  대로는 너무 놀라고 너무 기막히고 너무 후회되는 일이 있으면 앞이 캄캄하고  눈이 멉니다. 눈이 멀어. 우리도 그런 걸 많이 봐요. 눈이 멀어. 눈이 멀다가 참  오래 동안 차차 차차 회복이 돼져, 눈이 멀면. 그래 가지고서 사울이, 사울이  다메섹에 가 가지고서, 예수 믿는 사람 죽이러 간 그 사람, 예수 믿는 사람  죽이는데 선봉되어 있는 그 사람이 다메섹에 가 가지고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니까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저거 미쳤다. 저게 예수 믿으라고 증거하는  날이면 모든 사람이 예수 믿을 거다. 저놈, 사울 저놈을 잡아 죽여야 되겠다.'  온 성안에 있는 유대인들이 사울을 잡하 죽일라고 이렇게 탄압을 더해서  뭉쳐지니까 사울을 광주리에다가 담아 가지고서 성 들창문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달아내려서 들창문으로 달려 내려와 가지고서 아라비아로 도망 가  가지고서 거기서 삼 년 동안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그라고 난 다음에 나와서  복음을 전한 것이 사도 바울입니다.

 이러니까, 손 양원 목사님 그 양반이 그런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우리가 지금 가서 죽으러  가는데 지금이라도 예수 믿으면 다 천국 가고 지옥 가지 않습니다.' 하는 그  말을 듣고서 예수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라 그말이오.

 십자가에 못박혀 가지고 형틀에 달렸는데 그 강도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나라로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습소서' 하니까 주님이 있다가 말씀 하시기를  '너와 나와 오늘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되기 때문에,  믿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당장 된다 그거요. 암만 여러 수십 년을 믿어도  믿음이 없을 때에는 우리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믿을 때에는 그 능력이  와 가지고, 지극히 큰 능력이 와서 우리에게는 믿는 고 시간은 구원이 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손 양원 목사님은 그렇게 전도의 아름다운 채색 옷, 전도의 호화로운  옷을 만들어서 주님에게 입혔고, 사랑의 옷을 만들어서 주님에게 입혔고, 욥은  인내의 옷을 만들어서 주님에게 입혔고, 요셉이는 그렇게 참 호호막막한 참 이해  못 할 일을 만날 때마다 '주님의 인도는 진실하시다. 주님의 인도는 절대  신실하시다. 주님의 인도는 절대 안 걸어 갈 순서를 걷지 않는다' 하는 것을  그분이 꼬박꼬박 배반치 안 하고 따라갔던 그 결과에 총리대신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님의 인도는 요동치 안하고 주님의 인도는 틀림이 없다. 주님의  인도는 우리에게 잘 못 인도하는 것이나 손해가는 데로 인도하는 일이 없다.'  주님의 인도의 그 신실하심의 아름다운 광채의 옷을 요셉이가 만들어서 입혔다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는 기억하기 쉽게 이렇게 내가 비유로 말하는 것이니까 나는 어느  면으로. '아, 나는 층층 시하의 자유 없는 여기에서' 아랍 나라의 포로 되어  있는 한 계집종. 계집종이 거게서 얼마나 주님에게 영광돌릴라고 애를 써서  조심해서 살았든지 아랍 나라의 군대 장관 이 아랍 나라의 군대 장관이 뭐꼬,  이름이? 나아만이지? 나아만 군대 장관 집에 있었는데 온 전국이 치료할라 해도  치료를 못해서 고민하고 있으니까 그 계집종이 있다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는  하나님의 선지가 계신데 그 선지한테 가면 나올 건데요' 이라니까, 그 여종의 말  그런소리를 어찌 듣겠소? 유대 나라를 다 깔보고 있는데. 그 여인이 일생 동안  얼마나 진실되게, 얼마나 진실됐던지 그 여인의 말은 이제까지 거짓 말이 한  마디도 없었다 말이오. 진실된 말 했기 때문에 '아, 그러면, 너거 나라에  그러냐?' '예 있습니다.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으니까 가면 낫아 주실  것입니다.' 그만 그 여인의 말에 대장도 움직였고 그 나라의 왕도 움직였고,  편지 써 가지고 예물 가지고서 보내지 안했습니까? 그 여인은 자기의 진실로써,  진실이라는 진실이라는 그 진실의 그 아름다운 영광의 옷을 만들어 가지고서  주님에게 입혔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기억하고, 우리가 각각 받은 은혜가 다르고 직책이  다르니까, 나는 어떤 면으로 주님에게 영광을 돌릴까, 주님을 영화롭게 할까.

'아, 너 보니까 주님이 참, 너거 주는 참 영광의 주다. 너 보니까 너 보니까  너거 주는 참 진실한 주로구나. 너 보니까 너거 주는 정직한 주로구나. 너  보니까 너거 주는 참 사랑의 주로구나. 너 보니까 너거 주 너거 믿는 도는  화목의 도로구나' 이렇게 해서 어쩌든지 우리는 주님에게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서 입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을 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각각 자기 생활에서 우리는 어쨌습니까? 우리가 우리로 인해서  주님에게. 주님은 옳은 주님이신데 주님에게 흉한 이름을 입히지 안했습니까?  '너 보니까 예수교는 악한 도요 몹쓸 도다. 너 보니까 예수교는 도둑놈의 도다.

남의 돈 떼먹고, 네 보니까 예수교는 무례한 도다.'  어데서 한 장 편지 왔는데. 그 편지대로 그런지 안 그런지 내가 ○○○집사한테  말하기를 어떤 집사님인데 그거 속히 정리해라 했는데, 정리를 안 하면 제가  불러 가지고서 그 내용을 조사할 것이고. 그 내용을 조사해서 법적으로 정리해야  될 그런 일이면 정리해야 됩니다. 정리할 수 있으면 정리 안 하면 회개 안 하는  사람이오. 그래 가지고 하나님 영광을 가리지 앉습니까? '아, 내가 생각해  보니까 이럼으로 인해서 하나님에게 욕이 돌아갈 것이라서 내가 이것을  회개한다' 하면서 정리할 때에 영광의 옷을 주님에게 입히는 것이 된다 그거요.

우리가 행동 나쁘게 해 가지고서 주님에게 얼마나 욕을 돌립니까?  이러니까, 주님의 그 영광의 옷에 만신창으로 구멍을 막 뚫어놨다 말이오.

구멍을 뚫고 거기다가 환칠을 해 가지고서 이와 같이 예수님을 얼룽덜룽하이  아무짝도 쓰지 못할 예수님으로 이렇게. 예수교로 만들어 놨으니깐 우리가  그것을 다 회개해서 그것을 다 색을 탈색해서 지우고 흠을 다 메워서 아름다운  호화로운 의복으로 주님에게 입혀야 되겠다, 내가 주님에게 얼마나, 주님을  얼마나 흉하게 이렇게 주님에게 모든 흉한 흠점을 지웠으며 이렇게 주님의  영광의 옷에다 이렇게 못 쓰게 불 구멍을 내고 이 모두 흠을 지웠는가 이것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알기 쉽게 이건 생각하면서 회개하고, 이제는 그걸 회개해서  주님에게 영광이 되어지도록 영광의 옷을 주님에게 입혀야 되겠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알기 쉽게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러니까, 타락한 사람은 제가 중심이기 때문에 그래 사는게 옳고.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으로써 주님이 우리 중심이요 주님이 우리 머리요 주님은 우리  중의 우리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몸이요 그는 우리의 머리요,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요 우리는 하나님의 몸이 됐으니까, 몸이 됐으니까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몸을 위해서, 하나님의 몸을 위해서. 내가 나를. '아, 그 사람 보니까  사랑의 사람이라, 사랑의 사람이라. 그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라. 그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라. 아, 그 사람은 참으로 정직한 사람이라. 그 사람은 관용한  사람이요 관대한 사람이라. 그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라. 의로운 사람이라.'  그러면, 내가 의로운 사람이라, '저 예수교인 그 사람 보니까 예수교는, 그 사람  보니까 거룩한 교라, 성결한 교라' 그러면 내가 그 사람니까? 이렇게 되는 것이  뮈입니까? 주님에게 뭣을 입히는 것입니까? 예수교에다가 뭘 입힙니까? 예? 내가  만일 다른 사람이 볼 때에 '아, 그 사람은 참 세상에서 불 수 없는 거룩한  사람이라'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면은 예수님에게 무슨 옷을 입히는 사람입니까?  예? ○○○ 선생 거룩한 옷을 입히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혀. 거룩한  옷울 입히고 정직한 옷을 입히고,  남의 돈을 떼먹고 주지 안하고 이와 같이 잔인하게 행동하면은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예수님에게 뭐 입힙니까? 내가, '저놈 도둑놈이다' 했으면 예수님에게  무슨 옷을 입힙니까? 무슨 옷을 입히요? 말 해 보십시오. ○선생 예수님에게  무슨 옷 입히요? 도둑놈 옷을 입히지. 예수님을 보고 '저 도둑놈이다.' 도둑놈,  내가 도둑놈이 됐으니까, 내가 도둑놈 됐으니까 '예수 믿는 저거, 예수 믿는  저건 도둑놈이니까 예수교는 도둑놈의 도다. 예수 믿는 사람은 도둑놈이다'  이라니까, 내가 도둑놈 되니 내가 도둑놈 된 것이 예수님에게 무슨 옷을 입힌  것이 됩니까? 큰 소리로 모두 한번 해 봐요. 도둑놈 옷 입히는 것이지, 도둑놈  옷 입히는 거.

 알기 쉽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니 이걸 깨달아서 우리가, '날마다 호화롭게  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어 자기를 호화롭게 했다' 하는 여게서 홍포  입은 부자는 그렇게 했는데 우리는 그와 같이 모든 것을 꾸미는 것이 그와 같이,  자기를 위해서 홍포 입은 부자는 꾸몄는데 우리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내가  그와 같이 해서 주님에게 호화롭게 주님을 꾸며서, 내가 주님에게 호화로운 옷을  입히는 사람, 호화롭게 옷을 입히는 사람 알아 듣겠습니까? 이해가 돼요? 내가  도둑놈 되면 주님에게 도둑놈 옷을 입히는 것입니다. 내가 악독하고 잔인하면은  악독하고 잔인한 옷을 주님에게 입히는 사람입니다. 내가 거룩하고 온전하고  깨끗하면 내가 거룩하고 온전하고 깨끗한 옷을 주님에게 입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내가 깨끗해지면 주님의 몸이 아름답게 단장이 되어져.

내가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그런고로, 우리는 이모 저모를 담당한 것이 각각  다르니까 나는 어느 면을 담당했든지 나는 내가 아름답게 깨끗하게 해 가지고서  주님의 몸에 다가 아름다운 옷을 입히는 우리가 돼야 되겠습니다.

 그런고로 내가 욕얻어 먹으면 그 욕이 주님에게 돌아가서 내가 욕의 옷을  주님에게 입히는 것이고, 칭찬을 받게 되면 칭찬의 옷을 주님에게 입히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번에 탄일, 성탄 때에는 다 모두 떡국 하십시오. 떡 그런 거  메마른 거 하지 말고 모두 떡국 해요. 일 년에 몇 차례씩 이웃을 대접하는데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는다 합시고 이웃에게 너무나 냉정하지  안했어요? 이러니까, 식구 많이 하면 안 돼요. 많이 하면 저거 식구도 못  챙기니까 그저 많아 봤자 오십 인이 하는게 좋고, 또 뭐 크게 해도 하는 건  자유로 하기는 하지마는서도 해 가지고 도리 도리해서, 떡국 가지고 자가네들  이웃끼리 이렇게 좀 해서 그 사람들에게 좀 대접을 해서 서로 화친도 하고 그로  인해서 친근해서 전도할 그런 형편도 되어지고 이렇게 하도록 요번에 하는데.

주의 하나 시켰습니다. 뭐인가? 시키기를.

 그 말 있어요. 제 술 내고 뺨 맞는다는 말이 있어요. 제 술 내고 뺨 맞는다.

자, 제 술 내고 뺨 맞는다는 소리 들은 사람 손 들어 봐. 제 술 내고 뺨  맞는다는 소리 들은 사람. 이것도 못 들은 사람 많으네. 어데 별세계에 가 살고  왔구만. 우리 한국에 있으면 다 그 소리 다 들었을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차를 탈려거든 특급차를 타지 말아라  제일 완행차를 타라' 그렇게 말합니다. 내가 물어 봤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저거 장모가 말하기를 '야 이 사람아. 차를 타고 다니거든 꼭 완행차를 타고  다니게.' '뭐할라고 완행차를 타라 하더노' 이라니까, '완행차를 타고 다니면은  참 거게서 만물관인데 세상에 만물 박사를 다 만날 수 있다.' 뭐 상인들이,  무식한 서민들이 있기 때문에 속에 있는 거 감출 줄도 모르고 이중 할 줄도  모르고 있는 대로 본 대로 들은 대로 막 품어 재낍니다. 막 품어 재끼니까 이제  거기 가면은, 한 번 서울 가면은 거기서 굉장한 세상을 구경하고 상식을 많이  얻는다 이렇게 말을 해요.

 내가 무슨 말 하다가 이래 갔지? 예? 뭐? 아, 제 술 내고 뺨 맞는다는 말. 제  술 내고 뺨 맞는다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은 술을 한잔 내고, 술을 한잔 내고 난  다음에 '아이구 변변찮은 대접을 할라고 이렇게 시간을 앗아서' 상대방을  생각한다 말이오.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합니다. 참 이렇게 이거 아무것도 아닌  이걸 위해서 이렇게 시간을 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시간을 빼앗아  미안합니다.' 이라면 '아, 그 무슨 말이오? 오늘 참 대접 잘 받았소' 이렇게  말하면서 이렇지마는서도 뺨 맞는 거는 술 한잔 줘 놓고 난 다음에 술 줬으니까  '너 내 술 먹었지' 하고서 뒤에 술 한잔 냈다고 뒤로 저뻥 해 가지고 자세를  고자세를 부려 가지고서 이래 가지고서 '오늘 너 내 술 한잔 먹었지. 또 한잔  내라. 어짜고' 이라게 되면은 '이 자식 뭐 내가 너를 봐서 내가 왔지 술 그까짓  거 얻어 먹으러 온 줄 아나? 더러운 술 한잔 내놓고 잔뜩 쪼를 빼고 고자세  하고, 이 자식아. 그 술값 내가 내.' 탁 자기가 먹은 거 내고. '몇 잔이라?'  술값 탁 내 던져 버리고 가 버립니다. 뒤에 '아니라. 그게 아니라.' '이 자식  그게 아니고 너 같은 놈은 사귈 자격도 없어. 다시 안 사귀어.' 그만 도망쳐  버립니다. 잘난 사람은 그만 떨구어 버린다 말이오  그렇게 하는 그런 고자세로 그런 추접한 일 하지 말고, 야만일수록이 그래요.

야만들은 뭐 조그만한 남을 위해서 봉사 조그만한 것 하고 난 다음에는 그만 그  봉사로써 '내가 이만치 도와줬으니까 날 대접 안 하나? 이만치 뭣을 너를 위해서  희생했으니까 알아주지 않느냐?' 이것이 세상에서 야박한 일이오. 주님은  말했어. '감사치 못한 자에게 대접하라.' 네가 대접할 때에 감사치 못하는  자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자에게 대접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 말에, 말에  어째서 갚는다 했소? 말에 어째서 갚는다 했소? 그거 몰라? 감사치 못한 자에게  대접을 하면은 주님이 어떻게 갚아 준다 했소? 예? 몰라? 말을 눌러서, 말을  눌러 가지고 뽈끈뽈끈 다져 가지고서 내가 너에게 갚아 주겠다 그랬어. 성경에  주님이 말씀 하시기를.

 그런고로, 요번에 성탄 축하 할 때에 그렇게 남한테 추접한 고자세 해 가지고서  떡국 주고 뺨 맞는 사람 되지 말고 겸손히 해서 그래 그 사람들이 오는 것이  이래 참 시간을 내 줬으니까 고맙고 대접한 것이 너무도 허무하다는 그 마음의,  그 마음을 가지고서 그 사람에게 공연히 음식 같지 않은 거 가지고서 시간을  뺏들었다. 손해를 보였다. 그 동안에 왔다가 무슨 낭파나 안 당할까 그렇게  생각할 때에 사람들은 사귀는 맛이 있는 것입니다.

 '아이구. 이렇게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른 가 보십시오. 제가 너무  귀한 시간을 뺏들어서 미안합니다. 혹 저 때문에 무슨 낭파되는 일은 없습니까?'  자꾸 상대방 일을 생각하면서 염려를 한다 말이오. 그러면 그 사람은 속으로  그런게 있어도 '아이구, 아무 그런 일 없습니다. 아무 그런 일 없습니다. 참  오늘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이래 가면서 뒤에 생각하기를 '아, 그 사람은 사귈  수 있는 사람이라,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생각 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알고 다른 사람의 낭파 될 것을 염려를 하고 손해될 거를 염려를 하니까 그  사람은 사귈 수 있는 사람이라' 해서 뒤에 전도가 되지마는서도 그렇지 않으면  도로 수치하고 손해당합니다. 이게 다 잠언이라, 이게 다 잠언. 다 지혜의  말이라요.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어짜든지 주님에게 아름다운 옷을 꾸며서 영광의 옷을  입히자. 주님에게 영광의 옷을 입히자. 정직의 영광의 옷이든지 진실의 영광의  옷이든지, 신실의 영광의 옷이든지, 화목의 영광의 옷이든지 봉사의 영광의  옷이든지, 참음의 영광의 옷이든지. 모든 사람을 관용하는 관용의 영광의 옷을  입히든지. 거룩의 영광의 옷이든지 어쨌든지 내게 부담된 고 내 행위를 아름답게  하여서 주님의 몸을 아름답게, 주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단장하는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홍포 입은 부자에서 그는 그래 했지만 우리는  이제 중생됐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몸에게 단장을 해야 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재독에 많이 참석을 해요. 어제 오전 오후의 설교의 그 뜻을 깨닫기 가 참  어려울 건데, 하나라도 새겼으면, 내가 여섯 대지인가 말했는데 한 대지라도  새기면 기가 막히고 잠이 안 오고 참 거석할 건데 다 개 머래 먹듯 다 씹어서 다  내트리기 때문에 안 자란다 그말이오. 안 자라. 그래 나 이제 작정했어. '이  설교를 해서 구경만 시킬게 아니라 한 설교를 백 번을 해도 꼭해서 실행을  시켜야 되겠다. 이래야 교회가 부흥이 되고 모두 살지 이래 가지고는 안 되겠다'  하는 그것을 내가 확실히 내가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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