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


선지자선교회 1983년 12월 11일 주후

 

본문 : 벧전 1:3-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예수님께서 모든 죽음에 소속한 그 초보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밟아서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우리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은 단순히 그 죽으심뿐이 아니고 죽으심은  하나님으로서의 가난해지시고 낮아지시는 거기에서 부터 시작돼 가지고 차차  차차 점점 죽음으로 가까와져 가지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절정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하는 그것만 단순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 시작이 근본 하나님으로서 모든  부요가 다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차차 차차 희생되셨고 그의 권세와 영광과  존귀가 다 희생돼 가지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그 죽으심의 절정으로  완성을 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할 때에는 우리는 영광도 생각해야 되고  권세도 생각해야 되고 존귀도 생각해야 되고 지위도 생각해야 되고 모든  평강이나 쾌락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 것이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차차 차차 하나씩 둘씩 희생되기 시작해 가지고서 마지막에는 십자가 상에서  완전 희생이 끝났고 또 우리의 대속도 완성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오전에 말한 대로 두 가지 대속의  죽으심입니다. 하나는,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신 그 죽으심입니다.

형벌은, 죄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그 법칙을 어긴 것이 죄요. 또 불의라는  것은 제 자율대로 제 주관대로 제 사욕대로 제가 저를 주장해서 산 그것이 모든  불의의 죄악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을 모셔 섬겨 살지 아니하고 제가 왕이 돼  가지고서 제 중심으로 산 그것이 죄악입니다. 이 세 가지 죄악의 모든 벌을  담당하시기 위해 가지고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 예를 든다면 부요하기 위해서 죽으신, 죽어진, 우리가 부요하기 위해서  범죄한 그 범죄에서 구출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모든 부요를 내놓고  가난해지심으로 우리가 대속(이)된 것입니다. 우리가 높아질려고 함으로서  범죄한 그 처의 대속을 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 대신 모든 것을 다 높은 것을  댓가로 내놓고 낮아지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대형의 죽으심,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신 그 죽으심을  생각할 때에 예수님의 하늘 나라에 하나님의 본 지위에 있을 그때부터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의 그 과정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모든 자신의 생애의 과정과  연결시켜서 우리는 회개하는 것이 있어야 되겠고.

 또 한 가지 죽음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행하시기 위해서 죽었습니다. 우리를  대신 행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대신 행한 것은 우리가 죄를 안 짓는 일을  우리가 해야 될 터인데 우리 대신 예수님이 온갖 쓰라림을 당할 때에 죄를 짓지  안하시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에게 복종해야 될 것을 대신해서  주님이 하나님이시지마는 죽기까지 복종을 하셔서 우리를 대속을 하셨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과 화친해야 될 것인데 화친할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화친을 가지시고 화친을 할라고 할 때에 그 화친을 삭제하도록, 이  화친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할 때에 온갖 세상의 악령의 압력과 방해와 유혹이  있었지마는 마지막에 생명은 끊어져도 하나님과 화친의 줄은 놓지 아니하고  죽음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셔 가지고서 화친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대형이 죽음까지 이른 것이고 또 대행이  죽음까지 이르셔서 그래 다 죽음에 도달하기까지 하셔서 비로소 대형이 다 됐고  죽음에 도달하기까지 하셔서 우리를 대신 행하시는 대행이 완료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그 두 가지 죽으심을 죽으셨는데 그  죽으심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무덤 가운데에 장례 지내서, 하나의  정죄받아서 죄인으로 무덤 가운데에 매장된 그것으로서 비로소 완료가 된  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가 아무리 무죄자가 됐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됐고 하나님과 화친한 자가 됐다 할지라도 우리가 화친한 자로 살 수 있어야  되는데 살 수 있는 그 길이 없습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부활이라 하는 것이  없습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부활이 없는데 그 부활의 되어 예수님께서 여시기  위해서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면, 살아나실 때에는 우리를  대신해서 부활의 길을 열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이 사람 몸을 입으시고  사람되어 땅 위에 오셔 가지고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두 가지 죽으심으로 설정해 주신  그 공로의 모든 은택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살아 가지고 그 공로를 입어서 그  공로를 영원히 누리는 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다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희생하신 그 희생은, 하늘에서부터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죽어서 무덤 속에 들어가시기까지의 그 희생의  사랑의 고통과, 또 주님이 하나님으로서의 사람이 되어 영원히 이 대속의 공로를  입어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히 산 자로 살도록 하시기 위한 이 책임을 지시고  부활의 길을 열었습니다.

 부활의 길을 예수님이 여신 것은, 부활의 길을 열었는데, 열어서 그 길로  출입하는 자가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서 살지 안하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그 일을  하게 되면은 일차 타락에 비할 수 없는 지극히 큰 타락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타락의 모든 것을 다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부활은 내나 하늘에서부터 시작된 희생인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희생이나, 그 사랑의 희생이나. 부활, 죽은 가운데서 부활 하시  희생이나 그 희생의 가치도 같고 공로도 같고 희생도 같고 사랑도 같고 그나도  같고 꼭 같습니다. 양쪽에 어느 하나가 조금 무겁고 가볍지 않습니다. 비중이 꼭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지식에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해서  죽으셨다 하는 그것만 생각하고 감사하는 그 사람은 극히 아직까지 어리고 약한  천박한 편벽된 지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주 어린 것입니다.

 그러나 차차 차차 이제 예수님의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을 이어서 속사도  교부들이 있었지마는 속사도 교부들이 그 교리를 다 몰랐고 또 사도들도 성경을  기록했지마는서노 사도들도 하나님이 알려주신 이는 알고 모르는 이는 모르고  이랬는데, 그들이 성경을 기록했지마는 기록한 성경을 자신들도 다 무엇인지 다  모릅니다. 영감이 그들을 통해서 기록했기 때문에, 이제 차차 차차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서 기독자의 성화도 차차 차차 더 성장해가고 또 하나님의 도도  성장함에 따라서 깨달아짐이 점점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마는 그 도를 받는 사람들이 다 성장해 나가는 것이 차차 성장돼  가기 때문에 그 깨달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제까지 여인으로 난 자 중에는 세례 요한 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중심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중심해서  메시야에 대해서는 세례 요한 만치, 이제까지 구약시대에 모든 성도들이 모든  지식이나 깨달음이나 관심이나 가까이 하는 것이나 하는 것이 그 보다 더 주님과  가까이 한 자도 없었고 큰 자도 없었다 하는 것을 가르쳐서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 주님이 그렇게 증거를 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이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떤 걸 가르쳐  말한 것인고 하니 신약 시대를 가르쳐 말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나라를 가르쳐서 천국이라는 것인데, 구약에도 하나님이 주관하셨지마는  구약에는 간접적 주관을 하셨고 사사 시대에 직접 주관을 하셨다가도 간접  주관하시다가 그 다음에는 그들이 배반하고 왕을 세웠기 때문에 간간 간접의  주관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직접 주관을 하셔서, 구약 시대의  영감은 언제든지 외부적입니다. 밖에서 영감이 와서 영감 시켰다가 떠났다가  이랬지마는 예수님의 대속이 이루어진 그 후부터는 영감이 내주해 가지고서  누구든지 택한 자라면 중생시킨 그때에 성령이 그 사람 안에 계셔서 그 사람의  심신과 성령이 가리워지든지 막혀지든지 할 때는 있지마는 언제든지 떠나지  안하고 내주해서 계셔서 역사합니다.

 그러기에, 점점 이 세대에 세상 지식이 늘어나가고 유혹이 많은 그것은 그 많은  유혹을 능가하고 남음이 있을 수 있는 하나님의 도이기 때문에, 그것이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로 점점 깨달아서 기독자들이 장성해지므로 그런 최고  최종이 세상 미혹이요 세상 지식 그런 것을 다 능가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자라감으로 하나님의 교회도 참된 본질적으로 깨달아서 자라 가게 하려  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상하게도 그만 지식이 더하여 간다고 하는 인간 지식이 더하여  가는 이 인간 지식에게 하나님의 지식이 짓밟히는 이런 지금 경향이 많습니다.

이래서 기독교가 세상 지식을 따라서 가는 그 세상 지식을 앞세운 그 하나님의  지식을 뒤로 두는 그것이 죄 중에 큰 죄입니다. 이것이 사망의 근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개혁이 될 때에는 성경 말씀과 영감이면 다이고 성경 말씀 대로  영감대로 살면 다라 이것이 개혁의 어느 시대나 시발이고 개혁이 된지 얼마  후면은 차차 차차 못된 사람들이 거기에서 대가리 노릇 할라고서 인간 지식을  가지고 자꾸 이렇게 휩쓸고 이러니까 차차 차차 성경 지식은 천박해지고 영감은  하나의 무쓴 신화같이 무슨 환상같이 무슨 이상같이 무슨 변질된 사람같이  그렇게 생각해서 영감이라는 것은 아주 부인하게 이렇게 돼 나가게 되기 때문에  점점 개혁해 가지고서 시발된 신학교라면 얼마 안 가서 다 지식화되고  세상화되기 때문에 그 신학교는 타락을 품고 또 세상을 토하고 타락을 토하고  세상을 토해서 내나 세상과 별 다름이 없는 그런 신학으로 그런 교육으로 이렇게  속화시키고 완전히 타락시키는 그 결과를 맺으면, 또 거기에서 또 이제 다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서 더러워지지 안하고 깨어 있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너무 그가 본질적으로 드러나게 환하게 이질적의 것이 되기 때문에,  아주 완전히 변하고 다른 이질의 것어 되어지기 때문에 거기에서 같이 있을 수가  없어서 거기에서 분쟁이 일어나 가지고서 개혁이라 하는 것이 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속화된다는 이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다니엘서 12장에 보면은 '더러운 자는 점점 더러워지고 의로운 자는 점점  의로워진다' 그 말은 말세가 되어 갈수록 진리가 더 첩경적으로 간단 명료하게  진리가 나타나고 또 말세가 되어 갈수록 이 진리를 까뭉케는 그런 복잡하고  어지러운 그런 주장들과 사상들이 많이 일어날 것을 가르쳐서 말씀을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쳐서 음행의 포도주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해 줄 자가 없습니다. 남을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하라  하는 그것도, 그 말씀도 보면 절 먼저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저와 같이 사랑  하지 저를 사랑치 않는 자가 남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아문에,  먼저 자기가 바로 되어야 다른 사람을 바로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로 안  됩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자신을 애껴야 되겠고 자신이 자신을 살펴야 되겠고  자신이 자신을 참 보호해야 되고 자신이 자신을 건설해 나가야 되지 다른 사람이  자기를 건설해 줄 자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애껴야 됩니다. 그라는 데에는  우리에게는 완전한 법칙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영감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살펴야 됩니다. 이 사람을 접촉을 하니까 진리가 멀어지느냐 세상 지식이  멀어지느냐? 세상 지식 그까짓거야 다 멀어져서 하나님의 지식만 가지면 한  내끼도 없어도 좋습니다. 한 내끼도, 하나님의 지식만 가진다면은 인생에게는  만족이지 부족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기에, 세상 지식이 가까와지나 하나님의 지식이 가까와지나? 내가 이  지식을 접하고 보니까 하늘나라가 가까와지나 세상이 가까와지느냐? 어디 소망이  커지느냐 또 내가 보면, 이러니까, 내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하고 기도하는 이  기도가, 아무리 제가 조작배기 기도를 할라고 해도 기도에는, 하나님을 상대하는  기도라면 영감이, 요번 기도에는 내게 영감의 역사가 강하게 역사한다 영감의  역사가 역사하지 않는다 또 이 자리에 와 가지고 이번에 와 가지고서 기도할라  하는 이 자리에는 영감이 내기에 없다 아 오늘은 뜻밖에 의외에도 영감이 나에게  충만하다 하는 그런 것을 자기가 다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평계  하지를 못합니다.

 그런고로, 자기가 사람 접촉도 자기를 위해서 연구해야 되겠고 지식 접촉도  자기를 위해서 연구를 해야 되겠고 모든 사물 접촉도 자기를 위해서 연구를 해서  밤낮으로 깨어서 어떻게 하면 심판을 면하며 어떻게 하면 심판에 합격이 되느냐  하는 그것을 참으로 일편 단심, 하루밤 나그네 생활 이까짓 것도 귀중하다고  하는 것인데 영원 무궁의 생활이 결정되는 것이니까 그만침 가치 있고 귀중한  것인 것을 자기가 느끼고 그 실제로 그렇게 조심하는 그 사람이라야 알아지지  그렇지 안한 자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돕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돕지  안하십니다. 자기를 스스로 건죽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그 건축에 협조를  해 주십니다.

 그런고로, 주님이 두 가지 죽음으로 우리의 대속을 완성을 했습니다. 뭐 죽는  것 가지고서 완성이 아닙니다. 죽는 것 가지고 완성이 아니고 밑에서부터 죽  계속해서 올라온, 올라 와 가지고 마지막에 죽음으로 끝을 마쳤기 때문에  완성이지 죽음 그 하나만 가지고 완성된 것 아닙니다. 죽음 안에 그 안에  하나님께서 모든 걸 내놓은 것도 있고 가난해진 것도 있고 낮아진 것도 있고  모든 것 있어 가지고서 거기에서 비로소, 밑에서 자꾸 이렇게 투쟁도 계속해서  투쟁해 올라 왔고 또 밑에서부터 대속해서 올라 왔고 대형해서 올라 왔고  대행해서 올라 왔고 올라 오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형도 끝을  맺었고 대행도 끝을 맺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피 하나 가지고 되는 것 아니라, 피를 말하는 것은 그 밑에서 저  근원부터 쭉 연상해 가지고 거기에서부터 연결된 것 전부를 다 연합해서 그  절정의 하나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대형의 모든 희생과 희생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인간같이 땅 속에 매장되는 거기에서 완성이  됐습니다.

 비로소 거기에서 완성이 됐고 또 완성됐 지마는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죄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나지  안했으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우리가 죽어 있는데 죄 없는 자로 의로운 자로 뭐  하나님과 화친한 자로 됐다 할지라도 내가 살지 못했으면 그런 좋은 관계만  가졌고 그런 위치만 가졌지 내가 살아 있지 안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죽으심으 우리에게 아무  상관없습니다. 아무 상관없습니다. 또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없으면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부활하셔봤자 그 부활은 우리에게 효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신 것과 살으심은 꼭 같은 고난이요 꼭 같은  사랑이요 꼭 같은 가치요 꼭 같은 우리에게 효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해 놓으신 대형해 놓은 그 대형으로 사죄가 됐고,  대행으로, 대신 행한다 말입니다. 대행으로 의가 됐고 또 대신 화친으로서  비로소 하나님과 연결된 그 생명이 된 이 대속의 공로를 다 지공법과 지성  법에서는 완성을 해 놨지마는 실상 나는 죽어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송장이  감옥에서 죄없다, 죄없다 이래 가지고서 감옥에서 무죄로 석방을 당했습니다.

석방 당해봤자 송장으로 나와 가지고서 지금 송장으로 있으니까 그대로 있으면  썩는 것이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감옥에서 나오고 뭐 재판에서 이거는  무죄하다 아무리 해 놨다 할지라도 이제 그 사람이 벌써 생명이 끊어졌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말이요. 물론 그거는 죄없는 사람이라는 그런 법적으로는 해결이  됐고 제삼자에게는 인정이되다 할지라도 무슨 본인에게 실효가 있습니까? 아무  실효없습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이 그러기 때문에 다시 도성인신하신, 새로  도성인신하신 신인양성일위의 이 희생을 가지고서 다시 부활하신 이 부활을 해  가지고 우리를 책임져야만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제 좀 전에 읽어 본 대로 로마인서 6장에 '그의 죽으심은' 열절에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히 산  자로 살도록,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히 산 자로 살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로 하는 데에는 죄의 문제가  해결이 돼야 되겠고 의의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되겠고 하나님과 원수된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되겠고 하나님과 화친 문제가 해결이 되어져야 되기 때문에 그  공로를 가르쳐서 기초적인 공로요 자본적인 공로라 그렇게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요걸 똑똑히 아십시다.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우리  거듭나게 했다 말은 중생인데, 이 중생은 예수님이 두 가지 대속의 죽으심의  절정까지를 완료 했지마는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는 대형 대행만 됐지 대화친만  됐지 우리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시  중생되는 그 은혜를 우리가 입게 됐습니다.

 그러면, 중생되는 그 은혜를 입을라고 하면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신 그  죽으심이 밑천이 아니라면, 그 죽으심의 근거가 안된다면 없다면, 그 죽으심의  터가 없다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은 터가 되고 예수님의  살으심은 그 터 위에 우리를 위한 건설이 돼서 예수님의 살으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서 영원히 사는 자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대속은 죽음만이 대속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활이  합해 가지고서 우리의 대속입니다. 예수님의 사활이 우리 대속입니다. 예수님외  사활이 대속인데, 예수님의 사활이 대속인데 이 사활이 합해서 하나가 되는, 이  사활이 합해서 하나된 그 장소가 어디냐? 공간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무덤에서,  무덤이 열리고 거기에 주님이 죽은 가운데서, 그 무덤 속에서 살아사는 그건이  비로소 예수님의 사활의 절정이 공간적으로는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공간적으로는 거기에 머물렀고 또 시간적으로 말하면 언제냐? 시간적으로 말하면  바로 이레 중 첫날, 주일날, 안식일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주일날, 주일날  새벽이 그 시간적으로는 사활의 절정이 이제 결합된, 절정이 결합된 시간으로  말하면 언제냐 하면은 이레 중 첫날, 주일날 새벽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주일날  새벽이요 장소적으로는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 계시다가서 부활한, 예수님이  부활한 그 장소요, 공간적으로는 그거요 시간적으로는 주일날 새벽 그때 미명때  그때가 시간적으로는 그때입니다.

 그래 가지고서, 제자들과, 이 사활의, 사활의 절정이 거기인데 이 사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졌는데, 이루어진 이 구원이 우리에게 이  제 삶에 대한 대속은 우리에게 어찌 이루어지느냐? 죽음의 대속의, 죽음의  대속은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된 것이요 그것을  우리가 울궈먹고 힘입는 것은 평생이요 영원이요 또 우리가 예수님이 대속해서  살아나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된 이 공로도 완성은 무덤에서  공간으로는 그랬고 시간으로 말하면 주일날 첫 새벽에 그랬는데 우리에게 그 두  가지 절정의 공로가 사활이 일체가 돼 가지고, 사활이 하나가 돼 가지고, 사활이  일체가 되어서, 예수님의 사활이 사활의 일체가 되어 가지고서 우리에게 이  공로로 효력있게 전해 주어서 우리가 입게 되는 그것이 언제부터 입게 됐느냐?  입게 되기 전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반가워서 붙잡을라고 하니까, 나를 잡지  말아라 내가 아직까지, 곧 나의 아버지 너의 아버지 집에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잡지 말라고 했다가 이제 잠시 후에 다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나를 잡아라 내 옆구리를 만져 봐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사활 일체의 메시야, 사활 일체의 이 메시야의 혜택이 우리에게  퍼져 나오기를 언제 퍼져 나왔느냐 주일날 밤부터 퍼져 나왔습니다. 주일날  밤부터 공식으로 퍼져 나왔습니다. 주일날 밤에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에  주님께서 오셔 가지고서 평안할지어다 말씀하시고, 그날 밤에 당신이 사활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고, 사활의 이 공로의 혜택을 우리에게 입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그때부터 이제 주일을 지켜 가지고서 예배를 드려서 이렇게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일은, 이날은, 우리 모두가 다 지키기를 이날은 무슨 날로  우리에게 온 날인고 하니, 주님이 죽으시고 살으신 그 사활의 하나가 된 사활  일체가 된 메시야의 대속, 완전 대속입니다. 이제 죽음 가지고 완전 대속이  못됐고 삶만 가지고 완전 대속이 못 됐는데 삶은 죽음을 근거해 가지고 삶의  대속이 됐고 죽음의 대속은 이 삶의 대속이 이제 추가 되었으므로서 죽음의  대속이 완성을 한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주님의 대속이 완성된 이 완성의 은혜  사활의, 사활로 대속이 완성된 이 완성의 대속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날로  결정지은 것이 주일날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일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까지도 이날을 귀중한  걸로 여겨서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시기 오래 전에도, 할례라 하는 것은  세례입니다. 할례라 하는 것은 모든 더러운 걸 다 제해 버려 버리고  깨끗해지기를 시작하는 걸 가르쳐서 할례라 이렇게 말하는데 할례는 제팔일에  받습니다. 팔일에, 제팔일에, 난지 팔일에 할례를 받도록 팔일을 이용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것은 그 세례는  회개 세례입니다. 세례 요한이는 회개 세례를 주었지 다른 세례는 못 줍니다.

회새의 세례를 줬는데 예수님이 회개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회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받으신 것은 회개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가, 오니까, '무슨 나는 회개의 세례를 주는 데 나한테 세례  받을 게 뭐 있습니까?' 하고서 거부를 했습니다. '나한테 세례 받을 것이 뭐  있습니까?' '아니다. 그저 회개의 세례를 허락하라' 회개의 세례, 세례 요한은  뭐인지도 모르고 허락하라 하니까 할 수 없이 예수님에게 회개의 세례를  줬습니다. 예수님이 회개 세례 받은 것도 그것도 우리를 대속하신 대신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그 날도 주일날입니다.

주일이 생기지 안한 날이지마는 안식일 후 첫날입니다. 안식 후 첫날에 대속의  세례를 받았고,  또 예수님께서 변화 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가지고 거기에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의 대속을 베푸실 것을 그들에게 다 알리고 그들이 다  진여하고 이래 가지고서 십자가의 대속을 구약과 중시대 전부 여러 종류가 다  합해 가지고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제 이 구속이 완성되는 그 역사에,  말하자면 최고 회의라 할 수 있습니다. 최고 회의인 변화 산상의 변화받은  그날도 내나 안식 후 첫날입니다. 그날에 제자들이 말하기를, 베드로하고  요한하고, 우리자 장막을 여기 짓고서 그만 여기 살면 좋겠습니다. 이러니까  하늘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음성을 듣고서 좋아서 그러니까 말하기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는 나의 사랑하는 자 나의 기뻐하는 자 나의 아들이라 저의  말을 들으라' 그렇게 말씀하고 난 다음에 다시 보이지 않고 구름 가운데 두렵게  엄하게 말씀하는 데에서 그들이 놀래서 기절한 것같이 했다가 이래 깨 보니까  아무도 없어서 그 다음부터은 다른 것을 원하지 안하고 거기에서 있을라고 고집  피우지 안하고 주님을 모시고 주를 따랐던 것입니다.

 변화 산상에 율법 시대 또 모든 양심 자유 시대 그 모든 시대의 대표들이 모여  가지고서 대속의 최고의 회의를 하는 그 회의, 그날이 뭐이냐 하면은 변화한  것입니다. 변화한 날인데 변화도 돼, 변화도 된 날이요 회의도 한 날이요 한  그날이 안식 후 첫날에 됐습니다. 또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이제는 호산나라 부르라 하는 것은 만왕의 왕이 오셨고 만주의  주가 오셨다 하는 것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에 나귀를 몰고 오라  할 때에, 예수님은 무례한 일 하지 안하시는데 다른 사람이 애써 먹여 놓은 그  나귀를 뭣 때문에 몰고 올 것입니까? 남의 걸 몰고 오면 도적 아닙니까? 그럴  때에 뭐, 돈이 뭐, 하니까, 가서 내가 쓴다 해라 하니까 그들이 보냈습니다.

모든 그때 명령할 때에는 창조주요 주재자의 권위를 씁니다. 창조주 주재자의,  주재자의 권위.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서 들어가는 것은 만유의 주요 만주의  주재요 만왕의 왕으로서 재림하실 것의 모형을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 주인 없고 모든 존재는 다 예수님의 소유요 예수님은 창조주요  주재라는 것을 그때에 나타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입성한  그날이 안식 후 첫날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 후 첫날입니다. 또 신약 교회를 세운  성령강림이 안식 후 첫날, 오순절 그날이 안식 후 첫날이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주일날로서 비로소 안식은 참것의 그림자요 이건 다 날을  폐할 날이요 그것 가지고는 사람이 안식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셨고  미리부터 주일에 대한 행사는 다 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주일에 대한 중요한 행사들은 다 주일날 했습니다.

 하나 이 주일이 주일날로서 안 되는 것은, 주일날은 뭐이냐 주님의 사활의  대속이 일치가 되는 이것이 이루어야 되는 것이지 그 나머지기 지엽 그런거야  이루어져도 뭐 그것 가지고 안 되기 때문에 그게 다 이루어졌지마는 사활의  일치되는 이것이 이루어져야 그 모든 일이 해결되기 때문에, 그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에는 성전 휘장이 갈라진 것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가로막힌 그것이 이제 해결됐다는 증거로 그렇게 사람이 손 대지 안하고  갈라졌고 또 바위가 다 깨어지고 갈라진 것은 손 대지 안했는데 이는 돌과 같은  굳은 인간의 그 원죄의 강한 견고성이 예수님의 이제 죽으심으로 다 깨어지 것을  가르쳐 말했고 예수님이, 그래도 부활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그  부활과 동시에 무덤 속에서 모든 자던 성현들이 다 부활해 일어났습니다. 부활해  일어나 사람들은 그때 놀랬습니다. 다 부활해 일어나 가지고서 같이 예수님으로  더불어 예루살렘 성 중에 들어가셨다가 다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기 위해서  거기에서 잠깐 성중까지 영접하고 그 다음에는 다 자기 무덤대로 다 들어가  가지고서 무덤에 도로 들어갔습니다. 이러니까, 본 사람들은 보았고 인정하는  자는 인정하지마는 거기에서 어떤자는 꿈을 꾸었는가 그렇게 생각하지마는  성경이 밝히 말을 했습니다. 자던 성인들이 다 일어났다 했습니다. 이래  가지고서 예수님의 사활의 절정의 대속이 이루어진 그날이 주일 날이요 이  주일날 비로소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활의 이 대속이 실상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은혜의 날이 주일 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주일 변경시키는 그거는 대마귀가 한 것입니다. 이 주일을  변경시키는 것은 대마귀가 하는 것이요 또 믿는 사람이, 뭐 어느 날 지켜도 관계  없지, 믿는 사람이 주일을 범하는 것은 그것은 아직까지 어리니까 기본구원 얻은  사람이 그저 건설구원에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이지 그 신앙 가지고 성화는  절대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성화가 안 됩니다. 주일을 지켜 주일날 이 성과의  은혜를 받습니다. 주일날 변화 은혜 받습니다. 주일날 변화의 은혜를 받고  주일날 하늘나라에 들어 가는 그 모든 천국에 입성하는 그 은혜를 받고 주일날  성령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그것은 연조를 지금 뭐 기억하고 안 있기 때문에 모르는데 이  신약 교회가 생기고 난 다음에 초대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있었지마는 성령의  역사가 있고 난 다음에 벌써 백 년 이백 년 지나고 나서 로마에 있는 교회들이  부패해져서 ○○교가 시발될 때입니다. ○○교가 시작돼 가지고서 그때 ○○교가  차차 차차 교권을 가지고서 무례하게 행할 때에 그 후부터는 성신의 역사가  없었습니다. 없어서 그냥, 이러니까 천 이백년 동안이라 하는 긴 세월을, 신약  시대, 천 이백년 동안이라 하는 긴 세월을 교회에 영감 역사가 없이 그저 과거에  영감 역사해 나오던 그 제도와 그 형식 그 문서, 은혜받은 사람들이 말한 그저  하나의 종이 쪼가리 이것만 거머쥐고 이렇게 교회가 돼 나오다가, 지금부터 한  백여 년 전인지 그 날짜를 다 일반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때에 저 구미  지방에서, 제가 그거는 교회도 그때는 들었는데 잊어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서 물으면 혹 아는 사람들이 그런 것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교회에 성신의 은혜가 충만히 일었는데 그 성신 강림의 은혜가  어느날이냐 하면 주일날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주일날 새벽에 성신의 충만한  은혜가 있어 가지고서 그때에 그 성령의 역사의 은혜가 차차 차차 세계적으로  퍼져 가지고서 우리 한국에도 그 성령의 강림의 은혜가 퍼져 왔었습니다. 그때  거기에서 차차 차차 퍼져서 세월이 지나가면서도 성령의 은사가 이렇게 왔는데,  우리 한국 교회에도 복음을 전해서 복음은 전해 받았지마는 그저 성신의 역사가  뜨겁게 역사하는 것은 별로이 없었습니다. 없다가 그때에 거기에서 일어나서  차차 차차 오는, 전달해 오는 이 은혜를 받아 가지고 우리 한국에서도 성신의  충만함을 받은 것이 주일날입니다.

 주일날 받아 가지고서 우리 한국 교회도 그때 성신의 충만을 받아 가지고서  크게 왕성이 되고 크게 부흥이 됐었습니다. 부흥이 됐다가 그 뒤에 또 교회가 다  부패해지고 쇠퇴해져 가지고서 성신의 은혜가 지금 뭐 아 주 뭐 까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뭐 불이니 뭐이니 뭐 예언이니 지식이니 하는 이 말은 뭐이냐  하면은 벌써 길을 잊어 버렸다는 증거입니다. 길을 잊어 버렸으니까 어디로 갈지  모르니까 그저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하는 여기에서 무슨 소리를 해 불이라 하면  그리 가고 무슨 지식이라 하면 이리 가고 예언이라 하면 이리 가고 하는 그거는  다 조작배기지 성경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방언이니 이니 하는 것 또 병 낫는  신유, 병 낫는 신유라고 말하면 그걸 믿지 마십시요. 병 낫는 것은, 물론  기독교도 병 낫습니다. 병 낫는 것은 자기의 감정이라는 자기 주관이라는 그것도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고 또 이, 미신들도 어느 정도의 기적을 행할 수가  있습니다. 아 하나님 앞에서도 모세 당시에 일차 이적 이차 이적 삼차  이적까지는 그 복술쟁이들도, 마술쟁이들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최후까지는  못했지요  이러니까, 뭐 ○○○교라 하는 것도 병 낫습니다. 안 낫는 게 아니요 또 이런  사신도 무슨 도 그것도 병 낫습니다. 안 낫는 게 아니라 참 말로 낫습니다.

낫기를 아 자기가 정신을 똘똘 뭉쳐 가지고서 '정신 일도 금석 가토라' 하는  것인데 정신을 똘똘 뭉쳐 가지고서 마음에 낫는다는 확신을 가지고서 이러니까  벌써 그것이 치료입니다. 낫는다는 확신 가지고서 기쁨 가지고 평강 가지고  담력을 가지니까 병으로도 싸우는 힘이 강해지지 또 자기에게 평강이 자꾸  소생되어 올라 오지지. 또 자기에게는 병을 이기고 남음이 있다는 그런 확신이  오니까 병이 낫습니다.

 그런 것이 구원의 도가 아니고 그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병이 나은 것이 구원이  아니요 병이 나은 그것도 육신의 구원이지요. 암만 나아봤자 마지막에는  송장으로 죽습니다. 뭐이냐? 이제 하나님의 진리와 영감대로 변화가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영감과 진리대로 그 성질 하나라도 변화되고 생각 변화되고  지식 하나라도 변화되고 행위 하나라도 변화되고 마음과 몸의 기능이  조그만치라도 변화된 그것이 다 영생성을 가진 것이요 완전성을 가진 것이요 다  부활의 기능입니다. 이게 되어져야 되는 것이지 이게 안 되면 그저 아무리 기분  좋아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사람들 기분 좋게만 하는 데야, 교회 가운데에 진리를 말하면은  마음이 눌리고 어깨가 눌리고 마음이 눌려서 무거운 짐진 거와같이 눌리는 교훈  보다는 짐을 졌던 그 모든 무거운 짐진 걸 휘뜩 벗어 버리고 벗어 놓으니까  평안하고 좋을 것이고 또 그것보다도 더 좋은 것은 세상으로 끌어내 가지고  ○○교 같이 뭐 주일날 안 지켜도 되고 주일날 술먹어도 뭐 담배 피워도 무슨  장사를 해도 상관없다 풀어 놓으면 좋겠지요 우리 교인 어떤 분 하나, 요 앞에  그 무슨 교회라더라 ○○○교회인가 ○○○○○교회라던가 그리 가 가지고 거기  가서 말하기를, 아따 이제는 기분도 좋고 장사도 잘되고 뭐 어짜고, 이러면서 그  사람이 그렇게 한다는 소문을 들었소. 들어 옵디다. 거기는 뭐 주일날 상관없이  무슨 일 해도 상관없고 이러니까 물건도 잘 팔고 장사도 잘된다 이랬는데 얼마  안 가서 보니까 그 장사를 철거해 가지고, 다 망쳐 철거해 가지고 딴 데로 가  버렸습니다. 그 잘 된다 말이 거짓말이라 자기 말만 좋지. 마구 잡이로 믿어도  좋고, ○○교는 아무래도 됩니다.

 그러니까 아주 참 옳은 교리와 신조대로 말하면 사람들은 '나그네 세상을  두려움으로 지내라' 항상 네가 마음에 조심해서 네 마음이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날마다 살아라  조심해라 마음이 무거운 짐진 것같이 눌린다 이라다가 그것을 풀어 놓으면, 아  그럴 것 없다. 그걸 풀어 놓으면 평안합니다. 그걸 풀어 놓고 이제는 아무나따나  해도 천국은 다 가니까 천국은 문제 없으니까 염려하지 말아라 하면 더  좋습니다. 천국은 우리가 힘씀으로 가는 것 아닙니다. 우리 마음과 몸의 기능이  구원얻는 걸 원하는 것이지 기본구원은 택함에 결정되는 것이지 그 사람의  행위로서 결정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구별해야 됩니다. 이렇지, 그걸 얼마 동안 좀 세상으로 나가 가지고서 세상을 반  섞고 교회를 반 섞으면 더 좋아하지요 그라다가 이제 그럴 것 없다고 세상이  삼분지 이쯤되고 교회가 삼분지 일쯤 되면은 더 자유롭고 좋지요. 마지막에  세상이 다 되면 좋지요.

 그러나 택한 자는 중생된 영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처음에는 좋지마는  결단코 좋지 않습니다. 마음에 고민이 나옵니다. 양심의 호소가 나옵니다.

고통이 나옵니다. 그라다가 어떤 어려운 하나님의 징계든지 어려움이 하나 척  오면은 그때사 토해 나옵니다. 아, 내가 범죄해서 이떻다 내가 이렇다.

 제가 여기에 와 가지고서 오 육군 병원에 그때 방문을 갔는데 다른 환자들 많이  있는데, 다른 환자들 다 거석하니까 모두 울고 있는데, 똑 다 팔도 다리도 없어.

팔만 하나 이래 기부스해 가지고 이래 쭉 뻗쳐 가지고 있고 하나는 다리만 뻗쳐  가지고 있고 몸뚱이만 또 그것도 팔도 아무것도 없어 계란 모양으로 그래만 되어  가지고 있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들 가보면 가다 보면은 벙긋 벙긋  웃으면서 '아,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사람들 보니까 '예, 제가 만일  이 팔 다리가 끊어지지 않했으면 내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와 그래요?'  이러니까 '내가 주일학교 반사입니다. 반사인데 내가 그런 죄를 짓고 내가  주님을 배반하고 이래 가지고서 이런 병신이 됐었는데 내가 이렇게 안 되었으면  죄만 짓고 내가 회개하고 돌아 오지 안하고 안 믿는 사람으로 세상 뜰 뻔  했습니다' 이라고 오히려 그걸 기뻐하고 즐거워하더라 말이요.

 이러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중생된 사람은 반드시 세상으로 암만  좋아해도 자기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그때 회개해서 주님 앞에 범죄한 것을  느껴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어도 자기가 가다가 빛이, 성령의 빛이 비추어  지면, 내가 이거 사는 것이 뭐이냐? 만가지가 손에 쥐이지 않습니다. 내가 돈  이까짓 걸 가지면 뭣하겠느냐? 뭣 하겠느냐 이놈 돈의 욕심이 강할 때는  그렇지마는 그놈이 조그만 나아지면은 그만 하나님으로 더불어 가난해지고  진리에서 가난해지고 이렇게, 비참하게 된 그 자기의 신세가 가련한 것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일이 예수님의 사활의 절정적인 이 대속이  주일날로 우리에게 이제 분급하게 됐습니다. 주일날로 통해서, 주일날로 통해서  이 두 가지 절정의 이 대속이 우리에게 오게 됐기 때문에 우리는 이날에, 모든  날보다 이날을 귀중히 여기고 이날에 또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걸 귀중히  여겨서 이날에는 우리가 그 두 가지 죽음의 능력을, 자꾸 뭐 자살하는 행위가  아니고 죽음의 능력까지 나아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우리가 받아야 됩니다. 또  '하나님을 향하여서 산 소망을 잇게 했다' 썩지 안하고 쇠하지 안하고 낡아지지  안하는 이 산 자로 살도록 썩지 아니할 자로 살고 또 죽지 안 할 자로 살고 죽은  것을 살리고 썩은 것을 살리는 이 능력을 우리가 이 주일 날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일날은 이리 중대한 일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뭐 매매하는  것이나 장사하는 것이나 그런 것을 할 수 없어서 그런 것 하는 그런 것을 다  여기다 기울여 가지고서 예수님의 사활의 이 구속의 은혜를 종자적으로  근본적으로 구속의 은혜를 하나의 절정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받기 위해서 그런 걸 안하는 것이지 그거 안하는 것이 의가 되는 것  아닙니다. 그거 안하는 것은 거기다가 마음을 나누지 말고 합해 가지고서 여기  다 기울이라는 것이지 뭐 일 안하는 것이 뭐 의가 되는 것 아닙니다. 그 사람이  일 안하고 가만히 누워서 하루 종일 자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하는 게 낫습니다.

차라리 일하는 게 낫소. 우리가 일하면 마음을 다른 데다 빼앗기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다른 데 빼앗겨 가지고서 일도 안하고 이 구속에도 생각두지 안하고 그날  가만히 드러 누워 자기만 하고 아무 구원에 대해서 감각 없으면 그까짓 거나 일  하는 것이나 꼭 같은 것이지 뭐 다를게 한 내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날  잤으면 그 이튿날 다른데 일하는데 더 바치니까 그게 뭐 내나 그 일하는 것이지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죄를 없애 줬으니까  이것을 보수하는, 하나님이 세 가지 대속을 주시기 때문에 이 세 가지 대속을  우리가 지사적으로 보수할 수 있는 이 능력을 우리가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세 가지 대속을 우리가 지사적으로 보수할 수 있는 이 능력을 주일날 받아야  되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 주신 이의, 의의, 칭의의 이 건설을 우리는  지사적으로 건설할 수 있는 이 능력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자꾸 죽음을 자취하는 것은 아니고 하다 보면 죽습니다.

하다가 보면 배추달씨도 처음에 주일날, '이 도야지를 지고 가자' 잡아다 놓고  '지고 가자' '주일날이라 못 지고 갑니다.' '그러면 네가 그러면 못 지고  가면은' 개를 한 마리 잡아 가지고 '이 개를 그라면 끌고 가자' '주일날이라 못  끌고 갑니다' 빗자루를 주면서 '이 마당을 한번 쓸어라' '주일날 비로 마당쓰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지마는 당신들이 나를 주일을 범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마당을 주일을 범하도록 하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마당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끌고 갔습니다. 산으로 끌고 가 가지고서  세워 놓고, 뭐 세워 놓으면 달아나도 총이 있으니까 달아나지도 못하기도  못하겠지마는 그 사람 달아날 그런 비겁한 사람이 아닙니다. 깨달았기 때문에,  가만히 섰으니까 제가 총을 한방 탕 놓으면서, 이제 한쪽 팔이 턱 맞아 가지고서  툭 쓰러졌다가 다시 벌떡 일어서니까 '이놈아 너 지금 그러면 시키는 대로  주일날 뭐 하겠느냐 주일날 네가 하겠느냐' '못 합니다. 주일날 할 수  없습니다.' 그래 가지고 '못하겠나' 또 놓고 '못 합니다.' 또 놓고 '못 하느냐'  '못 하겠습니다.' 마지막에 그라다가 탈칵 죽어버렸으니까 더 못하겠느냐 소리를  못하고 그 사람은 못한다는 것으로 끝을 마쳤습니다. 그것이 기독자의  생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이 입혀 주신 사죄와 칭의와 화친 이 세 가지  대속을 우리가 보수하기 위해서, 보수를 어디까지 할 것이냐? 보수를 내가,  어려워도 보수하고 손해가도 보수하고 매맞아도 보수하고 감옥에 가도 보수하고  마지막에는 죽어도 보수하고, 죽는 데 이르기까지 지사까지 보수할 능력을  우리가 주일날 받아야 되겠습니다. 이게 주일날 받는 은혜입니다.

 또 주님이 우리에게 아 세 가지 대속의 은혜 생활을 하라고 했기 때문에, 이 세  가지 대속의 은혜 생활을 하라고, 하나님 향하여 살라고, 그러면 의를 건설  하고, 죄를 짓지 안하고 의를 건설하고 하나님과 화친한 생환을 하기 위해서,  이것이 건설인데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인데, 이 생활을 하기 위해서 어려움이  있어도 하고, 마지막에는 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마지막에 하다 하다 최종은  어떤 것은 우리에게 재산을 손해 보이다가 재산이 손해가도, 나는 이 세 가지  대속을 그대로 나는 기념하겠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념하라 했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이 피와 떡으로서 내 살을 기념하고 내 피를 기념하라 했습니다.

 기념은 주님이 이 세 가지 대속을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죽으신 이 죽으심을  나도 내 생애에서 죄없는 자로 살기 위해서 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의로운 자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살기 위해서, 너희는 내 피와 살을  기념해라 살기 위해서 내 피와 살에 이르기까지라도 너는 이것을 기념해서  버리지 말아라.

 우리가 이렇게 해 나가다가 보면 어떨 때는 좀 한번 욕 하번 얻어먹고서 끝나는  사람도 있고, 그 어릴 때입니다. 어떨 때는 물질에 손해 좀 보면 그만 그게  끝나는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참되게 뭐 죽을 만침 매를 맞아야 끝날 때도 있고  감옥에 갇혀야 끝날 때도 있고 인간에게 완전히 배척을 당해서 고독을 당해야  끝날 때도 있고 오만 하나님이 오만 것을 다 들이 댑니다. 마지막에는 이제  최후가 죽음인데 죽음을 들이 대도 우리는 주님이 기념하라는 이 기념을 버리지  안하고 죽음으로 기념합니다. 지사의 기념, 지사의 기념, 지사의 보수, 지사의  보수 지사의 기념을, 우리가 그 능력을 얻는 것이 주일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일날은 일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갖추어서 마음도  몸도 의복도 깨끗이 해서 주님의 이 세 가지 죽으심의 이 대속을 우리가  기념하고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심의 이 대속을 기념해서, 이 세 가지 대속이  대속의 절정으로 사활의 일치가 되어진 이 대속으로 생겨진 주일날이요 이  사활의 대속이 우리에게 효력있게 역사하는 은혜의 날이 주일날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날에 예수님의 이 두 가지 죽으심을 우리가 생각해서 우리에게 먼저  감격된 사람이 되어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우리가  기념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하하여서, 이제 뭐 빼앗기든지 가난해지든지 죽든지  하나님을 향하여서 사는,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이 삶을  우리가 놓지 않는 이런 각오를 가지고서 우리가 이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날은 이 은혜의 능력을 받는 것이 주일 날입니다. 그러기에, 주일날  이 능력을 받지 못하고, 물론 다른 뭐 이런 집회에서 은혜 받지마는저도 그런  집회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마는 원리적으로는 주일날입니다. 원리로는 주일날 이  은혜를 받습니다.

 또 예수님의 재림도 주일날 재림하실 것이라 하는 것을 누가, 성경에 말하기를  이걸 엄금했기 때문에 그날 그시를 알지 못한다 했는데 안다고 말하면 그거는 안  되기 때문에 말을 못하지 속으로는 다 짐작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사람들은 주님이 재림을 어느날 하느냐 하는 것은 다 속속들이 다 말은 못해도,  발표는 해서 주장은 못하지마는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저도 짐작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은 내대로는 짐작을 하고 이날 오신다  하는 것을 내대로는 아무리 부인할라 해야 확정이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아,  주일날 주님은 재림하신다 하는 것이 내 속에는 확정이 되어 가지고 있다  말이요, 다른 사람한테 주장은 못합니다. 주장을 하면 성경에 위반된 말을 하기  때문에 주장은 못하나 자기 속으로는 다 생각하고 있다 이거요.

 그런고로, 우리가 벌써 주일을 못 지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 다 빼앗겼습니다.

주일을 바로 지켜서 주일에 과거 엿새 동안보다도 주님의 두 가지 죽으심에, 이  죽음에 참 감격한, 그 감동의 도수는 다르지마는 이 감격의 눈물이 있어야  됩니다. 늘 우리가 그렇지마는 그 마음에는 눈물나는 그런 마음 같은 그런  강도의 마음이 우리에게 계속해 있습니다. 눈물이라 물은 안 나오지마는 마음에,  참,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우리 마음에 주님의 두 가지 죽음의 대속에  감격한 그 감격이 다른 모든 날보다 주일날 더 우리에게는 감동이 더 강해야  되고 또 이제 주님의 대속, 두 가지 대속을 입고 이두 가지 죽음으로 된 이  대속을 입고, 예수님이 또 이 때문에 살아나셨으니까 이 사심의 대속을 우리가  입은 자로 살기 위한 그런, 어느날보다 강한 뜨거운 힘이 있어 가지고서 이  주일날 강한 힘 얻은 것이 이것이, 주님의 이미 대속의, 지나간 대속에 대한  감격, 앞으로 또 대속을 입을 그 입음의 감격의 힘이 주일날 강해 가지고서, 이  주일날 강한 것이 월요일날 또 약해집니다. 아무래도 약해집니다. 약해지는 게  필연입니다. 월요일날 좀 약해지고 화요일날 좀 약해지고 이러니까 수요일날  다시 보충하자 해 가지고서 이제 수요일을 삼일 예배를 내놓은 것이고, 또  그라고 이라다 보면은 차차 차차 오일날 가면은 또 삼일이 되니까 또 약해지니  오일 예배가 있고 그 다음에 주일날 새로워지고, 이래서, 우리는 이 주일날  자기가 혁신이 안된다면, 이 주일날 개혁이 안 된다 면 이 주일날 변화가 안  된다면은, 주의 구속에 대한 감격도 주일날 자기로서는 절정적으로 변화가  일어나지 안한다면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 대속에 대한 자기의 욕망에 대한  감격에 변화가 안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딴 데서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일날을 예사로이 생각지 맙시다. 주일날을 잘 준비해  가지고서 주일을 잘 지켜야 됩니다.

 주일에는 이 두 가지 절정이라는 것.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살으심의  절정이, 절정이, 예수님의 무덤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부활로서, 부활, 이 제  죽음의 절정, 부활의 절정, 시발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두 희생을, 하나는 두  희생을 완전히 했고 하나는 다시 새로 도성인신해 가지고서 영원히, 이 희생은  끝이 나는 게 아니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서 영원히 살게 하는  이 대신을 책임지는 이 대속의 희생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것이 무덤에서  시작됐고 그것이 주일날 새벽에 시작됐고 그것이 주일 날 모든 성도들에게  반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주일날은 이 사활의 절정 일치의 이 은혜가 역사하는 것이  주일날이기 때문에 이날은 이런 줄 알고 우리가 죽으심에 대해서도 깊이 깨달아  느낌이 있어야 되겠고 또 부활하심에 대해서도 깨달아 느낌이 있어서, 하나는  소망으로 느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 하나는 또 소극적으로 어떻게 해서  대항해서 내가 참고 견뎌서 이겨 나갈 것,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녜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그러기에 주일 지키는 것을 예사롭게 뭐 살고 지켜, 우리가 주일 지킬라는 것은  앞으로 생명을 내놔야 주일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주일 지킬, 주일을 지킬라면 생명을 내놔야 되면 그때 내놔야  됩니다. 뭐 생명보담은, 주일 지키는 것 보담은 생명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 그런 망령된 생각 가지면 안됩니다. 주일은 참으로 생명을 내 놓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뭐 계명 2계명 3계명 4계명 거기에는 다 하나이고 또 5계명 6계명 그거는,  그거는 뭐 주를 위해서 생명을 내놓고 5계명으로 10계명까지 지킨다는 그런 것도  좋지마는 거기 대해서는 뭐 여러분들 자유대로 하지마는 1계명으로부터  4계명까지는 생명 내놓고 지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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