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

 

1984. 12. 2. 주일오후

 

본문 : 누가복음 16장 19절∼31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홍포 입은 부자뿐 아니고 사람들은 대개 인간 자기대로 사는 사람들은 다 이  생활을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화려하도록 해서 명예로나 지위로나 흑은  재벌로나 권세로나 무슨 도덕으로나 무엇으로나 어떤 것이든지 해서 그 종류는  각각 다를지라도 자기를 호화롭게 하기 위해서 꾸며 놓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일반 세상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이렇게 타락해서 요한계시 18장에도  '자기를 어떻게 사치하였으며 영화롭게 하였든지 그대로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렇게 죄악을 정의해서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님 재림 때에는 하늘까지 죄악이 관영한 세대라고 했는데 하늘까지 관영한  죄악들이 크게 말해서 어떤 죄악인가? 다 자기를 아름답게 장식하며 자기를  기쁘게 하는 그 두 가지 죄악이라고 거게다가 나타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가르침 받았고 또 소망하는 우리기 때문에 듣기 쉽게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호화롭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아름다운 옷을 꾸며서 지어서  예수님에게 입혀야 하겠습니다. 이거 하나의 비유입니다. 자기의 시간이나  소유나 자기의 지위나 자기의 권세나 자기의 재산이나 자기의 모든 씩씩한 그  인격이나 어떤 것이든지 그것을 팔아서 주님을 호화롭게 그렇게 단장하는 의복을  지어서 입혀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하나 나타내기 위해서 참 우리는 일생을 바쳐야 되겠고.

주님의 그 진실하심을 하나 나타내기 위해서 일생을 바쳐야 되겠고, 주님의  약속의 신실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 저 사람 보니 저 사람은 참 약속에  신실하다. 한번 말하면 변함이 없다. 그분은 참으로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측량 못할 만치 이해하고 너그럽다. 자기에게 대해서는 칼날같이  냉정하고 단속하나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너무도 끝없는 그 후대를 가지고  있다.' 어쨌든지 주님의 그 속성 주님의 그 신성, 주님이 우리에게 대속한 그  하나. 참 모때기 모때기 그 구비 구비에 주님이 어떠하신 주님이라는 그 주님의  그 형상을 우리가 드러내서 주님에게 귀한 그 영광을 입히는 데에는 우리는  그렇게 쉽게 되는 것 아니고 많은 값을 내야 되겠고 많은 그 시간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생 동안 자기는 주님에게 어떤 그 한 면이라도 이러한  주님이라 하여 다른 사람에게 참 깨닫게 하고 놀라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  냉정하고 쓸쓸한 이 참 사막같고 독사와 시랭이와 같은 이 세상에서 어느 한  모라도 다른 사람이 보고 그 향기로 흐뭇하게 여기고, 그 사람이 그 하나의  예수의 모양을 나타냄을 인해서 모든 사람이 보고 만족하고 새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는 주님에게 아름다운 옷을 지어서 입히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이거는 비유입니다. 우리가 지어 입힐 거 아니고 당신에게 있는 그 영광을  우리가 가리지 안하고 그대로 드러내면 주님의 영광이 무궁한 하늘나라에서는 그  영광이 이 세상 죄악으로 인해서 가리워 덮여 있다가 그 영광이 하나씩 둘씩  나타날 때에 그때에 하늘나라에서는 또 놀라고 또 감사하고 또 마음에 흡족하고  만족하고 그렇게 주의 그 끝없는 참 온전함에 다 놀라서 영원히 만족하고  만족하고 그로 양식 삼아서 피곤치도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가 없는 주의 영광을 만들어서 입힐 자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그 영광을 가리는 그 가리워 있는 그 영광을 우리가 그대로 가리지  안하고 드러낼라고 하면 우리는 어떨 때는 가다가 자기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희생해야 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자기가 참 말로 다 할 수 없이 억울함을  당하여야 할 때도 있고, 매장을 당해야 될 때도 있고 그때 어떨 때는 손해 갈  때도 있고, 몸과 생명까지도 다 바쳐져야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대로 그대로  드러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알기 쉽게 어짜든지 우리는 주님의  몸에다가 아름다운 그 고운 옷을 만들어서 입히도록 합시다.

 여게 세마포 옷을 입었는데, 세월이라는 자기 일생의 그 날에다가 하루 생활 한  시간 생활로 그저 한 시간 하루 생활로 자기의 사는 그것이 다 한시간 주님  영광을 위해서 하루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베 짜가듯이 베를 짜듯이 이렇게 짜 나가면 그  일생 동안에 사는 생활은 능히 주님에게 참 호사가 되고 호화가 되고 영광스럽게  주님에게 옷 입히는 그 일이 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날마다 연락했다 했습니다. 연락은 생일 잔치에는 그 생일 당한 그 생일  주인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생일 잔치가 있는 것이고, 환갑 잔치는 환갑  잔치 그 사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환갑 잔치가 있는 것이고, 취임했다고  취직했다고 어떻게 당선됐다고 하는 잔치는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  잔치가 이루어지고, 그 잔치를 그의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가 비용을 내  가지고서 잔치하는 것처럼 이 홍포 입은 부자는 자기의 가진 것을 비용을 내서  먹고 마시고 참예하는 사람들이 다 자기를 영화롭게 자기를 시쁘게 자기를  존대케 한 그 사람은 홍포 입은 부자의 생활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알기 때문에 이 하늘나라의 예수님의 피를 나누고 예수님의  살을 나누고 생명수를 나누는 이 포도주를 나누고 떡을 나누는 이 잔치를  가리켜서 애연이라 이랬습니다. 애연. 유다서에 보면은 애연이라고 사랑의  잔치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랑의 잔치,  이렇게 우리는 한 사람 두 사람을 만나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살의 은혜를  영감의 은혜를, 진리의 은혜를 이래서 진리와 영감의 은혜가 예수의 피가  무엇이며 예수의 대형의 사죄가 무엇이며 대행의 칭의가 무엇이며 예수님께서 그  죽기까지 하셔서 화친하신 그 화친이 어떻게 어렵고 안 하면 무엇이 어떻게  되는데 그렇게까지 하셔 가지고서 화친을 하셨는가? 예수님의 삼대 대속의 이  사랑을 나누어 먹고 은혜를 나누어 먹고 또 서로 희생하는 그 주님의 희생과  주님의 고난을 서로 나누어 먹고 마시면서 그 잔치에서 주님을 기쁘게 하는,  잔치의 주인은 주님이요 주님을 위한 잔치로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저 험해도  고요해도 또 감옥에서라도 어떤 환난 중에서라도 쓸쓸한 가운데서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 홍포 입은 부자가 자기 즐겁게 연락한 것같이 우리들은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이 사랑의 잔치를 우리는 날마다 해서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돼야 할 것입니다.

 제가 오전에도 예배 마치고 가서 어떤 사람 만나 가지고서 내가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는 내가 하는 말을 무슨 말인지 모르지마는서도 '심방을 가서  심방할 때에 기쁘지요?' 이라니까 '예, 심방 가서 기쁘고, 또 심방 가면 피곤이  다 없어지고 고만 갈 때는 그래도 참 기쁩니다. 그래 내가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랑의 잔치에서 사랑의 잔치에서 모두 즐거움을 누리는구만.

 여러분들 반사 선생님들이든지 권찰님들이든지 여러분들이 한 생명 한 생명을  찾아 가 가지고서 거게서 참 예수의 이 대속의 은혜를 서로 나눌 때에 그도 먹고  흡족하고 나도 먹고 흡족하고 뭐 그 이상 더 부귀영화가 없어도 생명이 끝나도  세상이 어찌 돼도 그 예수님의 대 속의 은혜를 서로 나눌 때에는 다 만족하고  모두 그 잔치에서 흡족함을 얻고 또 주님은 거게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니  이것이 과연 주님의 그 사랑의 잔치가 아니겠는가 그런 말로 제가 해석은 안  해도 '심방 가면 기쁘지요?' 하니까 기쁘다고. 그래 제가 혼자 말하기를 '주님의  사랑의 잔치에서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눴구만요' 그렇게 말을 하고 그쳤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렇게 모두 다 떨어진 옷을 입은 것처럼 주님을 만신창으로  우리가 상처를 입혔던 것입니다. 주님을 공연히 그렇게 귀중하시고 참 우리가  찬양하기에도 아깝고 부르기에도 아까운 주님이신데 우리가 들어서 공연히  이렇게 욕을 입히고 저렇게 욕을 입히고 이렇게 저렇게 원망을 돌리고 그런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었던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런 일을 다 이제는 회개하고,  이제는 주님에게 영광의 옷을 어떻게 해서라도 만들어서 영광의 옷을 입히고  내가 들어서 주님에게 그 수치스럽게 만든 그것을 다 가릴 수도 있는 그 영광을  우리가 죽기 전에 다 회복을 하도록 그렇게 목표를 정하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위한 사랑의 잔치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 모시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전에도 말했지마는서도 참 이 나사로는 천사들이 그가 죽을 때에 이렇게  천사들이 받들어서 아브라함 품으로 바로 영접했습니다. 이것이 제일 어렵지  안했나 그렇게 생각이 돼집니다.

 우리는 말로는 저도 많이 말합니다. 천하 모든 현실 중에 내가 어떠한 그  현실을 만났든지 내게는 천하의 수많은 현실 중에 내게는 그 현실이 제일 좋기  때문에 내게 준 현실이라고 논리적으로는 얼마든지 말을 많이 했습니다. 또 제가  확실히 믿고 깨닫게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게 대해서 저는 실행이 없었습니다.

남에게 나는 천대받고 다른 사람은 존대 받을 때에 시기심이 나오고, 다른  사람은 형통한데 내게는 형통이 없을 때에 마음에 섭섭함이 나오고, 남의  자녀들은 다 신앙에서 불타오르는데 신앙이 없을 때에 마음에 왜 이렇게 내게는  이런가해서 원망스러운 생각이 나오고 그런 그 무서운 그 외식하는 죄를 제가  오랫동안 지어 나왔었습니다. 처음에는 철이 없어 믿을 때에 참 주님이 나만이  사랑하시고 나만이 행복된 걸음을 걸어간다 이랬지마는서도 차차 차차 장성해서  세상을 보고 환경을 보고 모든 것을 살펴볼 때에 그 감사함은 없어지고 오히려  불만 불평이 늘 있었던 저입니다. 제가 다른 데는 물질에 대해서 내가 그런 것은  없었고 다만 내가 있는 것은 가족에 대해서 있었고 하나는 제가 그랬었습니다.

 ○○목사님은 제 아우입니다. 그 목사님은 대구에 있을 때에도 그렇게 공기  좋은 기도원 또 물 좋은 기도원, 서울에 가서도 잠실동에 가서도 그렇게 공기  좋고 물 좋은 기도원 주셨는데 나는 왜 이 부산에 온지 삼십여 년 동안 내가  오기도 싫은 자리 와 가지고서 이렇게 삼십여 년을 구해도 이렇게 기도원 하나를  안 줄까 하는 항상 속에 생각만 나면 불만스러운 그 마음이 불평스러운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라다가 오전에 말한 대로 제가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나사로를 그 후에는 생각할 때마다 나사로에 대해서 너무 머리가  숙여집니다. 참 그는 짓밟히는 들판에 발에 밟힌 그 꽃 한송이가 사람에게  밟히면서 인간들이 귀하게 봐 주지 안하고 아무도 몰라주고 다 천해서 짓밟아  쳐넣지마는서도 그래도 조물주 한 분만을 바라보면서 때를 따라서 잘 의무를 다  한 것처럼 이렇게 이 나사로가 이렇게 주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어떤  형편에서라도 마땅히 자기에게 좋게 해 주시느라고 그게 좋기 때문에 해 줬다는  그 한 믿음에서 아무 불평 없이 그렇게 지냈다는 거게 대해서 참 저로서는 아주  존경이 됩니다. 저로서는  다니엘 앞에 가 가지고서 먼저 방문하는 것보다도 제일 먼저 나는 찾아  방문하고 싶은 곳이 나사로입니다. 나사로에게 제일 먼저 찾아서 방문하고 싶고  다음에는 요셉에게 가서 찾아 가지고서 방문하고 싶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나사로를 본 받아서 어느 처지를 주님이 주시든지 그저 주님이 나에게 유익하게  해 주시는 이 사실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아무 지겹지 않게 원망 불평 나지 않게  피곤치 앉게 이렇게 지나 갈 수 있는 이런 우리가 사람으로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은 죽을 때에 믿는 사람은 낙원으로 갑니다. 안 믿는 사람은  음부로 갑니다. 우리가 잘 믿든지 못 믿든지 믿는 사람은 다 세상을 떠날 때에는  그 천사들이 다 안내해서 낙원으로 가게 됩니다. 낙원에 가서 예수님 재림  때까지 거게서 기다리고 있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자기의 영육이, 영과  마음이라는 그 육과 영육이 한하적 낙원에 있다가 자기가 입었던 그 몸을 다시  변화시켜 신령한 몸으로 입기 위해서 함께 옵니다. 함께 오면 만물을 복종케  하시는 그 능력이 우리의 몸이 어떤 요소 돼 가지고서 공중에 있든지 물에  있든지 어떤 그 원소가 돼 가지고 있든지 원소를 복종시키는 그 주님의 능력을  가지고서 우리의 몸을 다 이루어서 자기 가졌던 그 육체를 다 그대로 이루어  가지고 입게 됩니다. 그래서 물도 복종하고 이런 저런 어떤 모든 원소도 다  주님이 복종시켜서 우리의 몸을 다시 만들어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켜 주실 때에  그 몸 입고 이제는 영육이 되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갈 것이고 안 믿는 사람들은 공심판 앞에 가지마는서도  우리는 주님의 공로 때문에 공심판은 면제했는고로 낙원으로 가게 됩니다.

 제가 그런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그 두 부부가 결혼해서 잠깐 동안  결혼식하고 서로 한 이삼 일 서로 기도하고 나눠지기를 '우리가 이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두 몸이 되었으니 우리는 두 몸이 하나 되었으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 일을 우리가 열심히 하고 후회 없는 몸으로서 천국문에 가서 만나자'  그라고 그래 그 두 부부가 하나는 이 지방으로 가고 하나는 저 나라로 가서 먼  두 미개국에 가 가지고서 선교하러 갔는데, 한 사람은 저 중국으로 선교를  갔더랍니다. 갔었는데, 거게서 늘 멀리서 처음에 결혼한 그 약속을 그대로  지켜서 둘이 약속한 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 두 부부로서 하나는  중국에 하나는 그 사람이 중국이 아니고 구미 어디 지방인데 거게서 그 선교를  하면서 지냈는데, 한번은 보니까 자기 남편이 있는 그곳에 아주 그 공중이  환하면서 그 광채가 나더니마는서도 하늘에 있는 천군 천사가 내려 와 가지고서  자기 남편을 옹호해 가지고 하늘나라로 영접하는 것을 그것을 그 부인이 보고서.

남편이 먼저 갔는데. 그것을 보고서 그래 그 부인이 '아마 주님이 우리 남편을  이제 하늘나라로 인도하셨는가 보다' 하면서 즉시 그 자리에서, 그때는 지금  전화 같은 것이 없으니까 시간을 정해서 편지를 하니까 과연 그 시간에 세상을  떴다고서 그렇게 답을 받았다고 그런 그것이 그분의 그 부부의 전기에 기록된  것을 제가 봤습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세상 떠날 때에 떠나기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다 영광스러운  빛이 나타났고 천사들이 와서 영접해 가는 것을 봤고 다 성자들마다 거의 다  그렇다는 그것을 보고 증거하는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우리가 잘 믿든지 못 믿든지 주신 주님의 공로로서 영원히 꺼지지 안 하는 그  지옥을 면하고 하늘나라에 가게 된다는 거 이거 뭐 참 밤낮 감사하고 찬송해도  우리는 모지랄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산다 할지라도 그라고 난 다음에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면  뭐 좋을 것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공로로 그래도 영생하는 빛과 사랑이  넘치는 그 나라에 주님의 공로로 가게 됐으니까 예수 믿는 일 위해서 세상에  육십 년이고 칠십 년이고 가진 고난을 당한다고 해 봤자 그 뭐 고난이 뭐 큰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감사나 그것이 없어지고 불평해서 안  될 터인데 참 우리는 너무 몰라서 강퍅해서 그런 것입니다.

 제가 일본 있을 때에 보니까 그때 만주 전쟁이 났었는데, 그 뭐 지금  우리나라에서 부대장이라 하면은 그렇게 큰 게 아닌데 아, 부다이쪼가 온다고서  뭐 온 전국에서 다 환영을 하고 환영할 그런 식을 하고 이렇게 하는데, 제가  한번 가 봤습니다. 가보니까 그 부대장이 대판역에서 내리는데 그 뭐 환영을  하고 다 그렇게 존대하는 그 영광을 봤습니다. 영광을 보고 저는 그때 안 믿을  때라서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도 우리나라가 독립되어 있고 이렇게  노예국이 안 됐으면 나도 지원병이라도 해 가지고서 나도 내가 이 세상에서  승리의 장병의 그 환영을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마는 일본 나라에 내가  지원병 하기는 싫다해서 그때 지원병 하라는 것을 하지를 안 했었습니다.

 우리가 조만간에 다 떠나면 그 행한 대로 하늘나라의 영정의 대우가 다를  것입니다.

 셋째로 천국과 지옥의 형편이 어떤가 하는 것을 여게 나타냈습니다.

 천국에는 세상에 있는 닫은 사람들이 다 없습니다. 거게는 다만 믿음의 계통의  믿음의 계통의 믿음의 형제들만 거게 있습니다. 앞서 간 믿음의 형제들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고관 대작도 없고 재벌가도 없고 호화로운  사람들도 없고 아무도 없고 다만 예수의 피로 속량함을 받은 성도들과 주님과 이  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뭐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모두 다 필요하다  하지마는서도 낙원에는 주님과 그 신앙의 선배 아브라함과 둘밖에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거기에 만물을 새롭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하신 영원한  불변의 창조가 가득 찼지마는서도 가득 찼지마는 성도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다만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주님 한  분이 양식도 되고 힘도 되고 지혜도 되고 능력도 되고 기쁨도 되고 만족도 되고  다 되고, 다만 하나님이 지으신 무한한 만물이 있는 것은 자기의 일터요 자기의  일터요 일거리요 자기가 주님이 시키시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현장이지  현장이지 그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거는  주님 한 분이면 다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때에  이스라엘에게는 아무도 필요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었습니다. 옷도 필요  없었고 양식도 필요 없었고 물도 필요 없었고 무슨 전쟁하는 무기나 전술도 필요  없었습니다. 주님 한 분이 양식 됐고 물 됐고 의복 됐고 전쟁의 능력 됐고 그의  인도자 됐고 바다를 건너는 배도 됐고 광야에 살아가는 그 모든 주택도 다 됐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육체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해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에 그분 한 분으로서 뭐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도 그 와 꼭 같애서 보이는 거 이것 저것 다 있는 거 같으나  있는 거 같으나 실은 주님 한 분만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런데 우리는 두 가지의 무거운 짐을 졌습니다. 이렇게 꼭 자연 만물 이것  때문에 내가 사는데 자연 만물로 사는데 자연 만물로 사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우리의 부담입니다. 자연 만물 중에서 사는데 자연 만물로 살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부인하고 보이지 않는 주님 한 분으로 사는 이 사실을 믿는 이것이  초자연의 능력이요 지극히 크신 능력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는 보이는 우리는  형체에서 형체에서 살고 있고 보이는 힘에서 살고 있고 하지마는서도 보이는  형체에 살고 있으나 실은 아니요, 보이는 이 자연의 힘에서 살고 있으나 실은  아니요 우리는 순전히 지극히 큰 능력으로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는 이것이 피조물로는 할 수 없는 순전히 주의 피와 성령과 진리의  힘으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주님과 성도 둘만 있습니다. 다른 거는 없습니다. 주님과 성도 둘만  있습니다. 왜 거게 다른 것이 없겠습니까? 다른 것이 있으나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과 성도 둘뿐입니다. 다른 거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가 은혜를  베풀어야 할 시은의 재료들이요 자기의 무대요 자기의 일터요 일거리요  현장들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위치입니다. 교회는 자기의 신앙 계통에 신앙의  선배. 모든 신앙의 형제 이것이 한 몸같이 되어서 지체같이 되어 있고 주님 한  분은 머리같이 되어서 이렇게 사는 것이 낙원이었습니다. 낙원에는 주님과  성도만이 있었습니다.

 지옥에는 거게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은 크고 작고 많고 적고 간에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자기가 있고 자기 외에  있는 것은 자기와 꼭 같은 고난 중에 있어서 물 한 방울도 요청할 곳이  없습니다. 물 한 방울의 심부름도 시킬 만한 사람이 없었고 물 한 방울의 요구를  할 만한 그런 대상도 없었습니다. 거게는 다 다 자기와 같이 불구덩이  가운데에서 다 고통 중에서 고통중에서 부르짖고 있는 그 사람들만 있고  세상에서 제것이라고 다 쓰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연을 제것이라고 쓰면서  업신여겼던 그 모든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 네것 가지고 살아라. 전부  네것 가지고 살지 안했느냐? 부 네것 가지고 살고 네 힘으로 살지 안했느냐?  내가 필요 없고 이 필요 없는 너거들에게는 내게 필요 없는 내것은 내가 다 찾을  것이고 필요 없는 나는 다 찾을 터이니까 나 없는 세계에서 내것 없는 세계에서  너거끼리 살아라는 그것이 유황불 구렁텅이인 것입니다.

 이러니까, 멀리 있는 그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을  요청했습니다. 그걸 볼 때에 거기에 산 사람이 수억억만도 넘는데 억억만도  넘는데 그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에게  대해서 뭣을 요청할 만한 그런 대상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여게서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거게서 건강한 사람이 있었으면 물 한 방울이라도 찍어 줄  사람이 있었다면은 물 한 방울이라도 가진 사람이 있었다고 하면은 요청하겠는데  그 나라에는 하나님의 창조한 것은 크고 작고 간에 하나도 없습니다. 지옥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니 해결해 줄 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으로 해결 받는데 하나님이 안 계시니까  해결해 줄 이도 없고 유황불 구렁텅이에서 꼭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은 고통 중에  신음하는 그들뿐이니까 홍포 입은 부자는 멀리 있는 나사로에게 그 물 한 방울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합시다.

 믿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믿는 사람이 하늘나라 갈지라도 하나님을 어느 정도  주님을 어느 정도 필요하게 여겼든지 필요로 여긴 것만치 필요 돼 줍니다.

주님은 성도에게도 필요로 여기는 것만치 필요가 돼 주십니다. 주님의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치 주님의 것을 줍니다.

 아무리 믿는 사람이라도 주님의 것이 필요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부 자기 것  가지고 살지 주님의 것이 없어. '내것 가지고 내가 사는데. 내 힘 가지고 내  사는데 주님이 필요 있는가?' 그는 하늘나라에 가지 마는서도 세상에서 주님을  필요로 한 그 사람에게 무궁세계에도 필요의 하나님이 돼 주시고 주님의 것이  필요로 한 그 사람에게 주님의 것이 필요로 돼 주지 아무리 택자라도 주님의  것이 필요 없다고 한 사람 주님이 필요 없다고 한 사람은 그에게는 없습니다.

다만 기본적으로 자기와 상관없는 자기 주관에는 상관이 없는 객관의 은혜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혀서 기본구원 얻어 갔지마는서도 행위구원에  있어서는 필요가 없게 여긴 것만치 그대로 하나님은 갚아 주십니다.

 세상에서도 그러합니다. 세상에서도 당신을 필요로 여긴 것만치 그분은 그에게  역사해 줍니다. 아, 주님은 내게 있어서는 전능자라고 그렇게 전능자로 알고  전능자로 믿고 상대하는 자에게는 전능자가 되어 주십니다. 자기의 모든 부족한  것을 다 충족시켜 주시고 모든 것을 치료해 주시는 주님으로 인정하고 바라는  자에게는 모든 것을 다 치료해 주시는 주님이시요. 자기에게 필요 없다, 믿기는  믿지마는 믿기는 믿지마는서도 그저 얼마 만치 믿는지, 어느 정도 효력 있는  주님으로 믿는지? 돈만치 효력 있는 주님으로 믿는지. 자기 수족만치 효력 있는  줄로 주님으로 믿는지, 어떤 사람의 도움만치 효력이 있는 대로 믿는지, 참으로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전지 전능하신 대주재이신 그 주님으로 믿는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가지신 주님의 것이니 하늘의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내가 다 가지고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같이 있겠다고 약속하신 약속을 믿는  자에게는 주님은 그대로의 주님으로 같이 동거해 주십니다. 오늘도 동거해  주시는 거는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하늘나라는 주님과 성도 외에 낙원에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땅위에서  이거 필요하다, 저거 필요하다 필요한 건 많은데, 오늘에도 주님이 딱 우리를  부르면 세상을 딱 떠나면은 아무것도 나와 상관을 가지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없고 나는 주님 앞에 가서 서야 됩니다. 그저 좋으나 하찮으나 주님 한 분  모시고 주님의 것으로 주님과 주님으로 의논하고 주님에게 받고 주님으로 관계  가지고 주님 한 분 모시고 살아야 할 우리들입니다. 또 그분 한 분 모시고 사는  데에 그분 한 분으로 부족함이 있습니까? 부족함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주님을 가까이 할 때 멀리 할 때 우리가 얼마든지  체험했습니다. 가까이 할 때 멀리 할 때 체험했는데. 주님과 자기가 평생에  처음으로 제일 가깝게 되어진 때라고 하면 주님과 자기가 처음으로 제일  가까워진 때라고 하면은 가까워진 그때는 이제까지의 땅 위의 모든 때보다도  가장 행복스럽고 모든 것이 충족하고 부족함이 없는 만족의 만족을 이룬 것을  우리가 다 체험을 했습니다. 신앙이 어리든지 장성하든지 그가 주님을 만나는  중에 최고로 가깝게 만났으면 최고로 행복되고 만족한 그 세계를 만난 것을 그가  확실히 알 것입니다. 만일 자기에게 주님을 만난 것이 최고가 되지 못했다면  그보다 주님과 더 가까워지게 사귀어졌던 때가 과거에 있었던 그 자리를 도로  찾지 못한 연고이지 주님 만나서 부족함은 없습니다. 주님 만나고 난 다음에,  만났더니 후회된다, 만났더니 부족함이 있었다, 만났더니 속았다.' 그라는 사람  없습니다. 우리가 다 체험하지 안했습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항상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주님 한 분 모시고 그 분으로  전부 삼아서 사는 것이 하늘나라이니 이 일을 자꾸 연습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복잡 다단한 세상 속에 우리를 살게 해 주시는 것은 사이비한 그런 거 같은데  아니고 양식 같은데 양식이 아니고 사랑 같은데 사랑이 아니고 친구 같은데  친구가 아니고 기쁨 같은데 기쁨이 아니고 사이비한 거 꼭 좋은 거 같은데 꼭  좋은 거 같은데 잡고 보니 그게 아니라는 이 허와, 세상에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이렇게 헛된 것이 복잡한 그 콩지름(주: 콩나물)같이 소복한 그 사이에서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는 이 생활을 연성시키기 위해서 이것도 이것도  제하고 이것도 벗고 이것도 헤치고 이것도 헤치고 모든 것을 헤치고 주님 한 분  만나 그분 하나로서 만족이 되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집니다. 그분은 나의 전부  중에 전부다. 모지라는게 없다. 이것을 느끼고 찾아서 주님 한 분으로 이  세상에서 자기의 전부로 삼고 만족을 삼고 영원히 부족함이 없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말씀하신 대로 부족함이 없는 이 사실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실상으로 자기가 입어서 이 실상의 행복과 생명과 평강과  염려 없는 그 기쁨의 생활을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자꾸 연습해야 되겠습니다.

 연습해서 어데서든지 우리는 '아, 이거 아니면 안 되겠는데' 하는 문제가  옵니다. 거게서 그때를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그 문제가 올 때에 땅에 있는  그걸 가지고서 나로 하여금 해결 짓게 할라고 그것 준 것 아닙니다. '이거  아니면 안 되겠는데'해서 고민하다가 어떨 때는 고민하다가 그것이 이루어지면은  '아, 됐다.' 했지마는서도 이루어지고 '됐다' 하고 난 다음에 뒤좇아서 꼬리를  물고 그거 가지고는 만족이 안 된다는 것을 우리가 찾고 있습니다. '이거  가지고는 안 된다 안 된다.'해서 어떨 때는 하나님께서 안 된다고 이거 안 된다  뭣이 있어야 되겠는데 찾고 찾아도 그게 기어코 안 돼서 이 죽을 지경에 다다를  때에는 그때 이제 급하게 극단에 이르면 손골에 몰려서 갈데 없어 가지고서  극단이 돼 가지고서 더듬다가서 참 급하니까 가시나무 잡듯이 급하니까 주님  잡아 가지고 어째 만나서 주님 잡아 가지고 주님 만나서, 만나고 보니까 과거에  이거 문제 저거 있으면 될 건데 그거 없이 주님 만나니까 주님 한 분 가지고서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경험하고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렇게 우리를 세상에 두시고 이렇게 저렇게 길러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주님 한 분으로서 우리의 전부가 될 수 있고 만족이 될 수 있고 못  할 것이 없는, 왜? 그분은 창조주십니다. 엿새 동안에 우주와 영계를  만들었습니다. 엿새 동안에 우주와 영계를 만들었습니다. 영계를 우주와 같이  만든 것은 마태복음 25장에 보면은 약간 거게 표시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엿새  동안 만드신 그분 그분이 내게 있으면 다 됐지 그분이 없는거라도 엿새 동안에  우주를 만들었으니까 그분이 만들라면 내게 있어야 할 필요한 것을 못 해 줄  것이 뭐 있겠습니까? 이것도 믿는 대로 갑니다. 믿으면 주님은 그런 주님으로  그에게 역사해 주실 것이고 부인하면 그 사람에게는 부인당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조만간에 세상을 떠나서 주님 한 분 모시고 성도들과   더불어 같이 살아 성도들과 주님과 이렇게 같이 살아 성도들은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고 세포가 있지만 한 몸 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은 사람은 이   교파에 있든지 저 교파에 있든지 어느 시대에 있었든지 세계 어느 구석에   끼였든지 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인 것을 깨닫고 우리는 여게서 모순된   그 과오를 범하지 말고, 우리가 이 옛사람으로서 벌써 내가 있기 때문에 내   교파가 있지 새사람 되는 데는 교파가 없습니다. 새사람 되는 데는 교파가   없고 새사람 되는 데는 거게는 대적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 받은 자이면   다 내 몸이요 내 눈이요 내 귀요 내 지체입니다. 나 같지 않다고 우리가   오해하기 쉽습니다. 자기 같지 않다고. 어떻게 자기가 눈이라면 다 눈이   되면은 어찌되겠습니까? 다 발이 되면 어찌되겠습니까? 발도 있고 눈도 있고   입도 있고 귀도 있고 있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그 몸에 속한 지체 중에 한 부분인   지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언제든지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해서 땅위에 있는 동안에 영원히   같이 살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받은 성도들을 영원히 같이 살 터이니까   우리는 조심 있게 지내야 되겠습니다. 여게서 이리저리 대적하고 하는 그것은   다 벗고 갑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에 갈 때에 여기서 시기하는 것도   있고 미워하는 것도 있고 다투는 것도 있고 악독도 있고 모든 거 다 우리가   가져서 우리는 만신 창이 들어 있는 사람이요 쓰지 못할 이런 마목 저런   마목이 가득히 붙어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 둘을   치료해 가지고 갈 수 있고 치료하지 못한 것은 그대로 세상을 떠날 때에는   주님이 다 이런 것을 다 씻습니다.

   다 씻어서 악독도 씻고 사욕도 씻고 시기도 씻고 잔인도 씻고 거짓도 씻고   씻어서 안 된 것은 다 빚고 깎고 다 예수의 피공로로 다 씻어서 나중에   그리스도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 주님의 속성, 주님과 꼭 같은 존재 주님과   꼭 같은 사람. 주님과 꼭 같은 성질, 주님과 꼭 같은 그 인품, 주님과 꼭 같은   사랑. 주님과 꼭 같은 고것이 크든지 작든지 많든지 적든지 고거 외의 거는 다   씻어서 깎아서 다 제해서 유황불 구렁텅이로 다 보내 버리고 고대로 주의   형상화된 고것만 부활해 가지고서 하늘나라 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미움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시기가 없습니다.

 원망이 없습니다. 불만 불평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크든지 작든지   그리스도의 형상 외에는 없습니다. 다만 그 나라에는 큰 자와 작은 자로   나타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혹 생각하기를 '아. 그래도 나는 작은 자가 되기를 원한다'   생각하겠습니다. 왜? 아무리 성자라고 말해도 성자라고 말해도 늙은 노인 보다   철없는 아이라도 갓난 어린 아이 보고서 모두 다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내가   하늘나라 가서도 갓난 어린아이와 같이 됐으면은 그 작은자 되고 좋지 않겠나   싶으지마는서도 그것은 잘못 깨달음입니다.

   세상에서 왜 갓난 아이를 좋아하고 큰 사람을 다 사람들이 그리 사람들이 다   염증내느냐 하면은 그것은 다 죄악이 묻어 그렇습니다. 죄악이 묻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것이 사람인데 아무리 죄를 짓는 살인 강도라도 그   속에도 진정 원하는 것은 의인을 원합니다. 살인 강도라도 그 살인 강도라도   살인 강도를 죽음에서 건져내는 그 사람을 원합니다. 살인 강도라도 사람   위해서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희생해서 남을 구출하고자 하는 봉사의   사람, 사랑의 사람, 자비의 사람, 긍휼의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살인 강도,   악독 잔인한 사람도 그 속에 진정 소원은 그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되어 있어 이것이 자기의 본능이요 본성이기 때문에 제일 그 추하고   더럽고 미운 것이 덜 묻어 있는 덜 더러워 있는 것이 어린 아이기 때문에 갓난   아이에게 어리기 때문에 어린 아이를 보고 다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것입니다.

   좋아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을 다 싫어하고 하는 것은 뭐이냐? 그는 아무리   평가적으로 논리적으로 서로 관계적으로는 내게 큰 은택을 입힌 사람이지마는   큰 은택을 입혀서 나는 그의 덕택으로 산 사람이라도 내가 평가할 때에   아이보다 더럽다 그말이오. 더럽기 때문에 내가 본능적으로 아이를 좋아하지   그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세상에서 아이를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물들지 안 한   그것을 가치로 여겨서 좋아한다는 것이지 작은 것이 좋은 것 아닌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전부이 그리스도의 형상화된 것만이 가기 때문에 작은 자보다 큰   자가 제일 좋습니다. 큰 자가 제일 영광스럽고 존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이 말씀 중에 하나라도 지키지 안하고 버린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을 것이요 하나도 버리지 안하고 다 지킨 자는   하늘나라에서 지극히 크다고 일컬음을 배울 것이라고 그렇게 큰 자를 높이   평가한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그런고로 지옥은 하나님을 필요 없는 존재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 없는   존재로 전부 제것 가지고 제힘으로 산다는 것이 성공 같고 대단히 강한 자   같으나 그는 참 성공 같은 실패요 강한 자 같으나 약한 자입니다. 부자 같으나   가난한 자입니다. 털끝만한 것도 당신의 것이 아니면 나는 거지입니다. 당신의   것이 아니면 나는 일 초도 살 수 없고 당신이 아니면 나는 지극히 작은 것도   나를 위해서 보호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당신만이 자기의 필요로 당신의   은혜만이 자기의 필요로 한 그 자는 거지 중에 거지지마는서도 그 자는   하늘나라의 부자 중에 부자되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오늘이라는 이 시대에 시기를 놓치지 말고 우리는   준비해야 될 것입니다.

   거게 네째로 보니까 음부에 있는 그 홍포 입은 부자의 소원이 있습니다.

 홍포 입은 부자가 소원을 두 가지를 소원을 했습니다. 홍포 입은 부자가 두   가지를 소원했는데, 하나는 그렇게 모든 것이 구비했지마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서 그것을   소원했습니다. 뭐 거게서 나를 큰 벼슬을 주십시오. 권세를 주십시오. 뭐 어떤   영광을 주십시오. 명예를 주십시오. 아무것도 소원하지 안했어. 아무것도   소원하지 안했어. 다만 당면한 물 한 방울 소원했어. 아무것도 그 홍포 입은   부자가 다른 거 소원이 없었어. 다른 소원이 없었어. 그가 땅 위에 있을 때는   아마 소원이 숨질 때까지는 그의 소원은 가득 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딱 한   장면이 딱 바꾸어지고 나니까 홍포 입은 부자에게는 똑 두 가지 소원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아무것도 없어. 물 한 방울이 다급합니다. 물 한 방울이   필요했어.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이 지으신 내가 짓지 못하고 내 힘으로 짓지   못하고 당신이 지은 당신이 우리가 천해서 그까짓 거야 뭐 아무도 감사하지 못   한 거 하나님이 지으신 물 한 방울, 하나님이 지은 것 중에서 제일 천하고   우리가 천하게 쓰고 많이 있는 그 물 한 방울 그걸 요구했습니다. 여러분들.

   이렇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이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무진장으로 줄라고   했는데 그분의 것을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것이 영원히 당신의 것으로 살 수   있는데 당신의 것이 필요 없고 자기의 것으로 세상 어떤 인간의 것, 뭣의 것,   어떤 것의 것 이것을 원하는 사람은 생명이 딱 끝나는 그 다음부터는 주님과의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의 주님에게 얻는 사람이 됩시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주시고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주시고 교만 부리지않습니다.

 자세 부리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에게 얻어 살기를 연습 합시다. 왜?   그것이 당신이 창조하신 당신의 본능이요 당신의 본성이요 우리에게 그   정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 형제 다섯이 있으니까 이 고난의 곳에 오지 않도록, 저희의   만물관이 완전히 이제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의 만물관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고 소유관이 틀렸다는 걸 알았고 빈부관이 틀렸다는 걸 알았고   행복관이 틀렸다는 걸 알았고 존비 귀천관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완전히 홍포 입은 부자는 만물관이 뒤비졌습니다. 완전히 만물관이 뒤비졌어.

 이러니까 자기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음부에 가도 자기 형제를 생각했으니까   그 형제 우애를 얼마나 가진 사람이겠습니까? 우애를 가져서 그 형제에게   필요한 거는 다 해 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 해 준 그것이 그 형제를 속이고   망하게 했고 형제를 영원한 불구덩이에 오게 한 그것이 되었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형제를 망쳤다는 것을 자기가 자각하고서 거게서 형제에게   가서 이 불구덩이 오지 않도록 전달해 달라고서 그것을 소원했습니다.

   그 홍포 입은 부자는 유힝불 구렁텅이에서 두 가지 외에는 소원이   없었습니다. 이것 두 가지만 소원했습니다. 하나는 그가 가졌던 모든 영광과   존귀는 다 없어졌고 물 한 방울을 요구해도 그것이 요구대로 되어지지 않는 그   가련한 처지에 있었다는 것,    다만 남은 거는 뭐입니까? 남은 거는 야고보서 5장 5절에 보면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도살의   날'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짐승을 잡을라고 하는 것이   도살막 아닙니까? 네 마음을 두드려 잡을 때에 살찐 소는 고기가 많은 것 처럼   도살의 네 마음을 때려 잡을 때에 때려 잡힐 양이 커지도록만 네가 만드는   자이다.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는 것뿐이다. 이러니까 홍포입은   부자도 세상에 그가 누리고 한 그 모든 것이 자기에게 그 모든 것이   없어지니까 세상에서 그것을 구비하게 누렸을 때에 누린 그 호화로운 그 마음   그놈만 커져 놨으니까 그날 고통당하는 거지보다도 고통당하는 그 고통의   마음만 더 살찌워서 크게 된 것뿐이지 딴거 뭐 있습니까?    우리는 거게 가지 안할 사람이라도 우리가 지금은 이렇지만 아마 우리도   세상을 떠나면 그럴 것입니다. 지금 모두 젊은 사람들은 다 그러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이거 자녀를 낳았으니까 남보다도 실력을 구비해서   이렇게 세상에서 다 지지 안하고 빼앗기지 안하고 모든 세상을 다 사냥해   가지고서 잘 살게 할까 실력을 갖줘 줄까 하는 데만 분망할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에스겔 19장에 보면은 젊은 사자를 만들어 가지고 사냥하는   사냥하는 이 사냥을 연습시켜서 사냥을 연습해 가지고 어찌되든지 모든 것을   다 사냥해 가지고서 다 잡아다가서 잘 먹고 이렇게 하도록 기르나 고   마지막에는 그것을 죽여서 잡아서 갈고리에 끼어 가지고서 하나는 그   바벨론으로 보내고 하나는 그 애굽으로 보낸다고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죽기 전에 홍포 입은 이 부자가 그때의 만물관이 달라진   거와 같이 인생의 행복관이 달라진 거와 같이 성공관이 달라진 거와 같이 오늘   우리가 달라져야 될 것이오.

   나는 나이 늙어서 죽을 때가 가까이 오니까 달라졌습니다. 내가 한 스 물   다섯 살에 예수 믿었는데 삼십 전에 내가 이렇게 지금 마음을 가졌으면   자녀들이 다 그렇게 되지를 안했을 것입니다. 내가 사십돼도 사십 돼도   세상에서도 잘 되면 좋아했고 높아지면 좋아했고 뭐 세상적으로 뭣이든지 이래   돼지면 좋아했지 좋아하고 그것을 부러워하고 좋아했지 그것이 홍포 입은   부자가 이렇게 음부에 가 가지고서 다 그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다 자기를 멸하는 것뿐이다. 이런 그 만물관을 바로 가지지를   못했습니다.

   내가 오전에도 우리 집은 콩가루 집이 됐다하는 그 말은 뭐 경제적으로 됐다   말 아니오. 경제적으로는 다 미국에서 다섯 가 있는데 말 들으니까 다 중류는   살고 있다고. 다 저거 집 있고 다 차도 있고 다 직장도 있고 뭐 살지마는서도   그거 하면 뭐입니까? 하나도 목사의 자식들이 목사가 안 됐으니까 이렇게 좋은   길이 있다고 이렇게 제일 좋은 길을 있다고 말해도 내 말을 듣지 안하고   그랬으니까 그거 다 자식 농사 헛일 아닙니까? 다 그래 말하는 것입니다. 뭐이   세상적으로 망했다는 말 아니오.

   편지 오기를 거게서 뭐 이렇게 무슨 뭐 기술이나 돈을 얼마를 번다고 하는   그 소리를 나는 한 말로 말해서 그라기 때문에 '그저 도야지는 도야지는   도야지로 살아야 안 되나?' 나는 그들을 도야지라는 그 말을 언제든지 빼지   않습니다. 너거는 도야지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안 해 주시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우리는 이 홍포 입은 부자가 음부에 가 가지고서 그 두 가지 소원하는 그   소원을 우리가 묵묵히 생각합시다. 묵묵히. 세상에서 세상에서 주님에게   구해서 얻지 안한 것은 그 나라에서 구하지 못해. 그 나 우리나 꼭 같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신에게 하나 구해도 얻어 보는 연습을 하고 둘 구해서   얻어 보는 연습 했으면은 그 사람은 하늘나라 가서 둘을 당신에게 구해서 둘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백 가지를 구해서 얻은 사람은 백 가지를   구해서 얻을 것이요 천 가지 만 가지 모든 것을 당신에게 무엇이든저 구해서   얻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가서 모든 것을 구해서 얻을 것이요, 땅 위에서   당신에게 구해서 얻지 안하고 제힘으로해서 얻은 사람은 그 나라에 새로   입회해 가지고서 당신에게 구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구할 권세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 나라의 기초입니다. 땅 위에서 당신에게 구해서 얻지 안한 자가 그   나라에서 구해도 얻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하늘나라의 터입니다. 이래서   '자기를 위하여 영원한 터를 마련하는 것이니라' 그렇게 디모데전서 6장에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다섯째로. 죽은 자의 활동은 죽은 자의 활동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그 활동 범위가 제한돼 있습니다.

   낙원에 있는 성도는 낙원 안에서만 활동하지 무궁한 천국에는 아직못   갑니다. 낙원 안에서만 활동하고, 안 믿는 사람은 음부에서만 활동합니다.

 거게서 이 세상에 올라면 올 수 있는 줄로 그런 생각 가지면 안 됩니다. 믿는   사람은 낙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 세상에 못 옵니다. 아브라함도 이 세상에   못 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세상에 못 옵니다. 낙원에 가서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음부에 가서 있습니다. 못 옵니다. 제사를 지내면 뭐 와 가지고서   운감을 하는 줄로 알고 이걸 모르기 때문에 사무엘이 올라왔으니까 사무엘이   참 사무엘임니까? 그 사무엘이 올라왔다는 말을 묻는 것은 점쟁이가 불러   올렸으니까 그 사무엘에 대해서 묻지 그 믿는 사람들이 낙원에 있다가 이   세상에 왔다 갔다 하는 줄로 이렇게 이 구원관을 낙원관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면 못 옵니다. 예수님 재림 때에 같이 옵니다.

   재림 때에, 부활하고 난 다음에. 부활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우주를   다니지마는서도 자기가 물질계 우주를 다닐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것 만치   우주를 달립니다. 영계를 다닐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것만치 영계를 다닙니다.

 우주에는 자기의 몸이라는 몸을 우주에 다닐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자기의 몸의   기능을 살렸는지, 영계에 얼마든지 다닐 수 있는 그 기능을 어느 정도   살리는지, 우리가 볼 때에, 우리가 무식한 마음으로 볼 때에, 무식한 지식으로   볼 때에는 비행기라면 저거는 일 초 동안에 억억만 리라도 갈 수 있겠다   싶으지마는서도 비행기를 아는 사람은 그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못합니다.

 아주 느립니다. 그 힘에 따라서 힘에 따라서 십 배 십 배 빠른 것도 있고 힘에   따라서 백 배 빠른 것도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이 하늘나라에   가서 타고 다닐 수 있는 이 마음의 기능. 몸의 기능, 물질계에 타고 다니는   몸의 기능 이것을 이 세상에서 그 기능을 어떤 사람들은 심히 길러서 그 힘이   강하기 때문에 강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몇십 배 몇백 배를 빠르게 널리 다닐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어느 한계점 내에만 다니지 그 너머를 가지 못 해.

 이것을 가리켜 한 고을 주고 두 고을 주고 열 고을을 주고 그의 다스리는 그   활동 범위에 제한되어 있는 것을 성경에 누가복음 19장에 말씀을 해   놓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사 지내면 온다고 그런 생각 가지면 안 됩니다. 안 믿는   사람은 음부가 있고 믿는 사람은 낙원에 있고 갔으면 예수님 재림 전에는   아무도 오지 못합니다. 아브라함도 못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같이 와 가지고 믿는 사람은 부활하고 생명의 부활 받고 안   믿는 사람은 심판의 부활을 받아 가지고서 유황불 구렁텅이에서 다시 그   자리를 옮겨 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고, 믿는 사람은 하늘나라애 가서   자유하되 자기가 이 세상에서 실력을 기른 것만치 자기가 세상에서 자기의   신덕이든지 자기의 활동의 범위가 뻗쳐 있는 것만치 자기는 뻗쳐 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무한하지마는서도 자기가 믿은 것만치, 안 믿으니까 어떻게   자기 것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호호 양양한 영원 무궁한 영원한 영원 무궁한 영원 무궁한 이   한없는 이 세계가 있어서 얼마든지 일 분 일 초에도 얼마든지 점령해도 다 못   다 점령할 수 있는 이런 넓고 넓고 영영한 우리의 희망이 있는데 이 배암에게   속아 가지고서 썩어지고 취해 봤자 아무것도 아닌 요거 취할라고 요 조그만한   조브라운 요 욕심에서 요게서 만족하고 요것 가지고서 요것만 보고 하나님만   배반하기를 진리를 배반하기를 영감 배반하기를 예사롭게 하는 우리는 참   소경입니다.

   이래서, 소경이 아니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어리석은 사람이라 그렇게   말하기 쉬워. 미친 자. 어떤 사람은 '아, 나는 우매무지한 자업니다. 어리석은   자입니다. 나는 미친 자입니다.' 자기가 참 아무리 이리 봐도 미친 자, 저리   봐도 미친 자 '주님이여 내가 어리석어 그런 거 아닙니다. 내가 완전히 미쳐서   정신이상이 돼서 본정신이 없어 그렇습니다. 본정신이 없어 그러니 당신이   살려 줘야 되지 뭐 연구하면 알 만한 제게가 아닙니다. 완전히 미쳐서 정신이   이상됐으니까 미친 자이니 미친 자를 뭘 당신이 감고 있습니까? 미친 자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미친 자입니다.' 하면서 자기 미쳤다 하는 것을   오랫 동안 울면서 하나님 앞에 그 호소하는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 홍포입은 부자는 불택자이지마는 그는 회개를 못   했습니다. 회개하면 되는데 회개를 못했습니다. 거게서 지옥에서라도 회개만   하면 회개만 해도 그래도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인데 회개를 못해. 자꾸 그래만   나갔지 회개를 못해요.

   그 회개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하는   그 말은 그 성경에는 율법과 은혜의 둘이 있는데. 율법과 은혜가 있는데   율법도 은혜도 있어서 율법으로서 모든 것을 다 소상히 알 수 있고 은혜로서   다 사유함을 받을 수 있는 그 길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들을 것이라   '그렇지만 죽음 가운데 살아가면은 다 들을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비록 죽은 가운데에 살아났다 할지라또 듣지 아니하리라' 그 말은   회개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택한   자라야 될 수 있고, 구속을 입은 자라야 될 수 있고 중생된 자라야 회개가   되는 것이지 이 세 가지 순서가 없는 사람은 회개가 안 됩니다. 회개를 못   합니다. 택한 자도 하나님께서 회개를 시켜 주시면 회개됩니다. 안다고   회개하는 것 아닙니다. 설교한다고 회개되는 것 아니오. 알고 주장한다고   회개된 것 아니오. 하나님께서 회개를 시켜주셔야 회개를 합니다. 당신이 시켜   주시면 회개가 됩니다. 돌아서게 됩니다. 떠나게 됩니다.

   제가 원망 불평을 불만 불평을 회개한 것은 얼마 전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해 주시니까 당장 회개가 되는데 당장 되는데, 마음에 그라고 나서 암만   회개해야 된다 해도 안 되는데 두 성구를 주니까 내게는 회개에 대해서 확신이   왔어.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는데 지체마다 다 같은 일 하는 것이 아니고 각각   지체마다 할 일이 다르지 않느냐? 너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양을 수만을   주었고 네가 설교에 은혜 줬으면 그걸로 가지고 너는 족하고 거기서 너는   충성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지 뭐 네가 공기 좋은 기도원 없다. 물   좋은 기도원 없다, 뭐 목사 자식이 없다. 네가 그리할, 네가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이 사람에게 장점 있는 것 보고 그것 내게 주십시오. 내게 없으면   섭섭해 그러고 분에 울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저 장점 모든 사람이 하나 둘   장점 좋은 거 받은 거 가지고 있는데 받아 가지고 있는 거 그거 네게 없으면   불만 불평한다면 네가 하나님 될려는 놈이 아니냐?' 하는 것으로서 마지막에   저에게 책망하시기 때문에 내가 완전히 거게서 이제 돌아섰습니다. 주님이   붙드셔서 다시는 그 죄는 범하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서는 거 아니고 당신이 붙들어 주셔야 된다는 걸 내가 믿습니다. 회개는   당신이 회개시켜 주셔야 되지 당신이 회개시켜 주시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할라고 애도 쓰지마는 그것보다도 회개를 시켜   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되겠고, 회개할 것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야 되겠고,   회개할 수 있는 성구를 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되겠고, 회개할 수 있는   성신의 감화를 달라고 기도해야 되겠고 회개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주님이 주셔서 회개케 한 것은 절대 되풀이가 없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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