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

 

1984. 12. 8. 토새벽

 

본문 : 누가복음 16장 19절∼31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번 주일 공과의 제목은 나사로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부자와  나사로의 이것이 비유인가 사실인가 하는데 대해서 우리가 확정을 지어야  합니다. 어쨌든지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믿지 못하도록 이렇게 유혹을 줍니다.

'사실이 아니고 비유이니까 뭐 그렇게 심각할 것 없다' 요렇게 또 마귀가 유혹을  줍니다. 이것이 비유이면 그 실상이, 비유 아니고 실상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과 또 비유라고 하면 어느 것이 강합니까? 이 실상 이것이 강합니까 비유로  말한 것의 그 실상이 강하겠습니까? 비유로 말한 것의 그 실상이 이 실상을 말한  것보다 더 강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면 마귀의 유혹을 받지 않는데 여게서 마귀란 놈은  또 사람들을 흐트러지게 만들어 가지고 고만 유혹을 줍니다. 이 뱀은 마귀는  어짜든지 우리를 요렇게 조렇게 꼬아 가지고 우리가 전지자가 아니고 우리가  통달자가 아니기 때문에 요렇게 꾀울라고 애를 써서 기묘하게 꾀웁니다. 넓게  해서 꼬일 상바르면 넓게 하고. 좁게해서 꼬일 상바르면 좁게하고 또 길게해서  꼬일 상바르면 길게 말하고, 짧게 해서 꼬일 상바르면 짧게 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안하고 어쨌든지 우리를 꾀우기만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첫째는 비유라도 더, 비유라면 더 실상은 더 이보다 더할  것이고 더 강할 것이고, 또 실상이면 이대로의 실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여기에서, 이게 비유가 아니고 이는 실상을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다 타락 후에는 일방적 지식만 가진 것이 사람들입니다. 죽음  이편만 알고 생각하지 죽음 너머 것은 생각지 못하는 것이 다 어두워진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답답하셔서 사람이 죽은 뒤의 그 세계를  우리에게 하나 끌어다가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나사로와 부자는  주님이 죽은 후 사후 세계의 이 두 사람을 끌어다가 우리에게 보여 줬습니다.

 그러면, 사후의 이 두 사람을 하필 끌어다가 보여 주신 것은 두 사람은 대조가  되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을 끌어다가 보여 줬습니다. 홍포 입은 부자는 세상에서  가장 모든 것이 구비하고 참 소원 성취대로 하고 행복된, 제일 세상에서  행복되다고 하는 사람이고. 또 나사로는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아무라도 인정할 수 있는 대조적인 이 두 사람을 우리에게 갖다 보였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이 두 사람은 하나는 극히 행복되고 하나는 극히 가련한  이 두 사람의, 참 세상에서는 양극을 걸은 사람입니다. 하나는 행복으로 아주  극도의 행복을 가진 사람이고, 하나는 아주 극도의 빈곤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다 죽음 이편만 보고 죽음 저편을 보지를 못하기 때문에 죽음 이편만  보지 말고 죽음 저편을 보라 하시는 것으로서 사후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러면, 사후 세계를 볼 때에 심히 행복된 부자와 심히 곤고하게 산 사람과 그  두 사람의 사후 세계를 보기 전에는 참 나사로는 불쌍한 사람이요 부자는  행복스러운 사람이었지마는서도 이 세상과 사후 세계를 연결을 시켜 놓고 따져  보니까 이 거지는 부자에 비해서 뭐 십 배 행복 된게 아니라 천 배 행복된게  아니라 억만 배도 더 행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왜? 이 사람은 찍해야 행복되게  살아 봤자 그저 몇 십 년 살았는데 고통은 영원무궁토록 불꽃 가운데에서 물 한  방울을 요구해도 그게 이루어지지를 못하는 그런 가련한 가운데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게 됐으니, 하룻밤 나그네와 같은 짤막한 세상에서 고생을 했다  할지라도 고 생은 짧게 하고 행복은 영원히 누렸으니까 나사로가 부자보다 훨씬  행복 됩니다. 부자는 행복은 짤막하게 누렸고 그 불꽃 가운데에서 형벌은 영원히  받게 되니까, 짧은 행복 누리고 영원한 형벌, 불꽃 가운데에서 멸망의 고통을  받는 그 부자보다는 짧은 고생 당하고 무한한 행복을 누린 나사로가 행복된 것을  우리는 여게서 판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항상 생각할 때에 이 사전 세계와 사후 세계를 이렇게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일을 우리는 언제든지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사전, 죽기  전 세계와 죽은 후 세계를 언제든지 기억해야 되겠고, 죽은 후 세계는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영원합니다. 그는 천 년 만 년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영원히 끝이 안 납니다. 영원합니다.

또 이 세상은 얼마나 가느냐? 그것은 우리가 산 사람을 보면은, 지금으로 말하면  많이 산 사람이 신문에 백 삼십 세까지 사는 사람이 있는데. 많이 살아 봤자 백  삼십 세요 또 짧게 사는 사람은 뭐 나자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집사가  기도할 때에 저는 들으면 늘 '우리는 인생의 종말 시간을 모릅니다.' 하는 것을  자꾸 기도하는 걸 들었습니다. 인간의 끝 시간을 모른다. 종말 시간을 모른다.

오늘이 내 종말인지 세상살이가 오늘 끝나는 날인지 내일 끝날라는지 오늘 해  전에 끝날지 또 몇 십 년에 끝날지 우리의 생활의 끝나는 그 시간은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만일 인생이 그 사는 것이 끝난다고  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 그 사람은 영원한 불구덩이로 가서 영원히  불구덩이에서 형벌 받아야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에서  고생이 심하다 할지라도 세상살이가 끝나면 그때부터는 영생을 얻는 영광의  나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전 세계와 사후 세계, 인생들에게는 두 세계가 있다. 사전  세계는 짧고 사후 세계는 그 끝이 없는 영원히 길다. 또 사전 세계는 언제  끝날란지 우리는 모른다. 사전 세계는 내가 건강하고 젊지마는서도 무슨  차사고로 어찌 될란지 뭐 어찌될란지,  나는 기억이 흐려서, 기억할 거는 꼭 기억할 거는 몇 십 년이 가도  또록또록하게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기억 안 해도 될 것은 그만 금방 들어도  모릅니다. 어제도 어떤 사람이, 뭐 누가 죽었는데 어쩌다 죽었다 하더라? 금방  죽었다 이래요. 오늘 초상을 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오? 아, 세째 며느리, 저녁  잘 먹고 그랬다 했지? 아침 잘 먹고인가 저녁 잘 먹고인가, 젊은 사람이, 나이가  몇 살 안 됩니다. 아마 한 서른 몇 살 될 겁니다. 사십 안 됐지요? 네,  그랬는데, 아침 잘 먹고 그만 죽어서 오늘 장사지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살이는 언제 끝날는지 모른다는 것을 언제든지 우리는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나는 살고 있다,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만  생각하고 내 살아 있는 생명은 언제 끝날는지 모른다 하는 요것을 생각지 안하면  일방 지식입니다. 그거는 일방 지식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만 생각하는  지식만 가지고 언제 죽을란지 모른다 하는 이것을 생각지 안하면 일방 지식이기  때문에 그 지식은 다 미친 지식이요 그 지식은 참 어리석은 지식입니다. 또  우리는 요거 일방 지식을 가지지 말고, 살았느냐 언제 죽을지 모른다. 살았느냐  죽는다는 요 쌍방 지식을 가져야 하겠고,  또, 세상에서 어떤 부귀 영광을 누리느냐? 또 죽음 너머는 어찌 되느냐?  사전에는 어떻게 살며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느냐. 요것도 또 쌍방 지식을  가져야 됩니다. 죽기 전 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요것만 보는 고 일방 지식을  가지지 말고 죽은 후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그것을, 요것을 또 아는 요 쌍방  지식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살았느냐? 죽는다는, 사는, 살아 있는 것과 죽는 거 요 쌍방 지식,  쌍방, 요 양쪽 쌍방 지식을 가져야 되겠고. 또 금생과 내세 사전과 사후, 죽기  전과 죽은 후의 이 두 가지 세계를 우리가 생각하는 요 쌍방 지식을 또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일방 지식. 마귀란 놈은 자꾸 일방 지식으로 우리를 죽입니다. 일방  지식으로 우리를 죽이고 망하도록 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의 유혹에 일방  지식을 가지지 안해야 됩니다. 일방 지식 가지면 그거는 마귀에게 벌써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일방 지식을 가질 때에는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로마서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마귀란 놈이 이리 치우치게 하고 저리  치우치게 하고 다 헛된 길을 걸어서 다 무익하게 되고 말았다. 일방 지식을  가지게 해 가지고서 사람을 망친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요 두 가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요 두 가지 쌍방 지식을 우리가  가져야 될 것이고, 또 사전 세계와 사후 세계는 다르다 요것을 또 요 쌍방  지식을 가져야 될 것이고,  세째로는, 그러면, 홍포 입은 부자와 나사로를 비교해 보자. 비교해 보자.

그러면, 비교해 보면 어찌 되느냐? 홍포 입은 부자는 참 불쌍하고 그 이상  가련한 사람이 없었고 나사로는 행복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나사로와  부자를 우리가 비교하는 이 나사로와 부자와 비교하는 요 쌍방 지식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금생과 내세의 쌍방 지식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금생에는 금생은  짧고 내세는 영원하다 하는 쌍방 지식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내가 살았느냐?  오늘 죽을는지 내일 죽을는지 모르는 이 죽음이 내 앞에 지금 닥쳐 가지고 있다  하는 요 쌍방 지식을 우리가 가져야 되겠습니다.

 또, 이 홍포 입은 부자가 자기의 가진 모든 구비한 것을 일단 죽을 때에 하나도  가지고 가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도 가지고 가지를 못했습니다.

 자기가 뭐 단단히 간수해 놔서 은행에 저금해 놨고, 뭘 재판소에 토지 대장에  자기 걸로 만들어 놨고. 금궤 안에, 금궤 안에 집어넣어 놓고 어떻게 단단히  간직했다 할지라도 일단 생명이 딱 떠나면 그 모든 것은 하나도 가지지 못하고  다 손을 펴고 제 마음대로 가졌던 것을 다 내놓고 가야 됩니다. 하나도 가지고  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홍포 입은 부자가 그렇게 모든 것이 구비했지마는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또, 이 거지 나사로는 그렇게 몸에는 만신창이고 고통이고 가난하고 참  비참하고 가련함이 있었지마는 일단 죽으니까 그것이 하나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그 병이 따라가지 못했고 병신이 따라가지  못했고, 가난이 따라가지 못했고, 고통이 따라가지 못했고 영광스러운  사람으로서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는 모든 인간으로서 구원  얻은 사람 중에 제일 대가리되는 머리되는 영광스러운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속해도 좋은데, 아브라함의 권속이 돼 가지고 그 집에 살아도  좋은데 아브라함이 사는 세계에 살아도 좋은데 아브라함의 안품에 안겼으니까  그는 얼마나 행복됐습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사전 행복이 죽음에 따라가지 못한다. 사전 고통이 죽음에  따라가지 못한다. 사전의 행복도 고통도 따라가지 못한다. 다만 그가 살았을  때에 행동을 잘 했든지 못 했든지 그것만 가지고 가게 된다. 행동만 가지고 가게  된다.

 행동만 가지고 가게 되는데. 나사로가 무슨 행동을 했으며 부자가 무슨 행동을  했느냐? 부자는 오만 일 구비한 일, 오만 거사와 대사를 많이 했습니다.

나사로는 그저 다만 주님 믿는 거 그거 하나밖에는 하지 안했습니다. 이러니까  나사로는 주님을 보고 주님이 어떤 형편에 해 줘도 주님이 영원무궁 세계를  자기에게 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살았습니다. 홍포 입은 부자는 모든 게  구비했지만 예수님의 피공로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받은 사람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받지  못한 사람을 우리는 비교하는 요 비교를 우리가 가져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 요것을 대조하는 요 쌍방 지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을 받지 못한 사람이 오만 것을 구비하게 가지고  호화롭게 살았지마는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가장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 일단  죽고 난 다음에 영원히 나았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온 천하를 얻어도, 온 천하를 얻어도 네가  생명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랬습니다. 그러면,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온 천하를 얻어도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님의 대속이 네게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을,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대속해 주신, 나를 지옥에서  건지시려고 당신이 지옥의 형벌을 받으셨고. 내가 영원한 멸망을 받는 것을  거게서 구출하실려고 당신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셨고, 내가 영원히  아무것도 없이 가난하게 살 이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이 살 이것을 대신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화친하는 이걸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기까지의 고난을  받아서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친해서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 하나님의 것이 다  내것이 다 되는 이런 공로의 길을 열어 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대속해 주신 이 대속은 천하보다 귀하다.

그러면, 천하보다 귀합니까? 천하 차지하는 것이 낫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을  차지하는 것이 낫습니까? 천하 차지하는 것보다도 예수님의 대속을 차지하는  것이 얼마나 낫습니까? 뭐 억억억억만 배. 억억억 만 배, 얼마나 낫다고 비교  못할 만치 낫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에 예수님의 대속이 없는,  예수님의 대속을 믿지 않는 어떤 사람보다 우리는 행복되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또 생각할 것은 나사로와 우리와 또 비교를 좀 해봐야 되겠습니다. 나사로와  우리와, 홍포 입은 부자와 나사로와 비교해 보고, 또 금생과 내세를 한번 비교해  보고, 금생은 하룻밤 나그네와 같고 내세는 영원무궁하기 때문에, 영원무궁한 긴  세계가 중대하지 하룻밤 나그네와 같이 뻐뜩 지나가는 그게 뭐 중대하겠습니까?  이러니까, 금생과 내세의 그 길고 짧은 것도 비교해 보고, 또 금생에 행복되고  내세에 불행스러운 사람 금생에 불행스럽고 내세에 행복되는 그것도 비교해  보고. 이러니까, 홍포 입은 부자와 나사로 둘을 비교해 볼 때에 그거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런데 또 우리와 나사로를 또 한번 비교해 봐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나사로나 우리나 다 예수님의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사람인데 우리와 나사로와 비교하면 우리는 나사로에 비해서 몇 백 배나  낫습니까? 나사로에 비해서 몇 백 배나 낫습니까?  ○○ 목사님이 그때에 뇌 수술 할 때에 입원해 가지고, 뇌 수술한 사람이 여러,  뭐 얼마나 수가 없을 만치 많았는데 그 사람들 다 모두 다 정신병자가 되고  미치괭이가 되고 그래 안 하면 아주 별스러운 반신불수가 되고 다 그랬는데 ○○  목사 하나만 나았어. 하나 나은 ○○ 목사는 이제 차차 차차 나아 지금은 제법  건강하고, 아주 뭐 건강하고 조금도 별 표 없이 건강합니다.

 그때에 말하기를 자기가 하나님 앞에. 하나를 말하면서. 뭐 고통은 말 할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었는데, 죽기 전에 지옥의 고통을 잠깐 좀 맛을 봤어요.

보면서 말하기를, 지금이야 괜찮지마는서도, 내가 꼭 소변 할라 하면은. 소변이  그때는 어찌 됐든간에 그 기계가 완전치 못하니까 세 시간 만에 꼭 소변을 한  번씩 해야 되는데 소변을 한 번 하기 위해서 세 시간 동안을 계속 기도했다고서.

'주여 소변 잘 누게 해 주옵소서 소변 잘 누게 해 주옵소서.' 소변할라 하면  어떻게 고통을 당하고 아프고 소변이 안 돼서 애를 먹었는지 그래 세 시간  동안을 끊임없이 소변 잘하게 해 달라고서 기도를 했고, 기도해 가지고서 소변을  잘 하게 되면은 그 다음에는 계속 어떻게 감사한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감사한지, '아, 소변을 요번에는 잘 하게 해 주시니 참 감사하다.' 소변  잘 한 것이 어떻게 행복스럽고 어떻게 감사한지 감사하고 그런 행복감을  느꼈다는 말 들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데에 우리가 그 홍포 입은 부자와 또 우리가 볼 때에 앉은뱅이  누운뱅이 문둥이 만신창. 별별 그 병 그런 모든 병들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런 병이 없이 강건하게 지내니까 강건하게 지내는 우리와 나사로와  비교할 때에 우리는 얼마나 행복된 사람입니까? 그러니까, 자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 비교할 때에 부자보다 나사로는 얼마나 행복된 사람이요, 나사로와  우리와 비교할 때에 우리는 나사로에다 비해서 얼마나 행복된 사람입니까?  우리는 뭐 이러니까 감사를 못 견디게 할 수 있는 이런 처지에 우리가 망령돼서  감사한 줄을 모릅니다. 모르는 거는 다 일방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홍포 입은 부자가 그렇게 많이 가졌지마는서도 하나도 못 가지고  갔습니다. 물 한 방울도 가지고 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다 빈손으로 가게  됐습니다. 또 나사로도 이 세상에 사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웠지마는서도 일단  딱 숨이 떨어지니까 고통은 하나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따라가지 못하고 다  행복만 그에게는 영원히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홍포 입은 부자가 세상에서. 그는 뭐 부자로 지냈으니까 머리가  좋았던 것입니다. ○○○ 씨 같은 그런 이는 다 그런 분들이 머리가 좋습니다.

부자들은 머리가 좋습니다. 또 사장들은 머리가 좋습니다. 세상에 정치가들은  머리가 좋습니다. 이 두뇌 활동이 남보다 뛰어나지 안하면 권세로도 머리가 되지  못하고, 재산으로도 머리가 되지 못하고. 사업으로도 머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머리가 좋았으니까 홍포 입은 부자가 세상에 있을 때에는 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것도 좀 해야 되겠고 저것도 해야 되겠고 뭐 할 일이 분주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으로도 잠들기 전에는 이것 저것 할 일이 많아서 모두  이런 거 저런 거 할 계획을 가지고 할 일이 많았고 소원도 많고, 소원한 일도  많고 원하는 일도 많고 필요한 일도 많고 해야 될 일도 많고 복잡했을 것입니다.

일단 죽고 나서 보니까, 그게 다 헛일입니다.

 그 홍포 입은 부자가 죽고 나서 보니까 그의 소원은 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뭐이냐? 물 한 방울 내 혀 끝에 발라 달라고서 그 소원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왜? 딴거는 해야 안 되니까. 그거 하나밖에 없었고 그거 하나  됐는데 그것도 하필 멀리라 했습니다. 멀리 있는 아브라함을 불러 가지고서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내 가지고 그렇게 해 달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멀리 있는, 멀리 있는 아브라함에게 말할게 뭐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부른 걸 보면은 아브라함이 살았을 때에 이 홍포 입은 부자와 서로  관계를 가졌던 것입니다. 이 홍포 입은 부자가 아브라함을 봤던 모양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이라는 말을 들었든지 그래 안 하면 아브라함을 대면해  봤든지 그 사람이 교회 왔다 갔다 하면서 믿기는 믿은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족속이든지 그리  아니면 예수를 껍데기로 다니면서 예배당에 다니면서 아브라함은 우리 조상이라  하는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이든지 어쨌든지 아브라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꾸  아브라함을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자꾸 부르는 거 보니까.

 이러니까, 여기에서 예수 믿으러 다니지마는서도 껍데기 예수 믿는 사람들 예수  믿으러 다니지마는서도 택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그말이오. 택함을 받지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이 계명을 상관하지 안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안하고 죄를 마구 물 먹듯 먹으면서 제 욕심대로 얼마든지 잘  사는 사람인데, 우리는 그 사람은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이 아브라함을 부르고  주님을 부르지마는서도 그게 불택자인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고 예수 믿는 사람은 저거 불택자인지 모른다 이거 불택자로 정하지는  못하지만 모른다. 내가 만일 죄를 지었다면 내가 불택자인가 해서 겁을 내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거게서 일어서야만 할 것입니다.

 홍포 입은 부자가 멀리 있는 나사로에게 하필 물 한 방울 요청한 거 보면은  홍포 입은 부자가 거처하고 있는 그 음부에는 물 한 방울도 없다는 것이 확실히  증거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 한 방울도 없다는 증거가 확실합니다. 있으면  저거가 퍼 먹든지 했지 뭐 할라고 멀리 있는 나사로를 불러 가지고서 여기까지  와 가지고 물 한 방울 왜 발라 달라고 할 것입니까? 그러면, 거게 물 한 방울이  없었다는 그 증거가 되고, 또 거기에 만일 건강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면은 그  사람에게 물 한 방울을 좀 내게 갖다 달라고 이와 같이 말하지마는서도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음부에는 홍포 입은 부자보다 건강 나은 사람이  없고, 그 무슨 소유에 나은 사람이 없고, 형편 나은 사람이 없고 전부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은 고런 가련하고 기막힌 처지에 다 있었기 때문에, 뭐 이제까지의  세상에 왔다가서 죽은 사람이 그 수가 말할 수 없이 많을 것인데 그 사람 가운데  홍포 입은 부자보다도 형편 나은 사람이 없고 가게서 보니까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가 낫기 때문에 나사로를 불러서 말한 것입니다.

 나사로를 불러 말한 거는 자기 문 대문 밖에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이렇게  존귀해지고 이와 같이 돼 가지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심부름 시키면, 과거에는  나사로, 거지 나사로 있는 거 죽으라면 죽고 살라 하면 살고 이와 같이 지금,  병신이라도 '너 이리. 걸어오라' 하면은 두굴두굴 구불러서라도 걸어가고 이렇던  사람이니까 의례히 시키는 대로 하지 싶어서 이래 했지마는서도 그게 안  됐습니다.

 그러면 거게서 우리가 볼 때에 홍포 입은 부자가 있는데 거게는 수 많은 헬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마는서도 홍포 입은 부자의 형편 보다 뭐 소유가 나은  사람도 없었고 건강이 나은 사람도 없었고 여유가 있는 사람도 없고 평안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하는 그것을 여게서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갖다  보였습니다.

 이러니까 홍포 입은 부자가 소원하는 것은 두 가지만 소원했습니다. 하나는 물  한 방울 찍어다가 내 혀에 발라서 좀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 물 한 방울만 내  혀에 한 방울만 받아 줘도 좋겠다 그걸 소원했으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겸손해졌으며 얼마나 가련한 신세가 됐으며 얼마나 허영과 허욕이 다  없어졌습니까? 이래 가지고 그걸 요구했고,  하나는 뭐 요구 했습니까? 하나는, '우리 형제 다섯이 있는데, 나는 이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나는 세상에 부귀영화 누리는 그것이 항상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것으로써 만족하고 살았는데 갑자기 죽어서 여게 와 가지고 보니까 이렇게  영원한 이 신세가 되는 것을 나는 몰랐습니다. 이러니까, 형제 다섯이 있으니까  이 사실을 그들에게 전해 가지고서 그들이 여게 오지 안하고, 세상에서 나사로와  같이 어떻게 곤고하게 살지라도 여게 오지 안하도록 준비하도록 그렇게 전달해  주십시오' 했지만 전달이 안 된다고 말을 했습니다.

 만일 우리 부모네들이 지금. 학생들의 부모네들이 '공부하라. 네가 주일을  범해도 공부하라. 새벽 기도 가지 말고 공부해라.' 이렇게 공부하라  하지마는서도 만일 안 믿는 부모라면은 그 부모가 딱 죽고 나면은 그 자식에게  대해서 '새벽 기도 가지 말고 네가 공부해라. 주일 빼고 공부해라. 뭐 해라'  예수 믿는 거 힘쓰지 말고 다른 데에서 온 세상 천지를 다 차지한다 할지라도  그거 차지하는 걸 시킨 것이 후회가 돼 가지고서 반드시 후회하면서 그 소식을  전할 수 있으면 죽기 전에 전할라고. 죽지 안하고기는 자녀에게 전할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부모네들이, 학부형들이 학생들에게 그와 같이 지금 예수 믿는  것을 등한히 하고 세상 일을 그렇게 중하다고 권면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사후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후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 비참을  모르고. 사후 세계까지를 통계해 보니까 어느 것이 귀하고 어느 것이 천하다는  것을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이 다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걸 가르쳐서, 그 믿음 없는 부모들. 믿는다고 해도 믿음  없는 부모들은 홍포 입은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을 알았지마는서도 구원 준비는  하나도 하지 못한 그런 자와 같은지도 모르고 또 어쨌든지 사후 세계는 모르고  지금 권면하는 것이니까, 모르고 하는 것이니 들을 때에 그 학생들이 이 진리를  배우고 난 다음에 부모네들이 그러면 '아버지는 사후 세계를 몰라 그렇다. 사후  세계, 사후 세계를 몰라 그렇다,' 눈물 흘리면서 '아버지, 사람은 이 세상에  사는 것으로서 다가 아닙니다. 다가 아닙니다. 언제 끝날란지 모릅니다. 언제  끝날란지 모르는데 건강하다고 젊다고 알 수 있습니까? 언제 끝날는지 모르는데  끝나면 이 세상에 있는 부귀영화나 어떤 것이라도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그 나라는 믿음 준비 안한 사람은 유황불 구렁텅이요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유황불 구렁텅이요, 예수님의 구속을 받은 사람들은 아무리 거지로 살아도 세상  고생은 죽으면 끝나 버리고 죽은 다음에는 영원한 영생이 있는 하늘 낙원으로  가게 됩니다.' 하는 것을. 그 아버지에게, 사후 세계를 모르는 그 아버지에게,  사후 세계 보니까 제일 귀한 것이 예수님의 대속이요, 예수님의 대속 받지 안한  이 세상 것은 다 헛일이고 속는 것뿐이라.

 그러면, 세상에서 거게서 행복을 누렸으면 그게 뭐이 좋습니까? 좋은 것은 뭐이  좋겠습니까? 행복을 누린 사람이 있고, 자, 예를 들면은 나사로하고 홍포 입은  부자하고 둘이 지옥 갔다 합시다. 둘이 지옥 갔으면 나사로는 세상에서도 그런  고통을 당하다가 갔으니까 별 고통이 아니니까 거기 가서도, 거기 가서도 그냥  지낼 만할 것이고, 홍포 입은 부자는 원첨 영광스럽게 평안하게 살다가 갑자기  그래 됐으니까 부자가 더할 것 아니겠습니까?  요것을 가리켜서 야고보서 5장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너희들이 지금 호의호식하고 영광 누리는 그것은, 그 영광을 누려서  자꾸 네 마음을 기쁘게 영화롭게 호화롭게 하는 그것은 뭐이냐? 도살의 날에 네  마음을 살찌웠다. 도살의 날에 도살의 날에. 도살의 날에 네 마음을 살찌웠다.'  네 모든 부귀 영광을 누리는 그것이 딱 끊어질 그때에 네게 끊어질 그때에 고생  안 하던 사람이 고생당하는 것과 고생하던 사람이 고생당하는 것과 고생을 지옥  고생보다도 더 한 고생을 했다면 그 사람은 지옥 고생이 오히려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생없던 사람이 고생당하면 고통일 것이오. 세상에 제일 행복되게 살던  사람은 그 고통을 당하니까 그 사람이 제일 불행스러울 것입니다. 지옥에 가서  고통될 사람이 누가 고통될 사람이냐? 세상에서 제일 행복스럽게 즐겁게 산 그  사람이 다 같은 지옥 고통을 당하지마는서도 지옥 고통이 그 사람에게 제일  고통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도살의 날에 네 마음을 살찌웠다.'  하나님이 행복을 때려 잡을 때에 그때에 행복이 다 없어졌으니까 그때에.

하나님이 행복을 때려 잡을 때에 네게 고통될 그 마음만 지금 자꾸 더 키우고  있다 그말이오. 고통될 마음만 더 키우고 있다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요것을 생각해서 쌍방 지식을 가지라 하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줍시다. 쌍방 지식을 가져라, 일방 지식을 가지지 말고 온전히 쌍방  지식을 가져라. 일방 지식을 가지게 하는 것은 배암이다 배암이 우리 속에  들어와 가지고서 자꾸 일방 지식을 가지게 한다. 성경은 쌍방 지식을 가지게  한다. 또 비교를 해라.

 그러면, 살아 있는, 살았으나 오늘날에 죽을란지 산 것과 죽음의 쌍방 지식을  가져라. 또 금생과 내세의 쌍방 지식을 가져라. 생전에, 살아서, 생전과, 생전도  생각하는 지식 죽은 다음도 생각하는 지식, 생전과 사후의. 사전 사후, 죽기  전과 죽은 후, 사전 사후의 쌍방 지식을 가져라. 또 나사로와 홍포 입은 부자와  비교하는 이 비교의 지식을 가져라. 또 나사로와 너와의 비교해 보는 이 비교의  지식을 가져라.

 그러면, 홍포 입은 부자가 사후에 물 한 방울도 없었으니까 세상의 부귀를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요것을, 부자냐?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고통이냐?  하나도 따라오지 못한다. 아무리 세상에서 고통이 심해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산곡의 백합화라는 그 노래에, 제가 그 노래 부르는 것을  들었는데 '산곡의 백합화 성도들아. 칠 년 환난 일기 전에 나는 가노라. 세상아  잘 있거라 나는 가노라. 세상아 잘 있거라 나는 가노라. 세상의 고통아 잘  있거라 나는 가노라. 네가 나를 고통하고 핍박하고 오만 거 했지마는서도 너는  나 따라오지 못한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성도가 그렇게 찬송하는 소리. 그  찬송을 참 변판원 선생이라고 그렇게 찬송을 많이 했는데, 그 집에서 예수  믿는다고 어떻게 핍박이 많았는지. 그분은 아마 하늘나라 가서 굉장히 영광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6. 25때에 순교했습니다.

 이러니까, 사후에 보니 홍포 입은 부자가 물 한 방울 요청한 그것뿐이라는 할  일이 없어서 좋다. 소원이 하나도, 소원이 그 물 한 방울 밖에는 소원이 없었어.

오늘 우리가 이것을 또 생각할 때에. 우리가 이 소원 저 소원 있는데, 이 하룻밤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에 이 소원 저 소원 있지마는서도 우리가 죽고 난 다음  영원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 이 소원 있을 것이냐? 그때는 이 소원이 하나도  필요없고 쓸데없는 소원이냐? 우리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데 영원한  세계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자꾸 소원만 하고 있습니다. 이 죽은 후의 그 무궁한  참 영원한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에는 아무것도 쓸데없는 그 소원만 자꾸 하고  있습니다. 이 소원은 자꾸 할수록 망하고 죽고 속는 것밖에, 이 소원만 하고  있지 죽은 다음 영원 세계에서 소원할 소원은 하나도 하지 못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소원도 항상 쌍방을 가져야겠습니다. 이 소원 이 영원한  세계의 소원이냐 지금 있다가 없어질 소원이냐?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후서  3장에 말씀하시기를 '그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예수님의  재림하시고 우리가 주님을 맞이하는 그 날, 세상 생활을 끝내는 고때에 필요한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고때에 복된 것이 곧 우리에게 복 된다. 고때의 소원이  참소원이지 지금 소원은 다 소용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날의 모든 소망을 가지고 그날의 것만 소망하고 그날에게  소망하고 그날에 후회될 것을 지금 후회하고, 그날에 소원될 것을 오늘에  소원해서, 그날에 후회되는 것도 오늘에 해결을 짓고 오늘 후회하고, 그날에  소원되는 것도 오늘 소원하고. 그날에 필요하다 싶은 것을 오늘에 필요한 것으로  갖추어 가지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이 나도 그런 어리석은 쓸데없는 소원하고 참  소원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 되기 쉽고, 또 믿음 없는 부모, 믿음 없는 형제,  믿음 없는 남편, 믿음 없는 아내, 믿음 없는 친구 그들이 이 홍포 입은 자와  같이 죽음 너머 것은 하나도 생각지 못하게 하고 이 세상 것만 자꾸 이래  생각하게 하다가 죽음 너머 보면 다 필요 없다 그 말이오. 이거 모양으로 그들이  사후 세계를 몰라서 하는 것입니다. 그 행위가 세상 것만 말해 주는 건 사후  세계를 몰라 그런 것이니까 그 형제를 불쌍히 여겨야 되겠고, 부모가 아무리  믿는 거는 등한히 하고서 자꾸 이 세상 쓸데 없는, 공부 암만 해 봐도 오늘 세상  딱 떠나 버리면 그 지식이 따라갑니까? 그 지위가 따라가고 권세가 따라갑니까?  못 따라가는데 그것만 자꾸 말하는 것은 사후세계를 그 부모들이 모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니까 안타깝게 위해서 기도할 일이지 그 말에 유혹받아서 꼬임받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 부모는 몰라 그렇지. 알면 그렇게 안 하지요.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홍포 입은 부자와 나사로의 금생과 내세,  사전과 사후 세계를 이렇게 똑똑히 보여 준 이것이 대조가 되니까 이 대조를  가지고서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라고 거지 나사로와 나와 또  대조하면은 나사로는 거게서도 기뻐하고 만족했는데 우리는 나사로에 다 비해서  얼마나 귀합니까? 이러니까, 세상을 다 차지한 홍포 입은 부자보다도 예수님의  대속의 피공로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게서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영원한 고통에서 면제해 주시기 위해서 당신이 대신 고통당했으니까 이것도  우리가 생각하면 참 감사의 눈물이 그저 참 강같이 흘러야 될 거라 그말이오.

감사의 눈물이 강같이 흘러야 될 터인데 우리는 여게 대해서 도무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이것을 비교해서 생각하면서 그저, 기도는 뭐이 기도입니까? 기도는  생각입니다. 기도는 생각이오. 기도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면서 내가 주님과 내게  대해서 생각하고. 내가 주님에게 어떻게 했나 생각하고, 또 주님이 내게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나 생각하고. 내가 이렇게 하면은 사후에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하면 지금 지금 이 사후의 빽빽한 길을 걸을라 하면 세상에 어찌 되느냐 자꾸  생각하면 생각에서 할 일이 나오고, 생각하면 생각에서 참 기쁨이 나오고.

생각하면 생각에서 참 근심할 것이 나옵니다. 자꾸 성경 지식을 가지고 생각하면  거게서 참 할 일도 나오고 안 할 일도 나오고 거게서 속은 일도 나오고 거게서  모든 것이 바로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짜든지 우리는 쌍방 지식 가집시다. 쌍방 지식.

 자, 따라 합시다. 쌍방 지식! 일방 지식은! 배암의 유혹! 쌍방 지식은! 성령의  감화! 비교! 비교! 비교를 가집시다! 비교하여 평가합시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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