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1988. 6. 7. 화새

 

본문: 고전 15:36-44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 말씀은 이 기독교인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이 세상  모든 지식 안에는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만 우리 사람들에게 부활에 대한  이 지식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랬는데, 모든 종교 창설자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지식이요 뱀이 인간들에게 가르친 지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이 큰 문제이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이래서 혹 말하는 것은 그저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되나  하는 그런 문제를 두고서 종교 창설자들도 다 그 면에 많은 궁구를 했고 또  철학자들도 거게 대해서 많은 궁구들을 있습니다. 이랬으나 하나님이 열어  주시지 아니하시니까 바로 안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측과 추론과 그 추상은 다 했습니다. ‘아마 이럴 것이라,  저럴 것이라.’ 또 정직한 자들은 모르겠다 이렇게 말했고 정직하지 않는 그  허영과 허욕에 속한 좀 진실이 모자라는 그런 종교 창설자들은 이렇지 않겠나,  이럴 것이다.’ 이렇게 말을 했고 철학자들도 그 정직한자들은 모른다고 말했고  정직하지 못한 자들은 그들도 ‘이럴 것이라 저럴 것이라’ 그걸 제나름대로  이렇게 자꾸 말을 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죽는 것을 제일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일반인데 그  죽는 것이 왜 죽는 것인지 하는 그것도 모르고 또 죽으면 그만 끝나는 것으로  그렇게 보는 것이 다 마귀가 준 지식이었습니다. 이랬는데, 그 추측, 추론, 추상  그것이 차차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서 그 후배들이 이제 사람의 지식, 죽은 지식  죽이는 지식 이 사람의 지식과, 또 산 지식 살리는 지식 하나님의 지식이 서로  가까와져 가지고 거게 대한.

 사람들이 듣기도 하고 읽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이래서 이 기독교에서 말해  놓은 부활이라는 것을 그들이 따 가지고서 추측하고 추상하고 추론한 것을  이렇게 저렇게 말해서 부활이라는 그런 말을 쓰고 있고 또 지금도 부활을,  부활이라는 이 도리를 그들은 모르고 그저 이 세상 형편만 생각하고 ‘아마  죽었다가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해서 석가모니는  윤회론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다만 육만, 알고, 사람이 죽으면 그거야 간단한데, 사람이 죽으면  송장되고 송장이 흙되고 흙되면 그거 또 초목도 되고 뭐 그것이 또 초목이  동물이 먹으면 동물됐다가 또 동물이 또 흙되고 뭐 이렇게 그 자꾸 윤회해  나가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말을 했으나 요새는 지금 불교에서도 이제  부활이라는 말을, 이 부활이라는 말을 그들이 지금 아직까지는 담대히 쓰지는  안하지마는 이 중생이라는 말은 이제 뭐 마음 놓고 쓰고 있습니다.

 불교에도 ‘중생이 있다’ 중생이 있다 이라는데 지금까지는 제가 듣는 대로는  불교에서 뭐 부활이라는 말은 별로이 안 써도 아마 또 뭐 곧 가속도로 금년  내라도 ‘사람이 부처를 믿으면 죽었다가 부활한다’ 하는 이 기독교 부활과 꼭  같은 그런 것을 말하고,  그저, 자기네들이 정직하고 진실하면 모르는 것이니까, 모르니 이걸 똑똑히  알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들이 다 기독교에다가 눈을 기울이고 연구하겠지마는  그저 옳든지 그르든지 원죄라는 그 자기중심 자기 위주라는 그 원죄가 모든  사람들을 다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네들이 비록 틀린 것을 말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세상에서 틀렸다는 것이 나타나지 안할 정도라면 그것을 옳다고 주장해  가지고 자기중심 자기 위주의 자기 주의 자기 사상을 성립 시킬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다 원죄의 소행인 것입니다.

 이래서. 이 부활이라 하는 것을 온 세상이 다 부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은 다음에 부활하는 것 여게 대해서 정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이 부활이라는 이 하나님의 제도가, 부활이라는 이 제도가 온 천하에  있는 인간들의 지식에 없는 것이요 또 그들과의 반대되는 이 지식이기 때문에 이  지식이 성경에 기록된 것을 읽는다고 또 듣는다고 그렇게 옆에 사람이 있다고  증거를 한다고 해가지고서 우리에게 이 부활이 믿어지거나 들려지거나 알려지는  것 아닙니다.

 그거는. 왜? 온 천하의 지식이 다 이 부활을 부인하고 부활에 대해서 반대하고  부활을 다 모르는 소리며 저거들에게 없는 지식이기 때문에 부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악령이 이 부활을 모르도록 할라고 애를 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부활이라 하는 것이 참 믿어진다는 것, 자기가 인정된다는 그것이 심히 힘드는  것입니다.

 다만 힘으로써는 능으로써는 할 수 없고 아버지의 성령으로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내나 또 이런 것도 다 거게 해당됩니다. 성령님의 감동이  아니고는 이 부활이라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고 믿을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성령이 감동시키는 그 사람에게 한해서만 이 죽은 후에 부활이라 하는 이 부활을  믿게 됩니다.

 우리는 참 예수를 잘 못 믿어도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사람이 죽으면 이  다음에 부활이 있다’ 하는 그것이 믿어지는 그것이 곧 성령의 능력의 역사요  은혜이지 그 저거가 듣는다고서 그래 들어서 믿어진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암만 교인들이 많아도 교인들 그 많은 교인들 가운데에 이 부활의 교리를 말할  때에 이 부활을 인정하는 교인도 있고 부인하는 교인도 있고 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성령으로 중생됐다 안 됐다 하는 것을 우리는 짐작은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한단다’ 이렇게 ‘부활이라는 교리를 기독교에는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부활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 사람이  기독교의 부활에 대해서 설교를 한다고 해 가지고서 그 사람이 부활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지 안 믿는지 그거는 본인이 알 것이고 또 제 삼자도 저  사람은 부활을 믿는다 안 믿는다 하는 것을 그것을 정확지는 못하지마는 짐작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부활 교리 같은 이런 교리도 성령의 알려 주시는 그 은혜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온 천하 인간 지식에는 없는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보여 주신  이 지식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에 대해서 여게서는 이 씨 종자, 이 식물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부활의 이 도리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여게 부활에 대해서 첫째로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죽어야 살아난다는 이것을 처음에 말했습니다. 씨종자는  죽어야 살아납니다.

씨에는 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씨앗이 있고 씨앗 속에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 생명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물질의 생명이지 마는 생명이 들어 있어서  어떤 씨종자면 그 씨종자의 핵이라 하는 그 눈, 쌀눈 뭐 밀 눈 이 씨앗 그  눈이라는 눈이 있지마는 눈 그게 생명이 아니고 눈 속에 생명이 들었습니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 신비한 생명이 들어 가지고 있고 그 씨는 보이는 씨는  다 죽습니다. 그 보이는 씨가 다 죽어야 이제 보이지 않는 그 생명이 그것이  씨앗 그것을 다 삼키고 혹은 거게 껍데기만 남겨놓고 알맹이를 다 삼키는 그런  종자도 있고 또 사람 보기에는 꼭 같은 그 형태를 남겨 놓고 속에 있는 양분  있는 것만 전부 쪽 빨아 가지고서 먹고서 그렇게 자라는, 생명이 자라는 그런  종자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개암나무 같은 이런 것은 복숭 같은 거 이런 거는 보면은 그 씨앗이  땅 속에 들어가서 죽기는 죽습니다. 벌써 그게 썩기는 오래가면 썩지마는 단  시일에는 그것이 보기에는 꼭 같은 복숭씨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지마는 그  생명이 사는, 생명이 지금 자라기를 시작할 때에는 그 씨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씨밖에 없고 씨만 톡 튀어나와 가지고서 이 자꾸 이렇게 자라고  있는데 자랄 때에. 그때에 그자라는 눈 그것만 맡겨 놓고 나머지기 그 씨를 떼서  없애 버리면 그거는 노릇을 못하고 그만 말라버리고 죽습니다.

 내비두면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아주 씨종자의 것을 이 눈 그것이 빨아  먹고 이래 가지고서 그라면 육체는 있지마는 거게 있는 영양은 다 빨아먹어  가지고서 그걸 다 먹으면 비로소 밖에 있는 지기에 있는 그 지기를 먹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고 지기를 먹는 존재가 되면은 지기를 먹고 많이 크게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밀 같은 것도 그것이 처음에 이 생명은 살아 있고 그 씨는 죽습니다. 죽으면  처음에 죽을 때에는 그것이 녹아서 아주 물렁물렁 썩을라 하는데 썩을라 할  때에는 그게 먹어보면 달콤합니다. 그거 질금을 그걸로 가지고 하는데.

 달콤하게 되면 그것을 전부 그 생명이 다 빨아먹고 나중에 뒤에 보면 껍데기만  남아. 있고 그 생명은 양식은 그것을 생성이 다 말아먹고 껍데기만 남고 그걸 다  빨아먹는 그 과정을 통과해서 성장해가지고만 이제 지기를, 그밖에 있는 지기를  빨아먹게 되는 것입니다. 꼭 이와같이 우리 그 부활하는 이치도 이렇다 이래  가지고 가장 인용해서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이 도리를 가르치기에 잘 깨닫고 또  알기 쉬운 것이 이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씨종자를 인용해 가지고 우리에게 부활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가르쳤는데, 죽지 안하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하는 이 말씀에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어야 살아난다, 죽는 것은 나쁜 것이고 사는 것은 좋은 것인데  죽으면 살아난다.

 살아 있는 그것이 죽으면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좋게 살아난다. 씨앗이 그것이  있는 씨앗 보이는 그것이 죽으면 살아난 것은, 살아난 것은 죽은 것보다 가치  있다,  한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어 썩으면 수많은 밀알들로서 그렇게 그 결실을  하게 된다. 그러면 살아 있는, 것보다 죽은 것이 가치 있다 하는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죽으면 삽니다. 우리가 그 씨앗이라는 씨종자는  뭐인가? 우리의 그 생활이요 우리의 행위를 이것으로써 비유한 것인데 우리  행위를 그라면 씨종자를 심으면 어데다가 심느냐? 씨종자는 땅에다 심지마는  우리는 현실에다가 자기 행위를 심습니다.

 그러면, 심은 것은 현실에 자기 행위를 해서 그것이 그 행위대로의 그 행위가  이제 종결을 지운 끝이 난 것, 그것을 비유했고,  그러면 그 현실에다가, 현실에서 죽으면 산다 하는 이 말씀을 해놨는데 우리  현실에서는 사람으로 말하면은 옛사람이 죽어야 새사람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옛사람이 죽어야 새사람으로 살아나게 되니 그 인격성을 가리켜 말한 것인데  우리에게는 옛사람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그  인격성인데 그 인격성이 현실에서 죽어야 피와 성령과 진리로 된 새사람의 이  인격성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것도 죽어야 살아난다. 그러면 현실에서 다시 말하면  자기대로의 사람이 하나님의 이 선포한 도리를 근거해서 현실에서 자기라는  사람이 반드시 부인이 돼야 그것이 죽어져야, 그 인격이 끊어져야, 악령, 악성  악습으로 사는 그 인격이 현실 행위에서 죽어져야 그 현실 행위에서 새사람으로  살아나게 된다 하는 요것을 가르쳤고,  또, 자기가 이 옛사람이라는 그 인격 존재가 죽어지면 새사람의 인격으로  살아나는데 이 심신이라 하는 그것은 옛사람의 것이 돼 가지고 살다가 그것이  옛사람이 죽어지면, 그 인격이 죽어지면 새사람의 것이 돼 가지고 사니까 이것을  가리켜서 성화라 변화라 그렇게들 말합니다.

 새사람으로 살아 있는 그것이 또 그것이 죽어야 산다. 그러면 우리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이 새사람으로 살고 있는 그  육체가 그 심신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살아 있으나, 살아 있으나 이것은  불완전한 것으로서 사망의 침노를 받는 존재로 있기 때문에 그 사망의 침노를  받으니까 그것이 침노 받다가서 그만 그것에게 져 버리면 사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화된 것도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그거는 온전하다  완전하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새사람 곧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로 살던 육체가 영감과 진리로 살다가 없어져 버리면, 없어져 버리면  그것이 아주 실패로 돌아간 것이 아니고 그것이 침노를 받을 수 있는 산 존재가,  침노를 받을 수 있는 그 산 존재가 이제는 침노를 받지 아니할 수 있는 완전함에  나아간 그 생명이 온전으로 승격돼 나아가는 것입니다. 승격돼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우리의 영은 하늘나라 가고 우리의 그 마음이라는 혼이라고  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이것은 영과 항께 낙원으로 가서 낙원에가 있고, 이  마음이라는 존재는 물질이지마는 신비한 물질이라 이거는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은 영계에 활동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영계에 가고 순전히 이  공간과 시간에 제한을 받는 이런 몸이라고 육이라고 하는 그것은 이것은 그  시공을 초월한. 영계에 가서 시공을 초월한 존재로 살 수 있는 그 변화를,  신령한 적으로 변화되는 이 변화를 받아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안하면 안 되기  때문에 변화받는 그 과정을 받기까지는 그것은 물질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세상을 뜨면 영과 그 마음은 낙원에 가고 또 이  물질이라는 이 물질은 이 물질계 속에 지금 잠겨 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부활하게 될 때에는 영과 마음이 주님과 같이 와 가지고서 자기가  가졌던 그 모든 이 육을, 이 고깃덩어리를 그것을 다 자기가 찾아 가지고서  그것이 자기하고 선악간에 같이 했기 때문에 선악간에 같이 판단받는, 재판받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그것이 살아나게 됩니다.

 살아나기 때문에 빌립보 3장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는데 우리가  이대로 있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그의 능력을 가지고서 우리의 이 천한 몸을 그리스도의 그 영화로운 몸과같이  그렇게 이제 변화시켜서 부활시킨다’ 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다는 만물의 복종권을 거게다가 발표한 것은 우리의  이 몸이라는 것이 수많은 이 물질 속에 같이 거게서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산재한 것을 다 그것을 복종케 할 수 있는 그 능력가지고서 산재한 것을 다  모이게 해서,  노아 때도 노아가 그런 걸 다 모은 게 아니고, 모든 생물들을 모은 게 아니고  하나님이 모이게 한 대로 노아의 방주에게 다 그런 것들이 스스로 모아 들어  가지고서 다 스스로 다 들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의 작용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만물 속에 머물러 있는 이 모든 우리의 육이 각자의 육이  거게서 나오기 때문에 바다는 그 가운데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도 땅에서도 내어  주고 만물 가운데 있는 것이 나와서 다 부활을 하게됩니다.

 그때서, 죽지 안하면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주님이 지금 이 씨종자의 비유를  가지고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요것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죽어야 살아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도 현실에서 자기 주장 그거 그놈을 안  죽일라고서, 우리 총공회 지금, 이 총공회에서 운영해 나가고 있는 주체적으로  나가는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완전은 아니겠지마는 그래도 거의 완전이라고 할  만치 옳고 바른 것을 걸어 나갔었습니다.

 나갔는데 왜 이렇게 모두 다 웅성웅성하고서 ‘하, 이거 지금 목사님은 그  앞에서 그저 예예 하니까 그것뿐인 줄 알지마는 그 속에는 막 엉망진창이고 지금  막 괴고 있습니다. 그걸 아십니까?’ 하는 그런 말을 내가 누구한테 충고를  받았습니다. ‘그래 나도 안다’ 내가 그렇게 말했었는데,  그게 뭐이냐? 그게 새사람이 살라고 하는 그것도 있겠지마는 대개는 죽을 놈이  죽지 안할라고 지금 하고 있는 거라. 그거는 죽어야 됩니다. 그거 지금 여게서  모두 반동하고 그런 것 있었었는데 그것은 다 언제 죽어도 제가 나가 죽어도  죽어야 되고 또 언제 죽어도 그거는 죽어야 이제 살아나지 죽기 전에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현실에서 자기 죽일 것을 알아야 되겠고 꺾을걸 알아야  되겠고 뽑을 걸 알아야 되겠고 변화시킬 걸 알아야 되겠고 이래서 ‘죽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이제 죽으면 세상에서 산 걸로 살아 있다.

 산 걸로 살아 있지마는 산 걸로 살아 있어도 이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그 생명은 그는 사망에게 침노를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받을 수 있는데  사망에게 침노를 받아서 안 죽어서 다행이지 만일 죽었더라면 헛일 됐다. 침노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예수님의 그 몸이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신 그 다음부터는  다시는 그는 죽을 수 없는 몸으로, 죽을 수 없는 그 고깃덩어리로 땅 위에  계셨습니다.

 사홀 동안 무덤에 머물러 계신 것은 그전에, 죽기 전에는 사망의 침노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몸으로 가졌다가서 이제 일단 죽으시고 무덤 속에 있을 때에는  다시는 악령이나 악성이나 악습이나 사망이나 죄나 이런 것들이 다시는 침노하지  못할 그런 아주 고차원의 것으로서 지금 존재하다가 그 다음에 삼 일 만에 다시  부활했을 때에는 고런 것들이 오지 못할 아주 높은 고차원에서 살아나 있었고  이제 그런 것들을 다 전투해서. 예수님이 도전해 가지고 승리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다 종으로 부리게 됐습니다.

 그래서, 사망도 예수님의 종이요 생명도 예수님의 종이요 악령도 예수님의  종이라. 그런 것들을 예수님께서 다 총 통솔하게 됐고 지배하게 됐고 그런  것들은 다 복종할 수 있는 그런 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이 죽기를 싫어하는 자, 모두 지금 이거 교파는 수많은 교파들이 이래  있지마는 단일 교회라 하는 것은 이 단일교회 본질과 본성 이것은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난 그것이 그 본질이요 또 새사람으로 살아서 있는 그것이 또  일단 한번 죽어진 그것들이 이제 단일 교회에 영이요, 단일 교회에 집합된  영들이요 마음들이요 고기덩어리들입니다.

 이래서, 이것은 벌써 사망에서 한번 옮겨져 또 한번 옮겨져서 아주 높은 그  차원으로 승격된 그것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에서 죽기를 싶어하는 사람들은 살아나기를 싫어하는  것인데 여게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식이 박약한  사람들은, 자기 아닌 자기다, 자기를 죽인 원수인 자기다, 그놈이 죽어야 참  자기가 살아난다, 우리는 알기도 전에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자기가 분명히  있는데 이 자기는 참자기지마는 참자기는 자기가. 만나보지도 못하고 이 자기를  잊어버리고 옛사람 자기로 살기 때문에 주님이 탄식하셔서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은 온 천하를 얻어도 자기에게는 유익이 없다’  자기를 잃는다는 말은 이미 있는 자기를 말하는 것이고 빼앗긴다는 것은 자기가  될 수 있는 젓인데 변화해서 자기가 참 자기가 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그만  빼앗기는 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잊어버린 거는 그들이 가져가지는, 진리와 성령과 피로 중생된 새사람  자기는 악령, 악성, 악습이 가져가지는 못합니다. 가져가지는 못하고 이것으로  살지 못하게 방해하고 또 이 새사람의 그 심신이 될 수 있는 그 요소는 이것을  현실에서 죽여 버리기 때문에 이 천하 얻는 것보다 네가 너로 사는 것이 더 크고  유익이 있고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도 현실에서 영원한 네 심신을 만드는 것이  수입이 더 크다 하는 것을 주님께서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하겠습니다.

 중간반 학생 부모님들은 빨리 돌아가서 장년반에 참석 못한 그 학생들은  새벽기도에 참석하도록 보내십시오. 시간은 그저 다섯시 반에 시작해 가지고  여섯시면 딱 마칩니다. 여섯시에 일 분도 더 하지 안하고 그만 찬송하다 시간  되면, 시간을 맞춰서 그리 여섯시면 마칠 것입니다.

 이러니까 보내도록 해서, 어제는 얼마? 어제는 육십 오 명이 나왔다는데 그전에  OOO목사님이 인도할 때는 한 백여 명이 나왔었습니다. 새벽기도 중간반이 백여  명이 나왔었는데 그 다음에 OOO목사님이 인도하고 나서 한 십여 명으로, 이십 명  이내 십여명으로 줄어들어 가지고 그 뒤에 그만 또 중간반 반사들이 할 때에  그때는 열 명, 열 명 미만으로 이래 근근히 하다가 나중에는 한 두서너 명 이래  되니까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역사하는 건 다릅니다. 그래 지금 한  육십오 명 되는데 빨리 가서 그 학생들을 깨워서 보내 주기를 부탁합니다.

 그러면, ‘하이구 그 공부하는데’ 이 학교에서 말이오. 마귀들은 지금 힘을 써  가지고서 학교에 벌써 중고등학교 되면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마치기를 아홉시나  마치고 또 대개는 고등학생들은 열시 돼야 마친답니다. 열시 돼야 마치니까 그게  와 가지고서 또 씻고 또 이래 뭐 드러눕고 이랄라 하니까 언제 새벽기도 나올 수  있습니까?  마귀란 놈은 요것을 단단히 보고서 단단히 지금 계획을 가지고서 세워 가지고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여게 대해서 이걸 모르고, 이 배암 지식 이까짓 거  암만 배워 봐야 소용없는 것입니다. 암만 배워봐야.

 배암 지식 그걸 배울 때에 믿음으로 ‘하나님이 여게서 내가 믿음 지키라  했다’ 믿음으로 배암 지식을 가졌으면 점령을 해서 자기에게 선물이 되겠지마는  그걸 믿음으로 가지지 못하고 하나님이 시키시니까 여게서 내가 하나님 뜻을,  진리 행위를 여게서 하고 영감 행위를 여게서 하고 예수님의 대속의 행위를  여게서 한다.

 마치 말하면 장사하는 사람이 장사하는 데서 그 믿음 행위하고 또 무슨  노무자는 노무하는 거게서 자기 하루 종일 믿음 행위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  공부 그것도 그런 거와 같은 것으로 여겨서 거게서 믿음 행위를 하면은 그것이  자기가 정복에서 자기의 선물이 되겠고 보배가 되지마는 벌써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걸 크게 됐다면은 그게 뭐이냐? 전부 그게 우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게  우상되고 말아요. 금 우상되고 마는데 그래 하는 것은 우상이 뭘 자기를 유익케  하며 우상이 어떻게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하겠습니까?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졌으면 그게 우상이라.

 우리 신앙은 장사하면 그 장사를 통해서 신앙이 멀어지는 게 아니고 장사를  통해서 장사에서 신앙이 자라고 또 무슨 사무 보면 사무에서 신앙이 자라고 또  교편 잡으면 교원에서 신앙이 자라고 또 무슨 노무하면 노무에서 신앙이 자라고  공부하면 공부에서 신앙이 자라고  그 신앙이 자라는 한 밭이고 하나 터전으로 이걸 알고 거게서 신앙을 길러야  그게 내 이용물이 되고 내가 삼켜서 내 양식이 되고 마는 것이지 내가 그것에게  삼켜져 가지고서 하나님도 배반하고 나갔는데 뭣이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완전히 지금 세상은 참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신  대로 이 믿음을 볼 수 없는 이 세대가 왔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부산에 있는 사람이 대구 가면은 조금 다르고 대구 갔던  사람이 서울가면 조금 다르고 또 서울 갔던 사람이 미국 가면 조금 다르고 다른  그것이 저거 딴에는 이렇게 지금 문화가 발달이 돼서 이런 데 좋은 세계를  발견해 가지고서 이. 지금 좋아졌다, 더 참 명확해졌다, 이것은 더 성장돼졌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게 썩어졌다 말이요 그게 더러워졌다  말이오. 그거 더러워진 거라. 분명히 더러워진 걸 자기가 알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지요. 하나님과 멀어지고 자기에게 과거에 간절하던 하나님과 밀접한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이 책망하시고 좋아하시고 하나님의 희로애락이 자기에게 접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자기가 느낄 것이라 말이오. 멀어진 것도 느끼고, 자기 심령이  어두워진 것도 느끼고.

 이러니까, 네가 이 예언의 말씀을 네가 사모하고 주의해 가지고서 날이 새도록,  샛별이 떠오르도록, 이거 다 비유한 것 아닙니까? 날이 새는 거는 말씀에서 우리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야 되는 것이지, 성경과 기도로써는 마음이 밝아지고 이  세상 지식으로는 자꾸 마음이 어두워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 심령이 어두워지나 밝아지나? 또, 성령의 감화가 자기에게 더  강해지나 약해지나? 뭐, 양심도 잊어버렸는데 무슨 성신의 감화야 언제 만날  수가 있습니까? 이러니까 이래 가지고서 그만 버려져.

 그래서, 이 서울도 이가 우리가 교회를 안 세울 수 없고 교회를 세우기는  세워야 되는데 서울 가면은 그만 사람들이 변해 버립니다. 변해서 이거 버려  버려요. 버려지지마는 그거 교회 안 세울 수 없으니까 가는 사람마다 버려지는  것이지 그게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우리 찬송가도 이렇게 할라 하는 것을 제일 반대가 서울서 반대했어.

서울서 반대 중에 제일 누가 제일 반대했느냐 하면 이제 나간 그 사람들이 제일  반대고 거게 따라서 반대했는데 지금도 억지로 이라고 있습니다.

 찬송가 이거 계산해 보니까 이백 한 곡에서 통일 찬송과 우리 찬송이 다른 것이  구백 구십입니다. 구백 구십. 헤아려 보니까 구백. 구십, 단어까지 또 한  글자까지 다 해서 요렇게 하니까 구백 구십이 틀리는데 구백 구십이 틀렸으니까  구백 구십이 틀렸으니 둘 중에 하나는 못 쓸거라는 것을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거 이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이 찬송가를 이렇게 가사를 고친 이것이  이 속화의 방지에 지금 큰 아주 보배를 우리에게 얻었건마는 이게 적입니다.

그것도 알아야 되고.

 또, 지금 이 찬송가로 가지고서 이렇게 마찰이 많이 되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속화와 마찰될 터인데 그게 속화와 마찰될 그 마찰을 찬송가로 마찰하고 거게서  마찰이 안 되는 것은 죽어 버립니다. 별수가 없습니다. 이래서 유명한 사람들이  다 이 속화에 마찰이 안 된 사람은. 그대로 죽어 버리고 말았지 그게 뭐 산 일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찬송가로 속화에 마찰이 되고 또 우리 이 총공회라 하는 이거 이름을  가지고서 이 속화에 많이 마찰이 됩니다. 싫은 면으로 마찰이 돼서 욕도  얻어먹고 견디기가 심히 힘들지마는 그것으로 인해서 속화 방지에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됨으로써 그것이 뒤에 유익된 효력을 볼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이렇게 하고 그 속에 무슨 고신이나.

뭐 그런 게 다 없다 하는데 나는 모르지만 어제 말 들으니까 또 그뭐 지금도  예장이니 기장이니 그 예배당 간판에다 그래 쓴다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  ‘대한 기독교 장로회’ 이래 모두 그것을 또 붙이는 사람도 있는데 지금 또  어떤 사람은 그걸 붙일라 하니까 책임이 있으니까, 말이 있고 그거는 뭐이다  이래 그 이름이 들나서 자기라는 개체의 그 이름이 들나니까 그거 치워버리고  그만 이거 아무 그런 것도 없이 이거는 자기 이름 없이 그만 천하의 이름이 다  같은 이름으로  자기 이름을 속이고 가명을 가지고 하는 것, 가명이 아니라 이거, 그거  말하자면 가명이오. 그 거짓부리 이름 쓰는 것. 그거는 자기에게 마찰이 오지  않기 위해서 이와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말하자면 가명을 그래 단  도둑놈입니다. 그 교회 간판부터 도둑놈입니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는 무엇이 암만, 가도 그걸 치워 버리든지.

총공회라 하는 이 나쁘면 총공회를 못 쓰면 치워버리고 제일 좋은걸 따라가서  그래 실상과 간판이 같이 해야 되지 실상은 이라면서 간판에 그라는 그거 가명을  자기가 쓰고 있는 것이고 그거 자기를 숨겨덮어서 언덕 밑에 복병하고 있는 거와  같은 그런 행위라 그거요.

 이러니까, 지금은 이 예수교 장로회 한국 총공회라 이래 가지고서 들어와서  교인된 것은, 그게 그래 된 것은 어데 가면 그 예수교 장로회 한국 총공회가  아닌 것은, 아닌 것은 거게서 마찰이 될 것입니다. 마찰돼서 그만 이게 이리 돼  가지고 마찰돼 가지고서 그리 안 나가는 것이 방지가 조그매 된다고 하면은  그것이 ‘뭐 유익되지 해가 되지를 안 할 것입니다.

 찬송가를 이래 함으로써 또 마찰이 돼서 이 찬송에 대해 이라니까 ‘어, 그만  가야 되겠다.’ 그래 가지고서 찬송이 그래 돼서 찬송이 번연히 보기에 가사가  훨씬 나은데도 이거 아니라고 가는 그것은 제가 암만 길러 놔 봤자 마지막에  자라도 그게 갑니다. 자라도 가니까 그때 가면은 그냥 저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많은 것을 데리고 갑니다.

 이래 가지고서 과거에 고신이 합동하고 이렇게 합동시키는 것은 다서로 야심을  가지고 이래 했지마는 합동했다가 나오니까, 환원하니까, 고신이 왜 팍  줄어졌느냐? 줄어졌느냐 하면 합동했다가 환원하는 바람에 삼분지 일은 떨어져  버렸어. 삼분지 일은 뺏겨 버렸어.

 이러니까, 지금부터 ‘우리는 예수교 장로회 한국 총공회다’ 이러니까 이래도  와서 았을 거, 아버지가 보내면 을 거 아닙니까? 이래도 오는거 그것을  여게서부터 길러가지고 이랬으면 나중에 아무데 갖다 놔도 그만 오리와 닭과  같은 거기 때문에 딴 데 갖다 놔도 이거 타여지지를 안합니다.

 안 하니까 이 말세에, 우리가 바로 나간다고 하면은 말세에 세상에 속화되지  안하고 이렇게 되는 이게 보존이 될 것이고 이 찬송가도 그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찬송에 통일과 우리 찬송이 이백 한곡에서 벌써 구백 구십이  틀렸으니까 어느 게 못쓸 거라도 하나는 못쓸거 아니겠습니까?  그 틀렸는데 만일 우리 고친 것이 그것만 못한 게 있으면 누구든지 발명해  주면은 선생이라고 우리가 즌대를 할 것이고 거게 대해서 우리가 상당한 대우를  해 드리겠습니다. 물질 대우도 할 것이고 인격 대우도 할 것이고 또 모든 신앙의  권위 대우도 우리가 해 드리겠습니다. 뭐 물론 구백 구십 다 좋다고 하기는  했는데 별로이 퉁일 것보다도 가사가 고쳐진 것이 구백 구십 고쳐진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좋다고 저희들은 확신을 가지고서 고친 것입니다.

 이 고친 것은 뭐 어떻게 고쳤느냐? 고친 첫째는 성경대로에 틀린것, 성경에  위반되는 것을 성경대로의 것으로 고쳤습니다.

 또, 둘째로는 우리는 뭐 원어를 모르지마는 과거에 찬송가를 지은 사람, 그  본인이 영감받아 가지고 지은 그거 있으니까 그 지은 사람의그 가사를 짜다라  이래 뜻도 없으며 변동한 그걸 아무 다른 뜻이 없으면 그대로 사용하는 게 좋다  하는 걸 그 뜻으로서 그걸 고쳐 놓은 걸 그렇게 처음에 저작한 그 사람의 가사나  고친 것이나 더 좋은 점이 없으면 그 사람 가사를 쓰는 계 좋다 해 가지고서 그  사람 가사를 밝혀 가지고서 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찬송가 벌써 외우고 익혀 가지고 있는데 익혀가지고 있는  것을 아무런 고친 것이 좋은 뜻도 있지 못하고 도리어 나쁜 것도 있고 좋아봤자  좋은 뜻도 없이 꼭 같은 뜻인데 뭣 때문에 우리가 익은 것 정든 것 과거에  기억된 것 그거 할 일이지 하필 이래 가지고서 고친 것을 할 필요가 있느냐?  우리가 기억하고 외우고 있는 그런 것,  만일 새로 고쳐진 것이, 통일에서 고쳐진 것이 더 성경적이든지 아니든지는  내비두고 좋은 뜻을 가져서 더 은혜 있게 그 내용을 발표하는 발표력이 더  낫든지 한 그런 것이 있는 것은 고친 게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다 이제 성경에 위반된 것 고켰고 또 처음에 그 저자의 그 가사의 저자  가사라도 좋은 것이 있으면 고칠 수 있는데 저자 가사에 더 낫지 못하면서 저자  가사를 그거 고친 것은 그런 저자 가사대로 그저 하자 하는 그거 그래서 고친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다 같은 뜻인데 뭐할라고 익히고 알고 있는 걸 하지 꼭  그 새로 만든 걸 할 필요가 뭐 있느냐?  이거 같은 말인데 앞에 말을 뒤에 놓고 뒤에 말을 앞에 놓고, 한절을 위로  불이고 아래로 붙이고 이래 가지고 막 고쳐서 지금 이래 하는거, 이 고치기를  좋아해서, 요새 전부 유행을 좋아해서 유행을 좋아해 가지고서 언제는 바지가  이거 탁 대롱같이 이라더니마는 언제는 아랫도리가 다 나오도록 또 이라더니마는  끄트머리가 또 벌어지게 이라더니마는 이제는 벌어졌다가 오무라졌다가 벌어겼다  오무라졌다 이래 끄트머리는 딱 오무라지고 또 중간에 떡 벌어지고 또 가운데는  딱 오무라지고 이거 허리 있는 데는 딱 오무라지고 이래 가지고 자꾸 유행을,  유행이 뭐 나쁜 게 아니지마는 점점 개량 돼 나가는 건 좋지마는 자꾸 바꿔야  좋다 하는 그거는 창기성이기 때문에 원리가 고쳐야 됩니다.

 기독교는 바꿔지는 것 아닙니다. 기독교는 인생관이나 만물관이나 전체가 꼭  일관이자 고 변동되는 아닌 것입니다. 그 변동되기를 완하는 그게 창기라! 창기  따라갈 수가 없어, 우리가!  이러니까, 이 가서 누구든지 통일 찬송 가사와 우리 가사와 대 볼때에 이거는  이게 낫지 않느냐 하는 것이 좋은 게 있으면 우리가 그만 머리 숙이고 그 면에  대해서는 고치겠습니다. 그거는 즉시 고치겠습니다.

 이러니까, 또 우리가 보는 건 거의 다 좋다 이렇게 봅니다. 그거 하나라도  좋은가 아닌가 좀 따져 보십시오. 그것 때문에 역부러 그 고친 그 내용에 있어서  그 책 한 권에 삼백 원만 주면 그걸 뭣은 요래 고치고 요래 고치고 요래 고치고  뭣 때문에 고쳤다 하는 그 내용도 설명하고 알 수 있는 걸 해 놨는데 그것도  하지도 안하고 무조건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거 뭐 퉁일 찬송과 우리 찬송 가사는 그 천지의 차이가 있습니다. 천지 차가  있어. 하늘과 땅 같애. 이런 차이가 있는데도 꼭 이 통일 찬송이 이게 좋다고  이렇게 하고서,  또 어떤 사람은 그거 생각해 보지도 안하고 어짜든지 요새 주의가 작년  것보다는 금년 게 낫다. 금년 것보다 내년 게 나을 것이다. 자꾸이 세상이 점점  개량돼서 좋아져 간다고만 이렇게 사상을 가. 지고 있기 때문에 자꾸  좋아져간다고 하기 때문에 자꾸 따라가서 세상에 따라가서 자꾸 따라 갈라고  애를 써요.

 그러기 때문에, 이게 교회는 세상 따라가고 있는 것이 교회요. 교회는 실상  참된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따라가기 때문에 세상과 배치가 되는데  노아 홍수 후에는 배치되는 것이 하나 있다가 십 년이 지나가니까 배치되는 것이  둘이 있다가 백 년이 지나가니까 배치되는게 열이 있다가 천 년이 지나가니까  배치되는 게 만이 있다가 오늘에는 하나님과 배치되는 것이 많아져 가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은 틀려 가는 것이 많은 것인데 세상이 좋아지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에 기독교는 전부 세상 따라서 갑니다. 세상이 뭐라  하는고 보자. 세상 따라서 가고 하나님 따라가지 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완전히  배신을 당해 버렸고 전부 이거는 우상들입니다. 이것도 그 눈이 어두워서 그  속에 들어간 인간은 모릅니다. 눈이 근시자는 몰라.

 이러니까, 뭐 서울에 따라서 변화되고 미국 따라서 자꾸 변화되고, 그런데 미국  같은 나라도 거게도 하나님이 다 변했으면 그까짓 거 싹쓸어서 없애 버릴 것인데  거게서 거게서 변하지 않는 것, 아주 자꾸 변하는 속에 변하지 않는 참된 것이  있기 때문에 그거 보고 하나님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이 말씀을 예사롭게 들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못 봐요. 어데 지금 하나님을 따라서 동하고 정해야 된다 하는  입술만 그렇지, 입술도 그거 몰라요. 하나님을 따라서 동해야 된다는 그걸  교회들이 알고 있는 그 이름을 알고 있고 말하자면그런 명사를 알고 있는 교회도  많지를 못합니다.

 또 그렇게 말을 하지마는 그 일을 실상으로 자기 마음이나 생각이, 마음이  하나님 따라 움직인다는 게 얼마나 힘드는데? 이 일이 힘이 드니까 이 일을 한번  해 볼라고 달라드는 사람이 누가 있어, 있기를! 있으면 찍해야 어느 한 기회에  한 일 분이나 십 분이나 뭐 오 분이나 한 시간이나 이래 하고 자꾸 해도, 하나님  따라 움직일라고 했는데 자기도 보니까 엉뚱하게 또 한 시간이나 지나고 난  다음에 보면은 천리만리 멀고 엉뚱에 가 있습니다. 자기 계획은 요래 가지고  갈라고 했는데 엉뚱한 데 가 있어. 이렇게 마음이 주위 환경에 피동되니까 이게  무슨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습니까? 이런 자체이지만 자체를 발견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 이 찬송가는 이백 일 곡인데 이백 일 곡에서 현재 통일  찬송과 우리 찬송과 가사가 틀건 것이 구백 구십 곳이 틀렸습니다. 구백 구십  소가 틀렸어. 구백 구십 개가 틀렸어. 틀렸으니까, 이만치 틀리면 이 우리  찬송이 아주 못쓸 것이든지 그 찬송이 못쓸 것이든지 못쓸 거 아니겠소, 그거  대조해 보면? 만일 그것이 구백 구십 그 틀린 것이 우리 것이 낫다고 하면은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감사하고 뭐 우리를 살려 주신 얼마나 이거  보배로 여겨야 될 터인데 이걸 아주 정죄를 하고 이래 가지고 비꼬우고 비웃고  있습니다.

 뭣 때문이냐? 그거는 그 사람들이 그 세상에 속한 그 사람들이 좋아하지 안하기  때문에 그 사람 비위 맞출라 하는 거라. 찬송가 하는데 그 사람들 비위 맞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 찬송가의 저 찬송가를 어느 걸 좋아하나 이걸 찾아야지!  인간들이 좋아해서 인간들이 다 좋아해서 들어오는 그것만 찾으면 그거 무슨  하나님이 종이야! 무슨 예수교야, 그거는 세상이지 ! 정신 차려야 돼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하루 삼십 분 기도 잃지 안해야 됩니다.

 이 모이면 만날 야단치는 일만 하니까 그라지만, 성경에는 보면은 이런 것을  책망해라. 그 책망하는 자마다 다 빛으로 나타난다 했어. 이 책망하면  책망함으로 말미암아 그래도 뒤에 결과는 빛이 되고 맙니다. 제까짓 게 안 되고  어짤 것입니까?, 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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