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1988. 5. 24. 화새벽

 

본문 : 고린도전서 15장 36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한 번 죽기는 죽어야 됩니다. 안 죽고 그대로  예수님 재림 때에 변화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번도 죽음은 보지 안하고  그대로 재림하면 에녹과 엘리야처럼 하늘나라 간다는 그런 유혹을 가지고 나온  그런 이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지 안해야 됩니다.

 우리는 범죄했기 때문에 범죄한 그 혈과 육, 영은 그대로 살아서  완전해졌지마는 서도 이 혈과 이 육은 범죄한 이 까풀을 한 번은 완전히 벗어야  됩니다.’  왜? 이 고기덩어리 이거는 영생을 못 합니다. 장수하도록 못 합니다. 이것은 뭐  만일 천 년을 산다고 안 죽고 산다면 이것은 아주 그만 썩어서 송장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혈과 육은 하늘나라를 가지 못하고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입지 못한다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번 죽는다는 요것을 단단히 기억하고 그런 유혹을 받지  안해야 되고, 그러면 지금 뭐하는 때인가? 지금은 죽는 이 속에 죽지 안하는  것을 자꾸 만들어 가야 됩니다.

 그러면,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찬 세상인데 여기에서 썩지 안하고 영생할 것을  자꾸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이 가득 찬 가운데에 죄를 이기고 죄와  상관없는 자를 자꾸 만들어 갑니다. 이걸 가구 만들어가야 되지 그저 이대로  살리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너희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하는 이 비유로  말합니다. 부활을 이 씨뿌리는 씨로 종자로 가지고서 우리가 알아 듣기  쉽도록-이 부활이라 하는 것이 없습니다. 부활이라 하는 것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에 이런 부활 저런 부활 이건 종류를 가지고 우리에게 부활의도리를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자를 심으면 그것이 일단 죽어야 살아나서 나옵니다. 그러면 아주  죽으면 살아 나오지 못하는데 속에 보이지 않는 생명이 있는 것은 그 생명이  자라 가지고 나중에는 커단하게 돼 나옵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그대로  썩습니다.

 그러면, 다 같은 사람이 아니고 두 종류인데 속에 생명이 없는 자는 그대로  그만 죽어 버리고 맙니다. 세상살이에서 완전히 죽어 버리고 말고 생명이 있는  자는 세상살이 속에서 영생하는 것이 자꾸 만들어져갑니다.

 또, 뿌리는 그.곡식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게 아니고-요 아주 좀 단단히  구별해야 되는데-곡식 종자가 여러 종자가 있는데 그러면 밀이면 밀 뭐 콩이면  콩 종자가 있지 않t니까? 그 종자를 심우면 종자의 모양과 뒤에 나 가지고서  자라 나온 그 모양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요거 잘못하면 요 성경대로 안 맞기  쉬운데,.

 하나를 말합시다. 밀을 심었다 합시다. 그러면 밀 종자와 밀이 살아서 자라나온  그 형체와 밀의 형체와 자라나온 형체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습니까 다릅니까?  형체가 같아요? 형체가 같습니까? 다르다고 했는데 아기는 다르지 안해요?  밀은 조끄만하게 동글동글하게 요 그저 쌀 모양으로 그래 조그만하게  생겼지마는 밀이 살아나온 것은 뭐 중국밀이라 하는 그런 것은 아주 그 밀은  우리 한 길 안 큽니까, 키가. 커단하게 크기를. 한 길 크는데 그 형체와 종자의  형체는 다르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부활한자도 이와 같다.

 그러면, 종자는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건고 하니 여러 가지 종자가 있다.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 하는데 이런 생활도 있고 저런 생활도 있습니다. 행동이 이런  행동도 있고 저런 행동도 있고 믿는 행동이 뭐 수백 수천 수만 가지도 넘지  않습니까? 믿는 행동이 이래 행동하는 것도 있고 저래 행동하는 것도 있는데 고  행동하는 고것을 가리켜서 종자라 그랍니다. 종자. 이런 종자도 있고 이런  행동도 있고 저런 행동도 있다.

 그러면, 심는 것은 어데다 대고 심는가? 심는 밭은 뭐인가? 심는 발은 어떤 게  심는 밭인가? 심는 밭은 자기 이 세상살이 현실입니다. 세상살이 현실이 심는  밭입니다. 토지 입니다.

 심는 것은 어떤 것인가? 심는 것은 고 현실 생활하는 젓입니다. 그러면 현실  생활 하는데 이 세상에서 현실에서 자기가 생활하는데 현실은 밭과 같고  생활하는 것은 심는 것이라. 그런데 생활에 종류는 각각 따로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생활하는 종류는 각각 다르다 그말이오. 다르다,   그런데, 다 같은 현실에서 생활하지마는 생활하는 그 생활을 꼭 같은  생활합니다. 꼭 같은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는 속에 생명이 없는 생활은  그만 그 생명 없는 종자는 땅에 심어지면 심어지면 심어지는 그 시간부터 자라기  시작합니까 그 시간부터 지금 죽기 시작합니까? 죽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만  그 심어지면 그것이 심어지는 그것이 바로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종자가 생명이 있는 것은 그 안에서 죽지 안하고 이상한 작용이 생겨져  가지고서 썩을 것이 생명이 삼켜서 점점 생명으로 자라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살이를, 밭은 현실이라, 또 심는 것은 자기가 생활 행동하는  것이라, 생활하는 것이라. 또 종자가 여러 가지 종류의 종자가 있다. 행동은  여러 가지 종류의 행동이 있다. 밥먹는 행동도 있고 길가는 행동도 있고 일하는  행동도 있고 뭐 이것저것 행동이 다 여러 가지 있지 않습니까?  있는데 그 행동으로, 행동은 뭐이라 했습니까? 밭이라 했습니까 심는 것이라  했습니까? 심는 거. 심는 것인데 그 행동으로 완전히 죽는 거있고 그 행동으로  죽지 안할 것으로 이와같이 지금 살아나는 것 있고 두 종류 있습니다. 그것은  심기 전에 생명이 있으면 그것은 심어짐으로성공되고 생명이 없으면 심어짐으로  멸망 받습니다.

 그러면. 그 생명은 뭐이 생명인가? 세 가지를 우리의 생명으로 줬습니다.

진리도 영원히 죽지 않는 거, 진리도 영생하는 것이요 영감도 더우기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진리나 영감이나 한가지인데 처음에 하나님께 나올 때에는  영감이요 그것이 우리에게 왔을 때에는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또 더 우리가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도록 접촉된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이 그라면 성경이 성경으로 나타나기 전에는 뭐입니까? 뭐입니까? 성경이  성경으로 나타나기 전에는 뭐입니까? 진리. 또 진리가진리로 나타나기 전에는  이전에는 뭐입니까? 영감. 또 영감으로 나타나기 이전에는 뭐입니까? 뭐입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영감으로 나타내시고 영감으로 나타낸 것이 우리에게 와서 진리로  부딪치고. 또 진리가 신구약 성경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서 역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에 있는 이 말씀과 동행하면, 말씀과 동행하면  무엇과 동행이 됩니까? 예? 신구약 성경 말씀과 동행하면 뭐와 동행이 됩니까?  진리와 동행이 됩니다. 또 진리와 동행되면 뭣과 동행이 됩니까? 영감과 동행이  됩니다. 영감과 동행하면 뭣과 동행이 됩니까? 하나님과 동행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를,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이 진리, 이 말씀, 말씀이  진리인데 이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 누구를 배반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배반하는 거.

 또 자기에게 성신의 감화가 왔는데 성신의 감화를 그만 다른 복잡한 일 때문에  버려 버렸어. 성신의 감화를 소멸해 버렸습니다. 성신의 감화를 소멸하면 누구를  버린 게 됩니까? 하나님을 버린 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동행이 곧 영감으로 사는 게 하나님과 동행이요 하나님과  동행이 진리로 사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진리로 사는게 뭐인데? 신구약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라 하는 것을 하는 그것이 진리로 사는 것이요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하는 것이 진리로 사는 것이요 하라는 걸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주님 앞에 용서받고 하지 말라는것 한 것을 후회하고 하나님에게  용서받는 그것이 회개해서 사유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뿌리운 씨가 종자위 모양과 종자가 뒤에 자라고 난 다음에 모양이  다릅니다. 밀로 보면 뭐 우리는 다 인제, 같다 그말은 뭐이냐 하면 밀 종자는  심는다 밀이 되는 걸 그래 알기 때문에 밀의 종자의 형체와 뒤에 자라고 난  다음에 형체가 같다고 말하지 모르는 사람에게 밀이니 콩이니 모르는 그런  사람에게 밀하고 콩하고 팥하고 이래 한테 갖다 놓고서 그러면 이것이 뒤에  자라면 어떤 모양으로 자라겠느냐 하면 알 사람이 있겠습니까? 알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릅니다.

 이거는 콩은 보니까 찰닥하이 이만하고 울콩 같은 것도. 이만하고 또 밀은  조그만하고 그러니까 아마 이거는 크게 자랄란갑다 이렇지마는 밀은 한 길이나  되구로 자라지마는 콩으로 말하면 찍해야 요만치밖에 안 자란다 그말이오.

요만치 밖에 안 자라요.

 그러니까, 아주 종자의 모양과 종자가 자라난 뒤의 모양이 아주 다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동하는 그 행동의 모양과 행동하고 난 다음에  이 다음에 무궁세계에 보응의 모양, 행동으로 말미암아 속에서 만들어진 모양,  그 자라는 것은 우리의 심신의 기능을 말하는 겁니다. 기능을. 그러면 그 사람  행동과 자라는 기능은 아주 모양이 다르다.

 그러면- 이거 좀 잘 모르면 몰라요 -자, 그 행동할 때에 았주 그 행동이 영광과  존귀가 큽니다. 그 행동을 보고서 그 영광과 존귀가 커서 모든 사람들이 그  행동을 참 부러워하고 아주 그 영광스럽다 존귀하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다  높이 평가하는데 그 다음에 속에서 만들어지는거 자라는 것은, 자라는 것은  이것은 속에 만들어져 자라는 거 심신의 기능이 자라가는 것을 말한다 말이오.

심신의 기능이 자라가는 거 말하는데 자라가는 기능과는 영 다릅니다. 모두 우리  나라에서도 얼마 전에는 국회의원, 얼마 전에는 대통령, 이러니까. 그거 될라고  해서 그 행동하는 것이 한국 사람이 제일 부러워하고 존귀히 여기고 이런데  그렇게 하는 그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속에 만들어지는 사람은 다르다  그말이오.

 그러면, 하나는 아주 그 사람은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들어간 사람도 있고 뜻대로 살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아주 부귀  영광으로 살 수 있는데 그렇게 살지를 못하고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지금 자기에게 있는 것을 아주 거지 병신 아주  문둥원, 그런 문둥원에 가가지고 손양원 목사님 같은 이는 문둥원에 가 가지고서  일생 동안 문둥이로 더불어 같이 살고 이렇게 뭐 질질 고름 흐르고 내음새  나는데 그런 데만 돌아다니고 그 문둥이 하고 같이 사는데 그 같이 사는 그것은  그 행동, 같이 사는 그 행동과 속에 만들어지는 사람은 다르다. 그러면, 지금  대통령이 되고 하니까 그런 거는 아주 영광소러운 행동이라 이렇게 해서 모든  사람은 높이 평가하고 또 손양원 목사님 같은 그런 이는-알기 쉽게 그래 양 극을  말합니다. 알기 쉽도록.-손양원 목사님 잘은 그런 이가 나환자로 더불어 같이  이렇게 먹고 마시고 살고하는 그 생활은 아주 천하게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 행동은보기에 이 세상 행동은 천하게 보이나 속에 만들어지는 것은 지극히  존귀한 그런 것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 행동과 속에 자라는 거, 속에 자라는 거만들어지는  거 그거는 아주 모양이 다르다. 그거 이해가 됩니까? 이거 이해가 안 되면 안  돼.

 요거 이해를 해서 고 이치를 깨달으면 서부교회 왔던 사람이 굶어 죽어도 굶어  뒈져도 딴 데 안 갑니다. 뭐 핍박뿐 아니라 나중에 참 다른 사람들은 서부교인들  뭐 잡아서 전부 감옥에 가둬서 다 죽인다 해도 죽었으면 죽었지 변동 안 합니다.

요걸 모르기 때문에 변동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그러기 때문에 마귀란 놈이 자꾸 성경대로 바로 알게 하면 죽어도  성경대로 행하지 안할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자꾸 성경을 잘못 깨닫도록  그렇게 만든다 그거야.

 37절에 또 서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이러니까 종자의 형체와 그것이 자라는 형체, 종자의 형체와  자라는 형체가 성경에 같다고 말했습니까 다르다고 말했습니까? 다르다고  했습니다.

 이러니까, 종자는 뭐이 종자라요? 종자는 뭐이 종자요? 행동이 종자. 종자는  행동 종자라. 행동이 종자. 또 밭은 어덴데? 자기 현실. 그러면 종자의 모양과  자라나는 것의 모양이 같다고 했습니까 다르다 했습니까? 다릅니다. 다르지  않습니까?  다른 요것을 사람들이 모르고 종자의 모양과 자라는 것의 모양이다 좋은 줄  알고 종자의 모양이 아름답고 귀하고 영광스럽고 다른 사람이 다 부러워하고  권세 있는 그런 것을 종자를 다, 종자, 이 세상에서 종자의 모양 좋은 것을  취하고 그거면 구원도 다 그것이 될 줄로 그렇게 알지마는 이 보연은 종자의 그  영광과 자라는 것의 영광과, 그래서 모양이라 하나로 말했어. 종자의 모양과  자라난 것의 모양이 아주 다르다.

 이러니까, 그 대개는 보면 이 종자가 험하면 속에 것은 뭣이 속에 자라는 것은  좋은 게 자랍니까 나쁜 게 자랍니까? 종자가 천하면. 종자가 천하다 말이 무슨  말이요? 무슨 말이지? 이래 모르면 이걸, 성경 보고 다 이 모든 걸 라 생각하면  아는데 그 말해도 몰라요? 종자, 행동 아니요? 종자는 행동.

 행동의 평가와, 행동의 그 평가와, 행동을 이 세상 사람들이 가치로 여겨서  평가하는 것과 속에 자라난 것의 가치는 다르다. 그러면 그 가치를 세상  지식으로 평가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평가할수 있는데 예를 들면  손양원 목사님 그 행동은 세상 지식으로 평가하면 천합니까 귀합니까? 천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가하면 천합니까 귀합니까? 귀합니다.

 이러니까, 종자와 속에 자라나는 그것은 모양이 다르다. 다른데 다른 그것을  직접 보고 사람들은 세상 지식대로 그렇게 보고 평가하는 사람은, 망할 일은  존귀하게 여기고 존귀한 그 생에는 아주 천하게 그렇게 여긴다, 꺼꾸로 여긴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꼭-요거 지금 여러분들 대번에 그래 아는 게 아니고 가서 자꾸  생각해서 생각해 보면 ‘아멘’ 또 생각하면, 자꾸 이런 거 저런 걸 생각해  봐요.

 이래서, 종자의 모양과 자라나는 것의 모양은 다르다. 내 행동에 모양, 행동을  다른 사람이 보고서 가치 있다 추접다 더럽다 좋다 깨끗하다 뭐 아름답다 하는  그거와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속에 속 사람의 기능이 자라가는 그 모양은 아주  다르다. 그거 이해가 됩니까?  이걸 알면 재미가 있어서 마구 죽자 살자 하고 달라드는데 이걸 모르면 안  되니까 이거 장 이거만 가르치면 또 아는 사람은 ‘아이구 그거 뭐 이미 알고  있는데 그것만 자꾸 그래 쌓아니까’ 해서 모르는 게 또 하는거라, 모르는 것이.

 그런데, 그러면 종자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자라는 모양이 자라나는 모양,  종자의 모양과 자라나는 모양이 같지 안하고 다른데, 그러면 종자가 뒤에  자라나는 모양, 자라나는 모양은 하나님께서 자라나는 모양은 이 모양도 주고 저  모양도 주고 그 줍니까 자라나는 모양은 종자로 결정이 됩니까? 어찌 됩니까?  자라나는 모양은 종자로 결정이 됩니까 자라나는 모양은 어째서 결정이 됩니까  종자에서 천정이 됩니까 어데 결정이 됩니까? 종자에서 결정됩니다. 종자에서  결정돼.

종자에서 결정이 되는데 그러면 또 종자와 자라나는 모양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깨달아야 되지.

 종자의 모양과 자라난 모양은 다르다. 이러니까 모푸 다 종자의 모양보고  종자의 모얗이. 좋으면 그게 자라난 것도 좋을 줄 알고 구원도 좋을 줄 알고  예수 믿는 사랑들이 다 종자의 모양을 보고서 종자의 모양이 아름답고 천하다  그런 것 보고서 모든 자기의 그 행동을 결정한다. 종자의 모양.

 그러나, 종자의 모양과 뒤에 자라나는 모양은 다르다. 행동과 행동으로 인해서  자기가 살아나고 자라나는 그 심신의 기놓은 아주 다르다. 요거 뭐 무슨 이해가  됩니까? 이거는 뭐 알면 자꾸 알 수 있는 건데. 아주 다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현실에서 언행 심사의 행동하지 않습니까?  말도 행동이요 마음도 행동이요 생각도 행동이요 또 행동도 행동이요 우리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도 있고 또 이 수족으로 행동하는 것도 있고 우리의  정신으로 행동하는 것도 있고 행동하는 것이 입술로 행동하는 것도 있고 많이  있지 않습니까?  많이 있는데 이 행동의 이 모양과 이 행동으로 인하여 자라가는 기능의 모양은  다르다. 요거 여러분들이 좀 깨달아 잡으면 요것도 우리가 일생 동안 매일  생활에 있는 것인데.

 그러니까, 사람들은. 행동이 이 세상에서 볼 때에 다 아름답고 귀하고 그런  행동 할라고 합니다. 아름답고.

 행동. 그러면 바단 요이불 자리에서 누워자는 그 누워자는 행동, 누워자는,  행동이 귀합니까 지금 참 저 바위틈 속에서 북더기 속에서 지금 자고 있는  행동이 귀합니까? 누구든지 비단 요이불 위에 잘라하지 그런 데 잘라 할 리가  없습니다.

 또 지금 아주 좋은 양옥을 지어 놓고 그 위에다가 아주 호화롭게 그렇게 모든  것을 구비해 놓고 지금 거기에서 살고 있는 그 행동하고 있는 그 행동과 아주  말할 수 없는 아무짝도 ‘쓰지 못할 그 병신 거지 또 아주 행동이 독사와 같은  그런 뭐 개망나니 행동하는 인종지 말자요 ‘사람하고 같이 살고 있는 같이  행동하고 있는 그 행동은 다,더럼기 때문에 그거는 피할라 한다 그말이오.

피할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천풍언씨는 이걸 깨달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백작의 아들인데 그  백작의 영광, 백작이라 말하면 그거 내나 지금 뭐 장관이니 하는 장관 정도의  그런 모든 벼슬자리에 있는 그런 사람들을 백작이라 하는데 그런 사람의  자녀인데 그 위치에 존귀한 것을 버리고 자기는 빈민굴에 가 가지고서, 거지들  모아서 사는 빈민굴에 가 가지고 거기서 같이 살았습니다.

 같이 사니까 자기가 좋을 때에 약혼한 그 약혼자가 있었는데 하천풍언씨가 거기  가 가지고서 그 빈민들과 같이 사는, 빈민들을 봉사하기 위해서 구르마  끌구르마를 끌고 이래 가지고 이래 하니까 자기 약혼자가 자기를 보고서 그만  붙들고 울면서 아주 이런 짓 하지 말고 왜 이런 일 하느냐고서 당신이 지금  백작의 자녀로서 이렇게 아주 부i고 영광스럽게 살 수 있는데 이런 짓을 하느냐  이렇게 말하니까 ‘나는 지금이 생활을 안 하고는 안 되겠으니까 내가 그리 안  해도 당신은 나와 같은 사람 만나 가지고,는 불행스러우니까 어짜든지 이제부터  약혼했던것을 다 취소를 하자.-아무 죄지은 일 없으니까, 약혼만 했기  때문에.-약혼한 것을 다 파혼하자.’ 이렇게 말하니까 그 여인도 한번 두 번  며칠 가도 몇 달 겪어 보니까 그짓만 하고 있는데 아주 뭐 거지가 돼가지고 이래  다니니까 그래 파혼을 했습니다.

 파혼 했는데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서 ‘나하고 결혼을 합시다’ 이라니까  ‘내가 결혼을 할 수 없는 건 다른 사람을 데려다가 내가 고생을 시킬 터이니까  나는 결혼을 못 하겠습니다. 나는 지금 이 생활이 이 생활인테 이 생활이 뭐  행여나 이래도 앞으로 나가면 좀 펴일 날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는 죽는 날까지 이 생활이 계속될 터이니까 어떻게 와 가지고서 이 거지 생활  이런 생활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까 나도 그것이 내 비위에 맞으니까 같이  나도 그 생활 하고 싶다고서. 그래 결혼했습니다.

 결혼했는데, 그 빈민굴 그 책에 보면 거기에서 그 모든 뭐 그 가난한  사람이니까 전부 병신 아닙니까 위생을 할 줄 압니까 뭐 약을 쏩니까? 병신인데  이러니까 하루 종일 병신들 치료해 주고 또 다리 없는 사람은 다리노릇 해 주고  또 손 없는 사람은 손노릇 해 주고 또 눈 없는 사람은눈노릇 해 주고 이래이래  살고 자꾸 이래 치료하니까 경제가 그렇게 돌아가지 안하니까 안약을 사서 다른  사람에게는 넣어 줄 수가 있었지마는 자기 눈 아픈 데는 넣을 기회가 없어서  아파도 그 옆에 또 다른 사람 눈 아파 가지고 눈병 난 사람 있으니까 그  사람에게 먼저 넣어 주지 자기에게 넣어 주지 못하고 이렇게 살다가 보니까  나중에가서, 아내도 그래 살고 남편도 그래 사니까 거기에 두 사람의 눈은  한사람 눈 가지고 있어. 그러면 하나씩은 버려 버렸고 이 사람도 외통이고 저  사람도 외통이라. 하천풍언씨 외통 눈 뿐이오. 그러면 그걸 치료를 안 해서  버려서.

 이러니까, 이렇게 이 사는 그 생활이 얼마나 보면 천하고 가련하고 불쌍한  생활입니까? 그러나 속에 자라는 기놓은 다르다 그말이오. 속에 자라는 기능은  달라,  이러니까, 하천풍언씨가 자기가 백작의 아들로서 아주 위대하고 훌륭하게  취직하고 존귀하게 이렇게 살았다고 하면 생활 그 행위, 그 행위의 그 생활의 그  모양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지금 빈민굴에 가서 살고 있는 그 생에는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합니까?  그런데, 그 속에서 그 자라가는 그 기능은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백작으로  존귀하게 사는 때에 자라가는 기능이 낫겠습니까 이 지금 가련한 데 자라가는  기능이 낫겠습니까? 가련한 데 자라가는 기능이 나아.

 고거 뭐 그게 고생한다고 좋은 게 아니고 고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영감의 말씀을 받고 보니까 자기가 그 생활을 버릴 수가  없고 그 생활을 취하지 안 할 수가 없어서 취했어. 그러니까,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그 행동의 모양, 행동의 그 형체, 행동의 형상이라고 하면  생활 형상이라 말과 갈습니까 다릅니까? 행동 형상, 행동의 형체, 그 생활의  형체, 같은 말입니까? 같은 말이지요. 그러기에 자꾸 같은 말이니까 그걸 자꾸  행동의 형체라 말만 해 가지고서 모르기 때문에 또 인제 생활의 형체라 생활의  형태라 말한다 그말이오.

 생활이 이 세상에 생활의 형태 행동의 형태 그 형태와 속에서 만들어지는  기능의 형때는 다르다. 성경이 다르다 하는 요 다른 것을모르기 때문에 자꾸.

외식으로 껍데기 좋은 것만 취하지 속에 알맹이좋은 것을 취하지 않는다  그말이오.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 하면 아주 그 행동이 헙한 것도 있고 귀한 것도  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외부에 육안으로 볼 때 현재 세상에서 볼 때에 그 사람의  현실에서 행동하고 사는 그 현실에 행동, 생활, 생활 형태, 현재 세상에서 살고  있는 그 형태와 속에서 자라가는 속사람의 기능의 형태는 아주 판이 하다 요게  이해가 됩니까?  이라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러면 히어머리 험한 생활 하면 속에그 기능이  좋아집니까 겉어머리 영광스러운 생활하면 속에 이루어져가는 기능이 좋아집니까  어떻습니까?  그라면 겉어머리 말이지요. 아주 현실에서 생활하는 그 형태가 아주 험하고  천하면 그 속에 만들어지는 건 좋은 게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또 그러면 현재에 볼 때에 외모에 아주 생활 행동 형태가  영광스러워져야 존귀해져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존귀해져야 속에  만들어지는 속사람 영생할 사람의 그 기능이 아름답게 좋게 만들어진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이 뭐 있기는 있는데.

 그러면, 자기가 이 세상에 살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영감대로 진리대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대로 이렇게 살라고 하니까, 살라고 하니까 어떨 때는  세상에서 영광스럽고 존귀한 생활도 있고 어떨 때는 아주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천한 생활도 있고 이런데,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 하다가 천해지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  하다가 존귀해지든지 말씀대로 살므로 자기에게 닥쳐지는, 말씀대로 살므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필연적으로 되어지는 형태되어 있는 형태 그 형태대로,  되어지는 고대로, 자기가 깨달아서 주의 말씀대로 살라고 할 때에 자기에게  이루어지는 그 행동 그 행동으로 하는 그것이 속사람의 기능이 존귀하게 가치  있는 자라가는지 또 이 세상 사람들이 가치 있는 행동이라 가치 있는 생활이라  부러워하는 그 행동대로 하는데에 속에 기능이 좋은 것이 자라가는지! 어떤 것이  자라가는지? 그러면, 세상 사람이 볼 때에 아름답다 존귀타 이렇게 평가하는  그대로 사는 데에, 그 행동의 속에 기능이 좋은 게 자라가는지 하나님의 뜻대로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자기에게 부딪혀지는 필연적인 자연 보응적인 생활이  아주 고통스럽고 천한 생활이든지 부한 생활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고  생활로 살 때에 아름다운 그 기능이 자라가는지 어떤 건지? 저 OO씨? 네.

그러니까 우리가 요걸 똑똑히 알아야 돼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데에.

 그런데, 왜 이 말씀을 하나님이 하셨느냐 하면 인간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는  대로에 이 모든 평가 그 평가 그것이 자기 예수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평가인  줄로 이렇게 알기 때문에 요 말씀을 기록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사는 생활에 모든 사람들이 평가하는 그 평가와 속에  자라가는 그 기능의 평가는 다르다 그거요. 다르다고 생각이 돼 집니까?  확실합니까?  그런데, 잘못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고행을 해야 고생을 해야 수고를 해야  아주 천한 생활 해야 속사람의 기능이 아름답게 자라간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말이오.

 그러면, 이런 고행의 생활만 하고 천한 생활만 하면 속사람이 자라가는 것이  아름답게 자라가고 아주 예수 믿으면서 세상에 존귀한 생활만하고 영광있는  생각만 하면 속사람 자라가는 거 천해진다 요렇게 요 생각하면 요 생각이  잘못됐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손을 안 들었다그발이오. 그러니까 자꾸 요  말씀으로 구별해야 된다 말이오.

그러면 그때 말하기를, 그러면 천한 생활이, 천한 생활해야 속에서  영광스러움으로 자라가느냐 이 세상에 영광스러운 생활해야 속사람의 기능이  영광스러움으로 자라가느냐 이라면 대답을 뭐라고 해야 됩니까?  자, 영광스럽게 살아야 기능도 영광스러운’기능이 자라간다고 하는분들 손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천한 생활을 해야 속에 기능이 영광스러운 기능으로  자라간다고 그렇게 아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그러면 천하든지 귀하든지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하신 고 현싶에서자기에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진리대로 영감대로 현실에서 하나님의이 세시 진리대로 사는 행동 그 행동이면  천하든지 귀하든지 고 행동 고게에 영광스러운 기능이 자라간다 요렇게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 봅시다. 네, 알기는 다 알았어. 요렇게 여러분들이 똑똑히  알았는데, 이거 지금 목사들 한테 물어도 모릅니다. ‘이런데, 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느냐? 사람들은 이 세상에 보는 그 형태와 속에서 자라가는 형태를  같이 보기 때문에, 같이 보기 때문에 그게 틀렸다 그거요.

 그러니까, 껍데기 좋으면 속도 종을 줄 알고 껍데기 나쁘면 속도 나쁠줄 아는데  껍데기 좋고 속이 나쁜 거 많고 껍데기도 좋고 속도 좋은거 많은데 이제 사람이  고생 생활하고 또 천한 생활하고 하는 거기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거기에 가치가 있다. 그 건데, 그러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에 이 세상에서 존귀한 그 생활은 사람들이 잘 합니까 안 합니까?  잘 합니까 안 합니까? 잘 안 해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에  부자되고 존귀해지고 영광스러워지고 평안해지고 하는 그런 길은 사람들이 잘  걸어갑니까 안 갑니까? 잘 걸어가. 잘 걸어가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해서 고생스러운 길은 걸어가라 하면 안 걸어갈라 해.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게 뭐이냐 하면 생활이 일방적이 그 하나님 말씀에  준해서 살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 살든지 죽든지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하는것은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것은 고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까  평안한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까? 고생도 평안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고생도 평안도만 아니라. 고생만도 아니고 평안만도 아니라.

 이러니까, 하나님 뜻대로 사는 건 뜻대로 사는 그 걸음이 고생스러워도 뜻대로  살고 또 영광스러워도 뜻대로 살고 이래 살아야 되어지는 것이지 고생하고  평안한 거기에 우리의 기능이 자라는 근거가 안 된다 말이오. 그거 고생스러운  데서 고생스러우면 좋은 게 자라지고 또 평안하면 나쁜 게 자라진다 그게  아니라.

 그러면, 우리의 기능이 자라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 수고 하고 고생하고 또  평안하고 영광스럽고 하는 거기에 따라서 우리 부활할 자의 새사람의 기능이  자라갑니까 거기에 따라서 자라가지 않고 하나님이 현실에서 자기에게 말씀해  주신 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행동하는 거기에 따라서 우리의 기능이 천하고  존귀하게 자라가느냐? 어떤 것입니까? 껍데기 모양입니까 하나님의 계시 말씀에  순종이냐 거역이냐 하는데에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까? 순종과 거역이냐 하는  데에서 결정이 됩니다.

 이런데, 사람들은 일방적 지식 가지고서 켭데기 좋으면 속도 좋을 줄 알고 모두  다 껍데기 좋은 걸 잘 취하고 뭐 껼데기 좋은 걸 취해서 달리고 있지 속 좋은 걸  생각지 안하고 또 사람들은 껍데기가 고생스러워야 속이 좋을 줄로 그래 알고 또  그렇게 생각해 가지고서 믿는 사람들 많다 그말이오.

 왜? 흥포 입은 부자와 나사로에 대해서 성경에 말하기를 너는 살았을때에 좋은  걸 취했고 나사로는 고난을 당한 것을 네가 알아라. 이러니까 고난당하면 그만  영광스러운 구원이 이루어질 줄로 그렇게 생각하고 좋기만 평안하게만 살면  이거는 다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이 아주 불쌍한 그런 구원이 되라라 이렇게  사람들이 다 또 착각하고 있다 그거야. 그 성경 해석은 뭐이냐 하면 너는 살았을  때에 너 좋은 걸 취했고 그 나사로는 그는 난을 당했느니라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너는 세상에 살 때에 하나님 좋도록 하지 안하고 너 좋도록 했고 네 주관  네 중심 악으로 했기 때문에 너는 아무 구원 이를 거는 하나도 없고 나사로는  고난 취했다 그말은 나사로는 뭐 좋은 거나 나쁜 거나 저하고 싶은 대로 하지를  못하고 전부 주님하고 싶은 대로 했기 때문에 저 좋은 것 취하지 안하고 저 싫은  것 주님 좋아하시는 것만 취했다 그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요 성경을 요렇게 바로 깨닫지 안하면 구원이 바로 이루어지지 못하는데 그  아무나 따나 해도 이루어진다고. 이러니까 성경을 가르칠라고 해석을 하면 그만  듣기를 싫어합니다. 듣기를 싫어해 가지고서 엉뚱한 짓 하요.

 그러니까, 오늘은 요거 하나 배웠습니다. 행동의 모양과 속에 그 행동을 통하여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사람은 다르다, 만들어지는 기능은 다르다. 그러면 행동의  기능이 아름다우면 속에 만들어지는 기능은 천해집니까 아름다와집니까?  천해진다는 사람? 아름다워진다는 사람? 인제 여러분들 알았어.’ 그거 행동이  아름답고 천하고 하는 그것이 속에 기능이 좌우되는 근거가 아니라. 다만 행동이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느냐 하나님의 뜻을  어겨서 행동하느냐? 진리대로 행동하느냐 영감대로 행동하느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대로 행동하느냐그걸 벗고 행동하느냐 여기에서 속사람의 그 기능은  자라간다.

 이제 이 진리가 옳애요 틀려요? 옳애요 틀려요?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이  성경에 씨를 뿌릴 때 씨의 모양과 자라난 것의 모양이 다르다 하는 것의 이  해석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이것어 바로 해석했어 안했어? 이걸 모르면 제가  어떻게 구원을 이를 겁니까? 모르면 이루지 못해. 암만 어려워도 배워서 알아야  되지.

 안 것만치 자기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안 것만치 행동하고 모르는 행동은 못  합니다. 알고도 행동 안 하면 소용 없고. 알면 이제 행동하느냐? 할 수가  있지요. 그러니까 먼저 아는 게 제일 중요하고 그다음에는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자, 자라나는 그 형체는, 자라나는 형체는 땅 속에 심고 나니까, 땅  속에 씨를 심고 나니까 자라나는 형체, 자라나는 형체는 심고 나니까그 형체를  이런 형체도 주고 저런 형체도 하나님이 주셔서 형체가 되어집니까 벌써 심을  때에 그 형체가 결정이 됩니까? 심을 때에 그형체가 결정이 됩니까 안 됩니까?  심을 때 형체가 결정이 됩니다.심을 때 그 형체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OOO  선생. 뭐 몰라, 몰라. 잤으니까 몰라. 영점 대답해 버렸어. 그거는 낙제야,  낙제. 뭐 뒤에가서 자꾸 주 대 하는 거는, 그거야 다 아는 것이니까 그라기  때문에.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이 교리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이치이기 때문에 그 이치는 내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서 그 이치에 내 생명을  바칠 수 있어야 제 교리 신조 영생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안하면 안됩니다.

 이러니까, 자, 사람이 그 속에 행동에서 그 사람이 행동을 하는데 그 행동  함으로 속사람이 자라가는, 자라가는 그 형태가 그 행동에서 결정이 됩니까 안  됩니까? 결정이 됩니다. 그러면 자라나는 그 형태가 행동의 그 형태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릅니다. 또, 그라면 다르면 그 행동의 결과로  속사람이 자라가는 그것은, 행동으로 속사람이 자라가는, 속사람이 이리  자라가나 저리 자라가나 많이 자라가나 적게 자라가나 속사람이 자라가는 것은  그 사람 행동에 확실히 결정이 됩니까 안 됩니까? 결정이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결정이 됐어.

 하나님이 요렇게 오묘함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간단하고 명료하게 요래  가르켰어.

 이러니까 밀은, 자, 밀이 자라면 뒤에 어떤 모양으로 자랄까! 자란후의 모양과  밀의 모양이 전혀 달라. 요거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이 행동과 속에 속사람이 자라가는 행동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지식으로 보면 다 그거 같고 알지마는 세상 지식이 있기 때문에 다르다.

 그런데, 그러면 그 사람의 속사람이 이런 모양으로 자라락다 저런 모양으로  자라간다 하는 그 자라가는 것은 어데서 결정이 됐습니까? 어데서 결정이  됐습니까? OOO씨 사위 이름이 뭐이지? 어데서 결정이 됐습니까? 행동이 종자와  같애. 행동이 뭐이라 했지요? 행동이 종자. 그 종자마다 다 벌써 자라갈 밀은  이렇게 자라가고, 또 이 콩은 너불너불하게 그래 자라가고, 또 호박은 줄기로  자꾸 이래 자라가고 벌써 그걸 모르는 사람은 그 씨와 뒤에 자라난 그 모양은  전혀, 다르지마는 양쪽 지식을 다 아는 사람은 이거는 호박씨이기 때문에 이거  어찌 자라갑니까?’ 이리 이리 자라가는 걸 자라가기 전에 벌써 가르쳐 줄 수  있다 말이오.

 자라가기 전에 요런 행동에는 요런 요런 속사람이 자라가고 조런 행동에는  요렇게 저렇게 자라간다, 하나는 멸망이 자라가고 하나는 구원이 자라간다 하는  그것을 그 농부는 다 안다 말이오. 농부는 다 알고 알 수가 있어.

 그러면, 그것을 바로 정확하게 요런 행동에는 요렇게 자라가고 요런 행동에는  조렇게 자라간다 하는 그거, 또 요런 행동에는 요런 구원이 자라가고 조런 건  조런 멸망이 자라간다 하는 고런 것을 그 농부가, 여러 번 농사 지은 농부들은  똑똑히 아는 것처럼 농부가 정확하게 정확한 지씽을 가지고 있는 거와 같은 그  정확한 지식이 우리에게 와서 있습니까 없습니까? 와서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데  있습니까? 신구약 성경에.

 신구약 성경은 과거 현재 미래 영원을 일관적으로 똑 바로 가르쳐 놓은 것이  신구약 성경입니다. 이 신구약 성경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를 못 믿소.

세상에 있는 지식 저거 전부 똘똘 다 뭉쳐봤자 신구약 성경의 한 획을 당하지  못하는데 이놈의 지식은 취할라고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추워도 더워도 바빠도 똑  갈 줄 알지마는 하나님의 지식은 이거 아주 무가치하게 여깁니다. 이게 뭐 예수  믿는 사람이라! 오늘 예수 믿는 사람이 학교 공부는 크게 여기고 이 예수 믿는  이런거는 등한히 여기는 거. 이거 다 예수 믿는 사람들 아닙니다. 건설구원은,  믿는 거는 아니라. 기본구원은 있으니 그게 목사노릇도 다 하지마는 정말 믿는  거는 아니야.

 이걸 어짜든지 좀 깨달아야 됩니다. 요새, 나 만나는 사람마다 말해. 그 사람은  중학교 시키면 될 정도가 고등학고 시킬라 하면 그만 그거좀 되고 무리인데  중학교 시킬 건 대학 시킬라 합니다. 고등학교 시킬수 있는 것은 다 외국 유학  보낼라 하요.

 이래 가지고 일생 동안 시간도 없고 정력을 뭐 거기에 다 젓기고 거기다 종이  돼 가지고 죽을판 살판 해서 ‘이거 하면 된다’ 되면 뭣 돼, 되기를?  나는 그래서 박사일랑 절대 받지 말아라 말합니다. 왜? 박사 받은 사람이  박사로 인해서 손해보는 사람들이 많지 유익 본 사람들을 적어. 박사가 되면  다른 사람이 알아 주거든. 자꾸 이래 청하는 사람이 많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거 우쭐해 가지고서 그만 헛일되고 말아. 그게 구원 이루는 거  아니라. 박사가 구원 이루는 거는 절대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사는  요것만 구원 이룹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걸 여러분들이 자꾸 읽고 지금 부활에 대한 것을 요새 공부를 하는데 이  부활에 대한 걸 자꾸 읽으십시오. 읽고, 읽고 외우고 또 생각하고 생각하고 자꾸  이렇게 많이 생각해 알아지지 그냥 알아지는거 아니라. 자기 지식에 거기서 더  한 층 자라서 죽자 살자 알아지고 그만 그대로 죽자 살자 살라 하는 고 감동이  있어야 되지 그리 안 하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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