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1980. 6. 9. 월새

 

본문 : 고린도전서 15장 49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

  선지자선교회

우리 기도하기 전에는 이 줄이 저 앞에 가지 안 하고 똑같이 나갔는데 우리 기도할 동안에 온 사람들이 이 줄에 많이 앉아서 이 줄이 앞서 나갑니다. 그 사람들 남의 눈만 보는 사람들이지 양심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은 못 보지만 하나님은 보시지 않습니까? 작정을 했으면 그대로 해야지. 그 버릇을 고치려면 일으켜 세워서 저리 보내야 되는 건데 앞으로는 그렇게 말고 이제 안내원 없어도, 새벽 기도 나오는 사람이면 좀 믿어 보려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는데 이 줄과 저 줄이 같이 나가도록 합시다. 사람들이 사람 앞에 나서기를 싫어해. 이러니까 쭉 이래 앉으놓으니까 떡 이래 들어오기가 안면에 부숴셔 어려우니까 그러니까 양쪽 줄이 똑같이 나가면 다른 사람에게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모든 나쁜 건 자기가 부담하고 남에게는 부담을 안 주도록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입니다. (성경 본문 읽기 전에 교인들에게 권면하신 말씀)

흙에 속한 자는 첫째 아담을 말하고 하늘에 속한 자는 둘째 아담을 말합니다. 첫째 아담의 형상을 입었다는 말은 첫째 아담과 같이 우리의 영과 육이 같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의 형체를 입는다는 말은,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예수님의 영육을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도 영육이 있지만 그 영육은 우리와 같은데 그 영육은 첫째 아담의 영육과 같은데 다만 죄만 없으십니다.

그런데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가지신 그 형상을 입는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지신 형상은 어떤 형상을 말하는가?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입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도 입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은 형상이 물질로 된 형상도 없고, 우리 고깃덩어리는 물질로 된 형상입니다. 우리 마음도 물질로 된 형상이요. 우리의 영은 영물로 된 형상입니다. 그러기에 이 영물은 물질계에는 물형을 입지 않고는 활동을 못합니다. 하나님은 물질의 형상도 없고 영의 형상도 없으신 분입니다.

? 그분은 완전자시기 때문에 완전자는 형상을 가졌으면 형상을 쪼개트립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이 그분의 형상입니다. 완전이 그분의 형상이요, 또 영원 불변이 그분의 형상이요, 또 단일성이 그분의 형상이요, 또 온전한 지혜와 지식과 선, 사랑, 진실, 거룩, , 주권, 또 당신이 자존하신, 아무것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스스로 계신 자존.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 이렇게 성경에 당신이 나타내셨지 하나님은 뭉텅이가 있다. 크다 작다 영체가 있다 물체가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안 했고 물체도 영체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신성,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기능,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형상을 입었는데 예수님이 입으신 그 형상과 같은 그 형상을 우리가 지금 마련하고 있습니다.

어제 아침에도 불택자들은 세상에서 어떤 소망 가지고 사는고 하니 제가 그러나 안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인데 그것을 취하면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모든 죄되는 방법을 써가지고 이런 것 저런 것 마련해 가지고 제 욕심대로 실컷 살고 또 제 욕심대로 달성을 하고 제 욕심대로 달성하니까 제 단독 욕심대로 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이 사람은 이 욕심을 가지고 이렇게 이렇게 살다가 망한다 하는 그것을 예정하셔 가지고 그와같이 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에 합니까? 하늘나라에 하나님을 배반하되 제 욕심대로 살되 천 가지 만 가지만 아니고 수없는 것들이 이렇게 욕심으로 산 것은 이렇게 망하고 저렇게 욕심으로 산 것은 저렇게 망하고 또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한 것은 이렇게 구원 얻고 저렇게 순종한 것은 저렇게 구원 얻고, 이래가지고 하나님이 만드셔서 영원 무궁토록 하나님은 만든 것 가운데에 목적 안에 지음을 받은 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모든 것을 봐서 충만하도록, 학교에서 공부할 때에, 더욱이 과학을 공부하는 자연계에 속한 모든 것을 공부할 때는 실험을 하지 않습니까? '이것하고 이것하고 배합하면 이리 된다. 이리 되면 이리 된다.' 그 모든 것을 실험해 가지고 보이니까 거기서 공부해 가지고 나와가지고 이 사회에서 살 때에 '그런 것이 아, 이것하고 이것하고 부딪히면 이게 된다. 이런 사람 성질 하고 이런 사람의 성질하고 마주치면 이리 된다. 이런 일을 할 때는 이런 사람의 성질이 나오고 저런 사람의 성질이 나온다.' 이것을 조화를 잘해야 됩니다. 그것이 경영학이라는 학문입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실물로 조그마한 것을 가지고 실험을 해보고 난다음에는 '이제 됐다' 이라면서 큰 것을 가지고 그대로 해서 하는 것이 연구하는 것이고 실험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 모양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배반하면 어떻게 되고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하면 어떻게 되고 자기 욕심을 어떻게 이루면 어떻게 되고 어떤 욕심을 이루면 어떻게 되고 어떻게 욕심을 이루면 어떻게 되고 자기 욕심을 비우고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그 소원을 자기 소원으로 탐하고 그 소원에 복종하면 어떻게 되고 또 저 소원에 복종하면 어떻게 되고 하는 그것을 이 세상에서 모두 다 실험해 보이는 것입니다.

다니엘 같은 그런 사람도 하나의 실험해 보인 것이요. 다니엘이 앞에 사자굴이 있어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믿어나가니까 사람 보기에는 죽었지만 살아난 것같이 이런 것을 보아서 아, 사람보기에는 죽은 것 같으나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았다. 또 불가운데 집어넣으니까 이제 죽었다 했는데 살아났다. 그런 것은 여러 가지를 보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권하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리 사자굴 속에 들어가도 하나님이 안 삼키게 하면 안 되고 입을 벌리고 꺽 물었지만 씹지 못하게 하면 그대로 있다. 공간을 모든 활동을 조정하신다는 것을 거기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사람 너거 지식으로는 끝났다고 보여지지만 끝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죽으면 죽은 줄 알지만 무궁 세계의 생명이 있다. 또 이런 곤충같은 것 보면 이것이 죽습니다. 곤충이 번데기가 되어 죽어버렸습니다. 활동이 없지만 나중에 고비를 지나고 나면 이게 부화가 되어 나와서 훌훌 날라다닙니다. 이거 모양으로 사람에게는 부활이 있다.

"보라, 곡식 알을 땅에 심으면 이것이 썩지 않느냐?" 보면 질금이 되가지고 밀도 보면 밀 가루가 썩어서 한참 썩으려고 할 때 달콤하려고 할 때 바짝 말라버리면 질금이 된다 말이오.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썩습니다. 그 핵이라고 하는 눈 그것만 안 썩고 다른 것은 다 썩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이 있어서 그 생명이 자꾸 키우니까 핵 이놈이 분으로 되어 있는 달콤한 질금 물을 다 빨아 먹어. 다 빨아 먹고 이것이 크니까 종자는 죽고 거기서 움이 나서 자라지 않습니까? 이와마찬가지로 죽는 그것이 죽는 게 아니라 속에 생명이 있는 눈이라는 것이 자라나서 그뒤에 백 배, 육십 배, 어떤 것은 천 배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런 게 되기 위해서 그것이 다시 새움이 나서 살아나기 위해서 종자 그게 죽어버려야 거기서 새움이 나와가지고 새로 자라는 것같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죽는 그것이 영원히 죽지 아니할 몸을, 부활을 입기 위해서 되어지는 것이니 "어리석은 자야, 뿌리는 씨가 죽어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아라"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은 우리와 같은 구형으로 되어 있고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둘째 아담인데 그 아담의 형상을 입으리라. 이는 첫째 아담의 형상을 우리가 입고 있고 둘째 아담을 입어야 되는데 둘째 아담은 첫째 아담과 같은 그런 형상이 아니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는 앞에 말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거와같은 그 형상을 우리로 하여금 입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아버지의 신성을 닮은 그 인성, 예수님이 하나님을 닮은 예수님의 인성을 닮은 우리의 인성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가지고 제가 먹고 쓰고 제 욕심대로 하고 이래 하다가 세상 떠나게 되면 또 제 욕심을 자손에게 물려 줘가지고 이 욕심대로 해라 이렇게 물려주고 가지만 택한 백성들은 "깰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만 만족하리이다." 죽었다가 부활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하는 그 형상이 여기 말하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우리가 입겠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예수님의 인격성과 같은 그 인격성을, 예수님의 지능과 같은 그 지능을, 예수님의 속성과 같은 그 속성을, 예수님의 생애와 같은 그 생애를 우리가 입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같이 된다. 같이 된다는 말은 아니란 말이지요. 예수님과 똑같이 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인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형상이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너희들이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된다. 그러면 세상이 모르는 예수님의 형상을 우리가 보여야 된다. 예수님의 형상을 보여야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야 된다.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줬는데, 또 우리에게 입혀줬는데 그 형상은 뭐이냐? 하나님의 속성과 같은 그런 속성을 우리가 가지고 살고 하나님의 행위와 같은 그 행위를 우리가 하고 또 하나님의 지능과 같은 그 지능을 우리가 가지고 살아서 그 사는 것을 세상에게 보여주고 또 세상 사람에게 전해 가지고 그것을 가지도록 그렇게 해야 된다. 그것이 우리가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이것은 우리가 틀림없이 다 알지요. 이것 입고 있기 때문에, 첫째 아담의 이목구비 수족, 또 첫째 아담의 내장은 우리와 똑같은 내장입니다. 첫째 아담은 간이 없고 우리는 간이 있는 것 아니요 그의 내부와 우리의 내부가 똑같습니다. 그의 영과 우리의 영이 똑같습니다.

그러면 아담과 우리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여기 있지만 똑같은 사람은 없지요. 그러면 이 사람 저 사람 못 볼 것 아닙니까? 다 우리가 알지요. 그것은 조금 다르기 때문에 아무것이 아무것이 다 알지요. 사람으로 이목구비 수족 안팎이 다 같지 않습니까? 이것 모양으로 아담과 우리가 같습니다. 이 같은 거와같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우리가 입으리라." 그러면 예수님과 우리가 같이 된다는 이것을 우리가 굳게 잡아야 됩니다.

예수님과 같이 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다 우리와 같은 간 있었고 콩팥 있었고 손이 있었고 눈이 있었고 발이 있었고 다 있었습니다. 그게 같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것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 말은 하나님의 신성과 같은 하나님의 완전성과 같은 완전성을 가진 자로 지었다. 이런데 이것이 그래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인하여 연결이 되어야 존재의 작용을 할 수 있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다른 거 하고는 연결돼 봤자 존재 작용을 할만한 그런 능동자 원인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 보다 사람의 영이 훨씬 위에 있기 때문에 사람의 영은 하나님 다음으로 존귀하게 지음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는다. 예수님의 그 인격성, 예수님의 속성, 예수님의 행위 이것을 우리도 가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속성과 같은 속성, 신성과 같은 인격성, 그 외에는 하나도 없었고 있으면 그게 죄라서 우리를 대속 못하는 데 하나도 없었고, 예수님의 움직이심은 마음이나 생각이나 뜻이나 성질이나 수족의 행동이나 말이나 모두가 다 아버지께서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그분에게만 피동됐습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는다. 우리도 예수님과 똑같은 예수님이 아버지로 인하여 산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인하여 살게 된다. 그것을 여기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너희들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자는" 그말은 예수님의 구속을 입은 자는 그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과 똑같은 자가 된다는 이 소망을 굳게 잡아야 되겠습니다. 땅에 속한 형상을 입은 것같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는다. 예수님과 같이 된다. 예수님이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것같이 우리도 만물 위에 뛰어난 교회가 얻는 그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입었기 때문에 영원 무궁 세계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아버지의 보좌란 말은 평안하게 잠 잘자는 그런 자리란 말이 아니고 보좌란 말은 사람 말로 보좌라 표현했는데 보좌는 옛날에 정치가의 대왕이 앉는 자리를 보좌라, 용상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용상이란 말은 그들이 용이 제일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용이 앉은 자리라고 했고 보좌라 하는 것은 제일 보배로운 자리라 했는데 그거는 행정성을 언제든지 전제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통치성, 그러니까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는다 하는 말은 아버지가 역사하시는 그 역사를 예수님이 대리 역사한다.

그것을 표현해서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겠다, 또 너희들도 이기면 내 보좌에 함께 앉게 된다." 그말은 예수님이 이겨서 아버지가 동하면 동하고 정하고 정하고 껍데기는 예수님이지 속에 알맹이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시오. 또 예수님의 형체 밖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 말이오. 그 사이에 중보자만 되어 있어.

이와마찬가지로 "내 보좌에 함께 앉는다" 말은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은 이제 우리에게 맡겨서 우리를 통해서 다 하신다 그말입니다. 하나님 밑에 예수님처럼 예수님 밑에 우리되고 만물과 우리 위에 예수님이 위치해 있는 것같이 우리는 예수님 아래 만물 위에 위치해 있는 것이 우리 위치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만물은 그 발등상이 되고 우리는 그의 몸이 된다." 그러면 발등상이 위에 있습니까, 몸이 위에 있습니까? 몸이 위에 있지요. 또 그리스도는 머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갖추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 그분은 이렇게 순종해 가지고 이렇게 됐다하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우리가 품으라 하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입는 그것이 우리 자체 성화입니다. 자체가 어떤 것으로 성화되는가? 어떻게 거룩하게 변화가 되는가? 하나님의 신성처럼 변화가 됩니다. 하나님처럼 완전자, 영원 불변자 또 단일성의 자, 하나님은 자존했지만 우리는 자존하지는 안 해. 하나님과 같은 속성,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것 같은 소원,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 같은 뜻을 하고 하나님이 아는 거와 똑같이 알고 그러면 하나님과 행동이 하나라 말이오. 이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이룰 수 있는 자체 완전이 되어지는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이 말은 우리 자체 온전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고 또 그다음에 있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의 행동의 온전을 말했다 말이오. 그것을 가리켜서 거룩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거룩하심같이", 거룩이란 것은 이것 저것 구별해 가지고 이것은 틀렸다 이것은 맞다. 구별해 가지고 옳은 것을 차지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서원균! 서원균이 시험에 들었어? 저 아레 일할 때 보니까 좀 딴 사람이 됐어. 교만해지고 그전같이 겸손이 없어. 왜 나한테 대하는데 그렇게 버릇이 없어?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등짐지고 다녀도 내가 굉장한 사람입니다. 내가 미친 소리같지만, 그 사람들의 심리를 다 보고 시험에 들었다 하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꾸벅 꾸벅 졸지. 그 은혜를 어디서 잊어버렸어? 은혜를 도로 되찾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입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사람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 뭡니까? 그거는 자체입니까? 행동입니까? 서원균. 저 봐 귀신에게 완전히 홀켜 버렸어. 어째 그랬노? 누구하고 일하다가 어찌 됐노?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체입니까? 행동입니까? 행동입니다. 그 행동을 할 수 있는 그 자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기 위해서 입는 행동을 하고 또 하나님의 형상이 된 것만큼 또 행동하게 됩니다. 행동을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진 것으로써 행동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으로써 신인양성 일위, 우리는 신인양성 결합의 일행, 하나로 행한다 말이오. 하나님과 우리하고 행하는 것이 다른 게 없어 같지. 그러면 이것을 동행이라 합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 에녹이 300년동안 동행했다. 아브라함이 동행했다.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움직이고 자기는 자기대로 움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자기와 함께 동하고 정하는 것을 가리켜서 동행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 따라합시다. 예수님은! 신인양성 일위! 우리는 신인양성 결합의 일행! 이것이 된 것만큼 부활의 권능입니다. 하늘나라 가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일이 되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되어졌습니다. 아버지로 말미암아 되어졌다 그말은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이요. 인성은 피조물입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이 예수님의 신성같이 된 것처럼 우리들이 예수님의 인성과 같이 된다 그것을 가리켜서 여기 말씀합니다.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우리에게 신성은 우리에게 지금 와가지고 일하고 있는 신성은 이름이 뭐이지요? 우리에게 와서 우리와 결합해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이 결합할 수 있는 우리에게 온 신성은 이름을 뭐라고 말합니까? 성령님. 성령님을 가리켜서 또 무슨 영이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는 무엇이 되어가지고 왔습니까? 사람되어 가지고 왔지요.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신성을 말합니다.

그러면 지금 성령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하고 성령이라고도 하고 보혜사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보혜사란 말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해서 보혜사라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신인양성 일위, 그러니까 우리보다 가까워졌지요. 일위란 말은 신성과 인성이 둘이 서로 합한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됐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결합이란 말은 합했다는 말입니다. 둘이 합해졌으니까 떨어질 수 있는 것으로 합해 가지고 있고 붙어가지고 있고 예수님은 붙어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신인양성 일위로 됐고 하나가 됐다, 한 격위가 됐다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인성이 신성된 것이 아닙니다. 한 격위가 이루어졌는데 그는 인간을 탁월하신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의 방언으로서는 어떻다 표시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말씀한대로 신성과 인성이 양성이신데 일위라. 그것을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적이 무엇이냐? 신성과 인성. 인성은 내지요. 신성은 성령님이시오, 예수님이시지요, 그리스도시지요, 하나님 아버지시지요, 성자시지요, 성령이시지요. 이 삼위일체로, 하나님은 한 분뿐이신데 한 분인데 그 격위는 셋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 신성과 인성, 사람인 우리와 둘이 한 덩어리되는 결합이 되는 이것을 우리가 공작을 하고 있습니다.

한 덩어리가 되어가지고 하나로 움직이는 이것을 우리가 언제든지 연습을 합니다. 몇 번이든지 연습을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와 한덩어리 되는 이것이 무엇으로 됩니까? 되는 것은 자기가 마음으로 원하는 그 마음으로 되고 마음의 작용으로 되고 원하고 결심하고 작정하고 또 안된 것을 크게 후회하고 마음의 작용과 몸의 작용, 몸의 작용은 우리의 행동이지요. 마음의 작용과 몸의 작용 이것으로써 우리가 되어집니다.

그러기에 마음의 작용은 현실이라는 시간을 초월했습니다. 현실이라는 시간을 초월했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은 현실을 만나지 안해도 그 마음은 언제든지 작용을 할 수가 있고 이 몸뚱이 작용은 현실을 만나지 않고는 작용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제제 받고 있습니다. 몸의 작용은 현실을 만나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데에서 완성이 된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하나님과 결합되는 그것을 연습합니다. 몇 번이든지 연습해가지고 한번 연습하고 숙달되고 숙달되어서 하나님과 결합이 한 번 결합한 행동을 했으면 결합이 더 되고 두 번 결합된 행동을 했으면 결합이 더 되고 열 번 결합된 행동했으면 결합이 더 되고 어떤 사람은 한 번도 결합된 행동 안 했으니까 결합이 안 되어가지고 있고, 그러니까 하늘나라가면 예수님의 구속으로 기본구원으로써 결합된 것만 결합됐지 자기가 행동한 것으로는 결합된 게 없다 그거요.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구원의 차이, 영광의 차이는 행동으로 결합된 그것으로 차이가 생겨지는데 그것이 없는 사람은 가도 거저 부끄러운 구원, 불가운데서 얻은 구원, 자기가 모든 이 세상 살이에서 건설을 했지만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로 심판하니까 다 타버렸고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것처럼 하나님으로 인하여 된 것은 영원히 타지 안하고 영원히 있다 말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 반석은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으로 인해서 된 것은 영원히 존영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지 안하고 모래로 지은 것은 피조물들 이런 것들로 된 것은 다 없앤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신인양성 결합, 하나님하고 나하고 결합. 그다음에는 일행. 하나님과 나하고 함께 움직이는 것. 하나님 좋아하면 나도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면 나도 싫어하고 하나님을 따라 움직이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도와서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내 속에서 행동하는 것이라 말이오. 예수님이 행동하신 것이 전부 그 속에 아버지가 행동한 것이 예수님에게 나타났다 말이오. 그와같이 그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이루는 데 이런 방편, 저런 방편이 필요 있다 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따라합시다. 예수님은 신인양성 일위!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인하여 신인양성 결합 일행! 이것이 우리 목표입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그 방편은 주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생활하면 이것이 이루어진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것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이런 것 저런 것 다 버린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최고로 여기는 예수님과 죽음이 있고 여기는 삶이 있으면 삶이 있는데는 안 간다 말이오. 주로 인해서 어려워도 주께 순종하고 어려워도 주님과 동행하는 그 길을 원한다 말이오.

그러면 그 길을 소원하는 그것도 제 욕심이기 때문에 그것도 소원하지만... 결심은 '이 세상에 있는 종류대로의 어떤 입장 처지를 만나도 주님과 나와의 결합은 끊어지지 않겠다. 주여! 주와 나와 결합이 떨어지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이러니까 주님이 떨어질까 말까 하는 그런 형편을 딱 주십니다. 그러니까 안 떨어지려고 '주여! 내가 떨어지려고 합니다. 놓지마십시오.' 이렇게 안 떨어지려고 그 기회를 넘겼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 형편을 닥칠 때보다도 결합이 조금더 튼튼해졌습니다. 이래가지고 동행도 또 동행하기 어려운, 이제까지 한 동행보다 어려운 형편을 딱 준다 말이오. 이거 동행하기 어려운데 동행하려고 애를 쓰니까 넘어질까 말까 자꾸 이래 쌓으니까 그러다가 넘어졌다 말이오. 주여! 내가 동행하지 못하고 그만 넘어졌습니다. 주님은 주님대로 나는 나대로 살았습니다. 이제 그런 기회를 줬어. 또 그런 기회가 또 닥친다 말이오. 닥치면! 그때는! 이번에는! 내가 주님과 동행하겠다.

주님은 기도하라 하시는데 이제 기도하면 사자굴에 집어넣는다 하니까 주님은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하는데 여기는 우상에게 절하라 하니까 이제는 안 하려고 하니까 불 속에 집어 넣는다 말이오. 그래도! 주님과 나와 동행해야지. '주님이 우상에게 절하지 안하니 나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 주님이 우상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니까 나는 거기에 순종해서 절 안해야지.' 이래가지고 그것이 결합과 동행을 이루는 그 현실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현실이 다 그런 것이오. 이러니까 땅 위에서 원하는 것은, 자기가 원대로 해달라는 말은 소원은 그렇다 말이오. '하나님이여, 세상에서 최고로 하나님과 결합하기 어려운 형편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시험인데 '거기서도 주와 나와의 결합이 끊기지 않을 수 있는 이런 주와 나와의 사랑으로 구속의 사은으로 구속의 은혜로 이렇게 결합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러니까 '동남풍이 불거나 서북풍이 불거나 가시밭에 백합화는 예수향만 피운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 이게 다 주님과의 강한 결합을 원하는 것, 애모적인 결합을 원하는 것입니다. 또 어디서라도 주님과 동행하고 안 떨어지려고 그분과 동행하려고, 그분과 동행이 무엇인데? 그분의 법칙인 성경대로 하는 것이 그분과 동행이요 성신의 감화대로 하는 것이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행이 안 떨어지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요.

그러기 때문에 이런 일이 무엇이 하나 오면 '아이고야 돈 손해 볼까?' 그런 것 생각하지 안 하고 아, '동행하기 어려운 때가 왔다. 이때는 재물을 다 내놔야겠다. 사업을 다 내놔야겠다. 명예를 다 내놔야겠다. 내 자존심 다 내놔야 동행하겠다. 내 속이 팍 썩어서 다 내놔야 동행하겠다.' 이제 동행이 어려울 때 하나님과 결합하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이것을 목표로 우리가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럴 때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하나님 당신께만 모든 주권이 있습니다. 당신만 의지하고 딴 것은 뭐라하든지 당신께만 주권이 있으니 당신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분에게만 순종하는 것. 이것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남반은 보니까 어제 아침보다 줄지 않았는데 여반은 어제 아침보다 줄었습니다.

이거 내가 오늘 아침에 또 회개를 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내가 시작할 때는, 어제 내가 시간을 너무 길게 해서 갔다가 싸우기도 하고 두드려 맞기도 하고 욕도 얻어 먹고 영 정신 없는 꼴 많이 당했을 건데 내가 그걸 당사자가 아니니까 다섯 시면 딱 마쳐야 되는데 오늘 아침에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것은 가르치는 각단이 여러분들이 그걸 그래야 똑똑히 알기 때문에 이래 해서 그만 시간이 늦었어 안 됐어. 그 누가 종을 쳐 주십시오. 늦은 줄 알면 그 시간 되면 딱 다섯 시 되면 그쳐야 왔다 가면 낭패가 안 될건데 아주 낭패될 분이면 다섯 시 되거던 그만 가십시오. 가도 또 그게 안해야 되지. , 가서 한 주먹 맞아도 길에서 급한 꼴을 봐도 이 듣는대로 들어야겠다 이러면서 들으니 다섯 시에 마쳐야 되겠는데 그전에는 이 장로님이 꼭 다섯 시에 종을 쳤는데 그 종 있거들랑 좀, 어쨌습니까 이 장로님? 있거들랑 다섯 시에 종을 쳐서 다섯 시에 마쳐야 일반 전체면이 좀 유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권유해서 어쨌든지 와서 배워야 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자라면 이 도리를 배우도록 권면해 가지고 배우게 해야 됩니다. 모르면 신앙 생활을 못 하는 것입니다.

서원균 씨, 산에 가서 완전히 회복해요. 회복 안하면 안돼. 그래가지고 그만 좀 길게 나가버리면 죽어버리고 변해 일반 사람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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