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1980. 6. 8. 주후

 

본문 : 고린도전서 15장 35절∼49절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는 우리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그 모든 것을 다 우리 주가 되신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또 영원히 그분의 것이고 또 그분이 혼자 관리하시고  지금도 그것들의 주인이시며 그것들을 당신이 목적하신 구원을 위해서 이용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나타난 것이나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나 그 움직이는 것이나  있는 것이나 또 그것의 머무는 것이나 그런 것을 다 주님이 혼자 주권하고  계십니다.

모든 넓은 우주 영계지만 지극히 작은, 참 바늘 끝만한 그런 공간도 당신이 홀로  주관하시지 아무도 거기에 침범하지 못합니다. 또 일분은 냅두고 일초라도  피조물들이 제 마음대로 못합니다. 혼자 주관하고 계십니다. 또 심지어 벌레 한  마리 움직이는 것도 당신이 주권하셔서 당신으로 인하여 그게 움직이지 그것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어떤 큰 공장에 수천 마력되는 기계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기계가 돌아가면 그 기계는 수많은 기계를 다 돌리고 있다하더라도 그 모든  기계는 그 원동력이 돌아가는 데에 거기 따라서 그것이 돌아가겠고 또 원동력은  전기의 힘으로써 돌아가겠고 그 전기의 힘은 그 주인이 그것을 다 자본들여서  마련해서 되는 것같이 이런 것 저런 것 하나님께서 기관으로 쓰시는 것은 많지만  홀로 주님이 그 모든 것을 만드셨고 친히 관리하시되 어떤 자에게 분담을 시켜서  일을 하시기는 하십니다.

천사들이 이런 분담 또 마귀들이 저런 분담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당신이 그를 통해서 하시되 그분이 생존하신 그 능력이 그것들을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그것들이 사람의 손에 들린 막대기와 같고  또 사람의 팔다리가 아무리 힘이 있다 할지라도 그 속에 생명의 힘으로 움직이지  생명의 힘이 아니면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생명이신, 피조물의 생명이신  하나님이 움직임으로 이 모든 것이 움직여지지 하나님의 움직임을 떠나서 단독이  움직이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왜 어떻게 멸망하는 것과 구원얻는 것이 있어 멸망하는 것은  네가 이런 이런 멸망할 원인을 했기 때문에 심판받아 멸망해야 된다. 너는 구원  얻는 이런 이런 행위를 했기 때문에 이런 상을 받아야 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와같이 하시면서 피조물에게 그렇게 부담을 시켜서  정죄하고 칭찬하는 것은 그것은 공평되지 않잖겠는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전 목적을 정하시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고 창조하셨고 또 존재케 하시고 활용하시는 섭리를 하십니다. 그  섭리가 목적 하나를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 목적은 무엇인가? 그 목적은 하나님께 속하면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져서  하나님으로 동하고 정하기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동할 때 그 동함도 영원 존재가 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정할 때도  영원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고  움직일 때 그것은 다 영생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안 하고 피조물 어떤 것으로 말미암은 것도 다 멸망하는  것이라는 것을 영원히 피조물들에게 지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는 수많은 것들을 있게 하셔가지고 멸망케 하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또 하나님이 지으신 것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는 그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움직일 때 그것이 영생하는 것으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과  피조물들과 관계는 이러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옥은 하나님을 증거를 하되 하나님을 떠난 자가 이렇게 된다 하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유황불 구렁텅이요. 하늘나라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존재한 것이 그를 인하여 움직일 때는 이렇게 존귀하게 된다 하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피조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 가지로 증거합니다. 이분을  떠나면 사망이요 이분께 속하면 생명이라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떠나게 하여  떠나는 것을 만들어 떠나게 하여 멸망케 하므로 하나님을 알리시고 순종케 하여  순종함으로 영생을 얻게 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  그러기 때문에 택한 우리들이 멸망받는 불택자보다 나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멸망하는 것을 증거하도록 하나님이 지으셨고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구원얻는 자 가운데서도 이렇게 순종했기 때문에 이런 것이 있고 이렇게 순종이  에누리 있었기 때문에 이런 구원이 있고 전폭적으로 순종, 부분적으로 순종, 또  순종같으나 실은 순종치 않는 것, 천태만상의 그 수많은 것들을 만드셔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렇게 맺어진 것은 이런 영원한 보응이 있다. 요런 관계  맺어진 것은 요런 보응이 있다. 이것으로 하여 영원무궁토록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피조물은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과 피조물이 어떤  관계로 살면 어떻게 되고 어떤 관계로 살면 멸망한다는 하나님과 피조물에 대한  지식이 바다의 물이 넘침과 같이 충만케 하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지식이 충만하고 또 하나님으로 인하여 삶이 충만하여서 모두가 다  하나님 한분으로 지음받은 것이 하나님 한분으로 존재하고 하나님 한분으로  동하고 정하고 이렇게 되게 하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지음받은 자 가운데 어떤 자는 하나님께 속하기를 원하고, 어떤 자는 하나님께  속하기를 싫어하고, 어떤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확실히 믿고 인정하고 어떤  자는 하나의 기만적인 세상 말같이 믿지 아니하고 하는 그것이 제가 믿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자는 그런 증거해 가지고 그런 보응을  받아서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은 하나님이 우리가 알기 전 어떻게 예정하셨는가 하는  그것을 들어내고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또 세상은 앞으로 무궁세계에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나타내고 있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아서 필요한 지식은 빠짐이 없이 다 갖추어  가지고 신구약 성경 말씀에 주셨고 또 그 안에 영감으로 더 수많은 것을 주셨고  또 영감과 이 성경 말씀의 계시를 주시기 전에 모든 창조의 만물, 또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섭리, 또 인간들의 모든 심리 변동의 구조, 이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어떤 분일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것을 가르쳐서 자연계시라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지식에서 세상은 우리가 나그네로 사는 세상이요 우리가 살 본향은  죽었다가 부활후 심판받아 영원무궁 세계로 옮겨져 가는 그것이 우리의 영주처요  우리의 세계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신령한 나라, 영계라고 했습니다. 시간도  공간도 성장도 소망도 영광도 쾌락도 제한이 없는 영원이라고 하는 영원성,  완전성의 그 나라가 우리의 나라요 세상은 떠날 나그네의 세상입니다.

 하루 하루 사람들은 먹고 입고 마시고 살고 있지만 알든지 모르든지 하나는  멸망에서 멸망으로 걸어가고 어떤 사람은 구원에서 구원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외부의 생활은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장사하고 또 이런 저런 사회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외모는 똑같지만 하나는 그것 하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이  그것 하라하니까 그것하고 하나는 하나님이 하라해서 하는 게 아니라 제 욕심 제  소원 제 주장, 자기를 위해서 하고, 하는 것은 같지만 그의 동기가 다르고  목적이 다르고 방편은 같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같은 이 세상 살이를 하고 있지만 세상을 욕망해서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부활 무궁세계를 욕망해서 살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  자리에서 같이 자지만 한 밭에서 같이 일하지만 한 맷돌을 둘이 돌리고 있지만  하나는 멸망이요 하나는 구원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외부의 세상살이하는 형태도 같고 그 모든 방편도 같지만 목적은  다르고 동기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그 동기가 된 자도 있고 자기나 어떤  피조물이 동기가 된 자도 있고 또 하나님의 허락하신 이 준비를 목표로 하는 그  목적도 있고 자기 사욕의 어떤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그 목적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19절에 보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부활과 무궁세계가 없으면 제일 불쌍한 자의 생활이 믿는 사람의  생활입니다. 왜 세력은 없고 하나님과 진리만 서지 전생활이 자기는 절단나는  것뿐이라 말입니다.

 왜? 부활의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부활의 세계를 이루는 방편이 이러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인데 부활이 없으면 믿는 자의 생활은 전부가 헛일 중의  헛일이요, 손해 중의 손해입니다. 불쌍한 자 중에 불쌍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것보다도 동기를 중하게 보십니다.

"네가 뭐로 인해서 시작하느냐, 네 마음으로 시작하느냐, 영감으로 시작하느냐  하나님의 진리로 시작하느냐,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해서 네가 시작하느냐, 네가  시작하느냐, 목적이 너 좋으려고 하느냐, 조물주가 좋아하도록 조물주에게 네가  귀속되기 위해서 하느냐, 무슨 목적이냐?" 이것으로서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전 준비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세상 떠날 자인  줄 알고 세상 떠나도 손해와 후회가 없도록 모든 것을 경영하고, 또 이 세상에  사는 생활이 죽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고난 다음에는 악인이나 의인이나  전부가 죽음 가운데서 살아나니 세상은 없어지고 세상 행동을 가지고 살아날 때,  '그때에 내가 어떤 자로 살아났으면 좋겠다.' 비유컨대 '네가 그러면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로 살고 부활할 때 제일 행복된 자로 부활할 수 있으면  너 어떤 것 취할래?' '떠날 세상이기 때문에 하룻밤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의 걸음을 걸어도 부활할 때 제일 영광스러운 부활을 하는 그 길을  나는 택하겠습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이러니까 부활이 있기 때문에 부활할 그때를 바라보면서 지금 삽니다. 또 지금  인간의 이목구비, 인간들이 말하고 인간들이 눈초리하고 인간들이 떠들고 하는  그것도 두렵지만 인간들의 여론도 두렵고 말도 두렵고 눈도 두렵고 대적도  두렵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 똘똘 뭉쳐가지고 가가지고 심판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 피조물이 뭐라고 말하는 것은 참고나 삼지 그렇게 큰 일이 아니라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어찌되나 그렇기 때문에 심판을 보면서 삽니다.

자, 인간이 모르는 심판 보면서 하고 싶은대로 못해, 가고 싶은대로 못가,  말하고 싶은대로 못해, 취하고 싶은대로 못해. 이것 전부 심판 때문에 저하고  싶은 것은 전부 절단납니다.

 이러니까 세상이 볼 때에 '저거는 참, 예수교는 아편이다. 저 사람이 예수를  믿어서 저렇게 불쌍하고 가련하고 자유하지 못하고 제 소원대로 하지 못하는  저런 불쌍한 자가 됐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교는 아편이다. 최면술과 같은  것이다. 예수만 믿으면 망한다.' 그들은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심판을 모르기 때문에 심판을 무시하고 사는데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사니까 이 사람 떠는 것과 이 사람 주의하는 것과 이 사람이 취하고 싶은대로  못하는 것 보니까 그 사람들이 보면 답답하다 그거요. 이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미련케 보여집니다.

 또 심판 넘어 영원 무궁이 있으니 그때 수치를 생각하면 세상 수치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고 '떫은 게엄 한 개 못 먹는다' 말로 아무리 고생스러워봤자  하룻밤 고생인데 그 나라에 고생이, 그 나라의 평강이, 그 나라의 수치가, 그  나라의 영광이, 그 나라의 권세가, 그 나라의 천물이, 그 나라의 빈곤이, 그  나라의 부강이, 이것이 영원하기 때문에 그게 크고 그게 중하지 이까짓 것  지나가는 나그네가, 길 가는 행인이 잠깐 보기 싫은 것 봐봤자 퍼뜩 지나가면  그만이요. 보기 좋은 것 봐봤자 퍼뜩 지나가면 그만이요. 또 보고 있으려 해봤자  좋은 것 보고 있다고 늘 보여집니까? 안 보여집니다.

 이러니까 부활과 심판과 무궁세계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준해서 택한 사람들은  삽니다. 그러기에 택한 사람들이 사는 것은 세상이 모르는 하나님의 지식,  66권의 하나님의 지식을 배웠고 또 하나님이 직접으로 감동시켜 알려주는 이  영감의 지식을 배웠고, 이 두 가지 지식을 배운 것은 세상이 전혀 모르는  지식입니다. 세상이 부인하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표준해서 이 지식에 준해서  이 지식대로 사니까 세상이 모르는 지식대로 사니 세상이 모르는 생활입니다.

 이러니까 저거 지식과 대립, 저거 지식은 세상보고 사는데 이 지식은 무궁  세계를 보고 살게 되고, 저거 지식은 피조물만 보고 사는데 이 지식은 피조물만  보고 살 게 아니라 창조주만 보고 살고, 저거 지식은 안 죽고 살아 있을 동안만  사는데 이 지식은 죽을 것 부활할 것 심판 무궁세계까지 보고 살고, 저거 지식은  피조물 저거 좋기 위해서 사는데 이 지식은 창조주가 좋아야 내가 좋아지지 그가  섭섭해 하면 나는 절단난다는 것을 알고 이 지식에 따라 살기 때문에 세상이  모르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서 우리가 구원을 이루면 내세를 위해서 준비를 하면 어느  정도까지 준비할 수 있느냐 하는 그 정도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준비를  하면, 내세를 위해서 준비를 하면, 심판을 위해서 준비를 하면, 죽음과 부활을  위해서 준비를 하면 어느 정도 준비할까? 준비한 표준을 여기에 말해놨습니다.

 믿는 사람이 죽을 때 후회를 하면 그 사람 잘못 믿은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끙끙 앓으면서 어떤 때는 절망도 하고 어떤 때는 비관도 하고 어떤 때는 억지  생활을 했지만 죽는 그 시간을 탁 당할 때 '주여! 내가 울며 불면서 하기 싫은  생활이라도 억지로 억지로 했는데 죽음을 당하고 보니 나의 한 생활이 죽을 때  보니까 후회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살려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자기의  일생동안 산 생활이 죽음을 당하고 보니 다행스럽고 요행스럽고 만행스러웠고  '아이쿠, 그 한 가지라도 나하고 싶은대로 그렇게 했더라면 어떻게 될뻔했나?'  이렇게 자기 일생 생활이 '참 다행스러웠다. 참 요행스러웠다. 만일 그때에  어떻게 잘못됐더라면 어찌 될뻔 했나?' 이렇게 되어야 이것이 지혜있는 사람의  생활이지 딱 죽음을 만나니까 '그때사 아이고 이렇게 죽을 줄 알았던들 그때 안  할 걸. 이제 죽음을 닥치고 보니까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구나' 그러면  지혜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표준이 어떻게 되는가? 또 이래놨습니다. 47절 보십시오. 성경을 똑똑히  보고 확신을 가집시다. "첫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첫째 아담 말입니다.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그는 흙에 속한 자입니다.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둘째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땅에 속한 자는 땅에 속한 첫째 아담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는 땅에 속한 자에게서 나서 땅에 속한 자를  가진 것이 예수 믿기 전 우리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예수 믿은 후에 우리가  하늘에 속한 자가 됐습니다.

 49절에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그 무슨 소리입니까? 첫째  아담의 눈과 같고 귀와 같고 입과 같고 코와 같고 목과 같고 몸뚱이와 같고 팔과  같고 다리와 같고 내장과 같고, 또 첫째 아담의 심보와 같고 지식과 같고, 그가  죽은 영인 것처럼 죽은 영이 된 것이 같고 이랬습니다.

 뭐 첫째 아담을 우리는 보지 않았지만 첫째 아담이 우리 사람과 똑같이  생겼습니다. 마음도 우리와 같고 뜻도 우리와 같고 전신이 생기기를 같이  생겼습니다. 진화론자들이 말하기를 '아메바가 사람이 됐다. 올챙이가 뭐 어떻게  됐다. 원숭이가 뭐 어떻게 됐다.' 하는 그것은 괴변 소리고 그것은 거짓말쟁이  마귀가 그렇게 말해놓은 것이고, 첫째 아담과 우리와 혹 키는 크고 작고  몸뚱이는 굵고 가늘고 이럴 수 있지만 그는 팔이 두 개인데 우리는 팔이 한  개고, 우리는 두 개인데 그는 세 개이고, 안 그렇습니다. 외형도 같고 내형도  같습니다.

 "이와같이 또한 하늘의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예수님의 형상을  입으리라. 그러면 예수님의 형상을 입으리라 하는 예수님의 이 전신 수족과 같은  수족을 입는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첫째 아담과 같은 그런 수족을 가졌습니다.

 입는데, "형상을 입으리라" 이 형상은,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손을 닮고 예수님의 발을 닮는다는  말이 아니요. 하늘에 속한 자 예수님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우리가 입게 된다.

 이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예수님이 지극히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아버지로 동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로 인하여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목구비 수족 전체가 아버지가 그 속에서  움직일 때 예수님이 거기에 따라서 움직였다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내 말이 아니라 내 속에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그  역사하시는 그 역사가 내 입을 통해서 나올 때에 말이 됐고 내 손을 통해서 나올  때에 내 손의 움직임이 됐고 내 발을 통해서 나올 때에 내 발이 움직여서  걸어갔고 내 성질을 통해서 나타나실 때에 아버지의 성질이 내 성질을 통해서  나타났고 순전히 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이렇게 두 격위지만 아버지가 순전히  아들을 통해서 나타나서 아들은 아버지의 나타나심과 똑같이 나타난 그것이  아버지의 형상입니다. 예수님의 그 속성이 아버지의 형상입니다.

 예수님의 그 속성 온갖 속성, 예수님의 속성과 예수님의 그 행동, 마음의 행동,  몸의 행동 그 모든 성질, 사랑이나 진실이나 거룩이나 의나 그것이 예수님  단독이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아버지가 역사하시는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니까 사람들이 볼 때에 예수님이 하신 것으로 보지만 실은  "아버지께서 역사하신 역사가 나를 통해서 나타났다. 이러기 때문에 내 말은  아버지의 말이다. 내 움직임은 아버지의 움직임이다. 내 걸음은 아버지의  걸음이다. 내 모든 언행심사의 행동은 아버지의 행동이다.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애를 쓰면 어느 정도 될 것인가? 첫째 아담에게 속한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 떨어진 우리의 영육이 첫째 아담과 똑같이 생겨진  거와같이 하늘에 속한 둘째 아담 예수님께 속한 이 진리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지는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성과 예수님의 언행심사와 예수님의 전 인격 전  언행심사 전 속성은 아버지의 속성이요 아버지의 언행심사요 아버지의 심격이라.

이와같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을 여기 보증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이 말이 예사로 들립니까? 어떤 사람은 이 성구를 보고  며칠 밥을 안 먹고 구불면서 감사해서 못견뎌서 한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다. 첫째 아담과 내가 키는 좀 다를지라도 그  귀 있는 거 내 귀 있고 눈 둘인 것 나 눈 둘 있고 입 하나인 것 나 하나이고  콧구멍 첫째 아담도 둘인데 나도 둘이고 손 둘, 나도 손 둘, 발 둘 나도 발 둘.

첫째 아담과 나와의 이 몸이 생겨진 것이 똑같고 좀 크고 작고는 하겠지만  똑같고 마음의 구조가 똑같고 죽은 영이 똑같고, 이것처럼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이제 생겨질 것이 둘째 아담과 똑같다. 자 이걸 놀랄 일 아니오?  예수님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온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예수님의  동하고 정하시는 것.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왜 어려워서 "내가 안 하고는, 나는  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을 이 책임을 지게 하시옵소서. 나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는 것이 죽기가 두려워서 한 말 아닙니다. 우주적인 고난, 택한  자의 전 형벌을 대신 짊어지고 그 형을 받을 터인데 십자가에 죽는 그 죽음이  아니라 그 택자의 전부의 형을 다 짊어지고 택자의 전부의 행할 것을 다  책임지고 행하는 이 어려움인데 이 어려움에 세포 하나라도 믿음이 되지 안하면,  세포 하나라도 아버지로 말미암아 움직이지 아니하고 아프니까 세포 하나라도  단독이, 고통스러우니까 세포 하나라도 단독이 움직이면 하나님은 알지못하심이  없으시니까 세포 하나 움직여도 그 자체의 세포 하나가 강제가 됐으니까  자원해서 대속이라 하는 것은 끝났습니다. 대속은 안 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전체가 피동되는 지성의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하나님으로  인하여만 움직이는 것. 택한 자들의 구속을 전적 자원해서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지공법을 향한 것이요. 하나님의 지성법을 향한 것입니다. 자원은  지공법을 향한 것이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은 지성법을 향하는 것인데 세포  하나라도 찰나보다 더 짧은 시간이라도 아버지로 인하지 않은 것이 끼어 있으면  모든 일은 허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걸 인해서 고민했습니다. 더 기도의 결말을 짓기까지 하려고  해도 몸이 약해서 기도 못해서 간구하니까 천사들이 와서 그 몸을 도와서 마지막  기도의 그릇을 채웠습니다. "심한 통곡으로 간구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불쌍히 여겨서 이 일을 감당하기에 지극히 큰 능력이" 에베소서 1장 20절에  지극히 큰 능력이 대속으로 아버지의 명령 순종으로 독단 없는 순종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역사를 이루시게 했습니다.

 이러기에 예수님은 신성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으레히 그는 이기시지만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신성에게 이렇게 귀속되어서 동하고 정하고  신성과 인성과 하나로 역사하는 이 일이 되기 어렵다 그거요.

 이것 때문에, 우리는 중생된 영은 원하나 마음이 원하지 안할 때 있고 마음은  원하나 몸이 듣지 안할 때 있고 몸은 원하나 몸밖에 것들이 순종하지 안할 때  있습니다. 이랬는데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아버지로 인하여 하나님으로 인하여  동하고 정하는 이것이 완성됐습니다. 동하고 정하는 전부가 됐고 세포 하나도  동하고 정하는 전적 그에게 속하여 그의 것으로 그로 인하여 움직이는 이 일이  완성되지 아니한 세포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완성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예수님에게 다 상속시켰습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예수님에게 다 맡겼습니다. 예수님에게 전부 맡겼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심판을 예수님이 하십니다. 만주의 주가 됐습니다.

무엇으로? 신성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그렇게 됐습니다.

피조물로서 그렇게 됐습니다. 신성은 근본부터 창조주시오 주재십니다.

 이렇게 인성이, 모든 것을 다 내게 주셨으니,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내게 주셨으니" 말씀했습니다. 그 성구가 어디 있습니까? 저 권찰님  조는데 딱 물어봤으면 좋겠는데 만일 모르면 잠이 깰 것 같아서. 마태복음 28장  17절 이하에 있습니다.

 이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예수님에게 다 맡겼습니다.

아버지의 것을 다 맡겼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맡겼습니다. 맡겼다가 도적 맞으려고? 천사장 사탄 모양으로 도적 맞으려고?  맡겼다가. 뭣보고 맡겼습니까? 그것 아는 분 손들고 대답해 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백소출 집사님? 아예 졸았으니까 못한다고 해야 돼. 그래야 되지.

성령은 없어. 말만 하면 소용 있는가? 순종은 뭐 미리 안 하는가 다 순종하지.

답이 틀렸어. 뭣보고?  두 가지 보고. 하나는 뭐? 전체가 지성을 위합니다. 하나님만을 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전체가 세포까지도 하나님만으로만 동하고 정합니다. 이것  보고 맡겼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세포 하나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고  그렇게 돼버렸습니다. 이러니까 그는 영원히 하나님만을 위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동하고 정하니까 그의 역사는 누가하는 역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하는 역사지. 그의 목적은 뭣입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위한 목적이지. 그러니까  당신이 하는 것이나 한 가지라.

 아버지를 위한다니? 아버지는 완전이라. 영원 불변이라. 완전을 위하고 영원  불변을 위하니까 그것 자체가 완전이 되고 영원 불변이 되고 영생이 되지.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이 나를 위하라 하는 것이 사랑이요. 그것이 영생하게  하는 것이요. 완전을 대적하면, 당신을 배반하라고, 나를 안 믿어도 좋으니까  다른 걸 위해라. 완전을 버리고 다른 것을 위하는 것을 죽게 만드는 것이라.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 이것가지고 예수님은 성공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빌립보서 2장에 8절에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보십시오. 이 순종가지고 성공했습니다.

 그러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체를 입는다 그 말은 이것은 인격의 형체요 속성의  형체요 기능의 형체요 모든 역사의 형체입니다. 예수님의 하심같이 그렇게 하고  예수님이 아버지께 받은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께 받습니다. "내가 이겨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은 거와같이 이긴 자는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으리라." 예수님이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셨으니까 예수님의 보좌에 앉으면 그 보좌지.

 "내가 이기고" 무엇을 이기고? 아버지로 말미암아 지음받은 것이 아버지로  인하여 살게 하는 이것이 생명이요 이것이 진리요 이것이 영생인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음받은 이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한 이것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움직이고 하나님을 소망하고 위하여 살려고 할 때에 이것을 방해하는  마귀가 있고 마귀의 군병 사람들이 있고 모든 형편 사정이 있고 하나님이 또  이것을 갖다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지 못하게 거치는 것을 자꾸  만들어놓습니다. 그것이 시험입니다.

 온갖 거치는 것을 만들어놓아도 하나님이 조금 거치는 것을 만들어놓아도  죽자하고 이게 아버지로 인하여 살더니만 마지막에는 목숨을 안 내놓으면 그대로  살지 못하도록, 아주 브레이크를 딱 걸어놓아도 걸어오니까 생명을 내놓고  아버지 말씀대로 삽니다. 그것이 최고 승리요.

 이러니까 이렇게 세상을 이긴 자, 마귀를 이긴 자,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으로  하나되게 하는 이 일을 대적하는 수많은 세상 살이를 이기고 아버지만을  바라보고 그에게만 순종하여 영원히 그의 것이 되어 영원히 그로 동하고 정하여  그분이 하시는 일이 내가 하는 일, 내가 만물을 대할 때 그분이 만물을 대하는  그 일을 나를 통하여 그분이 만물에게 대해지는 이것을 이루는 이 보좌, 이  지위, 이 책임, 이 권세, 여기에 앉게 되리라.

 이러기 때문에 "깨어 있는 자" 어떤 자? 깨어 있는 자.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이것이 깨어있는 자라. 그자의 모든 언행심사는 다른  사람에게 양식을 줘. 유익을 줘. 그분이 삐꿔돌아가도 나는 양식줬다 그말이오.

바른 것 줬어. 이렇게 하는 자에게, "그 주인이 올 때에 이렇게 한 자에게  주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이러므로 첫째 아담에게 속한 육체의, 영육의 사람이 첫째 아담과 똑같이 된  것처럼, 둘째 아담 하나님께 사람이 신성과 인성이 합하여 인성이 신성처럼  인성과 신성이 꼭 함께 움직여 그 신성이 인성으로 통하여 나타나 인성이 한  일은 전부 신성이 한 일이라. 이렇게 된 이 형상, 이것을 예수님같이 우리가  입으리라 말씀한 이것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푯대는 이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이 얼마나 큰 가, 예수님같이 되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연결됐을 때에 아담에게 모든 만물을 갖다놓고 "너 이름  지어봐라." 아담이 무엇이라 무엇이라 지으니까 딱 들어맞고 잘 됐어. 그 이름  아담이 지었습니다. 아담이 지은 이름은 누가 지은 이름입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이름입니다. 아담이 지었는데 하나님이 지어? 하나님과 아담이 연결되었으니까  하나님이 '콩'하면 '콩'하고 하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아담을 통해서  지으셨지. 그것이 아담이 타락전 하나님과 연결됐을 때 그의 한 행동입니다.

 이제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연결된 연결이 다시는 끊치지 않을 연결을  가지는데 영은 연결을 가졌고 마음과 고깃덩어리는 연결을 가지지 안했는데  연결을 부분 부분으로 가져질라고 이렇게 노력하는 것인데 가져진 것만큼은 그  몸이 하는 것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도록, 이  연결입니다. 이 연결이면 하나님 대리자 될 만 합니까, 안합니까? 이 연결이면  하나님이 그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데 끼어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가 영광스러워지기만  영광스러워지지 하기는 하나님 혼자 하시는데 그 가운데 끼어 있으니까 제가 한  것처럼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같이 동참되지. 만물에게 하나님의 존대를 같이  그가 받지. 이것이 비밀입니다. 이것 보고 삽니다.

 이러기에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땅 위에 있는 것을 하나도 탐하지 않습니다. 이  욕심에서 사는 자가 없습니다. '어? 그래도 그 사람 밥 먹고 옷 입고 사업하네?'  잘못 알았소. 한 밭에서 일하지만 다릅니다. 한 자리 누워자지만 다르고 맷돌  같이 갈지만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해야 하지. 하라 하시다가 큰 사업을  열어놨는데 하라 하시다가 "중단!" 딱 중단합니다. 그것 하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라 하니까 하는 거라.

 이러기에 셋 총리 중에 하나의 총리의 직책이지만 하나님이 하라 해서 하는데  '야, 너 한달동안 기도함으로써 너도 죽을뿐 아니라 총리 지위 뺏긴다.'  환장하고 야단일건데 하나님이 "그때는 네가 죽어도 기도해라" 하니까 죽어도  기도합니다. 총리의 지위와 권세가 박탈이 나도 기도합니다. 이게 믿는  사람입니다. 다같이 한 자리에 일하니까 '너와 내가 같이 내가 돈보고 하듯이  너도 돈보고 하지. 내가 지위보고 하듯이 너도 지위보고 하지? 내가 명예보고  하듯이 너도 명예보고 하지?' 아니요!! 하나님만 보고 합니다. 하나님만 보고!  하늘나라만 보고! 영생을 보고! 부활을 보고! 심판을 보고!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므로 이러므로 그를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만물로 하여금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이 깨닫고 난다음에는 모든 것들이  주로 시인합니다.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당신 아니면 못삽니다. 지옥에 있는  것까지 주로 시인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했습니다.

 '성인이라야 능지 성인이라'고 이것을 깨닫고 이것 보고 사는 사람이라야 알지  땅의 것 보고 사는 사람은 '아무리 저래 쌓아도 저것 기만쟁이라서. 저 소리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소리 듣고 그 말 따라 하면 이것 뺏들어가려고 하지.'  아니오!! 속지 마십시오. 깨달은 사람은 알 것이오. 그대로 사는 사람은 알게  됩니다. 지극히 작은 데서 시키신 대로 살아봐. 살므로 인해서 자기 심령 속에  새로운 건설이 나오고 자기의 인격에 새로운 건설이 나오고 자기의 지식에  새로운 건설이 나오고 자기의 욕망에 새로운 욕망이 생겨지는 그것을 자기가  친히 보고 느끼고 잡아보고 한 사람들은 인간의 미혹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을  시키시는가? 어떤 것을 시키시는가? 빠짐없이 시키십니다. 각자에게 필요한대로  다 시키십니다. 간추려 말하면 시키시는 그 일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 무력의  것인가? 사욕의 것인가? 명예욕의 것인가? 전투의 것인가?  여기 말하기를 "육체는 다같은 육체가 아니요 형체도 다같은 형체가 아니라  땅에 속한 형체도 하늘에 속한 형체도 이 육체도 저 육체도 그 영광이 따로  있다" 하늘에 속한 형체의 영광도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형체가 따로 있고  해의 영광도 따로 있고 달의 영광도 따로 있고 별과 별들의 영광도 따로 있다.

부활한 자들도 이와같다. 그러면 뭐이라 말이요?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도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같으니" 이와같으니, 뭐가 같다는 말입니까? 죽은 자의 부활이  뭐와 같다는 말이지요? 어떤 거와 같다는 말입니까? 육체가 같다는 말이요?  형체가 같다는 말이요? 부활한 자가 무엇이 같다는 말입니까? 그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지금 그것을 거석하기 때문에. 뭐와 같다는 말이요?  그 육체 말했고 형체 말했고 해 달 말했고 별 말했으니까 별과 같다는  말입니까? 뭐와 같다는 말입니까?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같다 하는데 뭐가 같다  말이요? 정영덕 집사님? 뭐? 영광. 됐어. 자신없이 가지지 말고 똑똑이 가져요.

영광을 말해놓고 부활한 자의 영광이 이와같다. 영광을 말합니다. 부활한 자의  영광이 이와같다는 말입니다.

 영광은 어떤 게 영광인가? 영광은 자체가 훌륭한 것이 영광 아닙니다. 자체가  완전한 것도 영광 아닙니다. 자체가 잘난 것도 영광 아닙니다.

 어떤 집에, 아버지는 천하에 제일 잘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자녀를  하나도 돌보지 안 했습니다. 자녀들이 아버지 때문에 고생이나 했지 아버지의  혜택은 하나도 못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소경이고 절름발이고 벙어리입니다. 그  자녀들은 어머니의 은택을 잊지 못해서 어머니 말만 하면 그 자녀들이 웁니다.

소경이고 절름발이고 벙어리고 그런데 자녀들이 어머니만 말하면 감격해 웁니다.

아버지는 말할 때에 그 사람들이 분해서 이를 갑니다. 어머니는 말할 때에  감격해서 말만 하면 웁니다.

 왜 그렇겠소? 그러면 어머니는 그렇게 못났지만 자녀들이 못견딜만치 자녀들을  위해서 자녀들에게 유익을 끼쳤고 이러기 때문에 자녀들이 그 은혜를 감격해서  가졌고 아버지는 자체가 그렇게 잘났지만 자녀들에게 은혜끼친 게 하나도 없어.

오히려 손해만 끼쳤고 참 빚좋은 개살구지 피해만 입었지 하나도 좋은 게 없어.

이러니까 섭섭하고 분한 것뿐이야.

 그러면 자, 그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그 자녀들을 인해서 영광이 됩니까?  어머니가 영광이 됩니까? 누가 영광됩니까? 아버지는 그 자녀를 인해서  뭣되지요? 영광이 되요 욕이 되요? 네? 어머니는? 욕이 되요 영광이 되요?  영광이 되지. 영광이라는 것은 자기로 인해서 그 혜택을 받은 그자들이 감격해서  감사하면서 나를 찬양하고 나를 높이고 나를 사모하고 나를 위하고 하는 그것이  영광입니다.

 그 동리에 제일 부자가 있어도 영광은 없고 욕뿐입니다. 그 동리에 제일 거지로  사는데 그래도 온동네 사람들이 가니까 그 집을 물으니까, '아니고, 그 어른  말입니까?' '그 영감태기 집은 어디 있소?' '여보, 그런 어른을 그렇게 말하면  큰 일 나요.' '아, 가난뱅이 거지 영감태기인데 뭐 그럴까?' 그러니까 그 사람이  막 화를 내면서 달려 듭니다. '그는 가난하게 지내지만 우리 동리에서 잊을 수  없는 공로자입니다. 그의 공로를 입어서 우리 동네가 유지합니다. 그는 우리  동네를 위한 희생의 제물입니다.' 이 집에 가도 그렇고 저 집에 가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가난한 영감태기가 그 동네에서 영광이 있소 없소? 부자가 영광이  있습니까? 그 거지가 영광이 있습니까? 부자가 영광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부자에게 욕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봐요. 네. 욕이지.

영광이란 것은 이것입니다. 해의 영광도 달의 영광도 별의 영광도 해의 혜택을  입은 자들은 다 '아, 해 없이는 못 산다.' 열흘이나 장마가 됐는데 해가  돋으니까 '오늘은 해가 돋는다' 그게 해에게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부활한 자의 영광도 이와 같으리라" 오늘은 우리가 마련하는 이 부활의 준비,  영원 내세의 준비,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는 준비, 이 준비가  무엇을 이루는지 몰라도 이 전 생활은 하나님은 주어 기뻐하시고 모든  피조물들은 감격해 못 견디는 그 감사의 사은의 대상이 되어지는 이것이 우리가  이루는 구원입니다. 그러기에 시기가 없습니다. 질투가 없습니다. 우리를  저주하는 것이 없습니다. 없어질까 만물이 놀래지. 이럴 수 있는 영광의 구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은 영광으로 구원합니다. 덕으로 구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덕이 되는 구원이요 모든 사람들이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이  구원이요.

 이러기 때문에 세상은 몰라서 그렇지 나중에 가죽 껍데기 벗고 지위 껍데기  벗고 권세 껍데기 벗고 나면 권세 때문에 가루었고 지위 때문에 가루었고 구변  좋아 가루었고 돈 때문에 가루었고, 가루니까 사람들이 그 진상을 보지 못하고  또 그걸로 강제로 막으니까 말 못하고 이랬지만 모든 껍데기 훌떡 벗고 다  나오면 모든 사람이 다 복수거리밖에는 없고 배상 청구할 것밖에는 없고 다  속았다고 괘씸밖에 없는 그것이 인간의 이면의 생활이요. 오늘의 주님이  시키시는대로 사는 생활은 저주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더니만 괘씸하다고  죽여서 송장도 못추리구로 했더니만 그분의 전 생활이 우리를 이렇게 위하는  것인 줄 몰랐다. 그때 영광을 돌리게 하는 이 구원입니다. 평가적인 구원입니다.

사욕이나 사심이나 야욕이나 그런 걸로 되는 구원이 아닙니다.

 "해의 영광과 달의 영광과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른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같으리라" 하는 이말은 부활했을 때에 얼마나 무엇에게 필요한 존재가  됐는지 무엇에게 얻는 어떤 공로가 있는지 앞으로도 어떤 것에게 어떤 필요성이  있는지. 하늘나라는 평가의 나라입니다. 하나가 필요하다 하면 하나에게 그만큼  가치 가졌고 억만에게 필요하면 그만큼 가치가 크고 하늘에 모든 존재에게  필요하면 그만큼 가치가 커. 하늘나라는 평가의 나라입니다.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불렀다, 우리를 구원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브랍지 맙시다. 어떻게 해야 될 건가 하는 것은 시간이  없어서 과연 세상은 우리에게 필요가 없는가? 세상은 불택자들에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왜? 불택자들은 세상을 통해서 영원 멸망과 형벌만 마련하니까  세상가지고 손해봤으니까 있을 필요가 뭐 있겠소? 세상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왜? 우리는 세상에서 영원 무궁을 마련합니다. 하나님과 결합된 이것을  마련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필요하요.

 그러기에 기독교는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요. 기독교는 세상이 필요합니다. 어째 필요한가? 하나님이 동할 때 동하고  정할 때 정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내가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지능을 받아가지고  하나님의 속성을 받아 하나님같이 내가 행동하는 그 행동으로 통해서 하나님의  것을 받고 마귀로 통한 그 행동함으로 마귀 것을 받는데 이것을 마귀의 것을  어디서 받을건가? 세상에서 받고. 하나님의 것을 어디서 받을 건가? 세상에서  받고. 내가 하나님과 결합되는 것이 어디서 될 것인가? 세상에서 되고.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 어디서 될 것인가? 세상에서 되고.

 세상을, 이 무대를 이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들어라." 들고 "놓아라." 놓고  "둘을 합해라." 합하고 "셋을 연결하라." 연결하고 "던져봐라" 던져보고  "쥐어봐라" 쥐어보고 "받아봐라" 받아보고 하나님이 시키시는대로 하는 연습을  하는 세상으로, 하나님과 같은 속성으로 행동하는 것을 세상에서,  이리하여 세상은 우리의 연단소요 훈련소요, 배우는 학교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지식을 배우는 교재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맺는 증거품이요,  하나님과 나와의 실지로 동거 동행을 연습하고 실지로 결성시키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먹고 마셔서 내 욕심을  달성하기 위해서 세상이 필요한 것 아닙니다. 이 다음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이 다음에 증거하겠습니다. 오후에 그것을 증거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깹시다. 깨야 됩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우리를 구속하신 것  없어질 세상 것 취하라고 한 것 아닙니다. 그런 것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기 때문에 그런 것을 위하여 구하지 말고 우리가 구할 큰 것을 위해서  구하고 그것은 우리에게 적절한 비용으로, 필요물로 얼마든지 이용하도록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용 다하고는 우리는 세상을 떠날 때에 '세상아 잘  있거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내가 서툴어서 이렇게 저렇게 이용할 때  오용해서 너거를 괴롭게 했다. 미안하다. 그러나 너희들을 이용해서 나는 좋은  것을 이루고 가니 고맙다. '세상아 잘 있거라.' 예수님으로 더불어 다시  구름타고 올 때에 나와 너희들이 영원히 함께 해서 영원히 너희들은 나를 위할  것이고 나는 영원히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을 것이다. 하고서 세상을  이별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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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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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부활/ 요한복음 5장 29절/ 880529주새 선지자 2015.11.02
80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46절-49절/ 790821화새 선지자 2015.11.02
79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39절-44절/ 790820월새 선지자 2015.11.02
78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36절/ 880524화새 선지자 2015.11.02
77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16-19절/ 790819주전 선지자 201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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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부활/ 고린도전도 15장 49절/ 800610화새 선지자 2015.11.02
70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39절-44절/ 800206수야 선지자 2015.11.02
69 부활/ 빌립보서 3장10절 -12절/ 800408화새 선지자 2015.11.02
68 부활 소망으로 주님 위하여/ 요한계시록 18장 4절-8절/ 840715주새 선지자 2015.11.02
67 부활과 믿음/ 야고보서 2장 22절/ 830109주후 선지자 2015.11.02
66 부활과 믿음/ 마태복음 28장 1절-7절/ 830403주후 선지자 2015.11.02
65 부활과 생명/ 요한복음 11장 25절-27절/ 811108주전 선지자 2015.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