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1980. 4. 8. 화새

 

본문: 빌립보서 3장10절 -12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사도 바울은 자기가 성경 기록할 때에 이렇게 성경을 기록한 것은 바울의 영감  받은 마음이며 또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이 마음을 가진 바울은 성령의 사람,  참 예수 믿는 사람의 표본적 사람인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심같이 이 바울의 이 심령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심령의 표본이며 표준적 심령인 것을 여게 나타내서 하신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우리들이 가질 수 있다고 가지라고 말씀하신 이대로 이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완전무결하게 영감 되어 가졌던 마음이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는 바울의 마음이 아니고 성령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 바울의 마음이  되어서 그 마음의 발표를 여게 한 것이고 또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그 역사가  바울을 통해서 나타난 것을 여기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아브라함을 표본으로 삼아서 자라가고 달려가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소욕, 소욕과 행위는 모든 소욕과 행위는 여게 나타난 표본인 바울과 같이  되어지는 이것을 우리의 푯대로 향하여서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곧 바울이 12절에 말한 대로 그리스도 예수에게 잡힌바 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향하여 간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가  예수 그리스도가 잡은 바 된 이것은 신인양성일위가 완성한 이 완성을 푯대를  향하여 달리기 때문에 이 바울을 푯대로 향하여 달리는 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향하여 달리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를 본 받으라" 한 것입니다. 바울을 본 받는 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를 본 받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감화되어서 이제는 바울의 마음이  되었고 하나님의 움직이심이 하나님의 은혜로 도와서 바울의 움직임은 어떻게  움직였는가 하는 것을 여기에 나타냈습니다.

 그의 마음과 몸의 움직임은 이전에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서  그것을 소망했지마는 이제는 그리스도 하나만을 자기의 욕망으로 삼았고 또  자기는 이전에는 땅에 있는 것을 욕망해서 노력했지마는 그런 노력은 다  깨달음으로 버렸고 그리스도를 얻는 이 일에만 노력을 다 기울였고  또 모든 것을 접할 때에 수입하려고 접한 행동을 했지마는 이제는 모든 것을  접촉할 때에 다만 그리스도만이 거게서 자기의 할 수입으로 삼아 이 수입만이  취하고 이 수입을 하고 난 그 세상과 세상에 있는 그 모든 행실의 것들은 그것을  배설물로 버리고  또 그 현실이 계속하면 그 현실에서 그리스도를 취하는 수입하는 유일한 방편이  되는 영감인도로 또 거게서 언행심사를 하여 그리스도를 수입하고 또 이렇게  영감인도로 그리스도를 수입할 때에 그 현실이 어떤 돌변이 되든지 또 그와  비슷한 것이 오든지 그보다 크고 작은 것이 오든지 어떤 그 현실이 오든지  자기는 그전, 이전 현실에서 그리스도를 수입하는 영감 인도대로만 행동하여  그리스도만 수입하고 그리스도를 수입하게 되는 그 현실은 그대로 지내 보내  버렸고  이랬는데 주께서 다시 또 다시 그 현실을 계속해 주든지 그 현실의 정 반대를  계속해 주든지 이제까지의 역사에 있었던 종류의 어떤 현실을 주든지 또 역사에  없었던 초자연적인 어떤 그 현실을 주든지 이것은 그 속의 그리스도를 수입하게  하려 하여 주님이 만들어 주시는 선물인 현실인 것을 자기는 깨닫고 그 선물인  그 현실의 속에 주님이 내포시켜 주신 그리스도만을 자기는 현실이라는 보자기를  펴 그 그리스도만을 자기는 취하여 자기 것을 삼고 또 그 현실은 자기는  상관없이 내어놓아 배설물로 내어놓고 이 생활을 계속한 것이 바울의 심령의  생활이었습니다. 우리는 요것을 구별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면 자기 힘으로 그것이 되어진 것같이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그것을 하려고 행동을 꼭 같이 해도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될 때는 그 사람의 경영과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셨기 때문에 된  것이고 안 될 때는 그 사람의 경영과 노력 뿐이요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시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영은 사람에게 있으나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경영한다고 노력한다고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이 하실 때에 되고  안 할 때에 안 되는 것.

 어제 경건회 시간에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했다" 하는 그 말씀을 증거  했는데 범사가 우리 앞에 오는 그 현실 현실을 자기가 만든 것으로 그렇게  조브랍게 생각하는 오해를 가지지 안 해야 됩니다. 자기가 만든 현실이 아니고  주님이 단독 만든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 현실을 만드실 때에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소원을 가지고 할 때에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그 일에 내가 참가하므로 된 것이고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그 소원이 아닌 내 단독 소원과 내 단독 노력이 될 때에는 그 일이 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이 역사가 우리를 기르시기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다니엘이 자기가 그 총리의 직위 그것을 자기는 만들지 아니한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가 총리가 되려는 그런 욕망도 그 속에 전혀 없고 또 그가  사자 구덩이 들어갔을 때에 그가 총총리가 되는 그런 욕망이나 노력이나 하나도  없습니다. 전혀 그것은 주님이 일으키신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그렇습니다.

 다윗 왕이 그렇게 된 것도 꿈에도 그는 생각 안 가졌고 요셉이도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안 했는데 자기는 자기 할 일 하는데 자기는 자기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 그걸 찾아서 지키는 고것만 하는데 사자 구덩이도 오고 또 총총리도 오고  내나 그거 행하는데 전 나라의 왕과 백성들의 단합의 배척도 왔고 또 환영도  왔습니다.

 그 다니엘의 심신의 행동이 배척을 노력해서 배척이 온 것 아니고 환영을  노력해서 환영 온 거 아니고 또 자기가 그렇게 위대한 사람으로 등용된 거 그거  하기 위해서 노력한 것 아니고 총리 되기 위해서 노력한 것 아닙니다.

 다만 그는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으며 그것 행하는 것만  주력했습니다. 그것만하는데 이런 현실을 현실로 바꾸어 주시기도 하고 저런  현실로 바꾸어 주시기도 하는, 바꾸어 주시고 그대로 주시는 그 현실을 주시는  것 주님이시오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구별했습니다.

 이래서 어떤 현실을 주시든지 그 현실은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고 다만 자기는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고거 바로 찾아 가지고서 행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뜻을 찾는 데에는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제일 조건인데 자기가 이런 노력 저런  노력하는 그 노력 가지고 일이 된다는 것이 아니고 노력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명중해 들어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들어 맞히는 깨달음으로  동참하고 소원으로 동참하고 하나님의 역사 하심의 거게 움직임으로 동참하는  것뿐이지 그 경계가 동참하는 것뿐이지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 혼자  이루십니다. 인간의 노력은 거기에는 하나도 안 듭니다. 왜 안 드는고 하니  우리는 가진 것이 다 진동될 요소들로 되어있는 것들입니다.

 이제는 하는 것이 진동되지 아니할 요소들을 마련하는데 진동될 요소들이  진동되지 아니할 요소들을 마련을 못합니다. 천한 것이 귀한 것을 만들지  못합니다. 무식이 유식을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제가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순전히 이는 예수라는 인성을 통하여 예수라는 신성을 통하여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그 역사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고 예수를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도달하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 한 분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현실에서든지 그리스도만 수입하고 그 나머지는  그리스도를 얻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담아 가지고 온 그릇처럼 그리스도를  싸 가지고 온 보자기처럼 자기는 상관을 가져 그리스도만 취하고 나머지 그  보자기는 버렸습니다. 그 그릇은 버렸습니다. 버렸는데 그 이튿날 또 총리라는  그 그릇이 또 그대로 하나 또 왔습니다.

 그러면 날마다 오는 현실은 같은 그 직장이나 또 준 새 직장이요 어제와 같은  그 치부나 오늘도 사용하도록 주님이 또 새로 주시는 치부, 날마다 새것으로  주시는 이것인 것을 깨닫고 날마다 새것으로 주시는 현실이며 새것으로 주시는  그 오늘의 현실에 또 새로 취할 그리스도의 양이 있는 것을 깨닫고 그것만  가지고 나머지는 배설물로 이렇게 여겨 자기는 있으니 자기는 그것이 거게  있으니 그 속에 있으나 자기는 버렸소, 버린 것은 거게 대한 소욕이 하나도 있지  안하고 그것이 오늘로써 완전히 천리 만리 멀리 가서 상관없이 가 버리고 그와  정반대인 내 일이 올는지 그것이 올는지 그것이 와도 새것이 왔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고 또 반대되는 것이 와도 주님이 필요 있게 주신 것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아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욕망도 하나도 가지지 안 했고 또 그것을 붙드는  것이나 그것을 취하는 노력은 하나도 하지 안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만을 행할 때에 이것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것을  우리가 똑똑히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원을  그에게 두시고 그 일을 이루실 때에 그 일이 돼지니까 제가 해서 한 것같이 왜  소원을 두고 하는데 안될 때 있습니까? 안 되는 것은 된다는 그것이 자기로 된  것이 아닌 것과 자기는 소원하지 안 했는데 됐어 됩니다. 소원하지 안 했는데  의로운 일도 자기는 그걸 소원도 안 했는데 의로운 일이 됐습니다. 자기는 그  죄를 소원도 안 했는데 그 죄가 됐습니다. 별별 것이 소원하지 안한 것이  되어졌고 소원하는 것도 안되어지고 소원하는 것이 소원대로 되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이냐? 모든 것을 주님 혼자의 주권 의지로 예정하신 그 경영이 한  분의 주권 능력으로 이룬다는 것을 이것을 칼빈은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칼빈의  깨달음의 유력입니다.

 그러면 칼빈의 깨달은 주권은 두 가지 주권입니다. 주권은 혼자 주장했다  말이고 혼자 했다 말인데 주권적 주권의지의 예정, 주권 능력의 성취 그것이  칼빈이 깨달은 주권입니다. 바로 깨달았습니다. 아주 위대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요것만을 자기는 수입으로 삼고 그 수입 취하는 그것만 자기에게 주시는  현실은 그것 싸서 보낸 보자기 같이 그 그리스도 수입 그거 보게 한 현실인 것을  깨닫고 거게서 그리스도 수입 요것만 보고 그 현실은 자기에게 상관없는 것으로  그거 수입하고 난 그거 수입하고 그 수입 만이지 그 수입 없는 그 현실은  자기에게는 상관없는 것으로 딱 구별을 했고 또 그 수입하고 했는데 그 상태가  경제 상태나 권세 상태나 가정 상태나 모든 자기 현실 먼저 그 상태의 현실에서  그리스도의 수입을 했는데 그 상태의 현실이 다시 닥쳐 있습니다.

 그 상태의 현실이 또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그 현실은 새로 그리스도를  수입하게 하는 새 현실인 것을 깨닫고 그 새 현실인 그것은 주님이 그리스도를  얻게 하려고 자기에게 싸 보낸 요것인 것을 구별한 것이 바울의 모든 사상이요  바울의 견해입니다.

 그러기에 요것이 확증이 되면 자기는 어떤 현실을 만들려는 그런 헛된 수고를  하지 아니하고 또 어떤 현실을 놓지 아니하려고 잡는 그런 헛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그것을 만들라는  그런 헛된 노력도 안하고 또 만들어진 것을 놓지 안하고 빼앗기지 안 하려고  하는 그런 헛된 노력도 하지 아니하고 또 그것이 이루어진 것은 자기 소원대로  이루어졌든지 어쨌든지 주님이 단독이 하셨지 주님이 단독이 하셨지 자기는 혹  참가하고 원하고 원하는 그것도 주님이 나를 통해서 원하신 주님의 단독 역사 요  내가 거게 참가한 그것도 주님이 나를 통해서 원하신 주님의 단독 역사 요 내가  거게 참가한 그것도 주님이 나를 참가케 해서 내가 참가한 단독역사 요 자기는  그런 역사가 하나도 없는 다만 현실을 만드시는 이는 주님이신 데 참가했든지 안  했든지 만드시는 이는 주님이시오 현실을 만드시는데 자기가 어떤 것은  참가하므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만들어진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자기가 그것이 만들어지지 안 하도록 하려고 있는 힘을 다  써서 그것을 방비했는데도 그대로 만들어진 것도 있는 것입니다.

 요것을 바울은 똑똑히 깨달았습니다. 요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입니다.

주권적의지 예정과 주권 능력의 성취라는 요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기는 현실에 대한 현실관이 똑똑했고 현실이 변동되는 이거 변동관이  자기는 달랐고 또 현실에 대해서 자기는 그 현실의 존재 목적 그 현실이 왜 내게  닥쳤나 현실의 존재 목적을 자기는 알았고 존재 목적관이 달랐고 이러니까 이  현실을 사용하여야 할 현실 사용관이 발랐고 현실 사용이 발랐으니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거기서 수입하고 나머지는 배설물로 제거한 것입니다.

 요것이 성령의 사람의 깨달음이며 성령의 사람이 욕망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요것을 요렇게 구별하는 요것이 어렵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여게서  모순을 가져와야 되지 모순을 가지지 아니하고 그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거는 다 헛된 믿음입니다.

 그것은 맹종이요 맹종이 일이 됩니까 맹종은 일이 안됩니다. 실패합니다.

여게서 모순 그게 모순이다. 거게서 이럴 수가 있느냐 이 이치에 안 맞다 이치에  안 맞는 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그 이치에 안 맞는 것을 깨달은  그것이 이치에 맞는 것을 깨달은 거기에 나아가야 됩니다.

 그러기에 그 앞으로 연구하면 모순될 그것을 어떤 모순이 나올 것인가를  생각하고 지금 모순 나오는 그 모순을 해결 짓도록 지금 구비한 말을 지금 내가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하는데 그런 말을 안 하면 도리어 쉽겠고 알아듣기 쉽겠고  수월하고 바르고 곧은데 그런 말을 하므로 필요 없는 말이나 붙어 말이 되니까  복잡해지는 거 같지마는 여러분들이 정말로 살라고 노력을 하면 그거는 모순이  나옵니다. 모순이 나올 때에 요걸 말하지 안 하면 그 모순은 해결 짓지 못하고  요거는 틀렸다 하고 지내갈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또 자기가 깨달아 아는 사람도  있겠지마는 좀 어두운 사람은 깨닫지 못하게 되기 쉽기 때문에 모순이 나올 때에  모순 방지 이단이라고 정죄 하는 그 비평이 나올 때에 그 모든 비평 방지,  그것을 다해서 나가느라고 이 구석으로 저 구석으로 이렇게 바로 가면 상관없고  소용없는 말 같은 그런 말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은 참가하는 거 또 자기 노력이 아니라는 거, 이런 것을 말하는 것도  그와 같은 성질의 것으로 말을 합니다. 왜 우리가 지금 하면 되고, 안 하면 안  된다는 이게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문제가 난제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모든 현실을 제가 만들라고 애를 쓰고 제가 만드는 줄  압니다. 제가 붙들면 붙들릴 줄 압니다. 요것이 해결 안되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사욕대로 미래를 경영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현실로 공연히 허사를 경영합니다.

 그것을 자기는 거게 하나도 손대지 못하고 헛된 경영도 주님이 주셔서 그만치  헛된 일하다 만 그것은 하나님이 이런 경영은 헛일이다. 이런 것은 참되다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것은 어떻게 하면 망하고 어떻게 하면 흥한다는 그 두  가지를 알려 주십니다.

 그 두 가지 인데 흥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되면 흥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고  배반하면 망한다 그거뿐입니다. 그것을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을 때는 그 죄를  '잘못했다' 회개만 하는 것은 껍데기 신앙생활 하는 사람입니다. 껍데기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요. 이 죄 그것도 하나님이 만든 현실입니다. 타락을  하나님이 만든 현실이요 아담 해와의 타락이 하나님이 만든 현실이지 아담 해와  자기가 만든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 의지의 예정이요 주권 능력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타락했습니다. 다시 타락해야 안되지 타락 안 해야지 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타락을 주신 목적이 뭐이냐? 그 타락의 존재 목적 그  타락이라는 현실 존재 목적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현재의 조성자가  누구인 것을 알아야 되고 또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내가 어떻게 가져야 된다는  것을 바로 알고 상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큰사랑의 뜻이 있었는데 베드로는 그것을 평생 써먹었습니다. 안  써먹지 안 했소.

 그런고로 바울은 요 현실에서 요것만 자기 수입으로 가졌고 또 여게 1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 그 부활의  권능이라 말은 그 죽고 부활한 권능이라 말입니다. 그 부활의 권능이라는 것은  말하지 안 해도 죽음이 있기 때문에 부활이 있는 것 아닙니까? 죽음이 전제  죽음을 전제로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죽은 권능, 산 권능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참예함을 이것을  자기도 알려하여 자기도 가지려고 하여  안다는 말은 여기서 지식적으로 안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가 가진다는 말입니다.

소원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돈만 안다 명예만 안다 권세만 안다 자기의  감정만 안다 쾌락만 안다 애정만 안다 원한다는 말이요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전부를 기울인다는 그걸 가르쳐서 안다고 말하는 그런 성질의 아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말은 그리스도의 죽은 권능 그리스도의 살아난  권능 그걸 말합니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죽은 권능이라, 살아난 권능이라, 어떤 사람이  질문하다가 그 답이 해결 됐는지 지금 말 안 하는데 그리스도는 신성이신데  어떻게 죽고 살아날 수가 있는가? 신성은 불변의 존재인데 불변의 존재가 죽고  살아났습니다. 그는 불변의 존재로 죽었고 불변의 존재로 살아났소 이러니까  없어지지 아니하는 그분이 없어지지 안 하는 분으로서 죽음의 고난을 삶의 그  고난을 당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 말은 신인양성일위의 죽으심인데  인성을 말하지 아니하고 신성을 말한 것은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직책을 행한 그 권능이라 그 말입니다.

 요거 좀 어렵기 때문에 요것을 잘 듣지 아니하면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직책  이행 권능, 그리스도직책이라니? 제사장직을 선지직을 왕의 직을 요 세 가지  직을 행하는 데에 다 투자한 것이 요것이 죽음의 권능입니다.

 요 세 가지 직책을 하는 데에 다 드린 것이 요것이 죽음이요 이것이 지극히 큰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저 뭐 사는 거야 쉽지마는 죽는 거야 쉽지,  사는 것이 어렵지 죽는 거야 뭐 어렵지 않지 않느냐 높은데 떨어지면 죽지 그런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인양성일위의 죽으심은 그리스도직을 하는 데에  남김 없이 다 바친 것이요 그리스도직을 하는 데에 남김없이 다 바쳤다 그 말은  제사장직 하는 데에 다 바쳤습니다.

 제자장직이라니?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더불어 이렇게 이질 되어있는  하나님과 대립되어있는 모든 존재 하나님과 막히어져 있는 모든 존재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모든 존재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모든 존재 하나님과 정 대립이 된  이질이 되어있는 그 자체, 하나님과 이질 되어있는 대립되어 있는 그 자체 그  자체를 하나님과 하나 만든 요것이 제사장직입니다. 하나 만드는 이 일에 다  투자했습니다. 이 권능이요.

 그래서 에베서 1장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있는 지극히 큰 능력이  있는데" 이 능력이 무슨 일 했느냐? 그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했다 지극히 큰 이 능력이 그러면 이 능력이 지금  우리에게는 뭐 하려고 와서 있느냐 우리에게는 지극히 큰 능력이 와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 능력이 우리에게 다 와 있습니다. 지극히 큰 능력이 와 있소 이  능력은 뭐 하려고 와 있느냐 죽고 사는 일 하기 위해서 이 능력이 와 있습니다.

 죽다니? 요 제사장직 모든 피조물을 모든 피조물 어떤 자든지 택한 자든지 불택  자든지 모든 만물이든지 영물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모든 피조물은 피조물 그  자체를 하나님과 조금도 틈 없이 하나님과 조금도 이질이 없이 하나님과 꼭 하나  되어있는 요 한 덩어리가 될 수 있는 창조주는 창조주요 피조물은 피조물이요  경계만 있지 하나님과 꼭 동질 동성의 하나님과 꼭 같은 요 자체가 되어  하나님화 되는 하나님화 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되는 요 일을 달성하기 위해서  요기에 요거 위해서 거게 부스러기 하나도 여게 반대되는 것 있고 전부 요 일  하는 데에 다 투자되는 요 능력 다 투자된 요 능력 요렇게 투자가 됨으로  하나님께서 요 투자는 유한한 것으로 투자했는데 유한한 것으로 투자했는데  일시의 것으로 투자했는데 요것을 한 번만 투자해서 그렇게 되어져 있는 것을 한  덩어리 만들기만 했는데 부활의 권능 이제는 유한한 것으로 투자한 것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하나님께서 그 많으신 긍휼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하사 우리에게 산 소망 말씀하신 그 이유입니다.

 이렇게 유한한 것을 가지고 그 모든 피조물의 자체가 하나님하고 한 덩어리  되도록 만드는 요 일에 하나도 남김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소원대로 모든  것을 하나님과 하나되어 살게 하려고 완전자와 하나되고 불변자와 하나되고  영원자와 하나되고 요 하나되게 하는 요 사랑을 가지고서 하나되게 하는 요기에  다 투자를 했는데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시고 만족히 여겨서 유한한 것으로  투자했는데 이제는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으로 네가 이렇게 소원해서 하나도  아낌없이 제사장직을 선지직을, 선지직은 그의 지혜 지식이 하나님과  일치되어있지 안한 그것을 일치시키는 그 왕의 직은 하나님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이 일치되지 아니한 그 하나님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이 일치되는 그  능력이 일치되는 요 일을 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이 피조물에게 완전히  이루어지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에게  만족이요 피조물에게 만족인 이것을 위하여 네 모든 유한한 것을 다 드렸기  때문에 이제는 네가 이렇게 소원하니 이제는 유한한 것을 신령한 것으로  변화시켜 무한한 것으로 변화시켜 무한한 것으로 변화시켜 무한하고 영원한  것으로 너를 변화시켜 줄 터이니까 이제 무한하고 영원한 이것 가지고 영원히  무한히 네 소원대로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 하나님이 소원하시고 모든  피조물에게 행복 되어있는 이를 위해서 네가 봉사하는 자 되게 하려는  이것으로서 이제 주신 그리스도의 그 죽음의 권능 그 부활의 권능 이것을 이  고난에 이것이 인간말로 말하면 고난인데 인간말로 말하면 고난이요 하나님말로  말하면 이것이 무쌍의 그 이상이 없는 유일의 쾌락이요 기쁨입니다. 쾌락이요  기쁨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기쁨이지마는 인간이 볼 때에는 고난이라 그 말이요. 이 고난에  참예함을 이것을 선택했다 그 말이요. 이 세 가지 직을 인하여 자기를 다 드리는  이것을 선택했고 이러니까 하나님도 만족히 여겨서 이 직을 영원히 네 직으로  해라 하고서 주신 이 선택을 자기도 알게 하여 이것을 차지하려고 욕망하려고  자기도 유한한 것으로 이 세 가지 직책을 하는 데에 다 드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신인양성일위를 긍휼히 여기심과 같이 자기도 긍휼히 여겨 유한한  것으로 다 드린 자기에게 무한한 것으로 성화시켜서 주시는 요것을 원하여 요게  이르려 하노라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제사장, 선지, 왕직, 요  그리스도직을 행하는 데에 다 투자하고 그리스도직을 하는 데에 다 투자하므로  하나님이 신인양성일위인 예수님의 이 인성을 기뻐하셔서 무한한 것으로 해  주셨고 유한한 것에게 동참했던 신성은 무한한 것으로 변화시켜 준 요 인성에게  신성이 영원히 동참해 주겠다 일시 요 투자하는데 동참하신 요 신성이 기뻐해서  무한한 재료로 영원히 요 직을 행하는 여기에 하나님이 동참해서 같이 해  주시겠다 하는 요것이 신인양성일위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11절에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어찌  하든지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어찌하든지 주의 권능으로써 죽고 이 죽음으로 영원히 이제 죽음으로  영원히 죽음을 계속할 수 있는 죽어도 또 죽을 게 있고 죽어도 또 죽을 게 있고  다 죽여도 또 다 죽일 수 있는 여기에 도달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그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는 개의치 아니하신다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라 하는 것이 한 번만 죽기만 죽으면 그 다음에는 다시 죽음이  없는 영원한 평강을 예수님이 기대 했다면 그것은 엄연히 그 죽음은 껍데기  죽음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라는 말은 당신이 다 바쳐  제사장 선지 왕직을 하므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에게 간 그 자체 완전 지혜  지식의 완전 능력의 완전 사모 완전과 움직임의 완전으로 그 전부가 하나님 한  분으로 다 되어 참 하늘에는 문도 거리도 전부가 다 선지 사도 그대로 됐고 선지  사도는 또 하나님의 형상 입었고  이러니까 거게는 성전도 없고 하나님과 다른 형상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이  하나님과 꼭 같은 형상이요 동질 동성이요 함께 움직여요  이러니까 하나님이 안보여요 없어 전체 하나님화 된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그게  무엇으로 됐느냐? 제사장으로 됐고 선지 왕으로 됐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신정국가에 멜기세덱으로 하나님이 나타나서 오셨고 또 이치적으로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으로 오셔 가지고서 이 직책을 잘하여 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을 때에 많은 밀알이 생기는 것처럼 이렇게 이 그리스도로 죽고 살아  이로 인해서 모형적 그리스도 다음 열매 그리스도 우리는 다 그리스도인 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교회 이렇게 되어 하늘나라는  제사장 나라요 선지 나라요 왕의 나라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모든 사람은  나에게 제사장이요 나에게 선지자요 나에게 왕이요 나는 그가 제사장 노릇 하는  그 혜택을 내게 주고 나는 받고 선지 노릇 하는 그 혜택을 나는 죽고 그는  나에게 주고 나는 받고 왕의 혜택을 그는 나에게 주고 나는 받고 나는 제사장의  선지자의 혜택을 내가 그에게 주고 이것을 주고받고 이것을 주고받고 다시 쉽게  말하면 하늘에 있는 모든 존재는 자기 아닌 모든 존재를 하나님과 하나되어  완전케 하려는 이 노력뿐이오 또 모든 존재가 나에게 해 주는 것도 그것뿐이오  하나님도 나에게 이거 하시고 모든 것도 나에게 이거하고 나도 모든 것들에게  그리하여 하늘의 생활은 제사장 생활이요 선지 생활이요 왕의 생활입니다.

이러기에 거게는 죽음이 없는 나라입니다.

 이래서 바울은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이러니까 이걸 하려고 하니까  이제 자기는 그것을 다 이루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여기에 다 지금 투자하면 다  투자하기를 지금 목표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다 투자가 안됐기 때문에 다  투자하려고 말한 것이고 빚진 자라는 것을 아직까지 투자할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서 다 투자하기를 원하고 그러면 투자했으면 이렇게 수고와 고생이 다  지내가고 이제 평안이 온다는 이것을 원하는 그런 것 아닙니다. 이제 세상에서  요 세 가지 직책을 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이 세 가지 직책으로 다 쓰여지고  다 소비되고 거게서 소비되는 그것을 이 다음에 다시는 소비 없는 세계를 시대를  바라는 게 아니고 소비된 그게 취미요 소비되는 그게 재미요 소비된 그것을  원해서 다 소비하고 이제 소비했으니까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다 소비하고  영원히 영원히 소비하고 영원히 영원히 그게 쓰여지는 그것을 원하는 요것이  다시 말하면 십자가를 원하는 그것이 영원히 영원히 원하는 그 소원 성취를  이루어 주신 것이 부활을 주신 것입니다.

 부활을 받은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의 그것을 영원히 영원히 되풀이하는 안 죽어  그렇지 이거는 이 세 가지 직을 하기 위해서 세 가지 직을 하기 위해서 드리니까  끝이 밑천이 다 돼서 끝이 났지마는 이제 부활은 다 드려도 끝이 안나 안  죽으니까 그렇지 죽음으로 계속하겠다는 말입니다. 다 안 바쳐 괴로운 게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그리스도인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인간 생각으로 벌써 죽으면  이것뿐이니까 떫더라도 개암 한 개 못 먹겠느냐 고진감래로 아주 쓴 것이 다  지나가면 단 것이 온다 이 수고 지나가면 이제 평안하게 해 살 것이다 하는  요것은 실은 그 속에 요것을 원치 아니하는 것을 부득이 하는 것입니다.

 부득이 함으로 하지 아니하고 주님은 내가 원하고 원하였노라 하신 대로 아  요것이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어짜든지 한 번 죽고  그 다음에는 죽음이 없는 이제 이 수고와 고생이 없는 그것을 원한다는 그것이  아니란 요것이 중요합니다.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요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부활절이라는 것을 그 일주일 동안 일주일 동안 그 지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 주간으로 고난을 설교해서 고난의 설교는 슬픔으로 그 일 주간을  설교를 하면은 성공한 설교로 아주 그것은 좋은 것으로 이제 부활은 다시는  이제는 이 고난이 없어지는 이 부활이니까 모든 수고 다 끝냈으니까 기쁨으로  부활을 맞이하자는 이것은 그 주님이 죽으신 그 당신의 속성도 부활시키시는  아버지의 속성도 부활한 당신의 속성도 그것은 아주 모르는 이 죽음을 일생동안  두려워하고 고통스럽게 여기는 인간의 생각대로의 생각이고 성령의 생각은 아닌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자식이 그 병들어 죽으려고 꼴막 거리는데 자기가 자기를  희생해서 그것이 차차차차 살아나니까 어떻게 좋은지 그게 살아나니까 좋으니까  이제 '아이구, 수고를 그만 하라' 아니고 그 살아난 것이 좋아서 수고가 수고된  줄 모르고 자꾸만 지금 그 수고를 하고 싶고 완전히 살아날 때까지 수고를 하고  싶지 않겠소? 피곤치 않고 하고 싶다 그 말이요.

 지난밤에 수고하고 난 다음에 '아이구, 이제는 수고를 그만해야 될 텐데 내일  또 수고를 한다' 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살아나는 그 재미에 수고가 개의치 안한  것이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개의치 안 한 것입니다. 살아나는 그  재미에서 수고가 개의치 안하고 살아나는 그 재미에서 그 수고가 수고되지  아니하고 자꾸 그걸 하고 싶어 그걸 하니까 살아나니까 그걸 하니까 살아나니까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린 것은 완성 아닙니다. 완성 아닙니다.

 "믿음 사랑 소망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또  믿음을 가지고 소망을 이루어서 짐 진 무한하신 분을 향하여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유한한 자원을 가지고서 제사장 선지자 왕 노릇으로 다  투자하니까 우리가 그만치 완성됐습니다. 완성됐는데 이렇지만 밑천이 다 갔소  밑천이 다 들었소 밑천이 끝났소. 이러니까 이 소원하는 밑천은 끝났지 하나님을  목표해 가는 아직까지 미완성은 많이 있지 이러니까 예수님의 소원은 미완성의  완성에 대해서 이제 미완성을 완성하는 데에는 하나님처럼 완전히 나가는 데에는  유한이 무한에 나아가는 데에는 무한한 세월이 거쳐야 되고 영원한 세월이  거쳐야 되기 때문에 영원한 자본이 없으니까 영원한 자본으로 다시 살려 주시고  이것을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버지의 긍휼이요 이 부활을 원하는 것은  영원히 그것을 계속해서 당신이 영원히 나의 대 제사장으로 나의 선지자 나의 왕  노릇 함으로 죽기까지에 된 이 완성 끝에 다시 완성 완성 완성으로 영원히 나를  완성 당신은 나에게 영원히 제사장 선지자 왕 당신은 나의 영원히 사랑으로  당신을 희생 나는 당신의 희생으로 살아나는 이것을 깨닫고 요것을 원하는 것이  마음의 소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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