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과 믿음


선지자선교회 1983년 1월 9일 주일오후

 

본문 :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오전에 '믿는 사람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하는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믿음은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지식과 의사를 내 마음으로 인정해서 따르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몸으로 순종해서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을  마음의 순종이라 몸의 순종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과 신약에 당신과 우리와의 약속을 맺어놓은 것이 신구약  성경입니다. 그 약속 중에는 '내가 너희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으로 역사하겠다. 또  내가 너희들에게 이런 것 이런 것을 해 주겠다' 그렇게 나타낸 약속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아는 데는 신구약 성경을 열람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하나님으로 역사하시겠다고 관계를 가지시겠다고 하셨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를 가지는 구체적인 종류와 방편을  빠짐없이 또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말씀이나 믿는 사람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말씀이나 꼭 같은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 그는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에  나타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획을 약속을 인정하는 그것이 첫째 믿음입니다.

그것이 근본적인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심판밖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구원이  됩니다. 기본구원도 우리가 믿지 못하고 믿음이 없는 것을 주님이 우리 대신해서  믿음을 가지신 그 믿음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이러하신 하나님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에누리하지 말고 인정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종류의 축복을 은혜를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이 약속은 틀림없다. 이 약속은 변함없이  이루어진다 하는 것을 또 인정해야 됩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약속하신 구원을  인정하면 근본 믿음은 가진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인정하는 그것을 실상으로  이루는 데에는 또 우리의 약간의 행동이 거기에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 행동은 많지 못한데 약간의 행동, 일생 동안 행동해 봤자 그 몇 가지  안 되는 셈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해서 행동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에 나타낸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구원을 인정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개별적으로 현실을 통해서 명령하실 때에 그대로  지켜 행하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 아무 일이라도 다 된다 말이 아니고  자기에게 해당된 자기 구원으로서는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완성할 수가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오후에는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 그러면 여기에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 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이 믿음은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인정. 인정이 행동과 함께 한다.

인정이 되는 것만치 행동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정이 속에 있고 인정에서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정 없이 행동을 하는 데는 구원이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인정 없이 행동하는  일들도 있기는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던진 것은 인정 안하고 행동했습니다.

인정 안하고 행동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고기가 잡히도록 해 주신 그것은  뭐인가? 그것은 구원의 실상이 아니고 표적입니다. 구원을 표시하는 흔적입니다.

 베드로가 인정치 아니하고 별별 비꼬는 마음을 가지고 했든지 어쨌건  단마음으로 하지는 안했습니다. 인정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인정하는 믿음으로  했더라면 그가 죄인이로소이다 하면서 꺼꾸러질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인정하지 아니하고 행했는데 그 일이 이루어진 것은 그것은 표적입니다. 그로  인해서 '이분을 인정 안 할 분이 아니고 이분을 인정해야 되는구나 이분은 하나도  가감이 없고 에누리가 없이 그대로인데 나는 이분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서 그분이 그때에 그물을 던짐으로 주님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러기에 표적은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행하는 것이 아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표적을 주신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여기에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한다' '행함과 함께  일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실 때에 놀라다가 '내로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래 하시니까 '주님이시어든 나도 물위로 걸어오게 하옵소서' '걸어오라'  하실 때에 주님이 물 위로 걸어오라 하시는 것은 그것은 도무지 베드로로서  인정할 수 없는 참 대대에 박힌 선입적 관념이요 기존 지식인데 베드로가 그  말씀을 듣고 물 위에 푹 뛰어내린 것은 그것은 주님이 하신 말씀을 인정한  증표입니다. 인정이 됐기 때문에 그가 물위에 뛰어내렸지 주님의 능력과 주의  말씀을 인정치 안했으면 빠져들어갈 터이니까 누가 암만 내려서라 해도 죽자껏  안 내려섰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정한 증거입니다.

 '주님이 나를 물 위로 걸어오라 하십시오' '걸어오라' 하신 그 말씀을 베드로가  인정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가 내려서려고 주저주저 거리다가 못 내려섰으면  인정을 할까 말까 되나 안 되나 염려하다가 결국은 부인하는 것이 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푹 뛰어내리는 그것은 인정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물 위에  뛰어내린 것은 그가 주의 말씀을 인정하는 그 인정과 뛰어내리는 행동과 같이 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다 위에 뛰어내리는 행동은 외부에 보이는 행동이요 인정하는 것은  무형이라 보이지 않는 인정이 그로 하여금 뛰어내릴 수 있도록 그렇게 속에서  강하게 역사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실 때에 아브라함이 그가  그 소리를 듣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밤새껏 잠 안 자고 준비해 가지고 '어서  이삭을 번제로 잡아 드려야 되겠다' 한 것은 뭣을 인정하는 데에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는 데에 기쁘고 즐겁고 근심되지를  안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이로 네 씨로 삼을 게 아니라 네 몸에서 난 소생으로  씨를 삼을 터인데 하갈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라에게서 꼭 네가 네 자손이 날  것이라. 숫자가 많이 번식되리라' 하는 그 말씀을 의심 없이 확실히 인정하는  데에서 '이렇게 약속하신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니 불에 태운 잿덩이를  가지고 다시 살려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이삭을 하나님이 만드실란가보다' 하는,  하나님이 '네 몸에서 난 소생으로 네 씨를 삼는다. 사라에게서 난 자로 씨를  삼는다.' 하는 하나님의 그 약속을 의심 없이 인정하는 그 인정으로 인하여  이삭을 담대히 제사로 드렸고 또 하나님이 요 위에 드리면 잘 해 줄 줄 알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믿지 아니하고  번제로 드리라 하니 안 드릴 수 없어 드리기는 드리지마는 '이제 이삭을 번제도  잡아 드리면 하나님께서 사라의 몸에서 난 그 자손으로 번성하게 하겠다는 이  말씀은 헛말이다. 안 이루어진다.'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으면 하나님은 이삭을  통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지를 못하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지를 못합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렸다' 말씀했습니다. 그거는  아브라함이 '이는 아무리 번제로 드려도 하나님이 약속했기 때문에 그 약속은  사람을 태워서 잿무더기 되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잿무더기 되는 그것은  얼마든지 하나님이 살려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자로 희생을 시킬 수 있지마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은 호리도 변하지 않는다' 하는 이것을 아브라함이 믿기  때문에 그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시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포해 놓으신 이 약속을 믿을 때에  전능입니다. 믿지 않으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윗이 목장할 때에 사자와 곰을 찢었다 했습니다. 그뭐 다윗이 그렇게 힘센  사람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아버지가 명해서  지키라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나에게 부모를 통해 지키라 했으니까 내가 이걸  지킬 때에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 일에 방해하는 맹수를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해서 그 능력으로  찢을 수 있다' 하는 것을 인정하고 찢었기 때문에 찢어졌지 다윗이 힘이 세서  찢은 것은 아닙니다.

 인정이라 하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님이 선포해 놓으신 것을  인정한다는 이것은 참 만능이 아니라 전능입니다. 이 인정은 인정을 하는지 안  하는지 어느 정도 인정을 하는지 인정의 그 분량이라는 것은 정확한데도 알기가  어렵습니다. 왜? 인정은 무형의 것입니다. 이 인정은 형체가 없습니다. 무슨  눈으로 볼 수 있다든지 귀로 들을 수 있다든지 오관으로 이렇게 인정 인식할 수  있는 그런 형체를 가진 것이 아니고 이런 무형의 역사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인정한다는 그 인정이 인정한다고 해도 참 층어리가 심히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 인정의 양을 가지고 당신이 일을 하시고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에게 그 거리와 관계가 너무 차이가 많아서 측량  못 할 그분의 지극히 큰 역사가 지극히 작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인정  가지고 이루어지고 인정하지 아니하는 데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행동을 해도 인정 없이 행동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인정을 하고 그 인정으로 인해서 행하게 되어지는 그것이라야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 하는 말씀 그대로인 것입니다.

 다니엘이 '딴데 기도하면 사자구덩이 잡아넣는다' 이런 전국에 국령이 내렸는데  다니엘은 그 소리를 듣고 기뻐하면서 감사하고 여전히 종전같이 기도했다.

다니엘이 기뻐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사자구덩이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법도 때문에 죽으니 기뻐했을까, 또는  하나님의 능력이 계시니 저희 마음대로 한다고 사자가 주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권을 가지셨으니 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인정에서 기뻐하고  오히려 그 하는 모든 행사를 그렇게 가소롭게 여기는 그 일을 했을까? 그는  분명히 인정하는 데에서 생겨진 것입니다. 인정하는 데서 생겨졌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그 능력을 계약을 인정하는 인정이 반이 되면  반은 기쁘고 반은 염려되고, 완전히 인정이 될 때는 기쁘고 인정이 하나도 안 될  때에는 그는 근심 걱정에 쌓이게 될 것입니다.

 인정이라는 이것은 형체가 없는 것이지마는 신구약 성경에 계약한 하나님의  약속 우리가 소망하는 것과 하나님이 어떠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신  그 목적이 어떠한 목적, 우리가 목적 안에서 지음 받은 것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하나님이 사람되어 대속하심, 성령과 진리와 공로가 우리를 보증하심, 모든  존재가 이를 위해서 이용되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 이 모든 것을 인정되는 데에서  우리 마음은 변해집니다.

 인정하는 데에서 우리 마음은 변해집니다. 인정하는 데에서 우리 생각도  변해집니다. 우리의 담력도 변해집니다. 우리의 배짱도 변해집니다. 우리의 포부도  변해집니다. 변해지니까 변해진 것만치 그 사람은 행동하게 되면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약하시고 신구약 성경에 당신이 어떠한  하나님이란 것을 나타내신, 계약에는 크게 말하면 다섯 가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존하신 지존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주권 역사  양성일위의 구속 셋 보증의 역사 이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신구약 성경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인정 많이 하고 적게 하고 인정을 하고 안 하는데에서 그  사람의 마음도 변해지고, 소망도 변해지고, 비판도 평가도 변해지고, 경영도  변해지고, 행동도 변해집니다. 거기에 따라서 행위는 생겨지는 것입니다.

 이런데 인정하나 안 하나 하는 이것이 참 인정으로 모든 것을 다 얻고 부인하는  것으로써 모든 것이 실패되는데 인정하는 이것이 뭐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무슨  다른 무슨 재료가 들어야 자본이 들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인정만 하면 되는데!  그 인정 한다는 것은 값을 내놔야 됩니다. 값은 자기와 모든 피조물을 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약과 서로 맞설 때에는 모든 것을 부인해서 자기보다, 모든  사람보다, 모든 피조물보다 하나님의 계약을 인정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모든 피조물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인정이라는 것이 자기와 자기에 관련된 모든 것을 다 내놔야  인정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정이 이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모릅니다.

인정만 되면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습니다.

 출애굽 할 때에 바로는 죽이려고 하고 있는데 모세가, 하나님께서, 네가 이렇게  이렇게 해라. 그러면 이 땅위에 무슨 재앙을 내리겠다.- 모세가 그렇게 했습니다.

하니까 그대로 됩니다. 그것이 모세가 하나님에게, 작지를 내민다, 재를 뿌린다,  하수 물을 친다 하는 그게 힘있는 것 아닙니다. 그것은 행함인데 그게 힘있는 것  아니오.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했기 때문에 거기에 능력이 역사했지 인정하지 않고  암만 쳐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이 홍해 바다에 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작지를 가지고 홍해 바다를  가리키라' 가리켜 봤자 인정 안 하고 가리켰으면 모세가 거기에서 죽는 그  시간까지, 급하니까 물은 안 갈라지지 죽을 지경이지 가리키고 있어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안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이대로 된다' 하는 것을 인정하는 그 인정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다 옵니다. 그럴 때 가리키지 않으면 그것도 거역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왔지마는 거기에서 중단당하고 있는데 가리키니까 완전히 통과돼  버렸습니다.

 그들이 마라에 왔을 때에 물이 써서 죽게 됐는데 하나님에게 부르짖으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이 나무 가지를 물에다 집어 던지라'  그 던지는 것 백번 천번 던져도 소용 없습니다. 그런 나무를 그 골짝에 있는 대로  다 꺾어다 던저봐도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이 던지라고 말씀하셨으니 던지면 하나님께서 이 물을 변질시켜 주신다는  이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과 그의 능럭과 그의 사랑을 인정하고 던지니까  수질이 변해졌습니다. 우리가 인정 안 하면 하나님은 일을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므리바에 반석을 친 것도 그러합니다. 이제까지 수천 년 동안 반석으로 있던 데  작지로 때린다고 무슨 물이 나오겠소? 작지로 때린 그것은 모세의 행함입니다.

육체로 순종함입니다. 하나님이 그 반석을 치면 저기에서 물을 내서 이스라엘의  갈증을 면해 주실 수 있는 것을 약속하고 그만한 능력이 계시니 그분의 약속의  신실과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는 인정을 가지고 인정과 함께 바위를 쳤을 때에,  인정이 행함과 함께 일할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능력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 7절에는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항상 수많은 이적을 보고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나 안 계시나? 하나님이 이 일을 해 주시나 안 해  주시나?' 하나님을 인정치 아니하는 그 시험하는 것으로써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다 시체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일을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이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행동인데 지극히 큰 능력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이 지극히 큰 구원의 약속은 우리가 그분과 그분의 약속을 인정하는  데에서 먼저 하나님이 와서 착수해서 인정 그것만 가지고 다 되는 것 많습니다.

대개는 우리가 인정만 함으로써 다 됩니다.

 그 중에는 인정하고 우리가 행동까지를 해야 되는 것들은 약간 있습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행동해 봤자 몇 가지 못 합니다. 인정을 함으로 당신이 해 주는 것은  천천이요 만만인데 그것을 우리가 인정하나 가지고 다 받습니다.

 그런고로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는 '네가 믿음에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너를  시험해서 확증을 해라'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공산주의 앞에서 공산주의지들이  죽이려고 찾아 돌아다니는 데에서 거기에서 물론 우리가 피할 때는 피해야  됩니다.

 피해 가지고 강단 밑에 숨어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시니 저희들이  어떻게 하겠느냐?' 해도 인정하는 것이 아주 중량이 다릅니다. 인정하는 것이 그  인정을 인해서 내가 변화되는 것이 인정되는 것만치 나는 평안한 사람으로,  담대한 사람으로, 안심되는 사람으로 변해집니다. 암만 말로는 인정합니다.

인정합니다. 해도 인정이 안 되면 내가 변화함이 없어.

 깊은 산골 무인지경에 가서 혼자 맹수들 있는 속에 가서 기도를 할 때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목적 안에 두셨고 나 위해서 만물을  지었는데 이 만물이 내 구원 위해서 있는 건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지키시는데 맹수가 나를 어떻게 하리요?' 아무리 말해도, 입으로는 말하는데  속으로는 믿어지지 아니하니까, 인정되지 않으니까 두려워 떨려서 사지가  오그라집니다. 그게 그때에 나는 하나님의 전능의 보호를 지극히 큰 능력의  보호를 인정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는 '내가 믿음에 안 있구나' 나를 시험해 가지고 '내가 믿음에 안  있구나.' 그래 가지고 네가 확정을 해라 네가 '나는 믿음이 없다. 나는 믿음이  약하다. 나는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데 대해서 인정하는 것이 백의 일도 인정  안한다 백분의 일도 인정 안 한다. 아무것이 보다는 아무것이가 인정을 더 한다.'  이렇게 인정되고 안 되는 것은 네 자신의 심신과 행동이 변해지고 안 변해지는  그것이 인정하고 안 하는 그 표시니까 시험을 해서 믿음에 있나 없나 조사해  보고 확정을 지워라. '나는 이 면에 대해서는 인정이 없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 위해서 만물을 창조하심에 대해서  말뿐이지 인정이 없다.'  이러면 자꾸 인정을 하도록 하려고 내가 기도하고 또, 또 내가 스스로 요런  일에서 참 인정하나 안 하나 모든 일에서 인정을 하려고 애를 쓰고, 인정이 되나  안 되나 하는 것을 시험해서 판정하려고 애를 쓰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인정을  길러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 인정이 없이는 하나님은 일하실 수 없습니다. '인정과 행함이 함께 일한다'  인정과 행함이 함께 일한다. 인정 없이 행하는 것은 저 혼자 하는 행동이요  하나님을 의심하면서 하나님을 꾀우는 것이오. 인정 안 하면서 제가 행동은  하니까 스스로 속는 것으로, 하나님을 인정은 안 하면서 그 행동 하니까 그  행동하면 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꾀우는 것이요 속이는 것이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뜻을 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행동은 먼저 인정이 있고 그 인정을 인해서 내 마음이  담대해지기도 하고, 그 인정을 통하여 평안해지기도 하고, 인정을 통하여  두려워지기도 하고, 인정을 인해서 내 욕망도 나오고, 인정을 인해서 '야,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 당신과 당신의 계약이 인정이 되되 그 인정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변해지고, 내 사람이 인정에 따라서 변해지고, 내 행동이 변해질 수 있는  그 양만치는 하나님이 다 책임을 졌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성화라 하는 것도 인정하는 데에서 다 성화됩니다. 인정하는  것이 없으면 암만 행동해도 껍데기 행동하니까 외부에 행동은 익숙해질지라도  속에 사람은 변화가 안 됩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인정에서만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무형의 인정이기 때문에 속기가 쉽습니다. 그런고로 참으로  네가 인정하나 안 하나, 어느 정도 인정하나? 인정의 분량이 얼마나 되나? 인정의  분량은 네가 변화된 분량 그것이다. 인정의 분량은 네 행동의 분량이다. 그런고로  인정이 없는 데에는 아무것도 하나님께서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금년에, 참 허무한 소리 같지마는 자존하신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됐어. 이 사실을 자꾸 인정하도록 노력합시다. 하나님의  유일한 소원이 소망이 당신의 기업이 우리 구원 이것뿐입니다. 교회뿐입니다.

교회가 당신의 기업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영광의 찬미되기까지 만들라고 우리  구원 위해서 모든 걸 예정하시고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  따라서 사람은 변해집니다. 인정하는 데 따라 자기의 깨달음과 결심과 소원과  자기의 포부와 자기라는 사람이 변화되어져 가는 그것이 신령한 젖을 먹음으로  성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어서 나를 대형, 대행, 대화친 일으키신, 이 사실을, 일국의 왕이  자기 힘을 다 기울여서 나를 위해서 한다 해도 놀랄 일인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십자가의 대속하신, 인정하고 인정하고 내  피와 살을 먹는 자 생각하고 연구해서 인정하고 인정하는 인정됨으로 '주님이 나  위해 대속 하셨으니 내가 어찌 죄 가운데 있겠느냐? 대속하셨으니 나는 의롭게  살 수 있다. 아버지와 나와 거리낀 걸 다 대속해 놨기 때문에 아버지와  화친으로써 아버지 앞에 힘입어 살 수가 있다.' 이러는 여기에서 행동이 나오는  그것이 나로 인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 인정이라는 이것이 우리에게는 할 일 중에 제일 큰 일입니다.

우리가 몸과 소유와 생명을 다 바쳐서 하나님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거는  뿌스러기입니다. 그거는 뿌스러기요. 만일 그걸 해도 인정하지 않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귀란 놈이 별별 잡것으로써 할 수 있소. 순국자가 얼마나 많이  납니까? 사상에 순사상자가 얼마나 많이 납니까? 그것 모양으로 우리가 다  죽어도 소용 없습니다 인정입니다.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일 수 있다' 당신을 아니까 당신을 인정하니 내가  변화되어서 인정된 행동을 하니 저절로 만물 위에 뛰어날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어짜든지 금년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약을 인정하는 것 의심하는  요걸 죽이고 인정하는 것, 마귀는 우리의 원수입니다. 우리의 적입니다. 마귀는  그놈이 우리에게 의심을 줍니다. 마귀 그놈이 우리를 꾀울 대로 꾀워 가지고 온갖  달콤한 걸로 꾀워 가지고 꾀우고 난 다음에는 꾀워서 삐뚤어진 것 하게 하게 해  놓고 난 다음에는 그놈이 들어서 위협합니다.

 우리는 마귀와 죄를 원수로 삼아서 '마귀가 시키는 것은 뭐이든지 안 하겠다.'  마귀 이놈을 원수로 삼는, 내가 낙망하는 것도 '낙망 이놈을 마귀가 주지. 마귀  이놈이 주는 건 나는 안 하겠다. 마귀가 주는 낙망은 나는 안 하겠다 마귀가 주는  의심 안 하겠다. 마귀가 주는 원망 불평 안 하겠다. 마귀가 주는 헛된 공포와  비겁에 쌓이지 않겠다. 마귀 이놈이 주는 세상 소욕과 취미를 가지지 않겠다 마귀  이놈이 주는 사욕을 가지지 않겠다.'  마귀 이놈은 좋은 것의 반대만 자꾸 주고 우리에게 일으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십니다. 그러면 그 좋은 것이 어데서 나오느냐?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약을 인정하는 데서 나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약을 인정하면 거기서 절로  나오게 됩니다.

 인정하는 것이 실로 인정이 되느냐 안 되느냐 껍데기로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그것은 인정되면 된 것만치 내 마음과, 내 생각과, 내 소원과, 내 인품과, 내  성질이 변해 집니다. 인정이 되면 변해집니다.

 아무리 제가 변한 것을 안 하려고 해도 인정이 되는 것만치 변해집니다. 돈이  노자가 떨어져서 지금 어짤꼬 하다가 누가 와서 노자를 넉넉히 호주머니에 넣어  줘서 노자가 호주머니에 든든히 충분히 있습니다. 있으면 '노자 있거나 없거나 뭐  다를 것 뭐 있는가?' 해도, 노자가 없을 때에 걱정되던 그 일이 노자가  호주머니에 들면 마음이 든든해지고 달라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정을 하되 내 마음과 생각과 소원과 행동이 변해지는  그걸 봐서 그 결과를 봐서 내가 인정하나 안 하나 그것으로써 뿌리인 인정을  우리가 평가합시다.

 이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약을 내가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 시험해 보고  인정하면 내가 변해질 터인데 변해지지 않는 것이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정하지 아니할 때에는 하나님은 아무것도 와서 할 수가 없습니다. 인정하는  데에서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서 역사하실 수가 있습니다.

 인정함으로 되는 것은 백의 구십구나 되고 인정하고 우리가 행함으로 되는 것은  백의 일이 됩니다. 극소수요.

 그러기에 신구약 성경에 계약된 계약과 하나님을 인정하되 그 인정하는 종자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인정의 양이 있어 인정의 양 그것이 우리의 기쁨의  양이요, 담력의 양이요, 소망의 양이요, 모든 실력의 양이 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축도>  긍휼을 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과 주의 약속을 인정하는 표증으로  심신의 성화를 받게 하시고, 성화된 표증으로 행함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정으로만 받아지는 이 성화를 금년에 전력을 기울여 성화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이 항상 저희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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