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과 믿음


선지자선교회 1983년  4월 3일 주후

 

본문 : 마 28:1-7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오전에도 부활에 대해서 증거를 했습니다. 오늘은 온 세계의 기독교가 다 부활  주일이라 이렇게 정하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일은 안식일이 주일로 바꾸어진 것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까지는  구약에 속한 시대로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후로는 과거 구약 시대에 모든 제도가 다 폐해졌습니다. 또 폐해지지  아니한 것은 그 방편들인데 폐해지지 아니한 것은 예수님의 사활로 바꾸어진 그  일과 또 종전에 지키던 그 방편을 겸하여서 지키도록 그렇게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날짜는 바뀌어졌고 또 안식일을 지키는 그 제도 중에는 폐해진 것도 있고  바꾸어진 것도 있고 그대로 또 지키는 것도 있습니다.

 첫째 안식일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에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창조된 것들을 복을  주어서 거룩케 하여 그것이 복되게 살도록 그렇게 축복하시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또 주일은 일차 창조가 아니고 이차 창조 곧 신령한 창조, 처음 창조는 다 변할  것들이며 온전치 못한 것들이지마는 두 번째 창조된 것은 영원히 변동치 않고  진동되지 아니할 모두 영원의 완전의 성격들을 가진 것입니다.

둘째 창조는 악령의 유혹으로 인하여 죄로 사망된 것을 그것을 죄에서 완전히  해방을 시키는 일과, 또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화평을 이루신 일과, 다시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이 생명으로 이루어 준 것이 둘째 창조 완전 창조입니다.

 이 창조는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삼십삼 년 사 개월 동안.

신인양성일위의 예수님으로 사신 그 모든 생애와 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일과  또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일로서 이 창조는 완성이 된 것입니다.

 둘째 신령한 창조 진동되지 아니할 창조 이 창조를 이루시고 이루워 놓으신 이  창조를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두번째 창조함을 받은 이 은혜를 입은 자들이 이  은혜로 영원히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축복하는 것이 주일날 축복입니다. 일차  창조의 것을 축복하신 날이 안식일이요 둘째 창조의 것을 축복하신 날이  주일날입니다.

 그런고로 주일날은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에 속한 모든  것들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졌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부활하신 후에는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은 다 부활할 수가 있습니다. 부활할 수 있는 모든 기초를  모든 자본을 다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다만 본인이 부활을 원해서 부활하면  부활됩니다.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실 때에는 우리의 몸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부활이고 지금은  우리의 몸이 죽기 전에 부활할 모든 요소들이 부활할 수 있는 시기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기인 것입니다. 지금 부활할 것이 부활하지 못하면 부활을 못  합니다.

 오전에도 '주일은 죽은 것들이 부활하는 날이라' 하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부활은  어떻게 할 수 있느냐? 믿음으로만 할 수 있다 하는 걸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요 몸으로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 순종으로 살아난다, 마음으로 순종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이 당신이  영감계시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육십육 권의 도리를 우리가 인정하고 확신을 할  때에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에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다 해도 '어찌 영생이 있을까?' 하면 그  사람은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요 확신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부활 영생하신다고  하시니까 틀림없이 부활 영생한다' 하는 것을 확실히 믿으면 그 사람은 그 성구에  대해서는 마음으로는 믿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마음으로 믿으니까 그 몸으로 부활을  바라보면서 부활을 위해서 행동하면 이제는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인데 믿음으로  부활한다 그말은 하나님에게 순종으로 부활한다는 말이오, 순종을 어떻게 하느냐?  순종하는 구체적 방편은 성경에 기록돼 있기 때문에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순종하면 된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됩니다.

 그러면 순종 가지고 부활하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에게 두 가지 순종만 하면 부활을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을 가지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택한 자로서 예수님이 이 공로를 그에게 입혀  준 사람만 이 부활이 가능하지 이 공로를 입히지 아니한 사람은 믿음을 가질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가진다 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이렇게 이차 창조를 베푸셨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서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지성 지공,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공평된 전지자의 지혜로 입법해 놓고 전능의 능력으로 처리하시는 이 심판이  하나님의 공심판입니다. 사람들은 다 이 공심판에서 정죄받아 영원히 멸망받는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불택자들은 이 공심판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이  공심판에 관편된 모든 것을 다 대신 담당해서 해결을 지워 주셨는고로 택한 자들은  본인이 잘 믿든지 못 믿든지, 알든지 모르든지 그에게 공심판은 벌써 벗어나서  하늘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가 부인해도 택한 자는 됩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서 큰 중 하나를 장례를 했습니다. 그 중은 평양에 제일 갑부  최덕부라고 하는 사람의 장자입니다. 지금부터 한 육십 년 전 그때는 평양에 제일  갑부였습니다. 그분의 장자인데 그분이 이 불교의 유혹을 받고 '아무래도 내가  인생살이를 이래 살아서는 안 되겠다' 하고 가족을 다 미안하다고 이별을 하고  재산들도 주고 자기는 절로 들어가 가지고 중노릇을 했는데 중 중에도 참선하는  참선중입니다. 참선중이라면 그는 명상중이라고 하는 제일 고급중입니다.

 그랬는데 그분이, 저도 두 번 만나서 도를 전할 때에 불교에 대한 것을 유식하니까  오만 것을 다 말했으나 마지막에는 자기의 할 말이 없으니까 그저 웃으면서 '그만  합시다' 하고 끝을 냈습니다.

 그 뒤에 말 들으니까 그가 자기 생질집에 와 가지고 말하기를 '내가 길을 잘못  들었어.' '그러면 지금이라도 개종하면 되지 않습니까?' '내가 개종을 못 하도록 돼  가지고 있어. 내 밑에 따르는 사람들이 많고 벌써 이렇게 터전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 하나가 개종되면 크게 변동이 있기 때문에 개종을 못 하게 돼 가지고  있어.' 그러면서 길 잘못 든 것을 후회를 하더라고.

 이러다가 마지막 죽기 전 셋 주일인가 이 서부교회에 나오고, 마지막에는 '내가  이제는 이것 저것 다 보지 않고 이제는 개종을 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확실히  작정을 했다. 지금부터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 내가 만일 죽더란대도 아무데도  기별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고 그분이 예수님 믿기로 작정을 하고 마음에 기뻐도  하고, 감사도 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하고 개종하고 죽어서 김해 우리 묘지에  갖다 묻었습니다.

 그런데 그 통지를 안 했는데도 중들이 많이 와서, 뭐 거석할까 해서 그래 얼른  그만 초상을 쳤는데 지금 문제가 뭐이냐? 아마 중들이 그 중 죽은 데에 불교에서  말하는 사리, 그 사리를 캐내려고 언제 그 무덤을 파 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  무덤을 잘못하면 잊어버리기 쉬울 것이다 그런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택한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둘째 창조하신 이 창조의 혜택을 입어서 창조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또 제가 어떤 사람을 봤는데 그는 믿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늘  반대했습니다. 제가 마지막 위급하다고 해서 가니까 얼굴이 똑 숯덩이 모양으로 돼  가지고 있으면서 내가 가니까 누워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서 나한테 주먹을  거머쥐고 달려들어서 치려고 달려듭니다. 그래 내가 있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이  사람이 주님의 택한 자면 주의 백성이요 너는 상관이 없다.' 이러니까 뒤로 꽝  넘어가더니마는, 그때사 말합니다. '나 예수 믿겠다.' '그러면 회개를 해야지.'  이러니까, 눈물을 좔좔 흘리면서, 그분은 말을 잘한 그런 대웅변가입니다. '말을  잘하니까 말로 지은 죄가 많은데 말로 지은 죄를 회개를 해야지.' 내가 그러니까  혀를 깨무는데 혀 끄트머리가 새카맣게 그만 끊어질 지경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회개로 가는 것 아니고 주님의 공로로 가는 것인데 믿는 증거룰 가지고 회개를 하는  것이니까 그러면 기도하자.' 하고 기도 한 이 분 가량 기도하고 나니까 그 광채나는  얼굴 가지고 세상을 떴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 죽음을 통해서 그 가족들이 다  회개하고 예수님 믿게 됐고 그 손자는 목사가 됐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차 창조로 창조했다는 그 창조는 첫째가 하나님의 지공 지성의  법으로 심판하는 하나님의 공심판을 다 면제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에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둘째로는 악령에게 사로잡혀서 악령이 왕이 되고 악령의 그 왕국에 속한 자가 된  이 악령에게서 해방시키시는 이 일을 둘째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이 올 때에 말씀하시기를 '세상 임금이 오겠으나 내게는 상관이 없다.

그가 나한테 온갖 십자가의 곤욕과 애매한 정죄를 하지마는 그가 그와 같이 함을  인해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을 그에게  나타낼 것 외에 딴것이 없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불택자들은 악령이 그의 왕이 되어서 왕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택자들은 그 왕권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왕권을 가졌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통치하고 지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택자들은 사탄의 그 왕권에서 해방을  시키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택자들은 악령이, 사탄이 왕노릇은 못 하고 늘 미혹을  주고 침노는 하지마는 절대성인 능력인 왕권은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불택자들은 죄가 왕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죄가 왕노릇하는  죄가 절대성의 권위를 가지고 그 죄가 시키는 대로 하지 죄를 배반하고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 불택자들입니다. 그러나 택자 들은 죄의 왕권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본인만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좌를 대항하면 죄는 물러가야 합니다. 사탄을  대항하면 사탄은 물러가야 합니다.

 또 하나는 모든 불택자들은 사망이 그에게 왕노릇한다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사망의 왕권 아래에 있어 사망을 면코자 해도 사망을 면하지 못합니다. 사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망이 그에게 왕이기 때문에 영원히 영원히 사망에게 속해서  사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한 사망에서 사망에서 계속 존속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자들은 예수님께서 둘째 창조인 대속으로 이룬 이 사망에서 해방을 시켜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망이 우리에게는 왕노릇 하지 못한다고 로마서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사망이 왕노릇 할 수 없다는 말은 사망을 우리가 벗으려면  벗을 수 있습니다. 사망하지 않으려면 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기반을 닦아서 이차 창조의 혜택을 입혀 영은 이 혜택을  인어서 살아났지마는 마음과 몸은, 생활은, 모든 소유는, 영광은 이런 것들은  살아나지 안하고 죄 아래에 그대로 있다고 로마서 8장에 말씀했습니다.

그대로 있는 것인데 이제 자기가 현실이라는 그 현실 생활 생활에서 하나 하나가  거게서 그의 행동으로 벗어나야 거게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벗어나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안하고 벗어나지 않으면 살려놨지마는 소용없이 이제 그 심신의  기능이나 사업이나 영광이나 명예냐 그런 것은 다 죽도록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둘째 창조의 대속의 은혜인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났고, 사탄을  벗어났고, 죄를 벗어났고, 사망을 벗어난 해방을 시켜 주셨는데 이제 해방된 자로  살면 됩니다. 해방시켜 줬는데 해방된 자가 다시 죄에 얽매이고 져서 죽은 노릇을  다시 하면 사함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짐짓 알고 다시 자기를 더럽히면' 히브리서 6장에 '사하는 권세가 없다'  이랬습니다. '다시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 이랬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참 부활 주일을 전국이 곳곳에 모여 가지고 부활을 기념하는 이  기념이 대단히 좋습니다. 이 부활이라는 부활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나타내는 것 좋은데 우리가 부활이라는 그런 이름만 듣고 부활 주일이라고 춤만  추고 기뻐하고 잔치나 하고 즐거워하는 그것으로써 끝내 가지고는 예수님을  근심되게만 하지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실제로 부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일만 아니고 주일은 부활시키는 날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주일은 부활시키는 일이라.

 그러면 부활을 시키시는데 부활은 어떻게 받을 수가 있느냐? 내가 믿음만 가지면  부활을 받을 수가 있다. 믿음은 두 가지 순종인데 하나님에게 순종만 하면 부활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부활을 주실 때에 내 마음을 부활시키든지, 내 성질을  부활시키든지, 내 기쁨을 부활시키든지, 내 지위나 권세를 부활시키든지, 내 영광을  부활시키든지, 부부의 사랑을 부활을 시키든지, 모두가 다 죽은 것인데. 취미를  부활시키든지,   무엇이든지 우리는 죽은 것만 가뜩 가지고 있습니다. 죽은 이것이 좋은 것입니다.

만일 그 생명이 떠나버리면 죽은 것도 끝나버립니다. 생명이 떠나기 전에는 이 죽은  것이 보배로운 것이 죽은 것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에 죽은 것이 그것이  산 것이나 거의 같습니다.

 왜? 살리면 돼요. 살리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부활이라 하는 것은 인간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계약이기 때문에  믿어지지를 안해서 잘 믿지를 안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부활에  대해서 '부활이 있다 하니까 있는가?' 또 예수님 재림 때는 부활한다 하는 그것은  멀리 있으니까 부활을 믿지마는 당장 이 시간에 부활한다는 이 부활을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주일날은 부활하는 날인데 주일날 부활해 가지고 엿새 동안에 부활한 것이  자랍니다. 엿새 동안에 자랍니다. 보면 고린도전서 l5장 42절로 44절에 보면 거게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고, 또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고, 혈육의 것으로  심고 신령한 것으로 다시 살고' 다시 산다는, 말이 거게 많이 기록돼 있습니다. 다시  사는 것. 다시 살아야 됩니다. 다시 살아나야 됩니다.

 그래 거게 '다시 살아난다' 그말은 죽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속성에, 자기 사상에, 자기 지식에, 자기 생애에, 자기 취미에, 자기의  인격에, 자기의 행위에 죽은 것이 다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게 살아나기  전에는 심고 살아난다 그 말이 있습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 심고 살아난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  심는다는 말은 그 안에 여러 가지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 위해서 그 말씀을 주님께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심으는 것은 일단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아야 심어집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지 않으면 심어지지 않습니다. 팥을 가지고 있어도 팥을 땅 위에 던져야  내놔야 심어지고, 콩을 가지고 있어도 던져야 심어지고, 무엇이든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놔야 심어집니다. 그러면 요 심어진다는 요것이 '없어지고 다시  살아난다' 하는 말 한 가지입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 요  말이 약한 것으로 없어지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 그 말씀과 같은 말씀이오. 또  '욕된 것으로 심고 욕된 것이 없어지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산다'  그러면 없어진다고 했으면 쉬울 건데 왜 심는다고 했는가? 없어지면 없어지는  것으로 없어지지마는 심으는 것은 작은 것을 심어서 큰 것을 얻고 더, 적은 것을  심어서 많은 것을 얻는, 심으기 전보다 심은 후에 좋아지는 그 소망을 가지고  없애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소망을 가지고 없어지게 하는 것, 소망을 가지고  없애는 것.

 그것이 뭐이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죽은 것이 믿음으로 다시 살아나려고  하면 가지고 있는 그것은 죄악의 법대로 되어 있고, 마귀 법대로 되어 있고, 세상에  속한 것으로 되어 있는, 모두 죄 아래 있어서 죽은 것들인데 이것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면 죄악의 것으로 되어 있는 이것이 죄악의 것으로 되어 있는 그  방편이나 그 법규를 버리고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서 옮길 때에,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서 변동할 때에, 변개할 때에, 회개할 때에 그때는 과거에 죄악의 법도대로 되어  있는 그것이 죄악의 법도를 버리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고치려고 하니까 죄악의 법이  들어서 고치지 못하게 붙들고 너 가면 나 죽는다고 야단을 지깁니다.

 그러나 죄악의 법에, 죄악의 세계에 소속한 것이 거게서 죽는 것과 같이 거게서  죽어, 거게서 없어져, 거게서 완전히 자기는 죽을 각오하고 내어놓고 깨어질  각오하고 거게서, 거게서 서서 있던 것이 깨어지고, 거기서 존영해 있던 것이  깨어지고 일단 그 죽음의 세계에서 박살이 나짐으로써, 뭣 때문에 박살이 나지느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기 위해서 진리와 하나님 때문에 박살이 나지는 그 박살을  통해서 박살되고 나면 그 다음에 살아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썩을 것으로 심고' 썩을 것이 심겨지는 순서를 통해 가지고 다시  살아난다, 영원히 살아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먼저 죽고 그 다음에 살아나는 것인데 하나님의 진리로 인하여 과거  제도와 법칙과 소속과 관련과 모든 그 본질 본성을 완전히 하나님의 법칙으로  바꾸려고 하니까 그 과거에 있는 그 법칙에서는 죽은 것이 되어지니까 그  세계에서는 놓지 아니할라고 가지 못하게 오만 것 다 있지마는 그때는 거게서  죽어야 살아나는 것이니까 여게서 박살이 될 요량하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게서 죽음을 취하지 못하고, 죽음을 취하지 못하면 그 다음에  부활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들이 무엇이든지 자기가 권세 하나를 가져도 마귀와 죄가 주는  그 권세를 가졌다가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그 권세를 가지려고 하면 마귀가 주는 그  죄악의 권세를 그 법칙에서 하나님의 법칙으로 내 생애 법칙을 바꾸어 소속을 바꿔,  모든 사상을 바꿔, 목적을 바꿔, 방편을 바꿔, 정신을 바꿔, 이러면 그만 거게서는  절단이 나 버립니다. 거게서 절난이 남을 통해서 하나님 편에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부활은 좋아하지마는 부활 전에 죽음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워서 이 부활을 취하지 못하고 일생 동안 신음하다가 멸망하는 것을 가리켜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일생 동안 종노릇  하는 데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내가 왔다' 그렇게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이 아주 가정에 재미있게 잘 삽니다. 사는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은 몰랐고 세상 법칙에 맞추어서 제도에 맞추어서 다 이렇게 살았는데  성경을 보니까 거반이 다 성경에 위반이오. 다 버려야 되고 고쳐야 되고 다 폐해야  될 일들입니다.

 이러니까 그 가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변개를 시키고, 회개를 시키고, 개조를  시키고, 모든 제도나 소속이나 마귀에게 속한 것을 하나님께로 옮겨 붙이고 이래  할라고 하니까 일단 가정에 큰 파탄이 일어납니다. '내가 온 것은 세상에서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불목을 주러 왔다,' 이 불목을 통해서 새로 영생하는 화평으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와같이, 자기 가정이 그와같이 모든 죄악으로 된 그것이 다시 바꾸어져 가려고  하면 먼저 죄악에 속한 그 제도와 소속과 법칙과 모든 인연과 관련 그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려 하면 위반되기 때문에 일단 내어놔야 되고 일단 깨져야  되니까 그 깨지기 싫어서, 그 죽기 싫어서 깨지기 싫어서 사람들이 거게 매여  있다가 일생을 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도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서 그 모든 것이 깨어지고, 다 부서지고, 다 떨어지고, 없어지고 이래도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완전히 회개해서 개조를 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이제  다시 그 직업이 살아나고, 지위가 살아나고, 모든 것이 다 살아납니다. 사상도  살아나고, 제도도 살아나고, 영광도 살아나고, 소유도 살아나고, 업도 살아나고 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일날 이래도 내가 무슨 지식 하나도 나는 요렇게  알았는데 성경에서 '이렇다' 하면 요렇게 안 그것을 버려서 죽여야 '이렇다' 한 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주일날 당할 때에 자기는 지금  어떠한 성품을 가지고 어떠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말씀에 그 욕망은 하나님  말씀에 위반되니까 그 욕망을 버리라 하니까 그 욕망을 버리라 하면 그 욕망은  깨어집니다. 그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의 새로운 욕망을 가지게 될 때에 그  버리는 것이 심으는 것이요 죽는 것이요 하나님 말씀의 욕망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것을 주어서 살아나게 하는 것이 그것이 부활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도 보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다' 하는  거듭난다 말은 다시 살아난다 그말입니다. 난다 말은 살 생(生)자를 날 생(生)자로  보아서 그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시 살아나지 아니한 것은 하늘나라를  보지도 못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5장 25절에도 보면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나님의 아들을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지금도 그때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옴으로써 인격도  살릴 수 있고, 사상도 살릴 수 있고, 정신도 살릴 수 있고, 성품도 살릴 수 있고,  그의 모든 기능도 살릴 수 있고, 취미도 살 릴 수 있는 그것은 죽은 것이 죽어야  살아납니다.

 죽은 것은 죽은 것이 어떻게 죽은 것이 어떻게 죽은 것이냐? 죽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 때에 죽은 것은 내게서는 깨어지고 완전히 멸해져 버리고 하나님 말씀  들을 때에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주일날은, 나는 부활하는 날이니까 자기가 기도하고 양심을  가지면 주일날 다시 살아나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살아나는 것이.

 자기가 주일날 살아난 그것이 자라기는 어떻게 자라느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 능력은 주님이 주셔 가지고 주 안에 있는 영감의  일이나, 진리의 일이나, 구속받은 사죄 칭의 화친의 일이나 이것은 주님에게 능력을  받아 가지기만 살 수 있는데 주님에게 능력 받는 것이 어떻게 능력을 받을 수  있느냐? '믿음으로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을 받는다' 에베소서 l장에 말씀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을 받는다'  믿음은 뭐이냐? 하나님에게 순종으로 받는다는 말인데 하나님에게 순종으로 받는  것은 어떻게 순종하느냐? 순종하는 구체적인 그 방편에 있어서는 신구약 성경이  말씀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면 능력 받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순종으로 죽은 것이 살아나고, 살아난 것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순종으로 능력을 얻어서 점점 자라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순종으로 살아나고 순종으로 자라갑니다.

 주일은 죽은 것이 살아나는 것이 주일인데 어떻게 살아나느냐?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을 보고 그 말씀대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 그 말씀대로 행함으로  살아나는 게 아니고 그 말씀대로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 살아납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살아납니다.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이렇게 연결이 됨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하나님에게 순종으로 살아나는 그 은혜를 입어서 죽은 것이  순종으로 살아나면 죽은 것이 순종으로 살아나려고 할 때에는 큰 파탄이 옵니다.

그걸 가리켜 십자가의 고난이라 그렇게 말씀을 합니다.

 이러니까 모든 죽은 것이 살아나려고 할 때에는 죽은 것이 살아나는 데까지 이르는  그 과정에는, 그 사이에는 고난이라는 그 십자가의 고 난이라는 고난이 있기 때문에  그 고난을 당하지 않으려고 하면 죽은 그대로 있다가 영원히 멸망받고 맙니다.

고난을 각오하고 죽음에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순종으로 살아나게 되면 이제는  그것이 부활했습니다. 부활했으면 부활한 그것이 또 한 말씀을 순종함으로 그  말씀에게서 능력을 받아 가지고 또 자라고, 한 말씀을 순종함으로 능력을 받아  가지고 자랍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영감 도리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는 부활입니다. 부활.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는 부활이오.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능력입니다. 부활이요 능력이오. 그러기에 믿는 사람이 이  부활이며 능력인 이 부활을 받지 않고 능력을 받지 아니하면 살아나지도 못하고  자라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은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때에 그게 부활될 때도 있고 능력될 때도 있고  부활과 능력 둘이 될 때도 있는데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 그것은 말씀 자체가  살려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 말씀을 통해서 살리시고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믿는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실 때에 그 말씀이 임하여서 '봐라, 너는 이렇게  배야 될 터인데 이렇게 돼 가지고 있으니까 이것은 하나님에게 거슬려서 죽어 있다.

하나님에게 거슬려서 죽어 있으니 네가 지금 하나님과 일치가 되어지고 하나님과  화친을 해서 살아나라.' 자기가 진리를 들으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이 말은 죽은  말이로구나. 이 말을 살려야 되겠다. 이 정신은 죽은 정신이로구나. 이 정신을  살려야 되겠다. 이 성품은 죽은 성품이로구나. 이 성품을 살려야 되겠다. 내가 지금  이 소원을 가지고 있는 이 소원은 죽은 소원이로구나. 이 소원을 살려야 되겠다.'  말씀을 들을 때에 죽은 것도 알 수 있고 어떻게 살아날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럴  때에 버리지 아니하고 자기가 부활을 원해서, 부활을 원하면 믿음을 이하면 부활이  될 것이기 때문에, 믿음은 두 가지 믿음인데 이 자리에서는 한 가지 마음의 믿음을  취하고 그 다음에 자기가 실질적으로서 이제 몸으로 믿는 믿음으로 마지막 완료를  합니다.

 이 믿음을 취하면 마음으로 믿을 때에 내증이 생겨집니다. 내증. 내적 증거라  말입니다. 내적 증거 내증이 생겨지고, 몸으로 순종할 때에 외적 증거가 생겨집니다.

내적 증거가 중요하고 외적 증거가 그 다음이지마는 사람들이 완패해서 어둡기  때문에 내적 증거는 무시합니다. 외적 증거만 압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몸으로 행동할 때에 다니엘이 사자구덩이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까 그것은 외적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압니다.

그러나 그 안에 내적 증거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순종인데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오. 말씀에게  순종하면 법을 지키는 사람이요 법 아래 있는 사람이고 그 말씀대로 하나님에게 순  종하면 생명이 됩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에게 그 말씀대로 순종을 했을 때에 다른 사람은 그 이튿날 아침에  알았지마는 다니엘에게는 벌써 순종을 하기로 작정은 하고 다리오 왕이 해가  지도록까지 '네가 한 달 동안만 하나님께 기도하지 말아라' 그 신강이 있을 때에  '아닙니다. 나는 기도하는 것을 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네가 죽어도 좋으냐?  '죽어도 살아도 그것은 하나님께 맡겨놓고 내가 기도하는 걸 폐하지 못합니다.' 할  때에 마음으로 순종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속에 내적 증거가 있었을 것입니다.

내적으로 벌써 자기에게 그로 인해서 살아난 것을 자기가 봤을 것입니다. 던져서  사자구덩이에 던졌을 때에 사람 보기에는 죽었지마는 사자 구덩이 안에 들어가 있는  저에게는 하나님이 자기를 다시 살려서 자기에게 정신이나 사상이나 인격이나  신조나 교리나 신앙의 모든 인격 요소, 모든 하나님의 속성 요소가 자기에게 그  순서를 통해서 왁짝 살아나고, 강하게 살아나고, 크게 되어진 것을 자기가 봤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옥중에서 그가 깊은 착고 옥중에 들어 있으면서 밤중 될 때에  기뻐 못 견뎌서 찬송을 외쳤던 것은 그는 하나님 말씀 순종으로 인해서 속에 내부가  살아나서,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내부가 살아나서, 정신이 살아나, 믿음이 살아나,  소망이 살아나, 하나님이 자기 속에 역사하시는 그 역사가 새로와지고 강해지고  하는 그 내적 증거로 인해서 그가 기뻐서 외쳐서 찬송을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 기독교는 실지의 도입니다. 말씀을 듣고 아무리 명철해도 그저 그대로  그렇다고 천번 만번 외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없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인정해야  됩니다.

 마음으로 인정을 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알뜰히 살피든지 내가 마음으로  인정을 하면 '뭐 인정 하나 안 하나 인정하는 그리 냅둬라. 인정하지.' 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인정이 됐으면 된 증거를 보여 주고 인정이 안  됐으면 인정 안 된 것을 보여 줍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시험입니다.

 자기가 현실을 당할 때에 '내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인정을 하나 안 하나,  믿나 안 믿나, 인정 하나 안 하나, 부정을 할까 인정을 할까?' 이렇게 자기에게  신강을 하고 있는 것을 본인이 알게 됩니다. '내 속에 두 세력이 있어서 하나는  인정을 하려하고 하나는 인정을 안 하려 하고 내 속에서 두 세력이 싸우는 것을  내가 본다' 하는 것을 바울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가 거게서 부정하는 것을 버리고 인정으로 통과를 해 버리면,  인정으로 그 사실에서 현실에서 인정으로 통과해 버리면 자기 속에 부활한 것을  자기가 봅니다. 그 심령이 부활한 것을 볼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러면 그 뒤에 하나님께서 또 '네가 마음으로 인정했으니까 몸으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외부까지 살아나야 된다' 하고 그 몸으로 실행할 수 있는 그 현실을  또 만들어 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분 일초도 쉬지 안하고 계속해서  노력하십니다.

 그 현실을 만들어 주실 때에 그때에 '내가 과거에 인정하나 부정하나 신강샜던  요것을 여게서 내가 인정했으니까 인정한 요대로 내가 실행을 해야 될 요 현실이  왔구나.' 하고 현실 생활에서 믿음을 지키려고 하면 자기에게 애로와 고통이  있습니다. 애로와 고통이 있습니다. 힘이 듭니다.

 애로와 고통이 있을 때에 힘이 들 때에, 그때에 힘이 들 때에 그 힘이, 힘드는 그게  뭐이냐? 힘드는 그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는 때입니다. 부활한 것이 힘을 주시는  때요. 힘을 주시는 때니까 그때에 힘이 들 때에 그때에 그것이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힘인데 내가 그때에 힘이 들어도 그 힘드는 것을 버리지 않고 힘드는  것을 내가 행합니다. 힘드는 걸 행할 때에 그때에 나에게는 과거에 없던 새로운  능력이 우리에게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현실 현실에 하나님께서 요 현실에는 요 말씀 주시고 조 현실에는  조 말씀 주시는 현실 현실에 말씀 주시는 그 말씀이 하나님이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능력뭉텅이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죽은 것을 살리려고 하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때에 부활도 받고 능력을 받아서 자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이 부활과 성장을 인하여 믿음으로 받으려고 할 때에 애로가  있는 그 애로를 사람들이 싫어하고 없기를 원하지마는 애로가 없으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애로가 있는 것은 새것이 우리에게 오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에 그 애로가 있는 그것을 힘을 써서 내가 믿음을 지키면  부활도 하고 또 부활한 것이 자라기도 하고 이렇게 되어집니다.

 자기가 실질적으로 해 봐야 됩니다. 실질로 하면, 마음으로 하고 몸으로 하고 둘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마음으로 하면 자기 속에 다른 사람이야 뭐라 하든지 내적  증거가 있습니다. 자기 받은 증거가 있어. 살아난 증거가 있습니다. 속으로 살아난  증거, '요게 살아났다. 과거에 나는 요 성격이 죽었었는데 요 성격이 살아났다. 요  사상이 죽었는데 요 사상이 살아났다. 요 소망이 죽었었는데 요 소망이 살아 났다.

요 마음이 죽었었는데 요 마음이 살아났다. 요 진실이 죽었는데 요 진실이 살아났다.

요 거룩이 죽었었는데 요 거룩이 살아났다. 과거에는 요 사랑이 죽었었는데 요  사랑이 살아났다. 과거에는 요 인내가 죽었었는데 요 인내가 살아났다.' 살아난 것을  자기가 알 것이오.

 몸으로 행할 때에는 다른 사람이 환하게 보게, 자타가 환하게 보게 살아난 것도  과거에 그 사람에게 없던 새 힘을 얻어서 강성하게 장성하게 된 그것도 다른 사람도  볼 수 있고 자기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  요 말씀을 마음으로 몸으로 믿는 것, 따르는 것, 요 두 가지 합해서 믿음인데 요  믿음이 없이는 기독교는 아무것도 없어. 진공입니다. 요것이 없으면 안 되고 요것을  실지로 행해 보면 먼저 제가 알고, 받은 증거 있어 알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까지  환하게 보이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못나도 우리에게 현실 현실 변동되는 것은 모든 죽은  요소를 살려 주시기 위해서 부활로 왔고 부활이 왔고 능력이 왔었기 때문에 부활할  것 부활하고, 부활된 것 성장하고 부활 성장 부활 성장으로 이렇게 자라가기 때문에  영원한 것으로 하나님이 줘서 이렇게 둘째 창조의 것으로 되어지기 때문에 어데까지  천해져도 어데까지 올라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한없는 희망을 가진 것이지마는 사람들이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 일이 중단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말씀을 인정하는 것 그대로 실행하는 것 요것이 참 좋은 것입니다. 여게서 힘도  나오고, 여게서 기쁨도 여기 나오고. 여게서 담대도 나오고, 여게서 평강도 나오고  온갖 좋은 것이 다 여게서 나옵니다. 왜? 부활함으로, 부활함으로, 부활한 자가 보는  것은 부활하기 전에는 못 봅니다. 그만치 자라야 만날 자가 자라기 전에는 못  만납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실행 없는 사람이 불쌍하고 실행 있는 사람은 참  지혜있고 알속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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