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주님께 맡길 것-진리와 영감


선지자선교회 1983년 7월 4일 월새

 

본문 :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제가 처음에 예수 믿고 나서 이 절수를 제가 표어로 삼았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그 말씀은 영감과 진리 안에 있는 것을 말 합니다. 영감 안에 못  있을지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내 주신 신구약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대한  진리입니다.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진리가 우리를  주장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가 우리 언행심사의 행동이 주님 안에 있고 또  진리가 우리를 주장하게 되면 하는 말입니다.

 우리 욕심이 우리를 주장하지도 안하고, 또 어떤 그 사건이 주장하지도 안하고,  어떤 또 뭐 물질이나 그 다른 사람이나 그런 것이 우리를 주장하지 얀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하는 말입니다.

 나도 다른 사람도 사물도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고, 그저 영감에 나아가지  못할지라도 이미 선포해 주신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말씀이 우리를 주장하게  되면 하는 말입니다.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무엇이든지 네 소원하는 것은 어떤  소원이든지 다 내게 간구해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언행심사가 주님의 이 법도 안에 있고 또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우리 안에서 주장을 하면 '원하는대로 구하라 다 이루리라' 하는 그 말씀은  우리가 소윈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시니까 좋다는 것보다도 하나님은 불의를 할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전부 주님이  이루어 주시지 아니할 수 없는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그 소원에 일치가 되는 그런  소원을 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이 법칙, 이 법칙대로 언행심사를 행 한다는 것이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고, 우리의 언행심사가 하나님의 법칙대로  행한다고 해서 흠이 없는 것 아닙니다. 참 우리가 행한다고 해서, 바울이  말하기를 마음에 자책할 것이 없다 이래도 실은 또 그 이튿날 또 깨달아 보면  어제 자책할 것이 없이 행한 그것은 하루 지나고 나서 깨달아 보면 그것 참  우스울 일이고 허무한 일입니다. '이번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언행심사가 요거야  된 거다' 싶은 그것도 또 한 걸음 더 깨달아지면 또 허무하다 그거요.

 이러니까 그것은 우리가 누구든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그 정도의  것을 말합니다. 할 수 있는 정도. 자기로서 언행심사를 주님의 법도대로 하는,  '주님의 그 규범 안에서 그 법도대로 하는 그 생활을 하고' 하는, 주님의  말씀대로 하려고 애를 쓰고,  또 '내 말이 네 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감의 도리 영감의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주장하게 되면, 바로 네 소원이 내 소원 내 소원이 네  소원, 네 소욕과 내 소욕, 네 소원과 내 소원, 네 주장과 내 주장 내 주장과 네  주장이 하나될 수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 될 수 있다.

 하나가 안 된 것은 우리가 구해도 안 됩니다. 이러니까 주님의 뜻에 맞은  거라야 이루어지지 주님은 온전하신 분인데 당신의 온전에 배치되는 것을 이루어  주는 것은 우리를 범죄케 하는 것이요 하나님도 범죄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치되는 것은 이루어 주시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주님 안에 거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힘쓰면 가능합니다. 또 돈이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고  인간이나 내게 당면한 그 모든 사물이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관하게 그렇게 할라는 이것은 그게 한다고 해서 영감이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게 잘돼서 이상적으로 성공이 되면 영감이 되고 그저  안 되면 영감을 찾아가는 게 된다 그거요, 찾아가는 게 돼요.

 그러니까 그래도 그리 되면 우리의 소원하는 것이 주님의 뜻에 꽉 명중되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저 비슷하게 가까와지면 주님이 우리의 구하는 것을 비슷하게  이루어 주시고,주님의 뜻에 딱 들어맞으면 딱 들어맞게 이루어 주시고, 일치되는  것만치 우리에게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려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어제도 말씀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홀로 계시면서 당신이 무슨 일 하신  그것이 움직여서 역사할 때에 그 역사가 영감입니다. 하나님은 영감으로 일하지  하나님이 무슨 이래 무슨 만물을 움직이고 어째 하는 그것은 벌써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영감이 나와 가지고 진리가 돼 가지고 그 진리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원 전 목적을 정하실 때도 그때 목적을 뭘로  정했느냐? 영감으로 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하심이 영감 외에는 역사를 못  하십니다. 그분이 완전자시기 때문에 영감 외에는 당신에게서 나올 수 없고 또  깨끗하고 온전함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는 영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가 나올 때에, 하나님 역사가 나올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영감이라 그렇게 하고, 또 영감이 나와 가지고서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에게 접할 때에 피조물을 상대할 때에 진리라 이렇게 표시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이 나와 진리 돼 진리가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  운행하시고 보존하시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그 영감이 지극히 큰 능력이요 또 그 진리가 지극히 큰 능력인데  하나님의 능력이 영감으로 나타났고 영감이 진리에게 그 능력을 주어 진리가  능력을 받아, 그러면 영감도 전능한 능력을 가졌고 또 진리도 전능한 능력을  가졌는데 그 능력은 다 한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한 능력인데, 하나님에게서 영감이 나와 영감이 무한한 능력을  가졌지마는 영감이 나오고 난 다음에는 영감, 나온 영감 단독이 전능한 능력과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고,  또 영감이 모든 피조물을 상대할 때에 그때에 가리켜서 진리라 이랬는데 그  진리도 거게서 나온 능력이지마는 나오고 난 다음에는 그 진리도 계속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그 능력이 아니라도 독자적인 그런 권위를 가졌습니다.

 비유컨대 이 마이크 줄을 내가 가지고 이래 흔듭니다. 이래 흔들다가 내가  흔드는 일을 딱 중단해 버리면 이것은 저절로 이래 있는 것입니다. 이 모양으로  하나님에게서 영감이 나와서 영감이 나와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 나와  가지고 영감이 무한한 능력이 있고 진리가 무한한 능력이 있는데 그 영감과  진리가 내가 이 줄을 흔드는 것처럼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 계속될 때에 그  힘으로 말미암아 이래 되어지는 것이냐 거게 피동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이냐?  그런 게 아니고 나오기는 거게서 나왔는데 나오고 난 다음에는 영감도 독자적인  권위를 가졌고 진리도 독자적인 권위를 가져서 무한한 독자적인 그런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에베소 1장에 보면 너희들을 부름의 그 소망과, 또 너희들을 부르신  자와 또 너희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에게 임하는 그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을 너희들이 알기를 원한다.

 그 능력이 무슨 일 했느냐 하면 너희에게 오기 전에는 그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음의 성공을 하셨고 또 삶의 성공을 해서 죽으시고 살으셔  가지고서 아버지가 만족하고 또 모든 피조물이 다 만족하고 감탄해서 영원히  살게 되고 하나님으로 이제, 하나님은 근본이 되시고 모든 피조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이 또 그 분으로 말미암아 보존도 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영영히 충만하고 충만해 사는,  이러니까 하나님과 피조물이 일체, 본체적으로는 하나가 안 되지마는  사상적으로 하나요, 욕망적으로 하나요, 또 활동적으로 하나요, 이루는  결과적으로 하나되는 이렇게 하나님의 소원하시는 이 소원이 다 이루어지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그 능력이 예수님 안에서 그렇게 해서, 한번 읽어볼까요. 에베소  1장에. 18절, 1장 18절에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감이 하나님의, 하나님의 역사가 영감으로 나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감이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감이라,  또 하나님이 진리라, 주님이 영감이시라 주님이 진리라 그렇게는 우리가 말할 수  있습니다. 거게서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감으로 나타나셨고 또 하나님이  진리로 나타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곧 영감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감이라 할 수 있고 하나님은 주님은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 같지마는 진리는 하나님이라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이라 또 영감은 하나님이라 그렇게는 하지 못합니다.

 위에서 내려올 때에는 이렇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지마는 밑에서 나타난  그것이 곧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그 위치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것 좀 구별을  약간 하면 됩니다.

 이렇게 영감과 진리가, 영감이 목적을 정하셨고 또 영감이, 영감과 진리가  이제는 모든 것을 목적 정하고 난 다음에는 예정하셨고 창조 하셨고 또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감과 진리로 모든 것을 역사하셨는데 만물을 실지로  창조한, 피조물에 제일 가깝게 역사해서 피조물을 시공한 그 시공의, 시공한,  시공 자(者)는 아니지마는 시공의 역사한 그를 가리켜서 진리라, 그 진리를  나타낸 것이 영감이라, 또 영감을 나타낸 이가 하나님이시라.

 그런데, 그러기에 이 영감과 진리는 이렇게 지극히 큰 능력을 가지고  역사하시는데 이 역사가 예수님 안에서, 이 능력이, 영감과 진리가, 영감은  인격성이 있고 진리는 이치뿐이요 능력은 있지마는 인격성은 없습니다.

 영감은 인격, 우리와 같은 인격, 말하자면 신격인데 신격을 가지신 생존하신  그분의 마음이 곧 영감이기 때문에 신격성 생존하신 신격성이 거게 같이 연결돼  가지고서 있는데 그 영감과 진리가 모든 걸 지으시고 또 어제 말씀한 대로  우리를 그 가운데에 지으시고 지어놓은 우리에게 만물은 다 물질로 지을 때에  그때 물질의 그 생명을 가지고 살았지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었다고 하는 그 생기는 하나님이 주신 힘인데 그 주신 힘은 곧 그게 영감이요,  영감이요 진리입니다.

 그때도 영감과 진리로 생명을 얻어 가졌고 또 그래 가지고 타락해 가지고 죽은  우리들을 주님이 대속하셔 가지고 우리를 영감과 진리로 우리 영을 살렸고 그  다음으로 또 우리의 이 심신의 기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우리  중생된 영을 도와 가지고서 영을 통해서 구원하게 하시고 영을 통해서 구원할 수  없는 그런 것은 직접 구원 하십니다.

 그러기에 기본구원이라 하는 그 기본구원에 속한 것은 하나님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가지고라도 중생된 영이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몸이 부활하는 그 부활은 하나님이 직접 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기본구원이라, 그렇게 기본구원이라고 얼마 며칠 전에 한번 말해서  구별해 말한 그 기본구원은 다 인간의 그 중생된 영이 하나님을 힘입어도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은 다 하나님께서 단독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거게 상관이 없고  힘쓸 필요가 없는 그 부분을 가리켜서 기본구원이라. 기본구원은 꼭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건설구원이라 행위구원이라 하는 그것은 중생된 영을 성령이  감동시켜 도와 주셔서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려 줘 가지고 자꾸 하나님의 아들로 살도록 이래 하는, 성령을 힘입어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건설구원이오 그것이 바로 심신을 구원하는 구원인데,  그러면 심신의 이 몸을 부활시키는 것은 할 수 없기 때문에 부활은 기본구원에  속해 가지고서 시키지마는 그 몸이 세상을 떠나기까지에 그 동안에 심신을  구원하는 그 구원은 심신의 기능을 구원합니다. 심신의 기능을 구원하는데  심신의 그 기능은 어떤 기능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영감과 진리대로 하는  기능입니다.

 영감과 진리대로 하는 그 능력을 자기가 차차 육성시키고 배양시켜서 하는  것인데 그러면 영감과 진리대로 한 번 행하면 그만치 영감화 진리화 되었고 두  번 행하면 두 번 되어서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있는 실력은 영감과 진리대로 할  수 있는 그 힘이 하늘나라의 실력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이 세상에서 영감과 진리대로 한 것만치 그만한 실력이 됐기  때문에 한 번 연습하면 또 좀 처음보다 낫고, 두 번 하면 낫고, 세 번 하면 낫고  중복적으로 자꾸 이와같이 영감과 진리대로, 할 때에 낫고, 또 영감과 진리대로  하지마는 요 면에는 영감과 진리대로 했지마는 또 요 면은 영감과 진리대로  못했다 그말이오.

 그러면 요 면도 하고 조 면도 해서 영감과 진리대로 행할 수 있는 그 일을 차차  차차 하나씩 둘씩 이렇게 구비시켜 나가는 그 일도 우리에게 있고,  또 영감파 진리대로 행했다고 하지마는 실은 반도 안 들었고 십분지 일도 안  들었고 오히려 십분지 구는 자기의 주관대로 세상대로 악령 대로 된 것이니까  요런 것을 하나님께서 조절해서 조금씩, 영감과 진리에 섞여 있는 피조물적인 또  이 세상적인 악령적인 그런 것을 조금씩 제거해서, 많이 제거하면 우리가 절단나  버리기 때문에 많이 제거하지는 못하고 조금씩 제거하는 것을 가리켜서 그  방편을 가리켜서 연단이라, 금을 연단하는 것과 같이 연단이라 그렇게 말했고,  또 이것이 영감과 진리대로 행하는 줄 아는데 영감과 진리대로 행 하는 것을  저도 하는 것도 모르고 안 하는 것도 모르고, 안 하는 것도 했다 하고 하는 것도  했다 하고, 다른 사람들도 아닌 것도 그렇게 인정하고 그런 것도, 아니라고  부인하고 이러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쳐서 본인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알고 '이것은  지금 요만한 중량밖에 안 된다. 요만한 믿음밖에는 없다. 요만한 순종밖에는  없다. 요만치밖에는 성화돼 있지 않다.' 하는 그 실상을 하나님은 아시지마는  본인에게 알리시고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 인정하도록 하는 그것이 이제  시험입니다.

 말세가 되면 하나님이 막으셔서 그런 걸 상관하지 못하도록 마귀의 침노를 하지  못하도록 이렇게 막아 가지고서 잘 기르다가 '다시 이것은 더 뭐 길러봤자  여게서는 뽑을 것도 없고 가릴 것도 없다' 하면 마지막으로 이제 사탄의 유혹을  들이 보내 가지고서 그 가운데서 한번 최고로 한번 선택하고 나서 나머지기는 다  쓸어 없애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요전에도 지금 '벌써 불파니 뭐 지시파니 예언파니 방언파니 또 그 신유의  은혜라고 모든 이적파니 하는 그것이 실은 성경을 보고서 우리가 따져서 가치를  평가해야 되지 성경이 평가하지 안하고 인간들이 '야, 아무리 뭐 신구약 육십육  권의 도리를 아무리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보다 여게 문둥이 하나 나은 것이 더  크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인간들이 그 생각대로 평가를 하는 것이지 성경대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라 그거요.

 그러면 성경을 펑가하는 것은 모든 표적이나 이적이라는 것은 믿지 안하는 사람  하나님을 인정치 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데 있나 없나? 어데 그렇다  말이고?' 이럴 때에 그들은 육덩이밖에 모르기 때문에 육의 것을 역사해  가지고서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적이라는,  표적이라는, 신유라는 것은 믿는 사람에게는 없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 있다,  그것을 며칠 전에 우리가 말했습니다. 또 방언도 그러하다.

 그런 것은 다 믿지 안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자기가 방언되는 것을 보고서 믿는  인정을 하도록 그래 하고 난 다음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온 교회가 방언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미첬다고 하지 않겠느냐?' 방언이나 그런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이고 또 방언도 가짜 방언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성경을 봤지요 데살로니가후서에.

 가짜 방언이 있고 진짜 방언도 해 봐야 그것이 저만 '과연 하나님이 영감이  있구나. 이것 백지 우리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영감이 와 가지고 역사하니까  이렇게 이 방언이 되는구나.' 하는 그런 것을 제가 한번 체험해 보는 것이고  체험하고 난 다음에 평생 체험할라 하는 그것은 시험하는 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데서 망했느냐 하면 한번 하나님이 역사하는 걸 보고  '하나님이여 녜 믿습니다. 당신은 전능자인 줄, 우리 인도자인 줄, 우리를  사랑하는 줄 믿습니다.' 했으면 그다음에는 이제 당신의 시키는 대로 명령  순종이나 할 일이지 '또 모르겠습니다. 또 봐야 알겠는데요. 봐야 알겠는데요.'  또 봐야 압니다.

 또 당신이 하시고 '인제 아나?' '예, 알았습니다.' 또 그다음에 좀 있다가는 또  닥치니까 '아, 모르겠는데요. 봐야 알겠는데요. 당신이 하는 걸 봐야 알지요.'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으로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시험하는 것으로 멸망을  받았어.

 믿는 자에게는 어떤 것이 나타나느냐? 예언이 나타난다 했습니다. 예언. 예언이  나타나는 것은 예언은 우리 한국 말로 말하면 미리 예(豫)자 말씀 언(言)자니까  미래사를 말한 것같이 이렇게 번역이 될 수밖에 없어서 예언이라 하는 것을  선지자가 예언이라는 그 말을 미래사를 발표한다 그렇게 알기 쉽지만 그런 게  아니고 예언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모르는 하나님의 뜻을 과거의 것이나 현재의  것이나 미래의 것이나 그것을 인간이 모르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을 나타내는  그것이 예언이오.

 하나님의 것을 나타날 때 말로 나타내면 그게 실상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그  지능을 영감으로 나타냈고 말로 나타냈는데 그 말은 우주를 창조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언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민수기 이는 다섯 권인데 이  다섯 권 말이요, 이 다섯 권은 누가 기록했지요? 모세가 기록했는데 모세 이전  일입니다. 모세 이전 일인데, 이전 일도 있고 당한 일도 있었는데 그 기록한  것은 예언이라 하는 건 과거 현재사를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예언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예언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예언이요 신구약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예언인데 예언온 믿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성경에  말하기를 '방언은 하면 다른 사람들이 너희를 미쳤다고 하지 않겠느냐?' 성경에  그래 놔. '너희를 미쳤다고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예언을 말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와 가지고서 그 예언하는 소리를  듣고서 그 예언으로 말미암아 저희들이 알지 못하는 제 속에 모든 죄악이 다  들춰나가고 불의가 들춰나오고 저라는 인간이 어떠한 인간이라 하는 것을 다  들춰내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이지마는 그 사람들이 와 가지고서 머리를  숙이고 떨고 두려워하면서 말하기를 '과연 너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다' 그렇게  인정하리라 그렇게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그런 것을 바로 평가를 해  가지고서 하자 그거요.

 그러기에 마치 군대들을 인도할 때에 앞에 있는 그 군대가 바로 길로 싹싹 자꾸  전진을 하면 뒤에 있는 군인들은 지체할 것 없이 뒤에 있는 군인들은 막힐 것  없이 앞에 가는 대로 막 따라가기가 바빠서 이래 가지고 따라가니까 탈선될 일이  없지마는 앞에 가던 군대들이 앞에서 인도하는 것이 그만 가다가 떡 중단을 해  버리고 가지 안하고 있으면 그것은 옆으로 탈선돼. 있으면 앞으로 가던 게 안  가니까 이리도 삐끄러지고 저리도 삐끄러지고 다 삐끄러진다 그거요.

 훈련을 잘해 가지고 있는 군대야 앞에 딱 정지하면 그대로 섰지마는 일반  사람이 지금 여러 수만 명이 쭉 이래 앞에 가는데 앞을 따라 쭉 나가다가 앞에서  딱 중단해 버렸으면, 6·25때에 다리가 탁 끊겨버려서 앞으로 가지 못하니까  그만 그 사람들이 이리저리 자꾸 이래 삐끄러져 흩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에 그 영감과 진리가 사람들을 인도해서 그 인도대로 할라 하니까 하고 나도  또 모자라고 하고 나 모자라니까 달음질 하는 거라. 암만 달음질을 해도 또  모자라고 보니까 자꾸 갈 길이 있으니까 자꾸 그리만 달아나니 탈선되지  안하지마는 영감과 진리의 인도가 없으니까 이제 그만 다리 끊긴 것 모양으로  어디로 가이 될지 모르니까 여게서 불 말하니까 불파로 삐끄러지고, 지시파로  삐끄러지고 신유파로 삐끄러지고, 자꾸 이리저리 삐그러져 가지고 자꾸 탈선을  한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그 탈선된 그 상태인데 사람들은 그걸 크게 여기고 성경이  평가하는 것은 방언 그것을 자꾸 하는 것은 '일만 마디 방언 보다도 한 댓 마디  깨닫는 것이 낫다' 이렇게 성경에 평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방언이 그리 큰 게  아닌데 '방언이라야 구원 얻지 방언 없으면 구원 못 얻는다. 방언이 제일이다.'  이래 하지,  또 이적이라 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에게 이적이 필요하고 믿는 사람에게  이적이 필요 없다. 예언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를 배워 가지고 예언이  필요하다. 이렇게 평가를 했고,  지시니 꿈이니 하는 것은 그것은 '내가 보내지 안한 자들이 저거 사사로 만들어  가지고서 그와같이 하는 그건 내 적들이다' 하는 것을 예레미야 23장에 말한  것을 아레도 읽어 드렸다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감과 진리가 이렇게 권위 있다는 걸 깨닫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임한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하 것을 너희들이 알기를  원한다 그 능력이 예수 안에서 죽는 성공도 했고 부활하는 성공도 해서 아버지가  보내신 목적 달성을 완성을 해서 아버지 우편에 승리자로 앉게 됐다 그런고로 그  능력이 너희에게 역사 하니 어떻게 역사하는가?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이 선포해 놓으신 신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노여워하시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시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이 그런 죄를 짓겠나?' 하나님이 죄가 아니오.

완전자가 그런 것은 완전자가 삐뚤어진 걸 시기합니다. 인간의 모든 시기가  그분에서 나왔소. 그분이 인간의 시기를 지었소.

 그분이 범죄되는 삐끄러지는, 죄는 뭣이냐 하면 당신에게 거슬린 게 죄인데,  당신은 완전자이기 때문에 완전에 거슬리는 게 죄인데 당신에 거슬리는 시기를  안 하십니다. 당신에 거슬리는 시기가 아니고 당신을 세우기 위해서 당신을  사람들에게 영접하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을 나타내는 시기기 때문에 그 시기가  인간적으로 인간의 그 사욕적인 그런 게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저 대범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뭐 그분이 그래  커단하게 계시지 뭐 세밀하게 간섭하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마귀가 다  미혹 주는 미혹인 것입니다.

 아가서에 보면 술람미 여인이 주님을 말하기를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 사슴과 같다' 노루와 사슴과 같다는 것은 노루 사슴은  무슨 특성을 가졌느냐? 여기 사람들은 잘 몰라요.여기 공원에 가 가지고 보는 그  노루와 사슴은 여러분들 그것은 다 변질 됐습니다. 그것 뭐 사람들로 말미암아  변질됐어.

 저 자연으로 크는 노루와 사슴을 보면 노루가 지금 뭘 뜯어먹고 열심히  뜯어먹고 있는데 조그만한 솔방울이나 뭘 하나 톡 던지면 그 솔방울 하나 와서  톡 거리면 그만 뭐 어떻게 놀라 재끼는지? 톡 그러면 그만 뛰어서 당장에  어데까지 가느냐? 그저 뛰기 시작하면 어짜든지 그 산이 높으든지 낮든지  산만당까지 뛰어 올라갑니다. 만당까지는 당장에 뭐 그리 뛰어을라가 가지고  산만당에 올라가 가지고야 비로소 그 밑을 내려다 본다 말이오.

 이러니까 자기가 인식하고 있는 데에 자기가 인식하는 데에 그 다른 것,  자기에게 이질적인 것이 뭐 소리든지 뭣이든지 이질적인 것이 나타나면 그만  깜짝 놀래 가지고서 도망치는 그것이 노루와 사슴이라 그 말이오.

 그러면 주님은 우리하고 아무리 친해서 이렇게 뭐 좋아하시고 이러다가도  당신에게 이질적인 것이 우리에게 털끝만한 것이라도 딱 우리에게 있게 되면  당신은 깜짝 놀래 가지고 천리고 만리고 그만 멀겠 달아난다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과거에 목사들 가운데는 이용도 목사님이 그것을 말했습니다. 이용도  목사님이 자기 전기 해 놓은 걸 보니까 기록했는데 그분은 믿음으로 살았고  영감으로 살았어. 그랬는데 부패한 이 교회들이 그걸 이해를 못 하고 이단으로  정죄를 했다 그말이오.

 그랬는데 요새 지금 이용도 목사님의 참 계통되는 사람들이 그걸 바로  나타내는데 '그분은 참 그 시대에서는 가장 영감으로 산 사람이다'  그분은 그랬어. '주님이 나와 같이 동행하지 않는다고 부르짖으면서 주님을  찾다가 보니까 주님이 내나 내 곁에 서셨더라. 주님이 내 곁에 선 줄 알고 이제  주님이 내 곁에 서시고 나를 지켜 주신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곁에 계신 줄  알고 잠깐 날뛰다 보니까 주님 어데 가신지 없더라.' 그게 뭣이냐? 그게 경험  체험에서 하는 말이라.

 주님 당신과 동행할 때에는 같이 계시다가 조금만 주님 잊어버리고, 주님  잊어버리면 우리는 그만 세상으로 달아나 버리기 때문에. 세상으로 달아나  버리면 주님는 벌써 천리 만리 멀어졌다 그말이오.

 천리 만리 멀어졌으니까 주님이 어데 가고 없는갑다 싶어서 자꾸 찾다 보면 제  눈이 어두워서 안 보였지 내나 제 옆에서 자기를 지키고 계신다는 것을 체험한  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아침에 지금 이 말하려고 하는 건 다른 게 아니오. 영감과  진리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지극히 크신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가지신 그  영감이요 진리인데 우리가 영감과 진리로 살아났습니다. 영감과 진리로 살아났다  말은 하나님의 그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났다 말이오. 하나님이  만물 접촉할 때에 접촉하는 그 능력으로 살아났다 말입니다.

 진리는 만물을 접촉할 때 그때 진리가 되고 진리가 되기 전에는 영감이고,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영감으로 된, 영감으로 기록한 책인데 이 책을 가리켜서  진리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니까 이 영감과 진리로 우리가 살아났고, 살아났기 때문에 우리는 영감의  힘밖에는 없고 진리의 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영감의 능력 진리의 능력만 있지  다른 능력이 없다 그거요.

 그러니까 이 힘으로 사는데 우리가 또 자라는 것도 영감의 힘으로 자라고  영감의 능력으로 자라서 영감과 진리대로의 행동하는 고 실력이, 그뭐 이것 뭐  과학의 힘이 아니고, 과학의 힘이 아니고, 예술의 힘이 아니고, 무슨 야바위  놀음 힘이 아니고, 그런 뭐 연극의 힘이 아니고, 무슨 이 세상 모든 문화의 힘이  아니라 당신의 영감 진리, 당신의 영감과 진리에 피동되고 영감과 진리대로  움직이는 그 실력을 기른 것이 우리의 실력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아주 이렇다는 세상이 존대하는 위대한 사람으로 그 사람이  실력 있는 사람이고 세상이 다 우러러보는 그런 업적이 맣은 그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진리와 영감대로 한 것이 털끝만치도 없으면 그 사람은 만일 택한 자라고  하면 부활했을 때에 하늘나라의 그 활동할 기능은 털끝만치도 없는 사람이라  그거요.

 그런데 이 영감과 진리가 우리를 살렸고 살아났기 때문에,그러면 우리가 지금  요는 뭣이냐? '네가 내 안에 내 말이 네 안에 있으면'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와 붙어 가지고 있어야 연결이 돼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그 포도나무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요 곧 영감과 진리라 그말이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내가 진리라 내가 생명이라 내가 너희들이 걸어갈  길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영감과 진리를 우리가 첫째는 찾아야 되겠습니다. 영감과 진리를 찾는  데에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느냐? 영감과 진리를 어데 가 찾으렵니까? 영감과  진리를 찾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해 놓은 신구약 성경 말씀에서 찾습니다.

 말씀에서 찾고 또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무슨 설교에서 찾고, 그러니까  자기가 성경 볼 때에 영감과 진리를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읽는 것으로 영감과  진리를 찾고, 또 설교를 들으면서 영감과 진리를 찾고, 또 자기가 묵상하면서  영감과 진리를 찾고, 이제 찾은 이 영감과 진리를 자기가 영접해서 영감과  진리를 자기가 영접해 들이는 것이 뭣이냐?  자기가 성경에서 찾은 그 영감과 진리, 설교에서 찾은 영감과 진리 자기가  이렇게 고요히 묵상하는 데서 찾은 영감과 진리를 자기가 믿을 때에, 자기가  믿을 때에 이제 영감과 진리를 영접해서 영감과 진리와 자기가 하나됩니다.

인정할 때에.

 인정하고 소망하고 이제 그대로 행하려고 할 때에, 마음의 믿음이 몇 가지지요?  네 가지. 하나는? 녜, 믿음 지식, 믿음으로 지식하는 것. 믿음 지식, 또? 믿음  소망, 믿음 소망이라고 믿음을 먼저 붙이는 것은 그분을 따라서 말이요, 그분을  따라서 알기도 했고, 그분을 따라 알았다 말이오. 그분이 말하는데 그분이 알라  하는 대로 그래 알았다 말이오. 믿음 지식, 믿음 소망, 믿음 실행, 믿음  인내로써 이렇게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거게서 찾는 것이, 찾는 것이 그것이 성경과 성경 말씀을  설교할 때와 자기가 기도할 때에 찾는 것이고 찾아서 깨달으면 그것이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아, 이분이로구나.' 주님을 만났다 말이오. 깨달으면 진리와  영감을 만났습니다.

 진리와 영감을 만났는데 만난 진리와 영감을 자기가 영접해서, '문을  두드리는데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겠다' 영접하는 것은 뭐이냐? 자기가 깨달은  영감과 진리를 자기가 인정하는 것, 믿는 것, 인정하는 것이 그것이 이제 자기가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하고 그 다음에 자기가 실행하는 것이 뭣이냐? 실행하는 것이 그분과  동행하먼서 그분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실행이 맡기는 것입니다.

 자기 현실을 당했을 때에 그 현실에 영감과 진리, 처음에는 진리로, 진리로  시작을 하고 그 현실에서 진리가 뭐라고 여게서 지금 하라고 하느냐? 진리가  하라는 것을 찾아 가지고서 찾아서 자기가 할 때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자기의 목숨을 다해서, 다시 말하면 자기를  다해서 자기가 그 실행을 하는 것 있고 자기 손으로만 실행하고 마음으로는 딴거  있다 그말이오. 마음으로는 딴데 있다 말이오.

 그러니까 심방은 가기는 가지마는 마음은 지금 심방 가면서도 '누구를 지금  만나서 연애를 한번 해 볼까?' 또 심방하면서 '내가 심방을 하면서 어데 가  가지고 지금 내가 누구와 얘기를 해서 돈벌이를 좀 해 볼까?' 또 뭐 '어데 가서  그래 가지고서, 그러면 그 핑계대고 그래 가지고서 한번 구경을 하러 가 볼까?'  그뭐, 자기의 껍데기 수족이 하면서 그 마음은 또 따로 안 할 수 있고, 자기  지체와 자기 마음은 같이 해도 속에 정성은 같이 안 할 수 있고, 정성까지는  다해도 생명은 안 할 수 있다 말이지. 그러니까 생명이 닥치면 그만 그때 생명이  관계가 되면 툭 저버리는 것은 생명이 같이 안했다 그거요. 이러니까 하는 것도  얼마나 층어리가 있습니까?  이런데 그분과 동행을 할 때에, 현실을 닥쳤을 때에 진리로 먼저, 진리가  뭣이냐? '하나님의 성경 말씀이 요 현실에서는 어떻게 하라고 하느냐?' 그것을  찾는 것은 그 찾는 목적이 뭣이냐? 영감을 찾기 위해서, 그 찾는 목적이 영감을  만나기 위해서 찾습니다. 영감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 영감까지 만나게 되는 그  영감 만나는 것이 뭣이냐? 자존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지금 찾는 것이라 그거요.

 그래 가지고, 자기 현실 닥친 그 현실을 영감으로 찾아 가지고서 그다음에는,  진리 찾는 그것은 영감으로 찾아서 진리를 성경 말씀대로 성경 말씀이 요래 해야  된다 하는 그래 해야 된다는 그것은 겉어머리 형체고, 그 윤곽의 외형이고 외형  속에 그대로 행하는 거게 자기의 마음을 들일 수 있고, 성품을 들일 수 있고,  뜻을 들일 수 있고, 힘을 들일 수 있고, 생명을 들일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자기의 인격을 다 기울일 때에 하나님의 신격은 우리에게 접해 줍니다.

 그러기에 영감을 받는 것은 자기의 인격을 기울이는 데서 영감 받지 자기가  무슨 뭐 소지품 돈이나 뭐이나 세력 이런 걸 암만 바친다고 해도 당신은 그  영감은 접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육십육 권 꼭 법도대로 다 했는데, 다 했는데 가 보니까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었고 금과 은과 보석을 지은 것같이 불멸의 것이 건설된  것은 없다 그말이오.

 그것은 왜 그러냐? 율법을 행했어. 이 법칙으로 보고서 이 법칙대로 행했지  법칙을 내놓온 것은 당신의 그 신격이 우리의 인격과 신격 인격이 서로  교제하기를 원하고 그렇게 일위되기를 원해서 한 것인데 그러는 방편만 그리  했지 참 동상이몽이라는 말과 같이 둘이 한 침대에 누워 자기는 누워 자는데  지금 아내는 지금 딴 꿈 꾸고 남편은 딴 꿈 꾸고 그 인격 껍데기인 형체만 있지  속은 다르다 그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껍데기 율법적인 그것은 하고 있지만 속은 다르다 그거요.

그럴 때에는 영감이 같이 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행동한 것이  영감이 동행할 때 비로소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이요 그게 온전함이 되는 것이요  거기서 변화가 되어지는 것이라 말이오.

 변화가 되어지는 것인데 아무리 율법적으로 이와같이 행해도 그 사람이 교만만  돼져 버렸지 변화 안 됩니다. 그러나 영감받는 그것 다 기울여서 할 때에 자기가  변화가 돼진다 말이오. 그게 성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우리 현실을, 결론으로, 그것 다, 다 인제 여러분들이 들은  걸 다 생각하면 자꾸 알게 될 거라.

 현실에서, 자기 현실은 우리는 일생을 가되 우리에게는 뭣만 우리 세상이라  했습니까? 우리 세상, 백 년을 살았으면 자기 세상은 어떤 것만 자기  세상입니까? 녜, 현실만 자기 세상이라. 현실 외의 것온 자기 것 아니오. 현실  외의 것은 미래의 것도 자기 것 아니요 과거 것도 자기 것 아니요 현실만이 자기  것입니다.

 현실만이 자기 것인데 현실을 그것을 그 현실을 잘하면 자기의 일생은 잘한 게  되고 영원히 잘한 게 되는 것인데 그 현실을 잘 하는 데에는 자기가 그 현실을  맡아 가지고서 현실 처리를 할 수도 있고 또 자기 현실을 전지 전능 사랑의  주님에게 맡겨서 그 현실을 처리 하도록 하는 것이 있는데 누가 자기 현실을  거게서 조성하면 그 현실을 바로 가장 복되게 조성할 수 있습니까? ○○○선생?  녜, 주님이 하시면 잘할 수 있어.

 주님이 하시게 하는 것이 뭣입니까? 주님이 하시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내 현실을 당신이 해 주십시오. 당신에게 맡깁니다.' 당신에게 맡깁니다. 그  책임을 당신에게 맡기고 당신에게 그만 전권을 맡기고 위임을 맡겨서 당신에게  잘못되고 잘되고 하는 건 당신이 완전히 책임되도록 완전히 당신에게 맡겨버리는  것이 어떤 것이 당신에게 맡겨버리는 것입니까? 녜, 영감과 진리대로 행하는  그것이 당신에게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현실에서 어떤 현실 닥쳤든지 거게 영감과 진리대로 하는  그것은 뭐 죽음의 현실을 당했든지 삶의 현실 당했든지, 높은 존귀의 현실을  당했든지 어떤 현실을 당했을지라도,  그 현실은 뭘로 변해질지 모른다 그말이오. 그 현실은 미래의 원인이 되는  것인데 그 현실 잘못해 놓으면 뒤에 가서 무슨 결과가 맺을지 모른다 말이오.

그러나 그 현실을 후회 없이 가장 완전하게 바로 처리하는 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로 처리하는 것이냐? 그것은 주님이 그 현실을 맡아 주셔서 책임져  주시면 그게 현실이 잘 처리되는 건데 주님이 맡아 주시도록 주님에게 전임을  맡기는 것은 뭐이냐? '나는 주님 시키시는 대로 할 터이니까 당신이 요걸 맡아  주십시오 나는 요것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  그것은 당신에게 책임을 지웠다 그말이요, 벌써.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건 책임을 지웠다 말이오. 내 마음대로 하는 건 내가  책임을 졌다 말이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하라는 대로 했으면 그 사람에게  책임이 졌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피조물 어떤 자에게 책임을 지울 수도 없고 나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여게서 당신이 지금 하라는 게 뭐이냐? 하라는 그걸 찾아 가지고서  그대로 하는 것은 그분에게 책임을 맡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을 다 당신에게 맡겨서 그 현실 처리를 한 사람들은 그  현실이 영원 무궁에 가도, 그 현실 처리한 것이 영원 무궁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피조물의 그 범위가 수없이 넓은데 영계가 넓은데 그 피조물의 관계, 그뭐 있는  줄도 모르는데 그 관계가 바로 바로 되도록 어찌 우리가 맡겠습니까? 당신에게,  그때 당신에게 지도하는 그대로 내가 복종을 하니까, 믿음을 지켜 복종을 하니까  거게 대해서 당신이 옳고 바르게 처리해 버리니까 그분이, 그분은 모든 것을  당신이 지었고 당신이 운영하고, 조그만한 개별의 것도 당신이 섭리해  주관하시기 때문에 잘 아신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몰랐는데 '그때 내가 요것 하나를 복종을 했더니마는  주님이 여게 대해서 처리한 것이' 그 처리한 게 내가 천 년 뒤에 보니까 어떤  뭣이 있는데 거기 가 보니까 그와 딱 들어맞아서 그게 나를 보고서 감사를 한다  그말이오. 감사해. '내가 언제 여기 대해서 오지도 안했고 알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나를 감사하느냐?' '그래도 우리에게 이렇게 이렇게 해서 감사를  하는데요.' 하는 것이 있거든.

 그게 뭣이냐? 내가 그 현실에서 당신 하시는 대로 처리를,영감과 진리대로 내가  행하니까 그것이 당신을 책임 지우고 당신에게 전권과 그것을 맡기고 '나는 당신  시키는 대로만 하지 이것은 당신이 책임지십시오' 하는 그때에 내가 당신의 영감  진리대로 했더니마는 그 일읕 당신이 처리를 했는데 그때에 벌써 천년 만년 후에  내가 하나 접촉되는 거게 대해서 그가 나를 보고서 환영을 하면서 '아이구  오십니까?' 감사를 하며 하는데 나는 알지도 못하고 이런데 '우리에게 이런  감사한 일 하지 안했습니까?' 나는 몰랐는데 알지도 못하는데, 그게 뭣이냐?  주님이 나 위해서 해 놓으신 그거라 그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자기 현실에서 영감과 진리대로 하는 그것은 자기 현실을 전지  전능의 사랑의 주님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이고, 현실을 그때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은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고, 자기가 존경하는 어떤 위대한  사람대로 하는 것은 그에게 맡기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 현실을 어리석고 순 살인 강도, 도적이요 절도, 강도요  절도, 강도와 절도 그놈한테 우리 현실을 맡깁니다. 그러니까 그놈이 우리  현실을 잘해 줄 리가 있습니까?  이러니까 나중에 가서 놀라기는 '언제 그랬습니까? 언제 그랬습니까?' 지옥  가는 자들이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언제 그랬습니까?' 다  그래 말해. '언제 그랬습니까?' 했는데 나중에 가 보니까 이제 우리가 맡겨놓은  그자들이 다 그래 놨다 말이오.

 그러니까 자기 현실을 영감과 진리의 주인공되는 하나님, 영감과 진리에게  책임을 지우지 못하고 자기 현실을 다른 무엇에게 책임을 지운다는 것, 자기 그  어리석은 지금, 죽음의 힘 밖에는 없는데, 죽음의 지혜 밖에는 없는데 자기가  그것 책임을 진다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오. 그것은 술취한 미치괭이에게  운전대를 맡겨놓고서 그 험한 길 낭떠러지를 가면서 미치괭이한테 맡겨놓으면 그  언제 가 뚝 떨어져 가지고서 낙상해 죽지 뭐 하겠습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깨닫고 우리 현실을 어짜든지 주님에게 맡깁시다. 우리 현실을  주께 맡깁시다. 우리 현실을 주께 맡깁시다 우리 현실을 주께 맡겨서 우리  현실을 주님에게 책임을 딱 맡겨서, 맡기는 게 뭣이냐? 그때에 영감과 진리대로  하는 것이 주님에게 맡기는 것이요 그때 영감과 진리에 떠난 다른 것대로 하는  것은 다른 무엇대로 하면 그것에게 맡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하는 것이니까  아무리 잘해 봤자 하나님보다 더 잘 할 이가 어데 있어?  영감과 진리대로 내가 행하는 것은 우리를 사랑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창조주이신 자존자이신 하나님 주님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십 분 기도하고 난 다음에 권찰회 있습니다. 이 권찰회도 안 하면 안 되는데 참  실은 일주일 내 해 봤자 이틀 새벽밖에는 자유가 없어 만날 그것 하고 이러니까.

이러니까 언제 시간이 없는데, 그러니까 어짜든지 기도 많이 하고 명상해야  됩니다. 명상 안 하면, 자꾸 이거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고 뚫고 들어가야 되지  그리 안 하면 이 현상 세계에 시청각에 다 끌려버리고 말아요.

 이 시청각 그게 적인데, 자꾸 시청각에 지금 주장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현상  세계로 사람을 자꾸 끌고 나가는 것이라 현상 세계로 끌고 나가는데 다 그걸  부인해 버리면 좋을 건데 그놈을 자꾸 이렇게 주장을 하니까 그게 능숙하게  되니까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타락하는 것이 빠르더라 그거요.

 


선지자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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