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통해 영생,영멸 결정


선지자선교회 1983년 7월 1일 금새

 

본문 : 마6:21-24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땅과 하늘을 바꾸어야 되는데 땅과 하늘을 바꾸어 놓으면 한 가지 두  가지로 말할 수 없는 모든 자기의 생활이 바꾸어집니다.

 땅은 세상을 말하는 것이고 하늘은 천국을 말하는데 자기 소망이 땅에 있고  하늘에 있는 이것이 자기의 참, 뭐 새털같이 많다고 하더니마는 수없는 그 현실,  현실은 하루도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모를 만치 수가 많습니다. 수없는 그  현실을, 헤아릴 수도 없는 그런 수없는 현실을 자기가 걸어나갈 때에 그것이  후회 없는 바른 생활이 되어집니다.

 그걸 바꿔놓지 안하면 하나 하나 이렇게 자기가 아무리 깨어서 따지고  구별한다고 해도 현실이 몇 개나 지나가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현실은 그렇게  또록또록이 지나가지마는 우리는 어둡고 둔하기 때문에 그 현실 현실마다 자기가  감각하거나 구별하지도 못할 만치 복잡한 현실이 참 번개같이 지나갑니다.

 그런 현실을 바로 사는데는 자기가 땅의 소망과 하늘의 소망을 바꾸어서 하늘의  소망을 가지게 되면 그 현실 하나 하나를 알든지 모르든지 그 현실을 사망에  속하지 안하는 구원의 현실로 바꾸어 갈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바꾸는 데에는 그 방편이 뭐인고 하니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그것이 바꾸는 방편이다. 하늘에 쌓아두면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 말은 그렇게 하늘 저축으로 하면 하늘 저축으로 하는  그것이 하늘나라로 옮겨진다 그떻게 하는 말씀입니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러니까 보물은 마음은 아니고 딴것인데  딴것 그것을 물질, 뭐 물질 이것뿐인데 물질 그것을 그렇게 하늘에 저축하는,  하늘에 있도록 그렇게 하면 네 마음이나 그런 게 가 있다 하는 그런 것으로서  해석하기가 쉬운데 보물은 이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보배입니다.

 '너희'라 하는 것은 너희는 그것은 중생된 영들을 그 가리키는 말 인데 중생된  영들을 가리킬 때에는 새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새사람들, '너희는' 새사람들은, 중생된 영들은, 이런데 그거 조금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영은 따로 있습니다. 또 육도 따로 있습니다. 육은 뭘  육이라 하는고 하니 마음과 몸 이것을 가리켜서 육이라고 하고 영은 우리에게  마음과 몸 요것 아닌 그 외에 것, 하나님의 모형으로 되어 있는 그것이  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모형으로 되어 있는, (저 뒤에 울립니까? 이러면 들립니까? 너무  울리는가? 저 뒤에 들리면 손 한번 들어 주십시오. 녜.) 영과 육이 따로  있지마는 새사람이라 말할 때에는 영과 육이, 육이 성화되지 안했지마는 영과  육이 하나되어 가지고 있을 때를 가리켜서 새사람이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니까 논리적으로는 영과 육이 이떻게 뚜렷이 따로 나뉘어져 있지마는,  논리적으로는 나뉘어져 있지마는 실상은 나누기가 심히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생각은 죽는 것이요 영의 생각은 사는 것이라 거게 '영'은 사람의 영을  가리킨 것은 아니고 성령을 가리킨 것이나 '육체의 생각' 할 그때에는 영은 같이  있기는 있지마는 영은 거게 아무 작용의 역사는 하지를 못하고 영은 강제와  억제를 당하고 다만 심신 그것이 주장하는 것을 가리켜 말하고,  '영의 생각'이라고 할 때는 그 영은 성령을 가리킨 것이나 그 성령과 우리의  중생된 영은 언제든지 떨어질 수 없는 하나로 떨어질 수 없는, 본체적으로는  하나된 것 아닙니다. 언제든지 성령은 자존자시요 창조주시요 우리의 영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활동적으로는 중생된 영과 하나님이신 성령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하나이기 때문에 '성령의 생각은' 하는 그것은, 그것은 이 반대하는  육체의 생각을 말하지 안하고, 성령과 중생된 영의 작용은 생명과 평강이요  중생된 영과 한덩어리 되어 있지마는 중생된 영을 배격하는 그 심신이 주격이 돼  가지고서 움직이는 그건 것은 다 사망이니라 망하고 죽는 것이니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거에 영과 육이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나가 돼 가지고 사람이 되어 있고  작용적으로는 각각 따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영과 육을 하나님께서 언제나  분리시키지 안하고 이렇게 하나로 해 가지고 하나로 보고서 이렇게 말한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작용적으로는 따로 분립이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너희는' 중생된 영들인데 곧 중생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의 영육으로 된 인격체에다 대고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게 주격은 영이요 거기에 있는 소속, 소유격은, 피소유격은 육으로  되어 있는 그것을 합해서 중생된 새사람 '너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둬라' 보물이라는 이러는 데서는 벌써 주격과 피소유격을  분리시켜 가지고서 '너희 보물을' 보물은 다 피소유격이요 너희라는 거게 있는  새사람의 그 주격은 영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기에 활동과 작용적으로는  주격과 소유격을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 분리시켜 가지고,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했습니다.

 그러면 그 보물이라고 하면 영이 소유해 가지고 있는 보배인데 영이 소유해  가지고 있는 보배인데 영이 소유해 가지고 있는 보배는 어떤 것인가? 자기의  마음이 그것이 영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요, 마음은 주격이 아니고 마음은 영의  소유인데,  창세기 6장에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같이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그것은 벌써 그의 마음이 그 사람을 주장하는 마음이 주격이 되고,  마음이 주격이 되고 또 자기 몸이 주격이 되고 그럴 때는 벌써 그것이 육체의  사람이다.

 '육신의 생각'하는 말이나 '육체의 생각'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인데 '육체의  생각은' 하는 그 육체가 만일 고기덩어리라고 하면은 고기 덩어리에게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육체라는 것은 그것은 심신을 다 합해서 말을 하는데,  육체라 육신이라 다 같은 말인데.

 육체라는 그것은 이 몸이라고 말합니다. 육체라는 것을 이 몸이라고 생각을  하면 성경 해석을 다 할 수가 없고 성경을 해석해 나가다가 막히게 되고  아무해도 해석할 수가 없는 그런 난해절들이 많으니까,  마음을 육신에다 붙이지 안하고 마음을 영에다가 붙이는 사람은 '육신의  생각은' 하는데 육신이 고기덩어리뿐을 육신이라고 한다고 하면 거게 무슨  마음이 있겠느냐? 이러니까 '육신의 생각' 하는 이 것은, 육신의 생각이라 하는  그것은 어떻게 해석을 하겠느냐? 그러니까, 마음을 영에게다 붙이고 마음을  육에다 붙이지 안하는 그 사람들은 말이요,  그 사람들은 육신의 생각이라 하면 마음을 영에다 붙여버리고 육체라 하는,  육신이라 하는 것은 순전히 고기덩어리로만 그렇게 해석을 하고 깨닫는 그  사람들은 '고기덩어리에 무슨 감각이 있으며 이성 비판이 있으며 주장이  있겠느냐?' 이렇게 되기 때문에 부득이 육신의 생각이라 하는 육신을 가리켜서  육신을 '그거는 육신은 고기덩어리가 아니다.' 그렇게 억해를 해 버립니다.

'육신은 고기덩어리가 아니다. 육신은 부패성을 가리켜 말한다.'  육신은 부패성을 가리켜 말한다. 그렇게 해석을 해서 원어를 아는 사람들이  '원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래도 원어에는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부패성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지 이 사람의 고기덩어리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을 해 가지고 원어 모르는 사람들을 억압을 그렇게 해서  합니다.

 원어를 알고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대개는. 이러니까 이번역할 때에 어학은 능하지마는 성경은 많이 보지 안하고  믿음이 적은 사람들이 번역을 하기 때문에 이 번역이 성경대로 번역이 안 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신학교 다닐 때에 공박을 당했습니다. 나는 '육신은 곧,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된 그 육을 가리켜서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은, 마음은  영육이라는 육에 속했지 영에 속한 것 아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그게 아니다.

거게 육신의 생각 육신이라는 그 육신이라 육체라 하는 그것은 부패성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것은 원어에 싹스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 싹스는 부패성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지 그것은 고기덩어리 이것을 가리켜 말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원어를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틀린 줄은 알지마는  뭐라고 반박을 할 수가 없다 그거요.

 그래서 내가 원어 아는 사람에게 '요한복음 1장 14절을 찾아서 읽어보라'  이랬습니다. '그러면 거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했는데 그 육신은 뭘로 돼  있느냐? 그게 쏘마냐 싹스냐?' 이러니까 '그거 내나 원어에 싹스로 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싹스로 돼 가지고 있으면 싹스는 너거는 부패성이라고 이렇게  해석을 하니 그러면 [말씀이 육신이 되 어] 예수님이 부패성 됐다 말이냐?  '그러니까 그때 그러고 난 다음에 그 신학교서 다시는 그말을 하지 안하고 그만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원어를 가지고 자꾸 이래 말할 때 위협을 당하지 말라  그거요. 우리나라 말로도 다 번역할 대로 번역해 놨기 때문에 성경을 아래위  앞뒤를 읽어보고 전체를 읽어보면은 거게 대한 한절 두절이 없어져도 그것을  환하게 바로 알 수 있도록 그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는 명백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성경은 명백성을 가졌다.

성경에는 명백성이 있다. 명백성이 있다 말은 성경 자체가 누구든지 무식한  사람이라도 성경을 읽으면은 성경을 잘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성경 안에  영감이 있다. 성경 안에 있는 영감을 가리켜서 내재적 영감이라 그렇게 일반들이  다 술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여게 '너희'라고 말하는 것은 곧 중생된 영 또 새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너희 보물을' 하는 보물은 내치 여기서 늘 말해 나온 대로  보물은 피소유격이요 주격이 아닙니다. 거게는 이제 활동의 활동면을 말하니까  활동면에 가 가지고는 주격이 있고 피소유격이 있다.

 그러기에 사람이 피소유격이 주격이 되면 그때부터는 죽은 일 하게 된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범죄해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영은 완전히 죽어서  작용적으로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완전히 기능적으로는 완전히 죽어버렸습니다.

 영의 기능은 하나님으로 인해서만, 하나님이 원형이요 그 모형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인해서만 그게 작용도 되고 뭐 자라게도 되는 것이지 단독은 되는 게  아닌 건데 하나님과 연결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 연결이 딱 끊어져  버리니까,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딱 끊어지니까  영은 즉시 죽었고 영이 죽은 동시에 육도 죽었지마는 육은 수십 년을 걸쳐  가지고 차차차 죽어서 마지막에 완전히 그의 육의 행동 하나 하나로 다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육이 구원 얻는 것도 단번에 구원 얻지 못하고 수백 번 수천 번 그  현실을 통해서 살아나고 죽는 것도 현실을 통해서 죽고 이러기 때문에 영은  단번에 죽었지마는 육이 죽는 죽음은 장기간을 걸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게 '너희 보물'이라 하는 그 보물은 마음, 또 몸, 자기 몸 밖에  있는 모든 자기의 그 사물, 자기의 일 자기의 물질, 이것을 작용하는 그 힘이  되는 생명, 그러면 몇 가지입니까? 너희 보물이 몇 가지입니까? 마음, 몸, 자기  몸 밖에 있는 사물, 또 그를 움직이는 힘이되는 그 힘인 생명,  그 생명은 힘으로, 힘으로 말할 때도 많이 있고 또 생명이라 할 때도 있고  그래서 원어에 그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이니 하는 그런 사람들은  '생령이 됐다' 하는 그것을 그 사람들은 번역하기를 '생명이 됐다, 육의 생명을  가리켜 생명이라 한다.' 그렇게 여호와의 증인들은 말해서 그들은 영이 없다  합니다. 영이 없고 육의 생명 이것으로서 최고의 것이다. 그러기에 육의 생명이  죽으면 다 죽고 육의 생명이 살면 다 살아난다 그렇게 그들은 교리를 정하고  믿습니다.

 이러니까 하늘과 땅을 그 바꾸는 데에는 내가 하늘의 소망으로 살고 땅의  소망으로 살지 않고 소망울 바꾸겠다 이렇게 아무리 한다고 해도 안 되는데 그  바꾸는 간략한 아주 간리한 하나님이 정해 주신 방법은 뭐냐 하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다. 하늘 소망으로, 하늘 소망이라 말은 내나 하나님께 소망 둔다  말인데 하나님께 소망 두는 곧 하늘 소망으로 네 보물 취급을 하면 이게  바꿔진다.

 그러면 네가 마음이나, 몸이나, 사물이나, 네 생명이나, 이런 것을 네가 움직일  때에는, 움직일 때에는 '이러면 하늘에 저축이 되느냐 하늘에 생명이 되느냐,  이러면 하늘에 가서' 생명도 말이요 생명도 육의 생명은 하나가 아니고 육의  생명은 여러 수천 개 수만 개도 넘습니다. 육의 생명은.

 왜? 육체라 하는 것이 그것이 단일체가 아니고, 마옴도 단일심이 아니고 이  고기덩어리도 단일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수많은 세포들이 분자들이 합해 가지고  마음도 되고 몸도 됐기 때문에 마음의 분자도 수가 많고 몸의 분자도 수가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분자 분자마다 거게 대한 그 생명이 있는 것인데 그 생멍이 지금  요 시간 살았으면 요 시간 산 내 육체 생명 말이요, 육체의 생명. 육체의 생명은  육체를 작용할 수 있는, 육체를 작용할 수 있는 육체를 활동할 수 있는 그  육체의 기능을 공급하는 것이 그것이 생명인데 육체를 작용하는 요 생명은 요  시간 내가 살았으면 요 시간에 해당된 마옴의 그 요소와, 또 몸의 요소, 그것을  작용하는 그 힘, 작용하는 그 생명은 따로 있고, 그러다가 요 시간 지나가  버리고 나면은 거게 대한 마음도 완전히 그만 영원히 결정돼 버렸고 몸도 영원히  결정돼 버렸고 거게 대한 움직이는 힘도 결정돼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내나 우리는 그 몸뚱이로 그와 같이 있는 것 같지마는 그게 결정이  돼서 하나 결정이 돼서 하나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만큼 지금 양이  적어졌습니다. 양이 적어진 그것이 뭐냐 하면 그것이 이제 늙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루 둘 자꾸 이래 늙어서, 그러면 그것이 자기가 하루 살았으면 그만치  생명이 짧아졌고 십 년 살았으면 그만치 짧아졌고 그러니까 한 살 먹는 아이와  또 두 살 먹는 아이는 다 같이 어린 것 같지마는 벌써 한 살 먹는 아이보다는 두  살 먹는 아이는 많이 죽었습니다. 그 죽은 요소가 많고 산 요소가 벌써 많이  줄어졌습니다.

 그래 가지고 마지막에 한 칠팔십 되면 사람은 고기덩어리는 남아 있지마는 그  속에 기능의 요소는 다 죽고 지금 몇 가지만 남아 있기 때문에 그저 겨우 기어서  엉금엉금 기어 가지고 요렇게 나 모양으로 겨우 이래 작용을 이래 하지,  작용하지만 젊을 때 같은 그런 요소는 다 죽어버리고 절단이 났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이 마음과, 몸과, 자기의 이것을 작용할 수 있는 기능인 생명,  또 자기의 모든 사물, 그것은 단시간으로 일차로 지내서 끝나 버립니다. 일차로  지내서 끝나버리고 또 그다음 것은 그다음 순서입니다. 그러니까 그 순서 순서로  다 끝나버리면 그뒤에는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네가 지금 이  시간에 이 세상 살이를 하고 지나감으로써 이 시간 네 생명, 네 몸, 네 마음, 네  사물, 이것은 하늘의 것이 됐나 땅의 것이 됐나? 그것을 네가 살펴서 하늘의  것이 되도록 노력을 해라. 그러면 요 노력에서만 땅과 하늘나라를 바꿀 수 있는  방편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쌓아두라' 그 말은 하늘의 것이 된다 그말이오. 하늘의 것이  된다, 하늘에 속하게 된다, 하늘에 저축하게 된다, 하늘에 있게 된다. 하늘에  있게 됐다는 그거는 뭐냐 하면은 영생의 것이 됐다, 영생의 것이 됐다, 또  그것은 불변의 것이 됐다, 완전의 것이 됐다.

 이래서,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의 모형으로 된 것이 사람인데  하나님의 속성의 모형, 하나님의 속성을 성경에 나타난 그 강령적으로 말하면  열두 속성인데 열두 속성 가운데에 넷 속성은 공통성 없는 속성 하나님에게만  있는 속성이고 또 여덟 가지 속성은 공통성 있는 그 속성들인데 이렇게 한 시간  한 시간 한 토막 한 토막을 지나감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공통성 없는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화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요 한 시간 살아나감으로써 그 한 시간에 해당된 생명이나,  생명의 기능 말이요, 생명의 기능이나 마음의 기능이나 몸의 기능이나 그 사물의  이용 가치, 사물의 이용 가치 그런 것이 이제 그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해졌느냐 안 변해졌느냐, 또 그것이 영생이 됐느냐 안 됐느냐?  그러기 때문에 영생은 그것은 현실 현실을 통해서 되는 것이 영생입니다.

우리가 중생된 생명은 영생할 수 있는 생명이라 이러고 영생이라 하는 것은  현실을 통해서 그것이 영생이 되고 또 영멸이 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중생된 사람의 보물의 요소, 보물의 기능도, 중생된 자의 이  보물 그것도 다 영원한 사망이 되는 것도 있고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건설구원이라 성화구원이라 그렇게 성경에  말씀하는데, 자기가,  그래서 거게 말하기를 그랬습니다.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다' 그러면 중생된 사람은  영생하는, 영생하는 그 생명을 얻었는데 중생된 사람이라도 그 속에 미워하는  것이 있으면 영생은 안 된다 그말은 자기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가뜩 차서  구속으로 인해서 움직이지 안하면, 구속으로 언하여 움직이지 안하면 그건 다  사망이 되고 만다. 영생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하는 것을 가리켜 말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성경은 수많은 발표로 이렇게 나타나지마는 속에는 들어가면  하나입니다. 겉은 수백 수천이라도 그 속에만 들어가면 하나인, 그러기 때문에  수만 진리가 있지마는 들어가 보면 그게 하나인, 거게 가야 그게 도통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이것을 해석하는 것도 나중에 들어가면 그 하나되고 저리  해석하는 것도, 그 모든 것은 한 진리요 한 영감으로 되어지는 것이 그것이  성경입니다. 그러기에 진리는 하나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땅과 하늘나라의 소망을 바꾸려고 하면은 자기가 이 시간 살 때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움직이는 것은' 마음을 움직여, 마음 움직인다면은 이성을  움직이고, 감정을 움직이고, 또 성품을 움직이고, 욕심을 움직이고, 그 모든  정서를 움직이고 하는 그런 움직임의, 움직임의 힘만 따로 말하면, 그게 한테  붙어 하나지마는 움직임의 그 힘만을 가리켜 말할 때에는 그거 뭐입니까? 그게  뭐이지요? 그것을 가리켜서 생명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생명. 이제 하나지마는  논리적으로 이렇게 할 때에는 그것이 생명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나 우리의, 마음에도 수많은 요소들이 있는데 그 요소들이  제가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안합니다. 그걸 움직이게 하는 생명이 있으니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움직이게 하는 그걸 가리켜서 생명이라 하는데 생명이 떠나면  그것이 그대로 있지마는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몸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이 현실을 살면서 이 시간 내가 이렇게 움직이는 이 생명,  그러면 움직임 그럴라 하면 해석이 좀 힘들고, 능숙한 사람은 그거 그만 그리 돼  버리지만 처음으로는 그걸 할라 하면 좀 복잡하니까 언제 그것 다 말하기 어렵다  그거요.

 이러니까 내가 지금 생명 작용하는 이 생명의 기능은, 생명의 기능은, 이 시간  움직이는 이 생명의 기능은 이것은 하늘에 속하게 되느냐 땅에 속하게 되느냐?  이것은 영생을 지금 영생을 얻게 되느냐 영원한 사망을 얻게 되느냐? 이것은  하늘의 것이 되느냐, 하늘의 것이 되느냐? 하늘의 것이 된다 말이 영생하는 것이  됐다 그말이요, 그것이 성화됐다 말이요. 그러면 그게 무궁세계 가 가지고  자기의 기능으로 써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현실에서 그것이 그만 하늘에 속하지 안하고 영생하는 기능으로 되지  안하면 영원히 멸망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부활할 때에 시간 사용한 시간  사용된 마음의 기능이나 몸의 기능이나 사물의 그 이용의 가치, 이용의 힘이나  자기가 이런 것들을 움직이고 있는 그런 생명의 힘 생명의 기능 그것은 부활할  때는 없어져 버려. 부활할 때는 그 토막은 그것은 그만 톰박 끊어져서 거게는  공이 돼 버리고 맙니다.

 이것을 비유로 해서 '성도들이 모두 다 세마포 옷을 입고 있다' 옷을 입고 있는  이 세마포는 자꾸 날을, 베를 짜려면 이래 날을 두고서 씨로 가지고 자꾸 북을  가지고 씨로서 왔다 갔다 이라면서 짜 올라가는 것처럼,  자기가 이 세상에서 일생이라 하는 일생을 둔, 비유컨대 베 날과 같은 거기다가  한 시간 한 시간 현실 현실에 씨를, 씨를 이래 북으로 가지고 이래 이러고  이쪽으로 가면 또 하나되고 이쪽으로 가면 하나되고 이래 가지고 얽어서 나가는  것과 같이 그렇게, 세마포 옷을 입고 있으니까 그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 그리 말했어.

 그 옳은 행실이다 그말은 행동이 옳은 행실이라고 표시한 것은 자기가 부활할  때에 모든 기능은 이 세상에 한 시간 한 시간 생활하는 가운데에서 구속함을  받은 구원함을 받은 그런 것들이다.

 그러기에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 입고 사는 옷은 뭐냐 하면은 마음과  고기덩어리, 그 육의 생명, 그 사물 그것들이 움직여진 행동은, 움직여진 행동은  그것은 무궁세계에 입고 사는 의복이 되고 그 행동한 그 기능은 부활한 부활체의  자기의 실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할 때 어떤 사람은 실력이 있고  어떤 사람이 하나도 실력이 없는 사람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도 다 같은, 뭐 키가 커서 대인이 아니고 꼭 형체는  같이 생겼지마는 하나는 속이 퉁 비어서 그 사람은 바보가 되고 한 사람은 뭐  보기는 참 조그만하게 젓가락으로 찍을 만한 조그만하지마는 그 사람의 속에  기능적으로는 굉장히 강하고 장성한 그 강장한 사람이 있는 그것이 인생과  인생의 비교의 가치입니다. 인생과 인생 가치 비교가 된다, 그것이 인생과  인생의 차별이 되어진다, 가치의 차이가 되어진다 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서 무궁토록 자기가 입고 다닐 의복 의복이라 말은  그건 그것도 비유인데 의복은 겉어머리에 입고 있지 많습니까? 의복을 좋은  의복을 입으면 참 의복이 날개라고 좋은 의복을 입으면 다른 사람들 보기에 다  아름답고 자기도 보기에 아름답고 나쁜 의복을 입으면 아주 추해지고 그런  것처럼 무궁세계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현실 현실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그것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 하늘에 쌓아두는 것 성령으로 살았느냐? 하늘에  쌓아두는 그건 다 덕 있는 일이요 가치 있는 일인데 이 세상에서 덕 있고 가치  있는 그것이 무궁세계에 입고 다니는 옷과 같이 그런 것들을 사람들이 입고  다닌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는 지금 물질 이걸 가지고 입고 다니지마는 물질의 의복  속에는 뭐이 들었느냐 하면 그 사람의 이력이 들어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이 아무리 겉어머리는 비단옷을 입고 있다 할지라도 속에  이력이 없으면 그 사람 비단옷 입고 다니는 것이 그것이 아주 천해 보이고  그사람이 아주 헌두더기를 입고 다녀도 그 사람의 그 이력이 아주, 참 다른  사람이 사모할 만한 존경할 만한 그런 이력이 되면은 헌두더기를 입고 다녀도  속에 있는 그 속옷 빛, 속옷 광채가 겉어머리 나쁜 옷 험한 것을 덮어 가룬다  그말이오.

 또 아무리 겉어머리 옷이 좋아도 속이 그게 덕이라 하는 것, 덕이라 하는 덕의  옷이 험하면 이 겉어머리 아무리 좋은 옷을 해 봤자 덕의 옷이 더러운 그것이  속에 비추어 나오기 때문에 비추어 나오니까 그 사람은 천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실은 물질을 입고 있는 그 속에서는 덕을 입고 다닙니다. 그 사람의  신덕을 그 사람이 입고 다니는, 그게 실상은 그렇습니다. 다 같이 보니까,  손양원 목사님은 사람들이 세 번 놀란다 하는데, 그때 거창읍에 제가 강사로  청하러 갈 때 제가 갔었는데 손양원 목사님을 못 봤어요. 사모님만 보고 못  봤는데 집회를 하러 왔는데, 거기서는 만난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없는데, 손  목사님 오는 줄 알고 가니까 그 시간 오는 줄 알아도 안 와요. '강사가 안 와서  탈났네' 이러니까 강사는 벌써 찾아 가지고서 그 예배당에 가 있다 그거요.

있는데, 봐도 몰랐어.

 몰랐는데, 왜 몰랐느냐? 오는데 보니까 오바도 보니까 외투도 입기를 똑 여자  외투, 키도 똑 요만합니다. 요만하이 조그만하이 그러니까 어데 거지가 하나  왔는가? 여자 외투 하나, 남자가 여자 외투를 입고 있으니까 아주 천하게 봤다  그거요. 그래 가지고서 조그만한 사람이 그래 오니까 다 몰랐어.

 이랬는데 그날 밤부터 집회를 하는데 사람은 손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하면  얼마나 아마 커다랗고 위대하고 지금 굉장할 거다 하고 이랬는데 강단에 서  보니까 조그만한 어린아이가 하나 섰다 그거요. 그래서 사람들이 너무 작아서  놀라고 또 그러고 난 다음에 설교를 하는데 조그만한데 소리는 어떻게 큰지?  소리가 커서 놀라고 또 그러고 난 다음에는 그날 집회를 하는데 그만 은혜가  많아서 놀라고. 손 목사님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세 번 놀란다 그렇게 말해.

 그러니까 그렇츰 조그만하지마는 기능이 그래 놓으니까 보는 사람도 못  보지마는 아주 신덕의 권위의 그 영광을 입으니까 그 사람의 그 광채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서도 실은 물질 입고 다니는, 물질 입어서 물질로 그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그것도 있지마는 그거는 아주 저급이 물질보다도 그 사람의  신덕을 가지고 아름답게 만드는 그것이 장성한 사람들이오. 신덕보다도 그  안에는 그 기능,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제 광채 있게 만드는 것이 그것이  세상에서도 사람의 옷들인 것이요 가치들인 것입니다.

 또 시간이 너무 많이 지냈는데 어짜든지 새벽으로 나오십시오. 나오면 예수  믿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자꾸 이래 배워 가지고는 또 다 안 되니까 자꾸  자기가 배워 가지고 그대로 실행을 해 보면 하나 알면 둘 알고 둘 알면 셋 알고,  이래서 실행을 해서 똑 산에 올라가는 거와 같소.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십 메타 올라가면, 구 메타에 있다가 십 메타 올라가면  그만치 좀 시야가 넓어집니다. 보는 게 넓어져서 십 메타에 올라가면 십  메타에서 볼 수 있는 건 다 보게 돼. 또 백 메타 올라가면 백 메타에서 볼 수  있는 거는 다 보게 돼.

 그러니까 백 메타에 올라가면 그 사람이 이것도 말하고 저것도 말 하니까 '언제  저걸 다 배웠노?' '저걸 언제 다 연구했노?' 아니, 거기 올라가면 보이는 건 다  같이 보여. 그러니까 이것 보이니까 이것도 말하고 저것 보이니까 저것도  말하고,  그러니까 구 메타 올라간 사람이 십 메타 올라간 사람의 것을 보이는 것 '자,  저거 있다. 저거 있다.' 말하는 걸 알면 참 그거 답답한 일이고 볼라 해야 다 못  보고 '저렇게 어찌 많이 보는가?' 저도 십 메타 그것만 올라가면 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뭐이든지 듣고 실행해서 자기의 신앙의 도수가 올라가면,  신앙의 인격이 조금 자라가면 아주 시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라감으로 모든 것 알라 해야 되지 자기가 그걸 연구해 알라 해서는 안  돼. 그러니까 하나씩 실행하면은 자기가 변화되고 자기가 변화가 되면 변화된 데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행 없는 사람은 죽도록  고생해 봤자 신앙에 대해 무식한 사람 되고 실행하는 사람은 그만 쉽게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다 알게 돼 버려.

 그러니까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믿는다 하니까 주님 따르는  사람들이라 그말이오.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말에 거하면'  그거는 실행을 하라 그말이오. 내 말에 거하면 그러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네가  변화가 되고. 네가 변화가 되면은 처음에 실행하던 그 말씀을 아는 것이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네가 변화가 돼 가지고 알 때는 달리 알아진다.

 알아지면 그 진리는 뭐이냐? 그 진리는 너를 자유케 한다. 그 진리는 네가 그  진리가 너를 도와서 진리와 영감대로 중생된 너 중생된 자의 본성대로 자유하고  살 수가 있고 어떤 세력에게 꺾어지지 않는다 하는 그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아침에 또 이러니까 거기 더 보증한다는 게 복잡해 지는데, 땅과  하늘나라에 바꾼다는 것은 요 방편으로만,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 그  현실에서 '내가 이러면 내가 몸을 이렇게 활동하면 이 몸의 기능이 땅에서  썩어지느냐 하늘에서 영생이 되느냐?' 그러면 자기 현실 현실 활동할 때 몸의  기능 이것이 영생화 되느냐 영멸이 되느냐?  자기가 또 마음을 움직일 때 마음의 기능이 영생 되느냐 멸망이 되느냐?  자기가 이 모든 작용을 하는, 육의 생명은 그걸 다 작용, 그걸 작용 일으키는  것들인데, 모타와 같은데, 공장으로 말하면 전기 공장에 모타와 같은 것인데 그  모타인 그 생명의 기능은 이것은 영생이 되느냐 이 생명의 기능이 이제 멸망이  되느냐?  내가 이 모든 사물을 취급했는데 이 사물 취급한 이 일은 영생의 나라에 가  가지고서 내가 취급한 이 사물의 이용 가치, 사물의 기능 말이요, 사물의 기능  그것이 영생의 나라에 가서 내가 영원히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지느냐 이것이  그만 이 세상에서 영별해 버리고 그거는 영멸해 버리고 그리 되느냐?  그러니까 '이 사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성령과 진리대로 사는 것을 탄식하고  고대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현실에 있는, 우리 주머니에 있는, 우리 호주머니에 있는 이 돈이  말을 못 하는 줄 알아도 성경에는 말을 한다 했다 말이오. 호주머니에 있는 돈이  지금 탄식하고 고대하기는 요 호주머니에 있는 돈이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내가 진리와 성령으로 살아서 이 심신이 생명이 영생하게 되변 영생에게 이용된  이 백 원 이거는 영원 세계에서 이거 작용할 수 있는 그 기능으로 옮겨진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돈 이것을 사용하는 이런 것도 이것이 무궁세계에 자기의 사용할 수  있는 이용 가치의 기능으로서 화해지는 것도 있고 그것이 이 세상에서 그만  자기와 영원히 이별해 버려서 영원히 멸망하는 것도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물도 이 구원을 바라서 탄식하며 고대한다고서 로마서 8장에 말씀한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하늘나라로 세상과 바꾼다는 것은 자기 현실에서 내가 이렇게  움직이는 이 힘, 내 마음의, 마음의 힘을 주고 하는 이 생명은, 이 생명의  기능은 지금 영생이 되느냐 영멸이 되느냐?  내 움직이는 마음의 그 기능, 마음으로 생각 한번 했다, 감정 한번 먹었다,  욕심을 품었다, 비판을 했다 하는 마음의 기능은 이 시간 영생이 돼 버리느냐  영멸이 돼 버리느냐?  내가 이 몸으로 움직인 몸의 힘 그거는, 몸뚱이는 그대로 있지만 몸의  기능이라는 이 기능은 영생이 되느냐 영멸이 되느냐?  내 이 사물은 영생이 되느냐 멸망이 되느냐?  요것을 그 현실 현실에서 생각하는 요게서 하늘나라와 세상 나라가 자기의  나라가 바꿔지지, 거게서 자기 나라가 바꿔지지 그거는 하지 안하고 그냥 암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실질로 만드는 이 건설 방편을 이렇게 해 놨는데  이렇게 하지 안하는 자는 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집과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래 위에 있는 집이라,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자기로 인해서  지은 것이요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거 했다 그겁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신앙 섕활이라 하는 것은 자꾸 일 초 일 초, 참 한 시간 한 시간, 한 행위 한  행위 거게서 자꾸 이래 사는 데서 실생활에서 뭐 되는 것이치 절대 상상적인  나라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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