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5가지 지식과 교리 전도  선지자선교회

     

1988. 8. 9. 새벽집회

 

본문창세기 21031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께서 인류 시조를 지으시고 사랑하실 때에 죄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고 불의가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고 하나님과 대립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때는 깨끗합니다. 처음 인류 시조는 죄 없는 사람이며 불의가 없는 사람이며 하나님과 대립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으로 변하지 안하면 그는 변할 때까지는 언제든지 그대로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랬는데, 그 후 죄로 말미암아 사망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인류 시조의 사망케 된 그 죄를 가리켜서 원죄라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원죄를 범한 일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부정모혈로 나는 일반인의 전 대표로 아담을 상대하셔서 하나님과 신인 계약을 하시고 이 계약을 아담이 어긴 그 어김은 곧 우리가 어김이 되어 그 어김에 동참해서 같이 정죄를 받은 전 인류입니다.

 

이래서, 인류 시조 곧 신인 계약의 대표 아담이 범죄한 그 죄를 가 리켜서 원죄라고 말하고 또 그 쇤죄로 인해서 범죄한 우리의 평생 짓는 죄를 신학적으로 본죄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이 범죄하기 전에는 사람은 죄가 없었고 불의가 없었고 하나님과 대립이 없는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랬는데 이 사람이 범 죄함으로 죽게 됐습니다. 그러면, 범죄하게 된 그것이 곧 사람이 죽게 된 것입니다.

 

범죄하게 된 그 원인이 사람이 사망하게 된 원인이라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면 바로 아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범죄하게 된 그 원인, 곧 사망하게 된 원인이 어디서부터 생겼는고 하니 자기의 영에게서 생긴 것 아닙니다. 영에게서 생기지 안했습니다. 전부가 육에게서 생겼습니다. 육은 뭣을 가리켜 육이라고 하는고 하니 육은 곧 마음과 몸 이 둘로 합하여져 있는 것을 가리켜서 육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속성과 같이 지음을 받아 하나님의 그 속성과 같은 속성을 가진 그것이 영입니다. 영은 하나님의 모형이요 하나님은 우리 영의 원형입니다.

 

이 영은 하나님 외에는 다스릴 수도 없고 이용할 수도 없고 하나님만이 이 영에게는 관계합니다. 혹 사람이 타락 후에는 하나님이 통 치하던 그 영을 마귀가 통치하게 됐다 그렇게들 말하는 것이 거의 신학의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타락한 후는 마귀가 영을 통치하기 때문에 사람의 영이 그 후 부터는 범죄하는 하나의 기관과 존재가 됐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 신학 해석입니다.

 

이는 영의 존재가 어떤 것인가를 알지 못했고 또 거게 대한 짓이 범위 넓게 성경에 가득 찼지만 하나님이 눈을 열어 주지 안하니까 또 그 면에 대해서는 모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은 하나님만이 그와 접선할 수가 있고 또 하나님 만이 다스릴 수가 있고 또 하나님에게만 피동될 수 있고 그 영은 수많은 피조물들이 있지만 하나에게도 상관하지를 못하도록 제한돼 있습니다.

 

그 영은 다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자기의 육의 일부분인 마음에게만 상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만 가지고 아래로는 자기 마음과만 관계를 가지고 자기 마음은 자기의 몸과 관계를 가지고, 마음은 자기 몸과만 관계를 가집니다.

 

여게까지는 절대 제한 되어 있는 것으로서 이렇게 탈선을 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영에게, 영은 마음에게, 마음은 자기의 몸에게 관계를 가지고 역사할 수 있고 이제 그 몸은 그 밖에 있는 수많은 피조물들에게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래서 사람의 영은 어디든지 그것이 접할 수도 있고 또 기능을 작용할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람의 영은 위로는 하나님에게만 아래로는 자기의 마음에게만 거게만 작용하지 다른 데는 작용하지를 못합니다.

 

또 자기의 마음도 자기 몸에게만 작용하지 몸 밖에 어떤 물건이나 어떤 사람의 마음에도 작용하지 못합니다. 다만 그 마음은 자기 몸에게만 작용합니다. 자기 마음이 누구의 몸을 웃게 하고 울게 하고 그렇게 기쁘게 하고 활동하게 하는 그런 작용은 전혀 못 합니다. 제한돼 있습니다. 이제 몸에 나와서 그 몸은 모든 피조물 어떤 것이든지 다 접할 수 있도록 그렇게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사람이 범죄함으로 변질됐습니다. 범죄함으로 변질되어 본 지위에서 쫓겨났고.또 이제는 관련이 다 변질이 돼 버렸습니다.

 

변질된 것은 영이 하나님으로만 관계 가지고 자기 마음으로만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영이었는데 이 영이 이 관계를 가지는 이 위치, 하나님에게서 피동되고 자기 마음을 통치하고 하는 이것이 절대인 자기의 지위요 의무요 책임이요 본분이요 또 하나님이 주신 생애 법 칙이요 규범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다스려야 할 자기 마음을 영이 다스리지를 못하고 마음이 탈성되는 그 독행하는, 마음이 영에게 통치받지 안하고 제대로 행동한 그 행동을 한 것이 곧 뱀으로 더불어 접선하고 또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먹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었을 때에 곧 사람은 범죄하게 됐습니다. 사람이 범죄한 것은 영육이 다 범죄하게 됐는데 영이 범죄한 것은 아니나 영이 책임을 지고 있는 주격이 되어 있는 주격 위치를 가지고 있으면서 주격 그 직책을 감당치 못한 것이 곧 그 마음과 몸이 합작해 가지고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선악과를 먹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은 영이 먹은 것이 아니고 영은 또 먹을 수도 없고, 영은 먹지도 안했고 먹을 때에 동참하지도 안했습니다. 안 했는데 곧 이 마음이 독단해 가지고 선악과를 먹은 그것이 범죄입니다.

 

그러면, 범죄는 영이 한 것이 아니고 마음이 범죄했습니다. 마음이 범죄하는 그 범죄를 육이 따라서 둘이 협동돼 가지고 선악과를 먹은 범죄를 했으니 이것이 곧 육체의 행동입니다. 순전히 육체의 행동입니다.

 

이래서, 창세기 6장에 사람이 육체가 되었으니 하는 것이 사람이 육이 되었으니 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육이 된 것은 벌써 사람은 영이 주격되고 또 마음은 영에게 지배받고 몸을 다스리고 이래야 되는 것인데 그 영과는 관계를 끊고 독단 행위를 한 그것이 육입니다.

 

그러므로 영은 범죄하지 안했으나 범죄한 영이 죽으리라 하는 것은 영이 주격되어 있는 주격 의무와 책임에서 그 마음이 범죄한 그 범죄를 책임져 가지고 의무 책임 직책 책임에서 영이 정죄를 받았고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신약에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요 육의 생각은 사망이라' 하는 그 육은 곧 영과 관계를 끊고 이 마음이 독단 행동하고 마음의 독단 행동에 몸이 지배를 받아서 하나되어 행동한 그것을 가리켜서 육신의 생각이라 혹은 육체라 그렇게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거는 아직까지 나타난 교리는 아닙니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음받은 것이 사람의 영인데 그 영은 하나님만이 그를 움직일 수 있는, 하나님에게만 피동될 수 있는 것이 영입니다. 배 암에게나 어떤 피조물들에게 피동될 수 없는 것이 영입니다.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도록 지어져 가지고 있는 것이 영입니다.

 

또 그 영은 활동 범위가 어디따나 피조물에게 가서 접해 가지고 활동하지를 못합니다. 자기 마음에게만 작용하고 다스릴 수 있고 접선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영의 한계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이 피조물에게 대해서 사람에게 대해서 역사하는 것도 한계되어 있으니 하나님은 영을 통해서만 작용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에게만 영은 마음에게만 마음은 몸에게만 이제 몸은 모든 범위 넓은 피조물들과 접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후에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 하는 그런 것은 신학자들 중에 많이 그래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덕 행위를 하는 것은 중생되지 아니한 타락한 사람들에게도 도덕 행위가 있는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다 죽지 안하고 남아 있는 그 부분으로 인해서 도덕 행위를 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 신학은 성경대로 용납지 못합니다. 성경에 위반된 신학입니다.

 

그러면 영은 하나님에게만 관계를 가지고 거게만 피동되지 어떤 피조물에게도 피동될 수 없도록 지음받은 것이 사람의 영이라 또 위로는 하나님 아래로는 자기 마음에게만 접선할 수 있도록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의 영이라, , 마음은 위로는 영에게만 접선하고 피동되고 또 아래로는 그 몸에게만 접선되고 작용할 수 있도록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그 영과 관계가 끊어지면 그 사람은 짐승과 꼭 같습니다. 이래서 `육체가 되었으니' 하는 말은 영과는 관계가 끊어지고 순전히 육으로만 움직이는 것을 말하고, 육신의 생각이니 또 육신의 욕심 소욕이니 하는 것은 다 영과의 관계가 없는 육 단독 행위를 성신 단독 행위를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이래서, 이것을 지금은 아직까지 이 세계에 신학적으로, 저는 신학을 넓게 공부를 하지 안하고 연구하지 안햇지만 아직까지 개인적으로는 깨달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깨닫고 생각했지만 그런 사람들은 다 발표력이 모자라고 또 이 모든 세상 발표력인 학문이 모자라기 때문에, 또 그런 데다 관심을 가지지 안하기 때문에 별로이 그것이 공개되지를 못했고, 그것을 다 공개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공개하는 방편에만 주력하고 하나님과의 접선에는 주력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또 그런 사람들은 몰랐고, 아는 사람은 발표를 못 하고, 이래서 세계에 깨달은 사람들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이 되나 아직까지는 제가 들은 대로는 한번도 들어보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접할 때에 영과 접선해 가지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가진다.

 

중생한 후에도 관계를 그렇게 가진다. 또 영은 자기 마음에게만 관계를 가지도록 절대 제한돼 있다. 또 마음은 자기 몸에게만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제한돼 있다.

 

이제 그 마음은 자기 몸에게만 관계를 가지도록 자기 활동 범위는 자기 마음이라는 그 무대 밖에를 나가지를 못한다, 마음이라는 그 무대 안에서만 작용한다 하는 그것은 지금 생각하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만히 생각해서 하나하나 배울 때에 자기가 확실히 깨달아 믿어지지 않는 것은 거게다가 기록을 하든지 표를 해 놓고 `요것은 내가 아직까지 확정을 짓지 못하고 내가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으니 요거는 어찌 되나? 하는 것을 연구 과제로 두고 언제든지 확정을 짓고 확신을 하고 나가야 됩니다. 확정짓고 확신하고 나갈 때에 그 확정과 확신이 이 면의 확정, 확정이라 말은 확실히 정했다, 요렇다.

 

또 확신이라 하는 것은 그렇다고 자기는 확실히 인정했다. 이것이 확정 확신인데 이렇게 나가면 -이것도 좀 알기 어려운 말입니다. 확정과 확정이, 이 확정과 이 확정이 둘이 합해지고 이 확신과 이 확신이 둘이 합해 가지고 자기가 그 둘이 합하지 안하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일들을 발견하게 되고 자기가 지식하게 되는 것이 이것이 곧 믿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를 들면 아브라함 시대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런 그 부활이라 하는 것은 그때는 사람들이 지식하지를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부활이라는 그 지식은 인간계에 들어오지를 못 했고 또 인간은 부활이라 하는 그 지식 속에 발을 내 디디지를 못했었습니다.

 

못 했는데 아브라함이 제일 초보로 그 지식에 발을 내 디뎠으니 그것은 아브라함의 그 믿음의 능력으로써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그 하갈에게서 난 서자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인정하지를 안하고 곧 그 늙어서 지금 해산할 수 없는 그러 할마이 사라에게서 꼭 난 사람이라야 그 자손으로 인정을 하고 또 거게다가 축복을 하시고 또 그것에게서 생겨난 자손이 하늘의 별의 수효와 땅의 모래의 수효와 같이 되어진다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 후에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 하셨는데 버제로 드리는 것은 잡아서 불에 태워서 완전히 재가 되도록 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번제입니다.

 

그러면 이삭을 하나님이 번제로 드리라고 했을 때에 아브라함은 거게서 어누리해서 듣지를 안하고 하나님은 말씀을 이렇게 하시지마 는서도 그래도 말씀만 이래 하시지 어누리해서 실상은 그렇지 아니할 것이라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누리하는 그런 행동을 하지를 안했습니다.

 

번제로 드리라 하니까 이삭을 완전히 재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이래 드리라 하는 것으로 알았고 그렇게 또 재를 만들어 드릴라고 그 일을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럴 때에 아브라함은 부활이라 하는 것을 거게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이 이렇게 약속하신 약속을 변치 안하니 이 이삭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자손들이 나고 복의 근원이 된다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또 이삭을 재로 만들라고 하니까 이 둘이 모순되니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고 신실하니 그 자손이 생육된다는 말도 변치 안하는 말이.요 또 죽여서 불에 태워서 재를 만들라는 말도 변치 안하는 말이니 이 둘을 다 믿을 때에 거게서는 필 연적으로는 둘 다 믿는 그 믿음,의 작 용으로써 `재된 것도 살야나 가지고 아이 낳을 수 있다 하는 그 부활이라 하는 것을 비로소 그 부활이라는 지식을 두 믿음의 작용으로써 부활이라는 그 지식에 발을 내 디뎌서 아브라함은 부활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 부활을 말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다시 죽으면서 터가 있는 가나안을 바라본 것은 지금 있는 가나안이 아니라 영원히 진동되지 아니할 그 터가 있는 가나안을 바라봤다는 것을 그 후에 성경에 증거를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아담은 죄 없는 사람이요, 우러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현재는, 아담은 죄 없는 사람이요 우리는 그 아담으로 말미암아 실수돼서 죄 있는 사람이요, 불의한 사람이요, 하나님과 절연돼서 대립된 원수된 사람이요, 죄 있는 사람이요 불의한 사람이요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인데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 없는 사람 됐습니까 사 죄받은 사람 됐습니까? 사죄받은 사람 됐습니다. 사죄받았다 말은 죄인되었던 것이 죄 없는 사람 됐다는 말을 사죄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죄받은 사람이 됐습니다.

 

불의가 없던 사람이 불의한 사람이 됐는데 불의한 사람이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의 사람이 됐습니다. 율법 완전 이행자의 의의 사람이 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은 의인입니다. 우리는 의인입니다. 불의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불의가 없는 사람이 아니고 불의가 없는 사람이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사람이 됐습니다. 이제 불의한 사람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의인이 됐습니다.

 

하나님과 대립됨이 없는 그 사람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대립되는 이런 원` 수된 사람이 되었었는데 둘째 아담의 대속으로 말 미암아 하나님과 친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이래서, 사람이 죽게 된 그 모든 그 순서와 원인을 보면 어떻게 해서 죽었는가? 죽은 것은 영으로 말미암아 죽지 안했고 심신으로 말미암아 죽었다 하는 것을 우리가 똑똑히 기억을 하고 지금도 우리는 사좌, 칭의, 화친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우리가 단속할 것은, 우리가 단속한다 말은 자기가 자기를 단속하는 것인데 자기가 자기를 단속하는 것은 오직 마음과 몸만 단속하면 뒵니다. 우리가 단속할 것은 마음과 몸만 단속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마음을 자기가 단속하고 자기 몸을 자기가 단속해서 이 심신만 단속하면 되는 것이지 그 외에 딴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달라고 이렇게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시니까 달라고 간구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성경헤 되어 있는 것은 사람들이 강퍅하고 또 모두 연약해서 확고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구하라 주실 것이요 하는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그분이 주시고 다른 이는 줄 수 없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강조해서 점점 인식하고 인식해서 그 인식이 확고히 하여 하나님에게만 받을 수 있고 하나님만이 나에게 줄 수 있다는 이 관계 사실을 깊이깊이 인식시키고 인식시키고 재인식을 시키는 그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도 성경에 보면 우리가 간구를 해서 무엇을 하나님이 이렇게 주실 것으로 이렇게 보여지나 실은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하고 요긴한 모든 것을 다 완전히 예비해 놓으시고 계십니다.

 

예비해 놓고 계시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대해서 우리가 이래 달라 저래 달라 실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무한히 다 구비해 놓고 계십니다.

 

또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가 중생된 영을 통해서 관계가 맺어지는 것인데 하나님과 우리 마음이 직접 연결 못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영과에 연결하코 영과 연결된 그 하나님과 우리 마음은 연결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중생된 영을 통하지 않고는 연결하지 못합니다. 이래서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 심신에게 하나님히 자녀.된 이 비밀을 알려 준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다만 할 일이 뭐이냐? 할 일은 우리 마음은 중생된 영에게 접해 가지고 자기 속사람, `속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체에는 다른 법이 있다' 하는 육체라 말은 심신을 말합니다. 거게서 내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고 또 육체는 다른 죄악의 법에 지금 복종하고 있다 하는 것으로써 자기 한 사람을 두 사람으로 냐누어 가지고 그 소욕과 소행이 나누어져 가지고 있는 것을 거게서 분리시킨 그 속사람은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연합,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된 그 중생된 영을 말합니다.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신 그 부활로 인해서 우리 사람에게는 비로소 완전한 생명이 접선하게 됐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부활하시지 안했으면 우리 인간은 참된 그 생명에 연결은 가지지를 못합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가졌는데 거기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하나님의 그 크신 긍훌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 리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에게는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나는 은혜가 생겨지게 됐습니다. 우리가 죽은 것이 살아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공로로 인해서 준은 것이 살아나게 됐지 달리는 살 아나게 되지를 못합니다.

 

이래서 중생된 영은 벌써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중생됐습니다. 영이 증생된 것은 몇 가지로 중생됐습니까, 손가락으로? 영이 중생된 것은 몇 가지로 중생됐습니까? 다 손가락 한번 들어 봐요. 뭐 전부 이거 다 조는 것 같은데.

 

 

조는 것 같은 것은 여러분들 여게 대해서 이거, 이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 지금 이래 들어서 여러분들이 그저 받아들여 놓으십시오, 여러분들 속에 마치 전대 주머니를, 전대를 열어 놓고 자꾸 받아들여 놓으면 전대 안에 들지 안했소? 전대 안에 들었으면 그것이 어떤 시기에 기회에 어떤 처지에 그것이 하나씩 나옵니다.

 

나와 가지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를 주관하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살리시고 힘있게 합니다. 그럴 때에 나옵니다. 이러니까 그저 받아들여 놓으십시오.

 

왜 그 지금 말하는 것은 자꾸 이렇게, 이게 설교가 나가는데 이 설교록에 나가는데 나가면 수많은 그 학자들이, 수많은 학자들이 보고 비판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할 사람이 있을란지 없을갈지 모르지만 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또 수많은 고등 비평가들이 또 많이 말합니다. 고등 비평가라 하는 것은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를 이렇게 훼파하는 것, 하나님의 도를 이렇게 삣고 찢고 깎고 이래 갈라뜨려서 하나님의 도의 이 정 확성을 자꾸 흐리게 만들고 틀렸다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 성경도 틀렸다 하는 것을 강하게 지식적으로 이렇게 반대하고 훼방하고 있논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고등 비평가들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고등 비평가는 많은 학식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부정케 하는 그런 자들입니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설교록을 가지고 놓고 떼고 삣고 깎고 쪼개고 헐고 많이 할 것입니다. 안 해도 한다고 보고 저는 말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그들이 삣고 깎는 것도 상관없고 쪼개는 것도 상관없고 요는 바로 되나 안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로 됐느냐 안 됐느냐 하는 것이 이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만일 바른 것이라도 그겄이 요래도 될 수 있고 요래도 될 수 있다고 할 때에는 나는 그 의문 정죄에 걸립니다. 내가 의문 정죄에 걸립니다. 사람들의 그 유혹의 의문 정죄에 걸립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지금 생각하면서 아무리 비판해도 의문 정죄에 걸릴 수 있는 그런 미개하지 안했고 거게서 구비해서 그 한 마디 해 놓으면 그것 때문에 거게서 정죄를 받지 안할 수 있는 그런 최소한 다른 사람들에게 정죄받지 안할 수 있는 그 길을 지금 제가 증거할라고 애를 쓰고 있고, , 다른 사람들에게 유혹받지 안하고 알라면 알 수 있을 때까지를 해 볼라고 하나마 제가 힘이 모자라서 그것이 다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 중심은 그런 것입니다. 정죄를 받지 안하도록 할라고, 그러기에, 말한 것을 단번에 정죄를 하지만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서 그 징죄가 차차 차차 없어지고 이제 다 일반화되고 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데에서 `예수님의 그 인성은 피조물이라' 그 말을 뭣 때문에 했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 우펀에 앉아 계신다' 하는 그 말씀을 할 때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은 예수님희 신성이 승격된 걸 말한 것 아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 다만 예수님이라면 신성도 있고 인성도 있는데 인성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승리자로서 가장 하나님에게 신 임받고 하나님의 그 무한하심이 우편에 앉은 그자가 승리했고 신실했고 충성했고 진실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한의 충만은 우편에 앉은 그자를 통해서 모든 천상 천하 영계와 물질계븟 우주 모든 만물들에게 다 거기에 다 배급하고 계신다. 거기에 다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 이러기 때문에, 우편에 계신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말하는 것보다도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주요적으로 말씀을 한 것이다.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와 꼭 같은 피조물인데 피조물로서 모든 피조물 위, 자존자 하나님 한 분 밑에, 그 존귀한 위치를 가지게 된 것이 예수님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이라고 이렇게 증거를 하다 보니까 자연히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이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은 영광스러운 지위요 존귀한 지위요 아주 승리한 지위요 앞으로 무한한 그 시은의 영광의 존귀를 가진 그 위치 그 지책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데 그것을 신싱이라고 하면 아무 뜻 없습니다.

 

신성은 근본부터 하나님의 본체십니다.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신성이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은 뭐 승격입니까 그대로입니까? 그대로요 승격 아니오. 그대로요.

 

그런데, 다만 예수님의 신인 양성 일위가 그렇게 됐기 때문에 일위 이기 때문에 그 일위에는 곧 피조물도 거게 들어서 피조물이 피조물 위 창조주 한 분 밑의 그 위치를 가진 거기에다가 가치를 두고 말씀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이라 이랬었는데 그것 때문에 이 논리가 OO신학에서 논리가 있어서 아주 잠깐 동안 조금, 한번 좀 분주하게 떠들었다고, `어디 이럴 수가 있나? 이거는 예수님을 피조물이라니?' 어디 이렇겠느냐고. 퍼득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이래 가지고 많은 말이 있었으나 그것은 `예수님이 피조물이라' 이라고 난 다음에 퍼뜩 생각하니까 그 말이 실수가 돼서 잠깐 일어났다가 그다음에는 그민 가라앉았습니다. 가라앉았고 그거는 그만 즉시 그런 이 단이라는 말을 정죄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데 대해서는 한국 교회가 거의 정죄했습니다. 저는 OO노회라고 하면 OO노회인데 그 노회는 전국에 노회 중에는 수가 제일 많은 노회입니다. 그 노회서만 중생된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을 이단이라고 정죄를 한 줄 알았는데 그 뒤에 며칠 전헤 말 들으니까.

 

O교파에서도 정죄를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OO교파에서도 정죄를 했는데, 어떤 자리에서 `이것은 정죄한 이것은 잘못됐기 때문에 우리 O교파에서도 정죄한 것을 내가 확실히 안다. 아니까 이거 정죄한 이것은,' O교파에 있는 유력한 분입니다.

 

유력한 분이요 위대한 분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인데 그분이 `아무래도 우리는 이거 이것이 잘못되었으니까 이것은 고치고 가야 된다' 우리 OO교파에서 이것을 이거 고쳐야 된다 하는 그런 말을 제가 며칠 전에 들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바로 해 놓은 것은 뭐 정죄하든지 말든지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그 말을 바울이 그렇게 중하게 여기지 안하고 크게 여기지 안하고 또 자기 생각도 그까짓 거 양심에 가책없다 하는 그것도 양심대로 했으면 됐다는 자기 양심도 그렇게 인정을 하지 안했습니다. 자기 양심도 인정하지 안하고 모든 사람의 여론들도 인정하지 아니한 것은 모든 것을 아시고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 앞에 가 가지고 재판받을 터이니까 그 안에서 뭐 지저분하는 그런 것은 문제로 삼지를 안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꼭 바르면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이 관계가 없습니다.

 

며칠 전에도 저 O에 있는 그 교회들이 와서 거게서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 말하기를 `이 백 목사는 그 사람이 바로 교주다. 그 사람이 바로 교주다. 또 그 사람은' 자기가 가르친 그 외에 딴것을 가르치면 그 사람은 그만 정죄해서 당장 이동을 시키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지금 교주노릇하고 있는데 그것이 이단이 아니냐?' 이래 가지고 뭘 많이 주저부리하는데 그래 가지고 분개해서 왔기 때문에, 내가 있다가 `분개할 게 아니라 그런 데는 간단하니까, 뭐이 간단 하냐? 그 사람들 말하는 데에 고칠 것 있는가 살펴보고 고칠 거 있는가 살펴보고 고칠 거 있으면 고치면 그 사람이 심판받기 전에 나에게 말해 줬기 때문에 그런 선지자가 없고 선생님이니까 선지자로 선생님으로 모실 것이고 만일 살펴서 고칠 것이 없으면 그것은 안심하고 있으면 뒤에 가서 뭐 유익되지 손해 갈 거는 하나도 없으니까 안심하고 있지 뭣 때문에 그렇게 분개하고 있느냐? 거짓걸로 핍박하면 기뻐하고 즐거워해라 하늘에 상급이 크다고 했는데 뭣 때문에 그래 하고 있느냐?' 이라니까 뭐 자꾸 이렇게 논단해서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라다가 나중에는 웃으면서 그렇기는 그렇습니다. 하고 그래 기쁨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천하 사람이 다 맞다고 지금 정통이라고 다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그런 교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천하에서 그 교리는 옳다고 인정을 하고 다 존경을 받는 그런 교리들이 많이 있고 또 천하가 다 잘못됐다고 정죄받는 그런 교리들도 았지 않겠나 하는 생각 있습니다.

 

이러면, 만일 그렇게 천하에서 정죄받았는데 한 번도 세상에서 빛을 보지를 못하고 정죄만 받고 갔는데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 `요것이 옳다' 할 때에는 정죄한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 앞에 무릎을 끓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릎을 안 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제 천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옳다 바르다고 이렇게 다 인정을 하고 존경을 받고 많은 사람들을 그 길로 이끌었는데 그 교리가 잘못됐다고 하면 그때에 잘못된 교리로 말미암아 해를 받은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는 다 배상을 해 줘야 됩니다. 손해 배상을 해 줘야 됩니다. 이러니까, 제가 뭐 세상에서 살기를 많이 잘 살아서 성자라 셩녀라 하는 그런 인정을 받은 아름다운 깨끗한 좋은 행위가 있다 할지라도 자기의 가르친 것이 많은 사람을 미혹시킨 잘못된 교리나 신조로써 사람들을 손해 보였다면 자기가 행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 보인 것은 자기의 추수가 됐는데 자기가 손해 보인 것은 남에게 손해 보였으니까 그것을 배상을 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한 교리와 신조에 잘못됨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삐 뚤어진 그 길을 걸어서 손해본 것을 배상하면 그거 뭐 잘못된 한 교리를 배상하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래서 내가 어떤 장례식에 가 가지고 박윤선 목사님이 그때 주례를 했는데 그때 장례할 때에 하는 말을 O장로님이 그때 가스에 죽었는데 그때에 장례를 하면서 설교할 때 하는 말을 제가 하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뭐이냐? 사람이 살면서 옳은 일, 좋은 일, 바른 일, 구원 이룬 일, 참 가치 있는 일, 수입 있는 일도 많이 하지만 사람이 또 삶으로써 손해가는 일을 안 할 일을 한 일도 있다. 손해가는 일을 안 할 일을 한 일도 있다.

 

이래서 수입되는 일과 손해갈 일을 수지를 계산을 따져 보면 사람 들이 땅위에 살아서 유익을 보고 사는 것이 유익이 되고 죽는 것이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는 것이 손해갈 수도 있다. 그말만 말하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말하는데 그때 나는 들을 때에 `사람이 삶으로써 유익보는 그것도 있지만 손해보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 유명해지면 자꾸 이 일이 더 커지겠다. 유명해지면 유익되는 것도, 유명해지니까 많은 사람들이 따르니 유익되는 것도 있지만 사람들을 많이 손해 보이는 것도 있겠다.' 이러니까 야고보서에 말씀하시기를 많이 스승되고자 하지 마라. 많이 선생님이 되고자 하지 마라. 선생으로 자꾸 선생 대우받고 선생노릇 할라고 하지 말아라.

 

스승된 자는 받을 심판이 크니라 이랬습니다. 받을 심판이 크니라. 이러니까 유명해질수록,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많은 사람이 모었는데 내가 잘못된 그 교리와 신조, 신조라는 거는 어떻게 믿느냐? 교리라는 것은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깨닫느냐? 그 교리와 신조를 잘못된 것을 말해 놨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 잘못 가르침을 인해서 잘못돼졌으니까 거게 대해서 얼마나 그 배상을 물을라 하면 손해 배상을 많이 물어야 되겠는가? 또 바로 되면 거게 대해서 이익 배당을 받을 터이니까, 그 사람이 이 교리 배워 가지고 제가 옳은 행위했으면 옳은 행위한 그 이익에 대해서 또 내가 배당을 받을 터이니까 참 아주 수입도 크고 또 손해도, 아주 손익이, 손해와 유익이 굉장히 큰 장소가 곧 강단입니다.

 

이래서, 사람들은 일시에 그 대중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서, 또 많은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것만을 생각하고 설교하는 사람 또 어떻게 하든지 교인들을 많이 오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요게 다만 소망을 두고 설교하는 사람, 대단히 위험한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꼭 설교할 때에 뭐이냐? 이것이 하나님 앞에 어찌 되느냐 하는 그 심판을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이고, 하나님 앞에 정죄받으면 그 정죄받는 데 대해서 배상이 큽니다. 정죄받는, 하나님 앞세서 정죄받는 그 심판을 먼저 생각하고, 그다음에 둘째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자기 말한 데에 하나님이 인계를 받아 가지고 `, 네가 이랬으니까 그 일은 내가 이제 인계받아 가지고 내가 그 일 해 주마.'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은 당신이 뭐이 복음 운동을 다 했다는 말 아니오.

 

당신이 벌써 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됐다!'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인정하신 그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계를 받았는고로 그 일은 다 이루어 졌다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다만 사람의 지혜로운 말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과 능력에 있기를, 성령과 -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데 - 성령과 능력에 있기를 내가 원한다, 힘쓴다. 이것은 너희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식에 있지 안하고 하나님의 권능에 있기를 원해서 그렇다. 하늘나라는 사람의 아주 능란한 말에 있지 안하고 하나님의 권능에 있다.

 

이래서 그걸 원하고 힘쓴다는 것은 그런 면을 들어서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할 때에는, 전할 때에는 대중에 인기를 끌어서 대중들이 마음이 그리 기울어지고 이렇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것은 외식 입니다. 그거는 외식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인가 하니 심판을 보면서 심판에 정죄받지 않도록 하는 그 면에 제일 주력하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자기 증거하는 말에 같이 하시는 것을 둘째로 주력하고, 세째로는, 자기가 사람들에게 전하는데 그 전달이 어짜든지 바로 되고 옳게 되어서 세째로는 그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이해하고 그 교리와 신조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구원에 도움이 되도록 하려는 그것이 세째로 중요합니다.

 

이런데, 잘못하면 이것이 꺼꾸로 되면. 이 꺼꾸로 돼서 세째 것을 첫째 위치로 해 놓으면 꺼꾸로 됐기 때문에 다 틀려 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 중심이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그 사람이 뭐, 여러분들, 이단이라고 하는 이단이라는 것은, 이단이라 이단이라, 또 인본주의라 뭐 신본주의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단에는 하나님의 도가 없는 것이 이단입니까 평가를 순위적으로 하지 안하고 평가를 잘못해서 일호될 것을 이호로 그 평가의 호수가, 가치의 호수를 바로 질서 있게 바로 잡지 못하고 꺼꾸로 된 것입니까 어떤 것입니까? 그 질서를 바로 잡지 못한 것이오. 신본도 하나님과 사람 생각합니다. 인본도 하나님과 사람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먼저 두고 하나님을 다음 둔 것이 인본입니다. 신본은 하나님을 먼저 두고 사람을 다음에 둔 것이 신본입니다. 둘 다 사람도 하나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렇게 말을 하면서 여러분들이 들을 때에 혹 `왜 저런 말은 엉뚱한 말을 하는가' 하는 것을 좀 이해가 못 할 답답할 때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럴 때는 저는 지금 증거하는 것이 제대로는 증거하기를 첫째는 심판받지 아니할 것을 첫째로 생각하고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증거하는 일에 하나님이 옳다 하시고 당신이 인계 맡으시도록 하는 그것을 둘째로 생각하고 세째에는 이 교인들이 뭐 깨달아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을 제 삼위에 가치로 둡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 못 해도 녹음한 사람들은 테이프든지 사 가지고 가서 자꾸 들으면 왜 이 말은 엉뚱한 말을 했는가 하는 그 엉뚱스러운 말 거게는 합당치 안한 엉뚱한 말을 했다 하는 그 말을 가지고 자기가 `요 말은 안 하면 안 된다'하는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거게까지 자기가 바로 졸졸 따라온 사람이오.

 

그렇지 안하고 `이거는 이해 못 할 말이다'하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껍데기만 가지고 따라오고 말지 내용에 대해서는 자기가 지금 관계를 가질라고 하지 않는 그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말을 그렇게 하면 쉽고 좋습니다. 쭉 이래 해서 그만 대통에 물 들이둣이 주루룩 이래 하면, 대개 여기 문인들이 쓰는 것은 보면 그만 대통에 물 대듯이 주루루룩 연맥 있게, 문맥이 줄거리 쫙 그만 이래서 누구든지 다 들을 수 있도록 해 놓은 그것이 다 문인들이 쓴 글이오.

 

또 종교가들이 쓴 그런 것이나 철학가들이 쓴 것은 이해 못 할 꼬 불꼬불 꼬불꼬불한 것이 그것이 그들이 쓰는 문장이오.

 

,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에게 전하는데 이것을 전하는 데는 꼬 불꼬불할 것이 아니라 여게 동에 있다가 서로 퍼뜩 뛰어 가지고 서에 있다가 남으로 뛰어 가지고 언제 그 거리를 다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동서남북에서 그저, 뛰어다니며 그라니까, 문인들이 걷는 글은 쪽 바른 한 줄 외통길만 걷는 것이고, 외통길만 외줄의 길만 걷는 것이 문인들이 쓴 책입니다. 아무 속에 알맹이가 없소. 문맥이 쭉 통하고 이렇지만 그 종교서적이라든지 철학서적이라 하는 것은 조금 꾸불텅이가 있습니다.

 

구불텅이가 있는 것은 그 사람이 보는 범위가 좀 넓기 때문에 요 말만 해서 안 되니까 요쪽 구석도 말해야 되겠다 저쪽 구석도 말해야 되겠다 해 가지고 좀 범위가 넓어, 문인보다는 철인들이 좀 그것이 좀 생각하는 사고의 범위가 너른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종교가들이 좀 너릅니다.

 

그래서, 불교는 바로 철학이요, 불교는 바로 철학입니다. 불교는 바로 철학이요 그게. 철학이요 또 유교도 그것이 껍데기는 도덕이라 하지 만 속은 그 철학이 그 도덕을 운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니라 이 꼬불꼬불한 게 아니라 기독교는 저 가 가지고 천리, 만리 있는 거 가서 한 발자욱 몇고 또 이 말 뛰고 또 만리나 가 또 이리저리 뛰어 돌아다니니까 믿음이 아니면 연결 못 합니다. 믿음이 아니면.

 

그러기 때문에, 그 믿음이 연결되기까지 자기가 거게서 명상하고 자꾸 생각하고 자기가 믿어서 경험하고 체험하면 거게서 날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경 이, 소경은 항상 작지로 더듬어 보든지 손으로 만져 보든지 발로 더듬어 보든지 자기 육체의 감각이라야 그것을 알게 되지 그 육체가 도달하지 못하는 데는 보지 못합니다.

 

눈이 밝은 사람은 벌써 밝은 사람은 몇십 리 밖에 것도 큰 거는 보이고 있는데, 몇십 리 밖에 걸 보는데 이 사람은 그 소경에게 말하면 이거는 제가 나면서 된 소경은 거짓말로 아요. `그런 세계가 있을까?' 이러나 눈 뜬 사람은 보이지만 이 소경에게는 보이지가 않는다 그말이오. 보이지를 안해. 그와 마찬가지요. 사람이 높은 산에 올라가면 예를 들어서, 백 미터 높이에 올라간 사람은 백 미터 높이에서 보여지는 거 `저거 섬이 보여진다. 저 산이 보여진다. 저 마을이 보여진다.' 말하지만 십 미터 올라간 사람은 제게 보이지 안하니까 거짓말 한다고 이랍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기보다 저 사람은 높이 올라갔기 때문에 `거게 서는 보이는가보다, 거게 올라가면 보이는가보다 나도 그까지 올라가면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올라가야 되지 올라가지 안하고 제가 안 보인다고 자꾸 부인하는 것은 그거는 무지한 사람이오. 천 미터 올라간 사람이 말하는 것은 항상 말하는 것은 새 말이오.

 

천 미터 올라간 사람이 구백 미터 올라간 사람에게 대해서 하는 말은 항상 새 말이요 못 들은 말이오.

 

새 말인데 `저렇게 어떻게 자꾸 새 말을 주 지어낼까?' 이렇지만 지어내는 게 아니라 본 대로 말하는 거라. 저게는 뭐 있다 뭐 있다. 본 대로 말하지만 저는 거게 올라가지 안했기 때문에 자기는 보이지 안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겠습니까? 그래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답답해서 나는 본 것을 너희들에게 말을 하는데 너희들은 듣지 않는다 이랬어. 뭐 예수님이 새로 만들어 낸 걸 말하는 게 아니고 본 것을 말씀하신다고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래서,그러니까 말할 때에 여러분들이 알아듣기가 어려워서 `그거 뭘 잔소리를 하고 자꾸 꼬불꼬불 자꾸 그렇게 한다' 이라니까 뭐 사람에게 자꾸 알아듣기를 어렵도록 하기를 위해 가지고 피곤을 주기 위해서, 그만 시원하게 이래 말해 버리지 안하고 피곤을 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큰 정죄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은 다 옳고 바르고 깨끗한 하나님이라 했어.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오.

 

이런데, 안 하면 안 될 것이라서 그렇게 말하게 되고, 또 한 번 말하면 되는데 두 번 말하는 이유는 뭐이겠소? 한 번 말하면 되는데 두 번 말하는 이유는 뭐이겠소? 자 이거는 목사님들한테 물어 봅시다. 한 번 말하면 될 터인데 두 번 세 번 말하는 이유가 뭐입니까? 말하는 이유가 뭐이지? , 우리 O목사님이 깨닫기는 잘 깨달아.

 

한번 말해 봐요. 인정하도록? , 그것도 있습니다. 한 번 말하면 되는데 두 번 말하는 것은 있정하게 할라는 그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 사람이, 사람이 사람의 말로 표시할 수 없는 것이 그것이 영계의 것입니다. 그 무한한 것을 유한한 인간의 말로 어떻게 표시하겠습니까? 영감이라는 것은, 영감은 물론 사람에 따라 달라서 그 영감은 사랗의 그 유한의 범위 내에 와 가지고 되는 영감도 있지만 사람의 그 지능이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지식을 무한히 초월한 그 세계를 말하는 것이 영감입니다.

 

영감 발표는 인간이 말할 수 없는 무한한 그 인간을 초월한 그 세계를 말하는 것이 영감이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의 방언으로 표시한다는 것은, 어제 어떤 사람이 신고함에 써 놨는데 사람이 고전어라든지 뭐 현대어 근대어 하는 거 이렇지만 고전어에도 거게서 추상할라면 추상할 수 없는 거는 아니라. 물론 그것이, 그것은 말하자면 자기가 뭐 말했으면 자꾸 거게서 자꾸 추상하고 추상하고 자꾸 추상하고 이래 추론 추론으로 들어가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가 있다 하는 그 말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 말은 맞아. 그것이 뭐이냐 하면 곧 철학입니다. 그것이 곧 철학입니다. 얼마든지 들어가요.

 

들어가는데, 그러면 들어간다고 해 가지고 어디로 들어갑니까? 들어가면 어디로 들어가지요? 자꾸 자기가 생각하고 추상 추론으로 자꾸 들어가면 어디로 들어갑니까?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것이 모든 철학입니다. 자기가 철학을 평생 철학자로서 대학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철학의 근본을 모르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철학을 전체를 파악하지 못한 하나의 철하 우물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 그렇게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인간의 말로 하는 데에 인간의 말로 한 것을 자꾸 거게서 또 추상하고 추상하고 또 추론하고 추론하고 추측하고 추측하고 자꾸 이렇게 해서 들어가는 그것은 철학이요, 그거 불교요. 모든 이 종교들은 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게 아니라. 기독교는 근본부터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을 끌어서, 모든 세상 지식을 다 끌어 모아 가지고 이것을 한테 배합해서 종합을 해 가지고 거게서 짜서 뭐이 나오도록 하는 그것이 기독교 아니라.

 

기독교는 계시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열어 보이실 때에 보는, 하나님이 보여 주니까 보여 준 대로 보는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계시 종교라 하는 이것을 똑똑히 깨달아야 돼. 계시 종교. , 물론 하나님의 도를 들어서, 여게서 설교를 듣고 여러분들이 돌아가 가지고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합니다.

 

 

지난 밤에 증거하는 것도 하나님이 없는 가운데 나를 내셨고 나를 내신 분이 나를 어디다가 둬야 되느냐 둘 곳은 당신이 또 하신다 내가 나는 것도 내 할 일이 아니고 당신이 할 일이고 지어 놓으신 그분이 나의 있을 처소를 마련하는 것도 당신 할 일이지 우리 할 일은 아니라. 내가 이 곳을 찾아갈까 저 곳을 찾아갈까 그것도 우리 할 일 아니라.

 

우리 할 일과 하나님이 하실 일을 구별하는 그런 것도 자기가 암만 생각해도 그 생각해서 자꾸 나오면 생각하면 거게서 인제 생각하는 데서 말까지는 나왔지만 말에서 생각하는 데에는 두 길로 갈라집니다. 자꾸 이래 들어 가지고 들은 것을 생각하는 데에는 두 길로 갈라지요. 두 길로 갈라집니다.

 

생각하는, 자기가 들은 말씀을 가지고 자꾸 생각하고 섕각하고 이렇게 연구하고 연구하고 연상하는 가운데는 두 길로 갈라집니다. 두 길로 갈래길로 두 길로 갈라지요. 두 길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어디로 가고 하나는 어디로 갑니까? 이거 좀 말귀를 알아듣는지? 하나는 어디로 가고 하나는 어디로 가? 두 길로 갈라지는데 한 길은 뭐이며 한 길은 무엇입니까? , 말은 맞기는 맞습니다. 마귀의 길 하나님의 길인데.

 

이 길을 들을 때에 하나는 세상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이 말해 놓은 지식 세상 지식. 사람들이 말해 놓은 지식 이 사람들이 말해 놓은 지식 이 세상 지식은 누구의 지식이라고 했습니까! 마귀의 지식이요 뱀의 지식입니다. 이거는 막 좀, 지금은 인제 아직까지 다 통일이 안 돼서 그렇지만 이게 만일 통일이 된다면 세상 지식 사람들이 나를 갈아 죽일 것입니다. 세상 지식은 다 이것은 뱀에게서 나온 지식이다.

 

성경에 말하기를 다 불신자들의 속에서 주장하는 영이라 했으니까 그 주장하는 그 영으로 말미암아 받지 안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데 세상 지식 자, 이걸 연구하는 데 보자. 연구해 보자. 이 첫 날밤에 설교를 하고 그 이튿날 아침에 설교했는데 이걸 명상해서 연구해 보자.' 연구해 볼라고 할 때에 연구하는 길이 둘입니다.

 

자 연구해 보자. 어떤 철학에서는 어떻게 말했지? 철학자 누구는 어떻게 말했지? , 이제 도덕가 누구는 어떻게 말했지? 어느 종교에서는 어떻게 말했지? 과학자는 어떻게 말했지? 역사의 통계는 어떻게 말했지? 이걸 가지고 연구해 가는 사람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이러니 이것을 자, 내가 양심으로 한번 생각해 보자.' 양심으로 생각을 가집니다. 양심으로 지금 연구를 합니다. 양심으로 또 연구를 하면서 성경이 뭐라 하는고 또 성경 지식을 또 활용해 가지고 또 연구를 해 봅니다.

 

들은 말씀을 양심으로 연구하고, 그다음에는? 성경 말씀으로 연구 하고 그다음에 이렇게 연구해 나가면서 행하지 안하고 연구하는 자에게는 소용이 없어. 그런 거짓부리 자 앉아서 다 해 먹을라 하는 그런 손도 꼼짝하지 안하고 다 할라 하는 그런 허욕자, 허영자, 그런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다 물리치십니다.

 

자기가 성경에 말하기를 네가 모르면 행해 봐라. 그러면 거게서 네가 깨달음이 될 것이다. 네가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함으로 네가 변화가 되고 변화가 됨으로써 진리를 알고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성경 말씀대로 연구해 보면 연구해서 깨닫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도 밝지 못하니까 자기가 행하라 했으니까 알 수 있는 데까지 행할 수 있는 데까지 행해 보고, 자기가 못 행할 것일랑 하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하라 말이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로 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할 수 있는 일 하면 그때에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에 그것이 뭐이냐? 진실입니다.

 

말씀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정도에 행할 때에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진실에 친구가 있습니다. 진실과 동질자가 있소. 진실과 동질 자는 누구입니까? 진리? 진리와 동질자는 누구요? 진리가 어디서 나왔소? 진리가 어디서 나왔어요? O목사님? 어두워지니까 모르는 모양이라. 진리가 어디서 나왔어? 진리가 어디서 나왔어? 진리가 어디서 나왔어? 저 뒤에, `영감!' 진리는 영감에서 나왔어.

 

그러니까, 진실되게 자기가 행할 때는 그것이라도 뿌스러기라도 자기가 힘 있는 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행할 때에는 그것이 진실이 되기 때문에 진실과 동질자가 접선되게 됩니다. 거게서 영감을 받게 됩니다. 영감을 받아서 이제 자꾸 나갑니다. 이라면 그 길은 무슨 길이냐? 그 길은 둘 중에 하나인 뱀의 지식으로 연구하는 반대인 하나님의 지식으로 연구를 하고 자기의 이런 저런 별별 욕심 사욕으로 연구하는 반대에 양심으로 연구하고.

 

사욕으로 연구하는 것은 `보자, 학자가 뭐라 하며 철학자가 뭐라 하며 과학자가 뭐라 하며 종교가들이 뭐라 하며 유명한 사람이 뭐라 하는가 정치가가 뭐따 하는가, 이 모든 세상에 모든 지식들이 뭐라 하는가?, 그거 연구하는 자는 자기에 구원 도로 하지 않는 것이고 그 속에는 저도 모르게 자기 중심인 악이 속에 들어 가지고 지금 자기가 왕 노릇할라고, 자기가 인기를 끌라고, 벌써 거게서 그것을 가지고 자기 아주 번쩍거리게 자기 광을 낼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게는 진실이 아니요 거짓부리요 허영과 허욕이기 때문에 성령은 `하이, 내음새 난다. 아이 더러워.' 성령은, 성령은 암만 해도 성령은 `허이! 허 이! 어휴! 어휴! 내음새 난다! 어허!'달아나 버립니다.알겠습니까? 내음새 나는데 누가 거게 가요? 누가 변소간에 들어가서 장 앉아서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소? 안 가.

 

이제 거게서 자기가 아는 대로 행하는 것,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면 연약한 힘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했기 때문에 열린 문 줬습니다.

 

이제, 자기가 듣고 자기가 아무리 알라고 해도 모르니까 내가 요게서 행할 수 있는 것만 내가 행해 보자. 행할 수 있는 것만 행해 보자 할 때에 고거 본질이 진실로 나왔습니다. 본질이 진실에 속합니다. 고거 요래 속하니까 그라면서 자기가 그게 뭐이냐 하면 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양심으로 하나님의 도를 연구할라 하는 그 연구의 반대는 뭐이요? 양심의 반대는 뭐이요? 양심의 반대는 뭐이지 요 청년 한번 말해봐. 그러면 잠이 확 달아나. 양심의 반대는 뭐이지? 양심으로 연구하는 것 반대는 뭐이지? 모르지? 모르겠어? 모른다 해, 그라면 '가르쳐 줄 터이니까. 모르겠어?' 양심의 반대는 사욕이야. 양심의 반대는 사욕이라, 사욕. 내가 이래 가지고 유명한 목사가 돼야지, 유명한 학자가 돼야지, 유명한 박사가 돼야지, 뭐이 돼야지 하는 그거는 사욕이라.

 

, 성령의 소욕의 반대는 뭐이요? 육체의 소욕이라. 그게 육체의 소욕. 육체의 소욕인데 고리 나가면 그리 삐끌어지기 쉬워요, 그만 그런데, 우리가 연구할 때에는 양심으로 연구하는 것, 그러기에 양심을 쓰면 받아집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했는데 그 귀는 무슨 이 귀 말해요 뭐 말해요? 양심의 귀를 말하요. 양심을 통해서라야 들어지지 양심 통하지 않고는 들리지 않습니다. 이 귀야 누가 없는 사람 있어야지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귀 없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이러니까, 이제 양심을 쓰면 들립니다. 양심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 양심이라 하는 것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성경 지식대로 요렇게 비판해 볼라고 애를 쓰는 것이고, 또 세상 양심이라 하는 것은 뭐이지요? 세상 양심은? 세상 지식을 가지고 비판해서 찾을라고 하는 것이 세상 양심이오. 신앙 양심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찾을라 하는 것이 신앙 양심이라.

 

그 성경 지식 가지고 찾을라 하고 이와같이 하는 데에는 자연히 자기가 그 가다가 더 전진하지 뭇하게 되면 아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어. 아는 대로 행할 때에 돼져.

 

이래서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했어, `믿은 유대인들' 믿은 유대인들이라 말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유대인들 아닙니까? 순종하는 유대인들.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말에 거하면' 내 말대로 실행해 살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참 내 제자가 된다 말은 무슨 말이요? 성화된다 말이오.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과 같이 된다 말입니다. 자신 이 변화돼요, 자신이 변화돼요.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처음에 진리 보고 행하고 진리 보고 행해 가지고 진리 알게 되고 진리.보고 진리대로 행해 가지고 알게 된 그 진리는 자유하게 한다.

 

그 진리는 자유하게 한다. 그 진리는 자유하게 한다. 자유하게 한다 말은 그 진리대로 자유한다 말이요 사욕대로 자유한다 말이요? 그 진리대로 자유한다 말입니다. 이것도 다 처음에 들으면 무슨 말인지 모르나 자꾸 가서, 그러기 때문에 귀가 어두워서 못 들어요.

 

이래서 몇 달만 안 듣고 있으면 크만 귀가 자꾸 가리워져 어두워져 가지고 못 알아 들어. 안 들어도 자기가 사람에게 듣지 안하고 주님에게 직접 자꾸 주의 음성을 자꾸 들으면 뭐 몇 해라도 상관없고 평생이라도 상관없어.

 

 

이래서, 이제 이 말을 많이 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할라고 했느냐 하면 이렇게 사람이 하나님이 지어 주신 좋은 처소에, 또 자기는 그저 딴 데로 달아나지만 안하면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 우리에게 거처할 좋은 처소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거게다 두셨다 허어.`거게 두시고' 거게 두셨는데 도망만 안 치면 돼요.

 

도망만 안 치면 . 이런데, 자기가 뭐 살 곳이 어덴 줄 알고 자꾸 자기가 자기 좋은 자리 찾아 가지고 좋은 장소를, 처소를 만들라고, 자기 좋은 행복된 처소를 만들라고, 또 자기 행복된 곳을 찾아 갈라고 자꾸 이렇게 날뛰는 것이 대단히 쫓은 것 간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엄연히 확정을 지워야 될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과 나 할 일, 하나님이 하실 일과 나 할 일을 똑똑히 구별하고 나 안 할 일을 구별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일, 그라고 난 다음에는 내가 안 할 일 이것만 구별하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에 떠 가지고 드부렁 드부렁 뜨면서 참 만고에 천국 생활 낙원생활을 언제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하나님이 두게 하신 그만 거게 앉아 았으면 돼. 앉아 있으며 되는데, 지난밤에 돈에 팔려서 사창굴에 간 그 사람도 그 자리를 나오지 말아라. 그 자리에 네가 거게서 나오지 말고 거게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나님의 계명 지켜라.

 

하나님의 계명 지켜라. 거게서 나오는 것은 그 장소를 옮기는 것은, `계명 지켜라' 그 자리서 계명 지킬 게 있어.

 

그러면, 그 사창굴에 그 자리서 밤에 도망을 해 가지고 이제 도망을 해서 나와야 돼요 그게 하나님의 뜻이요 또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계명 지켜야 돼요? 나오면 안 돼. 거기 하나님의 계명 거기 지켜야 되지. 그 자리에 지키면 뭐, 계명 지키면 창기노릇을 항상 할라고? 그러면 거게서 계명을 지키면 뭐 해? 계명 지키면 사창굴에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그 여인은 사창굴에 쓸모가 있어요 없어요? 아무짝도 못 써요. 말도 하나님 시키는 대로 하지, 말도 시키는 대로 하지, 또 행동도 시키는 대로 하지, 행동을 시키는 대로 하면 몽둥이 맞을 거고, 말을 시키는 대로 하면 어짤 거요? 몽둥이 맞고 끌고 갈 거라, 저 구석으로. 그 사창굴에 창기들 들을까 싶어서 그만 끌고 갈 거 아니라? 창기들 들을까 싶어서 저 다른 사람 못 듣는 데로 끌고 갈 거라. 또 뚜드릴 것이고. 멋이 있어요.

 

거게서 지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하실 일이 있어, 그라면 거게서 머물러 가지고 지키면 우리가 지난밤에 공부한 대로는 뭣 나와요? 보기 아름답고 먹기 좋은 나무가 나게 해.

 

그게, 이랬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이사야 49장에 해 놓지 안했어요? 그거 다 원수들인데 다 나는 욕얻어 먹고 뚜드려 맞고 심히 외로와졌고 나는 이랬었는데 이 무리들은 어디서 왔는고? 그럴 뿐만 아니라 모든 군왕들은 양부가 되고 왕비들은 유모가 되고, 또 어짠다 했어요? 땅에 엎드려서 무릎 꿇고 절하고, 또 어떻게 한다 했어요? 발에 티끌을 핥을 것이니라. 이제야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래 끝까지 믿어보면 `과연 과연 하나님은' 우리 교회 과연 소리 많이 쓰는 목사님 한 분 있어요. 기도하면 `과연 과연' 그 과연 하는데 나는 매력을 둬. 자기가 뭣을 해 보고 난 뒤에 되니까 `과연, 해 보니까 되구나. 과연,' 그래 신앙 경험과 체험에서 과연이 나와요.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이 되는 거라. 원수가 내 발의 티끌을 핥을 만치 그렇게 나를 좋아하게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러니까, 그래서 이혼당한 그 배반당한 여자들에게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이 `네가 그 자리에서 네가 남편 탐해 가지고 욕심을 내서 후득거리면 안 된다. 거게서 너는 자꾸 계명 지키는 것뿐이라. 계명만 지켜 계명만 지키면, 계명만 지키면 미워서 박찼던 그 남편이 나중에는 좋아서 발에 티끌을 핥기까지 만들 수 있는 이가 하나님이시라. 나를 미워서 해치고 나를 미워서 죽일라 하고 이혼하고 보기가 싫어하는 그것이 내가 좋아서 발을 대면 발에 티끌도 핥고 또, 이와같이 이렇게까지 하게 만드시는 이가 우리 주첨이시 라. 주님 솜씨 좋지 않 소? 못 할 게 뭣 있소?

 

이런데, 거게 있으면 그렇게 아름다운 행복이 오는데 이 행복을 깨 뜨린 것은 죄인데, 깨뜨린 것은 죄인데 죄는 어디로 들어옵니까? 죄는 어디로 들어오요? 죄가 들어오는 곳은 우리 눈으로 들어오고 우리 귀로 들어오고, 우리 눈으로 들어오고 우리 귀로 들어오고 그리 들어 옵니다. 공상도 있기는 있지만 공상도 따져보면 본 것 들은 것 거게서 공상이 나오지 딴 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귀로 멸망이 들어오고 이 눈으로 멸망이 들어와. 이러니까 그것을 단속해서, 육체로 말미암아, 이 심신으로 말미암아 멸망이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심신 단속하는 이 일을 안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지난밤에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사람병 고치는 데, 사람병을 고치는 데에는, 사람병을 고치는 데에는 껍데기로 행동을 고쳐야 되겠고, 사람병을 고치는 데는 행동 안 고치면 사람병 안 고쳐져요. 행동을 고쳐야 되겠고 행동 고친 그 속에는 뭐 고쳐야 돼요? 그 속에는, 그 속에는 듣는 것 고쳐야 돼요, 듣는 것. 듣는 것 고쳐야 돼요. 또 듣는 것 고치고 또 뭐 고쳐야 돼요. 보는 것 고쳐야 돼요. 듣는 것 고치고 보는 것도 고쳐야 돼요.

 

이러니까, 부득이 이 행동하는 생활하는 이 생활은 가르치는 것이 이걸 가르치기 전에는 사람병을 고칠 수 없고 사람을 고칠 수가 없기 때문에 생활 법칙을 가르칠 수밖에 없고 생활 법칙에 틀건 것을 가르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 법칙을 배워 가지고 틀린 것은 틀린 줄 알아야 되겠고 옳은 것은.

 

옳은 줄 알아야 되겠고 하라는 것을 해야 될 줄 알고 해야 되겠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해야 될 줄 알고 안 해야 이 사람이 고쳐진다 그거요. 사람이 고쳐져.

 

여러분들 사도행전 3장과 4장에 보면 그때에 사람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 했지요? 사나이의 수만 한 오천 된다 했어. 오천 된다 하니까 우리보다 작기는 작지만 그때 수로는 많습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데 오천 명 되는 가운데에 제일 기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앉은뱅이 병 고친 사람입니다. 제일 기쁜 사람이 그 사람 이라. 제일 기쁜 사람. 그때 소망에 희망에 제일 희망에 넘친 사람 희망이 충만해서 희망에 넘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람병 고친 사람입니다.

 

그러면 자, 기쁨이 제일 넘쳤고 희망이 넘쳤고, 얼마나? 사람이 절망은 사망이오.

 

희망이 넘친 거 그게 능력입니다. 희망이 넘치고 기쁨이 넘쳤고, ? 그러면 이거는 다 자기 주관 행위인데, 주관 행위인데, 객관 행위는 어싯어요? 다른 사람들의 주목은 어찌 됐어요? 다른 사람들은 누구를 다 집중했어요? 병 고친 그 사람에게 전부 주목했습니다. 인기는 막 그리 집중 됐어.

 

객관을 다 점령하는 방법이 뭐이냐? 객관을 다 점령하는 방법이 뭐이냐! 자기 주관을 가장 행복되게 하는 방된이 뭐이냐? 이것이 사람병 고치는 것입니다. 사람병 고치는 것.

 

이러기 때문에, 이번에는 사람병 고치는 이것을 하기 위해서 지금 첫시간부터 시작했습니다. 첫시간부터 시작했으니까 이 사람병 고치는 데에는 지난밤에 다섯 가지를 말을 했는데 이제 앞으로는 `내가 스스로 존재한 자가 아니라 나를 만든 자가 그자가, 나를 만드신 그분이.' 요새 의학이 뭐 발견해 가지고 뭐 세포가 얼마니 말하지만 아직까지 의학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사람에게 대해서 억만분의 일도 모릅니다. 억만분의 일도 몰라, 이러니까, 이 의사들도 믿는 의사가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하나님이 존재 하신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요것을 믿고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하나 발견하고 `, 하나님이 이렇게 기묘하게 신비하게 요렇게 만들어 놨느냐?' 그래 그 인체를 공부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무리 요새 과학이 뭐라고 쌓지만 과학 중에는 아무리 과학이 뭐라고 쌓아도 사람의 인체만치 따라온 게 없어. 알겠습니까? 인체만치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없어.

 

과학자들이 그냥 제가 과학자가 되고 발명가가 될라고 야단을 지기기 때문에 그렇지 인체를 공부하면서 인체에 `, 눈은 물질로 말하면 이 세계의 과학의 눈은 뭐일까? 과학의 귀는 뭐일까? 과학의 입은 뭐 일까! 과학의 손은 뭐일까?' 또 이 정치를 하는 사람도 `이 정치의 눈은 뭐일까? 암만 그 사람이 건강해도 눈 멀면 소용없다. 내가 아무리 정치 잘해도 눈 멀면 소용없다 또 아무리 건강하고 뭐 입을 쫑얼쫑얼 놀리고 자꾸 건강해도 앉은뱅이 되면 가지도 못하는데 헛 일이라.

 

앉은뱅이도 안 된다. 또 아무리 눈 밝고 뻘뻘 돌아다녀도 팔이 병신이면 안 된다.

 

그러면 팔은 뭐일까? 내가 정치하는 데에 팔은 뭐일까? 내가 정치하는 데 눈은 뭐일까? 내가 정치하는 데에 발은 뭐일까? 내가 정치하는 데 입은 뭐일까? 내가 정치하는 데에 간은 뭐일까?' 이거 뭐 눈도 귀도 코도 수족이 다 건강해도 간에 간경화증이 떡 들어서 간에 병 들었으면 헛 일이라. 간에 병. `이 간은 뭐일까? 간은, 내가 정권 잡고 있는데 간은 누구가 간일까? 이 간이 병들었네 이 간온 누구를 간으로 만들어 넣었으면 되겠는데.' 간병 들면 헛일이다. 폐병 들면 헛일이다. 대장병 들면 헛일이다. 심장병 들면 헛일이다. 뭐 콩팥병 들면 헛일이다. 뭣이 들면 헛일이다. 이것이 쭈욱 나열해 보면, 다 해놓고 `내가 정말 정권을 잡고 정치하는 데에는 대가리는 누구를 삼고 귀는 누구를 삼고, 코는 누구를 삼고, 입은 누구를 삼고, '은 누구를 삼고 팔은 누구를 삼고, 다리는 누구를 삼고, 간은 누구를 삼고, 폐는 누구를 삼고, 소화하는 위는 누구를 삼고,' 이렇게 쭈욱 이래 누구를 한번 눈을 감고 생각합니다.

 

`이 내가 지금 정권하는 데는 어떤 인물들로 가지고 이거 다 수립을 할까? 이 조직을 할까? 이래 가지고 하나씩 생각해.`이거 눈 될 만 하나? 이겨는 귀가 될 만 하나?' 인체를 생각해 가지고 인체에 이 온전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이 만든 이것을 원본을 놔 두고 거게다가서 보면서 거게 표본을 해서 그와 그 모형적으로, 그 원본에 모형적으로 떡 만들어 놓고 자기가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이거는 눈이 병들어 안 되겠다. 이거는 귀가 병들어 안 되겠다 눈을 갈아야 되겠다. 귀를 갈아야 되겠다.' 다 해서 나중에 보니까 모든 면이 다 완전하고 참 간도 콩팥도 전부 다 완전하다 이렇게 돼졌을 때에 그 정권을 헐 자는 절대 없는 것입니다.

 

권불십년이라 권세는 십 년 가지 않는다는 그거는 말이 아니오. 인간의 권세는 잘못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나라의 권세는 절대로 그 권세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열 살 먹을 때에 받은 그 옳은 권세는 오십 살이 되면 더 견고하고 육십 살 되면 더 견고하고 칠십 살 되면 더 견고하고 팔십 살 되면 더 견고하고 구십 세 되면 더 견고하고 점점 더 견고합니다.

 

이런데, 그래 그 정년 퇴직이라고 은퇴라고 정년 퇴직, 기독교에 목회도 정년 퇴직한다는 데 대해서 너무 안타까와서 내가 그분들에게 물어 봤습니다.`아이, 정년 퇴직을 왜 하십니까? 그거는, 자꾸 이렇게 지금 만들어지니까 점점 좋아졌는데 좋은 거는 그만 대가리를 끊어 버리고 자꾸 못 된 걸 자꾸 이래 대충하고 이라는 것이 그게 틀리지 안했습니까?' 이라니까, 그런 줄 압니다. 이런데 하도 나이가 많고 이러니까 자, 사면도 안 할라 하지 고집통은 있지 또 경험은 있지 이래 놓으니까 배짱은 있지 `그뭐 내가 몇십 년, 여기 있었는데 어짤 거고?'이래 있지 이래 놓으니까 교회를 그만 절단을 내고 이거 또 전부 자기 아버지같이 어릴 때부터 길러 놨으니까 밀어내지도 못하고 이거는, 아마 이 백 목사도 어떻게 돼 가지고 있는지 몰라.

 

밀어내지도 못하고 이러니까 영 이 교회들이 다 절단이 나서, 할 수 없어서 그 사람들 때문에' 일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자진해서 은퇴를 해서 그 정년 퇴직을 합니다. 그렇게 말해 일단 그래 놓고 난 다음에, 정년 퇴직한다고 일 안 하는 게 아니라 정년 퇴직하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새로 개척교회를 세웁니다. 인제 저거 제거할라고. 그분들 뜻이 참 고상해요. 인제 개척교회를 세웁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한 교회 매여서 일하지 못했던 그런 일을 가려 가 자고 지금 일을 합니다. 이래 가지고 더 큰 일 더 어려운 일 해. 이래서, 그래 내가 OO목사님하고 둘이 만나 가지고 그 이야기를 차 타고 가면서 몇 달 전에 이야기를 했는데 그래 그라니까 그 어른은 지금 그래 하고 지금 인제 개척교회를 하니까, 개척교회 하는 거야 뭐 그 사람들도 개척교회 또 저거 하면 얼마든지 될 터이니까 그만 일단 거게 대해서는 자기네들이 희생을 해 가지고 잘 하게 돼서 나이 많다 하고, 고집 부리는 사람을 다 밀어내는 것을, 저거가 나와야 되지. 그러니까 그래 한다고. 그래 지금도 `오늘도 지금 저 구미쪽에 지금 뭐 지금 볼 일이 있어 대사로 보내서 지금 갑니다.' 그래 일을 하곤 해요.

 

그래서, 내가 뭘 하다가 그리 나갔지요? 이 세상 일은 그래요. 세상 일은 그렇지만 이렇게 나간 것, 자기가 이 말씀을 궁구하는 데에 양심으로 궁구하고 진리로 궁구하고 자기가 실행으로 궁구해서 성령이 협동하고 자꾸 이렇게 나가는 그 길은 노쇠함이 없습니다. 없는데, 이제 이 행복스러운 행복을 사람들이 어떻게 깨뜨리느냐 하면 다 범죄로 깨뜨리는데 그 범죄라 하는 것은 전부 인간의 이 심신의 작용으로써 범죄가 되어지고 멸망이 되어집니다.

 

행복을 버리는 것도 심신의 작용으로 되어지기 때문에 부득이 사람병을 고치는 데에는 이 심신의 작용 이것을 고치지 안하면.사람병이 고쳐지지 못하기 때문에 지난밤에도 오늘 아침에도 사람병 고치는 것을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병 고치는 것이 뭣 때문에 그라면 와서 요번 집회 때 먼 데서 여름에 더운데 왔는데, - 더워요? 더운 사람 있어요? 선선하고 참 좋습니다. - 왔는데 이래 딴거 안 하고 사람병 고치는가? 사람병 고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병 고치는 것을 할라고 지금 한 것이니다. 좀 전에 말했는데 오천 명이나 모인 가운데에 제일 기쁜 사람이, 자기 주관으로 제일 기쁜 사람이 그 병 고친 사람이오. 사람병 고친 사람이라. 기쁜 사람이.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뭐 기쁘게 할라고 돈을 모아놓고 `, 달러가 올라갔다.

 

이제는 증권 세월이 올라갔다.' 그까짓 거 암만 기뻐 봤자기쁨 속에는 또 고통이 바로, 바로 따라 올라섭니다. 바로 따라 올라서요. 이런데, 모든 사람 가운데, 오천 명이 아니라 오만 명도 뭐 좋고 오억만이라도 좋아요. 오십 억이라도 좋고. 모든 사람 가운데에 자기가 주관적인 쾌락, 주관적인 쾌락을 가지고 주관적인 그 만족을 가지고 그 기쁨을 가지는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여러 수십억이 있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제일 자기 주관적 쾌락, 주관적 기쁨을 가진 것은 요것밖에는 없다는 걸 발견하기 때문에 중요하기 때문에 말합니다.

 

요런 것도 그냥 되는 게 되는 게 아니라. 양심을 써 가지고 들어야 돼요, 양심을 써 가지고.

 

그래 뭐, 모두 다 기뻐서 금방 웃고 울고, 웃고 울고, 웃고 울고, 웃느냐 보니까 또 울고 있고, 우느냐 또 웃고, 이거 전부 마귀란 놈이 울면 또 웃게 만들고 또 웃으면 또 울게 만들고 자꾸 이라니까 거게 따라서 뭐 쉴 사이가 없이 자꾸 이렇게 교체하니까 정신없이 따라가고 있습니다. 확정을 지워. 전 인류 가운데에 자기 주관적 쾌락을 가지는, 쾌락이 인간의 행복에 최고인데, 그래서 철학들은 그 최종, 행복의 최종은 쾌락이라 하는데, 쾌락인데, 주관적 그 기쁘고 즐겁고 쾌하고, 유쾌하고 기쁘고 쾌락은 자기 병 고치는 거 사람병 고치는 거라.

 

또 또 하나 뭐이요? 하나는 또 뭐이라? 또 잊어버렸네, 하나. 희망에 넘치는 것.

 

희망이 넘치는 것. 그 인간 가운데에 그때 그 사람보다 희망 더 넘치는 사람 없었어요. 알겠습니까? 그때에 희망이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 희망이 제일 넘쳐.

 

욕망이 제일 넘쳐 소망이 제일 넘쳐.소망이 생명이오. 절망이 사망이오.

 

이러니까 이 주관적 소망이 넘치는 그 유일한 것이 자기 사람 만드는 사람병 고치는 요것입니다. 딴 데 없어요. 또 그러면 주관은 그렇지만, 주관적 행복은 가졌지만 객관적 행복은 어때요? 모든 사람이 누구를 주목해요? 자기를 주목해.

 

모든 사람의 인기를 누가 끌었어요? 인기는 전부이 자기에게 와 다 집중하고 있어.

 

모든 인간의 인기는 다 자기에게 집중하게 하는, 객관의 전 세력은 자기에게 집중되게 하는 이런 존영하고 영광스러운 이것은 어디 있어요? 어디 있어? 육신의 병? 사람병 고치는 데 있어요, 사람병 고치는 데. 사람벙 고치는 데 있는데 그 사람병 고칠라고 하는 것은 주관적 지상의 행복, 객관적 지상의 행복을 가지는 것이 사람병 고치는 것인데 사람병 고치는 데에는 뭘 고쳐야 돼요? 심신의 행동을 고치지 안하면 안 돼요.

 

 

심신의 행동을 고치지 안하기 때문에 첫날밤에 심신의 행동 고치는 것을 몇 가지를 말했는데 사람들이 거게 할 것은 몇 가지 있다고 했 어요? 다섯 가지 다 사람들이 해요? 먹지 말라는 것 안 하면 되는 거고 먹지 말라는 거는 안 하면 돼요. 그거 안 하면 되지 안해요? 그거 할 거 없어요. 먹지 말라는 것 안 하면 돼.

 

하라는 것은, 먹기 좋은 과실 얼마든지 먹어요. 보기도 좋지 맛도 있지 또 아름답지 먹기도 좋지 쉽지. 세상에 하나님이 주시는 성공보다 쉬운 것 없소. 하나님이 주시는 성공은 그렇게 힘들지 않는 것입니다. 힘들지 안해. 성공은 꿈도 안 꾸요. 성공은 꿈도 안 꿨는데 성공된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성공이지 막 그 성공에 이를 갈아붙이며 해 가지고 되는 건 아니야. 참 먹기 좋아요.

 

또 그라는데 보기도 좋아요. 보기 좋은 거는 다른 사람이 보지 뭐 내가 봅니까? 다른 사람이 보기 좋아요. 모든 사람에게 다 아름답고 덕 있고 유유하고 아무 조급한 경거 망동이나 그 부덕스러운 게 하나도 없어. 이렇게 우리에게 살기 좋은 것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그저 에덴에 두게 했으니까 그 자리 있으면 돼요. 하나님이 있으라는 자리 있으면 돼요. 하나님이 있으라 한 자리에 있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의, 있으라 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있으라 한 자리에 있는 것이요? 있으라 한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이 있으라 한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는 것, 가지 말라는 거 안 가는 것 움직이지 말라는 움직임,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움직이는 일을 하지 안하는 것은 하나님이 있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하나님 법을 어긴 행동 안 하는 것이 하나님이 있게 하는 데 있는 것이오.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데 안 있고 뽈쁠 기어서 가서 달아나는 것, 빠져 달아나는 것, 볼가져 달아나는 것 그거는 뭐입니까?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그 방편 행동을 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하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안 하고, 그라면 거게 있는 거라, 하라는 것만 하고 있으면 그게 내나 하나님이 있게 하는 데 거게 사는 거라. 하나님이 있게 하는 데.

 

지난밤에도 말했는데 그 자리를 떠난 사람이 누가 큰 낭파당했지요? 그 자리를 떠난 사람 누가 제일 낭파당했지요? , 아브라함이라, 그 자리를 있으라 하는데 떠난 그 사람, 떠나다가 낭파당한 사람 아브라함이라.

 

아브라함 예수 잘 믿는 사람이요 못 믿는 사람이요?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도 소용없어.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벙지만 암만 사랑해도 틀리면 소용없어. 암만 사랑해도 틀리면 소용없어.

 

하나님은 그러기 때문에 하후하박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무리 사랑 해도, 좌우에 날선 검이라. 아무리 사랑해도 틀렸으면 칼로 끊어 버려요. 그래서, 우리가 할 일 안 할 일을 잘 구별합시다, 할 일 안 할 일을 구별해서, 그러면 자, 우리가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자기 처지, 자기 처지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에 거 게 대해서는 손도 대지 말고 상관하지도 말 것. 하나님이 자기 처지를 만들어 놨다는, 자기 처소를 만들어 놨다는 것을 요것을 확실히 믿어야 됩니다.

 

우리도 이 물건 만들면 둘 자리를 마련하겠소 안 하겠소? 물건 만든 이가 둘 자리를 마련하겠소 안 하겠소? 물건 만들어 놓고 둘 자리 마련 안 하는 그런 천지 바보가 어디 있겠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놓고 있을 처소도 마련치 안한 그런 하나님 아니시오. 지혜 있는 하나님이시라.

 

이래 그거는 우리 할 게 아니라. 우리 할 게 아니고, 그라면 또 우리가 내가 어디 있을꼬 내가, 행복스러운 곳을 찾아가야 됩니까 찾아가지 안하고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데 있어야 됩니까? 그것도 우리 할 일 아니라.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데 있어야 돼.

 

? 있으라 하는 데 있는 것이 뭐이야? 있으라 하는 데 있는 것이 거기 사는 것이 있으라 하는 데 있는 것이지. 있으라 하는 데 있는 것이 거게 사는 것이 있으라 하는 데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렁지 안해요? 거게 있으라 하는 데에 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라?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데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데 거게 사는 것이지.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데 거게 사는 것 아니요?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데 거게 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게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사는 것이지.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데에 거게 사는 것은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이 살게 하신 그대로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요거 확정을 해요. 자기가 따져보고 확정을 해 봐요. 이거 어누리가 없고 뭐 거짓말이 아니고 억지로 끌어다, 붙이는 게 아니라. 이거는 뭐 다른 말을 못 해요.

 

여게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데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살라 하는 대로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대로 있는 것이요,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데 있지 안하고 자기가 자기 처소를 찾아서 좋은 행복 스러운 자리를 찾아갈라고 쨍동하는 것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안 하고 제 생각대로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그게 그거라. 제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 이러니까, 거게서 있으라 하는 데에 있고, 그러니까 우리 할 일은 처소 마련하는 것도 우리 할 일 아닌 것, 또 있을 곳을 찾아다니는 것도 우리 할 일 아닌 것, 하나님이 찾아 주는 데 거게 있으라 말이오.

 

하나님이 찾아 주시는 데 거게. 어떻게 했든지 자기 현실은 하나님이 거게 머물게 한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만 거게 있어요. 거게 있는 게 뭐이요? 거게 살라 말이오. 거게 사는 게 뭐이 거게 사는 거요, 거게 사는 것이? 요거 지금 알쏭알쏭 한 것 같은데. 거게 사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 거게 사는 것이요? 거게 사는 것은 사람이 가만히 있어요, 어디? 가만히 있을 수, 그래 딱 있을 수 있어요? 거게 사는 것은 거게서 숨 쉬라 하면 숨 쉬고 밥 먹으라 하면 밥 먹고 읏 입으라 하면 욧 입고 목욕하라면 목욕하고 거게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있는 거는 거게 사는 것이지.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거게서 하고 있는 것이 거게서 사는 것이라. 그라니까, 뭐 닥쳐요? 보기 아름다운 먹기 좋은 과실이 납니다. 그 과실 그거 만드는 것 그거는 사람이 할 일이요 누가 할 일이요? 사람 할 일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제가 할 일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이 다 만들어 주십니다. 만들어 줘도 제가 행복을 버리고 달아나 그렇지 행복도 하나님이 만들어.

 

처소도 하나님이 만들어 주지 행복도 하나님이 만들지, 그러면 거게서 할 일은 뭐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먹기 좋고 아름다운 것 자꾸 먹지요, . 자꾸 놀고 먹어요, 자꾸 먹기만 자꾸 먹어요. 너무 많이먹으면 배탈날 거고. 자꾸 얼마든지 자꾸 먹어요. 얼마든지 먹어요.

 

그런데, 거게 임의로 할 것 외에 2가지 명령이 있습니다. 고거 자기가 할 일이라.

 

임의로 할 거 있는데 그거는 자기 할 대로 `했는데 거게 2가지 할 일이 있어요. 거게 2가지 할 일. 2가지 할 일 있는데 하나는 뭐입니까? 하나는 할 일인 거. 생명과실 따 먹으면 영생하거든, 그 다음에 생명과실을 따 먹고 영생할까 두려우니까 쫓아내 버리라 이랬어. 생명과실을 따먹으면 영생하는 모양이지요? 그렇지 안해요, 여게? 그 말씀이 어디 있지? 322. , 그러면 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의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내어 보내어' 쫓아냈습니다.

 

그다음에는' 보니까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쫓아내 보내 버렸습니다. 쫓아내 보냈어.

 

이러니까, 거게서 할 일은 2가지. 생명과실 먹는 거 그거 먹고, 그 생명과실은 다 그것은 하나님이 먹을 사람 먹으라고 했고 저 일반 과실은 얼마든지 허락했고, 일반 과실은 허락했고 생명과실은 특수 과실이라. 특수 과실.

 

그러니까, 자기 현실 생활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내에서 세상 것을 배가 뿔룩하게 먹어 재끼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이 이 일반 과실도 배가 뿔룩하게 먹을 수 있기는 있지만 내가 황금 같은 귀한 세월에 언제 갈지 모르는데 그 일만 할 수 없다. 생명과실 따 먹어야 되겠다 하고 하나님과 좀 가까와지고 하나님과 관계가 좋아지는 이거 해야 되겠다 하는 그 사람 있고, , 망령되게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그거 선악과 찾아다니며 먹는 자 있고, 그거는 아주 보기에 아주 아름답고 탐스럽고 먹음직하고 지혜로울 만치도 그렇게 아름답게 보여지니까 먹지 안했습니까? 이러니까, 요것만 해도 우리가 삽니다.

 

이러니까, 하지 말라는 것 안 하고, 그러면 하라는 것 하나, 네 마음대로 해라. 이 범위 내에서는 얼마든지 해라. 제 마음대로 하라는 것 하나,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하나, 하라는 것 하나, 네 마음대로 해라 하는 것 하나, 해라 하는 것 하나, 하지 말라는 것 하나, 이렇게 단순합니다. 이렇게 우리 생활은 단순해.

 

그러면, 이러면 이것이 공연히 과장된 말입니까? 아니오. 따져보면 인간은 전부 뒤로 돌아보면 전부 뒤로 돌아보면 망친 건 제가 망쳤어. 떡 자녀를 길러 놓고, 내가 어떤 사람이, 그분이 경찰계에 다녔는데, 아주 경찰계에 고직으로 다녔어요.

 

OO라는 데서 다녔는데 그분이 자기 가정에 뭘 이래 말하면서 아들이 좀 불량해서 이라는데 그래 그 말하기를 그래. `.영 가슴이 도근거려 가지고 잠을 못 잡니다.' 또 어떤 부모는 이제 그만 어떻게 겁이 나든지 숨어서 그만 하수구, 하수구 하수구가 뭐 하수구 구덩이에 사람 들어갈 수 있어요? 하수구 구덩이에 들어가 가지고 가만히 있다가서 아들 소리 없어지고 난 다음에 그래 하수구에서 나왔다고 그래 하는 사람 이래. 그거 남의 말로 들을 게 아니라. 그거 또 하이 영 뭐 어떻게 뭐 그런지 사람이 죽을 지경입니다. 하마 오나 오나 겁이 나 가지고 발발발 떨고 있는데 그만, 그만 그만 밤 한시나 두시나 되면 대문을 발로 차서, 또 그것도 알거든. 또 마귀란 놈이 시키니까 위협을 주면 또 될 줄 알기 때문에 또 발로 되게 차니까 막 그만 영감 할마이 가슴이 탁 오그라지면서 그래 이랬는데 그래 그래 가지고 이럴 지경이니까 이거 어째야 됩니까 하면서 나한테 그래 의논을 합디다.

 

그래 내가 하기를 `그거 어째서 그래 됐지요? 그 아들이 아주 좀 그 뭐뭐 지혜가 있는데 그라면 그 공부를 얼마나 시켰어요?' 이라니까 그래 모두 대학을 시켰어.

 

대학을 시켰어. `대학을 시켰는데 그게 만일 국민학교만 하고 말았으면 그리 됐을갈가 그거 좀 어떠냐?' 하니까 `그렇게, 내가 지금 합니다. 대학 시킨 내 죄값입니다.' 그 모두 다 나중에 다 환난을 당하고 난 다음에는 물어 보면 전부 자기가 잘못해 그렇다 다 그래요. 안 할 일 해서 그랬다 그래요.

 

이래서 우리 교회서 그 교육에 절제해라 교육에 절제해라. 그 가르치는 것은, 가르치는 것은 얼마든지 좋다고 무절제하지 말고 교육에 절제를 해라. 국민학교 시킬 거는 국민학교 시키면 되고 또 대학 시킬 거는 대학 시키면 되고 또 무슨 유학 시킬 거는 유학 시키면 되고, 다 나쁜 게 아니라 꼭 자기의 정도가 있고 자기 거석이 있습니다. 정도가 있는데 그 정도에 틀리면 안 돼요.

 

이러니까, 그것을 사람들은 일방적 지식 가지고 그거는 많으면 좋은 줄 아는데 많아서 좋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또 적어서 좋은 게 하나도 없어. 꼭 어째야 돼요? 알맞아야 돼요. 적당해야 돼요. 적당해야. 여게 지금 그 아들도 와 있을 것이고 어머니도 다 있을 것이라. 이런데 내가 서부교회 처음 부임돼 가지고 `그 아들을 지금 중학교, 다녔으니까 그만 공부시키고 지금 그 처지에서 보면 실업을 가르치이소. 실업을 가르치면 그 사람이 뒤에 사장노릇도 할 것이고 뭐 대 기술자가 돼 가지고 할 수 있으니 시키십시오.

 

이라니까 뭐 나한테 대항하기를 `조사님은 왜 자녀를 대학을 시키면서 우리는 대학 못 시키구로 합니까?' 이게 사람에 대해 차별 둔다고 이래 가지고 어떻게 뭐 해 붙히는지 내가 꼼짝을 못 하고 그라면 뭐 마음대로 하이소 이랬지.

 

그랬는데 나중에 대학 이학년 하고 말았는데 그 아들 여기 와 있을 것이오.

 

똑똑한데 이게 국민학교만 나왔든지 중학교만 했으면 벌써 기술 받아 가지고 사장이 됐든지 공장장이 됐든지 됐을 터인데 그만 그래 놓으니까 아예 학은 이래 가지고 있는데 이거 내려가지도 못하지 사람이 올라가는 그거는 다 기어올라갈라 하는 것은 열심도 있고 다 잘합니다. 내려가기가 어려워요. 올라가는 것은 그거는 쉽고 내려 가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올라가는 그거는, ,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느냐 사람이 하느냐? 하나님만 올리지 사람은 올라가지는 못해. 올라가지는 못하는데 올라갈라 하는 사람은 꽉 찼어요. 꽉 찼고, 그런데 사람이 모두 다 저 개천에 떨어져서 저 개천에 떨어져 가지고 쳐박혀 있는 것은 어짜다 다 쳐박척 있어요? 올라갈라 하다가 쳐박혔어요 내려가다가 쳐박혔어요? , 올라갈라 하다가 쳐박혀 있 어요 내려갈라 하다가 쳐박혀 있어요? 좀 생각해 봤어요? 그거 생각해 보는 그게 인간 철학입니다. 그거는 인간 철학이라.

 

생각해 봤으면 다 알 수 있어요? 올라갈라 하다가 다 쳐박혀 있습니다.

 

이런데, 세상 사람도 보면 올라간 사람들은 다 안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올려 줘요. 올라간 사람들은 다 올라갈라 하다가 올라갔습니까 내려갈라 하다가 올라갔습니까? 그거는 좀 잘 이해가 안 되지? 내려갈라 하다가 올라갔어요, 이 사람은 계장인데 `나는 이 계장 자리를 너무 감당치 못하겠는데' 이 계장 자리를 항상 감당치 못해서 이래서 나는 계장보다 좀 밑으로 내려갔으면 내가 자유가 있을 터인데 이 계장 자리가 이거 내게 감당 못 하겠는데 하는 그 사랑을 하필 들어다가 또 과장을 시킵니다. 고거 과장을 시켜요. 이게 계장 자리인데 `내가 지금 시장을 하라 해도 할 건데 날 이제까지 계장 거기 쳐박아 놓고' 그라는 그거는 과장 안 시킵니다. 안 시켜요. 뭐 모든 이치가 다 그래요,

 

이래서, 우리가 할 일 안 할 일 요것을 똑똑히 구별해 가지고 이라면 그거 뭐 할 일 얼마 없어. 우리 할 일 자, 우리 할 일은 지난밤과 오늘 새벽에 배운 데에서 우리 할 일은 몇 가지입니까? 우리 할 일이 3가지인데 3가지 있는 중에 하나는 제 마음대로라.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러니까 할 일이 아니오. 자기 할 일은 꼭 2가지뿐입니다. 자기 할 일은 꼭 2가지뿐이오. 임의로 먹는 거야 뭐 먹고 싶으면 먹고 말고 싶으면 말지 그거는 꼭 자기 할 일이 아니라. 그거는 자기 마음대로고 할 일은 꼭 우리 할 일은 요거 2가지. 지난밤과 오늘 아침에 배운 데에서 우리 할 일은 2가지 요것만 생각하고 요것만 하는 사람은 다 돼요.

 

2가지 할 일인데 뭐 한 일이요? 생명과실 먹는 것, 하나님과 연결되는 일,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일은 고거 믿음 지키는 건데 그거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은 그것은 하나님이 하라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생명과실 먹는 것이요, 임의로 햐는 것은 하나님이 정죄하지 안한 것은 얼마든지 다 할 수 있는 자유로 있는 거라. 그거는 생명과실 먹는 거 아니라. 여러분들 우리가 생활하는 데에 죄 안 된다고 해 가지고 그게 우리 구원되는 것 아닙니다. 죄 안 된다고 해 구원되는 것 아니오. 하나님 명령에 순종한 그것만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생명과실이오. 그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하는 그것이 죄요 사망인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래서 뭐이냐? 지난밤과 오늘 아침에서 내가 안 할 일을 우리가 하는 그것이 일의 전부라. 일의 전부. 자기 처소 위치, 지위 자기가 마련할라고 이렇게 그거 마련하는 것, 그거 찾아 돌아다니는 것 이것이 우리의 일 전부입니다. 그거 전부 안 할 일이오. 다 포기해요. 안 할 일.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면 뭣만 시킵니까? O조사님. 저 미 국서 온 O조사님? 하나님 이 시키시는 대로 하면 하나님이 뭐 시켜요? 앉아 놀라고만 하요 공부하라고는 안 시키는가? 공부하는 거는 싯켜요 안 시켜요? 공부 하는 것도 시키지. 공부가 필요하면 공부하라고 시키지. 또 노는 게 좋으면 놀라고 시키지. 또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면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다 됩니다!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하면 우리 필요한 것이 다 돼요! 시키시는 대로 하는데 엉뚱이같이 이런 거는 뭐하러 시키는고? 그거 우리에게 필요한 거 시키는 거라. 요셉이를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요셉이 순종했는데 요셉에게 필 요한 것 다 구비하고 난 다음에 복덩이를 집어 넣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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