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홍수의 교훈

 

1979. 10. 5. 금야        

 

본문: 마태복음 24장 37절-41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낡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역사 세계가 두 번 심판을 받아 한 번 이제 마지막으로 받을 심판이 남아  있습니다. 처음에는 홍수로 심판받아 겨우 여덟사람만 구원에 참가했고 두  번째는 종교심판이 있어 이스라엘 가운데에 약간명의 사람들이 구원을 얻어  신약교회의 종자가 되었고 앞으로 세상은 불로 심판하는 심판으로서 이제 우리가  보는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다 심판받아 불살라지고 구원얻을  자는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불심판도 노아때의 홍수 심판과 모든 사람들의 그 행도이 같을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일백 이십 년으로 한정하고 직접 또는 선지자를  통해서 홍수로 심판하실 때가 가까웠으니 모두들 이 심판에서 멸망을 피하도록  구원 준비를 하라는 그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제까지의 역사에 없는 홍수 심판을 말하니까 하나의  괴변같이 듣고 진실성 있게 듣는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을 진멸하실려고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그날밤까지도  사람들은 홍수 심판이라는 이 문제를 크게 여기고 이 사실에 중심을 두고 전  생애를 이루는 노아의 그 생애를 모두들 조롱하고 비웃고 저희들 생각에 그보다  더 실상이요, 또 중요하게 평가되는 가정 건설과 의식주, 또 이런 저런 모든  것들의 교환 역사 여기에만 주력을 하고 이것만이 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홍수심판을 예방하는 여기에 관심을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내려 사람들이 피할래야 피할 곳이 없기까지 막다름을 당하고  인간들이 귀중히 여겼던 모든 것이 홍수속에 침몰이 되고 그때에 예컨데 온  천하를 주겠으니 온 천하를 차지하겠느냐? 홍수의 멸망받는 이 멸망에서 구원이  되는 노아의 방주 구원을 취하겠느냐? 둘 중에 어느것을 취하겠느냐고 만일  묻는다면 세상에 이런 것 저런 것 귀하고 좋고 아름답고 보배롭고 두렵고 권세  있고 높고 어떤 것을 막론하고 노아 방주의 구원보다 그게 낫다고 취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런 길이 있다면 그때에는 천하를 차지한 사람일지라도 천하를 내어주고  노아의 방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이 노아의 방주 구원을 원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 그 형편에서는 노아의 방주 이 구원보다 무엇을 원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이 방주 구원보다 무엇을 원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평가할 줄 알고 이런 사람이었는데 홍수의 이 심판  멸망이 오기 며칠전 몇해전 몇십 년전만 해도 이렇게 사람들은 평가하지  아니했습니다.

 온 천하보다 높이 평가되는 자기네들이 원하고 소원하는 어떤 것보다도  귀중하고 자기네들에게 가장 필요한 방주의 구원이 아주 멸시됐고 아주 무시하고  조롱하는 그런 하나의 괴변같이 여겨졌는데 때가 당해 홍수로 전체가 멸망되는  그때에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너 노아방주에 들어가서 이 홍수심판의 이 멸망을  피하는 구원을 받겠느냐 어떤 미남, 미인 차지하겠느냐 어떤 행락이나 재벌을  차지하겠느냐 했으면 한 사람도 방주의 구원보다 그게 낫다고 그것을 원하고  택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두다 이러한 사람들인데 이 사실이 얼마전에 두고 이 사실이 얼마라는 그  시간이 남아 있는 그때에는 여기 대해서 노아의 여덟식구 외에는 한사람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형적 창조물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원형이라면 사람은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능력도 그는 원형적 능력이라면 사람은 모형적 능력을  가졌고 당신의 지식을 원형적 지식이라면 그와 꼭같은 모형적 지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 년 만 년 억만 년이라 할지라도 그 시간이라는 시간에 제재를  받지 아니하시고 시간에 갇히지 아니하시고 천 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 년같이  억만 년후 그때에 당할 그때에나 억만 년후의 일을 억만 년 당겨 미리 억만  년전에 보는 것이나 생가하는 것이나, 느끼는 것이 하나님은 같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모형으로 지음받은 사람들도 시간과 공간과 종별에 있어  하나님이 원형적 무제한 무한이시라면 인간도 모형적 무제한 무한의 속성을 가진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불과 일백 이십 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그 사이에 두고는 홍수 때에  이렇게 높이 평가할 이 높은 평가에 홍수 심판 면하는 구원을 이렇게 허무하게  봤고, 몇 해, 몇 달, 몇 시간을 그 간격에 두고는 이 심판이 이렇게 보이지  아니해서 무시하고 멸시하고 허무한 것으로 평가 했으니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거슬린 삐뚤어진 걸음을 하나 둘 걸어 원형인 하나님에게서 이탈되고 유혹한  악령에게 사로잡혀서 인간이 저주받아 어두워진 것입니다.

 사람이 시간에 제한받는 그 양은 범죄의 양이요, 공간과 종별에 제한받는  제재받는 모든 것은 다 범죄한 양입니다. 범죄한 죄인이라도 죄의 양이 적으면  제한을 적게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때에도 홍수심판이 이르러 천하보다 가치가 방주가 크고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순종하여 모아놓은 그 방주가 크고 방주외에는 천하에 있는 것이  없는 것과 꼭같이 보여지는 그때의 현실 그대로 가감없이 시간에 제한받지 않는  원시적인 이런 총명를 가진 노아도 있었는데 이것을 전혀 모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그때와 꼭 같습니다.

 그때에는 홍수로 멸해지니 그 환경의 잔인성이 불로 멸하여지는 것의 몇백분의  일도 안됩니다. 철렁거리면 몇천명이 물이 푹 빠쳐서 보이지 아니하지만 불이  타는 것은 하나하나 탄다는 것이 얼마나 맹혹한 것인지 모릅니다.

 노아 홍수 때와같이 예수님의 재림때 온 세계가 불로 타는 것도 그때와 꼭  같습니다. 세계가 한목 불이 붙어 산도 들도 사람도 짐승도 귀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흉한 것도 하늘이 타서 없어지고 땅이 타서 없어진다고 성경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소멸되는 그 당시에 노아 때와같이 만일 가상적으로 온 세계를 네  주먹에 쥐어줄 터이니 이것을 할 것이냐 이 불심판을 면하는 구원을 받겠느냐  하면 한 사람도 남음이 없이 이 구원을 다 취할 것입니다.

 자기가 평생 좋아하던 어떤 것이라도 이것을 만족히 줄 터인데 이것을 받을  것이냐 불심판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겠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차지하지  평생소원 하던 것을 그것을 차지하겠습니까? 왜? 소원했지만 불에 타서 중간에  없어진다는 것을 보기 때문에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구원만이 불로 멸망받는  것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을 제 눈으로 바로 직결하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 앞에  봅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 가까이 왔습니다.

 이상하게도 이종교에서도 우주의 종말을 관심있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동등  숫자입니다. 예수 이천 년이면 아마 그때쯤 끝나겠다 모든 심리학자들과 명철한  도덕가들도 그렇게 사람들이 타락해 가면 불심판이 안와도 예수 이천 년 이상은  유지 못한다 하는 것은 전자 계산으로 계산을 대고 있습니다.

 이런데 성경대로 보면 그날과 그시는 알지 못하지만 예수 이천 년을 친다면  지금 17년 밖에는 남지 아니했습니다. 어쨌건 예정한 모든 예정의 징조를 보면  예수님의 재림은 가까이 왔습니다.

 이렇게 우리 앞에는 이런 중대한 우주가 확 디비지는 모든 물질계의 만물이 확  변동되는 대(大) 변동의 이 큰 사건이 인간들에게 놓여 있지만 어떤 사람은 이  말을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하고 또 어떤 사람은 들으나 부인되어지고 어떤  사람은 들을 때에 인정은 되나 자기의 전 생활이 여기 기준해서 움직일만한 이런  아무런 느낌없는 사람, 어떤 사람은 이 사실을 그 당시에 직접 보고, 느끼는  것보다 더 강한 느낌을 가지고 자기의 모든 생애가 이 사건을 떠나서는  움직이지를 못하고 필연적으로 본능적으로 자연적으로 이 불심판 가운데에  주님을 영접할 이것 때문에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전 생애가 움직여지기까지  세상 어떤 것이 그에게 자극 주고 충격주는 것보다 더 이 사실이 더욱 강하게  자극을 주고 충격 주어서 이 충격에서 이 자극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이  감동에서 전 생애가 이루어지는 이렇게 멀리 바라보고 넓게 보아 시간에  가리움을 받지 아니하고 그 현장과 지금 현장의 이 공간의 가리움을 받지  아니하고 이렇게 꿰뚫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 이 차이가 무슨 연고인가? 이것이  범죄한 까닭입니다.

 죄를 많이 범하고 적게 범하고 죄를 많이 회개하고 적게 회개하고 신앙 양심을  많이 쓰고 적게 쓰고 하는 여기에서 자기가 어두움의 짙으게 깊이 파묻힌  사람있고 어두움을 헤치고 나와 옅은 어두움에 묻혀 있어 하나님처럼 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그대로 인정되고 보여지고 느껴져서 여기  준하여 필연적인 생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에누리가 있고 조그마치라도 과장이 있어 인간들이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 가운데 깊이 파묻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있지만 과거 지은죄를  원통히 회개하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뜻인 진리대로 살아보겠다는 이것이  희박하고 유약한 여기에서 사람은 무형의 감옥속에 갇히워서 이 암흑속에 갇혀  사실이 부인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너희들이 이 모든 땅위에 있는 인간이 덮고 가리운 이 모든 비밀의  진상이 다 드러나고 모든 것이 불살라지게 될 때에 이제 있는 하늘도 불에 타서  살라지고 땅도 불에 타서 살라지고 모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때에 전체가 중한 것뿐이라 인간이 아름답게 보여지는 것이 그  비밀을 가리고 전체가 흉악해 가장 심판을 크게 받을 것뿐이라.

 이렇게 되리니 너희들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네  하나 하나의 행동, 과거 행동, 현재 행동, 미래의 한 행도, 네 행동을 하나 하나  따져라.

 거룩한 행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하고 구별하고 따지고 따지고 심사하고  심사해서 온전에 도달 하기까지 네가 아는 성경지식으로나 네 양심으로나 모든  통계로나 모든 역사에 비추어서 네 마음에 완전타 하기까지 네 전 생애를 따져  가라. 따져 나가라, 돈에 쏠려서 비판없이 행락에 쏠려서 비판없이 자기의 분주  복잡에 쏠려서 비판없이 다소의 어떤 세력에 쏠려 비판없이 갈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불심판에서 다 끝날 것이요, 그 심판안에 다 포함된 것들이다. 그걸  초월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 이하의 것들이다.

 다만 네가 이 불심판 이 문제에 대해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느냐  당도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느냐 이 문제가 제일 급한 문제요 큰 문제요 중요한  문제요 나머지는 이 문제 다 발아래 밟혀서 이제나 저제나 다 하나도 끝나는  것인데 이것을 버려두고 네가 급선무라고 생각해서 분주하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어쨌든 우리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네  몸이 바른 길로 인도하는 그 마음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소금을 놓고 살에다 살을 깎고 소금을 치는 것처럼 소금을 치면서  반성도 하고 회개도 하고 구별하라 했습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주의  나타나심을 바라보고 사모하라 아무리 이렇게 진리에 맞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주재이신 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상관 없습니다. 이는 당신의 구원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것에게도 붙들리지 말고 제재받지 말고 옳으냐 그르냐 이  진리에 먼저 인정받는 이 노력해라 진리에 인정바든 이 노력해라, 아예 진리에게  정죄받으면 어서 해결지으라 주의 피가 있으니 고해서 사함받으라 이 진리에 이  진리라는 이 심판법에 정죄받지 아니하도록 이 문제 해결지으라,  다음에는 진리에 정죄 안받는다 할지라도 주재이신 당신을 위주로 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진리대로 된 그 행동을 가리켜서  경건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진리대로 됐다고 해서 그 행동은 경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시고 불심판으로 임하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에 그렇게 될는지  모르지만 하루동안 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다소 시간을 끌지 않느냐 그렇게  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 보면 하루동안에 임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만일 우리는 지금 어떤 그 이웃나라에 공중에 벌거이 불이 댕기고 이제  불심판이 임했는가 보다 지금 어디 불심판에 임했다 하는 그런 것을 우리가  듣든지 보든지 한다면 우리는 그때에 어떻게 할 것인가?  말씀하신대로 불심판이 임했으니 아예 하던일 다 이제는 한 시간 후인지 두  시간 후인지 다 불탈 것이니까 이제 다 손놓고 다 버리고 이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우리는 기도하면서 공중에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서서 주님을 기다리자  할 것인가? 아닙니다. 이것 잘 알아야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저기 서대신동에 예를들면 불이 타서 들어와도  우리가 예배 보는 것 예배봐야 합니다.

 먹지도 못할 밥이지만 밥을 하던 것 밥을 계속해야 합니다. 내게 바느질 하던  것이면 바느질도 계속해야 됩니다. 왜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는 것은 본체적  교제입니다. 주님과 우리와의 본체적 교제입니다. 지금은 주님과 우리와의  활동적 교제시간입니다. 활동적 교제시간입니다. 지금은 활동으로 당신과  우리와의 결합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과 우리와의 결합은 활동입니다.

주님에게 내 마음이 피동됨으로 내 모든 마음의 움직임이 주님에게 피동되므로  내 몸의 움직임이 주님에게 피동되므로 주님과 결합입니다.

 지금은 활동적 결합시기입니다.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그때는 활동적  결합으로 된 이 결합이 본체적 결합으로 주님도 영육으로 신인양성일위로  나타나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나타나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나타나시고  부활하고 우리도 변화해서 주님과 같은 사람으로 본체적 결합으로 불심판을  면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옮겨 받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활동적 결합이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불이 타도 나 할  일 내가 주님이 나에게 명령하시는 주님이 나에게 하라 하시는 대로의 안 할  것을 안하는 여기에서 하라고 하시는 것을 하는 여기에서 이 일을 하는 여기에서  주님과 나와는 본체적 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나에게 본체적 결합을 이루는 한 도화선과 같이 한 신인교제의  중보와 같이 그 연결을 이루는 연결성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그때 주님이  나에게 명하시는 이 일을 벌써 주님이 오셨고 불심판이 내렸으니 이제 나는 이  일을 그만두고 주님 맞이해야 되겠다 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 주관적입니다.

그것이 삐뚤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과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똑똑히  기억해야 됩니다.

 밭에서 일하다가 주님이 부르니까 들려 갔습니다. 요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놓은  것은 지금은 활동으로 주님에게 결합인데 주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는 그것을  중단하고 하지 말라는 그것을 같이 가서 버려두고 이러면 그것으로 주님과 나와  연결이 끊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는 그 시까지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내  현실에서 명하시는 이것을 찾아서 이대로 이행하면 당신이 나를 찾아 오셔서  데리고 가십니다. 당신이 나를 찾아서 데리고 가셔도 내가 그 사명 내 놓고 주님  내가 따르고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 맡기신 그 일을 감당하는 그 일을  계속할 때 주님이 오셔서 그만두고 가자 하고 당신이 나를 데리고 가십니다.

이걸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주님을 맞이하는 재림 준비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자기  현실에서 주님이 자기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시고 명하시고 계시는지 어떤 것을  하지 말라고 하시고 어떤 것을 하라고 하시는지 이것을 바로 찾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런 일 저런 일 하는 것은 그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주님이 이런 일 저런 일 시키시는 목적이 무엇이냐? 이 일을 당신이  못해서 우리의 손을 빌리려 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일 저런 일 하는 것도 그 일이 가치있는 일이라 그 일이 없어서는  안될 일이라 그 일의 성공을 위해서 하는 것 아닙니다. 단지 두 가지요 복잡한  사이비한 가운데서 주님이 나에게 명하시는 그게 무엇인지 요것을 구별해서 찾는  그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요 하나는 당신이 시키시는 대로  당신에게 피동되어 움직이는 이것을 연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을 위해 사는 것 아니요. 당신이 나에게 시키시는 그 일이 가치가  없는 일 손해보는 일 상관없소. 죽자껏 해 왔는데 그 일이 그 당시에 바로  파괴되어도 상관없소 나는 파괴되고 안되고 일이 가치있고 안 있고 크고 적고 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땅위에 믿음 지키는 것 아닙니다.

 다만 당신의 뜻에 내가 결합되고 당신의 움직임에 내가 결합되어 움직이는  이것을 연성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해 놓은 것 다 불타 버립니다.

 그것 연성하는 것이요 하늘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의 안에서 통일될 때에 그  나라는 모든 언행심사가 당신 한 분의 뜻에 따른 뜻 한 분의 움직임이 따른  움직임을 이것만으로 된 나라입니다.

 이 실력이 그 나라의 실력입니다. 땅 위에 세계를 주문 실력이라도 그 나라에는  하나도 용납 못합니다. 다 이것은 불심판 아래에 불심판의 선 아래 있는 것이요,  거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위에 살면서 이 일을 하는 이 일이 가치가 있나 없나 이  일이 장구한 일이냐 없어질 일이냐 이런 평가는 소용없는 평가입니다. 그 일  하는 것 아니요, 큰 자본을 들여서 해 놓은 일이 당장 부숴져도 상관없소 왜? 그  일 때문에 하는 것 아니라 당신의 뜻과 당신의 행동에 내가 피동되고 안되는  그것을 연성 시키기 위해서 땅위에 사는 것입니다. 뭐할라고? 무궁세계에  당신에게 피동되는 그것만이 무궁세계의 생애요 무궁세계의 권위요, 실력이요.

 이러기에 우리는 땅위에서 무궁세계 영원세계의 영원한 생애를 연습 연성하는  것이 우리의 세상생애입니다. 영은 하나님에게 피동, 중생된 영에게 심신은  피동, 이러면 그 심신에게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거기 피동됩니다.

이것이 무궁세계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오늘밤에 낭독한 그  절수위에 바로 있습니다. 에누리 없습니다. 노아 때에도 유명한 사람들은 다  홍수로 매장 받았소 지혜있고 통달한 사람은 거기 매장당했소 하나님의 주권으로  당신의 본의로 이루어져 가는 절대성의 것이 있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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