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기도,경외,순종


선지자선교회 1983년 7월 14일 목새

 

본문 : 히5:7-10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 도성인신 하셔 가지고 신인양성일위로 계실 때에 당신이 벌써  사람되어 오신 그것부터가 우리를 대신해서 사람되신 것입니다. 또 세례받으신  것도 우리를 대신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 세례인데  예수님의 신성은 물론이요 예수님이 인성도 회개의 세례를 받을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세례도 우리를 대신해서 받으셨고 모든 사생활도 공생활도 다  우리를 대신해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도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또 살리심도 우리를 대신해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신 이 대신을 온전히 이루실 때에 어떻게 이루신 그  순서와 방편은 곧 우리가 온전을 이루는 순서와 방편입니다.

 그런고로 9절 끝에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택한 모든 자의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다른 데는 또 '첫열매가 되시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대신해서 구원을 이루신 구원이요 또 대신해서 행하신 그 방편인데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도 그 첫열매 근원인 그 방편 그 순서대로  하여서만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게 몇 가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얼핏 보면  예수님이 그 죽으심에서 다시 살아나는, 당신이 살아나는 당신의 그 살아나는  것이 구원이 되고, 살아나는 것이 복이 되고 살아나시는 것이 좋기 때문에  살아나기를 위해서 간구한 것으로 이렇게 보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이신데 그 신성이 인성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의 그 희생과 꼭 같은 중량의 희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성으로서는 그것이 큰 희생이지 그게 뭐 구원이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인성으로는 또 죽은 가운데서 살아날 그 무슨 염려가 있어서  간구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법은 죄가 없는 데에는 사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하실 때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털끝만한  죄도 범하지 아니하셨고 그 죽으심이 전부 절대자이신 지공과 지성에 순종으로  죽으셨고 온갖 외부적인 형벌이 있고 고난이 있었지마는 그로 인해서 지성과  지공을 배반치 아니했고 또 어려움에도 순종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가 없는 죄를 범하지 안한 예수님의 그 인성이 죽음  가운데에서 살아나지 못할 염려가 있어서 심한 통곡과 간구로 살려 주시기를  간구한 것 아닙니다.

 죽음에서 살아나는 이것이 우리를 대속하시는 살아나심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인양성 일위이신 예수님이 죽음에서 우리를 대속한 이 대속의 살아나심을  당신이 받지 안한다면 우리는 사죄와 칭의와 하나님과의 화친은 얻었지마는 화친  얻은 자로 삶을 가지는, 영생을 하는 이 영생은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주신 구원은 모든 법적  문제를 다 해결을 지워서 우리를 대속해 주신 것인데 그는 죄를 없이 했고  의롭게 했고, 또 하나님과 화친케 한 것뿐이지 다시 이런 자로 살아서 영생을  하도록 하신 것은 안 됩니다. 그것은 다만 인생의 그 사망의 난제를 해결지운  것뿐이지 살리는 대속 공로는 안 됩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을 그 죄를 다 없이 하고 감옥에서 석방했다 할 지라도  내어놓았다 할지라도 이제 감옥에서 나와 가지고 그다음이 생애가 자기의 생애요  자기의 영광입니다.만일 거게서 나오기만 하고 그다음이 살아 역사하지 못한다면  그것으로서 뭐 죽은 것이나 다 한 가지지 별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형을 다해서 했으면 죽기 전에 형을 면했다 할지라도, 형을 다 했다 할지라도  죽음으로 그거는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인제 그 죄수가 나와 가지고 감옥에서 나와서 이제는 죄 없는 자로, 다 죄값을  형으로 받았기 때문에. 죄 없는 자로 이제 하루를 살든지, 일 년을 살든지, 십  년을 살든지 사는 그것이 자기에게 보람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이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영생하는 새생명으로 살아나 가지고 모든 산 기업과 산  소망을 가지고 누리고 또 산 자로 온전을 향하여 성장해 나가는 이것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영광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보면 '예수님을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게  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주어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럽지도 안하고 낡아지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의  간구를 해서 십자가상에 대속으로 죽으시는 그 일을 성공을 했습니다. 에베소  1장에 보면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지극히 큰 능력으로 그 죽으심에 성공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지공법과 지성법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지공법은  자기가 자원해 가지고서 대형하겠다고 자원하면 그것은 자유성을 줬기 때문에  자원하는 데에 거절하면 자유성을 꺾는 게 됩니다. 그런고로 자원을 하면 대형  대행 대화친, 대신을 할 수 있지마는 자원하지 안하면 대신이 안 됩니다.

강제로는 대신을 시키면 법에 위반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혀 죽으실 때에 다만 세포 하나라도 그때에  대속하시는 그 죽음이, 그 고난이 원하고 원함이 돼져야 되지 그 세포 하나라도  원치 안함이 됐으면 하나님의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의 지혜 앞에 그 세포  하나라도 원함이 아니고 강제가 되어지니까 지공의 대속을 못 이룹니다. 이는  강제 죽음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대속이 안 됩니다.

 또 그렇게 십자가 못박혀 죽으실 때에도 지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성의  하나님을 향하는 그 전부가 돼야 되지 세포 하나라도 찰나에 신경 하나라도  아픔으로 향하고 지성하신 이 하나님을 향함이 안 되면 그거는 지성에 만족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지성법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어려워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는 이렇게 이 일을 감당할 만한  그런 실력이 없으니까 감당할 만한 그런 실력 있는 자가 천상 천하에 있거든  하나님께서 다른 이를 시키십시오. 그러나 내 마음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나는 이런 실력이 없습니다. 내가 지성에 만족을 하고  지공에 만족을 하는 이런 대속을 인성을 가지고 인체를 가졌기 때문에 이 일이  인간으로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이 일을 해 주셔야만 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이런 실력이 없습니다.' 이것을 말해서,  '이 잔을 내게서 떠나가게 할 수 없습니까? 내가 이 잔을 마시지 안 하면 안  됩니까?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것은  이것이 자기를 당신의 그 인성을 아시는, 인성을 아시고 인성의 유한됨을 아시고  이 무한의 대속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한의 그 도우심이 아니면 할 수  없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기까지 고민하시면서 간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지극히 큰 능력이 가서 역사해 가지고서 지극히 큰  능력으로, 지극히 큰 능력은 곧 성령의 능력인데 하나님의 능력인데 하나님의 그  능력이 곧 예수님의 신성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인성 신성이 일위지마는 인성으로서 불가능한 것을 신성이 예수님의  인성을 가지고 다 완성하실 이것을 허락하시고 이것이 결정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 가지고 제자들에게 '이제는 됐다. 너희들이 안심하고 좀  쉬라. 자고 쉬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때가 되니까  이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유유하게 박히셨습니다.

 에베소 1장에 보면 이 구속받은 우리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왔는데 이 능력이 우리에게  오기 전에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으시는 일과 또 부활하신  일을 대속의 일을 완전히 완성하셨다. 완성하시고 완성하신 그 능력이 너희들이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을 통하여 그 능력이 역사하셔 가지고 너희들도 할 일은  둘뿐인데-죽는 일 사는 일, 죽는 일과 사는 일 그것 두 가지가 우리 할  일인데.-죽음의 성공을 하고 삶의 성공을 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몸이 되고  하나님은 머리가 되고 또 만물은 발등상이 되고 만물에게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하는 중보자가 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 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러면 이는 또 부활하심에 대한  심한 통곡의 간구입니다.

 '소원을 을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참 죽는 일, 지난밤에 말씀과 같이 다해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일,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심같이 내가 주님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조그마치라도 남은 데에는 주님을 아직까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같이  사랑하지 못했고 사랑에 빚진 자라.

 그러기에 성도들은 자기가 일생 동안 주님을 위해서 살고 살고 이러지마는  마지막에 순교 이것을 푯대로 삼고 있습니다. 물론 주를 위해서 살았지마는  마지막에 그 생명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그 생명을 다하지 안하면 사랑할  수 없는 그 절정에 생명을 다해서 나를 사랑하신 이 주님을 상대할 때에 나도  생명을 다하지 안하면 주님을 사랑할 수 없는 그런 경우를 당해서 나도 생명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그게 이루어지기 전에는  항상 양심에 가책이 돼서, 주님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주님을 내가 이런  미숙한 사랑으로 사랑의 상대가 되어 있는 그 감에서 참 무거운 짐 큰 빚을 진  것같이 이렇게 느끼고 있다가 순교되는 그때에사 비로소 마음에 만족을 했던  것입니다.

 제가 늘 말하지마는 주남선 목사님이 참 그분이 고신에 제일 위대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참 제물이었고 그분이 만일 살아 계셨다면 그 분이 살아  있는 동안에 고신에 대해서는 아무도 불만할 사람도 없호 불평할 사람도 없고 또  그런 무슨 좀 서로 불화나 이런 걸 가지고서 갈라지는 그런 일이 분명히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만 세상을 떠버렸는데.

 그분은 마지막에 주를 사랑함으로 생명을 다하지 안하면 주를 사랑할 수 없는  그런 경우를 원해서, 신사참배 때도 그것을 원해서 그저 주님이 다해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도 주님을 사랑함으로 생명이 끊어지기를 원하고 원했지마는  왜정 말년 신사참배 때에 감옥에만 있었지 순교를 못 했습니다.

 또 6·25 때에 이제 때가 오니까 그때에 주를 사랑함으로, 생명을 내놓지  안하면 생명을 다하지 안하면 주를 사랑할 수 없는 그런 때를 바라서 늘 순교를  기다려서 모든 공습 때문에 소개했을 때에도 거게 늘 계속해서 날마다 꼭 안  빠지고 와서 이래 대기하고 이래 자취를 하면서 대기를 하고 이래 있었지마는  그만 헛일했습니다.

 이러니까 못 견뎌서 협천 가서 협천읍교회 가서 집회 하면서 '나는 이제 그거는  안 됐고 이러니까 내 있는 생명 다해서 주님의 도를 전하다가 가겠다'고 있는  생명 다하는 그 소원에서 그때 집회할 때에 큰 소리로 있는 힘을 다해서 외치고  그랬음으로 그때에 참 큰 은혜가 있었는데 그 집회 끝에 병이 나 가지고서 와서  이틀 만인가 별세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나를 사랑한 것과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이 일, 또 주님이 내게  주신 정조는 죽으심으로 나에게 사죄와 칭의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의 하나가  되는 이 일을 주셨으니까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조입니다. 주님이  다해서 이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것을 보수하는 것이  이것이 주님과 나와의 관계에 그 지조를 지키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지조를 지키는 데에도 참 생명을 다해서 지키고, 또 지조 가진 자로  사는 구속을 받은 이 삼대 구속의 생활을 하는 이것도 우리가 이 세상에 살려고  할 때에 '무엇이든지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하는 것은 물론 주님의 구속해 주신 이 구속은 곧 그것이 우리에게 신앙의  지조요 정조입니다. 주님과 우리 와의 관계에 정조입니다.

 육체의 부부는, 육체의 부부는 육체의 관계 이성 관계에 그것이 지조요 그  안에는 마음이 정조지마는 우리는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사죄 주셨는데 그  사죄를, 칭의를, 하나님과 동행시켜 줬는데 이제 이 화친을 이것을 우라가  강직하는 것이 주님에게 대한 정조를 강직하는 것이요 또 이대로에 사는 것이  정조 가진 그 깨끗한 생애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과, 또 이웃을 위해서, 주님이 하나 소원하신 것,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 사랑하는 자에게 우리는 예물을 해야 되겠고 또 그분이 소원하는  것을 들을 때에 기쁨이 됩니다. 서로 존경하는 사람도 내가 존경하는 그분이  나에게 말한 그것을 내가 다 잘 완료를 했을 때에 기쁨이 되고 또 대면할 때에  대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에게 소원하신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 우리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 모든  말씀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것 하나뿐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하는 요것 뿐입니다.

 그러면 이 일을 주님이 부탁하신 이 일을 감당하는 이것도 참 다 들이지 안하면  안 됩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너희가 망대를 지을 때에 앉아서 준공하기에  족할는지 예산하지 않느냐?' 이래 놓고서 그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있는  소유를 다 내놓지 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말은 내가 걸어간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내가 행한 이  일을 하지 못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내 모형, 네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네가 나를 사랑하여 내 모형, 제자라는 것은 제자라 말은 선생의  모형이라 말입니다. 선생 꼭 닮은 것이 제자입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주님의  사랑의 모형이 되지 못하고, 주님의 성공의 모형이 되지 못한다 하는  그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것을 하나라도 두고는,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  13장에 보면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힌다. 칼로 죽이는 자는 칼에 상한다.'  그러면,  이러고 무력을 쓰지 마라. 너희들의 싸움에는 무력을 쓰지 마라. 너희들의  싸움에는 무력 쓰지 마라. 무력 쓰는 자는 무력으로 망한다. 또 '사로잡는 자는  다 사로잡힌다' 눈을 떠야 되지, 시청각인데.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힌다'  세상에 무엇이든지 하나 가지고 가려고 하면 그것으로, 인해서 네가 세상에게  붙들리고 이 길을 걸어갈 수가 없다 하는 그것을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나는 다 내놔도 생명 하나만큼은 내놓을 수 없다. 나는 다 내놔도 내  자존심 하나만큼은 내놓지 못한다.' 언제 내가 어떤 장로에게 어떤 권찰하고  둘이 심방을 가 가지고서, 참 아주 깨끗하게 사는 장로님입니다.

 그 장로님에게 '장로님에게 회개할 점이 하나 있는데 그거 뭐인지 압니까?'  이러니까 '모릅니다. 뭣인지? 뭣입니까?' 이래서 '장로님은 자존심 그게 강해  가지고서 그게 우상이 돼 있습니다.' 이러니까 '참 나는 죽음과 자존심에, 이제  자존심 꺾어지는 것과, 자존심에 그 가책되는 자존심 꺾어지는 것과 죽음과  있으면 죽음을 취했지 나는 자존심을 꺾고는 나는 살지 못합니다.' 하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존심 그거 하나라도 가지고 예수님의 주신 대속을 보수하려고 하면 또 대속해  주신 대로 살려고 하면, 또 그분이 우리에게 한 마디 부탁한 그 부탁을 이것을  감당하려고 하면 자존심 고거 하나라도 안됩니다. 그것도 안 되고 생명도 안  되고 뭣이든지 하나 가지고 '요것 만큼은 내가 희생할 수 없다. 요거는 내놓을  수가 없다.' 하는 게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뭐 우리가 믿는다고 해도 잘못하면 그저 이 주님의 이 대속을  보수하는 것이 정조를 지킨 것인데 정조를 판 여인이 그 남편에게 무슨 안면이  있을 것입니까? 정조를 판 자가 주님 앞에 가 가지고서 무슨 안면이 있겠습니까?  주님은 얼마든지 용서하시고 하시지마는 그뭐 그래도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것과  같지 뭐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왜정 말년에 다 신사참배에 정조를 다 팔았다 말이오. 한국 교회는 다  팔았어. 안 판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안 판 사람이 별로 없었어. 뭐 지금  날뛰는, 날뛰는 그 유명한 목사들 가운에데는 제가 알기로는 안 판 사람이  마산에 두 사람 있습니다. 마산에 두 사람 있는 사람은 조수옥씨라고, 아따 무슨  고아원이지? 인애원, 옳지. 인애원 원장 그분이 거석했고, 또 손명복  목사님이라고 그분이 지금 살아 있는데 지조를 정조를 팔지 안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하고 나왔었어. 그다음에 숨어 있는 분들은 어데 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부산서는 제가 아는 대로는 없습니다.다 모두 그때에  정조를 팔았습니다.

 또 6·25때도, 어떤 목사는 자기가 아주 거게서 우상을 섬기지 안한, 있는 것을  다해서 주님의 보수를 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뭐 인민군이 뭐 어때서?  인민군이 뭘 무서워서?' 자기는 인민군 앞에서 자유로 아무 두려움 없이 이렇게  지냈다는 것을 자랑을 하면서 하는 말어 무슨 말이냐? '인민군 만나면 뭐, 말  한마디면 되는데.' '무슨 말이면 됩니까?' 내가 이래 물으니까 '수고하십니다.

그러면 뭐 좋아 하는데.'  그보다 더, 무신론자에게 수고한다고, 무신론 주장하는데 수고한다 하니까  하나님의 유일신을 섬기는 사람이 그보다 더 이상 정조를 파는 일은 없습니다.

이러니까 그래 생각하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그게 아무 가책이 없는 것이라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는 이 세상이 나그네 세상입니다. 잠깐 동안 지나가는, 긴 세월을  줬으면 우리가 참, '주님을 어떻게 네가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분이 주신  대속을 네가 어느 정도 네가 간직하며 보배로 여기며 그 대속해 주신 그대로  어느 정도 네가 얼마나 살았느냐?' 하는 이게 전부 시험이오.

 또 형제를 구원하라고 부탁을 했는데 이 부탁한 일을 네가 어느 정도 신실히  했느냐 하는 이것은 생애의 그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요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 짧은 세상에서 참, 짧기 때문에 잠깐 지나갑니다. 잠깐  지나가지마는 여기에서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 사랑을 어떻게 소중히  여긴 것,  또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대해서 주님이 나를 사랑한 것과 같은,  나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했는가? 주님은 다섯이라면 다섯 다해서 사랑하셨는데,  부요고 지위고 권세고 영광이고 하나님의 그 모든 부요, 몸과 생명을 다해서  나를 사랑하셨는데 나는 다했지마는 목숨은 다하지 못했다. 목숨이 문제가 될  때에는 나는 그걸 지키지 못했다.

 하면 신사참배는 목숨 때문에 다 그랬기 때문에 목숨, 어떤 사람은 돈 어떤  사람은 목숨과 돈, 무슨 자기 몸뚱이, 뭐 몇 가지나 두고 주님을 사랑했으니까  다해서 사랑하신 주님 앞에 내가 무엇을 '이거는 아까와서 내가 다 이것  드려서는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것까지는 내기 가지고 내가 사랑하지 못합니다.'  하는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울 일이겠습니까?  이런고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주님 앞에 나는 어떻게 사랑 했는가? 그  사랑의 상대가 어떻게 됐는가? 이것이 우리가 짧은 세상에서 마련되는 것이고  당신이 전부를 다해서 나에게 사랑으로 주신 정조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주신  정조가 있으니까 그것이 곧 십자가의 대속인데 이 대속을 어느 정도 내가  깨끗하게 내가 보수를 했는지 지켰는지?  또 주님이 나에게 부탁하신 이 부탁 이 복음을 위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사랑하느냐?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이 모든 시람들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압니다.'  '어린양을 치라' 이렇게 세 번 물으시고 그럴 때에 다 '사랑하면 네가, 내가  마지막으로 부탁한 어린양을 다스리고 먹이고 길러라.' 이것을 부탁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일도 우리가 짧은 세상에서, 나타나는 건 이것뿐입니다.

무궁세계에 나타나는 것은 당신을 어떻게 사랑했으며,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지조를 어떻게 지켰으며, 당신이 부탁하신 일을 어떻게 했느냐? 이 일을 한  그것이 무궁세계에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그것입니다. 곧 그게 전부 진리와  영감대로 행한 것이요 그것이 이제 무궁세계에서 할 수 있는 그 실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 이것을 경험하고 실력을 갖춘 그대로, 그리스도 심판  앞에 선다는 것은 그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서, 주님은 드러내기 전에 아시지마는  당신도 아신다는 것을 표하고 우리 자신들도 알고 모든 사람들에게도 알고  만물에게도 다 알려 가지고서 '이는 요 만한 정조성 있고-그게  결백성인데-요만한 정조성 결백성이 있고, 또 이만큼 하나님의 사랑의 상대가  됐고, 또 이만큼 자기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만큼 있는 것을  희생하는 요만큼은 희생할 자가 됐기 때문에 그 정도에 따라서 한 고을, 열  고을, 다섯 고을 이래 나눠 준다는 것이 무궁세계에 거게서 관할하는, 퉁치하는,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대제사장 노릇하고, 선지자  노릇하고, 왕노릇 하는 이 일의 직책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 말하는 게 그겁니다. 이것은 지금 다 서론인데, 이렇게  이리 되어 있으니 우리도 이 일을 그냥 감당하려고 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심한 통곡과 간구가 있어 가지고서 됐는데 우리가 그거 없이  하려고 하는 그런 생각 가지는 건 이거는 참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이게 우리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도 그것 가지고는 안 됐습니다. 그것 가지고는 안 됐어. 안 되고, '올렸고'  거기다가 덧붙이기를 뭐냐 하면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본체시나 동등될 걸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비어 종의  형상을 가져 이렇게 두려워 했습니다. 높였습니다.

 두려워했다 말은 경외라 말은 높였다 말인데 우리가 날마다 연구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데? 그분을 그분만치 우리들은 높여야 됩니다.

 왜? 일국의 왕도 높이는데 이제 우주의 주인인데 어떻게 높여야 되며 이 세상에  조금 권세를 가진 것도 우리가 두려워하고 그 앞에 떠는데 모든 걸 주권하시는  그분을 어떻게 우리가 모셔야 됩니까?  언제든지, 내가 어떤 사람이 기도하는 것 보니까 '주님은 자존자십니다. 주님은  자존자십니다. 모든 건 원인이 있지만 주님은 원인이 없습니다. 모든 것의  원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창조했습니다. 주님은 지극히 높으십니다.' 이래서  자꾸 주님이 얼마나 크고 높으신 것을 자꾸 자기가 말하는 것 주관이기 때문에  말하면 그대로 됩니다. 우리는 말 하번 하면 그게 속에 그만치 그 사람이 돼진다  말이오. 말하면 자꾸 그게 돼져.

 이러기 때문에 말로 또 주님을 자존하심과 지존하심을 자꾸 말하고 말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을 경외, 하나님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높여야 되는 이것을  자기가 높이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어지려고 자꾸 애를 쓰는 것이 그것이  명상이요 그게 기도입니다.

 이래서 참 하나님에 대해서 다 같은 한 자리에 있지마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다릅니다. 두려워함이 다 천층 만층이오. 만 명이 있으면 만 명이 다 두려움의  정도가 다 다르고 또 사랑함의 정도가 다 다릅니다.

 며칠 전에 여게, 그 집사가 키가, 노 집사가 키가 큰데 영 조그만하이  낮아졌어. 여게 아마 ○, 아따 ○ 무슨 집사고? 그 집사하고 한 교회 있었으니까  알 겁니다. 6·25때에 주남선 목사하고 이 장로하고 추교경 조사하고 서이 그  개평교회 가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설교를 할 때 목사님이 '지금 황충이떼들이 와  가지고 있으니까 이 황충이떼들에지 정조를 팔지 말고 굴하지 말아라' 하는 그  설교를 했는데 내나 거기 내무서원이 앉아 가지고서 필기하는 것을 다 보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그것도 생명 안 내놓으면 외치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딱 마치고 나니까 '동무 좀 같이 갑시다.' 그래 끌려갔습니다. 가  가지고서 감옥에 딱 가둬 놓고 '요놈들은 우리 소원을 풀기 위해서 요놈을  죽이도록 당장 그래 죽일 게 아니라 요래 가둬 놔라'  이랬는데 그때에 노 집사라는 그 부인이 밥상을 이래 밥상을 이래 이고 오는데  '그게 뭐꼬?' '우리 목사님하고 장로님하고 조사님하고 와서 그래 지금 내가  점심 해 가지고 온다'고. '보자'이래 보니까 저거는 꽁보리밥도 못 먹는데 허연  쌀밥에다가 갈치를 이런 갈치를 이래 구워 가지고 오니까 '이놈의 자식들,  우리는 나무 잎파리도 못 먹고 있는데 이런 갈치가 어데 나왔어? ' 그래  가지고서 그 먹지도 못하구로 하고 그만 들이 엎어버리고 말이지. 이래 가지고  또 한 몽둥이 맞고. 그래도 또 엎으니까 또 그래 가지고 주워 가지고 이래 또  우리 목사님 대접해야 된다고 한 그 집사님을 저아레 여기서 만났어. 우리 교회  왔어요.

 찾아왔는데, 와 가지고 나를 만나려고 저기 있다가서 인사를 하는데 그래  보니까 내가, 노 집사님이라 해. '노 집사라요? 어데 노 집사입니까?' 이러니까  개평교회 노 집사라 해. '아니 노 집사가 키가 컸는데 왜 이래 키가  작아졌습니까?' 영 키가 아주 작아져 버렸어.

 그렇게 다 신앙 생활들을 그래 합니다. 겉어머리는 다 같은 것 같애도. 칼이  들고 안 드는 것은 야문 것을 만나 보면 칼이 잘들고 못드는 것이 표가 나는  것처럼 그리 돼지면 그걸 시험을 해 보면 안다 그거요.

 이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지금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지금 심한 통곡으로  간구하는 이 눈물의 기도 진정, 눈물이라 하는 것은 속에 간장에서 나오는  것인데 심장이 울지 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눈물은 피가  아닙니다. 자기 속에 그 심령에 정력에, 정력에 에네르기가 나와가지고서 눈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고로 이런 눈물의 간구가 안 되면 우리는 안 됩니다.

 '경외하심으로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실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느니라' 주님도 이 온전은 순종으로써만 온전이 자랐습니다. 온전을 배웠다  했어. 순종으로 온전을 배워서 이루었다는 것이기에 그거 자라갔다 그말이오.

 그런고로 우리는 앞으로 있는 이 모든 어려움에 정조를 지키는 것이나, 그분이  원하시는 생애를 하는 것이나, 또 그분이 부탁하신 것을 감당하는 데는 심한  통곡의 간구가 없으면 안 됩니다. 간구가 없습니다. 또 간구만 가지고 안  됩니다. 간구와 우리를 구원하신 그 주님이 어떻게 크신 분이며 어떻게 높으신  분인가 이분을 자꾸 알아서 알아야 됩니다.

 참 여러분들이 복은 있기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존자시라 하나님은  지존자시라 하는 그 말을 그렇게 자꾸 재독 삼독 십독 뭐 백독으로 이렇게  익히는 연습을 지금 하지 않습니다. 이런데 여러분들은 뭐 들으려면 몇십  번이라도 들었고 얼마든지 했으니까 자기네들이 이래 핑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고로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내가 자꾸 인식하고 인식해서 아무리 우리가  경험하면 '이제 이게 이렇게 두려웠다. 두려워서 막 못 견뎌 두려워 죽을  지경이다.' 이보다 더 큰 두려움이 오면 그까짓 거 문제가 없습니다.

 지금 평소에는 저 호랑이 있는 그런 호랑이 굴에 가면 두려울 것 아닙니까?  6·25 때는 호랑이 굴이 피난처입니다. 그보다 더 인민군들이 죽일라 하는, 신앙  지키지 안하는 사람이야 그거 상관 없어. 신앙 지키는 사람들은 그들이 죽일라  하니까 그들이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 더 무서우니까 그들이 없는 산골짝에 가  있으면 거기 참 천국이고 피난처라.

 제가 그때 농산 때, 한번도 참 피하지는 안했는데 그때 하도 거기서 '이제는 다  잡아가 버리고 도야지 한 마리 남았으니까 이저는 마지막 우리가 잡아먹고  순교합시다.' 이러면서 기별이 왔어.

 그래서 그때 갔습니다. 갔는데 가 가지고서 그 도야지를 잡아서 집에서는 먹지  못하고 저 깊은 산골에 가 가지고 잡아 가지고 거기서 먹는데 거게가 어찌  편한지.

 그래서 내가 말했어. '평소 때는 여기 와 있으면 외롭고 적적하고 또 심심하고  또 어떨 때는 무서운 마음도 들 건데 지금 외적이 많기 때문에 적이 많으니까  여게가 참 낙원이요 펑안하다. 사렙다 과부의 집에 엘리야가 있을 때에 그때에  밖에서 이렇게 환난이 심하니까 그 사렙다 과부의 골방 안에 얄아서 삼 년  지내도 그것이 대단히 평안했을 거다.' 그런 얘기를 제가 하면서 그때 모두 다  웃고 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어짜든지 이 기도가 있어야 되겠고, 하나님 두려우심을 우리가  자꾸 깨달아서 우리가 인식을 해야 되겠고, 또 하나는 우리가 믿음이 자라는  것은, 저 먼저 열 처녀 비유에 말하기를 준비는 연습으로 된다 이랬습니다.

준비는 연습으로 된다. 연습해야 되지 당장에 자기 지식 가지고 지식대로 되는  것 아닙니다. 연습해야 되지.

 뭐 어떤 사람이 스케이트 타면 지식으로 요래 요라면 된다고 해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그거는 많은 연습을 해야 스케이트가 타진다 그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감 도리대로 하나 순종해 보고, 둘  순종하고, 열 순종하고, 백 순종하고, 자꾸 순종을 많이 해 봄으로써 연습이 돼  가지고서 순종으로 인해서 기름 준비한다 그래 놨는데 여게는 '순종함을 배워'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는즉' 이 순종으로 자꾸 온전이 이루어진다  말이오. 순종으로 자라간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기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아는 것, '저가 나를 안즉  내가 높이리라' 아는 것, 하나는 우리가 순종으로 자기의 실력을 자꾸 길러가야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현실을 지내보내면 연습 못해요.

 그러니까 의학을 공부하는 의대생들이 자기네들이 뭐 사람의 인체를 뭐 어떻게  해 봐야 되는데 이걸 안 해 보면 자꾸 연습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만일 송장  하나를 준 다음에는 그 송장 하나를 보둠고 안고 뭐, 하나 무서운 기는 없고. 그  송장을 요래 떼 보고 조리 떼 보고 그 송장을 안고 송장을 보물같이 여기고  보물같이 이래 안고 이래 가지고서 해서 비로소 거기서 많은 연습을 해 가지고  산 사람의 그 인체의 수술에 손을 댈 수가 있는 그것이 옳은 의사들인 것입니다.

 제가 어떤 의대에 있는 사람 말 들어 보니까 그 학생들에게 송장 하나를 주면  마구 송장 하나를 얻으면 보물 보물같이 막 핥는답니다. 핥고 보듬고, 밤에 잘  때도 보듬고 자고, 어쨌든가 그래 가지고서, 왜? 그래 가지고 그거 자꾸 이래  해부도 해 보고 요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고 이러는데 그런 것도 연습을 안  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연습 안 하면 우리가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세 가지를 기억합시다. 기도,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어떤 분인지 알아야 경외하지. 경외하는 것. 우리가 순종으로 날마나 모든  실력이 자라가야 됩니다. 담력도 자라가야 돼. 한번 거기서 담력 있는 그런  생활을 또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열 번 하고 자꾸, 담력은 담력 그 연습으로  자라가고, 또 진실은 진실 연습으로 자라가고, 또 슬기는 슬기 연습으로  자라가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사랑 연습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 하나 순종하는 요 현실을 지나가기 전에, 요 현실이 올 때  그 현실을 허비하지 말고, 현실 허비하면 안 됩니다. 이 현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보배라는 것을 지난번에 많이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참 오늘이라는 것은 이 준비할 때입니다. 언제 어찌 될지  몰라요. 지금 뭐 이래 가지고서 남한에서는 이런 것 저런 것 다 호화판으로 하고  있지마는 언제 터져 나올지 모릅니다. 그자들은, 일편단심 그것뿐이니까.

 아레도 보니까 뭐 간첩이 와 가지고서 여섯명이 왔던가 와 가지고서 잡혔다  이러는데, 우리 이남에는 참 좋은 면이 있지마는 이북에는 그런 것 잡으면  이용할 데 이용하고 뽑아 볼 대로 다 뽑아보고 난 다음에는 양식 들고  거석하니까 죽여버려. 죽이고 난 다음에 죽여도 그것 또 끝까지 이용해야 되기  때문에 사과밭에 갖다 넣어 가지고 사과가 잘 열도록 그렇게 한다 말이오. 그  사람들은 뼈가지 하나도 허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중인데 여기서는 그런 일 있으면 그 사람을 인도적으로 자 또 물을  것 묻고 난 다음에 또 그 사람 감화 줘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잘  대우하지 또 회개 안 하는 그것도 죽일 수 없다 해 가지고 지금 수용소에 가둬  놨는데 수용소는 미군이고 우리 국군이고 못 들어갑니다. 왜? 거기서 어떻게  적화 운동이 단결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닌 사람은 그 죽이니까 단합해  가지고서 이래 가지고 저기 천지에 밥먹이고 옷입히고 뭐 이래 놓으니까 거기서  호화판으로서 공산주의를 실컷 합니다. 공산주의의 진짜 공산주의의 뜨거운  불덩이는 지금 도로 수용소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러니까 거기서 이렇게 기계로  주지 들어가지를 못해. 들어가면 죽임을 받기 때문에.

 이러니까 그거 죽여서 밥 한 그릇도 들이지 안하고서 사과에 넣어 가지고서  사과를 열구로 해 가지고 따먹는 수입을 보는 그 계산하는 그런 계산하는 그런  데인데 여게서는 거기다 비해서, 하나님 보고 인도를 보면 옳지마는 이  과학적으로 본다면 이남은 이것 다 비과학적입니다.

 이러니까 언제 어찌 될지 몰라요. 안심하지 말고, 우리는 또 그게 안 오는 게  좋으냐? 오는 게 좋습니다. 실은.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를 가만히 있는데  죽이겠소? 이러니까 참 죽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나도 죽음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그 똑 대상, 다섯 가지고 사랑하는데 나도 다섯 가지고  사랑하는, 양은 작지마는 하려고 하면 그런 일이 오지 안하면 안 된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6·25는 손양원 목사님을 위해서 왔다. 순교자 몇 분을 위해서  왔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좋은 때입니다. 좋은 때입니다. 어짜든지 오늘 아침에도 이 세 가지. 세 가지를  자꾸 연습합시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십 분 기도 후에 권찰회 모입니다.

십 분 동안이라도 바짝 기도합시다. 기도하고, 십 분 동안은 기도 제목만 가지고 잊어버리지 안하고 하고 그래 가지고 어데 가서 기도를 해요. 어데 가서 시간 있는 대로 기도 하고 또 심방 가면서도, 심방 가면서도 눈은, 여러가지라. 안팎에 눈을 가지고 하나님은 자존자시니 그분보다 높은 분이 있느냐? 그분보다 권리 있는 분이 있느냐? 그분보다 나를 사랑하신 분이 있느냐?’ 아무 부모가 사랑해도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그 사랑 가지지 못했습니다. ? 실력이 없기 때문에.

이래 자꾸 하고, 늘 눈 감고도 기도하고. 모두가 기도가 돼야 될 것이고, 모두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연구가 돼야 되겠고, 모두가 순종이 되어야 우리의 구원이 바로 이루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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