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생활-가인과 아벨

  선지자선교회

1980. 1. 16. 수요일 저녁

 

본문: 창세기 4:1-9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기도)

영원한 정죄 영원한 사망을 무한하신 주께서 이를 대속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대속으로 구속해 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는 다 무한한 역사이오며 영원한 섭리였고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주로만 이루어지는 구원임을 저들이 주의 말씀을 인하여 믿나이다. 이 시간도 완전하신 성령의 감동이 우리 마음을 주관하시면 우리 마음은 이 빛에서 완전자와 같은 온전함을 이루고 성령님의 감화가 우리를 떠났을 때에는 여전히 사망과 깜깜한 흑암의 것이 되고 마는 것을 저희들이 얼마든지 경험하고 체험했습니다. 주님의 성령님이 임하실 때에는 사망도 생명으로 화해지고 모든 절망이 소망으로 견고해 지지마는 주의 성령님의 감화가 가리워졌을 때에는 조금도 다름이 없는 옛날 멸망 가운데 있을 때와 같은 걸 저희들이 봅니다. 오늘 밤에도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곳마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충만시켜 주시옵소서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영감을 구한 것이 그가 별스러움이 아니고 이는 필연한 간구인줄 압니다. 저희들에게 필요하고 가하고 유익케 하는 것이 많이 있지마는 성령의 감화가 떠나면 전체는 사망화 되는 것을 저희들이 봅니다. 천하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이 시간도 약속하신대로 주의 피공로로 인하여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충만시켜 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성령님이 오셔서 친히 생명의 도를 전하여 주시고 성령님의 감화로 받아 강직하고 이대로의 세상살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되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가인은 아담의 맏아들이요, 또 아벨은 그 다음 아들입니다. 그때 아담의 자녀가 가인과 아벨 뿐 아니고 그 외에도 많은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자녀들 가운데 가인과 아벨이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마치 오늘에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내셨지마는 하나님 섬기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과의 두 종류로 나눌수 있는 것처럼 그때도 아담의 자손으로써 이렇게 나누어져서 가인과 아벨은 제 2세의 교회입니다. 아담 해와가 제일 첫번 교회요. 가인과 아벨은 그 다음의 계대된 교회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 사적은 땅위에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상관이 없는 말씀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한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으로써 가인의 신앙 계통이 있고, 아벨의 신앙 계통 이 신앙의 두 줄기 두 갈래길이 잇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두 갈래 길이 있어서 우리가 가인의 길에 설 때도 있고, 아벨의 길에 설 때도 있어, 가인의 길에서 실패하는 토막을 걷고, 아벨의 신앙 걸음에서 승리하는 이런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가인의 신앙 걸음을 많이 걷고, 어떤 사람은 아벨의 신앙 걸음을 많이 걷고, 어떤 사람은 가인의 신앙길만 일생 걷고, 혹 어떤 사람은 아벨의 신앙길만 일생을 걷는 그런 복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래서 여게서 가인의 신앙 걸음은 멸망이요, 아벨의 신앙 걸음은 구원이니 가인의 걸음과 아벨의 이 두 걸음은 우리에게 거울로 주셔서 이 두 사람의 걸음을 우리가 연구해 가지고, 이 두 걸음에다가 자기의 신앙 걸음을 비추어 보면, 자기가 멸망을 걷고 있는지, 구원을 걷고 있는지 이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중복적인 구원이기 때문에, 가인의 걸음에 선 줄 알면 즉시 아벨의 신앙길로 옮겨서야 되고, 아벨의 신앙 길에 섰으면, 가인의 신앙길로 옮겨가지 아니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거게 보면 뚜렷이 나타난 것이 한 너댓 가지 순서로 나타나 가지고 있습니다.

 

가인의 순서 4가지를 보면 첫째는, 그가 하나님을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선조와 약속한 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했고, 자기 세상에서 살고 있는 그 모든 자기 사는 그 형편에 자기 사는 형편에 충격되어서 그대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농사짓는 일을 연구하고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또 거기에서 깨달아지고 자기 생활에서 깨달아지는 그대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아벨은 자기가 자기가 양을 치는 사람이라. 양으로 잡아 제사드렸다 이라니까 그 사람도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생활 환경에서 깨달아진 그대로 하나님을 섬겼다 이렇게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15절에 여인의 후손을 말했고, 또 가죽옷을 지어서 입혔고, 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대속을 받지 아니하면 안되는 그 대속 제물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미 선포해 놓은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나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기뻐하셨고, 아벨의 제사가 이스라엘에게도 그대로 제사를 드리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구약 시대의 성도들의 그 속죄 받는 그 도리를 보면 아벨이 제사드린 거와 꼭 같습니다.

 

이러기에 모든 성경이 이를 증거하는고로 아벨은 그가 하나님을 섬길 때에 자기 환경에 따라서 자기가 생각나는 대로 환경에서 자기가 깨닫고 느끼고 충격받은 그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대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 범죄로 사망하게 되는 이것을 속량받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하나님과 계약한 이 계약대로 하나님을 섬겼고 하나님의 계약. 곧 자기 선조가 죄를 지어서 에덴 동산에 쫓겨났고 사망하리라는 그 사망하리라는 그 사망을 벌써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받고 있고 정죄도 받았고 사망도 받고 있는데서 하나님이 이 정죄와 사망에서 구출하시는 이 약속 이것을 지켜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가인이 하나님 섬긴 것과, 아벨이 하나님 섬긴 거와의 다른 점입니다.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 이 두가지 종류의 생활을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다같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 예수 믿는 전 생활이 하나님 섬기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든지, 장사를 하든지, 무슨 일을 공부를 하든지 우리 생활은 다 하나님에게 상대하는 생활입니다. 이러기에 우리 생활은 전체가 예배라고 할 수 있고, 또 하나님 섬기는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믿는 사람들이 사는 이 생활은 가인에게 속한 생활과 아벨에게 속한 생활 이 두 가지 종류의 생활로 지금도 나누어져 있습니다. 가인에게 속한 신앙 생활은 우리가 원죄와 본죄로 영원 멸망한 자이요, 할 자인데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지금 구속을 입어야 하는 시기라. 자기의 전 생활을 멸망에서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구속을 입는 생활로 하는 사람도 있고, 이 구속에 상관없이 그저 자기는 예수님을 믿는다 생각하고 자기 생각대로 생활을 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하루 하루 사는 것은 죄에서 사망에서 속량받는 생활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속량받는 생활인데, 내가 품을 팔든지, 장사를 하든지, 어떤 무슨 정치를 하든지, 뭐 예술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나는 범죄한 죄인이요 이 사망 가운데 있는 죄인이니 죄와 사망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시간 이 둘을 벗어나고 죄를 벗어나고 사망을 벗어나서 예수님의 구속으로 생명과 의에 이 구속을 받는 이 시간으로, 이 생활로 이렇게 하루 전부의 생활, 자기 일생의 생활을 죄벗는 생활로, 죽음에서 구원받는 생활로, 구원 받기 위해서 장사도 하고 죄를 벗어나기 위해서 장사도 하고, 또 품을 들어도 이 품드는 이 일을 통해서 죄에서 벗어나고 사망을 벗어나는 순전히 구속받는 역사로 자기가 생활하는 사람도 있고, 아주 이것은 상관 없이 잊어버리고 자기 형편과 사정에 따라서 무슨 일이든지 예수 믿는다는 이름만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써 자기 형편과 사정을 따라 거게 피동되어 형편과 사정을 따라서 죄에 대해서와 의에 대해서 사망에 대해서와 생명에 대해서에 이것은 아무 생각없이 자기 현실, 형편에 따라서 사는 이 사람은 가인의 반열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생활도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도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일생 동안 머물자리는 어디냐? 머물 자리는 사망과 죄 속에 머무는 것이 우리의 처소요. 자체는 범죄한 죄인이요. 죽은 자이니 여게서 살려고, 이 죄에서 구속을 받을려고, 죄인이기 때문에 구속받고 죽은 자이기 때문에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요것이 지금 평생 죽는 날까지 생명 얻는 노력, 죄에서 구속받는 노력. 자기는 죄인이요. 사망 아래에 있는 자기, 이 두 가지를 기억하고 이 두가지 사람으로 사는 것이 성도들이 세상에 있는 자기 처소요. 또 자기는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그것이 자기에게 대한 진리라. 그렇게들 말하는 그 신앙가들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벨의 계통에 생활을 하는 것은 자기는 정죄받은 죄인인 것과 멸망 받을 자인 것을 이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이 현실에서 이 죄의 문제,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현실로 사는 요것이 아벨의 반열에 선 사람이요. 자기 현실에서 돈이나 보고 사건이나 보고 형편이나 보고 자기 육적, 세상적 이해나 보고 여기에 계산해서 살고 죄와 생명에 대한 관심은 없이 사는 것은 그것은 다 가인의 걸음입니다. 요것이 첫째로 중요한 것을 여게 나타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기에 다 같이 구멍 가게에서 두 사람이 장사하고 있습니다. 반탱이를 이고서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너 무엇 할라고 반탱이 이고 다니느냐?'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서 죄를 벗을라고, 사망을 벗고 죽은 것이 살아날라고, 죄 아래 있는 것이 의로 옮겨질라고, 죄에서 의로 옮길라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라고 옮기는 그 일 하느라고 반탱이 이고 다닌다 하는 사람 있을 것이고, 이것 없이 돈보고 이고 다닌다. 가족들 밥 먹이기 위해서 이고 다닌다 하는 사람이 있으니 꼭 같이 반탱이를 이고 다니고 구멍 가게에서 하루종일 장사하는데 한 사람은 그 생활이 생명으로 옮겨 들려 올라가고 하나는 버림을 당한다.

 

이래서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이렇게 구별해서 말씀했습니다. 이 아벨은 양을 잡아 제사지내는 그것은 범죄한 것을 사망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구속받을 것, 그러고 난 다음에 4천년 후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을 했지마는 여인의 후손 창세기 15장에 약속한 그 여인의 후손이요. 여인의 후손인 예수님의 이 제물을 예표해서 가죽으로 그의 보호를 입었고, 짐승의 피로써 속량받는 이 제도를 하나님께서 예표로 세우셨는데, 아벨이 이렇게 제사를 드렸을 때에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사를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 생활을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자기 어떤 처지, 어떤 형편에 어떤 종류의 생활을 하고 있든지 아, 나는 이 생활에서 죄짓지 아니하여 죄와 나는 인연을 끊겠다. 사죄자로. 이 생활에서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여 의롭게 살겠다. 내가 이 셍활하면서 돈이나 접촉하는 사람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인연을 끊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연결된 인연을 내가 놓지 않겠다. 요것이 자기 하루 종일 수입이요. 요것이 자기 생애의 목적이요. 요것이 생애의 동기요. 요것을 위한 방편으로 생활하는 요것이라야 그 사람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그 생활도 받으시지. 아무리 제가 유명한 생활을 하고 모든 사람이 부러워 우러러하는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사람들에게 어떤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할지라도 이 죄와 의와 하나님과 결합의 요 생명. 요 세 가지를 잊어버린 그 사람은 벌써 사망 아래 그대로 있습니다. 내나 노아의 방주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구원의 성곽 밖에 있는 사람이요.

 

그러나 자기가 높은 데 있든지, 낮은 데 있든지, 어디 있든지 자기는 나는 죄인인데 예수님께서 칭의를 주셨으니 내 마음과 몸, 내 행위가 다시는 내가 하나님에게 어기는 죄짓지 아니하여 사죄 주신 이대로 무죄를 입겠다. 죄없는 이 사죄를 오늘 종일 내가 입겠다. 이 일로써 사죄를 입느냐 정죄를 입느냐? 나는 사죄를 입겠다. 죄짓지 않겠다. 내가 이 일로써 불의를 행하겠느냐 의를 행하겠느냐? 여기서 요 일을 요 지극히 작은 일이지마는 이 일을 하니님앞에 의롭게 해서 오늘 나는 의를 건설하고 의로 살겠다.

 

내가 사소한 일이지마는 이를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슬려 내가 무엇을 하지 않겠다. 요렇게 요 세 가지를 자기 중심으로 두고, 요것을 욕망으로 두고, 요것을 자기의 수입으로 삼고, 요것을 위하여 그 날의 언행심사의 생활을 할 때에 고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셨어. 제사도 기뻐했어. 그 생활도 기뻐합니다.

 

기독자는 여기에서만 빛을 받습니다. 여게서만 기쁨을 받고 여게서만 지혜를 받고 여게서만 능력을 받고 여기에서만 참 희망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 저까짓 것 지금 죽도 못먹는 저까짓게 참 불쌍하고 가련하다고 하지마는 그 사람이 세상이 모르는 고차원의 그 인생살이, 고차원의 그 행복, 그 행복을 누리는 것은 세상은 알지도 못하요.

 

여기에서만 기독자들은 그의 참된 신의 성품을 받을 수가 있고, 하나님의 지능을 받을 수가 있고, 세상이 빼앗아가지 못하는 기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 너희들은 기뻐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는 거와 같지 않다. 세상이 너희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이 쾌락과 행복을 가집니다. 자기가 이것을 잊어버리고 땅에서 무엇을 취하고 그날 무슨 형통을 했다 할지라도 얼핏 생활할 때에는 기쁘다 했지마는 반드시 기쁘다 하고 난 다음에는 잇달아서 자기 속에는 께끄럼하고 불쾌하고 불안함이 따라 붙을 것입니다.

 

요렇게 아벨의 계통의 요 생활을 여게서 나는 죄를 해결하고, 의를 건설하고, 하나님과 결합된 요것을 내가 끊지 아니하고 살겠다 하여 사는 거기에서는 받는 자 밖에는 모르는 흰돌을 받는다 했습니다. 받는 자 밖에는 모르는 깨끗한 인품을 받습니다. 깨끗한 인품을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 보아도 아름답고 깨끗한 인품을 받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네 속에 생수가 되어 샘물 같이 흐르리라.' 자기 속에 끊쳐지지 않는 그 기쁨, 끊이지 않는 소망,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담력, 용감,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니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이것이 속에서 넘쳐 흘러서 아무 것도 없는 병석에 누운 만신창의 환자라도 요렇게 산 그 자에게는 가 가지고서 그 생수가 넘쳐 흘러서 세상으로 부요한 자에게 눈물을 줄 수가 있고, 세상에서 비참해서 참 혹한 절망의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기쁨의 소망을 줄 수가 있는 것을 가리켜서 '네 속에 샘이 되어서 넘치리라 다시 목 마르지 아니하리라.' 야곱의 우물은 암만 먹어도 목 마르지만 그 말은 네 육체적 그 인류 시조들이 상속하고 상속해서 유전해 주는 세상은 암만 취해봤자 마지막에는 갈급 나온다. 마지막에는 고통 나온다.

 

그러나 '내가 주는 생수는 네가 먹으면 뱃속에 샘이 되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고 넘쳐 흐르리라' 하는 요 말씀은 요대로 살 때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참된, 참된 그 하나님의 성품에, 신의 성품에 동참하신 신성같은 그 인성, 요 인성이 자기에게 완전히 나타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연결된 그 빛이 요것이 나와서 자기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가난에서도 만족할 수 있고, 굶어도 만족할 수 있고, 욕 얻어 먹어도 만족할 수 있고 십자가의 저주의 사망을 받는 거게서도 만족해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우를 해 줍니까.'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여 어떻게 해서 나를 이렇게 죄없는 나로 영원히 사망할 이 죄인들을 대속해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죽는 이렇게 가치있는 일을 나에게 시키십니까? 이 일을 나에게 맡겨 주십니까? 이 어쩐 일입니까? 해서 놀랄 수 있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살이를 살 때에 만족하는 것은, 내가 몸 밖에 있는 어떤 조건으로 해서 만족을 누리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을 다 차지하면 하나님되기 전에는 그 사람에게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또 몸밖에 있는 어떤 쾌락으로써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사람은 그것은 다 실패합니다.

 

그러나 요 아벨의 걸음을 걸어 자기가 참된 신앙을 걸음으로 죄의 문제, 의의 문제, 하나님과 결합 문제, 요 문제에 목표를 두고 요 중심으로 요렇게 살아서 무죄와 연결이 되고 의와 연결이 되고 하나님과 연결된 그 자리에서는 거게는 가난 속에서도 만족하고, 사형 속에서도 만족하고, 그 이북에 있는 공산군들이 와 가지고 묶어가지고 지금 저 산에 총살시킬려고 가면서 총을 딱 꼬나 가지고 이래가는 그 가운데서도 거게서도 그게 두렵지 아니하고 거기 죽는 사람들이 불쌍해서 가면서 형제들이여, 지금이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여러분들이 총살 당해 죽어도 지옥은 면하고 하늘 나라 간다고 그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급급한 사랑, 그 뜨거운 사랑. 이러니까 이놈 무슨 소리하는가 하면서 총뿌리를 가지고서 이를 때려서 이가 뿌러지고 이래도 또 외쳐서 형제들이여, 지금 총살을 당해도 예수님만 구주로 믿으면 영원한 지옥을 면하고 하늘 나라 간다고 그 형제를 구원코자 하는 자기의 죽음도 잊어버리고, 매 맞는 것도 잊어버리고, 입장도 잊어버리고 죽어가는 그 생명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사랑. 이것이 자기 몸 밖에 있는 환경이나 주위나 형편이나 사정이나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이런 것에게 제재 받지 않는 그 평강, 사랑, 기쁨. 소망, 담력 이것이 충만해지기 때문에 기독자는 자기 몸 밖에 있는 형편이 좋고 나쁘고 상관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기쁘게 살고, 슬프게 살고, 욕망에 충만하고, 절망으로 살고, 그 사람이 지능에 무한하고, 지능에 완전히 암흑이 되고 하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과의 연결되고 안되는 거기에 있는 것이지 몸 밖에 있는 것 아닙니다.

 

그러기에 인간으로서 제일 불행스러운 그 자리에도 하나님은 능히 만족하고 만족하고 자기 이상의 행복이 없는 사람으로 살게 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영감이면 살게 할 수가 있는 것이요. 그러기 때문에 몸 밖에서 행복을 취할라고 하는 사람은 이는 땅에 속한 사람이요.

 

그런고로 가인의 이 걸음과 아벨의 걸음, 이 두 가지 신앙 노선이 있으니 어떤 사람은 잠시 아벨에 속했다가 가인으로 옮겨가고, 어떤 사람은 평생 죽는 날까지 예수님의 이름은 부르지마는 가인의 노선에서 아벨의 노선으로 한 번 옮기지도 못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그저 갔다 왔다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벨의 생활을 많이 하고, 어떤 사람은 가인의 생활을 많이 하고 이렇게 해서 아벨의 생활로 일관할라고 애를 쓰는 것이 우리들의 노력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현실은 어떤 현실에서라도 어떻게 답답하고, 어떻게 지루하고, 어떻게 권태나고, 어떻게 두렵고, 어떻게 외롭고, 어떻게 피곤하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주님의 사죄 받은 것을 놓지 말고 주님의 칭의 받은 것을 놓지 말고 어쨌든지 나는 죄만은 안짓겠다.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살겠다. 하나님과 연결된 동거동행하겠다.

 

요 세 가지만 세 가지만 소유도 몸도 생명도 요 세 가지만 얻기 위해서 요것을 다 내어놓고, 요 세 가지만 얻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희생시켜서라도 요 세 가지만 얻을라고 노력하는 이것이 천국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보화를 찾는 사람이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있는 걸 다 팔아가지고 밭을 샀다. 보화가 있는 밭을 샀다. 진주를 구하는 자가 진주를 만나매 있는 소유를 다 팔아 가지고 진주를 샀다. 비유한 것은 이것을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이것이요.

 

내가 살 때에 아벨의 계통으로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이것을 받은 자니까 사죄받은 자로 살고 칭의받은 자로 살고 새생명받은 자로 사는냐? 사죄를 팔아 버리느냐? 칭의를 팔아 버리느냐? 생명을 버리느냐? 이것이 우리의 생활의 제일 문제되는 생활입니다. 그 다음에 서이 있는데 여게서 잘못되고 나면 그 다음에 어찌 되느냐? 자기의 생활이, 자기의 생활이 하나님과 대립이 됩니다. 그걸 벗어나면 자기 생활이 하나님과 대립이 되요. 그러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이 달지 아니해요. 신구약 성경을 읽을 때에 이 성경이 달지 아니하고 아, 이 성경도 자기 비위에 안 맞고, 이 성경도 자기 사정에 안 맞고, 이 성경을 읽을 때에 자기와 자기 형편과 사정과 자기 생활에 맞지 아니해서 요 성경은 없었으면 좋겟다. 요 성경은 자기에게 기쁘지 아니하고 반갑지 아니하는 요것이 되어집니다. 그러고 나면 별 수 없어. 아벨 죽여요. 그러고 나면은 의를 대적하는 사람되고 맙니다. 세밀한 거는 그 다음에 시간 있으면 증거하겠습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우리의 신앙의 종류를 밝히 보이시사 거울되게 하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벨같이 생명이 끊어지는데 이르기까지 가인의 신앙에 물들지 않게 하시고, 아벨의 신앙으로 끝을 마칠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깨끗게 결심하고 다시는 요동없는 저희들 되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154 두려움과 담대를 바로 가질 것/ 누가복음 15장 3절-7절/ 870519화새 선지자 2015.10.29
153 두가지는 나 할일, 일곱가지는 하나님/ 창세기 12장 1절-9절/ 881023주새 선지자 2015.10.29
152 두가지 처소/ 빌립보서 2장 5절-11절/ 890227월새 선지자 2015.10.29
151 두가지 처소/ 빌립보서 2장 5절-11절/ 890301수새 선지자 2015.10.29
150 두가지 생의 열매/ 갈라디아서 5장 16절-26절/ 861119수야 선지자 2015.10.29
149 두 힘을 구별하여 싸우라/ 에베소서 6장10절-13절/ 880623목새 선지자 2015.10.28
148 두 향방의 길/ 요한복음 14장 6절/ 850420토새 선지자 2015.10.28
147 두 짐승/ 요한계시록 13장 10절-18절/ 821011월새 선지자 2015.10.28
146 두 주인과 두 길/ 마태복음 6장 24절-34절/ 890112목새 선지자 2015.10.28
145 두 주인과 두 길/ 베드로후서 3장 3절-13절/ 881218주새 선지자 2015.10.28
144 두 주인/ 마태복음 6장 19절-34절/ 820106수야 선지자 2015.10.28
143 두 주인/ 마태복음 6장 24절-34절/ 870730목새 선지자 2015.10.28
142 두 주인/ 마태복음 6장 24절-34절/ 870731금새 선지자 2015.10.28
141 두 주인/ 마태복음 6장 24절-34절/ 820108금새 선지자 2015.10.28
140 두 주인/ 마태복음 6장 24절-34절/ 820107목새 선지자 2015.10.28
139 두 종류의 짐승/ 요한계시록 13장 10절-18절/ 821013수야 선지자 2015.10.28
138 두 종류의 지식/ 고린도전서 1장 18절-21절/ 820602수새 선지자 2015.10.28
137 두 종류의 증인들을 보고 온전을/ 히브리서 12장 1절-2절/ 880709토새 선지자 2015.10.28
136 두 종류의 증인들을 보고 온전을/ 히브리서 12장 2절/ 880711월새 선지자 2015.10.28
» 두 종류의 생활-가인과 아벨/ 창세기 4장 1절-9절/ 800116수야 선지자 2015.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