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인


선지자선교회 1982년 1월 6일 수야

 

본문 : 마 6:19∼34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세상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고 또 많이 살고 갔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는데, (저 뒤에 안 들린다는데요. 여기 누가 엠프 기사 있어,  여기에? 저 뒤에 안 들린다는데요. 지금 들립니까? 저 뒤에 저 구석에 들립니까?  이렇게 묻고 또 손들고 이런 일이 없어야 예배볼 때에 바로 되는 겁니다. 엠프  기사는 이렇게 되는 것이 이것 자기에게는 큰 수치인 줄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가 어떻게 손을 대니까 그만 되고 안 대니까 안 되고 그러니까 자기에게 뭐  능력 있는 것보다도 이것이 기사로서는 수치인 줄 알아야 될 터인데.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지요, 미리 딱 시험해 가지고 다 봐서.

 벌써 설교하다가 한 동가리 났습니다. 아무나 따나 책을 줄줄 읽듯이 읽는 게  아니고 나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대로 증거 하는데 그만 이래 한  동가리 나면 그만치 험합니다. 상했습니다.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갔는데 그 모든 사람들은 각각 자기대로는 가장 지혜롭게  살려고 연구도 하고 애를 쓰고 해서 '내게는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을 내가  마련해야 내게 제일 유익하고 또 편리하고 복될까?' 이것을 연구하는 것은 꼭  같습니다.

 이렇게 연구해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살고 갔는데 그 살고 간 것을 분석을 하면  두 종류로 살고 갔습니다. 하나는 '물질이 내게는 제일 요긴하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거처하고 살 것, 또 내가 이렇게 저렇게 사용할 물질, 이런 물질  저런 물질 물질이 내게는 제일 필요하고 중요하다.' 이것이 결정돼서 물질을  위하여 연구하고, 염려하고, 노력하고, 되면 기뻐하고, 없으면 슬퍼 고통을  당하고, 순전히 물질을 자기에게 필요로 삼아서 여기에다가 전심전력과 모든  시간을 기울여서 마련하고 또 이것으로 자기의 희로애락을 삼고 간 그 사람이 한  뭉텅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무더기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가 늙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는 자기의 생각이나 노력이 헛되지  않다고 계속 그것을 향하여 역사하다가 마지막에 세상을 떠날 때는 꼭 같이  후회하면서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하는 공통적인 후회와 고통을 가지고  떠났던 것입니다. 이 무더기가 하나 있습니다.

 또 한 무더기 있는데, 이 두 무더기뿐입니다. 또 한 무더기는 어떤 무더기인고  하니 '하나님이 내게 제일 필요하다. 나의 생명과 평강과 영원한 행복에  있어서는 모든 것보다 하나님이 내게 필요하다. 하나님 한 분만 잘 내  하나님으로 마련해 놓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이다.' 이렇게 깨닫고 하나님 한  분을 인하여 욕망하고, 연구하고, 염려하고, 노력하고, 이 일이 잘못되면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 삼는 이 일이 잘됐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희로애락이 하나님으로, 분투 노력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다가 간  한 무더기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무더기들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그 생애가 그렇츰 좋은 줄을  몰랐지마는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공통적으로 '아,  죽을 때 보니까 참 하나님으로 욕망을 삼고 살아온 것이 잘 됐다. 하나님으로  욕망 삼고 살고 온 이 생애를 다 못 하고 조금 한 것이 후회다. 다 못한 것이  후회다. 한 것만은 참 잘 됐다.' 이 편을 택한 사람들은 세상을 떠날 때에  세상에 있을 때보다 자기의 생애가 잘 됐다는, 있을 때보다 떠날 때에 더 기쁨을  가지고 떠났고, 또 성경에 법칙대로 보면 그 사람들은 세상을 떠날 때보다도  하나님의 심판을 거쳐 무궁세계에 들어갈 때에 기쁨과 평강과 다행스러웠다는 그  느낌은 더 많아졌던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이 주인을 귀중히 여기든지  저 주인을 귀중히 여기든지 그렇게 차이 있지 꼭 같이 섬길 수는 없다. 한  주인은 무엇인가? 한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한 주인은 물질이다." 그렇게 여기에  표현을 했습니다.

 물론 물질을 상대해 사는 사람도 물질을 위주로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필요로 했을 것이오. 또 하나님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위주로 하고  그 다음에는 또 물질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의 머리되는  것, 또 우리의 최고, 최상, 최종의 것, 우리 마음 중에 제일 중심이 되는 중심의  것, 주가 되는 것 그것은 물질을 향하여 있든지 하나님을 향하여 있든지 둘 중에  어디 한 군데 향하여 있지 양쪽에 꼭 같이 향하여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기든지 저를 중히 여기고 이를 경히 여기든지 반드시 그렇지 둘 다 같이 섬길  수는 없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이 시간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스스로 살펴서  오늘에 자기는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판정을 하고 잘못됐으면 당장  뜯어 고쳐야 될 것이고 바로 됐으면 요동치 아니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구속을 입어서 기본구원은 변동없는 이 구인을 주님의 은혜로  받았지마는 기본구원을 받은 자가 무궁세계에서 가서 살 때에 기본구원을 받은  자와 받은 자의 그 차이, 등급, 이것은 기본구원 받은 자가 세상살이를 하는  동안에 마련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이지마는 그 사람의 가치는 심히 차이가 많습니다. 거기에 따라서  사람이기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 사람이기 때문에 영광 있는 사람, 사람이기  때문에 권세 있는 사람, 사람이기 때문에 권세가 없는 사람, 인간과 인간의  차이는 인간이 아니라서 차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구속으로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들 다 하늘나라에  가서 영생을 하고 지옥에는 가지 않습니다.

 어디서 마련되는가? 우리가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입어 중생을 받아 예수님  믿는 이 생애를 하는 세상살이에서 어떤 사람은 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환영을  마련하고, 어떤 사람은 무능과 수치와 배척을 마련하는 이 사람으로 세상 신앙  살이를 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제일 필요로 위주로, 내 마음의 수지가 되는,  머리되는 이 중심이 하나님에게 기울어져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이것을 하기 위해서 공장 생활도 하고, 가정생활도 하고,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또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이 생활을 하려 하다 보니까 칠계를 안  범하려고 하니 결혼도 해야 되고, 결혼해서 부부 생활을 해서 불같이 올라오는  정욕을 이걸 억제해서 죄되지 않게 하려고 하다 보니까 자녀가 났고, 자녀가  났으니 또 이 자녀를 기르는 데에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영접할 수 있는  방편이 돼야 되지 방해가 되면 안 될 터이니까 이 일을 위해서 자녀도 기르고,  모든 전생활이 사는 것뿐만 아니라 죽는 것도, 고생도 평강도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삼는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온갖 고생하는 것도 웃는 것도 기뻐하는  것도 이것을 위해서 하고 이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먹는 것도 필요없고, 사는  것도 필요없고, 기쁜 것도 필요 없고, 재미있는 것도 필요없다.

 이리하여 하나님만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셔 하나님으로 부요하게, 하나님으로  부요하고 충만하게 되는 여기에만 자기의 욕망을 기울여 전심전력을 여기에다가  기울여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말하지마는 이와 같이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것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이 물질에다가 기울여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고, 반반 기울이면서 사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에게 대해서 10분지 1쯤 기울이고 세상에 대해서 10분지 9쯤  기울이는 사람도 있고,  말하자면 하루 동안에 한 시간쯤은 모든 것 다 잊어버리고 '아니다. 하나님에게  나는 향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여야 되겠다.' 그렇게 한 시간은 기울여 살았는데  나머지기 스물 세 시간은 그만 그러다가 픽 틀어져 가지고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물질에 대해서 전심전력을 기울여 이렇게 살아,  나는 지금 내가 무엇을 위주로 욕망하고 사는 사람인지 이것을 스스로 살펴서  확정을 지워야 할 것이고, 또 '나는 반반 기울이고 살고 있다. 어느 편이 더  무겁게 살고 있다. 어느 편이 가볍게 살고 있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사는 데  따라서 하나님으로 충만할 수도 있고 세상 것으로 충만할 수도 있으니 내가  마련된 것은 하나님은 얼마나 마련이 됐으며 세상과 세상에 있는 물질은 얼마나  내것이 마련이 돼 가지고 있는가?' 이것도 또 비판을 해 봐야 될 것이고,  그러면 '내가 죽을 때에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물질 마련한 이것은 반드시 손을  떼고 가야 될 것이고, 놓고 가야 될 것이고, 다 잊어버리고 가야 될 것이고,  뺏기고 가야 될 것이고 하니까 그때에 이것이 내게서 떠나감으로 내가 고통당할  양은, 고통을 당할 양은 얼마나 되며 무엇 무엇으로 고통을 당할 것인가?  젊음으로, 젊음이 없어 늙음으로 고통을 당할 건가, 죽음으로 고통을 당할  것인가, 물질이 없어짐으로 고통을 당할 것인가, 육신의 힘이 없어짐으로 고통을  당할 것인가, 인간을 이별함으로 고통을 당할 것인가, 무슨 무슨 종류의 고통을  내가 당할 것이며 고통당할 그 양은 얼마나 되는가?' 이것도 지금 따져서  계산하면 계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내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위주로 해서 살아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마련한 그 양이 얼마가 되니 '이 면에는 물질보다 하나님을 내가 위주로 삼아서  영접했다. 저 면은 그랬다. 무슨 면은 그랬다.' 그러면 내가 이 살아온 모든  수많은 종류 가운데에 그 종류에서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마련한 그 종류는 몇  가지나 되는가? 하나님을 섬긴다 하지마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그것을 내것으로  마련한 종류는 몇 가지가 있는가? 그러면 하나님을 마련한 종류가 몇 가지며  이것은 내가 세상을 떠날 때에 없어질 것인가? 이것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그러면 세상을 마련한 이것은 없어질 것인데 그 종류는 몇 가지나 되는가?  그러면 내가 세상을 떠날 때에 슬플 것이 몇 가지인지 기쁠 것이 몇 가지인지,  없어져서 가지고 있다가 다 뺏겨버리고 손 쭉 뻗고 툴툴 털어서 다 뺏기니까  분하고 섭섭하고 아주 허전한 그 공허감, 허무하게 공허되는 그런 것은 몇  가지나 되는지? 이는 참 요동치 않고 든든하고 튼튼하고, 이는 요동치 않고  든든하고 튼튼하고 이는 뺏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 내세로 들어갈 때도 모시고  들어갈 수 있는 이런 튼튼한 것은 몇 가지 면에나 하나님을 내가 모셔서  튼튼한가? 이것도 계산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동록 슬고 좀먹고 도적 맞는다 그말은 동록 스는 것은 썩어지면  동록부터 먼저 슬어 가지고 썩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 죄악으로 인해서 없어지는  것을 말한 것이고, 또 좀 먹는다 그말은, 세월이 지나가면 이 시멘트도 좀이  먹습니다. 영원한 세월을 통과하는 데에 없어질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고,  도적맞는 것은 당장에 한목 몽땅 없어지는 것을 가리켜서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나니 어떤 면을 섬기고 있으며  섬기겠느냐? 무엇으로 네가 네 주를 삼으며 너희에게 가장 필요의 것으로 네가  삼고 살겠느냐 하는 것을 여기에서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고요히 우리가 이  자리에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저 말씀하면 그만 정신차릴 여가도 없이 시원하게 듣고 즐겁게 들으니까 쭉  지나가 버리면 설교 듣고 난 다음에는 '아, 시원하고 기쁘고 즐겁다.' 공연히  극장에 간 것 모양으로, 무슨 신파 연극 구경한 것 모양으로 이렇게 기쁘기만  하고 즐겁기만 하고 떠나버리면 다 허공을 치는 것이요 다 헛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를 아니합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말을 했습니다. 들을 때에 자기가 어떤 자인지 자기를 심사해 가지고  확정을 하라 했습니다. 믿음에 있는지 없는지, 바로 됐는지 안 됐는지 그걸  심사해 가지고 확정을 하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육신으로 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사는 사람은  영생을 거둔다" 이 시간 성령의 감동으로 자기를 정평 정가 하면서 말씀을 듣고  이 말씀 듣는 예배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나와 상대하는  것이 예배인데', 내가 하나님 섬기는 것이 예배인데 이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를 심사해서 확정을 해서 후회할 것도 이 자리에서 후회하고,  욕망을 품을 것도 이 자리에서 욕망을 품고, 하나님과 삐뚤어진 것도 이  자리에서 해결을 짓고, 하나님과 연결도 이 자리에서 연결을 가지고 이렇게 하라  이것을 가리켜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말했습니다. 신령이라 말은  영감으로 예배를 드려라, 진정이라 말은 자기의 인격의 중심을 기울여서 예배를  드려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무슨 중심을 기울이겠소?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내 중심을 기울여 가지고  거기에서 영감과 내 중심이 합치돼 가지고 자기와 하나님과의 그 관계를 다시  개조해 가지고 하나님에게 거리끼지 않는 자기, 자기에게 거리끼지 않는 하나님,  하나님과 자기와의 올바른 관계가 되어져 하나님은 섬김을 받았고 자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이것이 결과적으로 이루어지는 이 예배를 드려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시간에 '나는 지금 무엇을 위주로 해서 사는가? 무엇을  지금 마련하고 있는가? 한 현실 한 현실이 지나가는데 이 현실에는, 이  현실에서는 물질을 내가 마련을 하고 지나가느냐 이 현실에는 내가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삼고 지나가느냐? 이 시간에는 어떻게 무엇을 내가 욕망을 했으며  무엇을 위해서 내가 이 시간에 노력을 했으며, 이 시간은 지나가 버리니까  과거인데 다시 뒤에 돌릴 수 없는 것인데 지나가는 이 시간에는 내가 무엇을  욕망을 가지고 무엇을 위해서 노력을 해 가지고 무엇을 내가 마련하고 이 시간을  지내 보내느냐?' 이것이 우리에게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가 멸망과 구원이 되는 이것인 것을 깨닫고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전심전력을 기울여 노력을 해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이게 안 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생각도 마음도 없이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돈 보이니까 돈  대해서 생각해 가지고 돈에 대해서만 전력을 기울였고, 인간 만나니까 인간만  보고 인간에게 상대해서만 전심전력을 기울였고, 자기에게 기쁜 일이 있으니까  그 기쁜 일만 상대해 가지고 기쁜 일에 대해서만 전심전력을 기울여서 그 시간  지내 보냈고, 슬픈 일이 있으니까 슬픈 일에 대해서만 그 시간 전심전력  기울여서 상대하다가 지내보내 버리고, 이래서 우리가 현실이라는 이 현실,  보이고 들리고 접하는, 이것은 다 땅의 것인데 이것만 상대해서 현실 현실을  살아나가고 있는 이런 죽은 생활, 이 어리석은 생활, 이 현실이라는 무서운  호랑이에게, 현실이라는 무서운 이 사자의 입에 밥이 돼 가지고 현실 현실에서  죽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우리의 과거가 아니었는지? 현재는 그것이 아닌지?  우리는 '과거는 그렇게 살았었으니까 원통하다.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  이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도 속는 일입니다.

 '나는 가만히 그 설교 말씀을 듣고 생각하니 과거에는 모두 그 현실에게  사로잡혀서 현실에게 삼키어서 현실적인 사람이 됐지 그 현실을 주신 것은 이  현실에서 영원히 후회될 것을 여기에서 고치고, 영원히 필요한 것을 여기에서  마련하고, 영원히 해결 못 지을 것을 이 현실에서 해결을 짓고, 영원히 필요한  것을 갖추지 못한 그것을 이 현실에서 갖추고 이렇게 현실은 참 영원을 위해서  요긴한 이 현실로 써야 될 터인데 그 현실은 나는 그 현실에 보이는 사람, 물건,  일, 모든 문제 그것을 상대해서 그것만 상대해 가지고 그것만 상대한 사람으로  살았으니 나는 현실에게 삼키어서 아무런 하늘나라에 대해서 마지막 시간에 떠날  때에 대한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살았다.' 이걸 생각하니까 후회가 됩니다.

 '과거는 후회가 된다. 앞으로는 이렇게 살겠다 주여! 내가 앞으로 이렇게  살겠습니다. 주여! 과거는 이렇게 산 것 후회가 됩니다.' 백 번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암만 말해 봤자 소용없어. 그런 것은 주님이 듣기 싫어해, 그건  다 죽은 소리요 그것 내나 마귀에게, 마에게 직접 홀린 자, 직접 홀린 자, 그  다음에는 직접은 홀리려 하니까 튀니까 홀리지 못하고 간접적으로 다른 것을  통해서 묶은 자, 간접적으로 묶인 자이지 소용이 없습니다. 그게 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과거에 이렇게 산 것이 후회가 된다. 앞으로는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  그것뿐이면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과거를 후회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앞으로 이렇게 살겠습니다.' 결심을 하고, 아무 소용없어.

 '과거에 이런 후회를 했고 내가 미래에 이런 소원이 있으니 이것만은 소용이  없다. 내가 과거에 후회한 것을 내가 현재에 내가 하지 않겠다. 앞으로 미래에  소원한 것을 현재에 하겠다.' 후회도 현재에 사용하고 앞으로 욕망도 현재에  사용해야 그것이 영감이지 그것을 하지 않고 과거는 후회로 제가 할 일 한 줄  알고 미래는 이렇게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써 이것은 마귀를 벗어난 줄로  알면 다 실패입니다. 우리는 현재만이 내 시간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그 현실, 현실, 하나님께서 '이 현실에는 이 면도 네가 하나님을  네 하나님으로 만들겠느냐 이 물질을 네 것으로 만들겠느냐?' 그 면에도 물질을  자기로 만들든지 하나님을 자기로 만들든지, '물질 하나님, 물질 하나님' 이래  쌓다가 마지막에는 물질로 결말을 지우는지 하나님으로 결말을 지우는지 그  면에, 그 면에 대해서 영원한 결정이 지워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그 면이 아닌 다른 면이 나옵니다. 다른 면이 나와서 이  면에는, 자기에게 무슨 다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다급한 일이 생겼으면 이  다급한 일이 생긴 여기에서는 네가 물질이냐 하나님이냐 둘 중에 하나이니까 이  면에서는 물질이냐 하나님이냐 어느 것을 마련하겠느냐? 그 면에서는 그 면에서  하나님이든지 물질이든지 그것이 결정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열 면도 아니고 백 면도 아니고 천 면도 아니고 수많은 이런 면  저런 면을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이런데 그 수많은 면에서 이  면에서도 하나님, 또 그 다음 면에서도 하나님, 이렇게 마련한 것이 무궁세계가  가지고 이 면에도 마련한 그 하나님이 자기와 하나되어 살게 되고, 그 다음 다른  면에도‥‥  이래서, 모든 면에 하나님과 같이 동행해서 살아 하나님으로 자기의 전부를  삼아 가지고 하나님은 자기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이 되고 자기는 지혜와 생명과  능력의 그 발표하는 지체가 돼서, 하나님의 지체가 돼 가지고 모든 면을 그렇게  살고, 어떤 사람은 여러 면을 닥쳤는데 이 면도 공이요, 이 면도 텅 비었고 저  면도 텅 비었고 모든 면이 다 비었는데 한 면은 하나님을 마련해서 그 면만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지마는 그 면이 그게 100년만에 돌아올지, 10년만에  돌아올지, 1년만에 돌아올지 모릅니다.

 그면 한 면만 하나님과 동행하지 다른 면은 다 쭉정이요, 다 불 타버렸고  헛일이니까 그 사람이, 마치 비유컨대는 다른 면은 다 병신입니다. 앉은뱅이요,  곰배팔이요, 공사요, 또 얼굴도 아주 박색인데 눈 하나만 또록 또록 하면, 눈  하나만 또록 또록 하면 눈 하나는 참 밝고 성하지마는 다른 면은 모두 다 병신,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마련한 것이 일 면은 마련해서 일 면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위해서는 내가,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내가 영접하겠다. 내가  하나님 놓고 다른 것 취하지 않겠다.' 하나님을 자기가 영접하여 자기 하나님  삼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하나님을 영접한 그 일 면은  영원무궁세계에서 하나님과 같이 살지마는, 다른 면은 '하나님을 희생시켜도  이것을 가져야 되겠다.' 했기 때문에 그 면은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았으니까  하늘나라 가 가지고는 그 면은 다 공과 같이 병신과 같이 없어지는 이것이  무궁한 우리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물질과 하나님이라는 것은 내게 대해서 이렇게 큰 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뭐 '물질 그까짓 것'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물질의 종이  되어 살면서도 그걸 몰라서 말하는 것입니다.

 내라는 이 사람의 생애가 이 현실에서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삼기 위해서  하나님 위주로, 하나님 중심으로, 내 전부를 하나님에게 기울여 하나님을 내가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모셔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모시는 이 생애냐 그렇지  않으면 물질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생애냐? 이 둘 중에 하나인 것이 인간의 전  생애입니다.

 역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갔지마는 살고 간 그 인간들은 두 무더기로  갈라집니다., 두 무더기. 두 무더기로 갈라지는데 한 무더기는 뭐라고 말했든지  구불렀든지 어쨌든지 마지막에 결말을 지워 보니까 물질을 자기의 주로 삼아서  물질 바라보고, 물질 의지하고, 물질을 필요해서 '무엇보다도 물질이 필요하다.'  물질 위주로 해서 살고 간 사람, 한쪽 무더기는 하나님 위주로 위하여 살고 간  사람, 이 두 무더기뿐인데 하나님 위주로 살고 간 사람 이 사람들은 중생된  구속받은 사람들인데 보니까, 하나님 위주로 하고 살고 갔는데 보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 위주라는 그것이 한 개만 달랑달랑 달려 있고, 어떤 사람은 두  개, 어떤 사람은 세 개, 어떤 사람은 전부, 이것이 하늘나라에 구원 얻은 자와  구원 얻은 자의 차이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느 편을 택해서 살 건가? 어느 것을 중하게 여겨서, 내가  보다 어디로 기울어 져서 어떤 것을 중심으로 위주로 해서 내 생애가, 현재  생애가 이루어지는가? 내 현재의 생애라 하는 것은 어느 위주로 이루어지는가?  이것을 심사 판정하면서 우리가 살아나가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 위주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무엇보다도 필요된다는 것을 자기가  알아서 모든 걸 희생해도 하나님만을 놓지 않고 하나님만을 자기 하나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과 이렇게 화친되어진 이것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과 화친된  이것을 위주로 해서 사는 사람이면 그 사람에게는 눈이 밝아집니다. 그  사람에게는 영감으로 모든 것을 옳고 바르게 인간들이 비판하고 평가하고 사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주로 하지 않고 물질을 위주로 하면 그 사람은  모든 면이 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면이 어두워져 버립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고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워진다" 빛은 신앙 양심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인데 "보물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나님을 자기 유일의 소망으로 위주로 삼으면 자기 마음이  영감의 마음이 돼 가지고 전생애가 환하지마는 아무리 그 사람이 명철해도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이것을 위주로 하지 않고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위주로 하면 그 사람 마음은 성령은 떠나고 마귀가 들어와서 새카매지기  때문에 전체의 사고나 비판이나 평가가 깜깜해지는 것을 여기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갔는데 나는 지금 어떤 살이를  살고 가며, 현재 현재 이 현재에서는 이 면에 대해서 영원을 준비하는 것 또 이  현재에 대해서는 저 면에 대해서 준비하는 것, 그러기에 현재가 각각 다른  현재들이 옵니다. 다른 현실들이 오요. 이런 현실 저런 현실 자꾸 바꿔지요.

바꿔지는 것이 바꿔져야 되지, 바꿔져야 여러 모를 준비할 수가 있지. 그러니까  그 현실에서 하나님이냐 물질이냐 어느 것이냐?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그것만 물질이 아니라, 그것만 물질이 아니라 자기 고기덩어리도 물질이오. 자기  마음도 물질이오. 자기 마음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내나 물질 위해서 사는  자입니다.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 사는 자도 물질 위해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사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사는 자는 마음을 자기 마음을 위해 사는 자도 아니요, 자기 몸을 위해  사는 자도 아니요, 생명을 위해 사는 자도 아니요, 자기 물질 위해 사는 자도  아니요, 지위 권세 위해 사는 자도 아니요, 가정 위해 사는 자도 아니요 모든 걸  다 솔빡 몽땅 팔아 가지고 해야, 팔아야 하나님을 살수가 있다 있는 것을 다, 이  하나님 영접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 되기 위해서, 예수님과 같은 자 되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과 같은 자 되기 위해서는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않으면, 하나라도 '이거는 가지고 가겠다.' 하면 안 된다. 예수님의 제자 되기  위해서는 모든 걸 다 아낌없이 희생하고 투자하고 생명까지 투자가 될 때라도 그  생명을 붙들려 하면 예수님의 제자 되지 못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영접하기에는  어려운 것을 가리켜서 말씀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설교는 이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사는 생애에서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삼기 위해서 사는지 이 시간에, '이 시간에는 하나님을 내가  차지했다.' 아브라함이 소돔왕이 와 가지고 적산, 원수에게서 뺏은 재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 재산은 다 차지하고 사람만 보내 주십시오.' 할 때에  아브라함이, 그 재산을 차지하면 그들이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부자된게 아니라 우리 때문에 부자됐다.'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뤄지고 물질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행복됐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행복됐다고 하지 않으니 하나님 뺏길 것이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안 된다. 실낱끝 하나도 차지하지 않겠다. 차지하지  않겠다.' 왜? '내가 하나님 차지 못 하고 물질 차지하는 일이 될까 싶어서 안  하겠다.' 이러고 물질 하나 실낱끝 하나도 차지 안 하겠다고 딱 해결을 짓고  현실이 착 지나가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와서 '아브라함아, 네가 그런 많은  물질을 왜 그와 같이 떨궜느냐?' '그것 잡으려 하다가 하나님 놓칠까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래! 내가 네 하나님이 되되 네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의  하나님이 되겠다.' 해서 하나님 차지했습니다.

 여러분들! 현실에 하나님을 차지하느냐 물질을 차지하느냐 이것 핑계 못  합니다. 우리가 살펴보면 환하게 다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 차지하려 하면 있는  것 하나도 아낌없이 다 희생할 각오를 하고, 생명 희생하게 되면 생명을  희생하고 하나님을 잡으려 해야 잡아지지 그렇지 않으면 못 잡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없어지게 할 때에는 잡아도 없어지요. 모든 사람이 역사에 왔다 간  사람들은 안 놓으려고 잡고 있었지마는 다 놓고 갔습니다. 하나님이 없어지지  않게 하면 세상이 다 달려들어도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데 염려하지 말고 모든 것 담대히, 자기 기업이나 생명이나 하나님 잡기  위해서, '이 생명 이것, 생명 내놔라. 그리 안 하면 하나님 네가 차지 못 한다'  이럴 때에는 '생명은 너희가 뺏들려 하면 뺏들어라. 생명은 줘도 하나님은 안  주겠다.' 이럴 수 있는 현실로 우리가 살아가자 그말이오. 이게 신앙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의 세상은 털끝만한 것도 그대로 지나가는 것 아닙니다. 생각 한번 한 것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다 드러납니다. 이렇게 정확 무오한 절대의 영원을 향하여  주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지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이 돼 가지고 갑시다. 이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이 소원을 가지는 자기로, 이 소원을 가져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당신에게 달라고  받아 가지고 갑시다. 이 지혜를 자기 것 삼고, 그 다음에는 이 지혜를 자기 것  삼는 그 사람이 변화가 되고, 능력을 받아 가지고 가야 돼지 그저 바쁘다고  예배보고 나서 훌쩍 뛰 나서면 자기는 껍데기 이 지식이 자기의 지식만 되기  때문에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구원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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