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향방의 길


선지자선교회 1985년 4월 20일 새벽(토) 

 

본문 :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와 바로 접선되는 그 위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 접선되는 위치의 말씀이요, 또 우리가 하나님과 이 세상과 접선되는 그  위치의 말씀도 있고, 또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안에서 그 위치가 심히 넓기  때문에 거기에서 이리 저리 헤매고 방황하는 그런 위치의 말씀도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나 또 우리가 신앙 행위를 할 때에  내가 지금 향하고 있는 그 향방이, 내가 향하고 있는 그 향방이 무엇인지를  언제든지 계속 구별을 해야 됩니다.

 이 육지를 가는 모든 것도 이런 저런 기구를 이용해서 가는 것도 있고, 또  걸어서 가는 것도 있고 있는데 가는 속도가 빠를수록 위험성이 많이 따릅니다.

비행기는 공중에 나니까 그게 아무 거치는 게 없으니까 뭐 이리 가도 저리 가도  위험성이 없겠다 이렇게 생각을 가지지마는 위험성이 땅에서 속도로 달리는 이  기차나 자동차보다 위험성이 심히 많습니다. 또 이 배도 속도로 가는 그런 속력이  빠를수록 그 배는 향진하는 데에 위험성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다  길이 있어서 그 길을 삐뚤리면 그만 저는 낭파가 되는 것입니다. 뭐 걸어가는  도보로 가는 거야 별로이 가지도 못 하는 동시에 위험성도 적습니다. 가다가  방해가 닥치면 못 올라가면 저리 둘러서 또 가고 헛일 해 봤자 별 것 없지마는,  그래도 이 차는 가는 데에 그 길이 좁기 때문에 그 길에서 탈선되면 부딪혀서 뭐  차도 사람도 죽든지 그래 안 하면 떨어지면 아주 절단이 나든지 그렇게 됩니다.

배도 그런 것입니다. 사람이 노로 저어서 돛대로 저어 가지고서 가는 그런  조각배는 뭐 길이 없어서 가다가 뭣을 암초를 당하든지 뭘 당한다고 해도  덜거럭하면서 걸리면 또 이리 또 틀어 가지고 가고 이래 하지마는 벌써 그  속도를 가진 배는 자기 길을 잃어 놓으면 절단납니다.

 며칠 전에 여떤 사람이 배 장사를 했는데 그만 배가 가다가 길을 조금 잘못  들어 가지고서 암초에다 대고 이렇게 가니까 암초에 부딪혀 가지고 구멍이  났더라면 괜찮은데 그 암초 위에 그만 주루룩 가는 그 속도로서 그 암초 위에  덜렁 올라 앉아 버렸어. 그러니까 배는 박살이 되고 사람은 뭐 죽은 사람은  죽었지마는 산 사람은 살았고 이랬는데 그 배를 그 배를 뜯어내는 데에 한 뭐 오  억 든다 든가 이랬는데 배만 그냥 없애 버리면 좋겠는데 그냥 냅두고 있으면 그  바다 주인들이 그라면 안 된다고 없애라고 자꾸 이라니까 그거 안 없애고 냅두면  안 되니까 그걸 뜯어내는데 한 오 억 든다고 합디다.

 비행기 같은 이런 것도 자기 항로를 조금 잘못 돼서 지나 버리면 거기에서 다시  그 항로로 되돌아가지를 못합니다. 되돌아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조금만 잃어  놓으면 그 비행기는 그 자리에 내리든지 안하고 그 길을 도로 뒤로 빠꾸를 해  가지고 갈라 해도 빠꾸를 어떻게 하면 빠꾸를 할란지 모릅니다. 어느 정도 가면  빠꾸가 되는지. 거기에서 거기에서 재어 가지고 해 놨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재어서 가는 방향과 조금 나가서 측량해 가지고서 가질 방향이 아주 다르기  때문에 조금만 탈선돼 놓으면 그 다음에 자기 항로를 찾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  길 잃은 비행기들이 이리 저리 방황하다가 다 추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보다도 공중의 것은 더하고. 저속의 것보다도 고속의 것은 더  그러하고 또 가치가 적은 길보다 가치가 많은 길은 더 그 길이 복잡하고  세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금만 탈선이 돼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사건도  그렇습니다. 그 사건도 뭐 어렵지 않는 그 가치 없는 사건은 이래 해결 해 봤자  저래 해결해 봤자 별 것 아니지마는 외나 중대한 가치 있는 그런 문제는 해결을  조금 잘못하면 그만 절단 나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나라에 그 정권을 일시 한 뭐 사 년동안 칠 년 동안 가지지마는 그  정권자가 하나 잘못하면 그 나라가 망하고 그 나라가 흥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 정권자는 사람을 안 죽이고는 정치를 못 하는 것입니다. 정권자가  사람을 안 죽이고 이렇게 정권할라 하는 이것이 아주 제일 중요한 그런 문제로  다루지마는 그걸 안 하고는 정치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권자의 가치는 사람을 많이 죽였느냐 작게 죽였느냐 하는 거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정치를 바로 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데에 거기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는 것은 그 후진들이 오랜 몇백 년 몇천 년 뒤에라도 옳고 그런  것은 반드시 드러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는 조물주의 그 뜻이 있으니까 그 뜻을  맞추어서 거기에 맞추어 나가면 잘 되고 거기에 삐뚤어졌으면, 조금 삐뚤어졌으면  오랜 후에 망하고 많이 삐뚤어졌으면 즉시 망하고 이런 것인데 그 나라나 그  민족이 자기들을 다스리고 있는 그 정치, 그 정치가 그 나라와 그 민족의 그 생사  화복을 거의 반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의 주장은 그 나라의 문화가 수많은 종류의 문화 그것이 내나 길인데 문화가  있는데 그 문화가 어떤 방향으로 점점 진보되고 있는가 하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그 나라의 그 발단을 걷고 있는, 그 나라의 뭐 국민학교보다도 중학,  중학보다도 고등, 고등보다도 대학 이 발단의 그 학자를 그 나라에서 어떤 학자를  영접하느냐, 어떤 학자들이 그 나라에 지금 문화를 인도하고 있느냐 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잘못된 학자 하나 있으면 그 학자가 그만 무능해서  짓밟혀서 없으면 좋지마는 그 학자가 그 시대의 모든 문화를 이끌고 간다고  하면은 이끌고 가는 그 사람에게 그 민족과 국가의 안 믿는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거의 반은 좌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은  것은 깨닫지만 큰 것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민족이나 국가를 바로 이끌고 갈 수 있는 제일 권위 있는 것이  무엇이냐? 권위 있는 것은 그 지역을 맡아 가지고 있는 교회들입니다. 이  교회들이 바른 길을 걸어간다고 하면, 언제든지 옳은 선지자들은 명대로 살지  못하고 다 거의가 순교했습니다. 그거는 세대가 다 거슬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박해를 당하고 이렇지마는 교회가 바른 길을  걸어가면 그 시대의 어떤 그 세력이라도 세상의 그 문화의 세력 또 그 행정의  세력 이 지식과 정치의 이 두 세력이 그 나라를 끌고 가는데 그 들은 다  말하자면 머리 끊긴 머리가 끊겨진 그런 짐승과 같습니다. 그게 뭐 바른 길을  걸어간다고 하는 것도 참 이리저리 하다 보니까 되는 걸로 그게 바로 됐지 그게  무슨 보고 측량하고 해 가지고서 바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끌고  가는 것은 다 사망선 아래에 있고 저주선 그 아래에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뭐  도적도 살기는 수명대로 살고 이런 건 다 수명대로 살기는 살지마는 그 생애가  사느냐 죽느냐, 그로 인해서 그 생애가 사는 데로 생명으로 전진했느냐 사망으로  더 향진했느냐 하는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나라의 교회가 바로  서서 있으면 세상은 바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 1장에 보면은 교회를 가리켜서 금촛대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금촛대라 말은 교회를 금으로 비유하고 교회의 그 모든 활동을 그 빛으로 이렇게  비유한 것은 교회가 세상의 제일 귀한 것이요 또 완전성 영원성을 가진 것이  교회라는 것을 표현해서 금이라 그렇게 했고. 또 등불이라 이렇게 한 것은 교회가  모든 것을 제일 바르고 바르게 알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그 시대와 민족의  양심이라 이렇게 할 수가 있고, 또 교회는 그 시대의 참된 지식이라 지혜라 할  수가 있고. 또 그 시대의 생명이라 할 수가 있고 또 그 시대의 모든 복덩어리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복의 기관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바로 나가면 박해는 당하나 바로 나가다가 박해당하는 그것은  절대로 그게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예? 바로 나가다가  박해를 당하는 것이 손해가 아닌가? 순교당하는 것이 왜 손해가 아닌가? 순교를  당하면 바른 것을 주장하다가 순교를 당하는데 순교를 시킨 자는 악의  세력입니다. 악령과 악성과 악습의 그 악의 세력이 옳은 것을 죽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 죽은 것은 옳은 것을 그렇게 박해 준 것은 박해를 받은 그 옳은 것은  이거는 완전이 돼 버렸습니다. 완전이 돼서 마치 아벨이 죽었으나 아벨의 피는 그  죽음으로서 다시는 악에게 침노를 받지 않는 성공의 실력을 가지고서 계속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주장과 그 사상과 그 도를 전한 이 선교는 이것은 원수에게  박해를 받지 안하고 원수가 박해할 수 없는 자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은  뭐 남북이 이렇게 야단을 지기고 있지마는 누구든지 만일 정치가가 그저 힘도  많이 쓸 것은 없고 많이 쓸 거는 없고 그저 아이들 힘만 해도 되겠습니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만 안 한다면. 사람 눈에 보이지만 안 하고 피해만 안 받는다면 뭐  아이도 상관없어. 이북에 가 가지고서 김 일성이 김 정일이 그런 사람들이 자꾸  서둘러 그렇다고 하면은 그눈에 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안하고 사람들이  해할래야 해하지 못하고. 그 사람들이 해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다면 조그만한  아이라도 가 가지고서 조그만한 조그만한 정낙침, 요만한 침 하나 가지고도 자꾸  그 해는 안 당하고 해치기만 한다. 그 눈 동광을 콕 찔러 버리고 또 이 동광을 콱  찔러버리고 귀를 콕 찔러 버리소 이래도 이거는 뭐 보이지도 안하지 잡지도  못하지 이거는 해하지도 못하지 조그만한 힘이지마는 해를 받지는 안하고 그  쪽을 해할수만 있다고 하면은 그런 조그만한 그 아이가 무기도 큰 거 가질 것  없고 조그만한 요만한 송곳 하나만 가지면은 그 이북을 다 점령할수 안  있겠습니까? 그렇지 안해요? 가 가지고 김 일성이 이래 눈을 콕 찔러 버리니까  이 뭐이 찌른지도 모르고 눈만 아파 눈이 멀어지지, 또 귀로 쿡 찔러도 귀가 그만  어두워지지, 이 울대로 콕 찌르니까 피가 또 나오지 뭐 이라니까 그뭐 잠깐  절단나지 그 해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고 해를 받지 안할 수 있는 그러 존재가  되지 안하고 해를 받을 수도 있고 해를 할 수도 있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게  승리를 못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주 군대를 수십만 명을 이래 거느리고 이래  가는데 가지마는 가니까 수십만 명이 해할 수 있는 동시에 또 수십만 명이 그  쪽의 수십만 명에게 해를 받을 수도 있고 이런 자이기 때문에 성공을 못 하고  지금 이래 있는 것입니다. 만일 피해를 받지는 안하고 하기만 할 수 있는 자가  됐다면은 아이 하나라도 일국을 다 점령할 수 있어 그렇지 않겠습니까? 안  그렇겠소?  이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증거하다가 진리 증거하는 자는 상대방은 불법이요  증거하는 자는 성령에 속했고. 상대는 대적은 악령인데 악령으로 더불어 싸우는데  이것을 싸우다가 옳은 것으로 인해서 만일 순교를 당했다고 하면 그것은 그  운동이 끝나고 죽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는 상대방에게 해는 받을 수  없는 존재로 승격됐습니다. 승격됐기 때문에 그 다음 부텀은 상대방은 해하지  못하고 이 쪽은 상대방을 얼마든지 해할 수 있는 자가 됐기 때문에 그만  상대방이 손을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왜정 말년에 광도에 그 원자탄을 던졌을 때에 그 원자탄 던지니까 그  파괴당하고 피해당하는 것을 일본 사람들이 보고는 이 쪽에서 '또 그라면 너거  동경에 또 던진다' 자꾸 이라니까 아야 이 오면은 이만하면 우리나라가 전멸되고  마니까 그 나라 뭐 광도 하나, 그거 광도 하나 그거 좀 크기는 크지마는 얼마 안  됩니다. 그거 하나 그런 거 하나 없어졌다고. 그 사람들이 손을 들 사람입니까?  안 들 사람이오. 만일 광도를 그 미군들이 와 가지고서 총이나 칼로 가지고서  이렇게 무찔러서 광도 십 배를 이렇게 무찔렀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손들  사람들 아닙니다. 이렇지마는 조그만한 게 절단났지마는 절단시킨 그 가해한  절단시킨 그 세력을 보니까 그 세력을 도무지 대항할 수 없는 세력이라 그  세력이 만일 항복하지 안한다면은 그 일본 나라라 하는 거는 아주 전멸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만 손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 광도의 원자탄 던진지 며칠  만에 손을 들었는지 누가 잘 압니까? 저 아마 ○○○집사님이 알 것 같은데. 그때  군대로 다녔으니까. 그 며칠 만에 손 들었습니까? 원자탄 던진지 우리는 뭐 그런  거 기억할 필요 없지마는, 팔 일? 녜. 팔 일 정도돼서 그뭐 팔 일 정도 똑똑히  모르지마는 그저 어쨌든지 열흘 안쪽입니다. 열흘 안 쪽에 그 사람들이 그만 손을  들어 버렸어  이것 모양으로 이 악령이 에덴동산에 들어 와 가지고 배암을 입고 들어 와  가지고 첫째 아담으로 더불어 이렇게 싸움을 했는데 그 첫째 아담에게 배암이  와서 도전했습니다. 도전을 해 가지고 그 해와를 먼저 삼키고 해와 삼켜 가지고서  그 다음에는 아담을 삼키고 이래 가지고서 고만 완전히 패전을 당해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이 악령은 기회를 보지 안 하고 피해 줄 수 있는 그런  아담의 편에는 그런 힘이 없고, 자꾸 피해만 입을 수 있는 그 자들이 됐기 때문에  완전히 손들었습니다. 그래 싸워 가지고 손을 들어 버렸습니다. 손을 들었는데 그  다음에 둘째 아담이 이 악령에게 도전했습니다. 악령에게 도전해 가지고서 이렇게  싸우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는 악령을 그 격멸할 수도 있고 악령은  또 이 둘째 아담을 격멸할 수도 있고 서로 이렇게 이 가해할 수도 있고 피해받을  수도 있고 가해할 수도 피해받을 수도 있고 이렇게 하니까 이래 싸우다가 악령이  둘째 아담을 그 침노할 수 있는 해할 수 있는 가해할 수 있는 이 일이 그만 끝  나 버렸습니다. 이제는 배암은 아담을 해할 수 없고, 없게 됐고, 또 둘째 아담은  배암을 얼마든지 계속해서 해할 수 있도록 되니까 그만 이 마귀가, 마귀나  배암이나 내나 같은 말인데 그만 이 사탄이가 손을 들었습니다. 손 만든 것은  예수님께서 그것들에게 피해를 보지 안할 수 있는 자로 그 완전히 변화돼 버렸고,  얼마든지 그것은 격멸할 수 있는 그런 위치로 변화되고 나왔기 때문에 그 뒤에  손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만 손을 들고서 항복을  하고 다시는 달라들지를 못하고 종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래서, 그 아벨도 가인하고. 가인은 사탄에게 속했고 아벨은 하나님에게  속했었는데 이렇게 서로 전투하다가 그 가인은 이긴 것 같지만 가인은 아벨에게  얼마든지 피해를 당할 수 있는 존재로 그대로 돼 가지고 있고. 아벨은 가인에게  피해는 보지 안하고 가인을 격멸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승격돼 버렸습니다.

승격됐기 때문에 그 아벨하고 가인하고 싸운 그 아벨의 전쟁은 결국은 점점 그  소속을 격멸하고 격멸하고 격파하고 격파하고 이렇게 하다가서 그 예수님이 또  오셔 가지고서 계속해서 지금 그 일을 하다가 예수님께서 비로소, 그 전쟁을  완료를 해 버렸습니다. 완료를 해서 다시는 이제는 그들이 일어날 수 없는 자로  돼 버렸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에 보면은 그 아벨이 죽었었는데 예수님의 피를 말하기를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역사한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 다음으로는  아벨의 피가 계속 능력 있게 역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피해를 받지 안할 수  있는 자로 승격 된 것이고, 왜 그리 되느냐? 그것은 자기가 주장하던 진리, 영감.

생명 내나 그게 하나인데. 진리, 영감. 생명 이 셋이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역사하다가 그 형체가 이 역사를 하는 것으로 인해서 그 형체가 끝이 났으니까  그 형체는 끝났고 속에서 그 형체를 붙들고 역사하던 그 생명과 진리와 이  영감은 이제는 그 피해를 받을 수 없는 그 존재로서 역사하게 됐기 때문에 그는  그만 완전한 그 승리로 이와 같이 승화되고 승격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할 때에, (이거 잘  안 들으면 몰라. 이게 땅에 속한 말 아니야. 자꾸 하나님과 딱 들어 붙는 그말  하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할 때에 그 사람이 향방이 둘입니다. 향방이 둘인데  말을 하든지 설교를 하든지 전도를 하든지 뭘 하든지 그 향방이 둘입니다. 둘은  하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그 설교를 하고 있느냐, 또 그렇지 안하면 사람을  향하여 가고 있는 설교를 하느냐, 그러면 천국을 향해 가는 걸음이냐. 세상을  향하여 가는 걸음이냐 요 둘 중에 하나입니다. 둘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가고 천국을 향하여 가는 그 운동은 하나님의 운동인데 그렇게 하면은 그  사람이 해 놓은 일을 그 무기인 진리가 그 역사를 계대해서 계속 하고, 또 그  진리를 명령한 그 영감이 계대해서 역사하고, 하나님의 본체도 계대해서  역사합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있으니까 대속의 공로가  계대해서 역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러가 이 세상에서 할 때에 자기가 이 세상에서 승리를 볼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그 보이는 승리를 볼라고 애를 쓰다 보면은 자기도  모르게 고만 세상을 향한 것이 되고 인간을 향한 것이 되기 쉽습니다. 세상에  승리를 볼라고 하지 말고 자기의 하는 일을 하나님과 우리와 주의 피의 능력, 이  세 가지 능력이 자기의 하는 일을 인계를 하느냐 안 하느냐? 그분이 지금  주장하도록 그렇게 했으니까 그 분이 나를 들고 주장하다가 내가 끝나  버렸으니까 그 주장이 꺾어지고 죽습니까? 안 죽습니다. 그 피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과 진리의 능력은 그대로 계속을 하기 때문에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붙들고 계속하든지 그래 안 하면 그 자체가 어떻게 역사하든기 나 하던 일을  계대했기 때문에 그 일은 그 주님과 진리가 계대하도록 이렇게 해 놓은 일은 그  일은 이 무한한 완전의 세력이 계대 하기 때문에 그 역사는 반드시 승리를  이루는 거기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이 일을 하나님과 진리와 주의 피의 능력이 이 일을  내가 끝나면 계대할 수 있느냐 없느냐? 거기에 접선을 시키고 연결을 시켜서 그  계대할 수 있는 요게 되느냐 안 되느냐? 내가 하면은 이 능력이 계대해서 할 수  있느냐? 내가 이 계대해서 하지 못 하고 그 능력은 계대 할 수 없는 성질이 됐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일시에 천하를 정복하고 천하의 인기를 다 끌고 모든  사람들을 다 자기에게로 집합하도록 이렇게 점령을 했다 할지라도 그 속에  영원한 능력이 자기를 붙들고 이래 하도록 자기와 하나되도록 이렇게 하지  못했다고 하면은 그것은 다 이 세상에 천 년 동안 큰 것이 일어났다가 깨지고  일어났다가 깨진 모든 그 사망 아래의 운동이요 저주 아래의 운동이요 이것은 다  파괴 아래의 운동이기 때문에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고 있느냐 인간을  향하여 가고 있느냐 둘 중에 하나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은 절대 없습니다.

또 천국을 향하여 가는 것이냐 세상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냐? 그 세상을  향하여 가고 있으면 세상은 좋아합니다. 또 인간을 향하여 가고 있으면 인간은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가고 있으면 하나님은 좋아합니다. 또 천국을  향하여 가면 천국은 좋아합니다. 이러니까 내가 어디로 지금 향방을 돌려  가지고서 향진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 생활은 히브리서에 말씀하시기를 '뒤로 물러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뒤로 물러가면. 뒤로 물러가면 기뻐하지 않는데  하나님을 향해서 가야, '그를 찾아가는 자마다 그의 계시는 것과 그가 그를 찾는  자에게 복 주시는 자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히브리서  I1장 몇 절이지? 6 절. 그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반드시 계신 것과 또 그를 찾는 자들에게 복  주시는 자이심을 알아야 할지니'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설교를 해야 되고 찾아가는 주장을 해야 되고,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면서  뒤로서 이 세상에다 손을 대고서 오라고 이렇게 끌지, 그리 향해서 가 버리면  헛일이다. 우리가 앞면으로 향해서 향진은 하나님을 향해서 향진해 나가면서  세상에게는 뒤로 손을 내 가지고서 '오라 오라 오라' 이래야 되지 오라 하는데  세상에 '내가 갈 터이니까 좀 돌아봐라. 돌아봐라.' 이래서 '안 돌아보면 나 안  갈란다. 돌아 봐라.' 이랄 때에 사람들이 유혹받기 쉽습니다. 요거 중요한  것입니다. 요런 거는 다 성경에도 있지마는 성경에 너무 깊이 있기 때문에 잘  모르고 요 신앙 체험에서 알 수 있어. '돌아봐라' 이럴 때에 하도 그래 쌓으니까  돌아봐야 돼. 돌아보면 살모시 돌아보면 저놈은 벌써 돌아서서 도망칩니다.

도망치니까 '와 도망치느냐? 가지말고 오라 하더니만 날 돌아보라 하더니만 와  도망치느냐?' 하고서 붙들러 가면 내가 오리를 예를 들면은 무슨 무슨 속도라  할까? 한 일의 속도로 가면은 저는 이의 속도로 도망칩니다. 도망쳐요. 아  이러니까 잡을라고 십의 속도로 달려가면은 백의 속도로 도망쳐 버립니다. 못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를 가는 그 비밀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향하여서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항진하면서 출진하면서 이  세상에도 보고도 '너거도 따라오라' 따라오라 이래 할 때에 '아, 천천히 가면은  우리가 따라가겠는데 우리가 빨리 가기 때문에 못 따라가겠다' 할 때에 멈추면 안  됩니다. 고 때에 할 일은 뭐이냐? 따라오라 하면서 그때는 한 걸음 더 빨리 가야  됩니다. 한 걸음 더 빨리 가야 되고, 뒤를 돌아 보라 하면은 하나님만 향하는 그  눈을, 마치 포수가 짐승을 잡을때에 그 짐승을 보고서 요렇게 겨누는 거와  마찬가지로 요 겨누는 거와 같이 하나님을 향하여서 이와 같이 더 좁게 이렇게  향해서 향진하면은 내가 십의 속도로 이와 같이 달리면 그것이 한 오의 속도로  옵니다. 내가 백의 속도로 달리면 그것이 한 사십의 속도로 달려옵니다.

 그러니까 앞서 가는 데 따라서 그게 돌아오지 그게 뒤로 그것을 붙들어 달라  하는 이것이 인화주의요 이것이 인화주의요 이것이 인본주의인데, 이래서 이  주일학교는 아마 서부 교회 주일학교가 이 세계로서 좀 아주 유명하게 된 것  같습니다. 내가 어제도 말을 들었는데 어떤 그 목사가 개척 교회를 하는데 그  보니까 자기 친척이 바로 가까운데 그 개척 교회를 하고 있는 줄 몰랐는데 그 참  교회를 하고 있는 줄 모르고 큰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더라고서. 그런데 만나  가지고서 말하기를 이게 그렇다 하니까 '아, 이거 뭐 주일 학생은 이제 뭐 다  뺏겨 놨네.' 하더라고서. 다른 말은 안 하고 '주일 학생은 이 교회에게 다 뺏겨  놨네' 아야 주일 학교는 서부 교회하고 서로 맞댈 수가 없구만. 아야 거기에서  손들은 그런 격으로서 말을 하더라고서.

 이렇게, 내가 무슨 말 하다가 그 말이 나왔지? 아, 그래. 사람이 자꾸 사람 좋게  한다고 이렇게 하다가 자꾸 그리 되는데, 우리 주일 학교에서는 고게 좀  다릅니다. 하나님의 심리를 연구해서 하나님의 심리에 맞출라고, 요새 나도 영어  그 한 마디 배웠어. 오우 케이 이라는데 좋으면 오우 케이 이라는가 보대요.

하나님께서 오우 케이. 하나님께서 됐다 이걸 지금 얻을라고 애를 쓰지 아이들의  아동 심리에서 아, 심리의 우리 심리의 비위에 딱 맞다 그거 생각지 안해요.

이러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자꾸 가고 하니까 모두 와서 말하기를 '그런 것을  가리켜 가지고야 학생들이 어찌알겠습니까? 그 주장을 그래 말해. 하나님의  말씀만 가르치는데 공과를 말할 때에는 그 오전 오후 설교한 것 가운데에서 제일  깨닫기 어려운 것 요지를 말해 놓습니다. 요지를 제일 어려운 것을 주일  학생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래 말해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을 향하여서 이  하나님이 좋아하도록 당신의 비위와 당신의 뜻, 당신을 주일학교 그 아동 설교할  때에 당신을 점령할라고 당신을 붙들라고 하는 설교지 아동 붙들라고 하는 설교  아니라. 하나님 붙드는 것이 목적이요. 그 하나님 붙듦으로 말미암아 앞에  학생들은 따라오도록 그렇게 하고 있다. 이러니까 이 인화가 아니고 인화가  아니고 신화라. 이 서부 교회서 주일학교 설교하는 것은 그 목포가 신화라.

신화라 말은 하나님하고 이 화목한다 그 말이오. 신화를 목표하고 있지 아 인화,  이 학생들하고 서로 이래 한 덩어리 되고 인화를 목표하는 것 아니라 영 정  반대라. 그것을 언제든지 잊지 안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이해가 안 돼서 '그 어째 그럴까?' 요 이해 안 되는 그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장로들보다 목사가 좀 잘하는데 목사도 보면 이해 안 되는 목사가  있으면 그 목사는 언제 그때 한 목사가 왔는데 그 목사가 아주 양복도 입고 자기  부인하고 이래 왔는데 아주 번들번들하게 벌써 그 뭐 세상 학문은 높은 학문  가졌는데 거기서 장로로 왔으니 그 분들이 은혜를 받으니까 이분이 어찌할 수  없어 이래 거석 하는데 내가 말했어. 그 자리에서. 뒤에 만나지 못하니까  '목사님이 그 교회의 은혜의 불을 끕니다. 은혜의 불을 꺼서 소방수. 소방대라  하나? 그 소방대 일을 하고 있으니까 목사님이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안 쓰면  점점 있을수록이 자꾸 교회가 자꾸 손해 갈 터이니까 얼마 안 가서 목사님  배척을 당할 것입니다. 이라니까 힘을 쓰십시오.' 내가 다른 때는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때 말해 주니까 그 얼마나 여기까지 왔는데 그 공격입니까? 여기 와서  하룻밤 자고 갔습니다. 그렇게 말해 줬어.

 보면,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에 교역자가 많이 왔는데 여러분들이 설교를 어떻게  하든지 설교할 때에, 너도 많은 경험을 해서 체험 가운데에 깨달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도가 시골이니까 시골 교회니까 무식한 정도에 있으니까 여기에는  설교를 좀 쉽게 해야 되겠다. 쉽게 해야 되겠다 하는 데에는 쉽게 해야 되겠다  하는 데에는 전부 다 실패입니다. 실패고 그저 어데든지 어제보다 오늘 더 하나님  앞에 가까운 설교를 해야 되겠고. 하나님과 가까운 설교를 해야 되겠고, 또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데에도 더 어제보다 속도로 나아가는 걸 했겠고 더 속도로  더 가깝게 더 좁게,  이 하나님이 지금, 예를 들면은 하나님이. 비유컨대 하나님이 저 동쪽에 있다  이러면 동쪽이라 하지만 동쪽이라 하는 것이 그 넓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동쪽으로 향하기는 했지만 동쪽에서 이게도 동쪽, 이게도 동쪽, 동쪽이지마는  차차 차차 가는 가운데에 하나님 만날라 하면 끝이 좁아져야 될 것 아닙니까?  동쪽 중에도 요리. 이래 가지고 마지막에는 그 넓은 동쪽에서 좁은데 한 평  이내를 찾아가야 딱 들어 만날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어짜든지  자기의 증거하는 것이나 자기가 걷는 걸음이나 그런 것이 점점 좁아져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하되 하나님을 향하되 점점 좁아져야 되고, 또 점점  고속화 돼야 됩니다. 점점 속도가 빨라져야 되지 점점 그 하나님을 찾을라 하면은  그렇지 안해요?  예를 들면 그 뭐 그래 어려운 것이 아니고 이 뭐 세상에 다 지식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안 배워도 다 알아요. 서울 갈라 하다가 서울 갈라 했으면 서울 떡  갔다가, 서울에 갔지마는 서울이 그렇츰 넓은데 어찌 알겠습니까? 서울에서 그  사람 있는 데로 좁아져서 서울에서 무슨 뭐 구 무슨 구를 찾아야 되겠고. 많은 구  중에 한 구를 찾아야 되겠고. 또 한 구 중에 거기에서 많은 동리가 있는데 그 중  한 동리를 찾아야 되겠고, 한 동리 가운데서 더 좁아져 가지고서 또 어느 그 뭐  몇 가라 하는 그걸 찾아야 되겠고, 그 몇가 가운데서 번지가 많으니까 고 자꾸  좁아져 가지고 몇 번지를 찾아 가지고서 딱 문을 노크를 똑똑 해야 문 열면은 고  사람 만날 수 있다 말이오. 그렇지 안해요? 이 넓은데 자꾸 좁아져야 되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걸음이기 때문에 점점 이와 같이  좁아져야 됩니다. 자꾸 우리 사색하는 거는 좁아져야 돼요. 이 찾는 것은  좁아져야 되고 또 걷는 걸음은 더 가속도로 속해야 되고 이런 건데 벌써 그  사람이 볼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점점 좁아지지 안하고 인간을 생각하고 인간을  생각하고 점점 넓어지고 하는 그 한 마디 말을 들을 때에 저 사람이 방향을 지금  세상을 향하고 있다. 인간을 향하고 있다 하는 고 방향을 알 수가 있다 말이오.

방향을 알 수가 있어. 그 사람이 지금 그 천국을 향하고 있는지 세상을 향하고  있는지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지 인간들을 향하고 있는지 그걸 볼 수가 있다 그  말이오. 한 마디 말해서 다 알 수가 있다. 저 큰일 났다. 큰 병 들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이래서, 우리가 이 교단에 속해야 된다. 이 교단에 속해야 우리가 유지된다  그러면 교단으로 속해야 된다. 교단으로 속할라 하는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꾸  방해하고 그들과 그들의 혜택을 입을라 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을만 하고  그들에게 쉽게 인정을 받을라 하고 이라니까 자꾸 이 교단 등록 안 한 것이 큰  장애가 되어지고 하나님 향해서 접촉하는 데는 그게 장애 되지 안하고 오히려  그것이 아무것도 없이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니까 거리꼈는데 거기에 떡 접선이  돼 놓으면 거기에 또 요구가 있으니까 신랑이 둘이 됐다 말이오. 신랑이 둘이  됐어. 신랑이 둘이 됐으니까 그전에는 신랑 하나만 만나 가지고 사니까 그 신랑,  하나만 비위 맞추면 돼 버렸는데 이놈의 간부가 하나 더 생겼으니까 이거 비위  맞출라 하다가 저거 비위 맞출라 하다가 이라다 보니까 안 돼서 그 모든  보수파의 그 신학들도 세상에 있는 그런 거기에도 다 문공부에 거기에 등록을  안할라고 이렇게 애를 쓰다가 나중에 등록 되게 됩니다. ○목사님. 웨스트민스트  신학교가 그 문공부에 등록된 게 언제 등록됐습니까? 그전에는 그 박사 학위를  못 줬는데, 지금 줍니까? 그 전에는 못 줬지요? 그 전에는 못 준 그 원인이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못 준 이유가 뭐 학력이 모지래 그런 거  아니고 박사 학위를 못 준 이유가 박사 학위를 줄 수 있는 권이 그 문공부에  등록이 안 했기 때문에 그걸 못 줬습니다. 못 주니까 불편하거든. 자꾸 불편해  가지고서 불편하니까 지금은 등록을 했습니다. 등록을 해서 박사 학위를 지금  주고 있는 줄로 그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준다고 합니다. 이 ○○교파도  그랬습니다. ○○교파도 ○○교파에서 지금 박사 학위를 줄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줄 수가 없어서 등록 안 했었는데 그 후에 등록을 해서 지금은 줄 수  있습니다.

 그게 뭐이냐? 세상 편리, 세상 편리를 보느냐. 하나님과의 편리를 보느냐 이 둘  중에 하나를 봐요. 심령이 어두워 놓으니까 모르는데 우리가 지금은 이렇게 등록  안 하고 나가는 것은 거기에 간섭을 받지 안할라고 등록하면. 결국은 불교들이  등록했는데 불교에는 등록한 데는 실은 재산이나 모든 것이 그 문공부의  것입니다. 문공부의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주권적으로 움직이는데 따라  움직여야 되는데, 지금은 교회라 하는 것은 너무 거리 멀었다가 이제 겨우 합해  가지고서 문공부에 등록하고 이라기 때문에 그들이 좌우하면은 지금 무리가  일어나고 반대가 나기 때문에 안하지마는 법적으로는 문공부에 등록하면은  문공부에서 모든 이 예배당이나 뭐 이런 것 다 전부 부동산이나 총권리를  문공부에서 가지는 것입니다. 불교 재물은 벌써 문공부에 다 가져갔습니다. 다  가지고 거기서 주권하고 있지 판다 해도 문공부 허락 없으면 못 팝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되지마는 교단 등록도 그와 같이 된 것이나 그거는 아직까지  그렇게는 권리를 쓰지 못하고 있는데 앞으로 그와 같이 나간다고 하면은  예수님의 재림이 있어 나간다고 하면은 불교가 문공부에 등록해서 그 불교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문공부에서 불교를 주권하는 그 권리가 어데가 크냐? 불교  자체에서 그 권리 주권하고 있는 권리가 크냐? 문공부에서 주권하고 있는 권리가  크냐? 문공부에서 주권하고 있는 권리가 오히려 커져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모든 경제면이나 못 하는 것 없어. 기독교도 다 그와 같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 할라고 하는 것인데 그 문공부에 등록되자, 교회 등록을 하자  하는 사람들 여러분들이 지난번에도 무기명으로 투표하자 했는데 무기명으로  투표할 때에 그때에 무기명 투표하기 전에 투표하러 나오기 전에 투표  가등록하자 하는 사람이요 가운데에 몇 사람일 것이고 반대하는 사람이 몇  사람일 것이다, 인명 수까지 헤아리는 사람은 다 헤아리고 있습니다. 몇 표가  나올 것이 요게 몇 표 나올 것입니다. 고렇게 미리 알고 있다 말이오. 고거는  뭐이냐 하면 그 사람을 알게 되고 신앙 사상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 그거요.

그렇지마는 그때보다 지금은 차자 차차 좀 그게 아마 숫자가 많아질 것입니다.

많아지는 것은 그 많은 운동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운동들이  그전에 그전부더 이래 하던 그 운동들이 자꾸 차차 차차 그것이 활동하고 세력을  잡으니까 많이 일어납니다. 많이 일어나는 그게 뭐이냐? 타락이라는 말입니다. 그  타락이 많아지면은 나중에 패전해 버리고 난 다음에, 타락을 표시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환난을 주면 그런 자는 다 패전하고 맙니다. 패전하고 말면은 승리자는  얼마 안 되는 것이 다시 개혁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세월이 지나가면  속화 타락하기 마련이고 타락한 거기에서 다시 개혁하기 마련이고, 타락 개혁.

타락 개혁 개혁된 것도 좀 있으면 또 타락하고 타락한 가운데 다 타락이 아니야.

하나님이 붙든 것은 남아 있어 가지고서 그건 또 개혁이 돼지고 자꾸 이래 돼  가는 것이 이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이러면 반드시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생각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람을 생각해. 그러면 자기는 모르지마는  저 사람은 지금 하나님을 향해 가는 것보다 사람을 향해 간다.

 이래 주일 학교도 다 온 교회 주일학교는 다 뭐이냐? 인간 심리를 다 잘 연구해  가지고 인간 심리에 딱 맞도록, 인간 비위에 학생들 비위에 딱 맞도록 해야 된다  이래 가지고서 그 설교하는 그 설교를 아이들에게 하는 설교라 해 가지고 아동  설교라 그랍니다. 아동 설교, 아동 설교를 하는데, 제가 그때 여기에 전국의 하기  아동 성경학교 강사 강습회가 있다고서 광고가 많이 돌아서 내가 한 시간 가  봤어. 가서 한 반 시간 참여했어. 반 시간 참여했는데 그 강사가 연세 대학에  있는 교수인데 사람은 뭐 신신학자라고 하는 것을 환하이 다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랬는데 그 사람이 가서 말하기를 '여러분들, 이 동화를 어짜든지  이렇게 폭 넓게 해 가지고서 연구를 하면은 뭐 창세기 1장 1절로 부터 요한계시  끝장 끝절까지 전부 다 동화를 할 수 있습니다.' 다 동화를 할 수 있다 그 말은  뭐이냐 하면은 다 성경말씀을 인간 얘기로 다 할 수 있다 말이요. 인간 얘기로 다  할 수 있다 말은 아이들이 다 재미있게 들을 수 있도록 아이들 재미에  흥분하도록 할 수가 있다 그 말이오. 그라면서 하나 말합디다. 창세기 1장에  에덴동산을 떡 말하면서 '에덴동산은 에덴동산은 거기에서 길거리를 걸어가면은  그 발바닥 밑에서 장그랑 장그랑 장그랑 장그랑 장그랑 그렇게 에덴동산은 그런  동산입니다. 이라면은 아동들이 참 재미있게 취미 있게 듣고서 이렇게 한다.'  쟁그랑 쟁그랑 한다고 이렇게 말하고, 또 말하기를 '그 에덴동산에는 의자들이  있는데 의자들이 있으며 의자들이 전부 파이프 오르겐이 다 돼 가지고 있어서  앉으니까 바바 바바바바바바바바바바 이래서 앉으면은 바바바바 하고, 또 서니까  바바바바 하고 또 이래 하고 전부 이래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동화를 잘  꾸며서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내가 거기서 뭐 효력이 있으면 당장 좀 호통을  칠 것이지마는 뭐 그랄 필요 없고 나는 나와 버렸어. 저 바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거짓말로 만들어 가지고 저래 아동들에게 그라니까 '아, 성경 말씀은  얼마든지 그 성경 말씀을 가지고서 거짓말을 사람 듣기 좋아하는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그것이 이게 아동 설교에는 일등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도록  이렇게 돼지니까 성경을 믿는 사람입니까? 그 성경을 안 믿습니다.

 요새 교회들이 성경 안 믿어요. 이 서부 교회 주일학생과 아주 다릅니다. 여게는  말씀은 정확하나. 말씀에 한 마디도 어기면 망한다.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이러니까 성경 말씀 어기면 안 될 줄 알고 뭐 이러지마는 그래도  며칠 전에도 중간반 학생들에게 자꾸 설교만 암만 해 줘도 안 된다. 그거  설교해도 보니까 그 기억도 안 하고 하니까 이 주일학교 요절지에 나가 공과  제목과 공과의 요절과 공과의 그 문답은 기록해 가지고서 그것을 중간반 일 부  이 부에도 다 나눠줘라. 다 나눠줘라. 이제 나눠주기로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걸 자꾸 하나라도 외우고 이러면 그 속에 박혀지는데 그만 이래 놓으니까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성에 대해서 완전히 권위가 떨어져 버렸어.

 이러니까 우리가 가는 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느냐 인간을 향하여 가느냐?  하나님을 향해 가면은 인간이 어짜든지 하나님 그분 비위 방출라 보니 인간 비위  못 맞춰요. 둘 절대 못 맞춥니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온 것은 세상을 화평케  하러 온 것이 아니고 분쟁을 일으키러 왔다 이래 가지고 뭐 시어머니와 며느리,  부모와 자녀, 그 남편과 아내 이 분쟁을 일으키러 왔다. 이래서 그 왜 그러냐?  그거는 이해할 수 있어. 이 모두 다 썩어졌는데 생명이 왔으니까 거기서 투쟁이  있을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왔는데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서  하나님 비위 맞출라하면 이 비위는 못 맞춰요. 못 맞추면 하나님 비위만 맞춰라  했어. 왜? 하나님 비위 맞추는 것이 그것이 피조물의 본질 본성에 딱 맞는  이치이기 때문에 하나님 비위 맞추면은 이 모든 피조물의 비위에는 딱 맞아요. 딱  맞는 건데 하나님 비위에 맞는데 피조물 비위에 안 맞는 것은 피조물 그것이  병이 들었기 때문에 고걸 고침에서, 고치되 하나님 비위에 맞추는데 고게 딱  들어맞도록 요렇게 고치면 요게 바로 되는 것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가거나 사람을 향하여 가거나 천국을 향하여 가거나  이 세상을 향하여 가거나 둘 중에 하나라. 저는 아무리 안 그렇다고 해도 너는  향방이 세상이다. 너는 향방이 인간이다, 너는 향방이 하나님이다 너는 향방이  천국이다.

 이러니까 그 설교를 할 때에 여러분들, 어제보다 오늘 더 좁게. 오늘보다 내일  더 좁게 내일보다 모레 더 좁게, 점점 좁게 이렇게 해서 자기가 맞는 세상에서  거석해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고 더 좁게 가는 것, 서울  가는 사람이 '서울' 하는 데서 서구냐 동구냐 뭐 북구냐 중앙구냐 뭐냐 이렇게 또  종로냐 뭐이냐 무슨 정이냐 이래 거기에서 또 인제 어느 동 그라면 동이라면  서울에 몇백 분지 일이 안 되겠습니까? 그 좁아져서 동 동에서 어느 골목,  골목에서 또 그 몇 번지면 그 번지에서 지번이 있어 가지고 몇 번에 몇, 몇 번의  몇. 몇 번의 몇 그라니까 또 거기에서 하나를 딱 찾아 가지고서 그 집에 가니까  번지 한 번지 집이 한 열 채 나 있습니다. 한 번지에 집이 열 채나 있고 열 집이  있으니까 거기에서 요 집인가 조 집인가 한 집을 딱 찾아 가지고 고 집에 가서  노크를 해야 열어 주면서 만날 사람 만난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니까 자꾸 좁아져요.

하나님을 향한 거는 좁아져야 된다. 그 속력은 고속으로 점점 빨라져야 된다.

요거 하나만 아는 것도 이것은 세상에서 억만 권의 책을 읽어도 아는 것  아닙니다. 아는 것 아니고 요거는 자기가 실행하는 그 실행하는 생활 가운데서  나와지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런고로, 요것을 기억하고, 엊저녁에 말씀 이 말씀을 앞으로도 자꾸  가르치겠는데 일곱 가지를 알았고 또 일곱 가지를 네가 점령하는 데에는  도달하는 데에는 예수님의 세 가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요 셋을 자기가  걸어가야 되는데 오늘 아침 하나만 간단하게 말한다면은 이 일곱 가지 일곱  가지만 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만 주권 가져, 아버지에게만 요 일곱  가지가 있어요. 아버지에게만 요 일곱 가지가 있는데 요 아버지를 접해 가지고  아버지에게 요 일곱 가지를 받는 데에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돼져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음인데 길을 가는  것도 길을 가는 것도 가다가 가다가 좀 쉴 수 있고 가다가 쉴 수는 있지마는  가다가 쉴 수는 있지마는 딴 길 가면은 그만 헛일입니다. 그러고 진리는 진리  속에서 쉬어 갈 수는 있고 머물러 있을 수는 있지마는 그 진리에서 불법으로 딴  데로 가 버리면 그만 헛일입니다. 또 생명도 그 생명이 그대로 살아가지 안하고  그대로 있을 수는 있지마는 생명이 그와 같이 지금 붙어 가지고서 잠자는 거는  생명이 쉬고 있지 않습니까? 있지마는 생명이 거기서 탈선해서 끊어지면 안  됩니다. 요 생명도 끊어지먼 안된다 요 진리에도 끊어지면 안 된다 실도 끊어지면  길은 요 길로 가다가서 끊어지는 것은 고 길에 이래 서서 후유 하고 이래  섰으면은 그 길에서 끊어진 거는 아닙니다. 그 길에, 그 길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 그 길에 있지 안하고 딴 길로 이래 딴 길로 걸어 버렸으면은 그만치  탈선됐기 때문에 찾기가 어려워. 그걸 알아야 돼요.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은 이것도 뭐 시간이 많이 걸려야  되는데 다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이거는 그 속에서 빨리 가고 더디 가고.

속도로 가고 좀 더디 저속으로 가고, 이래 다른 사람은 달음질치는데 이 사람은  슬렁 슬렁 걸어갈 수도 있고 암만 슬렁 슬렁 걸어 가도 그거는 달선해 딴 길  가는 거는 아닙니다. 이것은 이 길은 빨리 가고 느리게 갈 수는 있지마는 이 길을  버리고 딴 데로는 갈 수가 없다. 이 진리는 이 진리는 더디 준행하고 또 빨리  준행하는 거는 있어도 이 진리에서 이탈된 딴 불법으로 가면은 안 된다. 이  생명은 그 생명력이 약해서 그저 깔딱깔딱하고서 이래 할지라도 생명이  끊어지면은 다시 이을 수는 없다. 생명이 끊어지면 이을 수 없고 생명이 끊어지면  그만 그 다음부더는 썩어 버린다. 요것을 요 셋은 요 셋은 느리고 빠를 수는  있지마는 거기에서 끊어지면 안 된다. 이 길 가던 것은 딴 길 가면은 끊어져  버렸고 진리는 불법 가면은 끊어져 버렸고 생명은 그 생명 연결이 끊어져 버리면  사망으로 바꿔졌고 요러니까 요거는 더디 가기는 갈 수 있어도 요 탈선은 안  된다. 요 딴 걸로 끊어지면 안 된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가 가지고서  연구를 하도록 하십시오.

 요거 뭐 간단하게 요렇게만 해 놨는데,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데 대해서는 요게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이냐? 빨리 가고  더디 갈 수는 있지마는 요 길을 바꾸면 헛일이다. 또 요 길을 바꾸면 바꾼 것만치  반드시 그만치 지금 탈선됐기 때문에 본 길로 돌아 갈라 하면 힘이 든다. 진리도  그러하고 생명도 그러합니다. 요 세 가지는 빨리 가고 더디 갈 수는 있지마는  요게서 바꿀 수는 없다. 바꿨으면 바꿔지는데 바꿨으면 벌써 바꿔진 그것을 다시  본 자리로 되돌아 가야되지 되돌아 가지 안하면은 안 되는 것이니 되돌아 간다는  것이 사람 마음으로서는 퍼뜩 되돌아 가는 것 같지마는 절대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렵습니다. 되돌아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발람이 그 길을 가고 난 다음에는 뒤에 후회해서 생명까지 낸  순교자입니다. 발람이 순교자요, 그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생명을 바쳤지마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쳐도 내나 멸망이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요 길은 탈선돼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요길은 가면 더디  가고 일찍 가는 거는 좋지마는 요 길을 이탈되면 안 돼. 진리도 이탈되면은 그  이탈됐다고 이리 갔다 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줄 알지마는 그것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가운데서 인간들이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생명도 제가 내 놨다가  받았다가 그래 할 수 있느냐? 생명도 내 놨다가 또 가졌다가 가졌다가 제  소유물같이 이 진리도 제가 가졌다가 내놨다가 할 수 없어. 진리도 자기 위의  권위가 생명의 권위와 같은 그런 권위 가졌고 이 예수님의 길도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게는 계속해야 되지 더디고 빠른 것은 그것은 있을 수 있지마는  계속해야 되지 요게서 이탈되면은 이것은 다시 복구되기가 심히 어렵다 하는  것을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탈되다 복구되면은 또 금방 복구하면  복구되는 것 같지마는 복구가 된 것이 아니라 그 복구되는 데는 얼마나 힘드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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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두 주인/ 마태복음 6장 24절-34절/ 820108금새 선지자 2015.10.28
140 두 주인/ 마태복음 6장 24절-34절/ 820107목새 선지자 2015.10.28
139 두 종류의 짐승/ 요한계시록 13장 10절-18절/ 821013수야 선지자 2015.10.28
138 두 종류의 지식/ 고린도전서 1장 18절-21절/ 820602수새 선지자 2015.10.28
137 두 종류의 증인들을 보고 온전을/ 히브리서 12장 1절-2절/ 880709토새 선지자 2015.10.28
136 두 종류의 증인들을 보고 온전을/ 히브리서 12장 2절/ 880711월새 선지자 2015.10.28
135 두 종류의 생활-가인과 아벨/ 창세기 4장 1절-9절/ 800116수야 선지자 2015.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