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생의 열매

 

1986. 11. 19. 밤 (수)

 

본문:갈라디아서 5장 16절∼2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이번 공과가 되겠습니다.

본문은, 갈라디아 5장 16절로 26절.

제목은, ‘두 가지 생의 열매’ 요절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8장 6절.

서론.

‘그리스도인들의 중생되기 이전에는 정과 욕심이 전생활을 주장하다가 중생 후부터는 성령이 생활을 주장할 때도 있고 정과 욕심이 주장할 때도 있다. 이 두 가지 생활에서 하나는 사망에 이르게 하고 하나는 영생에 이르게 한다. 우리 기독자는 내 언행심사의 행동할 때에 이 두 주관자를 먼저 구별하여 동하여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말입니다. ‘동하여야 한다. 세상은 모르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 사는 우리의 구원과 멸망은 여기에서 발원되기 때문에 생사의 분기점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죽고 사는 그 갈래길이라 말입니다.

본론.

첫째. ‘성령도 우리 마음 안에서 부절히 인도하시고 정과 욕도 우리 마음 안에서 부절히 유인한다.’ 유인한다 말은 우리를 꾀워서 인도한다 말입니다. ‘유인한다.

그때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정과 욕의 유인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육체의 정과 욕을 따라 살게 되면 성령의 인도는 실패된다. 우리는 항상 이 두 인도를 구별하여 영원히 죽고 사는 것을 확정지워 살아야 한다.’ 둘째. ‘이 두 소욕과 세력이 싸워 우리 구원이 지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 현실마다 우리의 영접함에 따라 한 인도는 살고 한 인도는 죽는다. 여기에서 영원한 사망과 영생은 불변적으로 결정된다.’ 셋째. ‘두 인도를 마음 안에서 구별이 못 되었을 때에는 그 결과가 환하게 나타나나니 정과 욕의 인도는 첫째 음행, 둘째 온갖 더러운 것, 셋째 호색, 넷째 우상 숭배, 다섯째 술수, 여섯째 원수 맺는 것, 일곱째 분쟁, 여덟째 시기, 아홉째 분냄, 열째 당 짓는 것, 열한째 분리, 열두째 이단, 열셋째 투기, 열넷째 술취함, 열다섯째 방탕한 것들이다. 성령의 인도는 첫째 사랑, 둘째 희락, 셋째 화평, 넷째 오래 참음, 다섯째 자비, 여섯째 양선, 일곱째 충성, 여덟째 온유, 아홉째 절제이다.

우리는 심중 원인에서 찾지 못해 실패되었으면 결과에서라도 심각히 찾아 다음 심중을 삼가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문답에, 첫째. ‘중생 전에는 심중 인도자가 무엇이뇨?’ 답에, `정과 욕입니다.' 욕심이라 말입니다.

둘째. ‘중생 후는 심중 인도자가 무엇이뇨?’ 답에, `성령과 정과 욕입니다.' 셋째. ‘멸망과 영생은 어디서 결정되느뇨?’ 답에, `심중 인도자 선정에서 결정됩니다.’ 넷째. ‘두 인도를 심중에서 구별 못 했을 때에는 어디서 구별할 수 있느뇨?’ ‘그 행동의 결과에서 판명할 수 있습니다.’ 녜, 요거 다음 공과입니다.

반사 선생님들은 이 공과를 가지고 첫째 자기가 여게 대한 충분한 지식을 다 파악해서 확실히 알아지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야 되겠고, 또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자기 구원에 대한 복음이니까 충분히 알도록 연구를 하고, 그다음에는 요 사실을 자기가 믿나 안 믿나 해서 확실히 믿을 만한 도인지 아닌지 그걸 확정지워서 확실히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그대로 실행을 할라고 애를 써서 실행을 자꾸 연습해 가지고 해야 할 것입니다. 실행을 하면 거기에서 자신이 반드시 실행한 것만치 변화가 됩니다.

우리는 항상 거짓부리로 스스로 속기 쉽습니다. 자기가 참 아는지 거짓부리로 아는지 하는 그 실상은 믿어지는 데에서 안다는 증거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안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자기가 알면 반드시 믿어지게 됩니다. 믿어지지 안하면 안다는 것이 거짓부리요 아는 대로 바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내 이 진리를 바로 아나 모르나 하는 그것은 자기에게 믿어지는 믿음이 생겨지나 안 생겨지나 그걸 가지고서 알게 됩니다.

또 자기가 믿는다는 것도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에 이거는 무슨 과학적으로 무슨 물질이나 나타나지 않습니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참 믿는지 안 믿는지 하는 그 여부는 행동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그대로의 행동이 되지 안하면 자기는 믿지 않는다는 것으로 판정을 지워야 될 것입니다.

또 자기가 행하기를 바로 했나 안 했나? 이 바로 행했으면 반드시 행한 대로 자신이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 변화되는 것으로 자기 행함이 바로 됐나 안 됐나 하는 것을 심사해야 되겠습니다.

이래서, 자신이 이 복음의 말씀으로 인하여 변화가 되기까지, 변화가 되기까지 행하는 행함이 있도록 우리가 스스로 속이지 말고 노력을 해야 되겠고, 또 행함이 필연적으로 있을 수 있는 그 믿음이 속에 생겨지도록 우리는 노력을 해야 되겠고, 또 자기에게 믿어지는 믿음이 생겨지도록까지 이 진리를 바로 알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반드시 바로 아는 것만치 믿어지게 되고 믿어지는 것만치 행해지게 되고 행하는 것만치 말씀대로의 사람으로 성화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알아지는 것이 인간 주관편에서는 그 사람의 노력 여하와 또 그 사람의 그 주관에서 알아지는 것으로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람 보기에는 그렇지마는 실상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것만치 그 사람이 알라고 애를 써서 알게 되고 또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알려 가지고 믿어지게 하시는 것만치 믿음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또 믿어지는 데서 그만 두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만 두는 사람은 믿기만 하지 행하는 데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다음에 믿는 대로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때에 행하게 됩니다. 또 행한 대로 성화가 되도록 하실 때에 성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 보기에는 사람이 진실되게 노력을 한 그 노력의 결과로 된다 이렇게 보여질 만치 자기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노력이라는 것은 인간 주관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객관의 그 은혜에 인간은 피동되어져 가지고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은 이 도리를 알라고 애를 쓰는데 그 사람은 알 그 소욕이 생겨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그만치 버림을 당했다 그렇게 보면 틀림없습니다. 사람이 알라고 애를 쓰고, 믿을라고 애를 쓰고, 행할라고 애를 쓰고, 자기가 변화가 될라고 애를 씀으로 되는 것 같으면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가치도 사람만치 있습니다. 사람의 힘만치, 사람이 자기 힘 이상은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사람만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구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보기에는 하나님이 은혜로, 공으로.

은혜를 주시는데 하나님이 공으로 은혜 주시는 그 은혜를 사람이 받는 데에는 꼭 요렇게 가르칠 이 중요성을 자기가 깨달으면 그 학생을 가서 인도할 때도 말할 수 없는 간곡한 그 필요성과 중요성과 또 강하게 갈망하게 되는 강요성이 있게 되기 때문에 그 학생에게 가서 그 능력 가지고 말할 때에 학생도 다 인도를 받아 가지고서 잘 나올 수 있는데, 벌써 자신이 ‘오늘 인도해 가지고 오늘 오면 이거 뭐 가르치면 그저 가르치라고 하는 거니 가르치고, 또 주일날 오니까 내가 반사이니까 중얼거려서 뭐 하지. 한 십오 분 중얼거려 때우는데 뭘 가르칠까? 또 가르칠 무슨 중요성이 뭐 있나, 뭐 가르치나 안 가르치나?’ 이렇게 벌써 자신이 거게 대해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알아야 되는 거, 요대로의 요 구원을 받지 안하면 큰일난다는 그 중대성을 자기가 모르니까 학생들을 가르칠 용기가 안 나고 필요성을 느끼지 안하고, 가르칠 필요성을 느끼지 안하니까 ‘오늘 하루 나오나 안 나오나 뭐 출석하면 좋지마는 안 해도 별게 없다’ 이라는 데에서 다 이거 힘을 떨어뜨리고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주일학교가 이 말로는 뭐 세계 최대의 어린이 교회라고 이렇게 참 하나님이 큰 축복을 해서 이랬는데 오늘 지금 지체하고 이렇게 자꾸 성장되지 안하고 그저 항상 팔천에서 구천 조금 못 되고 구천 고개를 요새 지금 요새는 못 넘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있는 그 이유는 반사 선생님들이 공과를 그저 지내 보내고 이 공과가 자기 복음이요 자기 구원과 멸망이라는 이 중대의 복음이라는 것을 자기가 깨닫지 못하고 이 복음을 자기 복음으로 받아서 이 공과로 자기 구원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전할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 공과로 확실히 유익을 봤다면, 확실히 유익을 봤다면 다른 사람에게 전할 그런 책임성도 느끼게 되고 또 상대방을 대할 때에 ‘이 중한 것을 네가 배우지 안하고 어데 이보다 더 귀한 게 있어서 그러냐?’고 하는 강한 그 강권하는 힘이 있을 터인데 첫째는 공과에 대해서 자기가 은혜를 받지 못한 거게서 이 모든 주일학교가 부흥되지 않는 원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번 공과를, 참 이거 너무 세상이 자꾸 세상은 과학으로 망합니다.

과학으로 잘 사는 줄 알아도 과학으로 망합니다. 과학이 들어서 인간에게 생활 필수의 것을 주는 것만치 그놈을 취할라 하니까 하루 그것 취하는 소비세, 소비하는 소비세를 낼라고 하니까 저는 죽자 살자 해도 그것밖에는 못 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조금 저급의 생활을, 그렇게 좀 과학에 필요한 것을 다 이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생활비를 만일 한 천 원 가지고 된다 하면은 미국 사람들은 만 원 해야 됩니다. 우리 십 배 더 편리한 걸 살고 있습니다. 편리한 것 살아봤자 그래도 송장되고 죽을 때 보면 죽습니다. 늙을 때 되면 늙습니다.

그놈 소비세 내느라고서 기도할 시간도 없고 성경 볼 시간도 없고 또 그놈 경쟁해 가지고서 그거 해 가지고서 좀 더 수입 많이 할라 하니까 배암의 지식 그거 취하느라고 거게 다 들다 보니까 이제 다 장로의 아들, 집사의 아들, 목사의 아들들이지마는 그 사람들의 신앙이 떨어져서, 지금 그걸 자식 공부시킨다고 뭐 세계의 과학 노벨상을 받도록 할라고 하니까 그런 과학자, 대과학자를 만들라 하니까 얼마나 뒷바라지 하는 데에 골탕을 쥐먹었겠소? 이래 공부해 시켜 놓으니까 그 노벨상 받고 난 다음에는 ‘창세기에 엿새 동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하는 그거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여러 수 억억만 년이 걸렸는데. 그런 소리를 지금 교회서 가르치고 있다. 이거는 우리 이 과학 노벨 수상자들과 과학 모든 연구의 과학소에서 이것을 법원에다가 송사를 해 가지고 정식적으로 그런 가르침을 하지 말라고 해야 되겠다. 왜? 그거 가르치니까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했다고 하지 과학은 여러 억억만 년 됐다 하지 이러니까 과학과 대립돼지니까 이 학생들이 과학 연구하던 모든 의욕이 다 깨지고 마니까 그라면 과학이 뒤떨어져서 우리 나라는 망한다.’ 이래 가지고 지금 송사를 할라고 했다 하는, 그거 다 목사들이 장로들이 집사들이 죽자껏 돈벌어 가지고서 자식 공부시킨 그 결과가 그것입니다. 여러분들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이제 반사들이 산 반사가 생겨야 됩니다. 척 스미스 목사라 하는 그 목사님이 먼저 그때에, 나는 만나지 못했는데 한국에 와 가지고서 설교를 하는데, 제가 설교하는데 미국 목사 쳐놓고 설교하는 데서는, 내가 오래 돼서, 스톡 박사라고 하는 그분이 미국 그 칼빈주의 신학교 윤리학 교수인데 그분이 설교하는 것이 성경에 제일 깊이 알고 있읍디다. 미국 사람으로 온 사람 중에는 그 사람이 제일 깊이 알았습니다. 깊이 알고 그 설교한다는 걸 느꼈고, 성경을 가지고 성경적으로 가르치는 데는 그 척 스미스 목사가 제일 성경을 이렇게 넓게 알고 성경 가지고서 가르친다는 것을 제가 그 테이프를 가지고서 들었습니다.

이 모두 다 학자들은 미국 가야 뭘 많이 배우는 줄 알고 하는데 미국 삼 년 지내고 난 다음에 사람 안 버려 오면 다행이라 하는 것이 그게 통계입니다.

그 목사가 말하기를, ‘양을 여러 마리 먹이지 말고 한 마리라도 아주 건강한 양을 만들어라. 건강하고 좋은 양을 만들어라. 좋은 양, 건강하고 좋은 양 한 마리 있으면 건강하고 좋은 양은 반드시 새끼를 잘 낳게 된다. 또 건강한 새끼를 낳게 된다. 그러면 건강한 양 한 마리가 건강한 새끼 낳아 잘 낳아 이라면 자꾸 건강한 것만 낳으면 그 목장에는 건강한 양만 있고 소만 있기 때문에 그 목장은 잠깐 크게 부강하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한 교인이라도 그 교인을 건강한 양을 만들어라.

살찌고 건강하고 병들지 안한 것, 이런 병 도덕의 병도 없고, 경제병도 없고, 사회병도 없고, 또 교만병도 없고, 불신의 병도 없고, 비겁의 병도 없고, 월권 병도 없고 모두 다 온전한 사람을 만들어라. 한 양이라도 온전한 사람 만들어라.

온전한 사람을 만들게 되면 그 사람은 또 온전한 사람을 만들어 가지고 온전한 사람을 전도해서 온전한 사람 만들게 된다. 그러면 한 온전한 사람은 그 밑에 제자를 온전한 사람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 나중에 온전한 사람 온전한 사람 만들어 내면 얼마 안 가서 그 교회는 크게 부흥된다.’ 하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대단히 제가 은혜를 받았고 또 보지 안했으나 그 목사님에게 존경을 하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오늘 우리 서부교회도 반사들이 요 공과를 가지고서 자기가 실천을 해 보면 될 터인데 처음에 말씀을 듣고 이렇게 해 가지고 실천하지 안하고 이래 들을 때는 힘이 났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하기를 “이 말씀은 들으면 입에는 꿀과 같이 달고 배에는 쓰다” 이랬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는 다 좋지마는 실행할라 하면 심히 고통이 됩니다.

이러니까 우리 주일학교가 처음에 이 복음을 들을 때는 모두 다 듣고서 기뻐 즐거워서 뭐 반사들이 있는 대로 다 벌어 가지고 다 토큰도 사고 전도비에 다 바쳐서 주일학교에 전심 전력 기울였습니다.

이라다가, 그때는 그라니까 주일학교가 부흥이 돼서 어찌 됐는지 모르게 그렇게 많이 부흥이 됐는데 그다음에 반사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을 했으면, 자꾸 실행을 하면 여러 배 여러 백 배, 이러니까 자꾸 자기가 조그만한 보수 받아 가지고 복음에 다 바치고 이 말씀대로 살게 되면은 나중에 그 사람들이 다 사장이 됐을 것이고, 다 부자가 됐을 것이고, 다 높은 지위를 다 차지할 것이고 전부 이리 됐을 터이니까 ‘봐라. 봐라.’ 이렇게 하고 자기도 해 보니까 확실히 유익을 봤기 때문에 자신 있게 다른 사람에게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행하지 안했기 때문에 실제 유익을 보지 못한 정도에 있으니까 우리 반사들이 말뿐이지 이 실상 유익 없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라 하니까 무슨 힘이 나옵니까? 이래서, 제일 고장은 이 반사들이 이 공과를 업신여깁니다. 이 공과를 그냥 집어 던집니다. 반사 가운데에 요절 외운 반사를 찾으니까 요절 외운 반사가 몇 안 됩니다. 그래 가지고 여러분들이 뭐할 겁니까? 저는 요절도 안 외워 놓고 뭐 학생들에게 요절 외우라고 요절지를 돈 들여 자꾸 박아 가지고 주기는 뭣 줘? 그런 외식하는 행위를 우리가 안 해야 됩니다. 그 반사 선생님들, 양심에 가책 안 됩니까? 자기도 요절 외우지 못하고 학생들 어린 학생들에게는 ‘외워라, 외워라, 요절 외워라’ 이래 가지고 요절 뭐 할라고 베껴서 줍니까, 주기를? 그거 하나라도 요절 외워 보면 ‘참 요절 외워 보니까 참 은혜가 되는구나. 참 유익하다. 필요하다.’ 여게서 가르친 것을 산에 가 가지고 재독을 열 번도 듣고, 어떤 사람은 열 번도 듣고 귀에 꼽고 다니며 자꾸 재독을 듣고 들으니까 눈이 살망하게 뜨이는 것이 깨닫게 되고, 또 개닫고 난 다음에 자기가 그대로 행해 보고, 행하니까 현저히 놀랄 만치 복이 오고, 현저히 놀랄 만치 복이 와.

오늘 나 말 들었는데 그전에 여기 어떤 구역에 그림 그리는 사람 하나 있는데 내가 그 사람 그림 그리는 것을 그리지 말라고 했어요. ‘야, 예술가 쳐놓고는 안 빌어먹는 사람 없다. 너 뭐한다고 그런 거 하고 있노, 좀? 차라리 뿍뿍 노동일 하지 그 그림 그리는 거 만날 한다고 그라느냐?’ 이래도 그 사람에게는 무슨 천직인지 꼭 그림을 그려요.

그림을 그리는데 그림을 가르치면 이 남학생들 여학생들 이런 것 데려다 놓고서 이래 가르치는데 내가 그걸 봤어. ‘저게 그림을 그리는데 거게서 이성면에 깨끗하게 하고 저게 방종하지 안하고 사람을 속이는 기만이 없고 진실되이 하면은 저것도 하나님이 붙들고 뭐 할란지 모르겠다’ 내가 그걸 좀 더러 살펴봐요.

살펴보니까 성경을 어떻게 열심히 읽는데 아이를 이름을 짓기를 뭘 마가복음 읽을 때나? 누가복음 읽을 때 낳은 거는 누복이. 누가복음 읽을 때 낳은 거는 누복이라 하고, 또 사무엘상 읽을 때 또 삼상이라 하던가 뭐 그래 또 이름을 짓고 , 그게 아무 다른 그런 게 없고 아주 깨끗하게 하고 자기 부인도 열심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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