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운동-두 이치

 

1986. 8. 14. 목새벽

 

본문:사도행전 27장 22절∼26절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신구약 성경에는 교훈한 말씀도 있고, 또 어떤 지나간 역사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신 말씀도 있고, 또 거게는 약속하신 말씀도 있고, 또 미래사를 예언해 놓은 말씀도 있습니다.

예언이라 말은 하나님의 비밀을 나타낸 것이 다 예언인데 오늘 아침에 지금 내가 예언이라고 말하는 말은 미래사를 미리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그런 말씀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총합해서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구원을 바로 이루게 되느냐?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해 나갈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도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도라 말은, 길 도(道)자라는 그 한문 글자 길도(道)자 도라 말인데 우리의 갈 길을 가르쳐 주신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어떻게, 사람에게 대해서는 어떻게, 또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물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렇게 모든 그런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도리(道理)입니다, 도의 이치. 걸어가는 이치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신구약 성경을 대할 때에 언제든지 이 말씀은 내게 무슨 교훈을 하는 교훈인가? 이 말씀은 무슨 교훈을 나에게 하고 계시는가? 이 말씀은 나와의 무슨 계약한 계약을 알려 주고 있는 계약의 말씀인가? 또 이 말씀은 내가 모르는 미래사, 또 은밀한 것 그런 것을 나에게 어떻게 알려 주고 계시는가? 이 말씀은 내게 대해서 무슨 교훈을 하고 계시는가? 이 말씀은 나에게 무슨 지금 주의를 시키고 또 소망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며 힘을 쓰라고 하시는 것인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한 이야기처럼 이래 듣지 말고 이 말씀은 천지는 변해도 변치 않는 실상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전부 이 말씀이 이대로 실상이 될 말씀인데 실상될 그 말씀이 우리에게 이치로 나타났기 때문에, 마치 비유컨대 학교에서 공부를 배울 때에 수학을 배운다면 쌀가마니를 계수하는 것이나, 또 무슨 과일을 계수하는 것이나, 무슨 이 지리의 면적을 계산하는 것이나 다 계산 법은 같습니다. 같으니까 그 계산 법을 이것에게도 그 계산대로 하면 그 계산이 바로 되고 저것에 대해서도 그 계산대로 하면은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있는 거와 같이, 그러면 그 계산하는 이치를 콩에도, 곡식에도, 짐승에도, 면적에도 어데든지 그 계산법 가지고 하면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은 천인 만인이 이 이치를 다 써서 이 이치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에 기록한 말씀은 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내게 대한 이치를 가르쳐 주신 말씀이라.’ 이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성경을 보고 연구하면 우리의 구원 이루는 데에 크게 유익이 되고 성공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와 관련 없는 하나의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구원이 되지를 못하고 이 말씀대로 돼지니까 그 사람에게는 심판이 되고 맙니다. ‘네가 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듣고 이렇게 네가 읽었는데 왜 네가 이렇게 했느냐?’ 하는 심판 마련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하면 이 말씀이 자기에게 구원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정죄해서 심판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예사롭게 지내가지마는 한번 들리고 보고 접한 그 일이 절대로 그대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밤에도 그 공과에서 하나님이 모든 창조한 것을, 큰 이 울을, 큰 울, 큰 공간, 둥그러니 큰 공간 큰 울 이런 것을 셋을 만드셨는데 그 모든 것은 다, 그 셋이 어데 담겨 있는 게 아니고 셋을 담을 만한 그런 넓은 것이 있고 더 큰 것이 있어서 셋이 어떤 하나에 담겨 있는 그런 존재가 있어 가지고 셋이 있는 게 아니고 그 셋만, 아무 것도 없는데에 그 셋만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그 세 개만 이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세 개는 어데 있느냐? 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없을 무(無) 아무 것도 없는 데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라고 그 다음에 그 안에는 뭐 영계는 영질을 가지고, 영질, 바탕 질(質)자, 영질을 가지고 수많은 것들을 다 창조했고, 또 이 물질계에는 물질을 가지고 수많은 것들을 창조해서 그 창조된 것도 뭐 수가 우리 수로써는 셀 수 없을 만치, 억억억억억이라고 자꾸 그래서 그 소리를 뭐 며칠을 해도 모자랄 만치 그만한 많은 숫자를 하나님이 지으셨고 또 그 공간의 넓기도 그렇게 넓습니다.

천문학자들이 이 우주의 공간이라는 이 공간이 얼마나 넓은가? 그것은 어떻게 계수 할 수가 없어서 이 광선의 속도로 가면은 얼마나 걸릴란가? 그런 계수를 해 가지고 말하고 있지마는 그들이 다 인간을 초월한 이런 모든 숫자이기 때문에 암만 그들이 말해 봤자 짐작만 하고 있고 크다 넓다는 것만 말하고 있는 것이지 그 정확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존재들을 만드셨는데 만들어진 그 하나하나가 또 얼마나 세밀하게 구비하게 수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하나 만들었습니다.

하나 예를 들면은 아주 조그만한 그런 아메바 같은 그런 세균, 바이러스 같은 그런 세균, 아주 작은 그 세균도 사람들이 그걸 덩치로 있는 줄만 알았지마는 그 세균을 해부하면은 사람을 해부해서 본 거와 마찬가지로 그만치 복잡하게 해서 모두 다 개체적인 그런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래서,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세포라는 그 세포가 이거 다 모두 각각 생명을 가졌다 이렇게는 알지마는 그 세포가 개체적인 완전 구비한 체계와 모든 지체와 모든 요소들이 사람이나 비슷한 그런 구비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하는 그런 말은 지금 아직까지 나오지 안했지마는 좀 있으면 그런 말들이 다 나올 것입니다.

이렇게 세밀하게 복잡하게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만드실라고 설계를 할 때에, 만드실 설계를 할 때에 무슨 몇천 년 몇만 년이 걸린 것이 아니고 또 설계해서 며칠까지의 될 것을 설계해 놓고 그 다음에 또 설계하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단번 예정하셨습니다. 그 모든 걸 단번에 설계해서 딱 예정했다 말이오. 그러면, 그분의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세밀한 걸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요새는 또 말하기를 뭐, 한 사람 머리에 컴퓨터가 천억이 들어 있다 이런 말이 나왔다 하는데 그거 다 미래사를 사람들이 추측하고 추상하고 해 가지고 하는 말들이지마는 대개는 그것이 다 현실화됩니다. 왜 추측 추상이라 하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있는 그 추측 추상하는 그 모든 요소들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 그말이오.

하나님이 그것을 만드셔 가지고 사람에게 추측할 수 있고 추상하고 할 수 있고 추론할 수 있는 그런 것을 하나님이 만드셔 만든 그것들이 다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자꾸 추측 추상한 것이 몇천 년 지나가면 그것이 실상화돼서 현실로 전개되고 전개되고 하는 그런 것이 많습니다.

혹 그 신문에 뭐 그런 것을 보도하는 그런 면이 없습니까? 뭐라 하노, 그런 면? 미래사를 그렇게 혹 사람들이 공상으로 추상으로 추론으로 해 놓은 그런 부록을 뭐라고 말합니까? 신문에 그런 거 하지 않소? 신문에 그런 거 뭐 새 세계라든지 미래의 세계라든지 미래의 무슨 과학이라든지, 그렇게 미래에 뭐라 하는 거 아마 그런 말 붙여 가지고 그런 것이 나올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세밀하시고 또 전지하시요. 그 예정이라면은, ‘예정이라면은 간추려서 그 윤곽만 예정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있는데 윤곽만 예정했으면 윤곽만 됐지 그 외에 딴것이 뭣이 되겠습니까? 윤곽 예정을 바로 했다고 하면은 그 안에 있는 세포 예정은 필연적으로 다 함께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깨달은 데에 이원론을 말하지 안하고 일원론을 말합니다. 원인은 하나뿐이다. 하나뿐이라 말은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원인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해서 일원론을 말하고 있고, 이 배암은 말하기를 이원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또 존재된 것도 있고 다른 것이 존재 원인 되는 것도 있다.

이래서 저 서울에 ○○○교수가 ○ 대 교수인데 그분이 ○○○씨의 아들인데 내가 삼각산에 집회 다닐 때 그때 ○○○씨라고 하는 그분이 그 삼각산에 자기 기도실을 지어 놓고 거기 있다 말을 들었습니다. 그이 아들이 미국 가 가지고 신학 논문을 낼 때에 이원론이라는 그 제목 가지고 하니까 모두 다 박사들이 ‘이거는 참 박사 줄 만하다’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말을 들었습니다.

그 이원론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선의 원인은 하나님이시지마는 악과 죄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고 그것은 무슨, 그분이 쓴 거는 뭐 마귀라고 했는지 뭐라 했는지 이래서 이원론을 말하는데 그것은 다 마귀들이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지음받았다고 그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이랬는데, 이원론을 그들이 보고 인정을 해 가지고 박사 학위를 준 것은 ‘하나님이 악이야 만들어 냈겠나? 죄야 만들어 냈겠나?’ 이러기 때문에 그런 것을 인정했는데 악도 죄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성경에 말하고 있고 또 하나님이 악을 못 만들면 그는 온전한 자는 아닙니다.

이래서 지난 밤에 공과 그런 공과는 여러분들이 간추려서 그렇게 제목만 내놓은 것이니까 그것을 뭐 뜯어 먹을라면 한 달도 평생도 영원히 먹어도 양식이 남습니다. 양식이 남는다는 말은 또 생각하고 생각하고 하면 그와 자기와의 하나가 되어지는, 자꾸 하나님화되고 성화되고 이렇게 완전화되어지는 이런 은혜를 우리가 얼마든지 계속해서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한번 읽어서 기억에 지내 보내 버리면 헛일이오. 자꾸 생각하면 이제 하나님이, 알기를 원하니까 문서를 기록한 그것을 보고 자꾸 생각하고 또 성경을 여게 저게 봐 가지고 종합해서 생각하고 이래 하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보이는 문자 이면에 있는 성신의 감동이 인도하는 것을 자기가 자꾸 연구하고 찾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 생각으로 들려지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기도라 그렇게 말하고 또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해 가지고 뭐 보이는 데서 보이지 않는 거 또 현재에서 미래 이것을 자꾸 찾고 있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 모든 것을 이렇게 연구하고 궁구하면 이 우주와 영계의 이 모든 존재라는 것은 철두철미하게 조직적이어서 물이 새지 안하고 하나도 빈틈이 없어 변동할 수 없도록 다 그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있는데 그 가운데 전체는 변하지 안하고 그대로 나아가고 있는 그 가운데 우리 사람이 끼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거는 전체가 움직이는 그 전체 움직임과 나의 움직임이 일치가 되도록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요, 또 이 세상 지식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영원한 역사의 정반대인 배치돼서 멸망하도록 해 놓은 것이 그것이 세상 지식의 이치들인 것입니다.

이번에 사도행전 27장으로 28장까지 보는 데에도 거게 가만히 읽어 보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이 자기 신앙 양심에게 알려 주고, 받아서 하는 그 영감이 있는 것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게 영감받아 가지고 영감대로 생각을 하고 영감대로 말했고 영감대로 행동했고 영감대로 처리를 했고, 또 그 배 안에도 또 두 편입니다. 한 편이 아니오. 바울은 영감 따라서 그렇게 살고 행동하고 사람에게 관계를 가지고 바른 거 하고 행동하고 이렇게 하는데 또 바울의 정반대되는 운동이 또 그 배 안에 있다 말이오. 반대되는 운동이 배 안에 있어.

그러면, 거게서도 또 우리가 구원 이치를 생각해 보면은 두 지식이 있다. 두 지식이 있다. 두 세력이 있다. 두 지도가 있다 하는 것을 거기서 발견할 때에 그것이 지중해를 가고 있는 그 지중해는 곧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와 같다. 지중해는 우주와 같다. 그러면 또 거기에 바울이 타고 가는 그 배는 이 지구 땅덩어리와 같다.

그러면 이 지구 땅덩어리는 하나만이 아니라 이 지구에는 선과 악, 또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의 도리와 사람을 미혹해서 멸망시키는 멸망의 그 모든 운동들, 이 두 운동이 함께 있다 하는 것을 요게서 또 조그만한 범위에서 찾아 가지고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있는데, 그러면 그 배의 운명은, 배의 운명은 어데 있느냐? 그 배의 운명은 지중해라는 넓은 바다의 작용에 따라서 배의 운명이 좌우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우주라는 우주가 지금 어떻게 도느냐? 우주의 지금 움직임에 따라서 이런 것들은 다 모든 그 생사와 그 복리, 복과 화 이런 것들이 다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또 이 배가, 배가 어떻게 됨에 따라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운명은 이 배에 속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기보다 큰, 자기보다 큰 이 사회라는 것이 있고, 또 사회라는 그것보다 큰 이 세계의 인류라는 것이 있고, 인류 이거 다가 아니라 이 지구보다 큰 이거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다 작은 것이 큰 데 속해서 살고 있고, 작은 것이 큰 데 속해서 살고 있고, 또 큰 것들이 또 작은 것들로 인해서 그것이 다 존재하고 그것이 성장돼 나가고 있어서 이렇게 상호 관계를 가지고 이렇게 모두 이루어 나가는데, 이 악령이 주는 교훈 이 모든 교훈들은 이것은 자꾸 큰 것을 버리고 차차 차차 적은 데에 속하도록 만들고 이래 가지고 마지막에는 그걸 똘똘 뭉쳐서 자기라는 존재 속으로 다 들여서 자기 위주 자기 중심으로 이렇게 만들어 버리고, 또 자기라는 그 속에 들어 가지고는 자기에게 어떤 사람은 물욕, 어떤 사람은 명예욕, 어떤 사람은 안일욕, 어떤 사람은 행락욕, 어떤 사람은 아주 쓰지 못할 그 정욕, 하나의 음욕 이제 그런 거 자꾸 그저 하나의 그 속에 한 요소가 되어지는 조그만한 거 그것으로 자꾸 이끌어 가지고 사람을 자꾸 좁게 만들고 작게 만들고 적은 데 속하게 만들고 이래 가지고 마지막에는 아무 데로도 나가지 못하도록 하나에게 딱 밀어붙여 가지고 딱 거게 속해서 딱 가둬버리는 것이 이 세상 지식인 것입니다.

세상 지식들이 큰 걸 말하고 이라니까 어북 큰 거 말하는 줄 알았지마는 그것은 자꾸 세상 지식은 사람을 축소시켜서 자꾸 감옥으로 가두고 있다. 이래 가지고 마지막에는 가두고 가둬서 자기 속에도, 자기에게도 못 마땅한 것이 많고 자기에게 마땅한 것은 그저 한 지체에 지나지 못하는 한 지체에 속해서, 한 지체 말이오. 이 사람 지체, 손이나 발 이런 거 지체 아닙니까? 한 지체에게 속해 가지고 한 지체의 욕심에게 전부 귀속되어서 사람이 그만 한 지체가 되고 만다.

이렇게 축소시키는 것이 세상 지식이요, 악령이오.

하나님의 교훈은 그렇지 안하고 자기를 자꾸 키워서 자기와의 관계가 자기 옆에 있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있다. 이래서 자기라는 자체를 이 사회에 접해 가지고 사회와 연결을 시키도록 이렇게 하고, 또 이 사회와 접해 가지고 이제는 전인류와 연결해서 인류와 관계되는 그런 관계를 가지도록 자꾸 확대를 시키고, 인류와 관계하다가 마지막에는 사물과 관계하고, 사물과 관계하다가는 이 우주와 관계하고, 이 우주와 관계하다가는 이제 영계와의 관계 하고, 영계와의 관계를 자꾸 확대해서 넓혀서 자꾸 이래 나가다가 마지막에는 자존자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련을 시켜 가지고 지극히 크신 유일하신 하나님과의 모든 크고 작은 역사들이 다 그분과 존재해서 거게서 연결돼 가지고 나오는 이것으로써 완전이 되는 것이요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영계의 것과 물질계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고, 홀로 자존하신 그분이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창조하신 그분과의 관계가 되어서 그분의 통치에 속응해서ㅡ거게 통치에 속하고 거게 응해서 말이요ㅡ통치에 속응하는, 왕의 직책을 우리가 맡았다 말은 이 단일 통치에 우리가 속해 가지고 단일 통치대로 내가 모든 존재에 움직이는 이 통치를 그와같이 하도록 그렇게 이래 하는 직책을 우리가 가져서 우리를 가리켜서 왕이라, 왕이라 말은, 그리스도의 모형을 만든다는 거는 그리스도는 제사장, 선지자, 왕인데 우리를 왕직을 만들고 우리를 또 선지직을 만들고 제사장직을 만들고 이렇게 해서 자존하신 한 분으로 더불어 연결이, 연합이 되고, 또 그분에게 피동이 되고, 또 그분에게 속하고, 또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에게 또 인도를 받아, 영원 자존하신 한 분이신 그분의 인도를 우리가 받도록 우리 사람이 알 수 있게 이렇게 나타내서 그려 준 거, 그림 그리듯이, 도면 그리듯이, 우리 의 갈 길을 도면 그리듯이 그려 준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요, 이 안에 또 무한한 세밀한 세부까지를 그려서 우리 개인 개인이 요래야 되나 요래야 되나 하는 그런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구비하게 가르쳐 준 그 지도, 그 도면, 그 인도, 그 길 그거는 무한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무한이라 하는 것을 성령이 우리에게 은밀 의지로 무한히 가르쳐 주고 있다. 이러기 때문에 거게 속해서 살면 영생이요 완전이 되는 것인데 이렇게 이 모든 것이 다 조직적으로 물샐틈 없이 다 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이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데 자기가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실상을 자꾸 행해 나가면 보이면서 모든 것이 철두철미한 이 절대성을 가진 이 조직과 이 단체와 이 움직임 속에 자기가 있는데 자기 조그만한 먼지 같은 존재가 거기를 반항하고 거게 대항해 가지고는 그거는 죽을 수밖에 없고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것을 나중에 아는 것이 차차 차차 도를 알아서 도가 통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게 보면, 이 안에는 운동이 두 운동이 있다. 두 운동인데 한 운동은 말하자면 가까운 것을 보고 멀리는 보지 못하고, 이러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위주로 하는 그 운동이 되고 운동이 있고, 하나는 보이는 거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거게 따라서 살아야 된다는 그 운동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미항이라 하는 데서 떠나지 말자 여게서 떠나면 지금 물건과 사람의 생명까지도 다 위험하게 된다. 떠나지 말자.’ 하는 것은 바울의 지도는 보이지 않는 그 이면에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인도하시는 그 인도를 따라서 말을 했지마는 그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듣지를 안했습니다.

안 하고, 그 배에 주인되는 선주와 사공, 사공은 배를 부리는 사람이요 선주는 배 주인인데, 선주와 사공의 말을 다 권위 있게 들었지 바울의 말을 권위 있게 듣지 안하니까 바울의 말을 다 반대하고 그들의 말을 들었다 말이오.

듣고 따라가니까 어찌 되느냐? 따라가니까 아주 순풍에 돛을 달아서, 아주 순풍이 부니까 잘됐다고 이렇게 하면서 바울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대번에 ‘네 말이 틀리지 안했느냐? 보라 이렇게 이런데 우리가 거기 있으면, 우리가 큰 불편한 자리에서 겨울을 지낼라고 했으면 우리에게 큰 손해가 있지 않겠느냐?’ 그때는, 겨울 되면은 바다가 얼음이 얼고 이라니까 가지를 못하고 겨울을 지내고 난 다음에라야 가고, 그때는 이제는 돛을 달아 가지고 이 바람을 따라서 이 배가 가고 노를 저어 가지고 가는 그런 옛날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한 근 이천 년 지내갔기 때문에, 그랬는데, ‘우리가 네 말 듣지 안하고 선주와 선장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순풍을 만내서 우리 목적지에 잘 가게 되지 않느냐?’ 이렇게 말했지마는 그렇게 된 그 모든 운동의 순풍이 어데까지 끌고 갔더냐? 끌고 간 것은 저 지중해 한 가운데까지 끌고 가 버렸어.

지중해 한 가운데까지, 이리도 저리도 갈 수 없이 지중해 한 가운데까지 끌고 가 가지고 거게서 이제 바람이 일어납니다. 거게서 큰 폭풍이, 아주 큰 바람이 십사 일 동안이나 계속해서 불고 보니까 별도 안 보이고 해도 안 보이고 달도 안 보이고 밤낮 십사 일 동안이 꼭 밤중같이 이래 가지고 바람만 불어서 이래 가니까 그 사람들이 뭐 살 기망이 하나도 없었다 말이오. 살 기망이 하나도 없고, 이라니까 물건도 다 바다에 던져 버리고 또 나중에는 안 되니까, 배가 기계 없으면 배 못 쓰지 않습니까? 기계도 다 던져 버리고 그저 사람들만 있는데 아무래도 이 나무로 만들어 놓은 나무 조각 배가, 이 배가 지금 깨지겠으니까 그들이 있는 뭐 거게 있는 밧줄을 가지고 배를 댕기는 대로 댕기고 뭐 있는 대로 해 가지고 그뭐 사람들이 거의 죽을 지경이고 뭐 얼마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여게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그때에 그런 형편이 있었던 하나의 지나간 한 역사의 하나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렇게 보는 사람 있는데 이렇게 봐서는 안 된다 그말이오.

이 신구약 성경에 있는 그 모든 역사적인 사실은 우리의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는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이 사실은 우리에게 뭣을 가르쳐 주고 있느냐? 거게서 우리가 예수 믿는 이치, 우리가 살아가는 이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섭리하는 이치, 이 세상이 우리를 미혹 주는 이치 그 이치를 여게서 연구를 해야 된다 그거요. 알아듣습니까? 그러면 거게서 선주와 사공 그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위인들이요, 대인들이요, 다 모두 영웅들이요, 다 권력가들이라 그말이오. 그걸 우리에게 보이고 있다 말이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그 사도 바울의 말 듣습니까? 사도 바울로 말하면 오늘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서 지금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성경 말씀 듣고 있는 거와 꼭 같은 이치를 여게 보이고 있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지금 로마를 향하여 가고 있는 그 지중해는 우리가 이 우주로 봐도 맞고, 이 세계로 봐도 맞고, 또 그 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모든 사회라고 봐도 되고, 국가라고 봐도 되고, 그러면 거게는 또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 두 사람들의 지도와 세력이 있으니까, 그러면 이 세상은 그런 세력이 있다.

그러면 두 세력이 있는데 한 세력은 우리를 어떻게 지도하며 한 세력은 우리의 길을 어떻게 지도하느냐? 한 세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감 받아 가지고 그들을 지도했고, 한 세력은 이제까지 경험과 체험을 가지고 그들을 지도했고, 그런데 경험 체험이 많은 그들의 그 경험 체험을 가지고 지도하는 그것이 뭐인가? 이 세상의 역사와 통계를 가지고 지도하는 것이라 말이오. 역사와 모든 통계를 가지고 지도하는 것이고, 바울이 지도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신의 감동을 받아 가지고 지도하는 것이라 말이오.

이번에 집회 때에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미래적 영감이 있고, 미래를 가르쳐 주는 영감이 있고, 현재를 가르쳐 주는 영감이 있고, 지나간 뒤를 돌아보면서 회고적 영감이 있으니까 영감은 이 세 가지 종류로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다.

그러면, 미래적 영감을 받은 사람은 미래를 현재에서 준비하는, 항상 예비하는 사람이고, 미래적 영감받은 사람은 예비하는 사람이 되겠고, 현재적 영감을 받은 사람은 현재에 닿아서 닥치고 난 다음에, 자기가 닥치고 난 다음에 그때에 깨달으니까 준비하지 못한 것이 헛일이고 또 어려움을 당하니까 그때 놀랜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현재 영감받은 사람은 두려워하고 놀래 떨면서 기절하고, 미래적 영감을 받은 사람은 준비하느라고 바쁘고 부지런하고, 또 회고적 영감을 받은 사람은 다 멸망하고 실패할 대로 다 되고 난 다음에 후회를 알게 된다 말이요. 후회를 알게 돼. 잘못 된 거 알게 돼.

그러나 그 영감 안 받은 사람은 망해도 망하는 그대로 그만 망해서 ‘우리 운명으로 망한다. 우리 운명으로 망한다. 이거 운명이다. 이거는 만당이 있고 골짝이 있는 순환의 돌고 도는 이치에 있다.’ 이렇게 마귀란 놈은 해 가지고 자꾸 그걸 그 원인 있고 결과 있다는 인과의 이 사실을 잊어버리도록 한다 그말이오.

회고적 영감은 ‘과거에 그리 그리 할 때에, 그리 그리 교훈하고 가르치고 인도할 때 내가 그리 그리 할 걸. 그래 안 했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 후회를 한다 말이오. 후회는 과거에 옳은 걸 알았기 때문에 그대로 하지 안했으니까 후회되는 거 아닙니까? 후회하고, 현재적 영감이란 거는 ‘내가 그때 그렇게 교훈할 때에 내가 그걸 했을 터인데 그것을 하지 안하고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내가 현재 이런 낭패다.’ 현재에 자기가 잘못된 것을 깨달아서 낭패된 것을 알고 그것이 현재 영감이고, 지내가고 난 다음에 망하고 난 다음에사 잘못된 걸 아는, 깨닫고 알고 후회하는 것이 그것이 회고적, 회고란 말은 돌아올 회(悔)자 돌아볼 고(考)자, 뒤를 돌아보는 영감, 그 소용이 없어.

미래적 영감받은 사람들은 지금, ‘지금 뭐한다고 재림이 온다. 불심판이 와서 세계가 불탄다. 환난이 와서 공산주의 앞에 우리가 심문을 받게 된다. 공산화된다.

이 전쟁 된다.’ 이러면, 그렇게 된 것을 다른 사람들은 못 보고 있는데 자기는 미리 봤기 때문에 거게 대해서 준비하는 일 하고 있다 말이오.

이러니까, ‘하루 삼십 분 기도를 해라, 또 이렇게 하나님과의 밀접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네가 믿어야 도와 주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어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자꾸 너를 만들어라. 또, 하나님의 도우심이 네 믿음으로 인해서 너에게 실지로 실효가 있도록 되어지는 이 일이 이루어지도록 자꾸 준비해라.’ 이러니까, 예비적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모든 게 바쁘다 그말이오.

이래서, 요 하나를 여러분들이 알면 다른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요27장에 있는 이 지중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입니다. 우주로 봐도 되고 이 세상으로 봐도 됩니다. 성경에 갈릴리 바다에서 무슨 일이 있다 하는 그 갈릴리 바다는 온 세상을, 세계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고, 그 세계 속에서 이런 이런 이치가 있었다. 그러면 그 이치에는 반드시 둘이 있습니다. 사는 이치가 있고 죽는 이치가 있고 두 이치가 있다 그말이오.

그러면 지중해에도, 지중해 이 배 속에도 두 이치가 있었어. 두 이치가 한 이치는 사는 이치요 한 이치는 죽는 이치라.

그러면, 죽는 이치를 말하는 것은 그 사람들은 선장과 선주인데, 그 사람들은 뭘로 가지고 말하느냐? 이제까지 경험, 체험, 자기들 주관, 자기들 선입적 관념 그거 가지고 말한다 말이오.

선주와 선객들이 뭐 가지고 지도합니까? 선입적 관념, 기존 지식, 자기네들의 경험 체험, 모든 역사적 통계 그거 가지고 말하기 때문에 나타나 보이는 거 가지고 말하고 있고, 바울은 보이는 거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고 은밀한 가운데 계셔서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주님, 모든 것을 예정하신 주님 그분이 ‘내가 이리이리 예정을 해 놨다 이렇게 이렇게 된다’ 하는 그 예정의 은밀한 그분의 음성을 듣고 말을 하니까, 이 두 인도가 있으니까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선주와 사공들의 말을 듣지, 이제 바울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 말이오.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듣는 그 말은 보니까 얼마 안 가서 멸시를 당하게 됐고 선주와 선장들의 말은 대단히 인기가 있도록 사람들에게 인정과 환영과 아주 대우를 받게 됐다 말이오.

그러나, 그 세상 지도대로 따라 나가는 그것이 대우를 받아도 얼마나 받았느냐? 지중해 한 가운데, 큰 낭패와 다시 회복할 수 없는, 복구할 수 없는 그런 지경에 갈 때까지 돼서, 멸망으로 빠져서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데까지 형통했지 멸망에 빠져 가지고는 다시 구원할 수가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말이오. 희망이 없었어.

그러나 바울의 말은 처음에는 맞지 안했지마는 낭파가 되고 난 그때사 비로소 ‘바울의 말을 들었으면, 저분의 말을 들었으면 우리가 안 떠났으면 좋을 건데,’ 그때는 큰 풍랑이 일고 난 다음이라야 비로소 ‘바울의 지도가 과연 옳은 지도였다’ 모든 사람들이 감탄을 받는다 그거요.

그러면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앞으로 좀 계속하겠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지금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고 우리가 권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의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도리를 말할 때는 우리는 사도 바울의 입장과 처지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고, 또 거게 있는 사람들은,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을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바울의 주장이 옳은 주장이요, 옳은 지도를 했지마는 그들이 볼 때에는 임시 당장에는 맞지 안하고, 그러니까 조롱을 받았지마는 옳은 지도를 하고 나니까 마지막에 환난을 당하고 난 다음에는 ‘바울의 지도가 옳았다’ 이래 인기가 올라간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을 지도하는 것이 영감을 따라 지도하고 진리를 따라 지도하면 일시에는 맞지 안해서 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습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지마는 그 지도대로 결과적으로 이루어지니까 마지막에는 그 지도가 참이기 때문에 권위를 가지는 때가 온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아무나따나 사람을 대해서 이러니 저러니 말하지 마십시오.

아무나따나 말하지 말고 꼭 자기가 생각할라면 적어도 성경 말씀의 도리를 따라서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그보다는 더 영감을 따라서 사람을 지도해야 되지 아무나따나 생각나는 대로 마구잡이로 이래 말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이래 하면은 그 말이 얼마 안 가서 진가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 세상 말로 말하면은 당장 효력이 나고, 하나님의 인도대로 지도를 하면은 당장에는 효력이 나지 안하고 멸시를 당하지마는 조금 지나가면은 이제 인기가 있고 효력이 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에게 대해서 말한 것이 임시는 안 맞는 거 같아도 잠시 후면 그것이 다 지나가 버리고 우리가 예언하는 말씀이 맞는다 그말이오.

맞아서, 사람을 구원하는 데에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말하고 주장하고 인도한 것이 ‘과연, 과연.’ 하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그 참된 지도를 우리가 해야 됩니다.

이제 그 풍랑 지나고 난 다음에, 풍랑을 지나고 난 다음에는 그 풍랑 만나기 전에는 사도 바울이 똥이 됐소. ‘그뭐 네가 뭐 안다고 지금 미항에서 거게서 떠나지 말고 있자고 그랬느냐? 이렇게 잘 가는데.’ 똥이 됐지마는 옳은 말 해 놓으니까 얼마 지나가서 큰 환난에게 풍파가 일고 난 다음에는 ‘바울의 말이 옳다’ 하니까 전부가 바울에게 다 복종하고 바울의 사람이 되고 인도했다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인도할 때에 꼭 하나님의 영감대로 진리대로 바로 지도를 하면은 일시는 그들이 안 듣고 반항하지마는 반항하는 그것이 뭐이냐? 앞으로 바른 지도에게 복종할 수 있는 그 운동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운동들 만드는 거요. 이거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바른 지도를 해 놓으면 그 바른 지도하는 것을 그들이 바른 지도를 반대하고 조롱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와 모든 순서가 돼서 지중해 가운데까지 끌고 들어가는 그거는 뭐이냐 하면은 나중에 바울의 지도를 사람들이 갈망하고 그 지도에 대해서 받지 않은 것을 후회를 하고 바울의 지도를 앞으로는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런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그 작용들을 하고 있는 거라.

그러면, 부작용이 그게 뭐이냐 하면은 합치되는 거, 배치되는 것이 일치되는 그 일을 하고 부인하는 것이 인정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두 다 하는 것이라.

그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 풍랑이 일고 난 다음에 이제 바울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바울이 시키는 대로, 뭐 바울이 시키는 대로, 온 배에 이백일흔여섯 명이 바울 시키는 대로만 했다 그거요.

우리가 교훈하다가 그런 것이니까, 요런 데서 교훈도 우리가 배울 수 있어. ‘아, 바울같이 내가 지금 인도하는 이 우리 구역은 하나 지중해 배와 같다. 지중해 바울이 타고 간 배와 같은데 내 구역에는 내가 지도하는 이 지도가 바울과 같이 영감대로 지도해야 되겠다. 지도해야 되는 데는 우리 구역에 반대하는 인물들이 또 있다. 선주와 선객들 그들이 세상의 권위 가지고 있다. 우리 교회도 또 그렇다 또 이 교계도 그렇다.’ 이것을 여게서 우리에게 구원 도리 이치를 밝히 가르쳐 주고 있다 그말이오. 그래 가지고 나중에 좀 그다음에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게서 여러분들이 읽어 가지고 요것이 우리의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이치를 첩첩이 가르치고 있다. 이중 삼중이 아니라 여러 수천 수백 첩으로써 가르치고 있다 하는 것을 여게서 요 도리를 깨달으면 자기의 영안이 밝아지고 지혜가 밝아져서 바른 길을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고 여러 번 읽어서 이 모든 신구약 성경은 우리의 길이다. 우리가 살아갈 길이다. 우리가 살아갈 바른 이치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니까, 이 이치는 알밤 헤아리는 이치를 쌀가마니 헤아리는 이치에 맞춰도 되고, 또 사람 수를 헤아리는 데도 이치를 맞추어도 되고 하는 거 모양으로 이거 이치기 때문에,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큰 데 맞추면 큰 이치에 맞고 작은 데 맞추면 작은 데 맞고 모두가 다 요 이치가 사는 이치를 가르쳤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지의 능력이 아니면 요 이치를 우리에게 만들어 가르칠 수가 없어.

이러니 이 하나는 수억만에도 다 적용되고 다 바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놓은 생명이라 그거요. 이걸 알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은 영생인 것을 내가 안다” 이랬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래서, 이런 교훈에서 자꾸 자기를 넓혀야 됩니다. 자기를 키워야 되고 넓혀야 되고 지식도 넓히고, 소망도 넓히고, 범위도 넓히고, 사상도 넓히고 이래 놓으면은 온 세계의 모든 지식이라는 그까짓 거는 하나 주먹덩어리 같은 이까짓 걸 이렇게 들고 살펴보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 안 해도 이 진리를 공부 한 사람은 철학을 실컷 듣다가 ‘너 요런 지금 너는 함정에 들어 있다. 요런 감옥 속에 있다. 요 좀 탈피해 봐라. 여게서 벗어나 이 세계를 봐라.’ 하면은, 그들이 볼 수 없는 그 넓은 광대의 전체의 세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신구약 성경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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