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리 멸망

 

1979. 11. 7. 수요일 새벽

 

본문: 히브리서 11장 5절~6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를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으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어제 아침에 우리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그 이 준비는 어떤 다각면의 그  관련성을 마련하고 있다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우리가 장차 가서 살 무궁세계에는 어떻게 수많은 존재들이 다 자유성을 가지고  얼마든지 논란할 수 있고 시비할 수 있고 평가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수많은  존재들에게 관련되는 그 위치이기 때문에 자기와 마찰이 되는 그 존재는 그것이  다 정평정가해서 잘못된 것이며 그것이 밀려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만물  심판이요 곧 진리 심판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인데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가 다 그 때는 환영하고 영접하고 관계를 떨어지지 안 할라고 합니다. 그  때에 그 자기는 다 정평정가해서 인정받는 것들만 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맞은 것은 곧 하나님에게 맞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질 동성이 된  그것이 아니면 거기에 용납되지를 안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는 이게 더 깨끗하다 이것은 틀렸고 이것은 좋다 거기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전부 같이 깨끗하고 다만 도가 다르고 도수가 다르고 양이 다르고 그  권위가 차이 있는 것뿐이지 모두 깨끗한 것뿐입니다. 이것은 더러운데 이것은  깨끗하다 이것은 틀렸는데 이것은 옳다 그런 게 없습니다. 다 옳은 것 분이요.

옳지 않은 것은 용납이 안됩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는 성전이 없습니다. 하늘나라에는 성전이 없소. 성전은 모든  위치는 잘못 됐는데 이 위치는 바로 됐다 또 이 밖에는 부정한데 여기에는  깨끗하다 또 그 안에는 이 부정한 것이 이로 인해서 깨끗해진다 그것은 좋지  못한 것과 좋은 것의 구별이 구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성전이요. 죽은 것과 산  것을 구별가지고 있는 것이 성전이요. 또 나쁜 것과 죽은 것을 살리는 그 역사를  하는 것이 성전입니다. 하늘나라에는 그게 없습니다. 그 권위는 좀 크고 작고  강하고 약하고 한 차이는 있지마는 모두가 깨끗하요.

 그러기에 시온 하늘에서 울리는 그 시온성 그 예루살렘이 거리나 문이나 거기에  있는 백성이나 다 동질 동성이라는 것을 계시록에 말했습니다. 그것을 어제  아침에 얼마나 이렇게 우리가 어려운 어려운 지금 해결을 짓고 이렇게 어려운  조성품을 만드는 우리들인데 너무 이렇게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 이것을  얼마나 우리와 관련된 그 존재들이 있느냐? 하는 그 숫자를 알 자도 하나도 없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고 더군다나 거기에 맞출 자는 하나도 없다.

 이 비뚤어진 것을 아무도 고칠 자가 없다.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었다. 다만  일찍 죽임을 받은 어린양이 이 봉해 놓은 인봉을 뗄 권위를 가졌다 하는 그것이  이 어려운 건설을 공작을 대속하신 예수님의 대속으로만 이것이 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정이 돼서 회복이 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또 그리고  앞으로 계속적으로도 하나님의 구속으로만 이것이 가능하다 하는 그것을 말한  것이고,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할 수 있다는 것도  내나 그 점을 말한 것입니다.

 반석 위에 세웠다는 말은 그로 인해서 된 것을 말합니다. 모래 위에 세웠다는  말은 그로 인하지 아니하고 각자의 모래알 같은 아무 힘 없는 자기의 인본으로  시작됐다 그 말입니다.

 풀과 나무로 지었다 그 말은 전부가 하나님의 이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의 이  진리에게 다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여기에 저촉되지 아니한 것은 이것이 다  영생하고 여기에 걸리는 것은 다 소멸 돼 버린다.

 그 불로 시험한다 그 말은 동일한 말씀으로 심판한다 하는 것을 또 불로  심판하신다 그렇게 말씀해서 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의 권위를 가리켜  말씀합니다. 완전의 권위를 가리켜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니라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니라 그 말은 하나님은  완전치 않는 것은 다 소멸하시는 완전성이니라 하는 그 말입니다. 그것을 어제  아침에 말씀했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안 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순종한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요 믿음 요것으로 주시는 방편을 삼았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아무 감각이 없는 완전히 죽어 감각이 없는 자로 있을 때에는 이것은  순종이 어찌 되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살리는 역사는 순종 없이 하나님 단독이 그 역사로 살렸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어 있을 때 사죄 칭의 새생명 나지 아니했을 때에 사죄 칭의  새생명 멀리 장차 나타날 구주를 바라 보면서 죽었던 그 모든 구약에 속한  성도들 다 그들이 보지 못했으나 우리와 같이 다 본인은 상관없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대속하심으로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을 입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구별해서 기본 구원이라 그렇게 저는 발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에게 난 것입니다. 이것은 그때에 하나님 단독이 하셔야 되지  우리는 할 만한 목적 없기 때문에 하나님 혼자 하셔서 우리에게 입혀 주신  그것이 벌써 목적 안에서부터 시발된 것이며 예정으로 된 것이며 창조로 된  것이며 그것이 법적으로 되어 가지고 중생 될 때에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요새 교리사 교리사 그것은 수많은 역사 많은 시대 많은 지역 많은  사람들이 깨달은 것을 다 구경을 지금 하는 판입니다. 그것을 열람을 하면서 신앙  대조를 여러분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옳고 그른 것 앞서고 뒷 선 것을 여러분들이 지금 비교를  해서 대조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중생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의 주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옛날에 깨달음이 깨달음이 모자란 사람들은 사람들이 모자라  그런게 아니고 하나님이 그 시대에 필요한 것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시대에 필요 없는 것은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시지 아니하시고 또  그 다음 그 다음시대에 세상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이 도수가 높아져 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이의 선포해 놓으신 그 하나님의 도리를 점점 더 세상 그  악령의 역사가 높아짐에 따라 그것을 능가할 수 잇도록 이렇게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요. 또 먼저 깨달은 그런 것을 다 도움을 입어 가지고 힘입어 가지고  거기에다가 더 보태서 깨달아지는 것이요. 하나님이 직접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되면 아무리 신앙에 열심을 낸다 할지라도 세월이 가면은  그것은 다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잘못 개달음이 있고 또 깨달음이 숫자가 적은  것이 있습니다. 숫자가 적은 것은 그때 필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깨닫게 하시지  안하지마는 잘못된 것은 옛날이라도 없습니다. 잘못된 그것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심이 아니고 자기가 단독이 해서 잘못된 것이지.

 그러기에 그 사람의 깨달음이 바로된 것 있고 바로 되지 못한 것 있을 때 바로  된 것은 하나님이 그 시대에 그것만큼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르쳐 주신 것이고  잘못 깨달음은 성령으로 받아 가지고 깨달음이 아니고 그때는 자기 단독이  그렇게 깨달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깨달음에 숫자가 적은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시는 그 섭리고  잘못 깨달음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혼자 단독 이 날뛰어서  잘못 주장한 것입니다. 사람은 이게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생에 대해서도 많은 주장들이 있지마는 중생은 자기가 예수 믿기  전에 중생 하는 것입니다. 기본구원은 순전히 자기는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단독이  그 구원을 주신 것이고 기본구원을 주신 다음에 건설 구원에 시발이 중생입니다.

건설구원에 시발이 중생인데, 중생 그것도 자기는 모르게 그 오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기본구원 이것이 그 본인에게 직접으로 연결을 관계를 가지는 그  시작이 중생입니다. 그러기에 이 중생까지는 하나님이 단독이 하시기 인간 자체가  하는 것 아니요. 이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아주 한 번  크게 뜨거운 은혜를 받을 그때가 중생 된다 하는 그것도 성경적이 아닙니다.

성경에 말한 중생은 아니요. 또 자기가 중생을 그것을 두 번 받는다 하는 그것도  성경적이 아닙니다. 그것 다 사람들이 구슬로 만든 것이지 중생은 한 번 입니다.

중생은 영이 중생 하는 것이요. 영이 중생하고 나면 그 중생 된 영이 성령과 함께  그 마음과 몸 육 이 육에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합니다. 알려 줍니다.

알려줘서 이제 심신으로 된 육이 중생 된 영이 성령으로 더불어 가르쳐 주시는  이 가르침으로 받는 그것이 믿음의 시발입니다.

 그러기에 육이 하나님의 구원을 접하는 것은 신앙의 시작 다시 말하면 신앙의  움 신앙의 종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신앙의 종자가 자기 마음에 비로소  심어지는 그것이 순종의 시발이요. 그것이 우리 사람으로서는 기본회개라 그렇게  말을 붙여서는 될 수 있습니다. 그 본회개라. 요것이 비로소 육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관계를 가지도록 마귀를 향하는 것이 방향을 전환했다 방향을 돌아섰다  마귀를 향해 가는 것이 하나님 향해 돌아섰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성경에 중생이라고 하지 안 했고 성령으로 거듭난 것은 영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알기에 우리 자체에게 이 구원이 관련된 그  시작은 중생이고 또 우리 행동에 관련된 시작은 요것이 믿음입니다. 믿음. 믿음은  우리 행동을 관련된 그 시발이 그것이 믿음의 싹이라. 믿음의 씨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 보지 안 했다.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무엇으로 가지고 하느냐? 믿음  하나로만 하도록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이치를 잘 알아야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믿음인데 믿음의 요소는 하나님과  나와 하나님과 나 하나님의 것과 내 것과 요렇게 관계를 맺어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은 주격이 되고 주인이 되고 주격이 되고 우리 사람들 말로 하라  하니까 요래 밖에 못한다 그 말이요. 주격이 되고, 나와 내 것은 그의 소유 그의  것이 되는 내 물건처럼 당신의 물건처럼 당신의 것이 되는 요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믿음으로만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방편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은 기본구원 외에는 믿음이 없이 주는 일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 주는  일은 없습니다. 또 우리도 믿음 없이는 받는 일이 없습니다. 절대 못 줍니다.

하나님은 믿음 없이는 못 주고 믿음 없이는 못 받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이 주는  거와 같은 그런 일이 있습니다. 믿음 없이 하나님이 단독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런  것이 있고 또 믿음 없이 단독이 내가 그것을 하나님 단독이 주어서 나는 아무  관련 없이 받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찌 되느냐? 그것은 잠시 후면  없어집니다. 믿음을 통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것을 주신 것 내가 받은 것은  그것은 조금 있다가 없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것을 주시는가?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영은 중생 됐지마는 육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요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요 소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믿음 없이 주십니다. 주시니까 하 참 뭐 있는가 보다 하나님이  돌보심이 있는가 보다, 자꾸 내가 이 옆에서 전도한 뭐 되어지는 것 보니까 그  사람이 은연중 받는 것으로 또 은연중 빼앗겨지는 것으로 하 내가 아무리 단단히  해도 안 된다. 또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뭐 어찌 됐다. 이상하다. 나 외에 무슨  작용하는 존재가 이거 있구나! 이래 더듬어 가지고서 이제 알지 못하는 신을 찾는  거와 같은 이런 사람에게 눈이 뜨여지게 한다 이거요. 이러면 제가 그때  하나님에게 그러면 하나님에게 한 번 순종해 보자. 지극히 작은 것을 순종하니까  하나님께서 지체지 안하고 기다리고 계시다가 얼른 거기에 대해서 응보를 해  주십니다. 아! 이것 참 순종하니까 효력이 있네. 이것 담을 쭉쭉 흘리고 짜다라  날뛰는 것 보다도 이것 순종해야 되는구나. 또 두번째 순종을 하면 얼른 그걸  갚아 주십니다. 이래서 이 사람이 이제는 순종을 하는 사람이 하는 사람으로  출발했는데 그 순종 그것도 하나님이 그에게 배후에서 도와 주셔야 되지 그렇지  안 하면 순종이 안 되는 것인데 다만 자기가 껍데기만 가지고 있고 자기 간판만  가지고 있고 자기가 하는 것 같이 보여지기만 보여졌지 자기에게 무지 무능의  자기를 그 자유성과 합해서 하나님에게 바쳐 복종하는 여기 사용만 되어진  것이지 거기 무엇은 작은 것이라도 그 궁극까지 끝까지 그것이 무엇을 하나  해내는 실력은 하나도 없는 인간입니다. 하나도 없는 인간이요. 그러나 요기  순종을 하니까 얼른 되게 하셨는데 그 다음에는 순종을 반 하고 반은 못하게  만듭니다. 반은 순종했는데 순종이 안됐습니다.

 이러니까 그게 안됩니다. 하나님이 뭐 주시지 않습니다. 하하 이번에는 내가  순종 안됐네. 아 내가 순종을 안한게 아니라 순종하다가 중단됐고 순종 이외에  다른 것 잡것이 섞여서 그래 안됐구나. 이래서 순종면 이것이 다 사는 것이  되겠구나. 이제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순교를 기다리고 원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믿음으로만 영원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방편을 삼으셨고  나는 하나님에게 믿음으로만 받는 방편이 되어 있습니다. 믿음 외에는 자기  소유든지 자기 몸의 구속이든지 몸의 기능이든지 영광이든지 자기 영이 자기  영이 자기 육을 다스려서 영의 자유 자재로 쓸 수 있고 영에게 참 영이 원하는  대로 수종을 다 들 수 있는 그 육이라면 얼마나 보배요.

 우리가 하루 동안 뭐 하면서도 이것을 기계로 씁니다. 도구로 씁니다. 도구를  쓰니까 그 도구가 내 맘에 맞아서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착착 쓰여집니다.

기계보다 요 도구는 요건 참 보배다. 요것은 돈주고 잘못 샀다. 그 보다 요거는  잊어버리면 안된다. 요거는 잘 간직해야 된다. 요것은 일반 도구지마는 요거는 내  책상 안에다 갔다 넣어 놔야 되겠다. 그 쓸데 착착 쓰여지면 얼마나 그게  보배입니다. 이거 우리가 못이 (  )하나 박혔는데 못 머리가 요만큼 나왔어.

요놈을 뺄라 애를 써도 못 뺀다 말이요. 안되니까 장갑을 끼고 뺄라 해도 안  빠집니다. 안되니까 줄을 짜매 가지고서 당겨도 잘 안 빠집니다. 하! 이런데 요것  뭐 바룬가 뭐이 요게 이거였구나. 이걸 가지고 오면 된다. 저 곳간에 있다. 요것  요라니까 쏙 빠져 나옵니다.

 이러기에 이 도구라는 것이 필요 있고 과학이라는 것이 요렇게 쓰면 요  도구처럼 요렇게 편리한 것입니다. 내가 엊저녁에도 거 한 번 말했어. 아 그  사람은 내게 대해서 수족 같다. 이래 해야겠다. 그 사람이 참 내게 필요한  사람이다. 우리 교인인데 내가 그런 말을 했어. 고 뭐이든지 쓰일라고 하면은 다  고리 되니까 고렇게 저 잘되고 나 잘되고 거 참 편리하다. 그 필요성을 내가  얘기를 했습니다. ( )이랬는데,  영이 그렇습니다. 영이 주격입니다. 영이 영이 무궁세계에 우리의 도구가 필요한  도구처럼 아 이 마음과 고깃덩어리가 영이 쓰고 싶은대로 착착 쓰여지면 그 뭐  영계 가 가지고 영물들에게 이 영이 못할 것이 없어. 또 이 고깃덩어리 이것  가지고 이 물질계 못할게 없어.

 그러기에 영계와 물질계에 왕 노릇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물 중에  영 육으로 지은 것, 영과 물질 이 두 요소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천사는 영물 뿐이요 물질의 것은 없습니다. 이 사람은 그때부터 최고의  것으로 지음을 받았고 그런데 고깃덩이는 물질계에서 또 마음은 영계에서 이러기  때문에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에 영계에 쓸 마음을 가지고 갑니다. 입고 가요.

그러나 고깃덩이는 못 입고 갑니다.

 이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때에 이 고깃덩어리도 신령한 것으로 변화 받아  가지고 입고 갑니다. 왜? 이 고깃덩이도 장 떼 놔두고 안되겠는데 이것이 영계에  가지고 갈 때 영계가 가지고 영계 갈 때에는 없는 것 같이 걸거치지 안하지. 영계  있을 때는 마음 가지고 얼마든지 마음( )영이 소원하는 대로 쓸 수가 있어. 또  물질계는 물질계에 나가 쓸려고 하니까, 아 사람이 있는데 손을 잡아야 되는데  이거 보고 뭐 영이 마음 가지고 손이 잡혀 집니까? 그때는 이 변화된 이 몸이  고깃덩이 이 손을 불끈 악수를 잡아 쥘 수 있고 또 그 때 떡을 먹을 수 있고  이렇게 이러니까 물질의 모든 것이 다 접할 수가 있다 이거요. 그것이 부활체  입니다. 그 예수님의 부활체가 뭐 때문에 떡을 자셨고 뭐 때문에 손으로 잡았고  내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이래 했습니까? 그러나 만졌는데 또 눈에 안보이요.

 또 변화돼서 이래서 이렇게 지금 참 못 한 개 그거 뺄라 하니까 안되는데 이  빠루 가지고서 쑥 빼면 쑥 빠지는 것처럼 영은 이 육이라는 이것은 자기의  도구와 같고 자기 거처하는 집과 같은데 이것이 영이 영이 할 수 없는 일.

물질계에서 영이 할 수 없는 일. 이 고깃덩어리를 통해 가지고서 다 할 수 있고,  영계에 영 단독이 할 수 없는 것을 마음 가지고 다 할 수 있는 이 도구를 이  세상에서 마련해서 아 이 사람은 자기가 시장에 가 가지고서 갈 때에 자  뭐이든지 네 마음대로 가져 가라 공으로 가져가라 했는데, 이거 빠루를 가져  왔는데 이 사람은 빠루를 못 가져 왔다 말이요. 못 가져 왔으니까 저 사람은 못  있는 것을 척 이라니까 빠지는데 이 사람은 그걸 못 가져 와 놨으니 밸 수가  있어? 그 때 후회가 돼서 빌려 달라면 빌려줄 수 있습니까? 빌려 못 줍니다 못  빌려줘요. 그 제까짓 거는 아무래도 못 못 뺍니다. 녹난 거 이 못을 어떻게 빼요?  못 빼요. 아! 또 이 사람은 시장에 가 가지고서 보니까 톱이 있는데 이 톱을  사갔습니다. 아 이랬는데 자기가 무슨 일 할라 하니까 이 아름들이 되는 이  나무를 끊어야 되는데 아 저 사람은 톱을 가지고 슬렁슬렁 이러니까 그만 턱  끊겨지는데 톱이 없다 그 말이요. 톱이 없으니까 이걸 돌로 하겠소? 제가 (    )저는 못하는 기라.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건설구원이라고 하는 몸의 구속이라는 것은 영이  사용할 수 있는 이 기능을 지금 마련하는 것입니다. (       )구속인데 어떤  사람은 영이 쓰고자 하는데 쓰고자 하는대로 쓰여질 수 있는 이 기능이 마련  됐지마는 어떤 사람은 영이 쓰고자 하는대로 기능은 하나도 마련 안 했소. 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영에게 한 번 쓰여졌으면 그것은 영원히 제 것인데 영에게  한번 쓰여졌으면 영원히 제 것인데 쓰이지 안할라 할 때 그러기에 현실마다 그  현실에 영이 육을 쓰는 그 현실이요. 영이 육을 쓰는 현실인 그 현실은 영이 육을  자기가 자기에게 필요 있는 대로 사는 시간과 같소. 사는 시간과 같소.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믿음만을 주시는 방편으로 받는 방편으로 했는데 영원히 가질  것은 믿음 외에는 하나님이 주실 권리가 없습니다. 절대 못 줍니다. 인간도 믿음  아닌 다른 것으로는 절대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왜 이렇게 될까? 그것은  무궁한 나라 그 나라는 죽음이 없는데 영원한 나라에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해서 동해지는 요게 믿음인데 요걸로 안된 것이 있으면 어찌 됩니까?  하나님으로 인하여 동해지지 아니한 요것이 있으면,  자 하나님 있으면 하늘나라는 그 능동자가 몇이지요? 능동자가 몇 됐소? 이동화  목사님. 예. 예. 능동자가 몇 됐어요? 이종득(                       )둘 됐지.

믿음으로 되지 안한 그거이 하나 있었다고 하나 더 있었다고 하면은  하늘나라에는 능동자가 몇 돼요? 셋이 되지. 그러면 자 능동이 서이면 하늘나라는  한 덩어리요? 셋 쪼가리요? 세 쪼가리지. 도리수가 없어. 믿음의 이 절대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요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자 우리가 선을 행합니다. 인간 말로  우리가 좋은 일을 합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합니다. 모든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합니다. 또 하나님에게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니까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은 일을 해 주십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참 좋게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좋게 해 주시므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좋게 해 줍니다. 요 둘이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된 것 뒤에 된 것 요거 있는데 요거 잘 알아야 돼요. 요거 들어도  몰라. 거 쉬운 것 아니야.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니까 좋은 일을 많이 하니까  하나님께서 아 네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좋은 일을 하니 내가 너에게도 좋은 일을  해 주겠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 있고, 하나님이 나에게 좋게 해 주셔서 내가  이제 모든 사람에게 좋게 해 줍니다. 요 둘이 있는데 이 둘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저 뒤에. 저 효순 집사님. 큰 집에 뜰이 넓은 집에 있는 집사님. 예. 예.

둘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예. 장렬 목사님 (다릅니다.) 달라요. 다르다? 송종섭  조사님 어떻게 달라? 내나 선한 일 다 좋은 일하고 또 하나님에게 둘 다 좋은 일  좋은 걸 받았고 또 둘 다 사람들에게 좋은 일 했는데, 녜. 다르다는 말이 대답이  옳습니다. 먼저 것은 멸망입니다. 먼저 것은 멸망입니다. 뒤에 것은 생명입니다.

요것 잘 구별해야 됩니다. 뒤에 것은 생명이요 먼저 것은 멸망인데 먼저 것은  논리뿐이지 그게 없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하늘나라는 먼저 소속이 되고 그 다음에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주기부터 먼저 합니까? 받기부터 먼저 합니까? 받아 가지고 줍니까? 이제 주고  난 다음에 받습니까? 받아 가지고 줍니다. 받아 가지고 주는 나라요. 먼저 거기  속해 가지고 그 다음에 그 다음을 다스립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요 단일성의 나라. 개성이 없어. 전체가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하여 생겨졌고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하여 움직이고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하여 살고 하나님으로 하나님 한 분의 것으로만 가지고 입고 움직이고 자라고  하는 이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위치가 위치에 있느냐? 우리는 어떤 위치 있느냐? 제일  무서운 적이 죄악입니다. 제일 무서운 죄악이 이것이요.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느냐? 우리 위에 없고 우리가 근원인 근원의 위치로 알고 자기가 시발의  위치로 알고 자기가 근본의 위치로 아는 요것이 뭐입니까? 요것의 이름을 신학적  이름으로 뭐라 합니까? 요 이름을 요것이 뭐입니까? 신학적 술어로 뭐라 하요?  요거. 예. 원죄라 합니다. 요게 원죄입니다. 요게 원죄요. 요게 원죄입니다. 고라가  250 둘입니까? 뭣입니까? 예? 몇 명이지요? 250명 입니까? 250명이 산 매장 돼  죽었는데 그 죽은 그 죄가 그것이 그것이 본죄에 속한 것입니까? 원죄에 속한  것입니까? 예. 그것이 원죄에 속한 것입니다. 원죄에서 나온 본죄에로 나타났지만  고것이 원죄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요 말씀을 우리가 잘  깨달아야 됩니다. 어짜든지 자기가 능동 되려는 이것은 절대 피해야 됩니다. 예  자기가 능동자 되려는 이것을 절대 피해야 됩니다. 이것을 일생동안 원수로  삼아서 대적해야 됩니다. 자기가 능동자 또 자기가 주체자 되어지려는 이것을  일생동안 싸워야 됩니다. 바울이 내가 허공을 치는 거와 같이 내가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거와 같이 하지 않는다. 향방 없는 다름질 하는 자와 같이 하지  않는다. 그 다음에 해석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한 후에 내가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서 자기를 쳐서 복종한다 했는데, 복종시킨다 했는데, 복종시킨다는 말은  대가리를 마련한다 말이요. 자기가 왕권을 마련한단 말이요. 뭐이지요? 대가리  찾는단 말이요. 자기가 왕권 마련한단 말이요. 송종섭 조사님 대가리를  마련하는데 머리도 좋은데 대가리로 하는 것이 좀 더 좋소. 똑똑히 알지. 고게  왕권 마련하는 것 아닙니다. 자기 머리 찾는 것이요. 지금 머리 찾는 것 잘못하면  자기가 머리가 돼 가지고 자기가 머리가 돼 가지고서 하면 멸망이라. 자기가  머리되면 멸망이라.

 이러기에 자기가 머리 안되고 자기가 지금 소속자 자기가 소속자 될라고 애를  써. 먼저 소속하고 그 다음에 다스립니다. 먼저 받고 그 다음에는 주는 것입니다.

먼저 머리를 마련해서 머리에게 속한 자기가 돼 가지고서 그 다음에 다른 것을  접합니다.

 그런데 원죄는 정반대입니다. 주기 부터 먼저 하고 받는 것은 뒤에 하고  다스림부터 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머리를 찾아 마련합니다. 소속은 없이  자기가 통치하고 그러면 내가 어디에 속해 볼꼬 하는 것이요.

 이러기에 자, 내가 이만한 지금 교회를 일으켰고 이런 교회를 일으켜 놨다.

이렇게 교회 수가 많다. 우리 교회가 열개다. 오십개다. 백개다. 내가 만들어 놓은  교인이 얼마나 된다. 이러니까 내가 이것을 가지고서 지금 이 진영에  들어오겠는데 좀 받아 주십시요 합니다. 그럴 때에 그럴 때에 받아 주느냐? 안  받아 줍니다. 안 받아 주요. 절대 안 받아 줍니다. 받아 주는 것 같으나 그것이  있되 그것이 머리를 찾지 안하고 여기에 속해 가지고 차차차차 그것이 하나씩  둘씩 되어져서 자르면 그거 보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     )반역자가 되고  맙니다.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교훈의 요지는, 머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꼬리가 생기고 소속이  되어 가지고 그 다음에 움직임이 있고 그 피동되어 가지고 그 다음에 능동이  돼야 되지 능동이 먼저 되고 그 다음에 피동 되는 그것은 천국 이치가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한 말로 말해서 자기 위를 찾는 것을 먼저 해야 됩니까? 자기  아래를 찾는 것을 먼저 해야 됩니까? 자기 부하를 먼저 찾아서 부하를 먼저  만들어야 돼요? 자기가 부하 되는 것을 먼저 마련해야 돼요? 자기의 머리를  찾아야 돼요? 자기가 머리 노릇을 먼저 해야 되요? 무엇, 뭘 해야 됩니까? 어느  것이 먼저요? 믿음으로 에녹은 죽지 안했다 그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런데 멸망은 머리를 먼저 찾아서 자기가 머리에게 속하고 머리에게 받고  머리에게 피동 되고 그래 가지고 그 다음에 자기에게 속한 것을 찾고 또 자기가  주고 또 자기가 다스리고 자기가 원인자 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고게 원죄고  자기가 원인자 되지 아니하고 원인자에게 소속한 것이 되어 가지고 원인에게  소속한 것이 되어진 고것 가지고 그 다음에 원인이 되어지는 요것이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제도입니다.

 그러기에 요것을 알면 그 원죄에 대해(           )과 원죄와 정반대가 뭐이냐  하면 믿음입니다. 원죄와 정 반대가 믿음이요. 이러기에 요게 그만 원죄성 가지고  날뛰는 것인지 믿음 가지고 날뛰는 것인지 요기 아니면 저기 저기 아니면  요것입니다. 둘은 아주 방향이 다릅니다. 원죄는 자기에게서 시발 하는게 원죄요.

원죄는 자기에게서 시발하는 것이 원죄입니다. 그런데 원죄는 자존자 아닌 것이  자존자처럼 능동자 못 되는 것이 능동자, 독립자 못되는 것이 독립자, 줄 수 없는  것이 주는 자 요것 되는 것이 원죄입니다. 믿음은 그렇지 안해. 믿음은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존재케 된 것이 그로 인해서 존재된 것 그게 믿음입니다. 그가  근원이요. 그로 말미암아 생겨졌소. 어떤 것에게 그에게 속한 것 그로 인하여  움직이는 것 그에게 받아 주는 것 그에게 받는것.

 그러기 때문에 위에 것을 찾으라. 아래 것을 생각지 말아라. 위에 것은 하늘나라  하나님 이신데 위에 것부터 가지고 아래 것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기에 자기는  먼저 위를 찾고 그 다음에 아래를 찾아야 되지 위에를 찾지 안하고 아래부터  찾아 가지고서 왕 노릇은 아래부터 찾는 것이요. 왕 노릇은 아래부터 찾는  것이요. 원죄는 아래부터 찾는 것이요. 원죄는 언제든지 자기에게서부터 시발하는  것이요. 자기 주장 자기 욕심 자기 왕 자기 머리 자기 위주 자기 명예 요것은 다  사망에 속한 것입니다. 요 전부 그런 것입니다. 자기 주장, 그분의 주장에게 내가  따르고 따르는 이 주장을 이제 그 다음에게 줍니다. 그의 욕심에 내가 속해서  이제 다른 것에게 욕심을 가집니다. 그의 주장에 내가 속해서 그의 주장으로 내  주장 그의 소욕으로 내 소욕 그의 뜻으로 내 뜻 그로 인하여 그로 인하여.

 그런 머리요. 나는 그의 몸이라. 그 다음에 내게 속한 지체가 있어. 요것이 정  거꾸로, 여기서 사람들이 다 죽습니다. 육체로 능한 자 문벌 좋은 자 학벌 좋은 자  만치 못한다는 것이요 마귀란 놈이? 요렇게 눈을 살짝 돌려서 그래 고만 죽게  만드는 것이요. 이번에 우리 나라에 그 일어난 것도 요런 종류의 것입니다. 그  원죄가 다 그렇게 발작을 시켜서 자기를 멸망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방어할 만한 기력이 모자라면 죽는 거야. 몸에 병균이 안 들어 붙는가? 병균이  들어 붙지. 들어 붙는 병균을 이것을 그 방비하는 데까지 살고 방비하다가 방비  못하면 죽습니다. 신앙 생활이나 모든 것이 다 그렇소. 그것이 자연계시 입니다.

 이번에 여기서도 여러분들이 우리 나라는 우리 나라 에서는 예수 믿기 참 좋소.

다른 나라 에서는 경험하지 못하고 실험하지 못하는 것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을  얼마든지 합니다. 미국 나라 같은 나라는 정함이 없는 물질에 소망을 두지 말라  그 성경을 해석을 못 하요. 암만 해도 그 분들이 이해를 못 하요. 왜? 물질이  정함이 없어. 우리 나라는 금방 부자가 금방 거지 되고 이라니까 누구든지 아  이렇게 다 이해하지마는 그 나라는 그것을 이해를 못해. 그렇기 때문에 여기  설명을 거기 가 가지고서 그대로 하면 그 나라에서는 인정을 안 해. 하나 범위를  더 널리 나가야 돼지. 다음에 또 계속 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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