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

 

1989. 4. 27. 목새.

 

본문: 계 1:5-6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5절 하반절에 '우리를 사랑하사' '나를 사랑하사' 하는 말은 단수가 되고 '우리를  사랑하사' 하는 말씀은 복수가 됩니다. 왜 이렇게 복수를 사용했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 단독이 있어서 우리 단독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연합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래서 어데서든지 우리라고 하는 복수가 기록되었을 때에는 왜 단수를 쓰지  안하고 복수를 쓰셨는가 하는 그것은 곧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이 대속 때문에  하는 것을 거기에 나타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우리들을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피로'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 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 전 택함을 입었고 또 주의 것이 됐기 때문에 주님이 대속을  하셔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해방하시고' 또 우리를  해방하신 것도 예수님의 대속과 우리가 연합이 돼 가지고 있는 이것 때문에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되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이랬는데 해방했다  말은 갇혔었다는 말입니다. 해방했다 말은 갇혔던 자이다 하는 그말입니다.

갇혔던 자라 그 말은 우리는 죄에 갇혀서 사망 아래에 있고 마귀의 모든 주관  아래에 있던 우리들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연옥설을 주장하는데 연윽설이라는 것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영이 가서 전도해 가지고 예수 믿게 만든다. 그러면 지금 이 세상에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죽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을 예수님이 지옥에서 전도해  가지고 예수님 믿게 만든다,' 이러기 때문에 천주교에서는 죽은 자를 위해서 영세  주는 일이 있습니다. 영세 주는 일이 이것이 천주교가 생겨지기 전에도 영세 주는  그런 일을 내나 또 이단들이 자아내 가지고 했던 것입니다.

 이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받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 말은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받아서 죽은 자가 자기가 세례받지 못해도 그  자손이나 누가 친구가 그 사람을 대리해서 세례 받으면 세례받은 사람으로서  죽은 영계에 가 세례를 받아 가지고 그 사람이 구원얻는 데에 나아간다'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이래 보고 있지마는 그것은 다 잘못 깨달음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그때에 유대교인들이 자꾸 이렇게 예수교를 핍박하고 이러기  때문에 부활에 대해서 부인하는 사두개교인들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너거들이 내나 죽은 자 위해 세례받는 거 너거들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구원 얻는다는 그런 표시가 아니냐?' 하는 그런 말이지 그것이 옳게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래서 천주교에서 연옥설을 주장하는 것, 천주교가 '영계 가 가지고도 전도 받아  가지고 예수님 믿을 수 있다' 하는 그 말은 그것은 잘 못입니다.

 그거 어데서 근거를 하고 하느냐 하면은 내나 베드로전서 3장에 '주께서 영으로  옥에 갇혀 있는 영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다' 하는 요 말씀을 근거해 가지고  하는 것인데 옥에 갇힌 영들이라 말은 내나 여게서 해석이 됩니다.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하는 이것이 우리가 죄에 갇혔던 자라는 것을  여게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옥설은 우리가 부정해야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여게 또 우리, 또 '우리 죄에서' 또 우리, '우리를 해방하시고'  또 우리, 요 우리 할 때마다 언제든지 예수님과 우리와 연결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되는 것이지 연결이 없으면 안 된다는 그런 것을 표현해서 우리라는  복수를 썼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연결이 언제 됐느냐? 하나님이 자존하시고 하나님만  계실 그때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우리는  예수님과 연결이 되어 있었던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라 말은 내나 예수님을 가리켜서 그리스도라고 말하는데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사람되시기 전에 우리 구주이신 하나님을 가리켜서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우리의 구주가 영원 전에 되어 있는 그 하나님이 사람을  입고 오셨을 때에 그 후로부터 이름 부르기를 예수라 부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도성인신하시기 전에 우리 구주이신 하나님의  이름이요. 또 예수라는 말은 도성인신하신 후의 우리 구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과 우리와의 인연은 언제부터 그 인연이  생겨졌느냐 하면 창세 전, 영원 전부터 인연이 생겨졌습니다.

 그러면 이 창세라 말은 이 모든 만물을 지은 것을 가리켜서 창세라고 말하는데  창세라는 말이 창세가 두 번 있습니다. 창세가 두 번 있는 것은 하나는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하나님의 당신의 의지 속에 당신이 지금 순서를 이렇게 정하실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의지 안 창조가 있고. 의지 안에서 창조된 그것을 실지로 이  시공이 일는 이 실지에 창조된 이 창조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지 세계의 창조와 시공 창조가 있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잘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다음에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 하는 그런 데에  많은 관련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예수님의 대속 때문에 우리는 죄에서 해방받았습니다. 그러면 이  죄에서 해방받은 것은 우리가 있기도 전에 예수님이 대신해서 대형, 대행,  대화친의 대속을 일으켰는데 '우리가 나기도 전에, 범죄하기도 전에 무슨 우리  죄를 대신하겠느냐?' 하는 그런 생각을 마귀라는 놈이 유혹주기 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나기 전에, 나기 전이지마는 우리  범죄하는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나기 전이지마는 우리의  범죄하는 것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시면 하나님이 우리가  모태에서 나기 전 우리의 모든 죄지은 것을 예수님에게 다 부담을 시켜 가지고  대속을 하셨으니 그러면 그 죄는 우리가 나기도 전에 어떻게 우리가 죄가  있었으며 그 죄를 또 예수님에게 부담했겠습니까? 그거는 어짠 죄입니까? 그거는  무슨 죄지요? 남반에 한번 말해 봐요. 그 죄는 무슨 죄요? 그 죄는 우리가 시공  세계의 우리가 있고, 시공 세계의 우리가 있기 전 하나님의 의지 세계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지 세계라 말은 당신의 의지 안에서 모든 것을 예정하실 그  예정 세계를 가리켜서 의지 세계라고 이라는데 하나님의 의지 세계에는 우리가  영원 전에 있었습니다. 영원 전에 있었던 우리가 시공 세계의 우리로 이렇게  나타나는 것은 어떤 사람은 언제 창조되고 창조돼서, 그렇게 여게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있은 지가 백 년 이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 세계에서 존재하게 된  그것으로 말하면 벌써 영원 전에 존재했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사'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의 언제 그 관계가  가졌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히신 걸로  말하면 지금 한 이천 년 가까이 됐는데 그때 우리는 나기도 전인데 어떻게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였으며 또 우리가 죄짓기도 전에 우리 죄가 어떻게  있었으며 또 그에게 죄를 어떻게 담당시켰으며 어떻게 대형으로 우리를  대속하셨겠느냐 하는 것이 논리상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 세계의  우리가 있고 하나님의 이 시공 창조 세계의 우리가 있기 때문에 요런  차이점입니다.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우리  죄에서 해방하시고. 그러면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생겨졌습니다. 마귀란 놈이  우리를 해할 수 없는데 마귀가 우리를 해한 것은 우리를 범죄케 할려고 이렇게  유혹을 줄 때 우리가 범죄에 빠지지 안했으면 마귀야 뭐 있든지 말든지 그까짓  거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범죄함을 인해서 그때부터 벌써 감옥에 갇힌  자입니다. 무형의 감옥에 갇혀서 그때부터 자유가 없고 벌써 자유를 다 뺏기는  그것이, 죄로 말미암아 뺏기고, 죄로 말미암아 뺏김으로서 죄가 있으니까 그  다음에는 사망이 우리를 주관합니다.

 또 죄가 있으니까 마귀가 우리를 주관합니다. 죄 없는 사람을 마귀가 주관할 수  없고, 죄 없는 사람을 마귀가 해할 수 없고, 죄 없는 사람을 사망이 해할 수 없고,  사망이 침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죄가 있은 지 후로부터 우리는 권력이 없고  자유가 없어져 버리고 벌써 죄의 세력에게 붙들려서 죄의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우리를 해하는 것이 죄로 해하고 사망으로 해하고  마귀가 직접 우리를 해하고 이렇게 해하는데 마귀가 우리에게 제일 처음 우리를  해하는 것은 어떤 면으로 우리를 해 했습니까? 어떤 면으로 우리를 해했지요?  마귀가 우리를 해할 때에 마귀가 직접 우리를 해했습니까, 우리를 사망부터  시켰습니까 우리를 범죄케부터 했습니까? 마귀란 놈이 우리를 해한 그 순서가  어떠랍니까? 마귀가 직접 우리를 해했습니까? 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을 때는 마귀란 놈이 우리를 자꾸 범죄케 하도록 이렇게 달래고 꾀우고  이렇게 유혹을 시키고 협박을 하고 이렇게 해도 우리에게 실상의 해라 하는 것은  하나도 못합니다. 가해하지 못합니다. 가해하지 못하는데 우리를 꾀우기도  달래기도 이렇게 강제하기도 이렇게 할 때에 마귀에게 유혹을 받아서. 마귀란  놈이 우리를 살살 달래기도 하고, 또 좋은 걸 준다고 꾀우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우리에게 협박도 하고 주위 환경에 모든 것을 몰아쳐 가지고 우리를 억압으로  눌리기도 하고 그렇게 세상의 모든 방편을 써도 우리가 죄가 없을 때는 그 해가  내게 대해서 오히려 구원이 되고 영생이 되지 해는 하나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사망당하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마귀로 말미암아 이런  수단 저런 수단 어떤 수단으로서든지 마귀로 인해서 우리가 범죄한 그것입니다.

범죄하는 그것이 제일 해를 받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뭐, 죄도 우리를 해할 수 없고, 마귀도 해할 수 없고,  사망도 우리를 해할 수 없고, 아무도 해할 수 없는데 제일 먼저 접선되는 것이  뭐이 접선되느냐 하면 마귀 이놈이 우리를 살살 꾀울라고 꾀와서 죄짓도록만  만듭니다. 이래 가지고 죄만 지으면 그 다음부터는 마귀의 것이 돼 버럽니다.

그만 죄만 지으면 마귀에게 착 홀켜서 그만 그때부터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도의 감옥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법을 세워 놓았기 때문에 법을  어긴 것이 죄니까 우리에게 법을 어기도록만 하면 그만 법 어기고 난 다음에는  사망이 우리를 사망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도 우리를 직접 해할 수  없고 사망도 우리를 직접 해할 수 없는데 직접 해할 수 있는 것은 마귀 요놈이  들어서 우리를 해하게 합니다. 그래서 마귀의 유혹이 들어왔을 때에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우리가 제일 먼저 실수하는 것이 뭐이 실수입니까? 제일 무슨  실수를 먼저 합니까? 우리가 실수하는 그 실수의 제일 먼저 하는 실수가 뭐지요?  죄짓는 것이라 말이오. 마귀 그놈의 미혹받아서 죄만 지으면 우리는 그만  그때부터 영과 육이 다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사람들은 영은 갇히지 못하도록, 영은 범죄하지 않기 때문에 갇히지 못하는  것이고 육은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가 오면은 그 다음에는 오는 순서가 뭐이냐 하면은 사망이  옵니다. 마귀 오고. 마귀 오면 그 다음 순서는 죄 오고, 죄 오면 그 다음 순서는  사망 오고, 사망 온다 말은 망하고 죽는 일이 우리에게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말은 요 우리라는 말은 모든 성도들을 단합을 해서 복수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해방하시고' 우리가 범죄하기 전 벌써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 연합이 우리가 범죄하기 전에 타락하기 전에 연합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면 하나님의 의지 순서에도 범죄와 타락이 있는데 타락이 먼저냐,  하나님에 연결된 연결이 먼저냐? 연결이 먼저고 타락이 그 다음입니다.

 이래서 '우리 죄에서' 하는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가 참 우리의 원수가 되고  크게 무서운 모든 멸망의 원인이 되는 이 죄에서 우리를 해방해 주셨느냐?  해방해 주신 그것은 나 단독이 해방해 주신 게 아니라 우리가 된 사람들은  해방해 주시고 우리가 안된 사람들은 해방 안 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에 대해서 감리교라든지 또 성결교라든지 이런  모든 교파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은 전인류를 대속했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났으면은 누구든지 다 이 대속을 받는다' 이렇게 생각을 가져서 그 사람들은,  만인 구원설이라는 말은 전인류 구원설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장로교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장로교만은 '예수님이 대속하신 것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그 사람들에게 한해서만 예수님이 대속했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지 딴은 사람들은 대속하지 안했다. 이래서 예수님의  대속은 전인류 대속이 아니라 제한직 대속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장로교  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예수교 장로회 한국 총공회라고 그렇게 우리가 이름을 한 것은  예수교라 말은 세상에 종교가 뭐 수없이 참 천도 만도 넘을 만치 종교의 수는  그렇게 많기마는 그런 많은 종교 가운데에 우리는 예수교라는 이 예수교다 하는  것으로서 '예수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또 예수교 장로회라 말은 예수교  가운데는 이런 교리 저런 교리, 이런 신조 저런 신조, 이런 행정 저런 행정들이  있는데 우리는 장로교 교리와 신조와 행정을 우리가 믿고 따르고 있다. 그래서  '예수교 장로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교 장로회' 그러면 예수교라는 말은 세계  종교와 종교 사이에 구별되는 것을 가리켜서 예수교라고 말했고. 장로회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교 가운데 교파와 교파 사이에 교리와 신조가 다르기 때문에  일반과 다른 그 교리와 신조, 장로교의 교리와 신조를 우리가 믿기 때문에  장로회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한국이라 말한 것은 세계에 나라들이  많이 있는데 한국 이라는 그 나라 가운데 있는, '총공회라' 총공회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종교 중에는 예수교요, 예수교 중에는 장로교파요, 장로교파  중에 우리는 총공회다. 그 말은 장로교의 교리 안에서 우리가 또 믿는 신조와  교리는 다르다 그 말이오. 우리가 믿는 신조와 교리는 다르다. 우리가 믿는  신조와 교리가 다르기 때문에 제가 고신에 있을 때에, 교리라 말은 깨달음이라는  말인데 내 깨달음과 일반 장로교에서 깨달음이 다르기 때문에 나는 내가 깨달음  그것을 옳다고 주장을 하고 그들은 그들의 깨달음이 옳다고 주장하니까 깨달음과  깨달음이 시비가 나 가지고 제가 그때는 내나 조사, 전도사인데 전도사는  당회에서 그거는 세우기도 하고 당회에서 면직을 할 수 있습니다. 사면을 시킬 수  있고 강제로 면직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랬는데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에 일곱 노회를 시비를 했습니다. 일곱 노회에  이걸 치리하나 안 하나 이렇게 자꾸 하다가 마지막에는 상회 불순종이라는 그  죄목을 가지고 저를 치리했었습니다.

 불순종이 뭐이냐 하면은 그들이 말하는 교리와 신조를 내가 듣지 안하고 '그게  틀렸으니까 이렇다'는 그 교리와 신조를 말하고 그들이 행정하는 그 행정을  따르지 안하고 '그 행정이 틀렸다' 이래서 그 틀린 행정에게 내가 순종 안 해서  그들과 행정이 다르고 그들과 교리와 신조가, 다른 거는 다 같지마는 다른 그것  때문에 시비가 나 가지고 서로 갈라지게 됐고 내가 거기서 제명을 당하게 됐기  때문에, 총공회라 말은 '장로회와 같은 교리와 신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장로회와  또 다른 교리와 신조가 있다. 우리가 또 특별히 우리만이 깨달아서 그들과  대립되어 있는 그런 교리와 신조를 가졌다.'하는, 일반 장로교와 다른 교리와  신조를 가졌다는 명패로 총공회라는 것을 이렇게 우리가 정한 것입니다.

 이런데 총공회 간판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우리가 일반 장로교와 다른 교리와  신조를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것이요, 또 일반 장로교 교리와 신조뿐 아니라  그들이 행정하는 그 행정과 다른 행정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니까 그 사람은 이  총공회 안에서는 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고 총공회 가지고 일을 못 합니다. 제가  부끄러워하는 신조와 교리 정치 가지고 어떻게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행정은 그들과 다른 행정이 뭐이냐 하면은 그들은 전 행정이 종다수  가결입니다. 종다수 가결이라 말은 다수를 따라서 결정한다 말이오. 종다수라  말은 다수를 따라서 결정한다. 다수를 따라서 결정하는 그 행정인데 우리는 다수  따라서 결정하는 행정이 아니고, '소수보다는 다수가 좋지마는 아무리 다수라.

할지라도 진리대로 결정 돼야 되는 것이지 진리에 어긋났을 때에는 숫자가  많다고 해 가지고 따라갈 수가 없다' 해서 우리는 종다수 가결을 부정하고 진리  가결을 우리가 인정하기 때문에 이 신치가 아주 다르다 그 말이오.

 정치가 달라서 이번에 OOO목사님과 우리파의 나뉘어지는 것도 그것이 들어서  나뉘어졌고 또, OOO목사님은 거게 대해서 그것은 말하지를 안했습니다. 그는  행정 가지고 어떻다는 말은 해도 교리와 신조 가지고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가 대속받았다' 하는 거와 또 '아직까지 다 죽지는 안했고  미결로 이래 있는 죽어가고 있는 자를 대속하셨다' 하는 이 대속에 대한 이  중요한 교리가 달라서 그것 때문에 갈라졌습니다.

 교리나 신조라 하는 것은 하나 가지고 같이 있을 수가 없어. 하나 다르면 같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로 말하면 도덕적으로서는 세계에 참  으뜸가는 도덕가요 톨스토이의 박애주의, 모든 사랑이라는 이 박애주의라 하는  것은 모두 다 세계가 인정하지마는 톨스토이가 말하는 그 교리와 신조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톨스토이가 믿는 그런 교파와 신조를 우리가 믿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뭐이냐 하면 다른 거는 다 믿는데 동정녀 마리아 탄생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이 부정 없이 났다는 말은 그거는 거짓말이다 믿을 수 없다.

뭐 부정으로 났는데 어떤 부정으로 났든지간에 그만 그 모든 행위와 주장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가 인정하는 것이지 꼭 애비 없이 난 그런 탄생을 꿰어  붙일 필요가 없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예수님에게 아버지가 있고 났지 아버지  없이 그렇게 마리아로서만 성령으로 잉태하지 안했다. 성령으로 잉태한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우리가 같이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감리교와 우리와 갈라진 것은 뭐 때문에 갈라졌느냐? 감리교에는 '예수님은  인간이라면 어떤 인간이든지 다 대속하셨다' 하는 것이 감리교 교리인데 우리는  '대속하신 것은 제한적 대속이라, 누구 누구는 택한자들은 대속하고 택함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대속하지 아니했다. 이러기 때문에 다르다 그 말이오.

 그런고로 우리가 교리 하나가 다르면 같이 할 수가 없고 신조 하나가 다르면  같이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왜 예수교가 됐느냐? 뭐 회회교든지 유교든지  마호멧트교든지 무엇이든지, 힌두교든지 불교든지 이라지 왜 우리가 예수교가  됐느냐? 그 종교와 우리 예수교가 다르기 때문에 모든 종교들이 다 있지마는  우리는 그 종교와 같지 않는 '예수교다' 하는 것을 우리가 다르기 때문에 예수교로  표시했고,  그러면 예수교 가운데는, 뭐 만인 구원설이나 전인 구원설이나 또 합동설이나  이런 게 무슨 상관 있느냐? '그게 아니다. 그거는 택함을 받은 자들만 대속을  받았다.' 그러기 때문에 제한적 구원이라는 그것 때문에 우리가 또 감리교와 같이  되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라고 또 요한 웨슬레파와 우리와의 갈라진 이유는  뭐이냐? 요한 웨슬레파로 말하면 '사람과 하나님이 합해 가지고 우리 구원이 된다'  해서 합동설을 주장하는데 우리 장로교에서는 '합동이 아니고 전적 하나님의  은혜다' 하는 그 교리가 다르기 때문에 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총공회라 말은 장로교 중에 우리가 믿는 교리와 신조는 일반 장로교와  같은 것도 있지마는 다른 거 있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총공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총공회라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다른 그 교리와 신조를 깨달은 사람들은 '이것을 믿지 안하면 이거는 기독교가  아니다.' 이만침 중요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총공회라 하는 이름을, 이 간판을  영광스럽게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걸 모르는 사람은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잠시 기도 후에 결혼 상담이 있습니다. 구역장들은 봐서 벌써 그 사람들이 무슨  관계를 가져서 위험성이 있으면 빨리 그라기 전에 범죄하기 전에 결혼을  추진하는 게 좋습니다. 여자로서 벌써 열여덟 살, 열여덟 살 아니고 뭐 열대여섯  살도 됩니다. 열대여섯 살 먹고 남자가 한 그저 열 한 칠팔 세 이상만 되면은  만일 그들에게, 그런 사람을 결혼을 권할 필요가 없지마는 부정한 관계가 있으면  빨리 추진해서, 나는 주장이 그렇습니다. 남자 여자 열다섯 살 먹어도 그 부정한  위험성이 있으면 '네가 그거 끊지 못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끊지 못하면 결혼해라.'  그래 가지고 강제로 이라고, 안 하면 관계를 그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리  아니면 정 그러면 치리를 해 버립니다.

 그래서, 결혼 상담해서 어짜든지 구역장들이 이 관리를 잘해야 되지 관리 잘  못하면 헛일이오. 이러니까 다른 것이 다 괜찮아도 이 음행죄 하는 이것은 몸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게 해결되기 전에는 구원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말했어요. '다른 죄는 다 몸 밖에 있지마는 음행죄는 몸 안에 있다' 이렇게 성경에  말했습니다.

 주일학교 반사들이 공과 외울 것과 실행 실천해서 자기가 거게서 경험하고  체험해서 힘을 얻어 가지고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자기가 실행하면서 가르치면  학생들이 실행까지 배우게 되고 실행 안 하고 말로만 가르치면 말만 배우지  실행은 못 배웁니다. 실행 못 배우면 그 구원 됩니까, 무슨? 소용 없지요.

 하루 삼십분 기도 잃지 말고, 또 권사님들은…, 그라고 단체로 기도하러 간  구역은 OOO집사님 구역이…, 우리가 기도하는 데에는 항상 관심을 가지고 주의할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기도하는 데에 제일 우리가 주의할 것은 뭐라 했습니까?  새로와지는 것. 고쳐지는 거 변화가 돼야 돼. 그거 없으면 아무 소용 없어.

새로와지는 거. 내가 생활이 새로와지든지, 마음이 새로와지든지, 행동이  새로와지든지, 말이 새로와지든지, 우리가 뭐 새로와져서 고칠 거 얼마나 많은지  몰라. 새로와져야 되지 새로와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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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대속증거-성령-방언/ 사도행전 10장 39절-48절/ 850221목새 선지자 2015.10.28
70 대속의 효력/ 로마서 1장 16절-17절/ 860305수새 선지자 2015.10.28
69 대속의 은혜를 무한히 감사/ 고린도전서 15장 55절-58절/ 810120화새 선지자 2015.10.28
68 대속의 사활/ 에베소서 1장 15절-23절/ 820414수야 선지자 2015.10.28
67 대속의 문을 영감으로 열고/ 고린도전서 1장 18절-21절/ 791209주전 선지자 2015.10.28
66 대속의 목적/ 고린도후서 5장 15절/ 840715주전 선지자 2015.10.28
65 대속의 기념생활/ 누가복음 22장 15절/ 881204주전 선지자 2015.10.28
64 대속의 기념 생활/ 마태복음 10장 34절-39절/ 881109수새 선지자 2015.10.28
63 대속을 보수-반석 위 건설/ 마태복음 7장 24절-27절/ 860525주후 선지자 2015.10.28
62 대속에 대한 자라감/ 요한계시록 1장 9절-12절/ 880822월새 선지자 2015.10.28
» 대속/ 요한계시록 1장 5절-6절/ 890427목새 선지자 2015.10.28
60 대내전과 대외전/ 빌립보서 2장 1절-4절/ 890524수야 선지자 2015.10.28
59 대내전과 대외전/ 사무엘상 15장 9절/ 850308금야 선지자 2015.10.28
58 대구집회에서의 근본 소원/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880422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28
57 대구집회에 옥토밭을 만들어서/ 마태복음 13장 3절-9절/ 880408금야 선지자 2015.10.28
56 대구 기도원- 양성원 건축 준비/ 890605교역자회 선지자 2015.10.28
55 대가리 멸망/ 히브리서 11장 5절-6절/ 791107수새 선지자 2015.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