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적관, 현실에서 이기는 법

 

1983. 10. 29. 토새.

 

본문 : 딤후 4:4-18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구리 장색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많이 대적했습니다.

많이 대적해서 아주 바울로 심히 어려움을 당하도록 그렇게 심한 대적들을  했습니다.

 그때에 사도 바울은 알렉산더가 말하는 그 교리와 신조 그것이 틀렸고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그 도리가 옳은 것인 것을 증거를 하고 서로 많은 장기간의  변론이 있을 때에 사도 바울과 같이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랬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울이 그 사람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아니하고 아직까지 깨닫지  못했고 어리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지 못해서 그만 강한 세력이나.

언변 좋은 사람이나, 무슨 면이든지 좀 부요한 사람이 나서서 주장을 하면 그만  그 주장을 따르고 하나님의 주장인 이 진리를 따르지를 못하고 배반하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그런 것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이 없을 수 없다고, 여기에 나와 함께 내편에 서  가지고-곧 하나님편 사도 바울-내편에 서 가지고 나와 함께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너회들이 모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그만 이런 환경 만나면 이  교리와 신조로 저런 환경 만나면 그런 교리와 신조의 사람으로 이렇게 요동되어  알렉산더가 주장이 돼 가지고 나를 대적해서 내가 전하는 그 복음을 대적하는  그때에 하나도 나와 함께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허물로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들이 벌써 바로 서서 그 알렉산더의 주장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서 나와 함께하는 신앙 동지가 많고 또 깨달아서 진리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을 말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대적한 사람. 참 자기의 육체를, 자기의 재산을. 자기의 어떤  인간적인 활동을 대적하는 그런 것을 대적으로 여기지를 아니하고. 그저 그런  것은 또 대적할 때에 손해를 잘 당했습니다.

 진리를 주장할 때에 진리대로 살아갈 때에 이 세상이 들어서 육체를 대적하거나  모든 자기의 소유를 해하는 그런 것은 진리 때문에, 그것이 해가 되어지면  유익이 되는 것이고 진리 때문에 영감과 진리 때문에 없어지면 그것이 살아나는  것이 되는 것이요, 또 자라는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대적하지  안하고 그럴 때에 의례히 내가 희생을 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희생과 같은 그런 희생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면으로서는 희생하기를, 자기가  손해보기를, 지기를 주저하지 안하고 지체하지 안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는 일을 원하고 또 구하고 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복음의 진리를 대적하는 그 대적은 그는  언제든지 관용이 없습니다.

 관용이 없다는 것은 그 사람을 다시 정죄해서 용납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가 옳은 교리와 신조를 증거할 때에 옳은 교리와 신조를 대적해서  삐뚤어진 교리와 신조를 주장하는 그때에 자기는 어떠한 박해가 있고 어떠한 그  생명이 끊쳐지는 그런 일이 있으면 생명은 내 줄지라도 진리의 대적에 대해서는  타협하지를 아니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싸울 싸움이요 또 우리의 대적입니다.

우리가 양보해서는 안 될 일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 성화되지 못해 있기 때문에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 내 명예를  훼손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내게 육체나 물질이 나 어떤 면에 손해를  보인다 해도 그것은 내가 옳은 편에 서서 손해를 볼 때에 잘못된 편에 선 그  사람이 회개할 수 있고, 구원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일에 대해서는 지체하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단마음으로 그렇게 손해볼 것을 각오하고 있는 것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게 손해보면 어떻게 하려고? 손해 그것이 영원한 유익이 되는 것이고,  빼앗긴 것이 영원한 취득이 되어지는 것이고, 그것으로써 지는 것이 영원한  승리가 되어지는 것인 것을 십자가의 대속의 그 성질에 속한 것이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손해를 당하지 안하면 그 손해를 통해서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구원될 터인데 그 손해 당하지 안할려고 하면 자기도 내나 혈육에 속한  사람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복음 위주의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우리가 얼마든지 이해하고 양보하고 희생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교리와 신조가 조그만치라도 틀릴 때에는 그것은 혹 그것을  서로 바로 하기 위해서 전투의 방편으로서는 이런 저런 방편을 쓸 수 있습니다.

어떤 방편을?  옳은 것이요 상대방이 틀렸을지라도 틀린 것을 한 번 혹은 두 번 말을 하고  그다음에는 말하지 안하고 침묵을 지켜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반성할 수 있는  그런 냉각기를 주는 그런 것이 좋고 또 그 사람에게 너무 강한 대립이 되었으면  그 사람이 돌아오기가 서먹거리고 어려울 터이니까, 그저 침묵을 가지고 자기  속은 강하고. 감염되어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는 더  강해지고 상대방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부탁을 하고 기도를 하고 이렇게 전법을  바꾸어서 이럴 수는 있지마는  잘못된 교리와 신조를 주장하는 사람이 유명한 학위를 가지고 있고 또 유명한  온갖 그 공적의 간판을 가지고 있고. 세상 무슨 세력을 가지고 있고 언변이  능하고. 용모가 어떠하고, 모든 선천 후천의 것들을 아무리 구비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에게 자기가 설복되고 감염되면 그것이 속화요 그것이 주님을 판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은 속으로 더 강해지나 외부적으로 전투 방편에 있어서는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을 하면 오히려 상대방이 반성하고 돌아올 그런 기회를 막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럴때는 유하게 외유내강으로 겉으머리는 유하게 하면서 속으로는  강함을 가져야 됩니다.

 '주여 내가 이것이 옳은 줄 알고 저것이 틀렸지마는 내가 강하게 하면 저  사람이 뒤에 돌아올 수 있는 그 길을 방해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내가 나는  몸뚱이를 가지고 일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마찰이 잘되고 주님은 형체가  없으시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 제가 일하는 것처럼 되어지니까 주님에게 부탁을  합니다. 무형의 주님께서 그 일을 맡으셔서 그들에게 감동시켜서 돌아와 참된  교리와 신조를 알게 해 주옵소서' 하는 그런 기도를 하는, 겉은 유하지마는 속은  강한 그런 사람이 되어져야 되고 털끝만치라도 양보나 타협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대적은 곧 진리의 대적이 우리 대적이요 영감의 대적이 우리  대적이요, 내나 같은 말이지만 복음의 대적이 우리의 대적이요, 주님의 대적이  우리 대적이요, 하나님 대적이 우리 대적이 되지 그 외에 딴 것은 우리가 대적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부패성이 들어서 대적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내 스스로의 부패성을 그것을 꺾고 억누르고 뽑고 이래 서 그런 일에 썩을  것으로 인해서 싸우지 말고 썩을 것으로 인해서 대적되지 말고 영원토록 있는 이  복음의 진리, 영감, 주님의 대속, 주님 이편에서 그것은 우리가 생명을 바쳐서  잘 보수해야 되고 또 잘 그대로 온전히 전해야 될 막바로 생명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양보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여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늘 전투의 그 태세를 갖추어  가지고 전투하는 일을 그쳤을 때에는 별수없이 타락했던, 아직까지 옛사람을  완전히 없애버린 죽고 부활한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잘못하면 우리는 육체의  대적, "우리의 싸움은 혈육의 싸움이 아니라" 하는 그 말은 육체로 싸운 것  물질로 싸운 것 세상에 없어질 그것 때문에 싸우는 우리들은 아니다. 영감과  진리 주의 복음 곧 주님을 위해서 싸운다는 그 싸움을 가리켜서 종류들을 말해  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대적이 무엇인가 이 대적을 바로 알고 대적관이,  대적관, 대적을 보는 그 대적을 똑똑히 보고 전투를 해야 되지 잘못하면 그  대적을 혈육의 대적으로 싸우는 그런 싸움이 되면 역연 마귀의 수입만 되고  죄악의 수입만 되고 우리에게 대속으로 생명에 속한 것이 그만 사망되기  쉽습니다. 생명에 속한 것이 사망되기가 쉬운 것이니까 이것을 잘 조심해서  대적관을 바로 가지도록 이렇게 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조심 안 하면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강조하다가 그만 진리에서  삐뚤어지기 쉽습니다. 인간이 뭐 강하게 주장하고 열심히 하는 것이 그것이 몸과  생명과 소유를 다 기울여서 열심히 한다고 해도 교리와 신조에 빗나면 그만  마귀의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못하면 은혜로 역설하다가 그만 잘못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잘못 발표하면 자주 같이 있는 사람은 넉넉히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를 할  수 있지마는 혹 모처럼 듣는 사람은 이해를 못하면 오해하면 그 사람이 은혜를  받지 못하기 쉽다 그거요.

 지난 밤에 ○○○목사님이 증거하는 가운데에, 본인이 그리 알고는 있지  않는다고 내가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도성인신이 종합체라 하는 그런 말을 술어를  썼는데 그것은 잘못 발표한 것입니다. 종합체는 벌써 일찍부터 신성 부인을  이단으로 정죄했고 인성 부인을 이단으로 정죄했고, 신성 인성 신인양성 종합체  혼합체 이것은 일찍부터 정죄를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또 우리와 같은 형체는 없으신 분이시요 그의 본체는 무한하신 분인데  그의 본체와 인성이 하나될 수는, 종합체 혼합체 이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성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인성은 완전한 사람이 신데 다만  신인 양성이 일위가 된 것입니다. 일위. 일위는 한 몸이 아니고 일위라 하는  것은 은밀히 말하면 역사하는 역사는 한 역사를 한다 하는 것입니다. 한 역사를  함이고 한 위치를 지켜서 한 사명을 가지고 같이 동하고 정하고 같이 역사하는  그 역사만 하는 것이지 본체에 우리가 거기에 가서 접해서 그 본체와 우리의  본체와 이렇게 합하는 그런 종합체가 아닙니다. 양성일위라는 그 이상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양성 일위 일체라 하면 벌써 그 정죄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고 우리가 거듭난 것은 성령과 진리로 거듭난 자인데 영은 성령과 진리로  거듭을 났고 우리의 이 육이라는 심신은 거듭난 영에게 속해 있으나 실은 중생된  영과 대립이 되는 이 죄 아래 아직까지 죄의 주인을 벗어나지 못하고 죄의  주인과 하나가 돼 가지고 영을 대 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은 영이 참 마음의 주인이요 영이 몸의  주인인데 이 주인을 모르고 주인을 죽인 악령과 악성과 악습 이것이 하나의  단합이 돼 가지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미혹 시키고 우리를 주장하는 이것이  주인인 줄 알고 자기 주인 중생된 영에게 소속하지 안하고 이것들에게 소속해  가지고 행동을 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믿는 생활하는 것은 자기의 그 영이 소유하고 있는 이 심신을  영에게 복종을 시키고 영과 화합을 하고 영과 한덩어리가 되어 가지고 이제는  과거에 주인으로 삼았던 악령 악성 악습 이것으로 더불어 대적해서 이것을  이기는 그런 일을 연습하고 또 이겨서 완전히 중생된 영의 편이 되고, 영의 것이  되고 영에게 소속 하고. 영을 자기의 주로 모시고, 영을 따라 살고 영의 것이  되어 가지고 사는 이 일을 하는 것이 우리들이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영은 주님의 것이 됐고 주님에게 속하게 됐고 역사적으로는  주님의 지체가 됐고 이렇게 된 것이지마는 아직까지 이 심신은 이것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영육이 다 합해서 온전히 주의 것이 되고 주님에게 속해서  주님으로 인하여 사는 이런 것이 되도록 하려고 우리가 노력을 하고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화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중생된 그 영이 우리의 심신을 중생된 영에게 복종을  시키고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하나가 되려고 애를 써도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중생된 영을 돕는 성령님이 도와 가지고 같이 해서 우리의 심신에게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에게 속한 자다' 기본구원을 자꾸 가르칩니다.

기본구원을 중생된 영을 통해서 성령님이 중생된 영과 함께 그래서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된 것을 자꾸 증거해 준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게 증거를 해서 점점 우리의 심신이 중생된 영의 것이 되고, 영의 것이  되게 하는 그 영감 영감화되고 영감에게 복종되어서 영감으로 화되는 것 다시  말하면 그것 좀 말이 어폐가 있겠지마는 영감으로 염색되는 것 영감으로  염색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새사람을 입으라' 입으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님과 중생된 영이 함께 우리의 심신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사실을 증거해 주는 그 역사를 합니다.

 그러면 그 역사를 할 때에 우리가 전체적으로 신구약 성경이 이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이 신구약 성경에서 이 사실을 배워서 우리가 지식적으로 이해도  하고 인정도 하고 이렇게 하나 그것은 다 어디까지나 지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거기에 이 피동적으로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체가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영감을 구경하는 것이요 영감을 보고 아는 것이요 진리를 보고 아는 것이요.

진리를 그렇게 이 진리라고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진리에 물든 건  아닙니다. 진리로 물들인 것은 아닙니다. 다른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물들여  놓은 그 색깔을 탈색을 시키고 영감과 진리로 물을 들이는 그것을 가리켜서  ''옛사람은 벗어 버리라" 비유컨데 탈색되는 거와 같고 ''새사람 입으라" 하는  것은 새로 영감과 진리로 물들이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영감화되고 진리화되는 것은 그것은 언제든지 현실에서만  되지 현실이 아닌 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는  영감화 진리화 되어 있는 우리의 심신의 기능을 만드는 것이 그것이 우리 현실에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현실이 오기 전에 자기가 미리 성경을 배우고 인정하고 있는 그것은  인정을 한다고 해도 완전 인정, 완전 믿음 완전 진리화 되는 것, 진리와 완전  불변의 결합이 되는 것 이것은 언제나 현실에서만 되지 현실 아니고는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은 우리에게는 각자 자기에게는 자기 현실이 우주에 제일  귀한 모든 처소입니다. 요소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영원한 처소가 하늘에서 오는  영원한 처소가, 마련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인 만인의 쫓은 형편 뭐 사람들이 평가하기를 저 현실은 참  좋다 하는 그런 좋은 어떤 좋은 평가를 받는 현실이라 할 지라도 그현실은  자기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 현실은 자기에게는 아무 무필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에게는 미혹을 주는 것뿐이지 자기의 현실을 보배로운 현실 그  현실에서 하나님화되고 진리화되고 하나님되는 것 아니지마는 하나님화됐기  때문에 빛깔은 볼 때에는 하나님과 꼭 같이 되는. 하나님 형상을 입는 하나님의  지능으로 자기의 지능을 삼는 이것이 되어지는 귀중한 현실인데.

 이 현실을 이해 못 하고 자기에게 필요 없는 삼의 현실을 자기가 좋다고  평가하면은 자기 현실을 보배로운 이 가치를 모르고 이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현실을 통해서 영감화가 되고 진리화가 되고 이제는 감염되고 동화되고  감화되어서 영감이 돼 버렸고 진리가 돼 버리는 이렇게 지극히 귀중한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 현실이라는 현실에서만 됩니다. 그 현실에서는 반드시 이미 알고  있는, 기본구원으로 받고 있는 영감과 진리를 자기가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계약적으로 약속적으로 또 교리적으로 법적으로 이떻게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살아난 것인데 현실에서, 살아난 것이 영원히 죽지  아니할 수 있는 연단을 받아 가지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것으로서 완전히  살아남이 되느냐? 그것이 현실에서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적으로 말하면 살아난 것이 현실에서 죽느냐  살아난 그대로 안 죽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안 죽으면 영생한다는 말도  있고 또 죽은 것이 살아난다는 말도 있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실상은 죽어 있는  그것이 살아나는 것이요. 또 이 법적으로는 살아난 것이 실상에서 안 죽으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에 해당된 영감과 진리를 배반치 아니하면 배 반치 아니한  그 부분은 진리의 것이 됐고 영감의 것이 됐습니다. 왜? 그럴 때는 반드시  비중이 있고 비판이 있고 거기에는 투쟁이 있는 것아기 때문에 '네가 영감과  진리로 대속을 익었으니 네가 이 대속을 내놔라. 대속을 안 내놓으면 너  죽인다.' 속을 내놓으라 할 때에 세상이 해할 수 있는. 모든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 이런 것은 그들 이 다 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해할 터이니까 영감과  진리로 내가 구원 얻은 이 구원을 내놔라' 이럴 때에 그것을 내놓지 안하면  영감과 진리를 내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내놓고 영감과 진리에 하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다  그것이 뭐이냐? 죽음입니다. 그것이 죽음이요 그것이 세 상에서 죽고 살아난  것이오. 죽음으로 사망을 이기고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전투를 벌써 해 가지고 승리자로 현실에 영감화가 됐고 진리화가  된 것이기 때문에 벌써 마귀도 이겼고, 세상도 이겼고, 죄도 이겼고, 사망도  이겼고 다 이긴 자입니다. 이긴 자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준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둘째 사망의 해가  해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하면, 대속을 입은 대속을 입은 것으로  말하면 현실에서 안 벗으려고 하면은. 예수님 안에 새 것을 입으려고 하면은  옛것을 내놔야 됩니다. 옛것을 내놔야 되는데 그게 우리가 영감과 진리대로  살려고 하면은 오는 박해입니다.

 박해에, 오는 박해에서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 그것을 다 내놓으라 해도 그것은  다 내 줄지라도 영감과 진리를 내어 주지 안할 때에 자기 그 현실에 자기의  심신의 기능은 영감과 진리를 세상 모든 것을 다 내어 주고, 영감과 진리에게  속했고, 진리의 편이 됐고 영감과 진리의 것이 됐고, 영감과 진리를 입은  승리자가 됐기 때문에 그것이 완전 성화입니다. 부분적인 완전 성화요 완전  그것이 승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명체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요 현실에서만 영감화가 되고 진리화가 되고 또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악령화 악성화 또 모든 자기의 죄악의 행위의 자기 중심의 피조물  중심의 행동인 그 악한 행실 연습. 악습. 악습 화된 그것을 악습화 악성화  악령화된 것을 훼딱 벗어버리고. 그 시간에 벗어야 이제 영감화 진리화 중생된  영화 이렇게 되어지는 것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둘 중에 어느 것이냐 하는  이 싸움이라 하는 것은 우리 현실마다 반드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어느 것보다 어느 것이냐 하는 데에서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현실이 이렇게 귀중한 현실이기 때문에 현실마다 전투  없는 현실이 없고 현실마다 어느 것을 벗고 어느 것을 입느냐? 벗고 입는 일이  없는 현실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대속을 벗든지 또 그렇지 않으면 악령과 악성과 악습의  옛사람을 벗든지, 그것을 말하기를 옛사람이라 그렇게 발표했는데 옛사람을  벗든지 새사람을 벗든지 무엇이든지 그 현실에 서 자기의 심신의 기능은 어느  것을 벗고 어느 것을 입든지 둘 중에 하나라 그거요.

 그러면 우리들이 이미 법적으로 예수님의 대속적으로 입고 있는 이 새사람을  현실에서 벗지 안하면 벗지 안하면 완전히 입은 것이 되고 벗지 안하면 이  현실에서 옛사람을 완전히 벗어버리게 됩니다. 벗어버리는게 되기 때문에 완전히  벗어버리는게 됐으니 옛사람을 이긴 것이 됐습니다. 옛사람은 정복했습니다.

 옛사람을 정복한 것은 악령을 정복한 것이요 악성을 정복한 것이요 악습을  정복한 것이요, 악습은 죄를 말하고 악성은 그 불의를 말합니다. 불의는, 불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그것이 아니고 피조물이 중심이 위주가 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을 가리켜서 불의라 하기 때문에 칭의는 하나님 그 중심 그분에게  피동된 것을 가리켜서 의라 이렇게 말하고 죄는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계명  법칙을 어기는 것을 가리켜서 죄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렇게 현실에서는 영감과 진리로 우리가 완전히 변화함을 받는 것이 현실에서  됩니다. 자기가 지식적으로 평소에 알아 있던 그것이 요 현실에서 이제 자기가  입느냐 벗느냐, 영감화가 되느냐 악령화가 되느냐 또 중생된 영화가 되느냐  악성화가 되느냐?  그러기에 영이라는 것은 하나님만을 위하는 것으로 지음 받은 것이 영이기  때문에 영이 죽었다고 해 가지고 죄의 이용물이 되는 것 아닙니다. 악령에게  이용물 되는 것 아니라. 그거는 본질이 하나님에게만 이용되고, 하나님만  나타내고, 하나님만 위하는 것으로 되어 졉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결이  꾼어지니까 그 기능이 죽어서 기능 역사가 없는 것이지 그것이 뭐 변질되어서  악령과 죄악이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아직까지 영을 모르는 데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 지금 퍼져 가지고 있는 교리와 신조 가운데에는  '사람이 타락해도 하나님의 형상이 다 죽지 안했다. 그러기 때문에 불신자에게도  뭐 선이 있고 하는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다 죽지 안하고 남아 있는 그 형상이  지금 역사해서 그렇다 하는 그거는 대이단의 말입니다. 그러나 그거는 크게  이단이라고 정죄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대이단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그 사람이 이종교에서 선을 말하고 도덕을 말하나 그것은 악령이  저희 나라를 보수하기 위해서 저희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서 저희 나라를 위해서  세운 제가 세운 악령이 세운 법칙이라 그거요. 법칙이기 때문에 악령이 세운  법칙이지 하나님이 세운 법칙이 아니기 때문에 그 법칙은 강하면 강할수록이, 그  종교가 크고 건전하고 오히려 견고하면 할수록이 하나님의 대적면은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똑똑히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우리는 영감화 진리화 악령화 또 악성화 악습화 우리의 중생된  영화 이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실에서만 자기의 심신의 기능이  하나님과도 결합이 되어지고 중생된 영과도 결합이 되어지고 영감과 진리와도  결합이 되어집니다.

 언제나 결합이 되어지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분의 역사의 그 은혜와 결합이 되어지는 것이지 하나님 본체에 결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성도 하나님의 본체 결합은 아닙니다. 그는 다만 역사의  결합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양성일위라 하는 것은 지위마다 할 일이 있고 책임이  있는데 그 할 일과 책임이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성과 인성이  둘이 혼합 된 것 아닙니다. 그것이 종합된 것 아닙니다. 언제든지 신성은  하나님이시요 인성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어떤 사람이 '인성은 피조물이라' 이러니까  '어떻게 인성을 피조물이라 하나? 이건 불가침의 신성인데 신성을 범했다. 이래  가지고 한창 좀 바짝 떠드는 일이 있었지마는 그 일은 여러 사람이 말하지  안했고 그때부터 몇 사람만 말하다가 나중에 그것은 잦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이라 하는 것이 지금은 아마 거의 다 인식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요 현실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자로 계산을 하면,  논리상 입은 자로 계산하면 안 벗으면 되고 현실에서 안 벗는 것이 현실에 벗나  안 벗나 이것이 결정되기 때문에 안 벗으면 되고 또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자이지마는 실상으로 말하면 실상은 아직까지 옛사람으로 되어 있는 거기 속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그것을 벗고 갈아 입으면 됩니다. 갈아 입으면.

 그런데 지난밤에도 재독할 때에 내가 들어 보니까 영감에 대해서 많이 강조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 영감과 진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우리의 이 심신의 기능이라는. 이 심신의 기능이라는 것은 이것은  아주 질그릇과 같고 참 가치없는 그릇이며 이거는 아주 깨질 그릇이요 아주  형편없는 무가치한 견고성이 없는 그릇이지마는 여기다 영감과 진리를 담으면  그것이 영감화 진리화 되어서 "하나님 께로부터 난 자가 지키시기 때문에 악한  자가 만쟈지도 못하고 해하 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요게 진리입니다. 요  진리를 틀리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하지 않습니다. 요걸  여러분들이 꼭 회개를 해야됩니다.

 그 무엇을 그 사람이 뭐이 뭐 '일어서라 앉아라' 하는 그 교리를 말한 사람이  그 뭐이지. 이름이? 한참 그때 말했는데 그 사람 이름이 뭐입니까? 여러분들이  이 육의 대적은 대적으로 알지마는 교리와 신조의 대적은 대적으로 알지를 않기  때문에 위험성이 많고 나중에 가서 삼키기 쉽다 그말이오. 생명을 내놔도 교리와  신조는 양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그 서적을 제가 금정산에 집회할  때에, 그 사람이 이름이 뭐인지? 그 청년 자기 아버지는 고신에 장로요 찬양  지휘자입니다. 그 사람이 ○○○목사님 처제에게 장가를 갔습니다. 그런데 ○.

누가 아노 ○이라고? ○선생 맞았어. ○ 선생이 그때 와 가지고 집회 참석하고  그 책을 주면서 '목사님이 가르치는 게 꼭 이 책과 같습니다. 이렇게 말해서  나는 그래 그 책을 아주 반갑게 받아 가지고 그 집회 중에 내가 잠깐 몇 페이지  보니까 사이비합니다. 좀 다릅니다. 아닙니다. 달라서 이거는 아니라고 그  사람에게 내가 그때에 그 말을 집회 끝나기 전에 그 사람에게 말을 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그때에 ○○○목사님이 거기에 학생 시절인데 거기 왔던가? 내가 분명히  그 ○○○집사님, 그 모친되는 ○○○집사님 에게는 내 가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고 이렇고 이런 책이 있는데 아주 같은 것 같지마는 사이비한  것이니 이런 데에 어쩌든지 빠지지 안하도록 혹 내가 그때에 없을지라도  집사님이 단단히 해 요걸 듣고 있다가 그 ○목사님에게' 미국 가고 난 다음인가?  그때 아마 가기 전 같습니다. 모르지마는. 요런 것을 요러니까 요것을 말해  달라고 내가 ○○○집사님에게 내가 부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목사님도 내가 언제 한번 만나 가지고 그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몰라도, ○목사님 말이, 내가 묻기를 그때는 학생 때 미혼 때니까. '너는 지금  네가 공부해 가지고 뭣 되겠느냐?' 이러니까, 말하기를 '우리 한국 교회를  보니까 조금 뭣한 사람들은 전 부 세상으로 다 나가 버리고 이렇게 아주 무능한  사람들만 하나님의 이 도리를 메고 있으니까 뒤에 유능한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빼앗겨 지고 이거 교회의 장래가, 이 복음의 장래가 어찌 되는가 하는 그 면을  생각하면 많이 걱정이 됩니다.'  '그래 그 면을 생각하면 걱정되는데 그 면을 그러면 걱정되면 누가 감당을 해야  되느냐? 너는 거기에 대해서 관심이 어떠냐?' '그 면을 생각하면 마음에 자꾸  부담감이 오고 마음에 고민이 옵니다.' 그래 가지고 그때에 '네가 확정을  지워라' 그 정원 거기에서 기도하고 '확정을 짓겠는데 지금 단정을 내가 복음을  위해서 복음에 헌신하겠다고는 말하지는 못하겠으나 지금 그것이 마음 가운데 늘  눌려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다가 그다음에는 확정지운 것을 저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때 학생 때입니다. 오래 됐습니다.

 우리는 이 교리와 신조를 말하는 데에는 호리만 틀려도 호리만 틀려도 그것이  가면 갈수록이 큰 이단을 자아내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기에서 교리사를 공부하고 교회사를 공부하기로 말하고 또  지금부터는 그 조직신학을 ○목사님에게 말해서 좀 거기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가 하는 그것을 공부해야 되겠다 하는 그것을, 요 진리만 말하니까  요 진리를 못 알아들어 못 알아 들어서 이렇게나 저렇게나 말만 하면 되는 줄  알아 말만 하면. 모든 인간에게 정죄를 안 받아야 되고 인간에게 정죄 안 받는  것보다 하나님에게 가 가지고 정죄를 안 받아야 됩니다.

 정죄를 안 받는 그 교리를 말해서 사람에게 죽임을 당해도 대적하는 그 모든  사람은 무궁세계에서 자기가 대적한 그의 머리 앞에 가 가지고 무릎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영원히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승리가 우리 앞에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운에 벌로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아무나따나 일시 사람의 인기를 끌기  위해서 이떻다 저렇다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감동적으로 인기적으로 그런  위험한 일을 안 해야 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영감과 진리를 버리지 안하고 심신이 영감과 진리를 영접할  수도 있고 현실에서 영감과 진리를 버릴 수도 있고 현실에서 영감과 진리를  영접한 그것이 영감화된 것이요 진리화된 것이요 주님을 영접한 것이요 주님으로  더불어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결합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심신은 종합체기 때문에 그 일시에 그렇다고 해 가지고 다 남은 것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때에 도리를 인해서 세 상과 자기가 싸우다가  자기의 전부가 자기의 부분적만이 아니고 그 현실에서 자기의 전부가 진리와  영감편이 되려고 진리와 영감의 것이 되려고. 진리와 영감과 결합을 하려고, 안  떨어지려고 이렇게 하다가 그때에 희생이 한목 다 됐으면 다 됐으면 그것이  순교요 그것 이 완성이요 한꺼번에 몽땅 다 살아난 것이요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살아나왔기 때문에 그때 그 부분적 거기에 해당된 것만 살아났고 나머지기는  시험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살아나온 것은 미결로 다시 돌 아온 것이요 이제  죽었으면 그때에 완성이 되어지는 요 순교관을 우 리가 여기에서 바로 똑똑히  요렇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 지금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우리가 영감과 그 진리화되는 것 그러면  우리가 영감에게 피동되고 진리에 되동되면은 우리가 영감에게 피동되어서  영감에 피동된 그것으로 결정됩니다. 현실에서 결정돼 버립니다. 현실에 영감과  진리를 배반한 걸로 결정돼 버립니다.

 영감과 진리화 됐으면 그 영감과 진리화 됐으면 그 영감과 진리는 완전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면 만족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감화 진리화 것이 완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완전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뭐이냐?  그의. 예를 들면 사상면이나 도덕면으로 말하면 영감화된 그 영감과 진리는  우리에게 뭣 하러 왔느냐 하면 영감은 우리의 자신을 이렇게 성화시키고 진리는  우리의 자신과 행위를 성화시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는 우리 행위를 그때에 옳고 참된 것으로 고정을 시켜  버렸고 자기의 행동을 또 영감은 자기 자체를 영감화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감과 진리는 무엇을 하는 것인고 하니 그 영감과 진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러 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온 영감은 그 본질이 어떤  것이며 본성이 어떤 것인가? 진리는 본질과 본성이 어떤 것인가? 영감과 진리의  그것의 본질과 본성은 하나님이 목적하신 목적대로의 그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소원하셔서 하나님이 소원하셔서 모든 목적을 정했고  소원하셔서 모든 예정을 하셨고 모든 창조를 하셨고 하나님이 모든 섭리를  하시는데 하나님의 하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것, 그것의 뭉텅이로 온 것이  영감이요 진리입니다. 알겠습니까? 그것의 뭉텅이로.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뭉텅이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그 능력,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피조물 그것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당신이 제일 원하시고  원하시는 당신이 원하시는 당신이 좋게 평가하는, 당 신이 제일 기뻐하는,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당신이 제일 온전타고 하는 그것이 그 덩어리가 그  덩어리가 비유컨데 그 덩어리가 우리 에게 와 가지고 우리의 심신 안에 있어  심신을 고거화시켰다 심신을 고거화시켰다 그말은 그 심신을 하나님만을 제일로  아는 화시켰다. 하나님만을 기뻐하는 것으로 화시켰다 하나님으로만 능력 삼는  것으로 화시켰다 그렇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이 있는 것은 그것은 영감이 그렇게 우리 안에 와 가지고 그렇게  역사합니다. 그거는 하나님에게서 온 능력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능력이요  영감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진리는 하나님이 역사 하나님은 영감으로만 역사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 곧 영감이요 그 영감이 역사하는, 나타나서,  나타나는 역사를 할 때 에 그것을 가리켜서 진리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서 영감이 나왔고 영감에게서 진리가 나왔고, 그러면 진리는  외부적 행동을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 진리요 영감은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우리 자체가 되어지게 하는 것이 영감입니다.

 요 말을 요걸 여러분이 잡고 가면 됩니다. 요 영감과 진리는 영감 그 자체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 마음. 로마서 8장에 보면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 자가 아무도 없는데 성령은 아십니다. 성령은 하나님 마음과 하나라  그말이오. 하나님의 마음이라 말이오.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인데 하나님의 마음에 거기에 나온 마음이라 말이오. 그런데 영감은  하나님의 마음인데. 마음의 역사인데 하나님 마음과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는 무슨 일을 하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일 하는 것이 영감이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영감입니다. 또 진리는 하나님이  원하고 일하시는 그 능력화되게 해서 능력으로 변화시켜 능력화되게 하는 그  능력이 되게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렇게 영감과 진리는 우리에게 와 가지고 역사하시는데 영감과 진리로  살아났다 하는 것을 요 도리를 알면 어떻게 살아난 것을 알 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영감이 있다 말한다면 영감이 있다 그 말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존귀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이 피조물 인생아, 네가 이 사람이 돼라. 이런  사람이 돼라.' 이런 사람이 돼라 하는 그것이 당신 같은 자 되라 하는  그말입니다.

 당신같이 되라는 당신이 소원하는 그 소원, 그 소원 뭉텅이가 우리 속에 와  가지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소원하신 마음과 같은 그 마음으로 우리 마음이  변화되어지는 그것이 영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 있으면 다입니다. 영감 있으면 전지 전능이 거기 다 있고  완전이 있고 완전한 사랑이 있고 다 있습니다. 진리가 있으면 벌써 그것이 이  피조물들에게 역사하는 역사를 합니다.

 그러기에 우주와 영계는 진리가 지었습니다. 진리가 지었는데 진리는 어디서  나왔느냐? 영감에서 나왔습니다. 영감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영감화되는 것은 피조물이면서 하나님화 되는 것이오.

그것이 피조물이면서 언제나 피조물이나 하나님으로 자기에게 충만해져서  하나님으로 물을 들여서, 하나님으로 물이 들어서 모든 피조물을 상대할 때  피조물이 볼 때는 하나님으로 볼 수 있도록 요렇게 이제 완전히 변색이 됐다  그말이요.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 이래 하는데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말로 발표하는  것이 이것이 다 되는 게 아니라. 요것만 말만 알아도 소용없어 이럴 때에  여러분들이 내 속에 영감되는 그 영감을 여러 분들이 받아서 영감으로 알아져야  되지 영감으로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영감으로 모르면 요 속에서도  모르고 반대될 수도 있다 그거요.

 그러므로 지난밤에도 그 재독할 때에 보니까 그릇의 그 가치 그릇이 아무리  좋아도 속에. 비유컨데 속에 보석은 값이 비싼 것이고 이 그릇을 뭐 은으로  만들었든지 무슨 무슨 뭘로 만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가치가 속에 있는 보석과  가치가 크게 차이 있는 가치를 가 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일 좋은 그릇에  속에 있는 보석이 제일 작게 담겼고 제일 나쁜 그릇에 속에 들어 있는 보석이  제일 많이 담겼으면 그때에 그것의 이 그릇 저 그릇 가치를 평가해 때에 어느 것  이 제일 비싸겠습니까? 속에 있는 보석 많이 담긴 것이 냄새가 나고 제일 더러운  그릇이라도 보석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담겨 있으면 그것이 가치가 더 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이 영감과 진리로 그 속에 담는 그것이 보석 담는 거와  한가지인데 아무리 선천 후천의 모든 것이 훌륭하고 천하에 있는 모든 것을  통달할 수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 영감과 진리가 담겨 있지를 하나도 안 했으면  불탈 것 뿐입니다. 아무리 천해도 영감과 진리가 제일 좋은 것보다 조그매라도  영감과 진리가 많이 담겨 있으면 그 사람이 권위 있고 가치가 큽니다.

 그러므로 영감과 진리는 우리 속에 와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게 하는 것이  영감이요, 또 바로 소원하게 하는 것이 영감이오.

 그러기 때문에 영감은 우리에게 껍데기로는 신구약 육십육 권 도리를 우리에게  바로 알게 하고 인정하게 하고 또 속으로는, 문서로 나타낸 그 속에 하나님이 그  마음을 우리에게-하나님 마음에서 진리가 나왔는데-그 마음을 우리와 하나되도록  해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 마음화되어서 하나님 마음이 우리 속에 와서 역사해서  이제는,  바울이 말하기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그말은 영감화되어서 영감이 주장헤 가지고 영감과 진리가 주장해  가지고 사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진리는 그 생애 법칙을 다 바로 잡는 것이  진리요 영감은 진리로 이 모든 생애를 바로 하도록 역사하는 것이 그것이  영감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영감화된 그 영감은, 진리화된 영감은 현실에서 영감과 진리를  버리느냐 영접하느냐? 영감과 진리를 버리지 안하고 내 심신의 기능이 영감화가  되고 진리화가 되어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벌써 하나님화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피조물의 주인의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조물의 주인의 위치를 가지고 있고  피조물을 통치 할 만왕의 왕의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전능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전능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그 영감은 전능의 능력을 가지고 있고 전지의  지혜를 가지고 있고 진리도 전능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거는 믿음으로만 됩니다. 믿음으로만, 믿을 때에 되어지는  것이지 안 믿으면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헛일이라 그말이오.

 그런고로 영감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역사를 하고 있으며  어떤 존재로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압니다. 하나님이 성경  말씀으로 말씀하신 그 말씀을 인해서 우리가 압니다.

 말씀을 인해서 알면은 말씀을 인해서 속에 있는 내재하신 그 영감을, 받아  가지고 영감과 연결되어서. 진리와 연결된 것이 영감과 연결되고 영감과 연결된  것이 하나님의 그 역사와 직접 연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체 연결은  아니지마는 하나님의 모든 생명의 역사 와 연결되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전지 전능의 존재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영감과 진리와만 내가 뻘어지지 안하고 하나가 됐으면  피조물에 벌써 대리 주인의 위치를 가지고 있어 말하기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이제 것이나 장래 것이나 모든 것이 너희 것이라'' 소유권자를  말했습니다. 소유격이 되어 가지고 있는 것이고 모든 것을 통치할 수 있는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는 통치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영감과 진리가 와서 화되었을 때에 그것은 거룩한  제사장이요. 성결한 선지자요, 또 권위 있는 왕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내 밖에  있는, 현실은 내 밖에 있는 것 아닙니까? 내 밖 에 현실도 있고 내 안에 있는  부패성이 내 현실에 요소가 되는 것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내 밖에 있는 현실을 내가 상대할 때에 영감과 진리와 하나돼 가지고.

그러면 영감과 진리와 중생된 영은 하나가 됐고 하나가 된 것이 이것이.

신인양성일위는 되지마는 일체는 안 되는 것 처럼 우리는 영감과 진리와 영이  하나됐으면 하나됐지마는 언제든지 영감은 하나님의 역사요 진리는 하나님의  역사의 나타남이요 우리가 진리된다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진리된다 말 아니고  우리가 영감된 다 말 아닌데 영감화됐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요렇게 영감화 진리화가 되어 가지고. 그러니까 내 영은 그리 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몸의 기능이. 기능으로 움직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껍데기는 이것은 예수님의 기본구원에 서 다 생명 부활을 받습니다.

 기도 제목에 대해서 엊저녁에 ○○○목사님이 해석할 때에 그 기도 제목이 조금  아직까지 똑똑히 모르는 것같은 그런 것이 보여졌는데 그걸 여러분들 자꾸  명상해 기도를 많이 하면 이리도 저리도 아니고 그 하나에 가 가지고 하나에,  진실이라 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거룩이라 하는 것도 이래 많은 걸 구별해  가지고 하나에 똑 도달하는 것이 그것이 거룩이라 그말이오. 그것이 지금 돼  가지고 잡고 있어야 되지 지금 안 되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명상을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에 영감과 진리와 내 중생된 영은 하나되어 있고 우리의 심신의 이  기능이 하나가 되어 가지고 모든 내 밖에 있는 그것들을 상대하는 게 좋습니다.

이것이 제일 좋습니다.

 이게 제일 좋고. 그러면 상대하는 게 제일 좋고 그다음에 좋은 것 은 뭐이냐?  내가 진리와 영감에 하나돼 가지고 대외의 오든 걸 상대 하지 안하고 밖에 있는  그 모든 것을 딱 접촉할 때에 그로 인해서 '아이구 주님이 필요하다' 그로  인해서 '진리가 필요하다' 이제 그것에게 피동이 되어 가지고 주님을 찾는  그것이 둘째입니다.

 그것에게 원인이 되어서 그로 인해서 거기에 피동이 되어 가지고 주님과 진리를  찾는 그것이 이것이 죽은 데서 살아오는 것이요, 또 살 아 있는 자가 그 죽은  것들을 상대하는 그것이 있으니까 우리는 살 아 있는 것이 죽은 것들을 상대할  수 있는 이것을 주님이 원하시고 이것을 가리켜서 ''깨어 있으라'' 그말은 깨어  있으라 말은 이것으로 살라 그말입니다.

 ''깨어 있는 자에게는 도적과 같이 임하지 못한다" 그말은 깨어 있는 자에게는  털끝만한 것도 도적맞지 않는다. 손해보지 않는다, 현실 현실에 다 수입만 보지  손해는 보지 않는다 하는 그말입니다.

 이렇게 돼 가지고 바울은 자기 자체는 영감과 진리와 중생된 영과 자기의  심신의 기능이 하나가 되어 가지고 그 밖에 상대하는 그 모든 것을 상대합니다.

 이러니까 주님과 진리와 영감과 나와 결합이 내 밖에 접촉하는 그것보다 먼저  접촉 연결이 됐습니까 내 밖에 접촉되는 그것으로 인해 서 그것이 먼저 접촉  연결이 되고 그다음에 후연결입니까? 그러면 처음에 말한 것은 후연결이요  선연결이요? 뭐입니까? ○○○목사? 뭐라 하노? 그것은 선연결이오.

 나중에 영감과 진리는 다 버리고 제 마음대로 이러다가 어떤 일을 턱 닥치니까  '아이구 일을 닥쳤으니 이거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면서 그때사 진리를 찾고  그다음에 많은 기도 명상하고 묵상하는 가운데에서 영감을 찾는 그것은 이제  그것은 뭐입니까? 하나님과 진리와는 연결은 후연결입니까 선연결입니까?  후연결이지요? 세상이 먼저 연결이 됐고 하나님과 연결은 후연결이라 그말이요,  하나님과 연결은. 먼저는 세상과 연결되어 가지고 있다가 연결돼 가지고 있는  거기에서 튀어나와 가지고 이제 하나님을 찾아 가지고 연결을 하려 하는 것이라  그거요.

 그러므로 만물과 접해서 접하기 전 하나님과 접하고 연결하는 것이 먼저 된 이  사람으로 우리가 사는 것이 바울이 말하기를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 신다''고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지 안하고 깨어 있는  자요.

 자는 자는 아무리 중생됐지마는 이것을 잊어버리고 지금 세상으로 잠들었다  말이오. 세상으로 잠들어 세상으로 곤해서 취해 가지고 그만 죽은 자와 꼭 같다  말이오. 영감과 진리와 실은 법적으로 잇겨 가지고 있는 것이 끊쳐진 자와 같이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의 현실에 도적맞기 쉽습니다.

 요렇게 있으면서 ''주께서 내 곁에 서셔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는 영감과  진리로 하나되어 있고 하나되어 가지고 대외의 모든 것을 접했지마는 대외의  접할 때에는, 접할 때에는 '내 안에 주님이 계신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는  주님과 주님은 자존자시며 또 영감은 자존의 그 전부가 다 내게 온 하나님의 그  역사의 지능의 도덕의 완전인 전부요 또 진리는 그가 또 한 걸음 나타나 가지고  더 알아보기 쉽게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 진리인데  '내 안에 나와 동행하는 영감과 진리가 크시다' 이렇게 자기가 접촉을 하면서  "내 곁에 섰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이제 는 자기와 영감 진리가  하나되어 있지마는 자기가 상대하는 이 모든 인간이나 모든 피조물 상대하는 이  피조물과 어떤 박해나 무엇을 상대할지라도 그것과 내가 이제 내편이 되어 있는  내 대장이 되어 있는 주님과 비교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그때에 ' 주께서 내 곁에  서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아무리 자기가 선연결을 되어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현실을 당했을  때에는 언제나 주님과 그 현실과 비교하고 대조해 보는 요것이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요것이 있어야 됩니다.

 바울은 그것을 대조해 보니까 그것은 피조물이요 내 곁에 서신 주님은 그것의  창조주시요 주권자시요, 내 곁에 내편에 서 가지고 서신 분은 주권자시요  창조주시요 주재자시요 또 영원 자존자시요 전 지 전능자시요 그거는 이분에게  다 지배를 받아 가지고 움직이지게 된다는 내 곁에 서신, 나와 함께하시는 내  곁에 서신 주님을 발견 하고 이 주님과 그거와 비교를 하고 비중을 하고 이래  가지고 보다 주님이라는 것을 결정 지울 때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와서 일하실  수 있고 그때에 결정이 되지 안한 때는 안 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비교하고 비중을 달 때에 그것이 결정될 때에 그때에  이제 자기는 견고해졌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견고케 하셨다"  주님과 그거와 비교 비중을 자기가 할 때에 자기와 함께하신 주님이 크시고  어떻다는. 자기 안에 계시는 주님이지마는 역사적으로 자기 곁에 계시는 것으로  한번 이렇게 비중을 보고 살피어 보는 걸 말합니다. '내 곁에 서신 주님은  이것을 지었다'  공산주의가 독침을 가지고 와도 '내 곁에 서신 이 주심이 이것을 지었다. 이  주님이 이것을 다 경영했다. 주님이 이것을 살게 하셨다. 주님이 이것을 지금  일으켜서 이것을 만드셨다 주님이 지금 나 에게 독침으로 이와 같이 지금 하고  계신다 이것은 분명히 내 구원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서 당신이 아시기  때문에 이것을 예정도 하셨고 창조도 하셨고 섭리도 하셨고 나타나셨다. 이거는  주님이 하셨다.'  보기에는 우리의 육안으로 볼 때에는 독침이나 그 배후에는 진리를 요구하는  진리 요구가 있고, 그 배후에는 나로 하여금 영감대로 사는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자기가 발견하게 될 때에 자기는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빌립보 옥중에서 바울이 자기가 견고한 것도 자기 곁에 서신 그 주님을  발견하고서. 자기 안에 물론 주님으로 산다 했습니다. 주님으로 살지마는 자기와  함께하셔서, 곁에 섰다 말은 자기와 함께한다 말이오. 자기와 함께하시는 주님이  어떤 주님이라는 것을 자기가 거기에서 비판하고 평가하고 인정될 때에 그때에  바울에게는 자기도 모르게 기쁨의 찬송이 터져나왔습니다.

 그 터져나오는 그것이 기쁨의 찬송이 터져나오도록 바울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바울의 심신의 기능을 변화시킨 그 변화의 능력이 내나 지동도 하게 할 수 있고,  변화의 능력이 우주를 불로 태울 수도 있고 없는 가운데 만들 수도 있고 하는  그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자기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후연결도 있고 선연결도 있는데 선연결이 제일 좋고 후연결이라 할지라도  후연결을 해도 할 수 있습니다.

 후연결을 하면은 많이 놀래고 난 다음에 연결되지요. 선연결은 놀래지 안하고  연결됩니다. 기쁨으로 연결되고 후연결은 놀래고 연결 된다 그말이오. 놀래고  연결되어도 어서 자기가 자기 곁에 서신 주님을 발견해야 됩니다. 자기 곁에  서서 역사하시는 그 주님을 발견 해서 '주님은 모든 것보다 능하다' 하는 이것을  발견해서 깨달아질 때에 모든 시험은 온전한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곁에 선 주님을 발견해서 그분이 누구신 것을 내가 비판하고 평가하고  묵상해서 인정이 되는 것만치 자기는 강해지고 담대 해지고 진리화되고  영감화되기 때문에, 곧 진리화되고 영감화됐다 말은 전능화되고 전지화됐다  말이요. 주재화됐다 말이요. 주권화됐 다 말이요.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지마는.

그것이 벌써 하나님의 형상화됐다 그말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자기는  견고해지고 모든 악의 세력에서 구출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애 여기에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사자의 입에서  건지운 그것은 그 사자는 이 세상에 악의 세력을 가리켜 말함인데 그 악의  세력에서 어떻게 해서 건지워겼습니까? 내 곁에 서신 그분이 건져 주셨다 말이오  내 곁에 서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건지워졌습니다.

 이러니까 내 곁에 서신 그분을 자기가 깨달을 때에 강해졌고 또 그분을 자기가  보고 알 때에 자기에게 대적하는 모든 악의 세력은 오히려 그게 입이 봉해겼고.

악의 세력 그것이 자기에게 지배를 받고, 자기의 것이 됐고. 완전히 왕권이고  왕위를 가지기 때문에 그것을 통치하는 것이 되어지는 것이니 그때 순교하는  것이 그것을 영원한 통치자로 자기 것을 만드는 것이 결정되는 시기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아침에, 영감과 진리가 뭐인가? 사람이 아무리  병신이요 등신이라. 등신이라도 영감만 충만하면 그것이 아무 등신이고 병신이고  불학 무식이고 해도 그 사람이 영감이 충만 하면 그 사람이 뭘로 충만합니까?  전지로 충만하고 전능으로 충만 하고, 하나님의 소원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소욕으로 충만하고 그만 하나님 본체는 아니지마는 하나님의 움직이는  움직임으로 충만 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능한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데 이것을 모르고서 이것은 무시하고서 땅에 인간들의 모든 복술, 모든  끝이 없는 모든 역사 이야기. 모든 이런 것 모든 그것 이 다 궤휼이요 그것이 다  속이고 속이는 말이요 사탄의 깊은 것인데 사탄의 깊은 것인데  그것을 사탄의 깊은 것을 깊은 것 인제 얼마나 깊은가 해서 이것을 뽑아 버리기  위해서 우리가 공부해야 되겠고 사탄의 깊은 그것을 깊은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가 이용하기 위해서 그것을 가져야 되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도와 비교되는 평가를 같이 보고서 하나님의 영감과 진리가  작아도 이게 많으면 된다 하는 그 말은 그릇이 좋으면 은 그릇이 좋으면은 속에  알맹이야 보석이야 있든지 없든지 그릇 좋으면 제일 값이 비싸다 하는 그런 거와  같다는 것을 비교해서 말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고린도후서에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의 보배 가 질그릇에 담겼다" 하는 그 말이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영감과 진리가 있으면, 자. 그 사람에게 진리가 충만하 다 하면은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충만하다는 말과 다른 말입니까?  그 사람 안에, 그 사람안에 진리가 충만하다 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충만하다 하는 그 말과 다른 말입니까 같은 말입니까? 어떻소? 같은 말입니까?  요 확신이 있어야 돼요 같은 말입니다.

 또 주만 바라보고 주만 좋아하고 주만 사랑하고 주의 욕심으로만 가득 찼다는  말과 꼭 같은 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감과 진리가 와 가지고 영감화 진리화 되면 완성이요  다입니다. 그 외에 찾을 것이 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왜? 그분이  모두 인간을 만들었고 모든 인간이 지걸거리는 그런 것이 다 그분에게서  창조되어 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영감과 진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며  어떤 능력을 가진 것이며 어떤 존재라는 것을 요것을 똑똑히 알아 영감관을  똑똑히 알아야 되고 진리관을 똑똑히 가져야 됩니다.

 내가 다를 때에 그 이야기 하면 좋겠는데 ○목사님이 요새 지금 무엇을 쓰는지?  아마 뭐 지금 여기 잘 안 오는데 자주 안 오는데 ○○○목사님이 뭘 기록해서  보낸다 할지라도 녹음해 보내도 소용없어. 여기 와야 됩니다. 와야, 와서 진리와  영감을 알아야 되지  지금 뭐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에 대해서 뭘 쓴다 하는데 잘못 쓰면 큰일납니다.

지난밤에 ○○○목사님 설교한 가운데에 혼합체라 하는 그 한 마디만 있어도  정죄 다 받아. 책이야 뭐 몇십 권 있어도 다 그걸로 정죄받아서 완전히 다  말살되고 완전히 불살라지고 만다 그말이오. 우리는 얼마나 한 마디 '어' '아'가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런고로 현실의 귀중성과 영감과 진리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영감화 진리화  되는 것은 현재에서만 되는데 영감화 진리화 되면 영감과 진리는 뭘하는 것이며  무슨 실력으로 가는 것이며 그 성질이 무엇인가? 성질이 어떤가? 성질이  하나님의 성질이오, 또 모든 감정이 하나님의 감정이요 욕심이 하나님의  욕심이오. 그만 하나님은 아니지마는 하나님과 꼭 같은 것이 되어지는 것이  영감화 되어지는 것이 요 진리화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이래 가지고도 현실을 만날 때에는 나는 자기가 영감화 진리화만  자꾸 이렇게 거석하면은 자기가 비교를 모르게 되기 때문 에 내 곁에 섰다고  똑똑히 말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들어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내 곁에 서셨다"  이떻게 말했습니다. ''내 곁에 서셨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배우는 가운데에 이해를 못 하는 교리와 신조에 무슨  이해 못하는 게 있으면은 그것을 자꾸 명상해 가지고 아무리 명상해도  모르겠거든 나한테로 오라 그말이오. 와 가지고 알아야 되지 얼마나 어렵고  어려운 건데 여기에서 이단이 반대되는 학설이 여러 수십 수백도 넘습니다.

 이런데 이렇게 뚫고 나가는 이 길인데 그것을 그냥 예사롭게 이렇게 생각해  가지고서 그것도 그거다 그것도 그거다 해 가지고는 안 된다 말이오. 도무지  구별성이 없기 때문에 굳게 서지를 못합니다. 구별성이 없기 때문에 구별하는 게  없다 그거요  그래서 우리는 이 곁에 서신 분을 발견해 가지고, 곁에 섰다 그말 은 나와  함께한다는 그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곁에 섰다 이렇게 표시 해 놨어. 나와  함께하는 분과 이것과 언제든지 비중을 같이 비교를 해 봐요. 비교해 봐 가지고  보다 내 곁에 서신 분이 어떻다는 보다 크시다는 것을 발견이 될 때에 그때에  자기는 견고해지고 모든 자기를 대적하는 악의 세력은 자기에게 정복을 당하고  그것은 완전히 점령하고 그것도 구출하고 그것의 왕이 되고 그것의 주인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 일시 다른 사람에게 어떤 그 인격이나 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거나 그런 것에 위주로 하는 그런 위험성은 절대 말아야 됩니다.

 언제나 할 때에 주님이 보고 있어. 주님 당신이 보고 당신이 인정 하면 됨니다.

교회 부흥도 그렇소. 교회 '부흥도 당신이 인정하시면 여기에 내 피로 속한 자를  보내야 되겠다' 하면 보냅니다. 구속함을 받은 자만 예택받은 자만 옵니다.

 택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택정이라 말은 그 안에서 하나님이 택했 다고 말하는  그것을 택정이라 말하고 또 예택이라 말하는 것은 존재가 없었는데 그것을  '존재가 어데 있었느냐? 존재가 있는 가운데에서 그랬다'고 후택설을 말하는  그것을 방비하기 위해서 예택이라 그것도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 하나 말할 때는 모든 아닌 것을 배격하기 위해서 자꾸 요 리 빼딱 빼딱  하는 거는 요리 빼닥 돌아 갈 필요가 없는데 거기에 배격할 것이 있고 요리 빼딱  하는 것은 조게 배격할 것이 있고 왜? 수많은 이런 것들이 다 창살같이 이래  가지고 있는데 그 창살에 하 나도 안 걸리고 나가는 것이 이 생명의 길이요  진리의 길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교리와 신조를 구별해서 거룩하고 진실한 걸음을 걷는  사람은 이 세상은 와닥닥 다 무너집니다. 이것도 다 헛일 저것도 헛일. 이러기  때문에 뭐 불파니 예언파니 지시파니 하는 이것이 갈 길을 모르기 때문에 다  가로 탈선돼 가지고 이리 삐뚤고 저리 삐뚤어진 거라 말이오.

 제가 며칠 전에 금정산에. '이거 가나 못 가나?' 권사님들이 '아 이구 우리도  못 갈 줄 알았는데 가는데 죽기 전에 한번 가시는 것 한번 가 봅시다.' 하도  그래 쌓아서 한번 갔습니다. 어째 작대기를 짚고 그래 올라가기는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니까 거기 많은 사람들 이 와 가지고 기도를 합디다.

 기도하는 청년들이 많이 와서 기도를 하는데 참 답답해. 기도를 하는데 회개할  것을 모르니까 '어떻게 회개해야 됩니까? 회개의 능력을 주옵소서. 회개의  능력을 주옵소서. 자꾸 회개의 은혜를 주시고 그거는 회개의 은혜를 달라고만,  회개하는 은혜를 달라고만 이렇게만 말을 하지. 또 어떻게 해야 될 걸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러니 참 답답해  기도를 하려고 애를 써 오기는 왔지마는 기도할 길을 가르쳐 주지 못했기  때문에 못하고 있다 말이오. 기도할 길을 배웠으면 '내 갈 길을 이 길인데 내가  이 길을 못 가니까 이 길을 가게 해 주옵소서 이 길 가게 해 주옵소서. 이럴  때는 또 이걸 방비하게 해 주옵소서. 이걸 싸우게 해 주옵소서.' 싸울 대적을  확실히 자기가 깨닫고 걸어 갈 길 걸어왔으면 자기의 기도 할 제목이 환하고  자기가 또 회개할 것이 환하고 이럴 건데  뭘 이거는 참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그냥 '어디로 가야 됩니까?' 하는 그  말밖에는 안 된다는 것을, 그러니까 하다가 안 되니 부득이 자기의 주관의  감정을 일으켜서 한번 고함도 지르고 이러고 저러고 하나마 그것이 항상 인적  요소에서 돌고 있고 인적 요소가 신적 요 소에 연결되는 그 접선이 없더라  그말이요. 답답하다 그말이요. 많 은 청년들이 와서 기도하는데 그 보니까  하나도 자기의 갈 길을 아 는 사람이 없어'어떻게 해댜 됩니까?'  그러니까 갈 길을 모르니까 어디로, 힘써 애써 열심히 믿기는 믿 고 싶은데  어떻게 걸어가야 될 것을 모르니까 '이렇게 힘써 볼까?' 하니까 불로 힘쓰다가  이리 가다가 자꾸 이래 헤매는 것이 이 불파 니 뭐이니 지시꽈니 감정파니  환상파니 이렇게 말하는 것 이것은 다 신학자들이 다 책임을 져야 되는 이  중대한 죄입니다.

 바른 길로, 뭐 그런 게 아니고 그저 성경은 말하기를 '네가 요리 걸어서 요래  가면은 요래 걸어가면은 요런 노정이 올 것이다. 그런 노정에는 건너라 요런  노정이을 터이니까 갈래길이 올 터이니 그 때는 갈래길 요거는 가지 말고 요리  가라.' 이래 갈 길만 환하게 보 여 주면은 그 길을 못 가서 그 길 가기만 힘쓰지  길 찾는 데에 그 애를 쓰지 안할 터인데 길을 몰라 놓으니까 이리 저리 방황하고  허공에 이렇게 하고 있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마귀는. 철학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신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해야 예수 믿는 좋은 목회자가 된다' 철학은 기독교의 반대입니다.

원수입니다. 철학은 주관주의라는 것을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철학은 주관주의요 기독교는 주관주의가 아니오. 기독교는 계시주의요.

하나님께서 당신이 위로부터 열어 보이는 계시주의인데 이 철 학주의는 아닌데  철학이라야 되는 줄 알지, 철학은 주관주의라 그말이오.

 이제 불파니 뭐이니 하는 이러는 그것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마는 대개는 자기  주관주의로 돌아가서 자기 주관화시키는 것이고 자기 주관화시켜 죽여야 될 주관  자기의 감정과 죽여야 될 감정 그걸 자꾸 그화 시켜 그걸 고조시키니까 결국은  옛사람만 강해지고 새사람 은 자꾸 파묻히게 된다 그거요  그런고로 어쩌든지 많은 시간을 들여 신구약 성경 말씀을. 그러기에 기도를  벌로 하면 안 돼요. 아는 걸로, 성경 말씀 말이오 그만 기도를 벌로 하지 말고  '가서 뭐 기도 할꼬? 그래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결국은 주관주의 되고  탈선됩니다.

 이러니까 성경의 말씀에 "악인의 길을 좇지 아니하며" 시편 1 편이든지  무엇이든지 하나 성경 하나, 하나 성경 하나 들고 그 성구를 들고 그대로 지금  자기가 하려고 자꾸 이래 나가다 보니까 시작은 거기에서 시작했지마는  마지막에는 모든 진리로 다 이래 통과해서 이래 가기 때문에 나중에는 부르면  자기가 자기도 모르게 변화가 되어서 성경의 이 말씀도 생각하면 자기 비위에 딱  맞고, 저 말씀도 생각하면 자기 뜻에 딱 맞고, 저 성경이 말하는 욕심도 자기  욕심에 딱 맞고. 그러면 자기도 자기가 모르게 성경과 자기와 일치가 되어진  것을 자기가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기도하고 자기 욕심이 주격이 돼 가지고  기도하지를 말라 그말이오.

 지금 기도하는데 기도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이천육백사십일 명이 기도회에  참석을 하고 있습니다. 남은 사람들도 빨리빨리 우리가 권해 가지고 전교인이 다  이 기도회에 참석을 해야 하나님 앞에서 인도하는 바른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하여금 감당하게 하신다'  피할 길이 뭐입니까? 피할 길은 그 시험 닥쳤을 때에 가장 적이 되고 오랑캐가  되어 가지고 있고 원수가 되어져 있는 것 같은 그 계명이 나에게 악을 피하고  생명의 길 이요. 계명이 생명 길이요 그 길을 가는 힘은 우리의 기도입니다.

 기도와 계명은 우리에게 피할 길 주시는 것입니다. 피할 길 주시는 것  불뱀에게 놀래서 죽는 자들에게 구원을 말하니까 불뱀을 만들어 가지고 장대  위에 달아놓고 '이걸 바라보면 된다 그말이 무슨 말이오? 그 불뱀은 뱀에게 물린  자들에게 그렇게 아주 원수스러운 불뱀은 예수님을 상징한 것입니다.

 이 세상 죄악에게 이렇게 모두 삼켜 있는 그자들은 자기네들의 원수로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자기가 해상에서 놀랄 때에는 자기 원수로 보는 유령으로  보이는. 유령이 유령이 아니고 주님이 유령이 아니라 네 자체가 변질됐기 때문에  유령으로 보여지는 것이니 네 자체의 변질로 말미암아 상해지는 그것은 네  자체의 변질된 변질의 변질 이질인 그것을 네가 바라봐라 그래야 구원 얻는다  하는 것으로 구리쇠 뱀을 만들어 가지고 달아 가지고 바라보는 자는 살아  바라보는 자는 다 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주관을 부인하는 것이 신앙의 초보요 부인하지 않으면  헛일입니다.

 뭐 이것에게 붙들리고 저것에게 붙들리고. 가족에게 붙들리고, 돈에 붙들리고  친구에 붙들리고, 감정에 붙들리고, 행락에 붙들리고, 취미에 붙들리고 자기  사욕에 붙들리고, 붙들려 매인 줄이 한이 없는데 제가 약한 힘 가지고 언제 그걸  뚫고 자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하나씩 둘씩 마구 끊어야 됩니다.

 오늘 아침에는 늦어져서 그만 권찰회는 없습니다. 기도하다가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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