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 소망

 

1984. 9. 24. 월새

 

본문: 누가복음 9장 51절∼62절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사마리아에 제자들이 주님을 모시고 갔을 때에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지 아니하고 배척을 했습니다. 그 배척을 당할 때에 제자들의 마음이  심히 분개해서 주님에게 고하기를 '우리가 불이 와서 이 사람들을 다  소멸시키도록 그렇게 말을 하랍니까?'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 생각에는 그런 말 하면은 예수님이 좋아하시고 예수님이 들으실 줄  이렇게 알고 말을 했는데 예수님께서 꾸짖으시고, 그런 말하는 것을 잘못하는  행위라고 꾸짖으시고 다른 데로 갔습니다.

 제자들이 전에 주님을 따를 때에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도 될 때는 되고  안 될 때는 안되고 이렇게 에누리를 해 가지고서 늘 주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차차 따르는 가운데에서 이제는 에누리하는 버릇이 없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대로 된다 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됐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매우 장성한 믿음이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뽕나무를 명하여 바다에 심기라 할지라도 순종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인고 하니, 믿음이 있으면,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 믿음  행위냐? 믿음 행위는 자기 주관대로 발원된 것이 믿음의 행위가 아니고, 자기  주관대로 동기가 돼 가지고 하는 것이 믿음의 행위가 아니고, 믿음은 지식도.

지식도 주님에게 피동된 지식이어야 하고 또 판단도 계획도 소원도 모두가 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야 믿음입니다.

 자기가 주님의 지식대로 행동한다고 해서 믿음은 아닙니다. 주님의 지식.

말하자면 성경 말씀대로 했다고 해서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은 성경 말씀대로  했다 할지라도 그 동기는 얼마든지 성경 말씀에 위반된 동기를 가지고도 성경  말씀대로의 그 방편을 취할 수도 있고 또 목적도 다르고도 성경 말씀대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은 동기나 목적이나 그런 것이 다  주님으로 인해야 되고 방편도 주의 법칙을 따라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네가 뽕나무를 명해서 사람이 뽑지도 안하고 캐지도 안하고  운반하지도 안하고. 또 바다에, 어디 물에다가 심을 수가 도무지 없는 이치라  이치에 안 맞는 일이지요. 이치에 안 맞는 일이라 할지하도 그것이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시고 그렇게 주님이 명령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라면 다 된다 그런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면 다 그대로 됩니다. 신구약 성경에 있는 말씀은  다 그대로 되는 것인데. 그대로 되는데 자기가 그 말씀을 행해야 될 자기인지,  공연히 다른 사람이 지켜야 할 말씀을 제가 지키는 것이 되면 안되겠습니다.

말씀을 지키지마는 제가 목적을 딴 목적을 가지고서 그렇게 지켜도 안 되겠고  그런 동기를 가지고 지켜도 안 됩니다.

 그러기에, '뽕나무를 명해서 바다에 심기라' '믿음이 있으면'고 믿음이 뭐인가?  네가 뭐 무슨 하나님의 뜻이면 강한 뜻이 있고 약한 뜻이 있고 또 보스레기 뜻이  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면, 영감이라면 그 진리가 진리가 외부에  있고 영감이 있고, 영감과 진리는 한덩어리인데, 우리가 진리는 우리가  마음대로, 제 마음대로 잘못 이용할 수가 있지마는 영감은 이용을 당하지 안하는  것입니다. 네가 진리를 행하는 그것이 내나 영감에 복종하는 일이 되면,  진리는 우리가 지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진리 지식은 제 마음대로  악용도 하고 남용도 하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대해서도 그렇게 유혹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혹할 때에 성경  말씀대로 '네가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성전에 뛰어내려라 그라면 너를  붙들어서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라' 그거 성경 말씀인데, 성경 말씀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안했느냐 그러니까 성경 말씀대로  해라' 이렇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그럴 때에도 성령은 동행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말할 때에 성령님은 마귀의 말에 동행하지를 안한다 그  말이오. 동행하지를 안하고 저 혼자, 마귀 저 혼자 했지,  그런데 예수님은 외부의 말씀만 가지고서 이와 같이 하는 분이 아니시고 영감을  거석하기 때문에 '네가 성신은, 성신은 그것을 허락지 안하고 있는데 네 단독이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말하지마는 너는 하나님에게 대해서 역적  행위를 하고 있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하고서 나중에  꾸짖었습니다. 너는, 그에게만 경배하라. 흘로 그만 섬기라. 그런데 네가,  이것이 하나님의, 네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요, 또 내게 대해서는 그런 말하는  것은 네가 네 마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남용해 가지고 그렇게 했지, 악용해  가지고 그렇게 했지.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라고서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되 그 말씀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제가 뭐 이렇게 악용할 수도 있고 저래 자기 위해서 또  악용할 수도 있고 사용할 수도 있고 잘못 오용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꾀우기  위해서 성경 말씀 가지고서 그렇게 하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말세에는 제일  미혹 중에 큰 미혹이 뭐이냐 하면은 성경 말씀 가지고서 미혹시키는 것이 제일  큰 미혹입니다. 여기 이단들은 성경 말씀 가지고 '성경이 이랬기 때문에 네가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그렇게 성경 말씀을 가지고서 꼬운다 그 말이오.

 성경 말씀 가지고서 사람들을 꼬울 때에, 그러면, 성경 말씀 가지고서 꼬우니까  그 말씀과 함께 있는 성령님도 동행을 하느냐? 동행을 하느냐? 성령님은 그  사람에게 이용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늘 주의하는 것은  말씀대로 행한다고 해서 다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하는 그것이  성령님이 동의를 하시고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그것이 아니면 믿음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말씀대로 행하는 거기에 성령이 같이 할 때에 성령이 인을  쳤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이 인을 쳤다 그 말은 하나님의 성령님이 됐다  옳다 그럴 때에 믿음이 된다 하는 말을 늘 말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어떻게 이렇게 행할 때라도 그때에 내가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그것이 순전히 하나님을 위하고 또 이웃을 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자기  심령이 평안해지고 그런 방편으로 말씀을 행할 때에는 자기 속에 평강이 있고  자신이 있고 확신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말씀과 성령이 같이 하시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고, 말씀대로 행하기는 행하지마는 이때는 성령님은  동행하지 않는다 하는 것을 자기가 또 짐작할 수 있는 그런 일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말씀대로 행한다고 해도 성령님이 동행하지 아니하면 안 되고.

성령님이 동행하고 안 하는 그것은 우리 자체가 변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변화가 돼져야만 거기에 대해서 성령님이 동행하시지 그렇지 않으면  동행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말에 거하면'  하는 그런 것은 성령님이 동행한다 말이 아니고, '내 말에 거하면' 너희에게  법칙으로 선포해 준 이 법칙을 네가 지키면 말이오. 이 법칙을 네가 지키면 이  법칙을 지키면, 뭐라고 했습니까? '참 내 제자가 되고' 하는 그 제자가 되는  것은 그 법칙을 지킴으로 인해서 자신이, 성화된다 말은 영감이 자기에게 와  가지고서 영감의 사람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대로 지키는데에는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수도 있고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데 마귀의 자식이 되는 것도 있고 그렇습니다. 고 성경  말씀은 표현된 하나님의 진리이지마는 이 진리는 악용도 할 수가 있고 남용도 할  수가 있고 얼마든지 할 수가 있지마는 성령님은 거기에 동행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날 환자를 고치니까 '안식일날 병  고치는 거 보니까 하늘에서 온 분이 아니고 이거는 분명히 마귀에게 속한 자라'  이렇게 자기네들이 판단을 해 가지고서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을 정죄한  것은 그들이 무얼 가지고 정죄했느냐 하면은 성경 말씀 가지고 정죄했습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죽이라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안식을 범하니까,  안식일을 범하니까 예수님을 마귀라고 이렇게 말하고 정죄해 가지고서 십자가에  못박아 안심하고 담대히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데 안식일을 지키면서 문자대로 기록되어 있는  그 안식일 그 날짜만 법칙으로 지킬라고 생각했지 그 속에 안식일 지키라는 그  진리의 말씀과 그 안에 내재적 영감. 그 안에 내재해 가지고 있는 성신의 감화  감동이 있는 그 감동을 따라서 살지 안하고 이 말씀대로만 이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안식일 지키는 것은 다 바른 것이고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안하고 그 병자를 고치는 그것은 잘못이라 이렇게 생각했더라  그 말이오.

 그것은, 그래 가지고 정죄했는데 그럴 때에도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도 말씀을 지킬라고만, 말씀대로 행하려고만 애를 쓰지 안하고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영감을 찾는 방편이다. 영감을 찾는 방편이니 말씀대로  내가 행할 때에 영감이 동의해 줘야 된다. 영감이 동의해야 되고 영감이 함께  협동을 해야 된다. 영감이 협동하는 데에는'-영감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산  하나님의 역사지마는 진리는 지극히 큰 전능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마는 산  존재는 아닙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아닙니다. 피조물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지마는 인격적인 존재는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나타나 있는 성경  말씀은 저거가 문서는 이렇게 저렇게 자꾸 악용도 할 수가 있고 오용도 할 수가  있지마는 그 진리는 저희들이 오용할 수 없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그때도 영감대로 산 사람들은, 나다나엘이 가 가지고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오, 네가 왔나?' 칭찬을 했어요. '너는  간사함이 없고 참 진실한 이스라엘 사람이라' 이렇게 칭찬을 했을 때 '언제 날  봤습니까?' 이랬습니다. '언제 날 봤습니까?' '아, 네가 무화과나무 밑에서  나에게 기도하고 나한테 간구하는 것을 내가 그때 거기서 봤다.'  그러면, 그 사람이 속에 성령으로 더불어 서로 교제하고, 영감 없는 외식.

문서대로만 행하는 그 행위를 하려고 하지 안하고, 영감, 영감이 같이 하는,  영감이면 자기 양심을 움직이고, 자기 양심 안에 영감이 있으니까 자기 양심상  '이것이 요대로 하는 게 옳다' 그렇게 싶을 때에는 그때 영감이 접선할 수 있는  그 일이라 말이오. 그러나 자기가 말씀대로 하지마는 자기 양심에는 허락지  않는다 말이오. 양심으로 말하면 '요거는 남을 속이기 위해서 내가 요 말씀대로  한다. 꼬우기 위해서 이와 같이 한다. 요거는 내가 내 사욕을 위해서 이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거는 누구를 넘어트리기 위해서 한다.' 요걸 자기가 안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자기 양심도 찬성하지 안하는데 성신의 감화는 찬성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 양심대로 진실되게 외식 하지 안하고 간사함을 가지지 안 하고  요렇게 진실되게 사는 나다나엘에게 대해서는 '내가 너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할 때에 내가 너를 만났다' 이라니까 이제 그 나다나엘이 보고서 '아,  이분이 내나 기도할 때에 내가 바라보고 찾던 고 영감 곧 그때는 영감으로  나타났는데 이 영감이 곧 이 사람으로 나타나셨구나. 그러기 때문에 이분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셨구나.' 하는 것을 그 나다나엘은 알았다 그거요.

그러니까 그때 그 사람은 당장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믿고서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문서대로 사는 거기에만 주력을 했지 문서대로  행하는데에 성신의 감화가 여기에 같이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껍데기 성령이 문서로 기록해 놓은 문서대로만 하는 요것만  가지고 주장을 하다 보니까 타락하고 타락해 가지고서 저거는 문서대로  주장한다는 그 문서대로 행하는 그것이 들어서 메시야를 죽였고 메시야를  배반했고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성경 말씀대로 하면 된다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성경 말씀은 입문입니다. 성경 말씀은 영감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저기에 영감이 동참을 할 때에 고 일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고일이 믿음이 되는 것이니 믿음이 되면 뽕나무를 명해서 바다에  심기라 해도 고대로 순종하였으리라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네가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네 욕심대로 네 사욕대로 선택해  가지고서, 이 말씀 이 말씀 선택해 가지고 네대로 행하는 거기에는 성령이  동행하지 안하지마는 하나님의 성령님이 너에게 이렇게 하라 해서 그렇게 할  때에는 네가 껍데기는 성경 말씀대로 지키는 것이요 속에 알맹이는 성령의  감화가 너에게 감화해서 감화를 하는 것이요, 이러니까, 너는 진리와 영감과  너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일에는 뭐 이 산을 명하여서 바다에 던지우라  해도 고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이 제자들이 여러 번 교훈을 받고 삼 년 동안이나 지나갔으니까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면 뭐이든지 그대로 된다 하는 요거는 그들이 믿었다  그거요. 믿었지마는. 믿었는데 왜 주님의 능력이 그들과 같이 하지 안하고  거부를 했습니까? '이 불이 와서 사람들을 다 태워서 소멸하도록 그렇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시면 다 된다는 것을 믿고 주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렸지마는 주님이 말씀해 주지 안하고 거부를 했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주님이 제자들과 같이 이렇게 한자리에  서서, 한자리에 서서 있는 거와 같이 지금도 그와 같이 돼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은 지금 우리와 같이 계시지마는 볼 수 없는 신령한 영으로 같이 계신다 그  말이오. 그리스도의 영으로 같이 계신다 그 말이오. 그러면, 도성인신, 신인  양성 일위로서 되어 있는 양성 일위이신 예수님께서 인체를 가지시고 이렇게  우리에게 나타나면 우리가 똑똑히 알겠는데 인체를 가지지 안하시고 영체만  가지시고 우리와 함께 이와 같이 하고 계시기 때문에. '세상 끝날까지 같이  하신다' 하는 그것은 영으로 같이 하십니다. 영으로 같이 하시니까 그때는 그  제자들이 주님에게 '말씀 하십시오. 말씀하면 다 됩니다. 온 천하를 당장 이  천하를 없애라 해도 말씀하시면 천하가 없어집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을 했지마는 주님이 말씀해 주시지 안했으니까 그들이 거부를 당했다 그  말이오.

 그러나 지금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다 우리에게 기록해서, 한목 기록해서 다  이렇게 줘 놓고 이 말씀대로 행하라 이라니까, 그때에 주님이 나타나, 보기에  육안으로 볼 수 있도록 그렇게 나타나셔 가지고서 거부하고 찬성하는 것이  그때는 보여졌지마는 지금은 그것이 보여지지 안하는 때라 말이오. 신령하기  때문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는 고 귀는 무엇을 말했느냐 하면은 양심을 말한  것입니다. 양심이라야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영감이 같이 하는 것을 알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말씀대로 행하고, 말씀대로 행하는데 자기  양심이 동행을 하고, 알겠습니까? 자기 몸이 말씀대로 행하고 양심이 동행을  하고 요래도 요게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됐는지 안 됐는지 모릅니다. 양심이  동행하고 영감이 동행해야 비로소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명하는 것이고 나는 그  명령에 복종하는 피동하는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믿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요거 지금 내가 말을 잘 표시를 잘못해서 여러분들이 잘 들을는지,  잘 알면 벌써 이렇게 구차하게 말할 것 없이 그만 척척 알아지는데,  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말씀과 그 주님의 육체가 같이  있어서 주님의 입을, 육체의 입을 통해서 해라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니까 그들이  확실히 주님이 거부하는 것을 알았지마는, '불을 명하여 소멸하게 하오리이까.'  이랄 때에 주님이 거부하는 것을 그들이 알았지마는 오늘은 신구약 성경 말씀만  기록돼 있고 영적으로 계시기 때문에 이 말씀대로 제가 행할 때에, 말씀대로  행하는 데에 주님이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거부를 하는 말씀인지 주님이  동행하는 말씀인지 우리가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주님이, 내가 성경 말씀을 보고 내가 행하는 데에 영감이 이 말씀과 같이  동행을 하면 권능이 있어 가지고서 되어지는 것인데, 말씀을 제가 오용을 하고  제가 도용을 한다 말이오. 말씀을 도둑질 해 가지고서 제가 도용한다 말이오.

영감 없는 말씀대로 한 것은 도용이라 그 말이오. 도용할 때에는 권능이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런데, 그때는 주님이 보이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는 것인지 안 하는 거부하는 것인지, 찬성인지 거부인지 이것을 알 수가  있지마는 오늘에는 찬성도 눈에 보이지 안하고 거부도 보이지 안하기 때문에 저  단독이 독단으로 이 말씀을 이용하기가 쉬운 때라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대로 행해도 일이 되지 아니하는 그것은 뭣  때문에냐? 성령의 감화가 같이 하지 않고 말씀을 제 단독이 도용하는 행위가  됐기 때문에 암만 말씀을 가지고 증거해도 소용없고 말씀대로 제가 고대로  실행을 해도 결과가 좋은 결과가 나타나지를 아니하는 것이라 그거요.

 그래서 이 제자들이 그때 거기에까지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마는 고 하는  것이 저희들의 감정적이요 저희들의 사욕적이요 저희들에게 있는 그 사랑이 없는  진리와 영감 사람대로가 아닌 이런 모든 감정, 복수, 사욕, 순전히 옛사람  옛사람들이 들어 가지고서 주님에게 '명하시옵소서. 그라면, 허락만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이렇게 하랍니까, 이렇게 말하랍니까?' 이렇게 말할 때에  말하는 그자들이 뭐이냐 하면은 순전히 옛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말에  대해서 순종을 한다고 하면은 순종을 한다고 하면은 주님이 하나님에게 범죄하는  일이 되어진다 그거요. 만일 그 제자들이 영감대로의 말을 주님에게 하면 주님이  거역합니까? 거역 못합니다. 주님은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주님을 대면해 가지고서 절대적인 권능이 있는 주의  말씀이지마는 주님의 말씀을 저거들이 소원하는 말씀, 주님이. '이 말씀을  하랍니까' 이렇게 저희들이 소원하는 그 말이 순전히 악령의 소원이기 때문에  주님이 그 소원을 듣지 아니하시고 거부했다 말이오. 그거 들으면 주님이  범죄함이 되어지기 때문에.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된다고  이렇게 하는 것을 우리가 믿고, 말씀대로 됩니다. 되지마는 그 말씀을 우리가  악용을 하든지 도용을 하든지 할 때에는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지를  아니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지 안할 수 있는 악용과 도용이 언제 악용과  도용이 되느냐 하는 그것은 우리가 짐작을 하는 것이, 사랑에서 하는 말이  아니면은 전부 다 도용이 됩니다. 또 사랑에서 하되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면 전부 도용이 됩니다. 또 사랑도 육체의 사랑, 이 남녀  이성의 사랑도 있고. 서로 자주 친하니까 사랑해지는 동류의 사랑도 있고, 또  피의 혈통의 사랑도 있는 것인데. 그런 사랑 가지고 하는데에는 이거는 아가페  사랑, 평가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하는 거기에도 또  안 된다 그 말이오. 사랑으로 한다고 해도 잘못하면 정욕적으로 정욕의  사랑으로도 하기 쉽고 동류의 사랑으로도 하기 쉽고 혈육의 혈통의 사랑으로도  하기 쉽다 그거요. 그러니까, 자기가 그 혈통의 사랑에도 안 되고 정욕의 사랑도  안 되고 동류의 사랑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가지고서 죄인들을 죄에서 구출해 가지고 대속하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면, 우리가 대속적인 이 성격에 속한 것이 아니면  참사랑이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러면, 사랑이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것을 도용하는 것이요, 자기가  사욕대로 하는 것이면 도용하는 것이요, 자기 속에 자기중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다 도용하는 것이요, 또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고 그  소망을 위해서 하는 것도 다 도용하는 것이요, 모든 복수하는 그런 감정의 것도  다 도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그때는 도용을 하려고  해도 주님이 번연히 거기 같이 계지면서 '안 된다' 이렇게, 그 소원대로 '불을  명하랍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이럴 때에 '그래라' 했으면 '불이 나서 태워라'  이럴 것인데 주님이 허락지 안하니까 그들이 도용을 못 했다 그거요. 그때는  주의 말씀을 그들이 도용을 못 했습니다. 주님과 동행할 때에는 도용을 못  했지마는 주님이 그때 영으로만 계시고 도성인신하셔 가지고서 오시기 전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체의 주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저거 마음대로 도용하고  남용해 가지고서 그것이 자기네들의 멸망이 되고 말았다 그 말이오.

 멸망이 되고 말았는데,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할 때에는 실수,  뭐 하나님 말씀을 얼마든지 도용할 수 있는 그런 속에 악독이 회개가 되지  안했지마는 주님과 같이 다니니까 속에 악독이 주장할 때에는 주님이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은 거부를 당하고 안 됐지, 실수가 없었지마는 그때 주님 아니었으면  그때 실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때에 주님께서 같이 계시면서 삼 년  동안이나 도를 가르치고 그다음에 마지막에 떠날 때에 오만 걸 다 가르쳤지마는  부탁하기를 그렇게 부탁했습니다. 너희들은 지금 너희들이 주장을 할 수가 없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얻고' 그렇게 말했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얻는다.

네가, 성신의 감화가 너에게 와 가지고서 역사하시게 되면 너희들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신 성령님과 함께 네가 그 말씀대로 행하기 때문에  권능이 역사하지마는 너희들이 성경 말씀을 도용하기 쉽다.

 그 제자들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열흘 동안 기도해 가지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는데 열흘 동안 기도하는 가운데에 그들이 뭐 얼마나 전심전력을  기울였고 생명을 아끼지 안하고 기도했으니까, 그때 참 아주 긴장한 때고 또  정신 차려서 전심전력을 기울인 때입니다. 그 사도들이. 그렇지마는 그 사도들이  가룟 유다가 갔으니까 사도 하나가 모자라니까 사도 하나를 다시 우리가 선택을  해야 된다 하고서 뭐 제비를 뽑아 가지고, 제비는 무기명 투표겠지요.

투표겠지요. 이렇게 자기네들이 했지마는 맛디아라는 사람을 택해 가지고서  사도를 삼았지마는 그것이 인본주의고 자기들이 조작배기로 자기네들끼리 정해  놓은 사도지 사도는 그 뒤에 십이 사도에 사도 바울이 하나 들어가 가지고서  사도가 됐지 그들의 선택 사도가 잘못됐다 그거요. 그때도 성령의 역사가  아니니까 그들은 주를 위해서 이래 했지마는 영감이 아니면 안 됐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너희들이 내 말에 거하면' '내 말에 거하면' 너희들이 성경  말씀을 알고 고대로 지켜 행하게 되면, 행하게 되는 것도 제 마음대로 행하지요.

제 마음대로 행하는 것도 있고, 그 행함이 바로 맞을 때도 있고 안 맞을 때도  있다 그 말이오. 안 맞는 그거는 행하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용했기  때문에 헛일이고, 고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찾아 가지고서고 말씀대로  자기가 바로 행하게 될 때에는, 자기가 영감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 비판,  자기 양심과 이성 비판 가지고서 '요것 요때는 요 하나님 말씀대로 요대로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그렇게 선택 해 가지고서 하나님 말씀대로 행했지요.

행했는데 그것이 참으로 자기가 이성이 민첩하고 또 양심이 아주 깨끗하고 해서  이성과 양심이 힘껏 선택해 가지고서 '이 시간에는 이 성구를 지켜서 요대로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요렇게 해 놓은 그것이 성신의 감화에 동의가 되고  성신의 감화에 딱 들어맞았을 때에 그때 뭐이 되느냐? 너는 영감의 사람으로  변화된다 '참 내 제자가 된다.' 참 내 제자가 된다 말은 예수화된다 말입니다.

고만치 예수화 되면 고때 거기에 대해서 영감이 같이 하기 때문에 그 영감이  뭐이냐? 곧 권능이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를 알지니 이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자유케 한다  말은 무엇을 자유케 한다 말이냐? 다시는 그 진리에 대해서는 고대로 실행하고  고 진리를 어기지 않는다. 고 해석을,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종 된 일이  없는데 어떻게 자유한다는 그런 말, 우리에게 해당치 않는 말 그런 말 하고  있느냐' 할 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 된다.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 되는데 너희들에게 자유한다 그 말은 죄의  종이 되지 안한다. 죄를 범하지 않는다 이 성구를 다시는 범하지 않는다 하는  그것을 너에게 말하는 것이라' 그렇게 주님이 해석을 해서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성경 말씀대로 행하되 우리는 성경 말씀을  도용할 수도 있고 악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래 육십 육  권에 이렇게 나타나 가지고서 문서적으로 딱 이렇게 고정적으로 나타나 가지고  있지마는 이 말씀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자유로 선택하기 때문에 우리 자유가  들어서 하나님의 자유에 맞설 수 있다 그 말이오. 우리 자유가 하나님의 자유에  맞설 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유에 대립이 되지 안하고 하나님의 자유와  일치가 돼야 그것이 되어지는 것이지 일치가 안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행한다고 하지마는.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데 그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그것이 자기 이성 비판에. 이성 비판에  우리는 이성이라 하는 마음의 요소가 있습니다. 이성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이치를 생각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판단할 때에 '요것은 과연 하나님이 요  현실에서는 요 성구대로 요렇게 하는 것이 옳다' 요렇게 자기가 판단해  가지고서, 이성 판단을 가지고서 '요 시간에 요 성구대로 해야 되겠다 조  성구대로 해야 되겠다.' 이성 이 동행해서 판단을 해야 되지,  잘못하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그 현실에서 이성이 선택 주장을 해 가지고서  선택하지 안하고 돈을 탐하는 돈 욕심, 물욕이 들어서, 그때에 물욕이 주장해  가지고서 성경 말씀을 선택을 할 수도 있고, 감정이 주장해 가지고서 선택할  수도 있고, 사욕이 들어서 주장해 가지고 선택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으로  더불어 복수하고자 하는 그런 것이 들어서 선택할 수도 있고, '그때에 어떤  육체의 정욕이나 또 혈육적 사랑이나 무슨 동류적 사랑이나 이런 정욕적  사랑이나 이런 그런 욕심이 들어 가지고서 선택할 수도 있고, 지방 정실이나  혈육 정실이나 또 동류 정실이나 그 정실이 들어 가지고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선택하는 그 자체가 나쁘다 그 말이오. 자체가 나쁘기 때문에 그런 걸로  선택하면은 잘못 선택하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잘 구별해야 됩니다.

 요 말 할 때에 눈이 까물어지고 잠이 오는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깜깜한  사람이라.

 그럴 때에 우리는 아무리 부족하지마는 내대로는 이성이 선택해야 됩니다. 고  현실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한다 하지마는, 신사 참배가 생겼지마는 어떤 사람은  신사 참배는 이거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그런 사람도  있고, 이거는 국가 의식이기 때문에, 로마인서 l3장에 권세는 위로부터 내려오지  안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이거는 현 정부에게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국가 의식으로 정부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로마서 l3장 1절 이하에 있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라. 그 말씀을 인용하니까 신사 참배를 해야 되고, 또 제  이계명을 인용하니까 신사 참배 안 해야 되고,  이러니까, 이 성구를 그때에 그 현실에서 인용하는 사람도 있고 저 성구를  인용하는 사람도 있고 별별 성구는 자기대로의 선택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현실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그것은 지극히 큰 능력의 행위인데, 성화가  되는 것인데 그때에 말씀대로 행한다는 그 말씀을 선택할 때에 이 말씀대로  행할까 저 말씀대로 행할까 그 선택하는 것을 첫째로는 자기의 이성 비판을  가지고 선택해야 됩니다.

 이성 비판이라 하는 것은. 이성은 뭐이냐? 우리 속에는 말이요, 우리 속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지식을 가지고서 그 지식으로  요렇게 이치를 따지고 저렇게 이치를 따져 가지고서 '요거는 틀렸다 맞았다'  요렇게 해서, 자기 속에 있는 이성이 판단해 가지고서 자기대로는, 자기 그라면  그 이성, 자기 판단으로서는 최종의 팠단 최고의 판단이지요. 그 이성 판단을 해  가지고서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요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요것이, 내가 요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믿음이 되겠다.' 그렇게  이성으로 판단하는 고 판단을 가지고,  그러면 이성 판단이 됐으면 이제 완성이냐? 아니오. 이성 판단을 가졌는데,  이성으로서는 요렇게 판단을 할지라도 자기 속에 양심은 판단을 거부 할 때 있다  말이오. 자기 양심적으로, 양심적으로 생각해 보니까, 아, 요거는 이성  판단이라고 내 이성대로 판단하기는 판단했지마는 이거 양심으로 생각해 보니까  요거는 내 좀 사욕적이다. 요거는 내가 죽기를 싫어서 생의 애착욕이든지, 생의  애착욕이 거기에 들었든지, 물욕이 들었든지, 감정욕이 들었든지, 복수욕이  들었든지, 명예욕이 들었든지, 공명욕이 들었든지, 평안하기 위해서 안일욕이  들었든지 요것이 요게 들어 있어 가지고서 요것이 들어서 요 이성 판단이 곧지를  못하고, 요 지남침이 바로 정 남을 가리키지 못하고 옆에 쇠덩어리가 있으니까  거기에 이 지남침이 충격을 받아 가지고 요 지남침이 정 남을 가리키지 못하고  조금 빼딱하게 고리 돌아갔다. 우리가 나침반을 놓고서 요 바늘을 가지고서,  나침판이 요래 딱 요래 가리키고 있는데 바늘을 요쪽에 갔다 놓으면 침이  요쪽으로 빼딱해집니다. 또 요쪽으로 하면 요리 빼딱해집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양심이 곧다 할지라도 무엇에인가 충격을 받게 되면 우리  양심이 삐뚤어진다 그 말이오. 아무데도 양심은 충격을 받지 안해.

 충격은 누구한테 받느냐 하면은 자기라는 그 자기라는 그 옛사람에게 충격을  받습니다. 이러니까, 자기를 부인하지 안하면 그 양심은 죽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도 다, 불교인들도 양심이 있고 다 뭐 양심 없는 사람 없지마는 그 양심이  자기를 부인하지 안한 사람들의 양심이기 때문에 그 양심이 다 충격을 받아  가지고서 정남을, 바른 것을 가리킬 수 없는 양심이라.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우리가 가꾸어서, 양심을 가꾸어서 양심이 참 바로 명철해야 되고 정확해야  되는데,  양심 가지고 비판을 해 봐도. 자기가 이성 비판은 '그럴 수도 있다. 되겠다'  이랬지마는 양심을 가지고 비판해 보니까 '아, 이것은. 아무래도 이거는 좀 이거  내 욕심이요 사욕적이지 이거는 성신의 소욕적은 아니다.' 이래 가지고. 양심이  비판해 봐도 안 된다 그 말이오. 그래 가지고서 그것을 다시 고쳐서 양심이  비판해서 이거는 참 이성 비판, '내가 지식 비판으로도 요렇고 이성 비판으로도  이렇고 양심 비판으로도 이렇다. 이거는 하나님의 뜻이다' 확고하게 그렇게  알아지는 것이 있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확고하게 모를 때에는 발을 내디디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확고하게 모를 때에는 발을 내디디지 안하는 게 좋아요. 확고하게  모를 때에는 '나는 주여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어찌 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는 그 사람의 기도가, 그 기도가  희망이 있는 기도입니다. 사람들이 그만 단편적이고 간단하게 자기 욕심이  말하는지 뭐이 하는지 모르고 또 이렇게 떡 하는 거는 그것은 잘못 판단하기  쉽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확고하게, 확고하게 아는 거, 뭐 주일을 지키는 거 또  무슨 사람에게 대해서 거짓말하지 않는 거 이런 거, 그런 것은 그거야 확고한  것이지마는 알쏭알쏭한 그런 것이 있다 말이오. 알쏭알쏭한 그런 것이 있을 때에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자기 이성으로 판단하고 또 양심이 판단하고, 이래도  양심에 확실히 '그것이다' 확고한 확정이 되지 안 할 때에는 발을 내디디지 말고  '주여,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래야 될지 저래야 될지 어떻게  해야 될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모르겠다는 그 사실을 가지고서  주님에게 '나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니 주님이여 나에게 요것을 확실히 뭣을  가르쳐 주옵소서' 이랄 때에 그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데,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나는 모르겠으니까 나에게 확고히 가르쳐 주시옵소서' 할 때에는 우리가  어떻게 물어야 되느냐? 로마인서 l2장 l절 이하에 보면 '너희가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그라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면은 하나님의 옳고 바르고 참된  뜻을 너희들이 알게 되리라' 그렇게 로마인서 l2장에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에 양심의 비판과 성령이 찬성하는 인도하는 고 인도를  따를라고 할 때에는 아예 내게 있는 사욕이 다 없어져 버려야 됩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면 죽을 길로 인도해도 내가 복종하겠고 당장 이 모든 것이 다 없어져서  가난하게 되는 그 길이라도 내가 인도를 받겠고, 또 내가 어떻게 감옥에  들어가는데라도 인도 받겠고. 내 소유와 몸과 생명 그것은 다 내놔서 주님이  명령하신다면 고 명령대로 내가 복종하겠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놨을 때에 주님이 그 사람에게 바로 지도할 수가 있지  그것을 자기가 내놓지 않을 때에는 아무리 주님이 인도해도 자기 속에 내놓지  안하는 그것이 거리껴 가지고서고 인도를 받지 못한다 말이오. 그것이 들어서 그  양심이 어두워져서 귀가 없다 말이오. 들을 귀가 없고 귀가 가리워졌단 말이오.

가리워졌기 때문에 주님이 인도하시는 주의 뜻을 자기가, 영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을 다 정리해서 부인했을 때에 주님이  인도하시는 영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 선택은 오선할 수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선택해서, 성경 말씀 선택하는 것이 이성적으로 선택해야 되고  양심적으로 선택을 해야 되고 그라고도 자기를 부인하고 영감대로의 선택을  하려고서 애를 쓰고 동경하고 사모하는 그것이 있어야 영감이 너희에게 바로  선택해 줄 수가 있다. 영감이 바로 선택을 해 줄 수 있지마는 네게 사욕이  없어야 영감이 선택한 대로 복종할 수가 있지 네가 영감 선택을 원하기는  원하지마는 네 사욕을 두고서 '영감 선택이 내 사욕대로 됐으면 좋겠다. 내  사욕에 들어맞게 영감 선택이 됐으면 좋겠다.' 요런 네 속에 도적이 네 속에  들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감 선택은 너에게 들을 귀가 없어 가지고 들리지를  못한다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서 요 제자들이 요렇게 말을 했지마는 주님이 거부를  했습니다. 만일 그때 주님이 그들의 소원을 듣고서 그대로 '그래 말대로 해  봐라. 말대로 해라' '불을 내려서 다 태우게 할까요?' '해라. 그래 해라' 했으면  그리 됩니다.

 과거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럴 때에, 박해를 받고 난 다음에 '바로에게 가서 말을 해라. 말을 할 때에  바로가 듣지 안할 것이다. 듣지 안하면 네가 이리 이리해 달라고 기도하면 내가  해 주겠다.' 이럴 때에 바로에게 가서 말하니까 바로가 거부했다 말이오.

거부하면, 거부하니까 나올 때 떡 말하기를 '그러면은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나님에게 기도해 가지고 이렇게 되게 하겠다.' 이라니까 그 바로가 있다가  '그따위 소리 하지 마라. 그런 게 어디 될 수 있겠느냐? 온 나일 강물이, 이렇게  많은 강물이 피가 되다니 그럴 수가 어디 있겠느냐!' 이랬지마는 그만 저거  앞에서 '하나님이여, 이들이 이렇게 강팍하게 이러니까 이제 나일 강물을 다  피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 목전에서, 그래 말하니까 당장 나일 강물이 피가  돼 가지고 먹는 사람 다 죽는다 그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그들이 항복을 하지  안했어요? 그래 가지고 열 번이나 그 재앙을 거듭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명한 대로 고대로 명령대로의 복종하니까 거기에는, 그때 나일  강물이 그런 게 아니라 애굽을, 만일 하나님께서 애굽을 '이거 됐다. 전부 다  사해와 같이 완전히 바다가 돼 가지고서 전멸되도록 해라' 했으면 전멸이 됐지  어쩌겠습니까? '이 애굽이 수백 길 깊은 가운데에 패여서 떨어져서 수백 길 깊은  함정과 깊은 바다가 되도록 해라.' 소돔 고모라 성이 그것이 사해입니다. 사해,  소돔 고모라 성을 하나님께서 유황불비로 태워서 그게 타 가지고서 깊어져서  사해가 됐는데 그 사해에는 그렇게 물이 많고 요단강에서 흘러 내려가는  물이지마는, 요단강에 고기가 많이 있으니까 그 강이 흘러 내려 가지고 모인  곳이 사해입니다. 그러니까 사해는 고기가 있을 것 아닙니까? 사해는 생명 있는  생명체가 하나도 없습니다. 버러지 한 마리도 없습니다. 그거는 뭐이냐? 옛날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 성을 불로 태워서 그것이 만들어진 것이 사해라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털끝만치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멸하라 해도 멸하시고 이렇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그들은 경험하고  배웠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면 그대로 된다고 이래 생각을 했지마는  그들이 소원하고 말씀을 선택하는 것이 저거 사욕대로 선택했기 때문에  사마리아에 불이 내리지를 안했고 거부를 당했다 그 말이오.

 오늘도 우리가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현실에서 선택해  가지고서 고대로 행하는 데에는 그는 전지전능의 행위입니다. 전지전능의  행위이기 때문에 그 행위에는, 그 행위를 하다가 자기가 죽어도 전지전능이 행할  수 있는데 죽었기 때문에 그것은 한없는 영광이 되어지는 것이고 성공이  되어지는 것이고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선택하면은 그때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말씀하면 그대로 되는 거와 꼭 같다  말이오.

 그때는 육체를 가지고 나타났고 지금은 육체로 나타나지 안하고 부활체이기  때문에 그 영육이 같이 나타나지만 부활체이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육체로 계신다 그 말이오. 계시기 때문에 같이 계시지만 우리 눈에 보어지  안하기 때문에 우리가 오용하고 탈선하고 우리 혼자대로 주관대로 행동하기가  쉽다 말이오. 행동 안 하고 요렇게 주님이 명령하신, 지금 성경 말씀대로 한,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것이 성경 말씀 외에는 말씀해 주시지  안해요. 성경 말씀 해 주는데 그 성경 말씀을 우리가 선택을 바로 하면은 주님의  말씀, 주님이 직접 말씀해 주는 고 말씀과 같고, 선택을 바로 하지 안하면  그거는 사욕적으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잘못이 된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서 주의 말씀을 바로 찾아 가지고서 그와 같이  하는데에는 그것이 창조주의 능력과 모든 주권자의 능력과 주재자의 능력. 이  영생하는 생명의 능력이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고, 그거 아닌  것은 그것은. 말씀대로 했다고 해도 자기가 그 말씀을 도용하고 악용하고 이래  가지고 한 그것은 거기에는 성령이 동행하지 안하기 때문에 그거는 믿음이  아니니까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하는 그 권능이 같이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 현실마다. 현실 현실마다 주님이 명하시는 요  지극히 큰 능력. 믿음의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요 현실 현실마다 믿음의  행동을 할 수가 있는데, 우리가 현실에 믿음의 행동을 하지 안하고 믿음의 행동  아닌 행동을 우리가 하기 쉬우니, 우리에게 자꾸 이런 현실 주고 저런 현실 주는  것은 요 현실에서 또 믿음의 행동이 되도록, 다시 말하면 믿음을 연습 시킨다 그  말이오.

 연습시킨다 말은 하나님의 말씀 선택을 연습시킨다 말이오. 요 현실에 연습하고  자꾸 연습 연습해 가지고서 숙달돼서 이제는 고 현실 현실마다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움직이는 고 움직임이 되도록 그렇게 하는 그것이 돼야 되는  거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연습할 수가 있고 또 틀리면 또 고칠 수 있고,  얼마든지 연습할 수 있는 그 현실을 줬기 때문에, 요 현실에서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진리와 영감대로, 진리는 우리가 알게 문서 계시 이고 영감은 진리 안에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가 현실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되느냐 하는 그것을 선정할 때에 그 선정한  그것이 성경의 말씀적이고. 문서 성경적이고 영감적이고 요럴 때에는 그 지극히  큰 능력의 역사가 되어지는 것인데, 그것이 성경 문서 계시고 대로는  고대로지마는 다른 것을 잘못 선택해서 오선을 했다 말이오. 오선 오택을 해  가지고서 오용하는 그런 일이 되기 쉬우니, 그것을 바로 선택해서 바로 한다면  지극히 큰 능력이요 나는 거기에 대해서 성화가 돼 가지고서 예수님의 참 제자,  예수님을 완전히 닮은 자가 된다 말이오. 고만치, 고 분량만큼은 그렇게 되는  자가 되는 것이니 우리가 선택하는 데에는 조심을 해서, 현실에 성경 말씀대로,  '이래야 된다' 그렇게 생각지 말고, 성경 말씀대로, 우리가 현실에 보면 요것도  성경 말씀 조것도 성경 말씀 여기에 성경 말씀대로 행할 것이 뭐 어떤 때는  여럿이 있는데 차차 생각 하면 이것도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다 거석해 놓고.

또 성경 말씀대로 해야 된다 안 해야 된다 둘을 마지막에는 택하게 됩니다.

 둘을 택하게 될 때에, 둘을 택하게 됐으면 언간히 택했습니다. 다 떨어내고  둘을 택했으면 엔간히 택했는데 둘을 택했으면 '한 군데는 성경 보니까 하지  말라 했고 한 군데는 하라 했고 요랬는데 이거 성경이 모순되다' 이럴 때에  모순되면 모순된 그것을 한참 더 생각해 보면 일치가 되어집니다. 성경에는,  예를 하나 들면 '사람을 논평하지 말아라, 논평하지 말아라' 이래, 또  '평론해라.' 사람에 대해서 이러냐, 이 사람이 이러냐 저러냐 그렇게 평론을  해라 평론을 하지 말라 이렇게 했으니까 이 말씀이 다 서로 모순되다 말이오.

모순된데 모순된 걸 자꾸 생각하면 일치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왜 일치되느냐? '아, 옳지. 우리는 사람에게 대해서 논평을 해야 되겠다. 내가  그 사람에게 대해서 어떻게 대우를 하며 어떻게 상대를 하며 어떻게 지식하고 내  구원을 이루는 행동을 해야 되겠느냐? 내 구원을 이뤄서 내가 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해서 이리 저리 많이 논평을 해 봐야 되겠고, 내가 구원  이루기 위해서 논평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서, 심판은  하나님이 하실 것인데 정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 이렇게 헐고 빗고 훼방하기  위해서 내가 사람을 이리 저리 논단하고 논평하는 것은 하지 말라 했다.'  그러면, 논평을 해야 되고 안 해야 되겠다는 그것이 모순이 아니고 그 둘이 다  같은 것이라 말이오.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서 논평하는 것은 자기가 구원을  이루는 것의 적이 되는 것이고,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 사람을 논평해서 바로  정평 정가 해 가지고서 상대하는 그것은 그 사람의 구원도 유익되고 내 구원도  이루어지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는 것이고, 이거는 구원에 방해하는 것이다. 다  같이 논평을 하지마는 하나는 구원을 방해하는, 깨트리는 것이고 하나의 논평은  구원을 이루는 것이 되어진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이 제자들이 소욕한 것이 거부를 당했으니까 우리가 이런  데에서, 우리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행해 나갈라고 할 때에  잘못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는 행한다는 그것이 세상적으로 세상 제 욕심대로  행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이 되는 그런 일도 있습니다.

 그러면, 문서는, 문서대로는 했지마는 영감과는 일치가 안 됐다 말이오. 우리가  하는 것이 진리와, 이 문서대로와 영감대로가 일치가 돼져야 그것이 바로 돼서  믿음이 되어지는 것인데 이 영감대로에까지 일치가 되고저 하는데에는 우리가  어떤 순서를 밟아야 되느냐? 성경 말씀을 지식으로 자기가 판단하고, 이성  판단으로 하고, 양심 판단으로 하고 그라고 난 다음에 양심 판단으로 하고도  '나는 이래도 맞다고 못 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양심에 가책될 것이 없이 양심대로 하기는 했지마는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이라야 바로 알지 나로서는 알지 못하니 내 양심으로는  가책이 없이 이와 같이 하기는 하지마는 요게 과연 주님의 뜻에 딱 들어맞는지  안 맞는지 나도 모르겠사오니 만일 들어맞지 않는다고 하면은 주님이 요걸  수정하시고 바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고렇게까지 요 최종을 바라는 그 사람이  바른 길을 걸어갔고 실수가 적었더라 그 말입니다. 그다음에 계속해서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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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단점을 찾아 고치자/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851122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28
46 단일진리를 가지라/ 요한계시록 1장 1절 3절/ 851004금새 선지자 2015.10.28
45 단일소망/ 마가복음 10장 52절/ 870309월새 선지자 2015.10.28
44 단일교회/ 에베소서 4장 1절-6절/ 860411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28
43 단일교회/ 로마서 12장 3절-8절/ 840127금야 선지자 2015.10.28
42 단일교리/ 빌립보서 1장 29절-2장 11절/ 870709목새 선지자 2015.10.28
41 단일 소망/ 누가복음 9장 59절-62절/ 840923주후 선지자 2015.10.28
» 단일 소망/ 누가복음 9장 51절-62절/ 840924월새 선지자 2015.10.28
39 단일 소망/ 시편 91장 14절-16절/ 840925화새 선지자 2015.10.28
38 단일 사랑, 마귀역사/성령역사/ 요한일서 2장 12절-17절/ 830825목새 선지자 2015.10.27
37 다니엘의 신앙/ 다니엘서 6장 23절/ 820124주후 선지자 2015.10.27
36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 것/ 빌립보서 2장 3절/ 840427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27
35 다윗의 열쇠/ 요한계시록 3장 7절/ 810605금야 선지자 2015.10.27